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발렌시아는 분명 레알 마드리드보다는 우승 횟수가 적은 팀이었다. 그렇다 해서 그게 우주에게 있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우주는 그저 출전 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는 팀이라면 무슨 팀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안 돼.”
처음엔 같은 리그의 발렌시아로 임대를 간다고 하니 레알 마드리드 이사진이 난처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유망주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우주는 이곳에서 용병 선수인데 발렌시아의 전력이 되어버린다면 레알 마드리드에 손해가 돌아올 수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를 염려하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입장만 놓고 보자면 그렇지만, 우주의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걱정이 되면 경기에나 출전시킬 것이지.
“다른 팀이랑은 협상 안 할 거에요.”
이적 명단도 아니고 임대 명단이었다. 다른 팀으로의 이적은 어지간한 제의가 아니라면 허용하지도 않을 거면서 임대 제의도 참으로 까탈스럽게 따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주는 레알 마드리드에 더욱 심통이 났고, 운영진에 확실한 뜻을 전했다. 발렌시아가 아니면 다른 팀과의 협상은 없다는 뜻은 분명히 전해졌는지 결국 임대 계약 승인이 돌아왔다. 그쪽에서도 경기에 많이 뛰지도 못해 불만을 가진 선수가 팀에 남아봐야 도움도 되지 않고, 그럴 바에는 경기 감각이나 유지시켜주자는 생각 같았다.
“나도 이 팀에 계속 있지는 않을 거다.”
“어디로 가려고?”
“협상하려는 팀이 따로 있어.”
마켈렐레도 재계약 협상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태도에 크게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는 팀을 떠날 거라고 말했다.
“전력이 좋은 팀에서 뛰는 것도 분명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가장 좋은 팀은 나를 대우해주는 팀이다.”
우주와 헤어지기 전에 마켈렐레가 말했다. 마켈렐레는 자신의 말대로 대우해주는 팀으로 떠나겠다고 하면서 우주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기회가 되면 월드컵이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만나자는 속내도 밝혔다. 우주는 그러자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켈렐레 같은 유능한 미드필더가 상대 선수라면 경기가 재밌을 것 같았다.
7월이 되자 데이비드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 입단 소식이 전해졌다. 참 신기한 팀이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서 경기를 하는 팀이라니. 우주는 게임으로만 실현 가능할 것만 같은 일을 자꾸 벌여놓는 팀이 자신의 소속팀이란 게 신기했다.
그 때가 되자 우주도 임대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해 발렌시아를 찾았다. 발렌시아라는 클럽의 재정 상태가 레알 마드리드처럼 안정적인 것도 아니라 선수단의 정리가 필요했다고 한다.그 과정에서 바예스타와 카레브가 우주와 엇갈리며 임대로 팀을 떠났다. 바예스타와 카레브는 경험이 풍부한 공격수들이었는데, 이는 우주에게 있어 호재임에는 분명했다. 팀에 즉시 전력 공격수라고 하면 우주보다 한 살 어린 올리베이라와 한 살 많은 미스타 정도만이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을 때와는 다르게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이 때 알게 된 거지만 레알 마드리드가 우주에게 준 것은 호나우두와 경쟁했다는 경험과 꼭 성공하겠다는 오기 정도.
“환영합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치렀던 성대한 입단식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하이메 오르티 회장의 진심만은 알 수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 때와 완벽히 다르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도, 그 때의 상황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배번은 9번이었다. 등번호 20번은 경쟁자인 미스타의 번호였다. 우주는 익숙하지 않은 등번호가 박혀있는 유니폼을 들고 오르티 회장과 기념 촬영을 했다. 등번호는 우주에게 있어 부적과도 같은 것이지만, 2002 월드컵에서도 등번호가 11번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굳이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훈련장 발데베바스와 다르게 발렌시아의 훈련장 파테르나는 완벽해 보이지 않았다. 훈련장으로 가는 길은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도 않았고, 훈련장의 잔디 상태도 최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축구선수에겐 이런 환경이 더 나은 것이었다.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반드시 발데베바스처럼 최고의 시설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의 방식이 틀린 것도 아니고, 최고의 시설이 기량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분명한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이런 환경에서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게 우주의 생각이었다.
-네겐 그런 팀이 낫다.
발렌시아의 입단식을 치른 날 밤, 우주는 히딩크와 통화를 나눴다.
-네가 레알 마드리드에 가는 걸 말리고 싶었지만 결국 말리진 않았다. 네게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어쩌면 내가 네 기회를 막는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의 레알 마드리드의 생활은 좋지는 않았지만 그조차도 네겐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을 거다. 발렌시아는 좋은 팀이다. 베니테즈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 사람의 지도력에 대해선 알고 있다. 널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이끌어줄 거야.
히딩크의 격려를 받으니 더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그랬던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발렌시아에 새로 구한 집은 레알 마드리드가 구해준 집보다도 아늑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선 일본 기업 도요타를 유니폼 스폰서로 두고 있는 발렌시아로 가는 게 못내 찜찜해 트집을 잡는 모양새지만, 우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적응에 최선을 다할 뿐.
“니 내랑 연애하자.”
마음이 안정되니 잠시 다른 것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보이던 것은 노을이었다. 이젠 새로운 시간에 충실하고 싶었다.
발렌시아 광장 분수 앞에서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던 노을은 우주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랑 연애하자고.”
쪽팔려서 사투리를 써가며 고백해봤지만 반응이 예상치도 못한 반응이라 초조해졌다. 우주가 다시 말을 꺼냈을 땐 노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우주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한 게 연애 아니에요?”
“그래도 말하고 만나는 거랑 안 하고 만나는 거랑은 달라.”
“뭐 난 상관없는데.”
“받아들이는 걸로 알게.”
“나 그래도 한국에선 인기 많은데. 뭐, 그래요. 처음엔 내가 만나자고 했으니까. 우리 연애해요. 니 내랑 연애하자, 완전 명대사네...”
노을의 대답에 차츰 모든 게 안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위기란 단어는 생각나지 않았다. 스페인으로 와서 많아진 게 있다면 생각인데, 점차 복잡한 생각은 줄어들었다. 이제부턴 축구만 잘하면 될 일이었다.
의욕이 가득한 채로 첫 훈련 소집일을 애타게 기다렸다. 훈련장에서 마주한 베니테즈 감독은 생각한 인상 그대로였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깐깐했지만, 세심하게 선수들을 지도하는 감독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김우주, 네 장점은 뭐지?”
훈련 첫 날에 베니테즈가 물어왔다. 시즌을 대비해 웜업 세션에 집중할 무렵이었다. 아직 볼 컨트롤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동료들과 익숙치도 않은데 축구에 관한 걸 물어오다니, 여간 열정이 대단한 감독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음, 어디서나 슛을 시도할 수 있는 것과, 음, 음.”
“그래. 어디서나 제대로 슛을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은 공격수에게 축복과도 같지.”
그러면서 자신의 철학과 이번 시즌 발렌시아의 방향까지 제시한다.
“우리는 수비 이후 빠르게 공격으로 전환해야 한다. 몇 년 동안 그런 축구를 하려고 노력했고, 작년에는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이번 시즌은 다를 거야. 네가 우리의 성공에 일부분이 될 수 있다.”
차분히 선수들을 지도하는 델 보스케 감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라커룸에 가서 감독의 첫인상에 대해 이야기 하니 모두 공감한다는 듯 웃었다.
“그가 어찌 보여도, 그를 따르는 게 좋아.”
주장을 맡고 있는 알벨다는 선수들이 베니테즈를 보면서 느끼는 점을 우주가 첫 날부터 똑같이 느꼈다는 점에 대해 대단히 재밌어 했다. 그렇지만 그를 업신여기지는 않는지 연신 그가 좋은 감독이라고 말했다. 우주도 수긍했다. 적어도 베니테즈와 같이 축구에 대해 학구열을 불태우는 감독이라면 믿을만 했다.
감독뿐 아니라 동료들도 열정적이었다. 왼쪽 수비수 카르보니는 이미 38살로 은퇴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로 축구에 집중했다. 여전히 은퇴는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아르헨티나의 아이마르는 쾌활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지단이 조용한 느낌으로 공을 다루고 패스를 시도했다면 아이마르는 적극적인 드리블과 창의적인 패스를 주로 시도했다. 호흡은 괜찮았다. 아이마르와 비센테와의 2선 선수들과의 조합은 좋은 경기력으로 이어졌고, 우주는 연습 경기에서 곧잘 골을 터트렸다.
발렌시아의 팬들도 우주에게 많은 기대를 하는 듯 했다. 이미 저번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발렌시아를 상대로 득점을 올렸던 우주의 모습은 잊었다. 이제 우주가 발렌시아 유니폼을 입고 상대팀에 득점을 올릴 차례였다.
[골! 김우주!]
[대단하군요!]
[발렌시아의 유니폼을 입고 리그 첫 경기 만에 득점을 올립니다!]
리그 개막전은 바야돌리드를 상대로 교체 출전을 했다. 공교롭게 선발 출전한 미스타가 그 경기에서 부진했고, 교체 선수로 투입된 우주는 역습 상황에서 비센테의 왼발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을 골문 구석에 찔러 넣으며 발렌시아에서의 리그 첫 득점을 기록했다.
개막전은 1대1 무승부였지만 그 이후 4라운드까지의 경기는 모두 승리했다. 우주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 시즌에서 첫 선발 출전해 2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3대0 승리에 크게 이바지했다. 베니테즈 감독이 점점 우주의 출전 시간을 늘려가던 와중에 좋은 평가를 얻게 된 것이다. 미스타는 리그 4라운드까지 한 차례도 골을 넣지 못했다. 우주도 단 한 골만 기록하고 있어 많은 득점을 올리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경기 출전 시간부터가 달랐다.
“다음 경기 선발은 너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5라운드 경기를 앞둔 시점에서의 미팅, 베니테즈가 선발 라인업을 읊어줄 때 우주의 이름이 불렸다. 우주가 눈을 깜빡이며 베니테즈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베니테즈가 되물었다.
“문제라도?”
“아뇨. 그냥.”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다만 벌써부터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할 따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