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멀리서 처형장이 보였다. 단두대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죄인들의 처형을 외쳤다.
칼이 떨어지자 까마귀의 날갯짓 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마차 안에 있던 엘리사는 두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녀의 곁에서 어깨를 쓸어주던 진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보지 않고 갈 거야?”
엘리사 대신 인사를 전하기 위해 찾아갔던 진저는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왕비를 보아야 했다. 길면 하루, 짧으면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명을 달리할 것 같았다.
엘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사…….”
그녀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죽는 순간만큼은 왕의 여자이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어미’가 아닌 ‘여자’로 죽겠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맞아요, 거짓말이에요. 어머니는 제게 또 거짓말을 하셨어요. 두 번 이별하는 건 너무 아플 테니 나를 배려하신 거겠죠.”
“…….”
“인사 없는 이별은 벌이고 선물이에요.”
엘리사에게 모진 세월을 견디게 한 벌을 그녀는 지금 이렇게 받으려 한 것이었다.
상냥한 아내는 그 마음을 알기에 어머니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마차 밖에 있던 라골이 창을 열었다.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엘리사는 오히려 진저가 걱정이라는 듯 그의 손을 잡았다.
“루펠라를 두고 가도 되겠어요?”
“그 녀석이 바란 일이잖아. 난 더 이상 그 녀석에게 내 잣대를 들이밀고 싶지 않아.”
“잣대라니요. 걱정이죠.”
“그레닉과 함께하면 불행할 거로 생각해서 녀석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했어.”
진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제 귀찮아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커.”
“당신도 참…….”
“루펠라와 마피 부인을 왕궁에서 머물게 해줘서 고마워.”
엘리사는 출산을 앞두고 있어 그레닉을 보살필 수 없었고, 리한도 마탑의 후계로서 마지막 일을 수행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그레닉을 돌보는 역할은 파울로가 하게 되었다. 그는 엘리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며 그를 살뜰히 돌보겠노라 말해주었다.
바늘이 남는데 실이라고 떠나겠는가. 루펠라도 그가 깨어나기를 그란디아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그녀를 걱정한 마피 부인은 엘리사에게 함께 왕궁에서 지내고 싶다 청하였다.
「가장 미천한 곳에서 일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염치는 아는 사람입니다. 어찌 호의호식하겠습니까. 아가씨의 건강만 살피며 살겠습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죽은 듯이 명만 이어가겠노라 약조합니다.」
마피 부인의 말을 떠올리던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루펠라라면 할머님의 좋은 말벗이 되어줄 거예요. 마피 부인도 할머님을 도와줄 테고요. 저도 마음이 편해요.”
진저가 라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해라.”
마차 바퀴가 란델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공기가 차가웠다. 마치 엘리사가 그와 결혼하기 위해 그란디아를 벗어나던 그때처럼.
그란디아의 국경에 다다랐다. 엘리사는 국경을 지나기 전, 보이지도 않는 왕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내 이름이요. 신화에 나오는 엘리사 왕비님의 이름이에요?」
「그렇지, 그런 뜻도 있단다.」
「다른 뜻도 있어요?」
「전쟁의 끝, 그리고 새 시대의 시작이란 뜻도 있지. 어떤 역경도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강한 아이가 되길 바라서 ‘엘리사’라 지었단다.」
그웬의 마차가 그란디아의 국경을 지났다. 순간, 마차 안이 빛으로 가득해지더니 부부의 몸이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어머니와 꼭 닮은 벚꽃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엘리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쥔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랑한다, 아가야.」
엘리사도, 진저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직감하고 있었다.
리즈 왕비가 세상을 떠났음을.
* * *
5개월 뒤. 엘리사는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녀를 염려한 집사 콕스와 몇몇의 하녀, 그리고 하인들이 비밀리에 그녀의 뒤를 쫓았다.
하녀 하나가 볼멘소리로 집사에게 말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다른 하녀가 콕스 대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긴. 마님을 이렇게 화나게 할 만한 분이 누구겠어?”
그러자 이번엔 하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마님께서 임신하신 후로는 점잖아지셨다면서?”
콕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초산인 데다 아이가 나올 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해 달라 일렀는데 기어이 마님을 화나게 만들었다.
“개가 점잖아져 봤자 개지.”
놀란 콕스가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아뿔싸! 너무 답답하다 보니 진심이 나오고 말았다.
하녀와 하인들이 당황한 콕스를 쳐다보며 킬킬거렸다.
“여보!”
엘리사가 노크도 없이 남편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혼이 날 예정인 방의 주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망쳤구나!’
혼날 줄 알고 내뺀 게 분명했다. 그녀가 씩씩거리며 방을 나서려는데 창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커튼이 바람에 나부꼈다.
아주 부자연스럽게.
엘리사가 헛웃음을 흘리며 커튼 쪽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
“계속 거기 있을 거예요?”
“…….”
남자는 결혼하면 애가 된다는 귀부인들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어쩜 애보다 유치해진단 말인가.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달콤한 목소리로 그를 어르기 시작했다.
“여보.”
“…….”
“혼자서 맞는 봄바람은 달콤하지 않을 텐데?”
“…….”
“아직 추울 텐데?”
“……바람보다 당신이 더 차가워.”
커튼 사이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리사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나와요.”
“…….”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당신인데 왜 화도 당신이 내요?”
커튼이 벌컥 열리고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 진저가 나타났다.
“당신 남편이 누구야?!”
“네?”
“왜 그 새끼 편만 드냐고!”
“내가 언제 편을 들었다고……. 친구를 때린 게 나쁘죠! 세 살도 아니고 이제 곧 서른인데 이런 거 하나하나 알려줘야 해요?”
엘리사가 새초롬히 진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진저가 억울하다는 듯 셔츠를 올려 맨살을 보여주었다.
“그 새끼는 주먹으로 얻어맞았지만 나는 칼로 맞았어. 봐, 여기 상처! 아직도 남아 있잖아!”
“그럼 트리거 경이 남긴 그 상처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해 볼까요?”
진저가 입을 꾹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것을. 후회가 되었다.
그는 아내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약속이 있다면서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어?”
“트라노이 부인과 식사하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트리거 경은 왜 때렸어요?”
“그 자식이 그래? 나한테 맞았대?”
“당신과 술 마시러 들어갈 때는 멀쩡하다가 나오니까 눈이 푸르딩딩했다잖아요. 당신 아니면 누가 그분을 때려요?”
그녀가 남편의 손을 떼어 냈다. 그는 그란디아에서 란델로 돌아오며 그녀와 철석같이 약속했다. 약속은 총 세 가지였다.
첫째, 성질대로 행동하지 말 것. 남을 때리거나 죽일 일이 생기면 최소한 세 번은 생각할 것.
둘째, 아내 일에 흥분하지 말 것. 다른 의미로 밤에도 흥분은 자제할 것.
셋째, 혼자 생각하지 말 것. 거짓말은 절대 금지.
몇 번 정도 위기가 있었지만 오늘까지는 약속을 잘 지켜왔다.
엘리사가 대답 없는 그를 채근했다.
“네? 무슨 일이었는데요?”
“당신이야말로 그 자식과는 왜 만났어?”
“만나다니요?”
“더 예뻐졌다잖아. 내 여자만 아니었으면 납치하고 싶을 정도였다는데?!”
엘리사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거야 예의상으로 한 말이죠. 당신은 아내가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새끼가!”
“그러니까요. 트리거 경은 곧 결혼도 하잖아요.”
“……언제 만났어? 단둘이 만났어?”
“왕궁에서 잠깐이요. 라도르 후작의 장남과 트리거 영애가 약혼을 하나 봐요. 초대장 받는 자리가 있었어요. 경은 여동생을 데리러 왔다가 저와 잠깐 마주친 거예요.”
“약혼이라고?”
줄리아 트리거는 결국 왕세자와 파혼했다. 왕세자는 파혼하자마자 트라노이 공작부인의 사촌 동생인 쉴라와 달콤한 소문이 난 반면에 줄리아 쪽은 조용했다. 그런데 약혼이라니…….
“싫으세요?”
엘리사가 남편을 흘겼다. 진저는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약혼 소식이 반가워서 그렇지. 라도르 후작가면 큰 상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
“그래서 결혼하자마자 란델을 떠난대요.”
진저가 아내를 끌어안았다.
“당신 표정이 왜 이렇게 예쁘지?”
“뭐가요?”
“질투하는 거잖아.”
엘리사가 홱, 고개를 돌렸다. 남편이나 아내나 질투가 심한 건 마찬가지였다.
“……배고파요.”
“식사하고 오지 않았어?”
“요새는 뒤돌아서면 배가 고파요. 아이가 많이 커서 그런 걸까요?”
“당신은 아이를 갖기 전에도 란델의 디저트를 사랑했지.”
“돼지 같다는 거예요?”
“예쁘다는 거야. 내 꽃 돼지.”
“여보!”
기어이 엘리사의 입에서 고함을 뽑아낸 진저가 큭큭, 웃음을 흘렸다.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나온 진저가 아내를 찾았다. 이 시간이면 늘 침대에 누워 동화책을 잔뜩 끌어안고 있는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여보.”
그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방을 비웠나 싶어 그녀를 찾으러 나서려던 진저가 얼굴을 굳혔다. 침대 끝에 새하얀 손이 올라와 있었다.
“엘리사!”
배를 끌어안고 주저앉은 그녀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 으으.”
“엘리사!”
“소리 지르지 말아요……. 그냥 진통이에요.”
그냥 진통은 무슨. 진통은 그냥이 아니었다. 그가 사색이 되어 콕스의 이름을 외쳤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가운을 여미지 않았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헐레벌떡 뛰어온 콕스도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뭐 하는 거야! 당장 닥터를 불러!”
“다, 다, 다, 닥터! 닥터!”
아직 예정일이 남은 데다가 초산이었다. 아이가 예정일을 넘기고 나올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빨리!
소중한 후계자와 그보다 더 소중한 마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까 싶어 젊은 하녀들과 남성 고용인들이 모두 안절부절못하였다.
“다, 다, 다, 닥터가 아, 아, 아직!”
“의사! 의사!”
“이놈의 영감탱이는 언제 오는 거야!”
사내들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우니 쪽지에 적힌 것들이나 챙겨 와요.”
“팔삭둥이가 나오는 거 아냐?”
“여덟 달을 못 채워야 팔삭둥이라고 하는 거지. 아유, 정말 정신 사나워서!”
“소중한 후계자가!”
“마니임!”
보초를 서던 기사들까지 동동거리자 여성들이 나섰다.
“나가!”
“나가요, 나가!”
하녀장이 팔을 걷어붙였다. 아이를 셋이나 두고 산파로도 일한 적 있는 그녀가 능숙하게 아이를 받을 준비를 시작했다.
“마님, 진통이 온 건 언제부터입니까? 간격은요?”
방 밖으로 하녀장의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문 산파와 의사가 도착한 후 본격적인 해산에 들어갔다. 진통이 시작되고 세 시간가량을 안절부절못하던 진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엘리사가 다 죽어가잖아!”
저택에서 고함 한 번 제대로 지른 적 없는 엘리사가 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라골이 길길이 날뛰는 그를 진정시켰다.
“한 번에 나오면 그게 달걀이지 아이입니까. 다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럼 열 달 동안 뭐 한 건데? 지금껏 탱자탱자 놀다가 나올 때가 되어서야 눈, 코, 입 만들고 있는 거냐고!”
누가 보면 애 낳는 사람이 그인 줄 알 것이다. 라골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진저를 붙들었다.
“초산이라 시간이 더 걸릴 거라잖냐! 이러다 네가 죽겠어.”
“죽어? 뭐?!”
“내 말은 아이가 나오기도 전에 네가 죽겠다는 뜻이야.”
그때, 또다시 비명이 터졌다.
“아악!”
“마님, 숨! 숨 쉬셔야 해요!”
진저가 손에 머리카락을 가득 잡았다. 숨이 넘어가는 건 자신이었다. 저러다 잘못되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다.
“으, 아아!”
목소리가 다 쉰 엘리사가 삑삑 소리까지 내며 울고 있었다.
진저가 침실과 이어진 응접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주인님!”
라골과 콕스가 그를 뜯어말렸다.
“방에 들어가시면 안……!”
진저는 콕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떼어 냈다. 그리고 응접실에 있는 탁자 아래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리즈 왕비가 명을 달리하기 전, 그에게 건넨 것이었다.
「마력의 파장을 바꿀 수는 없냐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사위?」
약병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진저가 뚜껑을 열었다.
“이건 무슨 약입니까?”
진저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라골을 보았다.
“내가 낳는다.”
콕스는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고, 라골은 미간을 좁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설마 그거 몸을 바꾸는…… 야! 진저!”
말릴 새도 없었다. 진저가 약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갑자기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진저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어, 주인님!”
“진저!”
콕스와 라골이 차례로 그를 불렀다.
진저가 이마를 짚으며 작게 신음을 뱉었다.
“으…… 응?”
라골이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진저, 아니, 진저로 보이는 사람이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콕스가 그를 부축하려 손을 뻗자 라골이 얼른 콕스의 손목을 잡았다.
“잠시만요.”
“무슨 일인가? 이 약은 또 뭐고?”
라골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콕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주저앉은 사내, 아니, 사내의 몸을 빤히 응시했다.
“주인님?”
“네?”
“마님?”
“혹시…….”
라골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아내가 괴로워한다고 애를 대신 낳겠다는 놈은 처음 보았다.
엘리사가 소파를 짚고 일어났다. 이상했다. 자신은 분명 부부의 침실에서 아이를 낳던 중이었다. 멍하니 침실의 문을 바라보던 엘리사가 라골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거 설마…….”
“여기 든 약을 드시더니…….”
“이건! 기억나요. 어머니가 준 거예요.”
“허…….”
“바보…….”
두 사람은 기가 막혀 말을 이었다.
“크악!”
그때, 침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당황한 엘리사가 침실 앞으로 뛰어가 문을 두드렸다.
“여보! 여보, 괜찮아요?!”
“큭, 괜…… 찮아!”
라골은 어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와중에도 아내가 걱정할까봐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엘리사가 울먹이며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걸 왜 쓴 건데요!”
“크…… 괜찮다니까!”
“괜찮긴! 내가 해봤는데!”
엘리사가 문이 부서져라 두드렸다. 그러자 방 안에서 딱딱한 표정의 하녀장이 나타났다.
“방해됩니다.”
언제부턴가 그는 내저의 고용인들에게 ‘방해물’로 취급받고 있었다. 마님 추종자인 그들에겐 마님을 귀찮게 하는 그가 여드름보다 신경 쓰이고 귀찮은 존재였다.
“잠깐 들어가마.”
엘리사가 울먹이며 말했다. 하녀는 이 무슨 해괴한 표정이냐는 듯 인상을 썼다.
어이가 없었다. 이런 사람이 살육자니, 군신이니 하는 말로 불린다는 것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하녀장이 방 안에서 수발을 들고 있던 하녀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하녀가 웬 물병을 들고 졸랑졸랑 다가왔다.
“손 이리 주십시오.”
엘리사는 군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소독수를 엘리사의 손에 콸콸 부은 하녀가 그의 손에 분수 병을 건넸다.
“온몸에 뿌리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엘리사는 시키는 대로 옷이 흥건해질 때까지 소독수를 뿌렸다. 그리고 남편에게 달려갔다.
진저의 손을 꼭 잡은 엘리사가 히잉 소리를 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바보!”
“으윽!”
“아직 멀었나!”
엘리사가 소리치자 산파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남은 거지?”
산파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적어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기도…….”
그 말에 진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됐어, 안 낳아!”
“여보…….”
“으아아악!”
아내의 몸이 고통에 민감한 걸까. 배가 뚫릴 때보다 더 아픈 것 같았다.
‘검에 찔리면 금세 죽기라도 하지, 이건!’
“나 주, 죽는다고! 으아아아악!”
당황한 엘리사가 허둥지둥 주위를 살폈다. 도움이 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문득 트라노이 공작부인의 말이 떠올랐다.
「얼마나 아프던지 저도 모르게 남편의 머리채를 잡았어요. 부끄러워라.」
엘리사가 얼른 머리를 가져다 댔다.
“여보, 뜯어요!”
“으아아악!”
“뜯어요!”
해산을 돕던 하녀들이 멍하니 진저의 몸을 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산파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명이나 되는 아이를 받아왔지만 제 머리를 뜯으라고 한 남편은 본 적이 없었다.
“집어넣고 꺼내! 아아악!”
“예? 마님, 무슨 말씀이셔요?”
“손을 집어넣어서 꺼내라고!”
그게 말인가 방귀인가. 의사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였다.
“어어! 머리가 보여요!”
“으아아아악!”
“여보!”
“힘을 주세요! 마님, 계속 힘을 주셔야 합니다!”
난장판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엘리사가 입을 막았다.
그렇게 진저는 한 시간을 더 고생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으아아아앙!”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고추라는 말에 실망했던 것도 잠시, 아이를 받아 든 진저가 울먹였다. 엘리사가 그의 손을 잡았다.
“고생했어요. 고마워요!”
진저가 눈물을 펑펑 흘렸다. 평생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이 자식, 아버지 죽을 뻔했잖아.”
엘리사도 함께 울었다.
“흐윽, 욕은 하지 말아요, 흑. 이름은 뭐라고 할까요?”
진저가 답했다.
“갈릭.”
아이가 울음을 뚝 멈추었다. 아이는 눈도 뜨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불만스러워 보였다.
* * *
엘리사, 아니, 진저의 출산 후 세 달이 지났다. 란델, 그란디아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란디아에서는 왕을 대신해 소피아 왕태후의 수렴청정이 이뤄지고 있었다. 초반엔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왕궁은 강경했다.
성국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교황 후계로 일컬어지는 파울로가 소피아 왕태후의 집권을 용인했다. 엘리사 공주 부부 또한 그녀의 집정을 물심양면 도왔다.
란델 역시도 왕세자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트리거 가와의 파혼 후 잠시 휘청하였으나 새로운 약혼녀의 도움으로 강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
그웬 가는…….
“빌어먹을.”
진저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거울 속에 벚꽃색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미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출산 후 아내의 몸에 변화가 있었다. 임신 전보다 더 마력의 조절이 힘들었다. 그래서 몸은 시도 때도 없이 바뀌었다.
파울로와 리한은 반년은 지나야 제대로 마력을 운용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내의 침대에서 일어난 진저가 침실 문을 열려다가 아래를 내려 보았다. 막 일어난 터라 슬립 차림이었다. 진저가 아내의 육아를 돕느라 내저에서만 생활했기에 기사와 가신들의 출입이 잦았다.
다른 놈들이 아내의 몸을 보는 건 참을 수 없다. 그는 세수도 안 한 상태로 내저용의 미니멀한 드레스만 입고 아내를 찾았다.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다 챙겨 입고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 하녀가 갈릭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왔어요?”
엘리사의 몸을 한 진저가 방에 들어오자 하녀가 갈릭을 안고 총총 방을 나섰다. 진저가 아내와의 시간을 방해하는 걸 몹시 싫어했기 때문이다.
진저는 그녀의 여상한 태도를 보고 왈칵 얼굴을 구겼다.
“왜요?”
“몸이 바뀌었잖아.”
엘리사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다른 때였다면 진저도 그녀와 같았을 거다. 평소처럼 옷을 입고, 평소처럼 서로의 일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만은!
“우리 자기로 한 날…… 웁!”
엘리사가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하녀들이 복도 청소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들으면 어쩌려고 큰 소리로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그녀의 몸으로.
“우우웁, 우웁, 우웁!”
진저가 격렬히 항의했다.
이렇게 참다가 고환이 펑 터질지도 모른다. 복장과 함께.
진저가 그녀를 흘겼다. 하지만 엘리사의 몸에 들어간 탓에 무섭기는커녕 귀여웠다. 엘리사가 픽 웃으며 손을 내려놓았다.
“달거리를 하려는 것 같아요.”
“애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다들 6주면 다시 달거리를 시작한대요. 그것 때문에 마력이 들쑥날쑥한가 봐요.”
몸이 바뀐 건 고의가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속에서 천불이 난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달거리가 시작…… 달거리?’
달거리를 한다. 아내는 달거리 때엔 손도 대지 못하게 한다. 그럼 난 독수공방?!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저는 당황했다. 몸이 바뀌는 횟수가 많아진 만큼 기간은 짧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본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달거리가 터져 버리면 열흘은 꿈도 못 꾸잖아.’
“달거리 때는 달거리 때만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없어요!”
엘리사가 미간을 좁힌 채 소리쳤다.
“제게도 안 좋고, 당신에게도 안 좋아요. 그게 위생상 얼마나 나쁜데요. 절대 안 돼요.”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더는 조르지 못했다. 다만 슬픈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 * *
진저가 욕조에 턱을 괴었다.
아내는 갓난아이인 아들과 떨어지길 바라지 않았다. 아이를 낳은 후로 잠귀가 얼마나 밝아졌는지 모른다. 아주 조그만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 아들을 찾았다.
그런 그녀에게 매달려서 겨우 잡은 일정이었다.
진저는 아쉬움에 벽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약하게.
아내의 몸을 상하게 할 순 없었다.
그가 등을 기대며 아래를 내려 보았다. 아이를 낳은 뒤로 가슴이 커져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로도 짙은 골이 생겼다.
그가 가슴을 쥐었다.
쥐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온다. 이런 몸을 가지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건 반칙이 아닌가.
자신이 가슴을 주무를 때면 어김없이 달콤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젖꼭지를 지분거리다 입에 물면,
「흐으응, 진저…….」
아내 쪽에서 먼저 보채게 되는 것이다.
진저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몸은 어디를 건드리든 톡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배꼽 주변을 배회하던 손이 물에 젖은 수풀을 매만졌다. 수풀조차 부드러운 여자였다.
만지다 보니 점점 신이 난다. 생각해 보니까 아내의 몸으로 자위를 한 일은 없었다. 20년이 넘도록 아내의 손에서 가꿔진 몸.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해면체가 곧추설 만큼 예민하다.
진저는 검지를 세워 음핵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숨이 가쁘고 머리가 지잉 울린다. 아내의 몸도 자신만큼 애가 탄 걸까.
벌써부터 동굴 입구가 벌름거리고 있었다. 어서 안을 휘저어주길 바라는 듯.
검지가 비좁은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질 내 주름들이 석 달 만에 침입자를 몰아내려는 듯 달려들었다.
“흐으, 흑.”
욕실인 탓에 흘러나온 신음이 메아리친다. 그동안 아내가 얼마나 신음을 참아왔는지 알겠다. 예민한 몸은 제 손가락을 받아내는 것만으로도 잔뜩 흥분했다.
진저는 손가락으로 내부를 긁어냈다.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혀를 길게 늘려 입술을 핥았다. 조금 더 긴 것, 조금 더 굵은 것이 필요하다.
두 번째 손가락이 들어갔다. 첫 번째 손가락이 질펀하게 놀아준 덕에 충분히 젖어 그전보단 아프지 않았다.
“큽, 크흑!”
여성의 몸은 놀라웠다. 남성일 때와는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보, 오래 걸리시나요? 음식이 식을 것 같은데…….”
“크흡!”
대답 대신 신음이 터졌다.
“여보?”
“아흐, 큭.”
손짓이 점점 빨라졌다. 더, 더, 더! 요망한 우물은 손목이 저려오는 데도 더 빨리, 더 강하게 내부를 자극하길 원한다.
“무슨 일 있어요?”
아내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윽!”
“여보…… 혹시…….”
쾅쾅. 그녀가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뭐 하는 거예요? 여보!”
목소리는 걱정에서 당황, 또 기막힘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손장난에 빠진 그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한 손으로 우물 내부를 휘젓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첨벙첨벙. 물장구 소리가 커졌다. 백옥 같은 피부는 붉게 물들었고, 허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으흑, 크!”
질내가 바르르 떨리는 것과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엘리사는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진저를 노려보았다.
진저는 풀이 죽었다. 아내에게 한 시간을 빌었는데도 화를 풀어주지 않았다.
“우리는 부부니까…… 몸 정도는 마음대로 만져도…….”
쾅! 엘리사가 찻잔을 거세게 내려놓았다. 진저가 흠칫 엉덩이를 등받이에 바짝 붙였다.
“그래서 목소리가 울리는 욕실에서 그걸 해요?”
“…….”
“아랫사람이 들었으면 어쩌려고!”
“미안…… 응?”
뭔가 이상하다.
“침실 문을 잠그지도 않고!”
이상하다.
“하녀더러 당신에게 내 말을 전하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혹시 들었으면…….”
진저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화난 이유가…… 내가 당신 몸을 만져서가 아니라…….”
“다 벗고 목욕도 하는데 만지는 정도야 뭐 어때요!”
진저가 실실 웃었다. 아내는 의외로 화통한 면이 있었다. 그가 아내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음엔 철저히 준비해서 할게.”
“……약속이에요.”
그가 픽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 맞췄다.
* * *
끼이익.
침입자는 조심스레 침실로 들어왔다. 벚꽃색 머리칼의 주인이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내고 몸 위로 올라탔다. 벚꽃빛 머리칼의 주인, 그러니까 진저는 눈살을 찌푸렸다.
목가가 간지러웠다. 몸을 뒤척이자 목가를 간지럽히던 것이 가슴께로 내려갔다.
누가 감히 제 침실에 들어온단 말인가. 진저 그웬 다 죽었군. 침입자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다니. 이불 속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단번에 목을 꺾으려.
그런데 왜 이렇게 주먹이 가벼운 기분인가. 그제야 제가 몸이 바뀐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아내의 몸이니 기척에 둔감할 수 있었다.
아내의 몸?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발!”
그의 입에서 걸쭉한 욕이 튀어나왔다. 어떤 겁을 상실한 놈이 감히 내 아내의 침실을!
그가 눈을 부릅떴다. 사방이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침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창안으로 푸른빛이 들어왔다.
붉은 머리칼, 붉은 눈동자.
“엘리사?”
그는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진저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악몽이라도 꾼 걸까. 얼마나 무서운 꿈을 꾸었기에 아들이 아닌 자신을 찾았단 말인가.
그가 픽 웃으며 협탁을 더듬거렸다. 리한이 선물한 마력 전구의 스위치가 손에 걸렸다. 스위치를 누르니 빛이 들어왔다. 아내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무슨 장난…… 응?”
아내는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옷이 아닌 샤워 가운을 걸치고 한 손엔 마르코스 향유를 들고.
순간 기막힌 상상이 들었다.
설마 나를 덮치려고 온 건가?
그럴 리 없다. 아내가 얼마나 순진하고, 관계에 수동적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엘리사가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향유병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오늘 하기로 한…… 날이니까…….”
“뭘?”
“그거요.”
“그건 몸이 바뀌어서 못…… 설마.”
엘리사가 턱을 목 안으로 넣었다. 진저의 눈이 커다래졌다.
“내 몸에, 그러니까 내 항문에 뭔가를 집어넣으라고?”
아무리 진저라도 그건 무리다. 진저가 경악하자 엘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당신에게…….”
컥. 사래가 들 정도로 놀랐다. 이게 무슨 기막힌 소리란 말인가.
엘리사가 슬쩍 진저의 몸을 더듬었다. 제 몸이니만큼 어딜 만지면 좋은지 줄줄 꿰고 있었다.
진저가 그녀를 저지하려 손목을 붙들었다. 하지만 남자의, 정확히는 남자 육체의 악력을 이길 수 없었다.
엘리사는 한 손으로 가볍게 그를 제압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꾸물꾸물 손을 얽었다.
“싫어요?”
시무룩한 표정의 제 육체를 보는 건 고역이다. 진저가 ‘당연하지!’ 하고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그런데 왜 말이 안 나오는 걸까.
정말 콩깍지가 쓰인 것 같았다. 제 육체 위로 아내의 시무룩한 표정이 그려졌다.
엘리사가 휴,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것저것 가르쳐 준다고 하셔 놓고선…….”
“아니, 그건!”
아내 앞에서 스스로 자위를 해서 부끄럽게 한다든가, 어딜 만지면 느끼는지 실험을 해본다든가 하는 것이다. 결코 제 육체의 곤봉을 집어넣고 하응아응 신음하는 건 아니었다.
‘역지사지가 되긴 할 거야.’
제가 얼마나 아내를 원하게 되는지, 싫다고 거절할 때면 얼마나 속이 타는지 알게 될 터였다.
진저가 끙 앓는 소리를 뱉자 엘리사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녀의 바람도 그것이었다. 섹스는 좋긴 하지만, 힘들다. 남편은 힘이 좋아서 두 번만 해도 다음 날 허리가 아팠다. 그보다 횟수가 많으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지기 일쑤.
이 기회에 인내를 가르쳐 줄 생각이다.
엘리사는 조심조심 진저의 잠옷을 단추를 풀었다. 본래의 육체일 때는 귀찮다면서 홀딱 벗고 자는데, 제 몸일 때면 단추를 꼭꼭 다 잠갔다.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엘리사가 배실배실 웃으며 단추 풀기에 집중했다.
진저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될 대로 되라. 사실 아내가 얼마나,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하긴 했다.
진저는 누운 채로 움직여 베개에 등을 기댔다.
막상 자리를 깔아주는 부끄러운지 아내가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결심한 듯 입술을 꾹 깨문다.
그녀의 입술이 가슴에 다가왔다. 남편은 언제나 가슴을 핥는 것으로 관계를 시작했다. 엘리사가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갈릭이 하듯 쪽쪽 빨았다.
푸후, 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왜, 왜요?”
“간지러워서.”
몸이 바뀔 때면 아내를 대신해 갈릭에게 모유를 먹였는데, 오늘도 내내 아이에게 가슴을 물려주었다. 아내는 갈릭보다도 약하게 가슴을 빨았다. 아프기라도 할 까봐 잔뜩 긴장한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안 아파. 살짝 물었다.”
엘리사가 이를 세워 젖꼭지를 깨물었다.
“윽, 그건 좀 아파.”
그러자 강아지처럼 유륜을 할짝거린다.
허리도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애무가 아니라 정말 딱 주무르는 것이었다.
진저는 ‘아, 시원하다’ 하고 농담을 할까 하다가 아내의 얼굴을 보고 말을 삼켰다. 나름대로 정말 열심이었다.
엘리사가 진저를 힐끗거렸다.
자신은 남편의 손이 닿기만 해도 동굴이 습해졌는데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왜일까.’
제 몸인 건 매한가지인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약간 심술이 난다.
엘리사가 등허리에서 엉덩이 골로 이어지는 부분을 슬슬 매만졌다.
“흐…….”
드디어 제대로 된 신음이 터졌다.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남편이 하던 것을 떠올리며 다시 가슴을 물었다. 그녀는 입안 가득 가슴을 물고 혀로 핥아주는 게 가장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남편의 흉내를 내보았는데 효과가 괜찮았다.
진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달뜬 숨을 뱉었다.
가슴은 이 정도면 되었나. 확인을 위해 가랑이 사이로 손을 넣었다.
검지와 중지로 음부를 벌렸다. 손가락으로 동굴 주변을 톡톡 건드렸다. 애액으로 촉촉했다.
“벌써 하려고? 나 아직 다 안 젖었는데.”
분명 제 목소리인데 섹시하게 느껴진다.
남편의 몸은 촉감보다 청각에 예민한 걸까. 그녀도 슬슬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람한 성기가 발기하며 가운을 조금 들췄다.
진저의 손이 가운 안으로 쑥 들어왔다.
“흐읏!”
그가 성기를 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는 귀두를 연신 문지른다.
“계속 움직여야지.”
진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아내가 움직이지 않자 직접 손을 잡아서 가슴 위에 올려둔다.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며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후우.”
진저도 한숨을 흘렸다.
엘리사는 이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제 몸일 때처럼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리라. 그녀가 그의 양다리를 잡고 활짝 벌렸다.
진저가 크게 당황하여 눈을 홉떴다. 자세가 바뀐 바람에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완전히 제압당한 꼴이었다.
묘한 굴욕감과 흥분으로 몸이 뜨거웠다. 엘리사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은 진저를 승리자의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두고 봐.”
“볼 새를 주지 말아야겠어요.”
“무슨 뜻이야?”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뜻.”
엘리사가 손등으로 배꼽 주변을 쓰다듬었다.
“당신을 황홀하게 해줄게요.”
엘리사가 음핵과 음순을 입안에 가뒀다. 그리고 유두를 빨 듯 강하게 흡입했다.
“하응!”
진저가 엘리사의 머리를 잡았다.
비겁하다! 음핵을 핥기만 해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기 싫다고 버둥거렸으면서, 더한 걸 자신에게!
“아으응! 아앙!”
제가 낸 신음이라곤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진저가 허리를 마구 비틀었다.
아내가 왜 이것을 그리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느껴져서 괴로울 지경이었다.
“아앙, 아앙!”
그녀는 자비가 없었다. 복수라도 하듯 미칠 것 같은 부분만 공략했다. 후룹, 애액을 삼키기까지 하며.
잠시 입을 떼고 말로 공격하기도 했다.
“벌써부터 줄줄 흐르는 걸요? 제겐 참을성 없다시더니.”
“비, 비겁…… 아흥!”
되받아칠 틈을 주지도 않고 공격한다.
입안에서 혀로 음핵을 탁탁 때렸다. 진저는 거의 자지러졌다.
그녀가 입을 뗐을 때는 늘어져 헉헉 거친 숨만 흘리고 있었다.
가랑이가 애액으로 질펀하게 젖었다. 바르르 경련하기까지 한다. 엘리사는 만족감에 씩 웃었다.
남편은 이미 황홀경이었으나 그녀는 이것으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애무를 30분이 넘도록 하던 그다. 앙앙 울면서 애원해도 멈추질 않는다. 푹 젖어서 제 것이 쑥 들어가야 한다며.
엘리사가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 성기를 쥐었다. 음부에 비비니 축 늘어졌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다시 경련한다.
“흐, 아앙!”
엘리사가 애액을 줄줄 흘리는 우물을 파고들었다. 단숨에 퍽! 쳐올리자 진저가 발끝을 활짝 펼쳤다. 눈가의 핏줄이 터질 듯 팽창했다.
찔꺽찔꺽.
그래도 첫 방아는 견딜 만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힘이 세지기 시작했다.
진저가 애원했다.
“천천히, 아흑! 천천…… 엘리사!”
“아앙, 아앙!”
아내는 제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눈을 깍 감고 허리만 거세게 흔들 뿐. 그가 느끼는 두 번째 황홀경을 아내 또한 느끼고 있었다.
“악! 제발, 엘리사, 제…… 아아앙!”
둘 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신음을 흘렸다.
진저는 아내의 인내에 크게 놀랐다. 이렇게 음란한 몸이었던가! 그간 잠자리에서 그녀가 얼마나 점잖게 행동한 것인지 깨달았다.
엘리사도 놀랐다. 성기는 애무를 할 때부터 발기해서 어서 넣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런데 그걸 30분이 넘도록 참다니.
“아아, 좋아! 아으응!”
여자로서 느낄 때만큼, 아니, 어쩌면 더 큰 쾌감이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편이 애원을 해도 허리가 느려지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조종하는 것처럼. 그녀는 남편을 참을성 없다고 평가했던 자신을 꾸짖었다. 진저는 대단했다.
“아앙!”
“앙!”
앙앙 소리만 낼 수 있는 짐승이 된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네 번이나 사정했다. 앞으로 두 번, 뒤로 한 번, 서서 한 번.
진저는 해가 뜰 무렵이 돼서야 그녀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을 걸어 다니지 못했다.
엘리사는 울면서 그를 간호했다.
* * *
10년 후.
그웬저가 소란스러웠다. 하녀들이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뛰어다녔다.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세요?!”
오늘은 엘리사가 마탑주로 등극하는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아이 참, 어디에 숨으신 거람…….”
“무슨 일이냐.”
“주인님!”
하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십 년이 흘렀어도 변함없이 황홀하게 생긴 진저가 들어왔다. 그는 그간 경험이 더 쌓여 이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란델의 4공이자 그웬의 가주가 되었다.
“곧 출발할 시간인데 도련님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안사람은?”
“단장을…….”
진저가 미간을 좁혔다.
아들인 갈릭은 리스트럼(란델의 수도)에서 유명한 엄마 바보였다. 마탑주가 되면 전보다 더 바빠져서 자신과 놀아주지 못할까 봐 식을 치를 수 없게 숨어버린 게 분명했다.
아들이 숨을 장소야 뻔했다. 진저가 재킷을 내려놓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아내의 집무실에 들어간 진저가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자 책상 아래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오지?”
“……가기 싫어요!”
“그래? 그럼 혼자 저택에 남아 있어라. 어머니가 서운해할 텐데. 울겠지?”
“…….”
“내겐 좋은 일이군. 네게 서운해서 오늘은 나와 잘 테니.”
갈릭이 튀어나왔다.
“안 간다더니?”
“어머니랑 못 자는 건 더 싫어요…….”
진저가 마뜩잖다는 듯 콧잔등을 실룩였다. 이 녀석은 누굴 닮아서 제 엄마라면 껌뻑 죽는단 말인가.
진저와 갈릭이 엘리사의 집무실에서 나오던 때였다.
“으아아앙!”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로즈!”
“로즈다!”
아비와 아들이 똑같은 포즈로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어쩌나. 오늘은 추워서 모자를 꼭 써야 하는데. 로즈, 엄마 부탁 들어주면 안 될까?”
그녀가 아기를 다정하게 어르자 아기가 입술을 삐죽였다.
“로즈!”
“로즈!”
그웬 부자가 방에 뛰어들었다.
“엄마, 나요! 내가 안을래요!”
“아니야, 내가 안을 거야!”
“어제 아버지가 안았잖아요! 오늘은 내 차례예요!”
“씁.”
진저가 아들을 위협하듯 입소리를 냈다. 갈릭이 제 엄마를 쳐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엄마아…….”
“여보!”
“…….”
로즈를 안아 들었던 진저가 아들에게 아이를 건넸다. 갈릭은 신이 나서 로즈를 껴안았다. 아직 힘이 없어 제대로 안지 못하지만 로즈는 오빠가 좋은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우우! 귀여워!”
부럽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저가 쳇, 혀를 찼다.
“이 녀석 오늘 나가기 싫대.”
그가 아내에게 아들의 잘못을 고자질했다.
“네?”
“아아! 그게 아니라아……. 아빠 나빠!”
진저는 고소했다.
“하녀들을 고생시켰어.”
“그랬어?”
풀이 죽은 갈릭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엄마가 나랑 안 놀아주니까…….”
“그랬구나. 엄마가 옛날에 리한 아저씨와 약속한 게 있어서 꼭 마탑에서 일을 해야 해…….”
“알아요. 나쁜 마녀 물리치게 도와줬잖아요.”
“그럼 이건 어떨까? 우리 아들이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숙제도 열심히 하면 일주일에 두 번, 엄마랑 마탑에 가는 거야.”
갈릭의 표정이 환해졌다. 반면에 진저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난?!”
“당신은 안 되죠. 할 일도 많은 사람이.”
“마탑에선 일 못 해? 마탑에서도 할 수 있어.”
“억지 부리지 말아요. 갈릭, 로즈 모자 좀 씌워줄래?”
“네!”
오빠가 모자를 씌워주니 울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사이좋은 남매, 귀여운 남편. 행복하기 그지없는 나날이었다.
“로즈와 내려가 있으렴. 금방 내려갈게.”
“나 로즈 안고 계단 못 내려가는데…… 위험한데…….”
난간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는 아이가 동생 일엔 뭐든 걱정부터 했다. 엘리사가 웃으며 라골을 쳐다보았다.
“삼촌!”
엘리사의 부관이 된 그는 마탑의 사무총장으로 작위를 얻게 되었다. 이제 고용인이 아닌 파트너가 된 것이다. 라골이 웃으며 로즈를 안았다.
“같이 내려가자.”
“네!”
라골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아들을 본 진저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 나보다 라골을 더 좋아하잖아.”
“당신이 매일 고자질을 하니까요. 괴롭히기도 하고요.”
“사랑해서 그렇지. 사랑해서.”
그는 이제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엘리사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제가 라골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잖아요. 그걸로는 안 돼요?”
“돼.”
엘리사가 남편의 팔짱을 꼈다.
“어서 가요. 루펠라도 시간 맞춰 온다고 해요.”
“곧 결혼식이지?”
“다음 달이요.”
엘리사와 진저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문을 나섰다.
* * *
루펠라가 그웬 부부와 갈릭, 로즈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곁에 가면을 쓴 남자가 함께 있었다.
사람들이 루펠라를 보며 수군거렸다.
“그란디아에 있었다면서요?”
“아직까지 결혼도 안 했대요. 무슨 실수를 했길래 그란디아로 쫓겨나 있었는지…….”
“기사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잖아요. 뭐, 그것도 잘못됐는지 다른 사람과 다음 달에 결혼한다네요.”
“저분 말이에요? 누구신데요?”
“그란디아 왕태후의 양자래요.”
“오늘내일하던 노인네가 오래도 살아 있네요.”
여자들이 깔깔, 천박하게 웃었다.
“왕 대신 섭정도 한다는데요, 뭐. 신관들이 딱 붙어서 건강관리를 해준다잖아요.”
“그때, 그 사건 때문이죠? 애첩의 역모 때 신관들이 연루되어 있었다고.”
“그런데 왕태후의 양자라니요? 그럼 왕족이란 소리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 왕태후의 가문에 후계가 없대요. 그래서 양자로 가문을 잇게 하려나 봐요.”
“잘 잡았네요.”
“뭐, 루펠라 양도 그만큼 대단한 가문의 영애니까…….”
마차에 탄 채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마피 부인이 픽 실소를 흘렸다.
저 사내가 깨어나던 날을 기억한다.
「어떻게 된…… 루펠라? 영애입니까?」
「고마워해. 교황께서 매일같이 당신에게 마력을 나눠주었으니까. 언니와 리한도 해마다 왔었어.」
「이상해. 네가 너무 많이 달라졌어.」
「세월이 변했으니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완전히 어른이 된 그녀가 기억 속의 소녀와는 전혀 다르게 웃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린 거야?」
「하루에 세 번. 당신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다고 만 번쯤 생각했지.」
십 년 동안 한결같이 그를 기다렸다. 누구에게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직 그만을 바랐다.
「그럼 내 진심이 증명된 건가?」
그레닉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거다.」
그녀가 그의 볼을 꼬집었다.
「왜 반말이야?」
「뭐?」
「이제 내가 당신보다 세 살이나 많다고.」
그레닉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피 부인이 눈을 감았다. 그간 왕태후의 은혜로 신관들에게 치료를 받아왔다. 매일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루펠라에게 숨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녀도 루펠라만큼 그가 깨어나길 소망했다. 마음 놓고 떠나기 위해서.
루펠라가 갈릭을 끌어안았다. 엘리사와 진저가 행복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마피 부인이 축 늘어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세상을 떠났다.
마차의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리한의 조부인 전대 마탑주가 엘리사에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마탑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목걸이였다.
“훌륭하셨습니다. 앞으로도 훌륭하실 거라 믿습니다. 마탑과 란델을 위해 애써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엘리사가 먼 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계승식의 최대 이벤트인 새로운 마탑주의 ‘힘자랑’만이 남았다.
엘리사가 불꽃 비를 내리기 위해 손을 펼쳤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산 근처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지 못하도록 삼엄한 경비를 섰다.
“엄마아! 크게! 크게!”
“꺄우!”
“언니! 크게 해주세요!”
갈릭과 로즈, 루펠라가 소리쳤다.
‘크게? 그럼…….’
전에 시험해 봤던 마법을 써야겠다. 엘리사가 웃으며 손가락 끝에 힘을 집중했다. 갑자기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어?!”
“이게 무슨!”
하늘에서 운석 같은 커다란 것이 보였다. 운석이 불에 타며 산 쪽으로 내려왔다.
쿠궁!
“꺄아아악!”
“으악!”
운석은 정확히 산에 직격했다. 멀리서도 보이는 커다란 구멍이 만들어졌다.
놀란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이게 아닌가……?”
광장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진저와 라골이 목소리를 낮추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래도 되는 거냐?”
“몰라, 인마.”
“대단하시네. 부부 싸움은 절대 안 되겠다. 절대 대들지 마. 정말 죽는다.”
진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소에도 까불진 않지만 이제 절대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아무도 그웬에 까불지 못하겠군.”
진저의 말에 라골이 속삭였다.
“폐하 표정 봤냐?”
진저가 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색이 되어 있었다.
픽 실소를 흘린 그가 아내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 * *
외로운 유년을 보낸 두 아이가 자라 서로를 만나 치고받고 싸우며 사랑을 완성했다.
사랑의 증거가 된 두 아이는 자라 란델의 공작이, 그리고 그란디아의 여왕이 되었다.
“죽을 때도 한날한시에.”
“평생 사랑했듯, 다음 생에도.”
부부가 손을 맞잡으며 미소 지었다.
“사랑해요.”
“사랑해.”
레이디 비스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