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루펠라(1)
다음 날, 그웬저는 평소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1년에 한 번 있는 시찰일에 맞춰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정찰군 대장들이 돌아온 것이다.
국경 경비병들을 제외한 소대장 급의 기사들이 모두 저택을 찾았다. 엘리사는 그들을 맞느라 분주한 오전을 보냈다.
기사들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자 엘리사는 그들에게 손등에 키스할 수 있는 영예를 허락했다.
30여 차례의 인사 후 마지막 인물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닉입니다.”
묵례를 하려던 엘리사가 멈칫하여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레닉이라면 루펠라가 입이 닳도록 말하던 그 사내였다. 시누이의 사랑을 독차지한 기사. 엘리사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자 그레닉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래요, 그레닉 경. 잘…… 왔어요.”
두 사람이 모두 허둥거리자 진저가 엘리사의 어깨를 감쌌다. 그 바람에 그레닉은 엘리사의 손등에 입을 맞추지 못하고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진저는 돌아온 정찰군의 대장들에게 성대한 귀환 파티를 열어주었다.
수도군의 소대장들이며 병사들까지 모두 그들의 귀환을 환영했다.
진저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던 그녀가 남편의 옷깃을 잡았다.
“그레닉 경이면 루펠라의…….”
“맞아.”
“루펠라는 알고 있나요?”
그때였다.
“그레닉!”
사모하는 님의 귀환 소식을 들은 루펠라가 나타났다.
성큼성큼 걸어온 루펠라가 기사들을 헤치고 그레닉에게 다가갔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그웬의 귀애와 기사에 불과한 남성에게 집중되었다.
루펠라는 말없이 그레닉을 응시했다. 소란과 함께 등장한 여성답지 않은 침착함이었다.
그녀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를 올려다보는 루펠라의 눈빛이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말이 없기는 그레닉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고집스레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긴장한 채로 그들을 지켜보던 엘리사가 발을 움직였다. 진저가 아내를 붙들었다. 엘리사가 무어라 입을 떼려 했을 때였다.
“달려 있네.”
루펠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편지 한 통이 없기에 팔 두 짝을 다 잃은 줄 알았지.”
“…….”
“신수 좋네, 응? 가슴이 다 썩어 문드러진 나와는 달라.”
언뜻 비아냥으로 들리지만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그레닉이 허리를 굽혔다. 평생을 보아온 고귀한 여자의 고백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루펠라에겐 그뿐이었다. 세상을 다 준다 하여도 그 하나면 족했다.
가장 외로운 시기에 곁에 있어주었다. 제 목숨보다 그녀의 목숨을 귀히 여겨 주었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루펠라가 이를 악물었다.
“인사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운가?”
“아가씨를 뵙습니다.”
그는 늘 이러했다. 애원하고 애원해야지만 인사 한마디를 나눠주었다.
비참해서 견딜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여자는 사랑받기를 원하는 존재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라는 건 여자라면 누구나 바라는 바였다.
사소한 바람이 이토록 상대를 괴롭게 한다는 건 그녀 인생의 저주였고, 비극이었다.
그 시절이 지난 지금도 비참한 게 있었다. 이런 성의 없는 인사에도 설레는 자신.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신. 싫고 미워서 견딜 수 없는 건 이제 그녀 자신이었다.
그의 눈꺼풀에 새로 생긴 상처를 만지고 싶었다. 아팠냐고, 힘들었냐고, 나 없는 곳에서 어떤 위험한 순간을 겪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루펠라 그웬처럼 거리낄 것 없이 사는 여자는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날 때부터 운수 대통이라 공작가의 양딸이 된 것으로도 모자라 양부와 양모가 죽고도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고 누리던 모든 것이 이어지고 있다고.
‘운수 대통? 아니, 아니야.’
그녀가 진정 바라는 이는 신분이란 벽을 넘지 못하는 사내였다. 차라리 촌구석 필부였다면, 그와 같이 평민이고, 함께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여자였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차라리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리기를, 그리하여 그 하나만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여자이기를 그녀는 바라고 또 바랐다.
“우리 사이엔 대화 같은 건 있을 수 없나 봐.”
“…….”
“매번 명령하고, 듣고. 언제까지 그렇게 지내야 하는지 정도는 묻게 해주지그래?”
“아직 바람이 찹니다. 들어가십시오.”
“……이러니 난 늘 철부지여야 하지.”
그래야 한 번이라도 눈을 마주칠 수 있을 테니까.
연무장은 고요했다. 어느 하나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방해꾼은 루펠라였다. 그레닉을 노려보고 있던 루펠라가 등을 돌려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엘리사가 루펠라의 뒤를 쫓았다. 막 문을 나서려던 그때, 또다시 남편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연무장 안쪽에선 조금씩 소음이 커지고 있었다. 엘리사가 루펠라와 남편을 번갈아 보다가 그에게 잡힌 팔에 힘을 주었다.
“저렇게 가게 두면 어떡해요.”
“당신이 가봤자 저 녀석에겐 도움이 안 돼. 괜히 허튼 희망만 줄 뿐이야.”
“루펠라가 안쓰러워요…….”
“저 녀석 결혼은 내 의사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루펠라는 그웬의 사람이되 카르트가의 일원이었다. 그녀가 이제껏 그 큰 소란을 몰고 다니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그웬뿐만 아니라 카르트 후작가 또한 그녀를 지켜왔기 때문이었다.
“루펠라는 선대 공작 부인의 조카였어. 카르트가의 핏줄이니 저 녀석의 결혼엔 그웬뿐만 아니라 카르트 가 또한 얽혀 있는 거야.”
“하지만 이상해요.”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의 숙명이야. 그 많은 걸 누리고 산 대가를 치러야지.”
“그게 아니라 그레닉 경이요.”
“그레닉이 왜?”
루펠라가 그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레닉은 루펠라가 연무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서는 목석보다 단단하던 사내가 그녀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선 사내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여성은요, 남성보다 감정에 예민해서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이야?”
“그레닉 경이 정말 루펠라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을까요?”
진저가 그녀의 양어깨를 잡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닉의 의사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레닉이 그웬에 예속된 기사고, 루펠라의 이름 뒤에 그웬이 쓰인다는 거지.”
하지만 아내의 추측이 놀랍긴 했다. 지금껏 루펠라의 일방적인 집착이라고 생각했다. 그 녀석까지 루펠라와 같은 마음이라면 거취를 고민해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전 루펠라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줄 수 없겠죠.”
“엘리사.”
“저도 겪어봐서 알아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까. 아니, 그건 책의 한 구절일 뿐이었다. 적어도 엘리사에겐 그랬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아무리 포기하려 해도 절대 희미해지지 않았다. 겪어본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엘리사의 말에 진저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엘리사는 내내 루펠라가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식을 순 있겠죠. 그래도 기억이 추억으로 남아 통증은 잊히지 않…….”
“식는다고?”
“……네?”
남편의 뜬금없는 말에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네, 뭐…….”
“왜?”
“네?”
“한 번 좋아하면 계속 좋아하는 거지. 마음이 왜 식어? 당신 마음은 그렇게 빨리 변하는 건가?”
“제 말은……. 마음이…… 아니, 사람 마음이 식을 수도 있죠.”
“그래서 지금 당신 마음이 식었다는 거야?”
“비약하지 말아요. 그리고 제 마음이 식으면 가장 좋아할 사람은 당신 아닌가요?”
엘리사가 남편의 손을 떼어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은 이런 말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던 남편이 빚쟁이처럼 구는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돌아가려는 엘리사를 붙잡은 진저가 소리쳤다.
“내 말은……!”
그가 마른침과 함께 뒷말을 삼켜 버렸다. 그 스스로도 화가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내의 말이 맞다. 그녀의 마음이 식으면 그는 기꺼워해야 했다. 왜 화가 나고 당혹을 금치 못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엘리사가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의 투명한 푸른 동공에 비치는 자신은 몹시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진저가 대화를 포기했다. 그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등을 돌리자 이번엔 엘리사가 그를 불렀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신 건데요! 어디 가세요! 여보!”
어쩐지 굉장히 중요한 말을 놓친 것 같았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던 그녀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그를 쫓았다.
진저의 곁에 바짝 다가간 그녀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럼 계속 좋아해도 되나요?”
“…….”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진저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돼.”
엘리사의 눈을 휘며 밝게 웃었다.
“허락 같은 건 필요 없는데.”
좋아해도 되냐고 묻던 여자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당했다. 아내는 그를 놀린 게 즐거운지 한참을 키득거렸다.
“좋아하는 건 제 마음이죠.”
“당신…….”
진저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녁 같이해요.”
그러더니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홀로 복도에 남은 진저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갈수록 이길 수가 없었다.
더 기막힌 건 계속 지기만 하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사가 향한 곳은 루펠라의 방이었다. 문틈 사이로 작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노크를 하려던 엘리사가 그대로 등을 돌려 방문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삼십 분쯤 흘렀을까. 울음소리가 멈추고 방문이 열렸다.
루펠라는 방문에 기대고 있는 엘리사를 보고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허둥거리는 건 엘리사 쪽이었다.
“들어와요.”
“괜찮…… 아요?”
“다 울었어요.”
엘리사에게 앉은 자리를 내어준 루펠라가 하녀를 호출했다. 그리고 눈을 식힐 찬 물수건과 차를 내오라 일렀다.
엘리사는 계속 루펠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그놈이 와주지 않을까 싶어서 귀가 이만해졌거든요.”
농담하듯 던진 말에 엘리사는 울상이 되었다. 다정한 새언니는 농담에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윽고 하녀가 찬 수건과 차, 그리고 다과 거리를 준비하여 들어왔다.
하녀에게서 찬 수건을 받은 루펠라가 퉁퉁 부운 눈을 식히며 한숨을 삼켰다.
하녀가 루펠라의 방을 나섰다. 엘리사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찻잔 손잡이만 매만졌다. 이런 일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난 괜찮아요. 이런 일 한두 번이 아닌걸.”
“하지만 겪을 때마다 괴롭잖아요.”
“……요새 자주 지쳐요.”
“네.”
“지쳐서 아주 놓게 될까 봐 그게 가장 겁나요. 언니, 나는요.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삶이 상상이 안 돼요.”
물수건을 힘을 주어 손에 쥐자 손가락 사이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게 꼭 루펠라의 눈물 같아서 엘리사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홀로 사랑하고 있다고. 아니다. 그녀는 언제나 홀로 이별하고 있었다.
이별보다도 더 저미게 아픈 일들을 매일같이 겪고 있었다.
막돼먹은 여자라고 해서 고백이 쉬운 건 아니었다. 거절은 다른 여자가 느끼는 것만큼 아팠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자존심을 놓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랴. 그녀는 모든 자존심을 다 놓고 그레닉만을 쫓았다.
“스토커 같다. 끔찍하다. 정신 질환이 있는 거다. 그런 말들 수도 없이 들었어요.”
“루펠라…….”
“그런데 언니, 나는 정상이에요. 언니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니에요! 내 눈엔 루펠라가 아주 사랑스러워요. 루펠라의 용기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요. 누구보다 멋진걸요.”
루펠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녀석이요. 나보다 더 못됐어요. 알아요? 그렇게 내가 싫다는 놈이 내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려요.”
많은 것을 누리는 만큼 위험도 많았다. 납치 같은 건 이제 두렵지 않은 지경에 이를 정도로.
그녀가 싫어 죽겠다는 그레닉은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만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와 목숨 같은 건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를 지켰다.
그리고 뜨겁고도 뜨거운 눈으로 그녀를 보는 것이다.
“그런 눈을 하고 나를 본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어요? 언니, 말해줘요. 이게 정말 내 착각인가요?”
엘리사는 눈물에 젖은 루펠라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위로를 해줄 수도, 용기를 줄 수도 없었다.
엘리사는 제삼자였고, 남편의 말마따나 누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루펠라는 귀족, 그것도 공작가의 영애이고, 그녀가 사랑하는 이는 기사 서임도 겨우 받은 하찮은 신분의 사내였다.
그레닉이 루펠라와 같은 마음이라면 더더욱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집안과 척을 진 귀족 여자의 말로는 언제나 처참했다. 병사들에게 끌려가 다시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어 제가 사랑하는 남자를 그리며 자진한 이들을 셀 수 없이 보았다.
운이 좋아 집안에서 족쇄를 풀어준다 하더라도 누리던 것을 전부 포기한 여자는 없었다.
삶의 무게에 마음 같은 건 너무나 쉽게 허물어졌다. 그리하여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사람을 버리고 재물 앞에 고개를 숙여 버린다.
태어나 지금껏 줄곧 황금의 성에서 군림하던 여자보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힘든 남자가 더 현실적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리사는 굳이 그것을 짚어주지 않았다. 자신보다 루펠라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함께 우는 것뿐이었다.
엘리사는 그날 저녁까지도 기운이 없었다. 먼저 식사를 청했으면서 말도, 힘도 없이 스푼만 겨우 들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던 진저가 식기를 내려놓고 아내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아내는 음식을 앞에 둔 채 다른 생각에 골똘하였다.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루펠라로 인해 걱정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진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맛이 없나?”
“…….”
“엘리사.”
“…….”
“엘리사.”
“……아, 네.”
“그 녀석은 신경 쓰지 마. 서너 달에 한 번은 그렇게 소란을 벌이니까.”
엘리사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제 일이 아니라면 가족이든, 동료든 관심 없는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 매정했다.
루펠라가 얼마나 울던지 가족이 된 지 얼마 안 되는 자신까지도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엘리사가 마뜩잖은 얼굴로 그를 흘기자 진저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있는데도 안 하는 거잖아요. 당신이 정말 카르트 후작 때문에 루펠라를 방치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막돼먹기로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인사였다. 루펠라는 그웬과 카르트의 보호라도 있었지 이 남자는 그 막돼먹은 일을 모두 스스로 처리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 눈엔 대책 없을 일도 이 남자가 나서면 말끔히 해결이 되었다. 그래서 개차반 같은 성질머리와 사생아라는 오점으로도 란델에서 한 손에 꼽히는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진저는 아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당신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아, 귀찮아서 안 하는 것뿐이잖아, 남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것뿐이겠지.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감히 제 앞에서 저런 눈빛에, 저런 표정 같은 건 지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제 능력을 거기까지 인정하는 게 어쩐지 우쭐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안 그래도 근래엔 신경 쓸 게 많았다. 신경 쓰게 될 사람이나 일은 애초에 부숴 버리는 진저 그웬이 신경을 쓸뿐더러 쩔쩔매기까지 했다.
“인정하지. 그런 귀찮은 짓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것 봐요…….”
“신경도 쓰고 싶지 않고. 당신도 더 이상 루펠라 생각은 마.”
“뭘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루펠라를 위해 애써주면 기쁠 테지만, 바라진 않아요. 하지만 걱정은 할 수 있잖아요. 루펠라는 시누이이기 전에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고요.”
그 말을 끝으로 엘리사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아내는 항상 식사를 끝날 때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진저가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이럴 때는 어떤 말로도 아내를 달랠 수 없었다.
“그레닉이 원한다면 또 모르지만.”
“네?”
보라, 결국 지는 건 자신이었다. 이 작고 연약한 여자에게 몇 번을 지는 건지 모르겠다.
“두 녀석이 서로를 간절히 원해 가진 걸 다 포기한다면 생각해 볼 수는 있지.”
“여보!”
“설득하지 마. 당신은 지켜보기만 해.”
“네!”
엘리사가 볼우물이 쏙 파이도록 활짝 웃었다.
“일할 게 남았나?”
“일이요? 네, 일은 항상…….”
“함께하지.”
엘리사는 다른 때와 달리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편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밝은 표정으로 기다렸다.
진저는 실소를 흘렸다. 금은보화를 안겨 줘도 이렇게 좋아하진 않을 터였다. 뭐, 금은보화를 사는 게 그녀가 원하는 일보다 쉬울 테지만.
식사를 끝낸 후 진저가 먼저 집무실에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서류를 한 아름 끌어안고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본 진저는 인상을 찌푸렸다.
늘 저렇게 업무량이 많은 건가? 선대 공작 부인이 서류를 보는 건 금전 문제를 확인할 때뿐이었다.
꼭 선대 공작 부인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어떤 가문의 안주인도 저만큼 일을 많이 하지는 않을 터였다.
“원래 그렇게 일이 많나?”
서류를 보던 엘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전 일이 밀려서…… 하지만 항상 이 정도는 있어요.”
“고용인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전 란델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자료가 많이 필요해요. 그리고 이 정도는…… 음, 두 시간이면 끝나요.”
엘리사는 다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어떤 서류를 볼 때는 자료를 찾는 데 시간이 더 걸리기도 했고, 어떤 서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적기도 했다.
아내의 말처럼 일이 두 시간 안에 끝나긴 했다. 물 한 잔 마실 새도 없이 온 집중력을 끌어내는 것 같았지만.
‘라골, 이 자식은 뭐 하는 거야.’
아내에게 라골을 붙인 이유는 일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라골은 라골대로 야근에 야근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저 아내의 업무량만 걱정이 되었다. 기실, 눈으로 보았대도 아내 걱정이 우선이었을 터였다.
“행정관들을 보내주지.”
“그렇게 일이 많지 않은걸요. 요새는 익숙해져서 몇 시간이면 끝나요.”
“그 몇 시간도 하지 않는 여자가 천지인 건 알아?”
“모두 안 보이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을 거예요. 제가 손이 느릴 뿐이에요.”
엘리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건 결코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진저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아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엘리사는 이 사람이 무얼 하려고 이러나 싶어 그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진저가 아내를 덥석 들어 올렸다.
“꺅!”
“가만있으시오, 부인.”
“왜 이래요!”
“일도 끝났는데 뭐라도 먹으러 가지.”
“저녁 먹은 지 두 시간밖에 안 됐어요.”
“누가 음식을 먹자고 그랬어?”
“그럼 뭘…… 잠……! 여보!”
아내를 안아 든 진저가 집무실을 나서 제 침실로 향했다.
엘리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대체 이 남자는 왜 자꾸 자신을 덜렁 들고 다닌단 말인가.
일전엔 사람이 많은 상점가, 지금은 고용인들이 지나는 복도.
방으로 가자고 하면 제 발로 걸어갔을 것이다. 갓난아기처럼 안고 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그녀는 남편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그의 품 안에 얼굴을 숨겼다. 고용인들이 헙헙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천둥보다 크게 느껴졌다.
진저가 제 방 침대에 아내를 내려놓았다.
엉덩이를 침대에 붙인 엘리사가 남편을 맹렬하게 흘겨보았다.
“왜?”
남편은 뻔뻔한 표정이었다. 잘못이 뭔지 정말 모르는 얼굴로 어깨만 으쓱 올렸다.
“저도 발 있어요!”
“누가 당신 발 없댔어? 어느 놈이 그랬는데? 말해봐, 곤죽을 내줄 테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남편이 아내 좀 안고 다니는 게 어떻다는 건데.”
“아무도 안 그런다고요!”
“란델에선 다들 그래. 저택을 제 발로 걸어 다니는 안주인은 없어. 다들 남편이 안고 다녀.”
엘리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란델에선 원래 그래’라는 말이 나오면 일단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미심쩍은 눈으로 남편을 보았다. 남편의 입매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놀린 거죠!”
그럼 진짜인 줄 알았는가. 진저가 허리를 접은 채 폭소했다. 엘리사는 또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씩씩거렸다.
“왜 자꾸 놀리시는 거예요!”
“귀여우니까 그렇지.”
얼굴이 붉어진 엘리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무릎을 굽힌 남편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요 근래, 혼란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흔들릴 때. 그러니까 지금 같은 표정과 지금 같은 눈으로 자신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은 그를 볼 때. 그럴 때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진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아내의 붉은 뺨과 달아오른 목을 감쌌다.
“새우 같군.”
“네?”
“뜨거운 물에 넣으면 붉어지잖아.”
토끼 같다, 강아지 같다 등의 귀여운 말도 많은데 ‘새우 같다’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엘리사가 눈을 끔뻑거리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놀리는 표정은 아니었다.
“자꾸…… 뜨겁게 하시니까…….”
“내가?”
“당신이…… 아니, 아니에요.”
“야하지 않나, 그 말.”
엘리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남편에게 말리면 이상하게 야릇한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 뜨거운 게 뭔지 알려주고 싶은 표정이야.”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로 생각해?”
“…….”
이전보다 더 붉어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엘리사는 사과처럼 빨개져 허둥댔다. 그의 손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허리를 잡혀버렸다.
“입 맞추면 화낼 건가?”
“……네?”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말이야.”
“노, 놀리지……!”
그녀의 입술 위로 남편의 숨결이 느껴지나 싶더니 두 입술이 포개졌다. 당황한 엘리사가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뜨거운 살덩이가 침범했다.
진저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의 푸른 눈이 유독 반짝거렸다. 어떤 달보다 푸르고 아름답게 빛나 홀려 버린 걸까.
진저는 아내의 마음에 보답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평생 보답받지 못할 그녀가 애처로워 밀어내려 하였다.
그런데 왜 멀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는 걸까.
엘리사의 손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힘이 빠져 밀어낼 수도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잡았던 손이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 허리에 안착했다.
허리를 끌어안고 턱을 쥔 그가 이전보다 더 저돌적으로 그녀의 입안을 탐했다.
키스는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남편과 몸이 바뀌었을 때, 술에 취해서. 하지만 제 몸으로, 그것도 맨정신에 누군가와 입을 맞댄 적은 없었다.
입을 맞춘다는 건 이상한 느낌이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온 신경이 혀에 집중되는 듯한, 그런 생경한 감각이었다.
하나가 물러서면 하나가 쫓고, 하나가 뒤척이면 하나가 옭아맸다. 가장 민감한 살덩이부터 시작되는 전류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가슴에 놓인 아내의 손이 잘게 떨렸다. 거침없이 그녀의 입안을 침범하던 그가 입술을 떨어뜨렸다.
“숨 쉬어.”
“어, 어떻게…….”
숨을 코로 쉬지 어디로 쉰단 말인가. 입맞춤을 할 때 숨 쉬는 법까지 알려주어야 한다는 게 우스웠다.
다시 입을 붙이려 하자 엘리사는 입을 앙다물고 틈을 내주지 않았다. 그가 하하 작게 웃음을 흘리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코를 깨물었다.
“아!”
그 틈에 다시 입속으로 침투한 반란군은 오만 곳을 샅샅이 훑었다. 일 차전에서 이미 함락당한 살덩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침략군에게 끌려다녔다.
입술이 아릿할 정도로 물고 빨던 그는 다시 입술을 떼었다. 엘리사는 헐떡이며 그의 옷깃을 잡고 있었다.
“이건 뭐 어쩌자는 거야?”
그제야 그녀는 제가 남편의 멱살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건…… 그러니까…….”
그녀가 허둥거리며 옷깃을 놓았다. 엘리사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희롱을 당했다고 소리를 칠 수도 없고, 잘했다 칭찬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진저가 손을 뻗어 그녀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닦을 만한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제 손으로 직접 번들거리는 아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엘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울상을 지었다. 제게 왜 입을 맞추었는지 묻고 싶었으나 용기가 부족했다. 혹시 원하지 않는 말이 나올까 봐, 그래서 상처를 입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억울해.’
피해자는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피의자는 아주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깨물었다. 뭐를? 손가락을.
“윽!”
진저가 가볍게 코를 물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강도였다. 그는 인상을 쓴 채 손을 흔들었다. 그럴수록 엘리사는 더 힘을 주어 남편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대체 뭐야, 이 여자!’
키스 한 번 했다고 남편을 개처럼 깨무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