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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31/31)

    외전 4 :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그란디아 근경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전사자들로 산을 쌓을 정도로 엄청난 전쟁이었다. 전사자의 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병자가 근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란디아에서는 이들에게 구호 물품과 의사, 신관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왕족을 지원 대표로 그들의 전공을 치하하고 사상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기로 했다.

    왕은 나라를 비울 수 없었고, 왕비는 하늘로 떠난 지 오래였다. 왕태후는 병들었으며 왕의 사랑을 받는 여자는 신분이 미천하여 왕비가 되지 못하여 국외 봉사엔 왕족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결국 선택된 사람은 왕의 딸.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언제나 그랬듯 할 일이 없었다. 해선 안 되는 일도, 할 수 있었음에도 할 수 없던 일도 있었기에.

    그럼에도 소녀는 뭐라도 해야 했다.

    “어휴, 다른 나라의 의사들은 병자만 대충 살피면 되는데 우리는 대가리가 저래서.”

    “애물단지.”

    “그러니까 말이야.”

    “차라리 어디 가버리기라도 하지.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농땡이도 못 부리겠잖아.”

    막사 밖에서 의사들의 말을 듣고 있었으므로.

    갈 곳은 없었다. 도움이 되고 싶은데 무얼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녀가 구호소라도 들어갈라치면 사람들이 손사래를 쳤다.

    소녀는 약을 잔뜩 짊어지고 산으로 향했다. 사실 말이 산이지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했다. 켜켜이 쌓인 시체 더미 때문에 괜스레 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산을 다 오르지도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시체 썩는 냄새, 그 썩은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 온갖 사념이 얽힌 그곳은 어린 소녀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죽음의 땅이었다.

    「제 말 잘 들으세요, 공주님. 살고 싶으시거든 돌아오시면 안 됩니다.」

    레이라 부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왜요? 그럼 어디로 가야 해요? 어린 내가 왕궁을 떠나 무얼 할 수 있는데요?

    돌아가도 죽고 돌아가지 않아도 죽는다. 어차피 죽음은 목전까지 와 있었다.

    ‘차라리 죽을까?’

    아이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살아서 뭐 해. 살아봤자 뭘 할 수 있어. 내일도 오늘과 같을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간 가까스로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다. 아이의 인생은 이 산과 같았다. 시체들이 썩어가는 산, 희망 같은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산, 햇빛마저 피해 가는 산.

    ‘이럴 거면…….’

    그 순간 발목께로 기이한 촉감이 느껴졌다.

    “꺄악!”

    “……끄러워.”

    “무, 무슨!”

    다 죽어가는 소년이 소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소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새, 생존자!”

    분명 기운이 하나도 없던 소년이 순식간에 족제비처럼 날쌔지더니 소녀를 덮쳤다. 입을 막은 그가 주변을 살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데다 목소리에 힘도 없고 양쪽 눈은 퉁퉁 붓고 동공이 새빨갰다.

    보이지도 않을 텐데 왜 자신을 제압한 걸까. 무서워서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조용히 해.”

    “으으읍.”

    말을 하라고 해도 못 했을 것이다. 너무 놀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소년이 소녀의 입에 제 검지를 물렸다.

    “내 말이 맞으면 손가락을 깨물어. 알았어?”

    눈을 깜빡이라든가 고개를 끄덕이라든가 하는 간단한 게 아니라 손가락을 깨물라니. 소년은 눈이 잘 안 보이는 게 분명했다.

    “여긴 그란디아 근경이지? 넌 그란디아의 사람인가?”

    소녀가 소년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나돌아 다니는 거지? 이건 훈련받은 자의 발소리가 아니다. 혹시 전쟁이 끝나 사상자를 데리러 온 건가?”

    소녀가 다시 손가락을 깨물었다.

    소년이 후, 하고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제대로 왔나 보군’ 하며 중얼거렸다. 대륙 공용어이긴 하나 억양이 달랐다. 먼 타국의 사람이 분명했다.

    ‘타국의 소년이 이곳엔 왜…….’

    그러고 보니 강 건너 블리스렘 국의 영토에서도 전투가 있었다. 마영석을 두고 네셀국에서 블리스렘을 침략했고 블리스렘에서 란델에 도움을 요청했다.

    ‘블리스렘 억양은 아니야. 그런 란델? 네셀?’

    소년은 이어 물었다.

    “네셀과 란델, 블리스렌 연합의 전쟁은 어떻게 됐지? 란델의 승리인가?”

    이번에도 손가락을 깨물었다.

    소년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 전투의 공은 그에게 있었다. 도시를 비워놓고 그곳의 지리를 잘 아는 블리스렘 군대를 투입하여 시가전을 벌이자는 의견은 그가 낸 것이었다. 그럼 란델이 생색을 낼 수 없다며 지랄하는 포르테 경의 죽방을 날린 것도 자신이었다.

    ‘제기랄!’

    후계 자리를 탐하는 친척들이 암살단만 안 보냈어도 이곳으로 피할 일은 없었다.

    ‘지금 돌아가도 이미 다른 놈들끼리 다 나눠 먹었을 테지.’

    소년이 몹시 분해하며 주먹으로 땅을 내려쳤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소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이렇게 화가 난 걸 보면 모국이 전투에서 진 모양이었다. 패전국은 네셀이니 이 소년은 네셀의 사람일 것이다.

    “읍!”

    갑자기 소년이 소녀의 목부터 허리까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변태? 변태인가?’

    두려움에 눈물까지 나왔다.

    “소독약? 이거 소독약 냄새잖아. 너 의사야?”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천하에 나쁜 놈은 아닌 모양이다. 소녀가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의사냐니까!”

    소녀는 손가락을 깨물지도 반항을 하지도 않았다. 소년이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소녀의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럼 약은 왜 가지고 있어?”

    “생, 생존자를 찾으려고…… 위급한 상황이면 최소한의 치료는 하고 옮겨야 하니까…….”

    “왜 너 혼자 사람들과 떨어져 있지?”

    소년은 뿌옇게 변한 시야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눈을 최대한 좁혔다. 그러나 분홍색 덩어리와 하얀색 덩어리가 뭉쳐진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의사가 아니라면 뭐지?’

    시체인 체하면서 왕족 어쩌고 하는 말을 들은 것 같다. 설마 공주가 온 건가.

    소녀는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소년은 바로 자신을 죽일 마음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다쳤다. 기회를 엿보아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왕족인 걸 들키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팔겠다고 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 감시가 강해질 터였다.

    “저, 저는 신관이에요.”

    “신관?”

    “일손이 부족해서 저도 일을 하러 나왔어요.”

    소년은 금세 납득했다. 그래, 공주가 이런 곳에 올 리 없었다.

    “아, 아무한테도 안 말할게요.”

    “뭘?”

    “그쪽을 보았다고……. 약도 다 내려놓고 갈게요. 정 불안하시면 나무에라도 묶어놓고 가세요.”

    소년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신관 여자애 재밌는 구석이 있다. 다친 게 뻔히 보일 텐데 혹시 모를 상황을 우려해 도망치려 들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영리한데.’

    “일단 소독해.”

    “네?”

    “치료하라고.”

    소녀는 얼떨결에 무례한 소년을 치료하게 되었다. 붕대까지 매어준 소녀가 한숨을 흘렸다.

    “신관 맞아?”

    “네?!”

    “뭐 이렇게 엉성하냐고.”

    소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협박해서 소독까지 시키고 약도 바르게 하고 붕대까지 매게 했으면서 불평도 참 많다.

    “…….”

    “열심히 한 거 맞아? 아니면…….”

    죽이겠다고? 소녀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답했다.

    “여, 열심히 했어요! 정말이에요…….”

    장난이었다. 소년이 픽 웃었다. 낑낑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설마 그걸 모르겠는가.

    “먹을 건 없어?”

    “그런 건 없는데…….”

    소년이 마뜩찮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절뚝거리며 일어나 널브러진 시체를 더듬었다.

    “그걸 왜……!”

    천벌을 받을 거다. 소녀가 기겁을 했으나 소년은 시체에서 투구를 집었다.

    “나뭇가지를 모아.”

    “네?”

    “네 근처에 있는 거, 그거 모으라고. 불은 있지? 반짝이는 거 있어? 거울이라든가.”

    “그렇긴 한데…… 뭘 하시려고요?”

    “까마귀라도 잡아먹어야지.”

    소년이 씩 웃었다.

    * * *

    벌써 까마귀를 잡겠다고 씨름을 한지 두 시간째였다. 해가 지고 있는데 까마귀는커녕 까만 깃털도 보지 못했다.

    “저…… 이제 포기하는 게…….”

    소년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을 정확히 쳐다보는가. 무서워 죽겠다. 이제 자신까지 배가 고팠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도망쳐 봐.”

    “아, 아니에요…….”

    소녀는 울상이 되었다. 귀신도 이런 귀신이 없다. 그녀가 도망치려 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챈다.

    “내가 몇 살 때부터 전쟁터를 전전했는데. 식량이 떨어지면 새를 잡고, 토끼를 잡고 그랬다고. 몸이 이래서 토끼는 못 잡아도 새는…….”

    “몇 살 때부터 전쟁에 나갔는데요?”

    “너보다 한참 어릴 때.”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난 전쟁에 안 나가도 죽어.”

    “왜요?”

    “다들 내가 죽을 날만 기다리니까.”

    암살당할 날을 기다리느니 적들 손에 죽는 게 낫다.

    소녀는 퉁퉁 부은 소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많아봐야 자신보다 다섯 살쯤 위로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구나. 왕궁에서 언제 죽을까 전전긍긍하는 자신과는 달라 보였다.

    “힘들지는 않아요?”

    “당연히 힘들지. 훈련할 때도 죽을 것 같고, 전쟁에 나가서도 죽을 것 같아. 집 안에 가만히 있을 때가 가장 두렵지.”

    음식에 독이 들었을까, 밤에 암살자가 찾아올까 매분 매초 경계해야 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살았어요?”

    “다른 사람은 뭐 매일 행복해서 사는 줄 아냐? 다들 고민 한 가지씩은 있는 거야. 난 무게가 나가는 고민이었을 뿐이지. 목숨 고민.”

    “무섭잖아요.”

    “어른이라고 죽는 게 안 무서운 줄 알아? 전쟁에 나갈 땐 다들 무섭다고. 나이만 어릴 뿐이지 그들과 같아.”

    “그들은 집 안에서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요.”

    “남들이 다 불쌍하게 여기는 내 인생, 나만큼은 불쌍하게 여기지 말아야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소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걱정하게 되면 내 인생이 가여워질 테고, 그럼 포기하고 싶어질 거야.”

    “그런…… 데요?”

    “포기하지 않고 버티면 혹시 알아? 너희들이 믿는 신이란 미친놈이 내게 정말 나은 내일을 선물할지.”

    소녀는 말이 없었다. 한참 조용하다 싶더니 흑, 흐윽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소년이 소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야는 여전히 뿌옇고 소녀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소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제 손에 피와 흙이 잔뜩 묻었다는 것을 깨닫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울었다. 정말 그럴까. 살다 보면 나은 내일이 찾아올까. 아무도 반기지 않는 나를 지켜가다 보면 언젠가 나를 가슴 깊이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까.

    그래, 사실은……. 사실은 이런 말이 듣고 싶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야. 미래의 나는 행복해질 거야. 오늘을 견디면 그런 날이 꼭 올 거야. 믿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에이씨!”

    소년이 버럭 성질을 냈다. 놀란 소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년을 쳐다보았다.

    “너 가.”

    “네?”

    “가라고.”

    “하지만 까마귀도 안 잡혔고, 혼자서는 불도 못 피울 텐데.”

    “내가 야전만 몇 년을 했는데 불 하나 못 붙이겠냐. 어서 가.”

    “…….”

    “어두워지기 전에 따뜻한 곳으로 가.”

    소년의 마지막 말은 다정했다.

    * * *

    “그 사람이 첫사랑이었어요?”

    트라노이 부인이 잔뜩 흥분하여 물었다. 엘리사가 민망한 듯 웃었다.

    “사실 첫사랑이라고 느낀 건 남편인데…….”

    “어머, 우리 솔직해져요. 저도 우리 남편이 첫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가정교사였던 록스벨 자작이 제 첫사랑이에요.”

    “언니, 제가 듣고 있다고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의 시누이인 칸나가 키득거렸다.

    “아이, 각하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오늘은 트라노이 공작 부인과 칸나, 포르테 백작 부인이 그웬저에 모이는 날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기에 달에 한 번 모여 정보를 교환하거나 수다를 떨었는데 이번엔 엘리사가 주최하는 날이었다.

    포르테 백작 부인도 트라노이 공작 부인의 말을 거들었다.

    “가정교사는 정말 멋진 단어죠. 저는 피아노 교사였던 페리켈 경이 첫사랑이었어요.”

    칸나가 픽 웃었다.

    “그래요. 가슴속에 그런 추억 하나씩은 있어야지. 그웬 공작 부인의 첫사랑은 정말 운명 같네요.”

    “첫사랑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좋은 추억이에요.”

    가슴이 떨린다는 게 무엇인지 그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니까.

    부인들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고개를 돌리던 칸나가 입을 딱 다물고 트라노이 공작 부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머나…….”

    “……얼른 일어나요.”

    “그래요.”

    포르테 백작 부인은 집에 시어머니가 있다며 가기 싫다고 버텼지만, 칸나와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양옆에서 팔을 잡는 통에 결국 끌려가고 말았다.

    엘리사는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은 추억인가 봐?”

    익숙한 목소리에 엘리사는 그들이 황급히 자리를 뜬 이유를 알아차렸다. 남편이 듣고 있던 것이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웬 공작 부인의 첫사랑은 정말 운명 같네요’부터.”

    “저런. 그 전에 한 얘기를 들으셨으면 이렇게 화가 안 나셨을 텐데…….”

    진저는 부글부글 끓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첫사랑? 처엇사랑?

    “그래서 누군데?”

    “모르는 사람이에요…….”

    “모르는데 그렇게 좋은 추억이 있어? 그래, 들어나 보지. 어떤 추억이야?”

    엘리사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 첫사랑은 당신이에요.”

    “지나가던 개도 안 믿겠군. 그렇게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면서 내가 첫사랑? 당신과 십 년을 살았는데 그렇게 애틋한 첫사랑을 했는지도 몰랐군.”

    진저가 씩씩거렸다.

    “그래서 그놈 잘생겼나?”

    “당신이 훨씬 잘생겼죠. 얼굴이 퉁퉁 부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어요.”

    엘리사가 손을 내저었다.

    “퉁퉁 부어? 왜 부었는데? 당신이 너무 좋아서 밤새 잠도 못 이루고 왔었나 보지?”

    “전장이라서…… 많이 얻어맞은 거겠죠. 제가 보고 싶어서 부은 게 아니라…….”

    “전장? 허! 병사였어?!”

    엘리사는 잘못 걸렸다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도망쳤다. 십 년을 함께하며 배웠다. 남편이 이렇게 나오면 도망가는 게 상책이라는걸.

    엘리사가 종종걸음으로 도망치자 그 뒤를 진저가 따랐다.

    “그 새끼 싸움 잘해?!”

    라골과 함께 계단을 내려오던 갈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첫사랑이 뭐라고…….”

    아홉 살이 된 갈릭은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하게 되었다. 라골이 픽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내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다 애가 되지.”

    “고모는 첫사랑 앞에서 애가 된다던 걸요.”

    “……비슷한 뜻이야.”

    “아버지도 첫사랑이 있었으면서 어머니한테는 저렇게 화를 내시다니.”

    라골이 황급히 갈릭의 입을 검지로 꾹 눌렀다. 술이 웬수다. 술김에 갈릭에게 그의 첫사랑에 대해 말하고 말았다.

    마님이 마탑주가 되고 너무 기쁜 나머지 평생에 딱 한 번 과음을 했는데 그게 엄청난 실수를 낳았다.

    「다들 트리거 영애인 줄 아는데 그거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오…….」

    「트리거 영애요? 에엥? 운디네가 아버지 첫사랑이었어요? 네 살인데?」

    「아니, 길리안 녀석의 딸이 아니라아…….」

    「네셀국과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만난 신관이었나 의사였나…… 죽다 살아와서는 며칠을 그 여자애 생각에 잠도 못 자고오…….」

    「아버지가요? 대박! 그래서요?」

    「그래서 결혼 상대도 그란디아 사람으로 한 거어…… 우리야 그 신관 여자애에게 감사해야지. 진저가 진심으로 사랑할 사람을 만나게…….」

    「삼촌! 삼촌! 더 얘기해 주세요! 신관 여자애랑 어떻게 만났는데요?」

    라골이 손바닥을 붙였다.

    “살려주라. 네게 말한 걸 들키면 난 네 아버지에게 죽을 거야.”

    “걱정 마세요. 어머니의 사무관을 죽일 순 없죠.”

    갈릭이 개구지게 웃으며 라골의 손을 잡았다. 고모한테만 말해야지 하며.

    갈릭은 몰랐다. 루펠라가 갈릭으로부터 진저의 첫사랑 얘기만 들을 뿐 아니라 친구인 칸나에게 엘리사의 첫사랑 이야기를 전해 들어 두 사람의 인연을 알게 된다는 것을.

    레이디 비스트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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