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갈기>
제주도에 가서 차원이 다른 축구를 경험했던 게 결정에 도움이 되었다. 배달된 소포는 누군가의 짖궂은 장난도 아닌 포항 스틸러스의 엄연한 진심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스틸러스 구단의 관계자들은 입단을 확정짓자고 했다. 애초에 구단 운영진에서 협의된 사항이라고 했다. 구단은 유망한 젊은 선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우주는 스틸러스의 제안을 뿌리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윈윈이었다.
스틸러스는 고졸 신인 최고의 계약을 약속했다. 우주는 그 계약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학교에 진학해 4년이나 늦게 프로 무대에 들어서는 것보다는 프로에 먼저 입문하는 게 어떻게 봐도 이익이었다.
그렇게 모종의 계약을 끝내고 메디컬 테스트를 받았다. 검사 결과에서 생각지 못한 이상이 있었다. 발목에 뼛조각이 있었다.
스틸러스 입단에 큰 장애물은 아니었다. 우주의 잠재력에 매료된 스틸러스는 얼른 발목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고 재활까지 마칠 것을 제안했다. 다음 시즌에 바로 팀에서 뛸 수 있게 말이다. 물론 비용은 모두 스틸러스가 지원하기로 했다.
우주는 아직 고교선수였지만, 이미 스틸러스 선수나 다름없었다. 사춘기 동안에도 쉬지 않고 달린 보람이 있었다.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나서는 보조기를 차야 했다. 재활을 위해 포항으로 돌아와서 계속 병원에 다니는 일도 곤욕이긴 했지만 더 곤욕인 것은 축구를 아예 하지 못하는 점이었다.
보조기를 차고 병원에 오면 힘든 재활 프로그램을 받고 나서는 항상 병원 근처에 있는 공원 산책로를 거닐었다. 보조기를 차서 걷기도 불편하고, 오래 걸어서도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래도 무작정 걷는 건 축구에 대한 열망을 억지로 짓누르기 위해서다.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지만.
“김우주!”
멍하니 앞만 보고 산책로를 걷는데 갑자기 누가 얼굴로 시야를 막는다. 누구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세히 보는데 아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우주는 경계심에 걸음을 슬쩍 뒤로 옮기는 것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포철공고 10번 김우주, 맞죠?”
“맞는데요.”
“역시! 김우주였어!”
“누구세요? 나 아는 사람이에요?”
수수한 여자아이였다. 머리통은 고작해봐야 우주의 가슴팍 높이 정도에 있으면서도 당찬 모습이었다.
“그럼요! 저 김우주 선수 팬인데요!”
팬, 그 말 하나에 우주의 경계심이 풀어졌다. 우주는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풀고는 그제야 자칭 김우주 팬을 살펴보았다.
병원복을 입었으면서도 전혀 환자스럽지 않은 생기 있는 웃음에다가, 그 발랄한 웃음은 어찌나 해맑은지 영락없는 초등학생 같았다. 그러면서도 창백한 듯 하얀 피부를 갖고 있는 데다가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는 마냥 어린 아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성적 매력을 느끼게 했다.
이성적 매력, 여자 아이는 그것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아직은 사춘기에 머무르고 있는 남자 아이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우주는 찬찬히 자칭 김우주 팬의 외모에 빠져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싸, 싸인이라도 해드려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되물었는데 쑥스러움을 애써 감추려고 했기 때문인지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저 지금 펜이 없는데.”
그런 퉁명스러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우주 팬은 해맑게 대답했다. 우주는 도망이라도 치듯 산책로 옆에 세워진 등나무 아래의 벤치로 갔다. 벤치에 앉자마자 자칭 김우주 팬은 우주의 옆자리까지 따라앉았다. 아주 열성팬인 듯 싶었다.
“지금은 재활중이니까, 다음에 오시면 싸인해 주세요.”
무슨 자신감인지. 예쁜 여자는 스스로도 예쁜 걸 알고 있나보다. 우주는 어떤 거부감도 드러낼 수 없었다. 이유를 따지자면, 예뻐서 그렇다. 여자 자체를 대하기 어려운데 예쁘기까지 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제 이름은 민하린이에요. 민, 하, 린.”
자칭 김우주 팬, 민하린은 손을 내밀었다. 우주는 하린이 내민 손에 화들짝 놀랐지만 애써 괜찮은 척 하며 악수를 나눴다. 근데 왜 악수를 나눴는지 잘 모르겠다. 의미 모를 악수에 우주는 하린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통 여자들은 HOT나 젝스키스 좋아하지 않아요?”
“네, 전 강타 오빠 팬인데요. 혹시 김우주 선수는 젝스키스 팬?”
“아니, 전 그런 거 관심이 없는데요.”
“그럼 왜 물어보는데요?”
“제 팬이시라길래. 보통 이 또래 여자 애들은 그런 분들 좋아하시잖아요. 왜 제 팬인가 해서...”
우주의 어리버리한 말을 듣고 하린이 입을 가리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외모와는 다른 호탕하면서도 숨김없는 웃음이었다.
“팬은 팬이죠! 전 HOT도 좋아하고! 김우주 선수도 좋아해요! 팬의 개념, 혹시 몰라요?”
“아니아니, 그러니까요, 제 말은요. 여자분이 절 좋아하는 이유가 없잖아요. 전 그냥 축구 선수인데. 뭐 HOT 같은 가수들은 그냥 노래 잘하고 얼굴 잘 생겼으니까 좋아하는 거고요.”
“김우주 선수는 축구 잘 하잖아요. 신문에도 자주 나왔으면서.”
하긴, 축구를 잘하는 선수가 팬이 많은 법이다. 우주는 수긍할 수 있었다. 고교 무대에서의 김우주는 확실히 엄청난 선수니까.
“그리고 김우주 선수 잘생겼어요.”
“네? 저 머리 엄청 짧은데...”
“머리가 무슨 상관이에요? 뭐 물론 HOT 오빠들처럼 기르는 게 더 멋있긴 하지만.”
잘생겼다는 칭찬 하나에 우주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딱히 외모에 대한 자부심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TV에 나오는 잘생긴 연예인들과 다르게 우주의 머리는 아주 짧았다. 짧은 머리만큼 외모에 대한 자신감도 없어 항상 여학생들을 피해왔다.
그런데 이 기묘한 매력의 여자가 외모를 칭찬해 주는 것이다. 이게 그냥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우주에게 있어 최고의 칭찬이었다.
“제 친구도 버스에서 한 번씩 김우주 선수 본 적 있다고 그랬거든요. 전 그 때부터 김우주 선수 알았어요.”
“어, 언제요? 어디 학교 다니길래?”
“그건.”
하린이 우주의 앞으로 얼굴을 바싹 붙였다. 우주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러섰다.
“비밀.”
입술 위에 살며시 검지 손가락을 올리며 하린이 말했다. 유혹하는 것만 같은 자태와 순간 느껴지는 어설픈 여인의 느낌, 그러한 것들이 한데 얽혀서 우주의 시야에 채워졌다. 여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우주에게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왔다.
“저, 가요!”
“벌써요?”
대답도 하지 않고 우주는 어서 일어나 힘겹게 걸어 나갔다. 얼굴은 아직도 붉게 달아오른 채다.
“제 이름은 민하린이구요! 김우주 선수 팬이에요! 다음에도 또 만나요! 저 매일 이 시간이면 여기에 있거든요!”
작별인사 같지 않은 인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우주는 얼른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여자애 생각만 났다. 민하린, 등교 버스가 한 번쯤은 들리는 여고에 다니는 학생일 거다.
어디 학교일까? 날 한 번 봤던 적이나 있을까? 대화 한 번 해본 적 있나? 어찌 저렇게 나와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날 대하지? 혹시 저게 성격일까?
집에 돌아와서도 우주의 머리에는 온통 민하린이라는 여자아이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문득, 거울을 보고 마주한 자신의 모습을 HOT와 대조하기에 이르렀다.
‘머리카락...’
손에 쥘려고 해도 절대 잡히지 않는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우주는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절대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머리를 기르고 길러서, HOT의 강타가 하는 것처럼 노랗게 염색까지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