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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 킹-41화 (41/82)

41화

“엿 같은 경기였어.”

피를로는 이스탄불에서의 경기에 대해 아낌없는 표현을 사용했다. 밀란 선수들끼리 갖는 술자리에서 잠깐 스치듯 그 경기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갔다.

이내 밀란 선수들은 그 이야기를 흘려보냈다. 더는 생각지 않고 싶은 경기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피를로는 그 경기에 대한 DVD도 쓰레기통에 처박아 두었다고 했다. 조용할 것 같은 외모와는 반전되는 활발한 성격을 가진 그다운 반응이었다.

곧, 동료들은 웃고 떠들었다. 동료 선수들이 이스탄불의 경기를 잊어서도, 분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다음엔 이길 거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와는 다르게 여기 유럽에선 이런 식으로 패배의 아픔을 씻는다. 우린 최고니까 다음엔 성공할 거야, 그런 사고방식은 분명히 한국 선수들과는 달랐다. 한국에서도 이러면 도마 위에 오르기 마련인데.

“행운을 빌어.”

나중에 밀란을 떠날 때 밀란의 동료들은 축하 파티를 해주었던 것처럼 송별회까지 해주었다. 극진한 대우에 감사했다. 우주는 그 송별회가 의미 없는 파티이길 바랐다. 밀란으로의 이적이 간절했다. 더 이상은 레알 마드리드에서 경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클럽이 최고인 줄 알았던 건 좁았던 식견 때문이다. 최고의 클럽은 마켈렐레의 말처럼 자신을 대우해주는 클럽이었다. 그런 면에서 발렌시아도 좋았고, 밀란도 좋았다. 우주는 밀란의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운 도시를 연고로 하고 수준 높은 시설을 갖춘 AC 밀란에 그대로 머물고만 싶었다.

김우주 팬클럽의 역사가 20세기부터 시작되었으니 선수 생활을 한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우주도 한국 나이로는 27살이었고, 주위 선배들은 얼른 그 여자친구랑 결혼하라고 부추겼다.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이면 좋겠지만 노을의 반응을 예상할 수가 없다.

“저번에 했던 말 기억 나냐.”

“무슨 말?”

“청혼할 때는 반지 갖고 오라 했지.”

“아, 그랬죠.”

한국에 와서 만난 노을은 머리가 짧아져 있었다. 이번 영화 배역 때문에 머리를 잘라야 했다나. 어떤 머리를 한들 예쁘게만 보였다. 늘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있을 때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그게 단순한 바람이 아니길 바랐다.

“우리, 내년 월드컵 끝나면 결혼하자.”

청혼은 이탈리아 여행 중에 이루어졌다.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는 결국 반지 케이스도 못 꺼낼 것만 같아서 얼른 해버렸다. 배경은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그런만큼 무릎을 꿇는다거나 화려한 폭죽과 같은 이벤트도 없었는데, 준비성 없는 그 프로포즈에 노을이 어떻게 반응할지 우주는 반지를 내미는 것과 동시에 걱정이었다.

“반지, 예쁘네.”

노을의 표정이 잠깐 밝아졌다가 이내 어두워졌다. 그 짧은 한 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주는 불안해서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노을은 말을 않는 동안 계속 어두운 표정이었다. 반지 케이스 안에 놓여진 반지만 바라봤다.

“오빠가 저번에 물어본 적 있잖아요. 배우 언제까지 할 거냐고.”

“응.”

“나 죽을 때까지 배우 할 거야. 오빠가 딴따라라면서 무시하는 연예인일. 나한텐 직업이에요.”

“무시가 아니라.”

노을은 진지하게 말했다. 우주는 여전히 반지 케이스만 붙잡고 있었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랑 여자 주인공이랑 엇갈리는 이유가 그거에요. 상대를 미치도록 원하니까, 그래서 자기 자신한테 가둬두려는 거잖아요. 우리가 지금까지 큰 싸움도 없이 계속 만날 수 있던 건 서로를 간절히 미치도록 원하지 않아서 그래요. 오빠도 그렇고, 나도 그랬어요.”

긴장감에 우주의 손이 떨렸다.

“난 물론 오빠가 엄청 좋아요. 사랑한다고 말 할 수도 있어요. 오빠도 그러니까 나한테 이렇게 청혼하는 거잖아요. 근데 우리가 결혼하면, 우린 지금처럼 편하게 서로를 대할 수 없어요.”

“무슨 소리야.”

“오빠가 기대하는 만큼, 내가 오빠 옆에 계속 머물 수가 없다구요. 오빠는 그걸 바라는 거잖아요. 나랑 매일 같이 있는 거. 내가 연예인이니까. 오빠 옆에 계속 있으려면 일을 그만둬야 되는데, 그러기는 싫어요. 일은 분명 힘들지만, 그래도... 내 일이니까.”

감춰두었던 속내를 밝히기 때문인지 노을은 평소보다 더 진지해보였다. 노을을 만난 이후로 이렇게 진지한 모습은 본 기억이 없었다. 그건 그만큼 지금 건넨 말의 의미가 노을에겐 큰 의미일테니까.

“나 이제 25살이에요. 아직 한창이에요. 난 아직 욕심이 남아 있어서...”

“제일 예쁠 나이구나.”

노을은 자신의 말 중간에 끼어든 우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쉽게만 생각했구나. 난 그냥 네가 나랑 결혼하자고 하면 웃어 넘기길래, 이렇게 결혼하자고만 하면 네가 받아들이고, 결혼할 줄 알았어. 넌 나보다 많이 고민하고 있었구나. 미안해. 네 말처럼, 쉽게 생각한 게 맞아.”

“미안해요 오빠. 내가 나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나랑 결혼 하는 게 싫어?”

“그건, 아니에요.”

우주가 묻자 노을이 딱 잘라 말했다. 우주는 그 순간부터 별다른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오빠가 나랑 결혼하면 오빠가 생각한만큼 행복한 결혼 생활이 아니게 될까봐 그래요. 난 멀리 있을 때가 많을 텐데...”

“그럼 결혼하자. 난 네 말 들었는데도, 생각이 안 바뀌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만큼 이기적인 일이 없다는 걸 알고는 있다. 노을에게 강요를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지만 진심이니 어쩔 수 없었다.

노을은 우주의 말을 듣고 약간은 울먹였다.

“나, 애도 안 낳을 거고요. 이렇게 잠깐씩만 오빠 봐야 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응.”

“나중에 말 바꾸기 없이야? 나 진짜 결혼해도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아도 돼? 나 하고 싶은 일 하고.”

“응. 내가 항상 너한테 잘하도록, 긴장할게.”

“이 나이에 결혼하는 연예인 거의 없단 말이야...”

말디니가 추천해준 매장에서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가 드디어 주인을 찾았다. 노을은 눈가를 슥슥 닦으면서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뒤에 다시 해맑게 웃었다. 그 따라할 수도 없는 부드러운 웃음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노을은 모르고 있었다.

중요한 건 서로에게 속해졌을 때 받는 안도감이다. 서로에게 속해져 있다는 유대감만 있다면 멀리 있어도 괜찮았다. 결국엔 서로를 원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우주는 노을의 말과 다르게 그런 생각으로 노을을 기다려 왔다.

결혼해도 지금과 다를 것 없는 삶이란 건 조금 아쉽다. 그렇지만 노을에게도 노을만의 삶이 으니까. 구속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 나는, 오빠를 만나기 한참 전에 아빠가 돌아가셨어.”

반지를 건네준 그 날 밤에, 우주가 잠들기 직전에 노을이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상식에 가는 길에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꽤 전부터 병원에 계셔서 마음의 준비를 해놨었는데도 가슴이 막 아프더라. 우리집은 엄마가 없으니까 나 아역 배우 할 때부터 아빠가 내 뒷바라지 다 해줬거든. 그거 생각나면서 막 진짜 눈물이 수도꼭지 틀어놓은 것처럼 나오려 하는 거야. 근데 그 때 딱 레드카펫이 내 앞에 있었어. 돌아서서 아빠한테 갔어야 되는데, 아빠한테 가지 못한 게 아직도 후회스럽기도 해. 근데도 내가 미친 척 웃으면서 레드카펫 위를 걸은 거, 그거 다 연예인 생활 계속 하고 싶어서 그랬어... 나 독하지.”

아니. 우주는 등뒤에서 느껴지는 노을의 체온에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거든. 꿈이란 게 참 사람을 독하게 만들어. 아빠도 돌아가시니까, 나한테 남은 게 딱 그거 하나 밖에 없단 생각이 들었어. 실제로도 그랬고. 그래서 일에 더 매진했어. 근데 그 해 여름이 오니까 사람들이 막 미치잖아. 김우주, 김우주, 김우주... 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그거였어. 신기하더라. 그 사람이 뭔데 대체 사람들이 그 사람 얘기만 하지? 그런 생각 들고... 꼭 오빠가 날 방해한 것만 같다는 피해의식이 남몰래 생겼어. 나도 그 때의 날 이해할 수 없어. 난 축구도 별로 안 좋아 했으니까. 근데 그러다, 오빠를 만났어. 난 연기를 잘하니까 오빠 팬인 척 연기했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싶었거든. 근데 별 것도 안했는데 오빠가 마음에 들잖아. 나도 그 때부터 내 영화 보는 대신 오빠 축구 봤던 그 사람들처럼, 오빠 팬이 됐어.”

노을은 언제나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오늘밤은 그 수수께끼를 직접 풀어주고 있었다.

“짝사랑을 많이 해보기도 하고, 많이 받아보기도 했는데. 오빠도 날 안 밀어냈잖아. 그거면 짝사랑이 아니게 된 거지. 우리 사이가 건조하긴 했어도 서로 좋아한 건 분명했으니까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해. 근데 원래대로였다면, 그 반지 안 받았을 거야. 나는 오빠랑 결혼하는 게 싫다기 보다는, 내가 하는 일 때문에 오빠가 나한테 질리는 게 싫었거든. 그게 무서웠어. 오빠가 나 오해할까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거 아빠랑 엄마면 충분해... 오빠 지금 자? 자요? 내 말 듣고 있어?”

그날 밤은 노을의 품에서 푹 잤던 것 같다.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풀게 된 밤이라 그런지, 개운하면서도 나른했다.

서머 브레이크가 시작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번 시즌에도 누군가를 영입하고 방출할 것이다. 우주는 에이전트 형을 통해 밀란과의 협상을 이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밀란은 답이 없었다.

“우주야. 밀란은 적어도 지금 네게 제안을 안 하겠대.”

그리고 밀란은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적료를 주면서 우주를 데려오지 않겠다고 공언하며 이적설을 일축하는 동시에 우주의 희망마저 짓밟았다.

우주는 그 소식을 듣고 낙담해버렸다. 밀란에서의 경기력도 좋았다. 동료들과 잘 어울리기도 했고, 특별히 큰 부상도 없었다. 이마저도 인종 차별의 일환일까,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와중에 에이전트 형이 은근히 제안했다.

“레알 마드리드랑 재계약 하는 건 어때?”

“주전으로 써주겠대요?”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재계약을 준비하는 모양이야.”

“그럼 이적할 거에요. 분명 영입하려는 팀이 있을 거에요.”

반드시 이적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호나우두가 예전처럼 많은 경기를 뛰는 선수도 아니었고, 처음 입단하던 시절과 지금 우주의 위상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으니까.

다른 팀과의 협상은 진전이 없고, 초조함 속에서 시간이 조금 흘렀다.

“우주야, 레알 마드리드 쪽에서도 너랑 재계약 하고 싶대. 이번 시즌은 오웬도 방출할 예정이라고 해. 전과 달리 너한테 많이 신경 써줄 거야.”

밀란과 협상 테이블조차 앉지 못했다는 충격이 너무 컸다. 거의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버렸다. 레알 마드리드는 우주에게 이번 시즌 완벽한 주전은 아니어도 분명 전보다 많은 출전 기회를 제공해주겠다고 구단 측에서 먼저 약속했다. 우주는 곰곰이 생각했다. 레알 마드리드에 남는 것 역시 다른 팀을 가는 것만큼 적응이 필요한 일이지만, 계속해서 환경에 변화를 주기엔 무리였다.

“그럼 1년만 연장할 게요.”

처음에 레알 마드리드 측은 우주의 의견에 반발했다. 적어도 2년 정도는 연장해야 팀에 이익이니까. 다만 워낙 우주의 뜻이 강경했다. 밀란 말고는 가고 싶은 팀도 없었다. 다른 팀에서 들어오는 제안은 모두 리그 중위권 팀이었다.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 출전하고 싶었다. 리버풀도 넌지시 계약을 문의하긴 했지만 우주 쪽에서 사양했다. 베니테즈 감독이 있다 하더라도 아픔을 준 그 팀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세부 옵션 금액들은 모두 인상된 조건으로 계약 기간이 1년 연장되었다. 우주와 레알 마드리드의 계약 기간은 2007년까지가 되었다. 우주에게 여러모로 유리한 계약이었다. 월드컵의 활약을 통해 강팀으로 이적할 수도 있었고, 또는 월등히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 제안을 이끌어 낼 수도 있었다.

‘2006 독일 월드컵.’

우주는 미리 일정표에 월드컵 일정을 써넣었다. 이제 모든 포커스는 2006 독일 월드컵에 맞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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