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비스트 6
15장 가족(2)
루펠라는 엘리사가 회장에서 사라지고 난 뒤부터 계속 기운이 없었다.
루펠라에게 무슨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해서 모였던 미혼의 영애들과 젊은 귀부인들이 그녀의 안색을 살펴주었지만, 기분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네? 영애, 무슨 일인가요?”
“그웬 영애가 기운이 없으니 저희 모두 슬퍼지네요.”
“기운 차려요, 영애.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열 명 중 둘 정도는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펠라는 의외로, 아니,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라 좋은 사람들을 제법 알고 지냈다.
그래도 어떻게 말하겠는가. 모두 제 잘못인 것쯤은 알고 있는데.
엘리사가 화날 일이었다. 그녀에게 상의하지 않고 그녀의 관리하에 있는 저택에서 자진하려 했으니…….
만약 루펠라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엘리사는 큰 곤욕을 치렀을 터였다.
지금에서야 그런 문제들이 떠오른다는 게 더 속상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머리는 그랬던 것이다.
루펠라의 선택에서 엘리사를 철저히 배제했다. 엘리사는 말했다. 자신이 오빠의 동생일 뿐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자신도 그랬다. 엘리사는 오빠의 아내라는 것보다 꼭 만나야 할 인연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공작 부인과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
아콘 백작 부인이었다.
루펠라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콘 백작 부인에게는 유감이 있었다. 엘리사를 여섯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주범이 그녀라지 않은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오해는 마세요. 축사 전에 보니 두 분 사이가 어색하신 것 같아서요.”
아콘 백작 부인은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루펠라 주변에 포진했던 자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사에게 책 잡혔다 생각하는 귀부인들이 나서서 엘리사를 흉보기 시작했다.
“시가에 너무 무례한 게 아닌가요?”
“맞아요. 너무 하네요. 아무리 타국에서 왔다지만 남편의 집안 식구에게…….”
“그웬 영애, 속상하겠어요.”
“동향 좋다는 게 뭐예요. 우린 영애의 편이에요.”
속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루펠라와 함께 동행한 라골이 저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을 잡을 정도였다.
현재 루펠라는 진저로부터 벌을 받고 있었다. 라골에게 받는 정신 수양. 그건 루펠라가 가장 싫어하는 벌 중의 하나인데 그녀가 진저조차 수습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을 때 받는 벌이었다.
라골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녀는 라골에게 매일 어떤 일을 했으며 그로 인해 무엇을 느꼈는지를 양피지 12장 분량으로 써서 내야 했다. 그런다고 끝이 아니라 라골에게 체크를 받고 통과가 되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요는 정신 수양을 받고 있는 지금 또 사고를 쳐선 안 된다는 것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좀 그렇더라고요. 이해하죠, 그웬 영애?”
“저도 느꼈어요. 사람이 좀 뭐랄까…… 영악, 아니, 영리해 보인…….”
“뭐가 어째?!”
그녀들의 말을 듣던 루펠라가 버럭 소리쳤다.
난데없이 고함이 터져 나오자 시선이 주목되었다. 놀란 아콘 백작 부인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루펠라가 아콘 백작 부인의 손을 쳐냈다.
“우리는 영애의 편을…….”
“내가 언제 새언니와 싸웠다고 했나요?”
루펠라가 어깨를 파르르 떨며 엘리사를 헐뜯던 자들을 둘러보았다.
신나게 엘리사의 험담을 늘어놓던 여성들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콘 백작 부인만은 다른 부인들과 달리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장갑 아래 살갗이 붉어졌음이 분명했다.
엘리사 그웬 때문에 창피를 당한 게 벌써 몇 번째란 말인가. 지금은 귀부인들뿐만이 아니라 각계 유명 인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영애, 진정하세요. 우린 그런 뜻이 아니라 영애의 기분을 풀어주려던 거예요.”
한 귀부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왜 제 문제에 새언니를 끌어들이냐고요. 꼭 이렇게 되길 바란 사람들처럼.”
“바라다니요!”
다른 여성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그들을 쭉 노려보던 루펠라의 시선이 아콘 백작 부인에게 멈추었다. 그녀도 루펠라를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공중에서 두 여자의 시선이 얽혀들자 그들을 쳐다보던 이들이 모두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개 같은 성질머리로는 따를 자들이 몇 없는 여성들이었다. 아콘 백작 부인도 부친 밑에서 오냐오냐 자란 덕에 대단한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루페라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녀는 란델의 개차반으로 불리는 여성이었다.
“사과하세요.”
먼저 공격에 나선 건 루펠라였다. 그녀가 냉랭한 목소리로 사과를 종용했다.
“제가요? 왜요?”
아콘 백작 부인은 모르쇠로 나왔다.
“새언니더러 영악하다고 했잖아요!”
“잘못 들으셨겠죠. 영리하다고 한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닌가요? 사람들을 선동해서 언니를 헐뜯었으니 사과를 해야죠. 듣자 하니 언니에게 유감이 많은 모양인데……!”
“어머! 누가 그래요? 공작 부인이 그러던가요? 제가 공작 부인에게 유감이 많다고요?”
“언니는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럼 영애가 오해를 하셨네요. 전 전혀 유감이 없답니다.”
아콘 백작 부인이 뻔뻔한 표정으로 턱 끝을 올렸다.
“없기는 무슨……!”
“네! 말해보세요. 짚이는 게 있으시거든 말씀해 보시라고요. 사람도 많은데.”
아콘 백작 부인는 사람도 많다는 뒷말을 유독 강조했다. 그녀에게 반박하려던 루펠라가 말을 멈추고 입술을 콱 깨물었다.
‘저 여우가!’
신년 봉사 회의 발족식이 아닌가. 여기서 다른 귀부인들이 엘리사에게 수모를 주었단 걸 말하게 되면 창피를 당하는 건 엘리사였다.
다른 귀부인들도 아콘 백작 부인에게 동조하였으니 일부러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뗄 것이다. 그럼 일이 커질 테고…….
루펠라가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하자 아콘 백작 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사과는 영애가 하셔야겠군요. 제게 사과하세요.”
“뭐라고?! 야!”
“이래서 출생이 중요하다니까. 뭘 배운 건지, 정말”
혼잣말을 하는 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분명히 들었다. 루펠라가 팔을 걷어붙이고 아콘 백작 부인에게 달려들려 할 때였다.
“루펠라!”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뚝 걸음을 멈춘 루펠라가 울상이 되어 목소리가 튀어나온 쪽을 바라보았다.
엘리사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진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웬 공작 부부가 들어오자 회장의 모두가 일 났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콘 백작 부인마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엘리사가 루펠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요?”
루펠라가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자신 때문에 엘리사가 험담을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루펠라가 말을 못 하고 있자 아콘 백작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말씀 드릴게요. 영애의 태도가 이렇게 불량하니 교육이 필요할 것 같네요. 뭐, 부인을 탓하는 건 아니에요.”
“태도가 불량하다…….”
엘리사가 부러 소리를 내어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렇잖아요. 사람 많은 자리에서 연장자에게 달려들기나 하고. 여기 이분들 모두 기운 없는 영애가 걱정이 되어서 말벗을 해주려고…….”
“연장자란 무슨 뜻인가요?”
“네?”
엘리사의 뜬금없는 물음에 좌중 속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이국에서 왔다고 해도 공용어를 쓰고 있는데 단어의 뜻을 묻다니. 나 멍청하오, 광고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야 나이가 많은……!”
“나이가 많은 분을 공경해야 하는 건 왜죠?”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나이를 먹으며 그만한 지혜와 도량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보기엔 아콘 백작 부인은 저희 아가씨에게 공경받을 분이 아닌 듯하군요.”
아콘 백작 부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엘리사의 뒤에 서 있던 루펠라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분명 혼이 나리라 여겼다. 귀부인들이 엘리사의 험담을 할 여지를 주었으니까. 그리고 화를 참지 못해서 중요한 자리를 망쳤으니까.
그러나 엘리사는 루펠라의 앞을 막은 채 당당하게 아콘 백작 부인과 맞서주었다.
“이봐요, 공작 부인!”
“말씀하세요.”
그것도 다른 여자들의 기를 죽일 만큼 너무나 당당히.
“그럼 제가 멍청한 데다 도량도 좁다는 건가요?”
“그렇게 들리셨다면 그런 거겠죠.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일전에 백작 부인을 보았을 때, 부인보다 나이가 많은 분께 하대를 하셨잖아요. 왜 그러셨나요? 그분이 연장자신데.”
옳거니 잘 걸렸다. 아콘 백작 부인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란델에서는 나이가 적든 많든 결혼을 한 사람을 연장자로 보고 미혼의 레이디가 배움을 청해요. 그런 것도 모르셨나 봐요.”
“네. 제가 란델의 문화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래서 말인데, 제 문화 교사에게 몇 가지 물어볼게요.”
엘리사가 라골을 쳐다보았다.
“란델에선 나이를 상관하지 않고 미혼 여성은 기혼 여성을 연장자로 여기나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골이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곤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그녀는 항상 이렇듯 예상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냥 순한가 하면 이렇게 대담한 모습도 있었고, 대담한가 하면 상냥하고 따뜻해서 주변의 호감을 이끌어냈다.
라골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마님.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기혼 여성 또한 신분에 따라 나이에 상관없이 연장자가 됩니다. 가령, 백작 부인은 공작 부인을 공경해야 하죠.”
일부러 백작 부인과 공작 부인을 예로 든 데다가 중요한 건 쏙 빼먹었다.
그런 법이 있기는 하지만 관습일 뿐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나 그만한 지혜를 지닌 노사라면 아무리 공작 부인일지라도 대우해 주었다.
엘리사가 아콘 백작 부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 그건 어디까지나 관습이고 제가 말한 연장자는 도덕적인 개념……!”
“도덕? 언제부터 백작 부인이 도덕을 따졌는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존대를 하던 엘리사가 말을 놓았다. 그녀 주변의 부인들뿐 아니라 회장의 모두가 긴장하여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도덕을 따지는 자가 백성들을 위한 행사를 사익을 위해 주무르려 들었나.”
아콘 백작 부인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가 직접 이 이야기를 사람 많은 회장에서 할 줄은 몰랐다.
엘리사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진저가 나섰다.
신년 봉사는 4공의 관할이었기에 그가 나서기 충분한 자리였다.
“사익을 위해 주무르려 들었다니.”
이미 소문을 통해 엘리사가 다른 귀부인들에게 곤욕을 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그녀들에겐 부담으로 다가왔다.
진저 그웬이 누구던가. ‘전장의 마귀’ 혹은 ‘살육에 빠진 자’라는 말을 질리도록 듣는 사내였다. 근래 아내에게 푹 빠져 아내라면 제 스스로 이빨, 발톱을 다 뽑아낸다고 할 짐승이 이 일을 알면…….
“사과하세요, 백작 부인!”
“맞아요!”
“공작 부인의 말씀이 옳아요. 구구절절 옳은 말씀인데 왜 고집을 부리시나요!”
“한심해서 원…….”
“사과하세요!”
아콘 백작 부인과 함께 일을 벌인 자들이 나섰다. 그웬 공작의 진노를 사는 것보단 한 사람 매장시키는 게 훨씬 쉬운 일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아콘 백작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저가 아내와 여동생의 곁에 다가갔다. 때마침 홀을 떠나 있던 아콘 백작도 돌아왔다. 진저가 아콘 백작을 향해 턱을 움직여 불렀다.
턱만 움직였는데도 위압감을 뿜는 자는 많지 않았다. 겁을 집어먹은 아콘 백작이 주춤주춤 그들에게 다가왔다.
“경은 알고 있나.”
“예? 무, 무슨…….”
아콘 백작이 무슨 일이냐는 듯 제 아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콘 백작 부인은 사색이 되어 남편을 붙잡았다. 성질머리가 대단한들 수천, 아니, 수만일지 모르는 사람의 목숨을 앗은 사내를 맞설 순 없었다.
아콘 백작은 다소 멍청하긴 하나 눈치는 빠른 자였다. 아내가 무언가 사고를 쳤음을 깨닫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 저…… 저도 잘……. 당신이 설명하시오.”
그리고는 홀랑 내빼버렸다. 혼자 남은 백작 부인이 남편이 사라진 곳을 보고 있었다.
다른 남자는 제 아내가 저 모르는 곳에서 곤란했을까 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제 남자는 아내를 마귀라는 사내 앞에 던져둔 채 사라져 버렸다.
겁도 나고, 화도 나고, 질투까지 나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백작 부인이 직접 말하지. 내 아내의 말이 무슨 뜻인가.”
“…….”
“내 말이 들리지 않나.”
“…….”
진저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소한 행동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나 매력적인 외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살해당할 것 같은 위압감이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안 들리는 것 같으니 귓구멍을 뚫어…….”
“각하.”
엘리사가 남편의 팔을 잡았다. 타인의 눈에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그토록 지독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던 사내가 아내의 손이 닿자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제가 따로 설명 드릴게요. 백작 부인과 나눌 말이 있으니 각하께선 지기분들과 못다 한 대화를 나누시겠어요?”
말과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으나 요점은 저리 꺼져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숨을 멈춘 채 그웬 부부에게 집중했다. 내기를 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천하의 진저 그웬이 꺼지라는데 얌전히 꺼질 리 없다며.
그런데 정말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사람처럼, 아니, 아내가 약점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남편을 돌려보낸 엘리사가 백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오늘 일은 추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
그리고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기가 죽어 있는 루펠라를 본 엘리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일은 반성하세요.”
“네…….”
“루펠라는 그웬의 보물이에요.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홀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나와 오빠에게 말해요. 가문 대 가문으로 해결할 테니.”
몸가짐을 탓하려나 했는데 선전포고였다.
‘내 시누이에게 대들지 마’라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진저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잡혀 회포를 풀러 갔고, 마차엔 그웬의 두 여성만이 남게 되었다.
엘리사는 회장에서 루펠라를 감싸준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아콘 백작을 비롯한 현 백작 부인의 시모 되는 콘트리체 부인까지 엘리사와 루펠라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엘리사는 용서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냉랭한 눈으로 아콘 백작 부인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줄곧 엘리사의 눈치를 보고 있던 루펠라가 입을 열었다.
“저…… 언니.”
“……네.”
“아까는 고마워요.”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목소리는 이전보다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대화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절 이렇게 감싸준 건 처음이라 감동했어요.”
“…….”
“선대 공작 부인도 이렇게 감싸준 적은 없었어요. 제가 사고를 치기 시작한 이후로는 상대도 하기 싫어하셨죠.”
“…….”
“내가 언니 입장이라도 나와 대화하기 싫을 것 같아요. 이해해요. 그냥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기분 좋네요. 누군가 나를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모두가 루펠라를 오해하고 있었다. 루펠라는 모두의 생각만큼 철도, 생각도, 개념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녀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비슷한 삶을 산 엘리사는 알고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뿐이었다.
엘리사처럼 눈과 귀, 입을 모두 닫거나 루펠라처럼 가시를 세우는 것.
가시를 바짝 세우면 적어도 그녀 앞에선 그녀를 상처 주지 못할 테니까.
엘리사가 그녀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어쩔 수 없이 가시를 세우고 살았지만 오랜 세월이었다. 방어 수단, 그것이 인생이 되기에 충분한 세월. 루펠라의 자존심에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기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 증거로 뺨이 달아올랐다.
“왜 그랬어요?”
“…….”
“왜 그런 무서운 일을 하려고 그랬어요? 늘 혼자 있던 사람이 죽을 때까지 홀로 있으려고 한 것 말이에요.”
“……인정해요. 이기적이었어요.”
루펠라는 자신이 죽어도 카르트 후작이 진저를 해하려 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저 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오빠를 죽였다는 굴레에 쌓여 생을 마감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파탄이 나기 전에 눈을 감고 싶었다.
어리석고 이기적인 판단임을 모르지 않았다. 엘리사 또한 도망치려 했음을 알기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
“언니…….”
“살아 있으니 망정이지 루펠라가 사라졌다면 난 못 견뎠을 테니까.”
“…….”
“그런 생각을 한 네게 너무 서운해.”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루펠라에게 늘 존대를 써왔다. 엘리사가 말을 놓자 루펠라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마피 부인에게 혼나는 것 같아서, 아니, 정말 언니에게 혼이 나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미안해요.”
“혼자 견디기 힘들었으면 말을 해야지. 나와 오빠가 믿음직스럽지 않았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언니는…….”
‘그런 일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라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엘리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펠라가 어떤 말을 하려 하는지 느껴졌다.
“알아. 그래서 이제 기댈 수 있는 언니가 되어보려고.”
히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루펠라가 콧물을 줄줄 흘려가며 울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꼬마라 엘리사는 더 이상 화도 내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렇게 어렸는데 어른인 척하며 살았구나. 애어른이 되어 가장 고통스러운 건 그녀 자신일 텐데. 힘들었겠다. 이렇게 될 동안 곁에 아무도 없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루펠라를 이해하려 했던 적이 없었다. 기실, 그녀에게 화가 났던 게 아니라 엘리사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루펠라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라면 말해주리라 여겼던 건 오만이었다.
엘리사 자신조차도 그러한 일이 있다면 입을 열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삶이었다. 그러니 루펠라의 삶이 얼마나 각박했을지 헤아리고 그녀를 좀 더 보듬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마차가 저택에 들어갔다. 마차에서 내린 루펠라의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엘리사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서둘러 루펠라에게 말했다.
“난 볼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갈게요.”
“같이 가요.”
“내저에는 아직 고용인들이 일을 보고 있을 거예요. 울음 좀 멈추면 들어와요.”
그러더니 내저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엘리사는 고용하는 자로서의 기품을 중히 여기긴 하였으나 이런 일에 마저 사람 눈을 신경 쓰진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멀뚱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펠라가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에 숨을 멈추었다.
저 발소리를 어찌 모르랴. 자살 미수 사건이 터지고 처음 보는 그레닉이었다. 그레닉은 루펠라가 귀가하기를 기다린 모양인지 기둥에 기댄 채 정문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고 있었다.
“그레닉…….”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난 후로 루펠라는 아뿔싸, 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제 입에서 이름이 불릴 때면 쏜살같이 도망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그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와 있을 때면 항상 주변을 살피던 그가 오늘은 그러지도 않았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아파! 아프다니까!”
건틀릿을 낀 것도 아닌 맨손인데 어찌나 말랐는지 뼈마디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게 못내 가슴 아팠던 루펠라가 되레 목청을 높였다.
저택에 오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다. 이런 얼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레닉에게도 못 할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뛰어내린 것을 목격하기까지 했으니까.
“저를 이용해 협박했습니까.”
“…….”
“카르트 후작이 저와 주군을 저울질시킨 거냐 물은 겁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당신은……!”
그웬 부부와 루펠라가 발족식에 가기 전 그들을 수행하는 라골로부터 언질을 받았다.
‘경은 오지 마시오.’
호위도 안 된다는 말에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경이 있으면 루펠라 아가씨께서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단한 사람이군. 한 여자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주제에 이토록 아무것도 모르다니 말이야.’
날이 선 어투는 그레닉에게 전혀 상처를 주지 못했다. 그의 가슴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놓은 건 루펠라였다.
묻고 싶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토록 어린데, 그토록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자신 같은 놈을 위해 목숨까지 저버리려 하였는가.
“다른 사람이 다 날 욕해도 너는 안 돼. 넌 날 욕할 수 없어!”
“날 위해 죽으려 했다는 건 어떤 면죄부도 되지 못합니다!”
“아니! 넌 한 번도 날 1순위로 올려놓은 적이 없으니까!”
“…….”
“나와의 미래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도 너는 네가 최우선이니까!”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레닉은 그녀를 위해 화를 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더 포기할 수 없을까 봐,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알면 더 힘들까 봐 몸을 사렸다.
“내가 널 몰라? 널 사랑한 지 10년이 넘었어. 키가 작다고, 어리다고 해서 마음도 작았던 건 아니야. 넌 절대 날 비난할 수 없어.”
“난…….”
“그날 했던 말 진심이야. 이제 떠나도 돼. 소임 같은 건 내려놓고 너와 맞는 여자 만나서 마음 놓고 살아. 난 이제 이렇게 힘든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가슴을 밀친 루펠라가 내저를 향해 뛰어갔다.
그레닉은 제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그토록 밀어냈지만 한 번도 밀려나 본 적이 없던 여자였다.
그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각오를 했으니까 떠나란 말을 한 것이리라. 다시 제 얼굴을 본다면 이전과 같은 표정으로 귀찮게 할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언제나 그녀가 자신을 포기하길 바랐다. 그녀의 사랑은 쉬이 타오르고 불길이 거세져서 언제나 그에게 화상을 선물했다.
그런데 왜일까. 왜 이렇게 헛헛하고 가슴이 아린 것일까.
그레닉은 그 자리에서 굳어 루펠라가 떠난 자리를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