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전반전이 끝나고 아마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드레싱 룸으로 향했을 거다. 이런 스코어는 당연한 거지. 극단적인 예상일지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축구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들은 자부심과 자신감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축구선수들에게 그러한 태도는 자만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면 나쁠 게 없다.
그리고 그를 상대하는 선수들에게도 동기 부여가 되어준다. 최고의 자신감을 갖고 있는 상대 선수들을 이기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이란 말인가.
“예상했던 대로 카를로스가 전방으로 많이 올라왔다. 1골만 넣을 생각은 아닐테니까 더 올라오겠지. 측면에서 공격 가담을 할 때 당황해선 안 돼.”
베니테즈는 하프타임 때 드레싱룸에 있는 선수들에게 분발을 촉구했다.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발렌시아 선수들은 여전히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경기를 했고, 메스타야의 피치로 올라 가서는 둥그렇게 모였다.
“Gunyar! Gunyar! Gunyar!”
그들은 승리를 외치고는 자리로 갔다. 의식적으로 외운 주문은 후반전에 바로 효과를 드러냈다.
[비센테가 왼쪽에서 공격합니다. 오른발 슛팅! 골문 벗어납니다. 반대편 포스트 노려봤지만 골망을 흔들지는 못합니다.]
[위협적인 오른발 슛이었습니다.]
[활발하게 공격 시도하는 발렌시아.]
비센테는 후반 들어서서는 살가도를 쉽게 상대했다. 좌측의 카르보니가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살가도가 비센테 수비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됐다. 베컴은 활발한 움직임을 갖고 가고 있긴 하지만 카르보니의 움직임을 몇 차례 놓치고는 했다. 눈으로 보기에도 완벽한 수비 조직력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베컴이 중앙을 가로지르는 패스 시도합니다. 캄비아소에게 연결되는 공, 캄비아소는 피구를 봤습니다만 앙굴로가 공 차단합니다. 바로 아이마르에게 연결.]
레알 마드리드의 패스 미스에서 시작되는 역습, 아이마르가 공을 받고 우주는 수비진의 움직임을 보면서 레알 마드리드 골문으로 향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아이마르의 깔끔한 드리블을 미리 저지하지 못했다. 아이마르는 계속 레알 마드리드 진영으로 치고 들어왔고, 주위엔 비센테와 우주가 있었다. 아이마르의 패스는 페널티 박스 앞에서 레알 마드리드 수비진들이 자리를 잡았을 때 비센테에게 이어졌다.
[비센테가 기회 맞이합니다. 중앙엔 김우주가 있습니다.]
[선택을 빨리 해야 해요.]
페널티 박스 측면 부분에서 공을 받은 비센테는 멈춰섬과 동시에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살가도를 상대로 두어 번의 바디 페인팅을 보였다. 짧지만 살가도의 순간적인 판단을 흐리기엔 충분했다.
살가도의 수비 자세가 엉성해진 것을 본 비센테가 다시 공을 치고 드리블 했다. 페널티 박스 측면선을 따라가는 드리블이기에 우주는 골문 앞으로 움직이며 패스를 받을 준비를 했다. 패스가 온다면 바로 공의 방향만 바꾸는 슛으로 연결할 생각이었다.
[슛!]
[오! 이럴 수가!]
[비센테의 왼발이 레알 마드리드의 골문을 열어냅니다!]
비센테는 패스 대신 슛을 시도했다. 가까운 포스트 방향으로 시도하는 슛, 구석을 찌르는 강한 슛에 카시야스는 그대로 골을 허용했다. 골망이 흔들리자마자 홈팬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주는 동점골에 기뻐하는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이 경기에서는 정말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동점 만드는 발렌시아!]
[역습이 주효했죠! 살가도가 비센테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네요!]
전반 종료 직전에 선제골을 허용했으니 후반 10분에 터트린 동점골은 꽤나 빠른 회복이었다. 발렌시아 선수들은 홈팬들의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흥겹게 경기를 풀어갔다.
[카를로스의 왼발 크로스, 마르체나의 차단.]
[알벨다에게 연결 됐어요. 알벨다, 왼쪽의 비센테에게 발리 패스.]
동점으로 승부가 균형을 맞추게 되었으니 레알 마드리드는 득점을 위해 더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마치 매 경기마다 이길 수 있다는 듯 경기에 임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비센테가 중앙으로 꺾어 들어오면서 아이마르에게 패스 연결합니다. 차단하지 못하는 캄비아소.]
공을 잡아둔 아이마르가 수비 뒷공간으로 달리는 우주를 향해 패스를 띄워보냈다. 파본의 옆으로 지나간 우주는 레알 마드리드 진영 우중간 쪽에서 떨어지는 공을 받자마자 레알 마드리드 골문을 향해 달렸다.
[김우주가 기회 잡습니다. 완벽한 기회입니다.]
파본과 엘게라가 한 번에 우주에게 달려들었지만 우주는 그들보다 빠르게 레알 마드리드 페널티 박스까지 도달했다. 카시야스가 각도를 좁히며 나왔지만 우주는 침착하게 왼쪽 포스트로 공을 굴려보냈다. 곧, 홈팬들의 뜨거운 환호성이 다시 한 번 울렸다.
[골! 골골골골골! 골골골골골!]
[골입니다!]
[김우주의 골! 골! 골! 역전골입니다!]
작년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발렌시아에게 데뷔골을 넣었던 선수이지만, 발렌시아 홈팬들은 아낌없는 환호를 보내주며 함께 기뻐했다. 원래 골을 넣는 일이 당연한 직업이지만 항상 골은 즐겁다.
우주는 특별한 셀레브레이션을 보이지 않았지만 발렌시아 동료들과 아낌없이 큰 기쁨을 누렸다.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기록한 골이니 더욱 값졌다.
[발렌시아의 오늘 역습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경기 자체의 중요성도 컸다. 5라운드 밖에 진행되진 않았지만 초반 기선을 제압하고 리그 우승 레이스에 우위를 점할 기회가 오늘 경기였다. 그런 경기이니 지금 레알 마드리드가 받는 충격과 홈팬들의 기쁨이 비례하는 중이었다. 우주는 역시 발렌시아 쪽이었다. 현재 소속된 발렌시아에서 우승을 경험한다면 저번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 경험한 우승보다 더 기쁠 것 같았다.
[김우주가 알벨다에게 패스 이어받습니다. 미드필더와 수비수들 사이.]
우주는 파본을 등진 채 공을 지키기 위해 미드필더 지역으로 움직였다. 파본이 재차 수비 위치로 돌아가자 잠시나마 자유로워졌고, 골문 앞으로 움직이는 선수들을 확인하기 위해 드리블 방향을 바꾸었다. 그 때 캄비아소가 발을 걸었다. 공을 뺏으려고 의욕적으로 움직인 모양이지만 우주의 발을 건드리며 파울, 곧 캄비아소가 우주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우주는 파울을 당했음에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이런 경기에서 화가 날 리 없었다.
[프리킥 준비하는 비센테.]
비센테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페널티 박스 앞에서 얻은 프리킥을 준비했다. 휘슬이 울렸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한 선수도 비센테였다. 비센테의 왼발이 곧 레알 마드리드 골문으로 공을 보냈다.
[골! 또 들어갑니다! 골! 골! 골골골골골!]
비센테의 슛은 또 레알 마드리드의 골망을 흔들었다. 감아찬 슛팅임에도 엄청난 속도로 날아든 수준 높은 프리킥이었다.
[3대1! 발렌시아! 레알 마드리드를 압도합니다!]
[네, 저번 시즌은 5위로 마감했지만 원래 우승을 넘볼 수 있는 팀이거든요. 시즌 초반에 우승 경쟁팀을 완벽히 제압하네요.]
레알 마드리드에 베컴이 있다면 지금 발렌시아엔 비센테가 있다. 마찬가지다. 레알 마드리드에 호나우두가 있지만, 여기 발렌시아엔 김우주가 있다. 이름값이 우승을 결정짓는다면야 당연히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하겠지만, 축구는 그런 스포츠가 아니다. 팀을 위해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면 높은 이적료를 떠나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동등한 가치를 띌 수 있었다.
우주는 이 팀에서 경기를 하면서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세계 최고 선수들이 품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발렌시아는 홈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멋지게 제압했고, 언론은 우주에게 마드리드스타라는 표현 대신 발렌시아니스타라는 표현을 숨김없이 사용했다. 비록 그가 임대 선수이지만 발렌시아를 위해 큰일을 해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주의 생각도 같았다. 발렌시아의 승리에 일조했고, 발렌시아는 우승을 위한 걸음을 내딛었다. 팀 자체 분위기도 굉장히 좋아졌다.
[김우주! 다시 골 기록합니다!]
[오! 대단해요!]
[발렌시아의 선제골! 후반 늦은 시간이지만 김우주가 기회 놓치지 않으면서 바르셀로나에게 앞섭니다!]
다음 6라운드가 바로 바르셀로나 원정 경기였다. 우주는 그 경기에서도 선발 출전했다. 그 때까지 2승 3무로 레알 마드리드처럼 무패를 기록하던 바르셀로나는 우주의 득점 한 방에 첫 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는 호나우딩요를 앞세웠음에도 발렌시아의 수비벽을 뚫지 못했다. 마르체나와 아얄라 같은 수비수들이 도무지 득점을 허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알벨다는 중원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동료를 위해서 싸울 준비도 되어있는 선수였다.우주는 다음 7라운드에서도 선발 출전했다. 미스타를 완전 밀어낸 모습이었다. 베니테즈와 유대감이 깊던 공격수를 밀어내고 주전 자리를 차지한 것은 꽤나 의미가 컸다. 그저 기량으로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발렌시아의 빠른 역습! 김우주가 좌측에서 기회 맞이합니다! 반대편으로 슛팅! 들어갑니다!]
[마무리 능력이 상당해요!]
7라운드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선 2골을 기록했다. 2골 모두 자신감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한 번씩은 망설일 위치에서 바로 시도한 슛팅들이 모두 골망을 흔들었다. 베니테즈는 우주에게 특별히 무슨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우주는 그의 성격상 그가 경기력에 만족하고 있기에 아무 말도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독과 대화할 일이 줄어든 상황을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은 됐지만 좋은 징조임에는 확실했다.
우주는 정말 피치치를 바라보게 되었다. 프로에 와서는 득점왕 경험도 전무하고, 리그 우승 경험도 저번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우승이 전부였다. 저번 시즌의 우승은 자신이 이뤄낸 것이 아니니 상에 대한 욕심이 강했다. 그런 와중에 유럽에서 처음으로 주전 자리를 꿰참과 동시에 피치치를 수상 받는다면, 그만한 성취감이 없을 것 같았다.
“일이 잘 될 때는 왜 잘 되고 있는지 돌아보고, 일이 갑자기 안 풀리더라도 침착하게 대처하는 게 중요해요.”
노을의 말처럼 일이 너무 잘 풀리기에 이제 담담해지는 게 중요했다. 골을 넣더라도 내가 원래 이런 선수라고 여기며 크게 들뜨지 않기로 했다.
A대표팀에서도 불가리아를 상대로 골을 터트리기도 했다. 박지성과 이영표, 송종국 같은 해외파가 있었음에도 익숙치 않은 쿠엘류 감독의 체제 아래에서 좋은 경기를 펼치기는 어려웠다. 승부가 1대0으로 기울어질 때 경기 막판에 만들어 낸 동점골이었다.
그 때부터 대한민국의 최전방은 의심의 여지없이 김우주다, 그런 여론이 형성되었다. 월드컵 때만 하더라도 안정환과 황선홍 같은 선수들이 있었으니 그런 말이 나오진 않았다. 대표팀 경기력도 좋았으니 최전방에 누가 있더라도 그저 즐거웠다. 이후 대표팀 경기가 월드컵만큼 시원스럽지 못하니 최전방에 어떻게든 득점이라도 해줄 선수가 필요했는데, 우주 말고는 그런 역할을 해줄 선수가 누구도 없었다.
“한노을씨와의 열애 소문은 사실입니까?”
“열애까지는 아니고 그냥 연애인데.”
원체 레알 마드리드 소속이 될 때부터 독보적 위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대한민국 축구팬들은 우주를 주목했다. 축구를 모르는 국민이라도, 우주의 이름 정도는 알게 된 세상이 되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특수성을 생각지 않고 했던 인터뷰의 파장이 아무리 컸어도, 그저 김우주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우주를 응원했다.
일이 너무 잘 풀렸다. 그게 불안할 정도로.
-그건 네게 당연한 보상과 같은 거다. 네가 고생한만큼 그 대우가 따라오는 거지.
마켈렐레는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첼시로 건너간 그는 첼시에서 감독의 신뢰 아래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가끔 소식을 들을 수도 있었고, 이렇게 직접 연락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다음 시즌은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발렌시아는 이적료를 감당할 수 있는 구단이 아니잖아.
정말 문제가 있다면, 페레즈 회장이 우주가 발렌시아로 완전 이적 할 일은 없을 거라고 공언한 사실이었다. 언론이 발렌시아로 임대 보낸 것을 레알 마드리드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하도 쪼아대니 그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페레즈 회장은 완전 이적을 원한다면 적어도 바이아웃 금액 3천만 유로를 지불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우주가 포항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때 지불한 이적료가 7백만 유로 정도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완전 남는 장사를 하려고 했다. 이 기량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3천만 유로를 지불할 팀은 나타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첼시는 어때.
“첼시. 음.”
발렌시아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지금부터 고민하고 일을 진행하는 게 우주에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우주는 첼시든 어떤 팀이든, 다음 시즌은 다른 팀으로 이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선 3천만 유로를 유도할만큼의 경기력을 유지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