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가족(1)
시간이 흘러 트라노이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가기로 한 날이 돌아왔다.
그동안 루펠라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갈수록 거뭇해지는 낯빛이 걱정되어 엘리사가 몇 번이나 그녀의 방문을 두들겼으나 루펠라는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마치 자신을 세뇌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루펠라의 변화를 느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식사를 거르는 그녀는 고용인과 기사들의 걱정을 샀다. 특히 그녀의 고뇌를 다른 쪽으로 곡해한 기사들이 더 소란스레 염려를 표했다.
진저의 기사들은 대체로 정이 넘쳤다. 다른 말로 하면 도를 넘는 오지랖의 소유자들이란 것이다. 모두 오랫동안 함께 지낸 전우였다.
평소엔 그레닉의 편을 들며 귀족 아가씨와 미래를 꿈꾸는 건 위험하다는 말이 우세했다.
그러나 루펠라가 두문불출하는 데다 갈수록 야위어가니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는 이가 많아졌다.
죄인이 된 건 그레닉이었다. 훈련을 하면서도 오지랖을 부리는 동료들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오지랖의 순위를 매기면 언제나 상위권에 있을 한스가 그레닉을 찾는 일도 있었다.
인생 역전이니 뭐니 입을 나불대던 그가 근처를 지나던 마크빌에게 맞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쫓겨났다.
주변이 이토록 소란스러운데 당사자의 마음은 오죽하랴. 그레닉마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겨우 서 있는 루펠라를 걱정했다.
동시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지도 못하는 자신을 자책했다. 물을 수 없었다. 고뇌의 중심에 자신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물어보려야 물어볼 수 없었다.
나들이를 가기로 한 당일까지도 루펠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두고 나가기 걱정스러웠던 엘리사가 루펠라의 방을 찾았다.
루펠라는 노골적으로 불편하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냐는 말에도 봄이 와서 그런지 싱숭생숭하다는 성의 없는 답변만 하였다.
“루펠라.”
“그만해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데 왜 자꾸……!”
소리를 친 당사자가 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굳은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호통을 들은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시선을 둘 곳을 찾아 헤매던 엘리사의 눈동자가 이내 멈추었다.
“별일 아닌데 귀찮게 하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루펠라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던 엘리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루펠라가 그걸 원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래요…….”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말해줘요.”
“…….”
루펠라가 서둘러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엘리사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 루펠라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엘리사가 천천히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고서도 엘리사의 눈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물론 루펠라의 반응이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서운하다. 얼마나 서운한지 무슨 정신으로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든 생각은 ‘그녀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였다.
감 하나만은 또래의 여성들보다 낫다고 자부했다. 그녀가 어떻게 제 편 하나 없는 그란디아 왕궁에서 살아남았겠는가.
‘나와 관련된 일이야.’
엘리사와 관련되었으면서 루펠라를 저토록 고뇌하게 만들 만한 일이 무엇일까.
그녀가 이상해진 건 카르트 후작을 만나러 다녀온 이후였다.
그렇다면…….
“엘리사.”
골똘히 생각 중이던 그녀는 어깨에 손이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움츠렸다.
남편이었다. 준비를 마친 모양인지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진저는 화들짝 놀란 아내를 보고 한쪽 눈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일이야?”
“네? 아,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가 루펠라의 방문을 흘깃 쳐다보았다.
“루펠라인가?”
평소라면 루펠라가 혀 깨물고 자진하지 않는 한 관심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아내의 신경이 온통 루펠라에게 집중되니 그 또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신경 쓰지 마.”
“네?”
“신경 쓰지 말라고.”
남편의 말뜻을 알아차린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저 녀석이 홀로 고민하길 택했어. 그렇다면 무슨 불상사가 생겨도 오롯이 저 녀석이 감당해야 해.”
“……당신은 동생에게 너무 냉정해요.”
그가 아내의 볼에 입을 맞췄다.
“난 당신에게만 약해.”
그녀가 남편의 가슴을 밀어냈다.
“신경 좀 써줘요. 부탁할게요.”
“대충 무슨 일인지 예상은 돼.”
“카르트 후작이 루펠…….”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걸음을 옮겼다. 루펠라의 방에서 멀리 떨어진 후에야 그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카르트 후작이 간계를 꾸몄든지 하는 건 그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루펠라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루펠라가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진저보다 먼저 아이를 낳아 후계로 민다면 누구보다 강력한 정적이 될 터였다. 루펠라는 선대 공작 부인과 피를 나눈 데다 그웬의 호적을 쓰고 있는 자였으므로.
그게 아니라면 카르트 후작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그 늙은이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나 보군.’
엘리사가 악의라는 칼날을 받아냈다면 그는 실제로 칼날을 받아내며 살아왔다.
어떤 악조건의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은 그였다. 미치광이의 검쯤 웃으며 되돌려 줄 자신이 넘쳤다.
그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인 아내의 볼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그의 장난에 엘리사가 화를 낼 때까지.
“왜 화를 내?”
“전 심각하다고요.”
“놀 땐 놀자고. 놀러 가잖아, 우리.”
엘리사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도 그의 의견에 반대하진 않는지 별말이 없었다.
“다 당신 잘못이지. 누가 그렇게 귀여우래.”
“가면 갈수록 이상해져요. 알아요?”
그가 아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엘리사가 꺅, 비명을 내지르곤 그의 어깨를 잡았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복도를 지나던 하녀 몇과 눈이 마주쳤다. 하녀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얼굴이 붉어진 엘리사가 그를 노려보았다.
“이상해진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약 올라.”
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달콤했다. 남편이 이렇게 웃을 때면 화고 투정이고 낼 기분이 사라졌다.
엘리사가 그의 뺨을 잡고 아프지 않게 흔들었다. 그 소심한 복수에 진저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 * *
두 부부만 가기로 한 나들이는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몇몇이 더 끼어들어 인원수가 많아졌다.
그웬 부부, 트라노이 부부를 제외하고도 총 네 쌍의 부부가 더 참가했는데 그중엔 진저와 견원지간인 포르테 백작이 있었다.
그는 포르테 공작 부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가한 듯하였다.
엘리사와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근래 몹시 가까워진 것을 수도에 있는 이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부인들뿐만 아니라 남편들까지 또래라 그런지 통하는 게 많았다. 트라노이 공작은 수더분한 사람이라 누구와도 큰 트러블이 없었는데 진저에겐 유독 약했다.
귀족 후계는 대부분 검술 등 무예 수업을 받지만 진저처럼 특출 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란델의 네 공작가는 왕의 검이자 방패. 다시 말해 뿌리부터 무인의 혈통이란 뜻이었다.
다른 가문은 몰라도 공작가는 전공이 필수였다. 그리하여 트라노이 공작은 가문의 후계였을 시절 전쟁에 참전했다.
문제는 트라노이 공작이 너무나 성실하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기사, 병사들의 뒤에서 그들의 공만 쏙쏙 뽑아먹는데 그는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실력은 기사, 병사들의 반도 못 따라가는 주제에 선두에서 전쟁을 지휘하려 했다. 실력 없는 지휘관은 당연한 결과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그때 트라노이 공작과 그로 인해 죽을 뻔한 이들을 구해 준 게 진저였다.
그는 고립된 소대를 훌륭히 구해냈고 사죄하는 트라노이 공작에게 말했다.
‘사과를 한다고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오나?’
그럴 리가. 그가 데리고 있던 자들은 세 자릿수를 넘었다. 그런데 남은 건 고작 반백 명도 안 되는 숫자. 그들이 살아 있는 건 진저의 공이었다.
그때 트라노이 공작은 실력 없는 머리가 얼마나 끔찍한 학살자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트라노이 공작에게 진저는 영웅이었다.
가주들의 관계도 좋은데 아내들까지 관계가 좋다면 다른 가문에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포르테 공작 부인은 제 며느리에게 그웬과 트라노이 사이에 어떻게든 껴보라며 닦달이었다.
나들이를 할 호숫가에 도착한 부부들은 물과 기름처럼 여성, 남성끼리 뭉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 부부가 함께 있는 건 그웬 부부뿐이었다. 엘리사는 오늘따라 새끼 보듬듯 그녀만 쫓는 남편이 부담스러운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다른 부인이 술을 권하면 중간에서 주스를 내밀지를 않나, 그녀의 미모를 칭찬하는 남자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질 않나 너무나 곤란했다.
결국 참다못한 엘리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그를 타박했다.
“여보, 이제 그만 좀…….”
“뭐가?”
“저도 다른 부인들과 대화를 나눠야죠.”
그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트라노이와 우리만 오기로 했잖아.”
“포르테 부인이 부탁하셔서 어쩔 수 없었나 봐요.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트라노이 부인이 소식을 전하자마자 남편에게 말을 전했었다. 아내의 말에 진저가 시선을 돌렸다.
요새 그는 아내의 말에 무조건 긍정하였다. 여자에게 빠진 남자는 패가망신해도 변명거리가 없다더니 정말이다. 아예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무조건 ‘응, 그래, 좋아’ 세 마디만 반복했다.
“안 들었죠?”
“아니야. 들었어.”
엘리사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거지.”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뻔뻔하단 말인가.
엘리사와 진저가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을 때였다.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쪽배가 준비되었다. 아내들이 관심을 보였으나 남편들은 여전히 다른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진저가 쪽배 쪽으로 성큼성큼 걷더니 배 안에 서서 아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저 그웬이었다. 저런 쪽배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을 남자가 아내를 위해 노를 젓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이 일시에 입을 벌렸다.
“어머머!”
“그웬 공작이 노를 젓네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포르테 백작 부인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그녀의 남편은 호숫가에 온 뒤로 사내들과 이야기를 한답시고 제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인이 할 일을 공작이나 되시는 분이 품위 없게…… 그렇죠?”
다른 부인들이 모두 말을 아꼈다. 포르테 백작 부인이 내심 그웬 공작 부인을 부러워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들도 그랬으니까.
부부 동반 나들이는 부부 간에 얼마나 다복한지를 보이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현재는 그웬 공작 부인이 필두에 있었다.
뒤이어 트라노이 공작이 배에 타 공작 부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른 남자들은 여전히 다른 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희 남편은 어제 일 때문에 과음을 해서…… 호호!”
“저희 남편도요.”
“전 별로 타고 싶지 않네요.”
다른 부인들은 흙이라도 씹은 얼굴로 배를 타지 않는 핑계를 댔다.
포르테 백작 부인이 자신의 남편을 남몰래 노려보았다. 남편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눈매에 힘을 주고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애정 없는 결혼에 관심은 불필요한 부산물임을 모르는 귀족 여자는 없었다.
마음이 없는 생활의 관심이라 봤자 ‘뭐 이렇게 비싼 것을 사들이느냐’, ‘내 부모에게 좀 더 살갑게 할 수 없느냐’, ‘사교 활동에 몸가짐을 조심할 수 없느냐’ 등의 지긋지긋한 잔소리였다.
몇몇 귀부인이 공작 부부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남편들은 그런 아내의 마음을 조금도 모른 채 다른 이야기를 하며 연신 낄낄거리고 있었다.
배에 탄 엘리사는 물이 무서운지 시선을 공중으로 고정했다. 손은 핏기 없이 새하얗도록 힘을 주어 배 끝을 잡고 있었다.
노를 젓던 진저가 그 모습을 보고 픽, 실소를 흘렸다. 이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눈을 어찌나 빛냈는지 모른다. 천하의 진저 그웬이 손수 노를 젓게 할 만큼 반짝이는 눈이었다.
진저가 장난을 치려 배를 잡은 채 흔들자 엘리사가 기겁을 했다.
“하지 말아요! 화낼 거예요!”
멀리서 볼 때는 푸르고 맑고 아름다워서 들어가고 싶었는데 막상 들어오니 물이 너무 깊었다.
엘리사가 배를 붙잡고 꺅꺅 소리치자 진저의 입꼬리가 이전보다 더 올라갔다.
“그만둬요!”
“맨입으로?”
엘리사가 남편을 샐쭉 노려보았다. 그는 항상 대가를 달라며 짓궂게 그녀를 놀렸다.
화가 나서 대답하지 않으려는데 배가 더 크게 흔들렸다.
“하지 말아요! 무섭다고요!”
흐흑. 울음소리가 났다. 당황한 진저가 움직임을 멈추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란디아에서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가 엘리사를 물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배가 흔들리자 그때의 생각이 났다. 엘리사는 울상이 되어 눈을 매만졌다. 훌쩍거리던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요.”
고저 없는 목소리에 진저는 찍소리도 못 했다.
엘리사가 움직이지 않는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진저가 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저가 먼저 내려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부득불 홀로 배에서 내려왔다. 아직 노를 저으며 하하호호 웃기에 바쁜 트라노이 부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엘리사는 붉어진 눈을 가리기 위해 함께 온 부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차로 갔다. 그 뒤를 진저가 졸랑졸랑 쫓았다.
저 큰 체구로 가녀린 부인의 뒤를 쫓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귀부인들이 픽픽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 부인께 꽉 잡혔군요.”
“전장의 마귀라면서요. 마귀는 무슨. 강아지 같네요.”
“귀여워라.”
모두 부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매단 채 사라진 공작 부인이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 * *
그레닉을 비롯한 다섯의 기사가 소거실에 앉아 빛을 쐬고 있던 루펠라에게 다가왔다.
“마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앞으로 영애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영애 호위대의 대장을 맡게 된 하우벡입니다.”
하우벡과 그레닉, 체이서, 그리고 루펠라가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기사 둘까지. 모두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을 자들이었다.
그녀의 새언니는 이토록 상냥했다. 제게 심한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그녀의 신변에 변고가 생기지 않을까 하여 가문에서 손꼽는 기사들을 붙여 주었다.
아마 눈치를 챈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외숙을 만나고 온 이후부터 확연히 태도가 달라졌으니까.
새로운 그웬 공작 부인은 지혜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울고 있는 마음을 어찌 알았단 말인가.
그레닉의 마른 얼굴을 보고 있던 루펠라가 눈을 감았다.
당신을 지키고 싶어 했다면 믿어줄까. 평생을 함께 지낸 남매보다 당신을 지키려 했다면 믿어줄까.
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타인이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을 희생시키려 하는 나를…… 당신만은 이해해 줄까.
“도망칠래?”
루펠라의 목소리에 그레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를 보아달라고 애원하고 소리치는 그녀만을 보아온 사내는 피멍 든 가슴을 숨기려는 작은 여자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함께 가주겠다고 하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자신이 있어.”
“…….”
“너는 어때?”
“…….”
“난 가족이자 형제, 그리고 인생에 단 하나뿐인 전우를 버리고 가겠다고 하는 건데 너는 어때? 네 가족이 아닌 날 택해줄 수 있어?”
“……아니오.”
루펠라가 고개를 숙였다.
이런 남자였다. 이래서 사랑하지 않았는가. 나보다는 남인 사람이라. 제 상처는 다 헤져 썩어버려도 남의 생채기에 마음 아파할 사람이라 그녀 또한 그를 택했다.
“늘 아팠지만 오늘은 유독 더 아프네.”
“…….”
‘그러니까 당신은 나를 원망해야 해.’
그의 말대로 그녀는 어린애였다. 현실을 몰랐음을 인정한다. 둘 중 어떤 것도 택하지 못했기에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았다. 끝까지 맨 가슴에 닿지는 못했으나 태양 빛을 받아 따뜻해진 갑주가 그의 가슴을 대신해 주었다.
그거면 되었다. 평생 어린애처럼 살았으니 마지막도 어린애여야 했다.
그와 함께 있던 기사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굳은 그레닉이 그녀를 밀쳐내려 했을 때였다.
까치발을 든 그녀가 그의 뺨에 양손을 올렸다. 그의 얼굴을 붙든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촉, 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레닉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그대…….”
루펠라가 울음덩어리를 되삼키고 작게 숨을 골랐다.
“그대, 그레닉에게 윤허한다. 소임을 내려놓으라.”
“…….”
“십여 년간 당신 때문에 행복했어. 이제 가도 좋아.”
기사들이 서로 시선을 맞추었다. 안주인의 명이니 영애의 뜻을 따를 수 없다고 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없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그레닉이 몸을 일으키는 루펠라를 응시했다.
‘이제 나만 당신을 버릴 수 있어.’
그 말이 이런 뜻이었단 말인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황급히 몸을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인지되지 않았다. 다만 하나, 등을 돌려 이 말을 하는 순간까지 단 한 가지 기억나는 건 공포였다.
떠나라고 말한 건 그녀였는데 정말 떠날 것 같은 것도 그녀라서.
그래서 그는 평생 다시없을 용기를 냈다.
“루펠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겁니까.”
발걸음을 멈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구보다 해사하게 웃었다.
네가 물어봐 주었으니 이제 괜찮다는 듯이.
* * *
날이 저물었다. 가장 최상층. 공작의 집무실이 있는 그곳엔 저택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테라스가 있었다.
이런 선택을 한다고 해서 외숙이 욕심을 버리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또다시 미쳐 날뛸 것이다. 누구 하나는 끝장이 날 때까지 검을 휘두르겠지.
하지만 그녀는 누구도 택할 수 없었다. 그레닉의 마음을 죽이고 사는 삶이나, 오빠의 목숨을 앗고 사는 삶 같은 건 그녀에게 아무 가치가 없었다.
‘아쉽네.’
엘리사에게 조금 더 살갑게 굴 것을. 그녀를 만난 뒤 하루가 얼마나 따뜻했었는지 알려줄걸.
진저에게도 욕을 푸지게 해줄걸. 네놈 때문에 성격이 이렇게 더러워졌지만 조금, 아주 조금은 재밌었다고.
“루펠라 그웬이 이렇게 뒤질 줄 누가 알았겠어.”
아쉽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정말 조금도 참지 말고 살걸. 카르트 후작, 그 늙은이에게 소리쳤으면 좋았을 것이다.
“노망난 늙은이!”
꽥 소리친 그녀가 훅훅 숨을 골랐다.
누릴 만큼 누렸고, 할 말 다하고 살았고, 목숨보다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다. 이것이면 되었다.
루펠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테라스 난간을 잡았다.
떨어져 죽는 게 제일 쉽게 끝난다던데 제일 쉽게 끝나는 만큼 제일 무섭기도 했다.
훌쩍거리던 그녀가 코를 크게 들이켰다.
“씨이……. 마탑에 의뢰할걸.”
편하게 죽게 해달라고 하면 기함을 할 테지만. 하긴 마탑주의 손자인 리한이 진저와 막역한 사이였다. 진저 귀에 들리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터였다.
이게 제일 깔끔하다. 카르트 후작이 더 이상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유서도 써놨겠다.
복수는 이 정도면 되었다. 카르트 후작은 조카를 궁지에 몰아 죽인 냉혈한이 될 것이나 알 게 뭐란 말인가. 틀린 말도 아닌데.
루펠라가 이를 악물고 난간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공중을 향해 한 발 내디뎠다.
그때였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나 싶었는데 몸이 붕 뜨더니 본래 있었던 자리, 그러니까 테라스 쪽으로 처박혔다.
루펠라가 꽥, 하고 비명을 질렀다.
“미쳤어?!”
허리를 두드리려는데 어깨가 붙들렸다. 그레닉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레…… 닉?”
그의 뒤에 보이는 건 리한이었다. 마탑주의 손자, 현재 란델에서 가장 강한 마력의 소유자라는 그가 힘을 써 그녀를 끌어 올린 것이었다.
리한의 옆엔 라골과 그리고…….
“길리안.”
트리거 공작의 장자, 그웬가엔 다시없을 원수인 길리안이 팔짱을 낀 채 살벌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길리안을 불러온 건 라골이었다. 그레닉으로부터 루펠라가 오늘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다는 말과 그간의 사정에 대해 들은 라골은 루펠라의 계획을 간단히 눈치챘다.
평생을 보아온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궁지에 몰리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모를 만큼 무지하지 않았다.
진저와는 연락이 되지 않고 그녀를 설득하고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길리안뿐이었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루펠라를 구한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진저는 호적상의 남매, 빼도 박도 못할 오빠였고 라골은 심정상의 남매였다. 그는 지혜로워서 뭐든 상담할 수 있었다. 평생 보아온 그를 루펠라는 또 다른 오빠라고 여겼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몇 년 전만 해도 오빠가 하나 더 있었다. 루펠라가 길리안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길리안도 지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라골을 향해 소리쳤다.
“네가 불렀어?!”
라골이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팔짱을 낀 채 루펠라를 보고 있던 길리안이 말했다.
“말해.”
그가 어떤 말을 원하는지 루펠라는 알고 있었다. 이 일의 진상, 그리고 그가 진저와 그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는 그것을 말하라 종용하는 것이다.
“싫어.”
“네 입으로 말해.”
“싫어! 이 배신자! 한 번 배신한 놈이 두 번은 못 하겠어?!”
“루펠라!”
“너 같은 놈을 믿은 오빠가, 내가!”
배신자부터 천하의 몹쓸 놈, 개새끼, 소 새끼를 찾던 루펠라는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데, 그가 또 배신할까 봐 겁이 나 죽겠는데 트리거의 힘이라면 이 상황을 타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길리안이 등을 돌렸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다면 몰라도 된다는 듯이.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도와줘!”
길리안이 등을 돌리고 리한과 라골, 그리고 그레닉까지 울음을 터뜨린 그녀에게 집중하였다.
“도와줘. 카르트 후작이 오빠를 죽일 거야…….”
그녀는 배신하지 말아 달라 애원했다. 지금껏 무례하게 군 건 제가 빌 테니 제발 오빠를, 그리고 자신과 그레닉을 살려 달라 울부짖었다.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된 라골과 그레닉이 이를 갈았다. 리한 또한 ‘개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길리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래, 내가 그 녀석을 찔렀어.”
“나쁜 놈.”
“그때 나도 같이 찔렸지.”
“…….”
“원한다면 가문의 명예, 내 목숨까지 거마. 그 녀석을 지키기 위해 죽을 거다.”
루펠라가 울음을 터뜨리며 길리안을 끌어안았다.
떠났던 오빠가 돌아왔다.
밤이 깊어 저택에 도착한 엘리사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진저가 짐을 가지러 달려온 하녀 몇을 향해 눈짓했다.
주인님이 마님의 눈치를 보고 계실 때는 하녀는 물론이고 집사장까지 조심해야 했다. 하녀들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내저에 들어온 엘리사가 걸음을 우뚝 멈춘 채 어둠을 밝히고 있는 촛불을 보았다.
그웬가의 아주 오래되고도 은밀한 전통이었다. 결혼 후 집사 콕스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건 신호였다. 저택의 고용자들이 내저의 변고가 생겼을 때 안주인에게 은밀히 알리기 위해 사용되는 신호. 엘리사가 눈만 움직여 그들을 마중 나온 하녀 무리를 보았다.
“오셨습니까, 마님.”
뒤이어 들어온 진저가 굳어 있는 아내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아…… 니에요.”
촛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가주 모르게 마님에게만 알릴 일이 있다는 것. 하녀장이 허리를 깊게 굽혔다.
진저를 먼저 돌려보낸 엘리사가 집사장의 집무실 옆, 쪽방을 찾았다. 그곳에도 불이 켜져 있었는데 콕스를 비롯한 라골, 그리고 손님들까지 좁은 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후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엘리사가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터질 듯 붉어진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엘리사가 말했다.
“그래서 이 일은 비밀에 부쳐 달라.”
그녀의 말에 길리안이 답했다.
“저택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언제고 공작 부인의 귀에 들어가겠지요. 그때를 위해 말씀드렸을 뿐, 공작 부인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서 각하를 모셔오세요.”
그녀가 라골과 콕스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허락 없이 손님, 그것도 공작가의 영랑을 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목숨과 관련된 일에 그의 의사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자를 방관하고 있었다.
“공작 부인.”
“허락 없이 내저를 침범한 무례는 잊지요.”
길리안은 그녀가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의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에게 이 일을 알리지 말자고요?”
“저희끼리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대는 오만하군요. 한 가문의 가주가 목숨을 건 일이에요. 내 남편의 목숨뿐 아니라 후작의 목숨도 걸려 있는 일에 실수는 허락되지 않아요. 그런데 당사자가 이 일을 몰라야 한다니요.”
조금이라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다면 불상사는 모두 남편의 몫이었다.
그가 남편을 살리고자 애쓰겠다는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남편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제 모든 것인 그의 목숨이 달린 일에 티끌만 한 의심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래서 멍청한 짓…… 하지…… 말라고…… 한 거다…….”
길리안의 옆에 앉아 있던 이는 안면이 없는 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검은 로브와 말버릇으로 그가 누구인지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마탑주의 손자이자 현재 란델에서 제일가는 마법사. 그리고 남편의 지기인 리한이 분명했다.
곧이어 진저가 도착했다. 그는 라골을 통해 상황 설명을 듣고는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그 녀석은 죽겠다 설치고, 나와 내 아내의 허락 없이 타 가문의 영식들이 내 저택을 범했다?”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가주와 안주인의 허락 없이 길리안과 리한이 저택을 찾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리한이야 길리안과 함께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끌려왔으니 억울할 만하지만 라골과 길리안은 아니었다.
주인이 없는 새 길리안을 불러들인 라골과 이 일이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음을 알고도 저택을 찾은 길리안은 후일을 위해 벌함이 마땅했다.
“벌해주십시오.”
라골이 말했다.
“그리고 살아주십시오.”
진저가 이마를 짚었다. 멍청해도 저렇게 멍청할 수가 없다. 라골은 저리 우직한 사람은 아니었다. 성실하긴 했어도 머리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껏 그를 믿고 저택의 비밀을 공유했던 것이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보았던가. 이해는 했다. 라골과 자신, 그리고 루펠라는 태어난 이래 평생을 함께 지내왔다. 라골에게 루펠라가 어떤 의미일지 모르지 않았다.
“주인…….”
“소설 쓰지 말고 닥쳐.”
일단 제일 큰 문제는 카르트 후작이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뒷감당이 어려운 방법을 택했단 건 더 이상 그에게 패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일을 넘기더라도 다음엔 더 큰 무리수를 둘 터. 자신을 잡기 위해 루펠라까지 이용했다. 다음엔 어떤 것을 이용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겐 아내라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아내를 이용해 검을 겨눈다면 그는 속절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루펠라와 약속했다. 너를 지키겠다고.”
“미친 새끼야.”
친구란 것들이 단체로 약을 처먹었는지 토 나올 얘기만 주절거렸다. 진저가 역겹다는 듯 그들을 쭉 노려보았다. 리한은 저는 그런 적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진저는 그가 쪽방에 들어온 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내를 흘깃 쳐다보았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새파란 얼굴로 겨우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저가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자 사고를 친 라골과 길리안, 그리고 콕스까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웬의 영애를 위해 모여주신 것에 안주인으로서 감사를 표합니다.”
사내들이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지켜보았다.
“초대객들을 이런 쪽방에서 모실 수야 없지요. 콕스, 손님방을 정리하도록 하세요.”
“예?”
“마…… 님?”
라골과 콕스가 되묻자 그녀가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객을 잘 모셨군요.”
진저가 입꼬리를 올렸다. 라골은 그녀의 수행인이었다. 그러니 오늘 길리안과 리한이 저택을 찾은 건 제 명인 걸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라골은 주방에 술상을 준비하라 이르도록 하세요.”
엘리사가 몸을 일으키자 사내들도 주춤주춤 그녀를 따랐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건 리한뿐이었다. 마탑으로 돌아가겠다고 중얼거리는 그를 끌고 나온 건 길리안이었다.
“목숨…… 을 걸겠…… 다고…… 한 건 넌데…… 왜 나까지 귀찮아…… 져야…… 되냐.”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친구에게 검을…… 꽂은…… 놈이 할 말은…… 아닌데…….”
루펠라와의 일로 길리안이 진저를 찔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한의 핀잔에 길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제 방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방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루펠라를 발견했다.
그녀는 엘리사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엘리사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스쳐 지나가 방문을 열었다.
엘리사의 뒤를 쫓아 방으로 들어가려던 루펠라가 엘리사에 의해 가로막혔다.
“어, 언니!”
“내 방에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지 않았어요.”
“화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오빠보다 먼저 언니에게 사과하려고…….”
“그래서? 나에게 먼저 사과하러 왔으니 화를 풀어야 한다는 건가요?”
“언니…….”
“내 남편을 위해 죽으려 했으니까 난 화낼 자격도 없어요?”
“…….”
방문을 사이에 둔 두 여자는 동시에 눈시울을 적셨다.
“어떻게 그래요? 루펠라는 내게 남편의 동생이 아닌데, 루펠라에게 난 오빠의 아내일 뿐이었나요?”
“그런 건 아니에요! 언니, 그건 정말……!”
미안하다, 아니다, 생각이 짧았다,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엉엉 울며 두 여자는 투덕거렸다.
그녀들을 멈추게 한 건 삐딱하게 고개를 젖힌 채 다가온 진저였다. 그는 루펠라를 빤히 응시했다.
저거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저것도 여자라고 한 대 맞으면 골로 갈 것 같았다.
루펠라도 지은 죄는 아는지 진저의 마뜩잖은 시선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너 외출 금지.”
“…….”
“사재 사용도 금지.”
“…….”
“연무장 출입 금지.”
“…….”
“내일부터 라골에게 정신수양을 받아라.”
“그건……!”
라골의 정신수양은 실수를 한 고용인이나 루펠라가 진저도 수습하기 어려운 사고를 쳤을 때 내리는 벌 중 하나였다.
진저가 살벌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말대꾸를 하려던 그녀가 깨갱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
“언니에게 할 말이 있는데…….”
“내 아내 눈에서 눈물 나게 했으니 네가 좋아 죽는 그놈은 바지를 지리도록 뺑이를 돌려주지.”
“칫, 돌아가면 되잖아!”
루펠라가 쿵쿵 발을 구르며 방으로 돌아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내가 정말 미안해한다고 전해줘.”
진저가 흥, 콧방귀를 뀌고는 아내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내는 얼굴을 가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손목을 따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진저가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혔다.
“엘리사.”
그녀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속이 상해 참을 수 없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죽을 결심을 하였겠는가. 그런 루펠라를 알지 못했다는 게 괴로웠다.
“반성하고 있대.”
“제가……. 제가 제일 힘든 건…….”
그녀의 고뇌를 알았어도 엘리사가 해줄 일이 없을 거라는 것이다.
만약 엘리사 자신이 남편과 그레닉 중 하나를 선택하라 강요받았다면, 엘리사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남편을 택했을 거라는 게 가장 무섭고 괴로웠다.
진저는 자신을 선택할 거라는 엘리사의 말을 듣다가 픽 실소를 흘렸다.
“그럼 당연히 나지.”
“그게 아니라……. 루펠라가 사랑하는 사람인 걸 알아도 고민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예요.”
“그건 루펠라보다 나라는 건가?”
“웃지 말아요.”
엘리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런 아내가 귀여웠다. 사람이 이기적인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엘리사와 루펠라는 입장부터 전혀 달랐다. 루펠라와 자신은 평생을 남매로 지낸 사이였고,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세상에 유일한 가족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카르트 후작은 그레닉과 루펠라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려는 두었겠지.
하지만 목숨만 붙여 놓았을 것이다. 자신보다 카르트 후작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루펠라였다.
“그 녀석에겐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어. 카르트 후작이 그 녀석을 몰랐던 거지.”
“하지만…….”
“당신이 루펠라를 위해 죽으려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녀석에 대한 마음이 거짓인 건 아니야.”
“…….”
그가 엘리사의 코끝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쩌나. 앞으로 더 힘든 일이 많을 텐데.”
“……카르트 후작은요? 어떻게 할 거예요?”
“목숨 걸고 지켜준다는 놈들이 있잖아. 목숨 걸고 지켜보라고 할 거야.”
“여보!”
엘리사가 그의 어깨를 찰싹 내려쳤다.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서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엔 하녀가 미리 준비해 놓은 세숫물과 세안제 등이 있었다.
그는 아내의 겉옷을 벗기고 하나로 올린 머리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손에 물을 적셔 엘리사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가만히 있어.”
“여보!”
“생애 최초라고.”
단 한 번도 누구를 씻긴 적이 없었다. 씻겨 보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부드러운 뺨에 물에 젖은 손이 닿을 때마다 아내는 몸을 움찔거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엘리사가 울상을 지은 채 속으로 절규했다.
‘화장이 지워지잖아요!’
사랑을 자각하고 난 뒤로 남편에겐 예쁜 얼굴만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가 남편의 양 손목을 꽉 붙들었다.
멍하니 엘리사를 보고 있던 진저가 웃음을 터뜨렸다. 화가 났던 것도 잊고, 씻겨주는 것보다도 화장이 지워지는 것을 우선하는 게 우스웠다.
진저가 손에 힘을 빼자 엘리사가 눈치를 보며 수건을 찾았다.
“맨얼굴은 항상 봐왔어.”
“……잊어주세요.”
“푸하!”
진저가 허리를 접은 채 끅끅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분들이 와 계시잖아요. 어서 돌아가 보세요.”
“이제 안 울 건가?”
“네…….”
얼굴에 물기를 다 제거한 엘리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좋아진 후로는 모든 게 부끄러웠다. 마치 그란디아의 신화에서 나오는 여신, 칼리네처럼.
그러고 보면 남편의 머리카락 색은 여신, 칼리네가 사랑했던 그 사내와 똑 닮았다. 작열하는 태양과 같은 빨강. 붉디붉어 손을 대면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엘리사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남편을 빤히 응시하다가 풋, 하고 실소를 흘렸다.
“왜?”
“아, 뭐가 생각이 나서…….”
“무슨 생각?”
진저는 스스로가 점점 애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른 이성에게 닿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참기도 싫었고.
얼마나 애 같아지는지 루펠라를 위해 그레닉의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울컥 화가 치밀었다.
가장 우스운 건 자신이었다. 이렇게 이상해지는 자신이 싫지 않다는 것. 그게 가장 우습고 이상했다.
“그게…….”
“말해.”
“놀리면 안 돼요…….”
“뭔데 그래?”
엘리사는 그렇게 말하고도 한참을 우물쭈물하였다.
“안 놀려. 뭔데 그래?”
“그란디아의 신화인데요.”
여신, 칼리네는 대지의 신과 바다의 여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대지에도 바다에도 속해 있지 않아 모든 신과 만물에게 외면받았다.
자존심 강한 여신이었던 그녀는 자신이 천덕꾸러기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만을 위한 종족을 만든다.
종족의 이름은 레스칼포네. 신어로 칼리네에 의하여 만들어진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여신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레스칼포네는 신에 버금가는 마력과 굉장한 지혜를 가지고 있어 땅의 존재들에게는 경외를, 하늘의 존재들에게는 미움을 사게 된다.
레스칼포네족이 믿는 신은 칼리네가 유일하였다. 그들은 신들의 왕, 포타디움조차 우러르지 않고 일 년 중 단 3일을 남겨놓고 모든 날을 칼리네를 위한 제로 보냈다.
칼리네는 만족스러웠다.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므로 그녀의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마음속의 구멍은 신이라 할지라도 메울 수 없었다.
레스칼포네족이 그녀를 위한 제를 지낼 때마다 그 구멍은 넓어지고 더욱 깊어졌다.
칼리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를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고, 그 사람들은 어떤 만물보다도 위대한 작품으로 신들 또한 부러워하였다.
그런 자신이 어째서 외로워야 하는가. 외로움에 사무쳐 가슴의 구멍은 매일같이 깊어져 가는가.
외로움이 미움으로 변질되는 건 순간이었다. 그녀는 이제 의미가 없어진 피조물들을 세상에서 지우려 들었다.
애초에 자신이 만든 것, 부수는 것도 자신의 몫이라 믿었다.
그때, 레스칼포네족의 첫 족장이 삶을 다하고 하늘의 품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족장이 된 자는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그의 이름은 리오테넌. 태양을 담은 붉은 눈동자와 붉은 머리의 소유자였다.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춘 그는 신에 버금가는 마력과 신도 번번이 골탕을 먹는 지혜를 무기로 레스칼포네족의 영토를 넓혀갔다.
그의 창과 검, 활 앞에 적들의 목숨은 맥없이 사라져 갔다. 땅의 것들은 리오테넌을 전쟁의 신이라 불렀다.
신들마저 그의 빛나는 재능에 관심을 가지고 지상에서 제일가는 호남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레스칼포네족을 없애려 했던 칼리네조차 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와 조우한 이후 대지의 신과 바다의 여신의 딸로 세상에 태어나 이제껏 가지지 못한 게 없던 여신, 칼리네에게 변화가 생겼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달콤했다. 언제나 들었던 의미 없는 말에 목부터 귓불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태양보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낄 때, 그녀는 가슴의 구멍에서 어떠한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리오테넌과 만난 이후 칼리네의 시간은 모두 그로부터 시작해 그로 인해 끝나게 되었다.
“당신이 그 여신 같다는 말인가?”
신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진저가 엘리사의 목부터 귀를 매만졌다.
“당신과 닮아서요. 리오테넌 말이에요. 당신도 검과 활을 잘 다루고, 전술에 뛰어난데도 빛나는 재능을 가졌잖아요. 붉디붉은 머리칼과 눈동자도 마찬가지고요.”
진저는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남편을 뛰어나다고 말하는데 싫어할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어쩐지 리오테넌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었다. 그란디아의 신화 따위 들어본 적도, 들을 마음도 없었던 그로서는 왜 그 이름이 익숙한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엘리사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리오테넌 3세. 그란디아의 건국왕이죠.”
“아아, 건국 신화였군. 그래서 나와 닮은 그자는 어떻게 됐지?”
엘리사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년이었던 리오테넌이 청년이 되었다. 칼리네는 그때까지도 레스칼포네를 세상에서 지우지 않았다.
리오테넌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녀는 제 존재가 생긴 이래 최초로 결정을 번복했다.
청년, 리오테넌은 레스칼포네의 대족장으로 수많은 땅과 강, 호수, 바다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헬렘으로 레스칼포네족이 아닌 칼리네의 모신 형제인 바다의 신, 헥타스의 제사장이었다.
헥타스가 가장 사랑하는 제사장이었던 헬렘은 헥타스의 인도로 리오테넌와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때까지도 칼리네는 그녀가 제 피조물을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리오테넌과 헬렘은 조촐히 언약식을 가진 뒤 여드레간 불타는 사랑을 나누었다.
천막도 치지 않은 황야에서 그들이 사랑을 나눌 때마다 꽃이 피고, 샘이 생겼으며 요정들이 노래를 불렀다.
칼리네는 리오테넌과 헬렘이 서로 이어져 황홀한 한숨을 쉴 때마다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질투의 불씨에 온몸이 타버려 여드레가 지난 이후 새하얗던 피부가 검게 변했다.
호수에 비추는 자신의 얼굴을 본 뒤에야 칼리네는 절규했다. 깨닫고 만 것이다. 그녀가 피조물을 사랑한다는 것을.
칼리네는 마음을 자각한 후 즉시 아이를 가진 헬렘을 저 먼 땅으로 내몰았다.
리오테넌은 연유도 모른 채 아내를 빼앗겼고, 헥타스의 제사장으로 고귀한 몸이었던 헬렘은 가장 미천한 신분이 되었다.
아름답고 연약한 헬렘은 단숨에 저 먼 나라 왕의 마음을 빼앗았고, 그에게 능욕당해 리오테넌의 아이를 잃었다. 그리고 아이를 잃은 그날 헬렘이 자진했다.
훗날 그 소식을 들은 리오테넌은 슬픔과 분노로 미쳐 버렸다. 현명하던 젊은 왕은 폭군이 되었다. 살육, 살육, 살육. 지상은 폭군으로 인해 산지옥이 되었다.
결국 신들은 땅의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해 지혜를 가진 것들을 모두 없애기로 했다.
신과 인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폭군의 군대는 칼리네가 준 마력과 지혜를 무기로 신에게 맞섰다. 칼리네 또한 사랑하는 리오테넌의 편에 섰다. 그녀뿐만 아니라 인간을 몹시 사랑하는 신들 또한 인간의 쪽에서 검을 들었다.
50년간 전쟁을 벌였다. 신들에겐 눈 깜짝할 새였으나 사람에겐 그렇지 아니하였다. 결국 폭군의 군대가 백기를 들었다.
가장 선두에서 무릎을 꿇은 자는 리오테넌이었다. 소년이었던 리오테넌이 가슴이 갈가리 찢겼던 청년의 때를 지나 중년으로, 종내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되었다.
리오테넌이 죽고 인세엔 화산, 클라디라움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튀어나왔다. 지혜를 가진 모든 것이 죽었다.
칼리네는 그제야 깊이 후회했다. 리오테넌의 남은 뼛조각을 껴안고 960일간 눈물을 흘렸다.
타들어 갔던 땅과 마른 호수와 샘이 그녀의 눈물이 닿자마자 본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칼리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리오테넌의 남은 뼛조각은 넣어 피조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마음을 잃을 정도로 사랑했던 헬렘의 시체가 바스러졌던 땅의 흙으로 다른 피조물을 만들었다.
“리오테넌의 뼛조각으로 만든 자의 이름은 아리온이에요. 리오테넌 3세라 불렸던 그란디아의 건국왕이죠.”
“그런 걸 다 기억하고 있나?”
“어제도 읽은 책이거든요. 건국신화 좋아해요.”
엘리사가 테이블에 있던 책을 들췄다.
“헬렘의 시체가 바스러졌던 땅의 흙으로 만든 이의 이름은…….”
엘리사가 칼리네의 새로운 피조물의 이름을 말하려던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콕스가 들어왔다. 그는 길리안이 진저를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엘리사가 서둘러 진저를 내보냈다. 진저는 가기 싫은 듯 몇 번이나 혀를 찼다.
“당신도 와.”
“저도요?”
“궁금할 거 아냐. 그 녀석들 계획이.”
“아, 네.”
엘리사가 그를 따라 문을 나섰다.
주인 없는 침실에 거친 바람이 들이닥쳤다. 엘리사가 놓아두었던 건국신화 책의 페이지가 몇 장 넘어갔다.
「……헬렘의 죽음을 감싸 안은 땅의 흙으로 만든 피조물. 칼리네는 그것에 ‘엘리사’라 이름 붙였다. 아리온과 함께 자라 그의 아내가 된 엘리사는 첫 아이를 낳고 명을 달리했으나, 그녀를 안타깝게 여긴 헥타스가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을 닮은 성수를 만들어…… 성수의 이름은 ‘기하스엘’로…….」
* * *
엘리사는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진저는 그런 그녀가 귀여운지 어깨를 감싼 채 그녀의 볼에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그의 스킨십에 기겁한 엘리사가 얼른 그를 밀어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부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부부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의 어깨를 찰싹 내려쳤다.
“왜?”
“사람 눈도 많은데…….”
“없는 곳이라고 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이이가 정말!”
진저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왜 제가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
오늘은 신년 봉사회의 발족식이었다. 그웬가가 모의 전투에서 우승을 하게 된 탓에 그녀가 봉사회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할 것을.’
명예보다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참다못한 엘리사가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남편은 발족식 행사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제가 사탕이라고 되는 것처럼 물고 빨았다. 부끄러워서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옆에서 귀부인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웬 공작이 미친 게 아니냐, 공작 부인이 무슨 매력이 있어서 공작을 저리 휘어잡고 사느냐, 공작 부인한테 잘 보여야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였다.
긴장을 풀면 울상이 되었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지만 부끄러웠다. 엘리사가 푹 한숨을 쉬고 있는데 어깨에 손이 닿았다.
루펠라였다. 발족식을 축하하러 온 모양인지 그녀 곁에 있는 그웬의 하인들이 커다란 화분과 꽃다발을 각각 들고 있었다.
루펠라와 엘리사는 아직 화해를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루펠라의 자살미수 사건이 일어난 후로 아직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엘리사는 발족식 준비며 카르트 후작의 일로 바빠 그녀를 볼 겨를이 없었다.
루펠라도 나름대로 반성을 하는 모양인지, 아니면 엘리사가 바쁜 와중에 자신까지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 엘리사를 찾지 않았다.
오늘은 엘리사가 그녀의 이름을 내건 첫 행사 날이었다. 시댁 식구라곤 루펠라 하나인데 그녀가 참석하지 않으면 엘리사가 창피를 당할 게 분명했다.
루펠라가 어색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가리켰다.
“언니랑 어울려서…… 분홍색 장미.”
“아…… 네.”
친동기간보다 사이가 좋았던 시누올케가 어색해지자 주위 사람들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엘리사는 진저를 제외하면 친구는 물론이고 지인과도 싸운 적이 없었다. 늘 일방적인 시비였으므로 화해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루펠라는 엘리사와 다른 의미로 화해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그레닉 외에 다른 이들과는 싸워도 화해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다시 보지 않아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생각에 사과 따윈 하지 않았다.
루펠라가 이렇게 눈치를 보는 건 굉장히 드문 경우였다. 아니, 이런 자리에서 저토록 기가 죽은 것조차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엘리사는 그게 불편한지 연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공작 부인.”
그때, 길리안이 다가왔다. 트리거 공작 부인을 대신해 발족식에 참가한 것이다.
“닷새 만에 뵙는군요.”
“네.”
“예정 없이 초대를 청한 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지기 간에 긴히 나눌 말씀이 있었던 게지요.”
길리안의 등장으로 엘리사와 루펠라의 관계에 금이 갔다느니 하며 입방아를 찧던 자들이 잠잠해졌다.
‘그웬 공작 부인이 4공가와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 봐요.’
‘트리거 경은 이전부터 그웬 공작과 막역한 사이였잖아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물론이고 트라노이 영애와도 잘 지내더라고요. 이번 부부 동반 나들이도 두 부부만 다녀오려고 했다나 봐요.’
‘참, 일전에 트리거 공작 부인이 그웬 공작 부인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트리거 공작 부인이요? 그분은 파티나 행사에 잘 참가하지 않으시잖아요.’
‘아콘 백작 부인이 그웬 공작 부인을 두고 입방정을 떨었나 봐요. 대놓고 편을 들더라고요. 성품이 훌륭하다나?’
귀부인들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엘리사는 자신에게 이목이 주목되는 게 불편했다. 이유가 행사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귀부인들이며 영애들이며 하나같이 계산적인 시선을 보냈다.
어느 줄이 더 안전하고, 어느 줄은 위험하다는 것을 판단하기 시작할 때 사람은 교활해진다. 어릴 때부터 교활한 자들에게 상처받아왔던 엘리사로서는 자신이 그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은 웬만해선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사의 어깨 위로 팔이 올라왔다. 익숙한 향기가 느껴지자 안심이 되었다.
“괜찮아?”
남편이었다. 엘리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런 징그러운 시선쯤은 견딜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집이자 태양이었다. 있을 자리를 내어주고 늘 따사로운 볕을 쐬게 해주었다. 그러니 그녀 또한 그에게 무엇이든 선물함이 옳았다.
길리안은 진저가 다가오자 순식간에 표정이 변한 엘리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다지도 안심이 되어 보인단 말인가.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그웬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일까.’
왜 당신만을 쫓게 되는 것일까. 사소한 친절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남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갑갑한 걸까.
……마치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길리안의 눈이 엘리사의 뒤를 떠날 줄 몰랐다.
“……가요?”
“…….”
“경!”
“아.”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건 위험신호였다. 이성이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장난이 아니게 될지 모른다고.
그녀와 관련된 일에선 진저 녀석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그러한 까닭에 늘 그녀를 두고 녀석과 장난스러운 대거리를 벌였다.
그래, 반쯤은 장난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반은 진심이었단 말인가.
닷새 전 보았던 엘리사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휘젓고 있었다.
“경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낯이 익은 여성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일전에 그의 부친으로부터 소개를 받았던 여성이었다.
트리거 공작은 내심 이 아가씨가 길리안의 처가 되길 바랐다. 성품이며 집안, 자태까지 흠잡을 게 없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길리안은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일전에 뵈었을 때는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아쉬웠거든요.”
그녀는 호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님께서도 경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고…….”
“아, 예.”
미쳤다. 정신이 나갔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일어나는 그웬 부부의 일이 궁금해서 도무지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뱀처럼 간교하다는 말을 지겨울 정도로 들었건만 이 여자의 성이 무엇인지, 부친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다면 이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날 있었던 대화가 모두 떠올랐을 텐데.
“공작 부인께는 인사를 드렸어요. 그…… 경께서 좋아하는 음식을 알려주신다고…… 괜찮을까요?”
나무랄 데 없는 여성이었다. 길리안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기쁘군요.”
여성은 두 손으로 입매를 가리며 기뻐했다. 적극적인 여성은 언제나 그를 즐겁게 했다. 외모도 훌륭했고, 부친이며 모친 모두 원하는 며느리상이었다. 이 정도면 결혼을 해도 아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자리를 떠나도록 온 신경은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화를 하면서도 그웬 부부가 나누는 말이 더 크게 들렸다.
등을 돌리자 진저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웃고 있었다. 엘리사 또한 눈을 휘며 길리안과 대화를 나눴던 여성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았다.
“러슈어 후작가면 나쁘지 않지.”
그제야 길리안은 그녀가 러슈어 후작의 고명딸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스 러슈어. 수도 남성 중 절반은 그녀 때문에 눈물을 흘려봤을 거다.”
“넌 그게 문제야. 매사 부풀려 말하지.”
중앙기사단의 카발디와 왕궁의 행정관인 요셉이었다. 그들은 리한, 길리안을 포함한 진저의 악우들로 어렸을 때부터 수도를 휘젓고 다닌 악동들이었다.
카발디와 요셉은 진저의 결혼식에 참석한 자들이었다. 엘리사는 익숙한 면면을 보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부인은 그새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카발디가 엘리사에게 손등을 내어주길 청하자 요셉과 길리안이 그의 머리와 등을 각각 후려쳤다.
진저 또한 아내의 행사장만 아니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 뜨거운 눈빛으로 카발디를 노려보았다.
“아, 손등 키스는 존경의 의미, 악!”
결국 진저에게 장딴지를 걷어차인 카발디가 주저앉았다.
“여보!”
엘리사가 그를 타박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한 발 더 나가려던 진저의 다리가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카발디와 요셉이 입을 쩍 벌렸다. 세간에 들리는 소문은 소문 부풀리기 좋아하는 놈들의 작품이라 여겼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장면을 보게 되다니.
카발디는 또다시 호들갑을 떨었다.
“목줄? 목줄 매고 있냐? 응? 어디 있어?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거야?!”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입 닥쳐.”
“여보, 고운 말이요.”
그러자 또 진저가 입을 다물었다.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지만 이 정도면 엄청난 변화였다.
카발디가 가슴을 움켜잡았다.
“너무 충격적이라 심장이 멈춘 것 같군.”
보다 못한 요셉이 그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후려쳤다.
“죽어, 이 새끼야.”
“내 아내 앞에서 욕은 삼가라.”
요셉의 말에 진저가 눈을 부릅떴다.
길리안이며 요셉, 카발디까지 말을 잃었다. 정말 진저 그웬이 맞는 걸까. 영혼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렇게 벼락 맞을 짓을 하고 다녔는데 영혼이라도 바뀌어야 죗값을 치를 수 있을 거다.
“뭐냐, 이 팔불출은?”
요셉이 길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길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팔불출이 아니라 공처가지.”
카발디가 요셉의 말을 거들었다.
그제야 엘리사는 자신이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생겼다. 남편의 지기 앞에서 남편의 기를 죽인 게 아닐까.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에 친구분들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그녀보다 진저가 빨랐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흥, 콧방귀를 뀌었다.
“모시고 살 아내도 없는 것들이.”
“뭐?!”
“허…….”
“…….”
“결혼을 해야 진정한 사내가 되는 거다.”
“이 새끼 미쳤나 봐.”
“제정신이 아니군.”
“…….”
진저는 더 이상 나눌 말이 없다는 듯 아내를 끌고 사라졌다. 엘리사가 어쩔 줄을 모르고 뒤돌아보았지만 진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진저가 그녀를 놔주었다. 이상하게 아내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감이 들었다.
엘리사는 표정을 구기고 있는 남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친구분들이 걸리시면 먼저…….”
“아니야.”
“네?”
“나도 불편한 곳을 모르겠군.”
길리안의 시선이 왜 그렇게 불쾌했는지 그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사는 속도 모른 채 남편의 몸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침을 너무 먹였나?’
생각해 보니 오늘 메뉴는 남편이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행사장에 오기 전까진 괜찮았는데…… 아, 혹시 사람 많은 곳이 부담되나?’
엘리사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귀여웠다. 진저가 그녀의 귓바퀴에 입을 맞췄다. 야릇한 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져서 엘리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장난치지 말아요…….”
“시작은 언제 해?”
그녀가 벽에 걸린 커다란 괘종시계를 보았다.
“한 십오 분 정도면 시작해요.”
“그럼 마차로 돌아가 있을까?”
“정말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 당신과 둘만 있고 싶어서.”
엘리사가 그를 밉지 않게 흘겼다. 걱정하게 해놓고 뻔뻔하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도 입 맞추게 해주던가.”
“풍기문란으로 잡혀갈지도 모른다고요. 당신 친구분이 중앙기사단에 계신다면서요.”
“그 녀석은 신경 쓰지 마.”
“아, 그런데 저는 그분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결혼식에선 인사만 나눈 정도라…….”
진저가 길리안과 요셉, 카발디가 대화를 나누는 쪽을 흘깃 돌아보았다.
진저가 카발디를 가리킨 채 말했다.
“불한당.”
그리고 그 옆에 요셉을 가리켰다.
“개자식.”
남편이 친구를 말하는 호칭에 놀란 엘리사가 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친구를 그렇게 부르면 어떡해요…….”
불한당 경이나 개자식 경은 도저히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엘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궁에 속한 이들은 성을 붙이지 않는다면서요?”
“귀족이든, 평민이든 왕하에 있는 자들은 모두 왕의 것이라는 의미지.”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중앙기사단에서 일하는 분의 이름은 카발디, 그리고 행정관인 요셉.
“카발디 경과 요셉 경이라 부르면 되겠네요.”
“요셉은 기사 작위를 받지 못했어.”
요셉은 머리와 운동신경이 반비례하는 놈이었다. 고삐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자가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술에 취해 말을 타보겠다고 나섰다가 말 궁둥이에 매달린 채 상점가를 몇 바퀴나 돈 놈이었다.
그마저도 카발디 녀석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진즉 명이 다했을 터였다.
“사이가 좋으시군요.”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로는 불한당이니 개자식이니 하지만 친구와 만난 뒤로 남편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길리안이 처음 저택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루펠라의 말로는 아주 괴로운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도 두 남자는 변함없이 사이가 좋았다.
“저 녀석들? 악우지.”
“트리거 경도 그렇고, 모두 당신을 많이 아끼는 것 같아요.”
“그 녀석이 날 아끼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군.”
진저는 아내가 트리거가와 얽힌 일을 모르길 바랐다. 그녀가 더 이상 자신과 관련된 일로 아파하길 바라지 않았다.
아내는 심성이 선한 사람이라 지나간 일에도 저 대신 슬퍼했다. 진저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자신을 보는 그녀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곧 식이 시작하잖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하고 와.”
엘리사는 긴장이 돌아오는지 들숨 날숨을 반복했다. 그녀가 울상이 되어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열심히 준비했잖아. 축사는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달달 외웠고.”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어제 하루 종일 축사를 외우더니 발족식 오는 길에 마차에선 호흡까지 조절해가며 축사를 달달 외웠다.
그녀가 쓴 글과 축사가 일치하는지 봐주던 진저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내는 뭐든 잘하지만 기억력이 특히 좋았다.
이미 팔불출계의 거물이 된 진저는 흐뭇한 표정으로 아내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엘리사가 단상으로 향하자 길리안과 카발디, 요셉이 다가왔다.
“단상 뚫어지겠군.”
“누가 공처가 아니랄까 봐.”
카발디와 요셉이 이죽거렸다. 진저가 카발디를 향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서 그 주둥이 찢어지고 싶나?”
“제수씨!”
진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발디가 엘리사를 불렀다. 단상에 올라가려던 그녀가 멈칫하여 사내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자 진저가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어어, 손 올라간다! 제수씨, 여기……!”
결국 요셉이 그의 입을 막았다. 학창 시절에도 카발디가 사고를 치면 수습하는 건 요셉의 몫이었다.
그때는 이 분노 조절 장애, 눈치 고자가 진저의 기분을 살피던 때였다. 하기야 당시의 진저는 지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날이 서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 수많은 목숨을 빼앗고 산 귀신처럼 지내던 때였다.
요셉은 진저의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되레 그 무섭던 놈을 사람으로 만들어준 공작 부인을 향해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진저 그웬이 사람다워졌다. 그것만으로도 엘리사는 카발디와 요셉의 은인이었다.
“내 아내의 첫 행사다. 망치면 정말 사지를 절단 낼 줄 알아라.”
“제수…… 웁!”
카발디는 기어이 한 대 얻어맞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셉이 츳츳, 혀를 찼다.
“그런데 왜 제수씨야? 형수님이지.”
“저 자식이 우리 중에 제일 어리잖아.”
“어리긴. 다 동갑인데.”
“나는 12월생이고, 넌 11월생. 그리고 길리안 저 녀석은 9월생이야.”
“생일로 따지는 거냐? 쪼잔한 놈.”
카발디가 그게 뭐 어떠냐는 듯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옛날엔 진저에게 두들겨 맞고 형님으로 모시겠다던 놈이 이제 생일을 따지며 제가 형님이 되겠다니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요셉이 카발디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넌 입 열지 마라. 듣는 사람 빡치니까.”
“내가 틀린 소리 했냐! 안 그래, 길리안?!”
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괜히 길리안에게 투정이었다.
길리안이 자신을 끼지 말라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내 말이 맞잖아. 저 녀석이 막내지.”
세상에 막내라는 호칭이 저렇게 안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번듯한 옷을 걸치고 있어도 사람 댓 명은 죽이고 온 것 같은 눈빛이었다.
요셉은 맹세할 수 있었다. 카발디, 저 미친놈은 축사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맞다가 요절했을 거다.
축사가 시작되자 진저의 눈이 이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워졌다.
엘리사는 축사를 하는 내내 눈으로 그를 찾았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부부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해졌다.
그 모습을 보던 길리안은 입맛이 썼다.
축사가 끝났다. 미혼의 영애들은 그들끼리, 신년 봉사에 참가하기로 한 귀부인들은 엘리사에게 몰려들었다. 사내들은 각자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정관인 요셉은 바빴다. 요셉은 왕에게 특히 사랑을 받는 자로 주마다 몇 번씩 독대를 하였다. 친왕파며 상단을 운영하는 사내들이 요셉과 술자리를 청하러 모였다.
카발디는 황태자 호위대의 대장이었다.
길리안은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로 앞으로 물려받을 권력이 누구보다 대단할 남자였다.
진저야 말할 것도 없었다. 네 명의 사내에게 다가가기 위한 자들이 거짓말 조금 보태 행렬을 이루었다.
그들은 귀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엘리사와 마주칠 때면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영리한 자들은 이미 엘리사가 어떤 귀부인보다 대단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셉과 카발디는 진저에게 약했고 당사자는 엘리사에게 약했다. 길리안 또한 엘리사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엘리사는 초대를 청하는 귀족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이 제법 익숙하긴 했으나 이렇게 자리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관심은 처음이었다.
안 그래도 발족식이다 뭐다 해서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피곤했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녀의 곤란한 표정을 알아본 요셉이 다가왔다. 요셉의 뒤엔 그의 껌딱지 같은 카발디도 함께였다.
“공작 부인, 누이를 소개하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아아, 그럼요!”
엘리사가 요셉과 카발디와 함께 회장에서 사라지자 그녀에게 줄을 대고 싶어 했던 이들이 모두 입맛을 다셨다.
요셉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휴게실이었다.
“저…… 여긴…….”
“불편해 보이셔서요.”
“아! 감사해요.”
“곧 진저가 올 겁니다. 잠시 쉬고 계시죠.”
“신경 쓰게 했군요. 그런데 누이분은?”
“누님은 이런 자리에 오래 있을 분이 아니시거든요.”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요셉은 그의 친구 중 가장 사려 깊은 자였다. 카발디도 그녀에게 주스를 마시겠냐는 둥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그녀는 고마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은인에게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죠.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은인이요?”
“한번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저 녀석이 공작 부인 덕에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아…….”
엘리사가 부끄럽다는 듯 아랫입술을 물었다.
요셉과 카발디는 그 녀석이 얼마나 사나웠는지 모른다며 혀를 내둘렀다.
지금이야 쉽게 말하지만 이전에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러다 길바닥에서 칼 맞고 죽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말에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오해세요. 그분은 본래 다정하셨답니다.”
“그거야말로 오해입니다. 그 자식은……!”
카발디가 또 푼수를 떨려고 하자 요셉이 그의 발등을 콱 밟아버렸다.
“악!”
“제발 입 좀 닥치…… 다물고 있어.”
사내들은 허물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그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엘리사의 입가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내가 틀린 말 했냐! 그렇잖아. 그놈 좋다고 침대에 들어가려던 여자를 단칼에……!”
요셉이 서둘러 카발디의 입을 막았다. 그제야 카발디는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사색이 되었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요셉은 사색이 된 채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카발디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뭘 봤길래 온몸이 간인 것처럼 겁 모르는 놈이 사색이 되었단 말인가.
등을 돌린 요셉은 카발디가 사색이 된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소리 없이 멍청한 친구의 명치를 팔꿈치로 찍어버렸다.
“그럼 쉬…… 십시오.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다음엔 정식으로 저택에 초대하겠습니다.”
카발디와 요셉이 쏜살같이 휴게실을 나섰다.
휴게실에서 멀리 떨어진 후에서야 카발디가 입을 열었다.
“으아, 무서웠다.”
“많이 무서워해 둬라. 죽으면 공포 같은 것도 없겠지.”
“진저 녀석에게 살해당할 것 같지?”
“몰라서 묻냐.”
카발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공작 부인의 표정이 정말이지 무서웠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은 차가웠다.
하긴 남편의 침대에 들어가려던 여자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죽기 전에 재산 정리해 놔라.”
“그래, 뼈 빠지게 번 돈을 그 아줌마가 가져가는 건 못 보지.”
“백작 부인과는 아직도 사이가 안 좋냐?”
“아들은 내팽개치고 재가했으니 후작 부인이지.”
카발디는 유명한 마마보이였다. 부친은 절대 못 말리는 카발디를 조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카발디와 똑같이 다혈질인 남편을 참지 못하고 이혼했는데, 이혼한 지 9년 만에 카발디보다 고작 8살 많은 사내에게 시집을 갔다.
“이제 어머니 치마폭에서 나올 때가 되지 않았냐. 백…… 후작 부인도 본인 인생 찾아야지.”
“나와 8살 차이라고! 18살 차이면 또 몰라! 그 아줌마보다 11살이나 연하란 말이야.”
“수완이 훌륭하시다고 생각해. 그 미모에 11살 연하가 어디냐. 너랑 동갑인 새아버지 생기지 않은 게 다행이지.”
요셉은 그보다 죽을 준비나 하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때, 진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내 아내는 어디 있지?”
“어? 어어, 어…… 저, 저기.”
카발디가 식은땀을 흘리며 휴게실을 가리켰다.
진저가 이 새끼 뭐 하냐는 표정으로 요셉을 쳐다보았다.
“그간의 정도 있으니 고통 없이 죽여줘.”
요셉이 친구가 살해당하는 현장에 있고 싶지 않다며 사라졌다.
진저가 대체 무슨 이야기냐는 듯 카발디를 쳐다보았다. 진저의 시선이 닿기 무섭게 그는 ‘앗’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그 모습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너 무슨 짓을…….”
“그러고 보니 할 일이 있었네.”
카발디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더니 종내엔 뛰어가다시피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숱한 전쟁을 겪으면서도 뒤로 저렇게 잘 뛰는 놈은 보지 못했다. 진저는 카발디가 사라질 때까지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진저는 회장의 고용인들에게 물어 아내가 있는 곳을 찾았다. 그는 휴게실에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아내의 향기에 저도 모르게 입매가 스르륵 풀렸다.
“엘리사.”
뒤돌아 있던 아내가 그를 쳐다보았다.
“네.”
“도망쳐 왔나?”
“네.”
“요셉 녀석이군. 그 녀석은 섬세해서…….”
“네.”
그녀의 눈이 매서웠다. 천하의 진저 그웬이 오싹해질 만큼.
“무슨 일 있나?”
엘리사는 엘리사대로 기분이 이상했다. 화가 나는데 이걸 화라고 표현해야 할지, 토라졌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혼 전에 있던 일에 왈칵 화를 내버리는 게 옹색해 보일 것도 같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결혼 전에 있던 일이 아닌가.
‘결혼 전에 아무리 난잡하게 놀았어도 지금은……. 그런데 대체 얼마나 난잡하게 논 거지?’
루펠라의 증언 비슷한 것도 있었다. 왜 아직 초야를 치르지 않았느냐고, 설마 오빠가 고자가 된 게 아니냐고, 그렇지 않고서야 초야를 치르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그렇게 난잡하게 놀아나더니 기능을 상실한 게 분명하다고.
그러고 보면 결혼 전에 진저 그웬에 대한 이야기에 여자가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엘리사가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요, 여보.”
“으응?”
엘리사가 자신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다면 진저는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아내를 건드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심하게 놀린 것도 아니요, 그녀의 일을 방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살벌하단 말인가.
무엇보다 아내는 화가 났다고 해서 이렇게 싸늘하게 웃는 사람은 아니었다.
화가 났으면 났다고, 토라지면 토라졌다고 말하고, 말한 후로는 한 시간도 되기 전에 스스로 화를 풀어버리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짐승 같은 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제대로 걸렸어, 병신아.
그는 등줄기에서 샘솟는 게 식은땀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며 본능적으로 출구를 찾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그, 사람들이 찾을 것 같은데…….”
“저와 결혼 전에 말이에요.”
‘여쭤봐도 될까요?’는 분명 의향을 묻는 말일 텐데 아내는 그의 의향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아니에요.”
그러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말 너무 진짜 묻고 싶다는 표정이라 진저조차 궁금할 지경이었다.
진저 그웬은 감이 특히 발달한 사람이었다. 한차례 전처럼 위험이라면 짐승같이 캐치해냈다. 본래 가지고 태어나 전쟁터에서 갈고 닦았다.
그런 감이 다시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엘리사가 입을 다물면 일 난다.
진저가 입꼬리만 조금 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남의 눈치를 본 적이 있던가. 자신이라면 학을 떼는 선대 공작 부인 앞에서도 이처럼 눈치를 보진 않았다.
“무슨…… 일인데.”
그의 말에 엘리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에게 좋은 여자로 보이고 싶어요.”
“당신은 좋은 여자야.”
“이 질문을 하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못 하겠네요.”
그런 말을 하면서도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게 여실히 보였다.
“당신은 어떤 말을 해도 좋은 여자일 거야.”
“……그럼 물을게요. 결혼 전에 여자를 몇 명 정도 만났나요?”
물어보지 말걸.
진저는 1분 전의 자신을 때려눕히고 싶었다.
여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선대 공작 부인이 있었고, 자잘한 사례로도 들은 게 많았다.
제 기사 중 한 명은 어릴 때 함께 지냈던 이웃집 누나 때문에 파혼까지 당했다고도 하고, 하여간 질투란 게 별일을 다 만들었다.
그 또한 그랬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 사내놈이 볼 생각을 하면 부아가 치밀었다.
“오해야.”
그가 냉큼 대답했다.
여자를 몇 명 정도 만났냐고 물었는데 오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오해하기 충분한 대답이었다.
엘리사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진짜야! 오해야! 난 당신 말고 다른 여자는 사랑한 적이 없어.”
“정신적으로는요?”
“그…… 렇지.”
“…….”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여자를 만난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스치는 바람…….”
“바람이요?”
“아니, 내가 단어를 잘못 썼는데 그게 절대 당신과 결혼한 후엔…….”
갑자기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아내와 결혼 후 석 달. 그녀가 앵무새처럼 세 단어만 반복했던 시절. 친구 놈들과 같던 주점이나 휘하 기사들과 놀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 새끼들이 이걸 말했나?!’
엘리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왜 거기서 말을 멈춘단 말인가!
“나와 결혼하고도 만났단 건가요?!”
그는 억울했다.
친구 녀석들에게 끌려갔다. 결혼 소식도 그렇게 늦게 알렸으면서 술도 안 마셔주는 거냐고 애원을 하길래 두어 번 어울려준 게 다였다. 리한을 제외하면 음주가무에 뛰어난 놈들이라 여자가 빠지지 않았을 뿐 몸을 겹치는 일은 절대 없었다.
전투에 나가면 술자리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마련이었다. 그때 빠지지 않는 게 해당 지역의 처녀들이었다. 거절을 하면 영주들이 그웬의 진노를 샀다는 생각을 하고 처녀들을 죄 죽인다든가, 더 달라붙어 온다든가 별 거슬리는 짓을 해왔다.
그웬군은 란델뿐 아니라 타국에서까지 유명한 쑥맥군이었다. 다른 군이라면 좋다고 여자들을 옆구리에 끼고 술을 푸겠지만 그들은 그 지역의 처녀들에게 ‘이름이 뭡니까’, ‘목소리가 참 아름다우십니다’, ‘수, 수,술은 제가 따를 수 있는데’ 등의 병신 같은 짓거리만 했다.
게다가 진저는 온 나라의 미인이란 미인은 다 만나 본 자로서 그의 눈엔 조금도 차지 않는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이걸 아내가 이해할 문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술…… 자리는 괜찮지 않나?
요새 풍기문란을 소리치며 사내들이 주점에 가는 것도 막아야 한다는 소리가 있던데…….
진저는 몰랐다. 답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혼쭐이 나게 된다는 것을.
“아니, 그,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존대까지 나가고 있었다.
“오해십니다.”
“…….”
엘리사가 후,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몇 번?”
“…….”
“몇 번!”
“세, 아니, 네 번…….”
“언제?”
“길리안 녀석들과 두 번, 그리고 기하스엘 토벌에 나가서 두 번…….”
“잤어요?”
“안 잤어!”
“키스는?”
“안 했지! 절대 안 했지!”
“포옹은?”
“난 체질적으로 여자와 포옹이 안 돼.”
“당신 몸엔 닿았어요?”
“…….”
“닿았네.”
“여자가……. 나는 안 그랬어.”
그가 엄마에게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무서웠다.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이라 더 무서웠다.
엘리사는 엘리사대로 이렇게 화가 난 게 처음이라 어떻게 가라앉혀야 할지 고민했다.
결혼하고도 여자를 만났는지 몰랐다. 난봉꾼이라 들었는데 결혼 후엔 점잖게 행동해서 꽤 감동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밖에서 여자를 만나고 다녔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이해하려면 못 할 것도 없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깊다 보니 이해보다 감정이 우선이었다.
엘리사가 그를 노려보다가 걸음을 옮겨 휴게실을 나섰다.
그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의 뒤를 쫄쫄 쫓았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