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비스트 5
13장 루펠라(2)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본저를 찾은 루펠라는 저택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쯤이면 연무장에 가 있을 오빠가 소거실에 앉아 신문을 펄럭이고 있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시퍼렜다. 자세히 보니 잇자국도 나 있었다.
‘저택에 개가 있나?’
이상한 건 오빠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간엔 1층에서 고용인들의 업무를 체크하고 있을 새언니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콕스가 1층을 지나고 있었다. 그를 붙잡은 루펠라가 이상 기류의 원인을 물었다.
콕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2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양손을 꽉 쥐더니 주먹질을 하듯 허공에서 손을 휘둘렀다.
‘싸웠어?’
‘네.’
눈짓만으로 대화를 마친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조용하다 싶었다.
웬만한 경지에 오른 철학자도 저 망나니를 데리고 살면 성격 파탄자가 될 것이다. 언니가 많이 참았지, 암.
루펠라가 츳츳 혀를 차자 콕스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움직여 물었다.
‘오빠 아니야?’
‘아니에요.’
이번에도 눈짓만으로 대화를 마쳤다. 루펠라가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럴 리가. 언니는 순하고 다정해서 누구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낼 사람이 아니었다.
진저가 신문을 구겼다. 어제 제 손을 아작 낼 기세로 깨물었던 아내는 씩씩거리며 방을 나섰다.
아내는 놀리지만 않으면 유순하고 점잖은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제 손가락에 피멍을 들게 할 정도로 깨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남편이 아내에게 키스 좀 할 수 있지.
‘내가 간통을 했어, 억지로 배를 맞추자고 했어?’
고작 키스 한 번에 손가락에 피멍이 든 진저는 오늘 아침 훈련에도 나가지 않았다.
정찰군 소대장들이 함께하는 신년 첫 훈련임에도 불구하고 소거실에서 아내를 기다렸다.
처음엔 사과를 할 줄 알았는데 아내는 아침도 안 먹겠다고 했다. 그것도 직접 말한 게 아니라 하녀를 보내서 말을 전했다.
진저가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그레닉이 본저로 돌아왔으니 당연히 아침부터 출근할 줄 알았다.
“뭐, 왜.”
루펠라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젖혔다. 진저는 울컥 치미는 화를 가까스로 참았다.
“하던 일해라.”
“내가 뭘 하는데?”
“아침마다 하는 게 있잖아.”
아내와 루펠라는 날이 풀린 후부터 아침 티타임은 소거실에서 했다.
루펠라가 ‘저 인간 돌았어?’ 하는 표정으로 콕스를 보고 있었다. 왔으면 냉큼 아내를 불러오지 왜 집사와 노닥거리고 있는가.
“내가 뭘 아침마다 하…… 아!”
진저의 표정이 점점 사납게 변했다. 루펠라는 그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상아, 이 화상아.”
제 오빠를 향해 혀를 차던 그녀가 이번에 콕스를 보았다.
“콕스, 말해봐. 남자는 원래 다 저렇게 멍청해?”
“아, 그러니까 그게…….”
콕스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입만 뻐끔거렸다. 그렇다고 하면 주인님께 맞아 죽을 것 같고, 아니라고 하면 아가씨 등쌀에 말라 죽을 것 같았다.
저는 왜 하필 이 시간에 1층에 내려와서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게 되었단 말인가.
“괜찮아, 말해도 돼. 바른말 했다고 죽일 거야, 어쩔 거야.”
루펠라의 비아냥거림에 진저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헛소리 말고 늘 하던 거나 하라고 말했다.”
“언니가 뭐 하는지 궁금하면 직접 올라가시든가. 가서 잘못한 게 있으면 빌고, 없어도 좀 빌고. 사과한다고 좆이 떨어지는 건 아니거든?”
흥, 코웃음 친 루펠라가 계단을 향해 팔랑팔랑 걸어갔다.
“연무장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가 보지?”
진저가 말했다. 그제야 루펠라가 걸음을 멈추고 제 오빠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진저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루펠라의 눈엔 비열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오늘부터 그 녀석의 훈련이 시작되는데.”
“벌써?!”
“콕스, 마크빌에게 루펠라의 출입을 금하라 전…….”
“잠깐잠깐! 오라버님, 무례를 용서하시어요.”
루펠라가 치마를 양쪽으로 펼치며 급히 무릎을 굽혔다. 그를 보기 위해선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명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진저가 오만하게 웃었다.
엘리사는 해가 뜬 후에도 한참을 이불 속에서 있었다. 그녀는 퉁퉁 부운 눈을 비비며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제게 입을 맞추었단 말인가.
그는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쌍방 통행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에겐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좋아만 하라는 말로 느껴졌다.
‘그런데 왜 키스를 하는 거야.’
사람 마음만 심란해지게.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알음알음 들어온 것들로 인해 마음을 내줄 것도 아니면서 여지를 남기는 게 나쁜 짓이란 걸 알았다.
정말 나쁜 짓이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그러니까 제게 여지를 남긴 남편은 몹쓸 남자였다.
쾅쾅!
노크 소리라기엔 너무나 큰 소리에 놀란 엘리사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침실을 나서 출입문 문고리를 잡은 엘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이면 어쩌지.’
지금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혼란만 가중될 것 같았다.
“언니, 나예요!”
루펠라의 목소리였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문을 열자 한껏 상기된 표정의 루펠라가 보였다.
“오늘 그레닉이 훈련을 받는대요!”
그녀는 들어올 새도 없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아니면 얼굴도 못 볼 것 같거든요. 그래서 언니한테 인사만 하고…… 잠깐, 너!”
복도를 지나는 하녀를 붙잡은 루펠라가 훈련이 파하는 시간을 물었다. 삼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들은 루펠라는 더 마음이 급해졌는지 급히 엘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오늘 하루 잘 보내고 오후에 봐요. 아, 그리고 오늘 제2저에서 내 짐이 올 거예요. 그레닉이 떠날 때까지 아예 본저에서 먹고 자고 하려고요. 괜찮죠?”
“저야 당연히…….”
“오빠한테 허락 좀 받아줄래요? 내가 말하면 단칼에 거절할 게 뻔하잖아요. 언니, 오후에 봐요!”
엘리사가 대답할 새도 없이 제 할 말만 말한 루펠라가 쏜살같이 복도를 떠났다.
‘그이에게 허락을 받아달라고? 안 돼!’
오늘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루펠라를 붙잡으려 파자마 차림으로 복도에 나섰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말 보고 싶지 않은데…….”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오전이 지났다. 점심도 거른 엘리사는 그녀의 집무실에서 펜 끝만 매만지고 있었다. 루펠라가 오후에 오기로 했으니 그전엔 허락을 받아달라는 말일 터였다.
그녀가 직접 제 오빠에게 본저로 돌아오겠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불허를 외칠 거다.
남매가 대판 싸움을 벌이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럼 루펠라는 본저에 오는 게 더 힘들어질 테고, 어제보다 힘든 날이 이어지겠지.’
남편은 말했다. 그레닉이 진정 루펠라를 원한다면 그들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다고. 그러니 자주 만나 마음이 깊어지게 해야 했다.
‘자주 만난다고 마음이 깊어질까?’
남편은 자신과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데도 마음이 깊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키스를 했잖아.’
무슨 생각을 해도 끝은 키스로 귀결되었다.
남편은 오후부터 가신들과의 회의가 잡혀 있었다.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말도 꺼내지 못할 것이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엘리사가 문을 쳐다보았다.
결국 엘리사는 남편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똑똑.
제가 낸 노크 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도저히 남편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대로 도망치려는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남편이 나왔다.
다른 때는 앉은 채로 들어오라, 마라 입만 움직이던 그가 직접 나와 다리를 꼰 채 문에 몸을 기댔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당황한 엘리사가 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발이 꼬여 휘청거렸다.
“어이쿠.”
장난치듯 그녀의 허리를 잡은 진저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인데 주저앉으려고 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
“두드렸잖아, 당신이.”
아주 얄미운 표정이었다. 한 손으론 아내의 허리를 잡고, 한 손으론 문을 잡고 있던 그가 씩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맞춰볼까?”
“네?”
“당신이 날 찾은 이유.”
“뭐, 뭔데요……?”
그가 그녀의 코에 입을 맞추려는 듯 바짝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
깨물어버렸다.
따끔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소리친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아내를 본 진저가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을 놓았다.
“복수당하려고 온 거잖아.”
“그럴 리가 없……!”
“아님 말고.”
그리고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아내는 어처구니가 없어 숨만 크게 들이켰다.
* * *
날이 더 이상 춥지 않았다. 사내들이 상의를 탈의하는 게 고역이지 않을 만큼의 선선한 날씨.
오전부터 훈련에 매진하는 이들의 표정엔 기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정찰군 소대장들이 참가하는 첫 훈련. 참관은 그들 주군이 아닌 가문의 영애가 하고 있었다. 연무장에 들어온 내내 한곳만을 응시한 채.
훈련 중간, 쉬는 시간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레닉은 그녀의 시선을 철저히 외면했고, 그럴수록 루펠라의 시선은 더욱 집요해졌다.
훈련이 파하고 식모와 하녀들이 간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 후에야 병사들은 숨통이 트인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대장들은 그들끼리 모여 목소리를 죽인 채 대화를 나누었다.
“언제까지 계시는데?”
한스의 말에 하우벡이 왈칵 얼굴을 구겼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주군은 아셔?”
“주군이 명하셨다.”
한스가 에엑 소리를 내며 뒤집어졌다. 그 곁을 지나던 소대장들마저 입을 크게 벌렸다.
“주군이 어째……!”
그때였다. 훈련 내내 구령대를 지키고 있던 루펠라가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지나 물을 마시고 있는 그레닉에게.
한스가 그레닉의 등을 쳤다.
“인사 한 마디만 해드려.”
“네 할 일이나 해라.”
“계속 이곳에 계시게 할 참이냐. 너는 몰라도 우린 무슨 죄야. 숨도 못 쉬겠다고.”
한스는 그의 목에 팔을 건 채로 미간을 좁혔다.
루펠라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내내 그레닉만 응시했다. 그는 그녀가 무얼 바라는지 알고 있었다.
한스의 말대로 인사 한마디. 잘 다녀왔다는 그 말 하나. 고작 그뿐인데도 그레닉은 고집스레 그녀를 외면했다.
루펠라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레닉이 물통을 내려놓았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니.”
“그럼 돌아가십시오. 훈련에 방해됩니다.”
“그래서 기다렸잖아. 끝날 때까지.”
그레닉이 허리를 굽힌 후 막사로 향했다. 병사들은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루펠라가 그를 쫓아 막사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루펠라에게 팔이 잡힌 그레닉이 순식간에 그녀를 제압했다.
“말씀드렸죠. 검 잡는 놈들은 함부로 잡는 게 아니라고.”
힘을 주어 잡은 게 아니라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고 워낙에 순식간에 벌어져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루펠라가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레닉!”
“주군께 고하십시오. 그럼 전 그웬가에서 쫓겨나 노역이나 하게 될 겁니다. 사지가 찢길지도 모르죠.”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주제에.’
그레닉이 손을 놓았다. 그에게 잡혀 있던 루펠라가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그는 손조차 내밀어 주지 않았다.
모질고, 매정하고, 지독하다. 부정적인 수식어는 모두 떠올린 루펠라가 온몸에 힘을 주었다. 목에 핏대가 서고 피부가 온통 붉어졌다.
그레익이 막사 안에 비치된 작은 난로에 불을 피웠다.
바닥이 차서.
그녀가 쉬이 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래서 더 잔인한 것이다. 이렇게 밀어내면서도 제 마음을 온전히 감추지는 못하니까.
“쉬다 돌아가십시오.”
루펠라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물건을 잡히는 대로 던졌다.
“잘 지냈냐고 묻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레닉은 말이 없었다. 차라리 팔을 꺾고, 그녀의 뺨을 내리친다면 이토록 서럽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늘 말이 없었다. 자신만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추울까 봐 난로를 피우고 제 팔을 꺾은 게 미안해 손을 몇 번이나 오므리고 펴기를 반복하면서.
“너한테 그 한마디 듣자고 내가! 공작가의 영애인 내가! 이 먼지 바닥을 구르고 있는데…….”
“구르지 않고 싶으시거든 더 이상 저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너 아니어도 남자는 많은데, 세상천지에 널렸는데!”
그레닉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채로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세탁할 옷가지를 정리하던 하녀를 붙잡았다. 그는 하녀에게 루펠라를 부탁했다.
넘어졌으니 상처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약을 챙겨 와라. 오늘 옷을 얇게 입으셨다. 숄도 함께 가져오너라. 온통 그녀의 걱정뿐이었다.
그녀는 물었다.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그도 묻고 싶었다.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세상 어떤 것보다 그를 우선하였다. 모든 것을 가진 여자가 아무것도 없는 남자를 그토록 절절하게 사랑했다.
그런 여자에게 어떻게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가난했다. 도축업을 하는 아비는 푸줏간 건사도 힘든 사내였다. 모친은 아팠다. 그가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서지 않으면 약값도 댈 수 없는 지독한 병에 걸려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짐을 짊어지고 살아왔다. 그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남자였다.
그래서 그녀가 이기적이란 것이다. 그로서는 감히 뱉지도 못 할 말을 눈빛으로, 행동으로, 입으로 전했다.
나는 네가 좋아.
너를 사랑해.
너 아닌 다른 무엇도 나를 채울 수 없어.
그녀의 눈빛과 행동과 말이 제게 와 닿을 때마다 그는 고향의 부모가 떠올랐다.
병상에 누워 스스로를 탓할 어머니, 제가 보낸 돈이 자식의 목숨값이라 생각하여 하루 한 끼도 겨우 넘기실 아버지.
그 홀로 좋자고, 그 하나만 행복하자고 그녀를 택할 수 없었다. 그레닉은 해를 등지고 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뻑뻑했다. 열 감기라도 걸린 사람처럼.
루펠라는 결국 오전 훈련에 식사 시간, 그리고 오후 훈련까지 내리 연무장에서 보내고 해가 질 무렵에야 내저로 돌아갔다.
* * *
“내가 저를 잡아먹는댔어? 그냥 말 한 마디면 족하다고요. 상황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루펠라가 땍땍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엘리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이 그 말이다. 말 한 마디면 족한 것을 매번 골탕만 먹이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루펠라는 입안에 쿠키며 초콜릿을 와구와구 쑤셔 넣곤 부스러기를 다 흘리며 씹어댔다.
“그레닉의 문제는 그거예요. 인사라도 하면 내가 결혼하자고 매달릴 줄 아는 거! 순서가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요.”
그래, 순서!
엘리사가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순서가 문제였다, 순서가. 대화를 시작하고 서로를 안 후에는 포옹, 그리고 가벼운 키스. 여기서 키스란 볼이나 눈, 손등에 하는 가벼운 입맞춤을 말한다. 그다음에 혀가 오고가는 딥키스가 오는 게 순서이지 않은가.
아직 준비 안 된 사람에게 다짜고짜 혀를 넣다니. 배려가 없는 것이다. 혹은 제가 우스웠던가.
전자보다 후자가 문제였다. 전자야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를 할 수도 있지만, 후자라면…….
엘리사는 핏기가 죄 가시도록 손을 말아 쥔 채 부르르 떨다가 천장을 올려보았다. 남편의 집무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두 여자의 수다를 듣고 있던 라골은 기가 다 빨리는 것 같았다.
한쪽에선 인사 한 마디 안 해주는 무뚝뚝한 남자 때문에, 또 한쪽은 까닭은 말해주지 않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겹치는 남자 때문에 진탕 화가 나 있었다.
차라리 라골이 그 남자들의 멱살을 잡고 목을 짤짤 흔들고 싶었다. 대체 왜 그들과 조금도 상관없는 자신이 이 자리에 붙들려 있어야 하는가!
“그래서 언니는요?”
“네?”
“오빠가 언니 손을 깨물고 문을 닫았다면서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처음엔 기가 막혀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 몇 분이 지나니 정신이 돌아왔다. 손이 얼얼했다. 시선을 내려 손을 보았다.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타인이 득도했다 여길 만큼 성인군자였던 그녀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간 너무나 많은 응어리를 가슴속 주머니에 묻어왔다. 터져도 진작 터졌어야 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 남편은 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번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문을 열었다.
‘왜 그래요!’
다짜고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부부 사이에 키스가 대수냐는 말이 돌아왔다.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니면? 한 번 더 하게 해주려고?’
‘자꾸 왜 키스를 하냐고요!’
‘한 번밖에 더했어?’
‘하, 한 번이든 두 번이든 했잖아요. 나한테…….’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남편과는 무슨 대화를 나누어도 말이 야릇해져서 난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뭘 했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표정이라 오히려 그녀가 더 당황했다.
기실,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는 함부로 입을 맞추는 남자가 아니라고. 당신이기에 숨결을 교환한 거라고. 그러니까 기대해도 좋다고.
정말 화가 나는 건 실망할 걸 알면서도 기대를 하는 자신이었다.
엘리사가 찬물을 소리 없이 들이켰다. 라골은 이 자리가 어서 파하길 빌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오빠는 뭐래요?”
“아, 그게…….”
루펠라의 일을 꺼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엘리사의 표정을 본 루펠라의 태도가 여상했다.
그레닉이 수도군과 훈련을 받는 동안엔 본저에 있으리라 다짐했다. 이미 제 저택을 가지고 있는 이상 가주의 허락을 얻어야겠지만, 굳이 허락을 얻기 위해 동동 구를 생각은 아니었다.
정 안 되면 드러눕지, 뭐.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같아선 동동 구르지 않아도 그 망나니가 먼저 허락할 기세였다.
오빠와 새언니의 사이가 가까워진 건 흡족할 일이었다. 개망나니가 언니라면 한풀 꺾일 때부터 좋은 짝이다 싶었다.
처음엔 이 순둥이 같은 새언니가 오빠를 휘어잡을 날이 올까 싶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펠라가 라골을 흘깃 쳐다보았다. 두 여자의 수다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손을 흔들자 라골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루펠라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서둘러 서재를 나섰다.
“그거 어디에 뒀어요?”
“그거요?”
“밤의 요정들이 입는다는 갑옷 말이에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함께 산 속옷 말이에요. 올리비아 말이 언니가 나 모르게 따로 재밌는 걸 구매했다는데.”
“재밌는 거라니…….”
엘리사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루펠라가 목소리를 낮추고 가슴과 하의의 포인트를 가리켰다.
“속옷이요.”
“속…… 토끼!”
“토끼? 토끼 속옷이 뭐가 있었더라……. 아아, 꼬리 달린 망사?”
엘리사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젓자 루펠라는 음흉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늘렸다.
“봐요. 어디에 뒀어요?”
“그, 그걸 왜…….”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고, 언니를 돕고 싶기도 하고.”
엘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웬 남매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면서 이런 면은 놀라우리만큼 닮았다. 저렇게 음흉한 표정을 지을 때는 절대 말려들면 안 된다.
“오빠한테 뭐 섭섭한 게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도울 수도 있잖아요.”
“루펠라가 도울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이성 관계는 언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않겠어요? 언니는 가만히 앉아있어요. 내가 다 떠먹여 줄 테니까.”
엘리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그녀가 떠먹여 주는 게 달디 단 디저트인지 입에 넣을 수도 없는 폐기물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 * *
아내와 루펠라는 다른 시누올케 사이와는 다르게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나 아내가 꼭 한 가지 루펠라를 언니처럼 챙기는 게 있었는데, 그게 바로 루펠라의 식사였다.
루펠라는 삼시 세끼보다 술을 더 좋아하여 한 달 중 보름은 숙취로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엘리사가 끼니를 챙겨주지 않으면 식사랍시고 안주나 몇 개 집어먹을 게 빤히 보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다른 건 몰라도 식사 때만은 눈에 불을 켜고 루펠라를 지켜보았다.
루펠라가 본저에 온 날은 진저와의 저녁은 뒷전에 두고, 그녀와의 식사를 우선시했다.
이것이 마뜩잖은 진저는 엘리사에게 까닭을 물었다. 아내는 ‘당신은 삼시 세끼를 보양식으로 드시고, 철마다 보약까지 챙기잖아요’라며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에겐 그런 망나니일 수가 없는 루펠라도 제 새언니 말이라면 일단 한 수 굽혀 주었다.
그래서 본저에서는 그녀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오늘은 루펠라 녀석이 왔으니 엘리사가 아무리 화가 나 있어도 식당에 내려올 터였다.
몇 시간 전, 진저는 아내의 방을 찾았다. 오전처럼 아내를 자극하면 화가 나도 제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내는 두 시간쯤 꽁해 있더니 루펠라와 꺅꺅거리고 있었다.
아내의 방, 드레스룸 안에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루펠라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내는 잔뜩 당황한 목소리였다.
“이, 이건 정말 아니에요!”
‘대체 뭐가?’
진저가 ‘정말 아니라는 것’이 궁금해 드레스룸의 문을 열려던 때였다.
때마침 하녀가 웃는 낯으로 드레스룸을 나오고 있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진저를 발견한 하녀는 기함을 하고 소리쳤다.
“주, 주인님!”
그러자 드레스룸 안에서 우당탕 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어떡해요!’를 외치는 아내와 ‘다리, 다리!’를 부르짖는 루펠라는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드레스룸 밖으로 나왔다.
무슨 소란이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루펠라가 제 새언니를 데리고 침실로 쏙 들어가 버린 것이다.
진저의 눈치를 보는지 방은 한동안 고요했다. 그리고 십 분쯤 지났을까. 다시 말소리가 시작되었다. 루펠라가 분명했다.
“레이스…… 망사는 누구나…… 속옷 보여줄 사람…… 있다…… 요…….”
어쩐지 아내를 설득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레이스, 망사, 누구나, 속옷, 보여줄 사람, 없다?’
대체 무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뒤이어 말이 들려왔다.
“그냥 벗어요!”
벗긴 뭘 벗으란 말인가. 본인이 있는 자리도 아닌데.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었던 시시껄렁한 농담이 떠올랐다. 동성끼리 사랑을 나눌 때의 순서와 방법에 대한 말이었다. 질 낮은 음담패설을 하던 중 나온 소리였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도 아내의 곤란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진저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속옷을 들고 있는 건 아내였고, 말리고 있는 건 루펠라였다.
침입자를 본 엘리사의 눈이 커지나 싶더니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가요!”
“아니, 옷도 다 입……!”
……고 있는데 왜 그래, 라는 뒷말은 그의 얼굴을 향해 던져진 팬티에 의해 막혀 버렸다.
순식간에 손으로 잡아채긴 했으나 칼도 아니고, 하다못해 베개도 아닌 이상한 것에 어처구니가 없어 진저의 말문이 막힌 것이다.
“뭐 하는 거야……?”
그는 살면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허탈한 목소리를 내본 적이 있나 싶었다.
엘리사는 남편의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고 득달같이 달려와 그의 손에 들린 팬티를 잡았다.
어쩌다 보니 줄다리기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힘으로는 당연히 진저 쪽이 월등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완력을 쓸 수 없었다. 아내는 작고 연약해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닥에 나동그라질 것 같았다.
“주세요!”
“이게 뭔데.”
“제 거예요.”
“그럼 이 손바닥만 한 게 내 거겠어?”
진저가 팬티를 높게 들었다. 엘리사는 속옷을 잡기 위해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는데, 손끝이 닿기도 전에 그에게 안겨 버리고 말았다.
아내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은 그가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대신 설명하라는 표정이었다.
“언니 얼굴 터지겠네.”
“뭔지나 설명하지?”
“오빠나 놓지그래? 언니가 많이 부끄러울 텐데.”
루펠라의 말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녀의 말처럼 온몸이 붉어진 아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아내의 허리를 잡은 손을 움직였을 때였다.
말캉.
허리에서 조금 내려간 그곳. 스쳐봐야 패티코트나 느껴질 그곳이 이상했다.
진저도 놀라고, 엘리사도 놀랐다.
움켜쥔 것도 아니고 스친 것뿐인데 아내가 홉홉, 하고 숨을 들이켜더니 그대로 비명을 질렀다.
* * *
진저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오므리고 펴기를 반복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멍한 표정으로 주먹을 오므리고 펴기를 반복했다.
적지 않은 수의 여자를 안았고, 모두 머리 위에서 팡팡 터지는 불꽃놀이를 보여주었다. 그와 잠자리를 가진 여자 중 만족하지 못한 여자는 없었다.
다시 말해 그 많은 여자의 몸을 만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맛까지 보았단 뜻이다. 그런데 아내의 몸은 정말 촉감이 묘했다.
젤리 같기도 하고, 푸딩 같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맛보기 전에 손을 떼어버려서 착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가만히 손바닥을 들여다보던 진저가 계단 쪽에서 나는 인기척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내는 어디 갔는지 루펠라 홀로 소거실에 내려왔다. 루펠라는 인상을 쓰고 있는 제 오빠를 보고 함께 얼굴을 구겼다.
마음 같아선 쏘아붙이고 싶은데 그레닉이 본저에 있는 동안엔 입을 조심해야 했다.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입을 삐쭉거렸다.
‘왜 훈련은 꼭 본저에서만 하는 거야. 제2저에서 하면 좀 좋아?’
제2저는 연무장은커녕 제대로 된 훈련 장소가 없다는 것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안사람은?”
진저의 물음에 루펠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일 때문에 단단히 골이 났다.
뭐, 루펠라가 생각해도 개망신이긴 했다. 초야도 치르지 않은 순진한 여성이 노팬티 차림으로 있다가 엉덩이를 잡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엘리사가 처녀는 아니지 않은가. 다른 남자도 아니고 남편의 손이 닿은 건데, 뭐.
루펠라는 부끄러움에 몸져누운 엘리사를 위로했다. ‘오빠가 모를 수도 있다’는 입에 발린 말부터 ‘까짓 엉덩이 한 번 스친 게 무슨 대수냐 움켜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하등 도움 되지 않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도저히 진저의 얼굴을 못 볼 것 같다며 저녁 권유까지 거절했다.
진저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루펠라가 그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싸우는 건 겁나지 않지만 쫓겨나는 건 겁난다. 퇴로를 살피던 그녀가 식당 쪽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라골!”
서류를 보며 계단을 향하고 있던 그가 표정을 굳혔다. 뭔가 이상했다. 마치 오늘 오후, 두 여자의 수다에 강제 참여했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진저의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 몇몇이 조그맣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도망치라는 것처럼.
라골이 움직이는 것보다 루펠라가 빨랐다. 그녀가 라골의 허리춤을 붙잡더니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언니 좀 불러와.”
“……네?”
“언니 말이야. 저녁 식사해야지.”
마님의 소식이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접하는 사람이 바로 라골이었다.
고용인들은 마님의 심기가 조금이라도 어지럽다 싶으면 곧장 라골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마님의 눈썹이 약 2.3㎜가량 떨어졌습니다.’
‘큰일입니다! 마님께서 한숨을 쉬셨습니다.’
‘닥터! 닥터를 불러야 해요! 마님이, 마님이 무려 두 번이나 기침을 하셨어요!’
물론 그녀가 공명정대한 안주인이고 그로 인해 고용인과 기사들의 근무환경이 여러모로 개선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기사는 물론이거니와 아랫것들에게도 상냥해서 그들의 능률을 끌어올리는 데다 어떤 면에선 귀여웠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추종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여하튼 라골은 그녀의 일로 난리를 치는 기사며 고용인들에게 질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가문의 영애까지 나섰다. 영애뿐인가, 그 뒤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사내는 그웬가의 가주였다.
‘제기랄.’
라골이 이를 악물고 허리를 굽혔다. 까라면 까야지. 세상은 원래 돈 주는 놈이 법인 것이다.
계단을 오르던 라골은 생각했다.
‘돼지고기 냄새군. 이 자식들…… 마님은 돼지를 싫어하신다고 몇 번을 알려줘야 하는 거야.’
라골은 몰랐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마님 추종자 중 하나란 것을.
루펠라에 이어 스승인 라골까지 저녁을 권하자 엘리사는 어쩔 수 없이 식당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녀가 내려올 것을 미리 알았는지 식당엔 이미 3인분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남편은 가장 상석, 루펠라는 엘리사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엘리사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직도 엉덩이에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루펠라는 말했다.
‘맨 엉덩이 만졌으면 그냥 끝났다고 봐야죠. 오늘 밤, 침대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언니, 속옷은 계속 그 촌스러운 걸 입을 건가요?’
사랑을 자각한 뒤에 온 초야는 첫 시도 때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내 몸이 남편의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우리가 궁합이 안 좋으면 어떡해.’
남편이 자리를 피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신, 점심도 안 먹었잖아.”
그러나 남편은 피하기는커녕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후에 간식을 먹어서…….”
방에서도, 식당에 올 때도 세뇌시키듯 ‘남들 다 하는 일이야’라는 말을 수없이 중얼거렸다.
그란디아는 성적으로 폐쇄된 나라였다. 그란디아의 사람들은 여성은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하고 사내와 사사로이 접촉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이성 간의 접촉은 몹시 성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왕족으로서 만백성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엘리사는 그 세 가지를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란델은 그란디아보다 훨씬 개방된 나라고, 자신과 그는 부부라고 생각해도 뿌리 깊은 관념은 쉬이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남편이 초야를 치르자고 찾아왔을 때도 그토록 긴장을 했던 것이다.
진저는 엘리사의 불편한 표정을 보고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내가 당신을 잡아먹나?”
“네?!”
“진짜 그런 것 같은데.”
“그, 그, 그런 점잖지 못한 말은 조심해 주세요!”
아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으니 정말 자신이 식인종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저녁을 먹이려던 것뿐이었다. 이왕이면 함께 먹으면 더 좋고. 그런데 이렇게 긴장할 것까지야 있나.
“이 말이 어디가 점잖지 못한 건…….”
“배불러.”
풀 쪼가리나 입에 넣던 루펠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가 봐도 나 지금 거짓말하는 중이요’ 하는 표정이었다.
새언니가 계속 방을 떠나지 않는 바람에 계획을 모두 이행하지 못했다. 진저와 함께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어서 언니의 방에 올라가야 했다.
그녀는 부부가 입을 떼기도 전에 종종걸음으로 식당을 벗어났다.
엘리사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진저가 말했다.
“식사해.”
“네?!”
“……나 모르는 일이 있었나? 왜 이렇게 긴장한 건데.”
물론 아내의 입장에선 망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위가 좀 세긴 해도 이와 비슷한 일은 몇 번이나 있지 않았던가. 그때는 이렇게 과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당신 대체 왜 그래?”
“…….”
“엘리사.”
아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오늘 마르코스 유를 쓰실 건가요?”
그녀의 말에 당황한 건 진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조차 제 입에서 나온 말에 당황하여 한참 눈만 깜빡거렸다.
남편의 표정이 굳은 것이 무서웠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좀 더 에둘러 말할 수도 있었는데 너무 긴장한 탓에 바로 튀어나와 버렸다.
그럴 거야, 저럴 거야 추측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확답을 받고 싶었다.
그가 당장 오늘 밤에 제 방을 찾는 것도 무섭고, 그렇다고 영원히 찾지 않는 것도 무서웠다.
진저는 시시각각 변하는 아내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엔 긴장, 그리고 당황, 그리고 이젠 침울. 엘리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진저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 아내를 보는 자신의 표정도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요 근래 아내의 표정이 이처럼 어두워진 적은 없었다. 혹시 몸이 나빠진 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손을 뻗었다. 엘리사가 그의 손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잠깐 허공에서 멈추었던 손은 핏줄이 움트도록 꽉 쥐어졌다. 아내의 거절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저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인 듯도 하고, 폐가 콱 조이는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어떤 느낌이든 간에 더럽다는 건 변함없었다. 진저의 목울대가 꿀렁, 움직였다.
부부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 이전까지만 해도 이토록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고작 말 한마디로 바닥에 처박혔다.
진저는 도무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코스 유를 왜 언급했으며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이유는 뭐란 말인가.
고요에 파묻힌 식당 안. 부부는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 분쯤 지나서야 엘리사가 입술을 떼었다 붙이길 반복했다.
먼저 무슨 말을 꺼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저가 먼저였다.
“왜 그래?”
“…….”
“내가 당신에게 실수했어?”
아니라고 말하려던 엘리사가 다시 입을 닫았다.
확실히 실수는 아니었다. 마음은 그녀도 그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헷갈려요.”
“뭐?”
“혼란스러워요.”
“그게 무슨…….”
“당신을 모르겠어요.”
“엘리사.”
“전 당신과 결혼을 했고, 귀족과 왕족의 결혼에 가장 큰 의무는 자손의 생산이라 교육받았어요.”
교수며 주위 사람들, 귀족도 왕족도 아닌 자들에게까지 들어온 말이었다.
엘리사는 그들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결혼을 했으니 애를 낳아야지, 애를 못 낳는 여자는 쫓겨날 수도 있지, 후계를 낳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의무인데.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 혹은 ‘결혼을 하면 당연히 잠자리가 뒤따라야 한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명제였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시기엔 마음을 굳게 먹을 필요도 없이 수순을 기다렸다.
하지만 지금은 묻고 싶었다.
‘왜요?’
결혼은 자식 생산의 도구일 뿐인가.
사랑이야말로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숭고한 감정이라 설파하는 자들은 말했다. 자식은 사랑의 궁극적 형태라고.
그녀는 이제 두려워졌다.
몸을 겹치고 열락에 빠져 정신을 놓는 그런 것. 말초신경이 짜르르 울려 몸이 만들 수 있는 최상의 감각을 공유하는 것. 거기서 오는 통증과 부끄러움은 나중 문제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잘 키울 수 있을까. 부모가 될 그도, 그녀도 사랑받지 못했다.
사생아로 태어나 핍박받고 산 아비는 냉정한 자였다. 그의 자식이라는 것만으로도 태어날 아이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니 어미가 감싸야 했다.
하지만 어미가 될 엘리사도 사랑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무작정 예뻐만 하면 되는 건가? 아이에게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주면 되는 건가?
그녀와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서로의 감정조차.
차라리 해야 할 일이 명확하다면, 그래서 기대지 않는다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남편의 다정함은 이젠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나게 될 때 겪어야 할 상실감이 두려웠다.
그러니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 주는 모든 감정, 모든 감각을.
그에게 안기고 나면 절대 포기할 수 없게 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차라리 더 이상 기대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아이를 낳기 전에 포기할 수 있도록.”
진저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내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래서 아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안 뒤로 그녀와의 잠자리를 예정에 두지 않았다.
그는 선대 공작 부부의 일로 여성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또 남성이 어디까지 여성의 정신을 좀먹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나치게 아내를 싸고돌았다. 여자는 약한 존재다. 아내는 다른 여자보다 연약하다. 다른 여자들보다 연약한 아내는 관계가 무너지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당혹스러움이 앞섰다.
그녀의 말이 맞다. 관계가 무너져 선대와 같은 산지옥을 반복시킬 바에야 육욕은 다른 여자에게 채우고 자리만 지키는 것을 강요해야 했다.
애초에 아내를 사랑할 수 있다는 가정 따윈 하지도 않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어째서 아내의 말이 충격적인 걸까. 왜 그는 그녀의 말에 기분이 나쁜 것일까.
‘당신의 아이를 낳기 전에 포기할 수 있도록.’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녀는 후계를 낳아줄 테고 그럼 제 자리는 더 공고해질 것이다. 아이를 낳은 뒤엔 거리 유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는 완벽한 족쇄가 되어줄 테니까.
“사랑 없는 잠자리는 두렵지 않아요. 일방적인 감정이 두려울 뿐이죠. 그러니까 제 사랑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제야 그는 아내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하늘로 솟구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확답은 줄 수 없어.”
“그러시겠죠. 후계 생산은 안주인의 가장 큰…….”
“기분이 좆같아서.”
“……네?”
그가 욕을 하는 건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자신에게, 혹은 자신과 함께하는 상황을 이른 적은 없었다.
엘리사의 얼굴에 당황이 서리자 진저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한 말, 아주 불쾌해. 그런데 기분이 나쁜 이유를 모르겠어.”
“네?”
“당신 말이 옳아. 당신은 지금까지 안주인의 일을 소홀히 한 적도 없고, 과분한 바람을 가진 적도 없어. 당신은 내게 완벽한 아내야.”
“감…… 사해요.”
이런 상황에서 듣는 칭찬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런데 짜증이 나.”
“정확히 어떤 말이요?”
“당신 사랑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엘리사가 힘을 주어 두 손을 맞잡았다.
그와 그녀는 결혼한 지 꽤 지난 상태였다. 몸이 바뀌는 일이 있긴 했지만 지금껏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은 이유는 그가 그녀를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루펠라는 말했다. 남자는 스푼을 들 힘만 있어도 아랫도리가 부풀고, 삼시 세끼 먹는 것보다 살 몽둥이 휘두르는 일을 더 좋아한다고.
전부 맞는 말이라 생각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껏 육욕을 참아온 것이다. 화가 날 만도 했다.
엘리사는 남편이 화가 난 게 ‘기다림’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저가 진정 화가 난 말은 ‘사랑이 끝날 때’였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서로 다른 것에 당황했다.
엘리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해요. 당신이 힘드시리란 걸 알아요. 하지만 다른 여자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왜 다른 여자를 만나? 당신이 있는데.”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됐으니까요.”
진저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이 여자는 자신을 무슨 짐승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번식 행위를 참지 못하는 발정 난 개 말이다.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기다리는 게 힘들다고 하셨잖아요.”
진저가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아내에게 다가간 그가 그대로 아내의 뺨을 잡았다.
엘리사가 숨을 크게 들이켰지만 그는 아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눈에, 코에, 그리고 뺨에, 마지막으로 입술에 키스했다.
“내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당신이 기다리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도 그래.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기다리라는 것이다. 제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판단을 내릴 때까지.
아니라면 그녀의 뜻대로 해주겠지만, 맞았다면 지금까지 보내준 모든 감정에 곱절을 더해 보답할 수 있도록 뜨겁게 안아줄 테니.
진저가 픽 실소를 흘렸다.
* * *
루펠라는 엘리사의 속옷을 훔치기 위해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그녀의 새언니는 너무나 수수한 속옷만을 착용했다. 말이 좋아 수수한 거지 촌스러울 정도였다.
뜨거운 밤을 위해서 필요한 게 몇 가지 있는데 속옷이 그중 하나였다.
루펠라는 킬킬 웃으며 하녀들에게 속옷을 모두 자루에 담으라 일렀다.
하녀들도 밝은 표정으로 엘리사의 속옷을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집사나 하녀들이나 그 집 영애나 한마음으로 빌었다. 저택에 슬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으면 한다고.
하녀들이 속옷을 정리하는 걸 지켜보던 루펠라는 금세 지루해졌다.
그러고 보니 언니의 집무실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하녀들에게 계속 정리하라 이르고 새언니의 방 맞은편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녀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하녀들은 방을 정리 중이었고 콕스는 그웬 부부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다.
상급 고용인들도 이제 곧 식사 시간이라 내저를 비우고 고용인용 식당에 가 있었다.
엘리사의 집무실은 주인의 성격처럼 깔끔했다. 다만 책상만큼은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루펠라는 책상을 보며 픽 웃었다.
‘하여간 언니는 너무 성실하단 말야.’
루펠라가 커튼을 젖히기 위해 책상에 다가갔다. 그런데 바닥에 무슨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사직청원서?’
오후에 보니까 콕스가 서류를 잔뜩 들고 엘리사의 집무실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 못 본 서류인지 인장이 찍혀 있지 않았다.
사직청원서를 든 루펠라의 표정이 한순간에 딱딱하게 변했다.
‘그레닉!’
그레닉의 사직청원서였다.
수도군, 내저에서 일하는 기사들은 사직 때에도 가주와 안주인 각각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그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물러나고 싶다는 말을 적었다.
그의 사직서가 루펠라의 손에 의해 구겨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연무장을 향해 뛰었다.
가다가 드레스에 걸려 넘어지고, 높은 구두가 삐끗하여 넘어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넘어졌다.
몇 번을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도착한 연무장. 기사들이 그녀를 막았다.
“대장급 내부 회의 중이십니다.”
회의 중엔 아무리 가문의 영애라 할지라도 기사와 그들의 주군인 진저 외엔 출입할 수 없었다.
분명 그레닉과 관련된 회의일 것이다.
루펠라가 악을 내지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레닉!”
처음부터 자신이 바라는 대로 그레닉과 완전한 형태가 되리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그는 용기가 없었고,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기다리라면 기다릴 수 있었다. 그가 모든 책임에서 해방될 때,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머리가 더 많고, 그리하여 가진 용기가 모두 소진될 때, 그때 자신을 선택해 주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였으니까, 살면서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없어서,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 따윈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이렇게 도망치는 건 아니지.’
경비병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막아섰다. 영애를 제압할 순 없었다. 난동을 부리다 스스로 상처를 입는 것마저 경비병들의 책임이 될 터였다.
그웬가에서 검을 찬 자들의 첫 번째 소임은 그웬 일가의 안전이었다. 영애의 생채기 하나에도 몇 명이나 되는 자들의 목이 떨어지고 붙기를 반복했다.
루펠라는 그녀를 막는 경비병들을 밀치고, 악을 쓰고, 도리질 쳤다. 그레닉은 제게 인사 한 마디 없이 떠날 남자였다. 이렇게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숨이 턱턱 막혔다.
회의장으로 쓰이는 막사 밖에선 소란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회의에 들었던 대장급 인사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루펠라를 발견한 그들이 막사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레닉이 그 안에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사직? 사직이라고!”
경비병들은 여전히 그녀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 팔, 손이 모두 달달 떨렸다. 하우벡이 마크빌에게 눈치를 주었다. 주군이 없는 자리인 만큼 회의장에 출입을 허가할 수 있는 자는 부대장인 마크빌뿐이었다.
마크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보기에도 루펠라는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가 손을 올리자 경비병들이 물러났다.
경비병들에게 잡힌 손이 풀리자마자 루펠라가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막사 안, 테이블에 자리한 사람은 그레닉이 유일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고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의 얼굴에 진 그늘만으로도 결심이 확고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루펠라가 울음덩어리를 되삼켰다. 한바탕 고함을 지르려 했는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심이구나.”
“예.”
“진심으로 가문을, 나를 떠나려는 거야.”
“그렇습니다.”
루펠라가 눈을 감았다.
첫사랑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시작한 사랑. 루펠라는 사랑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어린 나이에 그를 마음에 품었다. 그녀에게 그가 특별한 만큼 그에게 자신이 특별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제 마음이 간절해지면 간절해질수록 그레닉의 시선은 다정해졌다. 곤란한 표정을 지어도, 입으로는 비수를 토해내도 눈빛만큼은 진심을 숨길 수 없었다.
궁금했다. 저렇게 다정한 눈빛을 보내는 남자가 어째서 항상 불가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지. 사랑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여자는 그의 뒷조사를 명했다. 그의 신상 명세를 받은 날, 처음으로 라골이 제게 화를 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고 모든 일이 다 가능한 줄 아십니까.’
오빠 같은 사람이 화를 내는 것보다, 남자의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것보다 충격적인 게 있었다.
그의 불행이 안쓰럽지 않고 기뻤다는 것. 고향에 다른 여자를 숨겨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녀와 같은 마음이란 걸 그 예의 없는 짓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갖은 짐을 짊어지고 있는 남자, 태생적 고난으로 세상에게 마음을 표현할 기회마저 뺏긴 남자. 그런 남자에게서 자존심만큼은 빼앗지 말자고. 그래서 그녀가 자존심을 버리기로 했다.
“무릎이라도 꿇게 해줘.”
“…….”
“애원이라도 하게 해달란 말이야, 이 나쁜 자식아!”
“…….”
“제발…… 내가 너를 도울 수 있게 해줘.”
루펠라는 테이블 끝을 붙잡고 겨우 서 있었다. 그의 냉랭한 표정과 마주한 후로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도우시겠습니까. 돈으로? 가문의 힘으로?”
그레닉은 진심으로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이토록 어릴 수 있단 말인가. 평생 먹고살 돈을 내민다고 해결이 되는 게 아니었다.
주군이 가문에서 도망친 그녀를 용서한다고 해도 친족인 카르트가가 있었다. 카르트가에서 그웬가에 압력을 가하지 않은 건 그녀가 아직 그웬의 성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카르트 후작의 조커였다. 언젠가 제대로 쓰기 위해 이날 이때껏 천둥벌거숭이 같은 그녀를 보호해 온 것이다.
그런데 제대로 쓰이지 않고 도망을 친다? 카르트 후작이 그녀와 그녀를 빼앗은 자신을 용서할 성싶은가.
진저가 카르트 후작에게서 그녀를 지켜줄 이유도 없었다. 그들 남매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건 호적이었으니까. 호적에서 그녀의 이름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도울 이유가 없었다.
천만금을 쥐어줘도 귀족의 분노를 사려는 의원은 없을 것이다. 그럼 모친은 루펠라가 쥐여준 돈을 노자 삼아 명을 달리할 터였다. 모친을 떠나보낸 부친은? 부친도 제대로 살지 못할 텐데 그걸 다 지켜보라고? 제 사랑 하나 끌어안으려 부모를 그리 만들라는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가장 큰 이유, 그건 그녀가 하루도 물질적 결핍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나는 모르겠어. 난 네가 아니면 안 되는데 너는 나만 아니면 되잖아.”
“레이디 그웬, 저를…….”
“그놈의 레이디! 영애! 이제 그만할 수 없어?! 나를 배려하는 척하지 마! 내 진심에 답해 본 적도, 거절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네가 나와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말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넌 쇼핑 한 번에 평민 1, 2년 생활비를 써버리지. 죽지 않기 위해 밀가루만 불에 구워 먹는 게 뭔지 모를 거야. 그런 네가 나를 위해 다 버리겠다고? 나를 원망하지 않겠다고!”
그녀가 제 곁에서 불행해지는 걸 그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원망으로 바뀌는 순간, 얼마나 처참해질지 예상이 가능했으니까.
그에게 다가간 루펠라가 푹 꺼진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올렸다.
짝!
그레닉의 얼굴이 돌아갔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았어. 이제 애원 같은 건 안 해.”
“…….”
굶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루만이라도 그의 연인일 수 있다면 자신을 헐뜯고, 깔보는 자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도 좋다고. 이 손으로 돼지를 잡고, 피를 뽑고, 살을 잘라내며 살자고. 그가 자신을 택해 준다면 지금의 자신 같은 건 모두 버리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다.
“멋대로 나를 재단한 놈에게 더 이상 애원 안 해.”
“…….”
그녀가 가진 걸 휘두른다면 쉬이 그를 가질 수 있었다. 돈으로, 권력으로, 지위로 그가 갈 곳을 빼앗고 궁지로 몬다면 가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리하지 않은 건 도덕이나 정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가장 하찮게 여기는 남자니까. 자신만큼은 그를 누구보다 대접해 주고 싶어서.
“끝까지 이기적인 놈에게 진심 같은 건 우스웠다. 그렇지?”
“무슨 뜻입니까.”
“너 못 나가. 나간다 하더라도 다른 가문에 발끝도 못 디밀게 할 거야. 네 가족을 인질로 붙잡든, 뒤에서 손을 쓰든.”
“루펠라!”
“이제 넌 날 못 버려. 나만 널 버릴 수 있어.”
“당신은 그런 짓 못 해.”
“아니, 넌 날 그런 사람으로 생각한 거야. 내 진심을 멋대로 재단해 오물을 뿌렸으니 보답을 해야지.”
그를 노려보던 루펠라가 막사를 나섰다. 막사 밖에 모여 있던 기사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내저로 돌아간 루펠라는 소거실을 찾았다. 서로를 마주 본 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부부가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식사 전과는 다르게 드레스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머리는 죄 헝클어지고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기사들이 들어왔다. 정말 그레닉에게 손을 쓸까 봐 염려하여 쫓아온 것이다.
루펠라는 차 시중을 들고 있는 집사 콕스와 라골을 지나 제 오빠에게 다가갔다.
“뭐든 다 할게.”
내저로 오면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울지 말자. 더 이상 비참해지지 말자. 하지만 말이 나오는 순간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 같았다. 루펠라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진저는 알아듣게 설명하라는 듯 미간을 좁혔다.
“카르트가에서 정보를 빼 오라면 그렇게 할게. 날 이용해서 뭐든 해도 좋아. 결혼을 하라면 할 거야. 쭈그렁 할아범이든, 성도착증 환자든 상관없어. 그러니까 오빠, 아니, 각하!”
온 얼굴을 적신 채로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비비다가 가슴을 쥐어뜯고, 바닥을 내려치다가 다시 두 손을 비볐다.
“제발 그레닉 하나만 제게 주세요.”
굳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던 진저가 마크빌과 하우벡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고개를 숙였다. 연무장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게 분명했다.
“데리고 올라가.”
울부짖는 루펠라의 어깨에 마크빌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였다.
“잡지 말아요!”
엘리사가 소리쳤다. 루펠라를 끌어안은 그녀가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감히 내 허가도 없이 내저에 출입한 겁니까.”
기사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저는 완전한 안주인의 소관이었다. 내저의 일만큼은 가주보다 안주인의 의견이 우선이므로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마른침만 삼켰다.
“엘리사, 이건…….”
바짝 날이 선 그녀를 설득하려 진저가 나섰다.
“가문의 혼약은 제 몫입니다.”
“알아, 알지만…….”
“영애에 대한 처벌도 안주인의 권한이죠. 제 허락 없이 내저에서 어느 누구도 루펠라를 만질 수 없어요.”
더 이상 그녀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제압당해 끌려가야 하는 게 아니라 위로를 받아야 했다.
물론 겉으로는 내저를 지휘하는 건 안주인이었으나 가주의 뜻에 반할 순 없었다. 그가 지금이라도 루펠라를 끌어내라 명한다면 기사들은 명을 따를 터였다. 그러나 진저는 그녀에게 져주기로 하였다.
그는 가만히 서서 루펠라를 부축해 올라가는 엘리사를 보고 있었다. 그녀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주변에서 참고 있던 숨들이 터져 나왔다.
내내 부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크빌이 나섰다. 주군 성격에 뭔 일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았다.
“저…… 마님께서 아가씨를 염려하셔서 그런 겁니다.”
진저의 시선이 마크빌에게 향했다. 그러더니 픽 웃어버렸다. 기사들이고 고용인들이고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엽잖아.”
대체 주군의 저 미소는 뭐란 말인가. 너무 귀여워서 죽여 버리고 싶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진저는 기분이 좋았다. 아내는 언제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한없이 맹한 것 같은데도 이런 일에선 똑 부러지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엘리사는 루펠라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왔다. 루펠라는 씻고 누우라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
루펠라 스스로조차도 연무장과 소거실에서 어떻게 버텨냈는지 모를 만큼 정신을 놓고 있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콕스가 따뜻한 차와 파자마를 가지고 오기 전까지 루펠라는 황망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런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루펠라는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
“화…… 내려면 내요.”
엘리사가 작게 한숨을 흘렸다. 생각해 보면 루펠라는 저보다 어렸다.
자신도 마음을 다잡지 못한 순간이 많았다. 익숙한 것보다 두려운 게 많고, 아이와 성인의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매사 조심했고, 속내를 숨겼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했다. 그러니 루펠라는 어떻겠는가.
나이 어린 사람도, 나이 많은 사람도 누구나 실수를 한다. 아이와 성인이 다른 점은 실수를 한 뒤다.
짚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반성하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성인이었다.
엘리사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멎었던 눈물이 또다시 터지고 말았다. 루펠라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
루펠라는 언제나 단언했다. 그레닉은 그녀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이제껏 아이답지 않게 너무 애써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요?”
“……언니 방에서 그레닉의 사직청원서를 봤어요.”
“네.”
“찾아가서 따졌는데 그 사람한테 나는 다른 여자와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한 내가 우습더라고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갈등이 되었다. 이제라도 돈으로, 힘으로 그를 가질까.
답장 한 통 없는 매정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자존심도 버린 채 무작정 기다렸다.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네.”
“나는 노력했어요!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함께하기 위해서! 나는……!”
“그럼 그 사람은요?”
“네?”
“그레닉은 루펠라를 위해 하나도 양보하지 않았나요? 노력하지 않았어요?”
루펠라가 고개를 돌렸다. 양보했다. 그레닉의 두렵다는 말은 그를 원망하지 않는 완벽한 환경에서 지내길 바란다는 말과 같았다.
그웬가는 진저가 지휘하게 된 후로 기사와 병사들에게 굉장한 봉급을 지급했다.
엘리사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루펠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죠?”
“……약할 때 안아주는 건 비겁해.”
“왜요?”
“좋아하게 돼버린다고요.”
엘리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사람은 행복해진다는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그녀조차도 모진 세월을 견뎌내야 했으니까. 좋은 사람은 대체로 불행하다. 언제나 빼앗기기만 하니까.
다만 루펠라만큼은 행복하길 빌었다. 그녀가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상처를 받기에 감당할 수 없는 길에 놓인 자들은 생각을 포기했다.
“언니는 참 이상해요.”
“제가요?”
“이럴 때 보면 뭐든 다 알 것 같은데 정작 언니 문제에 대해선 소극적이잖아요. 좋아하죠, 오빠?”
“아, 그…… 어떻게 알았어요?”
“그런 눈빛을 하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엘리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매를 매만졌다.
“내저를 소란스럽게 한 건 미안해요.”
“루펠라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줬으니 오늘은 넘어갈게요. 그렇지만 두 번은 없어요. 저택을 소란스럽게 한 것보다 고용인과 기사들이 보고 있는 데서 무릎을 꿇은 게 잘못한 거예요.”
“네.”
엘리사는 다정한 손길로 루펠라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웬가의 두 여성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함께 자겠다고 말하는 루펠라는 그제야 제 나이 대의 어리광쟁이로 보였다.
루펠라를 욕실로 들여보낸 엘리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욕실 안에서 물소리와 함께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로 울음소리를 가리려 한 모양이지만 완전히 숨기진 못했다.
이대로 울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엘리사가 부러 문을 크게 닫으며 방을 나섰다. 방 앞에 남편이 서 있었다.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던 엘리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때쯤이면 항상 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없었다. 그들이 물러간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 방 앞에서 기다린 듯했다.
남편의 뜻에 반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진저가 물었다.
“왜?”
“죄송…… 해요. 고용인들 보는 앞에서 당신에게…….”
“틀린 말 아니잖아. 고용인들 보는 앞에서 당신 일한 게 뭐가 잘못한 건데.”
“네?”
“고개 들어. 이제 나 포함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
엘리사가 멋쩍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가슴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번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 것도 그렇지만, 인정받은 적도 처음이었다.
진저가 그녀의 뺨에 손을 댔다. 발그레한 것이 열이 올라 보이더니 아니나 다를까 평소보다 체온이 높았다.
아내는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혹여 또 몸이 아프진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엘리사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편의 스킨십엔 언제나 떨렸다. 이렇게 눈빛이 변한 뒤로는 더욱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정말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이 이처럼 따스해진 게 언제쯤일까. 모르긴 몰라도 요 며칠 사이는 아니었다. 차츰 변해가는 눈빛이 종내엔 자신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기다려 달라고. 그렇다면 정말 기대를 해도 되지 않을까. 엘리사가 제 볼에 올라온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겁이 나요.”
“왜?”
그녀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루펠라와 대화를 나누며 깨달은 게 있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불씨를 품은 당사자는 반편이가 되어버린다. 제삼자가 보기엔 이미 나와 있는 답에도 혼란스러워했다.
루펠라가 부러웠다. 그녀의 용기는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게도 마피 부인이 있었다면, 보호해 줄 친척이 있었다면 다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녀도 하루에 수십, 수백 번씩 괴로워하며 없는 용기를 쥐어 짜낸 것이었다. 루펠라는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엘리사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사랑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게 더 아플 것을 이제 알게 되었으므로.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건 진저였다. 소극적인 아내는 언제나 저와의 접촉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신의 결론이 내가 아닐까 봐서.”
“…….”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신 눈빛을 믿어보기로 했어요. 저 스스로도 믿어보려고요.”
나는 진저 그웬을 사랑할 수 있는 여자다. 나는 사랑받기 충분한 여자다. 자신을 가지고 이 순간을 또렷이 기억에 남기고 싶었다. 기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무지한 여자는 결국 또 보험을 만들었다. 그래도 제가 한 수천 가지의 선택 중 가장 옳은 선택이 되리라 자신했다.
“사랑해요.”
“…….”
“당신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
진저가 아내를 끌어안았다. 머리가 시키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마음 같은 건 버린 지 오래였다. 전장에서 자식만은 살려 달라 울부짖는 노기사와 자신을 죽이고 아비는 살려 달라 애원하는 젊은 기사를 볼 때마저도.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온 마음을 죽이고 살아서 타인의 감정에 녹아들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술술 풀려왔던 것이다. 도덕이나 진심 같은 것을 버리면 세상은 쉬웠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했다. 생물학적 부친과 호적상 모친이 만든 산지옥에서 살 때. 사생아라는 타이틀이 주는 싸늘한 시선을 알게 된 서너 살쯤에.
어째서 이 여자와 관련된 일만은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 걸까. 소중한 이가 생기길 바라지 않았다.
그가 학살자와 미친개, 마귀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저질 별명이 아무렇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지킬 것이 없었으니 제 평가 또한 자신만이 감당할 문제였다.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게 두려웠다. 과거가 부끄러워질까 봐. 제 과거로 인해 이 여자가 상처 입게 될까 봐.
“기다릴게요. 당신이 말할 수 있을 때, 당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말해주세요.”
“……그래.”
“어떤 선택이든 괜찮아요. 저는 지금 당신으로 인해 행복하니까.”
어떻게 이다지도 사랑스러울 수 있는 걸까. 진저는 제 목을 끌어안은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어떤 남자보다 멋지게 고백하고 싶었다. 그녀가 뜨겁게 감동하도록.
* * *
이튿날, 진저는 그레닉과 하우벡을 불렀다. 그레닉은 하루 사이에 초췌해져 있었다. 진저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그레닉을 지그시 응시했다.
“사직청원서라.”
그의 말에 그레닉이 허리를 굽혔다. 사직청원서를 내기 전에 주군을 뵙지 못한 건 명백한 무례였다.
진저는 다른 단주와는 달리 기사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목숨 걸고 전장에 나가는 자들이 미련이 있거나 움츠리게 되면 사기가 크게 떨어진다. 사실 존중한다기보다는 오는 놈 막지 않고 가는 놈 막지 않았다.
“불가하다.”
놀란 건 그레닉뿐만이 아니었다. 하우벡도 그들 눈치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우벡보다 그레닉이 더 담담한 투로 물었다.
“아가씨 때문입니까.”
“그래.”
“주군, 전…….”
“부리는 놈의 의사가 내게 중요할 성싶으냐.”
“동생을 그리 아끼진 않으셨습니다.”
“그 녀석이 울면 안사람이 힘들어.”
그러니까 내 아내 귀찮게 하지 말고 네가 남으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알고 나가봐라.”
그레닉이 대꾸를 하려고 했을 때였다. 하우벡이 나서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결혼하신 후로 많이 누그러지긴 하셨으나 진저 그웬의 송곳니가 무뎌진 건 아니었다. 이러다가 정말 사달이 날 것 같았다.
“예, 사직청원서는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하우벡까지 이렇게 나오니 그레닉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레닉이 허리를 굽히고 진저의 집무실을 나섰다. 표정으론 쉬이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집무실 문이 닫히자 진저가 서류를 가리켰다.
“참가자 명단은 어디 있나.”
“예?”
“검술 시합 말이야.”
“아, 참가 예정자는 마크빌과 그레닉이었습니다만, 그레닉이 불참하게 될 것 같아 아직 보류해 둔 상태입니다.”
국왕 탄신에 맞춰 귀족들의 검술 시합이 있었다. 보통은 참가할 귀족 대신 그들의 기사가 나서는데 기사 서임을 받은 자들은 직접 나서기도 하였다.
“내 이름을 올려.”
“예…… 예?!”
진저의 말에 놀란 하우벡이 입을 뻐끔거렸다.
“주군께서 직접 나서신단 말입니까?”
“그래.”
‘왜요?!’
진저는 단 한 번도 검술 시합에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 귀찮은 일을 할 바에야 명예 같은 건 시궁창에 처박을 인사였다.
하우벡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진저의 집무실을 나섰다. 때마침 보고할 내용이 있어 온 마크빌과 마주쳤다. 마크빌은 혼이 반쯤 나간 하우벡의 어깨를 짚었다.
“무슨 일 있나?”
“주군이…… 아니, 아니다.”
아무리 간이 크다지만 주군의 집무실 바로 앞에서 ‘주군이 돌았나 봐’라고 말할 순 없었다.
마크빌은 오늘 해가 어느 쪽에서 떴느냐고 묻는 하우벡을 보며 인상을 썼다. 이 집안에 고용된 놈들은 어째 하나같이 이상해진다.
* * *
엘리사는 아침부터 루펠라와 붙어 있었다. 아내와 시간을 보내려 소거실에 내려온 진저가 주먹을 쥐었다. 저 녀석은 근래 제 새언니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도 보라. 그가 나타나자마자 엘리사의 팔짱을 끼고 있지 않은가.
엘리사는 가만히 서서 여동생을 노려보는 진저를 보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사람들은 남편이 여성에게도 용서가 없다고 했지만, 이젠 어떤 믿음이 생겼다. 제 앞에선 성별을 막론하고 어떤 인물에게도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제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혹시 몰랐다.
엘리사가 루펠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혹시 제가 안 보는 새에 쥐어박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라도 그녀가 루펠라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
루펠라도 엘리사에게 더 찰싹 달라붙었다. 거리낄 게 없이 사는 루펠라라도 무서운 게 딱 둘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는 것, 그리고 화난 오빠.
루펠라는 엘리사가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꼭 붙잡고 떨어지질 않았다. 그게 제 오빠의 화를 더 돋우는 줄은 모르고.
진저를 울컥 치미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라골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놈은 왜 항상 저 무리에 끼어 있는단 말인가.
라골로서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수업을 끝내려는데 루펠라가 서재에 쳐들어와선 차 한잔하자고 졸라댔다.
엘리사까지 오늘 루펠라의 기분이 좋지 않으니 함께 있어 달라 부탁하는 통에 도리가 없었다.
“팔자 좋군.”
진저의 말에 라골이 헛기침을 했다. 팔자가 정말 좋았으면 이곳에서 이렇게 루펠라의 투덜거림을 받아주고 있지 않았을 터였다.
“당신도 앉으시겠어요?”
다른 때라면 절대 앉지 않을 그가 라골의 옆자리, 그러니까 엘리사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앉고 난 뒤로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진저는 다리를 꼬고 앉아 삐딱하게 고개를 젖혔다.
“하던 말 계속해.”
삥 뜯는 양아치도 저 정도로 불량해 보이진 않을 것이다. 루펠라가 입을 삐쭉거렸다.
“식사는 하셨어요?”
엘리사의 말에 진저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 계집애와 붙어 있는 통에 얼굴도 안 보여주더니 식사를 챙긴다.
“대충.”
“몸 쓰시는 분이 식사를 대충하시면 어떡해요.”
라골과 루펠라가 시선을 교환했다. 언제부터 새언니가 오빠에게 잔소리를 했던가. 잔소리 비슷한 것을 몇 번 듣긴 했지만 이렇게 인상까지 쓴 적은 없었다. 그녀가 인상을 쓰는 일이라고 해봐야 남편이 지나치게 놀릴 때가 전부였다.
엘리사 또한 제가 확실히 남편을 편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그녀의 행동에 불쾌해하기는커녕 내심 만족하고 있었다. 결혼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 어느 정도 남편에 관한 눈치가 생겼다.
“당신은?”
“전 든든하게 먹었어요. 이번에 제과 기술자가 새로 들어왔는데 솜씨가 아주 좋더라고요. 케이크며 빵까지 못 하는 게 없어요. 가볍게 드실 만한 걸 만들라고 할까요?”
“음.”
진저가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사가 콕스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옆에 한 명씩 낀 상태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눴다. 살이 빠졌다느니 곧 여름이 오므로 옷장 정리를 해야겠다느니 하는 말들이었다. 엘리사는 진저의 뺨에 손을 올리고 일이 많아 얼굴이 거칠어졌다는 말까지 했다.
라골과 루펠라는 숨을 크게 들이켠 채 눈만 돌려 그들을 보았다.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아졌단 말인가.
게다가 진저 그웬의 저 편한 표정은 뭘까. 마치 성질 더러운 사냥개가 주인 앞에서 목덜미를 드러낸 것 같았다. 골골 울음소리만 안 들릴 뿐이지 부드러운 표정에 말씨까지 다정했다.
“참, 저번에 말씀드렸던 부부 동반 나들이 말이에요.”
“트라노이 공작 부부와 간다고 했던가.”
“네. 트라노이 부인이 언제가 괜찮은지 묻더라고요. 당신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당신이 괜찮은 날로 해.”
라골이 기함하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었다. 곧 영지 시찰이 있을 예정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녀석이 나들이라니. 그가 와인 잔을 들고 하하 호호 웃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내가 죽을 때가 됐나.’
죽을 때라서 헛것이 보이는 게 아니라면 대체 이 광경은 뭘까.
당황스럽긴 루펠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새언니에겐 제 성질을 완전히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신기한 건 새언니의 반응이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뭔가 쫓기는 사람 같았다. 정을 주지 않으려 애쓰던 그녀는 어디 갔는지 지금은 남편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눈빛이었다.
드러냄에 거리낌도 없었다. 오빠야 말할 것도 없었고. 단언컨대 오빠는 줄리아 트리거에게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을 터였다.
보기는 좋은데…….
“몸은 어때?”
“괜찮아요. 당신은 절 너무 연약하게 보시는 것 같아요.”
“약하니까.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다고.”
“농담하지 마세요.”
배알이 꼴렸다.
루펠라의 표정이 점점 짜게 식어갔다.
엘리사는 기분이 좋았다. 루펠라도 어느 정도 화가 풀린 것 같고 남편과 함께할 부부 동반 모임도 기대가 되었다.
트라노이 부인은 언제나 다정해서 대화를 할 때면 항상 푸근한 느낌이었다. 남편에게 좋은 친구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어서 부부 동반 모임 날이 오기를 빌었다.
“그럼 다음 주는 어때요? 마침 다음 주가 태고식이래요.”
태고식은 란델 만의 기념일이었다. 임신한 지 215일이 되면 부모의 지인들이 아이에게 선물과 함께 덕담을 건네는 것이다. 왕궁에선 어린아이를 볼 수 없었을뿐더러 친구의 아이를 위한 덕담은 처음 해보는 일이라 몹시 기대되었다.
“그렇게 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에겐 어떤 말이 가장 좋을까요?”
“당신이 들었을 때 기분 좋은 말이면 되겠지.”
“저요?”
“당신도 아이잖아.”
“제가 무슨…….”
그에겐 아이보다 작고 연약하며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참다못한 루펠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엘리사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자 루펠라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서 좀 쉬어야겠어요.”
“벌레요? 몸이 안 좋나요? 그럼 닥터를…….”
“네. 꼭 좀 불러주세요. 그웬 영애가 닭이 될 것 같으니 빨리 살펴달라고.”
루펠라가 제 오빠를 새초롬하게 노려보았다. 언니야 뭘 모르는 것 같지만 오빠는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닭살 돋는 말을 하고 있었다. 루펠라가 씩씩대며 제 방으로 올라가자 진저가 라골에게 눈치를 주었다.
‘넌 안 가냐?’ 하는 눈빛에 라골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루펠라와 라골이 모두 2층으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우리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요?”
“아니.”
진저는 몹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남편의 대답에도 제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엘리사가 헙, 숨을 들이켰다.
“루펠라를 배려하지 못했어요.”
“왜?”
“그레닉 경과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당신과 제가 너무 다정하게 말을 했으니까요.”
“저 녀석이 그레닉과 다투면 우린 다정하게 대화하면 안 돼? 그렇게 남을 배려할 필요는 없어.”
“좋아하는 사람이 저로 인해 기쁘고 즐겁길 바라요. 저도 그 사람으로 인해 기쁘고 즐거웠으니까요.”
그런 행복한 감정이 아니어도 불쾌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작은 배려로 그녀의 기분이 나아진다면 자신 또한 충만한 마음이 들 테니까.
아주 어릴 적 모후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라. 준 것만큼 돌아오길 바라지 마라. 사소한 배려도 마찬가지였다.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본인의 마음이 편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엘리사는 제 사람들이 언제나 행복하길 바랐다. 그게 가장 마음이 편한 일이므로.
엘리사가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진저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직 일이 남았어요.”
“나도 좀 그렇게 배려해 주지?”
“제가 당신을 배려하지 않았나요?”
“아내 얼굴을 자주, 더 많이 보고 싶은 게 남편 바람이란 걸 알아달라고.”
남편은 가면 갈수록 능글맞아졌다. 엘리사가 웃음을 참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부부를 지켜보고 있던 하인들의 표정에도 웃음이 번졌다.
* * *
그레닉은 훈련이 파하고도 연무장을 떠나지 않았다. 구령대에 기대서 저무는 해를 보고 있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닉.”
마크빌이었다. 그는 언제나 성실하고 생각이 깊어 모두가 존경하는 남자였다. 수도군의 부대장 자리를 지키는 이유는 괜히 있지 않았다.
마크빌은 어제 연무장 막사 앞에서 그레닉과 루펠라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내저에서도 루펠라가 벌인 소란을 직접 목격했다. 하우벡이나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모두 그가 그레닉과 대화를 나누길 바랐다.
남녀 문제에 관해선 제가 조언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사직에 관련해선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사직 신청이 기각되었다고 들었다.”
“예.”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이 상태에서 네가 저택을 떠나면 더 큰 소란만 야기할 거야. 주군도 그걸 아시기에 기각하신 걸 테고.”
“압니다.”
마크빌이 그의 옆자리에 서서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주제넘은 말 한마디만 하자.”
그레닉은 마크빌이 건네는 술 주머니를 받으며 픽, 실소를 흘렸다.
“두 마디 하셔도 됩니다.”
그와는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데 이렇게 사사로운 대화를 나눈 적은 몇 번 없었다.
“아가씨 말이다.”
“그 얘기는…….”
“자식이 빠져 가지고. 두 마디 하란 놈은 어디 갔어.”
마크빌에게 한 대 얻어맞은 그레닉이 맞은 뒤통수를 문질렀다.
“부족한 게 없이 자랐다고 현실을 모르진 않아.”
마크빌도 귀족이었다. 마크빌가의 성을 쓰고 있긴 하지만 그의 부친은 그를 없는 자식인 셈 쳤다. 가문의 장자가 모든 걸 포기하고 군인의 삶은 택하기 쉬웠겠는가.
전쟁터에서 동료가 죽어갈 때, 제대로 된 무덤 하나 지어줄 수 없을 때, 군기를 잡기 위해 함께 훈련한 자의 힘줄을 베어낼 때.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다. 가문 안에서라면 이런 일은 없을 거라고 수백 번을 생각했다. 그럼에도 아직 군인으로, 진저 그웬의 기사로 남아 있는 건 부족함 없는 삶보다 소중한 게 있기 때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진 사람도 없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지.”
버리는 게 어떻게 쉬울 수 있으랴.
“넌 아가씨를 그저 철부지라고 생각하겠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매일 기함할 가격의 드레스를 사고, 액세서리를 사던 여자가 화려한 삶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건 말이다.”
“…….”
“네가 지금의 삶보다 소중하다는 거다.”
재물, 동경의 시선, 할 수 없는 거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삶. 그런 삶들을 모두 포기하고 호미를 들고, 제 손으로 밥을 짓는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결심인 것이다.
“그 자존심 강한 아가씨가 주군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
“아가씨…… 가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 봐라.”
그레닉의 어깨를 두드린 마크빌이 자리를 떠났다.
처음 루펠라와 만났던 날이 언제였던가. 소년은 제 나이조차 셀 수 없는 기막힌 생을 살았다. 눈을 뜨면 바로 산에 올라가 해가 질 때까지 나무를 하고, 밤엔 부친을 도와 돼지나 소, 닭을 잡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삶을 살았다. 그나마도 모친의 병이 깊어지고 나서는 풀뿌리 하나 씹기도 어려웠다.
감당되지 않는 약값에 모친이 치료를 거부했을 때, 마을의 어느 귀족가 기사였던 사내가 돌아왔다. 팔 하나를 잃었지만 번듯한 집에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을 쥐고서.
그때 전쟁에 나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 몰래 사내를 찾아 어떻게 하면 전쟁에 나갈 수 있는지 물었다.
날붙이라곤 소, 돼지 때려잡을 때 쓰는 칼밖에 쓴 적 없는 그레닉도 말만큼은 잘 탔다. 소나 돼지를 팔러 가려면 말이 필수인데 늙은 아비 대신 어릴 적부터 말을 타왔기 때문이었다. 말 한 필 빌리기 위해 몇 끼는 굶어야 했으므로 기를 쓰고 말 타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제법 재능도 있었다.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그의 손길엔 유순해졌고, 어떤 좋은 말도 그가 고삐를 쥔 말보다는 빠르게 달리지 못했다.
그래서 사내의 도움을 받아 기병으로 참전했다. 하급 중에서도 최하급. 전쟁 준비보다 말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일을 하던 그는 그웬의 후계가 지휘하는 제3부대에 소속이 되었다.
진저 그웬과 함께 나선 첫 전투. 패전이었다. 그 전투에서 그레닉의 등은 과녁 신세가 되었다. 그레닉은 진저를 살리기 위해 그 꼴이 된 것이다.
사내 둘은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몇 시간을 강가에 숨어 있었다. 적이 온다 싶으며 물속에 뛰어들고 적이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물속에서 나와 숨을 쉬었다.
밤이 깊어서야 겨우 적의 눈길에서 벗어났다. 진저가 물었다.
‘왜 그 꼴이 되어서까지 도망치지 않았지?’
‘도련님이잖아요.’
‘뭐?’
‘도련님을 살리면 다음 전쟁에도 나올 수 있을 줄 알았죠.’
‘왜 그렇게 참전하고 싶은 건데?’
‘공을 세우면 기사가 될 수 있고, 귀족가의 기사가 되면 돈을 많이 주니까요.’
돈을 벌고 싶어서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놈은 처음이었다. 진저는 픽 웃더니 살아서 나가면 목숨값을 치러주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정말 살아서 돌아갔다. 그리고 그레닉은 그웬가의 병사가 되었다.
그웬 수도군. 영지에서도 엘리트들만 입성이 가능한 그곳. 태어나서부터 검을 잡아 부친의 부친, 그리고 그 부친 대부터 가문을 모신 이들이 있는 철의 성에서 그녀를 만났다.
깐깐한 아주머니의 앞치마만 붙들고 다니는 더 깐깐한 여자애가 있었다. 없는 게 없는 여자아이라 부럽다 싶었는데 홀로 있을 때면 고용인의 인사에도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시라도 제 오빠가, 또 마피 부인의 눈길을 받지 못하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애.
형제 하나 없는 그레닉은 아이가 귀여웠다. 몇 번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했더니 대뜸 결혼을 하자고 졸랐다.
진저뿐만 아니라 공작, 또는 공작 부인 앞에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결혼해애. 결혼해 주겠다고 해애!’
떼쟁이도 그런 떼쟁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 귀여웠다. 전쟁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오빠보다도 자신을 먼저 찾고, 앙당그레 주먹을 쥐며 ‘내 건데 왜 다쳐!’ 하고 소리치던 아이.
돈을 버는 것, 적군의 목숨을 앗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삶에 한 줄기 빛이었고 숨구멍이었다. 아이와 있으면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돈을 벌어도 트일 구멍 하나 없는 삶이 아이의 눈을 볼 때면 모두 잊혀졌다.
아이에게서 금세 잊히리라 믿었다. 아이의 작은 세상이 넓어지고 넓어져 온 하늘과 온 땅을 다 볼 수 있게 되면 저보다 더 좋은 남자를 좋아하게 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숙녀가 될 때까지 마음이 바래지지 않았다. 식겁할 만한 속옷을 사와서 입어 보라고 하질 않나, 대뜸 입술을 빼앗고 ‘내가 첫 키스지?’ 하고 묻질 않나.
당황스러운 날의 연속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마냥 아이 같던 루펠라가 여자로 다가왔던 것이.
재작년 전쟁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돌아왔던 그날. 그녀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제 곁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날. 잠든 척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서 루펠라는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을 신을 부르던 그날.
제발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이 사람 대신 제가 아프게 해주세요.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게, 제발 신이시여.
모든 것을 가진 여자가 아무것도 없는 남자를 위해 애원하던 그날.
아이는 여자가 되었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 눈을 마주치고 사랑을 속삭일 때면 그도 떨리고, 설렜다.
그녀 곁에서 숨 쉬고 싶었고, 자신 또한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하늘이 푸르게 변했다. 어두컴컴한 하늘을 바라보던 그레닉 또한 걸음을 옮겼다. 떨어진 술 주머니에서 남은 술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