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피치치>
환상적인 경기였다면서 팀 동료들 모두가 한 마디씩 해주었다. 레알 마드리드라는 팀에 특별한 일체감을 느꼈다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가 끝난 이후가 유일했다. 그 전까지는 발데베바스의 특권을 누리면서도 특별히 레알 마드리드라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언제나 언론과 팬들이 다른 선수들을 주목하기 때문이었다. 델 보스케 감독도 우주가 잘하길 바라기 보다는 호나우두가 제 기량을 유지하길 바랐다. 주인공은 우주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유나이티드와의 경기가 끝난 이후엔 처음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상황을 타개시키는 경기력이었다는 평가가 줄을 지었고, 레알 마드리드라는 팀에 걸맞는 선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자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썩 괜찮은 반격이었다. 적어도 레알 마드리드의 김우주란 이름을 세계 축구팬들에게 잊지 않도록 각인시키는 경기였다.
우주는 그 다음 리그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리그에서의 첫 선발 출전은 의미가 깊었다. 매 순간마다 집중하며 공을 다뤘고, 자신 있게 슛을 몇 차례 시도했다. 유효 슛팅은 없었지만 그래도 최악의 경기력까지는 아니었다. 선발 출전한 리그 경기에서는 후반 20분이 되기 전에 교체되었다. 팀은 승리했다.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교적 이전보다 더 팬들의 주목을 받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주 자신보다 더 뛰어난 선수들이 많기에 팬들의 주목에는 큰 의의를 두지 않기로 했다. 경기에 뛰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는 건 축구선수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많은 경기를 뛰지 못한 탓에 체력엔 부담이 없어 몸상태는 최상이었고 올드 트래포드의 해트트릭으로써 자신감마저 회복했다. 상황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호나우두가 선제골 올립니다! 유벤투스에게 앞서가는 레알 마드리드!]
우주의 기대만큼 상황이 수월하게 풀리지는 않았다. 델 보스케 감독은 경미한 부상에서 복귀한 호나우두를 더 중용했고, 호나우두는 여전한 득점 감각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어쩌면 우주의 득점이 호나우두를 불안하게 했고 결과적으론 호나우두가 긴장을 놓지 않고 최고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준 촉매제였을지도 몰랐다. 우주의 해트트릭으로 간신히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올라간 레알 마드리드는 1차전 유벤투스에게 2대1 승리를 거뒀다. 호나우두는 선제골로 팀 승리에 기여했다. 호나우두의 활약에 우주에게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다시 호나우두에게 주목했다.
굳이 우주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호나우두는 프리메라 리가에서도 득점 선두였고, 피치치에 가장 가까운 선수였다. 델 보스케 감독이 굳이 호나우두를 고집한다 하더라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호나우두가 세계 최고의 선수이기 때문에.
우주의 착잡함을 알아주는 동료 선수는 많지 않았다. 워낙에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있었고, 다들 그 자리가 제 자리라고 여기고 있기에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우주는 자신의 예전 행동들을 되돌아보았다. 국가대표에 뽑히는 게 당연하고 경기에 뛰는 일이 당연했던 날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만큼 자신을 믿어주는 지도자들을 만나왔으니 운이 좋았던 것 같기도 했다.
점점 이 상황에 순응하고 초연해지는 자신이 싫어질 지경이었다. 한껏 상승했던 자신감은 호나우두의 경기력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답답한 상황이면 팀을 떠난다고 말하는 게 나아.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보단 그게 낫지. 어쨌든 이런 상황이면 그렇게 반응하는 게 당연하잖아. 넌 충분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는 선수고, 지금 여기선 그게 어려워.”
모리엔테스는 분명한 자기 뜻을 갖고 있었다. 훈련이 끝났을 때에 개인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중 그와 마주쳤다. 우주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선수이기에 조용히 고민을 털어 놓으니 기다렸다는 듯 모리엔테스가 제 생각을 밝혔다.
“난 일단 팀을 떠나려고 생각하고 있어. 뭐 비밀이랄 것도 없지. 경기에 뛰지 못하면 아무리 최고의 팀에 있어도 의미가 될 수 없잖아. 내가 그 팀의 일원이 아닌 것 같은데.”
그의 태도에 하나 배우는 기분이었다. 공격수로서 어떻게 득점을 올려야 하는가, 그런 부분에 대한 영감을 얻은 건 아니었다. 우주가 모리엔테스에게 배운 건 자신을 존중하는 방법이었다. 모리엔테스는 우주에게 더 자신감을 갖고 자신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양의 방식이든 동양의 예의든 그런 건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세계 최고라고 치켜 세우면서 여기로 데려온만큼 대우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해줘야 하는 게 맞다는 것이 모리엔테스의 지론이었다. 딱히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느껴지기보다는 모리엔테스의 방식대로 하는 게 우주 본인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벤투스와의 4강 2차전 경기, 델레 알피에서의 유벤투스는 1차전의 패배를 만회하는 경기를 보였다. 트레제게와 델 피에로, 그리고 네드베드까지 이어지는 공격진은 상대적으로 헐거운 레알 마드리드 수비진을 압박했다. 이른 시간에 터진 유벤투스의 선취골, 연이어서 유벤투스가 골을 터트렸고 레알 마드리드는 라울과 호나우두뿐 아니라 우주까지 교체 투입시켰음에도 3대1로 패배하며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우주가 호나우두와 호흡이 맞지 않는 건 분명히 보인 경기였지만, 포커스는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진이 아니라 수비진에 있었다. 유벤투스의 강한 수비력에 비해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진은 형편없다는 것이 사람들이 꼽는 주된 패배 요인이었다. 아무 것도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필사적으로 배운 스페인어는 동료들과의 소통에 도움이 되었지만, 소통을 한다고 그들이 모두 우주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세계 최고라는 이름에 익숙했고, 우주의 상황에 공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경기에 뛰고 싶습니다.”
시즌이 끝나기 직전에 델 보스케 감독과 면담을 신청했다. 통역사와 함께 델 보스케의 방으로 찾아갔지만 스페인어로 먼저 말을 건넨 건 우주였다. 델 보스케는 약간 놀란 기색인 듯 하면서도 곧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이 팀을 지도하는 감독이고, 선수 기용은 내게 주어진 권리일세. 항상 최고의 감각을 갖고 있는 선수들을 선발하는데 주력하고 있어. 그런 와중에 자네 같은 선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축구 경기는 11명만이 뛸 수 있는 경기니까. 조금만 더 상황을 이해하고 기다린다면...”
“기다릴 수 없어요. 전 이제 막 프로 계약을 맺은 유소년 선수가 아니에요.”
한국에서 만났던 강압적인 지도자들과 다르게 델 보스케는 우주를 인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말을 수용해줄 것만 같은 포근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단호한 대답이 나와 우주도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이곳에서 이상하지 않다. 우주의 진심은 델 보스케에게 표현하는 것처럼, 경기에 뛰고 싶었고 증명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뿐이었다.
“고려해보겠네.”
델 보스케가 확답을 해줄 수 없는 곤란한 처지라는 건 알고 있다. 다만 이대로 있다가는 델 보스케 감독마저도 선발 라인업에서 우주를 제외하는 일이 익숙해질지도 몰랐다. 그 불안감이 우주를 재촉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37라운드 경기에서 마드리드 더비 상대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4대0 대승을 거뒀다. 공교롭게도 호나우두와 라울이 각각 2득점을 올렸다. 모두 우주의 경쟁자들이었다.
리그의 마지막 경기인 38라운드 경기에서도 호나우두는 빌바오를 상대로 2득점을 올렸다. 경기는 3대1로 승리했고 레알 마드리드는 이번 시즌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분명 기쁜 순간이었지만 마음 편히 기뻐할 수도 없었다. 만약 레알 마드리드가 우주에게 일체감을 느낄 기회를 줬다면 우주는 분명 마음 편히 기뻐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은 우주에게 기쁨보다는 여전한 불안감을 줬다. 페레즈 회장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선수를 영입할 거라고 공표했다.
“이적은 안 된대.”
시즌이 끝나고 휴가 기간에 우주는 에이전트 형을 통해 구단에 이적할 의사를 밝히기에 이르렀다. 계약 기간은 3년이 남아 있었고, 레알 마드리드는 후보 선수로 부족하지 않은 득점력을 보인 우주를 활용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모리엔테스까지 임대로 내보내는 와중에 우주마저도 보내기는 어렵다는 게 레알 마드리드의 입장이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입장이 그렇다면, 더는 이렇게 버틸 수 없는 게 우주의 입장이었다. 우주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강경하게 이적을 요구했다. 더는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 시즌 정도만 임대를 가게.”
페레즈 회장과의 면담에서도 우주가 하도 강경한 태도를 보이니 페레즈 회장은 어쩔 수 없이 면담을 하는 그 자리에서 임대를 허용했다. 한 시즌 정도의 임대라 해도 돌아와서 상황이 달라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절충안이었다. 우주는 그 절충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다른 팀과 임대 계약을 맺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우주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모리엔테스도 그랬을 것이다. 막상 다른 팀으로 떠날 기회를 얻었어도 이곳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착잡했다. 모리엔테스는 그래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라도 경험했지, 우주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경험했던 것이라고는 라 리가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 잠깐 손잡이 귀퉁이를 잡아본 게 전부였다.
호나우두는 리그에서 20번이 넘게 득점했다. 경쟁 상대가 세계 최고 공격수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주위에서 은근한 위로를 했지만 전혀 와닿지 않았다.
“난 잘 나가는 배우라서 1년에 드라마나 영화는 꼭 하나씩 찍어요.”
여름휴가라면서 마드리드를 찾아온 노을은 우주에게 그렇게 말했다. 항상 이 여자의 말은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대하게 하는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독특한 화법이었다. 어디 한 번 계속 말해보라는 듯 우주가 고개를 까딱였다. 노을은 테이블 위의 굴튀김을 입에서 우물거리며 말했다.
“잘 되는 것도 있고 생각보다 잘 안 되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공통점이 있는 게, 내용이 거의 똑같단 말이에요.”
“그럴 리가.”
“오빠가 한국에 있을 때 드라마를 자주 보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걸요. 주인공은 언제나 해피엔딩이에요. 내가 맡은 주인공 배역만 해도, 멜로라 하더라도 어지간하면 해피엔딩이라서. 흥행은 그걸 어떻게 표현하기에 따라 다른 거죠. 진부하게 표현하느냐 참신하게 표현하느냐, 내용으로 흥행이 가려진다면 그 차이에요.”
우주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자리잡은 와인에 향해 있었다. 그건 노을이 자신에게 있어 의미 없는 말을 할 때의 습관과도 같았다. 특히나 기분이 좋지 않은 지금 같은 상황에선 노을의 수다에 공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긴 힘들었다. 노을에겐 실례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지금 오빠도 그런 거에요.”
와인병에 시선을 두고 있던 우주가 포크를 손에 집으며 노을을 바라봤다. 노을은 시선을 내리깐 채로 조심스레 말했다.
“오빠가 지금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나중엔 해피엔딩이에요. 진부한 내용이어도 좋고 참신한 내용이어도 좋잖아요. 기왕이면 참신한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진부하면 앞 내용을 예상하기 쉽지만, 참신하면 앞 내용을 예상하기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해피엔딩이라고 믿어요. 아니, 그냥 오빠는 해피엔딩이에요. 지금은 위기고.”
노을의 까만 눈동자가 유독 밝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피하지도 않고 그냥 웃는다. 웃는 모습이 형이 내던 느낌처럼 따뜻하다. 그 웃음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은은한 레스토랑의 조명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빛내주는 것만 같다.
원래 이렇게 예쁜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주는 원래 이 여자가 이렇게 예쁘단 사실을 깨달았다. 우주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손으로 괜히 목뒤를 감싸며 딴청을 피웠다. 약간의 감정 변화를 노을이 눈치챌까봐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이었다.
방금 그 말 때문인지 뒤늦게서야 노을에게 반했나보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하긴 어려운 감정에 빠져들었다.
“나 오빠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죠?”
노을의 발랄한 질문에 우주가 어떤 대답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스페인에서 사용하는 휴대폰이 울렸다. 우주는 노을에게 미안하단 손짓을 보이며 전화를 받았다. 우주가 전화를 받는 동안 노을은 굴튀김에 맛이 들려 연신 굴튀김을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여보세요.”
-이렇게 아무 예고도 없이 전화해서 미안하고, 또 미안하지만은. 우리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 않으니 이해해주면 좋겠네.
통역사도 없는 와중에 스페인 사람과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는 어려웠다. 전화를 건 사람은 스페인어로 우주에게 말했다. 약간의 진땀을 빼며 우주가 대답했다.
네, 무슨 용건이세요. 스페인어로 대답하자 여지없이 빠른 스페인어가 되돌아왔다.
-나는 라파엘 베니테즈네. 라파라고 부르게.
“누구요?”
-라파.
우주는 그 이름을 되뇌다가 라커룸에서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란 걸 떠올렸다. 발렌시아의 감독이었다.
-우리 이사진은 자네에게 임대 계약 제의를 하기로 했네. 우리 운영진에서 네게 연락을 취하지 않고 내가 직접 네게 연락하는 이유는, 자네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당했던 취급을 여기에선 절대로 당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하기 위함이네.
모든 말을 이해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임대 계약 제의까지는 알아들었다.
-우리 팀은 네가 피치치를 수상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어. 호나우두보다 더 많은 득점을 올릴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베니테즈는 특별한 질문도 설득도 하지 않았지만 우주는 바로 마음을 굳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무엇보다도 인정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런 면에서 우주의 마음을 얻는 팀이 아니었다.
변화를 만드는 건 이런 별 것 아닌 성의 하나다. 발렌시아는 우주의 마음을 움직였고, 우주는 베니테즈가 묻지도 않았지만 대답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럼 발렌시아로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