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복수
엘리사는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엘리사.”
그제야 눈시울에 차올랐던 눈물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엘리사.”
“…….”
“엘리사.”
“…….”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울음에 먹혀 나오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고 싶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
그의 등장에 놀란 좌중이 시끄럽게 그와 엘리사에 관하여 떠들기 시작했다.
놀란 건 엘리사나 좌중뿐만이 아니었다. 이 타이밍에 등장한 그웬 공작을 보는 클라우디아의 표정 역시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진저 그웬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였다. 이런 자리에 나설 리 없다는 계산에서 엘리사를 몰아세운 건데, 어째서 그가…….
클라우디아가 모친을 쳐다보았다.
레이라 부인은 입꼬리만 올려 웃고 있었다. 눈빛이며 분위기는 냉랭했다.
“공이라니요?”
그는 대답보다 먼저 아내를 일으켜주었다.
“내가 그란디아에 들어오기 위해 신관을 매수했다고 한 거요.”
진저는 란델의 사람이었다. 그 말은 이 일이 밝혀지면 조금 곤란해지겠지만 엘리사만큼 큰 파장은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공이 왕궁에 온 지 사흘입니다. 그 안에 시녀와 일을 짜고 신관을 매수했다니요. 어떻게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진저가 좌중 속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루펠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엘리사를 부축했다.
레이라 부인이 단상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진저는 그런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인파 속으로 들어가는 루펠라와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 대답하…….”
진저가 레이라 부인을 지나쳐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왕에게 다가갔다.
“언제까지 방종을 묵과하실 겁니까.”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진저와 레이라 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란디아에선 왕을 치마폭에 감싼 레이라 부인에게 맞서려는 자가 없었다.
란델은 대륙에서 가장 군권이 강한 나라, 그리고 레이라 부인에게 맞서는 저 사내는 란델에서도 10년간 가장 전쟁에 많이 참전한 공작이었다.
그에 비해 그란디아는 성국에 속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방위조차 할 수 없는 나라였다. 성국에서 군권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저 그웬이 싸우자고 들면 나라에 망조가 든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기에 저 레이라 부인마저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란델을 수호하는 4공 중 하나이기 이전에 폐하의 사위입니다. 허락하신다면 감히 폐하 앞을 가리는 자의 목을 베겠나이다.”
“란델의 귀족이 그란디아 왕궁에 검을 든다!”
레이라 부인이 찢어지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란디아의 신하들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쟁을 이르십니까.”
“누구 앞이라고 감히 입을 여는가.”
진저의 말에 레이라 부인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하찮은 신분이었던 건 오래된 일이었다. 왕을 휘두르는 여자는 여왕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란디아의 여왕이라 칭함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내부에서의 일이고, 타국의 공작과 트러블을 만들 순 없었다.
‘저렇게까지 앞뒤 생각 없이 싸고도니…….’
물론 레이라 부인도 함부로 움직일 순 없었다. 하지만 왕궁은 완전히 레이라 부인의 영역이었다. 그녀의 영역에서 기 싸움을 하려 들면 칼침 맞기 십상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어리석은 자인가? 아니면 목숨도 아깝지 않을 만큼 공주에게 푹 빠졌다는 건가?’
그녀가 클라우디아를 노려보았다. 딸이 그웬 공작의 마음에 들었다면 없을 일이었다. 사흘이 지났는데도 어찌 사내 하나 취하지 못했단 말인가.
결국 레이라 부인이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웬 공작이 있는 자리에서 공주를 옭아매는 건 무리수였다. 엘리사 공주가 돌아오고 왕이 이상했다. 그래서 자신답지 않게 조급하게 무리수를 둔 것이다.
“폐하, 공께서 오해가 있으신가 봅니다. 허락하신다면 공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데, 제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레이라 부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치마를 넓게 펼쳤다.
왕은 말없이 레이라 부인을 쳐다보았다. 지금 트러블을 일으킬 순 없었다. 어느 쪽의 편을 들어도 다치는 건 한 사람이었다.
왕의 시선이 파리한 표정의 딸에게 닿았다.
“그리하라.”
“공, 저는 폐하의 은혜로 내궁의 살림을 잠시 맡고 있습니다. 항간에 불온한 소문이 있어 엘리사 공주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소란을 벌였나이다.”
개도 안 믿을 소리였다.
엘리사 곁에 있던 란델의 개가 ‘미친, 개소리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곳에 엘리사 공주님의 성정을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공주님은 아주…….”
레이라 부인과 엘리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바른 분이시지요.”
엘리사가 소리쳤다.
“그럼 다른 오해도 풀어주시죠. 저 아이, 저를 오랫동안 보살피던 아이입니다. 제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자가 부러 엮은 것이 분명합니다. 제 성정을 아시니 그 또한 인정하시겠지요?”
클라우디아가 모친에게 무어라 소리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그녀까지 나섰다간 소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하지만 시녀 헬렌을 그냥 놓아줄 수도 없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엘리사는 아주 조심스러워서 이런 실수를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를 일이다.
레이라 부인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꼬리가 올라갔다.
“……저도 그리 생각…… 합니다.”
왕과 진저, 엘리사와 클라우디아를 비롯한 좌중 모두가 느꼈다. 이번 일은 언젠가 갚아주겠다는 레이라 부인의 속내를.
“풀어주어라.”
레이라 부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엘리사가 황급히 헬렌에게 뛰어갔다.
강직한 하녀는 매질당해 쉰 소리까지 내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고운 드레…… 스예요.”
“헬렌.”
“제 피에…… 젖게 할 순 없다…… 고 말씀드리는 겁…… 니다.”
그녀들에게 마크빌이 다가왔다.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부축할게요.”
“곧 쓰러지실 것 같습니다. 부디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그쪽이 이분에게도 나을 겁니다.”
란델은 구조가 몹시 경직되어 있어서 귀족이 하인이나 하녀에게 존대를 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의 말에서 헬렌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웬가의 닥터에게 진료하라 이르겠습니다.”
“꼭 좀…….”
“저는 이렇게 멋진 여성을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보다 살뜰히 보살피겠습니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질당했으면서도 주인의 이름을 토설치 않고, 곧 죽을 것 같은데도 주인의 걱정이 우선이었다. 기사보다 더 기사 같은 여자였다.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크빌이 헬렌을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란디아의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크빌 경은 그웬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란디아까지 소문이 자자했는데 호남인 외형과 더불어 귀족임에도 기사의 길을 걷는다는 말로 유명했다.
더욱이 마크빌 백작가는 카르트가와 더불어 그란디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자가 그란디아의 공주에게 몹시 공손했다.
“엘리사 공주가 제법 똑똑하게 살림을 했나 보네요.”
“미남이라더니 정말…….”
“함께 온 기사도 모두 아름답던데…….”
“그게 문제예요?”
“공주를 통하면 좋은 혼처를 찾을 수도 있잖아요.”
영애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었다.
연회 도중 일어난 사건은 이렇게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왕이 다시 소음이 찾아온 연회장 안에 선언했다.
“모두 오늘의 일을 아로새기라. 감히 왕족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자, 국왕 아데울리의 이름으로 단죄하리라.”
연회의 참석한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연회가 다시 시작되었다. 연회의 주인공인 그웬 남매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남편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니 엘리사 또한 회장에 붙잡혀 있었다.
하지만 부부는 붙어 있기만 할 뿐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루펠라가 자신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을 물어뜯을 듯이 쳐다보았다.
라골이 그런 그녀를 말렸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겠습니다.”
“다가오지 말라고 노려보는 거야.”
“공작가의 영애가 소문이라도 나쁘게 나면…….”
“내 소문은 란델에서도 최악이거든?”
그러니까 그란디아에서는 자중하라는 소리였다. 진저가 계획한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 소란이 일어나게 둘 순 없었다.
“제발 조용히 있어주세요.”
“그란디아 것들은 다 싫어. 제 나라 보배가 누군지도 모르고 여우 같은 것들에게 휘둘려서는.”
“그란디아는 란델과 다릅니다. 상하 구조가 그렇게 경직되지 않았어요.”
루펠라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경직되었든 안 되었든 요지는 멍청하다는 것이다. 고작 첩에게 휘둘리는 왕도 웃기고, 왕실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주제에 공주 노릇 하는 것들도 웃겼다.
제일 웃긴 건 레이라인지 하는 미친 여자였다. 제가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엘리사를 몰아세우는 게 같잖았다.
그때 튀어나가려는 루펠라를 말리기 위해 기사가 셋이나 붙어 있었다.
“필리아랬지?”
“예?”
“연회 시작 전에 저 계집애들이 말하던 그거.”
“아, 마님을 곤란하게 했다는 레이라 부인의 딸이요?”
“그래. 막 소리치고 꼬집고 그랬다며.”
“예, 동생 쪽인 필리아가 맞습니다.”
루펠라가 필리아의 인상착의를 떠올리며 회장을 수색했다. 중앙 테이블에서 깔깔대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 대, 굵은 곱슬의 흑발, 흑안, 콧등에 주근깨가 가득하고…… 저년인가?”
“아가씨, 입조심 좀…….”
“가만 있어 봐. 샴페인 들고 있는 저거 맞아?”
못되 처먹게 생긴 여자가 엘리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쳐다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비틀거리며 다가가고 있었는데 때마침 진저가 자리를 비워 엘리사 혼자였다.
“뭐야, 왜 또 언니에게 가?”
루펠라가 살금살금 여자의 뒤를 쫓았다. 라골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루펠라가 필리아라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으면 속은 시원할 것이다.
루펠라로부터 제 이모가 한 짓을 들은 라골은 마님에게 큰 부채감이 있었다. 자신에게 번듯한 지위를 준 것보다도 더한 부채감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녀를 평생 곤란하게 했다는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가 곤욕을 치르면 그 또한 기쁠 터였다.
‘누가 진저 녀석 동생 아니라고 막무가내인 것도 똑같아!’
계획이 어그러지게 할 순 없었다. 라골이 목소리를 낮춰서 루펠라를 불렀다.
“아가씨, 이 정도면 충분히 자리를 빛내셨으니 가는 게……!”
“언니!”
필리아와 엘리사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루펠라가 씩씩거리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어요?”
엘리사가 핏기 없는 얼굴로 루펠라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네? 저 여자가 뭐랬어요?”
“저 여자라니요!”
루펠라와 필리아는 많이 달랐다. 루펠라가 아이처럼 솔직하다면 필리아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솔직할 수 있었다.
루펠라가 소리치고 분노하는 게 주변 사람을 위해서라면 필리아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분노했다.
하지만 똑 닮은 점도 있었다. 성정이 불같은 것. 그건 찍어놓은 것처럼 똑같았다.
“백마 탄 왕자님? 언니에게 안 어울려? 방금 그런 말 들은 거죠?”
필리아는 거스터 후작 영애 사건으로 레이라 부인에게 크게 혼이 났다. 이번에도 사고를 치면 꼽추와 결혼시켜 왕궁에서 내쫓을 거라고 일축했다.
그녀는 씩씩거렸지만 루펠라의 말을 쉬이 받아치지 못했다. 언니에게서 그웬가의 사람과 마찰을 빚는 건 후작 영애 사건보다 더 큰일이라고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저는 쭈그러진 딸기같이 생긴 게.”
“뭐?”
“딸기는 맛있기라도 하지.”
엘리사가 당황하여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필리아가 루펠라를 노려보다가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사교계에 몸담았다. 우아하게 욕하는 법 같은 건 잘 알고 있었다. 저런 멍청이쯤이야 상대 가능하다고 믿었다.
“곤란하겠어요. 하나 있는 피붙이가 너무 아름다워서 영애가 많이 묻히잖아요.”
딱 그 나이 대만이 할 수 있는 말싸움이었다. 엘리사와 라골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하나 있는 피붙이야. 뭘 좀 알고 말해.”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교양 없이 반말이라니! 공께서 걱정이 크시겠네요!”
“차는 공 말하는 건 아니지?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묻는 거야.”
필리아가 루펠라의 팔을 잡으려고 하자 엘리사가 필리아의 손을 쳐 냈다.
손등이 붉어진 필리아는 잔뜩 당황하여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내게 소중한 분이에요. 말을 삼가고, 예의를 지키세요.”
루펠라 그웬이라면 몰라도 이런 바보 공주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잔을 잡고 있던 필리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루펠라가 당혹스럽다는 듯 라골을 쳐다보았다.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생각이 짧고 성질이 괴팍하대서 뺨 한 대 맞아주려 했다. 그럼 제대로 엿 먹일 수 있을 테니까.
“이게 아닌데…….”
“아가씨 생각은 훤히 보입니다. 마님이 아가씨를 얻어맞도록 두시겠습…….”
루펠라와 라골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사달이 났다.
흥분한 필리아가 엘리사를 향해 술을 뿌린 것이다.
“오빠!”
“주인님!”
그리고 그 술을 맞은 사람은 진저였다. 진저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 막았다.
당황한 필리아가 입을 떡 벌렸다. 그보다 더 당황한 사람이 있었다. 진저를 찾아다니던 클라우디아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다 젖으셔서…… 정말 죄송…….”
“괜찮아?”
클라우디아를 뿌리친 그가 아내에게 물었다.
필리아가 진저를 샐쭉 노려보았다. 술에 젖을 뻔한 게 뭐라고 이렇게 야단이란 말인가.
“저는 치마만 조금…… 당신은요?”
“그냥 술인데, 뭐.”
엘리사가 굳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고작 술이었다. 이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술.
그녀가 젖는 것도 싫어서 끼어든 남자였다. 도저히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랑스러운 남자.
엘리사가 말없이 그를 지나쳐 회장을 나섰다.
진저는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비틀거릴까 봐 걱정이라는 듯이.
루펠라가 진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는 동생이라도 틈을 주지 않았다.
루펠라는 재미난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낄낄거렸다.
“잘했다고.”
클라우디아인가 하는 계집애의 표정도 그렇고, 필리아 그 멍청이도 그렇고 아주 우스웠다.
‘모녀가 번갈아 사고를 쳤으니 큰일 났네.’
오랜만에 즐거웠다.
그것도 잠시, 루펠라가 자신과 함께 회장을 나서는 진저를 노려보았다. 저렇게 젖어놓고도 잘났다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미남 행세를 하고 있었다. 계집애들이 어찌나 꺅꺅거리는지 골이 다 아팠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뭘?”
“언니에게 물 뿌린 미친년 말이야! 다시는 그딴 짓 못 하게 손목을 부러뜨려야지!”
루펠라가 버럭 소리를 쳤다.
“알아서 할 거다.”
“내 성에 안 차기만 해봐.”
“하면?”
“그때는 오빠가 아니라 내가 알아서 하겠어.”
“그러든지.”
진저가 픽, 실소를 흘렸다.
남매의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클라우디아가 진저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공!”
그녀는 내궁에서 뜀박질을 할 만큼 정신이 쏙 빠져 있었다. 진저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술은…… 필리아가 너무 취해서…… 대신 사과드릴게요.”
“사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공주님과 저희는 자매처럼 자랐습니다. 그간의 인연을 봐서라도 마음을 풀어주시길 청합니다.”
“자매끼리는 이런 연회에서 술을 뿌리며 노나?”
“그건…… 필리아가 아직 어려서…….”
“어린 게 아니라 주제를 모르는 거겠지.”
클라우디아는 어쩔 줄을 모르고 손끝만 매만졌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저희는 폐하께서 양딸과 같다는 말씀을 들은…….”
진저와 함께 있던 루펠라가 기막히다는 듯 클라우디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란디아에선 사생아는 귀족이 아니라며? 이건 란델이 좀 낫네.”
클라우디아가 미간을 좁힌 채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그럼 넌 귀족이 아니겠네?”
“저는 폐하께서 양딸과 같다고……!”
“그래서 양딸이야?”
“…….”
“양딸은 내가 양딸이고.”
“영애도 이전엔…….”
“이전에 뭐. 입양되기 전 소개도 해야 돼? 나 카르트 후작가의 루펠라. 너는 어디에 누구냐?”
카르트 후작은 점잖은 자였다. 저런 미친 것이 핏줄이라곤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그란디아 왕궁에서, 그것도 제게 이런 말을 할 순 없었다.
“사생아라고 다 같은 줄 알아?”
루펠라가 손을 활짝 펴고 진저의 가슴팍을 퍽 내려쳤다.
“이쪽은 법으로 인정한 귀족, 그것도 란델의 4공 중 하나.”
그리고 턱 끝으로 클라우디아를 가리켰다.
“그쪽은 귀족도 뭣도 아닌 찌꺼기. 너는 오빠를 공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
“무례하시군요.”
“무례는 네가 하는 거고! 오빠를 공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왕궁에서 폐하와 우리 언니뿐이잖아!”
미친개는 란델에서나 그란디아에서나 가감 없이 제 광기를 뽐냈다. 진저는 그런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수수방관이었다.
“여기가 란델이었으면 네년의 혀를 쭉 뽑아서 리본을 맸어, 알아?”
“……사과는 다시 드리겠습니다.”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숙이고 남매에게서 등을 돌렸다.
“야! 어디 가!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야! 까마귀 같은 계집애야!”
눈도 머리도 다 새까만 게 속까지 새까맸다. 저런 재수 없는 계집애에게 당했을 언니가 가여웠다.
“이제 그 입 좀 닫아.”
“뭘 그만해! 나도 아카데미 나온 여자다 이거야. 쟤가 아무리 열이 받아도 법으로 어쩌지 못한다고. 쟤는 그냥 평민이잖아!”
다른 때 같았으면 이렇게 버럭 소리치는 루펠라를 그냥 두지 않았다.
“법으로 어쩌지 못해도 물리적으로 어쩔 순 있지. 내가 일을 벌이기 전까진 숨죽이고 있어. 그리고…… 오늘은 기특했으니 봐준다.”
“뭐? 붙어볼래?”
“이게 진짜 미쳤나.”
“아, 짜증 나!”
루펠라가 발을 쿵쿵 구르며 왕이 제 몫으로 내어준 방으로 향했다.
* * *
레이라 부인이 왕을 쫓았다. 왕은 침실에 들어갈 때까지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왕족의 명예를 실추시키면 제 손으로 단죄하겠다니. 그건 엘리사를 다치게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제가 모욕당하는 앞에서!
“폐하!”
그녀가 왕의 팔을 잡았다. 그녀를 돌아보는 왕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말씀드렸습니다.”
“…….”
“언제나 제게 상냥한 부군이 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레이라 부인을 쳐다보던 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의 손은 언제나 소름 끼쳐.”
그녀가 왕을 찢어져라 노려보았다. 남 보는 앞에서는 ‘내 여자’, ‘내 사랑’ 하며 그렇게 달콤하게 굴면서 단둘이 있을 때는 언제나 이렇듯 차가웠다.
그녀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되삼키고 부드럽게 입꼬리를 늘렸다.
“저를 다정하게 보아주세요.”
그녀가 왕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폐하의 눈빛이 봄바람처럼 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처럼 보아주지 않으시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살벌하게 변했다.
이 여자는 언제나 뱀 같았다. 제 몸을 스멀스멀 기어올라 목을 꽉 옥죄었다. 그러다 토라지면 제 딸을 향해 독니를 드러냈다.
“하나 남은 그 여자의 흔적까지 지우게 하지 말아주세요.”
“…….”
“저는 언제나 폐하께 다정한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레이라 부인이 한껏 야살을 떨었다. 그러나 왕은 그런 그녀의 등 한 번 쓸어주지 않고 매정하게 떼어냈다.
왕이 미소를 지었다. 단둘이 있을 적엔 절대 보여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레이라 부인이 작게 한숨을 흘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아름다운 남자였다. 미소 하나로 이토록 그녀의 애를 태우는 남자는 평생 이 사람이 유일할 터였다.
레이라 부인이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그대가 싫어.”
“폐하!”
“살면서 이처럼 싫은 사람은 그대가 유일해.”
“그만하세요.”
왕이 그녀의 귓바퀴에 입을 맞췄다.
“나는 그대를 경멸해.”
결국 참다못한 레이라 부인이 왕을 떠밀었다.
이건 선언이었다. 당신은 모든 것을 갖겠지만 그의 진심만은 절대 가질 수 없을 거라는 선언.
“폐하께서 하늘로 돌아가실 때, 그 옆에 누울 사람은 저예요. 우린 죽어서도 함께할 테니까.”
“그거 참 끔찍하군.”
“아, 오늘의 실수는 다음 월례 회의에서 갚아주시겠어요? 폐하의 묘에 그 여자가 아닌 제 시체를 함께 넣으라 선언하세요.”
그제야 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살이 다 썩어들어 뼈밖에 남지 않아도 폐하의 옆자리는 제 것입니다.”
레이라 부인이 황홀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 * *
진저는 엘리사의 방에서 그녀와 함께했다. 그녀는 몇 시간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진저는 하늘이 쪽빛으로 변할 때가 돼서야 입을 열었다.
“많이 화났을 테지. 당신에게 말없이 나 홀로 결정했던 건 미안해. 그래도 엘리사, 내 얼굴 좀 봐줘.”
엘리사는 남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등을 돌리면 꽉 움켜잡았던 자루가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이 보고 싶었는데 당신은 아니었나?”
“…….”
진저가 아내의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두려운 게 없던 내가.”
“…….”
“내 위에 아무도 두지 않던 내가.”
“…….”
“당신 없는 밤이 두려워졌어.”
그녀가 떠나고 하루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도, 앉아도 그녀의 환영이 곁에 있는 것만 같아서, 누군가 심장을 꽉 틀어쥔 채 놓아주지 않은 것 같아서.
그가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그의 손등에 뜨겁고도 시린 것이 툭, 떨어졌다.
누가 당신을 강하다고 말할까. 사내의 여자는 그 앞에선 한없이 여리고, 약하고, 작았다.
그녀는 치밀어 오른 울음소리를 되삼켰다. 그의 손등에 그녀의 이마가 닿았다.
진저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떨어뜨리려 하자 엘리사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세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는 무서워요. 평생을 장님 행세, 벙어리 행세하며 살았어요. 당신을 만나서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전 여전히 장남이고, 벙어리예요.”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를 지키고자 한 일이 그녀가 유년기의 고통을 떠올리게 해버렸다.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요. 여보, 전…… 당신에게서 아이를 지키고 싶어요.”
“…….”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게 비참해요.”
그녀는 그를 이해했다. 아이로 인해 남편의 목숨이 위험하다면 그녀라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선에서의 생각이고 감정적으론 달랐다.
아비가 자식을 해하게 만든 아내이자 어미.
그녀가 어떻게 아이를 죽이고 살 수 있겠는가.
“엘리사, 나는 혈육도 믿지 못하고 살았어.”
“네…….”
“친부라는 자가 죽었을 때 든 생각은 이제 이전보다 안전하게 살 수 있겠구나, 그것뿐이었어. 친모를 그리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내 핏줄이 귀한 걸 몰라.”
“네…….”
“나는…… 엘리사, 나는 당신이 너무 귀해서 당신에게도 나만 귀한 줄 알았어.”
“제게도 당신이 귀해요.”
엘리사가 그를 돌아보았다. 새빨개진 그녀의 눈이 보였다.
“하지만 여보, 언제까지나 우리 둘뿐일 순 없어요. 제가 당신 덕분에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난 것처럼 저도 당신에게 최고의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나 같은 아비를 둔 아이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좋은 부모인가, 항상 고민하세요. 저도 당신과 함께 고민할게요.”
살을 버리고 뼈를 취하는 삶이었다. 한 번에 두 가지를 가질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기에 아내와 아이를 모두 욕심내지 않았다.
하나를 선택한다면 아내였다. 자신 같은 아비를 둔 아이는 태어나 봤자 괴로울 테니까.
“어떻게 당신을 미워하겠어요. 미워하려 애써도 마음만 더 깊어졌어요.”
“그래…….”
“여보, 저는 당신과 아이와 함께 살고 싶어요. 제가 마음껏 욕심부리게 해주세요.”
“그래.”
진저가 엘리사를 끌어안았다. 엘리사 또한 천천히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딱 붙어 평생 하나로 지내기를 그녀는 간절히 소망했다.
멀리서 부부의 애틋한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 줄 새 옷을 쥐고 있던 클라우디아의 손에서 힘줄이 불거졌다.
* * *
“발가벗고 그놈의 침실에 들어가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든 했어야지!”
레이라 부인이 클라우디아를 향해 크게 호통쳤다.
“어떻게 사내 마음 하나 못 잡아!”
그러나 클라우디아의 신경은 온통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진저와 엘리사에게 향해 있었다.
“멍청한 것. 네가 그놈의 마음에 들었다면 어미가 이런 창피를 당하는 일은 없었을……!”
“어머니도 그러셨잖아요.”
“뭐?”
“폐하의 침실에 발가벗고 들어가셨어도 그분 마음 하나 못 잡았어요.”
“하!”
클라우디아가 제 모친을 쏘아보았다.
왕이 레이라 부인을 이용해 리즈 왕비를 지키려 할 때, 그녀가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질투의 불길에 사로잡혀 몇 날 며칠 비명 같은 울음소리만 흘렸다.
클라우디아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폐하의 약점을 잡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어머니는 없……!”
“그래서?”
클라우디아가 입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모친으로 인해 호의호식한 딸들은 어머니에게 큰소리 한 번 제대로 낼 수 없었다.
“그럼 너도 그웬 공작의 약점을 잡아. 말 한 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약점을 잡아서 네 손아귀에 움켜쥐어.”
‘그의 약점이 엘리사 공주라도요?’
클라우디아가 레이라 부인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저택에 오시던 날을 기억해요.”
레이라 부인의 숨이 거칠어졌다. 필리아라면 몰라도 클라우디아는 그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한참 사춘기였을 적에도 반항 한 번 없던 아이였다.
“남들은 어머니께서 폐하의 혼을 쏙 빼놨다고 떠드는데 정작 폐하는 어머니를 찾는 날에도 리즈 왕비 생각뿐이었어요.”
“그만해!”
“내 여자, 내 딸. 폐하의 입에서 왕비와 공주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적이 있나요?”
“클라우디아!”
“매일 우셨잖아요.”
클라우디아가 잠깐 말을 멈추고 모친의 주름진 눈가를 바라보았다.
“폐하를 사랑하시니까.”
“…….”
“저도 그렇게 살길 바라세요?”
클라우디아는 레이라 부인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밤마다 그녀를 그리는 남자의 곁에서 뜬눈으로 잠을 지새우는 것. 그것만은 결코 어머니를 닮고 싶지 않았다.
레이라 부인이 으득, 이를 갈았다.
그때의 분노를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다 무능하다 손가락질하는 왕은 사실 여우보다 약삭빠른 자였다.
그가 젊을 적엔 소피아 왕태후의 섭정으로 입을 떼지 못했고, 나이 들어선 제가 쥐고 있는 카드로 인해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레이라 부인은 평민이었다. 그것도 어미가 술집 작부인. 낯짝 반반하다는 것 빼고는 가진 게 없는 자신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자를 마음에 품었다.
레이라 부인이 열여섯이었을 무렵이었다. 그녀의 마을에 무신관이 났다. 무신관은 전쟁에 참전할 수 있을 정도로 신성력이 높은 신관으로 나라에 몇 있을까 말까 한 인재였다.
어린 왕은 파울로를 치하하고 성국에 그를 인도키 위해 마을을 찾았다.
그리고 그날, 그녀와 왕이 만났다. 광장에서 넘어진 그녀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미천하며 초라하고 더럽기 그지없던 자신에게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남자가 손을 내민 것이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순간이었다. 신이 자신을 위해 빚어주었다고 생각할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폐하, 어찌 더러운 것을……!」
그와 함께 온 자들이 펄쩍 뛰었는데도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일으켜 주었다.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성품뿐이라.」
「예?」
「……라고 누가 그러던걸.」
그러면서 누구를 떠올리는 건지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너는 성품이 고와 보이는구나.」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붙였다.
「제가 성품이 고운지 어떻게 아십니까?」
「감히 뉘 앞이라고 네깟 게……!」
사람들이 레이라에게 고함을 치는데도 왕은 미소를 지은 채 대꾸해 주었다.
「예쁘잖아.」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몇 날 며칠, 아니, 몇 년이 지나서도 그때가 떠올랐다.
술집 작부의 딸은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않는다. 함께 있으면 엉덩이가 가벼워진다며 깔깔거리는 것들이 태반이던 시절을 그녀는 왕의 친절로 버텨냈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 올라온 수도에서 다시 한번 그를 보았다.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미천한 자신이 왕을 무려 두 번이나 뵌 것이다.
그녀는 왕과 눈이라도 마주치고 싶어서 매번 파티에 데려가 줄 귀족 애인을 만들었다.
파티에서의 왕은 어릴 때와 달리 수심이 가득했다. 레이라 부인만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수도 외곽을 자주 찾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당시 사귀던 사내가 왕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이었다.
술에 취한 사내는 그가 외곽을 찾는 이유는 여자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귀족 여자, 눈부시게 웃을 줄 아는 여자, 재물과 권력보다 소중한 게 있다고 말하는 여자, 그리고 그의 사랑을 받는 여자.
신은 절박한 사람에게 동아줄을 내려준다고 했던가. 맞는 말이었다.
왕태후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철의 여제라 불리는 모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왕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다른 여성으로 왕태후와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것.
언제나 멀리서 왕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저는 안 되겠습니까? 전 신분도 미천하고, 지금껏 많은 사내를 거쳤습니다. 저라면 충분히 폐하의 연인을 연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레이라는 왕의 연인이 되었다.
지금도 왕은 말한다. 그때, 네 손을 잡은 게 천추의 한이라고. 열여섯의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는 언제 처음으로 손을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요, 폐하. 잡지 마셨어야지요.」
모두 왕의 탓이었다. 하필 그날 제 손을 잡은 것, 하필 제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 하필 사랑한 여자가…….
‘나와는 천지 차이인걸.’
리즈 왕비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여자 같았다. 그녀는 왕을 비롯한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반대를 외치던 소피아 왕태후마저도 그녀에게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런 여자와 맞서야 했던 레이라는 매일을 눈물로 보냈다. 당시엔 비참해서 견딜 수 없었는데 돌이켜 보니 좋은 디딤돌이 되었다.
고작 술집 작부의 딸이던 여자가 왕비보다 더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최후의 승자는 그녀였다. 남편과 아이를 남겨둔 채 죽어버린 여자가 아니라.
“딸아, 영리한 내 딸아.”
“…….”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서 맞는 아침? 서로를 바라보는 간절한 눈빛? 그런 것을 바라던 어미가 얼마나 비참해 보였니.”
그랬다. 저토록 가여울 거라면 제발 왕을 포기하길 바랐다.
“인정한다. 마음은 원하는 대로 뒤집히는 게 아니지. 하지만 내 옆에만 붙여둘 방법은 있잖아.”
미소 짓고 있던 레이라 부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협탁에서 상자를 꺼냈다.
레이라 부인의 숨결을 불어넣자 자물쇠가 번쩍 빛나며 상자가 열렸다.
“내겐 ‘이것’이 그 방법이지.”
상자 속에 든 건 손 때 묻은 책이었다.
“리즈 왕비의 일기장. 폐하의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그 여자의 이름 앞에서 왕비라는 호칭을 뗄 수 있는 치부.”
리즈 왕비의 일기장이었다.
“너는 나처럼 살면 안 되지. 나처럼 비참해져선 안 돼. 처음부터 여왕의 자리를 노려라.”
“…….”
“보렴. 내가 이것을 쥐고 있으니 왕이란 남자가 얼마나 하찮아지는지.”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떨궜다. 그래, 그녀는 그웬 공작이어야 했다.
어머니가 리즈 왕비를 틀어쥐어 왕을 잡은 것처럼 그녀도 엘리사를 틀어쥐면 그웬 공작을 잡을 수 있었다.
“전에 보니 재밌는 여자가 그놈의 옆에 붙어 있더구나.”
“여자…… 라니요?”
“그웬 남매의 유모라던 여자 말이다.”
그웬 공작의 옆에 있으면서 엘리사, 그 계집을 마뜩잖게 바라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친해지면 좋을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려무나.”
클라우디아는 몰랐다. 그녀가 지금 레이라 부인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음을.
엘리사의 방에서 진저와 엘리사, 그리고 라골, 루펠라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제는 레이라 부인이 쥔 카드가 뭐냐는 겁니다.”
라골의 말에 루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왕씩이나 되면서 한낱 애인에게 휘둘릴…… 미안.”
루펠라는 엘리사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엘리사는 조금도 그녀의 말에 상처를 받거나 언짢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멍청하죠. 네, 멍청해요.”
“언니…….”
“폐하는 모든 걸 놓아버렸던 거예요. 나와 내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진저가 엘리사의 손을 잡자 그녀는 지친 듯 그의 팔에 얼굴을 기댔다.
“어머니는 나를 포기하지 못했을 테죠. 확실하진 않아도 어렴풋이 알 수 있어요. 어머니의 죽음에 내가 관련되었다는걸.”
리즈 왕비는 언제나 잠든 엘리사를 쓰다듬으며 말해주었다.
내 보물, 너 없는 세상에선 단 하루도 살지 못한다고.
“다만 너는 나 없는 세상에서 나보다 더 귀한 것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처럼 사랑스러운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오랜 시간 가슴에 품었고, 수백만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가 그들보다 한 여자를 더 귀하게 여겼다.
그것만으로도 부왕에게 어머니가 얼마나 소중한 여자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아이를 저버릴 수 있었던 것처럼 폐하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진저가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저요. 그란디아에 돌아와서 태어나 처음으로 폐하께 퍼부었어요. 내게 진실을 말할 자격조차 없다고. 그런데 사실은 듣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엘리사…….”
부왕이 레이라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던 건 자신을 보는 그의 눈에 분노가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족한 남자라도 왕이었다. 그것도 제법 약삭빠른. 그런 사람이 딸을 그 정도로 방치했을 리가 없다.
“수백만의 목숨보다 소중했던 여자를 죽인 내가 미웠겠죠. 그래서 나에게 벌을 주듯, 또 자신에게 벌을 주듯 나와 자신을 방치한 거예요.”
루펠라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졸렬하군요.”
“그렇게 생각해요?”
“왕비님이 돌아가신 게 어째서 언니 탓이에요? 그분이 선택했고, 언니는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 건데요.”
라골이 루펠라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진저는 그러지 못했다. 아내를 잃게 한 아이를 자신은 용서할 수 있을까. 자신도, 아이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내의 몸으로 아이의 태동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이가 얼마나 작은지, 그 작은 것이 살고 싶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 노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랐다면 그는 아내에게 해가 될 아이를 남겨두지 않았을 터였다.
“어쨌든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다들 너무 생각이 많아. 다 뒤집어 버리면 되잖아.”
라골과 진저가 한심하다는 듯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왜? 내 말이 맞잖아. 제깟 게 아무리 그래 봐야 왕과 공작가에 어떻게 당해.”
엘리사가 어색하게 웃자 라골이 서둘러 변명했다.
“그…… 아가씨는 너무 답답하셔서 그런 겁니다.”
“내가 뭐! 이전에야 우리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언니도 란델에서 많은 인맥을 쌓았고, 나도 카르트가의 힘을 빌릴 수 있고, 오빠도 있는데!”
진저가 인상을 쓰며 루펠라의 입에 차와 함께 나온 과자를 쑤셔 넣었다.
“폐하와 이 사람은 멍청해서 그동안 입 다물고 있었는지 아냐.”
“맞아요. 란델의 힘을 빌리면 이번엔 백성들까지 등을 돌릴 거예요. 그들에겐 왕족 개인의 일은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루펠라가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루펠라는 나이보다 영리한 데다 사교 활동을 오래 한 만큼 아는 것도 많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딱 그 나이만큼만 이해했다.
“루펠라, 란델의 왕비께서 왜 왕세자비가 될 줄리아 트리거를 견제했나요?”
“그거야 공작가의 영애니까요.”
“왕비인데요? 그녀는 아직 왕세자비가 아니잖아요.”
“왕세자비가 된 후를 걱정한 거겠죠. 트리거 공작가를 등에 업고 왕비의 권한을 모두 앗을까 봐.”
“네. 왕비님은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왕권에 기대고 있죠. 하지만 트리거 영애는 4공의 딸로 그녀는 왕권뿐만이 아니라 신권의 비호를 받는 거예요.”
왕권과 신권이 정확히 수평을 맞출 때 태평성대가 온다.
“트리거가에서 힘을 실어준다면 왕세자께선 어떤 소란도 없이 왕위에 오를 거예요. 하지만 그 후엔 다르겠죠. 신권이 왕권을 범람할 거예요.”
“트리거 공작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성품이 아닌 상황이랍니다.”
그 강직한 트리거 공작이 딸을 위해 무슨 일이든 했던 것처럼.
찻잔을 내려놓은 엘리사가 말을 이었다.
“란델의 폐하는 신권이 범람할 수 없는 틀을 만들었어요. 전쟁이죠. 전쟁의 전리품 분배부터 공까지 폐하 손에서 분배할 수 있어요. 그래서 4공은 똘똘 뭉쳐 왕을 견제하지 않고 서로를 견제해요.”
“그럼 그란디아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요.”
“그란디아는 성국에 속해 있어요. 전쟁이 나면 성국에 도움을 받아 적국을 견제하죠. 도움을 받은 만큼 이쪽에서 내놔야 하는 것도 있어요. 성국에서 군권을 간섭하는 거예요. 제 부왕께선 완벽한 군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애초에 그리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요.”
루펠라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라골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라골이 그녀의 말을 풀어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그란디아를 수호할 수 있는 건 왕이 아닌 귀족이란 소립니다. 소피아 왕태후가 실권하고 레이라 부인이 그 자리를 메꿨지요. 그녀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귀족의 도움이 없는 한.”
소피아 왕태후는 귀족들의 도움으로 선대 국왕의 서거 후 섭정을 할 수 있었다. 왕의 숙부로부터 제 아들과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신권을 키운 것이다.
다만, 그녀는 왕의 생모였다. 그녀가 왕권과 신권을 함께 틀어쥐었을 때는 귀족들이 쉬이 도전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녀의 실권 후 레이라 부인이 득세한 뒤에 발생했다.
제대로 된 왕비도 아니요, 그렇다고 왕족의 친모도 아니니 그녀는 신권의 비호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평민에 불과한 게 아니에요. 왕권을 짓누르는 귀족들을 대변하고 있어요.”
“언니, 전 이해가 안 돼요. 왜 하필 레이라 부인인 거예요? 왕비감은 많잖아요. 제 딸이 왕비가 된다면 더한 권력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진저가 혀를 찼다. 한심해서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제법 머리를 쓰는 줄 알았더니. 그런 남편을 엘리사가 달랬다. 란델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니 이해가 안 될 만도 했다.
“성국의 속한 나라라고 했잖아. 신권이 이처럼 왕궁을 짓눌렀으니 성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지. 그런데 왜 지금까지 성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겠냐. 그 여자가 쥔 열쇠가 그만한 힘을 발휘한다는 거지.”
그제야 루펠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신관장이라는 자가 레이라 부인의 줄을 잡고 있댔지?”
라골이 동의했다.
“사면초가라 한다지요. 군사를 움직이면 그 이후 신관장과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암살은? 언니가 독살 위협을 받았듯이 우리 쪽에서도……!”
“적이 레이라 부인 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처리할 수 있었어요. 그녀가 누구와 그 열쇠를 공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침묵할 밖에요.”
“그 여자를 치면 다른 쪽에서 움직일 수 있으니 더 큰 혼란만 가져올 뿐이라는 거구나…….”
루펠라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비볐다. 뭐 이렇게 복잡하단 말인가.
엘리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화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만을 보여주듯 현실에서도 아름다운 일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누군가를 욕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처럼 답답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발단을 만든 조모도 자신과 아들을 위해 애쓴 것뿐이고, 긴 세월 자신을 외롭게 만든 왕도 그저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렇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절망시킬 수 있는 건 사람이 아닌 상황이었다.
진저가 일이 시작하기도 전에 지친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개구지게 웃었다.
“하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엘리사가 생전 처음 아이를 지키기 위해 벌인 일까지 실패했다.
이렇게 빨리 들통이 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떠난 후로 레이라 부인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잘했어.”
“뭘요?”
“사람을 산 것 말이야.”
“하지만 헬렌이 고문을 당했으니 아무리 돈을 받았어도 나서지 못할 거예요.”
“레이라 부인의 영향력이 이만큼 막강한데도 돈을 받았잖아. 그만큼 절실한 게 있다는 소리겠지. 당신의 인선은 훌륭해. 절실한 자들만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을 얻었으니까.”
루펠라는 물론이고 엘리사와 라골까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귀족들을 포섭해야겠어.”
“아예 우리와 만나려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돈 받은 자들을 이용해야지. 귀족들에게도 절실한 걸 제시하면 되잖아. 나는 그걸 가지고 있고.”
“돈이요?”
진저가 재킷 안에서 절그럭거리는 것을 꺼냈다.
“성국에 있는 자들은 손에 넣기 어려운 것. 이번엔 저 녀석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진저와 엘리사, 그리고 라골의 시선이 루펠라에게 향했다.
“넌 억지를 써라. 나를 이용하든, 바닥을 기어 다니든지 무조건 카르트 후작을 설득해.”
“억지는 자신 있지! 그런데 뭘 설득하라는 거야?”
“그란디아에 마영석을 대지 않도록. 그리고 거기서 카르트가보다 더 많은 마영석을 확보하고 있는 내가 나타나는 거지.”
기하스엘은 진저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내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왕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마영석이 매립된 땅을 하사받게 하였으니.
진저가 비열하게 웃었다. 남편이 이렇게 웃을 때는 항상 무슨 일이 나곤 했다.
“라골, 너는 리한을 데려와라.”
“안 오려고 하실 텐데요. 장거리 여행은 칠색 팔색을 하시잖습니까.”
“리한이 만든 아이템은 대륙 최고다. 그들을 홀릴 수 있을 정도의 아이템을 만들 자가 있어야 해.”
“그러니까 안 오려고 하실…… 마님을 이용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라골이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진저 그웬의 본성을 잊고 있었다. 혈육이든 지기든 이용해먹는 녀석. 누구보다 더 악당 같은 놈이었다.
“게을러터진 놈인데 대체할 자가 없어서 아직도 마탑주 후계 노릇을 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마님을 마탑에?”
“여성은 마탑에 들어갈 수 없다는 법 있어?”
“그건 아니지만 기혼 여성은 마탑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엘리사는 남편과 라골의 설전을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대체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들통나면 안 되는 비밀을 역으로 이용하자는 거다. 아무리 성국에 속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내 아내이니 란델의 사람이 되겠지. 그런데 거기에 마탑 후계까지 된다면?”
“건드릴 수 없겠죠. 함부로 건드리면 성마전쟁이 일어날 테니…….”
정말이지 영악해 빠진 놈이었다.
“법이 금한다면 뜯어고치면 될 터. 내가 누구냐?”
라골이 졌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입법이 가능한 4공이시죠. 예, 바로 마탑에 연락하겠습니다.”
엘리사는 제 아내를 한순간에 마탑의 후계로 만들어버리는 남편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라골이 보관하고 있던 통신 마도구를 가져왔다. 연결되면 돌이 푸른빛을 띠는데 리한은 한참이 지나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장 난 게 아닐까요?”
엘리사의 말에 진저가 코웃음을 쳤다.
“대답해, 이 새끼야.”
-…….
“마영석, 네가 말한 수대로 넘긴다.”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손님.
태세 전환이 빠른 남자였다. 루펠라가 낄낄거리자 엘리사도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 스크롤 이상한데? 출장 와라.”
-어디서…… 개가…… 짖는군……. 내 스크롤은…… 언제나…… 완벽하다……. 무슨 수작이야…….
“수리 아니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수리여도…… 안…… 간다.
“네 소원이 뭐지?”
-개처럼…… 사는 거…… 먹고…… 놀고…… 싸고.
“내가 들어준다, 그 소원.”
마도구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나야 안 믿어도 그만인데, 넌 평생 귀찮은 짓 하면서 살아야겠군.”
-…….
“너희 조부님 퇴직이 몇 년 남았지? 5년? 4년?”
-뭘 어떻게…… 들어줄 건데?
리한의 말이 묘하게 빨라졌다.
“네가 마탑에서 못 나오는 이유는 너만 한 실력자가 없기 때문이잖아.”
-대륙을 다…… 뒤집어도…… 나만 한 실력자는 없지.
루펠라가 라골에게 물었다. 친구끼리 비슷해지는 거냐고, 아니면 비슷한 놈들끼리 만나는 거냐고. 친구 놈들끼리 잘난 체하는 것도 똑같았다.
“하나 있잖아. 너도 아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
리한이 조용해졌다.
-설마 공작…… 부인?
“그래.”
-마탑에 줄 거냐?
말의 속도가 일반인과 같아졌다.
-언제? 지금? 바로? 언제까지? 내가 가면 되냐? 어디? 지도 전송해.
“그란디아 왕궁. 닷새만 있다 가.”
-일곱 시간 후에 도착.
그러더니 통신이 뚝 끊겨 버렸다.
진저는 통화 내용보다 다른 것에 화가 났다.
“이 새끼가…….”
자신에겐 아무리 빨라 봐야 그란디아까지 2주는 걸린다고 했으면서.
“그 거금을 받아 처먹어놓고 날 속여? 주둥이를 찢…….”
“여보…….”
엘리사의 목소리에 진저가 머쓱한 듯 헛기침을 했다.
“친구 간에 우정 확인, 뭐 그런 거야.”
루펠라가 코웃음을 쳤다.
“두 번 확인하면 전쟁 나겠네. 아무튼 난 그동안 카르트가에 땡깡 부리면 되지?”
“잠깐 거래를 접는 정도면 된다.”
“응.”
거금을 들이고 산 통신 마도구가 오늘에서야말로 제 진가를 발휘했다.
리한은 그의 말보다 한 시간 이른 오후 네 시. 정확히 여섯 시간 만에 그란디아 국경에 다다랐다.
그전에 미리 거스터 후작으로부터 그의 신분을 감추고 출입패를 발부받은 라골이 그것을 전달했다.
리한은 라골과 함께 30분이 안 되어 왕궁에 도착했다. 레이라 부인과의 싸움을 앞두고 진저, 리한 간에 1차전을 먼저 벌였다.
“개자식, 그렇게나 받아 처먹고 날 속여?”
“무슨 말인지…… 모르겠…… 는데.”
“네 주머니에 들어간 돈만 그웬 기둥뿌리 하나는 될 거다.”
“결혼하더니…… 거짓말이…… 늘었군……. 내…… 주머니에 기둥…… 하나 넣어주고…… 불평을 하든가.”
“라골, 검을 가져와라!”
“그것도…… 떨이 가격…… 이었다…….”
모두 각자의 일에 번다하였으므로 지기의 싸움을 말리는 자는 없었다.
* * *
그날 밤. 엘리사는 헬렌에게서 들은 그녀 쪽 사람들을 쭉 적어 명단을 만들었다.
읽고, 또 읽고, 이 사람은 무슨 일을 해야 하며 또 이 사람에게는 어떤 일을 맡겨야 하는지 체크한 그녀는 종이를 촛불에 태워 재 하나 남기지 않고 명단을 처리했다.
헬렌은 유능한 아이였다. 남편의 말처럼 패가 될 사람과 아닌 사람을 정확히 구분했다. 운이 나빠 발각된 것만 빼면 시녀로 있기엔 아까운 재능이었다.
‘오늘 치 약은 다 먹었을까? 또 모아놓는다고 속으로 곪고 있는 거 아니야?’
엘리사가 힐끗 제 침대를 바라보았다. 침대엔 남편 대신 루펠라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카르트 후작가와 연락을 취하면서 얼마나 소리를 쳤는지 오후엔 목소리가 다 쉬어 있었다.
그토록 자신을 위해 열심히 해주었는데도 카르트 후작 부인으로부터 확답을 못 들었다고 울상이었다.
그녀는 루펠라가 덮고 있는 이불을 잘 정리해 주고, 리한이 준 선물을 꺼냈다.
그는 엘리사가 알을 깨고 나온 선물이라며 이것저것을 선물했다. 남편 말로는 그저 ‘당신이 후계가 되어주면 개처럼 숨만 쉬고 살려는 수작’이라 툴툴거렸지만, 그녀에겐 그저 고마운 일이었다.
선물 중 불을 만들 수 있는 작은 라이트 박스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호출 마도구를 챙겼다.
‘그이가 걱정할 테니 서둘러 다녀와야지.’
그란디아 왕궁에서 그녀만큼 외진 길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레이라 모녀를 죽기 살기로 피해 다녔기 때문에 쥐보다도 외진 길, 숨은 길을 많이 알았다.
엘리사가 시녀들이 이동할 때 쓰는 통로로 들어갔다. 세 갈래 길에서 첫 번째, 모퉁이를 돌면 가로막힌 벽이 나오는데, 남들 눈엔 막힌 벽으로 보일 테지만 엘리사에겐 달랐다.
그녀는 벽을 더듬었다. 그러자 벽인 줄만 알았던 것의 천이 소리 없이 올라가고 넝쿨이 무성한 길이 생겼다.
여긴 모후, 리즈 왕비의 비밀 창고였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왕궁에서 가장 오래 산 왕궁 서고의 사서, 모트 할아범도 이곳을 몰랐다.
레이라 부인에 의해 창고에 갇혀 폐쇄된 공간을 두려워하기 이전엔 놀이터 드나들 듯 이곳을 찾았다.
남편과 좋은 사람들 덕이 아니었다면 다시 이곳을 찾을 생각은 못했을 터였다.
창고는 총 세 곳으로 길이 나 있었다. 하나는 시녀 숙소, 또 하나는 왕궁 밖, 그리고 또 하나는 왕비의 방이었다.
“여기서 일기장을 보았는데.”
모후의 장례식 때만 해도 이곳에 있던 것이 어느 날을 기점으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때는 레이라 부인에게 치여 이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부왕과 자신만 두고 하늘로 가버린 모후까지 모두.
하지만 정말 소소한 일기였다. 오늘 무엇을 먹었고, 무엇을 했으며 어떤 것을 느꼈다 정도가 적혀 있었다.
어머니가 겪었던 그 어떤 정치적인 일도 적혀 있지 않을 정도로 소소한 것들뿐이었다.
어릴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철자가 맞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몇몇 글자는 엘리사의 손이 닿자 옅은 붉은빛을 띠었다.
“그때는 잘못 본 줄만 알았는데.”
리한이 말해주었다. 마법사들이 비밀문서를 작성할 때 흔히 쓰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라고.
엘리사는 그것이 생각난 김에 혹시 다른 비밀문서도 있나 하여 창고를 뒤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엘리사가 그란디아를 떠난 이후 아무도 이곳에 들었을 리 없는데 그녀의 물건에 먼지 한 톨도 쌓여 있지 않았다.
‘폐하신가?’
평생을 왕궁에서 보배로 산 남자가 정리했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그녀는 부왕이 진심으로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방치한 이유를 어머니에게서 찾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왕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다시 라이트 박스를 잡았다.
방을 나서려던 그녀가 테이블 한편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뭘까…….”
그것을 자세히 보려는데 호출 마도구가 삑삑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었다. 기사들과 함께 내궁의 길을 둘러보고 온다더니 벌써 확인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네, 여보.”
-어디야?
“잠깐 나왔어요.”
-당신 목소리가 왜 이렇게 울리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지하 통로를 통해 가고 있어요.”
-나가지 말랬잖아. 걱정하게 하지 마.
“금세 돌아갈게요. 아, 둘러본다던 건 어떻게 되었어요? 당신이 갈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나요?”
-란델 기사들이 내궁에서 활개 치도록 두고 보진 않을 테니까 내가 내궁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길을 확인했지.
“길을 확인했다는 건…… 도망칠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거야. 내 공주님은 정문으로 당당히 모셔야지. 어서 와, 클라우디아인지 하는 그 여자가 구경시켜 준답시고 내내 붙어 있었다고. 어서 당신 향기로 지워줘.
“당신도 참…….”
다른 여자를 곁에 둔 게 마음에 걸려 일부러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엘리사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두말없이 그리하겠노라 말했다.
그래도 헬렌의 상태를 확인해야 해서 시녀 숙소로 향했다.
숙소 문 앞을 지나 헬렌의 이름이 걸린 방을 찾던 그녀는 멀리서 들리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라이트 박스를 끈 채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래서 클라우디아 공주님께서 부인에게 독대의 영광을 주시겠다고…….”
“그 영광, 이런 노인네에게 주지 말고 젊은 당신네나 많이 받으시죠.”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마피 부인이야.’
라골은 이러저러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 신분을 숨겼다. 그래서 내궁에 머물 수 있었고, 마피 부인은 고용인의 신분이라 내궁이 아닌 시녀 숙소에 잠자리를 마련해 준 것 같았다.
“뭐라고요?!”
마피 부인과 재스민이 한동안 옥신각신하더니 종내엔 서로 팔목을 잡고 뿌리치기를 반복했다.
“그웬 공작을 키웠다고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마피 부인이 재스민의 멱살을 잡았다. 재스민이 그녀의 서슬 퍼런 시선에 놀라 크게 숨을 들이켰다. 마피 부인이 쉰 소리까지 내며 재스민을 위협했다.
“숱한 세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지켜온 분들이야. 네깟 게 함부로 이름을 부르라고 목숨 걸고 지켜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그, 그러니까 그런 귀한 분에게 바보 공주는…….”
“네 주인에게 똑똑히 전해. 나와 거래를 원하면 조건을 제시해라. 각하와 영애를 위해 어떤 것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여자는 두려운 게 없었다. 재스민은 죽음까지도 두렵지 않은 여자를 상대하기엔 내공이 턱없이 부족했다.
질린 재스민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고 마피 부인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색색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때 엘리사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마……!”
엘리사가 그녀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헬렌의 방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의 눈 밖에 난 만큼 가장 외지고, 가장 낡은 방을 쓰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엘리사의 생각대로였다.
그녀는 마피 부인을 끌고 서둘러 헬렌의 방으로 들어갔다.
헬렌은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뜨고 엘리사와 마피 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공주님.”
“대화할 장소가 필요해. 소리가 새어 나갈 수 없는 곳이었으면 좋겠어.”
헬렌이 절뚝절뚝 걸어 그들을 창고로 인도했다.
창고에 들어갈 때까지 엘리사에게 붙들려 있던 마피 부인이 세차게 손을 떼어냈다.
“이렇게까지 생각이 없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다들 마님이 혼자일 때만 노리고 있는데…….”
“그 입 다물어.”
엘리사의 기세가 흉흉했다. 놀란 헬렌이 불을 밝히다 말고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마피 부인이 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엘리사가 마피 부인의 양손을 모두 틀어쥐었다.
“마……!”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라면 참을 수 있어요.”
“이거 놓고……!”
“라골이 그랬어요. 부인이 나를 견제하는 까닭은 내게 있다고.”
정확히는 ‘엘리사에게 대적하던 이들이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라 물었다. 엘리사는 그의 물음에서 곧 답을 찾아냈다.
그녀 스스로 해낸 게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마피 부인의 오만이었다. 라골은 말해주려던 것이다. 엘리사는 마피 부인에게 져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알아요.”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나도 부인이 마음에 안 드니 피차일반이죠.”
마피 부인이 눈을 찌푸렸다. 엘리사 그란디아는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가졌다고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하지만 그래 봤자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진저는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포식자로 성장했다. 이도 나지 않은 하룻강아지를 지키는 포식자는 없었다. 마피 부인의 눈에 진저는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약해지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엘리사가 마피 부인의 손을 놓았다.
“부인은 내가 약해서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죠.”
“아닙니까?”
“내가 그동안 침묵했던 이유는 그분에게서 어떠한 것도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말은 언제나 쉬운 법이죠.”
“그 말은!”
이제 더 이상 마피 부인의 몫의 친절과 배려는 없었다.
“내가 그분에게서 당신을 떼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에요.”
헬렌이 엘리사와 마피 부인의 설전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확실히 공주님은 변화했다. 란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놀라우리만큼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톡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던 유리 인형이 생기를 얻고, 수많은 감정을 얻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그동안 엘리사는 지나치게 몸을 사렸다. 사는 것만이 목표였기에 레이라 모녀에게 명분을 주는 짓 따윈 하지 않으려 기를 썼다.
하지만 이젠 목표가 달랐다. 그녀는 그저 연명키 위함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게 될 아이.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것들만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처럼 처절한 게 아니라.
“간절히 부탁할게요. 내게 최후의 방법까지 쓰게 하지 말아요.”
“제가 앉아서 당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란디아에 오기 전이었다면 걱정했을 거예요. 루펠라와의 관계, 남편의 걱정 같은 것들이.”
“지금은 아니라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지금은 아니죠.”
엘리사가 마피 부인을 노려보았다.
“내 남편과 내 시누이는 이제 당신의 정체를 아니까.”
“정체?”
“망령. 어미로 남고 싶어 울부짖는 망령으로 보여요, 당신.”
무어라 대꾸하려던 마피 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망령이 아니라 우겨도 제 자식들 눈에 그리 보인다면 자신은 망령일 뿐이었다.
엘리사는 하고자 한 말을 모두 쏟아내고 숨을 골랐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진심을 부정한 적이 없었다.
마피 부인이 진저와 루펠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마음이 변질되고 퇴색되어 이제 집착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레이라 부인의 딸이 내게 접촉하려 한다는 걸 보셨지 않습니까.”
“당신은 못 해요.”
“못 한다?”
“클라우디아의 쪽에 선다면 당신은 영영 어미일 수가 없으니까.”
엘리사가 마피 부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실수로도 시선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자식의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어미는 없잖아요.”
“사내를 신뢰하십니까? 사랑에 빠져 미쳐 버린 왕을 아비로 두고서.”
“네, 나는 그이의 인생이에요.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 말을 끝으로 엘리사가 헬렌과 함께 창고를 벗어났다.
마피 부인의 눈은 텅 비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차후 그녀가 자신의 빈속을 무엇으로 채울지 엘리사는 알 수 없었다.
이전처럼 그웬 남매를 향한 집착일 수도 있고, 아니면…….
헬렌과 함께 그녀의 방에 들어온 엘리사가 주저앉았다.
“공주님?”
“……쩌지.”
“네?”
“내가 몰아붙여서 클라우디아의 사람이 되면 어쩌지? 그 사람이 괴로워할 거야.”
엘리사가 울상을 지었다. 헬렌을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 그렁그렁한 건 눈물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후련한 표정이었다.
“상관없잖아요.”
“응?”
“공주님의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담겨 있었나요?”
“아니.”
“그 부인이 레이라 부인의 줄을 잡는다면 진실에 져서 현실을 회피한 거예요. 그런 사람을 왜 무서워해요?”
익숙한 말이었다. 어디서 들었나 고민하던 엘리사가 양 뺨을 감쌌다.
헬렌이 엘리사의 사람이 된 건 엘리사의 나이 열셋의 일이었다.
헬렌은 집안에 돈을 우습게 여기는 자가 있어 늘 빚에 허덕였다. 헬렌이 손에 물집이 가시지 않도록 일을 했지만 빚은 줄어들기는커녕 쌓여만 갔다.
종내엔 돈이 사람을 집어삼키게 되었다. 어린 헬렌이 빚 대신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후처로 팔려가게 된 것이다.
헬렌은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왕궁 시녀가 되기 위한 시험 원서를 썼다.
낮엔 메이드 일에, 저녁엔 식탁보를 짰다. 잘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다섯 시간에 불과했는데 하루를 쪼개고 또 쪼개 시녀 시험을 공부했다.
결국 헬렌은 왕궁 시녀가 되었다. 악바리도 그런 악바리가 없었다. 나 좀 살려달라고 외치던 가족들은 헬렌이 시험에 붙자마자 ‘우리 딸이 왕궁에서 일한다!’ 소리치며 팔짝팔짝 뛰었다. 팔려가는 것도 유예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딱딱한 돌을 물렁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인생도 그랬다. 얼마나 녹록지 않았는지 그녀는 기대하던 왕궁에 들어오고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헬렌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시녀들조차 무료해 죽겠다는 듯 숨만 쉬고 살았다.
그런 시녀들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사람이 바로 엘리사였다.
‘공주라는 여자도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데.’
‘그래도 내가 낫지.’
‘나는 내가 벌어 떳떳하게 살잖아.’
‘공주도 세상살이는 팍팍해.’
헬렌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바닥을 쳤다고 생각한 인생이 아예 땅을 파고 들어갈 때까진 말이다.
사소한 실수로 클라우디아의 눈 밖에 난 헬렌은 급료가 높은 파트가 아닌 근근이 입에 풀칠만 가능한 잡일을 맡았다.
매일을 눈물로 보냈다. 어째서 자신만, 왜 늘 자신만. 신이 있다면 이렇게 열심히 사는 자신에게 이럴 순 없다고 생각했다.
헬렌이 괴로웠던 시기에 클라우디아와 필리아는 기분 나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다트 판으로 만들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은 헬렌 차례였다. 지치고 지쳐서 비명조차 지르지 않던 헬렌을 구한 게 엘리사였다.
그래, 엘리사였다. 그란디아의 바보 공주, 벙어리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말이 없던 그 아이.
그 아이가 클라우디아의 방에 뱀을 놓았다.
그러나 헬렌은 엘리사의 도움이 전혀 고맙지 않았다. 차라리 다트를 잘 맞아서 클라우디아의 눈에 드는 게 나았다.
자신을 구해 준 영웅은 전혀 영웅답지 않았다. 꼬질꼬질한 드레스, 엉망이 된 머리, 먼지투성이인 얼굴, 손톱에 낀 때. 아이의 행색은 아이가 왕궁에서 얼마나 외면당하는지를 증명했다.
‘이러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죠? 공주님이니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공주님이 사라져도 걱정하는 사람 하나 없다고요!’
엘리사는 일개 하녀의 고함에도 말 한마디 대꾸하지 못하고 손만 꼼지락거렸다.
헬렌은 지금도 소원했다. 신이 나타나 단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면 그녀는 두 번 생각지 않고 엘리사를 상처 주었던 그때로 돌아가게 해달라 외칠 것이다.
눈물을 꾸역꾸역 참는 표정이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 하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른다.
그때 엘리사의 표정은 지금도 헬렌을 괴롭혔다.
“기억하세요? 그날 저를 구해 주려고 클라우디아의 방에 뱀을 푸셨는데.”
“맞아, 내가 한 일이란 게 들켜서 창고에 갇혔지.”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헬렌은 생각했다. 마피 부인과 란델의 사람들은 엘리사를 모른다고.
그날 창고에 갇힌 엘리사가 얼마나 앙앙, 울었는지. 얼마나 살려달라고 빌었는지.
그 앞에서 헬렌도 함께 울었다.
엘리사는 그런 시절을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시절을 견디고 결국 행복을 쟁취한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그때 레이라 모녀에게 굴복할 수도 있었는데 안 하셨잖아요.”
“그랬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도망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땐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던 것 같다. 괜찮아, 너는 도망치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너는 아직 저들에게 두려운 존재야. 네가 저들이 두려운 만큼 저들도 너를 두려워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그 주문 같았던 말이 지금 이렇게 되돌아왔다.
“저는 그때 공주님을 따르자고 생각했어요.”
“고마워. 네가 있어 줘서 버틸 수 있었어.”
“진심은 언제나 통해요. 공주님의 진심이 제게 통했고, 또 제 진심이…….”
헬렌이 말을 멈추었다. 엘리사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지만 그녀는 말을 이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오신 거예요?”
“약 먹었는지 확인하려고.”
“먹었어요.”
엘리사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헬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방을 쭉 둘러보았다. 테이블에 약봉지가 아닌 작은 병의 뚜껑만 있었다.
“봉지는? 가루약과 함께 보내줬잖아.”
“쓰…… 레기통에 있나?”
엘리사가 양손으로 허리춤을 잡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보내주겠다고 했잖아. 이건 네 몫이야. 어서 먹어.”
결국 헬렌은 숨겨두었던 가루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어야 했다. 그동안 진저로부터 통신이 세 통이나 온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엘리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제 방에 돌아왔다. 진저는 잔뜩 꽁해 있었는데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침대로 향했다.
“루펠라는요?”
“다 큰 걸 끼고 자려고?”
“그건 아니지만…… 손님방으로 간 거예요?”
진저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그런데도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게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임신을 했는데 신경 쓸 일까지 많아서 피로에 절어 있었다.
“나는 아예 안 보이나?”
“불 좀 꺼줄래요? 피곤해요.”
“내가 기분이……!”
“불.”
엘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진저는 저도 모르게 불을 껐다.
하지만 죄지은 놈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 아내를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밤이요.”
“밤?”
“네, 먹는 밤이요. 이상하게 자꾸 밤이 먹고 싶어요.”
“…….”
이번엔 엘리사의 차례인 모양이었다.
엘리사는 모든 게 놀라웠다. 계획을 일사천리로 끌고 가는 남편부터 남편의 명에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그웬의 사람들. 그리고 남편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우리만큼 평정심을 되찾은 자신까지.
남편은 사소한 일부터 일국을 뒤흔들게 될 사건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가을에나 나는 밤을 두 시간 만에 삶은 밤, 구운 밤, 생밤 등 종류별로 가져왔다.
엘리사는 남편이 곰같이 커다란 손으로 파주는 밤 속을 먹으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건 어때? 켄저스 부족 땅에서만 나는 비싼 밤이라는데.”
“달콤해요.”
“내일이면 란델에서 밤이 도착할 거야.”
엘리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밤이라면 이제 물릴 지경이었다. 남편은 대륙에서 나는 밤은 모두 먹여주겠다는 듯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남편이 밤 하나를 더 까려 하자 엘리사가 급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건 왜 봐두라는 거예요?”
남편이 가져온 서류는 왕궁 출입 내역서였다.
“이상한 게 있는지 살펴줘.”
“왜요?”
“당신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왕이 이렇게까지 숨죽이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레이라 부인이 쥔 카드가 그만큼 강력하다고 했잖아요.”
진저가 밤과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래. 하지만 카드뿐만은 아닐 거야.”
“그럼요?”
“그녀가 쥔 카드를 빼앗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것. 당신은 그걸 찾아야 해.”
엘리사가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돌아보았다.
엘리사와 진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부친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 한 그들은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잘못 짚게 되면…….”
진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다시 하면 돼.”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지나가다 말에 치여 죽을 수도 있고, 뭘 잘못 먹어서 죽을 수도 있어. 나나 당신이 위험해진다면 그건 당신이 잘못 짚었기 때문이 아니라 운이 없는 거야.”
엘리사가 남편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부끄러웠다. 남편 말 한마디에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던 것이 잔잔해졌다.
진저가 부러 여봐란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당신 남편은 갈수록 멋져져.”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다 당신이 불안해할까 봐 걱정되는군.”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 말아요.”
“날 믿어서?”
“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잖아요.”
진저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아내를 쳐다보았다.
“제겐 당신처럼 멋진 사람이 없지만, 다른 여자들에겐 절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칭찬이야?”
엘리사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아내의 말을 곱씹던 진저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사람 성격은 쉽게 안 변하니 네가 그래 봤자 개차반이지. 넌 절대 이성에게 인기를 끌 수 없어.
그 말이지 않은가!
“엘리사!”
처음엔 말을 너무 안 해서 당혹스럽기까지 했는데 이젠 돌려서 남편을 욕하는 법도 깨쳤다.
“걱정은 당신이 해야 할 걸요?”
“내가 왜?”
진저가 퉁명스레 물었다.
“란델에선 절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이 할망구들이!’
“그러니까 제게 잘하셔야 해요. 마탑에서도 후계시켜 준다고 오라잖아요.”
엘리사가 배시시 웃자 진저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이 가긴 어딜 가. 내 아이까지 낳을 건데.”
“왜요? 당신 친구분의 어머님…… 이었나요? 후작 부인은 장성한 아들을 두고도 굉장히 젊은 분과 재혼하셨다면서요.”
그 일을 아내에게 말한 제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삐딱하게 고개를 젖히고 있었던 진저가 아내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남자는 쳐다도 보지 마. 당신이 쳐다보는 놈은 모두 집게로 이를 하나하나 빼줄 테니까.”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하지만 겁은커녕 웃음만 나왔다.
“그럼 몰래 봐야겠어요.”
“당신에게 사람까지 붙이게 하지 마.”
진저는 진심으로 기분이 나빴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쳐다보는 건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엘리사는 여전히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남편의 기분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결국 화가 난 진저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진심으로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는 거야.”
엘리사가 순식간의 그의 콧등에 입을 맞췄다.
“사실은 제가 지금 그래요.”
“…….”
“나를 위해 클라우디아와 만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미안함보다 속상함이 더 커요.”
언제 이렇게 여우가 됐을까. 제 심장을 꽉 틀어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 여자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로 인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걸.
“염치없다고 욕하셔도 돼요.”
“정말 염치없군.”
“그래도 저를 사랑하시잖아요.”
“그래서 기가 막히지.”
진저가 엘리사를 끌어안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엘리사가 허공에서 손가락을 휘저었다. 푸른빛이 사방에 퍼지더니 앞에 있던 그녀가 등 뒤로 이동해 있었다.
엘리사가 손목을 들어 팔찌를 들어 보였다.
“리한에게 배웠어요. 이건 마력 발동을 숨기는 아이템이래요.”
“언제 이름까지 부르는 사이가 됐어?”
진저가 인상을 찌푸리자 엘리사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비밀이에요.”
오늘은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태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녀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었고 그런 그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가 준 아이라는 선물이 그녀의 마음을 어느 때보다 충만하게 만들어주었다.
모든 고난이 아이의 태동으로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엘리사가 밖으로 나서자 진저가 그녀를 따랐다.
“또 뭘 배웠는데? 엘리사!”
“당신, 마음속을 읽는 기술 같은 거라면요?”
“그럴 리가.”
“그럴 수도 있죠.”
“그럼 당신이 이렇게 내 앞에 못 있지. 내가 얼마나 음란한 상상을…….”
당황한 엘리사가 그의 입을 막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조용히 하…….”
“공.”
엘리사와 진저가 투덕거리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부가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클라우디아였다. 그녀가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엘리사가 남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부탁하신 게 준비되어…….”
방문이 열려 있어서 그 안에 있는 테이블과 테이블 위에 있는 그릇이 보였다.
“공주…… 님과 함께 드시려던 거군요.”
클라우디아가 엘리사를 노려보았다. 엘리사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진저를 쳐다보았다.
“밤.”
‘밤?’
그의 말을 곱씹던 엘리사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럼 저 밤이 클라우디아가 구해온 것이란 말인가.
그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란델의 공작이 무슨 수로 그란디아의 밤을 이렇게나 빨리 구했겠는가.
진저는 뻔뻔한 표정으로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그란디아에선 페스트의 밤 푸딩이 최고라며?”
아내와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주고 싶었다. 그게 다른 여자를 비참하게 할지라도.
클라우디아가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할 수만 있으면 그의 뺨을 올려붙이고 싶었다. 그의 품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여자의 머리채라도 잡고 싶었다.
“구했소?”
“……예.”
“당신은 들어가 있어. 가지고 갈게.”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춘 진저가 클라우디아를 향해 얼굴을 왼쪽으로 까딱 움직였다.
“전 괜찮아요, 여보.”
“내가 당신에게 최고만 주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엘리사.”
그가 아내의 이름을 달래듯 부드럽게 불렀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공주님께 사람을 보내 전달하지요.”
“아내의 음식은 항상 내가 먼저 맛을 보아서.”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독이 들었나 시식하겠다는 뜻이었다.
클라우디아가 눈에 힘을 주었다. 비참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공께서 찾는 음식이라 최고의 것을 준비했습니다.”
클라우디아의 시선이 엘리사에게 향했다.
진저이기에 최고를 구했다. 그건 아내의 앞에서 그 남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낸 것과 진배없었다.
엘리사의 표정이 굳기도 전에 진저가 나섰다.
“그거 다행이로군. 나도 이 사람에겐 언제나 최고의 것만 주고 싶으니.”
계속 그의 곁에서 클라우디아의 화를 부추겼다간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다. 진저가 다시 아내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의 손가락을 잡고 있던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후 진저와 클라우디아는 별궁 응접실로 향했다.
클라우디아는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저를 비참하게 하실 건가요.”
“나를 다른 여자와 함께 보낸 내 아내도 그런 기분이겠지.”
“그건……!”
“누군가가 그녀를 사지로 몰았기 때문일 테고.”
레이라 모녀만 아니었다면 엘리사가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이런 모욕을 견뎌낼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기어이 클라우디아가 눈물을 보였다. 그녀는 뚝뚝 눈물을 떨구며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 매정하게 보지 마세요. 공을 보는 제 마음을 아시잖아요.”
클라우디아가 진저의 소매를 잡았다.
“어느 나라에나 정쟁은 있는 법이에요. 싸움에 진 쪽이 가여워지는 건 순리고요.”
“순리라.”
그 어린아이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창고에 갇혀 사흘 밤낮 우는 일이 순리라니. 그런 순리라면 깨부숴야 했다.
“그동안 저도 마냥 행복했던 건 아니에요. 외롭고, 괴롭고, 힘들었어요.”
클라우디아가 진저의 허리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가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
“나는 주제를 아는 사람이 좋아.”
“공…….”
그가 클라우디아의 턱을 쥔 채 위협하듯 낮은 소리로 읊조렸다.
“주제넘게 나를 택하려 하지 말란 뜻이다.”
“…….”
클라우디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평민, 그것도 사생아의 신분으로 공주처럼 사는 여자라도 사지라는 요람에서 자란 사내를 상대할 순 없었다.
굉장한 위압감에 무릎이 달달 떨렸다.
“내게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받을 짓을 해야겠지.”
“……어떻게 하면, 제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래서 더 이 남자를 가지고 싶었다. 어느 곳에서든 왕처럼 군림하는 남자. 그의 곁에서 허울이 아닌 진짜 여왕이 되고 싶었다.
“납작 엎드려 애정을 구걸해.”
“…….”
“내게 필요한 여자가 되라.”
“……될게요. 제가 엘리사 공주보다 더 당신에게 필요한!”
“그럼 가져와.”
클라우디아는 그의 붉은 눈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저 무작정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의 옆에 설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네 어미의 수급.”
그게 어미의 목숨일지라도.
“나를 그란디아의 왕으로 만들어라.”
남편이 가져다준 서류를 뒤적이고 있던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정말 염치가 없었다. 남편이 클라우디아를 따라간 건 모두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마음이 쓰였다. 미안하고, 속상하고, 또…….
그를 보는 클라우디아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했다.
‘어서 그란디아를 떠나고 싶어.’
질투가 났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어이없게 자신은 질투하고 있었다.
엘리사가 중얼거렸다.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염치요? 누가요?”
루펠라였다. 그녀는 한 손에 접시를 들고 엘리사의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루펠라.”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이래요. 란델이라면 이것저것 챙겨 먹일 텐데 그란디아에선 힘드니까…….”
접시를 내려놓은 루펠라가 민망한 듯 뒷목을 매만졌다.
“알고…… 있었어요?”
“이거 유모가 만든 거예요.”
엘리사의 눈이 커지자 루펠라가 손을 내저었다.
“리한이 독 감정을 하고, 나와 라골이 조리 과정을 지켜봤고요.”
“그녀의 앞에서요?”
“……신뢰할 수 없으니까요.”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피 부인은 완전히 그녀의 울타리에서 배제되었는데도 묘한 측은함이 생겼다. 그건 엘리사가 아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식처럼 기른 루펠라가 자신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끔찍한 기분일 것이다.
“유모를 신뢰할 수 없지만 이거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어요.”
“그게 뭐죠?”
“유모는 나와 오빠를 배신하지 못한다는 거.”
자신과 마피 부인이 함께한 그 모든 시간이 거짓은 아니었다. 제 자식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을 뿐, 마음만은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루펠라는 생각보다 더 약은 사람이었다. 진심이 아닌 상대를 어미처럼 따르진 않는다. 아이는 어른보다 더 예민해서 누가 거짓이고, 누가 진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오빠는 언니가 없으면 죽어요. 뭐, 저는 그렇지 않겠죠. 미안하고 괴롭겠지만 살 거예요.”
“…….”
“사람처럼 살진 못하겠지만. 유모가 그걸 모를 리 없어요. 그러니까 아직 움직이지 않은 걸 테고요. 저는 정치 같은 건 잘 몰라요. 생각도 짧죠. 하지만 사람은 조금 알아요. 그게 유모라면 특히.”
“그래서 그녀 앞에서 조리 과정을 지켜보고, 독 감정을 했군요. 루펠라가 그녀를 혐오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
“그러지 말아요.”
루펠라가 눈썹을 착 늘어뜨렸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루펠라의 순수함이 좋아요.”
“제가 순수하다고요?”
“네. 누구에게나 할 말을 다할 수 있는 건 이리저리 재지 않기 때문이죠. 강한 사람이라서 그런 거예요.”
“가진 게 많으니까요. 확실히 축복을 타고났죠.”
“아니요. 루펠라는 용기 있는 거예요.”
루펠라가 민망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녀는 엘리사에게 포크를 쥐여 주었다. 엘리사가 음식을 입에 집어넣자 몇 번이나 맛있냐고 물었다.
굉장히 맛있었다. 마피 부인은 삐뚤어진 집착만 없다면 계속 함께하고 싶은 여자였다. 능력 면에선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다.
부드럽고 고소한 데다 달콤한 게 입에 딱 맞았다. 사실 밤만 먹었던 이유는 다른 음식이 잘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오트밀은 먹으면 먹을수록 속을 진정시켰다.
엘리사가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그녀가 식사하는 동안 루펠라는 방을 둘러보고 떨어진 서류를 살펴보았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루펠라의 말에 엘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네?”
“국경에서 들어올 때요, 얼핏 이 사람 출입패가 경비병 허리춤에 달려 있는 걸 본 것 같아요. 특이한 이름이라 기억하고 있었어요.”
출입패를 허리춤에 달고 있다니. 그란디아는 수많은 부족과 인접한 만큼 출입 절차가 까다로웠다. 왕족인 엘리사조차 출입패를 보여야 국경을 지날 수 있었다.
“경비병의 이름은 아니에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걸 들었거든요. 애칭도 아니었고요.”
출입패도 확인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이라니. 엘리사가 서둘러 서류를 확인했다. 레이라 부인의 궁인 에튼궁에 매일같이 이 사람이 드나들었다.
“피기 코에토시.”
“특이한 이름이죠?”
“이름이 아니에요.”
“아니라니요?”
란델에서 들었다. 귀부인이 비밀리에 저택의 중요한 물건을 내보낼 때 물건에 사람 이름을 붙인다고. 물건에 발이 달렸을 리 없으니 이동하기 위해선 사람이 필요했다.
“피기 코에토시와 함께 드나든 사람은…….”
“여기 있어요. 벅? 성은 없네요.”
“성이 없는 사람은 신관이에요.”
벅이라면 그녀도 알고 있는 신관이었다. 파울로의 부관 격이자 그를 대신해 신관들을 통솔하는 자였다. 그리고 헬렌이 돈을 쥐여준 자이기도 했다.
“왜 사람 이름도 아닌데 출입 명부에 작성하죠?”
“드나들었다는 기록을 남겨야 할 만큼 중요한 물건이기 때문이겠죠.”
“혹시 ‘귀부인의 수첩’을 말하는 거예요?”
루펠라의 말에 엘리사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귀부인의 수첩이요?”
“네. 남편 몰래 물건을 내보낼 때 명부를 쓴다, 이런 거요.”
“맞아요!”
“명부 작성하는 이유는 중요하기 때문만이 아니에요.”
루펠라는 란델에서 자랐으므로 엘리사보다 사정에 밝았다.
“아니라고요?”
“남편을 협박하기 위해서 쓰는 거예요.”
“협박이라고요?”
“부부지만 귀족의 결합이기 때문에 알력 싸움을 할 때가 있잖아요. 안주인은 가주보다 힘이 없어요. 그럴 때 이용하는 게 이거죠. 귀부인 나름의 우아한 싸움이에요.”
루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 가문의 비밀을 이만큼 알고 있다고 시위하는 거죠.”
“가문의 비밀을 밖으로 유출할 수도, 지켜줄 수도 있는 사람이다?”
“맞아요.”
이거였다. 이걸로 부왕을 협박한 것이다. 엘리사가 서둘러 가장 최근에 피시 코에토시가 이동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국경에서 들어와 에튼궁에 보관되고 있었다.
이건 그란디아 내 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로 그녀가 가진 비밀을 떠들 수 있다고 시위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루펠라도 그걸 눈치챈 모양인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지막으로 에튼궁에서 레이라 부인과 차를 마셨다고 적혀 있어요.”
“비밀이 에튼궁에 있는 거예요. 언니, 찾으러 가요!”
“이렇게 대놓고 궁에 있다고 광고를 한 거라면 복사에 용이하다는 거겠죠. 문서일까요? 문서, 문…… 어머니의 일기장.”
루펠라와 엘리사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 중요한 걸 드나들게 한다는 건 분명 알고 있는 사람이 레이라 부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러 경비병 허리춤에 출입패까지 달게 했으니 수틀리면 세상에 광고를 하겠다고 떠든 셈이었다.
‘아니야, 어쩌면…….’
엘리사가 피시 코에토시가 드나든 날짜를 확인했다. 역시 사흘에 한 번꼴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피시 코에토시가 움직일 수 없을 거고, 그럼 숨죽이고 있던 그녀의 사람이 입을 열 것이다.
“언니, 가자니까요!”
“지금 움직이는 건 위험해요.”
“어서 언니를 구해 주고 싶어요. 여긴 이상해요. 마치…… 악몽 속에 있는 것 같아요.”
광대놀음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이 안에서 유년을 보낸 엘리사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엘리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모두와 상의해서 계획을 짜야 해요.”
루펠라는 엘리사의 생각보다 그녀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배 속에서 태아가 자라면 얼마나 위험한지. 출산 때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자라면서 의식을 갖게 되면 산모의 마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될 수도 있었다.
마법사 임산부들이 그런 실수를 몇 번 했다는 건 사료를 통해 증명된 바였다.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었다.
‘내가 언니를 구해 줄 거야.’
마피 부인이 엘리사에게 크게 잘못한 게 있기에 마음이 더 급했다.
그날 오후, 루펠라가 사라졌다. 진저와 리한이 마영석 거래를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루펠라가 사라졌다는 라골의 말에 엘리사가 다급히 소리쳤다.
엘리사가 라골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가 서둘러 진저와 리한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웬의 기사들을 풀어 엘리사가 지내는 제3궁을 뒤졌으나 루펠라는 찾을 수 없었다.
천방지축 시누이의 생각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제가 에튼궁에 가봐야겠어요.”
“위험하십니다. 아가씨는 지리를 모르시니……!”
“비밀 통로를 알려줬어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한 일이 이런 사달을 만들 줄은 몰랐다.
라골이 말릴 새도 없이 엘리사가 에튼궁을 향해 뛰었다.
루펠라는 말했다. 엘리사를 잃고 사람처럼 살 수 없을 거라고. 그건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루펠라는 시누이이기 이전에 첫 친구였다.
자신으로 인해 그녀를 잃고 엘리사가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 * *
엘리사가 알려준 대로 이동하니 에튼궁으로 향하는 통로가 나왔다.
헬렌이라는 시녀에게서 옷까지 빼앗았다. 루펠라 나름 만반의 준비였다.
시녀들이 처음 보는 루펠라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제 할 일에 집중했다. 근래 왕궁 시녀가 자주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펠라가 꽃병을 든 채 지나가는 시녀를 붙잡았다.
“거기 너.”
“뭐야?”
“레이라 부인의 방이 어디인지 알려다오.”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 건데도 귀족 영애 특유의 오만함을 가릴 수 없었다.
루펠라를 빤히 쳐다보던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귀족이 하인 행세하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듯.
“서쪽으로 쭉 걷다 모퉁이를 돌면 백조 조각이 있습니다.”
“……그래.”
“그 뒤를 보시면 쪽문이 나 있습니다. 그리로 이동하십시오.”
시녀의 반응이 떨떠름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로 인해 레이라 부인의 방을 찾게 되었다.
루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녀가 알려준 문을 찾아 들어갔다.
이상한 방이었다. 벽지 하나 발라지지 않아 벽돌 특유의 냉기가 느껴졌다.
걷다 보니 테이블과 몇 개의 의자가 나왔다.
“여긴 대체 어디람?”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기까지 했다. 지친 루펠라가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댔다.
그러자 스릉, 소리와 함께 벽이 열렸다.
‘찾았다!’
운이 좋았다. 벽을 타고 들어오니 드레스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쇼핑광인 루펠라 또한 고개를 주억거릴 정도로 고가의 옷이 가득했다.
‘언니의 옷장엔 싸구려 드레스만 몇 벌이었는데.’
그녀가 츳, 하고 혀를 찼다.
“이제…… 더 이상…… 수 없네.”
말소리가 들렸다. 환영 연회에서 들었던 레이라 부인의 목소리였다. 루펠라가 문에 귀를 붙였다.
“저도 계속해서 요청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부인 소리만 들으란 말인가!”
“부인께서 폐하의 아이라도 잉태하지 않는 한 왕비 자리는……!”
“벅! 내가 이때까지 당신을 어떻게 지켜줬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역시 엘리사의 추측이 맞았다. 레이라 부인은 벅과 긴밀한 관계가 분명했다.
‘그럼 신관장 파울로는? 그자는 어떻게 된 거야?’
“그래도 신분이…….”
“성국에 군권을 모두 넘겨준다지 않았어.”
“군권은 이미 성국에서 가진 거나 매한가지 아닙니까. 더한 것을 주셔야 저도 할 말이 생기지요. 닦달한다고 예하께서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시겠습니까.”
“그놈의 예하, 예하! 빌어먹을 교황. 언제까지 내 신분을 물고 늘어질 거야!”
“파울로 놈이 눈을 부릅뜨고 막고 있습니다. 예하의 후계라는 얘기까지 떠돌고 있는데 제가 무슨 수로…….”
“그래서 흠을 만들어줬잖아! 신관의 몸으로 여자를 안았어. 그런데도 그자 하나 처리하기가 어렵단 말이야?!”
레이라 부인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기다려 주십시오. 그란디아의 신관 모두가 레이라 부인의 아래에 있습니다. 아무리 신관장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은 어찌할 수 없을…….”
루펠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파울로는 적이 아니었다. 엘리사를 지키고 있는 마지막 보루가 그였던 것이다.
“레스칼포네족의 후예인 엘리사가 이 왕궁에 있어. 네가 성국의 도움만 구할 수 있다면 그년을 이용해 네 알량한 마력을 채울 수 있도록…….”
‘레스칼포네족?’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어쨌든 엘리사를 이용해 벅을 신관장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소리였다.
루펠라가 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으로 눈을 가까이 대었다.
레이라 부인이 테이블에 있는 상자에 숨결을 불어넣자 상자가 열렸다.
“그것을 제게 주십시오. 부인, 그럼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그대는 내가 멍청해 보이겠지. 왕비 자리에 눈이 멀어 내가 가진 최고의 카드를 그대에게 넘겨줄 만큼?”
“그, 그런 게 아니라…….”
“왕비 자리를 가져와. 그럼 그대가 필요로 하는 부분까지는 줄 수도 있지.”
이로써 확실해졌다. 복사본은 없다. 그란디아의 신관들이 모두 레이라 부인의 편을 들고 있으니 성국에 속한 나라의 국왕이 움직이지 못한 것일 뿐.
신관을 죽이면 군권을 모두 빼앗기다시피 한 왕은 죽는 수밖에 없었다. 왕이 바뀌면 그의 딸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겪으며 살 터였다.
‘그래서 레이라 부인을 죽이지 못한 거야. 리즈 왕비의 일기장은 레이라 부인의 손에 있지만 신관들이 언니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성국에서도 알고 있는 건가? 어째서 성국은 움직이지 않는 거지?
리한은 말했다. 엘리사는 전투 마법을 구사하는 자조차 손을 댈 수 없는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럼 성국이 그녀를 확보하려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일단 저것들이 나갈 때까지 여기서 기다…….’
몸을 일으키려다 휘청거린 루펠라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레이라 부인이 드레스룸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루펠라가 벌떡 일어나 비밀 통로를 향해 뛰어갔다.
레이라 부인이 드레스룸에 들어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벽이 열려 있었다. 여긴 벅을 비롯한 자신을 따르는 신관들만이 아는 통로였다.
때마침 시녀가 꽃병을 들고 들어왔다. 루펠라에게 길을 알려준 시녀였다.
“궁에 수상한 사람을 보았느냐.”
레이라 부인의 말에 시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여성 신관이 들었긴 하지만…….”
“여성 신관? 벅, 오늘 니콜이 에튼궁에 들었나? 오늘은 피시 코에토시가 나가는 날이 아니잖아.”
“아닙니다. 니콜은 제 명으로 성국에…….”
레이라 부인과 벅이 동시에 시녀를 쳐다보았다. 벅이 말했다.
“어떻게 생긴 여자였나.”
“굵게 굽실거리는 갈색 머리에 눈은 밝은 녹색이었고, 키가 작았습니다. 아! 그리고 볼에 점이 두 개…….”
시녀의 말을 들은 레이라 부인이 소리쳤다.
“당장 병사들을 풀어라. 루펠라 그웬! 그 여자를 잡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었단 말인가. 벅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죽여야지.”
“하지만 왕궁에서 죽어 나가면……!”
레이라 부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범인이야 만들기 나름이지 않겠는가. 시누이를 죽인 공주라. 그것도 나름대로 재밌겠지.”
쪽문에서 나온 루펠라가 사방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겁을 집어먹었다.
여기서 소란을 벌이면 언니와 오빠가 계획한 일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다. 아니, 그것보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든 많은 이의 보호를 받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멀리서 병사들이 다가왔다.
“저쪽이다!”
검을 들고 있는 병사들을 보는 순간 아찔해졌다.
“무슨 일인가?”
잔뜩 당황한 나머지 누군가 그녀의 곁에 다가온 것도 몰랐다. 엘리사였다.
“공주님.”
“무슨 일이기에 검을 들고 내궁을 뛰어다니는가 묻고 있네.”
“레이라 부인의 명으로 침입자를…….”
병사들이 엘리사의 뒤에 있는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수고가 많군.”
“곁에 계신 시녀를 살펴야겠습니다.”
“새로 들인 내 시녀일세.”
“확인을…….”
“죽고 싶으냐!”
엘리사가 소리치자 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난 폐하의 적통, 그란디아의 유일한 공주다. 감히 내 위에 서려는 자가 누구냐!”
엘리사가 루펠라를 등 뒤에 감춘 채 병사들 사이를 걸었다.
병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그녀들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엘리사와 루펠라가 모퉁이를 돌았다.
조금 전 그녀들을 막아선 건 하급 병사들이었다. 조금만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가 나타나면 엘리사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여기는 에튼궁이고 모든 병사는 레이라 부인을 따랐다. 그게 설령 국법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그란디아에서 레이라 부인은 그런 존재였다. 분명 병사들이 다시 쫓아올 터였다.
엘리사의 생각대로 다시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해.’
루펠라의 손을 잡은 엘리사는 리한이 알려준 대로 이동하고 싶은 장소를 떠올렸다.
‘배 속에…… 버튼이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머릿속으로…… 버튼을 누를…… 때 온 힘을…… 집중…… 시키세요.’
이전엔 놀라우리만큼 쉽게 마법이 발동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내 마력이 안 통해?’
뭔가가 그녀의 힘을 꽉 눌러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엘리사가 다급하게 속치마 안주머니를 뒤졌다.
“언니!”
리한이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라며 준 이동 스크롤이 있었다. 이것마저 발동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뭐든 시도해야 했다.
루펠라가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고, 후작의 조카라도 비밀을 본 이상 살아나갈 수 없었다. 스크롤은 한 장. 이동할 수 있는 사람도 한 명이었다.
그렇다면 도망쳐야 하는 사람은 루펠라였다. 그녀는 루펠라가 무어라 외칠 틈도 없이 스크롤을 찢어 그녀를 향해 던졌다.
“언니는요! 혼자는 안 갈 거예요! 언……!”
번쩍, 빛이 나더니 루펠라가 사라졌다. 이동 스크롤은 멀쩡하게 발동되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녀가 어디로 향했는지 확실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단기 이동 스크롤 중에서도 가장 미약한 힘을 발휘하는 아이템이었다. 혹시 신관에게 마법 발동이 발각될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왕궁 내를 벗어나진 못했을 것이다. 왕궁 내라면 어디든 이곳보다 나았다.
루펠라를 보낸 엘리사는 정신없이 뛰었다. 사방에서 군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잡히면 신문이 이뤄지는 것보다 암살되는 게 빠를 터였다. 다급하게 뛰는 것도 잠시, 막다른 곳까지 다다른 엘리사가 뜀박질을 멈췄다.
왕비궁이나 별궁은 그녀의 앞마당과 같았지만 레이라 부인이 끄는 에튼궁은 오직 그녀만을 위해 지어진 궁이었다. 길이 막힌 이상 엘리사는 궁지에 몰린 생쥐밖에 되지 않았다.
군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리사가 눈을 꼭 감은 채 남편의 이름을 되뇌었다.
‘여보……!’
그때 무언가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억센 힘으로 어깨를 끌어안은 그것은 남성의 손이었다.
“폐……!”
“쉿.”
딸의 어깨를 끌어안은 왕은 검지를 목걸이에 대고 한 방향으로 몇 차례 매만졌다. 그러자 루펠라 때와 같은 빛이 엘리사와 왕을 감쌌다.
눈을 떴을 땐 에튼궁이 아닌 익숙한 장소에 있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부왕, 그리고 헬렌, 또…….
“신관 파울로,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파울로!
엘리사가 부왕과 헬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도망치기 위해 눈을 깍 감았다. 에튼궁에서라면 몰라도 이곳에선 마력을 발동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력을 발동시키려 했을 때였다.
“레이라 부인이 있는 에튼궁과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가 있는 별궁, 그리고 신관저에선 마력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파울로를 쳐다보았다. 이미 그녀가 마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투였다. 그렇다면 잡아떼는 건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세요.”
“공주님, 일단 진정하시고…….”
“헬렌, 너도 날 속였어?”
“전 언제나 공주님의 시녀일 겁니다.”
“그럼 설명해. 어째서 폐하께서 날 찾을 수 있었고, 또 파울로는 여기 왜 있는지!”
그때 팔찌에서 반짝 빛이 일어났다. 누군가 그녀에게 몇 차례나 통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파울로가 말했다.
“받으십시오.”
“어떻게…… 에튼궁에선 발동하지 않았는데…….”
“공주님 몸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닿아 있어서 발동하지 않았다니…….”
그러고 보니 이동 스크롤은 멀쩡하게 발동되었다.
“오직 공주님의 마력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공주님 몸에 접촉하고 있는 마도구 또한 마력을 발동시키지 못합니다.”
“그럼 지금은 왜 통신이 되는 거죠?”
“공주님 곁에 누군가 아주 강력한 마력을 지닌 분이 계신 겁니다. 그분이 제 결계를 뚫은 거겠죠.”
리한! 미심쩍은 눈으로 왕과 파울로, 헬렌을 쳐다보던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선 의심을 한다고 나아질 게 없었다. 뭐든 시도해야 했다. 그녀가 팔찌를 매만지자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들리십니까?!
-언니! 대답 좀 해요!
-연결…… 됐다…… 조용히 좀…… 해.
-엘리사!
너무 시끄러운 데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말을 하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가늠도 안 되지만, 마지막 목소리만은 정확하게 들렸다.
남편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쭉 풀려 버렸다. 눈시울을 적신 그녀가 조그맣게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진저…….”
-엘리사! 당신이야? 내 목소리 들려?
“네…… 들려요…….”
-어떻게 된 거야! 잡혔어?
“잘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갈게. 어딘지 설명해!
엘리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 본궁으로 이동한다.”
진저도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왕…… 폐하십니까.
“그래.”
왕이 파울로를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는데 신기하게도 접촉이 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네 명 모두 본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왕의 침실 뒤, 그와 파울로, 그리고 헬렌만이 알고 있는 문이 열렸다. 휘장을 걷어내자 상상하지 못했던 비밀이 드러났다.
침대에 여성이 누워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엘리사가 비틀거렸다.
떠올리려 해도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던 여자, 그립고 그리워서 매일 눈물짓게 하던 사람.
“어머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진저가 아내의 허리를 잡았다.
“거짓말, 말도 안 돼. 어머니의 시신이 묘에 들어가는 걸 제가……!”
왕이 리즈 왕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기억 속의 그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빼면.
“여신이 레스칼포네족에게 내린 축복이지.”
왕의 손길이 너무나 애틋해 어느 하나 입을 열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은 엘리사 또한. 왕은 왕비 앞에서 사내였다.
그가 지키려 한 사람은 언제나 아내였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던 그녀를 그의 욕심으로 왕궁에 묶어놓았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어 그녀에게만 희생을 강요했다.
그녀의 희생이 사랑의 전부인 줄 알았던 자신은 얼마나 무지했던가.
그녀는 차마 그에게 내색할 수 없어 홀로 고뇌했다. 제 남자를 마음껏 자랑할 수도 없고, 사랑받고 있음을 드러내서도 안 되며 그저 홀로, 오로지 홀로 어두운 방 안에서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그리하여 모든 힘이 다해 시체처럼 차디차게 굳었어도 그녀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약속해, 내가 당신 곁에 돌아올 때 당신은 웃고 있어야 해.’
세상 모든 기쁨의 집합체 같은 여자였다. 말 한마디, 숨결 한 줄기마저 달콤했다.
그녀와 그녀의 아이만 있다면 그는 권력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내와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모든 욕심을 버리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여자.
“네 어미의 손을 잡아다오.”
왕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진저가 파울로를 쳐다보았다. 파울로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역시…….’
엘리사가 왕비, 아니, 시체의 손을 쓰다듬자 주변이 모두 고요에 파묻혔다. 왕은 그들을 초대한 사람답지 않았다.
왕의 침실에 모인 이들은 모두 왕이 입을 열길 기다렸다. 그는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마치 후회라도 하는 사람처럼.
결국 엘리사가 그에게 그간의 일을 물었다. 그럼에도 왕이 침묵을 지키자 파울로가 그를 대신하여 사정을 설명했다.
“이 일을 설명하기에 앞서 왕비께서 제게, 그리고 폐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려드리고 싶군요.”
아주 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잊혀 그저 리즈 왕비라 불리는 그녀, 엘리사의 모후에 대한 이야기였다.
리즈 왕비의 이름은 아즈렌이었다. 신어로 천국을 뜻했다. 그녀는 이름처럼 주변을 모두 천국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리땁고, 상냥하고, 따뜻해서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다.
그란디아의 국왕, 아데울리와 아즈렌이 만난 건 30년도 더 된 여름날이었다.
성국에 속한 나라는 여신이 지정한 길일에 신관을 뽑는 시험이 열린다. 아즈렌은 신관이었다는 제 부친처럼 성국의 신관이 되길 희망했다.
그 시험장에 왕과 파울로가 있었다.
파울로는 이미 유명 인사였다. 교황이 그의 소문을 듣고 직접 시험장에 왔을 정도로 뛰어난 마력과 섬세한 컨트롤을 자랑했다. 교황이 참가한 시험이었기에 왕 또한 참석해야 했다.
왕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파울로는 그에게 들러붙는 사람들을 피해 시험장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즈렌과 만났다.
아즈렌은 특이한 아이였다. 레스칼포네족의 후손이었으나 마력량이 일반인에 비해 조금 나은 정도였다. 마력량보다 더 특이한 건 그럼에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생이 밝은 여자였다. 엘리사는 그녀가 현명하며 정숙하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 그녀는 엘리사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아데울리, 그리고 파울로와 만났던 그날 그녀는 울타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성국의 신관들이 불온한 무리를 쫓기 위해 직접 설치한 울타리였다.
「무슨 짓입니까.」
평민으로 나 귀족보다 더 고귀하게 살아온 남자는 불의를 참지 못했다. 아즈렌은 말로만 듣던 파울로를 보고 놀라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누구시길래 성국의 신관께서 설치한 성물을 걷어차시냐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시험을 보러 온…….」
1차 시험에 통과한 이들은 총 여덟 명으로 모두 파울로와 함께 수련한 자였다. 그렇다는 건 저 여자는 시험에 떨어진 분풀이를 울타리에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울로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훈계했다.
「시험에 떨어졌으면 수련을 해야지 성물에 분풀이를 해서야…….」
「수련을 안 해서 떨어진 게 아니에요.」
「변명하는 건 비겁하다는…….」
「전 열심히 수행했어요.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오로지 시험 준비만 했다고요! 난 신관이 되려고……!」
화가 났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시험을 준비했는데 마력량이 부족해 탈락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에게 태어날 때부터 마력량이 넘치는 자가 훈계했다.
아즈렌이 고개를 숙이고 뚝뚝 눈물을 흘렸다. 신관은 말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신관이 되지 못한다고.
그녀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였다. 아버지처럼 신관의 인을 손등에 새기는 것.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저 사람이 내 아버지다 말하지 못했지만, 같은 인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부녀는 이어져 있노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
그때 아데울리가 나타났다. 멀리서만 보던 왕이 제 앞에 다가온 것이다. 파울로는 당황하여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아즈렌은 달랐다. 귀족이라도 왕을 쉬이 볼 순 없었다. 왕을 볼 수 있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가문의 힘이 막강하거나 개인의 능력이 뛰어날 것. 아즈렌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왕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왕비가 되어 아이를 낳게 된 건 천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
두 남자에게 아즈렌은 신기한 여자였다. 파울로에겐 감히 성물에 발길질을 한 여자였고, 왕에겐 신관이 되는 게 확실한 사내의 장딴지를 걷어찬 여자였다.
그렇다. 아즈렌은 파울로를 걷어찼다. ‘감히 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드느냐’, ‘당장 엎드려라’, ‘실력이 없다고 생각까지 없어서야 쓰겠느냐’ 땍땍거리는 사내를 참지 못한 것이다.
어린 왕은 배를 잡고 뒹굴었다. 평생 왕궁에서 산 그는 이렇게 재밌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두 남자에게 아즈렌이 신기한 여자였다면, 아즈렌에게 두 남자는 ‘머리에 똥 찬 놈’과 ‘허파에 바람 든 놈’이었다.
아이러니한 건 그 만남에서 평생의 짝을 찾았다는 것. 그리고 가슴이 설렌다는 게 무엇인지를 첫 만남에서 배웠다는 것이다.
「뭐가 웃겨요? 간절히 원하는 게 죽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얻을 수 없다는데!」
이 또한 화풀이었다. 파울로에게 난 화를 왕에게 풀었다. 왕인지 모르기에 부릴 수 있는 객기였다.
「그래? 우린 비슷하군.」
「네?」
「난 죽었다 다시 태어나야 족쇄를 풀 수 있거든.」
아즈렌은 먼 훗날에서야 그의 말뜻을 알게 된다. 그들의 왕은 그 자리가 죽기보다 싫었던 사내였음을.
그 후로 왕과 아즈렌, 아데울리는 틈만 나면 만났다. 열 몇 살 되는 어린애들에게 그 시간은 꿈처럼 달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왕과 아즈렌은 많이 달랐지만, 다른 만큼 비슷한 사람이기도 했다. 다른 건 신분이나 아픔을 견디는 법, 비슷한 건 자신과 그토록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렇게 왕과 아즈렌은 마음을 키워나갔다. 그가 왕임이 드러나기 전까지. 왕과 마찬가지로 질투에 사로잡힌 파울로가 소피아 왕태후에게 왕이 여자를 만나고 있음을 고한 것이다.
파울로는 후에 그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래서 아즈렌과 함께하기 위해 신관 자리를 포기하려던 계획을 접고 성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후회는 남았다.
제 선택으로 인해 왕이 레이라 부인을 만나게 되었고, 아즈렌의 딸이 평생을 외롭게 커야 했으니까.
리즈 왕비의 손을 쓰다듬던 엘리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당신들의 애정사가 궁금한 게 아니에요.”
과거의 엘리사는 리즈 왕비를 꼭 빼닮은 아이였다. 왕과 파울로가 아이를 제대로 보살필 수 없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아이를 보면 사랑하는 여성이 떠올랐다. 두 남자의 심장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는 여성, 아즈렌이.
엘리사가 왕과 파울로를 노려보았다.
“당신들의 사랑은 제게 변명이 되지 않아요. 평생 멍에를 짊어지게 되었어요. 사람의 애정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내 앞에 진심이 있어도 두려워 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요.”
울음기 배인 목소리가 가슴 아팠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멍에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것뿐이에요!”
진저가 엘리사를 끌어안았다. 이 분노를 내색하지 않으려 얼마나 가슴을 태웠을까. 아내가 가엽고, 그런 아내를 제대로 다독이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그제서야 왕이 입을 열었다.
“네게 용서를 빌 마음은 없다.”
진저가 왕을 노려보았다.
“그만하십시오.”
“자식보다 내 여자가 중요했다.”
“더 이상 엘리사를 상처 입히지 마시라 말씀드렸습니다.”
“너를 제물로 삼아서라도 내 여자를 지켜야 했다.”
“듣지 마. 시체를 끌어안고 사는 미치광이의 말이다.”
진저가 아내의 두 귀를 막았다. 그러자 왕이 흰자위를 번득이며 움직였다.
“누가! 누가 시체란 말이냐! 아직 잠들어 있을 뿐이야! 레스칼포네족은 신의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두 번의 삶이……!”
“현존하는 최고의 신관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진저가 파울로를 쳐다보았다.
“왕비님은 레스칼포네족과 달리 마력량이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고.”
리즈 왕비는 레스칼포네족이었던 아비의 피보다 일반인인 어미의 피를 더 많이 물려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레스칼포네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낳지 말자고 했지. 포기해 달라 애원했다.”
왕의 목소리가 처연했다.
하지만 리즈 왕비는 부득불 어미가 되길 택했다. 아이의 마력에 병을 얻게 되었음에도 끝내 아내보다 어미로 살았다.
“내게서 아내를 앗은 네가 미웠다.”
엘리사는 말없이 부왕을 쳐다보았다.
“부정 같은 건 내게 없는 단어라 생각했어. 그런데 왜 넌 이리도 사랑스럽단 말이냐.”
리즈 왕비가 엘리사를 갖기 전까진 평화로웠다. 레이라 부인을 앞세웠기에 불온한 세력이 그녀를 이용하려 들지도 않았다. 왕과 왕비는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런데 하룻밤의 실수로 엘리사가 생겼다. 왕비를 위해 모아온 자료에 의하면 산모의 마력이 아이의 마력에 미치지 못할 때 큰 불행이 생긴다고 한다.
왕비가 그러한 경우였다. 조부의 마력이 어미가 아닌 손녀에게 모두 이어진 건지 산모까지 태아의 마력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 생긴 막대한 양의 마력. 그건 리즈 왕비의 목숨을 갉아먹고, 왕을 고뇌하게 만들었다. 왕은 애원했다. 아이는 필요 없다. 왕좌 따윈 다른 이에게 넘기면 된다. 우리는 둘이서라도 평생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리즈 왕비에겐 아니었다. 모정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왕비는 아이를 출산하고도 살아남았다.
“신비한 일이었지. 추측대로라면 너를 낳은 즉시 온몸이 바스러졌어야 했는데.”
그녀는 오직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남았다.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이가 울면 우레가 왕궁을 덮쳤다. 웃으면 무지개가 생겨났으며 아이가 가는 길마다 꽃이 폈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다.
다행인 건 리즈 왕비가 아이를 낳을 즈음 파울로가 왕궁에 왔다는 것이었다. 파울로는 왕비를 위해 아이의 마력을 감춰 주었다.
하지만 그건 현존하는 최고의 신관이라 불리는 파울로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레스칼포네족의 마력은 신관이라 할지라도 당해낼 수 없었다. 아이의 마력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혼절했다.
그리고 파울로가 혼절했을 때 일이 났다. 우연히 신관 하나가 엘리사가 마법을 쓰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그 신관이 레이라 부인의 최측근인 벅이었다.
벅은 왕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알려진 레이라 부인의 줄을 잡고 싶어 했다. 운 좋게 신관이 되긴 했지만 능력이 형편없어 어린것들에게도 무시당했다. 레이라 부인이라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엘리사의 일을 알렸다.
레이라 부인은 똑똑한 여자였다. 처음부터 비밀을 알고 있다고 설치지 않고, 왕의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정보를 모았다.
몇 년에 걸친 계획이었다. 레이라 부인이 엘리사가 레스칼포네족의 후손임을 알아냈을 때, 리즈 왕비는 결국 목숨을 다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때가 되어서야 독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래를 제안하더구나.”
왕의 말에 엘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레스칼포네족이라 알려진 자는 네 외조부가 유일했다. 그런데 그와 어떤 접점도 없는 곳에서 네가 태어난 거다.”
진저가 중얼거렸다.
“신관의 아이란 걸 밝히겠다고 협박했겠군요.”
“그렇다. 그 일이 밝혀지면 너는 물론이고 왕비의 가문, 그리고 짐까지도 위험했지.”
진저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말은 바로 하십시오. 이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 왕비님이 폐위되어 어느 기록에도 폐하의 아내로 남지 못한다는 게 두려우셨겠죠.”
왕이 빙그레 웃었다.
“짐의 딸은 영리한 남편은 두었구나.”
진저가 엘리사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레이라 부인이 가지고 있는 건 무엇입니까?”
“…….”
왕은 대답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진저가 벌떡 일어나 왕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왕을 제외한 모두가 토끼 눈이 되어 진저를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서 사살되어도 할 말이 없는 중죄였다. 게다가 사사롭게 왕은 진저의 장인이 되었다. 장인의 멱살을 잡은 사위라니, 패륜이었다.
진저가 낮은 목소리로 왕을 위협했다.
“당신이 당신 아내의 시체를 지키기 위해 혈안인 것처럼 나도 내 아내를 지키기 위해 못할 게 없어.”
화살 비를 뚫고 살아온 남자의 위협에도 왕은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사가 남편을 불렀다.
“여보, 그만해요.”
“엘리사…….”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왕의 멱살을 잡고 있는 남편의 손등을 잡았다. 진저가 손힘을 풀었다.
남편의 손을 잡은 엘리사가 왕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나 분명히 말해두겠어요.”
“…….”
“어머니는 폐하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시체를…….”
“죽지 않았다. 레스칼포네족은……!”
“시체는!”
엘리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게도 권리가 있어요.”
“권리? 모친의 육체에 권리라고?”
“어머니의 의사 따윈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셨잖아요. 폐하께선 이미 어머니를 사람으로 대하고 계시지 않는데 제가 무엇을 가려 말하겠어요.”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가 남긴 것에 대한 우선권은 제게 있어요. 유품이 모두 제 것인 것처럼요. 이 모든 건 폐하의 선택이에요.”
엘리사가 왕을 지나쳤다. 시체와 왕을 번갈아 보던 루펠라와 라골도 그들을 따라 왕의 침실을 나섰다.
침실을 나선 루펠라가 굳은 표정의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언니, 미안해요…….”
엘리사는 루펠라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반성하세요.”
“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홀로 행동하지 말아요.”
“그럴게요.”
“이제부터 이동할 때는 물론이고, 방에 있을 때도 무조건 3인 이상 조를 지으세요. 라골과 리한도 마찬가지예요.”
라골이 그리하겠노라 답했다. 모두가 엘리사의 방에 도착했다. 마피 부인을 제외한 그웬의 기사들과 하녀, 그리고 리한까지 그녀의 방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진저는 아내의 뜻에 따라 조를 지어주고, 호위로 데려온 자들에게 각각 호위 대상을 짚어주었다.
“마크빌은 이 사람을, 그리고 그레닉은…….”
진저가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이러나저러나 평생을 함께 지낸 동생이었다. 그의 눈에 차는 매제라곤 할 수 없지만 여차할 때 목숨을 걸고 루펠라를 지킬 터였다.
“루펠라를 지켜라. 하우벡은 리한을 지킨다.”
“예? 저도 마님을 지키겠습니다!”
“레이라 부인의 궁과 별궁에선 마력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 아내의 마력만 제한했다곤 하지만 정확히 어떤지 확신할 순 없어.”
마력을 쓰지 못하는 리한은 쓸모가 없었다.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할 게 자명하니 호위를 붙여야 했다.
“마님의 마력이요?”
진저와 엘리사가 시선을 맞췄다. 어차피 란델에 돌아가면 마탑에서 교육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지금 드러난다 한들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란디아 내에선 함구한다.”
기사들은 이제 엘리사에게 존경의 눈빛까지 보내고 있었다. 반짝반짝한 수십 쌍의 눈에 엘리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병력은?”
진저의 말에 마크빌이 답했다.
“카프레제 전투에 한스가 지휘하는 아퀼라 부대를 투입했습니다. 스크롤을 이용하면 못해도 다음 주엔 도착할 겁니다.”
아퀼라 부대라면 암살에 특화된 부대였다.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퀼라 부대까지 합하면 우리 쪽에서 쓸 수 있는 병사의 수가 어떻게 되나?”
“백 명 남짓 될 겁니다.”
루펠라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기, 저번에 로헨과 연락할 때 들었는데 카르트 후작가의 상단이 내일모레쯤 이 근처를 지나간대. 지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트 후작이 자신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진저가 잡고 있는 카르트가의 약점을 모두 없애줄 수도 있었다.
“마영석의 마지막 거래를 구실로 그란디아로 들이지. 거스터 후작에겐 내가 말해놓겠다.”
“응, 카르트가에 연락할게.”
“전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 최악으로 치달을 시 에튼궁을 포위한다.”
“상대 병력을 파악하겠습니다.”
“총지휘는 내가, 연통은 하우벡이 맡는다.”
“명을 따릅니다.”
마크빌과 병사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사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엘리사의 방엔 그웬 부부와 라골, 루펠라, 그리고 리한이 남았다.
“리한, 너도 전투에 참가해라.”
“보수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다.”
“너는 신관을 맡아라. 신관장이 너를 도와 다른 신관들을 저지할 거다.”
리한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등을 굽혔다. 그러나 표정과는 달리 그의 손에 끼워진 마도구들이 모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왕비님의 시체가 있는 한 멍청한 왕이…….”
“아가씨.”
“아.”
루펠라가 멋쩍은 표정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그저 힘없이 웃었다.
루펠라의 말이 맞다. 부왕은 바보였다. 시체를 끌어안고 헛된 희망만 품고 있었다.
“루펠라의 말이 맞아요.”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요.”
방 안에 있는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엘리사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제 어머니를 편히 쉬게 해드릴래요.”
“당신 아버지가 허락할 리 없어.”
“폐하께서 제 허락을 받으신 것도 아니잖아요. 눈을 뜨게 해드려야죠. 어쩌면…… 복수일지도 몰라요.”
“엘리사…….”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 그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진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아. 진정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가 엘리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 리 없으니까.”
선한 아내는 어머니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후회하고 계실 거예요. 폐하를 안심시키기 위해 돌아온다 하셨지만…… 돌아오지 못하셨으니까. 제가 당신에게 그런…… 그런 말을 했다면 하늘에서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걱정 말아요. 지치지 않을게요. 이제 제가 반격할 차례예요.”
엘리사가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란디아에서 짊어졌던 멍에를 내려놓고 이 사람과 그리고 이 사람의 사람들과 또…….
‘아가…….’
아이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다. 엘리사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흐렸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래, 이제 그녀의 차례였다.
그녀가 문을 바라보았다. 방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실루엣이 기억났다.
“루펠라, 부탁이 있어요.”
“뭐든 말해요, 언니.”
“마피 부인을 맡아줘요.”
“유모를요?”
루펠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생각해 봤죠. 내가 클라우디라면, 레이라 부인이라면 어떻게 할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엘리사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