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비스트 7
17장 폭풍전야(2)
루펠라는 밤이 깊어서까지 골을 내고 있었다. 잠자리를 봐주러 들어온 마피 부인을 흘기고 홱, 고개를 돌리는 게 영락없는 일곱 살 배기였다.
“곧 있으면 스물이 되는데 이렇게 애 같아서야 원. 잘못 키웠네요.”
다른 사람 앞에선 제법 어른스러운 말도 할 줄 아는데 유모 앞에선 언제나 어린아이가 되어버린다. 루펠라가 피, 소리 내어 콧방귀를 뀌었다.
“유모 편 들어준 거야.”
“하나도 안 기뻐요.”
“애초에 유모가 새언니한테 싸움만 안 걸었어도……!”
자신도 말이 도를 넘었다는 걸 아는지 입을 다물었다.
“언제는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유모 편들어 달라더니.”
“계속 편들어 주세요. 마님은 계속 스트레스를 받아야 해요.”
“왜? 유모,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착각하지 말라니까? 오빠가 아까운 게 아니라 언니가 훨씬 아까워!”
베개의 먼지를 턴 마피 부인이 루펠라의 입에 캐러멜을 물렸다.
어렸을 때 잠이 하도 적어서 잠들기 전에 캐러멜을 먹였다. 잠자는 시간을 기대하도록.
이런 것을 보면 마피 부인이 루펠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루펠라는 여전히 마피 부인의 아기였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마피 부인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그래서 누굴 더 사랑해?”
마피 부인이 루펠라의 코를 아프지 않게 잡았다.
“이 녀석 언제 철이 들어.”
“유모라도 날 제일 사랑해 달라는 거야. 나 힘들었단 말이야.”
“그렇게 약한 척해도 그 사람은 안 돼.”
그레닉을 뜻하는 말이었다. 안 된다는 건 진작 깨달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유모에게 마음을 부정당하는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루펠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쪽 집안도 내가 싫대.”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마다할 판에……. 됐다 그래라!”
“그레닉이 날 제일 싫어해.”
“그럼 아가, 너도 그놈을 싫어하렴.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너에게 꼭 맞는 남편을 찾아줄 테니, 어서 잊어.”
“세상이 뒤집혀도 멋질 거야, 그 남자는.”
“그 남자는 진심으로 싫다. 네 짝으로 반대야.”
“가짜로 싫은 사람도 있어?”
마피 부인이 루펠라 방의 불을 껐다. 사랑하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춘 부인은 언제나 그랬듯 루펠라가 가장 좋아하는 말을 해주었다.
“오늘보다 내일 더 행복해질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루펠라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잠드는 것을 확인한 마피 부인이 물잔과 캐러멜 포장지를 올려둔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섰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었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내저를 점검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간 마피 부인은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았다.
식당 문을 열자 진저가 보였다. 그는 술병을 앞에 둔 채 물만 홀짝이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아차린 진저가 물잔을 내려놓았다.
“추측일 수도 있잖아.”
진저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예.”
“내 아내는 유모의 생각보다 강한 여자야.”
“저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님께는 말씀하셨습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술이 고픈 밤이었다. 태어난 이래 줄곧 외로운 삶을 살았다. 가족 같은 건 가지고 싶지도 않고, 가져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아내가 와주었다. 아내는 매일 웃음을 선물해 주었고,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주었고, 그리고…….
진저가 배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 진단을 받기 전엔 말하지 않을 거다.”
“닥터를 들어오라 하겠습니다.”
아내는 계속해서 도망치고 싶어 해야 했다. 마음이 안정되면 다시 몸이 되돌아올 테니.
아내는 진실을 알게 되고도 버틸 수 있을까.
“이 몸으로 그란디아에 갈 수 있나?”
마피 부인은 진저가 안쓰러웠다. 왜 하필 그웬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하필 레스칼포네 족의 후손을 아내로 들였단 말인가.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하면 희망조차 없겠지만.”
“아내가 최우선이다. 내 여자의 목숨을 좀먹고 태어나는 자식이라면 필요 없어.”
그란디아행을 하루 앞두고, 진저는 마음을 다잡았다.
진저와 대화를 마치고 나온 마피 부인의 앞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조카가 나타났다.
마피 부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나 라골이 계속해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밤이 깊었다. 숙소로 돌아가거라.”
“이모님!”
라골은 끈질겼다. 결국 걸음을 멈춘 마피 부인이 주변을 살폈다.
“소리 낮춰.”
“아이라니요? 진저가, 아니, 마님이 임신을…….”
몸이 바뀌니 임신한 이를 누구로 칭해야 할지 난감했다. 라골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마피 부인을 쳐다보았다.
“확실하지는 않아.”
이모님이 누구던가. 오랫동안 그웬저에서 일했으며 그보다 더 오랜 기간 귀족의 고용인으로 살았다.
부려지지 않은 날보다 부려진 날이 많은 그녀는 확실하지 않은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주인님께 고하셨다고요? 이모님이요?”
조카의 눈빛에 의심이 가득했다.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네가 알 일이 아니야.”
라골은 엘리사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귀족의 사생아를 고용인으로 들이는 경우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들였다고 해도 그런 자에게 중책을 맡기는 건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귀부인이면 응당 사생아를 저주할 터였다. 제 남편도 밖에서 씨를 볼 수도 있으니 경계하고 미워하는 게 옳았다.
그는 공작저의 새 안주인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자리를 옮길 준비를 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안주인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라골을 잡일꾼도 아니고 교사로 쓰더니, 마침내 번듯한 직책까지 주었다.
“마님의 비서관인 제가 마님의 일을 모르다니요.”
마피 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잡일꾼에 불과했던 조카가 어느새 내저에서 집사장 다음가는 자리에 올라 있었다.
“내저 서열로 따지면 내가 너보다 한참 낮다는 게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네 말엔 필히 답해야 한다는 투로구나.”
“적당히 하세요!”
점잖기 그지없는 조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빠져나가지 마세요!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임신인가요?”
“……주인님께 투약 중인 약이 증거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엘리사와 진저가 몸이 바뀌었다. 엘리사의 몸은 본래의 혼이 가진 마력량에 익숙했다.
그런데 본래의 혼보다 마력량이 턱없이 부족한 진저가 들어오자 그의 체력을 마력으로 알고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투약하고 있는 건 마력 증폭제일 텐데 그게 뭐가 증거라는…… 아!”
마력을 빨아들이고 있는 게 아이라면!
“어찌 아셨습니까?”
“이래서 아직 부족하다는 게야.”
선대 공작 부인이 죽고 난 후 긴 세월 동안 마피 부인이 안주인의 자리를 대신했다.
진저, 루펠라는 쉬이 저택에 사람을 들일 수 없었다.
루펠라가 문제였다. 선대 공작 부인이 죽었으니 카르트가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안주인까지 힘을 실으면 루펠라의 입지는 좁아질 테고, 그 아이 스스로 카르트가를 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루펠라는 카르트가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받았다. 그 아이가 그런 취급을 받을 것도 마음이 쓰였지만, 무엇보다 진저가 위험했다.
카르트 후작이 진저를 노리고 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저택의 일뿐만 아니라 저택에 드나드는 사람의 신상명세까지 얼추 알고 있는 루펠라를 이용한다면 진저를 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르트 후작은 루펠라의 입을 열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이 안 가는 영감탱이였다.
이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새 안주인이 누구인가가 중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안주인이 될 여자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마피 부인은 ‘미친 공작의 마지막 끈’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진저가 작위를 이은 후 수많은 귀족이 그녀를 진저에게 가는 통로로 이용하려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많은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진저와 루펠라가 준 권한은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진저 또한 새 안주인에 대한 자료를 아무런 경계 없이 건네주었다.
그렇게 마피 부인은 그웬 공작보다 더 세세히 엘리사 그란디아에 대해 조사할 수 있었다.
조사 결과 엘리사 그란디아는 성정이 모나거나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처음엔 그저 다행이라 여기고 더는 파지 않았지. 하지만 진저에게 공작 부인과 몸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생각해 보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더구나.”
조카는 귀족의 사생아였고, 가슴으로 낳은 두 아이는 앞길이 가시밭길인 사생아, 그리고 입양아였다.
귀족들로부터 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산전수전을 모두 겪었다. 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마님의 모친 말이다.”
“모친이라면 리즈 왕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임신 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출산 후엔 1년 가까이 움직이지 못했다고 들었다.”
“몸이 약하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래, 다들 그리 생각해서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은 게야.”
“달리 이상한 게 있나요?”
“병시중을 신관이 들었다더구나.”
신관이라면 마법사를 뜻했다. 왜 의사를 두고 마법사가 병수발을 든다는 것인가.
“성국에서 그 일을 허락할 리 없어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국왕이 요청했다면?”
진저였다. 마피 부인을 찾으러 왔다가 라골과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라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데울리는 레이라 부인에게 빠져 딸까지 등졌다고 하잖아. 이상해.”
라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즈 왕비의 사망 원인이 불분명한 건 나도 알아. 독살이라는 설이 있잖아. 레이라 부인이 왕비의 자리를 탐내 그녀를 독살한 거라고. 정도를 모르는 자는 그란디아의 아데울리 국왕이 레이라 부인을 궁에 들이려 독살을 도왔다고 떠들기도 해. 사망 원인이 독살이라면 전자든 후자든 왕이 개입했다는 뜻이야.”
“당시 레이라 부인은 왕에 기거할 수 없었으니 불가능. 아데울리 국왕에게도 메리트가 없는 일이지. 리즈 왕비는 그냥 두어도 죽었을 테니까.”
리즈 왕비와 아데울리 국왕이 결혼할 당시, 그란디아를 지배하고 있던 사람은 왕이 아닌 왕의 모후, 소피아 왕태후였다.
“소피아 왕태후는 왜 별게 없는 리즈 왕비를 국모로 들였을까.”
“그야 왕비의 외척이 득세하지 않도록…….”
진저가 입매를 비틀었다.
“내가 세력이 없는 왕이라면 말이야. 내 여자를 지키기 위해 눈을 가릴 사람을 앞에 두었을 거다.”
라골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게 레이라 부인이란 말인가.
“레이라 부인을 뺀다면 그간 왕이 했던 모든 일이 수상해지지.”
왕은 리즈 왕비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왕의 짝이 될 수 없었다. 명예나 재산이 특출 난 것도 아닌 데다 신관의 아이라는 결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왕은 꾀를 냈다. 세간의 평가가 차라리 리즈 왕비가 낫다 여길 정도로 하찮은 여자를 앞세우기로.
그게 레이라 부인이었다.
왕비로 들이고 나서도 레이라 부인을 멀리하지 않은 이유는, 임신한 왕비가 마력을 조절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이 그녀를 찾지 못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리즈 왕비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이를 낳고 8년 후 사망하고 말았다.
“그때 앓았다는 상사병이 레이라 부인이 아닌 리즈 왕비를 향한 것이로군.”
라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잖아. 그럼 왜 왕은 리즈 왕비가 낳은 자신의 딸을 외면한 거지?”
진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의 목숨을 앗고 태어났다면 미워할 수밖에.”
그 또한 그럴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마피 부인이 그들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요양을 중단하고 돌아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혹여 공작 부인이 아이를 낳다 명을 달리하게 될까 봐.
그럼 아이는 평생 진저의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아비와 똑같이 외로운 삶을 살 것이다.
‘그래, 너는 네 아내를 지키거라. 나는 네 아이를 지킬 테니.’
그리하여 두 목숨이 다 지켜질 수 있다면 이 노쇠한 몸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 레이라 부인이 아직도 왕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유는 뭐야?”
리즈 왕비가 죽고, 딸을 타국의 권력자에게 시집보냈다면 왕은 더 이상 지킬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딸보다 아내가 소중하긴 했지만, 그래도 딸을 버릴 순 없었던 거다.”
아내의 목숨을 앗게 될 이 아이를 없애지 못하는 자신처럼.
“설마 레이라 부인이 마님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확률이 높지.”
라골이 이마를 잡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이만한 마력량을 가지고 있는데 단 한 사람도 몰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 마님은 아플 때, 몸에 위험이 있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력을 분출하고 있었다.
“마님에게 신관의 이야기를 들었다.”
라골의 말에 진저가 미간을 좁혔다.
“신관?”
“레이라 부인이 사귀던 남자가 신관이 되어 왕궁에 나타났더라고. 그래서 왕과 신경전이 대단하다고 그러셨어.”
“그 신경전이라는 게 레이라 부인을 두고 벌인 건 아니겠군.”
“그자가 리즈 왕비님의 병수발을 들던 자일까?”
“아무래도.”
세 사람은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이 그란디아로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리한이 이동 스크롤을 보냈다. 마법사도 함께 대동할 테니 한 사람분 짐을 추가해.”
마피 부인을 찾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진저의 말에 마피 부인이 준비하겠노라 답했다.
마피 부인과 진저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있었다. 이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라골이 진저를 바라보았다.
“마님은 아시냐?”
“떠나기 전에 진단을 받을 거다. 확실해지기 전엔 알려주지 않을 거야.”
“그래도 마님께 말씀을……!”
“뭐라고?”
진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미는 당신을 위해 죽고, 아비는 당신을 위해 실정하고, 남편은 당신 위해 자식을 죽일 거고, 당신은 아이로 인해 죽을 거라고?”
“…….”
“아내의 바람에 따라 몸이 바뀐다.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큰 충격을 받겠지. 당연히 몸이 바뀔 거다. 그럼 아이도 큰 충격을 받겠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내를 위해 자식을 죽일 거라던 놈이 아이의 충격을 걱정하고 있었다.
“네 자식을 안아보고 싶긴 한가 보구나.”
진저의 목울대가 꿀렁 움직였다.
그란디아의 국왕, 아데울리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었다. 자식보다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순 없었다.
“……딸이길 소원하고 있다.”
“마님을 닮은 영애였으면 좋겠군.”
그 말을 끝으로 진저가 자리를 떠났다. 자리에 남은 이모와 조카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희망이 있는 거죠? 희망조차 없다면 저 녀석은 벌써 아이를 없앴을 거예요.”
진저 그웬은 그렇게 잔혹한 삶을 살아온 사내였다.
마력은 육체가 아닌 혼에 내재되어 있었다.
육체에 마력을 담지 않은 혼이 들어있다면 아이는 어디까지 마력을 빨아들일까?
모체를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럼 아이도 죽게 될 테니까.
진저가 엘리사의 몸으로 출산을 한다면 혹시 모른다.
“그란디아의 건국신화와 성국에서 빼 온 자료를 토대로 추측하는 거라 확실하지 않아. 그러니 그란디아에 가서 확인해야지. 리즈 왕비는 모성이 강한 여자였다고 들었어. 분명 딸을 위해 이 일을 기록해 두었을 거야.”
해가 뜨기 전에 진저는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았다.
그들의 추측이 맞았다. 아내는 진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엘리사는 아침 일찍 그란디아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그란디아와 란델은 마차로 이동했을 때, 하루를 꼬박 달려도 한 달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마탑의 도움으로 이동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이동 마차는 총 세 대였다. 한 대엔 그웬 부부가, 또 한 대에는 루펠라가 타고 있었다. 마지막 한 대는 가장 큰 마차로 짐만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엘리사의 배려로 고용인들이 순번을 정해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진저는 엘리사보다 삼십 분쯤 늦게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나왔다.
가져갈 짐을 모두 체크한 마피 부인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가씨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그란디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마피 부인은 루펠라를 데려가는 게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언제 몸이 바뀔지 몰라. 루펠라가 아내와 함께 있으면 다른 짓은 못하겠지.”
“아가씨가 위험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란디아 내에서 루펠라를 건든다면 나라 간의 문제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것까지 모르진 않겠지.”
루펠라는 그웬의 사람임과 동시에 카르트가의 핏줄이었다. 그웬은 대륙에서도 가장 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였고, 그웬가는 왕가를 지키는 4군 중에서 근 십 년간 전쟁에 가장 많이 참전한 가문이었다.
그웬뿐만 아니라 카르트 후작가 또한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몇 안 되는 가문이었다.
“카르트가는 성국에 마영석을 대고 있어. 성국에 속한 나라이니만큼 무시할 순 없을 거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아내를 지키게 될 마피 부인의 마음가짐이 달라질 터였다.
마피 부인은 자신에겐 더없이 좋은 사람일지 몰라도 아내에겐 아니었다.
여차하면 진저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아내를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펠라가 아내와 함께 있다면 목숨을 걸고 두 여자를 지킬 터였다.
마피 부인은 아내가 있는 마차로 향하는 진저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지독하긴.”
아내를 위해 제 여동생까지 동원한 격이 아닌가. 아무리 한 핏줄이 아니라지만 20년 가까이 남매로 커왔다.
진저와 루펠라를 번갈아 보는 마피 부인의 어깨 위로 라골의 손이 올라왔다.
“지독하게 키우셨으니까요.”
“그레닉을 아가씨에게 붙여라.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지만 아가씨를 위해서 목숨 정도는 내놓겠지.”
보라. 이처럼 지독한 사람이 키웠는데 지독하게 성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라골이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진저는 괜찮을까요? 임신 초에 고생을 하면…….”
진저가 임신을 했다니. 어렸을 적에도, 다 커서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어미의 혼이 몸에 돌아오기 전까지 크지 않을지도 몰라.”
“예?”
“아니라면 아직까지 임신 증상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어쨌든 아무쪼록 네 분 모두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내저를 잘 살피고 있거라.”
마피 부인까지 마차에 오르고 삼십 분이 채 지나기 전에 마부가 말을 몰기 시작했다.
란델을 벗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을 볼 때마다 엘리사의 입이 벌어졌다.
그란디아에서 란델로 올 적에는 한 달하고도 사흘이 더 걸렸다.
확실히 차기 마탑주가 만든 스크롤은 굉장했다.
진저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내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마피 부인과의 일을 괜찮다고는 했지만 역시 마음고생을 했던 것이다. 이런 것으로 기분 전환이 될 줄 알았다면 가까운 곳으로라도 나들이를 다녀올 걸 그랬다.
란델의 국경을 지나 켈로스족의 영토에 들어서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부부를 반겼다.
“여보, 창문을 열어도 되나요?”
“얼마든지.”
창문을 여니 풍경이 보다 생생해졌다. 남편의 붉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바람이 너무 상쾌해요. 란델에 올 때는 겨울이라서 죄 눈밭이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숲이 있는 곳이었군요.”
“켈로스족은 자연에 정령이 깃들었다고 믿어서 나무 한 그루도 쉬이 베지 않는다고 들었어.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기하스엘이 물을 마시러 찾아온다는 호수가 나와.”
“베너스 호수죠? 그 호수도 이 숲만큼 아름다울까요?”
“지금 이 풍경은 까맣게 잊힐 만큼.”
아이처럼 좋아하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진저는 가슴이 쓰렸다.
이 여자는 너무나 신기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십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란델 여자들은 아이를 갖게 되면 꿈을 꾼대. 그란디아에도 ‘태몽’이라는 말이 있나?”
“비슷한 게 있어요.”
“장모께선 당신을 임신했을 때 무슨 꿈을 꿨나?”
엘리사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우물거렸다.
“뭔데 그래?”
“……놀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말할게요.”
“안 놀릴게.”
“꽃…….”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꽤 평범한 태몽이었다.
“……돼지요.”
“꽃돼지?”
꽃돼지라니. 보통 여자아이의 태몽은 커다란 꽃이나 복숭아같이 고운 과일 꿈이지 않나.
“뭐, 꽃은 꽃…… 이군.”
엘리사가 남편을 밉지 않게 흘겼다.
“강아지처럼 조그만 돼지가 어머니 치마폭으로 들어왔대요. 돼지라고 하기엔 너무 예뻐서 꽃돼지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귀여워서 쓰다듬었더니 사람처럼 웃더래요.”
진저의 입꼬리가 실룩샐룩 움직였다. 무슨 태몽이 그렇게 해괴하단 말인가.
아내는 진저의 속도 모르고 계속해서 태몽과 관련된 이야기를 종알거렸다.
“낳고 보니 정말 돼지 같은 분홍빛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놀라셨다고 들었…….”
“으하하하!”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돼지라는 말은 토실토실 살이 오른 사람의 별명이 되곤 했다.
여자라면 듣기만 해도 싫어할 말을 이렇게 귀여운 얼굴로 말하니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안 놀리겠다고 하셨잖아요!”
“으하학, 안 놀렸, 하하하, 그냥 웃은 것뿐이야.”
진저는 배까지 잡고 웃었다. 엘리사의 얼굴이 꽃돼지 같은 분홍빛이 되었다.
그게 더 웃겨서 진저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엘리사는 점심을 먹기 위해 마차가 멈출 때까지 골이 나 있었다.
진저는 점심이 마련되고 나서도 마차에서 나오지 않는 아내를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엘리사.”
“…….”
“여보.”
“…….”
“꽃돼지.”
엘리사가 입술을 댓 발 내밀고 남편을 흘겼다.
“점심, 크큭, 점심 먹어야지.”
“안 먹어요!”
“베너스 호수 보고 싶어 했잖아. 호숫가에 차렸더군.”
머뭇거리던 엘리사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마차 밖으로 나오니 마차 바로 앞까지 음식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식사는 남편의 말대로 호숫가에 준비되어 있었다.
“루펠라는요?”
“남편과 단둘뿐인 식사는 싫은가 보군?”
“그렇지 않다는 걸 아시면서…….”
“사고 쳤으니 반성하는 티라도 내려는 거지. 당신, 아니, 내 얼굴 보기 민망할 거야.”
진저가 얼굴을 쓰다듬었다. 제 얼굴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게 귀엽고 우스워서 엘리사는 골을 내던 것도 잊고 배시시 미소 지었다.
진저가 메뉴를 보고 부러 과장된 투로 ‘어이쿠, 저런’ 하며 탄식했다.
그러더니 급히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하녀와 마피 부인을 향해 손짓했다.
“앞으로 ‘꽃돼지’는 식사를 내지 말라.”
마피 부인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새끼 돼지가 아니라 다 큰 멧돼지 고기입니다.”
“그럼 다행이고.”
‘저이가 정말!’
꽃돼지 이야기를 괜히 했다. 남편은 건수를 잡으면 절대 잊는 법이 없었다.
엘리사가 속으로 화를 삭이며 포크를 들었다. 하녀까지 있는 자리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진저도 아내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때, 풀숲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욱!”
“여보?”
“주인님!”
진저의 헛구역질에 놀라 기척은 금세 잊혀지고 말았다.
엘리사는 벌떡 몸을 일으켰고, 마피 부인이 다급하게 진저에게 뛰어갔다.
“우욱! 고기 냄새가 왜 이리 역하단 말이냐!”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고기 냄새가 역하시다고요?”
엘리사에겐 구수하기 그지없는 냄새였다. 식욕이 동하면 동했지 헛구역질을 할 만큼 역겨운 냄새는 아니었다.
“우우욱!”
* * *
진저는 물까지 전부 게워내고 나서야 헛구역질을 멈췄다. 그동안 주변이 어둑해져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베너스 호수 근처에 야영을 위한 간이 휴식처가 마련되었다.
엘리사는 내내 남편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게 된 게 이상했다. 혹시 몸이 바뀐 것 때문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괜찮으세요?”
엘리사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괜찮아.”
“미안해요…….”
“그 미안하다는 말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
진저가 내내 토사물을 뱉어냈던 나무통을 짚고 일어났다.
“당신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야. 아침이 얹혀서 그래.”
“그란디아로 가게 되어서 무리를 한 게 아닐까요? 제가 몸이 허약한 탓에…….”
“그런 게 아니래도.”
진저도 궁금하긴 했다. 건강하던 몸이 왜 갑자기 음식을 못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혹시 그란디아의 일을 너무 깊게 생각해서 몸이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닌가 싶었다.
“건더기 없는 수프라도 내오라 할게요. 그래야 약을 먹죠.”
“오렌지.”
“네?”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오렌지가 떠올랐다.
“오렌지가 먹고 싶군.”
“과일은 챙겨오지 않았을 텐데요.”
“난 지금 오렌지를 먹어야겠어.”
태어나 이렇게 오렌지를 간절히 원한 적이 있을까. 보급선이 끊겨 풀뿌리로 연명했을 때에도 이렇게 간절한 음식은 없었다.
엘리사가 당황하는 사이 몸을 일으킨 그가 천막을 걷었다.
“오렌지! 오렌지를 가져오라!”
주변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 병사들까지 놀라 눈을 깜빡였다.
“제가 있나 보고 올게요.”
엘리사가 음식을 실은 짐 마차에 가기 위해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는데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오렌지가 아닌 다른 과일이었다.
“과일은 없더라고요. 토마토는 어떠세요?”
“오렌지가 먹고 싶다고 했잖아…….”
남편의 어깨가 축 처지고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여보, 혹시 우는…… 거예요?”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던 진저가 난데없이 바깥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식재료를 챙긴 자를 들어오라 해라!”
당연히 주방장이 챙겼을 줄 알았는데 마피 부인이 들어왔다. 식재료를 포함한 모든 그란디아행 짐은 마피 부인의 결재를 받고 실렸으므로 책임자는 주방장이 아닌 그녀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왜 오렌지를 챙기지 않았나!”
“예?”
진저는 어렸을 적에도 생떼를 부린 적이 없었다. 다 크고 나서는 엘리사의 일이 아니라면 마피 부인에게 소리친 적도 없었다.
“과일은 금세 상하…… 주인님께선 과일을 싫어하시잖아요.”
“아내가 먹고 싶을 수도 있잖아!”
마피 부인의 신경은 온통 그웬 남매를 향해 쏠려 있었다. 엘리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한 적은 없었다. 편식을 하지 않는다기에 진저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식단을 짰다.
마피 부인은 말문이 막혀 마른침만 삼켰다. 자신을 키워준 사람이 당황하고 있었음에도 진저는 화를 참지 못했다. 오렌지의 욕구가 너무나 강렬했다. 지금 오렌지를 한 입 베어 물면 이 지겨운 구역질이 멈출 것 같았다.
지금껏 남편의 비교적 순한 모습만 봐왔던 엘리사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남편과 마피 부인의 사이를 막아섰다. 그리고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여보.”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진저는 거짓말처럼 진정됐다.
“켈로스족과 우호 관계라고 들었어요. 기하스엘이 켈로스족 민가를 습격했을 때 당신이 도와주었다면서요?”
“……응.”
“사람을 보내서 오렌지를 구해오라고 할게요.”
아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소리칠 순 없었다.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기사들을 켈로스족에 보내기 전에 마피 부인을 먼저 내보냈다.
“돌아가 있어요.”
마피 부인이 가볍게 묵례하고 루펠라의 막사로 돌아갔다.
마피 부인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제 아내의 먹을 것을 안 챙긴 게 이렇게까지 역정을 부릴 일이란 말인가.
간이침대에서 뒹굴며 육포를 씹고 있던 루펠라가 고개를 들었다.
새언니의 부름을 받고 제 막사를 나가기 전엔 이렇게 얼굴이 어둡지 않았다.
“왜 그래?”
“진저가……! 아니, 아니다.”
“오렌지?”
이미 루펠라의 막사에까지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만큼 크게 소리를 쳤으니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했다.
“언니가 서운해한다고 오빠가 유모에게 뭐라고 해?”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이유에서 화를 낸 것이었다. 마피 부인이 대답 없이 의자에 앉았다.
“언니가 뭘 찾고 그러는 사람이 아닌데…….”
하녀들에게는 마피 부인을 가벼이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고 그리 소리를 쳤으면서 제 언니가 역정을 부렸다니 옹호하고 있었다.
진저에게 한 소리 크게 듣고 왔더니 별것 아닌 것으로도 서운했다.
“그거나 이리 내. 귀족 영애가 채신머리 없이 병사들이나 씹는걸…….”
“왜 나한테 성질이람. 이번 일은 유모가 나빴잖아.”
“나쁘다고? 내가?”
모두 공작 부인과 태중에 아기씨, 그리고 진저를 위한 일이었다. 누가 악역이 되고 싶어 할까. 자신이나 되니 악역을 자처한 것이었다.
마피 부인의 표정이 굳어지자 루펠라가 피, 소리를 내며 육포 봉지를 접었다.
“아니이…….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은 하나도 빠짐없이 챙겼으면서 언니는 쏙 뺐잖아.”
“편식을 하지 않으신다고 했어.”
“편식을 하지 않는 거지 좋아하는 음식이 없는 건 아니잖아. 전에는 나한테는 사소한 것에서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다더니.”
그동안 내저에서 온종일 유모만 쫓아다녀 몰랐는데 밖에 나와 보니 듣는 게 많았다. 마크빌 경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막사 밖까지 들리게 소리를 치는데 사람들이 죄 새언니를 옹호했을까.
“내가 그렇게 한 건……!”
“알아.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서 유모 편들어달랄 때 얌전히 들어준 거고. 언니한테도 서운한 기색 내비쳤어.”
유모는 몸이 안 좋았다. 1년 내내 요양을 했는데도 낯빛은 그전보다 나빠서 되도록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지지해 줄 생각이었다.
“다 너희를 위한 일이야. 내가 언제 너희에게 해가 가는 일을 했었니?”
마피 부인이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땐 루펠라도 어쩌지 못했다. 루펠라가 어디서 이 고집을 배웠겠는가. 그웬 남매를 위해 귀족에게 맞서던 여자였다. 웬만한 고집과 오기가 아니었다.
루펠라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종알거렸다.
“유모의 ‘우리’ 사이엔 ‘우리의 의사’가 없네. 불 꺼, 잘래.”
루펠라의 이불 주름을 펴던 마피 부인의 손이 멈칫하였다.
기사들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들 손엔 오렌지 몇 개와 잼, 그리고 주스가 들려 있었다.
진저는 아내에게 그것을 전달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모두 해치웠다. 점심에 그렇게 구역질한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식욕이었다.
“그렇게 먹다간 또 체하겠어요.”
잼을 스푼째 떠먹던 진저가 머쓱한지 병을 내려놓았다.
음식이 들어가고 나니 밤에 했던 행동이 부끄러웠다. 이게 뭐라고 눈시울까지 붉힌단 말인가.
“이렇게 오렌지를 좋아했었어요?”
“내가 아니라 당신이 좋아하는 거 아니야?”
“과일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아, 그래도 잘 먹는 건 좋아요.”
엘리사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이 시간까지 함께 오렌지를 기다리고 있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환경이 바뀐 데다 며칠째 일이 바빠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피곤이 상당했다.
“졸려? 그럼 자자.”
엘리사가 눈을 둥글게 휘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먼저 자고 있어요. 경비 근무자들 일지 확인만 하고 올게요.”
“마크빌이 알아서 할 텐데.”
“며칠 만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근무자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정도는 알아두어야 했다.
진저가 마뜩잖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아내를 떼어놓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은 유독 정도가 심했다. 아내가 잠시 밖이라도 나가면 불안해졌다.
하지만 제 할 일을 대신하는 아내를 말릴 순 없었다. 이미 오렌지 건으로 체면을 다 구기지 않았는가.
일지를 확인한다고 나간 아내는 삼십 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종이 몇 장 읽는 건데 이상하게 오래 걸렸다. 불을 껐는데도 잠이 안 오고, 혹시 다른 놈팡이가 그녀에게 작업을 걸고 있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몸이 바뀌었다는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설마 단정한 아내가 자신을 두고 다른 놈과 시시덕거리진 않겠지만, 아내라면 몰라도 다른 놈들은 방심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찾아 막사를 나섰다. 부부의 막사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내였다. 기사들과 하인, 그리고 하녀 몇이 그녀를 둘러싸고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마치 ‘너 없어도 네 아내는 잘 지낸다’ 하는 조롱인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여보.”
진저, 아니, 자신의 목소리에 엘리사가 고개를 틀었다.
“왜 안 자고…….”
“여기서 뭐 해…… 요.”
“새로 들어온 기사인데 당…… 내 열렬한 추종자…… 래.”
“추종자?”
저 소년이라면 눈에 익은 자였다. 훈련을 할 때도 눈은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손목 각도까지 따라 하려 드는 놈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내를 보며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주군에게 존경을 눈빛을 보내고 있는 소년이 귀여운지 연실 껄껄댔다.
“어린 나이에 각종 대회는 물론이고, 전쟁 경험까지 있는 놈입니다. 다른 가문에서도 탐을 내는데 주군을 존경해서 그웬가를 고집했다더라고요.”
저놈이 자신을 존경하는데 뭐 어쩌라고. 그런 놈은 한둘이 아니었다. 백작가의 장남이었던 마크빌도 자신을 깊이 존경한다고 후계 자리도 차버리고 왔다.
그것보다 아내가 소년을 보며 흐뭇하게 웃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진저에게 가려는데 소년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주, 주군! 저…… 하, 한 번만 악수를…….”
떨리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소년에게 진저는 우상이었다. 처음 참가한 전쟁에서 그가 소년을 구해주었다. 배를 관통당해 걷지 못하는 자신을 등 뒤에 가리고 용맹하게 적군과 맞서 싸워주신 분이었다.
그 후로 소년은 그의 기사가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모든 다 했다.
진저에겐 몇 가지 소문이 붙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맨손으로 곰을 때려눕혔다는 것이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때려눕힌 건 곰이 아니라 마물이었고, 맨손이 아니라 검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소년은 소문을 믿고 곰을 잡으러 산에 올랐다. 역시 맨손으로는 무리였다. 그래도 팔 한 짝은 가지고 돌아왔다. 아직도 소년의 고향에선 팔 한 짝 없는 포악한 곰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엘리사는 소년이 귀여웠다. 남편을 이토록 존경한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엘리사가 손을 내밀었다. 소년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으려 하였을 때 무언가 불쑥 튀어나와 엘리사의 손을 낚아챘다.
진저였다. 그가 아내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더니 엘리사를 끌고 막사 안으로 사라졌다. 엘리사는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허둥대며 그와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자리에 남은 기사와 하인, 그리고 하녀들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마님이 왜 그러시지?”
“그러게…….”
“아!”
기사 하나가 옳거니, 하고 소리치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크, 우리 마님 속도 깊으시지.”
“무슨 소리야?”
“이 녀석이 오늘 경계 근무를 차례인데 악수에 정신 팔까 봐 걱정하신 거지!”
“아아! 그렇지!”
그들이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건가요?”
소년이 아쉬운 듯 손을 매만졌다.
“인마, 우리는 주군과 십 년째인데 악수는커녕 손가락 하나도 못 걸어봤다.”
“그거네! 다른 기사들이 보고 서운해할 거로 생각하신 거야!”
“역시 우리 마님!”
“주군이 장가는 정말 잘 가셨지.”
하녀들이 울먹거렸다.
“전 마님 밑에서 일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저도.”
“나도.”
모두 어쩔 수 없는 마님 바보였다.
엘리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씨근덕대는 남편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 엘리사가 조심스럽게 남편의 손목을 잡았다.
“여보, 불편한 일이라도 있나요?”
진저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키다가 코로 뱉었다.
“……다른 놈이랑 손잡지 마.”
“네?”
“눈도 마주치지 마.”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엘리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손이잖아요. 이 손.”
엘리사의 손가락이 남편의 손목에서 손바닥으로, 그리고 손끝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주는 감촉에 묘했다.
“당신 혼이 들어 있는 손이지.”
“내 손이라는 건가요?”
이번엔 그의 차례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서 코로, 또 입술로 내려왔다.
“내 모든 건 당신 거야.”
남편의 목소리가 야릇해 엘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두 사람 모두 숨결이 거칠어졌다.
‘안 그래도 몸이 바뀌면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많았지.’
색다른 즐거움이 있을 터였다.
남편의 입술을 쇄골로 받고 있던 엘리사가 간이침대를 쳐다보았다.
“침대가 너무 작은데…….”
“작으면 작은 대로 재미가…….”
그때 엘리사의 손이 배를 스쳤다. 그제야 진저는 이 막사 안에 있는 사람은 부부뿐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진저가 그녀에게서 떨어져 숨을 골랐다.
“여보?”
‘임신 초에 해도 되나?’
저번에 몸이 바뀌었을 때 어느 귀부인으로부터 임신 초 잠자리가 태아를 잃게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엘리사의 눈빛이 몽롱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올 리 없는데!’
뱃속에 든 녀석은 신이 보낸 사자일지도 모른다. 아비의 꿀 같은 한 때를 방해하러 온 최악의 사자.
진저가 아내 모르게 이를 갈았다.
‘이 애물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