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닿다
며칠 후, 엘리사의 방이 시끄러웠다. 복도를 지나던 진저가 걸음을 멈추고 아내의 방에 들어갔다. 공작의 등장으로 시끄럽게 떠들던 하녀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 드레스 가봉 중이던 엘리사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여보.”
“뭐지?”
“가봉 중이에요. 루펠라가…….”
루펠라가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곧 승전 봉사가 있잖아. 그날 입고 가라고 내가 디자이너를 불렀지. 앗, 언니 움직이지 말아요!”
“오늘 나가봐야 해요. 봉사에 함께할 귀부인들과 만나는 날이라고요.”
사실은 그것보다 살이 드러나는 곳이 너무 많아서 당혹스러웠다. 남편의 눈도 매서웠다. 드러난 가슴이며 어깨를 노려보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드레스 많잖아.”
“많긴 뭘 많아. 할망구들 드레스룸에 가봐. 공작 부인 드레스룸이 너무 협소해도 욕먹는다고.”
“어쨌든 그건 안 돼.”
“안 되긴 뭘 안 돼. 언니 봐요. 음, 예쁘네. 언니는 어깨라인이 예뻐서 이런 드레스가 잘 어울려요.”
“엘리사.”
“언니!”
진저는 안 된다고 난리고 루펠라는 된다고 난리였다. 남매가 그녀 하나를 사이에 놓고 으르렁거리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알았어요. 일단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
“가봉도 다 했잖아요!”
“그래. 어서 나가봐.”
엘리사가 드레스룸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엘리사가 자리를 비우자 남매는 다시 어색해졌다. 물론 루펠라만 어색해하고 진저는 드레스 카탈로그를 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왜 여자들은 옷을 벗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이 옷이고 저 옷이고 노출이 없는 옷이 없었다. 이런 유행을 만든 것들은 다 풍기문란죄로 처넣어야 한다. 그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 전엔 사내들끼리 모여 요새 유행이 아주 마음에 든다며 천도 절약되고, 보기에도 좋다던 건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루펠라가 헛기침을 했다. 카탈로그를 넘기던 진저가 인상을 찌푸리며 동생을 돌아보았다.
“뭐.”
“말 좀 예쁘게 하면 안 돼?”
그는 개소리를 사람 말로 한다고 픽 웃어버렸다.
“그…… 전엔 미안.”
“뭐?”
“그놈의 뭐뭐는 그만하지?”
루펠라가 고개를 홱 돌렸다. 말해놓고도 머쓱했다. 오빠와는 그렇게 지지고 볶아도 서로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진저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그녀를 보다가 카탈로그를 내려놓았다.
“수작 부리지 마라.”
“무슨 소리야.”
“그래도 그레닉과 결혼시켜 줄 마음 없다고 말하는 거다.”
“내가 언제 결혼시켜 달랬어?!”
“그럼 안 한다고?”
“해주면 좋지! 하지만 이번 건 아냐. 아, 언니가 사과하래. 고용인들 앞에서 수선 떤 건 사과해야 한다고. 나도 뭐, 좀…… 미안하게 생각해.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되잖아!”
진저가 귀를 후볐다. 믿을 게 없어서 저 녀석 말을 믿겠는가. 다시 그레닉과 관련된 일이 생기면 이전보다 더한 소란을 피울 터였다.
그래도 놀랍긴 했다. 자존심만 내세울 줄 알던 녀석이 사과를 하게 된 건.
“네 새언니가 놀라운 사람이긴 하지.”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개차반도 사람 만들고.”
“그래.”
서로 개차반으로 지칭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남매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걱정이네. 내가 따라간다고 할 걸 그랬나.”
“무슨 소리야?”
“아, 그 아줌마들이 또 기 잡네 뭐 하네 하면서 새언니 골탕 먹일까 봐 그렇지.”
“뭐?”
“이렇게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요. 승전 봉사를 지휘한다는 건 올해 다회를 도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잖아.”
다회라면 알고 있었다. 수도에 터를 둔 귀부인들끼리 모이는 자리로 몇 가지 행사를 주최한다. 왕궁과 귀족회의 후원이 있어서 귀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모임이기도 했다.
“언니가 왕족 출신이긴 해도 이방인이야. 이방인이 다회 의장을 맞는 걸 다른 귀부인들이 가만히 두고 보겠어? 올해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임신을 하고, 포르테 공작 부인이 의장 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단 말야.”
“요점만 말해.”
“트리거 공작 부인은 애초에 다회엔 관심도 없고. 의장이 되면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가 있는지 알아? 모두 다 올해만 노리고 있었는데 언니가 딱 등장해 봐. 그것도 승전 봉사를 지휘하네? 그럼 가능성이 제일 높다는 건데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할 준비만 하고 있을 거 아냐.”
루펠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혼의 몸이라 참석은 못 하지만 다른 행사엔 수도 내 숙녀들도 필히 참가하게 된다. 그때 도우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파티 내에서도 그렇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번 자리를 노리고 있던 아콘 백작 부인이 무슨 수를 쓰고 있는 건지 자주 귀부인들과 자리를 만든다고 들었다.
동생의 걱정에도 진저는 코웃음을 쳤다.
“왜 웃어?”
제 아내에게 그따위 사수를 부린다면 죄다 목을 비틀어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아내가 들어간 드레스룸 쪽을 보았다.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테니까.”
“못해도 언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강냉이를 모두 털어버릴 기세인데?”
진저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긍정의 의미였다.
남매가 밖에서 무슨 말을 나누는지 까맣게 모르는 엘리사는 외출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라골의 조언에 따라 화려하지는 않되 얕잡아 보일 만큼 추레한 차림은 피했다.
머리는 올려 어려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휘황찬란한 액세서리보다는 깔끔한 목걸이 하나만 착용했다.
하녀는 아름답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으나 엘리사는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다회로 인해 견제를 받으리란 건 예상된 일이었다. 예견된 일은 접어두고 다른 것에 무게를 두어야 했다.
적들이 포진한 곳에서 내 편은 얼마나 만들 수 있는가.
사교계에서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나 그녀의 시누이인 칸나 트라노이와 같은 여성들처럼 좋은 친구가 될 이만 만날 수는 없었다.
왕족으로서, 그리고 공공의 적으로 살아온 날이 십 년을 훨씬 웃돌았다. 아군보다는 적군에 익숙한 삶이었다.
혼자일 때가 차라리 쉬웠다. 지킬 게 자신 하나라면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그녀 홀로 감당할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가문을 위해 일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많은 수의 아군을 만들고 그들과 함께 가문의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엘리사는 준비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본격적인 귀부인들 간의 이권 다툼. 그 첫 시작에도 겁이 나지 않았다. 걱정은 되었으나 겁 같은 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 남편이 있었다. 남편은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울타리였다.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선 엘리사는 모임의 장소에 도착했다. 연회장을 개조해서 만든 그곳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족히 기백은 되는 자들이 일시에 허리를 숙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당황했겠지만 한평생을 왕궁에서 산 그녀였다. 이보다 많은 사람의 인사를 매일같이 받았다.
지배인의 안내에 따라 오찬장 문 앞에 다다른 엘리사가 남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오늘이야말로 진짜 안주인의 일을 하는 것이다.
웅장하기까지 한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렸다.
엘리사가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 * *
“당황 좀 하겠어요.”
어느 귀부인의 말에 테이블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 모임에 참여키로 한 귀부인들은 미리 공지된 장소와 전혀 다른 곳에서 그들만의 자리를 가졌다.
“새파랗게 어린 게 공작 부인이라니.”
“트라노이 공작 부인 앞에서도 고개가 안 숙여지는데 말이죠.”
“그래도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낫지요. 친정이 워낙에 탄탄하니. 주제넘은 자리를 탐하지도 않고요.”
“그래도 왕족이라지 않습니까.”
“왕족쯤은 되어야 상대가 가능하지요.”
깔깔. 천박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남편의 위광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한정되게 마련이다.
엘리사 그란디아, 아니, 그웬 공작 부인은 단 한 번도 그녀의 능력을 증명한 바 없었다.
그녀가 승전 봉사를 자선 경매도 아니고 고아원 봉사 활동으로 정했다는 것을 듣고 얼마나 기가 막혔던가.
애초에 다회의 의장을 매년 공작 부인끼리 돌아가며 도맡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러니 어중이떠중이들마저 저 잘났다고 콧대를 세우지.
귀부인들이 소리 높여 웃으며 엘리사를 비롯한 4공의 부인을 헐뜯었다.
리더격인 아콘 백작 부인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훌륭하신 분들이 얼마나 많아요? 모두 귀족가의 영애로 태어나 란델의 귀족 정규 교육을 받으신 분들이라고요.”
아콘 백작 부인의 말에 다른 귀부인들이 동조했다.
“이 자리니 하는 말이지만, 사실 4공도 선조 잘 만난 덕에 득을 보는 거지, 군사권 빼면 뭐 볼 게 있나요? 다른 가문들도 모두 란델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쓰고 있잖아요. 그런데 공은 모두 4공의 차지니. 부인들이라도 합심해야죠.”
“맞는 말이에요.”
“그웬 공작 부인이 아콘 백작 부인만 하면 몰라요.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봉사를…….”
아콘 백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끌려다닐 순 없잖아요. 이번 다회를 계기로 전환점을 마련해야 해요.”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이 모두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이번 다회의 의장은 수도의 귀부인이라면 누구나 노리고 있는 자리였다. 기실 모두가 경쟁자였다. 그웬 공작 부인이라는 공공의 적이 없는 한은 뭉쳐질 수 없는 여자들이었다.
모두 개인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겉치레만 번드르르하지 귀부인의 인권 신장, 모두의 안녕 같은 것에 누가 관심이 있으랴.
그런 면에서 아콘 백작 부인은 아직 부족한 여자였다. 겉으로는 그웬 공작 부인 하나에게만 반발하고 있으나 들여다보면 이건 4공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여자는 전혀 지혜로운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마뱀 꼬리였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끊어낼.
하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 하나 ‘새파랗게 어린 그웬 공작 부인’에게 진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 * *
“두 번 물어야 하나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어요.”
“저희는 공작 부인께서 요청하신 대로 준비를 마쳤습니다.”
엘리사가 지배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매는 분명히 웃고 있는데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냥 어리고 연약해 보였던 여자에게서 기이할 정도의 냉기가 느껴졌다.
“시계를 사줘야 할까요? 아니면 글을 익히도록 도와줘야 할까요?”
“……예?”
“약속 시간까지 초대객이 한 명도 오지 않았어요. 홀은 이 시간이 되도록 내게 알리지 않았고요.”
이런 일은 빈번하게 있었다. 귀부인들이 타국에서, 혹은 지방에서 올라온 여자의 기를 누르려 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이 홀이 세워진 지 30년이 더 지났지만 이 일에 관해선 지배인의 판단이 개입되지 않았다. 이 일이 홀의 직원들을 통해 발설된다면 다른 귀부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게 빤했다.
그녀가 지금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건지, 정말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은 몹시 싸늘한데 표정은 온화했다.
‘그래도 왕족 출신의 공작 부인이라 이건가.’
홀은 귀부인뿐만 아니라 정재계 인사들도 자주 회의를 하는 곳이었다. 그녀의 반응은 귀부인이라기보다는 노회한 정치인들과 같았다.
‘어떻게 이처럼 감정을 잘 다스린단 말인가. 마치 이 정도는 여러 번 겪어본 사람처럼.’
실제로 그랬다. 그란디아에서 이런 괴롭힘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대놓고 왕족의 품위를 운운하는 여자가 허다했다.
지배인을 흘깃 쳐다본 엘리사가 걸음을 옮겨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초대객들에게 전하세요. 늦어지신다면 내가 기다리겠노라고.”
홀의 메이드가 지배인의 눈치를 보다가 차가 준비된 트레이를 끌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되었네.”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모두 한결같이 파르르 분노해서 오찬장 안에 발도 들이지 않고 돌아갔다.
“아, 그웬저에도 소식을 전하세요. 오늘은 귀가가 늦어질 것 같으니.”
그제야 지배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진저 그웬이 누구던가. 지금껏 죽인 이의 수가 죽이지 않은 이보다 많은 남자였다.
그가 아내 사랑에 지극하다는 건 근래 수도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다.
그라면 아내에게 창피를 준 자들을 기필코 단죄할 터였다. 그럼 피를 보는 건 하찮은 자들, 그러니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은 자신이었다.
엘리사를 향해 허리를 굽힌 그가 재빨리 오찬장을 나섰다.
“어서 초대자 명단을 확인해서 소식을 전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렇게 네 시간이 지났다. 귀부인들이 쉬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두어 시간쯤 있으면 알아서 돌아가겠거니 생각했다.
지금껏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뜻에 반한 여자는 없었다. 그들 스스로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알아서 숙이거나 가문의 힘으로 찍어 눌렀다.
이건 정말이지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쪼르르 제 남편에게 달려가진 않을 거로 생각했다. 결혼 후 시간이 꽤 지났으나 그웬 공작 부인은 단 한 번도 남편의 힘을 휘두르지 않았다.
무례를 범한 모국의 여성에게도 단죄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건 명백한 기싸움이었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지는.
귀부인들의 기싸움으로 인해 곡소리가 나는 건 홀의 직원들이었다. 루펠라 그웬이 사람을 시켜 말을 전했다.
‘좋은 회합장이 없어지는 게 아쉽군.’
그러니까 홀을 없애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제 오빠와 비견될 정도로 망나니였지만 귀부인들 간의 기싸움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분통은 터지는데 귀부인들의 뺨을 내려칠 순 없으니 홀을 없애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배인이 오찬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웬 공작 부인은 아직까지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처음 그 자세 그대로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정면을 응시했다.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습니다.”
홀의 사환 중 하나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웬 공작이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그웬저에 소식을 전했던 자는 뭐라 하더냐.”
“그웬 공작은 출타 중이었답니다. 그웬저가 아주 뒤집어졌대요. 고용인들부터 기사, 그웬 영애까지 당장 공작 부인을 데려와야 한다고……. 공작 부인이 따로 서신을 보내지 않았으면 벌써 쳐들어왔을 거라고요.”
그웬 공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배인이 제 목을 쓰다듬었다.
“귀부인들은? 모여 있다지?”
“다들 눈치만 보고 있죠. 설마 네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을 향했다.
그웬 공작 부인은 대단히 영리한 여자였다. 파르르 분노해 남편에게 이른다면 그건 하수였다. 아무리 그웬 공작이라도 그 많은 수의 귀부인들을 모두 도륙할 순 없었다. 그건 내전이었다.
하지만 그웬 공작 부인이 스스로 흙탕물을 뒤집어쓴 이상 명분이 생긴다. 귀부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남편까지도 그웬의 손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어느덧 해가 완전히 졌다. 오찬장에 불이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엘리사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에 힘썼다.
절대 우습게 보여선 안 되는 자리였다. 자신은 그웬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우스워지는 건 남편이 우스워지는 것과 같았다.
여섯 시간이 넘어가자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끊어질 것 같다고 고통을 호소했으나 엘리사는 꿋꿋이 허리를 곧게 펴고 있었다.
* * *
“이러다 난리 나겠어요! 벌써 여섯 시간째라고요.”
“그래요. 다들 결정을 내리셔야 해요.”
“이러다 공작 부인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좀 앉아 있었다고 쓰러지겠어요?”
“그 자세 그대로 물 한 모금 안 넘기고 있다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그리 독해!”
귀부인들의 어쩔 줄을 모르고 소란을 벌였다. 아콘 백작 부인은 이 일로 크게 곤란해졌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그녀가 다른 귀부인들을 쳐다보았다.
제가 직접 말한다면 그게 위신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홀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제 그웬 공작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귀부인들이었다. 눈치를 보던 귀부인 중 심약한 이들이 먼저 자리를 뜨고 흰머리가 성성한 노부인까지 먼저 나선 이들을 쫓았다.
홀로 남은 아콘 백작 부인이 손톱을 깨물었다. 들쭉날쭉 거칠어진 손톱이 조각난 자존심 같아 더욱 기분이 상했다.
* * *
귀부인들이 하나둘씩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찬이나 만찬을 하기엔 이미 밤이 깊었고, 그렇다고 바로 돌아가기엔 후환이 두려웠다.
귀부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가운데 침착한 사람은 오직 엘리사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아콘 백작 부인이 들어왔다. 초대객 가운데 미리 참여치 못한다는 소식을 전한 두 귀부인 외엔 전원이 착석했다.
다시 말하면 그 둘을 제외하곤 모두 엘리사에게 반감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번 다회가 이들에게 있어 어떤 기회가 될지, 그래서 이들이 어떤 강수를 둘지는 이미 예측하였다.
귀부인들은 미혼의 영애들보다 더 촘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덜 자란 아가씨들의 얕은수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들이 지금 이만큼 당황한 건 생각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을 만큼 엘리사를 무시한 것이다.
요지는 그것이었다. 문제 또한 그것이었고.
엘리사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귀부인들을 쭉 둘러보았다. 몇몇 젊은 귀부인이 일러바치려는 듯이 아콘 백작 부인을 힐끔거렸다.
‘저 사람이 주동자로군.’
미리 라골로부터 인상착의 등을 들어 대충 누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콘 백작 부인이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신부였다.
부친은 호로스 후작. 타국 정치가들도 조언을 구하러 올 만큼 영리한 자였다.
이제 보니 그 영리함이 그릇된 방향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 딸의 눈빛이 뱀처럼 차가운 것일 터.
엘리사는 그란디아에서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평민들은 혼자서는 양산도 펴지 못하는 귀족들을 우습게 여겼다. 특히 여자라면 더했다. 어릴 때부터 교양이니 뭐니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홀로 아무것도 못 하는 반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귀족은 태어날 때부터 힘의 논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후작이냐 공작이냐, 선대가 얼마큼 부를 축적했느냐, 명망이 어느 정도고 재산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이냐.
힘의 논리를 아는 자들은 마냥 짓밟아서도 안 되지만 자비를 베풀어서도 안 된다.
뭣 모르고 한 수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서열이 고정되어버린다.
엘리사는 왕의 유일한 적출이었다. 신분상으로는 그녀의 조모인 소피아 왕태후를 제외하곤 그란디아의 어떤 여자도 그녀 위에 설 수 없었다.
하지만 사교계에서 그녀의 자리는 언제나 최하위였다. 그건 왕의 애첩인 레이라 부인이 엘리사를 핍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엘리사는 방종한 자를 처벌하지 않았다. 워낙 어렸고 뒤에 후견인이 없었으므로 무작정 사람의 감정을 우선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확실하게 찍어 누르고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알려줘야 했다.
그래서 엘리사는 늘 사교계가 어려웠다. 그녀는 성정상 남을 찍어 누르고, 남의 불행을 기회로 여기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서열을 인지시킬 수많은 방법 중 가장 어려운 방법을 택했다.
“밤이 깊었군요. 부군들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오늘은 이만 파하고 이다음에 다시 자리를 마련하지요.”
귀부인들이 당황하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 모임을 위해 몇 시간을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기다린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모이자마자 돌아가다니.
젊은 귀부인들은 그녀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동동거렸다. 노회한 귀부인 몇몇만이 가늘게 뜬 눈으로 몸을 일으키는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만만히 볼 여자는 아니로군.’
아콘 백작 부인보다 몇 수는 위인 여자였다.
이건 약점을 잡아둔 채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반성하여 숙이고 들어온다면 받아주겠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반성하지 않을 시엔 이 약점을 어느 때고 써먹겠다는 말이었다.
협박과 회유를 동시에 할 줄 아는 여자는 나이 든 귀부인 중에서도 몇 없었다.
엘리사가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남은 귀부인들이 허둥거렸다.
“대체 무슨 뜻이죠?”
“가서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면 어떡해요!”
엘리사와 비슷한 나이 대의 귀부인들이 울상을 지었다.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파라디 백작 부인이 실소를 금치 못했다. 주제 모르는 하룻강아지인 줄 알았더니 영악한 여우였던가.
현재 사교계에는 파벌이 존재하는데 각각 보수파, 진보파, 중립파라 불렸다.
보수파는 대대로 권력, 재력이 막강한 네 공작가와 힐튼 후작가 등이 있었고, 진보파의 경우엔 가문의 힘은 크지 않지만 재력이 뛰어난 이들이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의 귀부인이 이 진보파에 속해 있었다. 중립파는 가문의 힘도 미진하고 재력도 미진한 이들이었다. 란델 수도 사교계의 8할은 중립파이나 워낙에 가문의 힘이 약한 탓에 전부 모여 봤자 피라미에 불과했다.
파라디 백작 부인의 친정은 힐튼 후작가와 척을 지고 있었다. 게다가 남편이 상단을 이끌고 있어 본인의 가치관과는 다르지만, 진보파에 속해 있었다.
‘하여간에 멍청하다니까. 이러니 번번이 4공 부인들에게 깨지기 일쑤지.’
그녀를 제외한 공작 부인들은 모두 보수파에 속해 있었다. 4공의 부인들은 대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보수파에 들었다.
그런데 이곳에 자리한 이들은 모두 진보파와 중립파였다. 보수파였다면 당연히 그녀의 편을 들었을 터.
엘리사 그웬이 왜 진보파와 중립파 진영에 있는 이들만 모아 따로 모임을 했겠는가.
어떤 파벌에도 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힐튼 후작 부인의 모임이 보수파임을 모르고 참석한 모양이지만 사교계의 흐름을 안 뒤로 몸을 사렸다.
사실 그녀가 택한 방법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긴 했다. 현재 보수파는 포르테 공작 부인이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의견을 내봐야 그녀와 같은 신분, 게다가 나이까지 많은 포르테 공작 부인에게 막혀 발언도 쉽지 않을 테다. 중립파에서 그녀를 따르는 이들을 모으는 게 강력한 발언권을 얻는다.
상당히 현명한 여자였다.
“이제 어쩌냐고요!”
귀부인의 절규에 파라디 백작 부인이 혀를 찼다.
“어쩌긴 뭘 어째요. 가서 빌어야지.”
파라디 백작 부인의 말을 들은 귀부인들이 난색을 표했다.
“삿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이방인이에요.”
“이젠 그웬 공작 부인이죠.”
“그래도요! 정말 자존심 상해!”
이런 꼴을 보고 있으면 사교 활동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싶어졌다. 사람이 멍청해도 정도껏 멍청해야지. 여기서 그웬 공작 부인을 잘 구슬려 함께 배를 탔으면 얼마나 많은 콩고물이 떨어질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걸까.
다들 자존심을 부르짖는데 그 대단한 자존심에 매번 똥칠하는 사람은 그녀를 제외한 공작 부인들이었다.
여기서 세력을 넓힐 생각은 못 하고. 그래야 다회에서 공작 부인들을 어떻게 꺾어볼 생각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가면 갈수록 이들과 자리를 갖는 게 거북했다. 함께 멍청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 * *
밤이 깊어 저택에 돌아온 엘리사는 곧장 욕실에 들어갔다. 어서 씻고 눈을 붙이고 싶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자리는 언제나 피곤했다. 기 싸움을 해야 한다면 더더욱.
모두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모두를 웃는 낯으로 대하고 싶었다.
남편에겐 괜찮다고 말했지만 내저의 일이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안주인 자리가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만큼 일이 몰려 있었다. 마피 부인도 일개 고용인에 불과했다. 바깥일과 얽힌 일은 처리할 수 없었다.
양도 양이거니와 평생을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만큼 이해되지 않는 일도 많았다. 그만큼 자료도 찾아야 했고 자료로도 알 수 없는 건 직접 알아봐야 했다.
그래도 내저의 일을 끝내고 나면 기분 좋은 피로감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구나,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었다.
목욕을 마친 엘리사가 가운을 걸친 채 욕실을 나섰다.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말리려는데 등 뒤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꺄……!”
“쉿, 나야.”
남편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놀랐잖아요.”
그가 아내의 젖은 머리에 코를 박았다.
“저번에 사 왔던 그건가?”
“그거요?”
“힘없는 남편도 불뚝 서게 한다는 그!”
엘리사가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당신은 절 놀리는 재미로 살죠?”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사가 그를 흘겨보았다.
남편의 말이 맞았다. 고든의 숍에서 산 SE 시리즈. ‘힘없는 남편은 안녕’이라는 홍보 문구의 그것이었다.
진저가 아내에게서 수건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직접 그녀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었다.
“그 여자들이 괴롭히던가?”
“음…….”
“말해봐.”
처리해 버리게. 뒷말을 삼킨 진저가 죄책감 같은 건 조금도 없는 듯이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오후에 아내가 나갔던 모임의 소식을 전해 들은 진저는 여러 고민을 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아내 모르게 하려면 아무래도 무력을 써선 안 되겠지? 그럼 아예 가문을 풍비박산 내는 게…….
가장 좋은 건 아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처벌하는 건데 순하다 못해 가끔 바보 같은 아내가 타인의 처벌을 바랄 리 없었다.
“그냥…… 소소한 괴롭힘?”
“괴롭히는데 소소한 게 어디 있어. 괴롭히면 괴롭히는 거지.”
“마음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괴롭힘을 말하는 거예요.”
아내의 머리를 말리던 진저의 손이 잠시 공중에서 멈추었다. 아내가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때면 이상하게 가슴을 뭔가 꽉 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많은 괴롭힘이 이어졌기에 이런 일에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 걸까.
다른 여자였으면 울고불고할 만한 일이었다.
“다들 당신이 초청한 명단을 보고 놀라더군.”
“그럴 거예요.”
여자들끼리도 그런 파벌 다툼이 있는 줄은 몰랐다. 과자나 늘어놓고 누구 남편이 바람났네, 누구는 무슨 목걸이를 샀네 하고 떠드는 일이나 할 거로 생각했다.
“사과하지.”
“뭘요?”
“당신 일을 하찮게 여겼던 거 말이야.”
엘리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은 갈수록 다정해지고 있었다. 너무나 다정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몽롱해졌다.
“다른 파벌을 만들려고?”
“고려는 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다른 이유도 있었나? 라골은 그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하던데.”
“좋은 스승을 둬서 여러 방면으로 생각이 많아졌어요. 라골은 자랑스러워해도 돼요.”
“그럼 뭐야? 당신이 반대 파벌의 여자들만 초대한 이유.”
엘리사가 손가락을 매만졌다. 부끄러워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얘기를 듣고 남편이 실망할까 봐 걱정되기도 하였다.
“바라는 일을 해주고 싶었어요.”
바라는 일이라니. 진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있긴 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스스로도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게 하는 내저의 일도 다 내팽개쳤으면. 그가 근래 바라는 일은 그것이었다.
“소문이요. 당신은 제가 사교계에서 소문을 많이 물어오길 바란다고 하셨잖아요.”
처음 몸이 바뀌었을 때 그런 얘기를 했던 것도 같다.
몸이 바뀐 후 사교 활동이 예정되어 있던 그녀가 난처해하자, 그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소문이나 물어오면 되는 걸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느냐고 말했다.
그쯤은 몸이 바뀐 채로도 할 수 있으니 괜한 걱정은 접어두라고 덧붙였던 것도 같다.
진저는 그런 말을 한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아내는 언제나 예상보다 더 많은 일을 성실히, 그리고 완벽하게 처리했다. 그녀는 안주인으로서의 일에 굉장한 책임과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그는 본래 타인에게 기대가 전혀 없었다. 아내에게 기대를 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일의 연장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한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소문이나 물어오라니.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던 제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군.”
이상하게 남편의 목소리가 시무룩하게 느껴졌다. 엘리사가 급히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남편의 손을 붙잡았다.
“불쾌하다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고 싶어서…… 여보!”
아예 울상이 되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아내가 귀여웠던 진저가 물기가 말라 보송보송해진 그녀의 뺨을 잡았다.
“놀린…… 거예요?”
진저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엘리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워낙 선이 가늘고 부드러운 인상이라 얼굴을 찌푸려도 무섭기는커녕 귀엽기만 했다. 진저가 그녀의 코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네? 아! 생각해 보고 있어요. 척을 질 순 없지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걸 알려줘야죠.”
엘리사가 배시시 웃었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게 이런 감정인 걸까. 그는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정의할 수 없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다. 고든인가 고자인가 하는 그놈의 가게에서 산 세안제가 이런 향이었던가. 그 전엔 머리만 아프다고 느꼈는데 아내의 몸에서 난다고 생각하니 회가 동한다.
그가 은근한 손길로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이대로 그녀의 음부에 자신을 새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는 속도 모르고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는 중이었다.
“그럼 간지럽지 않게 해줄까?”
“당신이 머리를 제 목에서 떼면 간지럽지 않겠죠.”
진저는 얇은 슬립을 입술로 더듬어 날개 뼈를 찾아냈다. 맞은 편 있는 거울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묘한 표정으로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당신 가슴 말이야.”
그의 손이 슬립 안으로 들어갔다. 얇은 천을 안에서 꿈틀거리던 손이 기어이 브래지어 속까지 탐험하기 시작했다.
봉긋 오른 가슴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흣.”
“너무 부드러워서 만지면 녹아내릴 것 같아.”
“여보…….”
검지가 유륜을 빙글빙글 배회했다. 당장이라고 꼭지를 집을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마치 미모사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손이 닿으면 잎을 오므라뜨리는 그 식물. 자신도 그것과 같이 남편의 손이 닿으면 온몸을 움츠리고 싶었다.
엘리사가 허리를 조금 접자 엉덩이 골이 그의 하체에 닿았다.
“바보 같긴.”
그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유두를 집었다.
“흐응!”
“나를 더 부추길 뿐이라는 걸 모르겠어?”
유두를 비틀며 괴롭히던 손이 슬슬 아래로 내려왔다. 손은 여전히 슬립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사온 속옷인가?”
“아, 아니에요. 이건 루펠라가…….”
“그래도 남매라고 취향은 비슷하군.”
“여보, 그만…….”
손이 가랑이 사이로 들어와 볼록한 곳에 닿았다.
“흐읏!”
클리토리스가 조금 부풀었다. 금방이라도 울컥 애액을 토해낼 것 같았다.
“난 이렇게 얇-”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던 손이 구멍이 있는 자리로 내려갔을 때였다. 진저의 눈이 커지고, 엘리사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앗!”
그녀가 얼른 그를 밀어내고 한 발자국 떨어졌다. 온몸이 붉어진 그녀는 허공만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보였지만, 쉽지 않은지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엘리사.”
“오, 오지 말아요.”
진저가 한 발 다가가면, 엘리사가 한 발 멀어졌다.
“그거 뭐야?”
“…….”
“확인해 봐야겠어. 이리 와.”
“확인하긴 뭘 해요!”
창피함에 가출이라도 하고 싶었다. 루펠라가 선물한 것 중에 가장 얌전한 팬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뭐람. 엘리사가 울먹거렸다.
“이, 이건 저도 몰랐어요. 오늘 처음 입은 속옷이…… 오지 말라니까요. 거기서 얘기해요!”
진저는 그녀의 속옷을 만지던 손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속살을 만진 건 오랜만이었다.
그녀의 팬티는 얇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음부로 들어가는 통로, 그 통로가 있는 부분이 갈라져 천을 덧대 놓아서 팬티를 벗기지 않고도 관계가 가능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슬립을 벗겨 팬티의 모양을 확인하고 싶었다.
“괜찮으니까 이리 와.”
“제가 안 괜찮아요. 당신이 저리 가요. 눈이 무섭단 말이에요.”
“보기만 할게.”
“죽어도 싫어요!”
엘리사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하인을 호출하는 줄을 붙잡았다.
“쳇.”
진저는 혀를 차며 표정을 구겼다. 이게 바로 못 먹는 감인가. 감은 떫기라도 하지 아내의 몸은 어떤 과육보다 달다. 단 것을 아는 데도 삼킬 수 없으니 애가 닳는다.
“알았어. 머리만 말릴게.”
“…….”
“머리만. 진짜 머리만.”
“정말?”
“정말.”
그제야 호출 줄을 놓았다. 그리고 사뿐사뿐 걸어와 소파에 앉았다.
그는 여전히 입술을 삐죽이며 수건을 잡았다.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과 달리 손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아내의 머리를 말리며 말했다.
“아까 하던 말 계속해.”
“무슨 말이요?”
“당신을 괴롭힌 망구들 말이야. 내가 처리할게.”
“여보.”
엘리사가 짐짓 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할 일이에요. 당신은 나서지 마세요.”
“…….”
“그보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의 산달이 얼마 안 남았잖아요.”
엘리사가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말을 돌리려는 속셈이 빤히 보였다. 진저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척하며 속으로 주판알을 골랐다.
진저 그웬이 누구던가. 란델의 미친개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는 남자였다. 그 말인즉, 뺨을 맞으면 상대방의 살을 죄 저며 버린다는 것.
심지어 이번엔 아내를 건드렸다. 제대로 가지고 놀아주지. 그는 아내 몰래 결심했다.
* * *
다음 날, 진저는 새벽부터 4공 회의에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질 이 회의는 공작가의 일이 논의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4공 회의는 란델 최고의 의결기관이었다. 귀족회의에서 올라온 내용을 최종 결정하는 이 회의가 4공들의 권력을 유지시켰다.
4공 회의가 있을 때마다 공작들은 사익과 공익을 위해 팽팽히 맞섰다.
오늘의 회의는 이국에서 거래하는 상단에게 부과되는 세금에 관한 것이었다. 세금을 감소시켜 달라는 귀족들의 청원서가 거짓말 조금 보태 산을 이루었다.
이는 번번이 트리거 공작에 의해 막혔는데 트리거 가는 4공 중에서도 가장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땅이 기름지고 영지민의 수마저 많아 상단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딸, 줄리아 트리거가 왕세자와의 결혼이 내정되어 있어 친왕파의 귀족 중 가장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다. 세금이 감소하면 왕궁 재정에 큰 위기가 닥칠 터였다.
“허튼소리들 하고 있군. 비싼 밥 먹고 이따위 안건만 가결하고 있으니…….”
트리거 공작이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서류를 치웠다.
“거래되는 양의 4할은 너무하지 않소.”
포르테 공작이 흠흠, 헛기침을 하자 트리거 공작은 대번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 영감탱이가 근래 거대 상단을 이끌고 있는 귀족들과 만남이 잦더라니 뒷구멍으로 얼마쯤 받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트라노이 공작이 포르테 공작의 말을 거들었다.
“이 안건은 좀 더 대화를 나눠보시죠.”
“자네까지 왜 이러나!”
“앞으로 무역의 시대가 될 겁니다. 언제까지 란델에 갇혀 있으면 더 넓은 세상과 조우할 수 없죠. 세금을 감면한다면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까지 나서 타국과 란델을 잇는 현수교가 되어줄 겁니다.”
이제 믿을 건 진저밖에 없었다. 다수결이니 진저가 반대해 주지 않으면 이대로 가결될 것이다.
왕의 진노는 둘째 치더라도 트라노이 공작의 말처럼 되려면 족히 수십 년은 지나야 했다.
그동안 무역으로 인한 사건사고가 얼마나 터지겠는가. 아직 제대로 법안도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가결하는 건 위험했다.
모두가 진저를 쳐다보았다. 진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낮춥시다.”
“이보게!”
“그렇지! 잘 생각했네.”
트리거 공작과 포르테 공작의 표정이 상반되게 변했다.
“단, 4공 회의에서 결정된 물품에 한해서.”
“한정하자니.”
세 명의 공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진저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어차피 세율 문제는 계속해서 논의될 터였다. 4할이라는 세금이 부과되는 나라는 소수였다. 그 소수 또한 귀족, 혹은 대귀족과 탄탄한 끈을 가지고 있는 상인들에 의해 개혁의 조짐을 보였다.
1할을 내리든, 2할을 내리든 개혁의 시도는 했다는 게 중요했다. 개도 먹이를 줘야 길들여지지 않는가.
“다음 회의에서 논의되는 몇 가지 품목은 세율을 하향 조절하는 겁니다. 다른 품목은 차차 4공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 거죠.”
모두 정치판에서 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진저의 속뜻을 짐작하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세율을 조정하는 기관이 4공 회의로 한정된다면 충성도가 현저히 올라간다.
그뿐만 아니라 이 문제의 요점은 ‘세율에 대한 규제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상향을 하였으니 하향도 가능하다.
물론 멋대로 세율을 조절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경제판에서 노는 늙은이들이 이 문제를 안이하게 생각할 리 없었다.
“재밌군.”
트리거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트라노이 공작 또한 그의 말에 응수했다.
“면도 세울 수 있고, 무엇보다 민중 또한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을 겁니다.”
“이곳저곳에서 난의 조짐이 있다지?”
모두 암묵적인 동의를 했고, 화제는 자연스레 넘어갔다. 포르테 공작이 트라노이 공작이 꺼낸 화제에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걸린 두꺼운 담배가 치직,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에잉, 멍청한 사람들. 차에 시럽 한 스푼 덜 넣으면 백 년의 영화를 누릴 텐데 그걸 못 참아서.”
핍박하지만 않는다면 등에 칼을 맞을 리도 없었다.
“영지의 규모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까요.”
트라노이 공작이 말했다. 포르테 공작은 항상 다른 귀족들에 대해 말을 할 때 은근히 남을 깎아 내리며 자신을 높였다.
금년엔 남부에 큰 가뭄이 들어 걷을 세금도 부족한 판국이었다. 작은 영지를 보유한 이들은 세 끼 식사도 줄여야 했다. 이런 와중에 체면 지키자고 제 가족을 굶기려는 자는 없을 터였다.
“마탑은 괜히 있어? 그들을 영지로 불러들이면 되지.”
어른에 대한 예가 넘치는 탓에 항상 포르테 공작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던 트라노이 공작 또한 입을 다물었다.
말이라고 하는가. 마법사들을 불러드릴 돈이 있었다면 그리 영지민들을 핍박하지 않았겠지.
트라노이 공작까지 입을 다물자 머쓱해진 포르테 공작이 다른 서류를 들었다.
“다른 얘기로 넘어가지.”
회의는 예정대로 밤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세율에 대한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 퍼졌다.
* * *
엘리사의 기를 누르려 했던 귀부인들은 아침부터 다시 모였다. 사색이 된 그녀들이 아콘 백작 부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어떻게 하냐고요!”
“우리 모두 상단을 거느린 귀족들이에요. 4공 회의에서 세율이 논의된다는데 이제 더 눈치를 보게 생겼잖아요!”
“그웬 공작 부인의 눈치만 보면 다행이게요? 남편이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몰라요. 우리 상단은 세금 1할에 얼마나 큰 금액이 움직이는지 아세요?!”
모두 말을 하진 않지만 이번 일이 그웬 공작의 의견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트리거 공작으로 인해 통과되지 않을 안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일부 품목에 대해 세율을 하향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품목 또한 논의를 한다고 하니 상인이라면 다들 눈이 뒤집어졌다.
아콘 백작 부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무려 6시간을 기다리게 한 것만으로도 단단히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율 조절까지 그웬 공작 부인의 남편이 맡게 되었다.
다른 부인들도 남편으로부터 단단히 한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눈초리가 매서웠다.
그들을 지켜보던 파라디 백작 부인이 인상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여기서 아콘 백작 부인에게 따져봐야 뭐가 나오겠는가. 모두 찬동해서 만들어진 결과였다.
다른 공작 부인들에 비해 어린 데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무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풍을 맞을 각오 또한 해야 했을 터.
생각은 그렇지만 파라디 백작 부인 또한 입맛이 쓰긴 마찬가지였다. 이제 4공 가문은 더 활개를 치고 다닐 것이다. 왕이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의 권능에 도전할 자들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 사안에 왕이라고 나설 리 있겠는가. 왕의 입장에선 무역 세율을 더 올리는 게 득이 되었다.
‘이렇게라도 다른 품목의 세율을 유지하고 싶을 텐데 절대 나서지 않겠지.’
파라디 백작 가는 예로부터 큰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특히 사치품인 드레스와 장신구 등을 취급했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선 사치품에 대한 세율을 거의 유지했다.
다른 귀부인의 말이 맞다. 세금 1할로 굉장한 금액이 움직였다.
“어떻게 하냐고요!”
젊은 귀부인이 기어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모두 모이기 전부터 남편에게 크게 혼이 났다느니, 물건을 다 집어 던졌는데 자신은 남편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다느니 하며 울먹거리던 여자였다.
쾅!
파라디 백작 부인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우리끼리 떠들어봤자 뭐가 남습니까. 무릎을 꿇든가, 세율을 지금 이대로 유지하든가 하나를 택해야지요.”
“무릎을 꿇는다니요! 모두 자존심을 지키세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콘 백작 부인이 파라디 백작 부인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 * *
그웬 공작저는 평화로웠다. 아침 식사를 마친 그웬 부부는 소거실에 앉아 함께 차를 마셨다.
이제 완연한 봄이 되었다. 창문을 열어놓았더니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바람이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향긋하네요. 애프리콧 티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애프리콧 블라썸 티가 맞는 말이지요.”
콕스가 웃는 낯으로 부부의 차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님께서 차를 좋아하셔서 올해는 이것저것 들여 보았는데 옳은 선택인 모양이었다.
아내가 좋아하자 남편의 표정도 좋았다. 그는 픽 웃으며 그에겐 너무 달달한 차를 입에 머금었다.
“어떠세요?”
“괜찮아.”
“다행이에요. 참, 회의는 잘 마치셨나요?”
진저의 표정이 몹시 짓궂게 변했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곤 했다. 엘리사가 불안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당신, 내일부터 바빠질 거야.”
“제가요?”
“아니, 오늘인가.”
“왜요?”
“이제 사과 행렬이 있을 거거든.”
그가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사과 행렬이라니, 말을 들을수록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실없는 농담인가 싶어 흘려듣자니 표정이 걸리고, 더 묻자니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 *
엘리사는 점심때가 지나서야 진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로 행렬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는 줄이었다. 대문에서부터 일렬로 이어진 줄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경비병의 말을 전해 들은 그녀가 남편을 쳐다보았다.
진저는 여전히 뻔뻔한 얼굴이었다. 라골로부터 4공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듣지 못했다면 황당함에 말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말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인 걸까.
설마 아내에게 사과를 듣게 하자고 세율을 내렸을 리는 없고.
‘이이가 그동안 쌓인 게 있었나?’
아니라면 부부가 함께 온 이들까지 저리 매몰차게 쫓아낼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민망해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웬저에 남편과 함께 온 아내들은 얼굴을 들지 못했고, 남편들은 진저의 발등이라도 핥을 기세였다.
모두 대상단을 가진 이들이니 세금 1할이 얼마나 큰 압박으로 작용하겠는가.
벌써 다섯이나 되는 이들의 사과를 받은 엘리사가 남편을 붙잡았다.
“여보.”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 잘 봐달라는 얘기를 하고 있던 귀족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그웬 부부를 바라보았다.
어떤 여자가 진저 그웬을 타박하듯 부를 수 있겠는가. 그웬 공작의 앞만 아니었더라면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하였다.
“오늘 일정도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이만 돌려보내도록 해요.”
이미 다섯 번이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사과를 받아야 했다. 귀부인들 사이의 일이라면 몰라도 세율과 관련된 문제로 이만한 청원을 받는 건 거북했다.
“당신 뜻대로 하시오.”
진저가 씩 웃었다. 너무 순순히 부탁을 들어주는 게 이상했다.
다섯 번째로 찾아온 귀족을 돌려보내고 더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말을 줄 선 이들에게 전했는데도 그들은 쉬이 돌아가지 않았다.
밤까지 새울 기세였다. 귀족들이야 고용인들을 세워놓았지만, 소규모 상단을 운영하는 평민들은 그들이 직접 줄을 서 몇 시간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집사 콕스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뒤까지 돌아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고 순순히 부탁을 들어준 게 분명했다. 엘리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싱글싱글 웃고 있는 그를 흘겨보았다.
“왜?”
“…….”
“그 여자들은 왔나?”
‘무슨 여자들?’
엘리사는 인상을 쓴 채 그가 말한 여자들이 누구인지 고민했다.
“당신을 여섯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여자들 말이야.”
엘리사가 버럭 화를 내자 진저가 장난스럽게 손을 올렸다.
마음 같아선 다시는 그따위 짓을 벌이지 못하게 아예 앉아서 생활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이 정도면 약과인데, 뭘.
“전부 돌려보내요.”
“가고 싶을 때 가겠지.”
“여보!”
엘리사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것도 몹시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으로 평소라면 절대 내지 않는 고함까지 쳤다.
물 잔을 집으려던 진저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한 시간 안에 정리하세요.”
“…….”
세상에 무서운 게 없던 진저 그웬이 아내의 노기에 질려 말을 잃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다그쳤다.
“대답은요?”
“……알았어.”
하인들이고, 하녀들이고 콕스에 보고를 하러 온 라골까지 부부의 대화를 듣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웬저의 권력 구도가 뒤집히고 있었다.
화가 난 마님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그녀의 눈치를 보던 진저가 내저를 나섰다. 정말 그들을 직접 돌려보내기라도 하려는 듯.
남은 하인들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들이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위층에 올라간 엘리사는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저 사람은 정말!’
4공 회의에서 세율을 품목별로 낮추겠다는 얘기가 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저택 앞에 저렇게 많은 상인과 상단을 보유한 귀족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그게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그웬 공작이 뇌물에 눈이 벌겋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진정 뇌물에 눈이 벌겋다고 해도 말이다.
바깥일은 바깥일이고 그녀의 역할은 그것을 거드는 것뿐이었다. 조언을 요청한다면 머리를 맞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건 안 되고 저건 되네 가르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이미 도덕이 무너진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가장 큰 피해자였던 자신은 세상에 맞서기엔 세상에 너무나 물이 든 상태였다.
어떤 귀족이든 얼마 정도의 부정부패엔 눈을 감아주고 있었다. 창고를 거덜 낼 정도가 아니라면 조금쯤의 사욕은 능률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저나 자신이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겠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영리하게 살아 더 이상 그나 그의 가문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그를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런 것들뿐이었으니까.
그가 세율을 조정하자는 말에 동의한 것이 모두 자신을 위한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 선택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다는 게 걱정될 뿐.
자신을 위해서 그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늘 바라왔다.
30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었다. 그녀가 샐쭉 그를 노려보자 그가 두 손을 위로 올렸다.
“항복.”
“…….”
“항복이라고.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당신 생각은 고려하지 않고.”
그녀는 알까. 그는 복부에 칼이 박혔을 때마저도 백기를 들지 않는 사람이란걸.
진저가 입술을 삐죽이는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녀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진저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 건데?”
“…….”
“난 당신이 말하지 않는 게 제일 무서워.”
“……당신도 무서운 게 있어요?”
“생겼어.”
기죽은 척만 늘어서는. 엘리사가 제 목을 감싸고 있는 남편의 팔을 잡았다.
“잘할게요. 잘할 수 있어요. 믿어주세요.”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야.”
“그럼요?”
“잘하겠지. 뭐든 잘할 거야, 당신은.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신이 힘들어지는 게 싫어.”
엘리사가 그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진저가 숨을 크게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 부부는 어느 순간부터 상대에 대한 스킨십이 자연스러워졌다.
하는 것은 익숙한데 받을 때면 항상 숨을 멈추고 움찔거렸다.
그가 이렇게 움찔거리는 게 느껴질 때면 항상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란디아에서의 삶이 너무 고단하여 이제 눈물이 모두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겐 그가 숨구멍이고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마른 눈을 축축하게 젖어 들게 만드는.
“저는 이거면 돼요. 당신 품이면 다른 건 아무것도 힘들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기다렸다. 남편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다리면서도 이토록 벅차고 행복했다.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택해 준다면 난 어떤 고난도 견뎌낼 자신이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 *
진저는 마음이 급해졌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제 마음을 전해 본 적이 없는 그는 첫사랑에 설레는 풋내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완벽한 장소에서 완벽한 고백으로 그녀의 기다림을 보상해 주리라.
황실 배 검술 시합이 이렇게 기다려진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무언가를 이토록 갈망한 적 또한 처음이었다.
진저는 며칠째 훈련에 몰두했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검술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소문의 기사들까지 가을 낙엽처럼 나뒹굴게 만들었다.
홀로 왕이라도 때려잡을 기세의 주군을 보는 기사들의 표정이 썩어들었다.
작위를 이은 이후 이렇게까지 열심히 훈련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검을 잡는 그를 볼 때면 모두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휴식 시간에도 진저의 검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작년에 수도군으로 들어온 소년병이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넌 처음 보냐?”
소대장 한스가 픽 웃으며 소년의 허리를 검 자루로 찔렀다.
“예? 예! 대단하시다고는 들었지만…… 정말…… 예…….”
귀족의 몸으로 어린 시절부터 전쟁에 참가했다. 이 말만으로도 그의 생이 얼마나 끔찍했느냐를 알 수 있었다.
귀족들에겐 안타까움을 사겠지만 일반 병사나 기사들에겐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참전하여 지금껏 목숨을 부지했다. 그들에게 이렇게 느껴졌다.
전쟁을 지휘하는 장수도 아니고 소년이었다. 개인이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이 들던가. 태생적으로 검술과 체력이 타고났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검도 검이지만, 활을 잡을 때가 진짜지.”
“활이요?”
“명궁도 그런 명궁이 따로 없지. 현세에 강림한 신궁! 할티라 족장이 저 멀리, 그러니까 저- 어 멀리 개미 새끼처럼 보이는 거리였는데 활을 탁 쏴서 그냥 뒷목에 콱!”
한스가 오두방정을 떨며 코빌레네 연안 전투 때의 일화를 설명했다.
진저가 저렇게 개 같은 성격으로도 지금껏 그웬군을 지휘할 수 있던 까닭은 기사, 그리고 병사들을 실력으로 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스도 그의 실력에 반한 자 중 하나였다. 한스뿐이랴. 마크빌이고 하우벡이고 그레닉까지 검을 든 진저 그웬을 보고 반한 자들이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정확하게 그 비겁한 놈의 뒷목에 활을 박았단 말이야. 그놈이, 어? 이렇게! 어? 달달달 떨면서 낙마하니까 말이 그냥 놀라자빠지면서 그놈 면상을 또 콱!”
“크!”
“크아!”
코빌레네 연안 전투 때 참전했던 이들이 우레와 같은 손뼉을 쳤다.
“그러니까 주군의 출생을 가지고 무시하던 얄쌍한 놈이 안색이 막 이렇게 변해서!”
“크하하하!”
“안장에 오줌 안 지렸나 몰라!”
“아, 내가 봤지! 그놈 가랑이가 축축해지는 걸 내가 봤다고!”
“크하하하!”
손뼉을 치면서 웃고 떠들던 이들의 화제가 변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놈 체이서를 닮지 않았어?”
목숨처럼 아끼는 창을 손질하던 기사 체이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놈은 건들지 말자고. 칼리에게 차여서 정신이 없단 말이야.”
“차였어? 그러게 임마. 칼리는 너 같은 놈보다 나처럼 듬직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들이 낄낄거리며 칼리에게 차였다는 체이서를 놀리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차인 걸로도 모자라 동료들에게 비웃음까지 산 체이서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때, 잠깐 그들 곁으로 진저가 다가왔다.
“내 검도 함께 손질해라.”
날붙이 손질로는 그웬 수도 군에서 체이서를 따를 자가 없었다. 진저가 검집에 검을 넣은 채 던지듯이 건넸다.
“주군 들으셨습니까? 이 멍청한 놈이 말입니다. 시장 격투 대회에서 아가씨에게 청혼을 했다지 뭡니까.”
“그 사람 많은 데서 트로피를 안겨줬대요. 뭐라고 말했댔지?”
“이 트로피보다 네가 더 값지다.”
한스가 체이서의 흉내를 내며 낄낄거렸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아가씨가 그냥 줄행랑을 치는데 제가 다 안쓰러워서…….”
기사들이 와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웃는 와중에 웃을 수 없는 남자가 딱 둘 있었다.
모태솔로 두 명. 저번 주에 사랑해 마지 않는 칼리에게 차인 체이서와 진저였다.
* * *
연무장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기사들이 배를 잡고 낄낄거리자 눈치 보던 기사들마저 픽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진저의 훈련을 넋 놓고 보던 소년이 곁에 있던 기사에게 물었다.
“여자들은 화려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좋아하지.”
“시장 대회긴 해도 이목이 쏠린 곳이 아닙니까? 거기다 우승자인데 어째서 줄행랑을 친 겁니까?”
정말 모르는 듯한 순진한 표정에 기사들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 배를 잡고 구르는 사내도 여럿 있었다.
“그것도 자리 나름이지!”
“연애 못 해본 놈들이 꼭 그따위 난리를 쳐요.”
“다이아가 없잖아. 돌멩이만 한 반지는 있어야지!”
이래서 여자 안 만나본 놈들 망상은 알아줘야 한다느니 등의 말이 오갔다.
여자와 한 명도 아니고 두 자리를 넘어 세 자리도 거뜬할 정도로 놀아난 사내가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그와 만난 대다수의 여자는 고가의 보석이나 옷, 장신구에 환장했다. 아니, 선물을 하기 이전에 자신과 눈만 마주쳐도 눈이 풀리기 일쑤였다.
그가 진저 그웬이란 것만 모른다면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양 운명적 만남이라 떠들었다.
사실 진저는 여자와의 정서적인 만남은 초심자에 가까웠다. 그의 외모나 재물, 능력에 관심이 없는 여자는 아내가 처음이었으므로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완벽한 자리에서 모든 여자가 부러워하는 고백을 듣게 해주고 싶었다.
모후가 작고한 뒤로 단 한 번도 타인의 동경을 산 적이 없던 아내를 위해 성가시거나 짜증 나는 일쯤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저 새끼들을 어떻게 굴려야 삼 박 사흘 곡소리가 나도록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때였다.
연무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소리가 들렸다.
루펠라였다. 종잇장처럼 표정을 구기고 있던 진저가 씩씩거리는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서류에 서명 하나만 하면 되는 걸 며칠 동안 미뤄두니까 찾아온 거 아냐! 카르트가에서 계속 재촉하고 있다고!”
루펠라는 매년 카르트령에 내려갔다. 후작은 정치적인 이유로 그녀와 돈독한 관계가 되길 바랐고 항상 이맘때면 언제 내려오느냐는 편지를 다발째 보내곤 했다.
계속 카르트령에 내려가는 것을 피했더니 이제 사람까지 보내 닦달하고 있었다. 한 핏줄 간에 너무 격조한 것 아니냐는 말을 하도 들어 귀에서 맴돌 지경이었다.
카르트 후작은 선대 공작 부인의 혈육으로 여동생 사랑이 끔찍했다. 진저를 제외하면 그녀가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 남편과 함께 자살했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여동생의 사망 이후 일 년을 방 안에 틀어박혀 가슴을 쥐어뜯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여동생과 그 버러지 같은 선대 그웬 공작의 결혼을 추진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에 몇 번이고 피를 토했다.
블레어 그웬. 결혼 전의 이름은 블레어 카르트. 그녀는 결혼 전엔 꽃 같은 여자였다.
카르트가의 막내로 태어난 지 3년 만에 모친을 여의었지만 선대 카르트 후작과 카르트가의 후계이자 유일한 남매인 셀먼 카르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았다.
사랑받는 게 당연한 삶이었다. 결혼 후 석녀라는 것을 알기 전까진, 아니, 남편이 계집질에 눈이 벌건 남자라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진 말이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시들어버렸다. 처녀였을 적의 그녀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메마른 삶을 살았다.
그래도 현 카르트 후작인 셀먼 카르트에게 그녀는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아내와 딸에게마저 그런 지극한 사랑을 준 적이 없었다.
셀먼에게 블레어는 평생 아픈 손가락이었다.
모두 셀먼 카르트가 여동생을 몹시 사랑해 가여운 사생아를 핍박하는 사내라고 알고 있으나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과거엔 계집질에 미친 선대 그웬 공작만을 혐오했다. 그는 핏덩이 진저를 보고 매일을 눈물짓던 그녀에게 말했다.
하늘이 네게 자식을 내린 거라고. 그러니 정을 주며 살라고.
누이를 위한 말이었다. 차라리 남편의 핏줄에게 기대 살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점점 병들어 갔다. 그래서 부모를 한날한시에 여읜 루펠라를 양녀로 들이도록 하였지만 루펠라도 위로가 되진 못했다.
족히 20년 동안 깊어지던 병은 결국 블레어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진저가 가문의 위상을 위해 진실을 묻었어도 그는 백방으로 누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남편을 껴안고 자진하였음을.
실성한 사람처럼 지내던 그는 살기 위해 복수할 대상을 찾았다. 그게 진저였다. 사생아를 들이지 않았다면, 진저가 그웬가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없을 일이라고 울부짖었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 사는 남자처럼 가문의 힘을 키우고 그웬가에 맞섰다.
누이가 죽기 전까진 그웬에 비해 초라했던 가문이 어느새 란델의 귀족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신이 제게 허락한 시간 동안 여동생의 무덤에 진저의 시체를 바치기 위해.
일은 번번이 실패했다. 몇 가지 약점을 잡혀 이젠 드러내어 적대시하지도 못했다.
복수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신은 온 애정을 진저에게 쏟는 것처럼 그를 보호했다.
셀먼은 알고 있었다. 진저가 그를 살려두는 이유는 더 이상 가문의 치부를 만들지 않기 위함임을.
언제고 마음이 변하면 단번에 목덜미를 물어뜯길 터였다. 그래서 그는 안전핀과 더불어 화살 역할을 해줄 루펠라를 필요로 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루펠라가 혈육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혈육보다 평생을 함께 지낸 진저와 차라리 더 가까웠다.
그래서 매년 핏줄을 핑계 삼아 루펠라를 불러들이고 세뇌하다시피 가족 간의 정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설명했다.
당사자에겐 코딱지만큼도 먹히지 않는 말이었다. 선대 공작 부인이 죽기 전까진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이따금 적선하듯 정을 내준 것으로 혈육을 운운하는 게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들의 생각처럼 루펠라에겐 그들보다 진저가 더 의미 있었다. 진저로 인해 그녀의 보금자리가 완성되었다고 믿었다.
루펠라는 호적상으론 그웬가의 영애라서 그녀가 일정 일수 이상 타 영지에 머무를 땐 가주나 안주인의 허가가 필요했다.
보통은 결혼 후 인장을 받으면 안주인임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결혼한 지 1년 미만의 귀부인들은 서류에 남편의 확인이 필요했다.
엘리사가 서류를 작성해 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진저는 서명하지 않았다. 무슨 정치적인 이유도 아니고 미쳤는지 훈련에 몰두하느라 일을 미뤄둔 것이다.
덕분에 닦달은 루펠라가 다 받고 있었다. 그레닉과의 일도 있고 웬만해선 연무장을 찾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까지 온다 간다 말이 없으면 카르트가의 영식, 그러니까 사촌을 보낸다고 하였다.
그 깐깐한 놈이 오면 또 결혼이니 뭐니 하며 속을 뒤집을 게 빤했다.
루펠라가 팔짱을 낀 채 진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후까지 서명해. 오늘도 서류를 보내지 않으면 로헨이 올라온다고 했단 말이야!”
로헨은 루펠라보다 연하로 세간에선 진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만 영리한 소년이었다.
어떻게 보면 영리하다는 말보다 처세술에 능하다는 말이 맞았다. 그는 부친이 진저에게 날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부친의 의견에 반대한 탓으로 영지에 구금되다시피 하였다.
이번에 로헨이 올라오게 되면 또 루펠라를 붙들고 그웬 공작과 가까워질 방법을 마련해 달라 떼를 쓸 터였다.
그건 귀찮은 데다 위험한 일이었다. 루펠라가 거리낄 것 없이 산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선대 공작 부인의 일도 있는데 후계까지 그웬 공작과 얽혀 버리면 외숙은 미쳐 버리리라.
제 할 말을 다한 루펠라가 연무장 한구석에서 다른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레닉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연무장에 온 이후로 돌덩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런 주제에 다른 기사와 대화에 집중하는 체하는 게 화가 났다.
루펠라야 그토록 사랑하는 사내가 자신을 외면하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웬일인지 진저의 표정도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망나니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었다. 이 남매가 싸움을 벌이면 등만 터지는 게 아니라 아예 기사들 몇은 죽어나지 싶었다.
하우벡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루펠라에게 말을 붙였다.
“영애, 이 녀석이 말입니다.”
체이서가 칼리에게 차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체이서는 한동안 루펠라를 호위하던 자라 그녀 또한 익숙했다. 루펠라가 체이사를 쳐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 말 없이 도망쳐 준 걸 고맙게 여겨. 나였으면 그 자리에서 불알을 터뜨렸어.”
기사들은 사색이 되어 하초를 쳐다보았다.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루펠라는 평소에도 걸걸한 입담을 자랑했다. 그래도 설마 귀족 영애의 입에서 불알이라니……. 그녀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던 기사들이 몸 둘 바를 몰랐다.
반면에 어릴 적부터 그녀를 알던 자들은 체이서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었다.
루펠라는 빈 소리를 못했다. 그녀의 농담에도 8할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재미 삼아 놀리긴 했지만 여성이 저렇게 학을 떼니 이제 안쓰럽기까지 했다.
한 기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 그 정도까진 아니지 말입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자가 사람 다 보는 데서 고백받는 걸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 그리고 체이서가…….”
그녀가 기가 팍 죽어 있는 체이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기운 내. 그래도 영 그른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좀 씻어. 수염도 깎고. 그 수염 안엔 뭘 키우는 거야?”
체이서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제가 뭐 어때서요!’라며 소리치는 그를 본 루펠라는 그걸 몰라서 묻느냐고 반문했다.
“모릅니다!”
“쪽팔리잖아. 사람 많은 데서 남자가 웃통 까고 구린 말을 하는데.”
“영애가 여자의 로망을 모르는 겁니다.”
루펠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때마침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마크빌을 향해 말했다.
“훈련 좀 작작 시켜. 얼마나 굴렀으면 똥인지 된장인지 가늠을 못 해.”
으하하하. 다시 웃음이 터졌다. 루펠라는 폭소하는 기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누가 보면 다들 애인이 있는 줄 알겠어. 잘 생각해. 체이서는 뭘 몰라서 그렇지 외모가 딸리는 편은 아니잖아. 체이서도 차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어?”
그러자 다들 시무룩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도무지 자신에게 애인이 없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루펠라가 체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기운 내. 세상에 이성이 얼마나 많아? 하나에 목을 매는 건 천치래.”
“아가씨가 하실 말씀은 아니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난 천치라는 소리야.”
루펠라가 그레닉의 등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진저에게 서류에 꼭 서명하라고 다시 한번 당부한 루펠라가 연무장을 나섰다.
그녀가 연무장을 나서고도 한참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자도 있었고, 이러다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절규하는 자도 있었다.
부인이 있는 기사들만 노총각들 사이에 붙들렸다.
“여자와 먹는 밥은 어떤 맛이냐…….”
“달아? 맛있냐?”
“어떻게 하면 애인이 생기는 겁니까!”
부인이 있는 기사들이 그 꼴을 보다가 혀를 찼다.
“그런 말을 안 하면 생기겠지.”
한참 신세 한탄을 하던 기사들이 훈련이나 하자며 몸을 일으켰다.
“어? 주군은 어디 계시냐?”
정신을 차려보니 진저가 사라지고 없었다.
* * *
자신의 집무실에서 트라노이 공작 부인과 힐튼 후작 부인에게서 온 편지를 정리하던 엘리사가 난데없이 들이닥친 진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보?”
“사람 눈 많은 곳에서 받는 프러포즈 어떻게 생각해?”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싫어요.”
아무 말 없이 엘리사를 보는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시무룩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했다.
선물을 기대하던 아이가 부모에게 선물을 받기는커녕 받은 선물을 도로 빼앗긴 것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엘리사는 인사도 없이 문을 나서는 남편의 등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편의 물음이 실없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 * *
루펠라는 진저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를 하인을 통해 카르트 후작에게 전달했다. 수도에 있는 카르트 후작저는 그웬저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고, 하인은 그날 바로 답장까지 받아왔다.
영지에 내려가기 전에 식사라도 하자는 외숙의 편지를 본 루펠라는 비명을 질렀다.
로헨은 제 아버지의 뜻에 반해 영지로 쫓겨나 있었고, 쉴라와 카르트 후작 부인도 그와 함께 영지로 내려갔다.
카르트저에 남은 사람은 외숙이 유일했다. 그럼 단둘이 식사를 해야 한다는 건데……. 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느니, 핏줄은 끌리게 마련이라느니 하는 말을 들을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루펠라와 함께 있던 엘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이렇게 질색을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심스레 까닭을 물었더니 루펠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이유를 말해주었다.
“외숙이 식사를 하자고 해요. 정말 가기 싫어.”
“카르트 후작 각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분과 루펠라는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나쁘진 않죠. 내게 바라는 게 짜증 나서 그렇지.”
“짜증이요?”
남편과 루펠라와는 많이 가까워졌지만, 그들의 입으로 선대 공작 부인이나 카르트 후작에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루펠라는 카르트 후작은 선대 공작 부인을 몹시 아끼며 그녀의 죽음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에둘러 설명했지만 그란디아에서 들었던 소문과 라골에게서 들었던 정치적 관계, 그리고 은연중에 그웬 남매가 조금씩 흘리던 말을 취합하였다. 카르트 후작과 남편이 서로를 적대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엘리사의 표정이 심란해졌다. 루펠라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오빠가 작위를 이어받은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별일 없었잖아요.”
“그게 아니라 안쓰러워서요.”
“네?”
남편, 그리고 루펠라와의 대화로 그들의 유년이 외로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왜 그리 호전적인지 이제야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리사의 삶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태어난 후 얼마간은 모후와 왕태후라는 완전한 ‘내 편’이 있었다.
외로움, 그리고 타인의 적대감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레이라 부인과 그 딸들의 핍박을 감내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엔 견딜 수 없어서 잠들기 전엔 항상 신과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빌었다. 이대로 눈을 뜰 수 없기를.
루펠라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고생했어요.”
“괜찮아요. 지금은 잘 살고 있으니까. 뭐, 실은 잘 살고 싶지 않아요. 촌부가 되어 사랑하는 남자의 옷을 빨고, 음식을 하는 삶을 원하니까.”
“루펠라는 참 강하네요.”
“언니는 어때요? 그란디아에서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잖아요.”
“과거에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게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그건 지금도 그래요. 어제의 일상이 꿈일까 봐.”
루펠라가 엘리사를 끌어안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남자였으면 좋을 텐데.”
그녀의 농담에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도 그렇죠?”
엘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체 그 인간 어디가 좋아요? 이해할 수가 없어. 외모만 괜찮으면 뭐해. 여기가 아닌데.”
루펠라가 관자놀이를 두드리자 엘리사는 난감한 듯 웃었다.
“전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네? 말도 안 돼!”
“다정하고 사려심 깊어서 절 편안하게 해줘요.”
“짐승 새끼가 태어나 제일 먼저 본 걸 어미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언니도 그럴지 몰라요. 생각 안 해봤어요?”
엘리사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제가 그 사람에게 느끼는 모든 것이 거짓이 되진 않잖아요. 루펠라, 저는요. 그 사람이 잠을 깊게 잤으면 좋겠어요.”
“네?”
항상 잠을 얕게 자고 조그만 소리에도 깨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을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항상 홀로 스스로를 지켜왔기에 그는 지금까지도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그가 기침을 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잔기침을 할 때도 입을 열고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항상 입을 꾹 다물고 목 안으로 콜록거렸다. 그건 어릴 때부터 남의 눈치를 봐왔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엘리사의 생각은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다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를 둘러싼 많은 일화가 다 거짓이라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까닭으로 그리하였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전 그 사람을 사랑하고 나서 알았어요. 세상이 무서운 게 아니라는 걸요.”
“무섭지 않다고요?”
“세상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받을 상처가 무서워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만신창이가 되어도 좋아요.”
“…….”
“이런 감정을 안 것만으로도 좋아요. 이런 감정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사랑할 가치가 충분해요.”
루펠라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 그레닉은 가지고 싶은 남자였다.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사처럼 그 사람이 받을 상처를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그제야 루펠라는 알게 되었다. 왜 그레닉이 자신을 어리다고 말하는지.
그도 그럴까? 그도 이 사랑스러운 여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그래서 자신을 밀어내고 본래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걸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이의 사랑과 어른의 사랑을 이렇다 정리할 순 없지만, 루펠라가 생각하는 어른의 사랑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날 밤, 루펠라는 외숙과 식사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란델은 식문화가 발달한 나라라 귀족이 가기에 충분한 식당이 많았으나 외숙은 루펠라와 식사를 할 때면 항상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그건 그녀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입에 맞느냐?”
“네.”
“네 어미도 좋아하던 음식이지.”
루펠라는 이게 싫었다. 무슨 말을 해도 선대 공작 부인으로 끝나게 되는 그의 화법이 진저리나게 싫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을 살았다. 선대 공작 부인의 없는 자식을 대신하기 위해 살던 삶이 이제는 죽은 선대 공작 부인을 대신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끔찍해.’
망나니로 유명한 그녀도 외숙의 앞에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를 피하게 되면 어떤 일을 벌일지 몰랐다.
이제 마지막 방법도 없다고 생각해 다 죽자고 나오면 도리가 없었다.
“그웬 공작 부인이 블레어의 물건을 물려받았다지.”
“그런가요?”
루펠라가 모른 체하며 식사에 집중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그가 블레어 카르트, 그러니까 선대 공작 부인의 유품을 그웬저에 가지고 오기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지 루펠라는 알고 있었다.
진저가 작위를 이어받고 나서 처음 있는 정치 싸움이었다. 지금이라면 그딴 물건 다 가져가라고 직접 싸다 주었을 테지만 그때는 만만히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진저도 카르트 후작에 맞서 선대 공작 부인의 유품을 지켰다.
카르트 후작에겐 진저가 블레어의 짐을 가지고 있다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만만히 보이지 않기 위해 애정 없이 그녀의 짐을 내어주지 않는 진저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어떤 사람이냐.”
“새언…… 그웬 공작 부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새언니라는 말에 카르트 후작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래서 싫었다. 이래서 끔찍했던 것이다. 문제를 내듯이 말을 하고 루펠라가 원하는 답을 내놓지 않으면 저토록 살벌해졌다.
“그웬 공작 부인 말이다.”
“좋은 사람이에요. 똑똑하기도 하고요.”
“그자는 제 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루펠라가 소리 나도록 포크를 내려놓았다.
“약속을 어기시는 건가요?”
루펠라의 냉랭한 말에 카르트 후작이 하인을 향해 손짓했다.
하인은 척 보기에도 고가의 상자를 가지고 왔는데 상자를 열자 어마어마한 가격의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목걸이가 있었다.
그 안의 물건을 흘깃 쳐다보던 루펠라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보석이라면 고개를 끄덕였을 테지만, 딱 두 살 분만큼 지혜로워진 그녀에겐 구미가 당기는 대가가 아니었다.
“그럼 네 마음에 드는 것으로…….”
외숙의 말이 한 귀로 들어가 한 귀로 흘러나왔다.
루펠라는 카르트와 그웬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었다.
카르트 후작과 루펠라는 서로 필요로 하는 것을 교환하자는 약속을 했다.
후작에겐 당연히 그웬가의 정보가 필요했고 루펠라는 때마다 필요한 것을 그에게 받았다.
진저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루펠라가 후작과 만남으로써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고, 드물게는 계획을 알아내 미리 방비할 수 있었다.
진저에게 있는 카르트가의 세 가지 약점 중 하나는 루펠라의 공이었다.
“그놈은 안 돼.”
카르트 후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에 있는 귀족 중 루펠라의 사랑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한낱 기사, 그것도 평민인 자에게 카르트가의 핏줄을 줄 순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후작은 제 여동생, 그러니까 선대 그웬 공작 부인의 자식은 루펠라가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녀의 자식이라 여기진 않았지만 호적상 자식도 자식이었다. 그래서 딱 그만큼의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호적상 딸이 그따위 사내와 결혼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눈을 부릅뜬 루펠라가 외숙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또 그 사람의 가족에게 간자를 붙이실 건가요?”
그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루펠라의 성격에 그것을 알고 말하지 않았다는 게 더 놀라웠다.
카르트 후작 또한 식기를 내려놓았다.
“언제부터 알았지?”
“그게 중요한가요?”
“네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위험한 일은 없을 테지.”
“숙부님!”
루펠라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이래서 이 사람보다 진저가 편했다. 그래도 진저는 제 뒤에서 수를 쓰진 않았다. 제 기사에게 간자를 붙이진 않을 것이다. 말이 간자지 수틀리면 암살하겠다는 말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루펠라가 카르트 후작에게 약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그는 정말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자가 황실 배 검술 시합에 나간다지.”
“…….”
“추후에 사람을 통해 장소를 전달하마. 그자를 그곳으로 데려와.”
루펠라가 손이 새하얗게 변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그자인가, 아니면 네가 사랑하는 남자인가.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다.”
루펠라의 주먹에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그웬 본저에 돌아온 루펠라는 안색이 파리했다.
정문을 지나 내저로 들어온 그녀는 소거실에 켜져 있는 작은 불빛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사였다. 귀가가 늦은 루펠라가 걱정되어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루펠라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엘리사를 보며 입술을 콱 깨물었다. 도무지 새언니를 볼 자신이 없었다.
엘리사는 그녀 자신보다 제 남편을 아끼고 있었다. 언제나 단언했다. 남편이 없는 삶은 어떤 가치도 없노라.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이노라.
루펠라가 사랑하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선 이 사랑스러운 여자의 모든 것을 빼앗아야 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외숙은 그의 부탁이 진저에게 알려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레닉과 그의 부모를 해하겠다고 선언했다.
진저에게 외숙의 청을 말하고 도와 달라 애걸복걸해야 할까. 그가 자신을 도와줄지도 의문이지만, 이번 일이 드러나는 즉시 카르트가는 멸문을 피할 수 없었다.
차라리 멸문이 되면 다행이지 살아남는다면 카르트 후작에게 적으로 낙인찍혀 평생 불안에 떨게 될지도 모른다.
‘그레닉을 지켜야 해.’
그레닉을, 그의 가족을 지켜야 했다. 그럼 오빠는? 오빠는 어쩌지?
카르트 후작은 누이가 죽은 이후로 매일같이 갈아왔던 칼을 빼 들었다.
그 칼에서 그레닉과 진저를 둘 다 지킬 수 없었다.
모두들 말했다. 루펠라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그녀는 그저 카르트의 혈육이자 그웬가의 영애일 뿐, 가문의 비호를 벗어나면 그저 행로에서 벗어난 난파선일 뿐이라고.
질투에 눈먼 자들의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자랑스러웠다. 할 말을 다하고 살았고,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 그거면 인생의 승리자라 불러도 마땅하다고 여겼다.
아니었다.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껏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살아왔기에 이런 기막힌 선택을 해야 하는가!
진저를 제 손으로 죽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레닉과 그의 가족을 외숙의 칼날에 희생되도록 만들 수도 없었다.
“루펠라?”
“…….”
“괜찮아요?”
엘리사가 루펠라의 뺨에 손을 올렸다. 환절기라 감기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표정이 더 걱정스러워졌다.
그녀의 손길에도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루펠라가 아랫입술을 꽉 짓씹었다.
“용서할 수 있어요?”
“네?”
“언니의 소중한 것을 내가 빼앗는다면 용서해 줄래요?”
엘리사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자 루펠라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좀 피곤해서…… 먼저 올라갈게요.”
“루펠라.”
그녀는 엘리사가 이름을 불렀음에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루펠라가 이상했다. 카르트 후작을 만나러 가기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그녀가 기이할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밤이 깊어서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 게 염려가 되어 하인을 보냈다. 하인은 카르트 후작과의 식사는 이르게 파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남편 또한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후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루펠라에게 손을 대지 않을 거라고.
그녀를 호위하는 그웬가의 기사들이 실력자들일뿐더러 카르트가의 기사들까지 붙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함께였다.
방에 들어온 그녀는 침실 문고리를 잡은 채 미간을 좁혔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일까…….’
루펠라가 저렇게 기운이 없는 건 처음이었다. 그레닉이 떠나겠다고 했을 때도 저처럼 복잡한 표정은 아니었다.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돌렸다.
“여보……?”
진저가 불도 켜지 않은 채 침실에 딸린 작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불을 켜려 등과 연결된 줄을 찾아 더듬거렸다.
“켜지 마.”
남편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루펠라의 귀가가 늦는다고 사람을 보내길 요청했을 때에도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지 않았다.
루펠라 혼자만의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사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그의 숨소리가 작아졌다.
“거기에 있어.”
소파까지 열 걸음쯤 남았을 때 그는 그녀가 다가오지 않기를 원했다. 엘리사는 숨을 멈추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치는 남편의 실루엣을 보았다. 심장이 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왜냐고, 무슨 일 있는 거냐고, 어째서 나를 거절하는 거냐고, 당신의 선택이 이것이냐고. 그녀는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거기에 있어. 내가 갈게.”
‘아…….’
그의 목소리는 몹시 낮았지만 아주 달콤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천천히, 그리고 곧게.
엘리사는 말없이 그를 기다렸다. 아니,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눈에 고인 눈물이 떨어지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말했다.
거기에 있어.
내가 갈게.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모호한 말이지만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그녀였기에, 그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구두코와 그의 구두코가 닿았다.
그가 왔다.
그녀에게로.
달빛이 그의 등에 닿아 하얗게 부서졌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가늠이 갔다.
모후의 생전, 그리고 소피아 왕태후가 강건하던 시절 이후 그녀가 눈물을 보인 건 언제나 괴로움을 견딜 수 없을 때였다. 그를 만나고 그녀는 환희의 눈물을 알게 되었다.
“아아…….”
겨우 목소리를 내자 눈물도 함께 터져 버렸다.
“기다리게 했군.”
“으…….”
“미안해.”
아니라고, 기다림마저 행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눈물에 잠겨 할 수 있는 건 그저 울음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최고의 고백을 들었는데, 당신에게 난 이렇게 못난 남자야.”
진저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감쌌다.
“나를 위해 만신창이가 되어주겠다는 여자를 어떻게 더 기다리게 하겠나.”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을 포갰다.
방문 앞에서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잠을 얕게 자는 것을 마음 아파하는 최초의 여자였다. 그를 위해 만신창이가 되겠다고 결심한 하나뿐인 여자였다. 그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해준 유일한 여자였다.
그의 등을 끌어안은 엘리사의 손이 잘게 떨렸다.
겁이 났다. 너무나 바라던 순간이라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눈을 뜨면 절망하게 되지 않을까.
불안에 주저앉을 것 같은 그녀를 지탱해 주는 건 그의 단단한 팔과 뜨거운 입술이었다.
오랜 시간 입술을 겹치고 있던 남녀가 떨어진 건 하늘이 푸르게 변했을 때였다.
이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의 눈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드디어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눈빛이 이토록 다정해진 것은.
인정한다. 그를 기다리겠다고 말한 건 어떠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향할 때만 다정해지는 그의 눈빛, 자신에게만 향하는 뜨거운 눈동자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따금 숨이 막힐 것 같은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자신보다 멋진 여자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너무나 멋져서 그의 상처를 끌어안고 그가 더 이상 힘들지 않도록 보듬어줄 수 있다면 어떡하지. 그래서 그가 자신을 선택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그를 위해서라면 떠나주어야 했다. 하지만 떠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늘 온몸을 경직시켰다. 머리를 굴리고, 잠을 줄여 그에게 도움이 될 일을 했다.
엘리사가 천천히 손을 올려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매일 상상했어요. 이 순간이 오면 어떤 기분일까 추측도 해봤고요.”
“…….”
“생각보다 더 행복하네요.”
그녀는 울면서 웃었다.
이 작은 몸에서 이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던가. 그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함께 침대에 누운 부부는 계속해서 서로의 얼굴을 매만졌다. 두 사람 모두 지금이 현실임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싶었다.
“여보.”
“음.”
“멋진 고백을 해주고 싶었다고 했잖아요. 언제부터 제게 올 준비를 했던 건가요?”
“얼마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럼요?”
“처음부터 당신에게 빠졌지.”
엘리사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는 맹수였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온몸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처음부터 빠졌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이야. 내가 성가신 여자를 옆에 둘 것 같아?”
“제가 성가셨나요?”
“신경 쓰였지.”
돌이켜보면 무심한 체했지만 항상 그녀가 신경 쓰였다. 결혼을 진행할 때부터 이상한 여자다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더 이상했다. 그래서 성가실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처음엔 우리 말도 잘 안 했잖아요.”
그도 웃음을 터뜨렸다.
오셨습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다녀오십시오. 몇 마디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었다.
“몸이 바뀌었을 때도 신경 쓰였나요?”
“당연하지.”
“여자로서?”
“뭐, 그때는 여자라기보다는 몸이 바뀐 동지 정도였어.”
“처음부터 빠졌다면서요.”
“자각하지 못했으니까.”
엘리사가 입술을 삐죽이자 진저가 촉 입을 맞췄다. 그녀는 밉지 않게 그를 흘겼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술집을 드나들어요?”
“오해야. 난 몇 번 따라간 것밖에 없어.”
“엉덩이가 기특한 하이디는요?”
켁. 그가 숨을 잘못 들이켰는지 몇 번을 콜록거렸다.
“그건 분위기를 맞추려던…… 거지.”
“분위기 두 번 맞추면 두들겨 보기도 하겠어요.”
그녀가 툴툴거렸다. 그는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 모습마저도 귀여워 보였다.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이 여자에게 미쳐 있었다. 우스운 건 이런 당황스러움마저 그를 기쁘게 한다는 것이었다.
“꺅!”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뿐만 아니라 움켜쥐기까지 했다. 음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핥으며. 놀리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버럭 소리쳐 그의 장난에 맞장구 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예요!”
“당신한테 분위기를 맞추는 거지.”
얼굴이 새빨개진 엘리사가 아직도 엉덩이에 닿은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이번엔 허리를 쓰다듬었는데 손이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그의 손을 꼬집었다.
“정말!”
“부부고, 마음도 통했는데 뭐가 문제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제 슬슬 마르코스 유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싶은…….”
“정말!”
틈만 나면 사람을 이렇게 놀렸다.
더 이상 잠드는 게 무섭지 않았다. 체온이 낮은 손이 달아오른 뺨을 식혀 주었다. 아주 달콤한 손길에 그녀는 그간의 피로를 모두 녹여내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