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평화
샤워를 마치고 온 엘리사는 하녀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친구를 만난다던 남편이 한 시간이 조금 넘어 도착했다.
“벌써?”
“예. 씻고 바로 마님과 차를 마시겠다 하셨습니다.”
‘오늘 너무 화를 냈나…….’
화가 나는 일임은 분명하지만 또 그렇게 화를 낼 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들이 사회생활 운운하며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미안한 건 냉큼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았는가.
‘친구분들과 있었다면 술을 마셨을 텐데…….’
언젠가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중간에 술이 끊기면 기분이 나빠.’
조금 고민하던 엘리사가 하녀에게 차가 아닌 술을 준비하라 일렀다.
먼저 속 좁게 군 건 자신이니 풀어주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녀는 술상을 테라스에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아니, 내게 알려다오. 내가 직접 들고 그분의 방을 찾을 테니.”
엘리사의 침실을 준비하던 하녀와 다과상을 준비하고 있노라 알리러 들어온 하녀가 모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어머 어머!’ 소리를 내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마님!”
“저희는 초야 이후 소식이 너무 없어서 걱정을…….”
하녀들에 반응에 놀란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러나 하녀들은 이미 저희끼리 수다에 빠져 그녀의 말을 흘려들었다.
“슬립을 준비할까요? 아! 일전에 루펠라 아가씨로부터 슬립 선물을 받으셨잖아요.”
“속옷도 잊지 마.”
“그래그래. 졸리를 깨워야겠다. 단장하면 졸리지!”
“그래. 아, 가는 길에 주방에 술상을 준비하라고 전해 줘. 나는 여기서 마님 머리를 손질하고 있을게.”
저희끼리 하하 호호 떠들던 하녀들은 엘리사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거울 앞에 앉혔다.
“사실 지금이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수도는 소문이 빠르잖아요. 또 마르코스 유 업자들도 말이 많고, 고용인 중에서도 입을 잘못 놀리는 애들이 많고요. 무엇보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저택에 관한 소문은 제법 빨리 도는 편이에요.”
엘리사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 하녀는 손이 야무진 데다 눈치가 빠르고 영리해서 그녀가 신뢰하는 아이였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거의 다 엘리사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더 하녀에게서 나올 말이 궁금했다.
“별 해괴한 소문이 많아요.”
“소문?”
“그렇게 금실이 좋은데 왜 아이가 안 생기는 거냐, 주인님과 마님이 사실은 계약 부부다, 두 분 중 한 분의 몸에 문제가 있는 거다, 이런 말들이요.”
놀란 엘리사가 고개를 돌려 하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하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엘리사가 특히 신뢰하는 하녀였고, 이 아이 또한 엘리사에게 늘 신뢰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러니까 엘리사를 망신 주기 위해 그러한 말을 꺼낸 것은 아닐 터였다.
정말 자신 부부와 관련된 이야기가 수도에 나도는 모양이었다.
후계 생산만이 아내의 역할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후계 생산이 아내의 역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한 시대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시대와 맞붙어 산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 또한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여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몹시 외로운 삶을 살았고 하나라도 더 진심을 공유할 상대가 생기길 바랐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만큼 두려웠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상대에게 거절당할 때 오는 아픔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으므로.
남편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까 봐, 또 아이가 부모를 원망하게 될까 봐. 그녀는 그러한 것들이 겁이 났다.
하녀는 자신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는 마님을 보고 입술을 콱 깨물었다. 기쁜 마음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엘리사의 머리를 빗던 하녀의 손이 멈추었다.
“저…… 마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문이야 어디서나 도는 거고, 소문 좋아하는 사람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요.”
어떻게서든 엘리사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하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엘리사는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소문을 좋아하잖니.”
“그러니까 말이에요……. 죄송해요…….”
하녀는 시무룩해져서 손만 배배 꼬았다.
“걱정 마. 소문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게 아니니까.”
“그럼요?”
“……내가 아직 부모가 되기에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서.”
하녀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마님보다 생각이 더 어리고, 나이가 어린 사람들도 아이만 잘 낳았다.
란델의 여성들은 보통 이십 대 초반에 결혼해 일 년도 안 되어 애를 배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마님은 스물둘, 봄이 되었으니 스물셋이 되었으나 외양을 보지 않는다면 그 나이 대라 믿기 어려울 만큼 생각이 깊었다.
너무 생각이 깊다 보니 조심하지 않아도 될 문제까지 신경 쓰시는 것 같아 안쓰러울 때가 있었다.
“마님, 저희 어머니가 그러셨는데요.”
“응?”
“저를 낳기 전까진 아이였대요. 저를 키우면서 아픔과 공포를 알았고 그러면서 어른이 되셨다고. 일흔, 여든이 되어도 아이인 사람이 있잖아요. 내가 어른인지 의심하는 시점부터 어른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요?”
엘리사는 거울 속에서 보이는 하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의심하지 마세요. 저희 눈엔 누구보다 존경스러운 주인이시니까.”
“……고마워.”
엘리사는 해사하게 웃는 하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저보다 어린 하녀가 이렇게나 사려 깊고 지혜로웠다.
“이건 저희 할머니 말씀인데요. 걱정이 불행을 몰고 온대요.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너희 집안 여성들은 모두 현명하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엘리사와 하녀가 마주 보며 함께 웃었다. 하녀의 말처럼 평생 너무 걱정만 하고 살았다. 엘리사에겐 이제 든든한 남편이 있었다. 그는 어떤 풍랑 속에서도 자신을 든든히 지켜줄 터였다.
* * *
목욕을 끝내고 나온 진저는 침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수건을 내려놓았다.
진저가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이는 엘리사였다.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는 얇은 슬립 차림의 아내.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크게 떴다.
얇은 슬립이 그녀의 가녀린 실루엣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진저가 헛기침을 하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목욕을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등 뒤로 땀이 스미는 것 같았다.
“아…… 차를 준비하라고 하셨다고…….”
아내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진저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사가 술잔을 들어 보였다.
“술이 부족하실 것 같아서요. 오늘 일찍 들어오셨잖아요.”
술은 마시지 않았다. 아내에게 허튼소리를 지껄인 카발디를 두들기느라 술 마실 틈이 없었다. 그래도 진저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여자의 야릇한 차림은 어떤 안주보다 달콤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
진저가 소파에 자리하자 엘리사가 술을 따랐다.
그녀가 가져온 술은 와인이었다. 술을 따르는 그녀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아내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대담한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순진해서 부부의 술자리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걸까.
생각해 보면 아내는 맹했다. 또 냉수나 마시고 속을 삭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당신이 와인을 좋아했나.”
달달한 샴페인이나 마찬가지로 단 스파클링 와인 같은 것만 즐기는 줄 알았다.
“그란디아에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무슨 얘기?”
“붉은 와인이 남성의 정력에 좋다고.”
“켁!”
술을 마시던 진저가 사래에 들려 콜록거렸다. 아내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단어였다.
마르코스 유 얘기만 나와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여자였다. 그런데 얇은 슬립에 술까지 가져와 정력을 운운하다니.
진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무슨, 무슨, 아…….”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드러난 손목이며 손까지 새빨갰다.
“그…… 여자 이야기 때문에 그래? 정말로 자지 않았다니까.”
“생각나게 하지 마세요!”
엘리사가 그를 흘겼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러는데!’
기쁘긴 했다. 정말 기쁘고, 흥분되는데 그만큼 무서웠다.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놓고 홀랑 내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것도 있어요……. 제가 외롭게 해서 당신이 그런 곳에…… 갔을지도…….”
“아니야!”
“그래도 그것보다는…….”
엘리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제 당신 전부를 가지고 싶어요.”
진저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엘리사의 맑고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반응에 엘리사가 더 민망해하였다.
“여…… 앗!”
엘리사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쏜살같이 다가온 그가 엘리사를 소파에 눕힌 채 올라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남편을 바라보았다. 너무 무서운데 제 위에 있는 사람이 남편이라고 생각하면 공포보다 설렘이 더 강렬히 느껴졌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
“……알아요.”
“이제 도망치지 못해.”
“그것도 알아요.”
“네 속에 들어가서 전부 헤집을 거야. 내 생각밖에 못 하도록.”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닿더니 곧 턱으로, 목으로 내려왔다. 목에 닿는 그의 입술이 너무나 야릇하게 느껴져 오싹해졌다.
“아!”
입술은 곧이어 쇄골에 닿았다.
“…….”
“저기 여…… 앗!”
엘리사가 그를 밀어내려 손을 뻗자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무서워!’
그의 눈이 붉게 빛나는 것 같았다. 엘리사가 울상이 되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숨을 거칠게 뱉었다.
“이제 안 참아.”
“그게 아니라…….”
“…….”
“침대로 가요. 여긴 너무 부끄러워.”
그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그녀의 허벅지가 잡혔다. 맨살에 손이 닿자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녀를 안아 올린 그는 빠르게 걸어 그녀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침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엘리사가 다시 ‘아!’ 하고 소리치더니 문을 가리켰다.
긴 시간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자 앞에 오아시스가 있었다. 앞에 오아시스를 둔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덤벼들까. 진저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훅, 한숨을 내쉬고 침실 문을 닫았다.
쿵.
문이 닫혔다.
짐승이 아내의 위로 다시 올라탔다.
그와 닿는 부분이 모두 뜨거웠다. 요동치는 심장까지도 음욕을 자극한다.
입술이 뭉개질 정도로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 타액이 턱 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혀를 옭아매던 그의 혀가 천천히 멀어졌다. 잠시 떨어진 것조차 아쉬워 견딜 수 없었다.
“씹어 먹고 싶어. 온몸을 잘근잘근 씹어서 삼켜버리면 떨어지지 않아도 될 텐데.”
위험한 목소리에 배 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다.
엘리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수그렸다. 이글거리는 눈빛이며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 가슴을 매만지고 있는 손. 모든 것에서 자신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거대하게 부푼 성기가 허벅지에 닿았다. 그녀가 다리를 얽어 피하려 들었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순식간에 잡아 벌렸다.
엘리사는 배 끝까지 밀려온 치마를 내리기 위해 낑낑거렸다. 그와 한 몸이 되는 건 그녀 또한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혀가 달콤하게 얽힐 때, 유두를 핥으며 뜨거운 눈길로 자신을 볼 때마다 머리가 하얘지도록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끄러워!’
지금이야 속옷을 입고 있지만, 곧 그에 의해 벗겨지리란 걸 알고 있었다. 자신조차 제 성기를 그리 낱낱이 본 적은 없었다. 보기만 하진 않겠지. 입술에 했듯이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일전에 그러했듯 혀를, 또 손가락을 집어넣어 꿀이 펑펑 흐르도록 만들 거다. 기묘한 기대감에 허리가 들썩였다.
그가 낮게 웃으며 붉게 달아오른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감추지 마. 당신, 예뻐.”
“다, 다리는 놔주세요. 부끄러워요.”
그러자 정말 다리를 놔주었다. 놀란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제 몸을 탐할 때면 언제나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울먹임도, 애원도 통하지 않았다.
엘리사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픽 웃으며 ‘왜?’ 하고 물었다.
“오늘은…… 점잖으셔서…….”
그가 귓불을 깨물었다.
“오늘 밤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
“네?”
“당신이 원하는 것만.”
다시 말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해주지 않겠다는 것.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엘리사는 입만 뻐끔거렸다.
진저는 픽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도자기처럼 매끈하고 흰 피부는 자신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붉게 꽃을 피운다.
“자, 이제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지?”
엘리사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원하는 건 뭐든 해줄게.”
아주 야릇한 목소리였다.
“손가락을 넣고 돌려줄까?”
“흣.”
그가 귓바퀴를 따라 혀를 움직였다. 질척거리는 소리에 소름이 끼친다.
“아니면 봉오리를 혀로 문질러줄까.”
봉오리가 지칭하는 게 클리토리스라는 듯 그는 직접 가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음핵을 건드렸다.
“조금씩 천천히 넣어줄 수도 있어.”
그의 무릎이 성기를 대신해 음부를 문질렀다.
“흐윽, 여보 제발…….”
진저는 혀를 길게 늘려 그녀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정말 그녀가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엘리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만, 만져 주세요.”
“어디를?”
허벅지 안 여린 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도저히 어딘지 까지는 말할 수 없었다. 진저가 소음순을 지분거렸다.
“어디? 응?”
엘리사가 그를 새초롬히 노려보았다. 분명 소설에선 첫 관계를 녹아내릴 듯 달콤하며 로맨틱하다고 서술했는데, 왜 자신은 남편이 얄밉기만 할까. 울상을 지으며 그의 가슴을 툭 치자 남편은 픽 실소를 흘렸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오금을 문질렀다. 예민해진 육체는 손가락 끝이 피부를 비비는 것만으로도 해면체를 잔뜩 적신다.
그는 음순을 적시며 떨어지는 꿀을 후룩, 소리가 나도록 핥아먹었다.
엄지와 중지로 음순을 벌리고, 검지로는 클리토리스를 사정없이 문지른다.
“아흐흑!”
그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성기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어서 들어가고 싶다고,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고, 저 안에 비집고 들어가 길을 내고 싶다고 주장하는 듯.
엘리사의 우물로 들어간 손가락은 이리저리 내부를 탐색했다. 그러다 한곳에 정착해 뱀이 몸을 비틀 듯 빙빙 돌기도 하고, 여린 살을 쿡쿡 찌르며 농탕질을 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엘리사는 허리를 비틀었다.
찔꺽찔꺽.
애액과 남편의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사실은 더 큰 것으로 안을 헤집어주길 바랐다.
남편은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고 음순이 벌어질 때마다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여보…….”
진저는 멍하니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알았던가. 마냥 순진해 보이던 아내가 농염한 표정과 야릇한 목소리로 자신을 원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가 아내를 끌어안아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제 바지의 단추를 잡게 했는데, 의도가 빤했다.
이걸 푸르면 시작이다. 살 몽둥이는 제 안에 들어올 테고, 젤리같이 부드러운 혀가 음핵을 핥는 것보다 더 짜릿한 무언가를 보여줄 터였다.
무서우면서도 기대가 되는 묘한 감정. 엘리사가 꼴딱 침을 삼켰다.
“어서.”
그는 귓불을 살살 핥으면서 아내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린다. 엘리사는 결국 바지 단추를 풀었다. 그런 김에 슬슬 바지까지 내려주었다.
진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툭.
바지가 땅으로 떨어지자 다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린다. 진저는 아내를 답싹 들어 제 위에 앉혔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허벅지에 앉게 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비벼봐.”
흥분으로 목소리가 잔뜩 쉬었다.
“어, 어떻게…….”
그는 제 허벅지와 아내의 허벅지가 맞닿은 부분을 비집고 들어가 음핵과 음순을 지분거렸다. 시선은 제 성기로 향했다.
엘리사가 무릎으로 걸어 제 음부를 그의 성기가 있는 곳에 붙였다.
“후우.”
남편의 입에서 뜨거운 한숨이 흐르자 긴장감과 더불어 기이한 흥분이 느껴진다.
그녀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래에서 그의 성기가 움찔움찔 요동치는 게 느껴진다.
점막이 성기에 닿을 때면 허리에 바짝 힘을 주기도 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제멋대로인 남자를 주무르는 느낌. 실로 즐거운 감각이다.
그녀는 더욱 자극적으로 허리를 돌렸다. 위아래, 양옆으로 허리가 돌아가자 진저가 이를 악물었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감각뿐만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잔뜩 흥분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순진한 아내가 제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하체는 엘리사의 애액과 진저의 쿠퍼액으로 엉망이 되었다. 애액이 섞여 질척이는 야릇한 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졌다.
엘리사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흥분으로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성기를 문대는 것만으로도 절정에 이를 것만 같았다.
“흐응, 흑!”
절정에 이르기 직전, 그가 그녀를 잡아 침대에 눕혔다.
“벌써 가버리면 안 되지.”
마주 보며 누운 자세가 되었다.
“으응! 싫어어…….”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도리질 쳤다. 곧이었는데. 조금만 더 하면 배 속에 쌓인 불덩이가 터질 것 같았는데!
진저는 또다시 가랑이에 성기를 끼우고 문지르려는 그녀를 저지했다. 그리고 달래듯 엉덩이를 주무른다.
“쉬이.”
그녀가 할딱이며 남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고작 맛만 보았을 뿐인데 안절부절못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진저가 젖꼭지를 튕기듯 문질렀다. 흐응, 응, 응! 잇새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해줄까? 응? 말해봐.”
“어서, 어서어…….”
진저가 우물 속에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 문질러줘, 찔러줘, 엉망으로 만들어줘. 그녀는 보채는 대신 허리를 조금 흔들었다. 하지만 진저는 그녀의 바람대로 움찔거리는 주름을 달래주기는커녕 쑥 손가락을 빼버렸다.
“우으…….”
진저는 협탁을 더듬어 향유병을 꺼냈다.
그것이었다. 마르코스 유. 그는 능숙하게 병마개를 따서 손가락을 적셨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녀의 음순과 음핵을 마사지했다.
“아앙!”
절정 직전에 멈췄기 때문에 몸은 여전히 뜨거운 상태였다. 특히 남편의 성기과 맞닿았던 음부는 조금만 스쳐도 애액을 줄줄 흘릴 판이다. 그런데 점막을 민감하게 하는 마르코스 유까지 들어오니 미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되었다. 그가 붉어진 눈가에 키스를 하며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뭉툭한 귀두가 음부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흐흑!”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 그녀가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격통이었다.
그는 괴로워하는 그녀의 눈에, 뺨에, 그리고 입술에 입 맞췄다. 그리고 다리를 번쩍 들어 제 목에 걸쳤다.
“내가 다 들어가도록 벌려야 해.”
조금씩 들어가던 성기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내 쪽에서 허리를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혹여 이대로 끝낼까 싶어 애를 쓰는 것이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진저가 단숨에 허리를 쳐올렸다.
퍽.
“아흣!”
도끼가 우물 끝에 닿았다.
엘리사가 호옵호옵 숨을 들이쉬고 뱉길 반복했다. 비좁은 틈을 단숨에 벌려버리니 허리가 저릿거렸다.
“아아, 여보…….”
익숙해질 시간을 주기를. 그녀가 젖은 눈으로 애원했다.
그러나 진저는 자비 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멈춰달라고 애원하는 주인과 달리 몸은 요망하다. 축축하게 젖은 질벽이 와락 달려들어 성기를 감싸 안았다. 흉흉하게 발기한 그것을 그녀의 질이 조물조물 씹어댄다.
퍽.
퍽.
뜨거운 방망이가 절구 찧듯 음부를 헤집는다. 처음엔 아프기만 했는데 갈수록 몸이 뜨거워졌다.
“아흐흑! 흐응!”
땀 때문에 그를 안은 손이 자꾸만 미끌어진다. 손톱을 세워가며 등을 끌어안았다.
“큿.”
“흐아앙!”
자신이 드나들고 있는 곳이 정말 아내의 몸이 맞단 말인가. 순진한 몸에 이토록 뜨거운 구멍을 숨기고 있었다니. 그는 허리를 거세게 흔드는 와중에도 아내의 온 얼굴에 키스했다.
찔꺽찔꺽, 음란한 소리가 계속될수록 엘리사는 미칠 것 같았다. 그동안의 패팅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져서 생각 따윈 할 수 없었다. 배곯은 종달새처럼 삑삑 교성만 흘리게 된다.
“아으으응!”
“큽!”
남편이 주는 감각에 취해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흐으윽! 아흑!”
그녀는 남편이 들어올 때 맞춰서 우물을 벌름거렸다. 더 강하게 쳐올리기 위해 잠시 빠져나가는 것도 아쉬웠다.
“큽!”
진저가 그녀의 목을 깨무는 것과 동시에 내부가 뜨거운 무언가가 펑 터졌다. 그가 부르르 허리를 떨었다.
* * *
엘리사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일어나지 않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를 보는 진저의 눈빛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어제는 최고의 밤이었다.
체위는 한 가지뿐이었으나 어제의 그녀를 보면 이후엔 몇 가지의 체위를 가르쳐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저가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자 엘리사가 ‘으응’ 하고 잠투정을 했다.
그녀의 눈이 조금 열리더니 한 차례 깜빡였다. 그리고,
“꺅-!”
벌떡 몸을 일으킨 엘리사가 이불을 끌어안았다.
어제 너무나 강렬한 경험을 하였더니 저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울상을 지었다.
“또?”
남편은 그녀의 속도 모르고 이상한 말만 하고 있었다.
“뭐가 또예요?”
“어제 그 표정을 시작으로 우리가…….”
“조용히 해요!”
저 입을 막고 싶은데 맨살이 너무 부끄러워 그러지도 못했다.
“영재라고 해야 하나?”
“네?”
“처음인데도 너무 잘하니까.”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엘리사가 그를 매섭게 흘겼다.
“초심자에게 너무하셨다는 생각은 없으시고요?”
“힘들었나?”
“당신이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허리가…… 우으.”
엘리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편에게 말려들었다. 그는 아내의 말에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제는 어둡기라도 했지 해가 뜬 지금은 그의 몸이 훤히 보였다.
엘리사가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런 아내가 재밌어서 더 야릇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어땠는데? 얼마나 빨랐지? 그래서 허리가 어떻게…….”
“여보!”
정말 눈물이라도 터뜨릴 것 같아서 더는 놀리지도 못하겠다. 진저가 픽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귀여워서 그렇지.”
“…….”
“괜찮아?”
“……네.”
“어제 당신 정말 예뻤어.”
“…….”
놀릴 때만 해도 코를 꽉 꼬집어주고 싶은데 이렇게 다정하게 자신을 얼러주면 기분이 삽시간에 녹아버린다.
진저에게 안긴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처럼 심하게 아프진 않았다. 두 몸이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기이하도록 충만한 기분도 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흥분된 얼굴이 좋았다. 그의 흥분된 얼굴이 좋아서 제가 먼저 허리를 움직일 정도로.
“고생했어요.”
“내가?”
진저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되물었다.
“어제 뭐, 그래, 고생했지. 당신도 고생했어.”
“그게 아니라요! 기다리느라…… 고생하셨다고요.”
“아.”
진저가 픽 웃으며 그녀의 온 얼굴에 촉촉, 입을 맞췄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어떻게 이처럼 사랑스러운 여자가 제게 와준 것일까. 끔찍한 삶 속에 그녀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 여자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해.”
그의 말에 엘리사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울상이 된 얼굴마저 사랑스러운 아내.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다. 이깟 목숨 같은 건 수백, 수천 개라도 내어줄 수 있었다.
왕궁 배 검술 시합을 며칠 앞두고 그웬 부부는 다복함의 최고점을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님의 침실이든, 주인님의 침실이든 들어갔다 하면 나오지를 않는 통에 외부의 일과 내저의 일이 모두 중단되는 사태를 겪었다.
검술 시합이 코앞인데 진저가 나올 생각을 안 하니 기사들의 속이 새카맣게 탔다. 특히 실무를 보는 하우벡은 양 볼이 쏙 파였는데 다른 기사들이 휘청거리는 그를 볼 때면 그의 어깨를 몇 번씩 두드렸다.
‘제기랄!’
오늘은 주군의 침실에 마님이 들어가 있었다. 마님의 침실이면 몰라도 주군의 침실 정도는 들이닥쳐 볼까.
‘오늘까지 서류를 내지 않으면 부전패라고!’
참가명단에서 제외되는 게 아니라 부전패였다. 무예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진저 그웬이 부전패라니. 이만한 개망신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들어갔다가 마님이 옷이라도 벗고 계시면 낭패였다. 그냥 낭패가 아니라 3대가 줄줄이 목이 잘릴 재앙이다.
하우벡이 눈 밑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때였다. 그의 옆에 다가온 콕스가 하우벡과 똑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저도?”
“기사단도?”
사내들이 굳게 닫힌 문만 바라보다가 서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검술 시합이 코앞인데 서류도 아직입니다.”
“신년 봉사도 얼마 남지 않았죠.”
“부부 사이가 너무 좋은 것도…….”
“…….”
결재할 서류가 산처럼 쌓인 두 사내는 말을 아꼈다.
* * *
그웬 부부는 밤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왔다. 아내를 번쩍 안아 든 채 식당으로 내려온 그는 하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된 음식을 직접 먹여 주었다.
엘리사는 그런 남편이 부담스러운지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왜 이래요, 정말.”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며.”
“그건 일이 밀려 있는데 당신이 안 놔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리사는 스푼이 입가에 다가오면 넙죽넙죽 잘 먹었다. 진저는 그 모습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흘러내리는 아내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픽 웃었다.
“그래서 신년 봉사는 다음 주로 밀린 건가?”
“네. 준비 기간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발족식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사과 행렬 등으로 진저가 엘리사에게 꽉 잡혀 산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웬 공작 부인에게 잘 보이려는 이의 수가 셀 수 없어서 생각보다 규모가 커졌다.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준비를 해왔기에 망정이지 첫 행사에서 허둥댈 뻔하였다.
“당신은요?”
“난 당신 신년 봉사가 끝나면 이틀 뒤에 왕궁 배 검술 시합이 있지.”
“굉장한 실력자들이 나온다면서요?”
“아무래도. 재야의 고수들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시합은 많지 않으니까.”
“언제나 당신이 아니라 마크빌 경이나 하우벡 경, 그레닉 경이 참가했다고…….”
남편이 대단한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듣긴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저는 아내의 눈꺼풀에 입술을 맞추었다.
“내 실력을 믿어봐.”
“어떻게 남편 걱정을 안 할 수 있겠어요. 이번엔 대체 왜 참가하신 건가요? 다른 귀부인들도 묻던데요.”
당신에게 최고의 고백을 해주려고.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공개적인 곳에서의 프러포즈는 어떠하냐는 말에 아내는 두 번 생각 않고 냉큼 ‘정말 싫어요’라 답했다.
진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남은 스프를 떠서 그녀의 입가에 가져갔다. 아내는 이번에도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우물거리던 그녀가 입안의 내용물을 삼키고 다시 물었다.
“네?”
요새 그녀는 제법 끈질겨졌다. 진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에게…… 고.”
“네?”
“……최고의 고백…… 고.”
‘이 사람이 대체 왜 이런담?’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 크기가 들쭉날쭉했다.
“여보, 안 들…….”
“당신에게 최고의 고백을 해주려고.”
“네?”
“이만하지.”
못 들었으면 몰라도 들어버렸다. 검술 시합과 최고의 고백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엘리사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고집스레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어쩐지 그의 귓불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곰곰이 그의 말을 곱씹어보던 엘리사가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그건 제게 프러포즈할 자리가 필요했다는 건가요?”
“……알면 묻지 마.”
“이미 결혼했는걸요. 따로 프러포즈하실 필요는 없는데…….”
“당신이 내게 용기를 내주었으니까.”
“제게 오실 준비를 한 거로군요.”
엘리사는 여전히 그녀의 눈을 피하고 있는 남편의 뺨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맞춘 채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수련하신 거고요.”
“안 해.”
“왜요?”
“당신이 정말 싫다고 했잖아.”
“남의 눈을 의식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 고마워요, 여보.”
엘리사가 진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다른 때라면 곧바로 입술을 찾았을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내는 연유를 몰라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는 그녀에게서 최초의 감정을 무수히 많이 느꼈다. 사랑도, 독점욕도, 희비도. 그처럼 많은 감정을 알려준 그녀는 곤란함과 쑥스러움까지 알려주었다.
곤란했다. 가면 갈수록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진저 그웬이 입맞춤 하나에 흐물흐물 녹을 줄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푹 한숨을 내쉰 그도 그녀의 얼굴을 잡고 뺨에, 코에, 또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볐다.
“너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곤란해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부부가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는 식당 밖에 루펠라가 있었다. 그녀는 허기진 배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없이 취미생활을 즐기다 보니 식사 때인 줄도 몰랐다.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길래 내려왔더니 오빠 부부가 그림 같은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오빠가 새언니를 데면데면하게 굴 때는 얄미워서 엉덩이라도 걷어차고 싶었는데, 달콤하게 구니 이건 또 이거대로 거슬렸다.
‘언니를 빼앗겼어.’
낮이고 밤이고 눈만 마주치면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탓에 고용인이고, 루펠라고 그들을 볼 일이 없었다.
“아가씨가 오셨다고 알릴까요?”
그렇게 말하는 하녀의 표정에는 ‘주인님과 마님의 달콤한 한때를 방해하면 아가씨고 뭐고 두고 보자’라는 말이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됐어.”
하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식사를 준비해서 방으로 올리라 이르겠습니다.”
“그렇게 해.”
자살 미수라는 큰 사고를 친 덕에 본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엘리사가 주관하는 행사라면 잠시 저택을 나설 수 있지만, 그녀가 주관하는 행사는 다음 주에 있는 신년 봉사밖에 없었다.
소거실에 앉아 일하는 고용인들을 번잡스럽게 하는 게 그녀가 사람과 마주치는 유일한 일이었다. 지루함에 지쳐 있던 루펠라는 얼굴에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었다.
방으로 올라가다가 우뚝 멈춰 서서 발을 쿵쿵 굴렀다. 근래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많이 났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아가씨.”
복도를 지나가던 라골이 그녀를 불렀다.
“알아보라고 하신 일 말입니다.”
“응.”
“그레닉은 아직 사직청원서를 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레닉. 그녀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남자는 이제 짜증을 솟구치게 하는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오랄 때는 오지 않고, 가랄 때조차 가지 않는다. 대체 자신이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흐려지지 않을까 싶어 내보내려 하였다. 아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다만 그가 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건지, 그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다면 평생 그리워할지언정 멀어지고 싶었다.
“쓰지도 않았대?”
“그거야 본인만 알 일이죠.”
“요새 나한테 너무 차갑지 않아?”
“죽을 각오도 하셨으면서 사람에게 냉대받는 정도야 뭐.”
라골은 여전히 유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평생을 함께 자란 그녀가 말도 없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죽을 결심을 한 것이다. 그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잖아.”
“아가씨의 계획이 성공했으면 듣지 못했을 말이군요.”
“노총각이라 그래.”
“네?”
“깐깐해진 거 말이야. 결혼해. 결혼하면 오빠가 번듯한 직업에 집까지 구해줄 텐데 왜 아직 뭉개고 있어?”
라골이 인상을 쓴 채 꾸벅, 인사를 하고 본래 가던 길을 갔다. 하여간 저 남매는 오빠고 동생이고 싸가지를 상실했다.
루펠라도 제 방으로 향했다. 자살 미수 사건 이후 루펠라의 방 앞엔 그녀를 감시하는 기사가 있었다. 오늘은 마크빌 경이었다.
“부단주가 호위 근무도 해?”
“오늘은 한 놈이 빠져서요.”
“도망쳤나 보지?”
“…….”
그녀의 호위는 오랫동안 그웬가를 모신 연배 있는 기사와 신입 병사가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2, 3년에 한 번쯤은 그웬 수도군의 훈련에 질려 도망치는 병사가 생겼다. 어차피 얼마 못 가 잡혀 올 텐데.
“싫다는 사람은 보내주지.”
“갱생이 목표입니다.”
“오빠가 알면 힘줄을 끊어서 내다 버리라 할 텐데.”
“……주군께선 모르실 테니까요.”
애원조의 말이었다. 마크빌은 이렇게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속도 깊어서 그녀의 외숙인 카르트 후작이 일찌감치 조카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은 사내기도 했다.
후작이 아직까지 그녀의 결혼에 크게 관심이 없는 건 다 마크빌 때문이었다. 백작가의 장남이기도 하고, 그웬군의 부단주이기도 한 그는 후작의 입맛에 딱 맞는 사내였다.
‘마크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그녀의 사랑이 이처럼 진절머리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빠 모르게 하려고 직접 호위를 서는 거야?”
“고향에 있는 약혼녀가 위독하다고 합니다. 휴가를 신청했는데 여의치 않아서 돌려보내지 못했습니다.”
“가족이 아픈 게 아니면 아예 휴가를 신청할 수 없잖아.”
“그래서 주군께 법규를 바꿔보자고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오빠가 잘도…… 뭐, 지금은 이해할 수도 있겠네. 그건 그렇고 마크빌.”
“예?”
“나랑 결혼할래?”
이건 무슨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소리란 말인가. 그가 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냐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넌 남자만 사랑하고, 난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니까 딱 좋잖아.”
“제가 남자만 사랑하다니요!”
“오빠한테 홀딱 반해서 집안이고 뭐고 싹 버리고 온 거 아냐?”
“그, 그, 그런 무서운 말씀 마십쇼!”
그의 실력과 고독에 반하긴 했지만, 목숨을 걸고 말하건대 사랑은 아니다. 진저가 들었다면 징그러운 말을 듣게 한다고 척추를 접어버렸을 것이다.
속 뒤집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 루펠라가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말했다.
“아님 말고.”
그리고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마크빌은 눈에 그늘을 드리운 채 어깨를 떨구었다. 왜 서 있기만 하는 게 온종일 훈련에 매진하는 것보다 피곤하단 말인가.
다음 날, 하우벡과 결재를 받아야 할 가신들은 엘리사가 봉사 장소를 보기 위해 내저를 비운 틈을 타 진저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오늘은 두 달에 걸쳐 치러지는 기사단의 일대일 대련이 있는 날이었으나, 그들은 파업을 선언하며 진저를 붙잡고 늘어졌다.
“대련엔 참관하겠다. 오후로 미뤄.”
“오후엔 마님이 돌아오십니다.”
“그런데?”
마님이 돌아오시면 또 주군의 방이든, 마님의 방이든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을 게 아닌가.
‘어차피 미뤄봐야 마님 신체 검진이나 하실 거면…… 어이쿠.’
진저가 서류를 끌어안고 들어온 가신 하나를 노려보았다.
“방금 저 새끼 눈빛이 거슬렸는데.”
“오해십니다.”
서둘러 서류를 내려놓은 가신이 잡힐세라 도망쳤다.
진저 또한 그동안 아내와의 시간에 빠져 일을 등한시했다는 자각이 있었다. 차라리 그녀가 없는 동안 서둘러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이런저런 것을 가르쳐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확실히 학구열이 높은 사람이었다. 침대 위에서도 하나를 가르쳐 주면 그 하나에 또 다른 하나를 접목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진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자 하우벡이 쿵, 소리를 내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뭐야?”
“보셔야 할 서류입니다.”
그가 가져온 서류를 뒤적이던 진저가 고개를 들었다.
“검술 시합 관련 서류는 어디 있나?”
“어제 오전까지가 서류 마감이었습니다.”
“넘겼잖아.”
“예. 그래서 부전패.”
진저가 의자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마님 앞에선 봄바람 같은 사람이 마님만 없으면 한겨울 북풍보다 차갑다.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던 놈은 닥치라고 하기엔 목숨이 아까웠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오싹하지 않는가. 어차피 고용된 놈은 주인을 이길 수 없었다.
하우벡이 말을 이었다.
“……가 될 뻔했으나.”
“했으나?”
“먹였습니다.”
“…….”
“뇌물.”
“잘했군.”
하우벡이 등 뒤에 감추어 놓았던 서류를 진저에게 건넸다.
“예선은 이틀 후, 본선은 그다음 날입니다.”
“일정이 왜 이따위야?”
“중앙 기사단에 모 후작가의 차남이 들어간다더군요.”
그러고 보니 왕궁 배 검술 시합의 우승자 특전은 중앙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검술 시합 앞에 ‘왕궁 배’가 붙어있긴 하지만 주관하는 건 중앙 기사단이었다.
단장인 케르모스는 검보다 돈에 눈이 벌건 자였다. 그 ‘모 후작가’에서 케르모스에게 돈을 얼마나 처먹였는지 가늠이 갔다.
서류를 살펴보던 진저가 이를 갈았다.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정육점에서 죽은 짐승 살이나 베던 놈에,
‘얼씨구.’
나약하기로는 수도에서 따를 자가 없다는 몬타나 백작의 애면글면 외아들까지 참가를 신청했다.
진저가 인상을 쓴 채 하우벡을 보았다. 하우벡은 당신이 나가겠다고 했으면서 왜 저를 보느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얼마나 먹였나.”
“뇌물을 말씀하십니까? 외곽에 집 한 채 살 정도는 됩니다.”
돈 쓰는 데에 쪼잔하단 소리를 들었던 바는 없으나, 이따위 시합에 나가려고 돈을 썼다고 하니 짜증이 솟구쳤다.
“주군께선 본선부터 참가하시면 됩니다.”
“그건 또 왜?”
‘그야 제 아들이 혹시 죽어 나갈까 봐 걱정된 귀족들이 수를 쓴 거겠지.’
왕궁 배 검술 시합을 노리는 자들은 중앙 기사단에 입단하려는 평민이나 남, 자작가의 영식뿐만이 아니었다.
란델은 대륙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땅이었다. 자연히 기름진 땅과 큰 강을 끼고 있어서 그를 차지하기 위한 타국과 언제나 전쟁을 벌였다.
개국부터 약탈로 시작한 국가였다. 전쟁의 명분은 차고 넘쳤다.
그래서 백작 이상의 귀족 가문에서는 참전이 너무나 당연하였고, 그러다 보니 무의 명예를 단연 1순위로 꼽았다.
그래서 고위 귀족들은 가주가 되기 위한 시작을 기사 서임으로 여겼다.
왕궁 배 검술 시합은 ‘나 사실은 기사 서임을 받을 정도로 검을 잘 다뤄’라고 광고하는 곳이기도 했다.
하우벡은 이 보여주기식 문화가 아주 우스웠다.
날붙이만 보면 가랑이를 적시는 겁쟁이들은 기사고, 그들은 전투원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 문화인가.
하우벡 자신이나 그레닉 등 실력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자들도 주군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터였다.
하우벡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서류에 적힌 어르신네들 귀한 아드님들은 한 손으로도 멱을 딸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을 상관이랍시고 모시는 놈들이 가여웠다.
“그건 어떻게 됐어?”
“아, 곧 호위 부대를 짜서 내려보낼 생각입니다. 마님은 알고 계십니까?”
“…….”
얼마나 마님께 푹 빠졌으면 이런 걸 말하는 것도 잊어버린단 말인가.
“마피 부인의 치료가 끝났으니 이제 다시 본저로 복귀하시는 겁니까?”
“그럼 왜 호위 부대까지 내려보내서 데려온다고 생각하나.”
말은 저렇게 해도 마피 부인이라면 한 수 접어주는 사람이었다.
“보고 끝났으면 나가봐라.”
“예.”
진저의 집무실을 나선 하우벡이 픽, 실소를 흘렸다.
일전에 마피 부인을 데려오라고 말하던 주군을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다름없는 그녀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그래, 마치 평범한 사내처럼.
* * *
그날 오후, 루펠라와 엘리사는 티타임을 함께했다.
“마피 부인이요? 치료가 다 끝났나요?”
“그리 심각한 병은 아니었어요. 안주인 없는 저택에서 홀로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오빠가 휴가 겸 요양을 보내준 거죠.”
루펠라는 오랜만에 밝은 표정을 보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마피 부인이 루펠라의, 그리고 진저 인생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입양아, 또 사생아라는 타이틀을 견디게 해준 사람이었다. 얼마나 강인하고 멋진 여자일까. 엘리사 또한 마피 부인과의 만남이 기대되었다.
“혼날 것도 많겠지만.”
루펠라가 쿠키를 씹으며 말했다. 반은 부스러기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녀는 무릎에 묻은 가루만 조금 털어냈다.
“이런 것 말이죠?”
드레스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전부 털어내고 하녀를 부른 건 엘리사였다.
엘리사의 웃음기 배인 말에 루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소리가 엄청나요. 저택에 오래 있던 고용인들은 유모 발소리만 들려도 도망간다고요.”
“예전부터 궁금했어요. 마피 부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평범한 사람이요.”
“네?”
“평범하게 내 새끼가 제일 예쁘고, 욕도 잘하고……. 함께 있으면 나도 평범해질 것 같은 사람이에요.”
루펠라가 어째서 마피 부인을 그토록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남편은 잠자리 후 엘리사를 제 팔에 기대게 하며 그는 자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선대와의 일,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이던 일, 마피 부인의 품에서 잠들던 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특히 마피 부인의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가 다정해졌다.
“오빠도 유모에겐 약해요. 언니한테 하듯이 말랑하진 않지만.”
“그분이요?”
“잔소리가 매우 많은데 유모한테만큼은 큰 소리를 내지 않거든요. 눈빛도 그렇고.”
“언제쯤 오실까요?”
“빠르면 다음 주? 못해도 이번 달 안엔 올 거예요.”
루펠라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엘리사가 그녀의 편이 되어주었지만, 엄마 같은 마피 부인과는 달랐다.
기사들끼리는 우스갯소리로 마피 부인과 마님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으면 볼만하겠다고 입을 놀렸다.
그도 그럴 게 루펠라는 마피 부인에겐 아기가 따로 없었다. 언제나 마피 부인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고, 그녀가 있을 땐 외부 활동도 하지 않았다.
진저도 루펠라처럼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마피 부인을 타인과 다르게 여겼다. 그녀는 어떤 말을 해도 진저에게 큰 소리를 듣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잘 맞았으면 좋겠어요. 배우고 싶은 게 많거든요. 마피 부인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나요?”
“잘하는 사람?”
“네?”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잘하는 게 중요하다’가 유모의 말버릇이에요.”
마피 부인은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평민의 몸으로 선대 공작 부인에게서 외면받는 두 아이를 지켜왔다. 그리고 선대 공작 부인이 죽고 나선 내저를 총괄해 왔다. 그만한 카리스마는 있으리라.
엘리사가 몇 번이나 손을 오므리고 펴기를 반복했다.
“긴장돼요?”
“전 시어른이 없으니까 이런 자리가 처음이거든요.”
“언니가 유모를 시어른으로 여길 필요는 없어요.”
“알아요. 하지만 그이와 루펠라의 소중한 사람이잖아요. 잘 보이고 싶어요.”
엘리사가 배시시 웃자 루펠라는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엘리사는 루펠라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주었다.
처음엔 자신이 그웬 영애라 불리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오빠의 여동생이므로 이처럼 다정하게 구는 것으로 여겼는데, 엘리사는 남편의 애정을 얻고도 변함이 없었다.
“난 언니가 참 좋아요.”
“저도요.”
엘리사와 루펠라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라골이 그녀에게 확인받을 서류를 가지고 왔다.
“이대로 진행해 주세요. 참, 마피 부인이 돌아온대요. 들었어요?”
라골은 마피 부인의 조카였다. 그래서 따로 그녀를 챙기고 있었던 터라 다른 사람보다 일찍 소식을 접했다.
“예.”
“응, 라골에게서 들으면 되겠네.”
루펠라가 찻잔을 내려놓고 남은 자리를 가리켰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언니가 유모를 궁금해하더라고.”
“이모님은…….”
어떻게 그녀를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라골이 그녀에게 딱 맞는 단어를 생각해 냈다.
“코벤입니다.”
코벤은 역사 속의 인물로 왕권이 신권에 기울었을 때의 자였다. 신하들에게 치인 왕은 현명하게 정치를 할 수 없었다. 코벤은 우직한 자로 충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러다 결국.
“죽었죠.”
“라골!”
놀란 엘리사가 그를 타박했다.
“이모님께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이모님 자신도 그리 평가하십니다. 코벤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약관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거라고요.”
루펠라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웬 남매를 위해 그웬의 성을 가진 자들에게 대들었다가 징벌방에 몇 번이나 갇혔었다. 그때마다 보기 힘들 정도로 깊은 상처를 얻었으면서도 할 말을 참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용케 살아남았다 싶어.”
루펠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덕분에 선대 공작 부인의 마음에 들었어요. 피시스라고 호시탐탐 작위를 노리는 놈이 있는데 오빠 때문에 후계가 되지 못했다고 억울해했거든요. 술을 진탕 먹고 선대 공작 부인에게 석녀라고 막말을 했거든요?”
그때 피시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사람이 마피 부인이었다. 그녀는 술에 취한 척하며 막말을 하는 그놈에게서 잔을 빼앗았다.
“이 술은 손님을 위한 거지, 짐승을 위한 게 아니라고 말했죠.”
“대단하군요!”
“유모는 그런 사람이죠.”
루펠라가 이처럼 당당하게 하고픈 말을 하는 건 그녀의 영향이었다.
그렇다. 마피 부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어 이제 이름보다 부인이란 말이 더 익숙해졌으나, 젊은이보다도 호기 넘치는 사람이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었다. 다만 중년을 넘어 노년의 나이에 접어드는 만큼의 지혜를 지닌, 평범하고 굳세며 지혜로운, 그런 노부인이었다.
엘리사는 그녀를 말하는 루펠라의 표정을 보고 마피 부인이 이들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알았다. 루펠라는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마피 부인 없이는 살 수 없노라고.
엘리사는 깊은 밤이 되어 만난 남편에게도 같은 것을 물었다.
“마피 부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아내를 품에 안은 채 고민에 빠졌다. 곁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사람이라 마피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유모가 신경 쓰이나?”
“루펠라도 같은 걸 물었어요.”
“당신은 뭐라고 답했는데?”
“당신과 루펠라의 소중한 사람이니 잘 보이고 싶다고 그랬지요.”
진저가 작게 웃으며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중하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아내에게 배웠다. 그러한 감정을 몰랐다면 마피 부인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을 터였다.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비교할 순 없지.”
“비교하라는 게 아니라…… 아이 참.”
“당신이 알려줘.”
“제가요? 뭘요?”
“그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진저는 뜻 모를 말에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아내를 힘주어 껴안았다.
그녀는 알까. 그녀를 사랑한 후로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지.
“사랑해.”
“저도요. 그래서 말인데요, 여보.”
사랑한다는 말 뒤에 어째서 ‘그래서 말인데요’가 붙는단 말인가.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진저가 답하지 않자 그녀가 그의 맨 등을 찰싹, 내려쳤다.
“네? 여보!”
“……뭔데.”
“신년 봉사에 함께 가주시겠어요?”
“봉사에 문제가 있나?”
“그게 아니라…….”
엘리사는 그가 신년 봉사에 가야 할 이유를 말해주었고, 그녀에게서 이유를 듣던 그는 포효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이 개자……!”
“개자?”
“……내가 갈게. 그리고 그 개새…… 아니, 놈들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저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루펠라와 라골을 쳐다보았다.
“안 가냐?”
“뭘?”
오빠라는 작자는 뭘 묻냐는 듯 엘리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라골은 이미 저 멀리 도망쳤다.
그녀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제 오빠를 노려보았다. 새언니는 얼굴이 붉어져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재수 없어 진짜!”
그녀가 빽 소리를 지르고 방을 나섰다.
진저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를 품 안에 끼고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그가 달콤하게 웃으며 아내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당신도 참…….”
“몇 시간 못 봤더니 가시가 돋는 줄 알았다고. 저 녀석보다 날 더 걱정해야 돼.”
엘리사가 픽 웃으며 두 손으로 그의 뺨을 잡았다.
“어디 봐요. 눈에 얼마나 큰 가시가 돋았나.”
“눈 말고, 여기에.”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제 하체로 가져갔다. 엘리사는 그를 새초롬히 흘겼다. 밤마다 못 살게 구는 통에 매번 늦잠을 자게 되는데, 낮에도 괴롭히다니. 몸이 남아나지 않겠다.
“이러다 쓰러지겠어요.”
“그래? 그럼 쓰러지지 않게 주사를 맞아야지.”
엘리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어제도 세 번이나 하고선…….”
“세 번밖에 못 한 거지.”
갈수록 능글맞아진다. 엘리사는 그를 밉지 않게 흘기며 가슴을 밀어냈다 이러다 정말 붙잡혀 몇 시간이고 신음을 흘리게 될 것 같았다.
“오늘 일은?”
남편은 끈질겼다. 괜히 별명이 미친개가 아니다. 그가 아내의 목에 팔을 걸치고 그녀의 입술을 야릇하게 핥았다.
“끝, 으응.”
혀가 그녀의 귓바퀴를 쓸어내렸다. 그는 비겁하게 가장 약한 귓바퀴를 공격했다.
소리에 민감한 그녀는 귓바퀴를 공략당하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깨를 짚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승리를 예감했다.
“응? 엘리사.”
이러면 거짓말도 할 수 없게 돼버린다. 그녀가 입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끝…… 냈어요.”
그가 슬금슬금 그녀를 밀었다. 벽에 등이 닿았다. 진저는 치마 속을 더듬으며 목덜미를 츕츕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흣, 여보…….”
“응.”
“내일 일정이 있…… 하아.”
“조금만. 약속해, 맛만 볼 거야.”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어제도 조금 핥기만 한다면서 세 번이나 사정했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붉은 눈과 마주치면 거절할 수 없었다. 정신보다 몸이 먼저 관계에 익숙해졌다. 곧 그의 페니스가 제 안으로 파고들 거라 생각하니 동굴 속에서 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사슴을 몰아붙인 이리처럼 숨이 거칠어졌다. 야들야들한 살을 맛볼 생각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진저가 등 뒤의 지퍼를 내렸다. 하얀 살을 살짝 깨물며 브래지어 후크마저도 풀어버렸다. 어깨 끝이 스륵, 흘러내리며 진저가 애써 키운 머위가 드러났다.
그는 기대로 부푼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남은 머위는 한 손으로 정성스레 지분거린다.
“하응.”
그녀의 몸은 날이 갈수록 달콤해진다. 첫날보다 다음 날이, 어제보다 오늘 더 먹음직스러웠다.
그는 그녀에게 드레스 자락을 물게 했다.
“음란한 몸이야. 벌써부터 젖었잖아.”
혀를 내밀고 속옷의 젖은 부분을 핥았다. 어느 한 곳 달콤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애액마저도 음욕을 자극하는 맛이다.
혀로 가랑이 사이 오목하게 패인 부분을 슥슥 문댔다. 예민한 몸은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교성을 터뜨렸다.
“흐으읏.”
그의 손이 팬티 안을 들어가 엉덩이를 꽉 쥐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터질 듯 탱글탱글하다.
“잘 물 수 있지?”
손가락이 습한 동굴 사이로 들어갔다.
“흐윽!”
뭉툭하고 길쭉한 것이 내부를 쿡쿡 찔렀다.
“좀 더 꽉 물어야지.”
“흐읏.”
그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깜짝 놀란 나머지 하체에 힘이 들어갔다.
“잘했어.”
칭찬하듯 다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엘리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자, 이번엔 힘을 풀고…… 어어, 힘 풀래도.”
반항하듯 손가락을 조이니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위아래로 문지른다. 안이 자극되자 허리가 찌릿찌릿 울린다. 고작 손가락 하나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결국 엘리사는 시키는 대로 힘을 풀었다.
“다시 물어.”
“흐윽.”
“좀 더 꽉 물 수 있잖아. 그렇지, 잘하네.”
이번엔 칭찬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천천히 위아래로 비빈다. 애액이 뚝뚝 떨어져 카펫을 적셨다.
진저는 그녀의 팬티를 발목까지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내의 허벅지를 번쩍 들고 음부에 페니스를 조준했다.
성기가 음순을 비집고 들어갔다. 귀두관까지 통과하자 그는 거침없이 허리를 밀어붙였다.
“흑, 흐으읏!”
쩍쩍 소리를 내며 성기가 드나들기 시작했다.
“흐아, 아앙!”
남편의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물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치고 말았다.
“아아앙!”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머릿속에서 램프가 깜빡깜빡 점멸하는 것 같았다. 입을 벌릴 때마다 앙앙 교성이 터져 나왔다.
갈수록 움직임이 난폭해졌다. 팔뚝처럼 거대한 성기는 엘리사의 가장 연약한 곳을 자비 없이 비벼댔다.
“큿!”
엘리사가 열락에 겨워 허리를 반쯤 휘었다. 진저가 이를 악물고 허리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툭, 투둑.
그가 파정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한숨을 흘리며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신년 봉사가 있는 날이 되었다. 엘리사는 아침부터 봉사를 할 보육원으로 향했다.
소식에 어두운 귀부인과 영애들은 기존의 봉사와는 다른 방식에 놀랐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던 귀부인들이 하녀들을 지휘하고, 몇몇은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그러게요.”
차마 그웬 공작 부인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서 그렇지 다른 이들도 불만이 많아 보였다.
“재클린 양 좀 보세요. 교양 없이 직접…….”
재클린 러스트리는 선박 사업을 하는 러스트리 백작의 외동딸이었다. 외가는 대대로 왕의 간관으로 재산뿐만 아니라 영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여성이 꼬질꼬질 때가 묻은 아이들을 세수시키며 코를 풀어주고 있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뭘 몰라도 그렇지 귀족을 모아놓고 이런 천박한…….”
“쉿, 말조심하세요. 그웬 공작 부인이 겉보기와는 다른가 봐요. 아콘 백작 부인이 크게 혼쭐이 났다고 들었어요.”
“어머머! 아콘 백작 부인을요?”
그러고 보니 말도 안 되는 행사라고 제일 먼저 소리쳤어야 했을 이들이 조용했다. 말 많은 귀부인 몇몇은 아예 그웬 공작 부인 쪽에 찰싹 달라붙어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발족식에서 엘리사가 남편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천하의 그웬 공작이 그녀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지 않았는가. 엘리사 그웬의 뒤에 진저 그웬이 버티고 있는 한 그녀는 왕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공작 부인! 이쪽을 봐주시겠어요?”
엘리사를 두려워하는 자들, 동경하는 자들은 성실하게 봉사에 임하고 있었다. 엘리사 자신도 바쁘게 아이들을 씻기고 먹였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실감 났다. 봉사의 총지휘부터 문제가 생길 시 해결하고, 또 아이들을 돌보는 것과 뒤풀이 준비까지 해야 했다.
폭풍 같은 몇 시간이 지났다. 엘리사는 땀에 헝클어진 머리를 손질받았다.
“마님, 괜찮으세요?”
저택에서 데려온 하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으응, 괜찮아.”
말은 괜찮다지만 혼이 나가 보였다. 마님은 쑥 나와 있던 귀족들의 입이 쏙 들어갈 정도로 정신없이 일했다.
“이제 슬슬 정리가 되는 것 같은데 조금 쉬시는 게 어떠셔요?”
하녀가 걱정 어린 말을 건네고 있을 때였다. 입구 쪽이 시끄러워지더니 몇몇 귀부인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하녀들이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물러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엘리사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남편이었다. 그는 익숙한 얼굴의 기사들, 그리고 하인들과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들 손에 무언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진저는 보육원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찾았다.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아내를 발견한 그가 손을 위로 올렸다.
안 보이는 데서 여유를 부리고 있던 귀족들이 지나가던 아이나 주변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하나씩 잡았다.
그를 처음 보는 여성들도 있었다.
공작 부인이 주최하는 모임, 그러니까 이런 신년 봉사를 포함한 행사 등엔 언제나 사람이 미어졌다.
그런데 이번엔 공작가의 새사람, 그것도 진저 그웬이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아내가 주최했음에도 참가 인원이 많지 않았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확실히 적어서 힘도, 재산도, 인맥도 없는 귀부인이나 영애들까지 참가할 수 있었다.
‘소문이 정말인가 봐!’
발족식이나 왕궁 주최 무도회에 참가할 수 있는 건 힘있는 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콩고물이 떨어질까 싶어 참가했던 이들은 소문이 진실이라는 것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그, 그웬 공작이죠?”
“네. 저렇게 새빨간 머리색을 지닌 사내가 둘이 있을 리가요.”
“소문대로 정말 아름답네요.”
황홀한 표정을 짓는 여성도 여럿 있었다.
엘리사와 만나기 전의 진저였더라면 평범한 여자들은 쳐다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살기를 풍겼겠지만,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몹시 부드러워졌다.
“저…… 각하.”
그러다 보니 간이 배 밖에 나오는 사람도 생겼다.
영애 하나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녀는 자작가의 영애로 집안에 재산이 없어서 그렇지 증조부가 왕궁 서기를 지내고, 먼 친척은 타국 왕가에 끈이 닿아 있었다.
매일같이 비명이 나올 정도로 비싼 화장품을 바르는 여자들과 견주어도 부족함 없는 외모도 가지고 있었다.
언감생심 공작가의 정실은 못 되어도 애정과 관심 정도는 받을 수 있으리라.
아닌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제법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선물을 받아왔다. 죄 늙어 빠진 할아범들이라 그렇지.
그런데 진저는 말을 건네는 자작 영애를 무시한 채 성큼성큼 걸어 제 아내에게 다가갔다.
마치 세상에 여자는 아내 하나뿐이라는 듯이.
정실부인, 심지어 신혼 때의 공작 부인 앞에서 미혼의 영애가 말을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파문이 일 텐데 눈길조차 받지 못했다. 이건 개망신이었다.
자작 영애의 얼굴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그 자리에 있던 귀부인들이 소리 높여 그녀를 헐뜯었다.
“미쳤군요!”
“세상에, 부모가 어떻게 가르쳤으면!”
“남의 남자를 탐내는 것들은 죄 머리를 깎아놔야 해요!”
공작 부인과와의 친분을 목적으로 봉사에 참가하기도 하였지만, 그녀들은 기혼이었다. 그러니까 남편이 있는 여자란 소리다.
특히 권력자나 거부를 남편으로 둔 귀부인들이 파르르 분노했다. 권력과 돈 때문에 남편에게 붙는 날파리들은 차고 넘쳤다. 그녀들은 남의 것을 탐내는 젊은 여성은 국외로 추방해야 한다고 믿었다.
엘리사는 언짢은 표정으로 자작 영애 쪽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감정을 숨기는 게 품위를 지키는 일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도무지 미간의 주름을 펼 수 없었다.
“왜 그래?”
“……부르던데.”
“그런데?”
“못 들으셨어요?”
“들었어.”
“네?”
“당신 앞이니까 살려둔 거지.”
엘리사는 제 성격이 사실은 꽤 나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무서운 말에 기분이 풀리는 걸 보면 말이다.
그웬 부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자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농담인데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 아니면 무서운 일인데 농담이어도 무서울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새…… 자들은 어디 있지?”
“뒤풀이에 참가하실 모양인가 봐요. 이곳에선 뵙지 못했어요.”
“그렇군.”
진저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내는 말했다.
신년 봉사에 후원해 준 귀족들이 그녀와 따로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뒤풀이는 저녁에 있나?”
“네. 뒤풀이 자리는 그분들이 마련하신대요.”
몇 번 거절했지만 끈질기게 청해오는 터라 곤란했다. 그란디아에선 외간 남자,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여럿과 술자리를 갖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란델에 온 뒤로 그란디아의 문화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남성 우월적인지 깨달았으나, 엘리사도 굳이 남성들과 술자리를 갖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속이 빤히 보였다. 자신을 이용해 남편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게 있는 것이다.
란델 귀족 사회에 많이 익숙해지긴 했어도 아직 부족했다. 혹여 실수를 하여 남편을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으아아아앙-!”
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조그만 아이가 부부 사이로 불쑥 끼어들더니 엘리사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아침에 코를 닦아주었던 아이였다. 걸음마를 겨우 뗀 것 같은데 용케 엘리사를 쫓아다녔다.
진저가 인상을 쓰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사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래도 아침부터 아이를 안아줘서 그런지 제법 능숙해졌다.
“아우!”
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엘리사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그녀는 그런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안아보시겠어요?”
“아니.”
아이는 엘리사를 찾으러 오는 동안 넘어졌는지 먼지와 검댕 같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다.
‘옷이 지저분해질까 봐 그러나.’
아이가 진저의 옷깃을 꽉 잡았다.
“어머.”
“우우우! 아우! 우!”
그리고 힘을 주어 흔들기 시작했는데 진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 여보. 아기라서 아직 뭘 몰라요.”
“…….”
“우! 아우우!”
“아가, 그만하렴. 어머!”
이제는 아예 양팔을 남편 쪽으로 뻗고 온몸을 흔들고 있었다.
어른들은 모두 겁내는 그를 아이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가고 싶은가 봐요. 한 번 안아주세요.”
“싫어.”
“여보…….”
“……너무 작아서 징그러워.”
“네?”
3등신에 볼이 터질 듯 빵빵하고, 손은 단풍잎보다 작았다.
“잡으면 터질 것 같아. 윽, 평생 검만 쥐었다고. 이런 말랑한 건 순식간에 터뜨려 버릴 거야.”
남편의 말을 듣고도 눈만 깜빡이고 있던 엘리사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었다.
엘리사가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봐요. 터지지 않잖아요. 이렇게 부드럽게 안으면 돼요.”
그래도 진저는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이는 작고 연약하다. 아내도 작고 연약하다. 고로 작고 연약한 것들은 서로를 터뜨리지 않는다.
진저의 머릿속에 평범한 사람과 사뭇 다른 공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모르는 엘리사는 그저 웃었다.
봉사는 하루로 마무리되었다. 준비한 기간에 비해 짧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귀족들은 봉사가 끝난 이후 각자 뒤풀이 장소인 벨럼 홀로 향했다.
벨럼 홀엔 봉사에 참가했던 이들보다 배는 더 많은 수의 사람이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마치 본격적인 행사는 뒤풀이라는 듯이.
엘리사는 봉사 때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뒤풀이에서만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런 아내를 보던 진저가 말을 건넸다.
“기분은?”
“네?”
“나쁜 것 같아서.”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속이 상할 뿐.
홀로 행사의 뜻을 해석해, 홀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당연한 것이라 믿었다.
공작 부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어리석은 믿음이었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봐 그게 걱정돼요.”
진심으로 아이들을 돌봐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눈치가 빠르다. 진심과 가식을 몰라볼 리 없었다.
엘리사보다 노련하고 생각이 깊은 귀부인들이 그간 신년 봉사를 허울뿐인 껍데기로 만들었던 건 이유가 있던 것이다. 귀족들의 습성을 엘리사보다 더 많이 이해했기 때문에 봉사의 본질을 덮어두었다.
“거둬진 아이들도 있다며.”
엘리사를 목적으로 참가한 이들 중에도 진심으로 아이를 아끼는 자가 있었다.
“당신의 목적이 그것 아니었나?”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의 미래는 뻔했다. 특히 란델은 보호자 없이 정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이들이 사람 구실을 하고 살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의 말이 맞다. 몇 명이라도 일자리와 새로운 가족을 얻을 수 있다면 성공한 행사라고 생각했다.
“양자로 입적된 건 아니어도 귀족가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거고, 미래의 일자리까지 보장됐어.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남은 아이들이 가여워서요.”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 거로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진저가 턱짓으로 어느 쪽을 가리켰다. 러스트리 영애였다. 그녀는 어딘가 불편한 모양인지 계속해서 출입구 쪽을 보고 있었다.
자매로 보이는 여성이 몇 번이나 까닭을 물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버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그래. 겨우 성사된 약혼까지 깨고 싶어?”
거리가 멀긴 했지만 입 모양으로 대화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엘리사가 무슨 뜻이냐는 듯 진저 쪽을 바라보았다.
“재클린 러스트리.”
“네, 러스트리 양이에요. 오늘 봉사에서도 어찌나 열심히 일해 줬는지 몰라요.”
진저가 픽 웃으며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진한 아내는 자신이 여성의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2년 전에 이혼했어.”
“미혼이라고 하던데요.”
“혼인 무효가 되었으니까.”
“어째서요?”
“후계를 낳지 못하거든. 석녀야.”
선대 공작 부인과 같은 석녀였다. 그래서 2년 전에 남편과 시가에서 러스트리가에 큰 소송을 제기했다.
“아이를 못 낳아서요?”
“후계 생산은 부부의 최우선 과제이니 결혼 전에 마탑과 의료원에서 검진을 받지.”
“네? 그런데 왜…….”
“양자를 들이지도 않겠다고 선언했거든.”
엘리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러스트리 영애를 응시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
진저는 진심으로 러스트리 영애를 걱정하는 아내를 보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늘렸다.
“아이를 보는 게 힘들었나 봐요. 그래서 미혼이라 불리는군요. 혼인 무효가 되어서.”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 쪽은 아직도 미련이 있는 모양이지만.”
“어머!”
“남편의 가문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 그녀가 소송을 걸어주길 청했지.”
라골에게서 들었던 적이 있는 법이었다.
이혼 후 6년이 지나야 후처에게서 난 아이를 호적에 친자로 올릴 수 있었다. 후계 싸움을 우려하여 생긴 법이라고 했다.
이 법을 얘기해 주면서 라골은 한 부부를 예로 들었는데, 진저가 한 얘기와 크게 유사했다.
“아, 혹시 러스트리 양의 남편이었다는 분이……!”
엘리사가 멀리서 재클린 러스트리 쪽을 보고 있는 사내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애쉬턴 백작이었다. 그는 타국 태생으로, 외아들이 죽어 후계를 잃은 란델의 먼 친척에게 입적되었다.
입적된 만큼 어서 아이를 낳아 자리를 공고히 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석녀였고, 아이의 입양도 불가하였으니 내심 속이 탔을 것이다.
“애쉬턴 백작이 입적된 지 3년 조금 넘었지. 이렇게 나이가 들어 입적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네, 들었어요. 외아들이 남긴 아이에게 후계 자리를 주고 싶어서 애쉬턴 후작이 일부러 먼 친척을 양자로 들였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석녀를 며느리로 들이겠다고 할 가문은 없었다.
일부러 아이를 만들지 않기 위해 석녀로 유명한 재클린 러스트리를 며느리로 들였는데, 이게 웬걸. 친손주를 입양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애쉬턴 후작 부부의 속이 어떻겠는가.
그웬 부부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재클린이 결정을 마쳤다.
그녀는 엘리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부인.”
엘리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저는 사정이 있어서 아이를 멀리했는데, 부인이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재클린은 모를 소리를 하고 회장을 떠났다. 그녀의 뒤를 애쉬턴 백작이 쫓았다.
멍하니 그녀의 말을 곱씹던 엘리사가 짝, 손뼉을 쳤다.
“어어?!”
아내는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진저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클린은 봉사 내내 ‘라라’라는 아이를 품에서 떼어놓질 못했다. 젖먹이와 정이 든 그녀는 보육원을 떠나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찾는 라라를 돌아보았다.
진저는 우연히 그녀가 언니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라라를 키우고 싶다는 말에 그녀의 언니가 펄쩍 뛰었다.
‘미쳤니? 입양은 절대 못 한다고 할 땐 언제고!’
‘그땐 내가 너무 싫었으니까. 외로운 사람에겐 친자식이 필요하다고 믿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것 때문에 아버님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알아?’
언니가 일축하였음에도 재클린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진저가 아내의 귓가에 무언가를 소곤거렸다.
“정말이에요?!”
“그래.”
“너무 잘됐네요!”
아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좋아했다.
남편은 테라스에서 애쉬튼 백작과 재클린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재클린은 ‘이제 피가 통하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당신의 말을 알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애쉬튼 백작은 그런 그녀를 뜨겁게 끌어안았고.
“당신을 좀 더 믿어. 아주 잘하고 있으니까.”
엘리사의 푸른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마치 호수에 돌멩이가 빠진 것처럼.
‘당신은 알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는 그가 그녀 삶의 이유란걸.
그의 다정함에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자라고 있었다. 스스로 꼭꼭 닫힌 문을 열 용기가 생겼다.
진저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다음엔 같이 가요.”
“뭐?”
“그 절벽으로.”
“……누가 그래?”
“다들 알아요. 매년 그맘때면 일정도 없이 떠난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러스트리 양을 알고 있었잖아요.”
지혜롭고, 영리하며 사려 깊다. 어떤 찬사로도 아내를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마실 걸 가져오지.”
진저가 잠시 자리를 떠나고 홀로 남은 엘리사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 공작 부인!”
그때, 시끄러운 사내들이 등장했다.
“아, 참석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저희야말로 뜻깊은 행사에 후원할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하하. 공작 부인은 갈수록 아름다워지시는군요.”
후원자 무리였다.
엘리사의 첫 행사엔 거상의 아들부터 돈깨나 있는 집안에서는 죄 후원을 하려고 아우성이었다.
이 사내들은 그들 중에서도 뛰어난 재력을 지닌 이들로, 루펠라의 말을 빌리자면 돈 많고 생각 없는 양아치들이었다.
사내들의 음흉한 시선이 엘리사의 골반 라인을 훑었다.
엘리사는 알게 모르게 수도에서 인기 있는 여자가 되었다. 진저가 없는 자리에서는 그녀에게 말 한 번 붙여 보려고 주변을 맴도는 이들이 많았다.
“이왕 영광스러울 거면 손등에 키스도 하고 싶은데 말이죠.”
으하하, 사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양손을 마주 잡았다.
“감사 인사는 제가 해야 하는 걸요.”
“그럼 공작 부인께서 손등에 입 맞춰주시겠습니까?”
“입술도 좋습니다.”
“전 포옹 정도면 만족합니다.”
농담이랍시고 하는 말들이 저질이었다. 엘리사가 표정을 조금 굳히고 뒷걸음질 쳤다. 사내들은 그런 엘리사가 귀여운지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혈안이었다.
“참, 책을 좋아하신다죠?”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외숙이 작가입니다. 폴리거스터라고 하는데 들어보셨습니까?”
엘리사가 아닌 다른 사내가 답했다.
“폴리거스터! 저도 좋아합니다!”
글자라면 광고 문구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사내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다.
폴리거스터라면 삼류 저질 소설을 쓰는 자였다. 책의 절반은 성행위에, 남은 절반은 귀족과 남성의 우월함을 역설하고 있었다.
얼마나 표현이 저렴한지 책이라면 가리지 않는 엘리사에게 최초로 작가를 가리게 한 이였다.
“달마다 강연을 해주시는데 공작 부인이 꼭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리를 청하는 자는 미혼으로 형이 작위를 이어받게 되어 따로 나와 살고 있었다.
미혼 남성의 집에 야설 작가의 강연을 들으러 가는 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날은 일정이 있을 것 같군요.”
“그럼 시간을 조정하지요. 아, 공작 부인이 참석만 해주신다면 새벽이라도 좋습니다.”
사내는 끈질기게 굴었다. 노골적으로 곤란한 내색을 하는 데도 지치지 않았다.
“부인.”
그때, 등골이 오싹할 만큼 살기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사는 보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하얗게 변하는 사내들의 낯빛을.
사내들은 차마 뒤돌지 못했다. 엘리사를 곤란하게 만든 주범의 어깨를 짚은 손이 너무나 두려워서.
“잘 지냈나, 경들?”
뒤를 도는 순간 목이 뎅강 잘릴 것 같았다.
“가, 가, 각하.”
사내들은 범에게 곧 물려갈 토끼라도 되듯 덜덜 떨었다.
그웬 공작이 보육원에 들렀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뒤풀이에 오래도록 남아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잘 지냈냐고 묻잖아.”
“그, 그렇, 그렇, 예, 잘 지냈습, 습니다.”
엘리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만 말하던 사내가 몇 번이나 혀를 씹는 것을 보고 웃음을 삼켰다.
“그래? 어떻게 잘 지냈는지 궁금하군.”
“예, 예?”
“사내들끼리 그간 얼마나 잘 지냈는지 얘기해 보자고.”
“아,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예! 자, 잘 못 지냈습죠. 예, 그렇습니다!”
“그럼 왜 잘 못 지냈는지 자세히 알려주게.”
“가, 가, 각하!”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사내들을 본 진저가 눈꼬리를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따라와.”
진저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사내들을 끌고 갔다.
며칠 후, 기이한 소문이 돌았다. 세상에서 음주가무를 가장 사랑하는 사내들이 몰라보게 변했다고.
산과 들의 청량함과 꽃과 풀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자며 외치는 그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란 이름의 모임이었다.
* * *
아내의 일이 정리되자 이제 남편이 바빠졌다. 다음 날 바로 검술 시합 본선에 참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멋진 모습을 한껏 기대하고 있는 엘리사와는 달리 진저의 기사들과 가신들은 눈이 퀭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들은 세상의 멸망을 앞둔 사람 같았는데, 그들을 이상하게 여긴 엘리사에게 루펠라가 연유를 알려주었다.
“오빠 성질이 보통 성질이에요? 괜히 오빠한테 깝죽대다가 죽어버리면 다 저 사람들이 처리해야 하니까 걱정돼서 저래요.”
“왕궁 주최 시합이잖아요. 설마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나올 리…….”
“있어요. 다들 ‘이번엔 누가 병신이 될까, 누가 주제 파악 못 하고 목숨 버리러 나올까’ 그거 구경하러 모이는 거예요.”
엘리사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시합인 줄은 몰랐다. 한때 여흥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위험한 시합인 줄 알았다면 남편을 참가하지 못하도록 말렸을 것이다.
엘리사가 안절부절못하자 루펠라는 고개를 저었다.
“언니.”
“네?”
“언니가 걱정해야 하는 건 오빠가 아니에요.”
“그럼요?”
“상대방을 걱정해야죠. 괜히 까불다가 끽.”
루펠라가 목 아래로 선을 그었다. 엘리사는 그런 루펠라가 못마땅한지 입술을 내밀었다.
남편도 루펠라에게 무심하지만, 루펠라도 남편에게 너무 무심했다.
속으로 툴툴거리던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다칠지도 모르잖아요.”
“오빠가요? 말도 안 돼.”
“손가락이 베일 수도 있고! 그러면 뜨거운 물로 샤워할 때 굉장히 아릴 텐데…….”
“언니.”
“……미안해요.”
“신혼이니까 이해할게요. 1년 뒤에도 이러면 곤란해요.”
“네.”
훈훈한 마무리였다.
엘리사와 루펠라는 오전부터 시합장으로 출발했다. 시합 준비를 위해 먼저 시합장에 도착해 있던 진저가 아내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대회 시작 전부터 아내는 긴장이 역력했다. 그녀는 참가자들이 있는 울타리 안쪽으로 손을 뻗더니 남편의 몸에 상처가 있는지 살폈다.
“다치지 않았어요?”
“아직 몸도 안 풀었어.”
“조심해야 해요. 다쳐서 돌아오면 못 들어오게 할 거예요.”
“다친 사람을? 더 열심히 간호해 줘야지.”
엘리사는 애가 타 죽겠는데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농담만 했다.
엘리사가 진저의 손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그는 그런 아내가 귀여운지 울타리를 사이에 둔 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누군가에게 이처럼 걱정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누구도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웬 부부의 다복한 모습에 시합장이 짜게 식었다. 오빠 부부를 바라보고 있던 루펠라가 라골에게 물었다.
“언니가 재능이 있어.”
“…….”
“오기에 불타게 하는 재능.”
울타리 안에 있는 미혼 남성들, 기혼이지만 아내에게 냉수 한 잔 얻어먹지 못하고 온 남성들, 아내가 엘리사만큼 미인이지 않은 남성들까지 모두 이글이글한 시선으로 그웬 부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합 전에 엿이라도 먹으라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저 그웬의 아내가! 이 중에서 가장 안전할 사내의 아내가 울먹였다.
“여보, 다치지 말아요.”
“내 시합은 금세 끝날 거야.”
부부의 대화가 사내들 눈엔 이렇게 들렸다.
‘여봉, 다치지 말아용. 몰라 몰라, 여봉이 다치면 미워할 꼬양.’
‘나의 아기 고양이. 저놈들 다 내 밥이야, 하하.’
‘아잉.’
진저가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추고 등을 돌렸다. 아직 준비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함께 시합에 나갈 사내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하나같이 투지에 불탄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내가 객석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그가 조용히 읊조렸다.
“뭘 봐, 이 새끼들아.”
그러자 사내들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두 시간쯤 지나자 관중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궁 배 검술 시합은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까지 관람할 수 있어 엘리사는 순식간에 인파에 파묻혔다.
이도 저도 못하고 동동거리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누군가가 말을 붙였다.
“공작 부인!”
진저의 벗인 카발디였다. 일전에 발족식에서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중앙기사단 의복을 입고 있는 그는 뛰어난 풍채를 자랑했다.
엘리사보다 루펠라가 먼저 그에게 아는 척을 했다.
“바보 카발디잖아.”
“으하하, 싸가지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너 멍청한 것도 똑같고.”
카발디와 루펠라가 으르렁거리는 사이 중앙기사단의 의복을 알아본 사람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엘리사가 연유를 모르겠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왜 여기 계십니까?”
루펠라와 대거리를 마친 카발디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아, 각하께서 시합에 참가하셔서…….”
“아니요. 왜 평민석에 계시는지 여쭙는 겁니다.”
“네? 여기가 평민석이었나요?”
왕이 참석하는 자리엔 사병을 데리고 올 수 없으며,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
중앙기사단이 관람석이며 시합장을 지키고 있기에 위험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그래서 기사들은 시합장 앞까지만 그녀들을 배웅해 주었다.
루펠라야 제 오빠에게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니 이런 자리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함께 온 라골은 다른 일을 수행하는 중이었고, 엘리사는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평민석과 귀족석이 나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루펠라가 똥 씹은 표정으로 반대편 객석을 쳐다보았다. 일찍 도착한 건 그녀들이었는데 어느새 귀족석이 꽉 차 있었다. 이러다간 저 멀리서나 관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리사도 몹시 아쉬운 표정이었다. 남편의 시합이 기대되기도 했고, 혹시 그가 다칠까 봐 염려되기도 해서 꼭 앞줄에서 보고 싶었다.
“이리 오시죠. 제가 특등석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카발디의 말에 그웬의 두 여성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카발디가 그 특등석이라는 곳으로 데려가기 전까지는 기쁜 마음이었단 소리다.
시커먼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그곳은 심사위원석이었다. 중앙기사단의 심사위원석.
루펠라가 이건 무슨 짓이냐는 듯 카발디를 쳐다보았다. 카발디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제일 잘 보여!”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
“특등석인데? 그렇지, 자식들아!”
카발디의 물음에 중앙 기사단의 기사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군대는 똑같았다. 치마 걸친 사람이라면 호호할망구에게도 볼을 붉힌다. 그런데 젊은 여성, 그것도 미인 둘이 가운데 떡 앉아주시겠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란 말인가.
당황한 엘리사가 카발디를 좋게 달랬다.
“경의 상관도 오실 거고, 저희는 아무래도 다른…….”
“그건 걱정 마십쇼! 단장은 폐하의 곁을 지키실 겁니다!”
“다른…… 상관분도…….”
“그것도 걱정 마십쇼! 단장을 제외하면 제가 제일 셉니다!”
마치 네댓 살 어린애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엘리사가 그의 수준에 맞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려는데 카발디가 남들 모르게 눈치를 주었다.
‘아!’
남편의 부탁이 틀림없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가장 안전한 곳에 그녀를 자리하게 한 것이리라.
또 다른 장점도 있었다. 그녀가 앉은 곳은 시합장과 가장 가까운 자리었다. 남편에게 일어나는 일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길리안을 비롯한 남편의 지기들이 남편을 지켜준다고 하였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카트르 후작은 아직 그를 포기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루펠라와 함께 나선 것이었다.
엘리사가 자리에 착석했다. 새언니의 눈치를 보던 루펠라도 그녀의 곁에 앉았다.
“언니, 정말 괜찮아요? 여러 말이 나올 텐데요.”
“여기가 가장 안전해요.”
그제야 루펠라도 카발디가 그녀들을 찾은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들이 착석하고 삼십 분이 지나지 않아 가장 상석에 왕족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카발디는 그녀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엘리사가 넌지시 물었다.
“다른 일은 없으신가 보네요.”
“전 앉아서 명령만 내리죠. 대가리들 하는 일이 다 그렇습니다, 하하!”
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녀들을 지켜주겠다는 소리였다.
“계속 이곳에 계시면 시합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지 않나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한 번은 순찰을 돌아야 하거든요.”
‘카르트 후작이 루펠라를 불러내도록 틈을 내주겠다는 거구나.’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합보다 시합 중에 있을 일이 더 걱정되었다.
곧 기사단장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를 계기로 더욱 정진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중앙기사단의 의복을 입고 있는 자들이 무언가를 끌고 왔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기하스엘의 가죽입니다. 예로부터 기하스엘은 체력과 마력을 촉진시켜 준다 하여…….”
털도 비늘도 아닌 것 같은 기이한 모양의 가죽이었다. 죽고 나서도 번쩍이는 그것을 쳐다보던 엘리사가 휘청거렸다.
“언니!”
루펠라가 그녀를 얼른 부축했다.
“괜찮아요?”
“아…….”
“어디 안 좋아요?”
가죽을 보자마자 아찔하고, 심장이 쿵쿵거리며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 으으!”
“언니? 언니!”
엘리사가 신음하기 시작하자 카발디가 그녀를 살폈다.
“공작 부인, 괜찮으십니까?”
“언니! 정신 차려요!”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닥터! 닥터를 불러!”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카발디가 부하에게 서둘러 의원을 불러오라 명했을 때였다.
엘리사의 몸에서 번쩍, 하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언니!”
“공작 부인!”
“닥터, 여깁니다. 공작 부인이……!”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져 있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언니, 괜찮아요? 정신이 들어요?”
“공작 부인!”
눈을 뜬 그녀의 몸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좆 됐다, 시발.’
또다시 몸이 바뀌었다. 진저는 자신을 잡고 있는 카발디의 손을 쳐 냈다.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도 하고, 검술 시합에 기하스엘 가죽을 들고나온 기사단장이란 놈에게 빡치…… 화가 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걱정이었다.
‘엘리사는?’
몸이 바뀌기 전까지 뭘 하고 있었더라.
‘시발.’
엘리사의 몸, 아니, 진저가 이마를 짚은 채 이를 갈았다.
“언니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아내는 절대 괜찮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바뀌기 전에 그는 작년의 준우승자인 도축하는 놈에게 시비를 털고 있었다.
착하게 살면 복으로 돌아온다는 말 따위 믿지 않았다. 착하게 살아봐야 남는 건 알맹이 없는 칭찬뿐이라 생각했다.
평생을 그리 생각하던 진저는 지금 선조들의 혜안에 감탄했다.
이래서 착하게 살라고 했던 것이다. 길거리에서 칼을 맞아도 할 말 없는 짓만 하고 다녔더니 아내가 대신 칼을 맞게 생겼다.
머리를 쥐어뜯던 진저가 벌떡 일어났다.
“언니!”
“공작 부인!”
그의 앞을 루펠라와 카발디가 막아섰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어딜 가는 거예요. 일단 진찰부터 받아요.”
“예, 공작 부인. 일단 진찰부터…….”
한 손은 루펠라에게, 또 한 손은 카발디에게 잡혔다.
진저가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이거 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내는 자신의 몸으로 우락부락한 사내놈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터였다.
그냥 놀린 게 아니었단 말이다. 자르다 온 게 짐승 살점이 아니라 꽃이었냐는 둥, 생식기를 떼라는 둥 잔뜩 약을 올렸다.
결정적인 한 방은 눈감아줄 때 알아서 도망가라는 말이었다.
‘젠장할!’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진저 그웬도 한물갔다느니, 그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느니 하는 말들로 사람 신경을 깔짝깔짝 긁기에 자신도 그들의 신경을 긁어준 것이다.
약이 바짝 올라야 이 지겨운 시합이 좀 재밌어지지 않을까 하는 속셈도 있었다.
“이거 놓으라니까!”
아내의 몸은 약해도 너무 약했다. 카발디를 못 떼어내는 건 그렇다고 쳐도 루펠라까지 뿌리치지 못했다.
“어떡해! 너무 아파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봐! 뭐해! 당장 언니를 살펴!”
루펠라가 허겁지겁 달려온 의사를 향해 소리쳤다. 카발디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저를 살폈다.
진저가 악을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발작도 하잖아!”
카발디가 허둥지둥하는 닥터를 닦달했다.
“무슨 병인가?!”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계속 붙잡혀 있으려니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다. 화병 또는 지랄병이라 불리는 병이.
그 시각 엘리사 또한 큰 곤욕을 겪고 있었다. 남편의 몸으로 눈을 뜬 그녀는 무섭게 생긴 사내들에게 빙 둘러싸였다.
그녀는 사내들이 어째서 이렇게 흥분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사내들은 하나같이 전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다시 말해보라 윽박지르는 사내가 있는가 하면, 실력을 증명해 보라고 눈을 부릅뜨는 사내도 있었다.
‘남편이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흥분한 채로 그녀를 노려보는 사내들 사이에서 깡마른 소년이 튀어나왔다.
호기 넘치는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는 소년은 엘리사와 시선을 맞추었다.
“각하, 저도 트리거 공께 검술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사사롭게는 선후배가 되지요.”
“……?”
엘리사는 소년의 말뜻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소년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지 울컥 화가 치미는 표정이었다.
“스승님께서는 실력과 인품은 비례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만히 소년의 말을 듣던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음……. 본론만 말해주겠나?”
소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대답하지 않으면 터질 것 같아 나름대로 조심스레 물은 것이었다.
소년이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스승님의 말씀이 전부 옳은 건 아닌가 봅니다.”
‘다들 그이에게 화가 난 것 같은데…….’
“실력으로 도리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기면 대회에 참가한 모든 분께 일전의 발언을 사과하셔야 할 겁니다.”
무슨 소리인지 당최 알 수 없었다. 눈치로 봐선 남편이 무슨 말을 했고, 그 말로 인해 이들이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야 사과를 할 텐데…….’
고민하던 엘리사가 에둘러 그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심기를 가라앉히게. 그리 타오르면 보일 것도 안 보이지 않겠는가.”
문제는 빡이 칠 대로 친 상대에게 에둘러 하는 말은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녀의 말은 이렇게 들렸다.
‘화내면 어쩔 건데. 니들이 열 받아봐야 내 상대가 될 성싶냐.’
점잖은 체하고 있던 소년이 결국 펑 터져 버렸다.
“기필코 그 목에 내 검을 꽂을 테요.”
듣자 듣자 하니 정도를 몰랐다. 소년은 기껏해야 열다섯을 겨우 넘긴 것 같았다. 남편의 가슴에 겨우 닿을락 말락 하는 키와 가녀린 선의 얼굴이 추측을 뒷받침했다.
엘리사는 아이와 노인에게 약했다. 너무 심하게 도를 넘지 않으면 웬만한 일은 눈감아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남편을 걸고넘어지는 건 언짢았다. 무엇보다 목에 검을 꽂겠다는 건 죽이겠다는 말이지 않은가!
엘리사가 발을 쿵, 구르고 허리를 양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꽁, 하고 소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듣자 듣자 하니 말이 심하구나!”
소년은 얼이 빠져 붕어처럼 입만 뻐금거렸다.
“사람의 목숨을 앗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쓰지 않니!”
조금 전, 그러니까 진저의 몸에 본래 영혼이 들어 있을 적엔 ‘죽고 싶어서 용을 쓴다’, ‘그러다 죽으면 억울하진 않겠지’, ‘목을 부러뜨려주랴’ 등의 살벌한 말을 쏟아냈다.
그런 ‘사람이 말이 심하다’, ‘사람 목숨을 앗는다는 말이 너무 쉽다’ 하며 소년을 혼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년이 반항하려 폼을 잡자 엘리사가 ‘어허!’ 소리쳤다.
“반성해야지! 저 벽 보고 서 있거라!”
소년은 엘리사의 말이 사람을 놀리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소년은 겁이 너무 없어서 부모와 스승 모두의 걱정을 샀다. 그런데 이상하게 엘리사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기는 영혼에 축적된다고 여기지만 사실 신체에 더 많은 양이 축적된다.
진저가 평생 전장을 오가며 쌓은 살기는 그의 신체에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었다.
게다가 기하스엘로 인해 영혼이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이 상당히 증가한 상태였다.
혼의 강력한 마력과 신체에 축적된 기가 만나니 평소의 위압감보다 더한 것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기와 마력의 융합도 십 대 중반의 혈기를 쉬이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한참 씩씩거리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가, 가르치려 들지 마십시오. 시합장 안에서만큼은 신분을 잊어야 한다는 규칙이……!”
“떽!”
쿵!
엘리사가 떽 소리를 치자마자 대기실로 쓰이는 막사 안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엘리사를 노려보고 있던 소년도, 소년과 마찬가지로 씩씩거리던 사내들도 모두 말을 잃은 채 엘리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 * *
결국 진저는 중앙기사단의 기사들과 루펠라의 저지로 인해 아내를 찾아가지 못했다.
‘막사 쪽에 소란이 인 것 같았는데……. 닥터가 내게 붙어 있는 걸 보면 아무도 다치진 않은 것 같고…….’
자신에게, 아니,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바로 연락이 왔을 터였다.
하지만 시합을 목전에 두고도 아직도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우려하는 일을 벌어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뒤집어버려?’
이 자리를 홀라당 뒤집어버리면 시합을 지체시키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사고를 치면 뒷수습은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된다.
‘이도 저도 못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
진저가 이를 악물었다.
다행인 건 1차전 상대가 마음 약한 소년이라는 것이었다.
‘일부러 치명상을 내진 않을 테니, 적당히 쓰러지는 체 백기를 들면 되겠지.’
소년은 14세 나이로 검술 천재 소리를 들었다. 집안은 한미하지만 그의 의기와 실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트리거 공작의 눈에 들었다.
얼마나 예뻐했는지 트리거 공작이 진저에게 실수하기 전까지는 농담 반 진단 반으로 소년을 후배라 부르라 할 정도였다.
그때, 북과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1차전을 알리는 소리였다.
“호명하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 진저 그웬, 크리스 빌헬름!”
‘벌써?!’
본래대로라면 자신보다 먼저 시합을 치를 이들이 있었다.
대진표를 보고 있던 루펠라도 의아한지 곁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왜 오라버니가 벌써 나왔지?”
“대기 중에 무슨 일이 있었나 봅니다. 몇몇 참가자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뭐야, 사내놈들이 호기도 없고.”
루펠라가 흥, 콧방귀를 뀌고 시합 관람용으로 가져온 오페라 쌍안경을 집었다.
“악! 언니, 뭐예요!”
루펠라가 오페라 쌍안경을 집기 무섭게 진저가 그것을 빼앗았다. 여동생의 비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막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니 아내가 더 걱정될 뿐.
쌍안경으로 본 아내, 그러니까 제 몸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생채기 하나 없어 보여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이상한 건 소년 쪽이었다. 심판이 시합 개시를 외치기 무섭게 아내에게서 떨어지더니 검을 꾹 말아 쥐었다.
저렇게 힘을 주어 검 자루를 쥐는 자는 초보 아니면 겁을 집어먹은 반편이뿐이었다.
자신의 악명에 겁을 먹었다고 하기엔 대기실에서 보았을 때는 멀쩡했었다. 멀쩡하다 뿐인가, 주제도 모르고 그를 견제하기도 했다.
‘뭐야, 저건.’
아내도 소년처럼 검 자루를 손이 하얗게 변하도록 꾹 말아 쥐었다. 그런데 손 주변에서 푸른 연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검기! 검기다!”
관중 중 하나가 소리치자 객석에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뭣 모르는 놈이 검을 엄청나게 잘 다룬다는 진저 그웬의 손에서 무언가 이상한 게 있으니 대뜸 검기라고 소리친 것이다.
저건 검기가 아니었다. 검에 대해 잘 아는 중앙기사단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뭡니까?”
검술에 박식한 자들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 기사들까지 ‘검기 아니야?’, ‘검기네 검기’, ‘검기가 실제로 존재하는 겁니까?’, ‘마력과 기의 충돌을 검기라고 부른다며?’, ‘이론은 그렇죠’라고 쑥덕거렸다.
카발디가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올렸다.
병신 짓만 하고 다녀서 병신 대장이라 불렸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저 푸른 연기의 정체를 아는지도 모른다.
기사들이 잔뜩 긴장하여 카발디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카발디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기에 10골드.”
‘시발.’
‘저걸 대장이라고…….’
‘쪽팔려.’
기사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였다. 소년이 순식간에 엘리사와의 거리를 좁혔다. 검 끝을 그녀의 복부에 겨눈 채로.
뻑!
그리고 날아갔다.
누가? 소년이.
어디로? 엘리사의 맞은편, 그러니까 그가 달려온 반대 방향으로.
진저는 이것으로 눈치를 챘다. 기하스엘 가죽이 아내의 마력을 괴이할 정도로 끌어올렸다. 그래서 원래도 컨트롤하지 못했던 마력이 지금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아내의 몸을 지키려.
진저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빌헬름 자작의 장남은 개쪽도 저런 개쪽이 없었다. 일반인의 눈엔 뛰다가 자빠져서 뒤로 뒹군 것으로 보였을 터였다.
침묵의 몇 초가 지나자 곧이어 함성이 터져 나왔다. 놀란 건 좌중만이 아니었다. 소년을 날려 버린 엘리사조차 넋을 놓고 있었다.
소년은 날아간 것뿐만 아니라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검을 든 채 우물쭈물하던 엘리사는 일단 소년을 일으키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호의는 상황에 따라 악의보다 더한 것으로 변질된다. 지금이 꼭 그런 상황이었다.
하나, 엘리사는 소년을 날려 버린 사람이었다.
둘, 소년에게 다시 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그녀는 검 손잡이를 꽉 그러쥐고 있었다.
셋, 소년은 어렸다.
넷, 그 말은 겁을 먹기 충분한 상황이란 것이다.
네 가지 악조건이 겹쳐졌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 누가 봐도 어린싹을 짓밟아 버리려는 악인으로 비쳤다.
엘리사와 소년의 거리가 성인 걸음으로 채 세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낯빛이 시퍼렇게 변한 소년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다친 곳은 없나?”
소년이 염려되었던 엘리사의 물음은 사람들과 소년에겐 ‘다친 곳이 없으면 다치게 해주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피가 나는데…….”
‘피만 나고 죽지는 않았다는 건가! 악마!’
“어디 괜찮은지 보자.”
‘안 괜찮도록 만들어주겠다는 게로군! 저 짐승보다 못한 놈!’
“이런, 무릎에서도 피가 나는구나. 상처 자국이 남으면 안 되는데…….”
‘상처 자국 같은 게 남지 않도록 지금 죽이겠다는 거야?! 저 천벌받을 놈!’
분명 공격을 한 쪽은 소년이고, 엘리사는 검을 잡은 채 서 있던 것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루펠라까지 제 옆에 오빠라면 껌뻑 죽는 새언니가 있다는 것을 잊은 채 혀를 찼다.
“미친 새끼.”
욕이 입 밖으로 나온 후에야 그녀의 바로 옆에 새언니, 그러니까 새언니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루펠라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네요, 저 남자애.”
기인지 마력인지 모를 것을 얻어맞고 날아간 소년은 애꿎은 욕까지 먹어야 했다.
진저는 루펠라의 욕에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개의치 않은 게 아니라 아예 그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내내 아내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내는 못 하는 게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몸에 사실 내 아내가 들어 있는데 머리와 손끝만 야무진 게 아니라 아예 못하는 게 없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결국 소년 쪽에서 백기를 들었다. 그웬 공작을 공격하려고만 하면 이상한 것에 부딪혀 저 멀리 처박혔다.
그웬 공작은 자신을 온 사방에 처박아놓고도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공격은 안 하고 주위만 기웃거렸다.
가장 화가 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한 가문의 가주이기 전에 기사이고, 기사란 무릇 검을 드는 신사를 뜻한다.
하지만 이 시합에서 그웬 공작은 전혀 신사가 아니었다. 신사는커녕 양아치보다 못한 사내였다.
죽일 거면 한 번에 죽이지 관중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패배를 선언한 소년은 시합장에서 내려오자마자 도망치듯 뛰었다. 그리고 울었다.
“흐윽, 개새끼.”
소년과의 시합으로 엘리사는 준결승까지 부전승으로 오르게 되었다. 다른 참가자들이 소년 같은 개망신을 당할까 봐 지레 겁을 먹어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기실로 쓰이는 막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심심하네.”
그녀의 곁으로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가 숨만 크게 쉬어도 다른 대기자들이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흐르자 휴식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다.
대기실에 있던 사내들이 행여 엘리사와 휴식을 함께하게 될까 봐 쏜살같이 도망쳤다.
“아……!”
엘리사는 아쉬운 표정으로 사내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검술 시합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정보를 교환하려고 했다.
1차전은 운 좋게 이겼고, 다음 시합은 더 운 좋게 상대방이 도망쳐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시합에서 어떤 일을 하면 안 되고, 또 시합하게 될 자가 어떤 사람일지 알고 싶었다.
싸우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기왕 싸울 거라면 이기고 싶었다. 남편의 몸이니까.
엘리사가 시합에 대해 알려줄 사람을 찾아 막사를 벗어나려던 때였다.
어떤 것이 등 뒤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그것을 꽉 잡았다.
“악!”
“여보?”
남편뿐만 아니라 라골 또한 막사를 찾았다.
시합 내내 외면받아서 그런지 아는 사람, 그것도 남편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제 몸을 보니 몹시 반가웠다.
“어떻게 왔어요? 대기실은 출전자 외엔 출입금지라던데요!”
진저가 라골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짓을 받은 라골이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짤랑짤랑.
돈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뇌물을 먹였지.”
“그랬군요!”
라골은 아내에게 뇌물을 먹였다는 소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는 진저를 탓해야 할지,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엘리사를 탓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어찌 되었든 부부가 쌍으로 만만치 않았다.
“잘하더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아이가 뛰어오더니 혼자 넘어지고 그래서…….”
진저와 라골이 시선을 교환했다.
엘리사는 아직 제 몸에 일반 마법사 댓 명도 뛰어넘을 마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녀의 마력은 기하스엘의 피와 가죽으로 고조되는 모양이었다.
아내가 알게 되면 쓸데없는 걱정을 할 것 같아 말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기하스엘은 개체가 늘어나 민가를 습격하게 된 후로 신전에서 특별히 감시하는 중이었다.
“길게 말할 시간은 없어. 후에 무슨 일인지 알려줄게. 그보다 몸은 어때?”
“괜찮아요.”
괜찮기만 한 게 아니었다. 외려 평소보다 기분이 배는 좋았다.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한데, 정신은 혼미하지 않았다.
엘리사의 생각이 맞았다. 고조된 마력이 그녀를 흥분 상태로 몰고 갔다.
“아무래도 리한 님께 알리고 정보를 공유하는 게 좋겠습니다.”
리한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내의 안위가 걸린 상황에서 가릴 게 있을 리 없었다.
진저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을 함께하지.”
“그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만.”
“왜지?”
라골이 진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님께서 준결승에서 이기신다면 무조건 우승하실 겁니다.”
“상대가 누구길래.”
“몬타나 백작의 영식이…….”
“그자는 대체 얼마나 처먹였기에 결승까지 올라가는 거지?”
라골이 손가락 열 개를 다 펴 보이자 진저가 인상을 구겼다.
“더럽게 많이 썼군.”
“기사단장의 딸이 이번에 결혼을 한답니다.”
“예물을 보낼 돈이 부족했나 보지? 그 노랭이라면 모아둔 게 꽤 있을 거 아냐.”
“딸의 결혼 상대가 켄터키 후작가의 맏이랍니다.”
켄터키 후작도 중앙기사단장 못지않게 돈 밝히는 늙은이였다. 두 돈벌레의 자식들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대단한 손주가 나올 것이다.
진저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진저의 몸을 한 아내가 승리한다면 왕의 만찬에 초대될 터였다.
진저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가 자신의 몸으로 그 여우 같은 노인을 버텨낼지 모르겠다.
그보다 준결승이 걱정이었다. 마력에 보호받는 지금이라면 승산이 차고 넘치지만 갑자기 안정되면 큰일이었다.
제 몸이라면 칼 한두 대쯤은 버텨낼 테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자상의 고통에 힘겨울 걸 생각하니 창자가 꼬일 것 같았다.
준결승까지 올라갔으니 시합 전에 백기를 드는 건 무리였다. 대충 1차전만 때우고 돌아가는 게 좋았는데 그 하룻강아지 놈이 이리저리 처박히는 통에 승리하고 말았다.
진저가 걱정스러운 듯 아내를 쳐다보았다.
“위험하면 바로…….”
“걱정 마세요. 무리하지 않을게요.”
“그 말이 더 걱정된다고.”
진저는 남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녀에게 한 문장을 세뇌했다.
위험하면 장외.
위험하면 장외.
위험하면 장외.
칼 맞을 것 같으면 바로 장외로 뛰쳐나가라는 말이었다.
그가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아내를 세뇌하고 있어서 라골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위험하다고 장외로 뛰쳐나가는 것만큼 개쪽은 없었다.
그게 소문이 나면 가문의 위상은 물론이고 그웬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이다.
만약의 사태, 수습에 들어갈 금액은 몬타나 백작이 중앙기사단장에게 먹인 뇌물보다 더 큰돈일 게 분명했다.
진저와 라골이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흘렀다. 준결승을 알리는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사와 함께 시합장에 나선 이를 본 진저가 꽥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
등치는 산만한 산적 같은 놈이 엘리사, 그러니까 진저의 육체 앞에서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아잉! 보고 싶었어요, 각하!”
양손에 사람 몸뚱이만 한 도끼를 든 남자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모른다. 저 멀리 객석까지 다 들릴 만큼 우렁찬 소리였다.
진저가 라골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죽였다.
“저 새끼 살아 있었어? 어떻게 저게 준결승에 올라온 거야!”
아내의 시합 상대를 예측하기 위해 눈이 빠져라 시합을 보았다. 하지만 저놈은 보지 못했다.
라골이 당황한 듯 서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노꼬르멘도카타르모? 이 자식이구나!’
대륙 공용어로 이름 철자를 재조합하면 ‘공작님 사랑해요’가 된다.
그러고 보니 시합 중에 계속 로브를 안 벗는다 싶었다.
카발디가 얼빠진 목소리로 라골에게 물었다.
“저놈, 그때 진저가 벤 놈 아니냐? 왜 우리 열여섯이었나, 열다섯이었나 한참 사고치고 다닐 때 말이야.”
뒷골목에서 유명한 건달이었다.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빼앗으며 살았는데 진저에게 까불다 큰코다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진저를 어찌나 쫓아다녔는지 모른다. 걸핏하면 상의를 찢으면서.
‘아이이이잉! 자기만 보면 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맹세할 수 있었다. 그건 진저를 봐서가 아니라 더럽게 많이 처먹어서 살이 찐 탓에 옷이 터질 것 같은 것이었다.
참다못한 진저가 그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그 뒤로는 더 때려달라고 쫓아다녔는데 결국 그의 검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린 채 자빠졌다.
그걸 수습한 건 라골이었다.
라골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시합장과 진저(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를 번갈아 보았다.
온몸의 힘줄이 다 끊어져서 숨만 쉬고 있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저 멀리 타국에 보내버렸다.
그런데 십 년도 넘어, 그것도 이 상황에 나타날 줄이야.
“분명 힘줄이 다 끊어졌습니다. 치명상을 입고 겨우 살아난 거라 평생 걸을 수 없을 거라고…….”
“누가!”
뒷골목 의사가.
‘헉!’
라골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의사가 저놈의 부하였던 건가. 제 두목을 살리려 연극을 했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실수는 라골 인생에 몇 없는 일이었다.
카발디가 또다시 중얼거렸다.
“시합에서 이기면 폐하께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나.”
라골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십 년 전에도 진저에게 미친놈이었다. 그가 무슨 소원을 빌겠는가.
‘시발…….’
답은 딱 둘이었다.
저놈이 죽든가, 라골이 죽든가.
‘그이와 아는 사이인가?’
친근하게 구는 것으로 보아 몹시 막역한 사이인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내의 눈빛에서 호감 혹은 집착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엘리사는 입술을 콱 깨물고 중앙기사단석에서 보이는 남편, 그러니까 자신의 몸을 노려보았다.
여성에겐 인기가 없어서 안심했는데 남성에게 인기가 있었다.
디자이너 고든도 그렇고, 지금 이 사내도 그렇고.
기사단석에서는 얼굴까지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그래도 시선이 마주치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진저는 어쩐지 온몸의 피가 발밑으로 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 일을 라골의 탓으로 돌리기로 하였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힘줄을 다 잘라놓은 놈을 살려 보낸 건 그의 탓이었다.
처음엔 크게 당황하던 라골이 입을 딱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저 성질머리에 어떻게든 실수를 보상받으려 할 것이다. 뭐로? 자신을 곤죽으로 만들어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거 시합이라도 다 보고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시합 개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다. 쌍도끼를 꽉 움켜진 사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각하는 모르시겠죵.”
“…….”
“십여 년간 각하를 다시 뵐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요. 각하의 너른 가슴에 안기고파서!”
처음엔 웃고 있던 관중들이 슬슬 사내의 목숨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안겨?!’
화가 나자 엘리사의, 아니, 진저의 몸에서 검붉은 연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기는 곧 폭풍처럼 휘몰아치더니 회오리가 되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완벽해!”
사내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깜짝 놀란 엘리사가 검 자루를 꾹 말아 쥐었다. 연기 같은 것은 시전자의 감정에 동화되었다. 깜짝 놀라니 불똥으로 변해 사내를 공격했다.
“아아! 각하! 흥분되어요!”
‘변태인가?’
변태가 맞았다. 그는 불똥도 두려워하지 않고 엘리사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소년을 상대할 땐 이렇게까지 두렵지 않았다. 덩치도 덩치지만 미친 자였다.
“마력도 훌륭하네요. 하지만 제가 보고 싶은 건 십 년 전처럼 화려한 검술이에요. 아아, 각하! 제게 보여주세요!”
사내와의 거리가 다섯 걸음 채 남지 않았다. 엘리사가 사내와 객석에 있는 남편을 번갈아 보았다.
진저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저 씨……!”
“우웩! 콜록콜록!”
본래 진저의 몸이라면 몰라도 마님의 입으로 욕을 하는 걸 보일 순 없었다. 라골이 피를 토할 것처럼 기침하여 가까스로 그의 쌍욕을 묻어버렸다.
“뭐야, 이제 봄인데 감기라도 걸렸어?”
루펠라의 말에 라골이 새파래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으로 낯빛이 변한 것이지만 다른 이의 눈에는 건강이 심하게 좋지 않아 보였다.
“당장 시합을 중지시켜!”
진저가 외쳤다.
“너무 걱정 말아요. 저놈도 꽤 미친 것 같지만, 오빠 별명도 미친개라고요. 미친 것들끼리 붙었으니 볼만할 거예요.”
루펠라는 안심하라는 듯 진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미친개가 영혼이 바뀌어서 제 옆에 있다는 건 까맣게 모르는 채로.
카발디가 껄껄 웃으며 루펠라의 말에 동의했다.
“저놈은 저도 압니다. 십 년 전에도 진저를 쫓아다니던 놈인데 그때도 힘줄을 죄 끊어놨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 부인.”
‘그러니까 그 공작 부인이 지금 저 미친놈 앞에서 달달 떨고 있다고!’
진저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복장만 터질 것 같은 게 아니라 걱정과 미안함으로 온몸이 펑 터져 가루가 될지도 몰랐다.
“당장, 당장 중지시켜!”
라고 소리친 진저가 곁에서 열심히 고개를 젓고 있는 라골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
“……주세요.”
“대회 규칙상 안 될 것 같은데요. 이봐, 지금 시합을 중지시킬 수 있나?”
카발디에게 질문을 받은 기사가 규칙이 적혀 있는 수첩을 뒤적거렸다.
“준결승부터는 한쪽이 쓰러져서 경기가 불가능해지지 않으면 외부에서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답니다. 공작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녀석이 성격은 저래도 실력 하나는 끝내주거든요.”
카발디는 속도 모르고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사와 진저, 그리고 라골이 당황하고 있는 그때 시합에 집중하고 있는 지체 높은 귀족이 있었다.
카르트 후작이 주먹을 움켜쥔 채 진저, 그러니까 엘리사의 영혼이 들어간 진저의 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쌍도끼의 사내는 카르트 후작이 고용한 이였다. 용병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일을 하는 놈이었다. 은밀하게 활동하는 저놈을 불러들이기 위해 얼마를 썼는지 모른다.
얼마를 써도 좋았다. 죽은 누이의 묘에 저 사생아의 수급을 바칠 수 있다면 그깟 돈이 문제랴.
‘마음껏 날뛰어라. 저놈의 피 한 방울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네놈에게 들인 돈은 건 전혀 아깝지 않으니!’
먼 타국에서 마법사까지 섭외를 마쳤다. 루펠라가 저놈을 시합장에서 빼내면, 그때 저 녀석의 피로 저주를 완성하면 된다. 그리하면 남들 눈을 피해 몸을 옮길 수 있었다.
온몸은 물론이고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정신만 들어 있을 것이다. 그 몸으로 평생 누이의 묘를 지키게 하리라.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고, 죽음을 구걸하도록!
쌍도끼의 사내라면 진저 그웬을 죽일 순 없어도 도끼에 피를 묻히는 것만은 할 수 있을 터였다.
누이가 죽은 후로 이처럼 즐거웠던 적이 있던가. 이날을 위해 질긴 목숨을 이어왔다. 후작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시합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쌍도끼의 사내가 진저 그웬에게 접근하기는커녕 주위만 빙빙 돌고 있었다.
‘저놈은 대체 뭐 하는 거야!’
쌍도끼의 사내가 일부러 접근을 피하는 건 아니었다. 도무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아잉! 어서 피를 묻혀야 저주를 걸 수 있는데! 그래야 몸이 움직이지 않는 저 사람에게 이렇고 저런 짓을……!’
엘리사는 점점 더 화가 났다. 사내의 눈이 욕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지금이라도 남편의 품에 뛰어들 것처럼.
‘유부남이라고!’
기혼인지 미혼인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
“각하, 사랑해요!”
쌍도끼의 사내가 이를 악물고 엘리사를 감싸고 있는 기의 벽에 뛰어들었다.
펑!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기의 벽과 사내의 몸이 충동하자마자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사내가 피를 철철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놀란 엘리사가 사내에게 다가가려다 걸음을 멈추었다.
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엘리사가 한 일이라곤 속으로 화를 낸 것밖에 없는데 관중의 눈엔 마력으로 사내를 완전히 찍어 누른 것처럼 보였다.
그뿐인가. 다가가려다 걸음을 멈춘 것까지 멋졌다. 마치 너 따위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하니 아량을 베풀어주겠다는 것으로 보였기에.
“우와아아!”
마법사를 꿈꾸는 이들, 기사를 꿈꾸는 이들, 평범한 삶을 꿈꾸는 이들까지 사내라면 모두 함성을 내질렀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시합 내용은 전혀 훌륭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궁 배 검술 시합이란 강자가 최고의 볼거리인 바, 사내들이 크게 흥분해 그웬의 이름을 외쳤다.
“그웬! 그웬!”
“그웬!”
“그웬!”
아내를 걱정하던 진저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병사들을 제외하곤 어떤 이들도 그웬의 이름을 연창한 적이 없었다.
남편은 세상에 다시없을 악당, 아내는 모든 사내를 흥분시키는 영웅이라.
그웬의 이름을 연창하는 자들이 진실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카발디며 중앙기사들까지 흥분한 표정이었다. 몇몇은 왕의 사람이라는 신분도 잊은 채 그웬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쌍도끼의 사내는 걷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었다. 피 한 방울이면 저 아름다운 사내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었다. 십여 년간 오직 이날을 위해 수련에 매진하지 않았는가!
피가 안 된다면 닿기라도! 손가락 하나라도!
하지만 사내의 노력은 부질없었다. 손가락 한 마디도 진저의 몸에 닿지 못했다.
사내가 기어오는 것을 보던 엘리사가 검 등으로 그의 머리를 콩콩 내려쳤기 때문에.
말이 콩콩이지 검에 마력이 들어가니 뻑! 메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엘리사가 얼른 검을 등 뒤로 숨겼다.
그렇게 준결승은 허무하게 끝났다. 숨겨놓은 재산의 반을 날린 카르트 후작의 계획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 * *
신은 불공평했다. 유구한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돈과 명예가 있는 놈 중에 천재가 나와 나라를 건국했고, 폭군은 명이 길었다.
후작은 노력했다. 태어나 이렇게까지 노력한 적이 없었다. 그 노력이 향한 방향이 누군가를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서라는 건 우스웠지만.
그런데도 그는 진저의 털끝 하나 어찌하질 못했다.
후작은 분개했다. 피를 토하고 가슴을 쥐어뜯었다.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갈 곳 없는 분노를 진저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살 수 없었으므로 그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이제 너를 보내야 하는 게냐.’
여동생에게 묻고 싶었다. 복수를 포기하면 누이는 잊힐 것이다. 아무도 그 불쌍한 아이를 기억하지 못할 터인데, 이 헛된 복수를 멈춰야 하는 건가.
객석에서 나와 멍하니 거닐던 그가 재킷 안을 매만졌다. 그 안에 든 것은 단도였다.
노쇠한 몸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산 사내조차 이기지 못한 그를 죽일 수 있을까? 단언하건대 절대 불가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멈출 순 없었다. 어차피 복수를 끝내야 한다면 누이를 호색한에게 시집보낸 손, 바로 제 손으로 끝내야 했다.
그는 대기 막사를 경비하는 자에게 돈을 쥐여 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킷 소매 속으로 숨긴 칼, 그 자루를 꼭 쥔 채로.
엘리사는 대기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쪽지를 전했다. 쪽지엔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결승 상대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가 적혀 있었다.
결승 상대는 어차피 보여주기 식으로 나온 헐랭이니 마음 놓고 있으라 하였다. 아마 그녀가 한 발자국만 떼도 혼절할 거라고.
‘결승은 한 시간 뒤라는데…….’
준결승을 할 때까지도 계속 기다리고만 있었다.
‘잠깐 산책이나 하고 올까?’
십 분 정도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봄이 완연하여 온 천지가 꽃밭이었다. 막사 주변에도 소담스러운 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잠깐이니 괜찮겠지?’
그녀는 막사를 나섰다. 막사 뒤쪽으로 꽃길이 나 있었는데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스르륵 입매가 허물어졌다.
한참 꽃길은 걷는데 저 멀리서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내는 낯빛이 좋지 못했다. 엘리사가 얼른 뛰어가 그를 부축했다.
사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밀쳤다.
중년, 아니, 이제 막 노년으로 보이는 사내가 어찌나 힘이 좋은지 진저의 몸을 한 채로도 비틀거릴 정도였다.
“괜찮으십니까?”
“……나를, 나를 놀리는 게냐.”
“예?”
‘남편과 아는 사이인가?’
그러고 보니 어딘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다가다 본 것 같기도 했다.
이상했다.
자신을 놀린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순수한 눈빛이었다.
무슨 수작일까. 후작은 소매 속에 숨겨놓은 칼을 꽉 그러쥐었다.
진저가 아내와 영혼이 바뀌었다는 것을 모르는 후작으로서는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물론 조심스러운 건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진저와 아는 사이인 것 같은 노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길을 잃은 게냐.」
「아닙니다.」
「하면 왜 그리 어두운 곳만 다니고 있어?」
「……후작께서 오셨으니까요.」
「녀석, 내가 왔으면 얼굴을 보여줘야지 숨어다니기만 하면 어째.」
「저를 싫어하잖아요.」
처음부터 이기적이고 막돼먹은 인사는 아니었다. 세상에 지치기 전까진 제법 눈치를 보던 아이였다. 가끔 그웬저를 찾을 때면 눈치껏 사라졌다.
그날도 자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해 있으려 한 것 같았다.
진저는 어릴 때부터 평범한 아이와는 달랐다. 또래보다 일찍 말을 배우고, 그 또래에는 상상할 수 없는 날을 보냈다.
아이가 안쓰럽던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피해 달아나려는 아이와 함께 산책을 했다.
어른도, 아이도 말 한마디 없었다. 그저 멍하니 풍경을 감상하거나 하늘을 보았다.
분명 그런 날이 있을진대 왜 이리 변한 것일까.
‘네가 변한 것인가, 내가 변한 것인가.’
답은 알고 있었다. 모두 변했다. 그렇다면 어른과 아이를 변하게 한 이는 누구인가. 잘못은 대체 누구에게 있으며, 이 공허한 마음은 누구에게 채워야 하는가.
엘리사는 갈수록 안색이 나빠지는 노인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남편과 아는 사이라면 조심해야 했지만 몸이 안 좋은 노인을 외면할 순 없었다.
“……잠시만 계십시오.”
결국 결정을 내린 엘리사가 서둘러 막사 쪽으로 뛰어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후작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후작은 당혹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째서 다시 돌아온 것일까. 그것도 물주머니를 든 채로.
물주머니를 건네는 그웬 공작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경계 같은 것은 처음부터 생각지도 않았다는 듯 너무나 허술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카르트 후작이 소매를 매만졌다.
“너는 나와 같은 반편이가 아니란 게냐.”
“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인가. 자신이 그웬가를 적대시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자신을 용서하기로 했던 것일까.
그래서 후작 자신이 만든 수많은 치부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것일까.
후작이 고개를 돌렸다.
‘그늘 밖은 언제나 이처럼 아름다웠던가.’
카르트 후작이 손을 내밀어 물주머니를 받았다. 주머니 끝을 막고 있는 뚜껑을 비틀었다. 그러자 물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닫혀 있는 것을 열기란 이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노인은 물주머니를 받고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민망함에 엘리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들…… 꽃이 참 아름답지요? 그웬저에도 유채 꽃밭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물주머니를 매만지던 노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유채꽃은 저 먼 타국의 들꽃이었는데 선대 공작 부인이 그 소박한 아름다움에 빠져 종자를 사들였다고 했다.
선대 공작 부인이 관리하던 꽃밭은 현재 엘리사가 관리하고 있었다.
겨울엔 몰랐는데 봄이 오자 들꽃의 밭이라곤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뽐냈다.
후작에겐 그녀의 말이 달리 들렸다.
아직 그웬저엔 누이의 손길이 배어있다고. 그가 복수를 포기해도 누이는 잊히지 않을 거라고.
후작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왜 하필 지금인가. 왜 하필 지금 그간 꽁꽁 얼어 있던 마음이 녹는 것 같은 것인가.
어쩌면 그는 진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저의 목숨을 노릴 정도로 깊이, 절절하게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누이의 20년은 헛되지 않았단 것을.
후작의 마른 얼굴이 젖어 들었다.
* * *
결승은 남편의 말대로 허무하게 끝났다. 몬타나 백작의 영식은 엘리사가 검을 잡자마자 겁을 집어먹었다. 겁을 먹은 사람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다.
도망치거나 달려들거나.
몬타나 경은 후자를 택했다. ‘야앗!’ 소리를 내며 달려들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더니 쌍코피를 흘렸다.
부친인 백작은 아들을 크게 혼냈다. 돈을 얼마나 썼는데 그런 개쪽을 당하게 했냐며 예순이 다 되어 얻은 애면글면 외아들을 쥐어 팼다.
시합 내용은 형편없었으나 관중들은 크게 흥분했다. 절대적인 강자는 어디에서나 환영받는다. 엘리사의 경우가 딱 그랬다.
결승이 끝나고 땅거미가 질 무렵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입상자부터 호명이 되어 엘리사는 가장 마지막에 단상에 올랐다.
그녀가 단상에서 트로피를 건네받자마자 큰 환호성이 들렸다. 휘파람을 부는 자들도 있었다.
단상에서 내려온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걱정한 것만큼 큰 난리는 없었다.
남편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객석에서 그녀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남편, 아니,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휙휙, 휘파람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진저의 곁에서 실실거리고 있던 카발디가 몸을 틀어 엘리사가 지나갈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엘리사는 자신이 얼마나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미혼, 기혼의 여성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만을 인지하고 있었다.
진저는 제게 다가온 아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생했어.”
엘리사는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분명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혼이 바뀌었다는 것만으로 세상 어떤 것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당신에게 프러포즈를 해주려고.」
‘아.’
트로피를 들고 있으니 일전에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편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진저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엘리사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을 만나고 보호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어요.”
“뭐하…….”
그녀는 외로웠다. 외로움에 지쳐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를 택했다.
인형이 되어 살아남자고. 사는 것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자고 생각했다.
그런 삶 속에서 남편을 만났다.
“답답했을 거예요.”
“…….”
“언제나 입을 닫고 있는 저로 인해 힘들 때도 있었을 거고요.”
그를 만나고 사랑받는 기쁨을, 또 사랑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그녀가 생각하는 최고의 고백을 받았다.
그러니 이젠 그녀가 남편에게 고백할 차례였다.
“저는 당신을 사랑한 후로 시와 노래에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
진저의 눈이 일렁거렸다.
여성에게서, 그것도 이미 결혼한 아내로부터 받는 고백이었다. 어떤 희극보다 우스운 이 광경이 왜인지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나를 잃지 않도록 지켜줬어요.”
“…….”
“이제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그는 얼마나 무지했던가. 화려한 자리에서, 화려한 물건을 선사하는 고백만이 최고라 여겼다. 그런 고백이야말로 뭇 사람의 부러움을 사게 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어떤 장소, 어떤 물건도 진심을 이길 순 없었다.
엘리사가 남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평생 당신 품 안에서 살게 해주세요.”
“…….”
“사랑해요, 여보.”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남편을 끌어안았다.
미쳤던 게 분명하다. 몸이 바뀌고 난 뒤로 이상하게 흥분되더니 해가 질 무렵에 최고점을 찍었다.
그래서 그런 미친 짓을 한 게 분명하다.
진저, 라골과 함께 마차를 타고 있던 엘리사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미쳤어…….”
시합장을 나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란 말인가. 남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을 속삭였다.
그것도 그런 간지러운 말을 하며!
부끄러움에 훌쩍거리는 엘리사의 머리 위로 본래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 들지?”
“…….”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날 지켜줄 수 있겠어?”
“놀리지 말아요!”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어 남편을 흘겼다.
남편은 그녀의 고백을 받은 뒤로 기분이 하늘을 찔렀다. 분위기에 취한 그녀가 반지 대신 건넨 트로피를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짐칸에 트로피를 넣겠다고 하는 하인의 말도 귓등으로 들었다.
“그래서 날 어떻게 지켜줄 거지?”
“…….”
“적들을 날려 버릴 건가? 빌헬름 자작의 아들에게 했듯이?”
“……조용히 가요.”
엘리사가 창밖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일을 벌인 건 그녀 자신이니 남편을 탓할 수도 없었다.
“어떤 사랑 시가 가장 좋았지?”
“…….”
“시구와 가사를 이해했다며. 나도 같이 이해하자고.”
결국 참다못한 엘리사가 트로피를 빼앗았다. 남편의 몸은 본래 자신의 몸보다 힘이 좋아서 손쉽게 트로피를 빼앗을 수 있었다.
문제는 트로피뿐만이 아니라 남편까지 딸려 왔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엘리사가 품에 남편을 안은 채 눈을 끔뻑거렸다.
“부인은 식사보다 내 입술이 고픈 모양이오?”
“그, 그런 게 아니라…….”
부부만 있는 게 아니라 맞은편에 라골이 있었다. 엘리사가 남편의 어깨를 얼른 밀어냈다.
“자꾸 놀리시면 갈 거예요.”
“어디로?”
순식간이었다. 자신의 몸 어디에 이런 힘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놀라운 힘이었다. 남편이 그녀의 손목을 끌어 제 품에 이끌었다.
“내 품으로?”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 마세요!”
“평생 내 품에서 눈을 뜨고 싶다지 않았소.”
“그, 그건…….”
“거짓이었나?”
“거짓은 아니지만…….”
남편의 지기이자 자신의 스승 격인 라골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곳에선 그의 품이 그립지 않았다.
진저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평생 보아온 제 얼굴이 이렇게 사랑스럽게 보일 줄은 몰랐다.
“내가 잘생기긴 했군.”
“……정말!”
할 수만 있다면 마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부부가 마차 안에서 알콩달콩 서로의 품에 안고, 안기는 사이 마차는 내궁에 들어섰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엘리사는 탈출구라도 찾은 듯 재빨리 문을 나섰다. 진저도 아내를 따라 땅에 발을 디뎠다.
내궁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초대받은 그웬 부부가 유일했다. 그들의 수족이라도 라골은 부부를 따를 수 없었다.
경비병이 있는 문 앞까지만 부부를 배웅한 라골은 다시 마차로 되돌아갔다.
오랫동안 그웬가에서 일한 마부는 라골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가 피곤이 역력한 라골에게 물었다.
“말을 몬 나보다 네가 더 피곤해 보인다.”
라골은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차라리 말을 모는 게 나았다. 총각 앞에서 애정 행각에 거리낌이 없는 주인을 모시는 것보다는.
‘제기랄.’
별을 보는 라골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다.
* * *
사내는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다. 어릴 적엔 왕자로 불렸고, 나이가 들어선 왕세자, 그리고 지금은 왕이 되었다.
왕들과의 오찬에서도 그는 ‘란델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태어나 줄곧 나라 안에서 가장 고귀한 자로 산 그는 오만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폭군이 아닌 왕으로 남을 수 있었다.
어릴 적 그에게 정치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머리를 써서 적을 꺾고 왕가에, 그리고 민중에게 도움이 되면 승리하는.
하지만 어떤 게임도 평생을 하게 되면 재미를 잃는다. 나이가 드니 정치처럼 피곤한 일이 없었다.
약관을 넘길 즈음 정치에 재미를 잃은 왕은 왕가와 백성들에게 소홀해졌다. 그런데 이게 웬걸.
게임인 줄만 알았던 것이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귀족들은 제멋대로 그를 휘두르려 하고, 성난 백성들은 이곳저곳에서 봉기를 들었다.
나라가 뒤숭숭해지니 적국에선 이때다 싶어 전쟁을 선언했다.
결국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까지 생겼다. 우스운 건 그의 목을 노리는 자가 왕가의 사내들이란 것이었다. 왕가를 위해 무수히 많은 일을 해온 왕을!
‘빼앗기면 죽는다.’
그제야 왕은 정치란 게임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란 걸 깨달았다.
단 한 번 정치에 흥미를 잃었을 뿐인데 중년이 되어서까지 그 일이 족쇄로 남아 있었다.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 4공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일을 빌미로 수많은 것을 가져갔다.
공작 하나가 왕에 필적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 언제고 다시 그 힘을 가져와야 했다.
하지만 4공은 그토록 개성이 다른 주제에 왕이 검을 빼 드는 시늉만 하면 똘똘 뭉쳤다.
4공의 결속을 느슨히 하기 위해 왕세자를 트리거 공작가의 영애와 약혼까지 시켰는데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줄리아 트리거는 그에게 과자 부스러기 같은 정보만 던져주었다.
왕세자를 넘겨주었음에도 실패한 계획에서 왕은 깨달음을 얻었다.
‘저건 쓸모를 다할 만큼 소중한 것이 아니로구나.’
트리거 공작이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귀히 여기는 건 그의 부인이었다.
줄리아 트리거가 왕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면 거병도 불사하겠지만, 그렇지 아니하다면 트리거 공작은 그저 지켜볼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벌벌 떠는 것이 제 손아귀에 있어야 했다.
가령, 란델의 미친개라 불리는 그웬 공작이 과거의 자신을 버릴 만큼 귀한 것.
그래, 저 공작 부인과 같이.
왕이 그웬 공작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뛰어난 용모이나 나라를 뒤진다면 저만한 여성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대체 무엇으로 그웬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았단 말인가. 그웬 공작은 식사 내내 그의 아내를 살피고 있었다.
입에 맞는 음식을 챙겨주고, 과거의 그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따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거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왕의 눈에 비친 그웬 공작은 이전과 변함이 없어도 그 내용물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저는 의외로 가리는 것이 많았다. 먹어야 할 자리에선 입에 넣긴 하나 그렇지 않다면 앞에 놓여 있어도 포크를 가져가지 않았다.
그는 특히 어류를 싫어했다. 어렸을 때 상한 생선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서 비린내라면 학을 뗐다.
그에 반해 왕은 어류를 좋아하는 모양인지 만찬 음식이 거의 생선을 이용한 것이었다.
진저는 입장상, 그러니까 공작 부인이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이상 이곳저곳에 손을 대기 어려울 터였다. 그래서 엘리사가 직접 남편이 잘 먹는 음식을 대신 챙겨주었다.
“샐러드를 좀 더 내오라고 할까요?”
만찬에 참석한 왕족이며 귀족들이 그웬 공작의 존대를 듣고 매우 놀랐다.
4공을 제외하곤 웬만큼 나이가 지긋하지 않은 이상 그의 존대를 듣기 힘들었다.
왕과 이 자리에선 나이가 일흔을 바라보는 폴렌트 백작뿐만이 그의 존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마치 어린아이 같은 관계도가 그려졌다.
존대는 높은 사람이 받는다.
공작 부인은 공작에게 존재를 받는다.
공작 부인은 높은 사람!
관계도만 어린아이 같을 뿐 아니라 행동도 어린아이처럼 서툴러졌다. 자신의 아내가 엘리사에게 실수를 범한 자들은 식기를 든 손을 벌벌 떨었다.
그웬 공작 위에 그웬 공작 부인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내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괜찮아…… 요.”
“문어는 괜찮죠?”
살이 무른 것, 비린내가 심한 것은 싫어해도 문어나 전복처럼 조리하면 단단한 것들은 그래도 좀 먹는 편이었다.
“어…… 네.”
존대가 입에 붙지 않아 말이 어색했다. 진저는 아내가 건네는 음식을 입에 넣으며 속으로 열두 번째 쌍욕을 했다.
‘시발.’
몸이 바뀌긴 했지만, 아내에게 고백을 받은 데다 그녀가 유난히 귀여웠다. 만찬이고 나발이고 답삭 안아 들어 제 방으로 향하고 싶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저 늙은이들의 얼굴을 보아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대충 준우승만 하라고 할걸.’
명예 같은 건 둘만의 시간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식사 내내 많은 대화가 오갔다. 평소 무뚝뚝하던 진저의 성격이 오늘만큼은 아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 ‘아니오’ 대답만 하면 돼서 편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자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왕족과 귀족이 물러가고 왕과 부부만의 티타임이 시작되면 더욱 진지한 대화를 해야 했다.
만찬을 마친 부부는 왕궁의 다실로 이동했다.
복도에도 보는 눈, 듣는 귀가 많았다. 그는 아내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오늘은 이것저것 가르쳐 줄 생각이었는데, 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거야.”
“우승상이 폐하와의 만찬이니까 그렇죠. 괜히 왕궁 배이겠어요?”
“그러니까 만찬만 하면 될 걸 왜 차까지 마셔야 하냐고.”
“차만 마셔요, 네? 그런데 제게 뭘 가르쳐 주려고 하셨어요?”
그거야 당연히 부부의 밤에 대한 것이었다. 부부가 몸이 바뀌는 일이 어디 흔한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며 평소엔 할 수 없었던 일을…….
진저의 표정이 음흉해지자 엘리사가 그를 새초롬히 흘겼다.
“나쁜 생각 하죠?”
“그게 왜 나빠? 당신이 너무 순진해서 그런 거지. 원래 당신 나이 때는 다들 이 정도 생각은 한다고.”
“제가 순진한 게 아니라 당신이 너무 심한 거예요. 사흘 전에도 그런 걸 하……!”
엘리사가 헙, 숨을 들이키며 입을 다물었다. 남편과 말을 하면 이렇듯 항상 말려 버린다.
진저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했잖아.”
“제가 언……!”
당황해서 목소리가 커져 버렸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본 엘리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아내를 보고 픽픽 웃던 진저가 제 등을 가리켰다.
“당신은 절정에 이를 때마다 내 등에 상처를……!”
“이 사람이 정말! 여기가 어딘데 그런 소리를 해요!”
엘리사가 손을 뻗어 남편의 입을 막아버렸다.
왕의 다실에 도착한 부부는 차가 나올 때까지 왕과 어색한 대화를 나눴다.
“공작 부인은 인상이 깊었지. 탈취전에서 굉장한 기량을 선보이지 않았는가.”
“과찬이십니다.”
진저는 조금만 긴장을 풀면 똥 씹은 표정이 튀어나올까 봐 입꼬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웬 공작이 훌륭한 아내를 두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짐도 그리 생각해.”
고개를 숙이려던 엘리사가 남편의 눈치를 보았다.
남편이라면 왕이라 한들 쉬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터였다.
“네.”
그리고 사람 당황스럽게 하는 대답만 턱턱 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몇 번 몸이 바뀌어보았다고 제법 능숙해졌다. 진저는 뻔뻔한 표정의 아내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맞다. 그라도 그리 답했을 터였다.
“공작 부인은 그웬의 후계를 언제쯤 보여줄 텐가.”
란델에선 이런 말이 인사 정도로 쓰였다. 이것만큼은 언제나 당황스러웠다.
“저희끼리 상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귀한 관심 거두어주십시오.”
더 당황스러운 건 남편의 대답이었다. 엘리사는 긴장한 것을 숨기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혹여 왕의 심기가 상해 가문에 피해가 있을까 봐 염려되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부부의 일이지.”
그러나 진저는 왕의 웃음 속에 숨은 의도를 쉽게 간파해 냈다.
‘교활한 늙은이.’
‘만만치가 않군.’
엘리사는 왕과 진저의 시선이 부딪치는 허공에서 불길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 또한 왕궁에서 자란 만큼 이런 기 싸움은 자주 목격했다. 기 싸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긴장이 되진 않았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고, 두 남자 모두 대단히 노련한 사내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트리거 영애가 내달부터 왕궁에서 교육을 받는 건 알고 있는가?”
왕은 계속해서 공작 부인, 그러니까 진저에게 말을 건넸다. 수십 년간 쌓아온 내공이 말하고 있었다. 이 자리의 중심은 저 말랑해 보이는 공작 부인이란 것을.
“그렇습니까.”
“궁이 익숙하지 않아 외로울 게야. 공작 부인이 자주 들러 말 상대를 해주는 게 어떻겠나.”
말은 권유지만 속뜻은 달랐다.
진저와 줄리아가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근래 있었던 일까지 모두 속속히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공사가 번다하여 시간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같이 교육을 받는 게 어떤가?”
이게 목적이었던 것이다. 진저의 표정이 점차 살벌해졌다. 엘리사가 얼른 남편의 손을 붙잡았다.
여기서 다시 왕의 권유를 거절한다면 그녀가 나서 하겠노라 말할 것이다.
“주에 한 번 시간을 내겠습니다.”
“이거 아쉽군! 왕가의 여성들만이 받는 교육이라네. 장차 큰 도움이 될 텐데.”
“이미 그란디아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 짐이 들은 것과는 다르군.”
쿵!
엘리사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란디아와 란델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레이라 부인은 제 행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태생이 귀한 여성을 얼마나 망가지게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사람처럼 언제나 엘리사를 몰아붙였다.
진저가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오는 온기에 엘리사는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웬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웬의 교육을 받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왕가에 유일한 적출인 그대를 돌려달라더군.”
이 말엔 진저 또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란디아 왕이 비를 들이지 않아 내궁에 일이 많은 모양이야. 내궁이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그대를 그란디아에 빌려달라는 청이었지.”
란델의 동서남북 국경은 각각 4공의 군이 지키고 있었다. 국경을 지키고 왕을 수호하는 그웬가의 수장이 란델을 비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애초에 4공이 왕의 허가 없이 일정 기간 나라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을 국법으로 정해두었다. 반란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엘리사 홀로 그란디아에 가게 될 터. 레이라 부인이 그녀를 보내줄 리 없었다. 엘리사가 란델에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둘 중의 하나였다. 살해당하든지, 말라죽든지.
엘리사는 결혼한 지 3년이 지나지 않아 아직은 타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은 아무리 그웬 공작이라도 그녀의 거취는 왕의 뜻 아래 있다는 것이었다.
돌려보내겠다는 걸까. 엘리사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기 싫었다.
“짐은 싫다고 했어.”
“……예?”
진저까지 얼이 빠졌다.
“짐이 그대를 돌려보낼 수 없다고 했네.”
무슨 생각으로? 아니, 그것보다 저 교활한 늙은이가 어째서 협상조차 하지 않고 그런 카드를 버린 걸까.
“재밌잖아.”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왕과의 대화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부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엘리사의 상태가 너무나 불안해 차마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남편의 방에 틀어박힌 그녀는 새벽이 다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저도 함께 밤을 하얗게 새웠다. 라골로부터 한 시간에 한 번씩 그녀의 상태를 전달받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왕궁을 나서며, 마차에서, 저택으로 돌아와서까지 당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 말했으나 아내의 불안을 잠재우진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진저 또한 힘없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면 황망하기 이를 데 없을 터였다.
그녀의 마음은 오직 스스로만이 극복 가능했다. 그게 못내 가슴 아파 진저는 아내를 두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라골이 일곱 번째로 엘리사의 소식을 전하러 왔다.
“차도 필요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
“마님의 상태가 이처럼 불안정하시면 두 분의 몸이 언제 돌아올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
“불안하십니까?”
“내가?”
“불안해 보이십니다.”
진저가 잡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는 여리고 약했다. 다부지려 노력하는 것조차 가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내를 그보다 강한 사람이 없다고 평가해도 진저에겐 언제나 여린 사람이었다.
그녀가 과거의 공포에 저버릴까 봐, 그리하여 또다시 순응하는 것을 택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그녀는 진저의 유일한 약점이 되었고, 그녀 없는 삶은 진저에게 더 이상 가치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다면 반역도 무릅써 그녀를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란다면?
자신과 자신이 가치 있다 여기는 것을 지키기 위해 그란디아행을 택한다면?
그녀는 진저의 유일한 약점임과 동시에 절대자였다.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내의 몸은 술이 안 받아.”
“예?”
“이런 날은 술이 필요한데 말이야.”
그를 지그시 응시하던 라골이 문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가 건넨 것은 찬물이었다.
“뭐야?”
“냉수 마시고 속 차리시라는 말입니다.”
“…….”
“마음이 깊어지면 겁이 나는 게 당연합니다.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 주셨으니 오죽 겁이 나시겠습니까.”
“뭐?”
진저가 인상을 구긴 채 라골을 쳐다보았다. 약해진 건 인정하지만 타인의 입으로 제 상태를 듣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저 그웬이 아닙니까.”
“…….”
“무패의 악귀. 악당은 좀처럼 지는 법이 없죠.”
주인을 저처럼 당당하게 악당이라 칭하는 자가 있을까. 진저가 픽 웃으며 물을 들이켰다.
그의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떠올랐다.
순진한 아내를 만나 그 또한 너무나 순진해진 것이다. 진저는 만백성이 악귀라 부르는 사내였다.
지키는 것보다 빼앗는 게, 정정당당이란 단어보다는 모사와 계략이 더 어울렸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언제나 방어보다는 공격을 택했다. 누구도 아내의 심중에 고뇌를 심을 순 없었다.
“왕이라 해도 씹어 먹어줘야겠지.”
“준비하겠습니다.”
* * *
어렸을 적부터 밤이 싫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어둠에 파묻히게 해달라고 얼마나 빌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란 이처럼 간사했다. 어제만 해도 신에게 감사하다고 생각했으면서 지금은 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진저가 자신 때문에 불행해질까 봐 이처럼 겁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건 모두 견딜 수 있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고 비웃음이고 어떤 것도 그녀를 괴롭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불행해지는 것만은, 자신으로 인해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부서지는 것만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니, 그것보다 혹시라도 그에게 버림받게 될까 봐. 진저에 대한 믿음이 공포로 인해 점점 작아지는 게 느껴져서 괴로웠다.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아.’
정말? 정말 그럴까? 피를 나눈 아비조차 자신을 버렸는데?
모국의 모두가 자신을 등졌다. 그래, 모두가.
레이라 부인과 그 딸들만이 아닌 모두가 등을 돌렸다. 그녀의 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선 그게 권력의 힘이란 걸 알았지만, 어릴 때는 그리 생각했었다. 그녀의 잘못으로 모두가 그녀를 싫어하는 거라고.
이런 헛된 생각은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상처란 쉬이 낫는 게 아니었다. 궁지에 몰리니 또 과거에 사로잡혀 버렸다.
‘어쩌면 내가 잘못됐는지도 몰라.’
고개를 떨군 그녀가 힘없이 남편을 불렀다.
“여보…….”
“왜?”
등 뒤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사는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에 바짝 힘을 주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고…….”
“그런데?”
“당신도 그러라고 하셨잖아요…….”
“며칠 함께 잤다고 당신 몸이 내 몸에 익숙해졌나 봐.”
“네?”
“잠이 통 안 와. 씻었지? 누워.”
그는 엘리사가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침대에 눕혀 버렸다. 자신의 몸 어디에 저런 힘이 숨어 있었는지 모를 만큼 강한 힘이었다.
진저가 협탁에 놓인 초에 불을 껐다.
“뭐 해?”
“뭐……가요?”
“내가 항상 팔베개를 해주었으니 이번엔 당신이 해줘야지.”
그렇게 말한 그는 또다시 순식간에 엘리사의 팔을 길게 뻗게 하고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좀 딱딱하군. 당신을 곤히 재우려면 훈련을 덜 해야겠어.”
“……잘못 누웠으니까 그렇죠.”
“어떻게 눕는 게 편한데?”
엘리사가 대답하지 않자 진저는 치사하다고 중얼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아, 그래. 이렇게 눕는 게 편하군.”
“…….”
어둠 속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남편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 참. 이런 것까지 말해줘야 아나? 하여간 남자들이란.”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믿을 수 없이 가벼운 농담이었다. 진저가 제 등을 두드렸다.
“안아달라고.”
결국 남편의 뜻대로 팔베개를 한 채 안아주게 되었다.
부부는 말없이 서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위로하려고 오신 건가요?”
“내가 왜?”
진저는 뭘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냐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당신을 위로해 줘야 하는 건데? 당신이 날 위로해야지.”
“네?”
“오늘 이런저런 것을 가르쳐 주려고 기대했는데 방에 틀어박혀 버렸잖아.”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을 기다려 준 데에 대한 고마움에 그녀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지 않아도 될까요?”
“당신이 가고 싶지 않으면. 어떤 상황도 당신의 마음 위에 있을 순 없어.”
어째서 당신 곁에만 있으면 이처럼 안심이 되는 걸까.
그의 말이 맞다. 이제 그녀에겐 남편이라는 든든한 아군이 있었다. 그녀가 원치 않는다면 누구도 그녀를 구속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