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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 질투 (29/31)

    외전 2 : 질투

    “마님.”

    안절부절못하던 하녀가 그녀를 불렀다. 손톱을 물어뜯던 엘리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하녀를 쳐다보았다.

    “괜찮으세요?”

    “그래…….”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갈릭의 네 번째 생일 파티 이후 그녀는 이따금 생각에 잠겨 손톱을 물어뜯곤 했다.

    불안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갈릭을 낳은 후로, 아니, 그란디아의 일이 정리되고 다시 란델에 돌아온 후론 이런 불안이 드는 일은 없었다.

    속상했다. 하필이면 불안을 선사한 사람이 사랑해 마지않는 남편이란 것, 그리고 불안이 질투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엘리사가 하녀에게 물었다.

    “오늘도 영지군과 합동 훈련이 있니?”

    “네? 네. 주인님께서 참관하러 가셨어요.”

    갈릭의 네 번째 생일 파티 때 그웬 영지군이 수도에 올라왔다. 영지는 진저에게 충성하는 가신들이 관리하고 있어서 여행을 갈 때가 아니면 찾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이번 기회에 늘 영지에서 고생하는 기사와 병사들을 잘 대접하리라 마음먹었다.

    그웬의 유일한 여기사, 로벨 경을 보기 전까진.

    여자라면 일단 벽을 치고 보는 그가 로벨 경 앞에선 편해 보이는데다 곧잘 웃기까지 했다.

    거기까지는 친한 기사인가 보다 하고 웃어넘길 수 있었는데 술에 취한 영지 기사들이 듣고 싶지 않은 일을 주절거렸다.

    「여자가 기사가 된다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다들 반대하는데 주군이 경에게 말하더군요. 삼합, 삼합만 견디면 널 내 병사로 받아주지. 크-!」

    그 말에 기사며 병사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로벨 경이 얼마나 악바린지 모릅니다. 웬만한 사내도 견디기 힘든 주군의 검을 세 번이나 받아냈다는 거 아닙니까. 주군이 그 자리에서 그녀를 받아주었죠.」

    「크하하! 그때부터였죠? 로벨 경이 주군께 푹 빠진 게.」

    푹 빠져? 엘리사가 놀란 표정으로 로벨 경과 진저를 쳐다보았다. 로벨 경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고, 진저는 픽 웃고 있었다.

    「주군이 결혼할 거라는 말에 상심해서 술을 진탕 마셔서는-!」

    그 말을 한 기사는 끝까지 말을 하지 못하고 술에 지고 말았다. 꽈당 넘어져 커헉커헉 코를 고는 그를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엘리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뭘 했다는 걸까. 포옹? 입맞춤? 설마…….

    ‘잠자리?’

    엘리사가 눈을 깍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제 기사를 건드렸을 리 없다. 설혹 잠자리를 가졌더라도 자신과 결혼하기 전의 일이었다.

    ‘생각하지 말자. 로벨 경은 그저 가문의 기사일 뿐이야.’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고 집무실을 나섰다. 차라리 그와 함께 있는 게 불안이 덜할 것 같았다.

    1층에 내려가니 소거실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엘리사가 그에게 말을 붙이려 했을 때였다.

    로벨 경이 소거실로 성큼성큼 들어와 서류를 한 무더기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대화 중이었다. 엘리사는 두 손을 꼭 잡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마님?”

    라골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마탑에서 연락이 왔노라 전하려던 중에 그녀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네? 아니, 아니에요.”

    라골이 미간을 좁힌 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보고 있던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제, 제가 무슨!”

    화들짝 놀란 엘리사가 손을 붕붕 저었다.

    “…….”

    라골은 말없이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변명했다.

    “정말…….”

    “…….”

    “사실 조금…….”

    엘리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저와 로벨 경이 연인 관계였던 것도 아니고 그저 군신 관계일 뿐이었다.

    로벨 경 쪽에서 진저에게 마음이 있었다곤 하나 그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그녀를 기사로만 대했다.

    진저와 한 침대를 쓴 지 5년이 넘었다. 그 정도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신경 쓰이는 건 그가 여성과 거리를 두는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개차반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지라 그를 탐내는 여자도 없었고, 탐을 낸다 해도 진저 쪽에서 칼같이 끊어냈다. 로벨 경처럼 서로 친근하던 경우가 없었다는 말이다.

    “처음이라서요. 처음이라 조금 신경이 쓰일 뿐이에요.”

    “주인님께 말씀드리시죠.”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이성과 친근하게 지내고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 중 여성은 1할이 채 되지 않았다. 모두 남성 마법사에 리한이며 라골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그런 자신이 그에게 여성을 멀리하라 투정을 부릴 순 없지 않은가.

    하녀가 갈릭이 어머니를 찾으며 칭얼거린다는 말을 전해 왔다. 엘리사는 힘없이 갈릭을 찾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라골이 픽, 실소를 흘렸다.

    보통 콩깍지는 2년이면 벗겨진다는데 이 부부의 콩깍지는 도무지 벗겨질 줄을 몰랐다.

    진저는 마님에게나 강아지 같지 다른 여자에겐 몬스터처럼 흉흉한 사람이었다. 제정신인 여자라면 접근할 리 만무했다.

    라골이 진저와 로벨 경에게 다가갔다.

    “안 돼. 하우벡이 영지에 내려가면 수도군 실무는 누가 보나.”

    “이러다 노처녀로 늙어 죽겠습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말 못 들어보셨습니까? 만날 기회가 있어야 꼬실 가능성이라도 있죠!”

    “네가 올라오면 되잖아.”

    “화병으로 죽으란 말씀이시죠? 저는 주군과 안 맞습니다. 스트레스로 말라죽을 거예요.”

    “그럼 넌 노처녀로 늙어죽겠군.”

    “마님께 말씀드릴까요? 결혼 전에 어떤 여자들이 주군의 침대를 덮혔는……!”

    “네 목을 잘라 우리 갈릭의 공으로 줘야겠다.”

    “이것 보세요! 주군이 이러시는데 제가 어떻게 수도에서 산단 말입니까?!”

    엘리사는 간과한 게 있었다. 진저의 군은 란델에서 유명한 쑥맥군이라는걸. 연애 같은 건 개뿔도 모른다.

    그런 그들이 로벨 경이 진저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들은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다. 로벨 경이 관심을 두는 사람은 진저가 아니라 하우벡이었다.

    그녀는 하우벡이 족장에게 다리가 잘린 친구를 업고 부족에서 탈출해 진저의 부하가 된 그날, 그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다.

    ‘의리 쩔잖아! 개 멋있어!’

    하지만 그녀도 쑥맥군 소속. 남자를 어떻게 꼬시는지보다 어떻게 작살을 내는지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하우벡을 영지에 보내줘’, ‘안 돼’, ‘마님께 과거에 얼마나 방탕했는지 일러바칠 거다’, ‘죽고 싶어?’의 연속이었다.

    “이용해 먹었으면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레닉의 소대를 렉터가 맡았어. 그놈 하는 짓이 영 마음에 안 든다. 네가 이끌어 봐.”

    “렉터 그 자식은 뺀질뺀질해서…… 그런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군을 이용해 먹었다고요?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다른 놈들은 네가 나를 좋아한 줄 알고 있잖아.”

    “안 그래도 파티에서 그 지랄한 놈들 반 죽여 놨습니다.”

    로벨 경이 씩씩거렸다. 몹시 분하다는 듯이. 엮을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하필 개차반 주군이 뭐냐는 표정에 진저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뭐 어때서. 내 아내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멋지며 다정하다고 했다.”

    아주 자랑스러운 투였다.

    “마님에게 잘하십쇼. 그런 분이 흔치 않아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라골이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라골을 본 진저가 무슨 일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마님께서…….”

    “그 사람이 왜?! 몸이 안 좋나? 감기라도 든 거야? 망구들이 괴롭히기라고 했어?”

    마님이란 말만 나오면 저렇게 난리였다. 라골이 고개를 저었다.

    “로벨 경과 주인님을 보시며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한숨?!”

    “마님이?!”

    진저와 로벨 경이 소리쳤다. 로벨 경은 그런 무서운 오해 마시라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진저는 입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마탑 일에 내저 관리에 사교 활동까지 하는데다 갈릭의 육아까지 하느라 아내의 관심을 통 못 받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질투는 언제나 달콤한 것이다. 진저가 벌떡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그를 본 로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주군의 콧노래를 들은 것 같은데……. 세상이 망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이게 무슨 일이죠…….”

    “늘 그러십니다.”

    “예?”

    “마님 앞에선 사춘기 소년이시거든요.”

    로벨이 징그러운 소리를 한다며 표정을 왈칵 구겼다.

    * * *

    “히이잉, 나바.”

    “나빠? 으응, 미안해. 우리 아들 낮잠 시간을 잊었네.”

    정신이 없어서 갈릭의 낮잠을 재우는 것도 잊었다. 갈릭은 꼭 엘리사의 침대에 누워 엘리사가 토닥여 줘야 잠이 들었다. 아이가 엘리사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마아.”

    “그래, 졸리지?”

    엘리사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뺨을 아프지 않게 집었다. 몽실거리는 감촉이 사랑스러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어쩜 이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울까. 내 아이가 가장 예쁜 것 같아.’

    남편의 아이가 이렇게 순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엘리사는 그를 깊이 사랑하긴 하지만 의외로 객관적인 부분이 있었다.

    진저가 개차반이라는 것.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까지 인간은 교화시키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빠르다는 사람이었다.

    갈릭은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으로 머리색과 눈만은 판화 찍듯 진저와 똑같았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불안하게나 하고.”

    갈릭이 꿈뻑꿈뻑 눈을 감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등에서 등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 향기, 이 손길. 남편의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했나.”

    남편의 말에 엘리사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응?”

    “……그런 거 아니에요.”

    진저가 아내와 갈릭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이동했다. 엘리사와 마주 본 자세가 되었다. 그는 아내의 벚꽃빛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입가에 실실거리는 미소가 내려앉아 있었다.

    엘리사는 골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웃지 마세요.”

    “거 봐. 화가 난 게 맞는 것 같은데?”

    “…….”

    “우리 마님은 속상할 때 입 다무는 버릇을 언제야 버릴까.”

    엘리사가 눈꼬리를 삐죽 올렸다.

    “그래서요?”

    답답하다든가 싫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진저는 목을 쭉 빼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내게 당신을 더 많이 알려달라는 소리지. 입 다물고 있으면 난 모르고 지나갈 테니까.”

    “……5년이나 함께 살았는데 더 알고 싶으신 게 있나요?”

    진저가 손등을 베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잠깐 인상을 쓰고 감탄한다든가-”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미간을 매만졌다.

    “행복하면 미소를 참기 위해 입꼬리가 내려간다든가-”

    이번엔 입꼬리를,

    “울고 싶을 땐 귀가 먼저 빨개진다든가-”

    이번엔 귓불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땐 쌍꺼풀이 진해진다든가-”

    이번에 쌍꺼풀을,

    “화가 날 땐 볼이 살구색이 된다든가.”

    이번엔 볼을 매만졌다.

    “난 당신을 알게 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행복해져.”

    엘리사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귀가 빨개지고 쌍꺼풀이 진해졌다. 그녀가 붉어진 눈시울 비비다가 그의 뻗은 손에 얼굴을 문질렀다.

    “로벨 경과 너무 친해서…… 당신이 다른 여성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냥…….”

    진저는 두서없는 그녀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해서요. 그래서 불안해요.”

    밝으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어지듯.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불안해지는 것이다. 믿음과는 별개의 의미였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어떤 매력적인 여자도 가정을 깰 수 없음 또한 알고 있다. 이 불안은 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서 오는 불안이다.

    나는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여자인가?

    나는 다른 여자보다 매력적인가?

    그에게 가장 좋은 여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부끄러워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엘리사가 시선을 내리깔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저는 한 팔로 몸을 지탱하고 갈릭을 넘어 그녀 쪽으로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더해 줘.”

    “네?”

    “더 질투해 줘.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고 싶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변하지 않아줄래요?”

    “물론이지.”

    그가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볍게 붙이며 말했다.

    “사랑해.”

    “……저도요.”

    빼앵! 불편해서 깨버린 갈릭이 징징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엘리사가 그의 얼굴을 확 밀치고 갈릭을 끌어안았다.

    진저는 아내에게 떠밀린 코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저 자식……’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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