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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 킹-63화 (63/82)

63화

“공격수 자리엔 현이랑 우주.”

숙소 세미나실에서의 미팅이었다. 홍명보 감독은 벨기에전의 선발을 앞두고 선수 명단에 많은 변화를 줬다. 우선 골키퍼가 정성룡에서 김승규로 교체되었다. 알제리와의 경기에서 불안한 모습을 몇 차례 보여줬던 것이 홍명보 감독의 선택에 영향을 준 것 같았다. 2선에서 특히 많은 변동이 있었다. 강소중과 한미르가 빠지고 손흥민과 기성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현은 공격수 자리에 전진 배치되었다. 현의 자리엔 이청용이 위치했다. 황은후는 상황에 따라 교체 투입될 것 같았다.

현은 단상 위의 작전지시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자석이 우주의 자석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벨기에와의 경기에선 우주와 함께 공격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현은 미팅이 끝나고 내내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초코에몽 공수 해왔냐? 왜 이렇게 실실 쪼개고 있어?”

밥을 먹는 동안에 은후가 툭툭 건드려도 발끈하지도 않고 그냥 흘려넘겼다. 미르와 소중도 약간 이상하다는 듯 현을 쳐다보았지만 현은 여전히 해맑은 표정이었다.

현의 정신은 온통 2002년에 대한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화질도 불분명한 TV에서 현은 우주의 경기를 보며 상상했다. 나도 언젠간 저렇게 멋진 축구선수가 될 거야. 많은 아이들이 현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현만이 우주와 같이 뛸 기회를 잡고 있었다.

축구를 가르쳐 준 인물은 아빠지만 열정을 불어넣어준 인물은 우주였다. 우주와 함께 공격수 포지션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은 아빠에게 축구를 배우는 일처럼 흥분되는 일이었다.

우주는 특별히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폰의 어플을 통해 계속 노을과 은솔이와 연락했다.

현이 지켜봤던 예전과 다르게 조금 온화해 보였다. 지금도 물론 강인해 보이지만 그건 축구를 할 때의 이야기다. 축구를 하지 않을 때면 보통 사람보다 더 가족에게 신경 쓰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은솔찌잉~! 아빠는 이제 경기하러 가네요옹. 우리 은솔찡이 경기장에서 응원해 줄 거니까 오늘도 이겨야죠옹!”

경기장으로 떠나기 직전, 방에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우주가 난데없이 음성 메시지를 녹음한답시고 현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애교를 부렸다. 현은 흠칫 놀랐지만 이내 주먹에 힘을 줬다. 2002년 영웅이 이렇게 약해보일 수가.

“선배님. 실례만 아니면 질문해도 될까요.”

“우웅! 오늘 아빠의 컨셉은 먹잇감을 위해 전력으로 달리는 사자!”

사자가 아니라 발정난 살쾡이 같은데. 현의 소감은 솔직히 그랬기에 도무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우주는 고개만 돌려 현에게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현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공손하게 물었다.

“대체 선배님은 딸한테 왜 그렇게, 그 뭐랄까. 딸만 대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해야 하나...”

현의 질문을 받는 건지 마는 건지, 우주는 은솔이에게 보낼 셀카를 찍는 것에만 매진해 있었다. 현도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굳이 이런 거 알아 봐야 뭐하나. 어차피 망가진 모습을 볼 대로 다 봐버렸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까.”

“그럼 혹시 둘이 되면 안 그러실 거에요?”

“둘이 되나 셋이 되나 그럴 건데.”

“으흐음...”

현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우주를 잠깐 바라보고 있던 현은 경기장에 챙겨갈 물건 몇 개를 가방에 담았다.

“딸한테만 이러니까 보기 싫냐?”

“네? 아, 아니요! 제 말은 그러니까...!”

우주가 날카롭게 물어오자 현은 깜짝 놀라 가방을 떨어트렸다. 우주는 현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네가 애를 가지면 알 거 아니야. 은후는 이해할 수 있으려나?”

“저 애 안 가질 거에요.”

“응?”

“결혼도 안 할 거고요.”

네가 거기서 말하면 여기까지 너 보러 찾아온 여자친구는 뭐가 되는데. 우주는 그렇게 물으려다가도 현이 장난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냥요. 혼자 사는 게 편하고...”

우주는 혼자가 편하다고 당당히 말하는 현을 보다가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말하는 거 누구 닮았는데. 굉장히 친숙한 모습인데. 생각을 거듭하다 곧 결론이 났다. 이 모습은 마치 몇 년 전의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구라치네.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여자친구는 외로워서 만든 거 아니야?”

“외로워서 만든 게 아니라 그냥 좋으니까...”

“현아. 11명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배우는 축구선수가 하는 말치고는 좀 모순 아니니? 인생은 그런 게 아니야. 우리가 서로한테 패스 하는 것처럼, 기쁜 거나 슬픈 거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지.”

솔직히 우주는 지금 자신의 말이 딱히 좋은 예시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현이 혼자 사는 게 편하면 그냥 혼자 살면 된다. 그런 부분까지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알려주고 싶었다. 길은 혼자 걸어갈 수 있어도 여럿이 걷는 게 더 편하고 즐겁다는 것을. 우주는 그걸 이미 몇 년 전의 고통으로 알았다. 현도 알아줬으면 했다.

“그럼! 오늘도 파이팅!”

대답도 못하고 끙끙 거리며 서있는 현의 팔을 토닥토닥 쳐주며 우주가 먼저 방을 나섰다. 현은 우주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사람이 딸만 안 보면 저렇게도 배울 게 많은데, 어떻게 딸을 대하는 모습만 보면 절대 저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까. 낮과 밤처럼 다른 모습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우주는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준비했다. 이미 확정된 16강이기에 사력을 다해 싸울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벨기에 같은 강팀을 만나서는 좋은 경기를 해보고 싶었다. 후배들에게도 이제부터의 16강 경기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좋은 예행연습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미 16강 갔다고 해서 해이해지지 말자. 적극적으로 하자. 어차피 져도 16강은 가잖아! 재미있게 해. 실패는 생각할 필요 없으니까 즐겁게. 우리 목표가 뭐라고!”

“우승!”

경기 시작 전에 대한민국 선수들은 다시 이번 대회 목표를 되새기면서 자리로 향했다. 세계적 선수들과의 경기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들은 우주의 말을 듣고 부담감을 덜었다. 경기 전까지만 해도 약간의 회의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벨기에의 선발 라인업입니다. 티보 쿠르트와, 얀 베르통언, 빈센트 콤파니, 반 바이텐, 반 덴 보레, 무사 뎀벨레, 스테번 드푸르, 마루앙 펠라이니, 아드낭 야누자이, 케빈 미랄라스, 로멜루 루카쿠.]

[4-2-3-1의 전형으로 나설 것으로 보이는데요. 신체적으로 강력한 루카쿠를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펠라이니와 루카쿠처럼 거대한 선수들로 대한민국을 위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대한민국인데요.]

[수비수들이 적절한 대처를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한민국의 선발 라인업입니다. 김승규, 박주호, 김영권, 신현성, 이용, 한국영, 기성용, 손흥민, 이청용, 최현, 김우주.]

[선발 라인업에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부상을 갖고 있었던 박주호 선수와 기성용 선수가 복귀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죠.]

우주는 경기 시작 직전 중앙선 근처로 가면서 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현을 불러 관중석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어.”

“네? 아, 네.”

수정이 있는 관중석을 알려주는 것이다.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주는 더 할말이 있어보였다.

“나 연애할 때는 노을이가 한 번도 경기장에 안 왔는데. 진짜 부럽다.”

딱 한 마디 남기고 우주가 저리로 갔다. 현은 센터 서클 위에 서면서 우주의 말을 곱씹었다. 하긴, 연애하기 전에는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이 필요에 의한 것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연애 후에는 그게 아니었다. 반드시 둘일 필요는 없었지만 어쨌든 현은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패스를 주고 받는 축구처럼 감정을 나누는 사람이 있었다.

[경기 시작됩니다!]

아마 오늘 경기도 마찬가지일 거다. 지면 함께 슬퍼할 거고, 이기면 함께 기뻐할 거다. 남들에겐 그저 조 1, 2위 결정전 경기이지만, 현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다른 의미의 경기가 될 수 있었다.

[어쨌든 펠라이니 선수는 2선에 있으면서 계속 전방으로 올라 갈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겨야 할 다른 이유를 생각하자니 새로운 동기 부여가 되는 기분이었다. 조 1위 자리를 떠나서 반드시 이기고 싶었다. 그냥 경기 전에 했던 사소한 약속 하나인데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냥 장난으로 흘려보낸 약속이지만, 경기가 시작한 지금은 장난이 아니었다. 약속을 실현하고 싶어 필사적이 되었다.

[벨기에가 공격 시도합니다. 아! 차단해내는 기성용!]

벨기에 선수들이 대한민국 진영에서 패스를 주고 받을 때 기성용이 차단에 성공했다. 기성용은 재빨리 센터 서클 위에 서있는 우주에게 패스했다. 우주는 패스를 받아내고 현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현은 수비 뒷공간으로 뛰고 있었다. 콤파니가 현을 쫓아 움직이지만 우주의 눈엔 분명히 보였다.

[바로 패스 내주는 김우주!!! 최현에게 갑니다!!!]

[네!!! 좋아요!!!]

벨기에 수비수들 뒷공간이 열렸다. 현의 압도적인 속도 때문이었다. 콤파니는 그에 대응하며 현을 쫓아감에도 불구하고 현이 페널티 박스 앞에 멈추는 공을 잡아낼 때까지도 현을 뒤쫓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쿠르트와가 자리를 박차고 현에게 달려갔다. 현은 지금 골키퍼와 1대1 찬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대로 슈우우웃!!!]

[슛!!!!]

벤치에 있던 은후는 현이 하려는 시도를 보고 욕을 내뱉었다. 현은 골문과 25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대로 칩슛을 시도하고 있었다. 슛을 시도하는 순간에 쿠르트와가 슛을 읽어내고 전진하는 것을 멈췄었기에 제대로 키를 넘기는 포물선을 그리지 못하면 이 칩슛은 실패하게 된다.

미르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공의 궤적을 쫓았다. 소중은 들어가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소중은 이미 이 슛의 결과를 아는 것 같기도 했다. 공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결과가 채 나오기도 전에 눈을 비볐다.

우주는 저 멀리 있는 공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결과를 확신하고 공이 골대에 가기 전부터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고오...!!!]

공은 경기장의 열기를 헤치고 가려는 곳으로 정확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쿠르트와가 뒷걸음을 치며 긴 팔을 높이 번쩍 들어 올리지만 골문 앞에서부터 휘기 시작한 공을 막아내지 못했다. 공이 점차 골대 안쪽으로 떨어졌다. 쿠르트와는 완벽히 지나쳤다. 골대 안쪽으로 떨어지던 공은 마침내 골망에 안겼다.

[고오오오오올!!!]

[고오올!!!]

[골!!! 최현의 선제골!!! 1대0!!!]

[이야아아!!! 대단합니다!!!]

[전반 2분 만에 대한민국의 선제골입니다!!!]

현이 오른쪽 손목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아까 우주가 가르켰던 관중석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펴보였다. 벤치에 앉아서 심드렁한 표정을 하는 소중은 그 셀레브레이션을 보고 생각했다. 아마 저 단순한 사람의 성격상 그 손가락이 의미하는 건 5분의 1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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