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 내 아들이 어때서
갈릭의 일곱 살 생일을 앞둔 날이었다. 4공 회의로 귀가가 늦어진 진저를 빼고 모자가 사이좋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갈릭의 접시에 남은 피망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아들.”
“피망 싫어요…….”
“편식하면 건강하게 자라지 못해. 키도 안 크고.”
“아버지도 생선을 안 드시는데 키가 크신걸요?”
엘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릭의 식사 지도를 하기 위해 진저에게 생선을 억지로 먹인 지 어언 4년째였다. 이때까지 잘 지킨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 모르게 갈릭 앞에서 편식을 했단 말인가.
“아버지가?”
“저번에 트라노이 각하가 레이카랑 왔었을 때요.”
“어머, 트라노이 공이?”
레이카는 트라노이 부부의 딸이었다. 자신의 기억으론 부녀 단둘이서만 저택을 찾은 적은 없었다.
“언제?”
“어머니가 마탑에 계실 때요. 일주일 정도 못 들어오셨을 때.”
3개월 전에 마탑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일주일 정도 집을 비웠었다. 진저가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 저택에서 일어난 일을 말해줘서 집에 돌아와 하녀에게 따로 묻지 않았다.
‘트라노이 공과 레이카가 왜 찾아왔을까.’
엘리사가 궁금한 듯 턱을 매만지자 갈릭이 말했다.
“공작 부인에게 쫓겨났다고 했어요.”
“으응?”
생각지도 못 한 이유였다.
“록산느? 가게? 또 갔다? 막 그랬는데…….”
아하. 엘리사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록산느의 주점을 좋아하는 포르테 공작에게 끌려갔던 게 틀림없다.
그 일로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몹시 화가 났다고 하더니 쫓겨났던 거구나. 레이카를 데려온 이유도 짐작이 갔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하루라도 딸을 못 보면 눈에 가시가 돋는 사람이었다. 딸 사랑이 유별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레이카를 데려가면 부인이 어쩔 수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걸 알고 딸과 함께 나온 모양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생선을 안 드셨니?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어?”
엘리사는 갈릭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든 시시콜콜 전했는데 그가 편식을 한 걸 전하지 않았다는 게 의외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하면 말을 못 타게 한다고 그래서…….”
엘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들을 협박했어? 이 사람이…….’
집에 오면 제대로 한 소리 해야겠다. 엘리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버지는 이미 다 크셨으니까 안 드시는 거고, 우리 갈릭은 아직 더 커야 하잖아.”
“그래도 싫은데…….”
엘리사가 주변을 살피다가 갈릭의 접시를 가져왔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피망을 쳐다보았다. 허공에 분홍빛 실이 여러 개 생긴다 싶더니 피망이 빙글빙글 춤추기 시작했다.
“우와!”
갈릭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엘리사는 아직 견습생 신분이라 마법을 사용하는 걸 극도로 조심했다. 혹여 조절을 못 해 폭발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이제 중급 마법은 자유자재로 쓸 수 있으니 이 정도는…….’
“자, 입 벌려볼래?”
“응!”
무서운 아버지를 두어서일까. 갈릭은 아주 어릴 때 의젓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자리에서 흥분하면 이따금 저도 모르게 말이 짧아질 때가 있었다. 그녀의 마법이 몹시 흥미롭다는 증거였다.
엘리사가 검지를 들자 피망이 공중으로 붕 뜨기 시작했다. 그녀가 갈릭의 입을 향해 짧은 직선을 그렸다. 피망이 빙글빙글 돌며 아이의 입속에 들어갔다.
“한 번 더! 어머니, 한 번 더요!”
갈릭이 테이블까지 탕탕 때리며 즐거워했다.
“남은 피망을 다 먹으면.”
“응! 나 다 먹을래요!”
갈릭이 신이 나서 피망을 먹기 시작했다.
덜컹 문이 열렸다. 소리 없이 귀가한 진저가 성큼성큼 걸어 아내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추고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엘리사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식사하셨어요?”
“아니, 괜찮…….”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그녀가 하녀를 향해 명했다.
“각하께서 식사를 하셔야 하니, 고등어를 구워오너라.”
모자의 식사 수발을 드느라 본의 아니게 대화까지 듣게 된 하녀들이 슬쩍 입을 가렸다.
아들 앞에서 편식한 걸 들켰으니 일주일은 생선 요리를 먹게 생겼다.
등 푸른 생선은 진저가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진저가 생선은 싫다며 인상을 썼다.
* * *
사흘째. 무려 사흘째 아침, 점심, 저녁 식탁에 생선이 올라왔다. 비린내가 역할 뿐이지 먹으라면 못 먹을 것도 없지만, 이 식단은 아내의 화에서 비롯된 거라 진저는 식사가 고역이었다.
“여보.”
“…….”
“엘리사.”
진저는 갈릭이 없는 틈을 타 아내에게 칭얼거렸다.
“전쟁에 나가면 생선은 질리도록 먹는다고. 트라노이 공이 왔을 때도 전투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생선은 금세 상하니까 잘 가져가지 않잖아요.”
“식량이 떨어지면 자급자족을 할 수밖에…….”
“전투는 일주일 만에 끝났고, 해안가가 아니라 자급자족할 일도 없었는데요?”
“…….”
진저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놈의 자식, 그렇게 엘리사에게 이르지 말라고 했는데! 그가 인상을 쓰며 다시 포크를 쥐었다.
“저는 오늘 마탑에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올 거예요. 릭과 사이좋게 식사하셔야 해요. 싸우지 말고, 편식하지 말고.”
아이를 교육하듯 남편을 주의시킨 엘리사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남편은 시무룩해져서 포크로 생선 눈알만 쿡쿡 건드렸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처음엔 맹수처럼 크고 무서웠는데 지금은 강아지처럼 귀여웠다. 두려운 게 없다며 세상 만물을 비웃던 사람이 자신, 그리고 자신의 평화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건 가슴이 아플 정도로 행복한 일이었다.
‘귀여워 죽겠어.’
결국 귀여움에 져버린 엘리사가 하녀를 불렀다.
“각하의 접시를 내가렴.”
진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하녀가 부부 몰래 웃으며 생선이 가득 든 접시를 치웠다.
그웬저는 언제나 이러했다. 진저가 실수를 하여 엘리사를 화나게 해도 그 화가 일주일을 가지 않았다. 시무룩한 진저가 귀여워 넘어가는 것이다.
“식사량이 너무 적어지셨어요. 저녁은 든든히 챙겨 드세요.”
“응!”
이 남자는 왜 나이가 들수록 귀여워질까. 엘리사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가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녀를 사이에 두지 않은 진저와 갈릭은 몹시 어색한 사이이며, 부자가 붙어 있는 경우는 엘리사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어떻게 죽일지 골몰할 때나 가능하다는 것.
그래도 한 공간에 있기는 했다. 진저는 살가운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어린 아들을 혼자 두지는 않았다.
부자는 여느 때와 같이 멀찍이 떨어져 서로 할 일을 했다. 진저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를 보았고 갈릭은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그림책을 읽었다.
벌써 두 시간째였다. 진저가 아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어릴 적엔 책보다 검을 가까이했다.
물론 가정교사들에게 교육을 받긴 하였으나 학습 일정을 마치고 나면 활자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렇게 책만 읽었다간 뇌에 곰팡이가 생기는 게 아닌가.
갈릭도 책장을 넘기는 체하며 진저를 힐끗 쳐다보았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걸까. 무섭다.
“갈릭.”
“……예.”
진저가 마른 입안을 달싹였다. 일단 말을 붙였는데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릭에게 다정해지세요.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라잖아요.」
안다. 아는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진저는 아내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다정했던 적이 없었다. 저 녀석은 왜 하필 자신을 닮아서. 닮을 거면 상냥하고 다정하고 선하고 착한 어머니를 닮으면 좀 좋은가. 아들은 자신을 찍어낸 것처럼 똑 닮아서 이상하게 불편했다.
“무슨…… 책을 읽느냐.”
그렇다고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트라노이 공작처럼 물고 빨진 않아도 그의 마음속엔 분명 아들의 칸이 있었다.
평생 제 이익만 좇으며 살아온 그가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오늘보다 나은 날이 되길 바라서.
“물고기 장수요…….”
갈릭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고기 장수? 네가 물고기를 팔 것도 아니고 그런 책을 볼 필요가 있나?”
감히 누가 진저 그웬의 아들에게 물고기를 팔라 하는가. 그가 눈을 부릅떴다.
“어머니가 어릴 적에 자주 읽은 동화라고…… 읽어보라고…….”
“아.”
그렇다면 읽어도 좋다.
엘리사는 부자에게 뭐든 해도 좋고, 뭐든 옳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이라면 오렌지로 포도주를 만든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고 볼 것이다.
진저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어떤 점을 느꼈지?”
말투가 어색했다. 이런 건 생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갈릭도 당황스러운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 그게…… 물고기 장수가 시장에서 물고기를 파는데…… 으음…… 판 돈으로 꼬치를 사먹어요.”
“그런데?”
“꼬치 맛있어요?”
느낀 점이 고작 그것인가. 진저가 한쪽 눈을 찌푸리자 갈릭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게 아니었다. 아들의 기를 죽이려 물어본 말이 아니었는데 왜 아들은 기가 죽었는가. 그것도 바짝. 고개까지 숙이고 시무룩해하는 아들을 보던 진저가 급히 집사 콕스를 불렀다.
부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콕스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어쩌나, 우리 도련님’을 염불 외듯 외고 있던 콕스가 부리나케 부자 앞으로 뛰어왔다.
“예, 주인님.”
“옷을.”
“예?”
“갈릭의 외투를 가져와라.”
콕스와 갈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저를 쳐다보았다.
* * *
진저는 아들을 데리고 야시장에 나갔다. 오늘은 제도 외곽에 장이 선지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갈릭은 진저의 손을 꼭 잡은 채 별세계 같은 야시장을 쳐다보았다.
“와아…….”
조리실도 아니고 집 안도 아닌데 음식을 만드는 자들 천지였다. 아예 바닥에 불을 놓고 고기를 굽는 자들도 있었다.
진저가 아들을 데리고 성큼성큼 걸었다. 아버지의 보폭에 맞추느라 아들은 거의 뛰듯 걷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헤아릴 정도로 진저는 사려 깊은 사내가 아니었다. 그저 신이 나 뛰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는 마치 여기 있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길을 찾았다. 꼬챙이처럼 긴 나무에 고기를 쏙쏙 꿰고 있던 사내가 ‘어이쿠’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각하!”
아버지는 여기를 어떻게 알고, 이자는 아버지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갈릭이 의아한 표정으로 진저와 사내를 쳐다보았다.
“꼬치 두 개.”
꼬치를 주문한 진저가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쥐여주었다. 주인인 듯한 사내가 금화를 한사코 거절했다.
“또 이러십니다. 꼬치값으로는 과하다니까요.”
주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갈릭이 눈을 끔뻑거렸다. 아버지가 어머니나 기사들 외에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상대는 처음 본다. 진저는 꼬치상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아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나는 맵지 않게.”
“도련님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예예, 알겠습니다요.”
사내는 야채를 하나도 넣지 않고 고기만 잔뜩 넣은 꼬치에 양념을 슥슥 발랐다. 하나는 빨간 양념, 다른 하나는 갈색의 양념이었다. 양념을 바른 꼬치는 금세 익었다. 꼬치 끝에 천 같은 것을 둘둘 만 사내가 진저에게 그것을 건넸다.
진저는 갈색의 고기 꼬치를 갈릭에게 건넸다.
“먹어.”
아버지가 주는 거니 받기는 했는데 입에 넣긴 무서웠다. 어머니는 위생에 철저했는데 특히 음식에 예민했다.
어린 아들이 식중독에 걸리면 큰일이라고 조리된 음식은 식기 전에 먹이고, 여름엔 생선은 아예 입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이건 먼지 가득한 곳에서 만든 건데…… 어머니가 싫어하실 텐데…….’
갈릭이 주저하자 진저가 직접 고기를 집었다. 아들의 입에 넣어주려다 다시 제 입가로 가져와 후후 불어주었다.
“자.”
진저가 갈릭에게 직접 무언가를 먹인 건 처음이었다.
‘무서워.’
갈릭은 눈을 꾹 감고 입을 아- 하고 벌렸다. 진저가 픽 웃으며 아들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었다.
“으응?”
맛있다. 소스는 달콤하고 고기는 따뜻하며 부드러웠다.
“맛있어요!”
갈릭이 더 달라고 보챘다. 무서움도 잊고 아기 새처럼 쩍쩍 입을 벌렸다.
진저는 제 몫의 꼬치를 먹는 것도 잊고 갈릭에게 꼬치구이를 먹였다. 후후 불어서 식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부자를 쳐다보았다. 매번 공작 부인과 단둘이 오시더니 이번엔 아들도 데려오셨다.
‘내 꼬치는 대륙 제일이지.’
사내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꼬치 하나는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갈릭이 더 먹고 싶다며 진저의 몫의 꼬치를 쳐다보았다.
“이건 매워.”
“매운 것도 잘 먹어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워.”
“괜찮아요!”
갈릭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잠깐 고민하던 진저가 아들에게 제 몫의 빨간 꼬치를 먹여주었다.
“으아아앙!”
그럴 줄 알았다. 헥헥거리던 갈릭이 얼마 안 가 울음을 터뜨렸다. 진저는 아들을 번쩍 안아들고 물을 먹였다. 물을 먹었는데도 매운지 아들이 낑낑거리며 아비의 목에 얼굴을 부볐다.
“그러게 맵다니까.”
“아버지 미워요!”
“나 참.”
이상한 감각이었다. 감히 제 앞에서 밉다고 소리치는 사람의 목을 분지르고 싶지 않다니.
아내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인데도 어느 한구석은 똑같았다. 가슴이 간지럽다든가, 자신도 모르게 픽픽 웃음이 난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진저는 아들을 안은 채 주인이 거절할 틈도 없이 금화를 내려놓고 시장 한복판을 걸었다.
얼음 가게에 도착한 그가 아들에게 물었다.
“무슨 색.”
갈릭은 혀를 빼물고 헥헥거리다가 진저가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잘게 간 얼음 위에 색색의 시럽을 뿌려주고 있었다.
“으음, 빨간색!”
혀가 아프다고 죽는다던 아이가 어느새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말했다.
빨간 얼음은 순식간에 나왔다. 진저는 값을 지불하고 아들에게 빨간 얼음이 든 컵을 건넸다.
인심 좋은 주인이 얼음을 탑 쌓듯 쌓고 시럽을 잔뜩 뿌려준 탓에 갈릭이 스푼으로 얼음을 뜰 때마다 그의 가슴에 시럽이 튀었다.
“내려와서 먹어.”
“…….”
먹는 것에 정신이 팔린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진저는 아들을 안고 야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폭죽이 터지기 시작할 즈음, 얼음을 다 먹은 갈릭이 눈을 빛내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체력이 좋아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팔이 저렸을 터였다. 진저가 조금씩 미끄러지는 아들을 추슬러 안았다.
아기일 적에도 아이를 이렇게 오래 안아준 적은 없었다. 여섯 살이나 되었는데도 아들의 몸에서 옅은 분내가 났다.
“우와, 우와!”
아들이 팔까지 휘두르며 기뻐했다.
「당신은 아직도 갈릭이 어린애 같나? 여섯 살이면 다 컸어. 물고 빨 때가 아니라고.」
질투에 사로잡힌 진저가 아내에게 투덜댈 때면 아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여섯 살이면 아기죠.」
「난 여섯 살 때 창을 휘둘렀어.」
「갈릭이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어도 제겐 아기로 보일 거예요.」
「징그럽지도 않아?」
「당신도 그럴걸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진저의 눈엔 갈릭은 다 큰 아이였다. 그런데 오늘 보니 갓난쟁이보다 조금 나은 아이일 뿐이었다.
폭죽 행사가 끝나자 정신을 차린 갈릭이 진저의 품에서 내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제 품에서 내려온 게 아쉽다니.
「당신은 아들이 그렇게 예쁜가.」
「그럼요. 우리 릭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죠. 꼭 천사 같아요. 당신은 안 그래요?」
「세상에서 제일까지는 아니지.」
어디가 그렇냐고. 우리 아들이 뭐가 부족하냐고 눈을 흘기던 엘리사를 볼 때면 팔불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날 닮아서 잘생기긴 했지. 여섯 살밖에 안 됐는데 성실하고. 그래, 착하기도 하군.’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예쁠지도 모른다. 진저의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내 아들.’
왕세자의 아들보다, 포르테 경의 아들보다 어느 곳 하나 모자란 데가 없었다. 그 녀석들보다 훨씬 낫다. 그래, 내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딸이 생기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예쁜 아이가 될 테지만, 아직까지는 그랬다.
갈릭은 자신을 보며 픽픽 웃는 아버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아버지가 무섭게 웃으실까’ 하며.
진저의 손을 잡고 쫄랑쫄랑 걷던 아이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요, 아버지.”
“왜?”
“아버지는 이런 데 안 오실 것 같은데…….”
“네 어머니와 가끔 와.”
“어머니랑요?”
진저가 처음 야시장을 찾은 건 그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그가 소공자로 불리던 시절의 일이었다.
선대 공작과 타고 가던 마차가 이 근처에 주저앉았다. 근처에 야시장이 있다는 말에 그럼 한번 구경하자며 그가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그게 다였다.
지금까지도 노인네가 죽은 건 천벌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영 몹쓸 사내란 것도.
하지만…….
‘꼬치는 사줄 줄 아는 사람이었지.’
그는 선대 공작과 함께 꼬치 가게에 들렀다. 선대 공작과 진저는 지금의 진저와 갈릭보다 훨씬 어색한 관계였다.
대화는 당연히 없었고, 아비가 아들에게 꼬치를 먹여주지도 않았다. 매운 꼬치, 덜 매운 꼬치를 가려서 주문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선대 공작을 떠올리면 그날 일이 떠오른다.
“네 할아버지와 꼬치 가게에 간 적이 있어.”
“조부님이요? 우와, 그럼 아버지도 엄청 기분 좋으셨죠?!”
갈릭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다들 아버지를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친구들과 라골은 그게 질투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했다.
아버지보다 가진 게 없어서, 마음이 허해서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싶어서 하는 쓸데없는 말이라고. 하지만 갈릭은 어쩌면 아버지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전에 다친 고양이를 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다친 다리를 치료해 주었는데 아픈 고양이는 ‘하악’ 하며 털을 곤두세우고 자신을 위협했다.
아버지가 무서운 사람인 건 불행했기 때문에 마음이 다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고양이처럼. 갈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었구나.”
“뭐?”
“아버지가 무서운 건 다친 고양이와 같아서가 아니었어요. 다행이에요!”
무슨 말인지 당최 모르겠다. 진저가 미간을 좁혔다.
“어머니가요. 예쁜 추억이 많을수록 강해지는 거래요. 근데 아버지도 예쁜 추억이 있잖아요. 그래서 강한 거예요. 강해서 무서운 거였구나.”
“…….”
“아버지가 어머니와 릭을 지켜줄 거지요?”
“……그래.”
갈릭이 무슨 말을 할 때면 엘리사는 아이 몰래 한참을 울었다. 혹시 아이에게 상처를 받은 건가 싶어 동동 구르면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맑게 웃었다.
「행복해서요.」
그는 오늘 비로소 그녀를 이해했다.
아, 이래서. 이런 거구나.
사랑하는 여자로 인해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몇 번이나 있었다.
잠든 그녀를 쳐다볼 때, 그녀가 행복에 겨워할 때, 사랑한다고 말해줄 때 자신답지 않게 코끝이 시큰했다. 그는 그 이유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갈릭이 태어나고 6년. 이따금 가슴이 얼얼했다. 귀가 뜨거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란 건 알지 못했다.
그의 인생에 선물을 아내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아내가 원하니까, 후계자가 필요하니까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제게 가장 큰 선물을 주었잖아요.」
그렇다. 아내도 제게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진저는 갈릭의 붉은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하고 가슴속으로 되뇌었다.
아가야, 너는 아비 인생에 선물이구나. 아무것도 아니었던 기억이 너로 인해 추억이 된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깊이 사랑한다.
“왜요……?”
갈릭이 울상을 지었다. 잘못한 걸까. 그래서 아버지가 화가 났나?
진저는 픽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뻐서.”
갈릭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떼를 써서 아버지가 미쳤나 봐! 어머니에겐 언제나 듣는 말이지만 아버지에겐 처음 들었다. 아이가 꾸아앙 눈물을 터뜨렸다.
당황한 진저가 벌떡 일어났다.
“왜? 왜?!”
“엄마아아! 으앙!”
“누가 내 아들을 울린 거야?!”
제가 울린지도 모르고 진저는 발만 동동 굴렀다.
* * *
엘리사는 밤늦게 저택에 돌아왔다. 남편의 침실에서 하녀가 외투 두 개를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마님.”
하녀가 허리를 숙였다.
“오늘 각하와 갈릭이 외출했나?”
“예.”
엘리사가 남편과 아들의 옷을 확인했다. 둘 다 가슴팍에 무언가 묻어 있었다. 익숙한 냄새였다. 야시장이 설 때마다 남편과 갔던 꼬치 가게의 소스 냄새.
‘이이가 갈릭과 야시장에 갔나?’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야시장이 서는 날이었다. 갈릭과 너무 대화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데리고 나가주기도 하고. 엘리사가 키득거리며 하녀에게 옷을 건넸다.
방에 들어가니 진저가 잠들어 있었다. 진저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고 있는 사람은 아들이었다. 사랑스러운 광경이었다. 엘리사는 한참을 서서 눈 안에 장면을 새겨놓았다.
갈릭이 불편한지 낑낑거릴 때가 돼서야 아이를 남편의 품에서 구출하기 위해 움직였다. 엘리사가 남편의 팔을 조심스럽게 들자 갈릭이 데굴데굴 굴러 그에게서 멀어졌다.
“이런, 그렇게 자다간 내일 목이 아플 거야.”
갈릭의 목이 곡예하듯 꺾여 있었다. 그녀가 아들의 머리를 받치려고 손을 뻗었다.
“으응.”
“일어났니?”
갈릭이 눈을 부볐다.
“……이야.”
“응?”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비밀? 뭐가? 엘리사가 아들을 조심스럽게 흔들었지만, 아들은 대답 없이 색색 숨만 내뱉었다.
부자 사이에 비밀이 생겼다.
‘뭔지 알 것 같은데.’
재킷에 묻어 있는 소스, 갈릭의 입안이 새빨간 것. 종합해 보면 답은 금방 나왔다.
야시장에 가서 꼬치와 얼음을 사먹었구나. 밖에서 만든 음식을 먹은 걸 알면 자신이 야단을 칠 테니 비밀로 하자고 한 것일 터였다.
엘리사가 남편과 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오늘 일은 부자만의 비밀로 묻어주기로 하고.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온 엘리사가 키득거렸다. 그게 뭐 비밀이라고. 혼낼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귀여워라.”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두 남자를 두고 엘리사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