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사진조차 하나 남아있지 않는 기억.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란 어딘가 책에서나 읽어봤을 법한 말로 우주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리그도 재개되었다. 우주도 그에 맞춰 몸상태를 끌어올리는 훈련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다시 축구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그들은 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 청소년 대회를 앞두고 우주가 청소년 대표에 차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주의 나이가 그렇게도 어렸다. 월드컵에서 득점을 기록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청소년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어린 나이였다.
우주는 또 포항을 떠나 청소년 대표 선수단에 합류해 훈련을 해갔다. 침울한 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애써 축구에만 전념했다. 높아만 보이던 선배 선수들이 아닌, 고만고만한 또래 선수들과 축구를 하니 축구가 쉽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심각한 감정 기복 때문에 마냥 축구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감정 기복은 일관성의 문제로도 이어졌다. 경기 중에도 좋은 플레이를 했다가도 한 순간 어이없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대한민국은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맞붙게 된 팀은 일본, 일본은 오노 신지와 이나모토 준이치를 내세운 팀이었다.
[자, 1대1의 팽팽한 승부! 승부는 과연 연장전으로 갈 것인가!]
김은중의 선제골이 있었지만 일본도 동점골을 터트리며 승기를 내주지 않았다. 경기 종료 시간은 다가오는데 스코어는 동점. 이대로면 연장전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멀리 넘겨주는 패스, 최전방의 김우주가 공 받습니다!]
[위험해요!]
페널티 아크에 서서 멀리서 날아오던 공을 기다리던 우주는 순간적으로 집중력을 잃었다. 허벅지로 공을 트래핑해야 하는데 그 트래핑이 너무 길었다. 공이 우주에게서 멀리 떨어지듯 굴러갔고, 우주는 아주 찰나 그 공을 보고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공격수에게 변명은 필요 없다는 그 말. 그 말을 떠올리며 우주는 자신의 허벅지에 맞고 튕겨나간 공을 쫓아갔다.
[김우주! 그대로 슛합니다!]
골문을 등지고 공을 받아냈던 우주는 결국 자신의 허벅지에 맞고 튕겨나간 공을 쫓아가 터닝슛까지 이어갔다. 억지스럽고 투박한 슛 시도였다.
[아아! 골 허용합니다!]
[아! 김우주는 위험한데요! 막지 못하네요!]
[일본 청소년 대표팀...! 경기 종료 직전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에게 통한의 골을 허용합니다...!]
[역시 김우주에요. 네덜란드를 상대로 중거리 슛으로 골을 만든 그 능력을 여실히 증명하는 한 골이네요...]
페널티 박스 밖에서 시도한 슛이 골망을 파고들었다. 먼 거리에서 시도한 슛이지만 2점 슛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술 점수가 추가되는 아름다운 골도 아니었다. 그저 1점에 불과하지만 그 골이 승부를 갈랐다. 우주의 득점 이후엔 90분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게 되었고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가 아시아 최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리그로 돌아왔을 때 우주는 각종 언론과 팬들의 도마 위에 오르는 선수였다. 우주의 모든 플레이가 그들의 관심거리이자 먹잇감이 되었다. 유례없는 신인왕 경쟁 때문이었다. 고종수와 안정환, 그리고 김우주까지.
프로축구가 흥하는 건 그들 때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정작 신인왕 경쟁 구도 속에 있는 3명은 서로에게 라이벌 의식과 같은 경쟁 심리는 한 번도 느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언론이 이들에게 대결이란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관심을 끌었다. 점점 이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이들의 인기도 늘어만 갔다.
우주는 시즌이 끝났을 때 최고의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우주가 트로피를 수상 받을 때 시상식장은 우주를 향한 플래쉬 라이트로 가득했다.
마냥 고운 시선만 있던 건 아니다. 리그에서 인정하는 상인만큼 리그에서 더 뛰어났던 안정환이 받았어야 하는 신인왕이지만 김우주가 국가대표의 활약만으로 가로챘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우주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싶었지만 무시하기는 힘든 반응들이었다. 그런 반응들과 마주하는 와중에 점점 속은 곪아만 갔다.
“니 또 술 마시러 가나.”
“친구가 잠깐 보자는데요 뭐.”
“술 마시지 마라 니. 운동선수면 운동선수답게...”
“나갔다 올게요.”
시즌이 끝나고 나서 밤만 되면 집밖으로 나돌았다. 엄마가 만류해도 어쩔 수 없었다. 우주는 이미 통제를 할 수준이 아니었고, 그렇다 해서 엄마가 이제 우주의 축구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어 주는 것도 아니었다.
1999년. 이제 프로 2년차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동계 훈련을 시작하려 할 때는 또 대표팀이 우주를 불렀다. 대표팀이 부르고 나서 다시 포항에서 축구를 하려 하면 올림픽 대표팀이 우주를 불렀다. 그 다음엔 청소년 대표팀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언론이 떠들어댔던 말들이 틀리지 않았다. 언론은 대한민국의 차세대 공격수가 김우주가 될 거라고 했고, 연령대를 불문하고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엔 항상 우주의 이름이 있었다.
우주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축구에 집중해도 항상 동료들과 지도자들이 바뀌었으며, 그런 만큼 전술적인 부분에서 해야 하는 역할도 매번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우주의 무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조리 충족시켜줄 만큼 완벽하지 않았다. 점점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야 김우주.”
“네 감독님.”
나이지리아에서 열리는 세계 청소년 월드컵에 대비해 체력 훈련에 매진할 무렵이었다. 원래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던 박창선 감독 대신 조영중 감독이 청소년 대표팀의 사령탑에 올라선 시점이었다.
“73kg으로 감량하자.”
“네?”
“네가 지금은 좀 둔해. 다른 나라 애들보다 먼저 공 잡으려면 가속도를 빨리 낼 수 있어야지.”
그렇지 않아도 선수 구성까지 새로워진 탓에 아시아 대회 때와는 다르게 선수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 조영중 감독은 우주에게 체중 감량까지 지시했다. 우주는 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미 몸상태는 좋았다. 그런데도 억지로 체중을 감량하려고 달리기 훈련만 하니 몸상태가 좋아질 리가 없었다. 운동선수의 컨디션은 사소한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훈련 자체가 달라져 버리니 몸상태가 좋을 수가 없었다.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청소년 월드컵 대회에서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팀은 힘도 못 쓰고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에 반해 아시아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일본은 결승까지 올라가는 저력을 보였다.
언론은 청소년 대표 선수들 중 가장 유명한 선수, 김우주를 비난했다. 빈 골문에 공도 제대로 못 차 넣었다면서 대놓고 비난하는 기사를 찍어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몸을 굴리던 우주에겐 가혹한 처사였다. 프로팀에 복귀해서 경기를 뛰어도 홈팬들 말고는 아무도 우주를 응원하지 않았다. 신인상을 두고 경쟁하던 안정환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그야말로 붐을 일으켰다. 우주는 아픈 무릎을 쓰다듬으며 아픔을 잊어보려는 듯 매일 술집을 찾았다.
그로 인해 사생활이 좋지 않다는 소문마저 퍼졌고, 언론은 또 우주에게 별명을 지어주었다.
‘게으른 천재’
우주는 단 한 번도 게을렀던 적이 없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훈련 프로그램은 모두 다 소화했고, 경기조차도 나태하게 치렀던 적이 없었다. 억울해 미칠 노릇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표팀은 계속 우주를 불렀고, 우주는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며 자신의 유니폼 색깔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경기를 치렀다. 그렇게 바쁜 1999년이 지나가고 21세기, 2000년이 찾아왔다.
“무릎 내측인대 부분 파열이네요.”
“심각한 건가요?”
“그럼요. 한동안은 축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너무 무리하셨어요.”
대표팀에 합류해 진단을 받았을 때 대표팀 주치의는 딱하다면서 한숨을 내쉬고는 부상 사실을 알려주었다. 무릎 내측인대 부분 파열, 인대가 파열될 정도의 큰 부상은 처음이었다. 그러면서도 올림픽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올림픽까지는 시간이 있었고, 올림픽 대표 감독 허정무는 우주의 부상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결국 우주는 무릎에 붕대를 감고 경기를 뛰어야 했다. 부상이 완쾌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무릎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방향 전환을 하려 해도 다리가 아팠고, 슛을 해도 다리가 아팠다. 제 경기력이 나올 수 없던 것은 당연했다.
이번엔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진 않았다. 그래도 김우주가 좀 더 잘했다면, 그런 말은 나왔다. 곧 아시안컵에 출전할 엔트리에도 우주는 이름을 올렸다. 자신의 이름이 아시안컵 대표 명단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우주는 이를 악물게 되었다.
“대표팀은 진통제다. 아파도 뛰어야 해. 지금껏 다른 선배들도 다 그랬어.”
레바논 아시안컵을 치르면서 우주가 무릎에 고통을 호소하자 한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그 진통제에 선수 생활이 짧아진 인물이 몇 명일지, 앞으로는 누가 또 있을지. 나 자신은 어떻게 될지. 우주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경기 때마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았다.
[김우주! 골입니다!]
[해트트릭!]
조별예선 1차전 중국을 상대로 2대2 무승부, 2차전에선 쿠웨이트에게 1대0 패배, 대한민국은 아시안컵에서 8강에도 못 올라설 굴욕을 맛볼 수 있었다. 8강에 올라서기 위해선 각조 3위들끼리 성적을 비교해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두 팀만이 8강에 갈 수 있었는데, 그렇기에 3차전에선 최대한 많은 골을 넣고 이겨야 했다.
우주는 3차전에서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조 3위였지만 다른 조의 3위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나은 성적을 거둔 3위였고, 8강에 합류할 수 있었다.
8강에 올랐지만 상대는 이란. 몇 년 전 다에이가 지옥을 맛보게 해줬던 그 이란이 상대팀이었다. 71분 바게리에게 선제골을 내주긴 했지만 90분에 김상식이 극적인 동점골을 만들며 승부는 연장전까지 왔다.
[오른쪽에서 낮은 패스!]
[...김우주!]
골든골로 승부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경기 내내 잠잠하던 우주가 번쩍였다. 측면에서 들어온 낮은 크로스를 우주는 곧바로 슛팅으로 연결하며 이란의 골문을 흔들었다.
[골든골! 김우주의 골든골! 대한민국이 4강으로 갑니다!]
[정말 대단한 역전극이네요!]
다리가 부서질 듯 아팠지만 우주는 그래도 버텼다. 4강에서 사우디를 만나 알 메샬에게 연이어 골을 내줘 2대0으로 뒤진 상황에서도 우주는 포기하지 않고 골을 넣었다.
결승 진출은 좌절됐지만 3, 4위전에서 맞붙게 된 상대는 중국. 우주는 이번에도 후반 종료 직전 골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최종 결과는 3위, 그럼에도 우주는 6득점으로 아시안컵 득점왕에 올라섰다.
게으른 천재니 뭐니 하는 언론의 자유분방함에 일침을 놓는 것 같은 득점력이었다. 언론은 이번엔 우주를 찬양했다. 라이언 킹의 완전부활이라면서.
레퍼토리는 늘 그랬다. 잘하면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못하면 항상 김우주 때문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우주는 그 반복에 신물이 났다. 결국 포항 구단에 부탁해 독일에 재활을 하러 가게 되었다.
오히려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말이 통하지도 않는 독일로 오게 되자 마음은 편했다. 그럼에도 회의감은 여전했다. 축구를 하긴 하는데, 축구가 미치도록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아픔만 줄 뿐이었다.
“다리가 나으면 뭐하지. 축구를 때려치울까.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간혹 벽을 보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 속에 담아놓았던 울분을 말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를 더 파악해가는 그 기분, 항상 감정을 담아놔야 하는 이 입장이 아닌 이상 절대로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 못할 애처로운 기분이었다.
이제 재활도 끝나가는 무렵, 그냥 독일에만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때였다.
“독일 맥주는 꽤 맛있네.”
평소처럼 맥주를 마시고 잠에 빠져들 생각에 눈을 감는데, 재활 프로그램을 도와주던 에이전트 형이 달려와 방문을 열고 외쳤다.
“우, 우주야!”
“네?”
“샬케! 샬케가 같이 훈련하재!”
“...샬케? 샬케, 어디서 많이 들어는 봤는데.”
샬케란 우주에게 있어 낯선 단어였다. 혹시 사람의 이름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에이전트 형이 확인사살을 해주었다.
“샬케 04! 축구팀 말야!"
============================ 작품 후기 ============================
지금 적고 있는 내용, 모두 한 선수가 겪은 실화입니다.
이 앞부터는 실화가 아니에요.
이제부턴 그 선수가 아니라 김우주란 사람의 이야기에요.
여담이지만 이번 태양의 앨범은 정말 엄청나던군요.
원래 태양팬이긴 했지만, 빠순이들처럼 앨범 자체를 사고 싶은 건 이번이 정말 처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