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이기적인 사람들
다음 날 오전, 잠에서 깬 엘리사는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리를 거부하더라니까요. 결혼 초엔 걸신들린 것처럼 원하던 사람이 말이에요. 그때 눈치를 채야 했는데!」
「왜요? 무슨 사고라도 쳤더이까?」
「젊은 것과 바람이 났더라고요.」
「어머머!」
문득 일전에 귀부인들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몸이 바뀌었으니 바람을 피울 상황도 아니고, 남편은 애초에 바람을 피울 만큼 가벼운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바뀌었잖아. 그에겐 내게 안기는 게 굴욕적인 일일 수도 있어.’
한 번도 경험이 없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몸이 바뀌면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많다며 야릇한 농담을 했지만, 정말 농담일 줄은 몰랐다.
‘이런 걸로 기분 상할 필요는 없어…….’
생각은 하면 할수록 느는 것이다. 엘리사는 간이침대에 가만히 앉아 또 다른 일을 생각했다.
‘그 사람도 내가 거부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을…….’
“주인님.”
세숫물을 가져온 하녀가 천막 밖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들어오라.”
하녀는 간이 트레이에 물이 든 대야, 세안용 비누, 세안 후 바를 크림과 수건까지 완벽히 준비를 해왔다.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음에도 트레이엔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란델은 대륙에서도 가장 큰 영토를 자랑하며 군사력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런 나라, 그것도 공작저의 고용인들이라 그런지 그란디아 왕궁의 고용인들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어느 부분에선 그들보다 더한 능력을 자랑했다.
안주인으로서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엘리사가 말했다.
“훌륭하다.”
화들짝 놀란 하녀가 황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과, 과찬이십니다.”
주인님은 결혼 전의 살벌하던 모습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러워지셨다.
이건 모두 마님의 작품이었다. 진정 훌륭한 건 란델의 미친개까지 감화시킨 그녀의 성품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마님께선 고용인뿐만 아니라 기사들에게 또한 깊이 존경을 받고 있었다.
‘역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니까. 마피 부인은 그것도 모르고…….’
마피 부인으로 인해 가장 스트레스가 큰 사람이 엘리사인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마피 부인을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저택에 분란을 일으켜 분위기를 가라앉혔을 뿐 아니라 너무나 철두철미하게 저택을 관리했다. 관리가 아닌 감시로 여겨질 만큼 저택을 떠나기 전날엔 내저의 총괄을 맡은 집사, 콕스와 한바탕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마님이 어서 마피 부인을 쫓아내 주면 좋을 텐데…….’
어려운 일이란 건 알고 있었다. 주인님도 그랬지만, 루펠라 아가씨가 특히 끼고돌고 있었기 때문에 마님이 아가씨와 의절할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었다.
“저…… 주인님.”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던 엘리사가 하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녀는 제가 먼저 그를 불렀음에도 우물쭈물 손가락만 매만지고 있었다.
“뭐지?”
“그게…… 마피 부인이 온 뒤로 마님의 안색이 나빠지셨습니다.”
엘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녀가 남편에게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다른 뜻이 아니라 저희 모두 마님의 건강을 우려하고 있어서……!”
“우려하는 게 아니라 핑계를 대는 것이다.”
“……예?”
“네 뜻을 이루려 내, 아니, 안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 핑계라 말했다.”
“저, 저는…….”
그녀의 혼이 들어 있는 육체는 수백 혹은 수천일지도 모르는 목숨을 도륙한 사내의 것이었다.
인상을 쓰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위용을 자랑했다. 사색이 된 하녀가 무릎을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나셨나 봐! 어떡해!’
당황했더니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저,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모두 같은 고용인인데 마피 부인만 특혜를 받으면…… 앞, 앞으로 고용인들 간의 기강이…….”
엘리사는 하녀의 말을 막지 않고 그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저택을 나서기 전엔 폴 아저씨, 그러니까 정원사를 하고 계시던 분이 실수를 하셨는데 마피 부인이 그 자리에서 해고를…… 그래서 집사님과 싸우기도 하고…… 저, 저희는 누구 말씀을 따라야 하는지…….”
당황한 바람에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무시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피니.”
“예, 예?!”
주인님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대들의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또한 바른말을 하는 것이 그릇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말을 해야 할 자리와 아닌 자리를 구분하라.”
“예, 주인님…….”
엘리사가 간이 트레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가라는 신호였다. 하녀는 떨리는 몸으로 겨우 간이 트레이를 끌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주인이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같이 실수를 범한 날엔 온갖 불안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하녀는 간이 트레이를 정리하면서도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용인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주인에게 실수를 하였다.
‘날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마님뿐이야.’
결국 하녀는 또 한 번 실수를 저질렀다. 그녀는 마님이 있다는 호숫가로 달려갔다.
진저는 그곳에서 기사가 오전에 다시 구해온 오렌지를 해치우고 있었다. 육류, 어류는 물론이고 다른 채소나 과일도 먹을 수 없는데 오렌지만은 가능했다.
그는 풀지 못한 성욕을 식욕으로 바꾸어 오렌지에 풀었다. 오렌지만 네 개째 해치우고 있던 그는 난데없이 달려와 제 발밑에 엎드린 하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살려주세요, 마님!”
“무슨 일이냐.”
“제가, 제가 주인님께 큰 실수를 했습니다.”
하녀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두 손을 비볐다.
실수를 하고 나니 진저 그웬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악귀라는 별명을 얻었던 전쟁에서 란델을 향해 칼을 들자고 주장했던 자들의 삼대를 모두 도륙했다.
타인에게 그가 무슨 까닭으로 그 많은 목숨을 도륙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의 손에 묻은 피의 양이었다.
“마피 부인의 일을 주인님께 고했는데 화가 나셔서…….”
“그게 무슨 소리야!”
하녀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눈물을 쏟았다. 안 그래도 어제부터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까지 얹어지니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마피 부인의 행동이 심해요. 정말이에요! 모두 그녀가 저택을 떠나길 바라고 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래서 저희 중엔 마님 명보다 마피 부인 명을 우선하는 사람도 있고, 집사님도 싫어하시고, 또…… 그렇지! 주인님의 음식에 이상한 것도 타요!”
마피 부인이 저택에 오기 전부터 몸이 바뀌어 있었다. 그 말은 마피 부인이 약을 탄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아내라는 말이었다.
‘약이라니?’
그건 제게도 보고된 바 없는 내용이었다.
“영양제라고는 하는데, 원래 주인님께서 드시는 음식은 모두 마님께 알려야 하잖아요. 그런 것도 혼자서 결정하고…….”
“……,”
“마님, 저는 그웬저가 아니면 갈 데가 없어요. 저같이 귀족가에 실수를 해서 해고된 사람은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고요. 저는 고향에 병든 노모가 있어서 죽어도 그웬저에서 죽어야 해요. 그런데 마피 부인이 자꾸 고용인들을 해고하니까…….”
“입 다물어.”
하녀의 처지는 진저에게서 측은지심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넣었다는 약이 무엇인지 염려될 뿐이었다.
진저는 마피 부인이 저택에 돌아온 후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을 전해 들었다. 아니, 전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해주고 자신이 찾은 내용에 따르면 아내가 약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제기랄.”
천하의 진저 그웬이 남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했다. 마피 부인은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검을 맞고 활을 맞은 자들도 물욕에, 혹은 소신을 위해 그의 등을 노렸었다.
‘아이를 위해 아내에게 해를 가한 건가.’
마피 부인은 충분히 그럴 만한 여자였다. 자신과 루펠라를 위해 모든 것을 내버렸던 적도 있었다. 그 모든 것 안에 도덕이나 신념 같은 게 포함되어 있었다.
하녀는 마님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는 것에 놀라 말문을 닫았다.
주변을 살핀 그가 무릎을 굽혀 하녀와 눈을 맞췄다.
“마, 마님…….”
“앞으로 너는 내 명만을 따라야 한다.”
“예?”
“이건 각하에게도, 마피 부인에게도 들켜서는 안 돼.”
“…….”
“그리하면 네가 저택에서 떠날 일은 없을 것이다.”
“예! 예, 마님.”
“마피 부인이 각하의 식사에 매번 넣는 약을 은밀히 가져와라.”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마피 부인이 자신보다 먼저 해결책에 가까이 갔을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 모르게 누군가와 결탁을 했다든가.
후자의 가능성은 전자에 비해 형편없이 낮으나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었다.
의심이 생기니 모든 게 불안했다.
* * *
남편은 계속해서 구토를 했다. 이제 오렌지까지도 풀 비린내가 난다며 질색을 했다.
“오전까지는 괜찮지 않았어요?”
“우욱!”
토사물이 든 통을 끌어안은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이상, 욱!”
“네?”
“이상해. 이곳에 온 뒤로 계속 이러잖아. 빨리 떠나는 게…… 웩!”
“하지만 지금 떠나는 건…….”
진저의 몸이 나빠지기 전에 출발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에 바로 호수를 떠날 수 있었다.
“이 몸으로 괜찮겠어요?”
“마차에서 토하진 않을, 웨에엑!”
“당신 몸이 안 좋은데 마차에서 토하는 게 중요한가요? 손으로 받아줄 수 있으니 그건 걱정 말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저가 눈가를 매만졌다.
“당신, 울어요?”
그는 아내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고 싶진 않은지 등을 돌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사소한 일에 화가 나고 그보다 더 사소한 말에 이처럼 감동이 되는 것인가.
“당신은 최고의 여자야…….”
기가 막히긴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여보, 바로 떠나긴 힘들 것 같아요. 당신 이상해졌…….”
“내가? 내가 어디가 이상해? 당신, 말이 심하군!”
조금 전만 해도 감동해서 눈시울을 붉히던 사람이 갑자기 말이 심하다고 야단이었다.
엘리사는 그와의 대화를 포기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상했지? 결혼 후로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했나? 다른 남자는 이상하지 않고?! 나와 이혼할 생각이야? 안 돼! 떠나고 싶으면 날 죽여야 할……!”
엘리사가 천막 밖을 향해 외쳤다.
“지금 출발한다.”
결국 진저는 자신의 뜻대로 마차에 탈 수 있었다.
부부가 마차 내로 들어갔을 때였다. 고삐를 잡으려던 마부가 덜컹, 하는 소음을 듣고 목을 길게 빼어 짐칸 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 고삐를 내려놓으려는데 마차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서 이 이상한 곳을 떠나지 않고 무엇하느냐!”
마님이 어서 출발하라고 성화였다.
결국 마부는 소음의 원인을 알아보지 못한 채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2주가 흘렀다. 진저의 바람과는 다르게 호숫가를 떠나고도 속이 가라앉지 않았다. 며칠째 묽은 수프도 넘기지 못하는 그로 인해 일정이 계속 지연되었다. 지금쯤이면 도착은 못 했어도 멀리 국경 정도는 보여야 했다.
그나마 리한이 제작한 스크롤이 있어 망정이지, 그의 스크롤이 없었더라면 일정이 끝도 없이 길어졌을 터였다.
진저의 등을 토닥이던 엘리사가 물었다.
“오늘은 어때요?”
“어제보단 나아.”
“유독 마차 안에서 심한 것 같아요. 밀폐된 공간이라 그럴까요?”
“아무래도…….”
진저의 영혼이 들어간 이후로 제법 올라왔던 볼이 구역질을 시작하고 나서는 몰라볼 정도로 홀쭉해졌다.
진저는 엘리사가 내민 물잔을 받으며 숨을 골랐다.
이젠 맹물도 마시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끓이지 않으면 물비린내가 나서 도저히 속으로 넘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끓이기만 하면 되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녹슨 주전자나 제대로 세척하지 않은 주전자로 끓인 물 또한 속이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웬 일행은 진료를 받기 위해 본래 계획했던 경로를 이탈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그란디아와 인접한 나라 ‘텔로트’였다.
텔로트는 많게는 천 단위에서 적게는 십 단위까지 소규모 부족이 모여 통합된 나라로 마을에 따라 문화가 많이 달랐다.
그웬 일행은 텔로트 중에서도 코스먼 부족의 마을로 들어섰다. 코스먼족의 마을이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달리 있었다.
텔로트의 몇몇 부족은 그란디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배해 참전한 남성의 절반을 잃었다.
그란디아의 공주인 엘리사가 그들에게 머물기를 청한다면 단칼에 거절할 것이 뻔했다.
엘리사는 코스먼 족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오두막을 안내받았다.
그녀가 진저를 침대에 눕히자 기사들이 정찰조와 경비조를 짜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분란이 생기면 꼼짝없이 고립되기 때문에 기사들은 다른 때보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용인들 또한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주인의 음식뿐 아니라 기사와 자신들의 식사까지 만들어야 했으므로 저택을 떠나온 후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그룹이었다.
엘리사는 남편의 허리와 다리를 주물렀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그는 평생 앓아본 적이 없는 근육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몸이 무거워졌다거나 많이 움직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손발이 저렸다.
“코스먼 족장에게 의사를 부탁했어요. 조금만 참아요.”
“우리 쪽 의사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잖아.”
“우리는 이동 중이라 장비가 부족하잖아요. 마도구도 없어서 정밀 검사를 하기도 힘들고요.”
“코스먼족이 마도구를 가지고 있겠어? 성국에서 미개하다고 받아주지 않아서 그렇지 그들도 신성을 믿잖아.”
진저는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엘리사는 그가 진료를 받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가 그의 말과 다름을 알고 있었다.
그란디아와의 관계가 타 부족에 비해 나쁘지 않을 뿐이지 그렇다고 좋은 관계라곤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아내의 몸에 무슨 수작이라도 부릴까 싶어 진료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리라.
엘리사가 그를 밉지 않게 흘겼다.
“진료를 받으려고 이곳에 온 거잖아요.”
“잠깐 쉬어가려고 온 거야.”
“고집 그만 부려요. 코스먼족은 텔로트 국 가운데 가장 온화한 부족이에요. 부족민 수도 적어서 위해를 가할 생각도 못할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뒤통수는 그런 자들이 치는 거야. 나 적이요, 드러내는 자들이 차라리 쉬운 상대라고.”
진저는 이 2주간 몹시 예민했다. 마치 갓 새끼를 낳은 고양이처럼 주변을 경계했다. 단 십 분도 아내와 떨어지려 하지 않아서 곤란한 정도였다.
‘정말 왜 이러는 거람.’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렇게 진료받길 거부하니 도리가 없었다. 엘리사가 한숨을 쉬더니 끓인 물을 가져오겠다고 몸을 일으켰다.
“물만 챙겨서 얼른 와.”
“당신, 요새 아기 같아요. 알아요?”
‘아기는 당신 배 속에 있어.’
진저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엘리사가 나가자마자 마피 부인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호숫가에서부터 마피 부인과 단둘만 있는 것을 꺼렸다. 호숫가를 떠난 후로 그녀와 단둘이 대면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한 적 없다.”
말투까지 냉랭했다. 마피 부인이 진저를 빤히 쳐다보다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약 꾸러미를 꺼냈다.
“약을 맞지 않으니 계속 몸이 좋지 않은 겁니다.”
마피 부인을 철석같이 믿었을 때야 아무런 의심 없이 주사를 맞았다. 그녀가 바쁠 때는 그 홀로 주사를 놓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저는 그녀가 저 모르게 아내에게 약을 먹이고 있다는 것을 안 후로 마피 부인의 주사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안심하고 맞으세요. 제가 직접 조제한 겁니다. 마력 증폭제와 영양제를…….”
“가지고 나가.”
“진저!”
기어이 마피 부인이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사나웠던 10대 때도 이렇게 그녀의 말에 반항한 적이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니?”
도저히 마피 부인과 대거리를 벌일 체력이 나지 않았다. 진저는 인상을 찌푸린 채 턱만 약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말을 해야 알 것 아냐. 대체 뭐가 문제니!”
엘리사가 가까이에 없으면 구역질은 멈추지만 온몸에 기가 빨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물을 가지러 간다던 아내는 오두막에서 꽤 멀리 떨어진 모양인지, 식은땀까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유모가 내게 할 말은 아니지. 우리가 그녀에게 할 말도 아니고.”
“뭐?”
“속이는 게 있는 놈은 혀가 삐뚤어지지 않은 한 남 탓할 수 없잖아. 안 그래?”
속이는 게 있다니. 마피 부인이 앞치마는 꾹 말아 쥐었다. 어쩐지 언젠가부터 하녀 하나가 자신의 곁을 맴돌았다.
그녀를 보는 시선이 어쩐지 의심스러워 몇 번 다그쳤으나 하녀는 기가 죽기는커녕 드세게 맞서왔다. 마치 든든한 지원군이 있는 양.
‘내게 사람을 붙였군.’
마피 부인이 입을 꾹 다문 채 진저를 쳐다보았다.
진저는 루펠라보다 영리한 만큼 달래기도 루펠라보다 어려웠다. 마피 부인이 한 수 물러나겠다는 듯 그에게 다가갔다.
“진저, 아가. 내 젖 물려 너를 키웠다. 내가 어떻게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겠니. 난 다만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했을 뿐이란다. 마님에게 해가 되는 약이 아니야. 그저…….”
“그저 나와 같은 약을 먹였을 뿐이지.”
호숫가를 떠난 후로 계속 몸이 안 좋았으면서 어떻게 약이 무엇인지 알아보았을까. 제 아내 일이라면 몸보다 우선이었다. 그래서 더 걱정되었다.
“마력을 증폭시킨 게 무슨 문제라는 거니.”
“내가!”
결국 참고 참아왔던 분노가 터져 버렸다. 지금껏 마피 부인을 내버려 두었던 건 그녀가 진저를 지키기 위해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 목숨보다 진저의 목숨을 우선했고,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진심이었다.
“이 진저 그웬이 그대의 속셈을 모를 정도로 아둔하던가. 나를 우롱치 마라, 마피.”
마피 부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진저는 언제나 그녀에게 남들과 다른 아량을 베풀었다.
마피 부인은 진저와 루펠라로 인해 특별해졌다. 그웬 공작을 키운 여자, 그의 고삐, 란델의 미친개들이 꼬리를 마는 여장부. 그런 별명이 자랑스러웠다.
그웬 남매에 대한 애정이 보상받는 것 같았다.
“그 애가 뭐라고 어미보다 중요하단 말이냐. 내가 너를 안아 길렀다. 세상 어떤 곳에도 기댈 구석 하나 없는 너와 루펠라를 내가……!”
“나는 지금껏 착각하고 살았군.”
“그게 무슨 소리냐.”
“유모는 콩고물만 바라는 하이에나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
“맞아! 나는 너희에게 그런 사람이야.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저 너희가 무사히…….”
“유모는 그 하이에나들보다 더 질이 나빠.”
쿵! 귓가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돈으로 보상하지. 어떤 귀족도 쉬이 만질 수 없는 액수로 보상하겠다. 그리하면 되나.”
“진저 그웬!”
“그래, 나는 진저 그웬이지. 마피, 당신이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억장이 무너지고, 그동안 살아온 흔적이 죄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네가 나에게…….”
“지금 그 사람은 마력을 제어해야 해. 그런데 약을 먹였다는 건 태아를 키우려 했다는 거지.”
“네 핏줄을 지키려는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
“몸이 바뀌어 혼은 더 이상 마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 약으로 마력을 늘렸으니 본래의 몸으로 들어가려 할 거야.”
“…….”
“그럼 다시 혼이 바뀌어도 혼이 아닌 몸에 축적된 마력은 내 혼이 있을 적에 들어온 것이니 기존의 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고. 어쩌면 그렇게 체질이 변해…….”
진저의 눈이 살기를 띠었다.
“마력 저장고 신세가 되겠지.”
고대에 쓰인 방법이었다. 마법사의 몸에서 혼을 추출해 타인의 마력을 집어넣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면 몸은 혼의 주인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데, 그럼 타인이 육체 주인의 허가 없이도 마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살아 있는 시체를 ‘마력 저장고’라 불렀다.
고대인들은 이 저장고로 굉장한 효과를 보이는 아이템을 만들었다.
“혼이 사라질 때까지 몸은 생체 활동을 멈추지 않으니 아이는 무사히 자랄 거다. 그걸 바랐나?”
마피 부인이 마른 입속에서 혀를 굴렸다.
오산이었다. 진저가 이것까지 알아내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성국에 있는 오랜 지기에게서 들은 방법이라 성국에 속하지 않은 란델의 공작은 알아내지 못할 줄 알았다.
“너는 네 아내가 위험하면 미련 없이 아이를 죽일 테니까!”
“마피 부인!”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어찌 살려고! 그 일을 방비한 게 뭐가 나빠!”
확실한 방법도 아니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한 것뿐이었다. 지금은 공작 부인 없이 못 사는 것처럼 굴지만 제 자식을 품에 안으면 다를 터였다.
“그 사람을 위해 그란디아로 가려던 게 아니라 이 방법이 가능한지 알아보려던 거로군.”
“어미 마음이 그런 것이다. 내 자식을 위해 못할 게 없는 거야!”
진저가 실소를 흘렸다. 아내를 위해 마피 부인의 무례를 눈감아주고,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마피 부인이 하는 모든 일을 용납했다.
평생 사람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아로새기며 살았다. 그런데 어째서 남을 믿었단 말인가.
모두 아내가 제게 준 무한한 애정 때문이었다. 타인에 불과한 여자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어주어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너도 겪고 있지 않니. 네가 하는 건 입덧이야. 잠도 못 자고, 몸이 무겁고, 피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괴롭지? 그렇게 열 달을 품어 낳은 자식이다. 귀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나는 너를 그렇게 사랑해!”
“루펠라가 가엾군.”
“무슨 뜻이니?”
“당신은 우리를 자식처럼 사랑한 게 아니라 죽은 자식을 대신해 집착했던 거야.”
그때였다.
쨍!
파열음이 나더니 열린 문 사이로 엘리사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저와 마피 부인이 모두 말을 잃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은 채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엘리사가 천천히 떨리는 발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게 현실인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무겁게 걸음을 내디딘 그녀가 진저에게 다가갔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배에 손을 올렸다.
“제가, 제가 당신의 아이를……. 내가!”
“엘리사…….”
그는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엘리사는 배를 만지고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꾹 베어 물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거죠?”
“…….”
“오해하는 거예요. 그렇죠? 당신이 제게 이런 일을 알리지 않았을 리 없어요.”
“…….”
“말도 안 돼. 어떻게 나 때문에 자식을 죽여. 맞죠, 여보? 제가 지금 말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어요. 당신이 오해를 풀어주세요.”
오해를 풀어달라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말하지 않아도 진실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진저는 말없이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엘리사, 난 당신 없는 삶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래서 난 당신을 잃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든, 얼마나 소중하든…….”
진실이었다. 그가 정말로 제게 임신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그것도 자식을 죽이기 위해.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남편이 내 자식을, 그의 자식을 죽이려 한다고. 도와달라고 목을 놓고 외치고 싶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도움을 줄 사람은 없었다.
엘리사가 남편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와요. 내 몸에서 나와.”
“엘리사, 진정해.”
“돌려줘! 내 몸을 돌려줘! 내 아이를 돌려줘!”
엘리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남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마피 부인이 그녀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진저는 지금 몸이 안 좋……!”
진저가 마피 부인의 손을 세차게 떼어냈다. 그의 손에 떠밀려 주저앉은 마피 부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오열하는 엘리사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진저를 쳐다보았다.
한참 그의 어깨를 흔들던 그녀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그의 배에 얼굴을 기댔다.
“너였어…….”
“…….”
“꿈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던 아이가 너였구나.”
진저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그녀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란델을 떠난 후로…… 매일 밤 똑같은 꿈을 꿨어요. 누군가 나를 애타게 불렀는데…… 나는 바보같이 그 아이가 내 아이라는 걸 모르고…….”
잔뜩 안개가 낀 숲을 맨발로 헤집고 다니며 그녀를 부르는 사람을 찾았다.
목소리가 너무나 안타까워서, 끌어안고 다독여 주고파 매일 아이를 찾았다.
바로 곁에 있는 걸 모르고.
“전 싫어요. 아이를 죽이고 저 혼자 살아남느니 함께 죽을 거예요.”
“제발, 엘리사……!”
“왜 죽을 거라고 생각하셔요! 여성 마법사들도 아이를 잘만 낳는 ……!”
“장모처럼 당신도 비명에……!”
“어머니라니요?”
결국 진저는 그가 이런 방법을 택한 연유를 그녀에게 말해주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엘리사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진저가 이야기를 모두 마치자 엘리사는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부터 당신과 나 둘뿐이었잖아.”
“그러니 평생 둘만 살자고요?”
“그래. 처음 그랬듯 마지막도 단둘이…….”
엘리사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마피 부인이 말했다. 그녀가 가엽다고.
아니다. 진정 가여운 사람은 그웬저에 갇혀 사람도 짐승도 아니게 된 이들이었다.
“돌아가세요.”
“……뭐?”
“저는 더 이상 공과 함께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당신이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아이 때문에 갈라서자는 거야? 나는 당신에게 아이보다 못한 사람이었어?”
“여자로 낳기에 어미로 살겠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내 남편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은 사내라는 뜻이죠. 당신이 내 의사를 무시했듯이 이번엔 내가 당신의 의사를 무시하겠어요.”
지금이었다. 지금 소망을 생각하면 본래의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확신을 하자마자 주변이 온통 빛으로 가득해졌다.
“엘……!”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미처 다 외치기도 전에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 *
진저가 눈을 뜬 건 엘리사가 떠나고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지금껏 엘리사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마력과 모친의 마력을 흡수하려는 태아의 사이에 있었으므로 그도 모르는 새 상당한 피곤을 축적하였다.
그는 정신이 들자마자 아내를 찾았다.
기사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떠나게 두었단 말이냐!”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몸에 손을 대면 자진하시겠다고……!”
“그래서?!”
“부대에 실력이 뛰어난 자들로 호위대를 꾸려 마님과 함께 보냈습니다.”
진저가 마크빌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마크빌은 휘청거리지도 않고 그저 뒷짐을 진 채 묵묵히 그의 주먹을 맞았다.
도저히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군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주군은 난데없이 혼절했기에 의중을 물을 수도 없었다.
사색이 된 그녀는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제 몸에 손을 대면 혀를 깨물겠다는데 어떻게 말릴 수 있겠는가.
마크빌은 호위만은 받기를 간곡히 청했다. 그녀 또한 그란디아로 홀로 가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호위만큼은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그란디아로 출발한다.”
“그게…….”
“또 무슨 일이냐!”
마님은 단거리 스크롤을 모두 가져가셨다. 반나절도 안 되어 성에 도착한 모양인지 오늘 아침에 전령을 보내 입국을 허락지 않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이 영감탱이!’
왕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그란디아의 국왕 아데울리가 딸의 청을 들어준 것이다.
그는 사흘 전, 추측하고 있는 모든 것을 아내에게 알려주었다. 거기엔 그란디아의 국왕, 아데울리가 진정 사랑한 여성은 리즈 왕비이며 레이라 부인이 엘리사가 마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것 또한 포함되었다.
‘협박을 한 건가?’
그가 으득, 이를 갈았다.
협박을 했는지 회유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가 입국을 금지했기에 그는 그녀에게 갈 수 없다는 것과 그란디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마를 짚고 있던 진저가 마크빌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 당장 거스터 후작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을 알아보아라.”
“거스터 후작이라시면…….”
“레이라 부인을 후원하고 있는 자다. 그자를 통한다면 그란디아로 갈 방법이 생길 거다.”
현재 그란디아는 왕의 손이 아닌 레이라 부인의 치마폭에 싸여 있었다.
그녀를 이용한다면 그란디아 왕궁에 들어갈 방법이 생길 게 분명했다.
마크빌이 거스터 후작과 연락할 방도를 찾기 위해 기사 몇과 함께 사라졌다. 진저 또한 다른 방법을 궁리하기 위해 오두막에 처박혔다.
사흘간 잠도 자지 않고 진저의 간호만 하던 마피 부인은 그제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녀는 루펠라가 있는 천막에 들어갔다.
마피 부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루펠라를 불렀다.
“루펠라, 아가.”
그러나 루펠라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골내지 마라. 오빠가 아팠잖니. 오늘은 너와 함께 자마.”
“건들지 마.”
“루펠라?”
“무서우니까 건들지 마!”
사흘 만에 보는 루펠라는 그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마피 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루…….”
“마력 저장고라니. 정신을 놓고 영혼이 사라져 죽을 날만 기다리게 하는 거라는데……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생각을 했어? 내가 아는 유모가 맞는 거야?”
‘들었구나.’
엘리사가 오두막에 들어온 후로는 그녀에게 집중하느라, 그 후로는 진저의 건강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누군가 그들의 대화를 들었을 줄은 몰랐다.
“다 너희를 위한 일이었어.”
“책임 전가하지 마! 유모가 날 위해 그랬다면 난 평생 죄책감에 숨도 쉬지 못하고 살 거야.”
“만난 지 일 년도 안 된 사람보다 평생 함께 지낸 네 오빠의 핏줄이 더 중요한 거야. 내가 뭐라고 했니. 너희는 세상에 단둘뿐인 남매라고……!”
“그런 개자식을 오빠라고 부른 나도 역겨워.”
마피 부인이 세탁을 위해 안고 온 진저의 옷가지를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졌다.
“그럼 잠자코 지켜보라는 거야?! 자식이 옳지 않은 길로 가려는걸!”
“그게 옳지 않다고 누가 그래? 세상 사람들이? 철학자가? 더 이상 뭘 포장하려고 해? 유모는 우리를 위해 그런 짓을 한 게 아니야.”
“그럼 내가 누구를 위해 그랬다는 거야!”
“유모를 위해서.”
“하!”
진저보다 루펠라에게 더 서운했다. 그녀만큼은 제 마음을 알아주리라 생각했다.
두 아이 다 자신의 말이라면 흙으로 빵을 만든다고 해도 믿었다. 대체 공작 부인이 얼마나 구워삶았으면 이렇게 반항을 한단 말인가.
“유모, 귀족이 되고 싶어?”
“듣자 듣자 하니 말이 심하구나!”
“남의 인생을 대신 살고 싶은 거야? 아니면 돌아오지 않은 청춘이 아쉬워서? 뭐가 됐든 좋아. 다만 나와 오빠를 위해 그 모든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하지 마.”
“…….”
“역겨우니까.”
마피 부인이 남긴 짐이라면 대신 짊어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도 그만큼 자신과 진저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아니었다. 유모는 그릇된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웬 남매의 이름을 핑계로 쓰고 있었다.
“나를 위해 언니가 그토록 처절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면 난 평생을 불행하게 살 거야. 죽지 않았어도 앞으로 나는 언니에게 죄인이 되어 살겠지. 유모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만해!”
“그런 무서운 일을 생각하고 행한 건 유모인데 어째서 내가 책임을 져야 해? 유모, 나는 이제…….”
루펠라가 이를 악물었다.
“유모가 날 사랑하길 바라지 않아.”
마피 부인을 지나쳐 나온 루펠라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유모에게 이렇게 심한 소리를 한 건 처음이었다.
심한 소리를 했는데 그 안에 거짓이 담기지 않았다는 게 더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자신과 진저를 사랑하지 않길 바란다는 건 진심이었다.
그녀의 애정은 그들에겐 너무나 버거운 짐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람. 그럼 언니가 정말…….’
세 명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설마’였다. ‘농담이겠지’, ‘내가 듣고 있는 걸 알아서 장난치는 거야’, ‘몸이 바뀌는 저주가 있을 리 없잖아!’ 진저가 혼절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도 장난 한번 거하게 친다며 고개를 저었다.
마피 부인의 반응을 보고서야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임을.
‘언니…….’
마피 부인이 한 몹쓸 짓이나 진저가 그녀에게 아이를 가졌음을 숨긴 것은 루펠라의 입장에선 이해해 주길 바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마피 부인이 아무리 밉다 해도 자신을 키워준 사람이었다. 모진 말로 할퀼지언정 타인으로 살아갈 순 없었다.
그건 진저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평생을 남매로 지내왔다. 타인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언니는? 그들이 벌인 일을 죄 홀로 감당하고 있을 언니는?
루펠라가 두 손을 꽉 맞잡았다.
그란디아 왕궁.
과거 엘리사의 보금자리이던 푸른 탑은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가 차지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녀는 왕태후의 침실과 가장 가까운 손님방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란디아로 돌아온 직후 바로 왕과 대면하였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녀가 남편의 그란디아 출입을 금한 것으로 남편과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엘리사가 위자료 한 푼 없이 그란디아에 돌아오길 빌고 있던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는 사흘간 파티를 열었다.
기쁜 날이었다. 있는 거라곤 왕족이라는 타이틀 하나뿐이면서 잘난 체하던 그녀가 결국 바닥까지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필리아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제 언니의 잔에 제 잔을 맞췄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던 거야.”
“어떤 소문?”
“그웬 공작이 그거에게 푹 빠졌다는 것 말이야. 비앙카 그게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전한 게 분명해.”
클라우디아가 고양이의 털을 빗기며 눈썹을 실룩였다.
“그웬 공작이 그란디아에 들어오기 싫다고 한 거겠지. 자존심이 상할 것 같으니까 그게 먼저 선수를 쳐서 입국 금지령을 내린 거라고.”
필리아의 말에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고양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네 말이 맞을 거야. 목석같은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니? 그웬 공작이 많이 참은 거지.”
“소문과 달리 신사인 모양이지? 아, 그런데 어머니는 뭐라셔? 이번 기회에 아예 그란디아에 붙잡아 놓으시겠대?”
“응. 코넷 경과 재혼시킨다더라고.”
코넷 경은 왕의 숙부를 제외하면 그란디아에 유일하게 남은 왕족이었다.
먼 친척이라 이름뿐이지만 그래서 더욱 차기 왕으로 어울리는 자였다. 부리기 쉬운 자일수록 입맛에 맞는 법이었다.
“그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방에 처박혀 있다는데.”
“음식도 거부한다는구나.”
“왜?”
“우리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겁을 내는 거겠지.”
필리아가 목청 높여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깔깔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하녀를 향해 손짓했다.
“너, 그 재수 없는 계집애에게 오늘 만찬에 꼭 참가하라 전해.”
오늘은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가 여는 마지막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다른 날보다 손님이 많을 테니 오랜만에 멍청한 공주를 유희거리로 내놓을 셈이었다.
클라우디아도 재밌겠다고 생각했는지 동생을 말리지 않았다.
엘리사에게 필리아의 말을 전하러 갔던 시녀가 돌아왔다.
“뭐래? 온다지?”
“그게…… 몸이 좋지 않으시어 만찬은 어려우시다고…….”
시녀, 재스민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재스민은 영리하고 셈이 능해 클라우디아가 가장 신임하는 하녀였다.
필리아가 ‘미친 거 아니야?!’라고 소리치며 방방 뜨고 있는 사이, 클라우디아의 시선이 재스민의 옷깃에 닿았다.
클라우디아는 심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어서 시녀들의 옷차림이 흐트러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재스민은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엘리사에게 말을 전하러 가기 이전의 옷은 물기 하나 없이 빳빳했다.
“그건 뭐니?”
“공주님이 제게 물을 뿌리셨어요!”
흡사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교사에게 친구의 실수를 이르는 것 같았다.
“뭐?!”
“뭐라고?!”
자매가 동시에 버럭 소리쳤다. 엘리사는 대체로 말을 따르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음독하여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시녀에게 물을 뿌렸단 말이지.’
고양이의 다리를 잡고 있는 클라우디아의 악력이 점점 거세졌다. 고양이가 깡, 소리를 내며 클라우디아의 무릎에서 뛰어내렸다.
“다시 가서 전하려무나. 내 만찬에 꼭 참석하라고.”
“하지만…….”
“입을 찢어야 그 ‘하지만’ 소리가 멎을까?”
“아, 아닙니다. 공주님.”
클라우디아와 필리아 자매는 왕의 핏줄이 아니었음에도 왕성에서 ‘공주’ 소리를 듣고 살았다.
자매보다 훨씬 신분이 높은 자들도 시녀들의 ‘공주님’ 소리를 묵인했다. 그건 레이라 부인이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큰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재스민이 다시 방을 나서자 필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란델에서 병이라도 얻어 온 거 아니야? 그 멍청이가 우리 말을 무시하다니!”
“여기가 어딘지 잊은 모양이지.”
여기는 엘리사의 집이 아니었다. 자매의 성일 뿐.
* * *
“공주님!”
벌써 다섯 번째 노크였다. 이번에도 확답을 받아오지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질 터였다. 재스민은 마음이 급했다.
“클라우디아 공주님이 만찬에 꼭 나오시라고 하셨어요!”
재스민은 엘리사의 앞에서 클라우디아를 공주라 칭할 만큼 자매에게 충성하는 자였다.
엘리사와 동년배인 그녀가 나이 많은 선임 시녀를 다 누르고 지금 이 자리에 오른 까닭이 그것이었다.
“공주님! 아이, 정말! 왜 갑자기 안 부리던 고집을 부리고 난리람.”
그웬 공작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란디아를 떠나기 전만 해도 목숨이 아까워 레이라 부인과 자매의 명을 잘 따랐다.
“옷까지 젖게 하고, 저 멍청이 때문에 나만 혼났잖아.”
재스민이 기둥을 걷어찼다.
그때, 엘리사의 방문이 열렸다.
“공주님!”
엘리사의 방으로 들어간 재스민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탁자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지금은 날아올 물이 없었다.
“흠흠, 클라우디아 공주님께서 만찬에 꼭! 참석하시라고 말씀 전하셨습니다.”
“회초리를 가져와라.”
“그럼 저는 가보…… 네?”
“회초리를 가져오라 하였다.”
재스민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재스민이 제 말을 들었음에도 달리 움직이지 않자 방 한편에 달린 호출 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얼굴의 시녀가 나타났다.
왕궁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지낸 엘리사가 많이 의지하고 지낸 언니 같은 시녀, 헬렌이었다.
그녀는 그간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인지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회초리를 가져오너라.”
헬렌이 굳어 있는 재스민을 흘깃, 쳐다보았다.
“……시녀를 벌하는 용도로 쓰시려 하십니까?”
“그래.”
엘리사의 명을 받고 나갔던 헬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초리 여러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재스민은 그때까지 얼어붙어 있었는데 엘리사가 그중 가장 굵은 회초리를 들고 나서야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고, 공주님!”
“등을 돌려라.”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공주님!”
재스민이 눈물, 콧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봐주기는커녕 소매를 걷었다. 결국 재스민은 헬렌에게 붙들려 등을 돌려야 했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네 잘못을 고하거라.”
“공…… 악!”
엘리사가 재스민의 등을 내려쳤다. 짝!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렸다.
“잘못, 잘못했…… 공주니임…….”
“말하지 않을 때마다 매의 수가 더 늘어날 것이다.”
짝!
“공주님께서 출입을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방문…… 흐윽 ……을 열었습니다.”
짝!
“공주님의 앞에서 파, 팔짱을, 악!”
짝!
“왕가의 귀애 앞에서…… 흐어엉, 폐하가 아닌 다른 자를 우선하였습니다.”
짝!
“공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았……!”
짝!
등을 족히 스무 대는 맞은 시녀가 쓰러졌다. 헬렌은 서둘러 근위병을 불러 재스민을 치웠다. 그리고 엘리사가 지칠 때마다 먹었던 수면제를 가져왔다.
“공주님.”
“괜찮아.”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임신한 와중에 혼과 혼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전에 없는 피로가 엘리사를 덮쳤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공포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혹여 식사에 독이라도 넣었다면? 레이라 부인이 암살자를 보냈다면?
이제 자신이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죽어 배 속에 아이가 세상 빛 한 번 보지 못할까 봐, 그것이 가장 걱정되었다.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 실정하였다는 왕에게마저도.
‘헬렌은? 헬렌은 믿을 만한 사람인가?’
왕궁에서 유일하게 제 편을 들어주던 하녀였다.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의 심술로 자주 보지는 못했으나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어주던 사람이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어서 모후의 일기장을 찾아 떠나야 했다.
남편에겐 갈 수 없었다. 남편은 아이보다 제 목숨을 우선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면 미련 없이 자신을 택할 것을 알기에 그에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왕과 거래를 했다.
그란디아에 오자마자 부왕을 찾아 진실을 물었다. 부왕은 언제나와 같은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남편의 추측이 상상에 불과하다는 듯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랬기에 엘리사는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를 속이려 하시는군요.」
「네가 많이 외로웠구나. 모두 짐의 탓이다.」
부왕은 웃고 있었다.
「예, 폐하. 모두 폐하의 탓입니다.」
「란델에서 보낸 날이 네게 특별했나 보구나. 이전과는 다른 눈빛이야.」
「어떤 여자가 있습니다. 그 여자의 삶은 대단히 불행하여 갓 낳은 자식과 하나뿐인 동생을 모두 잃었지요. 여자에게 유일하게 남은 피붙이는 여자의 동생이 낳은 귀족의 사생아, 조카뿐이었습니다.」
부왕은 그녀를 물리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마치 그게 아비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는 듯이.
엘리사는 이야기를 이었다.
「겨우 구한 직장에서 그녀는 삶의 의미를 부여할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 내주고,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으며 그들을 키웠지요. 아이들의 삶 또한 녹록치 않았기에 그녀는 더욱 힘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는 대단한 가문의 가주가 낳은 혼외자식이고, 또 하나는 그 가주의 아내가 데려온 먼 친척이었거든요.」
「썩 지루한 이야기로군.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냐.」
「아이들이 장성한 뒤에도 여자는 아이들을 위한다는 말로 그릇된 일을 저질렀습니다. 장성한 아이가 그릇된 일을 저지른 그 여자에게 무어라 말했는지 아십니까?」
그제야 부왕이 가면을 내려놓고 본심을 드러냈다.
「끔찍하다.」
「…….」
「이제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
「그녀에게 키워진 아이가, 그리고 자신이 가엾다.」
엘리사는 부왕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부왕의 말처럼 그란디아를 떠나기 전의 그녀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냉랭한 표정이었다.
「제가 폐하께 느끼고 있는 감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
「부디, 저를 위한 일이었다고는 말씀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폐하의 잘못된 선택으로 매일같이 죽음을 소원했습니다. 사흘을 빛 한 점 들지 않는 창고에 갇혀 목이 쉬도록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원망했습니다.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느냐고.」
「엘리사 그란디아.」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폐하,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지냈던 모든 일을 지우고 싶습니다. 어머니와의 추억마저도 말입니다.」
엘리사는 눈으로 말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그이고,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떤 진심도 말할 수 없노라고.
엘리사는 부왕이 진실을 말할 기회마저도 박탈했다.
“네게 부탁이 있어.”
엘리사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헬렌이 비틀거리며 침대로 향하는 그녀를 부축했다.
“말씀하세요.”
“앞으로 내가 먹는 모든 음식, 약, 그리고 물까지도 네가 관리해 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겨우 침대에 앉은 엘리사가 협탁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남편이 그녀에게 선물한 귀걸이였다. 팔면 서민 4인 가족이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고가의 물건이었다.
엘리사가 그것을 헬렌에게 건넸다.
“가진 게 이것뿐이야.”
“공주님!”
“이걸 팔아서 궁인들을 매수해. 남은 건 네가 가지고.”
“저는 이런 건 필요 없어요. 친분이 있는 분께 부탁해서 사람을 모아볼게요. 돈은…….”
엘리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란델에서 저택을 관리하고 사교활동을 하며 아로새긴 것이 있었다.
사람보다는 물질이 우선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하웰 백작이 비밀리에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 마침 궁에 들었다고 하니 바로 돈을 융통해 와.”
“공주님…….”
“헬렌, 내겐 시간이 없어.”
서둘러 모후의 물건과 일기장을 찾아 그란디아를 떠나야 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란델에 돌아갈 수 없었다. 임신한 몸으로 잦은 이동을 할 수는 없으므로 되도록 빨리 신변을 숨길 곳을 찾아야 했다.
엘리사가 건넨 상자를 꽉 그러쥐고 있던 헬렌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렌이 방을 나서자 엘리사는 문을 잠그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시녀들의 수장 노릇을 하는 재스민에게 회초리를 들었으니 이제 함부로 기세를 과시하는 자는 없을 터였다.
클라우디아, 필리아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엘리사가 이렇게까지 그들의 뜻에 반한 적이 없었으므로 쉬이 무슨 짓을 하진 못할 것이다.
필리아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쉽게 흥분하고 물욕에 눈이 어두워 견제하기 쉬웠다.
그에 반해 클라우디아는 모친인 레이라 부인을 쏙 빼다 박은 여자였다.
‘믿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이가 그란디아 근처에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문제는 레이라 부인이었다. 자신과 모후가 굉장한 마력의 소유자임을 아는 그녀는 조심하는 게 옳았다.
‘신관장을 어떻게 회유한 걸까. 젊었을 때 깊은 관계였다더니 아직도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건가?’
신관장 파울로는 모후에게 은혜를 입은 자였다. 신관 간의 알력싸움에 밀려 그란디아를 떠날 뻔했지만, 그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리즈 왕비가 신성력으로 병을 관리하겠다고 말린 덕에 그란디아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시간이 흘러 파울로가 신관 내부 권력 싸움을 정리하고 신관장이 되었다.
‘어머니가 아끼던 분이었는데…….’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걸까. 은혜마저 등질 정도로 레이라 부인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럼 그이는? 그이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기에 그토록 바랐던 따뜻한 가정을 포기한 것일까.
엘리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몰라도 엘리사만은 그가 가정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뜻한 가정을 원하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아기를 안고 있는 그를 보며 눈물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저런 아름다운 광경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지극히 자신과 남편을 위해서 아이를 원했던 것 같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아이에게 쏠려 있었다.
“아가야, 엄마가 너를 지켜줄게.”
그녀가 배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 시각, 진저는 그란디아 국경에 다다랐다.
“후작은?”
“오늘 왕성에서 주군의 입국 건이 논의된다고 합니다.”
입덧과 불면증을 겪었기에 지금 아내가 홀로 얼마나 괴로울지 잘 알고 있었다. 진저가 검 손잡이를 꾹 말아 쥐었다.
‘느려터진 새끼들.’
어떻게든 그녀가 모후의 물건을 찾기 전에 그란디아에 들어가야 했다.
자식 밴 어미가 모두 그러하듯 그녀는 지금 제 자식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예민할 대로 예민한 상태였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아비가 자식을 해하려 한다는 걸 알았으니 남편까지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 그의 뒤로 루펠라가 다가왔다.
“입국이 불허되면 어떻게 해? 밀고 들어갈 수도 없잖아.”
“다른 수를 생각해야지.”
“언니 도망칠 시간만 벌어주는 셈이네.”
진저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뭐라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가 그녀에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루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카르트가에 도움을 구했어.”
진저의 눈이 일그러졌다.
“뭘 그렇게 놀래? 외숙이 언제라도 가문에 돌아와도 좋다면서 돌아오고 싶을 때 쓰라고 준 거야.”
그녀가 목을 감싸던 옷을 조금 내려 목걸이를 보여줬다.
‘통신 마도구?’
진저가 코웃음을 쳤다. 얼마나 자신을 죽이고 싶었으면 성 몇 채는 우스울 가격의 아이템을 루펠라에게 선뜻 건넨단 말인가.
사실 그도 카르트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란디아에 들어가는 마영석의 절반을 모두 카르트가가 대고 있었다. 거래가 끊기면 그란디아뿐만 아니라 성국에서도 인상을 찌푸릴 터였다.
그의 입김이면 입국이 조금 더 수월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연락을 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다 그가 무슨 요구를 할지 몰라 쉬이 카르트 후작을 찾을 수 없었다.
진저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루펠라에게 도움을 받는 게 머쓱했다.
“후작은 뭐라지?”
“지금 저택에 없대.”
“없다고?”
“잠깐 영지에 갔나 봐.”
그럼 도움을 요청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말 아닌가.
“대신 숙모님과 로헨이 있더라고.”
카르트 후작의 장자인 로헨은 진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도 가문을 위험하게 하면서 진저와 대항하는 건 무리수라는 입장이었다.
“숙모님이 그란디아에 편지를 전달하신대.”
“리한에게 전달해. 그 녀석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이곳에 보내줄 거다.”
“이미 말했어.”
귀찮기 그지없던 여동생이 도움을 주는 순간도 있었다. 그웬 남매는 스스로 탑에 갇힌 공주를 데려오기 위해 생애 최초로 뜻을 함께했다.
* * *
“공주가 미쳤다고?”
머리를 손질하던 레이라 부인이 필리아의 말에 빗을 내려놓았다.
“네!”
“제 방에 처박혀 나오지도 않는다는데, 무슨.”
“오늘 만찬에 나오라니까 언니의 시녀를 매질했어요! 미친 게 아니면 그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재스민 등이 다 터졌더라고요!”
레이라 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클라우디아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행동했으면 그 멍청한 계집이 사방팔방 날뛰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클라우디아는 기가 죽어 고개를 수그렸다. 그녀 또한 엘리사가 이렇게 고집을 부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결혼하기 전만 해도 자신에게 대들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멍청한 것.”
레이라 부인이 딸을 타박했다.
“그 물러 터진 계집 하나 제대로 못 다뤄?”
“그게 아니라…… 그웬 공작이 대단한 거예요. 거기서 얼마나 호의호식했으면…….”
필리아가 클라우디아의 편을 들었다.
“다시 교육해라. 그 계집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 벌레 같은 것들이 나를 이겨보겠다고 그 계집에게 달라붙을 거야.”
“예, 어머니…….”
하필 그게 그웬 공작과 결혼을 해서. 왕이 수를 쓰고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터였다.
‘야비한 영감탱이. 꾀만 늘어서는.’
그웬 공작은 레이라 부인도 탐을 낸 사윗감이었다. 성질이 보통 아니라기에 선을 조금 미뤄두었을 뿐이었는데 그걸 왕이 홀랑 가로챘다.
머저리 공주와 결혼 후엔 아내에게 푹 빠졌다고 하는데 소문을 완전히 신뢰할 순 없었다. 조금 아껴준 정도겠지.
레이라 부인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클라우디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필리아가 제 아비인 죽은 백작을 닮은 데 비해 클라우디아는 자신을 쏙 빼다 박았다.
“오늘 그웬 공작의 입국이 논의된다. 내게 속한 귀족들에게 입국을 허락하자고 말할 생각이야.”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그웬 공작이 기하스엘 토벌로 받은 땅에서 엄청난 마영석이 나왔다더구나. 네가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내게는 물론 나라에도 도움이 되겠지.”
“…….”
“란델의 공작 부인. 그 이름엔 머저리 공주보다 네가 더 걸맞지 않겠니?”
딸은 목석같은 엘리사와 비할 수 없었다.
클라우디아의 입매가 둥글게 휘었다. 죽은 아비는 딸에게 남겨준 게 사생아라는 타이틀뿐이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치욕을 감당해야 했는가.
란델의 공작 부인이 되면 지금보다 더한 권능이 손아귀에 들어온다. 자신을 무시하는 이웃 나라 왕족들에게도 복수할 수 있었다. 레이라 부인은 의지를 불태우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저리 공주보다 내 딸이 낫지, 암.’
“오늘 밤, 폐하를 모시려면 준비할 게 많구나. 나가들 보렴.”
“예, 어머니.”
“예.”
자매가 레이라 부인의 명에 따라 그녀의 방을 나섰다.
필리아는 제 언니가 공작 부인이 되는 것이 흥분되는 모양인지 입을 멈추질 않았다.
“언니가 그 바보보다 부족한 게 뭐 있어? 그건 이름만 공주지, 사실 공주 노릇은 언니가 다 해왔잖아.”
말하다 보니 화가 났다. 가진 건 왕에게서 물려받은 왕족의 피밖에 없으면서 나라 밖의 일은 모두 엘리사가 나섰다.
“어머니가 어서 아들을 낳아야 할 텐데. 임신이 자꾸 늦어지니 그 바보의 가치만 올라가잖아.”
“입을 조심하라지 않았니. 왕위를 논하는 자는 역적이야.”
“내 말이 틀려? 그게 결혼을 해서 후계를 세우면 왕비가 되는 거잖아. 공주로도 모자라 왕비 소리까지 듣다니.”
클라우디아도 내심 필리아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엘리사는 왕태후와 공주인 까닭에 내궁의 일을 제대로 주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왕비가 된다면? 남편을 들쑤셔 제 권리를 되찾으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우리 쪽에서 왕을 세운다 해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
머저리 공주에게 폐하 소리를 하게 되는 것도 끔찍했다.
필리아가 꿈꾸듯 몽롱한 표정으로 종알거렸다.
“내 동생이 왕이 된다면 진짜 공주가 될 수도 있잖아. 언니는 공작 부인이 될 거고, 그럼 나는…….”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그렇게만 되면 미천한 자들이 공주 행세를 한다며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자들의 입을 찢어버릴 수 있었다.
시녀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엘리사 공주가 재스민을 매질했다는 것이 이미 내궁에 퍼진 모양이었다.
“그, 그래서 레이라 부인께서 꼭 만찬에 참가해 달라고…….”
엘리사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이 시녀는 재스민 다음으로 엘리사를 가장 곤욕스럽게 하던 여자였다.
‘이렇게 쉬웠나.’
우스웠다. 결혼 전에는 화를 넘어 무섭기까지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누군가를 매질하고, 소리치니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었다.
아니면 그녀의 남편이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모후는 자신에게 사람을 사랑하라 말해주었다. 가엽게 여기고 보듬어주라고 하였다. 그런 사소한 배려가 모여 좀 더 좋은 세상이 되는 법이라고, 남들 위에 있는 너는 필히 그래야 한다고.
‘아니요, 어머니.’
틀렸다. 사람은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존재였다.
보라, 매를 들으니 겁을 먹는다. 돈을 주면 사람을 살 수 있다. 선량한 마음은 공포를 이기지 못한다.
자신마저 그랬다. 클라우디아나 필리아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 레이라 부인과 다퉈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자매들보다 그란디아를 손아귀에 쥔 레이라 부인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알았다.”
“예, 예?!”
“알겠으니 나가보아라.”
“예, 공주님…….”
시녀는 엘리사를 힐끔거리며 방을 나섰다.
정말 저 순둥이 공주가 재스민을 매질했을까? 그녀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란디아를 떠나기 전보다 살이 조금 오르고, 머리가 긴 것 외에는 바뀐 게 없는 것 같았다.
‘눈빛은 조금 바뀌었을지 몰라도…… 재스민이 농담을 한 거겠지.’
공주의 방에서 나오기 전만 해도 어깨를 잔뜩 움츠렸던 시녀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괜히 무서워했어.’
그녀는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에게 공주가 만찬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시녀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간 시녀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재스민을 흘겼다.
“얘! 너 때문에 간 떨어질 뻔했잖아!”
“뭐?”
엎드려 누워 있던 재스민이 고개를 들었다.
“널 매질한 사람이 바보 공주라고 한 것 말이야. 아니지? 클라우디아 공주님이었던 거지? 아니면 필리아 공주님이라던가.”
시녀의 말에 재스민이 버럭 성질을 냈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지금?!”
안 그래도 고통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헬렌, 그 계집애에게 직접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했단 말이야!”
“내가 갔을 땐 평소와 같던걸?”
재스민이 탁자에 놓인 화병을 집어 던졌다. 쨍! 날카로운 파열음 소리가 나자 시녀가 주춤했다. 누가 성질 더러운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의 시녀 아니랄까 봐 거친 것도 똑같았다.
“아, 알았어……. 네 말이 맞아, 됐지?”
“정말로 날 매질했다니까? 쉬지도 않고 내 등을……!”
말하다 울컥 성질이 치밀어 올랐다. 재스민이 시녀를 향해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신경질적인 모습에 겁을 먹은 시녀가 슬금슬금 뒷걸음쳐 시녀 숙소를 벗어났다.
생각하다 보니 더 화가 난다. 공주보다도 헬렌, 그 계집애가 더 문제였다. 가져오란다고 두말없이 회초리를 가져올 건 뭐란 말인가. 클라우디아는 피 냄새가 역겹다며 당분간 근처에 오지도 말라고 하였다.
“내가 이번 만찬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재스민이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다가 비명을 질렀다.
“앗!”
그런 그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또 다른 시녀, 클로이가 던지듯 약병을 건넸다.
“들어간다고 네가 귀족 도련님 눈에 들 것 같아?”
“왜 못해? 레이라 부인도 평민에서 백작 부인으로, 또 나라를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자리에 올랐는데?”
“네가 귀족 첩이라도 되려고 열심히 비빈 건 아는데, 정신 차려. 넌 자매 모습이 좋아 보이든? 나는 하나도 안 부러워. 사람들이 앞에선 설설 기는 척해도 뒤에선 다 손가락질한다고.”
“이게 진짜……!”
“내 말이 틀려? 저 자매가 왜 눈에 불을 켜고 남편감을 찾는데? 그란디아가 아니면 어디서도 결혼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 그란디아 안에서도 그래. 웬만한 명문가라면 고개부터 젓는다고.”
재스민이 코웃음을 치며 턱을 치켜들었다. 부러워서 하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표정이었다.
클로이는 헛된 꿈에 부푼 친구가 가엽다는 듯 혀를 찼다.
“어떻게 해서든 이번 일을 만회해야 해.”
“글쎄, 너는 안 된다니…….”
“내가 한낱 귀족 첩이 되려고 왕궁에 들어왔는지 알아? 더 높은 자리를 봐야지…….”
재스민이 원하는 건 신관장 파울로의 옆자리였다. 그녀의 뜻을 간파한 클로이가 큰일 날 소리를 한다며 펄쩍 뛰었다.
“천벌받을 소리!”
클로이의 반응에 재스민이 픽,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더니 클로이를 향해 손짓했다. 클로이가 재스민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재스민이 소리를 바짝 죽인 채 속삭였다.
“베릴이 출궁한 이유가 뭔지 알아?”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지셨다고…….”
“틀렸어. 신관장 파울로의 침실에 들었다가 큰돈을 받고 출궁한 거야.”
클로이가 기함을 토했다. 정말 천벌받을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일반 신관도 아니고 신관장이었다. 성국에서 안다면, 아니, 성국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왕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사달이 날 터였다.
“폐하께서는 모르시지? 그럼 레이라 부인은?”
“당연히 폐하께선 모르시지. 그리고 레이라 부인은…….”
재스민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렸다. 파울로의 침실에 여자를 들여보낸 게 레이라 부인이었다.
‘그와의 관계가 질린 모양이지?’
그렇다면 이번엔 제 차례였다. 그의 눈에 들어 떵떵거리고 사는 게 그녀의 계획이었다. 제 등을 헤집어놓은 그 여자에게마저 인사를 받으면서.
“파울로 님의 시중은 신관이 드니까 이번 기회가 아니면 뵐 수 없는데…….”
재스민이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클라우디아의 눈에 들어 그를 만날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클라우디아 님의 마음에 드는 건 간단하지.’
바보 공주를 제대로 엿 먹이는 것보다 그녀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건 없었다.
재스민의 입매가 비죽 올라갔다.
* * *
드레스를 갈아입은 엘리사가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물렀다. 오래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태아를 성장시키는 조건이 엘리사의 아이에게만은 일반적이지 않은 게 분명했다.
‘마력인가?’
엘리사가 거울 속의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직 배는 나오지 않았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의 말에 의하면 빠르면 12주부터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엘리사는 정확히 언제 아이가 생겼는지 몰랐다.
무엇보다 아이가 평범하지 않다 보니 임신 상식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되도록 빨리 떠나야 해. 못해도 이번 달 안에는…….’
돌아오자마자 모후의 물건을 찾는 건 무리였다. 누군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었다. 되도록 은밀하게 모후의 물건을 찾아 그란디아를 떠나야 했다.
“공주님.”
엘리사가 고민하는 사이 헬렌이 다가왔다.
“출발하시겠습니까?”
“그래.”
클라우디아, 필리아의 만찬에 향하는 엘리사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만찬장에 도착한 엘리사는 그녀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이들과 인사도 나누지 않은 채 의자에 착석했다.
사람들이 엘리사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사에게 이런 분위기는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자그마치 10년간 이런 시선을 받아왔다. 이제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버림받았다면서요?”
“네?”
“그웬 공작이 국경을 넘지도 않고 그녀만 들여보냈대요.”
“제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엘리사 공주가 폐하께 직접 그의 입국불허령을 내려달라 청했다던데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그웬 공작이 이혼을 청했는데 공주가 그걸 피하려고…….”
엘리사는 수군거림을 귓등으로 흘렸다.
필리아는 바보였지만 클라우디아는 영리한 편이었다. 자신이 주최한 만찬 음식에 독을 탈 리 없었다.
‘제 만찬에서 내게 독을 먹일 만큼 바보라면 상대하기 쉬웠을 테지.’
안심하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리였음에도 그녀는 쉬이 포크를 들 수 없었다.
만찬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음식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다. 어류, 육류는 물론이고 물에서까지 물비린내가 났다.
그제야 그녀는 남편이 왜 호숫가에서부터 구역질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리사가 토기를 참지 못하고 입을 가렸다.
“어디 불편하신가 봅니다.”
밉살맞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엘리사를 쏘아보고 있는 필리아가 보였다.
엘리사는 대답지 않고 손수건으로 입을 눌렀다. 입을 여는 순간 구역질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엘리사의 사정을 모르는 다른 이들에겐 그녀가 필리아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바짝 약이 오른 필리아가 씩씩거리며 두 손을 그러쥐었다.
“그만하렴. 참석해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이잖니.”
“언니……!”
클라우디아가 테이블 아래로 필리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필리아가 입술을 짓씹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또 나를 무시하고…….’
엘리사의 무시보다 제 언니의 무시가 더 기분 나빴다. 자매는 한배에서 난 것 같지 않게 성격이 달랐다.
클라우디아가 레이라 부인을 쏙 뺀 것과 다르게 필리아는 제 오만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괄괄한 데다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고 보는 철부지였다.
자매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다르게 좋은 편도 아니었다.
여느 자매와 같이 동생인 필리아는 클라우디아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그래. 항상 언니 편만 들고.’
쟁반을 든 채 만찬 테이블을 돌고 있던 시종이 발을 헛디뎌 필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스쳤다. 대뜸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시종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얼마나 세게 따귀를 때렸는지 시종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일순 회장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시종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필리아가 찢어지게 소리치자 만찬장 밖에서 대기하던 시녀장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클라우디아의 눈빛이 못마땅하게 변했다.
“필리아.”
“내 드레스를 밟았다고요. 이게 얼마짜린데……!”
공주도 쉬이 걸치지 못하는 값비싼 천에 그란디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맡았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클라우디아가 시녀장에게 눈짓을 하자 시종은 변명할 틈도 없이 끌려나갔다.
자매는 이렇듯 왕궁의 시녀, 시종들은 물론이고 높게는 공작부터 낮게는 자작 영애에게까지 함부로 대할 수 있었다.
공주에게도 없는 권한이 그녀들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시종에게 퍼부었음에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던 필리아는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어릴 적부터 필리아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육포처럼 물고 뜯고, 과일처럼 즙을 내어 잔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 수 있는.
“왕비가 없으니 내궁이 이리 어지럽네요. 안 그래요, 공주?”
“…….”
“폐하께서 이제 슬슬 왕비를 들여야 할 텐데요.”
필리아는 큰 파티가 있을 적엔 엘리사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네 어미가 없어서, 네 조모가 내 어머니를 왕비로 들이지 않아서.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그러면 엘리사는 항상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겠지. 모두 어머니를 왕비감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뭐라고 말을…….’
“그러게 말이에요.”
“예?”
“폐하께 비를 들이라 주청드릴 생각입니다.”
만찬장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엘리사 공주가 레이라 부인을 왕비로 인정한 것인가. 사람들이 서로 시선을 맞추며 엘리사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클라우디아와 필리아마저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엘리사를 빤히 응시했다.
필리아가 제 언니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어머니를…….”
“영애, 영애는 결혼을 약속한 분이 있나요?”
엘리사가 거스터 후작 영애와 시선을 맞췄다. 거스터 후작은 레이라 부인의 후원자로 그녀가 왕의 첩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모두 그에게 있었다.
당황한 거스터 영애가 아랫입술을 꾹 베어 물었다.
“저, 저는…….”
거스터 후작 영애는 부친이 아닌 모친을 닮아 성정이 유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정치 싸움에 끼어들고 싶어 할 만큼 욕심이 없기도 했다.
“이전부터 성품이 참 바르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곳에서든 훌륭한 어머니가 될 것 같네요.”
이곳에서 엘리사의 말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신분도 하찮은 데다 부정부패의 온상인 레이라 부인이 아닌 거스터 후작의 외동딸을 왕비감으로 점찍어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참다못한 필리아가 꽥 소리를 질렀다.
“내 어머니의 어디가 저런 여자보다 못하다는 거야!”
“필리아!”
클라우디아가 필리아를 뜯어말렸다. 거스터 후작은 외동딸을 깊이 사랑하여 손톱 밑 거스러미도 차마 넘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자리에서 후작 영애를 모욕한다면 모친과의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었다.
“말해봐, 너! 용병의 아이를 밴 적이 있다는 네가 왕비 자리에 어울려?!”
필리아는 클라우디아가 말릴 새도 없이 거스터 후작 영애의 약점을 들췄다.
클라우디아가 황급히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당했어.’
이건 이간책이었다.
이간책을 쓰려면 이 소문이 퍼졌던 열일곱 즈음이 가장 걸맞은 시기였다.
그러나 엘리사 성정에 거스터 영애의 치부를 들출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애초에 레이라 부인이나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에게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던 여자였다.
‘란델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필리아는 여전히 흥분해서 앞뒤 분간을 못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아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필리아!”
“내가 틀린 말 했어? 언니는 왜 항상……!”
“입 다물어.”
결국 필리아는 클라우디아의 명을 받은 시녀들에게 끌려 만찬장을 나섰다.
그렇게 만찬이 흐지부지 끝났다. 남에게 짐을 떠넘긴 덕에 이룬 쾌거였다.
‘내 아이를 지켰으니 쾌거가 맞는데…….’
가슴 한구석에 찬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 * *
클라우디아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제 바보 공주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분해서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모친은 필리아가 벌인 일을 알고 크게 역정을 내셨다.
‘동생 관리 하나 못해서 무얼 하려고!’
늘 그랬다. 동생이 벌인 모든 일은 그녀의 탓으로 돌아왔다.
필리아는 자신을 어머니께 크게 꾸중을 듣게 해놓고서도 반성의 기색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 왕궁에는 천지 분간 못 하는 멍청이가 너무나 많았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아침부터 어머니의 부름이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모친의 방에 들어가기 이전에 거울을 꺼내 눈을 살폈다. 충혈된 곳은 없는지, 눈 밑에 거뭇한 것은 화장으로 가려졌는지 확인한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만날 땐 기쁨보다 긴장이 먼저였다. 그녀가 원하는 완벽한 딸이 되려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클라우디아의 나이가 스물이 넘었다. 다른 여자라면 벌써 결혼했을 나이였다. 이제 자신도 가정을 꾸려 어머니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머니, 클라우디아입니다.”
클라우디아가 문밖에서 자신임을 고하자 곧 들어오라는 모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
다행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만면에 미소를 띤 어머니와 붉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서 오너라.”
레이라 부인은 상냥한 표정으로 클라우디아를 향해 손짓했다.
“란델에서 귀한 분이 오셨다. 공, 제 딸입니다. 제게는 보배보다 귀한 아이라 꼭 인사시키고 싶었어요.”
클라우디아가 한 발짝, 또 한 발짝 천천히 사내에게 다가갔다. 레이라 부인 곁에 선 그녀가 사내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가 등을 곧게 폈다.
‘아…….’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꿈속에서만 그렸던 미인의 눈동자 속에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들어 있었다.
딸이 사내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보고 있자 레이라 부인이 딸의 손을 건드렸다.
“크, 클라우디아입니다.”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말없이 귀한 분을 모셨더니 긴장했나 봅니다. 클라우디아?”
“아! 레먼가의 클라우디아입니다.”
“진저 그웬이오.”
“공의 존함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이름과 함께 무슨 말이 오갔는지 궁금하군.”
“몹시 근사한 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진저가 입꼬리만 들어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음에도 레이라 모녀에겐 달리 보였다.
‘고작 이런 여자들이었나.’
진저 그웬은 소문처럼 그린 듯한 미남이었다.
“저는 폐하께서 찾으셔서 먼저 가보아야 할 듯싶습니다. 클라우디아, 네가 공을 살뜰히 모셔야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클라우디아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잠깐…….”
레이라 부인이 클라우디아를 데리고 방문을 나섰다. 클라우디아는 모친에게 끌려나간 뒤에도 정신을 반쯤 놓고 있었다.
“클라우디아.”
“…….”
“루디!”
“네! 네, 어머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외모에 홀리면 안 돼. 진저 그웬이 그란디아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네.”
레이라 부인이 떠나고 클라우디아가 본격적으로 그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름과 나이 등 소소한 잡담을 나눴다. 클라우디아는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만 할 뿐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지 않았다.
“보고 싶은 곳이 있으신지요? 폐하께서 부족한 저를 어여삐 여겨 주셔서 웬만한 곳은 모두 출입이 가능하답니다.”
아내에게서 늘 들어온 해바라기밭이 궁금했다.
‘모후께서 좋아하는 곳이에요. 정원 지붕을 개방하고 밭으로 꾸며 놓으셨어요. 여름에 꽃이 피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해바라기밭을 떠올리던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아내를 떠올린 진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럼 해바라기밭을 보고 싶소.”
“아…… 직 꽃이 다 피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외진 곳에 있어서…….”
해바라기밭은 리즈 왕비궁에 있는 것으로 왕은 그곳만큼은 레이라 모녀에게 개방해 주지 않았다.
“어렵다면 됐소.”
“…….”
진저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닙니다. 함께 가세요.”
언제 또 단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진저와 클라우디아는 리즈 왕비궁에 도착했다. 경비병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클라우디아가 진저에게 양해를 구하고 경비병들과 따로 말을 나눴다.
“내가 누군지 몰라?”
“하지만 폐하께서…….”
“네 명이 폐하의 손에 달렸을까, 내 손에 달렸을까.”
“그, 그래도…….”
“나와 공이 비궁에 든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결국 경비병은 클라우디아의 말에 따랐다.
리즈 왕비궁에 든 진저가 쓰게 웃었다. 왕비가 작고한 뒤로 아무도 관리하지 않은 건지 삭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이런 곳이 아내의 놀이터였다. 홀로 왕비궁 안에 거닐었을 어린 엘리사가 그려져 마음이 아팠다.
‘궁 안에 작은 우물이 있어요. 그곳에 들어가 있으면 하늘과 구름만 보여요.’
진저가 작은 우물의 둘레를 쓰다듬었다.
‘좁고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기 전엔 제 유일한 안식처였어요.’
이끼가 잔뜩 낀 이곳이 안식처인 아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물을 보며 애틋해진 진저를 본 클라우디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엘리사가 좋아하던 우물이었다. 어렸을 적에 그녀를 골리려고 우물 뚜껑을 닫아버린 적이 있었다.
클라우디가아 애써 미소를 지으며 진저의 팔을 잡았다.
“해바라기밭은 이 앞입니다.”
진저가 매정하게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성큼성큼 걸어 해바라기밭을 찾았다.
노란 꽃잎이 잔뜩 피어 있는 풍경은 몹시 아름다웠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을 텐데 해바라기는 어떤 꽃밭에서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피어나 있었다.
진저는 말없이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의 곁에 다가온 클라우디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왕궁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왜 항상 마음 한편이 서늘할까요?”
클라우디아의 모습이 지워지고 초라한 드레스를 입은 아내가 나타났다. 마치 아내가 그의 곁에 있는 것처럼.
“많이 외로웠겠군.”
“…….”
클라우디아가 진저의 옆선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클라우디아의 생을 성공했다고 표현했다. 사생아가 왕궁에 들어 공주 노릇을 하고 살았으니 최후가 돌팔매당해 죽는 것이더라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아무도 클라우디아의 외로움을 몰랐다. 두려워서 숨고 싶은 그녀를 알아준 사람은 진저가 유일했다.
클라우디아의 동공에 물기가 어렸다.
“어떻게 아시나요?”
“내가 그랬으니까.”
진저는 클라우디아가 아닌 해바라기밭에 서 있는 아내의 환영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지켜주고 싶어져.”
쿵.
클라우디아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왜일까.’
어째서 이 남자를 보면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은 걸까.
클라우디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엘리사.”
사내는 그녀의 이름이 아닌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 * *
진저에게 쉴 곳을 내어주고 제 방으로 돌아온 클라우디아는 침대에 양팔을 올린 채 얼굴을 파묻었다.
참을 틈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자마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째서 엘리사, 그 계집애는 항상 클라우디아가 간절히 바라는 것만 앗아가는 것일까.
그 아름답고 다정한 남자를 가지고 싶었다. 이토록 무언가를 깊이 갈망한 건 처음이었다.
‘엘리사, 엘리사라고 했어.’
제 심장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 순간, 그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 진심을 고백하고 있었다.
“지켜주고 싶다고?”
자신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자신만 한 여자를 곁에 두고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바보 공주를 떠올리다니.
‘그깟 게 뭐라고.’
클라우디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저…… 공주님.”
한참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피 냄새가 역겨워 당분간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던 재스민이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너도 내가 우습니?”
“네?! 아닙니다!”
“내게 오지 말라던 것을 잊었어?”
“아, 그게…… 아무래도 엘리사 공주가 심상치 않아서…….”
엘리사가 심상치 않다니?
“무슨 소리야?”
“헬렌이라고 공주가 결혼 전부터 아끼던 계집이 있는데…….”
재스민이 클라우디아를 따르고부터 그녀에게 줄을 서고 싶어 하는 시녀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심심치 않게 이러저러한 소식을 많이 물고 왔다.
“올리브는 동생이 크게 앓고 있어서 돈이 많이 필요해요. 그래서 시녀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도 많이 하는…….”
“요점만 말해.”
“올리브가 요새 이상하게 헬렌을 따르더라고요. 그래서 뒤를 캐보니까 동생 약값을 헬렌이 주었다지 뭐예요?”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희귀병을 앓고 있어서 약값이 몹시 비싸요. 그런데 몰래 하던 잡일도 딱 끊고 헬렌의 일만 돕고 있어요. 헬렌은 엘리사 공주가 아끼는 아이라서 돈이 되는 파트엔 절대 갈 수 없거든요? 돈 있는 집안도 아니고요. 돈이 생겼을 리 없어요.”
엘리사 공주가 헬렌에게 돈을 쥐여주었다? 왜?
재스민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던 클라우디아가 몸을 일으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어요.”
“더 큰 문제?”
“올리브가 요새 신관과 접촉하더라고요.”
클라우디아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신관을 돈으로 매수하는 건 중죄였다. 성국에 보고가 올라가면 입지 문제가 될 것이다.
“자세히 알아봐. 증거를 잡으면 더 좋고.”
“예.”
이틀 후 재스민이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추측하고 있는 게 맞았다. 올리브와 신관이 돈을 주고받는 장면을 목격한 자가 둘이나 되었다.
클라우디아는 이 일을 모친에게 보고하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았다.
“엘리사 공주가 멍청한 짓을 했구나. 증거는 충분하니?”
“목격자가 둘이나 있습니다. 빠져나가지 못할 거예요.”
레이라 부인은 헬렌이 신관에게 건넸다는 돈주머니를 매만졌다.
왜 하필 신관을 매수하려 했을까. 신관은 내궁의 일에 깊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내궁 정쟁에선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역시 그냥 두고 보아선 안 된다. 레이라 부인이 돈주머니를 콱, 움켜쥔 채 입매를 비틀었다.
“그웬 공작과는 어떻게 되었니?”
“…….”
“멍청한 것. 사내 마음 하나 못 꾀어서야…….”
“엘리사 공주를 많이 아껴요. 제가 둘 사이를 파고들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공주를 찾지는 않는다고?”
“예…….”
그건 이상했다. 클라우디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눠도 엘리사 공주로 종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도 그쪽에서 먼저 공주를 찾진 않았다.
오늘 아침에 그와 함께 왔다는 그웬 영애와 나누는 이야길 들었다.
‘언니는 대체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아직 안정이 필요할 거야. 내가 왕궁에 들었다는 건 아직 레이라 모녀를 비롯한 몇몇만 알고 있으니 시간을 주려고.’
엘리사 공주가 무슨 이유로 그를 떠난 건지 모르겠지만 클라우디아에겐 좋은 일이었다.
“오늘 그웬 공작의 환영 연회가 있을 거다. 그 자리에서 밝혀야겠구나.”
“예, 어머니.”
클라우디아가 레이라 부인의 방을 나섰다. 그녀는 복도 끝에서 오고 있는 진저를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곁에는 그웬가의 문양이 그려진 건틀렛을 차고 있는 기사 몇과 마찬가지로 그웬가의 문양이 그려졌지만 건틀렛이 아닌 예복을 입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일단 제가 먼저 마님을 뵙겠습니다.”
“라골, 너도 그 일을 알고 있었으니 믿으려 하지 않을 거다.”
“그럼 저는 왜 부르셨습니까. 그런 거금을 들여서……!”
그웬 공작에게 인상까지 쓸 수 있는 것으로 봐서는 신분이 꽤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라골?’
클라우디아가 그의 앞을 막아선 채 허리를 굽혔다.
“아침에 보고 또 뵙는군요. 어머니를 찾으시는 건가요?”
“폐하를 뵈러 가는 거요.”
“아,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
“내 오랜 지기요. 더 할 말이 있소?”
다른 때보다 더 목소리가 냉랭했다. 머쓱해진 클라우디아가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클라우디아가 비켜서자 사내들은 그녀를 잡지도 않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엘리사 공주 얘기만 나오면 그렇게 다정하게 웃으시면서…….’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제 방으로 향하려던 클라우디아가 방향을 바꿔 엘리사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따로 노크할 필요도 없이 엘리사가 방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공주!”
클라우디아의 목소리에 엘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늘 연회에 공주는 참석하나요?”
“연회?”
클라우디아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머니가 시녀, 시종들에게까지 단단히 입막음을 시켜놓았다더니 오늘 환영 연회가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유일하게 엘리사 공주를 따르는 하녀, 헬렌도 죄인이 되어 구금 중이니 모를 만도 했다.
“저는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엘리사가 클라우디아를 지나쳤다.
“그분이!”
클라우디아가 누구를 칭하는지 이름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엘리사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분이 그란디아에 계십니다.”
어쩐지 왕궁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더라니.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누군가 그를 위해 힘을 쓴 게 분명했다.
“저는 식사를 함께했어요. 오늘도, 어제도.”
자신과 그가 함께 있었다는 말을 들으면 엘리사 또한 질투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를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요?”
“그런데…… 라니요. 제가 그와 함께 있었다니까요?”
“그분과 함께 식사를 한 여성은 셀 수 없이 많아요.”
“그분이 바람을 셀 수 없이 많이 피웠다는 건가요?”
“저는 그분을 믿는다고 말한 거예요.”
클라우디아의 표정이 무너졌다. 자신은 사랑받고 있고, 사랑받는 여자는 결코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입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던 클라우디아가 이내 입을 열었다.
“공주는 비겁해요.”
“당신이 아니라요?”
엘리사는 지지 않았다. 정말 사랑받는 사람은 간사한 말로 사람을 휘두르려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공과 같은 상처가 있는 척, 아픈 척, 괴로운 척. 그렇게 그의 마음에 들었죠. 마치 공주가 공의 인생에 있어 선물이라도 된 것처럼.”
“…….”
“그런데 공주, 공의 인생에 공주 같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클라우디아가 어째서 다른 때와 달리 초조해 보이는지.
“나는 첫눈에 알았어요. 내가 그에게 완벽한 가정을 줄 수 있다는걸. 공주는 그럴 수 있나요?”
“당신에겐 내가 여전히 바보 같아 보이나 봐요.”
“뭐라고요?”
엘리사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말로 날 조롱하려 하지 말아요. 난 그분에게 충분히 사랑받았고, 그 마음이 진실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클라우디아가 다시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왜 도망쳤어요? 불안해지고, 괴로워질 때마다 도망칠 건가요? 그를 두고? 나는 알아요. 공주는 공주 자신보다 그를 아끼지 못해요. 도망친다는 건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거니까. 대답해 봐요. 정말 그를 위해 상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요?”
엘리사가 처음으로 클라우디아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 남편이 들어야 할 말이에요.”
부러 ‘남편’이란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번 승부는 클라우디아의 완벽한 패배였다. 너무나 당연한 판정이었다.
부부의 마음에 싹튼 꽃은 사람의 힘으로는 꺾을 수 없으니까.
엘리사가 등을 돌려 클라우디아에게서 떨어졌다. 도서관을 찾은 그녀는 신성력과 관련된 책을 찾다 말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곳에 있구나.’
그가 떠오른 것만으로도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갑자기 사라진 헬렌도 찾아야 하고, 신성력과 관련된 서적도 미리 읽어둬야 하는데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 차려.’
엘리사가 양손으로 뺨을 두드렸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도서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바짝 집중하여 책에서 찾은 내용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워커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병사들이 그녀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무슨 일이냐.”
“레이라 부인께서 공주님을 찾으십니다.”
시종도, 시녀도 아니고 병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 단단히 난 게 틀림없었다.
엘리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망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병사까지 왔으니 분명 부왕에게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다. 부왕조차 막지 못하는 일이라.
‘헬렌.’
오늘 내내 헬렌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엘리사는 병사들을 따라 그녀가 있다는 연회장에 들어야 했다.
엘리사가 레이라 부인의 앞에 섰다.
“부르셨다고요?”
피처럼 붉은 와인으로 입술을 축인 레이라 부인이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공주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공사가 번다해 찾지 못했습니다. 그간 잘 지냈나요?”
“생각해 주신 만큼 지냈지요.”
“그럼 잘 지냈겠군요. 나는 공주가 그란디아를 떠난 뒤에도 늘 그대 생각뿐이었답니다.”
엘리사는 잔뜩 긴장해 있었다. 오후에 클라우디아가 했던 말이 내내 그녀를 괴롭혔다.
‘공은 공주를 찾지 않던데.’
그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다. 제 아이보다 그녀의 안전을 우선할 정도로. 그건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았지만 사랑받는다는 자신만큼을 남겨두었다.
‘공주는 비겁해요.’
하지만 클라우디아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공과 같은 상처가 있는 척, 아픈 척, 괴로운 척. 그렇게 그의 마음에 들었죠. 마치 공주가 공의 인생에 선물이라도 된 것처럼.’
클라우디아의 말이 맞다. 그와 그녀는 완벽하게 맞는 짝이었다.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상처를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 또한 같았다.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슴이 뚫려도 죽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남자가 ‘안아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녀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 공의 인생에 공주 같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요?’
아니.
‘나는 첫눈에 알았어요. 내가 그에게 완벽한 가정을 줄 수 있다는걸. 공주는 그럴 수 있나요?’
아니.
‘불안해지고, 괴로워질 때마다 도망칠 건가요? 그를 두고? 나는 알아요. 공주는 공주 자신보다 그를 아끼지 못해요. 도망친다는 건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거니까. 대답해 봐요. 정말 그를 위해 상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요?’
아니.
사실은,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를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체하고 있었지만 진정 바라는 건 자신의 안정이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닫고, 괴로워지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고, 아프고 싶지 않아서 그를 버렸다.
그를 오두막에 두고 돌아오던 날 알게 되었다. 자신이 여전히 두려움이란 고치 속에 있다는 것을.
그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던 자신은 얼마나 오만했던가.
보라, 그를 두고 도망친 주제에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눈에 담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의 시선이 화살이 되어 그녀를 꿰뚫고 있었다.
“공주, 내가 그대를 부른 이유는 불미스러운 사건에 그대가 연루되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에요.”
레이라 부인이 손짓하자 기사들의 손에 의해 피투성이가 된 헬렌이 끌려 나왔다.
“여러분, 모두 보십시오. 돈으로 신관을 매수한 죄인입니다.”
헬렌이 고개를 떨군 채 가는 숨만 색색 내쉬고 있었다.
“죄인은 진실을 말하라. 신관을 매수하라 지시한 이가 누구인가.”
헬렌의 어깨가 떨렸다.
지금 헬렌이 모든 것을 말하게 되면 엘리사는 또다시 새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신관을 매수하려 한 자가 공주라도 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 뒤에 성국이 있었다. 성국에 속한 나라의 백성은 왕이라 할지라도 성국의 교리를 따랐다.
어쩌면 이대로 아이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필시 그렇게 될 터였다.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그웬가의 씨라면 자신의 딸을 그웬 공작과 결혼시키고 싶어 하는 레이라 부인이 아이를 살려둘 리 없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가.’
눈물이 차올랐다. 비참하고 비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못난 어미를 둔 아이에게 미안하고,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도 진실을 함구하길 바라는 비정한 주인을 둔 헬렌에게 죄스러웠다.
“죄인이 토설할 때까지 손톱을 하나씩 빼라.”
“하.”
엘리사가 비틀거렸다. 헬렌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내 아이와 헬렌을 구할 수 있는 거야?’
병사가 쇠 집게를 꺼내 들었다. 이 기막힌 희극의 당사자를 비롯한 모든 이가 고요에 파묻혔다.
멀리서 피투성이가 된 헬렌이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피범벅이 된 그녀는 여전히 주인을 위해 입을 다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누가 제발 도와줘…….’
쇠집게가 헬렌의 검지 손톱을 집었다.
“그만……!”
엘리사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때였다.
“납니다.”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구원자가 나타났다.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던 회장 안에 소음이 돌아왔다.
“누구지?”
“란델 억양이야.”
“적발에 적안, 설마…….”
누군가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진저 그웬!”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고 있던 그때, 마법처럼 그가 등장했다.
그가 아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