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레이디 비스트
3주 후, 레이라 부인의 측근이 모두 지하 감옥에 구금되었다.
백성들은 레이라 부인과 두 딸을 마녀라 부르며 엘리사의 이름 앞에 영웅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성국에선 교황의 사과문과 함께 고위 신관을 보내 이 일에 연루된 신관들을 방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그란디아의 왕, 아데울리는 반역만큼은 치외법권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국과 그란디아의 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들을 중재한 건 교황의 후계로 내정된 파울로였다.
왕은 주모자인 벅과 레이라 부인의 명을 받아 일기를 해석하던 신관, 케이트만을 그란디아에 넘겨받기로 하고 다른 이들은 성국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성국에 넘어간 이들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라는 확답을 받았다.
성국은 면을 세워준 아데울리에게 보답하기 위해 레스칼포네족의 기록에 대한 열람권을 주고, 군사 자취권을 일부 돌려주었다.
특히 왕이 신관들을 위협할 수 없도록 왕도의 기사 수를 제한한다는 항목을 완전히 삭제했다.
왕이 성국과 협상하는 동안 진저와 엘리사도 바삐 움직였다.
진저가 엘리사와 루펠라가 곤욕을 치르는 동안 내궁에 들어올 수 없었던 까닭은 거스터 후작과 게티 백작이 변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작과 백작의 주장은 달랐다. 레이라 부인이 기사를 동원한 것에 놀라 잠시 고민을 할 시간을 벌었을 뿐이지 엘리사와 진저를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그날의 곤욕은 기실 그웬 부부에겐 좋은 일이었다. 거스터 후작과의 거래가 공중분해 된 격이었다.
후작은 딸이 왕비가 될 기회를 놓친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가 진정 통탄하는 건 또다시 그란디아의 권력을 손에 쥘 기회를 단 몇 시간 때문에 놓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두뇌 회전이 빠른 자였다. 지금은 숨을 죽이고 엘리사의 처분을 기다리는 게 그와 가족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건 게티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내가 아니었으면 그웬 공작의 일은 성공하지 못했다’며 ‘레이라 부인은 내 군이 그들의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순순히 체포된 거다’라 외치고 다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진저가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바빴다면 엘리사는 왕비의 일기장을 해석하느라 바빴다.
리한이 일기장이 들어 있는 자물쇠 함을 해제해 주었다. 루펠라를 살린 것부터 일기장을 해제해 주는 것까지 대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불가한 일이었다.
큰 은혜를 입었다고 거듭 인사하는 그녀에게 리한은 말했다. 마탑의 후계가 되어준다면 이보다 더 귀찮은 일도 할 수 있다고. 그동안 그가 어떻게 후계로 지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리한과 파울로, 그리고 엘리사가 머리를 맞대고 일기장을 해석했다. 리즈 왕비가 남긴 두 권의 책은 엘리사만 읽을 수 있었기에 그 오랜 시간 동안 신관들마저 해석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어머니는…….”
볼멘 목소리에 파울로와 리한, 그리고 진저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는 시인이 되셨어야 했어요.”
일기를 모두 시처럼 써서 뜻을 해석하고 책에서 마법의 종류나 레스칼포네의 역사를 찾아 대입시키는 게 어려웠다.
파울로가 픽 웃었다.
“남의 손에 일기가 들어갈까 봐 저어한 것이겠지요.”
“알죠. 답답해서 하는 말이에요.”
그녀는 곤란해 보이는 파울로를 보고 눈꼬리를 사르르 접었다.
“이쪽도…… 봐줘…… 요…… 말 꼬리에…… 매달려…… 인어처럼…… 헤엄치고…… 싶…… 오…….”
“싶오?”
진저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사와 리한, 파울로는 대답지 않고 열심히 책만 넘기고 있었다.
“15페이지에……. 아, 바다에 떨어진 천마, 이걸 말하는 것 같아요.”
“이건 해석이 쉽게 되는군요.”
“저번 주에 보았던 수플레 먹궁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었다가 최고로 힘들었어요.”
진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먹궁이라니, 먹구름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궁, 그러니까 한 대륙의 ‘사주’를 알아봐야 해서 정말 까다로웠잖아요.”
“전…… 오골계는…… 오골오골…… 하고 울어서 오골계인가……가 가장 어렵습니다…….”
파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직도 확신을 가질 수 없죠.”
진저는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길 포기했다.
그들은 해가 저물고 나서야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진저가 책을 정리하고 있는 엘리사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엘리사가 인상을 쓰며 그를 돌아보았다.
“배 만지는 건 싫어요.”
그는 투정을 부리는 아내의 입술에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제 싫다는 말도 잘하는군.”
“당신이 가르쳐 줬잖아요. ‘싫다’, ‘밉다’, ‘화가 난다’ 같은 말들이요.”
“미운 적도 있었나?”
“그럼요.”
“언제?”
“줄리아 트리거 때?”
그가 제발 잊어달라는 듯 아내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아이가 태어나면 다 일러줄 거예요.”
“내가 잘못했어…….”
진저는 그가 지상 최대의 강적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그 강적에게 도무지 이길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숄을 챙겼다.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 되었다. 이제 겉옷 없이 나가면 쌀쌀했다.
“어디 가려고?”
“감옥에 내려갔다가 루펠라를 보러 가려고요. 오늘도 밥을 안 먹었대요…….”
“……그 녀석을 보는 게 괴로울 텐데.”
“루펠라만 할까요.”
엘리사가 진저의 뺨을 쓰다듬었다.
“후회가 돼요. 이럴 줄 알았다면 루펠라의 사랑을 좀 더 확실히 응원할 걸…… 하고.”
진저가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였다.
“당신도 그런가요?”
“이래서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건가?”
그가 아내의 허리를 쓰다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마저도 루펠라가 걱정되었다. 이러다 자진이라도 할까 봐 걱정되어 아침저녁으로 그 녀석을 찾기까지 했다.
혹시 몰라 기사들에게 번을 정해 감시하라 명했지만 사실 그도 그 방법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루펠라가 떠나려 한다면 뜯어말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또한 아내를 잃었다면 삶의 의욕을 잃고 죽음만을 좇았을 테니까.
“감옥엔 왜? 레이라 부인을 보려고?”
“일기가 거의 다 해석되어가니까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충격을 받을까 봐 걱정돼. 당신도 그렇고, 아이도…….”
엘리사는 제 배 위에 있는 진저의 손을 양손으로 덮었다.
“남편이 지상 최고의 악당인데 이 정도로 겁을 먹을까 봐요?”
“가면 갈수록 대단해져.”
“최고의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 아이가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나도 노력하라는 뜻이야?”
“믿어달라는 뜻이에요.”
그녀가 남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남편과 대화를 끝낸 엘리사는 지하 감옥을 찾았다. 몇 주간의 고신으로 피와 살이 썩어들어 가는 냄새가 지독했다.
헬렌은 입은 가리고 토기를 참는 엘리사를 보더니 간수에게 접견실로 죄수를 끌고 오라 일렀다.
레이라 부인이 양 손목과 발목에 족쇄를 주렁주렁 매달고 접견실에 들어왔다. 간수가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해 상처가 난 곳에 물을 뿌렸는지 비 맞은 생쥐 꼴이었다.
엘리사가 싸늘한 눈으로 꿇어 앉혀진 레이라 부인을 노려보았다.
기력을 잃었으면서도 눈빛만은 강렬했다. 엘리사를 당장 찢어 죽이고 싶다는 눈빛을 본 헬렌이 간수를 향해 손을 올렸다.
철썩!
채찍에 맞은 레이라 부인이 넘어져 헐떡거렸다.
“이, 이……!”
그녀는 혀를 깨물 수 없도록 재갈을 물려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재갈을 풀어라.”
“하지만 공주님…….”
“자진할 생각이었다면 벌써 옛날에 했겠지.”
“으으으!”
“나는 너보단 자비로운 사람이야. 지금 혀를 깨물어 죽겠다면 말리지 않으마.”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 보라는 뜻이었다. 그녀가 그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평생 그녀와 겨뤄온 엘리사는 알고 있었다.
레이라 부인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간수가 가죽으로 된 재갈을 풀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너를……! 네년을!”
“아직도 헛된 꿈을 꾸느냐? 양팔과 다리가 모두 잘려나갈 텐데……. 헬렌, 어제는 누가 고신을 못 이기고 죽었다고 했지?”
“비앙카의 시체를 개에게 던져주었습니다.”
그제야 레이라 부인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내일은 네 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군.”
“너는, 너는 나보다 더 잔인한 계집이야. 그래도 나와 내 딸들은 너를 고신하고 죽이진 않았어! 네가 우리와 뭐가 다르단 말이냐! 주변의 동정을 사려 착한 척, 여린 척……!”
“진정 착하고 여렸던 적도 있지만…… 네 말이 맞아. 난 이제 그런 사람이 아니야.”
“하!”
“당신이 나를 마녀로 만들었으니까.”
“마녀의 딸이니 마녀가 될 수밖에!”
그녀는 여전히 리즈 왕비에 대한 분노를 버리지 못했다. 고신이 시작되고 나서도 폐하를 뵙게 해달라 절규했다니 왕에 대한 마음만은 진심인 것 같았다.
“죄를 모두 토설하면 비상을 내어주마.”
“자결하게 해주겠다고?”
“노예로 살게 되겠지만 네 딸들도 살려줄 거야.”
“내가 죽는데 클라우디아와 필리아의 목숨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레이라의 딸들에게 동정이 생길 정도였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폐하는 너를 죽일 마음이 없으시다.”
레이라 부인의 눈에 희망이 비췄다.
“양팔, 양다리를 잘라 광장에서 한평생 빌어먹고 살게 하고 싶다셨지.”
희망은 순식간의 절망으로 바뀌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레이라 부인이 픽, 실소를 흘렸다.
“넌 나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
“언제고 또다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는 자가 나타날 거다. 그때도 넌 널 구원해 줄 사람을 소망할 거야. 지금의 네가 너 홀로 아무것도 못 했듯이 미래의 너 또한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그녀는 마치 저주를 내리듯 조악한 말을 주절거렸다. 헬렌이 그녀를 향해 채찍을 내려쳤으나 그녀는 비명조차 흘리지 아니하고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네가 무엇을 했느냐?”
“…….”
“네 남편이 사람을 모았고, 그 멍청한 평민 계집이 날 무너뜨릴 증거를 찾았다.”
“…….”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듣지 마세요, 공주님. 마녀의 헛소리일 뿐입니다.”
헬렌이 말했다. 엘리사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레이라 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진 게 아니야.”
“…….”
“네 어미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네 어미는 네 아비에게 평생 벗지 못할 멍에를 짊어지게 했어. 네 아비는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지. 사랑 때문에 딸을 방치했다. 그는 여전히 그렇게 자위하고 있을 거야. ‘난 어쩔 수 없었어. 사랑하는 여자를 되살리고 싶었어. 딸은 착한 아이니까 날 이해할 거야’ 하고.”
“……가여운 사람.”
엘리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타인에게 그런 사람일 뿐이다. 착한 아이! 그래서 지켜줘야 하는 아이!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언제나 배신당할 거다. 착한 아이란 모두를 이해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도 좋아.”
레이라 부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배신당하고, 빼앗기고, 종내엔 갈기갈기 찢어져도 좋다.”
“뭐?”
“남편을 만나기 전의 난 당신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죽을까 봐서, 내가 죽은 뒤 아무도 내 이름을 기억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미래를 두려워했던 거지.”
“너도 폐하와 똑같아. 그렇게 스스로를 자위하는 거야!”
“훗날 당신의 말처럼 후회하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한들 현재를 버리진 않을 거야.”
레이라 부인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어깨를 파들파들 떨었다.
“당신이, 또 다른 사람들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대도 좋아. 내 사람들은 알아. 내가 달라지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노력했다는 것을.”
“…….”
“아니, 내 사람들조차 몰라도 괜찮아. 내가 아니까.”
“간악한 계집. 그렇게 너를 속이고 있구나.”
“모두 내가 했어. 내가 바뀌었기에 남편이 나를 그란디아에서 구해주기로 했고, 그로 인해 마피 부인이 바뀌었어.”
처음 란델에 갔을 적의 그녀라곤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변화했다. 남편이 자신을 버릴까 봐 그를 향한 마음을 죽이려 노력했고, 감히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울타리가 생겼기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고, 그녀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지키고 싶은 것도 생겼다. 남편과 남편의 사람이자 자신의 사람, 그리고 아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던 레이라 부인에게 맞섰다.
그녀가 레이라 부인을 끌어내리기 위한 계획을 짰다. 마탑주가 되도 좋다고 말했기에 리한이 그란디아에 와주었다. 그래서 게티 백작이 군사들이 집결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
거스터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하우벡 부대와 카르트가의 병사들을 그란디아 내로 들여 보내준 건, 그의 딸이 필리아에게 모욕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은 나비의 날갯짓과 같았다. 결국 태풍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엘리사가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필리아에게 지지 않았으므로 생긴 태풍이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대전을 포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레이라 부인이 이처럼 맥없이 구금될 일도 없었다.
엘리사는 진심으로 진저를 사랑했다. 그랬기에 진저 또한 그녀 없는 삶이 가치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엘리사가 예전처럼 훗날을 두려워했더라면 그가 자신을 키워준 여자에게 그리 단호히 ‘비열하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바뀌었기에 진저와 루펠라가 한 점 바래지 않은 투명한 애정을 주었다. 그러했기에 마피 부인은 엘리사가 제 자식들에게 필요할 만큼 강한 여자임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레이라 부인의 목소리를 마영석에 담았다.
레이라 부인은 엘리사에게 두려움 그 자체인 여자였다. 엘리사는 두려움을 이겼다.
‘그래, 모두 내가 했어.’
엘리사가 치맛자락을 꾹 말아 쥐었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녀는 레이라 부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거다.”
“망할 계집…….”
레이라 부인의 눈이 붉어졌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순간, 엘리사가 레이라 부인으로부터 진정한 승리를 쟁취했음을.
* * *
지하 감옥에서 궁으로 올라온 엘리사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헬렌은 내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사가 머쓱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예?”
“자꾸 그렇게 보니까 민망하잖아…….”
우뚝 걸음을 멈춘 헬렌이 실소를 흘렸다.
“어쩜 이렇게 변하셨을까 싶어서요.”
“뭐?”
“마력은 공주님께서 더 강하신데 진정한 마법사는 각하신가 봐요. 마법처럼 공주님을 변화하게 했으니까요.”
엘리사가 쑥스러운 듯 입술을 달싹였다. 헬렌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두 손을 모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주님.”
“응?”
“무덤까지 가져가려 했습니다. 그분께서도 공주님께서 이 일을 아시길 원치 않으시니까요. 저 또한…….”
엘리사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왕태후 전하를 찾아주십시오.”
“할머님을……?”
“공주님께서 저를 구해주셨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클라우디아와 필리아가 헬렌의 등을 다트판 대신으로 쓰려 했던 그때, 엘리사가 나서주었다.
“저는 그날, 두려움에 공주님을 외면했습니다. 어린 공주께서 저로 인해 더럽고 어두운 곳에 갇혀 비명을 내지르는 데도요.”
“너도 어렸으니까.”
“아니요. 저는 어리지 않았어요. 폐하께 달려가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가 두려워 나서지 못했습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그날, 공주님을 구해주신 분은 왕태후 전하세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라면 조모가 병마에 쓰러져 눈도 뜨지 못할 때였다.
“제게 리즈 왕비님의 비밀의 방을 매일 정리하라 명하신 분 또한 왕태후십니다. 그리고…….”
“뭐?”
“리즈 왕비님의 일기장을 레이라 부인에게 전해준 사람 또한 그분이십니다.”
엘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왕태후의 방엔 어떤 향냄새가 배어있었다. 이건 ‘죽어가고 있는 냄새’였다. 그녀는 왕태후의 목숨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헬렌이 협탁에 놓인 향의 불을 껐다.
“10분 정도면 일어나실 겁니다.”
“병마가 아니었나? 일부러 잠재워두었던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전하께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엘리사가 깡마르고 주름진 왕태후의 손을 잡았다. 손이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거칠었다.
왕태후가 정정했을 적에 그녀의 손에선 늘 보드랍고 좋은 향기가 났다.
왕태후의 무릎은 언제나 엘리사의 차지였다. 모후는 엘리사가 말썽을 부릴 때면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했는데 조모만은 그녀가 무슨 말썽을 부려도 늘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감싸주었다.
밤이면 조모의 무릎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듣고, 달콤한 캐러멜을 먹었다. 양치하지 않는다고 어머니에게 혼이 날 거라 칭얼거리면 귀한 손으로 직접 양치를 시켜주기도 했다.
레이라 부인이 궁에 들어온 후로는 왕태후의 방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방을 찾는 날이면 더 호된 곤욕을 치러야 했으니까.
잠든 조모를 보고 있으면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늘 그녀의 방문에 기대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자신을 다정히 불러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런 날을 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자신은 불행한 아이라 조모의 명줄을 짧아지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엔 그녀의 방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후로는 레이라 부인이 엘리사가 왕태후의 방에 들어갈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다.
그래서 그란디아에 돌아오고도 그녀를 찾지 못했다.
엘리사가 그녀의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궁금한 게 많았다. 왜 그러셨어요? 왜 어머니의 일기장을 레이라 부인에게 주셨어요? 할머님도 제가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왜 저를 구해주지 않으셨어요? 당신의 아기는 이제 태에 아이를 가지고 있을 만큼 컸는데 어째서 일어나지 않으시는 거예요?
엘리사가 그녀의 이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고 있던 때였다. 머리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왔다.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는 손. 이 손이 누구의 것인지 엘리사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아가.”
“…….”
원망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울음소리를 억누르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녀는 돌아왔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아가…….”
“……흑.”
“네가 온 것을 보면 끝이 났나 보구나.”
“할머님…….”
왕태후가 낮게 웃었다.
“내 생의 마지막 도박이었지. 나는 너에게 걸었단다.”
두 눈에 물기가 어려 조모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왕태후가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왜…… 어째서 레이라 부인에게 일기장을 주었나요?”
“그 계집이 있는 한 귀족들은 왕의 숙부에게 모이지 않을 테니까.”
왕태후 소피아는 철혈의 여제로 불렸다. 어린 왕비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을 잃고 아들을 대신해 수십 년 동안 그란디아를 다스렸다. 모두 소피아를 레이라 부인에 지지 않는 악녀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아들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먹이를 주고 그들이 먹이를 취하는 동안 그녀는 정치를 했다. 결코 폭정은 아니었다.
아들과 손녀에게 왕비의 일기장을 건네주면 그들은 나라를 버리고 오직 아내와 어미를 되찾으려 들었을 터였다.
그래서 레이라 부인이 필요했다. 소피아의 입장에서 레이라는 필요악이었던 것이다.
“레이라는 정치를 모르지. 성장한들 귀족과 왕족, 집권세력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태생적 한계지.”
“종조부라면 제가 상대할 수 없었을 거란 뜻인가요?”
“왕이 정신을 차리고 있고, 지금의 네가 돕는다면 어렵지 않은 상대였을 거다.”
“그럼…….”
“왕은 당시 리즈를 잃고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녀를 되살려야 한다는 목적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왕좌에서 내려왔겠지. 그리고 왕의 숙부, 그자는 왕과 너를 살려두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레이라 부인은 달랐다. 그녀에겐 왕이 필요했고, 왕을 얻기 위해 엘리사 공주를 죽일 수 없었다. 소피아는 한눈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왕을 사랑하고 있음을.
“아가야, 홀로 그 오랜 시간을 버티게 해서 미안하구나.”
“…….”
“약하고 보잘것없어진 늙은이가 너의 발목을 잡게 될까 봐 그간 네게 언질을 주지 못했다.”
“할머님…….”
소피아가 엘리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엘리사가 그녀를 일으켜 주자 헬렌이 물을 가져왔다.
소피아는 헬렌이 가져온 물로 입술을 축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야, 내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단다. 그러니 서둘러 일을 진행하렴.”
“예?”
“네 어미를 깊은 잠에서 깨워야지 않겠니.”
엘리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레스칼포네족의 마지막 후손인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내 목숨을 매개로 네 어미에게 숨을 돌려주어라.”
엘리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한참 대답이 없던 엘리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게 왜 이리 잔인하세요.”
“아가야, 내가 어찌 네 마음을 모르겠니.”
왕태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손이 곧 힘을 잃을 것처럼 앙상하게 메말라 있었다.
“네 이름은 내가 지었단다. 먼 옛날, 건국왕의 축복과 같았던 그녀처럼 너도 우리의 축복이 되기를 바라며 네 이름을 지었어.”
“…….”
“나는 이제 지쳤다. 너무 오랜 세월을 버텨냈어. 이제 할미의 눈을 감겨다오.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조모이냐, 모친이냐는 선택 앞에서 누군들 제정신일 수 있으랴. 엘리사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 * *
루펠라를 보러 간 엘리사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하녀가 스푼을 그녀 앞에 놓아주지 않았다면 두 여자는 말 한마디 나눌 수 없었을 터였다.
엘리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루펠라의 손에 스푼을 쥐여 주었다.
“조금만이라도요.”
“…….”
“루펠라.”
루펠라는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했어요.”
“네?”
“언니를 원망했어요. 언니와 결혼한 오빠도 원망해 봤고요.”
엘리사가 그녀에게 뻗으려던 손을 이내 말아 쥐었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언니 탓이라고, 또 오빠 탓이라고 그렇게 원망을 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더라고…….”
“내 탓이에요.”
“내가 그란디아에 오겠다고 고집만 부리지 않았어도, 언니에게 상의하지 않고 레이라 부인만 찾아가지 않았어도 그 여자가 나를 노릴 일은 없었어요. 다, 다 내 탓이에요.”
“그러지 말아요…….”
“그런데 나는 숨 쉬고, 자고, 먹고 잘만 살고 있어. 그의 목숨까지 빼앗은 내가…….”
루펠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레닉은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그래서 자신을 거절했던 걸까. 자신은 결국 그의 인생에 흠이었을 뿐일까.
루펠라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상해요, 언니.”
“…….”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나. 속 시원하게 소리치고 싶은데…… 안 돼.”
“루펠라…….”
“벌 받는 걸까요? 울 자격도 없어서 울 수 없는 거야?”
“…….”
“아, 언니 제발…… 제발…….”
루펠라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약속할 수 있어요. 맹세할게요! 그 사람이 돌아오면 나 더는 욕심 내지 않을 거예요. 평생 홀로 살라면 그렇게 할게요! 대신 죽으래도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언니 제발!”
“루펠라, 그만해요! 밖에 사람 없어요? 들어와요!”
엘리사가 발작하듯 온몸을 할퀴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아, 언니 그 가여운 사람을 내가!”
하녀들이 뛰어들어왔다. 그녀들은 루펠라의 손목을 묶고 재갈을 물렸다.
“뭣들 하는 짓이야!”
놀란 엘리사가 저지했으나 하녀들과 함께 들어온 마피 부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만 자진 시도가 두 차례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입을 막았다.
“진정제가 돌 때까지는 묶어놓아야 합니다.”
“다치지 않게…… 잘…….”
“제가 함께 있겠습니다.”
엘리사가 배를 끌어안았다. 큰 충격을 받아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감싼 것 같았다. 루펠라에게 주사를 놓은 마피 부인이 엘리사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복도에 나서니 겨우 마음이 진정되었다.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앞으로 아가씨를 찾아오지 마십시오.”
“저는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마탑을 지지하던 란델이 언제부터 성국의 영향을 받았습니까? 성마 전쟁으로 삶이 피폐해진 이후입니다. 사람은 힘들 때 종교를 찾습니다. 강한 힘을 동경하고, 영웅을 갈망하죠. 마님은 아직 잠재력이 밝혀지지 않은 분이십니다. 마탑의 후계와 성국의 후계 두 분이 모두 공을 들이는.”
“…….”
“마님이 오시기 전까진 루펠라 아가씨께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모르시겠습니까? 마님은 루펠라 아가씨의 희망이자 절망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피 부인이 자리를 떠났다. 엘리사는 그 자리에 굳어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희망이자 절망…….’
한참 복도의 찬바람을 맞고 있던 그녀에게 라골이 다가왔다.
“마님.”
“아, 네. 무슨 일 있나요?”
그는 리한이 그녀를 찾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무슨 일 있어요?”
“일기에서 새로운 것을 해석하신 모양입니다.”
“그는 어디에 있죠?”
“방에 계시면 모시겠습니다.”
“아니에요. 내가 갈게요.”
라골은 곤란한 듯 뒷머리를 매만졌다.
“시체 안치실에 있습니다.”
“네?”
“주인님께서 그레닉의 장례를 란델에서 치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체가 썩지 않도록 시간을 멈추었는데 까다로운 데다 마법이 잘 풀리는 모양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경께서 시체 안치실을 찾으셔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레닉이 칼에 찔린 뒤 바로 리한이 나타났다고 했다. 하지만 리한은 그레닉에 대한 어떠한 말도 없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기에 그저 죽은 줄로만 알았다.
「레스칼포네족인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네 어미의 숨을 돌려놓아야지 않겠느냐.」
‘어쩌면…….’
엘리사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라골이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를 불렀으나 엘리사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시체 안치실을 찾은 엘리사가 몸을 움츠렸다. 성 안인데도 한겨울 같았다.
리한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깨를 움츠린 엘리사를 보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붉은빛이 그녀를 감쌌다. 2, 3분쯤 지난 뒤에는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리한.”
“무슨…… 일이…… 십니까…….”
“물을 게 있어서 왔어요.”
“말씀…… 하세요…….”
“혹시 그레닉이…….”
엘리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자신은 자신 때문에 그레닉이 죽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 망상을 하는지도 모른다. 망자를 기만하는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작…… 부인……?”
“아, 그게…….”
엘리사가 양손을 맞잡았다. 지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예전의 바보 공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시간을 멈췄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혹시 그레닉이 죽지 않은 건가요?”
리한은 한참 그녀를 쳐다보았다. 행동이며 말이 굼뜬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더 답답했다.
“맞습니다…….”
“지금 치료를 한다면……!”
“루펠라에게…… 이번 일은…… 말씀하지 마십시오.”
“네?”
“루펠라는 또다시 연인이…… 죽는 순간을…… 봐야…… 할 테니까요. 치료할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기사의 혼을…… 높이 사…… 장례만은 가족이 치를 수 있도록…… 멈춰 둔 것뿐입니다.”
엘리사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렇군요…….”
“공작부인의 탓이…… 아닙니다.”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는 말을 믿지 않았어요.”
“예……?”
“그런데 각하와 결혼한 뒤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네요. 그레닉도…… 그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찾아올 텐데. 그의 행복을 빼앗은 기분이에요.”
리한은 그레닉을 알고 있었다. 루펠라와의 소문이 워낙 유명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진저와 지지고 볶던 어린 시절에 그와 자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언할 수 있었다.
“이 바보는…… 지금 가장…… 행복할 겁니다. 그의 인생에서 제일 솔직했던 순간이었을 테니까요.”
엘리사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 * *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는 시녀인 재스민과 한방에 갇혀 있었다.
필리아는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를 듣고 철장에 달라붙었다.
오늘 죄수의 밥 당번은 재스민과 사이가 좋지 않은 시녀, 레나였다. 레나는 던지듯 물그릇과 퍽퍽한 빵을 내려놓았다.
필리아가 철장 밖으로 손을 뻗어 레나의 발을 붙잡았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어머니는? 거스터 후작은 어떻게 하고 있어?!”
“후작 영애에게 모욕을 줘놓고 그 아비 되는 자의 도움을 바라는 거야? 하여간에 이렇게 염치가 없다니까. 네가 어떻게 되냐니. 잘해야 ‘끽’이지.”
레나가 턱밑으로 선을 그었다.
“뭐야?! 여기서 나가면 네년 손모가지를 잘라주마.”
필리아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자 레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철장 안에 손을 넣어 필리아의 머리채를 잡았다.
“악!”
“아직도 공주 노릇 하고 싶나 본데, 그냥 일찍 죽여 달라고 빌어. 노예가 되면 죽는 것보다 괴로울 테니까. 네년들에게 이를 가는 사람이 몇인 줄 알아?”
“아악! 이거 안 놔?!”
“왕궁 시녀들은 돈을 모아서라도 네년을 사야 한다고 아우성이야. 네년이 부운 물에 데인 상처가 아물지 않았어!”
레나가 팔을 걷어붙여 필리아가 낸 화상 자국을 보여주었다. 필리아의 머리채를 한참 흔들던 그녀는 구석에서 다리를 끌어안고 있는 클라우디아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네 언니보다는 낫다. 네 언니는 감히 그웬 공작을 탐냈다면서? 매춘부의 딸년이 주제도 모르고 공주 행세하더니.”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레나를 쏘아보는 눈빛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넌 네 매춘부 어미의 피를 진하게 타고났나 보더라. 사내놈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던데? 귀족 놈들은 모였다 하면 색노로 사들이려 난리라더군.”
“……그 입 다물어.”
“아, 공주님께서 두고 보지 않으시려나. 너희의 ‘놀이방’에서 그랬듯이 손톱 밑에 못을 박고, 살가죽을 벗겨서 불로 지질지도 모르지.”
새파랗게 질린 필리아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레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필리아가 재미있는지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곱게 털어놔. 그래야 곱게 죽지. 너희는 죽는 게 낫다니까?”
“입 닥쳐!”
클라우디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레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친구라던 것들은 너희와 엮이기라도 할까 봐 어서 처리해 달라고 청원서까지 보낸다는데.”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혀를 찼다.
“그러게 잘 좀 살지.”
마지막까지 놀리듯 팔랑팔랑 손을 내저은 레나가 사라졌다.
필리아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제 어떻게 해! 난 사형도 싫고 노예로 팔리는 것도 싫단 말이야!”
“시끄러워!”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재스민이 필리아의 뺨을 내려쳤다.
“이게 다 너희 때문이야!”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고 알랑방귀를 뀐 건 너잖아!”
필리아와 재스민이 서로 머리채를 잡고 뒹굴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 할 때는 마음 한구석 내어줄 수도 있다고 하던 남자가 제 신세가 이렇게 변하니 한 번을 찾아오지 않았다.
엘리사, 그 망할 계집은 이제 마음 놓고 그의 품에 안길 터였다. 그 장면만 상상하면 토악질을 참을 수 없었다.
클라우디아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난 대신관에게 가는 통로로 너희를 이용했을 뿐이야! 내게 그런 짓을 시킨 건 너희잖아!”
재스민의 말에 클라우디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 대신관이 있었어.’
그녀는 아직 대신관이 엘리사의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자는 어떻게 잘 피한 모양이지? 그자만 잘 이용하면 역전시킬 수 있을 거야.’
클라우디아가 주머니를 뒤졌다. 혹시 몰라 구금된 후에 감춰두었던 고가의 액세서리가 있었다.
신관장은 예배 도중에 쭈뼛쭈뼛 나타난 노병을 보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신상 앞에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도와주십쇼.”
이유 모를 말에 그제야 신관장이 노병을 쳐다보았다.
그는 뇌물 수수로 궁에서 쫓겨나게 될 뻔하였으나 신관장 파울로의 도움으로 말단에 남은 자였다.
“또냐?”
파울로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염치없는 작자인 줄은 알았다만 이토록 기가 막히게 굴 줄은 몰랐다.
“신관들과 알력싸움에서 져 암살당할 뻔한 파울로 님을 제가 구했습니다.”
“그건 네놈을 궁에 남게 해준 것으로 갚았을 텐데.”
“노모에 어미 없는 자식들까지 줄줄입니다. 파수장도 아니고 말단 졸개로 노모에 자식새끼들까지 다 먹일 수 있겠습니까?”
한숨을 내쉰 파울로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지 말해야 도와줄지 말지 결정할 것 아냐!”
“노모의 생신이 다음 달입니다. 생신에도 빵 쪼가리를 먹일 순 없어서…… 받았는데…….”
“무얼?”
“간수 놈에게 얼마를 받았습니다.”
“한심한 놈.”
그가 혀를 차며 노병을 위아래로 훑었다. 젊어서도 손버릇 때문에 신세를 망치더니 나이 들어도 변하지를 않는다.
“돈을 쓰고 나서 보니 준 놈이 달리 있었습니다.”
“누구기에?”
“그게…….”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었다. 파울로가 노병을 닦달했다.
“클라우디아.”
“뭐라?!”
“아, 저도 그 계집이 준 줄은 몰랐습니다. 구금되며 패물을 숨겨놓았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이미 받은 데다 다 제 손으로 그 계집의 보석을 처리해서…….”
클라우디아가 가지고 있는 보석이라면 평민은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고가일 터였다.
“가라.”
“파울로 님!”
“자매의 추국이 당장 사흘 뒤다. 입을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리하고 싶지도 않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역적의 뇌물을 받았습니다. 드러나면 죽은 목숨이 아닙니까. 이 목만 떨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노병이 파울로의 다리에 매달렸다. 이런 놈도 생명의 은인이라고 궁에 남겨 놓은 자신이 한심했다.
“내가 무얼 어떻게! 레이라 부인과 관련된 자는 공주님께서 친히 관리하고 계신데…….”
“파울로 님만 뵙게 해준다면 입을 다물겠답니다.”
노병의 손을 떼어내던 파울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클라우디아가 그를 왜 찾는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클라우디아는 파울로의 속내를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레이라 부인과 관련된 자들은 아직까지 죄를 실토하지 않았다. 역모에 연관된 만큼 토설하면 가문이 몰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앙카처럼 드러내어 죄를 지은 자들이야 살을 저며서라도 고문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달랐다.
아무리 레이라 부인을 잡아들였다 한들 직접적인 증언 없이 귀족들까지 벌하진 못했다. 무엇보다 긴 세월 동안 귀족들이 왕권을 짓누르고 있었다.
연관되지 않은 다른 귀족들도 그때를 회상하며 호시탐탐 왕권을 노릴 게 분명했다.
노병을 떼어낸 파울로가 급히 엘리사와 진저를 찾았다.
엘리사에게 죽을 먹이고 있던 진저가 난데없는 방해꾼의 등장에 혀를 찼다.
오랜만에 아내와 한갓진 시간을 보내나 했더니 오늘도 글러 먹었다. 아내는 남편이 떠준 죽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운지 얼른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무슨 일이신가요?”
파울로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식당에 있다는 말에 온다 간다 말없이 찾았더니 민망한 장면을 보고 말았다.
진저의 무릎에 앉아 있던 엘리사가 일어나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다. 진저는 아쉬운 듯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지만 아내를 잡진 않았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연히 긴한 말이겠지.”
진저가 말했다. 아니면 죽일 수도 있다는 듯 살벌한 말투였다.
일이 많아 신경을 잘 못 썼는데 아내는 여전히 입덧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오늘은 좀 먹나 했더니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네가 다 망쳐 버렸다.
“여보…….”
엘리사가 진저의 팔을 톡, 건드렸다. 파울로에게 그리 사납게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말씀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판을 뒤집을 수 있겠습니다.”
“네?”
“귀족들에게서 사병을 빼앗고 그란디아의 군을 새로 구축할 기회입니다.”
엘리사와 진저가 시선을 교환했다.
파울로는 노병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들에게 전했다. 파울로의 이야기를 들은 부부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귀족들을 찍어 누를 수 있겠군. 클라우디아의 입에서 나오는 자들은 반항 한 번 못하고 잡혀 올 거다.”
“맞아요. 그리고…….”
레이라 부인의 힘은 귀족들에게서 나왔다. 그녀를 사형시킨다 해도 귀족들은 다른 구심점을 만들 터였다.
진저가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한 놈만 팬다고 그게 복수야?”
“네?”
“난 애초에 당신을 괴롭게 하던 놈들을 모두 박살을 내려 그란디아에 온 거라고.”
“귀족들도 봐주지 않겠다는 건가요?”
“당연하지.”
남편의 오만한 말을 들은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 * *
엘리사는 진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왔다.
왕태후와 루펠라, 그리고 클라우디아까지 복잡한 일이 너무나 많았다.
라골이 지쳐 보이는 그녀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데요.”
엘리사는 힘없이 웃었다. 진저가 아내 대신 라골에게서 차를 받았다.
그가 아내에게 찻잔을 쥐여 주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엘리사가 찻잔을 쥔 채 한숨을 흘리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코앞에 다가갔다.
“제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마력을 지닌 여자의 남편이잖습니까.”
“그래서요?”
“마님과 매일 함께 자다 보니……읍.”
“이 사람이!”
엘리사가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라골에게 부끄러웠다. 진저는 지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입에서 떼어냈다.
“그 잠 말고 다른 잠 말입니다.”
엘리사가 민망한 표정으로 찻잔만 매만졌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까 신비한 능력이 생겼다는 거죠.”
“무슨 능력인데요?”
“마님 심중의 고뇌가 보입니다.”
남편이 자신을 마님으로 부르는 것도, 어색한 존댓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가 아내의 뺨을 매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짐은 나눠 지자.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순 없어?”
그녀도 많이 바뀌었지만 그녀 못지않게 그도 많이 바뀌었다. 처음의 사나운 기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다정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 제겐 둘 다 너무 소중한데…….”
“그럼 하지 마.”
“안 할 순 없어요. 저밖에 못 하는 일이라.”
“그래도 하지 마.”
“네?”
진저는 그녀가 왕태후의 방을 찾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고뇌는 십중팔구 왕태후와 관련된 일일 터였다.
“하지만…….”
“그걸 왜 당신이 해야 해?”
“저밖에 못 하는 일이니 제게 부탁을…….”
“당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란 건 중요하지 않아. 당신이 하고 싶은지가 중요하지.”
“…….”
“그리고 단어 선택이 틀렸어.”
“네?”
“그건 부탁이 아니라 강요야.”
남편의 단호한 말에 엘리사는 픽픽 실소를 흘렸다.
“나쁜 분은 아니에요…….”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부탁할 수 있지. 부모가, 또 형제가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 나도 그럴 거야. 우리의 아이가 사내놈이면 아주 많은 강요를 하게 되겠지. 부모니까.”
“……딸이면요?”
진저가 ‘윽’ 소리를 내며 가슴을 쥐었다. 엘리사를 닮은 아이가 제 손을 잡고 쫑쫑 걷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팠다.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진저가 말이 없자 그녀가 남편의 어깨를 찰싹 내려쳤다.
“딸이라고 마냥 예뻐하면 어떡해요.”
“사내놈이길 빌고 있어.”
“딸이 더 예쁠 거라면서요?”
딸이 태어나면 두려워서 잠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세상엔 위험한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딸을 다른 놈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울화가 치밀었다.
사내놈은 좀 빼앗겨도 좋았다. 아니, 가져가라고 보따리를 싸서 넘겨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럴 수 있다고. 나도 내 아들놈이 강하게 컸으면 좋겠고, 결혼을 빨리했으면 좋겠고, 당신에게 덜 들러붙었으면 좋겠으니까.”
“정말…….”
“딸이라면 결혼을 안 했으면 좋겠고.”
조언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위로가 되었다.
“선택은 자식의 몫이라는 거죠? 부모는 방향을 제시할 뿐.”
“당신 마음 가는 대로 해. 하기 싫으면 하지 마. 폐하시라도 당신에게 강요를 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또 폐하의 멱살을 잡으려고요?”
진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난 세상에 무서운 게 없었는데 지금은 둘이나 생겼어.”
“뭔데요?”
“당신이랑 당신의 아버지. 이상하게 당신 아버지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
결국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멱살은 못 잡겠는데…….”
“그런데요?”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정도는 뭐.”
천하의 진저 그웬이 누군가에게 매달린다니. 엘리사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처음엔 아내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흐느끼고 있었다. 그가 당황하여 아내의 턱을 잡았다.
“엘리사.”
“흐흑.”
“왜? 무슨 일인데? 그렇게 심각한 문제야?”
“아니요…….”
“그럼?”
“너무…….”
엘리사가 남편을 끌어안았다. 그를 안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너무 행복해서……. 루펠라는 연인을 잃었고, 할머님은 저와 어머니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계셨는데 나 혼자 행복한 게 미안해요…….”
진저가 아내의 코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라골이 까치발을 들고 뒷걸음질 쳤다. 란델에서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신호의 키스였다.
슬금슬금 방을 나온 라골이 죄 없는 벽을 걷어찼다.
누가 신혼 아니랄까 봐 시도 때도 없이 애정 행각이었다.
* * *
클라우디아는 애타게 간수를 기다렸다. 가진 보석을 모두 쥐여 주었는데도 며칠이 지나도록 답이 없었다.
그녀가 불안한 듯 손을 꽉 맞잡았다. 이 일까지 잘못되면 정말 죽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어머니 쪽도 방법이 없는 거야. 그러니 아직도 연락이 오지 않지.’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모든 게 다 끝나는 걸까. 불안함에 몸서리치던 클라우디아 앞에 보석을 받아간 간수가 나타났다.
“당신!”
간수는 주변을 살피더니 철장을 열어주었다. 함께 있던 필리아와 재스민이 자신도 풀어달라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필리아가 클라우디아를 붙잡았다.
“언니, 너만 나가는 거야?!”
“입 좀 닫고 있어. 방법을 마련해 올 테니까.”
“혼자 도망갈 수도 있는데 내가 언니를 어떻게 믿어!”
재스민이 필리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리는 도망가 봐야 사람 구실 못하고 살아. 다시 역전시켜야 해.”
“어떻게?!”
“아직 파울로가 있잖아.”
재스민과 필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예배당을 찾은 클라우디아는 오만한 표정으로 파울로를 노려보았다.
“줄을 잘못 타셨어요.”
클라우디아의 말에 파울로가 코웃음을 쳤다.
“제가 말입니까?”
“배에 구멍이 뚫려 침몰하는 줄 아신 모양인데 파울로 님이 타신 그 배, 구조선이 아닙니다.”
파울로는 말없이 입꼬리를 늘였다.
“가진 보물을 모두 다른 배에 남겨두었는데 땅에 발을 디딘다 한들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본론만 말씀하십시오.”
“신께 속한 몸으로 색욕을 탐했으니 천벌을 받으셔야죠.”
결국 그것이었나. 레이라 부인을 속이기 위해 하녀들과 관계를 맺는 척한 일. 그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약점이 잡힌 체 레이라 부인을 속일 수 있었으니까.
‘약삭빠른 생쥐도 잡게 되었고 말야.’
파울로는 난처한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제가 도움 될 일이 있을까요? 공주님의 눈을 피해 영애를 피신시키는 건 무리입니다만.”
“알아요.”
“그럼 무얼 원하십니까?”
파올로가 소매 속에 손을 넣어 마영석을 매만졌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요? 어머니께서 입을 함부로 놀려 끌려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쉬이 말할 것 같아요?”
“그럼 어찌 원하는 바를 이르신단 말씀이십니까?”
“저와 계약해요. 목숨을 건 계약을.”
파울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 몸에 ‘그리온다의 낙인’을 찍어주세요.”
“마탑에서 쓰는 마법입니다. 신관의 몸으로 이단의 낙인을 찍으라니요!”
“그 정도 약점은 잡아야 안심을 하죠.”
“……이미 색욕을 탐했단 것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걸 증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도 압니다.”
그녀를 노려보고 있던 파울로가 두 손을 올렸다.
“좋습니다. 제가 영애를 얕보았군요.”
“지금 당장 낙인을…….”
“그리온다의 낙인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에요. 생명력을 마력으로 바꿔 단 한 번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게 하는 금단의 마법이죠.”
“자진하실 셈입니까?”
클라우디아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어차피 그녀는 바닥을 길 수 없는 처지였다. 차라리 혼까지 모두 바스러질지라도 통쾌한 한 방만은 날리고 싶었다.
“제겐 더 이상 남은 수가 없어요. 엘리사 그란디아를 죽이고 저를 궁지로 몬 그 남자에게 복수할 거예요.”
클라우디아의 말에 파울로의 목울대가 꿀렁 움직였다.
* * *
‘그건 부탁이 아니라 강요야.’
남편의 말이 맞다. 그녀는 더 이상 착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늘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그래, 남편처럼 말이다.
엘리사가 숨을 크게 들이켜고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었다. 그녀가 시종장에게 눈짓하자 알현실의 문이 열렸다.
왕은 자신을 찾은 딸이 반가운지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그래, 할 말이 있다고?”
부왕은 모후를 사랑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자식과 백성들까지 저버리게 만들었다.
“무엇이든 괜찮으니 개의치 말고 말하려무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남편을 잃었다면 그랬을 테니까.
부왕은 엘리사와는 견줄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 마음은 함께한 시간만큼 견고해졌고, 그녀를 그리던 시간만큼 탁해졌다.
가엽지 않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었다.
“이리 앉거라.”
그녀는 의자를 향해 손을 뻗는 부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약속을…… 약속을 지켜주세요.”
왕은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그 약속에 리즈 왕비가 연관되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은 들어줄 수 없다지 않았느냐.”
“…….”
“돌아올 것이다. 네 어미가 내게 그리 약속했어.”
“……보내주세요.”
딸의 얼굴에 그 옛날의 리즈 왕비가 겹쳐졌다.
‘낳게 해주세요.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어머니의 딸로서 청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제 당신의 여자가 아닌 이 아이의 어미이고 싶어요.’
“어머니를 누구보다 훌륭한 여성이었다고…… 내내 그리 생각할 수 있도록…… 폐하.”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아니, 맞을 거예요. 이 아이 목소리 한 번 못 듣고 죽을 수 있어요. 그래도 전…….’
“부디 절 어머니의 딸로 남게 해주세요.”
‘이 아이의 어미로 남게 해주세요.’
왕이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너희 모녀는 짐에게 잔인해.”
마른세수를 하던 그가 헝클어진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나이가 들었어도 섬세해 보일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폐하께서 선택하셔야 합니다. 어머니를 배웅할 수 있는 건 폐하뿐이에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왕은 엘리사의 어깨를 잡고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설마…….”
“…….”
“설마 해독한 거냐?”
“…….”
“그 사람의 일기를 해독한 거야?”
“…….”
“엘리사! 짐이 묻지 않느냐! 내가!”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불어진 눈으로 힘을 주어 엘리사의 어깨를 흔들었다.
“돌아올 수…… 있는 거겠지?”
“폐하…….”
“엘리사!”
왕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나를 속이지 마라. 너는 모른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너는 절대 몰라!”
“제발 폐하…….”
왕의 눈 속에 보이는 그건 광기였다. 엘리사가 두려움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언제? 어떻게? 역시 너만이 더냐? 너만이 그 사람을 깨울 수 있는 거지? 무엇이 필요하느냐? 모든, 모든 다 해줄 것이다.”
“……저는, 저는 안 할 거예요.”
“뭐?”
“누군가의 목숨으로 어머니를 살리지 않을 거예요.”
왕의 동공이 떨렸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엘리사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어미를 살릴 수 있다면 사람 한둘이 무슨 상관이냐.”
“……싫어요.”
“누구 목숨이 필요하기에? 죽어 마땅한 자들은 차고 넘쳤다. 부모의 재산을 탐내 패륜을 저지른 자들도 많고, 강간범에 무차별 살인을 한 자들도 있어. 그자들의 목숨이 네 어미보다 귀하진 않잖아!”
엘리사가 배를 끌어안았다.
“달리 정해진 자라도 있느냐? 꼭 그 사람이어야 하는 거야? 누구길래?”
엘리사가 눈을 꼭 감았다.
“……저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뭐?”
“폐하,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희생돼야 하는 자가 저라면…….”
눈에 물기가 가득 어린 그녀가 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말도 안 돼.”
그는 혼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었다. 그 상냥한 사람이, 벌레 하나도 죽이지 못하는 바보가 딸의 목숨을 희생시켜 돌아오겠다고 할 리 없었다.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내가 너를 방치했다고!”
“…….”
처음 만난 아내는 바보였다. 다혈질에 불의를 참지 못하고, 앞에 가여운 사람이 있다면 제 입에 있는 것이라도 꺼내 주는 멍청한 여자.
남의 것을 빼앗아 살아온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바보 같아서, 너무나 착해서 자신 또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마음에 차는 아들이 아니라 상심했던 그를 그녀가 일으켜 주었다.
「그럼 안 돼요?」
「뭐?」
「저는 신관이 꿈인데 마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신관을 뽑을 때마다 응시할래요. 한심한가요?」
「그래.」
「저처럼 한심한 사람도 있는데 폐하는 약과죠.」
농담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을 하고 팔랑팔랑 뛰어갔다. 그녀와 있으면 함께 멍청해지는 것 같았다. 늘 청춘 소설 속 대사 같은 말만 하는 여자였다.
“우스운 건 그 말이 모두 진심이었다는 거지.”
“……네?”
“그 사람이 있어서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어.”
“…….”
“청순 소설, 로망스 소설은 늘 행복한 끝을 맺으니 우리도 언젠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날 줄 알았다.”
“폐하…….”
“내가, 내가 네 어미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 아느냐? 마음을 거리낌 없이 전하는 그 여자에게 감히 누굴 넘보는 거냐고 비난했다.”
“…….”
“내가 두렵고 싶지 않아서 늘 숨겨두었어.”
“…….”
“사람들 앞에서 남편 자랑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여자야.”
왕이 이마를 감쌌다.
“내 일이 바쁘다고 그녀를 방치하고, 너를 방치하고……. 몰래 피눈물 흘리는 걸 나만 모르고……. 그 여자가 얼마나 가여운 여자인지 아느냐?”
“…….”
“사랑받지 못하는 왕비라고 손가락질당하면서, 남편에겐 늘 뒷전이면서…… 그러면서도 나를 언제나 기다려 주었다.”
왕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네가 물었지. 후회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후회하십니까?”
“그 여자를 보내주지 않은 나를 후회한다. 그 여자의 현실보다 내 마음이 중요하던 나를 증오해! 그러니 제발, 엘리사…….”
왕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게 네 어미에게 보답할 기회를 줘…….”
“……저요, 폐하.”
엘리사가 왕의 손을 떼어냈다.
“아이를 가졌습니다.”
왕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어요. 저를 가지고 얼마나 행복하셨는지 모른다고. 일기장에도 쓰여 있었어요. 저를 품고 폐하의 품에서 잠들 때가 가장 행복하셨대요.”
“…….”
“왜 어머니를 괴물로 만들려 하세요.”
“엘리사.”
“그것도 폐하의 욕심임을 모르시나요?”
엘리사는 왕의 손을 제 배로 가져왔다.
“아직 움직일 수도 없는 아이가 저를 강하게 했어요.”
“…….”
“아버지가 되시는 그분도 폐하처럼 혼란스러워하셨어요. 나쁜 마음도 먹었고요. 그런데요, 폐하.”
“…….”
“그분은 오직 저를 위해 그런 결단을 내리신 거예요. 폐하는 정말 보답하고 싶은 마음뿐인가요?”
“듣기 싫다. 돌아가거라. 내 마음은 바뀌지 않을 거다. 네 어미를 깨울 준비나……!”
엘리사가 등을 돌리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발 아버지…….”
이제 울음에 먹혀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지경이었다.
“어머니에게 할머님의 목숨을 빼앗게 하지 말아주세요…….”
“뭐?”
“살아 있는 제게 보답해 주시면 안 되나요?”
“…….”
왕이 당황한 표정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이 아이의 좋은 할아버지가 되는 것으로 보답해 주시면 안 돼요?”
“……엘리사.”
“저는 너무 외로웠어요. 언제나 아버지가 절 찾아주시길 기다렸어요.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이제 다 커버렸어요.”
“…….”
“아직 폐하를 미워하는 채로.”
왕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왕태후가 나타났다.
왕태후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손녀와 얼어붙은 아들을 보고 조용히 한숨을 흘렸다.
“파울로에게 일러두었다. 명일 새벽, 왕비를 깨울 준비가 완료된다고 하더구나.”
엘리사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결국 그녀는 부친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이제 끝을 내자.”
왕태후의 말에 왕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밤이 깊었다. 진저는 예복을 걸친 엘리사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왕태후가 리즈 왕비를 위해 목숨을 내주기로 하였다는 말을 들은 뒤, 그는 아내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새하얀 예복보다도 더 새하얗게 변한 얼굴이 안쓰럽고,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떠넘긴 왕과 왕태후가 원망스러웠다.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던 엘리사는 제 등에 닿는 남편의 온기를 느끼고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녀를 끌어안은 진저가 말했다.
“원한다면 함께 도망쳐 줄게.”
“……도망친다고 해서 책임까지 모두 내던질 수 있을까요?”
왕과 왕태후가 그녀의 핏줄만 아니었더라도 사지를 절단 내고 싶었다.
나약한 이들이 영웅을 갈망하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의 아내가 영웅 역할을 맡아야 한단 말인가. 그들이 대체 아내에게 무얼 해주었기에.
“세기의 악당이 되어줄 수도 있어.”
“폐하와 할머님을 향해 검을 드시겠다고요?”
엘리사가 낮게 웃었다. 자조 섞인 웃음소리에 그는 대답 대신 아내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하지 마.”
“……사람은 바뀌지 않네요.”
“끝까지 비겁해지겠다는 거겠지. 바뀔 마음이 없는 거야.”
“아니요. 저 말이에요.”
“뭐?”
엘리사가 남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일이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믿고 싶어요.”
“엘리사…….”
“어쩔 수 없는 바보인가 봐요.”
화장대에 딸린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믿음이 기어이 배신당하면 그때, 저를 데리고 도망쳐 주세요.”
그가 아내의 등을 토닥였다.
* * *
예배당 지하에 그웬 부부와 왕, 왕태후와 파울로, 또 불상사를 대비해 마력을 보충할 수 있는 리한이 모여 있었다.
리즈 왕비를 둘러싼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시체인 듯, 시체 같지 않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는?”
왕의 물음에 파울로가 고개를 조아렸다.
“만반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왕은 내내 긴장된 표정이었다. 다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희열, 그리고 그간의 실수를 질책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진저가 엘리사의 어깨를 감쌌다.
“몸에 부담이 가면 그 즉시 중지할 겁니다.”
진저의 말에 왕은 말없이 엘리사를 응시했다. 부친의 시선에도 그녀는 눈길 한 번 내주지 않았다.
모친과 재회하길 바라는 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살아난다는 게 어찌 기쁘지 않으랴.
다만, 그녀가 걱정되는 건 왕태후였다. 그리고 깨어나 모든 것을 알게 될 리즈 왕비 또한 염려되었다.
왕태후 대신 살아난 그녀가 과연 기쁜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단언컨대 불가한 일이었다. 그녀의 성정이라면 평생을 부담 속에서 고뇌할 게 분명했다.
리즈 왕비에게 다가간 그녀가 자신과 닮은 벚꽃색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모후의 몸은 완전히 시간이 멈추어 기억 속의 그녀와 한 치도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이 손 안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녀의 모든 것이 환상처럼 금세 사라질 것 같았다.
왕은 아내의 머리를 매만지는 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공주님.”
파울로가 그녀를 왕비와 3m 정도 떨어진 마법진 안으로 인도했다.
한숨을 크게 내쉰 그녀가 양손을 모았다.
그녀는 미리 리한과 파울로로부터 들은 내용을 다시 떠올리며 조금씩 마력을 원 안에 집중시켰다.
‘숨을 들이켜는 것처럼 마력을 심부로 모으는 겁니다. 처음 마법을 발동하는 자들이 가장 쉬이 마력을 분출할 수 있는 곳이 손목입니다. 맥박에 따라 조금씩…….’
그녀 주변에 순백의 소용돌이가 생겼다.
리한이 파울로를 향해 물었다.
“한번도…… 자의로 마력을 쓴 적 없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맞네.”
“저렇게…… 쉽게…… 쓸 수 있는 걸…… 견습생들이 본다면…… 뒷목을 잡을 겁니다…….”
“신의 가호가 아니겠나.”
“그런 걸 재능이라고…… 하는 겁니다. 가호는…… 무슨.”
파울로가 마뜩잖은 듯 리한을 힐끗 쳐다보았다.
“경계는 하고 있겠지?”
“그쪽이야말로…….”
파울로에게 리한은 밉살맞은 놈이었다. 일기 해독 중에도 얼마나 거슬렸는지 모른다. 오늘 ‘그 일’만 아니었더라도 마탑의 나부랭이를 지하 성전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계 자리를 걷어차 다행이지. 공주님이라면 성국과 문제가 생길 리 없어, 암.’
파울로가 마력을 방출했다. 맑은 물빛의 마력이 그물처럼 뻗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리한의 몸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울로의 마력과 리한의 마력이 얽혀 공중에 야트막한 돔이 생겼다.
그런 와중에도 엘리사는 바짝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다른 생각이 들 것 같아 두려웠다.
‘명심하셔야 합니다. 공주님의 마력은 생각보다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오발동이 되면 공주님은 물론이고 주변이 모두 초토화될 겁니다.’
자꾸만 부친과 남편,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들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거나 소소한 잡담을 나누는 게 그녀의 인생에서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할머님!’
엘리사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녀는 조모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생명력을 바쳐 마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반대로 마력을 받쳐 생명력 또한 만들 수 있다는 소리였다.
왕태후가 리즈 왕비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생에선 너는 나로, 나는 너로 태어나자. 너도 나를 모질게 핍박하려무나.”
유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엘리사에겐 어떤 소리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제발, 제발…….’
그리고 애원하듯 신에게 빌었다. 정말 신이 있다면,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해 줄 뜻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마음을 모두 지금 이 순간에 기적으로 내려주길 간절히 소망했다.
순백색의 소용돌이가 벚꽃과 똑 닮은 분홍빛으로 바뀌었다. 기에 색이 입혀지자 소용돌이는 더욱 강하게 몰아쳐 왕궁의 세 여성을 감쌌다. 마력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됐습니다!”
파울로가 벽의 밖에서 소리쳤다. 엘리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감았을 때만 해도 익숙했던 광경이 어느새 새하얀 빛 속에 감싸여 있었다. 엘리사가 조모와 모친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조모의 몸에서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팬가? 안 돼!’
엘리사가 조모의 손을 붙들었다. 실패했다면 더 이상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조모의 목숨을 빼앗아 모친에게 주는 짓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순간 ‘쾅’ 하는 파열음과 함께 엘리사가 어깨를 감쌌다. 누군가 그녀가 만든 벽을 부수고 있었다.
“밖에서도 목소리가 들릴까?”
불청객이 나타났다.
엘리사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왕태후가 얼른 그녀를 감싸고 난데없이 나타난 침입자의 이름을 외쳤다.
“클라우디아!”
“산송장인 줄 알았는데 걷기까지 하는군. 이것도 레스칼포네족의 기적인가?”
“뭐 하는 짓이야!”
“참 대단해. 섭리까지 거스를 수 있는 마력이라니.”
클라우디아가 잔뜩 이죽거렸다. 엘리사가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의 것이 아닌 마력, 왕족의 피, 자식을 끔찍이 생각하는 모친.”
“……뭐?”
“너는 모두 다 가졌잖아.”
“당장 돌아가면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
“너를 위해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남편까지도 말이야!”
클라우디아가 소리치자 그녀의 눈이 일순 흰자위까지 새까매지더니 화살같이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불행한 사람이 다 가진 사람에게 나눠쓰자는 게 뭐가 잘못됐어?”
마력의 벽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사!”
“엘리사! 대답하거라! 무슨 일이냐!”
“공주님!”
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애타게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봐, 나에겐 남은 게 없는데 너는 저렇게도 많이 가졌어.”
“클라우디아…….”
“춥고 더러운 감옥 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어떤 복수가 가장 짜릿할까?”
클라우디아가 엘리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여자의, 아니, 사람의 힘이라곤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엘리사의 멱살을 잡아 몸을 공중에 띄웠다.
엘리사가 버둥거리며 클라우디아의 손을 잡았다.
“그만해!”
왕태후가 클라우디아의 소매를 할퀴듯 잡아끌었다. 눈 깜짝할 새에 왕태후가 바닥에 처박혔다.
“할, 할머, 큭!”
“그러다 알았어. 난 어떻게 해도 속이 시원해질 수 없다는걸.”
클라우디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아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먼저였다.
‘여보…….’
눈이 충혈된 엘리사가 진저를 떠올렸다.
“엘리사! 엘리사!”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데도 마력 장벽 밖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벽이 모두 그녀의 눈인 것 같았다. 진저가 벽을 계속해서 내려치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그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벽은 마치 그녀가 조종할 수 없는 생물처럼 안에 있는 자들을 지키려 했다. 진저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몇 배나 강한 힘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그는 주먹이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벽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엘리사! 제발 대답해!”
“엘리사! 아가야!”
그 옆에 왕의 얼굴도 보였다. 그의 주먹도 남편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주름진 얼굴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이게 무슨 소리야! 다친 거냐?! 위험해진 거야?! 멈춰! 당장 나와!”
목이 쉬어라 소리를 치며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아가 엘리사를 잡지 않은 남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엘리사가 심부에 모아둔 마력을 한 번에 방출시켰다.
“악!”
클라우디아가 마력에 떠밀려 엎어졌다.
한참을 콜록거리던 엘리사는 조모를 부축하기 위해 그녀가 쓰러진 자리로 달려갔다.
어느새 엘리사는 그녀가 본래 마법을 시전하던 자리에, 그리고 클라우디아는 왕태후가 서 있던 곳에 있었다.
클라우디아가 소리 높여 웃었다. 이만한 저항은 예상했다. 어차피 죽을 각오를 하고 왔다. 이 정도 아픔 따위는 아무렇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
왕태후의 어깨를 잡은 엘리사가 클라우디아가 엎드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네 미래가 어떨지 말이야.”
“…….”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사랑하는 남편, 돈독해진 부모, 너를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미래.”
“요지가 뭐야?”
“이제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죽어버리는 건 어떤 기분일 것 같니?”
왕태후가 손녀의 손을 꼭 그러잡았다.
“너를 지척에 두고도 구하지 못한 저들의 마음은 어떨까?”
“…….”
“나를! 내 마음을 농락한 저 남자는 평생 어떤 기분으로 살게 될까!”
클라우디아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새카만 마력이 맹수의 발톱처럼 예리하게 갈려 엘리사를 향해 돌진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클라우디아의 마력이 그들 머리 위에 있는 붉고 푸른 돔에 빨려들었다.
순간 앞이 캄캄할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클라우디아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미리 준비한 단도를 품 안에서 꺼낸 그녀가 엘리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또 한 번의 파열음이 들렸다. 엘리사는 눈을 크게 뜬 채 피투성이가 된 클라우디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마법이 발동된 방향을 쳐다보다가 입을 가렸다.
몹시 노한 표정의 리즈 왕비가 클라우디아를 향해 다가갔다.
놀란 건 클라우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서도 욕심이 많더니 다 커서도 오만하구나.”
“……리, 리즈, 리즈 왕비.”
“내 딸의 것을 탐한 것으로도 모자라 목숨까지 앗으려 해? 뼈저리게 갚아주마.”
말로만 듣던 그 선한 왕비라고는 믿을 수 없는 위압감이었다.
“네 어미가 내 딸에게 한 것에 곱절을 더해!”
클라우디아가 다급히 양손을 펼쳤다. 그런데 이전처럼 마력이 솟구치기는커녕 기력이 쭉 빠져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이게 뭐야!’
엘리사가 비틀거리며 클라우디아 앞에 섰다.
“이, 이게 무, 무슨!”
“고마워.”
“뭐?”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클라우디아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눈을 부릅떴다.
“평생 악몽에 시달릴 뻔했는데 네 덕에 떨쳐냈어.”
“무슨…… 뜻이야?”
“네 시간은 잘 쓸게.”
“내 시간이라니!”
순식간에 마력의 벽이 해제되었다.
‘설마.’
클라우디아는 이번 일을 예상했다는 듯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울로를 쳐다보았다.
“너, 너……!”
흘러내린 머리카락 중 희끗희끗한 것이 보였다. 그녀는 주름진 손등을 바라보다가 엘리사의 곁에 다가온 리즈 왕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숨 바쳐 만들었다고 믿은 기회가 한순간에 바스러져 버렸다. 복수를 위해 몸에 새겨 넣은 그리온다의 인이 리즈 왕비를 깨워 버렸다.
왕태후와 왕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과 왕비, 그리고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클라우디아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신관이 마탑의 마법을 썼다는 것을 들킨다면 파울로는 살아남지 못해!”
엘리사가 답했다.
“살아갈 거다. 우리 모두.”
“……뭐?”
“누구의 꼭두각시가 아닌, 자유로운 삶. 오늘보다 내일이 더 즐거워지리라 믿으면서 살 거야.”
“그게 무슨…….”
“인형극은 끝났다.”
엘리사가 눈짓하자 파울로가 손을 들어 올렸다. 파울로의 손끝에 빛이 모였다. 그것은 이내 둥근 원을 그리며 클라우디아의 주변을 감쌌다.
클라우디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녀 인생의 종막임을.
“싫어! 살려줘! 이대로 죽기 싫어! 싫……!”
꺄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으로 그녀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 수 있었다.
원에 감싸인 클라우디아는 마지막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엘리사가 눈을 감았다. 누군가의 목숨을 앗는다는 건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 인생의 첫 살인이 클라우디아라는 것 또한 믿을 수 없었다. 엘리사가 배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 위로 뜨거운 손이 올라왔다.
피투성이가 된 남편의 손이었다. 그녀는 진저의 가슴에 기대 숨을 골랐다.
“이제 다 끝났어.”
“네…….”
그 모습을 지하 성전에 있는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리한은 성국의 신력에 감싸인 나라에서 마법을 쓴 것이 힘에 부쳤는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나도 고생했는데 왜…… 아무도 부축…… 해주지 않는 거야?”
그가 투덜거리자 엘리사가 남편에게서 떨어졌다.
“리한, 괜찮아요?”
리한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이 와중에도 아내가 다른 남자 걱정을 하는 게 마뜩잖아 보이는 진저가 재수 없었다.
“공작부인의 걱정은…… 됐습니다.”
“네?”
“감동의 재회…… 아닙니까?”
엘리사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두려워서 등을 돌릴 수 없었다.
그녀의 등 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엘리사.”
“…….”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였다. 기억조차 나지 않아 밤마다 목메게 했던 목소리.
그러나 엘리사는 자신을 부르는 모친을 볼 수 없었다. 도무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이렇게 돌아올 거면서 왜 나를 혼자 두었나. 나를 위한 희생이 나를 얼마나 괴롭게 할지 몰랐던 걸까. 왜 하필 지금 돌아온 건가.
왜, 어째서 십여 년이 지났어도 당신의 목소리는 가슴을 저리게 만들까.
“엘리사…….”
엘리사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흐느꼈다.
“아가…….”
“…….”
“내 아기야…….”
“…….”
“많이 컸구나.”
엘리사는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런 그녀를 끌어안은 리즈 왕비의 눈 또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엘리사와 진저는 왕의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상당한 마력을 쓴 탓에 바로 왕을 찾지 못했다. 부부는 리즈 왕비가 깨어나고 이틀 뒤, 정오가 되어서야 왕을 찾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엘리사는 비어 있는 왕의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곧 달라지실 겁니다.”
“너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했다는 걸 안다. 모든 게 짐이 부족하여…….”
“저는 복수를 마쳤습니다.”
맥락과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왕이 무슨 뜻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클라우디아를 죽였고, 필리아와 레이라 부인을 교수대에 세웠으며 귀족들까지 쥐고 흔들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었어요.”
“고마울 따름이다.”
“저를 방치하고, 어머니를 살릴 도구로만 보았던 폐하께마저도요.”
“뭐라고?”
엘리사가 알현실을 지키는 병사에게 명했다.
“전하를 모셔라!”
곧이어 문이 열리고 왕비가 들어왔다. 그녀는 깨어난 뒤로 단 한 번도 왕을 찾지 않았다. 그의 애원에도 묵묵부답이던 그녀가 그를 찾아온 것이 못내 기쁜 모양인지 왕이 만면에 미소를 띠웠다.
“왕비…….”
왕이 왕비를 부르려 할 때였다.
“폐하께선 또다시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야 하실 테니까요.”
순식간에 왕의 표정이 굳었다. 왕비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태도가 담담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완전히 깨어난 게 아니란 말이냐?”
“폐하, 저는 아주 어릴 적에 깨달았답니다.”
“뭐?”
“신만큼 잔인한 이는 없다는 걸요. 사람 목숨이 뜻대로 되겠습니까? 클라우디아의 시간을 빼앗아 어머니께서 땅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열흘에 불과합니다.”
엘리사는 웃었다. 아주 통쾌하다는 듯이. 아니, 사실은 통쾌해 보이고 싶어서 애써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저와 할머님의 목숨을 담보로 고작 열흘의 시간을 얻으려던 당신은 얼마나 무지한 분이십니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모두 당신으로부터 시작했지요. 어머니를 욕심내서, 왕관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해서 레이라 부인이라는 싹이 텄어요. 독초밭에서 괴로워하던 딸에게 끝까지 잔인하셨습니다.”
“엘리사!”
진저와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벽을 내려치던 부친이 떠올랐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을 때 진저의 손이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왕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 폐하, 저는 끝까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벌떡 일어난 왕이 왕비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또다시 당신을 잃을 순……!”
왕비가 단호히 왕의 손을 떼어냈다.
“우리는 벌을 받아야 해요.”
“당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인생을 휘둘러왔는지 기억하세요.”
“아즈렌…….”
왕비의 눈을 보고 알았다. 진실이었다. 그녀는 다시 그의 곁을 떠나야 했다.
왕비가 왕의 뺨을 쓰다듬었다.
“깨어난 나는 사랑하는 남자가 얼마나 최악인지 알게 되었고, 깨운 당신은 인생을 바쳤던 나를 잃게 되겠군요.”
왕의 눈이 더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는 자신과 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 아내를 깨웠다. 숱한 인생을 휘두르고, 종내엔 최악의 아비, 최악의 남편으로 남았다.
그제야 그는 후회했다.
“……당신을 깨우지 않았다면 난 당신 기억 속에 최악으로 남지 않았을까?”
“당신이 후회한들 우리 아이가 홀로 감내해야 했던 시간이 돌아올까요?”
“…….”
리즈 왕비가 왕의 뺨을 내려쳤다. 짝! 마찰음과 함께 왕의 얼굴이 돌아갔다.
알현실을 나온 엘리사의 어깨 위로 진저의 손이 올라왔다.
“힘들지 않아?”
“뭐가요?”
담담한 척하는 걸까. 아니면 아예 마음에서 모친을 지운 걸까. 진저는 걱정되는 마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의 아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이게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다시 마음의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바짝 경계하며 사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복수로 인해 제 몸까지 태우길 바라진 않았다.
엘리사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슬프겠죠. 또다시 울 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인 걸까.
“헤어지는 순간에 당신이 곁에 있어줄 테니까요.”
물론 그렇다 해도 슬플 것이다. 가슴이 저밀 것으로 생각했다. 누군가의 생명을 바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은 며칠이 허망하고, 아플 걸 알면서도 행하고만 자신이 바보 같아서.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것도 있었다. 어머니를 통해 얻게 될 아이의 안전, 그리고 좀 더 강인해질 자신 같은 것들이 말이다.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려면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에요.”
그가 있어주었기 때문에 깨달았다.
“날씨가 쌀쌀해졌군.”
“가을이 다 지나갔으니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곧 결혼 1주년이에요.”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군.”
“앞으로도 많은 일이 생길 거예요.”
진저는 질린다는 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1년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힘을 주어 아내의 손을 잡은 그가 그녀와 함께 겪은 일들을 떠올렸다.
“몸이 바뀌질 않나. 싸우긴 또 얼마나 많이 싸웠어.”
“당신의 첫사랑이 나타나기도 했고요.”
“그건 좀 잊어주지.”
그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안 돼요. 두고두고 곱씹을 거예요.”
“엘리사…….”
“또 뭐가 있죠?”
“당신이 날 주무른 것도 있잖아.”
“제가요?”
엘리사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제가 휘둘렸던 거겠죠.”
“아니, 얼마나 날 주무르는지 하루 종일 당신 생각뿐이었다고. 좋아하게 해달라면서 행동은 마음 정리 다 된 사람이었으니까.”
기가 막혔다. 어쩜 그렇게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엘리사가 걸음을 멈추고 진저를 쳐다보았다. 그는 뻔뻔하게 ‘왜?’ 하고 물었다.
“그건 당신이 제가 아니라니까 그런 거죠.”
“내가?”
“제가 좋다고 하니까 당신이……!”
그때 받은 상처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오리발이었다. 엘리사가 말을 잇지 않고 쿵쿵 발을 구르며 방으로 향했다.
“어디 가? 엘리사!”
“따라오지 말아요!”
“내 변명도 들어줘야지!”
“변명하는 남자는 좋은 남자가 아니라면서요.”
“어떤 새끼가 그런 소릴……!”
“당신이잖아요!”
진저가 픽픽 웃으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런 말을 다 기억하고 있었어? 당신 나 엄청 좋아하나 보네.”
“정말!”
조금만 틈을 주면 놀려먹으려 든다. 엘리사가 진저를 흘겼다.
“천하의 진저 그웬이 여덟 살배기 꼬마애 같다는 걸 누가 알기나 할까요?”
진저가 아내를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은 평생 모를걸.”
“왜요?”
“이런 모습은 평생 당신만 볼 수 있을 테니까.”
미워할 수 없는 남자였다. 진저가 팔을 조금 들었다. 그를 새초롬히 쳐다보던 그녀가 졌다는 듯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이제 정말 끝인가?”
“시작이죠. 제가 새로운 폭풍을 품고 있는데요?”
“벌써부터 두렵군.”
그란디아의 궁에서 외롭게 자란 여자가 란델의 저택에서 외롭게 자란 남자를 만났다. 처음 그를 봤을 땐 상상이나 했던가.
그녀와 그가 서로 같은 마음이 되어 사랑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가지고, 또 행복한 미래를 그리게 될 것이란걸.
남편의 팔을 끌어안은 엘리사가 킥킥, 웃음을 흘렸다. 그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내 저택에서 죽어 나가지 않길 바라겠소.」
“볼이 빨간 것 같은데? 열이 나나? 어디 봐.”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시오.」
“이마도 뜨겁군. 거기 너, 닥터를 불러와라!”
「이대로도 좋잖아. 부부라고 꼭 마음이 통할 필요가 뭐 있어.」
고작 1년이었다. 1년간 수많은 것이 바뀌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것이 바뀔 터였다. 1년 전의 자신이 오늘을 상상하지 못했듯, 오늘의 자신도 1년 후의 자신을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앞으로도 수많은 난관이 있겠지. 눈물짓고, 가슴을 내려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당신이 있다면.”
내 품에 들어온, 내게만 달콤한,
‘나의 짐승.’
* * *
그로부터 이틀 뒤, 그웬 부부는 여전히 그란디아에 머물고 있었다.
왕비가 되살아난 것은 백성들에겐 소문으로, 귀족들에겐 공공연한 비밀로 남았다.
레이라 부인이 없는 자리에서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모두 상황을 살폈다.
혹자는 나라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 엘리사 공주와 권력 다툼을 벌일 것이라 말했고, 혹자는 모녀의 정에 취해 또 다른 레이라 부인이 생기도록 내궁을 방치할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모녀는 어느 누구의 예상과도 다른 행보를 보였다. 십수 년 만에 만난 딸과 어미라기엔 데면데면한 구석이 있는 데다 리즈 왕비는 내궁의 그 어떤 일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왕은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였다. 모르는 자들은 레이라 부인을 사형대에 올리게 되어 화병이 난 거로 생각했으나, 진실은 달랐다.
그가 닫은 건 문이 아니라 세상이었다.
그웬 부부가 그란디아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이것으로, 부부는 추후 그란디아에서 일어날 권력 분쟁을 염려했다.
진저와 엘리사를 비롯한 레이라 부인의 축출에 도움을 준 그웬의 이들이 왕태후의 만찬에 초대받았다. 리즈 왕비도 함께였다.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왕태후의 말과 달리 엘리사의 결혼 전보다 나은 건강 상태를 유지했다.
성국에서 보내준 의료 신관들의 공이 컸다. 진저는 엘리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성국과의 거래에 의료 신관에 대한 내용을 넣었고, 그들은 그란디아 왕족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과 함께 서명을 완료했다.
진저는 스푼을 든 채로 굳어 있었다. 엘리사가 그런 그를 흘겼다.
이 일은 진저가 엘리사를 짝사랑했다던 프리즌 경을 질투하면서 시작되었다.
만찬장에 오기 전 진저는 모 후작으로부터 프리즌 경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리즌 경의 부친은 레이라 부인을 따르지 않았으나 그의 형제가 연루되어 있어 그가 책임을 지고 작위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프리즌 경이 가문을 맡게 되었다. 눈치 없는 자가 그 일을 전하며 ‘프리즌 경은 공주님이 결혼하신 후로 며칠이나 술독에 빠져 지냈다고 합니다’라 불씨를 놓았다.
그러자 진저가 씨근덕거렸다. 다른 놈팡이가 제 아내 때문에 술독에 빠졌다는 건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그는 만찬장에 들어온 후로도 프리즌의 이름을 곱씹으며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화가 나는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꼬마였던 프리즌 경과 엘리사가 처음 왈츠를 배우던 날의 이야기가 나왔다.
리즈 왕비의 목적은 ‘우리 엘리사가 어릴 적에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였으나 질투에 사로잡힌 그에겐 ‘그 망할 자식이 어릴 적부터 제 아내에게 눈독을 들였다’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가 아내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자와는 얼마나 오래된 사이였어? 연인이었던 거야? 결혼 생각도 한 건가?’
그나마 아내의 모친과 조모가 있는 자리라 분노를 자제한 게 이것이었다.
엘리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와 프리즌 경은 한 번도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를 짝사랑한 필리아로부터 몇 번이나 곤욕을 치렀던 터라 그녀 쪽에서 학을 떼고 피한 것이다.
‘전혀요.’
‘그럼 왜 그 개자…… 사람이 술독에 빠졌던 건데?’
‘저도 모르죠.’
‘내가 이래서 밖에서 웃고 다니지 말라고 한 거야. 당신은 당신 미모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당신과 만나기 전의 일이에요.’
어르고 달래도 한 번 지핀 질투의 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좋은 자리에서 제 탓도 아닌 일로 변명하게 된 엘리사가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첫사랑이었나?’
결국 참다못한 엘리사가 반격했다.
‘당신은 결혼 생활 중에 첫사랑과 만났지만 저는……!’
그 순간 부부의 대화에 왕태후가 끼어들었다.
‘첫사랑?’
리즈 왕비가 왕태후의 말을 이었다.
‘결혼 생활 중에?’
스푼을 쥐고 있던 진저가 침을 꼴깍 삼켰다. 왕태후와 왕비의 눈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엘리사도 단단히 토라져서는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쥐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은 왕태후가 깍지를 꼈다.
“편하게 말해보시게. 지나간 일이 아닌가.”
먹은 것도 없는데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진저가 고개를 저었다.
“오해십니다…….”
“무슨 오해? 설마 아직도 만나고 있나?”
그는 제 혀를 잘라내고 싶었다.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란 말인가.
저 좋다는 여자들은 들어봤어도 아내에게 홀딱 반한 놈의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이럴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질투가 나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진저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두 손을 얌전히 포갰다.
가뜩이나 란델의 미친개로 소문이 자자한데 줄리아의 일까지 들킬 순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라골과 마크빌, 하우벡이 동시에 스푼을 떨어뜨렸다. 주인님 혹은 주군에게서 이런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왕태후가 눈썹을 실룩였다.
“무엇이 아니란 거지?”
“제 첫사랑은 이 사람입니다.”
진저가 어색한 손길로 엘리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흐음, 그래?”
“물론입니다.”
왕태후와 왕비가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사실이냐?”
엘리사가 진저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게…….”
진저는 테이블 밑으로 아내의 치맛자락을 쥐었다. 마치 겁먹은 어린애가 어른에게 이르지 말아 달라는 것 같았다.
엘리사는 웃음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첫사랑인가 보네요.”
“그럼 조금 전에 한 말은 무엇이야?”
“매일 저택에서 첫사랑을 보고 있다는 말이었어요.”
왕태후가 더 캐묻기 위해 입을 열자 리즈 왕비가 그녀를 달랬다.
“어머니, 음식이 식겠습니다. 저희가 인사를 드려야 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더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후에 다시 물으셔요.”
레이라 부인의 일로 왕궁의 모두가 진저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왕태후가 말없이 포크를 들었다.
만찬장을 나선 진저가 가슴을 두드렸다. 얼마나 긴장한 채 음식을 먹었는지 강철 식도에 강철 위 소리를 듣던 진저 그웬이 식체를 경험하게 되었다.
“당신, 전하와 많이 닮았더군.”
“네.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 약인가요?”
그가 픽, 실소를 흘렸다. 리즈 왕비가 약을 챙겨주었다. 디저트를 먹기 전부터 표정이 불편한 사위를 알아차리곤 하녀에게 명해 약병을 전달했다.
입에 물약을 털어 넣은 진저가 가는 한숨을 흘렸다.
“괜찮으세요?”
“가슴이 답답해.”
투정을 부리듯 아내의 머리에 턱을 얹었다.
“다들 보잖아요…….”
엘리사가 뒤따라오는 라골과 리한, 그리고 그웬의 기사들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내 아내를 내가 안겠다는데 뭐. 너희들, 불만 있나?”
있다고 하면 사지를 절단 낼 기세였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기사들이 잽싸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우렁차게 외쳤다.
“보기 좋으십니다!”
진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는데?”
“이 사람이 정말…….”
하지만 엘리사도 싫은 건 아니었다. 고된 일이 모두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 이렇게 평화로운 데다 달콤하기까지 한 시간은 오랜만이라 웃음이 나왔다.
“몸은 어떠신데요? 가슴이 답답한 것 외에 달리 불편하신 곳은 없나요?”
“음, 가슴만 답답해.”
리한이 부부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거…… 화병이다.”
진저가 쥐고 있던 약병을 집어 던졌다. 약병이 정확히 리한의 이마 정중앙을 때리고 떨어졌다.
“무례한…… 놈…… 은혜도…… 모르고…….”
“시끄럽다. 이거나 좀 치료해 봐.”
리한의 치유 마법이나 약은 효과가 좋아서 가벼운 병이라면 받는 즉시 몸이 나았다. 하지만 리즈 왕비가 전달한 약은 그다지 효과가 좋지 못한 듯했다.
“싫…… 어……. 그렇게…… 부려먹었으면…… 됐지…… 뭘…… 더…… 쥐어짜 내려고…….”
진저 그웬이 천하의 상놈이라면 리한은 천하의 게으름뱅이였다. 세상에서 일하는 게 제일 싫은 그가 마탑의 후계를 때려치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 많은 일을 도와주었다.
일이 끝났으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일기 해석부터 엘리사의 부탁까지 일이 밀려들었다.
엘리사가 민망한 표정으로 리한을 보고 있다가 남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만해요. 리한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요. 이런 것까지 부탁할 순 없어요.”
“별것도 아닌…….”
그녀가 남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벚꽃색의 빛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어때요?”
가슴의 답답함이 가셨다.
진저는 놀란 표정으로 아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내의 마력량을 따를 자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녀가 마법을 쓰는 건 몹시 신기했다.
“언제 배웠어?”
“틈나는 대로 대신관에게 배웠어요.”
“성국의 마법인데 괜찮나?”
“성국은 마탑의 마법을 쓸 수 없지만 마탑은 성국의 마법을 금지하지 않는대요. 오히려 좋아한다는 걸요?”
마탑이 프라이드보다 돈을 우선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기가 막혔다.
“참, 아이를 낳고 2년 정도는 리한이 마탑에 있어주겠대요.”
저 게으름뱅이가 그런 말을 했다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진저가 무슨 수작이냐는 듯 리한을 쳐다보았다.
“몸조리…… 잘 못하면…… 아파…….”
“네가 왜 남의 아내 건강 걱정을 해?”
“공작부인 아프면…… 내가 다시 마탑으로 가야 하잖아…… 그건 싫다.”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럼 그렇지.’
엘리사는 티격태격하는 사내들이 귀여운지 내내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 * *
밤이 깊었다. 진저의 품에서 곤히 잠을 자던 엘리사가 눈을 떴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쭉 기지개를 켰다.
“‘거기’에 가려고?”
진저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네, 당신은 좀 더 주무세요.”
“아니야. 같이 가.”
진저와 엘리사가 밤마다 ‘그곳’을 향한 건 벌써 세 번째였다.
그는 아내가 걱정되었다. 그야 잠을 얕게 자는 게 습관이 되었으나 엘리사는 몹시 피곤할 터였다. 임신까지 한 상태가 아니던가.
옷을 걸친 그들이 지하 성전으로 내려갔다. 거대한 마법진 안에 파울로와 리한, 그리고 관이 있었다.
“일찍 오셨군요.”
엘리사가 그들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걷자 진저가 얼른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천천히.”
진저는 엘리사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평소 보폭으로 걷는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차라리 몸이 바뀌었으면 좋겠군.’
임신한 상태로 일하는 것보다 제 몸으로 일하는 게 덜 힘들 것 같았다. 체력이라면 아내보다 자신 쪽이 훨씬 나았으니까.
엘리사와 리한, 파울로가 관 주변으로 서서 양손을 펼쳤다. 그러자 마법진이 푸르게 빛났다.
근처에 서 있던 진저가 쩍 하품을 했다. 며칠이나 한 일이니 위험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파울로 쪽으로 푸른빛이 몰려들었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 균형이 어그러진 것이다. 당황한 파울로가 마력을 조절하지 못하고 푸른빛을 완전히 밀어내 버렸다.
“여보!”
하필이면 이 중 가장 마력이 낮은 진저에게 푸른빛이 흘러들어 갔다.
심장을 관통당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진저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10여 분쯤이 지난 후였다.
진저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닥을 짚었다.
‘내가 주저앉았었나?’
“제기랄, 뭐 하는 거요? 머리가 어지럽잖아.”
그가 흐릿한 시야 때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왼쪽에 자리하던 신관장이 없어졌다.
그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신관장과 리한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구경났……!”
“공주님?”
“공작부인?”
이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설마…….’
진저가 가슴을 매만졌다. 불룩하고 부드러운 것이 손에 잡혔다.
아내의 건강이 우려돼 그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아내의 마력이 안정화되었으니 다시 몸이 바뀌는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기회였다.
진저가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아파.”
“네?! 어디 가요?”
놀란 엘리사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녀는 진저의, 아니, 제 몸을 샅샅이 살피곤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다친 곳은 없는데…… 머리가 아파요? 메슥거리나요?”
“우욱.”
그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꾀병이 분명한 목소리였다. 우욱은 무슨.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을 뿐 정말 헛구역질은 아니었다.
“아, 입덧이…….”
엘리사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네 달째라서 입덧이 가라앉았는데……. 파울로, 몸이 바뀌면 이럴 수도 있나요?”
파울로가 고개를 저으려 할 때였다. 아내를 답삭 끌어안은 진저가 눈을 부릅뜨고 파울로를 쳐다보았다. 사실을 말하면 목을 분질러 버릴 태세였다.
파울로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네?”
“몸이 바뀌는 건 처음 보는 일이라…….”
진저가 아내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아프다니까. 이제 올라가자.”
이것저것 일이 많아서 그동안 아내를 빼앗겼다. 이제 아픈 척을 하며 아내를 독차지하게 되었으니 이게 바로 호사가 아니겠는가!
엘리사가 관을 쳐다보자 진저가 나 죽는다는 듯 으그그, 하고 신음을 흘렸다.
“네! 알았어요! 일단 침실로…….”
“그래.”
리한은 아내에게 안겨 회심의 미소를 짓는 진저를 향해 혀를 찼다.
침실로 올라온 부부는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한 사람만 만족스럽고, 다른 한 사람은 곤란했지만.
진저가 입을 쩍 벌리며 밤을 가리켰다.
“저거.”
그는 침실로 올라오자마자 선언했다. ‘이제 손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라고. 그녀는 남편의 어리광을 받아주며 한숨을 흘렸다.
남편과 몸이 바뀌어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았으나 이상하게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손은 움직일 수 있잖아요.”
“아야야.”
엘리사가 그를 흘기며 밤을 집었다. 그녀가 거절할 때마다 아플 리 없는 어깨나 등을 잡고 신음을 흘렸다.
“바쁘단 말이에요. 해가 뜨면 란델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하는데…….”
“라골이 있잖아.”
“제가 확인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요.”
“그건 마피 부인 시켜.”
“여보.”
“마피 부인 때문에 그 난리를 치렀는데 할 말이 있겠어?”
“몸이 안 좋잖아요. 마피 부인 때문에 일이 정리되었고요.”
진저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을 키워준 것도 그렇고, 아내를 지켜준 것도 고마운 일이었지만 아이를 위해 그녀를 죽이려 한 건 용서가 되지 않았다.
“존중은 할 생각이야.”
“이제 그녀를 ‘유모’라고 부르지 않을 건가요?”
“그 사람에게 너무나 무거운 자리였던 거지.”
남편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고 호출 줄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하녀에게 라골을 불러오라 명한 후로도 남편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침실을 찾은 라골이 해괴한 광경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진저 그웬이 공작부인의 입가를 닦아주고 있었다. 수줍음이 많은 공작부인은 평소라면 절대 받지 않을 세세한 시중을 받고 있는 데다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 님?”
“왔어요? 방금 차를 가져왔는데 라골도 함께 마실래요?”
진저의 몸뚱이가 몹시 친절한 목소리로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라골은 확신할 수 있었다.
‘또 몸이 바뀌었군.’
진저 그웬은 저렇게 웃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줄 아는 놈이었다.
“아닙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신지요?”
“저와 이이가 몸이 바뀌었어요.”
“예.”
‘역시 몸이 바뀌었구나.’
라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란델에 돌아갈 준비를 라골 혼자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출발 일정도 변경됩니까?”
‘저 화상 때문에’라는 뒷말은 삼켰다. 엘리사가 진저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 뜻대로 하라는 듯 대답 없이 밤만 씹고 있었다.
“그럼 일정은 그대로…… 아, 내가 말한 건 잊지 않았죠?”
“생각이 바뀌진 않으셨습니까?”
“제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루펠라가 선택하는 거지.”
라골이 진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공작부인의 부탁이 있었어도 ‘그 선택’은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 바뀐 것일까. 제 시선을 느꼈으면서도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도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라골이 픽, 실소를 흘리자 그를 향해 베개가 날아왔다.
진저가 역겨운 표정을 짓지 말라며 베개를 던진 것이다.
‘좀 전의 생각은 취소다.’
역시 마님의 몸이라 귀여워 보였던 것이다.
* * *
진저는 아내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뒹굴거렸고, 그녀는 내내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라 남편의 강요였다.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요?”
“아, 두통이 생길 것 같은데…….”
그만두려고만 하면 이렇게 협박을 했다. 처음 몇 시간은 함께 있어 주지 못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어린애 같은 투정이 귀엽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성가셨다.
그녀는 귀찮다는 듯 손을 설렁설렁 움직였다.
“당신, 내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 줄 알긴 해?”
“위험하다고요?”
“배 속에 애를 키우고 있다고.”
“애가 괴물이라도 돼요?”
“어쨌든 잘해줘야 한단 말이야. 임신했을 때 못하면 평생 남는다잖아.”
“기가 막혀서…….”
가만히 있으니 한도 끝도 없었다. 엘리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배가!”
역시 또 엄살이었다.
“그럼 당신은 그란디아에 남아 있어요.”
“뭐?”
“전 예정대로 이틀 후에 란델로 출발할 거예요. 당신은 몸이 너무 위험하니 그란디아에서 아이까지 낳고 오세요.”
“잠깐만! 엘리사!”
엘리사가 벌컥 문을 열고 나섰다.
처음 몇 주는 그녀가 예민한 탓에 몸이 좋지 않았으나 그 후로는 입덧도 심하지 않았고 잠도 잘 잤다.
그녀가 임신한 줄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아이가 몹시 순한 거라고.
그렇게 착한 아이의 핑계를 대다니. 엘리사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곧 진저가 그녀를 쫓아왔다.
“정말이야, 몸이 안 좋아. 입덧도 하잖아.”
“입덧은 이미 예전에 멎었어요.”
“아니야. 정말이라…… 욱!”
엘리사가 걸음을 멈추고 남편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긴 했는데 사실인지 알 순 없었다.
‘아침에도 그러더니.’
엘리삭 홱,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복도에 홀로 남은 진저가 애타게 아내를 불렀다.
“정말이야! 당신이 없으면 배도 아리고 음식도 잘 안 넘어간다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너무 해댄 통에 신뢰를 잃어버렸다.
“여보!”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엘리사는 이미 뿔이 나 저 멀리 사라진 상태였다.
* * *
그녀가 향한 곳은 지하 성전이었다. 어젯밤에 몸이 바뀐 탓에 마력을 얼마 주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어제 몫의 마력을 채워놓으려 했다.
“공주님.”
“파울로?”
“마력을 주입하러 오신 겁니까?”
“네. 파울로도요?”
“예.”
파울로가 관을 열었다. 금세라도 눈을 뜰 것 같은 사내가 관 안에 잠들어 있었다.
“젊음이 아깝습니다. 이 사내는 공주님께 좋은 사람이었습니까?”
“제게도, 모두에게도 좋은 사람이었어요.”
“어떤 사람이었죠?”
“사랑하는 여자에게 결핍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아 마음까지 죽인 남자였어요.”
파울로가 낮게 웃었다. 자신과는 다른 남자였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그녀를 궁지에 몰았다. 그리하여 그 여자의 숨을 십수 년이나 빼앗았다.
엘리사가 파울로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어머니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어 후회를 한대요. 그게 시간이 준 가장 큰 벌이라고.”
“예나 지금이나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어요. 시간이 준 벌을 받기에 저는 너무 열심히 살았거든요. 제가 후회하려면 태어난 것조차 탓해야 하는데 저만은 제 존재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제 아이와 남편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요.”
“맞습니다.”
“그러니까 파울로도 후회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예?”
엘리사가 한쪽 눈썹을 늘어뜨렸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기로 했어요.”
“공주님…….”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픈 일이더라고요. 그러니까 파울로가 진 죄, 이렇게 갚아주세요.”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제 마음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면 돼요.”
“그건…….”
“어머니는 제게 빚이 있대요. 딸이 어떻게 어머니에게 빚을 받겠어요. 그러니까 파울로가 어머니에게 진 빚, 제게 대신 갚으세요. 그럼 저도 어머니의 빚을 받지 않아도 되잖아요.”
왜 왕이 딸을 미워함과 동시에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나 리즈 왕비와 닮았다.
파울로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어머니는 폐하를 선택하셨지만, 저는 파울로를 선택할게요.”
그가 손으로 눈을 덮었다. 그녀의 마음이 감사하고 기뻤다.
그랬다. 그는 아직도 리즈 왕비, 아즈렌에 대한 빚을 청산하지 못했다. 레이라 부인이 왕궁에 들어오게 만든 일의 첫발은 자신이 떼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의 인생에 있어 족쇄와 같았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을 듣는 순간 족쇄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맹세하겠습니다.”
파울로가 엘리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족쇄를 풀어주신 은혜,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갚고 또 갚겠습니다.”
“자식에게 은혜를 갚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불민한 백성이 왕국의 보배에게 청합니다.”
“파울로…….”
“들어주시겠습니까?”
납작 엎드린 그가 고개만 들어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네…….”
“이름을 부르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엘리사가 물기 어린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 아가야…….”
주저앉은 그녀가 파울로를 끌어안았다.
“고맙다.”
이것이 가장 자애로운 신관으로 역사에 기록된 23대 교황인 파울로, 그리고 첫 여성 마탑주이자 ‘실수’로 가장 강력한 파괴 마법을 만든 엘리사 아즈렌 그웬이 성국과 마탑의 친교에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엘리사와 리즈 왕비, 아즈렌은 처음이자 마지막 독대를 했다.
리즈 왕비는 첫날의 혈색을 잃었다. 점점 더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모레 출발할 거예요.”
“처형대에는 나올 거니? 아이가 걱정되는구나.”
“견뎌준다면 보고 싶어요. 하지만…….”
리즈 왕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이 시체처럼 차게 느껴졌다.
“저희가 출발한 후 이튿날이 어머니가 떠나시는 날인 걸 알아요. 서운하신가요?”
“그럴 리가 있겠니. 작별 인사를 하게 해준 네게 감사할 뿐이지.”
“어머니를 살린 건 아버지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어요.”
리즈 왕비가 딸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란다. 어찌 네 속을 모르겠니.”
딸은 마음 약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복수가 악의 증거라는 건 너무나 부조리한 말이었다. 선한 이는 희생하고, 악한 이는 거머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지 않은가.
“네가 가장 마음 아파할 걸 알아.”
“…….”
“아가야, 원망하렴. 원망하고 원망해서 내가 네 어미였다는 사실까지 부정해.”
“…….”
“자격 없는 부모는 잊으렴.”
리즈 왕비가 엘리사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 확연히 부푼 상태가 아니었으나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속에 자리한 씨가 엘리사 인생에 얼마나 큰 보물이 될지. 그녀에게 엘리사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어미의 꿈은 신관이었단다.”
“파울로에게 들었어요.”
“한때는 신을 미워했지. 내가 그리 바라 마지않은 것을 왜 내려주지 않았는가, 소리쳤어.”
“……제가 어머니께서 바란 것을 가졌군요.”
“축복이지.”
“어머니…….”
“그 마력이 내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해방시켜 줬으니까. 아마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의 마력에 따라 어미의 명이 달라진다는걸.”
엘리사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애초에 마력이 강하지 않아 너를 낳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 하지만 너는 다를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늘을 가르고 우레를 내렸어.”
“…….”
“일기장은 모두 해석했니?”
“아니요. 아직…….”
리즈 왕비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엘리사가 그녀에게 일기장을 건넸다.
리즈 왕비가 손을 펼쳐 일기장을 훑었다. 그러자 너덜너덜했던 부분이 마치 새것처럼 바뀌고, 해석할 수 없었던 몇몇 글씨가 달라졌으며 글자들이 재배열되었다.
그녀는 다시 딸에게 일기장을 건넸다.
“이건…….”
바뀐 일기는 ‘어머니’의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 있던 일, 왕궁에 들어와서 있던 기쁜 일과 슬픈 일, 그녀가 얼마나 왕을 사랑했는지가 모두 사라지고 아이를 임신하였음을 알게 된 날이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네게 도움이 될 거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쓴 일기에서 그녀가 엘리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네 외조모의 기록이다.”
그녀는 양피지 꾸러미를 건넸다.
“나는 너와 달리 마력이 적어 평범한 태아와 다르지 않았지만, 나와 너의 잉태 기간 중 유사한 부분이 있더구나.”
엘리사가 붉은색으로 체크된 부분을 보았다.
“123일. 방 안의 물건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이가 태중에서 장난을 친 모양이다.”
“그건 내 기록이야. 네 외조모의 것을 보면 125일 즈음에 그 비슷한 일이 있어.”
“139일.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곳마다 꽃이 피고 새순이 돋았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가. 꽃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해바라기밭을 만들어야겠다.”
“그즈음에 어머니는 죽은 화분이 살아나는 걸 보셨지. 마력량의 차이인가 보다.”
2주 정도의 기간을 두고 사건이 일어났다.
“네가 주의해야 할 건 200일 이후란다. 200일 이후부터 출산 후 3년까지 태아의 마력이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지.”
“그래서 별궁과 에튼궁에 결계를 친 건가요?”
“파울로의 실력이야 말에 무엇하겠니. 그런 파울로도 몇 번이나 혼절했어. 네가 마탑에 들어가기 전 아이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면 걷잡을 수 없으니…….”
“그건 걱정 마세요.”
엘리사가 드레스 아래 감춰져 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리한의 출입증이에요.”
그는 그녀가 마탑의 후계가 되겠다고 하자마자 폭탄 떠넘기듯 출입증을 넘겨주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교육을 받겠다고?”
“어머니는 그란디아에서 자라셔서 모르시겠지만, 마탑은 성국과 달라요. 마탑에 속하기 전에 정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죠.”
리한은 말했다. 이 마력 지상주의를 바로 ‘난 놈만 해 먹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니?”
“할 수 있어요. 이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예요.”
“장하구나.”
“이런 힘을 갖고 태어나게 해주셨으니 잘 살기 위해서 써먹어야죠.”
리즈 왕비가 허탈하다는 듯 웃어버렸다.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딸이 어느새 훌쩍 커버렸다. 그녀 자신보다도 크게.
“그이가 그러더라고요. ‘있는 건 당연히 써먹고, 없는 것도 어떻게든 써먹어야 한다’고.”
“참 괴상한 사위야.”
“그러게요. 이상한 남편이에요.”
모녀가 마주 보며 웃었다.
한참 엘리사를 보고 있던 리즈 왕비가 탁자 위에 약병을 올려놓았다.
“이건 뭔가요?”
“네 남편이 부탁한 거야.”
“네?”
“그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더구나. 네 외조부가 외조모에게 남긴 선물이란다.”
“전해주면 되나요?”
“그래. 그리고 네 부탁은…….”
리즈 왕비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왕이 기거하는 본궁이 보였다.
“어떻게든 죽기 전에 확답을 받아놓으마.”
“……그리울 거예요.”
“엘리사, 나는 레스칼포네족으로 태어나 좋았던 게 없단다.”
레스칼포네족이기 때문에 남편에게 아이를 잃을 뻔하기도 하고, 시모에게 부정당하기도 하였으며 사랑하는 아이를 홀로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단 하나 선물이 있었지.”
“…….”
“너를 다시 보게 된 것. 네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게 된 것. 그게 여신이 내게 준 선물이야.”
“…….”
그녀가 딸을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이 마음을 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말인데도, 네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구나.”
“어머니…….”
“내내 행복하거라.”
부디 자신의 존재가 아이의 인생에 기쁨으로 남기를. 그녀는 딸을 끌어안고 소망했다.
* * *
루펠라는 하염없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세상은 ‘그날’ 이후로 망가져 버렸는데 세상은 언제나 와 같이 돌아간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쾌청했다.
루펠라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없는데 어떻게 이리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없는 세상이 어떻게 이다지도 아름답단 말인가.
‘아니, 사실 가장 끔찍한 건…….’
루펠라가 힘없이 웃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당신 없는 세상에 익숙해질까?’
이 무슨 어리석은 질문이란 말인가. 견딜 수 없으면서.
괴로웠다.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매번 아른거리는 그의 잔상도.
처음엔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다. 그가 남기고 간 것들이 그녀의 몫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환영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렇게 깨달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여자임을.
죽은 후에도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차라리 같이 묻혀 영겁의 세월 동안 그의 분노를 받아내는 게 나았다.
루펠라가 베갯잇 사이에서 종이에 싸인 무언가를 꺼냈다.
루펠라는 손에 스푼을 쥐여주는 유모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드세요.”
“…….”
“제발 먹어!”
마피 부인이 스푼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깟 놈이 뭐라고 네가 죽는시늉을 해!”
“…….”
“루펠라!”
마피 부인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잘 들어라.”
“…….”
“너는 대륙에서도 가장 부강한 나라의 공작 영애야. 네가 가질 수 없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네 오빠가 그웬 공작이고, 공작부인은 마탑의……!”
“그거였어?”
루펠라는 초점 없는 눈으로 마피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새언니를 받아들인 거야?”
“…….”
“그럼 그 사람은 영원히 인정하지 않았겠구나.”
“그건……!”
“그 사람이 살아 돌아와도 나는 그를 포기하지 못할 텐데, 유모는 그 사람에게 또다시 상처를 줄 테지.”
알고 있었다. 그가 마피 부인에게 갖은 모진 소리를 들었다는걸. 1년 전, 그가 말없이 떠났던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음도.
선한 체, 그 사람에게만은 약자인 체, 사랑에 빠진 가련한 여성인 체하느라 숨긴 것도 있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유모를 막지 않은 건…….”
“뭐?”
“내가 누군가에게는 가치 있는 사람인 걸 알려주고 싶어서였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사실은 그 사람이 맞아. 난 자존심을 모두 버리지 못했어.”
“루펠라…….”
“내 사랑에 빠져 그 사람이 안 보였어.”
루펠라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란 이렇게 이기적이었다. 아니,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숨을 쉬고, 누군가의 걱정을 받고, 밥을 먹고, 그를 그리며,
살아간다.
살고 있었다.
살아졌다.
루펠라가 제 뺨을 쥔 마피 부인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화가 나서 거짓말을 했어. 유모는 내 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사람이야. 누군가에겐 악역이더라도 내겐 늘 영웅이었어.”
마피 부인이 얼른 그녀의 뺨에서 손을 뗐다. 유언이라도 남기는 듯한 그녀가 불안했다.
“그러지 마라.”
“나를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던 유모를 기억해. 작은 생채기에도 가슴 시려 하던 유모를 기억해. 내게 한없이 주고 싶어 하던 유모를 기억할 거야.”
“하지 마! 왜 이러는 거야! 너희 남매가 내게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어?! 이런 꼴을 보려고 하루에 몇 번씩 죽을 각오를 하며 너희를 키웠는지 알아?!”
마피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랑해 마지않는 아이의 얼굴이 환영처럼 일렁거렸다.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결심한 적이 있었기에 지금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바닥 보듯 훤하게 알 수 있었다.
마피 부인이 주저앉아 루펠라의 손을 쥐었다.
“당장은 죽을 것 같을 거다. 숨도 쉴 수 없이 가슴이 아릴 거야. 그런 순간은 인생에 몇 번이나 온다. 나도 그랬어. 남편을 잃고, 아이를 잃고, 동생을 잃었어. 하지만 세상은 빼앗아간 만큼, 꼭 그만큼 선물을 내린단다. 내게 너희가 그랬듯이.”
“……나를 키우면서 행복했어?”
루펠라의 손등에 마피 부인의 눈물이 추락했다.
“그럼. 가족을 모두 빼앗기고도 미련했던 여자가 이리 독해질 만큼.”
“그럼 됐어요. 나도 유모의 딸로 살아 행복했으니까.”
마피 부인이 루펠라를 끌어안았다.
“그래, 살자. 누구보다 너를 사랑하는 내가 있잖니.”
마피 부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루펠라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 두 배를 넘게 산 유모에게 어떻게 세상을 논할까. 하지만 유모, 하나는 알겠어.”
“…….”
“유모의 깨달음이 타인의 깨달음이 될 순 없어. 난 유모와 다른 사람이니까.”
루펠라의 손이 그녀의 등에 올라갔다.
“고마웠어요.”
그때, 어떻게 해서도 루펠라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루펠…….”
어깨가 축축했다. 그건 몹시 기이한 감각이었다. 등으로 흐르고 있는 이것이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마피 부인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녀의 등에 흐르고 있는 건 루펠라, 그 자체였다. 그녀의 생명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두려워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루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그렇지?”
루펠라는 대답이 없었다.
“네가 내게 이처럼 잔인할 리 없어.”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제발…….”
마피 부인은 힘없이 미끄러지는 그녀를 붙잡지도 못했다.
엘리사는 리즈 왕비가 준 일기장을 읽고 있었다. 행복한 그녀를 보는 진저 또한 미소를 지었다.
부부의 차 시중을 들던 라골도 오랜만에 평화로운 그들이 반가웠다.
“그렇게 좋은가?”
“재미있어서요. 제가 이렇게 말괄량이였네요.”
“어쨌길래?”
“파울로가 마력을 못 쓰게 하니까 그의 머리를 쥐어뜯었대요. 아기가 어찌나 힘이 세던지 머리카락을 한 움큼 뜯어놨다고…….”
“하하.”
진저가 그녀의 뒤에서 일기장을 들췄다.
“나도 읽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당신의 기억을 공유하고 싶어.”
“부끄러운 이야기도 많아……”
쾅!
허락도 없이 문이 열렸다. 놀란 엘리사와 진저가 침입자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마피 부인이었다.
진저가 인상을 썼다.
“공작부인의 침실에 멋대로 침입……!”
“바뀌셨습니까?”
다급한 목소리에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
그녀는 대뜸 진저의 모습을 한 엘리사에게 무릎을 꿇었다.
“마피 부인!”
손을 비비며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에 진저의 얼굴이 굳었다. 엘리사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려주십시오.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미쳐서! 다 제 죄입니다! 아가씨는, 그 아이는 죄가 없어요!”
“루펠라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마피 부인이 엉금엉금 기어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살가죽을 다 벗겨내셔도 좋습니다. 고문도 견딜 겁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진저가 마피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불길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저를 죽여주세요, 마님!”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진저가 급히 문을 뛰쳐나갔다. 라골 또한 던지듯 주전자를 내려놓고 그의 뒤를 쫓았다.
“마님, 제발…….”
두 손을 비비는 마피 부인의 표정이 간절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요!”
마피 부인은 이 두려운 일을 믿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진저의 아이가 욕심나 남매를 그란디아로 이끈 건 자신이었다. 그녀를 죽인 것도 자신인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아아! 아아아!”
마피 부인의 가슴에 새빨간 생채기가 몇 개나 생겼다. 상처에서 피가 보이기도 했다.
엘리사가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피 부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만 움직였다.
“……살아 있나요?”
“숨이, 숨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당장 파울로를 불러와요. 리한도……. 그리고 의사를…… 또…….”
쿵쿵,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마님! 제발 마님께서……!”
“내가 가서 볼 테니까! 내 말대로 하라고!”
엘리사는 여전히 자신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마피 부인을 밀쳐내고 루펠라의 방을 향해 뛰었다.
그녀의 방은 이미 의사와 그를 보조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들을 헤집고 루펠라에게 향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라골이 고개를 들었다.
“살릴 수…… 살릴 수 있는 거죠? 죽지 않는 거죠?”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창백해진 라골이 그의 멱살을 쥐었다.
“당신 의사잖아! 사람 살리는 의사! 아직 이렇게 따뜻한데 어째서……!”
“매, 맹독입니다. 그란디아엔 이 독을 해독할 수 없는 사람이 없어서…… 신관이 아니라면 어렵습니다. 하지만 신관은 성국에 속한 나라의 왕족, 혹은 귀족만 치료 가능한지라…….”
“공주님!”
파울로와 리한이 방으로 뛰어들었다. 파울로가 루펠라의 맥을 짚었다.
“기하스엘의 독이래요!”
“음독한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너무 늦었다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당황한 의사가 파울로를 잡았다.
“시, 신관장! 이분은 란델의……!”
엘리사가 고함을 내질렀다.
“알고 있으니까 입 다물어! 책임은 모두 내가 져요. 지금 당장 해독하세요.”
고함을 내지른 자가 공주인지 모르는 이들은 ‘과연 그웬 공작, 성질이 개 같다’며 마른침을 삼켰다.
진저는 말없이 루펠라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나오십시오. 제가…… 이건 뭡니까?”
파울로가 진저를 떼어내자 루펠라의 손이 떨어지며 쥐고 있던 쪽지가 보였다.
진저가 쪽지를 펼쳤다.
[오빠에게.
그렇게 미웠는데 왜 마지막으로 편지를 쓰는 사람은 오빠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까?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친남매와는 다르다고, 그러니까 기대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세상의 유일한 가족으로 느꼈나 봐.
오빠가 내게 언제나 져주었다는 걸 알아. 나 같은 사고뭉치를 보호하고 그웬의 영애로 자라게 해줘서 고마워.
오빠, 더 이상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 오빤 모진 사람이 아니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 뿐이야.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라 말해주지 못했어. 오빠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언니여서 기뻐. 먼 곳에서 언제나 오빠를 응원하고 있을게.
나의 유일한 가족, 부디 행복하길.]
진저가 쪽지를 구겼다.
‘못난 자식.’
그에게도 그녀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들개처럼 살아가야 하기에 가족애를 꽁꽁 숨겨두었을 뿐 소중했다.
그레닉을 허락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녀가 소중했기 때문이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아이가 손에 물을 묻히는 게 싫어서 그녀의 감정이 얼마나 깊고 뜨거운지 알면서도 외면했다.
이토록 끔찍한 순간엔 누구나 자신을 탓하게 된다. 그녀를 사랑하는 모두가 그랬다. 이 소식을 듣고 뛰어온 기사들도, 라골도, 마피 부인도, 그리고,
진저와 엘리사도.
파울로가 그녀의 입을 열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마력을 불어넣자 입 안에서 흑진주처럼 까맣고 빛나며 동그란 것이 공중에 떠올랐다.
그로부터 네 시간이 지났다. 해독한 파울로는 혼절 직전이었다. 새벽마다 그레닉을 살핀 데다 해독하기 위해 파장이 맞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가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위험한 순간은 지났습니다만 경과는 지켜봐야 합니다.”
“깨어나면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할 수 있겠죠?”
엘리사가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정도의 맹독이니 아무래도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후유증이요?”
“맹인이 된다거나 팔다리에 마비가 온다거나…….”
엘리사가 입을 가렸다.
루페라는 잠든 것처럼 색색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언제나 와 같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인데 후유증이 남는다니.
그녀가 눈을 꼭 감았다.
“시간이 지나면 치료법이 개발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숨을 구한 게 어디입니까.”
“수고했어요…….”
파울로가 진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엘리사에게 속삭였다.
“공을 잘 다독여 주십시오.”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방문을 열어주었다.
파울로가 방을 나서자 부부와 루펠라만이 남게 되었다.
그녀는 간이 의자에 앉아 멍하니 루펠라를 쳐다보는 남편을 끌어안았다.
“……당신이 그랬지. 후회할 거라고.”
“여보…….”
“그 녀석에게 작위를 내릴걸. 결혼시켜 내려보냈다면 이런 일은……”
“작위를 내렸어도 자작이잖아요. 공작 영애가 자작에게 시집을 가는 건 힘들어요. 카르트가도 있었고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현실이 너무…….”
“알아. 그 이해관계 때문에 저 녀석이 간절히 원하는 그 하나를 들어주지 못했다는걸.”
“여보, 제발 스스로를 원망하지 말아요.”
엘리사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제 죄예요. 제가 루펠라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해요. 저를 위해 레이라의 침실에 숨어들어서 타깃이 된…….”
“위로 안 해도 돼. 저 녀석이 스스로 한 일이잖아.”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루펠라를 지켜주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차라리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줄 것을. 다시 좌절하게 될까 두려워 입을 열지 못했다.
진저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부모 잡아먹은 놈은 동생까지도 잡아먹는군.”
“살아날 거예요.”
“그 녀석 없는 세상에서 불구가 되어 혼자 살아가라니. 끔찍하지 않나.”
엘리사가 입술을 꾹 베어 물었다.
“나한테 맡겨 줘요. 방에 가서 좀 쉬…….”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그녀가 그를 노려보았다. 진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단 한 번도 말을 놓은 적 없는 여자였다.
“알아! 깨어나도 살 의지가 없다면 어차피 또다시 자진할 거란 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게 얼마나 괴로운 건지도 알아. 곧 어머니를 잃게 될 나니까 더 잘 안다고!”
“…….”
“당신이 그러면 난 나를 원망해야 해. 당신과 결혼한 사람이 나라서, 나처럼 사연 많은 여자가 당신의 아내가 되어서 루펠라가 이렇게 된 거라고 나를 원망하고 만단 말이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나는 당신을 믿어. 모두가 틀리다고 해도 당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나 좀 믿어줘.”
“…….”
“내가 당신의 동생을 살려줄게요.”
진저가 제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엘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당신을 믿어.”
이 말이 듣고 싶었다.
다음 날, 새벽이 되었다. 푸른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루펠라는 악몽을 꿨다. 어디로 가도 길이 막혀 있었다. 두렵고 외로워서 도움을 구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으…….”
그녀가 신음을 흘렸다. 그때,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등 위로 올라왔다.
“일어났어?”
“……오빠야?”
붉은 머리카락을 보고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죽지…… 못했나 보네.”
“욕해주고 싶어.”
“뭐?”
루펠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졌다. 진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표정이 보였다.
“언니예요?”
“욕 잘하잖아요. 알려줘요.”
“화…… 많이 났어요?”
“아프지만 않았으면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루펠라가 쓰게 웃었다.
여린 새언니가 아파할 줄 알면서 이 길을 선택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이기적인 년이니까요.”
“그러네요. 이기적인 년.”
루펠라의 눈이 커졌다.
“욕 잘하네?”
“다음엔 뺨을 내리쳐줄 거예요.”
“다음은 없어요. 실패하지 않을 거니까.”
“정말 이기적이에요! 어떻게 내 앞에서!”
루펠라가 웃어버렸다.
“오빠의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군요.”
엘리사는 그녀가 미웠다. 애간장을 태웠으면서 일어나자마자 농담을 하는 게 화가 났다. 주먹을 쥔 그녀가 씩씩거리며 루펠라를 노려보았다.
“언니, 나 좀…….”
“…….”
“나 좀 보내주면 안 될까요? 이기적인 부탁인 거 알아요. 언니를 힘들게 할 것도 알고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 없는 세상이 불바다 같아요.”
“…….”
“온몸을 태워서 아파. 견딜 수가 없어.”
엘리사는 루펠라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한마디만 더 해요. 그럼 다 때려치울 테니까.”
“네?”
“당신이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 살리지 않을 거라고.”
잠시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펠라는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다. 하지만 심장이 너무나 크고 빠르게 뛰었다. 마치 ‘넌 제대로 들었어’ 하고 말해주듯이.
“죽으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
“다 끝이야. 루펠라는 절대 그 사람 곁에 못 가요. 남은 사람들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은 당신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귀하게 간 사람과 함께할 수 있겠어요?”
“언니…….”
“그러니까 살아서 함께해요.”
“언니!”
루펠라가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잘 자고, 잘 먹어요. 날 볼 수 있으니 눈은 멀쩡하고. 팔과 다리는…….”
“살아날 수 있어요?”
“전과 다름없이 건강하고 활기차게 지내겠다고 약속해요.”
“할게요! 약속할 수 있어요!”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하진 않아요. 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그는 레스칼포네족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리즈 왕비가 살아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녀가 죽기 직전 몸의 시간을 정지시켜 놨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엘리사의 마력이 열쇠로, 클라우디아의 시간을 모두 흡수해 딱 열흘의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완전히 살아날 순 없었다. 그녀는 그레닉처럼 검상을 입은 게 아니라 애초에 몸이 생명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닉의 시간을 딱 하루만, 그러니까 그날 전으로만 되돌릴 수 있으면 돼요.”
“그럼……!”
“다시 말하지만 확실하지 않아요. 지금 대륙에서 가장 마력이 높은 셋이 노력했는데도 아직 일어나지 못했잖아요.”
루펠라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희망이 있는 거죠?”
“네, 하지만 5년이 될 수도 있고, 10년이 될 수도 있어요. 어쩌면 평생 눈을 뜨지 않을 수도 있고요.”
가슴이 벅차서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울음덩어리를 되삼켰다.
“루펠라가 그렇게 간절하다면 기다릴래요? 기다릴 수 있겠어요?”
“네…….”
그가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도 희생했듯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루펠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