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장 폭풍전야(1) (21/31)

    17장 폭풍전야(1)

    다음 날이 되어도 부부의 몸은 바뀌지 않았다. 라골의 말처럼 엘리사의 불안이 영향을 미친 듯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제는 몰랐는데 아침이 되니 머리가 어지럽고 아랫배에 통증이 일었다.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겠거니 했던 복통은 갈수록 심해졌다. 진저가 저도 모르게 끙, 신음을 흘리자 엘리사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응……?”

    남편이 몸을 둥글게 말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여보?”

    “윽…….”

    “여보!”

    엘리사가 남편을 얼른 살펴보았다. 낯빛이 하얗게 변했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엘리사는 호출 줄을 당기는 것도 잊은 채 고함을 내질렀다.

    “누구 없느냐! 닥터! 닥터를 불러와라!”

    주인의 다급한 목소리에 대기 중이던 고용인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다른 하인들은 닥터를 부르러 뛰어갔다가 소득 없이 되돌아왔다.

    “닥터는?!”

    “정기 학회가 있어 출타하셨다고 합니다. 오후나 되어서야 돌아오실 거라고…….”

    “대행할 자가 아무도 없단 말이냐!”

    “급히 클리프 경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만 한 시간은 걸리실 겁니다.”

    하녀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진저를 살피기 위해 이불을 들췄다. 피도 아니고, 소변도 아닌 갈색의 액체가 하의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이게 무……!”

    당황한 엘리사가 치마를 올리려 했을 때였다.

    “다들 나가 있거라.”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부인이 하인들이 볼세라 이불을 다시 덮었다.

    “뭣들 하고 있는 게야! 나가란 소리가 안 들리느냐!”

    작은 체구의 여성에게서 이렇게 날카롭고 커다란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다. 고용인들이 눈치를 보다가 서둘러 침실을 나섰다.

    엘리사가 남편의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는 그 여성에게 물었다.

    “의사이신가요?”

    여성은 엘리사를 힐끗 쳐다보다가 다시 진저에게 시선을 맞췄다.

    “언제부터 괴로워하셨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잠깐, 뭐 하시는 거예요!”

    여성은 자신이 가져온 여행용 짐 가방에서 주삿바늘을 꺼내고 있었다.

    “의사가 아니라면 이 사람 몸에 손댈 수……!”

    엘리사의 혼은 진저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다시 말해 타인의 눈에는 진저가 고함을 지르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진저 그웬이 누구던가. 나이 지긋한 노인들까지 벌벌 떨 정도로 악명이 자자한 사내였다.

    그러나 여성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외려 더 담담하게 주사 속으로 약을 넣고 있었다.

    “주인님, 정신 차려보세요.”

    엘리사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여성은 분명 엘리사의 몸을 흔들며 ‘주인님’이라 칭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설마!’

    진저가 스스로 손을 뻗어 주사를 놓으라 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이 마피 부인이구나.’

    진저가 자신과 만나기 전부터 믿어온 여성이었다.

    마피 부인은 진저에게 주사를 다 놓고 땀과 갈색의 액체에 젖은 옷을 모두 걷어내고 나서야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부인.”

    “……그대가 마피 부인인가?”

    “예. 라골로부터 그간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노고가 크셨겠습니다.”

    “아닐…… 세.”

    “짐을 풀고 정식으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마피 부인은 엘리사가 어어, 하는 사이에 남편에게 주사를 놓고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라골이 본저의 닥터를 대신해 클리프 경을 데리고 들어왔다.

    클리프 경이 진저를 살피는 사이 엘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주인님의 용태는 진료를 받아보셔야…….”

    “그게 아니라 마피 부인이요. 오늘 본저에 왔던데요.”

    “아, 며칠 일찍 도착하신 모양입니다.”

    “라골, 나는 각하와 내 몸이 바뀐 걸 어째서 마피 부인이 알고 있냐고 물은 거예요.”

    “주인님께서 이모님께 이 일과 관련된 자료를 모으게 하셨습니다. 모르셨습니까?”

    들은 바 없는 내용이었다. 엘리사가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 * *

    진저를 간호하다 내저의 일을 보기 위해 나온 엘리사는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엘리사가 만든 틀 안에서 그녀 자신보다 더 완벽하게 일이 완료되어 있었다. 사소하게는 청소부터 크게는 외부 일정들마저 손댈 틈 없이 완벽했다.

    “확인을 받아야 할 서류는 이쪽에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피 부인이었다. 그녀가 건넨 서류는 확인이 없어도 인장만 찍으면 될 것들이었다.

    얼떨떨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으며 당혹스럽기도 했다. 어떤 감정으로 마피 부인을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완벽한 일 처리보다 그녀가 부부의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게 더 신경 쓰였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독부터 푸는 게…….”

    “마님.”

    “네?”

    “주인님의 몸으로 말씀하실 때는 문장을 완벽히 맺으셔야 합니다.”

    “아…….”

    “그런 유약한 표정도 삼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마치 모국의 교사들을 대하는 것 같았다. 엘리사가 두 손을 꽉 잡자 마피 부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엘리사는 얼른 손을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 두 분 몸이 바뀔 때까지 내저의 일은 제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때 하녀가 차를 가지고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마님께서 건강을 회복하실 때까지란 말씀입니다, 주인님.”

    마피 부인이 부러 호칭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엘리사의 역할을 해야 하는 진저는 현재 몸이 좋지 못했고, 마피 부인은 엘리사 이전에 내저의 일을 보던 사람이었다. 지금으로선 마피 부인에게 내저의 일을 일임하는 게 옳았다.

    마피 부인은 차를 가지고 들어온 하녀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마피 부인이 요양을 가기 전엔 본 적 없는 하녀였다. 현 공작 부인이 내저의 열쇠를 쥐고 난 뒤로 고용인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니 아직 새로운 고용인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피 부인이 하녀를 향해 말했다.

    “누가 차를 내오라 하였느냐.”

    “예? 마님께서 항상 이 시간에 주인님께 차를 가져다 드리라고…….”

    주인이 말을 제대로 못 하니 아랫것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이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듯 고용인들에게도 자세가 중요했다.

    여기서 자세란 몸 가누는 모양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정신과 기강을 말했다.

    마피 부인이 하녀가 가져온 찻주전자의 덮개를 열어 보았다.

    “주인님은 몸이 냉하셔서 커피나 우유 등은 내지 말아야 한다.”

    “아…….”

    “그런 것도 몰랐단 말이냐.”

    차를 내오는 하녀라면 주방에 속해 있었다.

    그웬가뿐만 아니라 란델의 귀족저는 대부분 고용인을 파트 별로 나누어 버리는데 음식을 만지는 자들은 청소 용구를 만져서도 안 된다.

    또한 취직 후 가장 먼저 주인 내외의 건강 상태와 맞는 음식, 맞지 않는 음식 등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피 부인이 쟁반을 던지듯 하녀에게 안겼다.

    “고용인을 모두 소집하거라.”

    “예?”

    “앵무새도 아닌데 같은 말은 몇 번씩 반복하는 연유가 뭐야!”

    하녀가 겁에 질려 진저로 보이는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주인님까지 아무 말도 없자 하녀는 울상을 짓고 쟁반을 끌어안은 채 문을 나섰다.

    엘리사로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피 부인의 말이 모두 맞았기에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술만 꾹 깨물고 있었다.

    엘리사는 한다고 한 것이 마피 부인의 눈엔 엉성하기 그지없어 보인 것이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썼다면 마피 부인에게 혼이 나지 않았을 텐데…….’

    자신 때문에 다른 고용인들이 혼쭐이 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각하께선 타인을 안쓰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그리 가르쳤지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간 마님께서 어찌 내저를 다스리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사려 깊으시더군요.”

    “아, 칭찬…… 감사합니다.”

    “감사해하지 마십시오. 칭찬이 아니니.”

    “…….”

    “직무 유기라 보이더군요.”

    “예?”

    “아랫것들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아랫것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니요……!”

    내내 기가 죽어 있던 엘리사가 미간을 좁혔다.

    “인정, 인의, 배려. 그런 것들로 사람의 마음을 얻었을 때야 비로소 진심 어린 충정이 생긴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리석은 분. 그리 당하고도 아직도 사람을 믿으시나요?”

    주먹을 꾹 말아 쥔 엘리사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와 루펠라를 기른 만큼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이리라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그녀를 통해 남편의 어린 시절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짐승만이 약육강식의 세계에 산다 생각지 마십시오. 사람이란 짐승은 야생의 짐승보다 더 쉬이 강자를 알아봅니다. 약자를 알아보는 건 그보다 빠르지요.”

    “내가 약자로 보일 거란 말인가요?”

    “요양지에 있을 때도 마님의 소식은 여러 곳에서 접했지요. 그란디아에서, 그리고 이 저택에서.”

    엘리사가 숨을 멈춘 채 마피 부인을 응시했다.

    “파티에서 당찬 모습을 보이셨다고요? 아, 신년 봉사에서도 귀부인들을 영리하게 누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게 이런 일을 누가 알려줬을까요?”

    ‘라골? 아니면 루펠라?’

    마피 부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아, 그웬저의 새 여왕은 어찌 이리도 순수하단 말인가. 표정만으로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아닙니다. 제 조카라서가 아니라 라골은 영리한 아이입니다. 이런 분란이 생길 줄 알고 있었을 테니 제게 마님의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게지요. 루펠라 아가씨도 제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이 품 안에서 길렀으니까요.”

    “……저택의 고용인들이 전했단 말인가요?”

    마피 부인이 엘리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몇 시에 일어나 언제 단장을 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이며 진저와 언제, 또 몇 번이나 잠자리를 가졌는지. 그녀는 엘리사보다 더 자세히 엘리사의 일상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가까이 두고 부리는 하녀나 하인이 마피 부인에게 말을 전했다는 것이다.

    모두 입이 무겁고 상냥한 자들이었다. 지척에 있을 자들은 그런 자들로만 부러 골라 놓았다.

    ‘그런데 왜…….’

    웃으며 엘리사의 일상을 늘어놓던 마피 부인이 입매를 딱 굳혔다.

    “아시겠습니까, 마님? 사람은 인의 같은 것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마님이 그들에게 보여야 할 것은 배려나 친절 같은 게 아니라 위엄이에요. 가여우신 공주님, 사람에게 그처럼 상처 입으시고도 아직도 사람을 믿으려 하십니까.”

    지독한 여자였다. 이런 여자에게 키워졌기에 남편과 루펠라가 외로워하였던 걸까. 분노에 몸을 떨던 엘리사의 시선 안에 남편의 물건들이 들어왔다.

    ‘이상해.’

    이상했다. 사생아와 입양아로 세상에 태어난 이래 줄곧 날 선 시선만 받아온 이들이 이런 교육까지 받고 컸다니. 그렇다고 하기엔 둘은 너무나 따뜻했다.

    마피 부인은 분명 제게 사람이 아닌 강자로 살라 가르치고 있는데 그녀가 키운 두 아이, 아니, 그녀의 조카를 포함한 세 아이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아……!’

    엘리사가 꾹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마피 부인을 바라보았다.

    “조악하기 그지없군. 네가 가르쳐 준 대로 주인에 대한 존경이 없는 너를 벌하여야겠다.”

    마피 부인의 표정이 그제야 달라지기 시작했다.

    “각하와 아가씨를 키운 자라 하여 저택의 안주인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법. 당장 너를 징벌방에 가두고 열흘간 매질할 것이다.”

    열흘간의 매질을 버틸 몸이 아니었다. 갓 요양에서 돌아온 몸이니만큼 아직까지 관리가 필요했다.

    징벌방은 콕스에게 들은 걸까.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안다면 공작 부인의 성정에 저리 쉬이 징벌방행을 외치지 않을 터였다.

    마피 부인이 대꾸치 않고 엘리사와 시선을 맞췄다.

    “……가 정답이지요?”

    엘리사가 생긋 웃었다. 굳어 있던 마피 부인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마피 부인의 생각이 맞아요. 저는 제대로 된 공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내저를 다스려야 할지 몰라요.”

    “그래도 말귀는 트여 있는 분이시로군요.”

    루펠라와 라골의 말대로 할 말은 다하는 인사였다. 엘리사가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상냥하신 분.”

    “……한낱 고용인에게 존칭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 남편을 가르치고, 시누이를 안아 기른 분이니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하지요. 정 싫으시다면…… 명령을 할게요. 그냥 들으세요.”

    “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공작 부인에 대한 세간의 평이 어떤지 아십니까?”

    “그래서 걱정이 되셨나 보군요. 그분과 아가씨를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제 젖을 먹여 키웠으니까요.”

    “부족하면 가르쳐 주세요.”

    마피 부인이 엘리사를 마뜩잖은 듯 바라보았다.

    “나가 보겠습니다.”

    “아, 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한 사람은 많이 혼내주세요.”

    “……그럴 겁니다.”

    그러기 위해 시험한 것이니.

    마피 부인이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그녀의 표정이 방에 들어서기 전처럼 살벌하지 않았다.

    ‘현명하군.’

    화를 참지 못하거나 자신에게 진다면 진저의 아내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불과 불이 만나면 더 큰불이 될 뿐이고, 한쪽은 강한데 다른 쪽은 약하면 강한 쪽의 약점이 될 뿐이니.

    생각에 잠겨 걷고 있던 마피 부인은 자신의 팔을 잡는 손길을 느끼고 나서야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모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십니까?”

    라골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피 부인의 안색을 살폈다.

    감이 예민한 편이라 저 멀리에서 나는 작은 기척도 재빠르게 알아차리던 분이었다. 나이가 들고 병이 찾아와 감이 많이 떨어진 듯하였다.

    “정말 괜찮으세요?”

    “되었대도 그러니. 그보다 내저에선 호칭을 주의하라지 않았어!”

    “아무도 없습니다.”

    “이걸 어디에 써. 한참 어린 마님이 너보다 낫구나.”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편은…… 시험에 통과하셨나 보죠?”

    “흥, 영 글러 먹은 분은 아니시더구나.”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모두 홀딱 빠졌다고. 마님 사랑을 외치는 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마피 부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웬의 안주인은 배려 같은 것으론 안 돼.”

    라골이 픽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꽤 마음에 드셨나 본데요?”

    “피를 토하며 키운 내 아이들의 아내고 새 가족이야. 당연히 그쯤은 해야지.”

    말은 밉살맞지만 표정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모님이야말로 말조심하세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내 자식이라는 말을 쓰세요?”

    그녀는 조카의 말에 답하지 않고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내 자식이라 부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은 것 같으니 살아생전에 잔뜩 불러두려 그런다.’

    요양을 하는데도 몸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목숨을 다하기 전에 새 공작 부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려 부득불 저택을 찾았다.

    하나 남은 피붙이와 가슴으로 키운 아이들이 그녀 없이도 행복하도록.

    엘리사는 마피 부인이 집무실을 나선 후에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남편이 아픈 게 자신과 몸이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그가 알게 된다면 또 자책하냐고 나무랄 터였다.

    ‘그래도…….’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세상 어떤 것보다도 소중해서 상처 하나에 마음이 아렸다.

    마피 부인은 자신이 진저를 돌볼 테니 엘리사는 진저의 일을 대신하라 말했다. 쌀쌀맞은 투였으나 속뜻을 아니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는 제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쓸 테고, 자신은 그런 모습에 가슴 아플 터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병이 있었다면 그간 통증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어째서 그와 몸이 바뀐 후에야 병증이 나타나는 걸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엘리사가 호출 줄을 당겼다. 하녀에게 라골을 불러오라 이른 그녀는 처음 몸이 바뀌었을 적에 모아놓았던 책을 찾기 위해 집무실을 뒤졌다.

    분명 이쯤에 기하스엘과 관련된 책을 보관하는 것 같았다.

    “아!”

    책장의 가장 구석에서 기하스엘부터 시작해 몸이 바뀌는 저주와 관련된 서적을 찾아냈다.

    “기하스엘, 기하…….”

    ‘이상하게 기하스엘과는 많이 얽혀 있네.’

    갖다 붙이면 끝도 없어서 침묵하고 있었다. 엘리사의 이름은 그란디아의 건국왕 아리온이 사랑한 여자에게서 따왔다.

    그리고 자애로운 국모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신이 그녀의 주검으로 만든 신수가 기하스엘이었다.

    처음 저주가 발현되었을 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기하스엘과는 얽힌 일이 많았다.

    ‘검술 시합에서 갑자기 몸이 바뀐 것도 기하스엘 가죽을 본 후였지.’

    찜찜했다. 남편은 무언가 아는 눈치인데 그녀에게 정보를 공유해 주지 않았다.

    란델은 귀족이 마법사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근지에 있는 남편의 지기, 리한이 그것을 증명했다. 리한 또한 후작가의 혈통인 데다 가주를 지낸 리한의 조부는 현재 마탑주라는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란디아에서는 귀족이 마법사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마탑과 척을 진 성국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마력을 가진 자는 신관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법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도리에 어긋난다 하여 조심하는 형국이었다.

    엘리사는 란델에 온 후 놀라우리만큼 바뀌었다. 하지만 스무 해 넘게 지냈던 곳의 문화는 몸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마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엘리사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라골.”

    “예, 명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마피 부인이 그이에게 놓은 약 말이에요. 그게 정확히 무엇인가요?”

    라골은 불안해하는 엘리사에게 ‘마력을 증강시키는 약’이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마피 부인은 어째서 남편에게 마력을 증강시키는 약을 놓았으며 남편은 왜 아무런 의심 없이 약을 맞은 걸까.

    처음엔 마피 부인이 그를 안아 키웠기에 그녀를 굳게 믿는다고 생각했다.

    “이상해요. 마피 부인은 마치 이런 일이 날 줄 알았다는 듯이 약을 꺼냈잖아요.”

    “그건 주인님께서…… 몸이 바뀌는 연유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간 엘리사에겐 비밀에 부쳤지만 진저는 몸이 바뀌는 이유가 무엇인지 제법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라골, 말해봐요.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게 뭐죠?”

    파헤쳐 보면 별 이유는 아니었다. 하필이면 엘리사가 강한 마력의 소유자였고, 그녀는 기하스엘로 인해 마력이 증강되면 조절할 수 없게 된다. 또 하필이면 남편이 기하스엘의 피를 뒤집어쓰고 저택에 돌아왔다.

    세 가지가 맞물려 일어난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남편은 그녀만큼 강한 마력의 소유자가 아니란 것이었다.

    마력은 신체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혼에 담긴다. 마력을 담고 있던 혼이 신체에서 빠져나가니 신체는 텅 빈 마력을 새로운 혼에게서 찾았다.

    당연히 새로운 혼, 그러니까 진저는 엘리사만큼의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신체는 마력을 대신해 체력을 빼앗은 것이다.

    진저는 엘리사와 몸이 바뀔 때마다 달거리를 겪었다. 이 일을 모르기 전엔 달거리 때문에 체력이 떨어진 거로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알게 된 후에는 대비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피 부인과 라골이 남몰래 이 일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했다.

    진저가 이 일을 엘리사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금까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별일이 없었지만 언제고 몸에 이상이 생길 터였다.

    선한 아내가 이 일을 알게 되면 그녀의 탓이라고 자책할 게 분명했다. 진저는 그것이 걱정되었다.

    “그이는 왜 내게…….”

    “마님께서 그리 염려하실까 봐 숨기신 겁니다.”

    “……혹시 몸이 바뀐 게 내 탓인가요?”

    “탓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연한 사고지요.”

    “맞군요.”

    결국 라골은 엘리사에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엘리사는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라골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탈이 나신 겁니다. 주인님의 혼에는 마님만큼의 마력이 없으니까요.”

    라골이 말을 맺을 때는 눈물마저 흘리고 있었다.

    “마님…….”

    “괜찮아요. 고마워서 그래요. 당신 몸의 고통보다 내 마음의 평화를 우선해 준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자책하겠어요. 이 서류는 라골이 대신 챙겨줘요.”

    엘리사가 라골을 지나쳐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남편이 쉬고 있는 침실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깨우지 않으려 애썼지만 남편은 그녀가 곁에 오자마자 눈을 떴다.

    “괜찮아.”

    “안색이 이렇게 안 좋은데 괜찮긴요.”

    “내 얼굴로 울지 말래도.”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아내의 볼을 매만졌다.

    “말하지 그랬어요.”

    “……라골에게 들었나?”

    “제가 물었어요. 라골에겐 다른 말씀 마세요.”

    “아직 확실한 건 없어. 다 추측일 뿐이야.”

    “마피 부인이 가져온 약을 맞고 괜찮아지셨잖아요. 그게 진실인 거예요.”

    “상냥하게 대해줘.”

    그가 부러 엄살을 부리며 아내의 손에 뺨을 비볐다. 그리고 이불을 들추며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엘리사는 침대 옆에 놓인 자그마한 의자를 택했다.

    “매정하기는.”

    “그래서 몸은 언제 바뀌는 건가요? 그것도 알아내셨죠?”

    제일 쉬운 방법은 그녀가 마력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저는 그녀에게 마법을 배우란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력은 혈통이 중요했다. 리한의 경우가 그랬다. 리한의 가문 또한 대대로 마력이 강한 가문이었다.

    아내처럼 강한 마력의 소유자는 대를 잇지 않으면 불가했다. 그럼 아내는 누구로부터 이렇게 강한 마력을 물려받았는가.

    아내는 이복형제가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이 불가했다. 그란디아 왕가인가, 아니면…….

    ‘리즈 왕비가 유력하겠지.’

    일전에 아내로부터 모후가 조향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향수 말이야.”

    “네?”

    “시중에 풀린 향수처럼 꽃이나 과일 향을 내는 것 말고 귀족들만 즐겨 쓰는 특별한 향수가 있지?”

    “네. 마영석으로 만드는 향수들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죠. ‘봄의 향기’, ‘가을의 추억’ 이런 식으로요.”

    시중에 일반 향수가 풀린 지 십 년도 되지 않았다. 그전의 향수는 마탑에서 만드는 특별한 사치품이었다. 그 말은 리즈 왕비의 ‘조향’엔 분명 마영석이 쓰였단 것이다.

    ‘마영석을 정제할 수 있는 건 마법사들뿐이지.’

    성국에 속한 그란디아는 마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국은 마력을 신성력이라 부르며 신성력이 강한 자들은 신관이 되어 호의호식했다.

    그란디아 왕의 순애보는 유명했다. 왕비가 되어봐야 신관이 되는 것보다 호사를 누리지 못할 텐데 그녀는 어째서 신관이 아닌 왕비를 택했을까.

    그리고 아내는 어째서 이토록 강한 마력(신성력)을 지녔단 걸 이때까지 모른 것일까.

    이 정도로 강한 마력이라면 나라를 부흥시킬 수단으로 쓰이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왕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부친인 왕과 조모, 소피아 왕태후까지 그녀의 마력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리즈 왕비가 철저히 그녀의 마력을 숨겼다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지?”

    “어머니요? 어머니는…….”

    리즈 왕비를 떠올린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욕심이 없다고?”

    “네.”

    엘리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와 어머니, 또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조모님만 아는 비밀이 있어요.”

    “비밀?”

    “사실 어머니는 신관의 아이예요.”

    “뭐라고?”

    진저가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허리를 접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여보!”

    “으, 괜찮아. 말해도 돼.”

    “제 외조부는 신관이셨는데 외조모님과 사랑에 빠져 어머님을 낳으셨대요.”

    알 만했다. 성국에선 신성력이라 부르는 것을 보다 강력히 계승하기 위해 신관끼리의 결합만을 허락했다.

    성국에 속한 귀족이긴 해도 신관이 아니라면 결혼을 허락할 리 없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외조부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남편을 잃은 여자는 시름시름 앓다 그를 따라가고 말았다. 그래서 여자의 사촌 동생이 딸을 입양한 것이었다.

    진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결혼 전에 아내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었다. 그웬가의 안주인을 들이는 일이었다. 당연히 가문의 정보라인이 모두 동원되었다. 그런데도 이런 정보를 알지 못했다니.

    진저는 자신이 흠이 많았기에 흠 없는 아내를 원했다. 알았더라면 엘리사를 아내로 들이지 않았을 터였다.

    진저가 아내를 끌어안았다.

    “결혼 전에 알게 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군.”

    하마터면 사랑스러운 아내를 영영 안지 못할 뻔하였다.

    “그란디아는 사생아에 특히 민감하다고 들었는데 용케 왕비가 되셨군.”

    “지금 외가의 재산은 사실 어머니의 것이에요.”

    “뭐?”

    “외조모님이 혹여 딸이 버림받을까 봐 죽기 전에 재산을 모두 어머님께 상속하셨거든요.”

    “현명하시군. 지금의 외조모는 당신이 신관의 핏줄인 걸 모르는 건가?”

    “네. 하지만 좋은 분이세요.”

    “좋은 사람은 친손녀가 아니라고 해서 외롭게 두지 않겠지.”

    엘리사가 흐리게 웃었다.

    레이라 부인이 부왕을 치마폭에 넣고 있었다. 나라 제일의 권력자가 되었단 뜻이었다. 그런 사람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은 건 당연지사.

    그래도 타국에서까지 마음고생을 할까 봐 가산을 반이나 뚝 떼어주겠다고 하신 분이었다.

    “원래 장모님의 것이니까.”

    “이만큼 돈을 늘린 건 외가분들이에요. 눈치 보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매년 선물은 꼬박꼬박 챙겨주셨어요.”

    “항상 같은 선물을 말이지.”

    그런 것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엘리사가 남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좋은 기억으로 남겨둘게요.”

    “당신은 너무 착해.”

    진저가 한쪽 눈을 일그러뜨렸다.

    이로써 결심이 섰다. 그란디아로 가야겠다. 그리고 이제까지 아내를 괴롭혀 왔던 것들의 목을 부러뜨려 주리라.

    그의 머릿속에 있는 레이라 부인의 이름이 조금 더 진해졌다.

    “가자.”

    “어디를요? 몸도 안 좋으면서…….”

    “그란디아로.”

    엘리사의 눈이 커졌다.

    지금도 그때의 나날이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없도록 멍에를 메도록 만든 시간이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녀의 진심과 남편의 사랑이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하필 지금 그 산지옥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엘리사는 잡고 있던 찻잔을 놓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

    남편에게서 그란디아로 가자는 말을 들은 지 이틀.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남편은 이대로 머물러 줄 터였다. 하지만 그가 그란디아행을 택한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쉬이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력으로 인해 남편과 몸이 바뀌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알고 있는 것을 자세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엘리사는 성국에 속한 나라, 그것도 왕족이었다. 신성력, 그러니까 마력에 관한 건 이미 어릴 적부터 교육을 받아 알고 있었다.

    ‘분명 선조 대대로 마력이 강했던 거야.’

    그래서 성국에서는 신성력을 보다 강하게 계승하기 위해 누구보다 신성력이 강한 전투 신관의 정사(情事)까지도 관여한다. 소름 끼치도록 불쾌한 일이었다.

    엘리사에게 강한 마력이 있다는 게 드러난다면 성국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를 전투 신관에 봉하려 할 터였다. 그럼 성국에 속하지 않은 나라인 란델에서 살 수 없는 건 당연지사.

    남편과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어서 마력을 다스려야 해.’

    성국과 마탑 모르게 마력을 다스릴 방법은 달리 없었다. 라골은 남편의 지기인 ‘리한’의 도움을 받으면 될 일이라고 했으나 마탑주의 후계가 자주 공작가를 드나들 순 없었다.

    ‘모후께서도 이만한 마력의 소유자셨겠지…….’

    신관이었던 외조부로부터 이 마력을 물려받게 된 것이라면 어머니 또한 강력한 마력을 지니셨던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성국에서 내려온 대신관 앞에서도 마력을 들키지 않으셨다. 단련할 방법이 있을 터였다.

    “그걸 찾아야 해.”

    그때 무언가가 불현듯 떠올랐다.

    ‘어머니의 일기장!’

    리즈 왕비는 작고하기 이전에 엘리사에게 자신의 일기장을 쥐여 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일기장을 보며 모후를 떠올리라고.

    그란디아에서 힘겨웠을 적엔 그저 그림으로만 보였었다.

    ‘특별한 일기였던 거야.’

    하지만 모후의 물건은 왕가의 것이라 하여 타국에 시집온 엘리사는 가져올 수 없었다.

    결국 그란디아로 가야 했다. 제게 마력이 있음을 들켜 남편과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것보다 그란디아에 가는 쪽이 옳았다.

    그래도 두려웠다.

    레이라 부인과 그 딸들을 보고도 자신이 지금의 행복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편이 자신을 평생 사랑해 주리라 지금처럼 믿을 수 있을까.

    엘리사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였다.

    “엘리사.”

    남편이었다.

    그는 말없이 엘리사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약속해 주세요.”

    “뭐든지.”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진저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때문에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엘리사, 여보.”

    그는 아내의 뺨을 가볍게 잡고 온 얼굴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스스로를 싫어했던 것만큼 나도 내가 싫었어.”

    “…….”

    그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단 말인가. 언제나 화려하고 당당해서 스스로를 싫어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내 몸에 당신의 혼이 들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사랑스럽게 보여.”

    엘리사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속뜻은 그가 했던 어떤 말보다 진지했다.

    “당신만큼 나도 당신에게 애원하고 싶어.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제가 어떻게 당신을 버리겠어요…….”

    “나도 그래.”

    남편을 끌어안은 그녀가 작게 흐느꼈다.

    “갈게요. 당신과 함께라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부의 그림자가 틈 없이 맞물렸다. 마치 하나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처럼 너무나 아름답게.

    * * *

    그란디아 행이 결정되었다. 부부는 그란디아로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2주가량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야 했다.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 가문의 행정과 군을 대신할 자를 세웠다.

    군의 총책임을 맡게 될 자는 마크빌 경이었다.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군을 통솔할 자였다.

    행정 책임자는 진저의 먼 친척인 콜로디 경이었다. 본래 하우벡과 함께 군의 실무를 보던 청년으로 비상한 머리를 지닌 자였다.

    “콜로디를?”

    진저는 콜로디를 행정 책임자로 하였다는 아내의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콜로디는 사고로 부친을 잃고 아이로 되돌아간 모친을 모시고 살았다.

    그는 진저를 직접 찾아온 간이 배 밖에 나온 꼬마였다.

    진저가 막 작위를 계승했을 무렵 찾아온 콜로디는 말했다.

    ‘돈도 많은데 같은 성 쓰는 사람끼리 좀 나눠씁시다.’

    그렇게 소년은 말이 끝나자마자 진저에게 쥐어 터졌다. 머리에 혹이 나서 울음을 터뜨린 소년을 돌려보내려는데 손과 무릎이 달달 떨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란델의 미친개, 전장의 마귀에게 찾아오는 게 어찌 쉬웠으랴. 소년은 고작 열여섯에 불과했다.

    저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아는데도 그처럼 미친 소리를 한 까닭은 정신을 놓은 어미 때문이었다.

    ‘당신한테는 푼돈이잖아! 나는 그 돈 때문에 어머니를 팔 생각까지 했다고!’

    잠시만 눈을 떼도 벽에 똥칠을 했다. 흙을 파먹기도 하고, 건달에게 붙잡혀 소년이 돈을 꾸러 다니게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죽고 할 수 있는 건 뭐든 했다. 사기부터 강도질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사람 같지 않은 짓도 마다치 않았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거라곤 공작가와 먼 친척이라는 몸뚱이 하나였다.

    진저 그웬을 만나기 위해서 정신을 놓은 어머니는 물론이고 자신의 몸까지 저당 잡아 돈을 빌렸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어차피 죽을 목숨, 할 말은 다 하자고 생각했다.

    ‘공작가의 먼 친척이면 뭐해!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본가에선 품위, 품위 노래나 부르지! 돈 줘! 달라고!’

    말하다 보니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당신도 그렇게 고귀한 몸은 아니잖아! 당신이나 나나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 가진 사람인데 왜 당신만 떵떵거리면서 살아! 돈 줘! 안 줄 거면 죽여!’

    진저는 소년의 악을 듣고도 한참 말이 없었다. 후에 소년이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느냐고 묻자 ‘이 실성한 쥐똥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노라 말해주었다.

    소년은 한 차례 전보다 더 흠씬 두들겨 맞았다. 눈 주변에 시퍼런 멍이 들고 한동안은 운신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야무지게도 팼더랬다.

    하지만 진저는 고통 때문에 꿈틀거리는 소년을 저택에서 간호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의 군대에 넣어주었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낼 정도의 돈을 쥐여 주기도 했다.

    그렇게 소년은 진저의 사람이 되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까지도 그의 은혜를 갚겠노라 다짐 또 다짐했다.

    “콜로디 경은 당신에게 충성할 수 있다면 그…… 변…… 도 먹을 수 있다잖아요.”

    그의 말버릇이었다.

    ‘주군이 하라는 건 다합니다! 똥도 먹어치우겠습니다!’

    그만큼 충직한 수하는 없었다. 수하라기보다는 신도에 가까웠다.

    사실 그냥 죽이면 한순간만 고통스러울 테니 평생을 괴롭게 하려고 했다. 다람쥐 같은 게 앞에서 뽈뽈거리는 것도 재미있었고.

    그때 진저는 콜로디의 생각처럼 ‘너는 차가운 수도의 공작. 하지만 용기 있는 소년에겐 따뜻하겠지’ 이런 건 아니었다.

    “콜로디가 영리하긴 하지. 하지만 가문의 행정은 잘 모를 텐데.”

    “감시 격이에요. 그리고 당신만 좋다면 군이 아닌 가문의 사무관으로 들여도 좋을 것 같더라고요. 하나를 알려주면 열 가지, 스무 가지를 하는 인재예요.”

    신통했다. 진저도 콜로디의 나이가 차면 그에게 가문의 일을 가르칠 참이었다.

    “당신이 전쟁에 나갈 땐 다른 이들이 손쓰지 않아도 죽게 될지 모르니 조용했을 거예요.”

    “그렇지.”

    “무엇보다 미혼이었고요. 당신과 저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그보다 더 든든한 기둥은 없어요. 그러니 당신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란디아로 가는 틈을 노릴 거예요.”

    진저가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사내였다면 큰일을 했을 거야.”

    “그럼 당신을 못 만났을 텐데요?”

    “그러니까 내가 운이 좋은 놈이지.”

    엘리사가 부끄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 남편이 이처럼 간지러운 말을 할 때면 부끄럽기도 하고 부유하듯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콜로디로는 부족해요. 보다 강력한 감시자가 필요해요. 다른 수를 못 쓰도록.”

    “그건 걱정 마.”

    “네?”

    “적임자가 있거든.”

    진저의 한쪽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엘리사는 자신의 얼굴로도 비열하게 웃는 남편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내 얼굴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남편이 말하는 적임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 * *

    길리안은 오늘만 네 번째로 트리거저를 찾은 진저의 하인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또 무슨 말을 전하라더냐.”

    하인이 당혹스러운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게…….”

    그것도 잠시, 하인은 언제 당혹스러워했냐는 듯 진저의 표정을 연기했다.

    몹시 오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든 하인이 입을 열었다.

    “‘사내놈이 한 입으로 두말하면 쓰나. 생식기를 떼도록 하라’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까지는 참았다. 하지만 네 번이 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진저가 말하는 건 검술 시합의 일이었다.

    루펠라와 그웬 공작 부인 앞에서 당당하게 ‘진저는 내가 지키겠다’를 외쳤는데 막상 검술 시합 날 그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길리안의 탓이 아니었다. 카르트 후작이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아 나설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나가 죽으라고 전해라.”

    “경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각하의 두 번째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또 뭐라는데!”

    하인이 다시 턱을 치켜들었다.

    “‘비이겁한 놈’이라 하셨습니다.”

    ‘이 새끼를 그냥…….’

    안 그래도 요새 곤란하던 참이었다. 자꾸 싱숭생숭하고 떠올리면 안 되는 사람이 머릿속을 둥둥 헤엄쳐 다녔다.

    그웬 공작 부인. 그녀의 미소가 자꾸만 떠올라서 괴로웠다.

    “그리고 이번엔 편지를 주셨습니다.”

    길리안은 진저의 하인이 내민 편지를 잡아챘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놈이라 불안하긴 하다만 빚을 갚을 기회를 주마. 이번엔 정말 나를 지켜봐.

    p.s 남의 아내를 탐내는 놈은 생식기를 세 토막을 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귀신같은 놈.

    진저의 편지를 든 길리안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을읐드그 즌흐르”

    “예?”

    “그 가벼운 목숨 내가 지켜주겠다고 전하란 말이다!”

    어쩌겠는가. 빚진 놈이 참아야지.

    * * *

    그란디아행 명단을 확인하던 진저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유모도 가게?”

    “안 됩니까?”

    진저의 팔에 주사를 놓던 마피 부인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주사는 어떻게 놓으시게요? 그란디아 왕궁 의원들은 죄 레이라 부인의 사람일 텐데 독으로 바꿔치기 되면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죽으라는 말로 들리는데. 닥터를 데려가면 되지. 몸도 안 좋으면서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오가려고.”

    “닥터가 이 약물이 뭔지 모를까요?”

    “놓는 법을 알려주든가.”

    “마님의 몸입니다. 실수하면 그란디아행이 아니라 하늘행 마차를 타시겠지요.”

    결국 진저가 입을 다물었다.

    “라골은?”

    “저택에도 눈과 귀를 남겨두어야지 않겠습니까. 그 아이는 가지 않을 거예요.”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 지금이나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인사였다.

    루펠라는 마피 부인이 진저를 싸고돌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과 달랐다.

    진저와 루펠라의 입장은 얼핏 비슷한 것 같아도 가까이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루펠라 또한 일반적이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니 마음의 상처야 입고 자랐으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마피 부인이 진저의 일에 조금 더 관심을 두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사는 말했다. 마피 부인이 있었기에 지금의 당신이 있는 거라고. 그 또한 동의했다. 얼굴도 모르는 생모, 이름뿐인 모친과 달리 그녀는 사랑과 정성으로 그를 키웠다.

    그래서 마피 부인은 그에게 어떤 사람보다도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가 스스로 몸을 지키지 못했을 적에도 숱한 고난과 싸우며 그를 지켜온 사람이었다.

    “몸은 나아지고 있는 거지?”

    “이만큼 살았으면 됐지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동동거리겠어요. 그보다 주인님, 진정 마님의 몸으로 그란디아에 가실 생각인가요?”

    진저는 대답하지 않고 마피 부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서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저는 제 아이가 우선이에요. 잔인하다 해도 어쩌겠어요. 사람이 다 그렇지요.”

    “유모.”

    “그만큼 개고생하면서 살았잖아. 이젠 좀 평화롭게 살지 그러니.”

    라골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그에게 말을 놓을 수 있는 고용인이 그녀였다. 그녀는 저택에 돌아온 후로 진저와 단둘일 때는 언제나 우려를 표했다.

    “마님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좋은 사람이지, 네게 꼭 어울리는 아내야. 하지만 공작 부인에 걸맞은 사람은 아니란다.”

    “그만. 말이 지나치군.”

    “현명하더구나. 하찮은 자라도 깔아뭉개는 것보다 융화되고자 하고. 네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보다 좋은 아내는 없었을 거야.”

    진저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마피 부인은 이처럼 주제넘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슨 까닭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진 않았다. 타국의 천덕꾸러기 공주라는 타이틀 하나뿐이라면 몰라도 이제 성국과 마탑, 란델과 그란디아에서도 탐을 내는 마력의 소유자였다.

    아내를 지키기 위해 진저는 과거보다 더한 가시밭길을 걷게 될 터였다.

    “내가 무력하게 아내를 빼앗길 사람인가.”

    그는 엘리사의 몸으로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위압감을 뽐냈다.

    “너를 내 새끼라 생각하고 길렀다. 젖 한 번 못 물리고 떠나보낸 아이가 다시 내게 온 것이라 믿고 너와 루펠라를 온 정성 다해 키웠어.”

    마피 부인의 말에 그는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마피 부인이 쉬라는 말을 건네고 방을 나섰다.

    문 앞에는 그녀가 온 정성을 다해 키운 아이의 육체가 서 있었다.

    공작 부인은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인지 이전처럼 웃는 낯이 아니었다.

    그래,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웃는 낯이 아닌 건 이해가 가지만 화를 내지 않는 건 예상 밖이었다.

    엘리사가 눈짓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문을 닫으라는 뜻이었다.

    ‘오늘이야말로 매질을 하려는 건가?’

    자신과 공작 부인 사이에 싸움이 나면 당사자보다 진저와 루펠라, 그리고 라골이 괴로울 것이다. 더욱이 진저는 몸까지 좋지 않았다.

    마피 부인이 방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엘리사는 가타부타 말없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마피 부인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엘리사와 마피 부인이 도착한 곳은 손님방으로 쓰는 방이었는데 후미진 곳에 있어 누구도 출입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뗀 건 마피 부인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인을 통해 전달…….”

    “나는 익숙해요.”

    “예?”

    “미움받는 게 익숙해서 부인의 탐탁지 않은 시선이 아프지 않다는 뜻이에요.”

    “그러셔야지요. 한낱…….”

    “그리 자신을 깎아내리니 저도 부인의 말처럼 행동할게요.”

    “말씀을 정확히 하셔야지요. 그래야 아둔한 제가 알아듣지 않겠습니까.”

    엘리사가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왜 내게 전하지 않았나요?”

    “곧 그란디아로 향하시잖습니까. 어차피 가실 수 없으니 전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미간을 좁혔다. 화를 참고 있음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혼을 내겠다던 하인들은 모두 내보내셨더군요.”

    “부부 간의 일을 누설하였으니 당연히…….”

    “그 일도 제게 전하지 않았고요.”

    마피 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엘리사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지 말라는 게로군.’

    “송구합니다, 마님. 늙은 게 사리 판단을 못 해 마님의 심기를…….”

    “귀족이 아니라도 내 남편을 키워준 분이니까 어른으로 여기자고 생각했어요.”

    마피 부인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결국 이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년시절이 외로웠으므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거다.

    이런 사람을 상냥하며 영리하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현명하다 우러렀던 행동이 모두 마음의 병에서 비롯된 거라니. 다시 생각해도 공작저의 안주인에 걸맞은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범한 무례는 내 남편, 내 시누이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라 생각했고요.”

    “본론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부인의 무례를 방관하지 않겠단 뜻이에요.”

    그때, 문밖에서 마피 부인을 찾는 루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너, 유모 못 봤어?”

    엘리사가 방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피 부인이 그웬 남매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지 않았다.

    마피 부인이 돌아온 후로 루펠라는 엘리사를 찾지 않았다. 아직 미안한 게 남아 있어 어색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마피 부인에 대한 반가움이 더 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껜 이 일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왜요?”

    “겁을 내실까 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 일이 루펠라에게 드러날까 두려워해야 한다는 거죠?”

    “말장난은 그만하십시오, 마님.”

    엘리사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나는 이 저택에 안주인이고 란델에 단 네 명뿐인 4공의 부인이에요. 내가 왜 부인을 두려워해야 하나요?”

    “……그리 말씀하시면 저는 드릴 말이 없습니다.”

    “앞으로 부인만 아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내 허가를 받으세요.”

    가만히 엘리사를 쳐다보던 마피 부인이 허리를 굽혔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그란디아로 향할 준비는 차질이 없었으나 저택엔 때아닌 폭풍이 치고 있었다.

    공작가의 안주인인 엘리사와 그웬 남매를 키운 마피 부인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피 부인이 하는 모든 일에 엘리사의 인장이 찍혀 있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각 파트의 장(長)이 했던 모든 일을 세세히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인 건 아직까지 엘리사와 진저의 몸이 바뀐 상태라 사람 눈 많은 곳에선 언쟁을 벌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복도를 청소하던 하녀들까지 엘리사와 마피 부인의 관계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었다.

    “너는 마피 부인이야, 마님이야?”

    “당연히 마님이지! 원래 공주님이셨던 데다가 힘도 마님이 훨씬 세고, 고용인들에게도 상냥하시잖아.”

    “그래도 세월의 힘은 못 당하는 거라고. 주인님이 선대 공작 부인에게 그렇게 핍박받을 때 대신 매질당하면서 지켜준 사람이 마피 부인인걸.”

    복도를 지나가던 콕스가 헛기침을 했다.

    “너희들 입을 함부로 놀리다간 혀가 잘릴 거다.”

    그제야 참새처럼 쉴 새 없이 짹짹거리던 하녀들이 입을 다물었다.

    걱정이 되는 건 콕스도 마찬가지였다. 마님이 평소와 달리 뭔가 거칠어진 것도 같고, 얼굴에서 웃음도 사라졌다.

    이것도 마피 부인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마님만 생각할 수 없는 게 마피 부인은 말은 쌀쌀맞아도 속정이 깊어서 콕스나 다른 성실한 고용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이었다.

    ‘두 분 사이가 좋아져야 할 텐데…….’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두 분 사이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와의 사이가 틀어져서인지 주인님까지 마피 부인을 전처럼 편하게 대하지 않았다.

    아랫것들 간의 싸움이라면 몰라도 힘 있는 자들이 싸우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주변인들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과자와 차를 준비한 콕스가 엘리사의 방을 찾았다.

    엘리사와 영혼이 바뀐 진저는 쟁반을 든 채 어색하게 웃고 있는 콕스를 보고 눈을 부라렸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콕스가 쟁반을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혹시 요새 힘든 일이 있진 않으신지요……?”

    진저가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있으면?”

    “저라도 괜찮으시면 함께 고민을……!”

    낮에만 해도 루펠라가 찾아와 저 비슷한 말을 했다.

    마피 부인과 엘리사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건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내의 부탁으로 각 파트의 장에게 모든 일을 세세히 전하라 말한 이가 그였다.

    사실 가장 곤란한 건 그였다. 아내가 그의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피 부인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마피 부인과 잘 지내보려 했던 아내는 무슨 일인지 잔뜩 화가 났다.

    아내는 그에게 마피 부인과 관계가 나쁘다거나 마피 부인이 싫다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진저는 아내가 언짢은 기색을 숨긴다고 해서 속내를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됐으니 나가 봐라.”

    “마님…….”

    “나가 보래도.”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가!”

    결국 호통을 치게 만든 콕스는 기가 푹 죽어 침실을 나섰다.

    침실에 홀로 남은 진저가 냉수를 들이켰다.

    “곤란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이게 그 무시무시하다는 고부 갈등인 것인가.

    진저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두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알다 보니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낮에 한차례 속을 뒤집고 간 루펠라는 말했다.

    ‘유모가 심했을 거예요. 유모가 말도 성격도 괄괄하다는 건 나도 알아요. 객관적으로 봐도 지나쳤죠. 유모는 신분도 그렇고, 우리를 낳은 사람도 아닌데. 하지만 감정적으론 언니에게 서운해요.’

    루펠라에게 마피 부인은 생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엘리사와 보낸 시간은 평생 자신을 키워준 마피 부인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를 너무 아껴서 그래요. 언니가 그 마음을 조금만 헤아려 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루펠라의 말을 공감해서가 아니라 지금은 어떤 말을 꺼내더라도 아내가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 번 마피 부인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여긴 유모의 홈그라운드잖아. 유모가 그 사람을 이해해야지. 내 여자 상처 입히면 나도…….’

    ‘이래서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지.’

    그러더니 ‘아, 각하께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주사를 놓을 때 외엔 그를 찾지 않았다.

    “제기랄.”

    이 고부 갈등이라는 게 그 어떤 전쟁보다 어려웠다.

    그란디아에 가져갈 짐을 챙기던 엘리사가 손을 멈추었다. 진저는 며칠째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는 건 라골도 마찬가지였다.

    “하세요.”

    결국 참다못한 엘리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하실 말씀이 있는 거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

    진저는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였다. 자신의 처지가 그러함을 모르지 않았다.

    란델은 그란디아보다 여성에 관대한 대신 구조는 훨씬 수직적이었다.

    귀족이 아닌 자가 다른 귀족도 아니고 공작가의 안주인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법으로 다스려야 할 일이었다.

    마피 부인은 지금보다 젊었을 적에 성격이 더 괄괄한 편이었다. 그래도 선대 공작 부인과 이러한 갈등은 없었다.

    마피 부인이 누구보다 자신의 입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오직 진저와 루펠라를 지키기 위해서만 가시를 곤두세웠다.

    변명을 하려던 진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네?”

    “다른 남자였더라면 이런 일은 겪게 하지 않았겠지.”

    손만 멈춘 채 시선은 짐에 고정했던 엘리사가 남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내가 약한 소리를 할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겠군요.”

    “엘리사…….”

    “저녁은요? 오늘부터 기름진 음식도 가능하다고 했던가요?”

    아내가 말을 돌렸다. 그는 아내가 누군가를 꺼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내의 부정적인 감정을 처음 일으킨 사람이 어머니 같은 유모라 생각하면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식당에서 드시겠어요?”

    “방에서 먹지. 당신은 일이 남았나?”

    “아니요. 저도 얼추 마무리되었어요.”

    엘리사가 식사를 올리라 명하고 한 시간쯤 흘러서 부부는 테라스에 나갔다.

    “란델은 우리가 떠나면 곧 더워지겠어요.”

    “그렇겠지. 그란디아는 어때?”

    “그란디아는 대륙 최북단에 있어서 크게 계절 구분을 하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추위에 강했어.”

    부부가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 저녁 식사를 담은 트레이가 도착했다. 트레이를 가져온 건 젊은 하녀 둘과 마피 부인이었다.

    젊은 하녀는 음식을 탁자에 올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을 나섰다. 오늘 식사 시중을 들 사람은 마피 부인인 모양이었다.

    진저가 마피 부인을 향해 눈짓했다. 다른 사람을 보내라는 뜻이었다. 아내는 유모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식사 때 싫은 사람을 보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진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피 부인은 아무리 눈짓을 보내도 고기를 썰고, 샐러드를 접시에 옮겨주는 둥 제 할 일만 했다.

    참다못한 진저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보다 이성 간의 사랑이 더 뜨거워서가 아니라, 유모의 행동은 도를 넘고 있었다.

    “유…….”

    “불편하십니까, 마님.”

    고개를 숙인 채 식사에 집중하던 엘리사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불편하시면 내려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불편하다고 하면 한낱 고용인일 뿐인 마피 부인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마피 부인의 눈을 들여다본 엘리사가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남편 앞에서 부러 그녀와 자신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드러내는 건 시험과도 같았다.

    네 어미와 같은 나는 저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다. 그런 뜻으로밖에 안 보이는 행동이었다.

    엘리사는 마피 부인이 저택으로 돌아온 뒤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진저가 몸이 좋지 않은 바람에 그란디아행 준비도 그녀가 거진 다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마피 부인과 기 싸움까지 있었다.

    엘리사는 본래 기 싸움에 익숙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남도 아니고 남편과 루펠라를 키워준 사람과 싸워야 했다. 스트레스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타인이 보기에 이 싸움에서 엘리사는 얻을 게 없었다. 이기면 공작 부인이나 되는 여자가 고용인 기 하나 못 꺾어서 안달이라는 소리를 들을 테고, 지면 지는 대로 망신이었다.

    그러나 위의 이유들은 그녀에게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엘리사 자신이 보기에도 이런 싸움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 싸움에서 엘리사는 철저한 약자였다.

    남편이 스스로 몸을 지키지 못했을 적엔 마피 부인이 그를 대신해 온몸에 상처를 입어가며 지켜주었을 터였다.

    그녀가 언제나 ‘한낱’이라는 말을 고용인 앞에 붙이는 이유는 그 한낱 고용인이 대단한 귀족들에 맞서 진저는 지켜왔노라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려갈까요, 마님?”

    서럽기까지 한 건 상담할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껏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담해 온 사람은 루펠라, 라골, 남편뿐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만큼은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녀는 라골에겐 유일한 피붙이고 루펠라에겐 피만 나누지 않은 어머니이며 진저에겐 지금껏 그를 지켜온 사람이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건가?”

    엘리사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스트레스에 피곤함까지 쌓이니 반응이 예민해진 것이다.

    이젠 마피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처음엔 남편과 루펠라를 위해 자신에게 엄하게 구는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엘리사가 아무리 답을 맞혀도 나아지기는커녕 행동이 점점 더 심해졌다.

    “말 그대로 의사를 여쭙는 겁니다. 불편하시면 내려가지요.”

    마피 부인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면 그란디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레이라 부인과 그 딸들이 꼭 이렇게 괴롭혔었다. 레이라 부인은 부왕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그 앞에서 자신을 은근히 핍박했다.

    일전에 있던 일들도 그러했다. 레이라 부인의 장녀인 클라우디아는 제 어미와 함께 왕궁에 살긴 하지만 신분은 백작 영애였다.

    그란디아는 사생아에 대한 차별이 란델보다 심해서 레이라 부인이 백작의 첩이었을 시절 낳은 딸들은 그녀가 백작 부인이 되고도 첩의 딸로 불리었다.

    그런 클라우디아가 엘리사를 대신해 왕궁의 일을 보았다. 그래서 엘리사는 왕궁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사신 접대 등 공주의 일을 할 때 사신이나 성국 신관이 묻는 말에 열에 아홉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나날이었다.

    “마님, 대답을 해주…….”

    “부인은 어째서 나를 그리 칭하지?”

    “그럼 공작가의 안주인을 어찌 칭해야 할는지요.”

    “마피 부인!”

    노성이 터져 나왔다.

    진저였다.

    놀란 엘리사가 눈을 크게 뜬 채 남편과 마피 부인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만 내려가 있으라.”

    “주인…….”

    무언가 말을 하려던 마피 부인이 진저의 눈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더했다간 사달이 일어날 터였다.

    마피 부인이 트레이를 끌고 방을 나섰다. 엘리사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남편의 소매를 잡았다.

    “당신 속만 아플 텐데 소리치지 마세요.”

    “그냥 두고 보라는 소리야?”

    “그런 게 아니라…….”

    짜증이 솟구치니 속이 아렸다. 진저가 인상을 찌푸리며 배를 매만졌다.

    “여보, 괜찮아요?”

    “오늘 식사는 이만하지.”

    “아, 네…….”

    진저까지 테라스를 나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엘리사가 포크 끝을 매만지다 고개를 돌렸다.

    꽃이 다 폈는데 그녀의 봄은 아직 오지 않으려나 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 * *

    진저, 루펠라와 마찬가지로 라골 또한 엘리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명한 서류를 작성해 온 라골이 여느 때와 달리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서류를 확인한 엘리사가 남편의 인장을 찍어주었다.

    “이건 이대로 처리하세요. 출발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빠뜨린 것은 없나 점검하고…….”

    라골에게 지시 사항을 말하던 엘리사가 말을 맺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마피 부인은 어떤가요?”

    “예?”

    현재 가장 피하고 싶은 이름이 나왔다. 라골이 토끼 눈이 되어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어제…… 그러니까 속상한…… 아니에요.”

    조카에게 제 이모가 고함을 들었다고 하는 게 어떤 의미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결코 좋지는 않을 터. 엘리사는 입을 다물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많이 속이 상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진저가 어찌나 소리를 크게 질렀는지 방 밖에 있던 고용인들까지 들을 정도였다.

    몸이 바뀌어 있기 때문에 고용인들을 참다못한 엘리사가 마피 부인에게 크게 퍼부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평소에 엘리사가 워낙 상냥하고 다정한 성정을 가지고 있어 다들 ‘오죽했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줄 서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을 열심히 나르는 중인 것 같았다.

    루펠라가 펑펑 울며 라골을 찾았다. 이 나이 먹어 유모를 지켜주지 못하는 자신이 밉고, 언니 마음을 이해하는 게 유모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완전한 공작 부인의 편은 없군.’

    모두 진저로 인해 만든 관계였다. 그 이전에 만들고 유지한 관계가 공작 부인과의 관계보다 우선되는 게 당연했다.

    특히 루펠라는 제 인생에서 그레닉과 마피 부인을 뺀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는 아이였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저…… 마님, 많이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엘리사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제 고모의 편을 들려 한다고 생각했다. 진저는 그녀에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사실 루펠라가 그녀에게 서운해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게 못내 서운했다. 자신에게 루펠라는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자 여동생이었다. 라골도 마찬가지로 친구이며 스승이었고, 가장 믿음직한 수하였다.

    마피 부인과 자신을 비교해선 안 되는 걸 알고 있었다. 루펠라에게 그녀는 어머니 그 이상의 의미였다.

    이해는 했다. 마음 맞고 상냥한 새언니가 들어왔다고 해서 어머니를 미뤄두게 되는 건 아닐 테니까.

    “너무 눈치를 보진 마세요.”

    “네?”

    라골은 전혀 예상외의 말을 꺼냈다.

    “모든 사람 입맛을 다 맞추며 사는 건 불가능하죠. 마님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펜 끝을 매만지던 엘리사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고마워요. 나는 라골이 마피 부인의 편을 들 거로 생각했어요.”

    라골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모의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번엔 정말 심했다. 얼마나 몰아붙였으면 마님께서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신단 말인가.

    “내 편 네 편 갈라야 하는 상황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나는 내가 왜 마피 부인에게 미움을 샀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라골은 마피 부인의 유일한 피붙이였다. 진저도, 루펠라도 모르는 속내를 그만은 조금 눈치채고 있었다.

    마피 부인이 이처럼 지나치게 날을 세우는 까닭은 두 가지였다.

    두 가지 다라면 몰라도 한 가지 정도는 조금 힌트를 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란델에 오신 후로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요?”

    “네.”

    “그때 마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또 그런 사건을 벌인 이후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인지…….”

    “그 전에 마님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엘리사가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피 부인이었다. 문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은 건지 눈이 세모꼴이 되어 있었다.

    “마크빌 경이 호위할 병사들의 명단을 보내왔습니다.”

    “아, 그래요?”

    엘리사에게 서류를 건넨 마피 부인이 허리를 굽혔다.

    “이 아이는 더 쓰실 일이 있으십니까?”

    사람이 물건도 아닌데 부러 ‘쓴다’고 표현한 건 그만큼 화가 났기 때문이리라. 엘리사가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가져가겠습니다.”

    라골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마피 부인을 따라나섰다.

    “무섭습니다, 이모님.”

    라골이 엄살을 부렸다. 제 이모 앞에서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힌트 정도인걸요. 화 푸세요.”

    라골을 노려보던 마피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 좋아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저택의 모두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간 공작 부인이 주변인들에게 얼마나 큰 신뢰를 쌓았는지를 알려주었다.

    “스스로 깨달아야 얻는 것도 있다.”

    “이모님은 가끔 논점이 어긋날 때가 있어요.”

    “논점?”

    “평민에 불과한 자가 귀족, 그것도 공작가의 안주인과 기 싸움을 하는 게 문제란 말입니다.”

    입 가벼운 하인을 내보낸 데다 마피 부인과 라골이 철저히 관리하고 있기에 아직까지 소문이 새어 나가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알음알음 이 이야기가 퍼졌을지도 모른다.

    공작 부인으로서의 위엄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피 부인이 그녀의 위엄을 가장 많이 상하게 하는 장본인이란 게 걱정스러울 따름이었다.

    “내 논점은 항상 내 아이들의 안전이었어.”

    라골은 더 이상 그녀와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이 현명하던 이를 아집에 사로잡힌 노인으로 만들었는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일단 좀 쉬세요. 안색이 너무 나빠요.”

    마피 부인은 저택에 돌아온 이래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그만큼 많은 일이 마피 부인의 손을 거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만큼 많은 것이 그녀로 인해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의 조카는 그게 가장 크게 걱정되었다. 마님은 그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모님이 그녀의 콤플렉스를 살살, 아니, 대놓고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님이 싫다. 진저의 발목만 잡을 테지.”

    “그럼 선대 공작 부인과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까?”

    선대 공작 부인이라는 말은 진저가 작위를 이은 후 금기어가 되었다.

    “라골!”

    “분란은 이모님께서 만들고…… 대충하세요.”

    제 이모에게 화를 내던 라골이 멀리서 걸어오는 루펠라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

    루펠라가 마피 부인을 향해 달려왔다.

    “아가씨, 품위요.”

    마피 부인이 루펠라를 나무라기도 전에 그녀는 마피 부인의 손을 끌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다던데.”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다들 그 얘기 중이던걸.”

    루펠라는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주변을 살핀 그녀가 마피 부인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돈주머니었다. 제법 큰 금액이 들어 있는지 묵직했다.

    “이게 뭐예요?”

    “언니한테 줘.”

    “아가씨가 직접 주세요.”

    “아니! 아, 유모는 말이 안 통해! 유모가 주는 거라고 하란 말이야.”

    마피 부인과 라골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루펠라는 진저와 나란히 미친개 소리를 들을 만큼 성격이 드센데 가끔 이렇게 깜찍한 짓을 했다.

    마피 부인이 픽 웃으며 돈주머니를 다시 루펠라에게 되돌려 주었다.

    “뇌물을 주라고요? 잘못되면 전 쫓겨날 거예요.”

    “뭐라도 좀 해보자는 거지.”

    “마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신가 보네요.”

    “믿음이야 있지. 우리 새언니처럼 좋은 사람이 어딨어? 착하지, 상냥하지, 저 무서운 걸 남편이라고 옆에 붙여놓지.”

    “아가씨!”

    “언니는 오빠와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돈주머니는 왜 주었단 말인가. 라골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언니 물욕 없는 걸 내가 모르나? 줘도 싫다 할 거야. 유모가 먼저 숙이라고.”

    “제가 귀족이 아니니까요? 왕가의 금지옥엽, 공작가의 안주인에게 대적할 만한 신분이 아니라서?”

    “유모!”

    결국 루펠라가 소리를 질렀다. 두 여자는 어처구니가 없으면 소리를 치는 것도 똑같았다. 그녀가 마피 부인을 밉지 않게 흘겼다.

    “신분에 콤플렉스라도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다음 생을 노려봐. 이번 생은 틀렸어.”

    마피 부인은 그런 루펠라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번도 자신의 신분이 하찮은 게 부끄럽지 않았다. 제 배로 낳은 아이는 비명에 갔으나 가슴으로 기른 세 아이가 있었다.

    그래, 어쩌면 루펠라의 말처럼 신분에 콤플렉스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을 때, 세상에 상처받아 분노하고 있을 때, 우는 법보다 공격하는 법을 먼저 배웠을 때. 그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왜 너희를 내 배로 낳지 못했을까…….’

    사랑하고 사랑해서 병마에도 좀처럼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마피 부인의 희미한 미소를 본 루펠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신분이 높다고 다 좋은 건 아닌데…… 화나는 일도 많고……. 그래도 유모 맘 아픈 소리를 했다면 미안해…….”

    마피 부인은 루펠라의 사랑스러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되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처럼 착하고 여린 아이였다. 그녀는 루펠라를 끌어안았다.

    “아가, 행복해라.”

    “응…….”

    “다시는 울 일이 없도록 너를 지켜주고, 보듬어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유모도 참.”

    “그레닉은 안 된단 소리야.”

    루펠라가 쿵, 발을 굴렀다. 이래서 유모가 없을 때 그레닉을 많이 봐두려 한 거다. 그녀가 돌아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반대를 받아야 할 테니까.

    루펠라는 마피 부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마피 부인의 맞은편에 있던 라골은 제 이모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라골이 루펠라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는 태어난 이래 가장 싫은 추측을 하게 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무서운 추측 말이다.

    * * *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엘리사는 줄곧 라골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말을 생각하면서 걷던 엘리사는 남편을 부르는 목소리를 놓쳤다.

    “……군, 주군!”

    “아!”

    마크빌이었다. 진저로 보이는 엘리사를 살폈다. 주군은 평소 같으면 괴물 같은 감각을 자랑했다. 저 멀리서 들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았고, 아무리 노련한 암살자가 와도 기척을 눈치챘다.

    ‘마님과 결혼하시고 많이 부드러워지셨어.’

    매일같이 바짝 털을 곤두세운 채 주변을 경계하던 그가 지금은 많이 사람다워졌다.

    마크빌은 그게 기꺼워 엘리사를 앞에 둔 채 실실거렸다.

    “무슨 일이에…… 냐.”

    “저…… 여기서 드릴 말씀은 아니고…….”

    자신을 보며 웃음 짓던 마크빌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마크빌을 따랐다.

    “이 문제를 마님께 상담할까 했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군에 소속된 자는 완전한 진저의 사람이었다. 병사 및 기사는 어떤 문제에도 그들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 말인즉 진저군의 부대장인 마크빌은 엘리사에게 상담할 일이 없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레닉이 퇴직을 종용당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마피 부인에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간 루펠라 아가씨와 있었던 일을 모두 들은 모양인데…… 그레닉이 아주 수척해졌습니다.”

    ‘나뿐만이 아니었어?’

    그레닉의 퇴직까지 종용하는 것으로 보아 그웬 남매의 문제를 모두 정리할 생각인 듯했다.

    “그…… 주군도 아시다시피 그레닉은 훌륭한 놈입니다. 기술, 힘, 체력은 말할 것도 없는 데다 충성도도 여타 병사들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혹여 주군이 마피 부인을 내버려 두라 말할까 봐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전방에서 꾸준히 경험을 늘린다면 란델에서 손에 꼽히는 무인이 될 터였다.

    “루펠라 아가씨와 관계없는 일에선 그만큼 쓸모 있는 놈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시켜도 실수 한 번이 없는 녀석입니다.”

    마피 부인이 퇴직을 하라 회유만 했더라면 마크빌이 남편을 찾았을 리 없다. 협박을 동반한 게 분명했다.

    “무어라 협박했는지 아는 게 있나?”

    “입에 올리기 민망합니다.”

    “마크빌 경.”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아가씨의 불행을 대신해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그레닉과 맺어진다면 스스로 죽겠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사가 이마를 짚었다. 도저히 마피 부인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 일을 남편에게 알려야 하는지, 제 선에서 처리해야 하는지 쉬이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엘리사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병영으로 돌아가게.”

    “주제넘은 건 알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마피 부인이 돌아온 후 저택이 어수선합니다. 고용인들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그란디아로 떠나는 진저와 엘리사를 호위하기 위해 많은 이가 수도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려 영지에 주둔하는 기사와 병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들에게도 마님과 마피 부인의 기 싸움이 화두에 올랐다.

    그웬 수도군의 마님 사랑은 영지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유별났다. 특히 꽃 탈취전을 함께 치른 자들은 공작 부인의 신도와 같았다.

    그웬 수도군은 마님을 두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육탄전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영지에서 온 자들이,

    ‘마피 부인의 명이 우선이지. 주군의 유모잖아. 키운 정을 어떻게 당해.’

    ‘그렇지. 마피 부인은 생긴 것도 독하게 생겨먹어서 마님처럼 야리야리한 분은 한입에 삼켜 버릴 거야.’

    라고 떠들면, 마님 신도들은,

    ‘너 이 새끼 말을 함부로 하네?’

    ‘주둥이가 찢어져도 그따위 말이 나오나 보자!’

    하고 달려들었다.

    “주제넘은 말임을 안다면 언사를 삼가야겠지.”

    엘리사의 말에 마크빌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사를 받은 엘리사가 걸음을 옮겼다.

    엘리사는 이 일을 진저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병영에 있는 자들까지 어수선하다면 남편은 이 일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몸이 안 좋은 사람을 이런 일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진저는 엘리사보다 먼저 마피 부인이 이곳저곳을 뒤집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엘리사가 마크빌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시각, 진저는 마피 부인을 불렀다.

    마피 부인이 공작 부인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하녀들이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오늘이야말로 한판 제대로 붙으시려나?”

    “아무렴, 마님이 할 때는 하는 분이시잖아.”

    “주인님이나 아가씨가 아시면 큰일 나지 않을까?”

    “그래도 마피 부인 기는 죽지 않겠어? 나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 지독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고.”

    하녀 하나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다른 하녀들이 동의했다.

    마피 부인이 요양을 떠난 후에 저택에 들어온 하녀들은 모두 그녀에게 학을 떼고 있었다.

    마님이 내저를 관리하던 시기는 태평성대고, 마피 부인이 돌아오자 난세가 되었다 비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마님이 밀리지 않을까? 마피 부인 성격이 어디 보통이야? 우리 마님, 마음고생하시면 안 되는데.”

    “주인님께서 가만있으시겠어?”

    젊은 하녀들의 수다를 듣고 있던 나이 지긋한 하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아가씨가 가만 계시겠니? 너희들 생각해 봐라. 네 오빠가 처를 데려왔는데 처만 물고 빠는 거야. 너와 네 오빠 키워준 어머니는 무시하고. 이건 전쟁이지.”

    “그래도 마피 부인이 주인님과 아가씨의 친어머니는 아니잖아요.”

    “맞아요. 우리끼리니 하는 말인데 마피 부인은 본인이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때였다.

    “뭐야?!”

    노성이 튀어나왔다. 루펠라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하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택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엘리사의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마피 부인과 진저가 뛰어 내려올 만큼 큰 소란이었다.

    무릎을 꿇은 하녀들이 뚝뚝 눈물을 흘렸다. 루펠라는 먼저 내려온 마피 부인을 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루펠라 인생에 가장 첫 기억은 손바닥이 피범벅이 된 유모였다. 그녀는 선대 공작 부인이 부리는 하녀에게 모질게 매를 맞아 피범벅이 된 손으로 남매를 끌어안았다.

    다른 하녀에게 얻어맞을 때마다 ‘내가 너를 지켜줄 거다, 너희는 내 자식과 진배없다, 걱정 마라, 너희를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테니, 내 아이들아 너희는 그저 건강하게 자라려무나’ 물기 배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녀는 루펠라와 진저가 사고를 칠 때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볐다. 세상에 그처럼 하찮은 사람이 없다는 듯 손을 비볐었다.

    ‘용서해 주세요, 우리 아기씨들을 용서해 주세요.’

    어른이 되면 유모를 절대 무릎 꿇게 하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그런데 왜 유모는 아직까지 ‘하찮은 사람’일까.

    자신은 다 자랐고, 자신만큼 유모를 사랑하던 제 오빠는 그웬 공작이라 불리고 있는데 어째서…….

    루펠라는 분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마피 부인을 따라 내려온 진저가 하녀들과 루펠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루펠라는 차마 엘리사를 볼 수 없는지 고집스레 고개를 돌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가씨.”

    “못해도 번듯한 성(姓)은 가지고 있지. 유모는 왜…….”

    루펠라가 제 유모의 신분을 원망하고 있을 때 진저와 혼이 바뀐 엘리사가 그들이 있는 1층에 내려왔다.

    진저의 얼굴을 본 루펠라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갈래! 유모를 데리고 제2저로 갈 거야!”

    엘리사와 진저는 아직 카르트 후작의 의중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검술 시합에서 일을 벌이지 않아 물러났구나 생각할 뿐, 아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리사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아내를 보다 못한 진저가 입을 열었다.

    “루펠라.”

    “언니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알아요, 잘못은 내가 하고 있다는 거.”

    “…….”

    “약속했는데, 내가 크면 다시는 누구도 유모를 아프게 하지 못할 거라고, 나느은…… 앗!”

    마피 부인이 루펠라의 손목을 매섭게 끌었다.

    “부리는 자들 앞에서 이 무슨 추태입니까!”

    “유모…….”

    “주인님 앞에서 소리치지 말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루펠라는 진저의 모습을 한 엘리사를 노려보다가 쿵쿵, 발을 구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러면서 공평하게 사랑했다고?’

    유모가 타인의 입에 함부로 오르내리는 것도 싫었지만, 진저와 자신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아는 것도 속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마피 부인은 루펠라가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받은 사랑이 제 것뿐이니 제 사랑에 집착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두 아이를 차별한 적은 없었다.

    ‘저 철부지를 어쩔꼬.’

    소외만 받고 자란 루펠라가 가여워 혼내기는커녕 진저에게보다 더 다정하게 굴었다. 그런데도 사랑이 부족하다고 늘 떼를 썼다.

    자신이 먼저 떠나게 된다면 저 철부지가 홀로 세상을 견뎌내야 했다.

    1층에 적막이 감돌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엘리사였다. 그녀는 하녀에게 루펠라가 흥분한 까닭을 캐물었다.

    하녀들은 엘리사 뒤에 서 있는 마피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하녀들의 시선만으로도 루펠라가 소리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모두 마피 부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일을 지켜보던 하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엘리사는 마피 부인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는 진저를 만류했다.

    몸이 바뀐 상태에서 엘리사의 몸으로 하는 말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듣는 이들이 해석을 달리할 여지가 있었다.

    엘리사가 먼저 몸을 피했다. 진저의 몸을 한 자신은 그 자리에 있어 봤자 말만 늘릴 뿐이었다.

    엘리사가 먼저 올라가자 진저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님, 제 이야기를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뒤에서 마피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마님’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마님의 ‘몸’과 ‘마음’ 모두에게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남편의 방에 들어간 엘리사는 식사를 내온다는 하녀에게 고개를 저었다. 건강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남편이라도 혼이 스트레스를 받으니 식욕이 떨어졌다.

    엘리사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온 진저가 그녀를 살폈다.

    “몸이 안 좋나?”

    “아니요. 식욕이 없을 뿐이에요. 마피 부인과 얘기를 나누신 건가요?”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내는 결혼 초에도 지금도 뭐든 혼자서 하는 것을 좋아했다.

    홀로 처리한 일이 완벽하면 완벽할수록 자신이 있을 자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면에선 마피 부인과 나눈 이야기가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내의 등 뒤에 있는 거울을 흘깃 쳐다보았다. 확실히 자신의 영혼이 아내의 몸으로 들어오고 나서 혈색이 좋아졌다.

    일을 한다고 수면 시간을 줄인 것도 아니고,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도 않았다.

    출혈을 본 날을 제외하면 마피 부인이 구해온 약 덕분에 고통 없이 지내고 있었다.

    ‘유모의 말이 타당할지도 모르겠군.’

    진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당신에게 잘하라고 했지.”

    “그러지 마세요.”

    “왜? 지금이 좋나?”

    “그건 아니지만, 저도 마피 부인도 서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완전히 방향을 잡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엘리사가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마피 부인과의 관계는 정의하기 어려웠다. 일반적인 시모-며느리 관계였더라면 한쪽이 굽히거나 타협하는 게 가능하겠지만, 엘리사와 마피 부인은 고용주-고용인의 관계였다.

    엘리사가 숙이게 되면 귀족들에게 비난을 살 뿐만 아니라, 엘리사의 위치가 완전히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종내엔 사교활동에 큰 차질이 생길 터였다.

    그렇다고 마피 부인과 싸우는 게 옳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엔 그녀를 몹시 사랑하는 루펠라가 있었다. 무엇보다 남편을 키워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남편이 지금까지 믿어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전자보다는 후자가 나았다. 루펠라에게 미움을 사면 엘리사 홀로 마음고생을 할 뿐이지만, 사교 활동에 차질이 생기면 가문에 피해를 주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부딪치는 게 나아.’

    서로 완전히 싫어하게 되는 게 노선을 정하기 편할 테니.

    “일국의 공주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배려심 깊은 사람이…….”

    “네?”

    “이럴 때 보면 왕가의 교육을 받은 공주답다는 거야.”

    아랫사람에게마저 상냥한 아내는 생각 외로 버려야 할 것과 안아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알았다.

    “당신이 곤란해할 줄 알았어요.”

    “날 키워준 사람과 싸우려 한다고?”

    “네…….”

    “나에게 좋은 사람이 남에게도 좋으란 법은 없다는 걸 아주 어렸을 적에 배웠어. 나한테 좋은 사람이라고 당신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거로 생각하진 않아.”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이유 없이 공격받는다면 물어뜯으라고 말해주려 했다. 등 뒤에 내가 있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칼이 향한 방향이 왕좌라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자신을 사랑으로 키운 여자인 건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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