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패자, 그는 항상 패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진저는 그의 일을, 엘리사는 그녀의 일을 하며 적당히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일이 없는 날이면 항상 식사를 함께했다.
이따금 한가할 때는 엘리사의 집무실에서 같이 간식을 먹거나 취미 생활을 했다.
엘리사는 마음이 편했다. 더 이상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으니 느긋해졌다.
그러다 보니 결혼 초로 돌아갔다. 남편이 농담을 할 때면 대꾸를 하거나 토라졌지만 그렇지 않을 땐 할 일에만 집중했다.
저택은 평화로웠다. 한 사람만의 울화증만 빼면.
엘리사가 느긋해진 반면 진저는 조급해졌다.
그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내는 노력을 해보겠다더니 노력은커녕 그보다 타인을 우선했다.
어제는 그녀가 그에게 고백한 날로부터 딱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오전부터 루펠라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저녁을 함께 먹자는 약속도 내팽개치고 상점가에 다녀왔다.
돌아온 엘리사는 기다리고 있던 진저에게 말했다.
‘식사 안 하셨어요?’
식사 안 하셨어요? 안 하셨어요? 기가 막혔다.
진저는 소파에 얌전히 앉아 찻잔을 들 때 말고는 움직임이 없는 아내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던 엘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왜요?”
“그 책이 그렇게 재미있나?”
“네, 좋아하는 작가예요.”
아무렇지 않게 답하던 엘리사가 고개를 기울였다. 남편은 뭔가 화가 난 것 같았다. 찻잔을 든 채 고민하던 그녀가 아, 소리를 냈다.
“어제는 정말 기다리시는지 몰랐다니까요. 함께 저녁을 먹자고 말씀하셨다면 안 나갔을 거예요.”
그녀는 억울했다. 바쁘지 않을 때면 항상 같이 저녁을 먹었지만 약속된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게 약속처럼 되어서 그렇지.
“어디 갔던 건데.”
“아, 레스토랑이요. 란델은 정말 굉장해요. 그란디아엔 음식점이란 게 없거든요. 귀족가 요리사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어요. 나와서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왜 자신과 함께 먹을 생각은 못하는 건데. 진저는 치졸한 질문을 가까스로 삼켰다.
울화가 치밀었다. 왜 자신이 이토록 조급하게 굴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고백을 한 건 아내였는데 왜 자신의 애가 닳는가.
“그리고 디저트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도 있었어요. 얼마나 훌륭하던지!”
엘리사는 흥분한 채로 어제 먹었던 디저트가 얼마나 멋졌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초콜릿은 그란디아에서 먹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와 결혼한 이후로도 그렇게 굉장한 초콜릿은 맛보지 못했다.
혀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는데 너무나 부드러웠다.
그란디아는 란델보다 음식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본식은 물론이고 디저트도 란델의 것이 몇 배는 더 훌륭했다.
생각하다 보니 또 먹고 싶어졌다.
엘리사가 집무실 테이블 서랍 쪽을 돌아보았다.
포장해 온 초콜릿이 있었다. 루펠라의 선물이었다.
엘리사가 남편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 당신도 맛보실래요?”
“뭘?”
“초콜릿이요.”
진저는 단것이라면 질색을 했다. 엘리사도 말은 꺼냈지만 그가 초콜릿을 먹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내가 초콜릿을 꺼내왔다. 언제 먹었는지 이미 절반은 비어 있었다.
진저가 초콜릿 하나를 입에 물었다. 다른 초콜릿에 비해 단맛이 심하지는 않지만 더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초콜릿을 보고 표정이 환해진 아내를 보니 심술이 났다.
진저는 남은 초콜릿으로 손을 뻗었다.
“아……!”
남은 초콜릿을 모두 입에 넣은 그가 볼을 부풀린 채 우물거렸다.
그러더니 흥, 콧방귀를 뀌었다.
“별로 맛도 없구만.”
맛도 없다면서 왜 동을 내는 건데. 상자를 뒤집어 정말 한 알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진저는 초콜릿을 모두 삼키고 입술에 묻은 코코아 가루를 핥았다.
“다 먹으면 어떡해요!”
엘리사가 울상을 지으며 버럭 소리쳤다.
“점심 먹었잖아. 후식으로 나온 커스터드 파이도 하나를 다 먹었고.”
“그거랑 초콜릿은 달라요!”
“뭐가 다른데. 먹으면 다 배로 가는 거지.”
진저는 잘못한 게 없다는 듯 아주 뻔뻔한 투로 말했다.
그런데 아내가 책을 소리 나게 덮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서둘러 아내를 따라갔다. 엘리사가 속도를 높여 걸었다. 복도에서 때 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게 뭐라고 화를 내. 좋아, 더 사오라고 할게.”
입을 꾹 다물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보.”
“…….”
“엘리사.”
“…….”
“당……!”
“시끄러워요!”
서재에 들어간 엘리사가 문을 걸어 잠갔다. 남편이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그렇게 소중한 건지 몰랐어’ 하며 외쳤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어서 더 화가 났다.
서재에서 수업을 준비 중이던 라골이 무슨 일인가 싶어 몸을 일으켰다.
“마님?”
한참 씨근덕거리던 엘리사가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 아니, 아니에요.”
남편의 옹졸한 행동에 대해 말하려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초콜릿 하나 때문에 싸웠다고 해봤자 웃음만 살 터였다.
“주인님과 다투셨습니까?”
“…….”
“무슨 일이신데요?”
“……요새 너무 심술 맞아요.”
“주인님이요?”
“네.”
초콜릿을 다 먹은 것도 그렇지만 남편은 요새 이상하게 골이 난 상태였다.
함께 있을 적엔 입을 가만두는 법이 없었다. 어제 아침엔 고용인들 보는 앞에서 드레스가 너무 나풀나풀하다고 혹시 오늘 어디 날아갈 생각이냐 물었다.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어제 아침 일을 얘기해 주자 라골이 픽, 웃었다.
“드레스가 좀…… 화려했으니까요.”
“파티용 드레스보다는 수수했는걸요.”
“그러니까 그게 속살이…… 그…….”
속살이 많이 드러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마님이 옷을 갈아입길 바라셨던 겁니다.”
엘리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진저는 날이 풀리자 셔츠를 풀어헤치고 다녔다. 하루 종일 그러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아침 훈련을 끝내고 돌아오면 항상 셔츠 단추가 닫히질 않았다.
그래서 그가 훈련을 끝내고 돌아올 때면 하녀들이 연무장과 내저가 이어진 길에서 서성거렸다.
그 말을 들은 라골이 난처한 듯 뒷목을 주물렀다.
“뭐, 보이는 것만큼은…….”
진저는 포장만큼은 최상등품이었다. 알맹이가 형편없어서 그렇지.
라골이 엘리사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는 계속 골이 난 표정이었다.
한두 번이면 말을 안 한다. 한 달 내내 몇 번이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드레스나 음식을 가지고 놀리는 건 약과였다.
엘리사는 2주 전부터 사교 활동을 재개했다. 처음 파티에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모르는 여성들이 귀부인, 미혼 영애 할 것 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성적인 문제에 대해 이것저것 상담하는 게 아닌가.
트라노이 공작 부인까지 ‘조언해 주신 대로 했더니 각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요’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시엔 어리둥절했는데 사정을 알고 나서는 화가 났다.
왕비가 주최한 테이블 파티에서 남편이 주책을 떤 것이다.
트라노이 공작이 팔베개를 해주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그녀에겐 부부 관계를 추천해 주질 않나, 남편이 바람난 게 아닐까 고민하는 귀부인에게는 맞바람을 피라고 조언해 주었단다.
“정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주인님 나름대로 마님을 위해 한 일일 겁니다.”
“맞바람을 피우라고 조언한 게 저를 위한 일이었다고요?”
“다른 귀부인들과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라골이 그 사람이었더라면 그리했을 건가요?”
그럴 리가.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다 보니 더 화가 났다. 엘리사가 씨근덕거리며 남편의 발소리가 들리는 문 쪽을 노려보았다.
내일도 파티가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자리였는데 왕비의 테이블 파티에 참석했던 귀부인들이 나오는 자리였다.
귀부인들은 엘리사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혈안이었다. 그것도 아주 야릇한 화제를 꺼내며.
대체 왜 그녀가 다른 남자의 거시기 사이즈에 대해 알아야 하고, 밤 기술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가.
엘리사가 호출 줄을 당겼다. 이윽고 콕스가 들어왔다.
그래도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라고 남편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콕스가 마님의 명에 따라 찬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가 내민 찬물을 마신 그녀가 후, 한숨을 내쉬었다.
찬물을 들이켜고 속의 불길이 가라앉은 뒤에야 엘리사와 라골은 수업을 시작했다.
라골은 여러 방면에 재능이 넘치는 자였다. 특히 가르치는 것은 그린디아 왕궁의 교사들보다 나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점에선 이제껏 만나온 스승 중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란디아에서 역사학을 가르쳐 주던 오멘도 자작은 노년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쩌렁쩌렁한 목청을 자랑했다.
수업을 할 때마다 그가 관심 있는 내용이 나오면 그 목청으로 버럭 소리쳤다.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데도 영 잠이 깨지 않았다. 스승 앞에서 졸린 상태로 있는 건 예의가 아니라 허벅지를 비틀어가며 참아야 했다.
그에 비해 라골은 어려운 내용은 엘리사가 겪었거나, 관심 있는 분야에 빗대 설명했다.
어려운 내용뿐만 아니라 알아야 하는 일반적인 상식, 외워야 할 것들도 역사나 신화, 전설들을 덧붙여 주니 훨씬 편했다.
“모의 전투가 원래 1, 2차로 나눠진다고요?”
“4공의 군이 한 번에 투입되는 사각전이 아니면요. 1차에서 두 가문끼리 각각 전투를 치르고 승자끼리 결승을 치르죠. 이때 승군, 패군에 관계없이 점수를 매깁니다. 승자라도 내용이 형편없었다면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해요. 그 점수를 가지고 치르는 게 이 2차 전투입니다.”
“아아, 사각전이기 때문에 2차가 없었군요.”
“일대일과는 달리 동맹 등 전술이 여러 가지로 활용되는 전투라…….”
모의 전투에 대해 설명하던 라골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건 자신이 아닌 진저나 마크빌 경이 설명할 일이었다.
“혹시 모의 전투 훈련 때도 몸이 바뀌셨습니까?”
“아니요.”
그들은 어느 새부터 이 문제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과일 던져 베기’ 사건이 진저가 아닌 그녀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안 라골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렇게까지 웃는 라골을 처음 본 엘리사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다.
라골이 웃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후 기사들은 주군이 성격은 시궁창보다 더러워도 실력과 훈련 지시만은 진짜라고 칭송했다.
지나가다 그 얘기를 들은 진저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놀린 기사들을 복날 개 패듯 두들겼다.
그때는 저 양반이 한겨울에 더위를 먹은 건가 싶었다.
당연히 화가 난 부분은 ‘시궁창보다 더러운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훈련 지시만은 진짜’라는 말에 울컥한 것이다.
“마크빌 경에게서도 들은 적 없으십니까?”
“네, 제가 해야 할 일만 알려주었거든요. 각하와 하우벡 경도…….”
하여간에 누가 몸 쓰는 사람들 아니랄까 봐 이런 쪽의 배려는 쥐똥만큼도 없었다.
순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우승한 가문의 꽃이 봉사를 하는 것도 모르셨습니까?”
“네?”
라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준비성이라면 누구보다 뛰어난 마님이 이때까지 자선 파티를 묻지 않으신 게 이상했다.
“우승한 가문의 꽃이 신년 봉사활동을 추진하는 게 관습입니다.”
“언제요?”
“그러니까…… 다음 주군요.”
“네?!”
엘리사가 기함을 했다.
다음 주라니. 모의 전투가 끝나고 바로 준비를 했어도 모자랄 판국에 다음 주라니!
“신년 봉사는 뭔가요?”
“우승한 꽃이 내용을 정해서 귀부인들과 함께 봉사를 나갑니다.”
라골은 전혀 봉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귀부인들은 그것을 봉사라고 여겼다.
엘리사가 서둘러 책을 덮었다.
“수업은 다음에, 아니, 다음 주 봉사가 끝난 후로 미뤄줘요.”
“아…… 예.”
그녀는 서둘러 서재를 나섰다.
어떻게 이 일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속으로 알려주지 않은 남편을 원망하는데 때마침 그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아내를 발견한 진저는 아는 체를 하려 하였으나 엘리사는 그를 새초롬하게 흘기고 제 집무실에 쏙 들어가 버렸다.
어리둥절한 진저에게 이유를 알려준 건 봉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려 엘리사의 집무실을 찾은 라골이었다.
“마님께 신년 봉사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제야 진저는 아내가 저토록 새초롬한 이유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모의 전투가 끝나자마자 우승 파티가 있었고 그 이후로는 몸이 바뀌었다. 게다가 한 바탕 파란이 있지 않았는가.
“신년 봉사가 다음 주입니다.”
“뭐, 또 저희들끼리 모여서 천박한 말들이나 나누겠지.”
미혼의 레이디들에게 결혼 생활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야한 농담만 잔뜩 하다 오는 게 신년 봉사였다.
고용인들은 파티 준비에 이골이 나 있었다. 선대 공작 부인이 있을 적엔 한 달에도 몇 번씩 파티 준비를 하던 이들이었다.
초대장을 추리는 건 번거롭겠지만 그 외의 일들은 하루 이틀이면 끝날 터였다.
“오늘부터 준비하나?”
“마님 성격이라면 아마 그러실 듯싶습니다.”
굳게 닫힌 아내의 집무실을 보던 그가 픽 웃었다.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온 진저는 식당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한 건 파티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모두 밀가루며 버터 등을 안고 식당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방장들을 비롯한 요리사들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디저트라도 준비하려고 하나.’
별생각 없이 지나가려던 그가 조리실 쪽에서 나는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마님!”
‘엘리사?’
그가 서둘러 조리실을 향했다. 조리실 안쪽에서 주방장의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험하십니다!”
벌컥 문을 연 그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내는 머리에 하얀 두건과 앞치마를 입은 채 칼을 들고 있었다.
귀부인이 칼을 들 일이 무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장검이 아닌 식칼을.
엘리사는 난데없이 쳐들어온 진저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볼에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
“뭐 해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대체 그 식칼은 뭐야?”
“제빵용 칼인데…….”
부엌에서 쓰는 칼이니 식칼이라고 불려도 괜찮지만 엘리사는 칼의 날 부분을 보여주었다.
일반 식칼과는 달리 날 부분의 형태가 달랐다. 물결 모양의 날을 본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게 궁금하다고 한 게 아니지 않은가.
대체 왜 제 아내가, 그웬 공작 부인이 조리실에서 칼을 들고 있어야 하나.
네놈들은 안 말리고 뭐 했어. 진저가 그녀 주위에 있는 요리사들을 살벌하게 노려봤다.
아내는 문제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진저에게 제빵용 칼과 일반 식칼이 뭐가 다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게 궁금한 게 아니라.”
“그럼요?”
“여기서 뭐 하냐고.”
“아, 신년 봉사 준비를 하고 있어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신년 봉사 준비를 왜 조리실에서 하느냔 말이다.
“고아원에 빵을 만들어서 보내려고요. 함께 봉사를 하는 부인들에게 가르쳐 줄 생각인데 제가 모르면 안 되니까 배우고 있었어요.”
진저가 벌어질 뻔한 입을 가까스로 닫고는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 여자들이 잘도 제빵을 배우겠다. 귀부인들의 봉사는 언제나 이름만 봉사지 또 다른 파티였다.
평생 칼은커녕 다 구워진 빵도 안 잘라봤을 여자들이 귀족도 아니고 고아 아이들을 위해 빵을 만들겠는가.
요리사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마님이 시키니 하긴 하는데 해도 되는 건지 몰라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건 콕스도 마찬가지였다. 귀부인들의 신년 봉사는 이런 게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엘리사는 되레 ‘그럼 왜 봉사라고 부르나요?’ 하고 물었다.
그때 오븐에서 소리가 났다. 엘리사가 진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븐 장갑을 낀 채 오븐을 열었다.
오븐에서 빵을 꺼낸 그녀는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상한 통을 쳐다봤다.
통 안에는 새카맣게 탄 빵이 한 가득이었다. 진저는 말하고 싶었다. 만들지 말고 차라리 그 밀가루를 보내.
하지만 입 밖에 내는 즉시 아내가 화를 낼 게 분명해서 침과 함께 말을 삼켰다.
“자꾸 실패해요. 왜 그럴까요?”
이젠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요리사를 향해 오븐을 들어 보이는 것이다.
“위에 시럽을 바르면 불 조절을 잘해야 하지요. 원래 시럽이 잘 탑…… 니다.”
오히려 조리사들이 진저의 눈치를 봤다.
“그래도 중앙에 있는 건 괜찮네요. 봐요, 여보. 안 탔죠?”
“그게?”
시커멓게 탄 빵만 봐서 시력이 저하된 것 같았다.
“잘 봐요. 여기만 조금 그을렸잖아요. 드셔 보실래요?”
조리사들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진저는 안 먹겠다고 거절하려는데 엘리사가 그의 앞까지 걸어와 직접 손으로 빵을 잘라주었다.
“네? 한번 드셔 보세요.”
그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그녀가 빵을 그의 입에 넣어주자 우물우물 씹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맛없는 빵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전장에서 먹는 풀뿌리도 이것보다는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어때요?”
기대로 눈이 반짝거렸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진저도 도저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괜…… 찮아.”
씹을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화장품인 것 같기도 하고 식용향료인 것도 같은데 굉장히 짜증 나는 향이었다.
“정말요?”
아내는 뛸 듯이 기뻐했다.
요리사들은 진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도 마님 사랑을 외치는 그녀의 광신도였다. 하지만 마님 사랑으로도 커버할 수 없는 지독한 맛이었다.
진저는 그걸 씹고 삼킨 데다 무려 괜찮다고 말했다.
“그럼 오늘 디저트는 제가 만든 빵으로 해요.”
“…….”
“네?”
“응…….”
어쩐지 남편의 말투가 시무룩한 것 같았다.
진저는 그대로 연무장에 나가지 못하고 빵 굽는 아내를 구경해야 했다.
굽는 족족 모르모트가 되어 빵 맛을 봤는데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이상한 맛이었다.
시식이 일곱 번을 넘어갔다. 아내는 여전히 빛나는 눈동자로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그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엘리사는 마음에 차지 않는지 팔짱을 낀 채 구워진 빵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또 뭐가.’
이제 빵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여기서 다른 빵을 만든다고 하면 아예 저택에 있는 조리실은 모두 없앨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먹기엔 맛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냥 사서 가는 게 낫겠죠?”
그에겐 이 빵을 디저트로 주겠다고 했던 그녀가 두건을 벗으며 한숨을 흘렸다.
“밀가루가 아까워요.”
‘내 시간이 더 아까워.’
아내가 조리실을 나설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있던 진저가 허탈한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직접 먹여주는 건 좋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기가 막혔다.
등신도 이런 등신이 없었다.
저녁 식사 후 부부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 식후 차를 함께했다.
엘리사는 기가 죽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이유를 아는 모양인지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식사 후 디저트로 내기 위해 자신이 만든 빵을 맛보았는데 도저히 씹을 수가 없었다. 씹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심하게 맛이 없었다.
그녀가 빵을 들고 망연자실하는 와중에 한스 경이 들어왔다. 그는 배가 등가죽에 붙게 생겼다며 엄살을 부렸다.
종종 그렇게 얻어먹고 다니던 그가 통에 한가득 담겨 있는 탄 빵을 보고 ‘이거 먹어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너무 간절한 눈빛이라 엘리사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빵을 입에 넣은 한스 경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리고 말했다.
“아, 이쪽에 있는 건 음식물 쓰레기였나 보죠?”
한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면 엘리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함께 있던 콕스와 요리사들이 그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저희끼리 쑥덕거렸다. 막내 요리사가 어딘가로 향해 달려갔다.
고용인인 그들은 기사 서임을 받은 수도군의 소대장을 패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생니를 몽땅 뽑아줄 인사를 향해 고자질을 하러 간 것이다.
그렇게 하우벡이 등장했다. 그는 어색하게 웃더니 한스의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나갔다.
조리실 밖에서 타작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때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두두두두, 하는 워커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돼지 멱 따는 것 같은 비명이 들렸다.
간간이 ‘억, 마님이 만드신 건 줄, 으악! 모, 몰랐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사는 그제야 그녀가 만든 빵이 얼마나 맛이 없는지 알게 되었다.
시종일관 시무룩한 표정의 아내를 보는 진저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티타임을 시작한 지 삼십 분가량 흐른 것 같은데 아내는 몇 모금 외에는 다른 다과 거리를 입에 넣지 않았다.
그가 녹인 초콜릿을 듬뿍 얹은 케이크를 잘랐다. 아내의 접시 위에 자른 케이크를 올려주자 아내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좋아하잖아. 자호…….”
자 뭐라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내가 냉큼 대답했다.
“자허토르테요.”
“그래, 그거.”
남편이 포크를 향해 턱짓을 하자 주저하던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저…… 빵은 죄송해요. 그렇게 맛이 없는 줄은 몰랐어요.”
“아아, 몰랐나?”
“네…….”
“난 오전 일을 복수하려나 했지.”
밉살맞은 말에 엘리사의 입술이 조금 튀어나왔다.
보통 사과를 하면 괜찮다고 하거나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다고 하는데, 남편은 기회만 잡았다 싶으면 그녀를 골렸다.
“많이 만들어놔. 다음 전투 때는 무기로 쓰게. 아니면 독극물로 쓰든가.”
“죄송하다니까요…….”
큭큭, 작게 웃던 진저가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 공주로 자란 그녀가 음식을 만들어보았을 리 있는가. 그 정도 맛은 당연한 결과였다.
“마법이라도 부린 줄 알았지, 난. 똑같은 재료로 그런 대단한 걸 만들었으니.”
“그만 놀리세요. 이제 안 할 거예요.”
아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더 놀리다가는 정말 토라질 것 같아서 그는 눈짓으로 아내의 포크를 가리켰다. 그리고 뻔뻔한 표정으로 배를 잡았다.
“속이 안 좋아서 포크를 들 힘도 없어.”
“……그런…… 데요?”
“당신이 먹여 줘야 한다는 말이지.”
속이 안 좋으면 식사도 하지 말아야 하고 당연히 초콜릿과 버터가 듬뿍 들어간 디저트도 피해야 했다.
분명히 또 놀리는 것이다. 그래도 잘못한 게 있다 보니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엘리사가 결국 포크를 잡았다. 그의 입에 들어갈 정도로 케이크를 조각낸 그녀가 다시 남편의 눈치를 보았다.
“어서.”
결국 그의 입속으로 케이크를 넣어주었다. 그런데 남편은 만족하지 않고 계속 눈짓으로 케이크를 가리켰다.
“이제 됐잖아요.”
“배가 다시 아픈 것 같은데.”
빙글빙글 웃고 있으면서 배가 아프다니.
“정말…….”
한 번, 또 한 번 케이크를 넣어주다 보니 그녀의 접시에 있는 케이크가 몽땅 사라졌다.
“별맛은 없군.”
“여보!”
엘리사가 씩씩거리며 그를 부르자 그는 능글맞게 웃었다.
“왜, 여보?”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둥 뒤에 숨은 수도군의 소대장들과 병사들이 낄낄 웃으며 주군과 공작 부인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주군이 픽픽 웃을 때는 함께 픽픽 웃고, 공작 부인이 ‘여보!’ 하고 소리칠 때는 ‘어이쿠’ 하고 웃었다.
양 눈에 먼 이국의 동물이라는 까맣고 하얀 곰처럼 멍이 든 한스가 말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면 죽을 때가 온 거라던데. 그러자 다른 병사가 대꾸했다. 주군은 욕을 많이 먹어서 천수를 누리실 겁니다. 영특한 병사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보고는 언제 합니까?”
한 병사의 말에 한스가 ‘이제 해야지’ 하며 쪼그리고 있던 무릎을 폈다.
그때였다. 한스의 어깨 위로 가느다란 팔이 걸쳐졌다.
“신수가 훤해, 응?”
사내를 홀딱 벗겨 무등을 타도 ‘쟤는 원래 미친 애야’ 소리를 들을 란델의 유일한 여성. 루펠라였다.
란델의 여성은 타국의 여성보다 작고 가녀린 편이었다. 루펠라도 마찬가지로 작았다. 그녀는 한껏 까치발을 든 채 한스의 어깨에 매달리듯 팔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온 콕스와 라골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루펠라는 그를 끌고 가면서 말했다.
“웃어, 웃어.”
소대장들이고 병사들이고 표정에 물음표가 떴다. 어째서 삥 뜯는 양아치…… 아니, 돈 필요한 무서운 형들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가.
집사 콕스가 해사하게 웃으며 한스와 함께 기둥에 달라붙어 있었던 사내들을 테라스 반대쪽으로 몰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병사들은 일단 라골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라골이 말했다.
“입꼬리 올리고 치아를 보이십쇼.”
웃으란 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내저 뒤편에 사람 없는 곳으로 향했다.
한스를 비롯한 소대장과 병사들이 뒷짐을 진 채 루펠라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말이야. 웬만하면 이런 일로 부르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저번 달에는 그녀가 짝사랑하는 그레닉의 출처를 묻기 위해 소대장들을 죄 소집했고, 그 전달에도 그레닉이 어디에 있는지 묻기 위해 소집했으며 그레닉이 수도 저택에 있을 땐 그레닉은 훈련이 너무 많다며 소집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소집하면서 웬만하면 이런 일로 부르지 않는다니.
소대장들이면 몰라도 병사들은 한 번도 루펠라에게 불려온 적이 없었다. 병사들이 눈알만 굴려 그녀 뒤쪽에 있는 콕스와 라골을 보았다.
콕스는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왕년에 칡뿌리 좀 씹어본 사람처럼.
“빵 누구야.”
그녀의 말에 한스가 헙, 숨을 들이켰다.
오늘 빵과 관련된 일을 벌인 자는 그뿐이었다.
한스의 반응에 루펠라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음식물 쓰으레기. 쓰으으레기?”
한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엎드려뻗쳤다.
루펠라에게 일러바친 놈은 사람 구실 못할 줄 알라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래도 나만 아는 게 어디야? 오빠가 알았으면 살아 있었겠냐고. 안 그래?”
생각해 보니 다행이었다. 한스는 루펠라에게만 이르고 주군에게 이르지 않은 놈을 죽이진 않고 반병신만 만들기로 하였다.
‘하우벡, 이 새끼.’
분명히 그 자식이었을 거다. 조금 전만 해도 혼자 조리실에 쳐들어온 게 아니라 마크빌 경과 그 휘하의 소대장들까지 불러와서 이 꼴로 만들어 놓았다.
스스로 엎드려뻗친 한스에게 신경을 거둔 그녀는 뒷짐을 진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말세야, 말세. 나 어릴 때는 말이야. 기사들이고 병사들이고 공작 내외께서 함께 계신다 싶으면 그림자도 안 보였다고, 어?”
그야 선대 공작과 공작 부인은 매일같이 전쟁을 벌이셨으니까. 두 분이 마주친다 싶으면 쏜살같이 사라질 수밖에.
“그런데 구경하는 거로도 모자라 방해까지 하면 어떻게 해야겠어? 응, 콕스?”
그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루펠라가 뒤에 있는 콕스에게 물었다.
“물고를 내셔야지요.”
“물고가 뭐지, 라골?”
마찬가지로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라골에게 물었다.
“죽다, 죽이다, 죽여 버린다 정도로 해석 가능합니다.”
헉, 병사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래서야 쓰나. 가문을 위해 물심양면 애쓰는 분들의 목을 몸에서 분리시키거나 가랑이를 찢어버려서야 되겠어? 그냥…….”
루펠라가 츳 하고 혀를 찼다.
“방망이에 달린 두 개의 알을 살포- 시, 그냥 살포- 시 떼는 거로. 그게 낫겠지.”
소대장들과 병사들이 한스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루펠라가 사내들 사이를 쏙쏙 걸어 다니며 한탄을 가장한 말을 쏟아냈다.
“어쩌나, 그렇게 열심히 훈련하고 전쟁에 나갔는데 고자가! 응? 고자가 되겠네! 결혼도 못하고 퇴직금만 끌어안은 채 도색잡지나 보면서 생을 마감하는 거지.”
사내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시정하겠습니다!”
그들을 둘러보던 루펠라가 버럭 소리쳤다.
“하나, 공작 부인이 만든 음식을 먹은 후엔 무조건 미소를 짓는다.”
사내들이 우렁차게 따라 외쳤다.
“미소를 짓는다!”
“둘, 공작 부인이 만든 음식을 먹었을 때 나와야 하는 답은 ‘맛있습니다’이다.”
“맛있습니다!”
“셋, 각하과 공작 부인이 함께 계실 땐 전쟁이 터져도 찾지 않는다.”
“않는다!”
콕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각, 진저와 엘리사는 작은 케이크 한 판을 다 먹고 있었다.
남편은 단 거라면 질색을 하면서 아내가 먹여 준다고 날름날름 받아먹었다.
마지막 조각을 든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팔이 아파요.”
“그럴까 봐 나도 먹여줬잖아.”
엘리사가 그를 노려보았다.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피하다가 가슴 쪽으로 떨어져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남편이 가슴에 떨어진 케이크 조각을 유심히 보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기겁을 하고 막았다.
‘지금 생각하시는 거 말하면 저 집 나갈 거예요.’
진저는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 생각 안 했는데?’
얼굴이 새빨개진 엘리사가 그를 흘겨보았다.
‘너무하는군. 미안하다고 하려 했는데 가출 선언이라니. 옷을 더럽힌 게 그렇게 화가 났나?’
그 말에 엘리사는 헙, 숨을 들이켰다. 주워서 먹겠다고 할까 봐 지레 입을 막은 건데 생각해 보니 귀족으로 태어나 작위까지 이은 그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었다.
물론 진저가 하려는 말은 ‘당신이 정 싫으면 내가……’ 정도의 말이었지만 아내가 너무 미안해하니 아니라고 말도 못 했다.
결국 한 판을 모두 처리한 진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또 무슨 일이신데요…….”
“남편이 아내 얼굴도 못 봐?”
“그렇게 볼 때마다 놀리시니까…….”
진저가 턱을 괴고 아내를 지그시 응시했다.
왜 이렇게 아내만 보면 놀리고 싶은지 모르겠다. 순하디순한 여자가 파르르 떠는 게 귀여워서인지, 아니면 관심을 받고 싶어서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가슴에 초콜릿이 묻었을 때도 그랬다. 매너와 담쌓고 살아왔으나 여성의 몸과 관련된 농담은 추행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당신 가슴에 있어서 더 먹음직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에둘러 놀리려던 건 맞았다. 차라리 아내가 입을 막아준 게 다행이었다.
그는 요새 사춘기 소년 같았다. 여자를 볼 때마다 뭉게뭉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얼뜨기들 말이다.
아내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안 뒤엔 더더욱 조심하는 게 옳았다. 그런데 어째 조절 없이 농담이 나오는 걸까.
그의 표정을 보고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는 아내를 보며 그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늘렸다.
그는 인정하고 말았다. 아내를 놀리려는 게 조금 더 관심을 받고 싶었기 때문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어 혼란스럽긴 했으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는 제 아내였다. 그러니 그녀는 마땅히 그를 가장 신경 써야 했다.
“왜…… 요?”
“뭐가?”
“자꾸 쳐다보시니까…….”
엘리사가 뺨을 문질렀다. 그가 픽 웃으며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톡 튀어나왔던 그녀의 입이 쏙 들어갔다. 머리를 쓰다듬는 이유를 알 텐데 아무 말이 없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 * *
다음 날, 봉사 준비에 여념이 없던 엘리사는 길리안이 저택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달 전부터 짐만 맡겨놓은 채 트리거저에 있었던 그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내려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길리안과 마주했다.
그는 살이 빠져 있었다. 진저가 워낙 화려한 인상이라 그렇지 길리안도 미남이라는 말을 귀에 인이 박히게 듣고 산 남자였다.
살이 빠져서 그런지 이상하게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녀들이 모두 얼굴을 붉힌 채 그를 훔쳐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여성 중 얼굴을 붉히지 않은 건 엘리사가 유일했다.
진저의 얼굴에 익숙해서 그의 미모가 무감한 것도 있지만 본래 그녀는 외모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길리안이 먼저 묵례하자 그녀 또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는 처음보다도 정중한 태도였다.
엘리사도 어렴풋이 남편과 트리거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깥일을 묻는 게 실례라고 생각하여 입을 다물고 있을 뿐 파티에서, 또는 루펠라나 라골의 태도에서도 느껴졌다.
사교계에서 인망 높은 귀부인들은 파티에 엘리사와 트리거 공작가의 여성을 함께 부르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매달 열리는 4공 회의에서 그웬 공작과 트리거 공작이 틀어졌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깥분의 일은 바깥분의 일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으나 그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바깥양반들이 틀어지면 그들의 안 사람끼리도 철천지원수 대하듯 하는 게 대부분의 경우였다.
그 예로 포르테 공작 부인과 데탕스 후작 부인을 들 수 있었다. 그녀들은 남편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로만 보면 으르렁 난리였다.
그러니까 현재 남편과 사이가 좋지 못한 트리거가의 사람은 출입을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하인도 아니고 후계가 직접 공작저를 찾았다.
엘리사는 긴장하고 있었다. 혹시 남편의 허가 없이 출입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길리안은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엘리사의 걱정을 알아채고 미리 진저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짐을 챙기러 왔습니다.”
“아아.”
엘리사는 하녀에게 그의 짐을 챙기도록 지시했다. 하녀들이 길리안의 짐을 챙겨 내려올 동안 상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남편은 연무장에 있었다.
결국 손님을 접대해야 하는 사람은 엘리사였다. 그녀는 소거실에서 길리안과 사소한 한담을 나누었다.
그런데 예상외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트리거 영애가 파혼하지 않는다고요?”
엘리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수도에는 왕세자와 트리거 영애가 파혼한다는 소식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귀족부터 하인에 이르기까지 소문을 옮기고 다녔다.
“예, 예정대로 내년에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어쩐지 저번 주까지는 편지를 보내 언제 왕궁을 찾아주겠느냐고 조르던 왕비가 조용했다.
이전 파티에서 보았던 왕비의 태도로 보건대 이건 트리거 영애 입장에선 축하할 일이 아니었다.
엘리사가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느라 입술을 달싹였다.
“축하해 주시면 기쁠 겁니다.”
길리안의 말에 엘리사가 서둘러 대꾸했다.
“아, 그런 게 아니라…….”
“동생이 무례를 범했다고 들었습니다. 사과의 말을 전해달라더군요.”
‘남편과 무슨 일이 있었구나.’
몸이 바뀌었을 때 무례를 범한 모양이었다. 찝찝한 눈빛을 하긴 했어도 그녀 앞에선 철저히 예의를 지키던 여자였다. 비앙카의 일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사과는 받지 않겠습니다.”
“예?”
“본인의 사과가 아니니까요.”
그녀가 직접 줄리아 트리거의 무례를 겪은 건 아니었지만, 제 몸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면 그건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길리안은 쓰게 웃었다. 한없이 순해 보이는 그웬 공작 부인이 이처럼 단호하게 나올 땐 다른 말로 달랠 수 없었다.
“하지만 트리거 영애의 결혼이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일까. 비틀려 보자면 결혼해서 내 남편에게 손대는 일이 없길 바란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나 티 없는 표정이었다.
“아,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길리안이 화제를 전환했다.
“선물이요?”
“엘킨도스의 회한을 좋아하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초판본을 구했습니다. 저보다 공작 부인에게 의미가 있을 듯하여 가져왔습니다.”
그가 포장한 책을 내밀었다. 엘리사는 예상대로 기뻐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고 책을 확인했다. 커버를 열자 내용이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길리안의 말대로 초판본이 맞는다면 이건 엘킨도스의 글씨가 틀림없었다.
“초판 스무 권을 모두 손으로 썼다더니 정말인가 보군요.”
“예.”
그녀는 한 자, 한 자 손으로 쓸어가며 중얼거렸다.
“이 부분에 힘이 많이 들어갔네요. 저자에게 의미 있는 부분이었나 봐요. 저도 이 부분을 가장 좋아해요.”
뒤파르 부인과 남주인공이 설전을 벌이는 부분이었다.
남자를 어떻게 믿느냐, 네가 나타나 내 딸이 얼마나 불행해졌는지 아느냐고 묻는 뒤파르 부인에게 남주인공은 말했다.
「불행 또한 사랑. 서로가 주는 아픔에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오!」
길리안은 손님을 접대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책에 집중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으십니까?”
“무엇을 이르시는지요?”
“뒤파르 부인에 대한 생각 말입니다. 그녀가 양딸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겁탈당한 뒤파르 부인이 남성을 혐오하여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을 헤어지게 만들었다. 두 주인공 사이에 큰 벽을 세워 그들은 중년의 나이에 재회하고 나서도 한동안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글쎄요. 전 여주인공이 아니라서 뒤파르 부인을 원망했는지 모르겠어요. 원망했다고 보시나요?”
트리거 공작 부인, 그러니까 모친이 겁탈당한 일로 부친과 줄리아, 그리고 그 자신까지 고통받았다.
“잘잘못은 제가 아닌 주인공들이 가려야 하는 거겠죠. 가장 가여운 건 뒤파르 부인이 아닐까요? 고통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으니까.”
그는 줄리아로부터 부모 모두 자식들이 비밀을 알았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부친은 물론이고 모친까지 그간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만약 현실에서 뒤파르 부인과 그 양딸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당신의 삶에 진심으로 찬사를 보낸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모두 삶을 포기했을 만한 고통에도 뒤파르 부인은 훌륭하게 맞선 거니까요.”
일전에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알았다. 그는 진심으로 모친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모친은 처절하게 외로운 밤들을 보냈다.
“경은요? 생각에 변함이 없으신가요?”
“아닙니다. 멋지군요.”
뒤파르 부인도, 그렇게까지 타인을 이해할 줄 아는 당신도.
뒷말을 삼킨 길리안이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다과 준비를 마치고 차를 따르려던 하녀가 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찻물이 넘쳐 테이블 밑으로 흐르고 말았다.
“공작 부인!”
하필이면 엘리사의 다리에 뜨거운 물이 튀고 말았다.
시중을 들고 있던 하녀들과 길리안이 모두 당황하여 엘리사를 살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 했을 때였다.
“엘리사!”
소거실로 들어온 진저가 재빨리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아내의 다리를 살폈다.
치마를 걷어 상태를 보려는데 아내가 치맛자락을 붙든 채 놓아주지 않았다.
“여, 여보…….”
아무리 다쳤다고 해도 다른 남성 앞에서 맨다리를 보일 순 없었다. 그녀는 진저의 손등을 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조금 튄 정도예요.”
아내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한 진저가 어쩔 줄 모르는 콕스에게 버럭 소리쳤다.
“하녀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송구합니다!”
콕스가 허리를 굽혔다. 실수를 저지른 하녀 또한 시퍼런 낯빛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여보.”
길리안을 흘긋 쳐다본 엘리사가 남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손님이 있으니 고용인의 실수에 대해선 추후에 논하겠다는 말이었다.
진저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한참을 아내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잡고 있던 손을 빼려고 하자 그가 힘을 주어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래.”
“고마워요.”
진저를 향해 미소 짓는 공작 부인. 지기는 그런 아내가 걱정스러운지 계속해서 젖은 치마를 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그는 진저가 행복하길 빌었다. 공작 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기분이 이처럼 가라앉는단 말인가.
진저는 아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닥터 테슬러를 호출했다.
엘리사는 손님 앞에서 이러는 게 부끄러운지 그의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괜찮다니까요.”
“내가 안 괜찮아.”
“정말…….”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이 신경 써주는 게 내심 기뻐 보였다.
길리안이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는 닥터 테슬러가 뒤뚱뒤뚱 뛰어올 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엘리사는 테슬러와 그의 여제자를 따라 치료실로 향했다. 행여나 진저가 안아 옮기겠다고 할까 봐 아주 재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그제야 소란이 진정되고 지기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길리안이 먼저 안부를 묻자 진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안과 다르게 진저는 안부를 묻지 않았다. 평소라면 저 새끼는 원래 싹수가 노란 새끼니까, 하고 넘어갈 테지만 오늘은 어쩐지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내 안부를 물어주면 입에 버짐이라도 피냐?”
“죽상을 하고 있는데 물어 뭐해. 사후 세계에 관해서 논하려거든 내 저택 말고 마탑을 찾아라.”
별걸 시비 건다는 투였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길리안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치료실 쪽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께 얘기는 들었다.”
트리거 공작 이야기가 나온 후에야 제대로 된 대화가 시작되었다.
“과거는 모두 잊자고 하셨다지.”
그는 하녀가 새로 내온 차를 마시며 대답을 지체했다.
“네게 많이 고마워하신다. 줄리아의 미련을 끊어준 것을 포함해서. 줄리아는 파혼하지 않고…….”
“다른 얘기.”
“……뭐?”
“트리거 영애에 관한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길리안이 쓰게 웃었다. 그가 냉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년기의 인연까지도 이처럼 칼같이 잘라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줄리아는 모친과 긴 얘기를 나누었다. 죄스럽다는 모친의 말에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매는 이기적이었다. 그저 자신의 상처만 아프고 괴로웠다. 모친이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홀로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친 혹은 남매의 삶과 조금도 관련 없는 그웬 공작 부인이 차라리 더 많이 모친을 이해했다.
닥터 테슬러의 진료를 받고 있던 엘리사에게 사내들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의 곁에 있던 루펠라는 고소하다는 표정이었다.
“오빠와 완전히 끝났으면 좋겠네요.”
연인도, 하다못해 이성도 아닌 사내들에게 끝났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엘리사가 난처한 듯 입꼬리만 조금 올려 웃었다.
“원래 뒤통수 때린 놈과는 상종을 하면 안 되거든요. 오빠는 다른 데선 인간말종이면서 왜 필요할 땐 성인군자인…….”
주절주절 떠들던 루펠라가 헙 숨을 들이켰다. 엘리사는 그날 일을 모르고 있었다. ‘뒤통수?’ 하고 중얼거리는 그녀를 본 루펠라가 화제를 전환했다.
“아, 뭐, 상처, 상처! 그래, 상처는 안 남겠는가.”
테슬러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이게 상처가 남는다면 목욕물에 들어가는 사람 모두 전신이 흘러내릴 겁니다.”
진저의 희번덕거리는 눈도 무서운데 득달같이 달려온 루펠라에 고용인들까지 난리였다.
상처가 안 남겠느냐는 질문은 루펠라의 질문을 포함해 벌써 열 번을 넘게 들었다.
그때, 진료실에 하녀가 들어왔다.
“손님 식사도 함께 준비해 올지 여쭈십니다.”
다른 때라면 남편은 연무장에서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할 테고 자신은 혼자 간단히 먹거나 루펠라와 함께 들었을 터였다.
루펠라가 그놈은 소금 한 바가지 퍼주라 소리쳤으나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손님이 식사를 하실 땐 이전에 먹었든, 배가 불러도 자리를 지키는 게 란델의 관습이었다.
결국 그웬 부부와 길리안, 그리고 루펠라까지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식당 안에서 말을 하는 건 여성들뿐이었다. 사내들은 말없이 식기만 움직였다.
“요새 음식이 괜찮군요.”
“요리장이 바뀌었거든요.”
본래 주방장은 실력은 없으나 카르트가의 사람인 탓에 주방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선대 공작 부인이 사망한 후에도 내저에는 은근히 카르트가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루펠라가 카르트가의 출신이었으므로 선대 공작 부인을 따르는 자들은 그녀의 사후에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엘리사는 내저의 열쇠를 잡은 즉시 각 분야의 장(長)을 선출해 고용인들의 권력 구도를 뒤집었다.
그 과정에서 실력 없는 요리장이 축출되고 실력과 인품을 갖춘 자가 그 자리를 채웠다.
엘리사의 말에 루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파리 같은 놈이었거든요.”
“파리요?”
“파리보다 잘 비빌 걸요? 실력은 형편없으면서.”
엘리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루펠라의 직설적인 말은 곤란할 때보다 신기하고 즐거울 때가 더 많았다.
진저는 사이좋은 시누올케 사이를 보며 픽 웃었다. 그는 카르파초를 덜어 아내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엘리사가 입 모양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나이프를 잡은 길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저렇게 부부가 오붓한 게 눈꼴 시린지 모르겠다.
진저가 물었다.
“내일 일정은?”
“아, 외출을 해야 해요. 내일 4공 부인들끼리 회합이 있거든요.”
그 말에 길리안이 끼어들었다.
“어머님께서 공작 부인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물으시더군요.”
“어머, 그러실 것 없는데.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요.”
“4공 부인 회합엔 첫 참석이라고 들었습니다. 첫 참석 때는 많이들 배려해 주시는 편이니 괘념치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과한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친절을 무조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육류는 피하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레 전했다.
육류는 간을 다 맞춘 상태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아 란델의 센 간에 익숙하지 않은 엘리사는 쉬이 배앓이를 했다.
길리안은 저택에 묵는 동안엔 고기를 잘 먹었던 그녀가 떠올랐다.
“각하와 계실 땐 육류를 잘 드신 것 같았는데요.”
“아, 주방장이 제 음식엔 간을 덜 해줘요.”
“그러십니까? 그럼 요리는 어류로…… 참치를 좋아하셨죠?”
그런 것까지 유심히 본 건가. 진저의 표정이 굳어졌다.
엘리사가 진저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건 각하께서 좋아하는 음식이라…….”
진저는 여상한 표정을 가장해냈다. 그가 본품으로 나온 생선 요리에 가시를 발랐다. 언젠가부터 가시 있는 요리가 나오면 그가 가시를 발라줄 뿐 아니라 생선 살까지 먹기 좋게 잘라주게 되었다.
“그렇군요.”
길리안이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평소와 달리 작위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살을 바르는 족족 아내의 접시에 덜어주는 진저와 그런 진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엘리사를 번갈아 보았다.
계속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 녀석은 뭐든 잘 먹죠. 포크커틀릿도 좋아하고요.”
포크커틀릿은 고기를 자주 취할 수 없는 평민들이 부족한 고기에 빵가루를 더해 먹는 것이다. 귀족들은 그것을 평민들이나 먹는 천박한 음식이라 하여 잘 즐기지 않았다.
엘리사는 진저가 포크커틀릿을 먹거나 찾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남편을 보았다. 어쩐지 남편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좋아하세요?”
“……오해야.”
‘오해라니? 무슨 오해?’
길리안이 부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좋아하잖아. 마담 록산느가 먹여준 포크 커틀릿을 아주 좋아했다던데.”
마담 록산느? 엘리사가 미간을 좁힌 채 길리안을 쳐다보았다.
“4공들끼리 자주 찾는 주점이 있습니다. 마담 록산느라는 미인이 운영하는 주점이죠.”
“록…… 산느가 먹여줬다고요?”
엘리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당신과 결혼 전에 간 거야. 포르테 공이 하도 가자고 하길래.”
“무슨.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 갔잖아. 아버님께서 동행하셨단 걸 들켜서 난리가 났었다고.”
엘리사가 진저를 노려보았다. 저택에 여자를 데려오지 않는다고 고마워했건만 밖에서 만나고 다녔는가 보다.
진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저 새끼가…….’
식탁 밑에서 루펠라의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제 오빠의 장딴지를 걷어찬 그녀가 엘리사의 눈치를 살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늘한 표정이었다.
“어, 언니! 나도 록산느라면 들어봤어요. 포르테 공이 한동안 홀딱 빠져 있었대요. 오빠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걸 거예요. 그렇지?”
루펠라가 다시 한번 진저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래.”
엘리사는 말없이 음식만 입에 넣었다. 진저가 발라준 생선 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길리안이 음흉하게 웃었다.
“이거 말실수를 했나 보군요. 포르테 공과 그녀가 각별한 사이긴 했죠. 아, 기하스엘 토벌 전에 포르테 공과 다퉜다더니 혹시 그것 때문이었나?”
“입 닥쳐.”
진저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포크를 쥔 엘리사의 손마디에 핏기가 없었다. 얼마나 꽉 그러쥐었는지 얼핏 부들부들 떨려 보일 정도였다.
록산느도 그렇지만 일전에 기사들에게서 들었던 하이디가 떠올랐다. 하이디의 엉덩이가 기특하다며 칭찬했던 것도 기하스엘 토벌 전이라던데. 루펠라가 헤프다고 말했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식사가 파했다. 루펠라는 불똥이 튀기 전에 제2저로 도망쳤고, 길리안 또한 짐을 챙긴다며 제가 묵던 방으로 올라갔다.
소거실엔 진저와 엘리사만이 남아있었다. 식후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엘리사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평소와 다르기는 진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납기 그지없는 야수가 주인의 눈치를 살살 보는 대형견이 되어 있었다. 그는 태산같이 밀려 있는 업무도 뒤로한 채 아내의 눈치를 보았다.
아내는 한 시간가량이나 말이 없었다.
‘저 새끼 입을 어떻게 찢어놓지?’
아니, 그보다 아내의 화를 어떻게 풀어줘야 하느냔 말이다. 토라졌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책을 보고 있는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엘리사.”
“…….”
“여보.”
“급한 일 아니시면 나중에 말씀해 주시겠어요?”
“응…….”
엘리사는 그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책장을 넘겼다. 활자가 인쇄된 하얀 종이 위에 일전에 보았던 하이디가 둥둥 떠다녔다.
얼굴도 모르는 록산느는 그녀가 아는 한 가장 퇴폐적이고 매력적인 얼굴로 바뀌어 포크커틀릿을 튀기고 있었다.
그렇게 또 십여 분이 흘렀다. 진저는 여전히 아내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엘리사는 계속해서 화가 축적되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진저가 화색이 되어 궁금한 게 무엇인지 물었다.
“록산느는 어디가 기특한가요?”
“응?”
“버켄 주점의 하이디는 엉덩이가 기특했는데 록산느는 어디가 기특하냐고요.”
“…….”
진저는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수그렸다. 아내에게 버켄 주점의 하이디를 운운한 녀석이 걸리기만 하면 척추를 접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가슴?”
“…….”
“가슴인가 보군요.”
“영감탱이들이 하도 먹으라고 성화여서…….”
“성화에 넘어가실 분이던가요.”
“내가 의외로 예의를 깍듯하게 지켜.”
탁! 책을 소리 나게 덮은 아내가 자신과 눈을 맞추었다.
농담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진저는 평생 처음 겪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몰라 애가 닳았다.
풍속 주점도 아니고 그냥 술을 마시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간 것도 아니지 않은가.
포르테 영감탱이가 이럴 때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얼마나 조르던지 차라리 한 번 가주고 치워 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던 것뿐이었다.
“올라가 볼게요.”
엘리사가 몸을 일으키자 마음이 급해졌다.
“난 이제 당신이 아닌 다른 여성은 눈에 안 들어와!”
싸늘하던 엘리사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요?”
그러자 이번엔 진저의 말문이 막혔다. 그도 왜인지 알 수 없었다.
진저가 답을 하지 못하자 엘리사가 그를 맹렬히 노려보더니 책을 챙겨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대체 뭐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다음 날 오전, 엘리사는 일정대로 4공 부인의 모임에 참석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트라노이 부인과 트리거 부인이 가볍게 묵례하자 엘리사 또한 고개를 숙였다.
트라노이 부인과는 모임 때마다 만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지만 트리거 공작 부인과는 오가다 마주친 게 다였다.
이렇게 본격적인 대화 자리가 마련된 건 처음이라 엘리사는 살짝 긴장을 한 상태였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인자한 인상의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엘리사가 착석하자마자 차와 다과 등을 챙겨주었다.
그녀는 엘리사에게 큰 부채감이 있었다. 남편으로부터 그웬 공작저에서 일어났던 일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말했다. 그웬 공작 부인에게 진저가 자신의 사위가 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노라고.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그녀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 단호하게 말했다고.
실제로 트리거 공작이 대화를 나눈 상대는 엘리사와 몸이 바뀐 진저였으나 트리거 공작 내외가 진상을 알 리 없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엘리사를 범상치 않은 기질의 여성이라 보았다.
만약 정말 그웬 공작 부인이 딸의 출생과 제 일을 알고 있다면 무조건 무릎을 굽히고 사죄해야 했다. 그게 가문을 위한 일이고 나아가 트리거 공작 부인, 줄리아 트리거를 위한 일이었다.
도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남편이 딸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감수하였다는 걸 알고 줄리아는 절망했다.
제가 그런 일을 당해서, 조심하지 못해서, 딸에게 제 죄를 물려주어서. 그녀는 엘리사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웬 공작 부인은 당연히 화를 내야 했다. 치를 떨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어떤 말도 남편을 빼앗겠다는 선언을 덮을 수 없겠지만, 진심을 담은 사죄만큼은 건네고 싶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이 작은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란델의 디저트를 좋아한다면서요?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디저트라고 해서 가져와 봤어요.”
그녀가 엘리사 앞에 사탕가루가 묻은 마카롱을 놓아주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종알거렸다.
“어머, 파라곤의 마카롱이죠? 굉장히 유명한 마카롱이에요. 하루에 딱 열 세트만 판매한다더라고요.”
란델에서 가장 유명한 파티시에 파라곤. 그에겐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타국의 귀빈이 그의 마카롱을 맛보고 싶어 했는데도 모두 판매되었다고 부득불 거절했다는 것이다.
“오슈 공주일 거예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의 말에 엘리사가 되물었다.
“오슈 공주요?”
“거절당했다는 귀빈 말이에요.”
오슈 공주라면 엘리사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오슈 공주의 모국인 플라이터 국이 그란디아처럼 성국을 따르는 나라라 몇 번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성질이 보통이 아닌 여자였다. 손질한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공주와 지체 높은 귀부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시녀의 뺨을 때릴 정도로 난폭했다.
“분노한 오슈 공주가 팔목을 자르겠다고 했는데도 절대 만들 수 없다고 했대요. 그럼 오랜 시간 예약을 기다린 손님들은 뭐가 되냐면서.”
“굉장하네요.”
“폐하께서 파라곤의 디저트를 몹시 좋아하셔서 망정이지 정말 팔목이 잘릴 뻔했다니까요. 이건 지금 예약하면 3개월 후에나 받을 수 있는 귀한 디저트예요.”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트리거 공작 부인이 다시 한번 마카롱을 권했다.
소문대로 정말 훌륭한 맛이었다. 보통 마카롱은 너무 달게 마련인데 파라곤의 마카롱은 단맛이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다.
“어머.”
엘리사가 입을 가렸다. 굉장히 특이한 식감이었다. 입안에서는 쫀득거리는데 목구멍에선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쫀득한 게 금세 녹아버리네요.”
“그렇죠?”
젊은 귀부인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트리거 공작 부인이 입술을 늘렸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세 여성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담소를 나눴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내내 부드러운 표정으로 엘리사를 응시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임신 후엔 왜 이렇게 자주 화장실을 가게 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그녀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대화를 주도하던 이가 자리를 비우자 테이블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엘리사는 눈치를 보았다. 남편과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르니 쉬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트리거 공작 부인이었다.
“남편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고 싶어요.”
“……네?”
“본래 그리 무례한 분은 아니십니다. 딸을 아끼는 마음이 지나쳐…… 무슨 변명도 부인의 마음을 달랠 순 없겠지만, 사죄만큼은 하게 해주세요.”
공작 부인쯤 되는 여성이 이토록 진솔하게 사과하는데 계속해서 입을 다물 순 없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 정도의 잘못을 했다는 것이다. 대체 그 잘못이 무엇이기에…….
엘리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트리거 경이 따님의 사죄를 대신 전하더군요.”
“예…….”
“저는 사과란 당사자가 해야 하는 거로 생각해요. 부인께서 고개 숙일 일이 아닙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엘리사가 남은 마카롱을 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호의로 받아들일게요.”
엘리사가 미소를 짓자 트리거 공작 부인도 허탈한 듯 실소를 흘렸다.
정말이지 범상치 않은 여성이었다. 용서는 하지 않되 당사자가 아닌 자신은 남편, 자식과는 따로 떼서 보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가문엔 좋은 일이 아닐지 몰라도 트리거 공작 부인에겐 위로가 되었다.
사과란 당사자가 해야 하는 것. 그래, 그녀가 고개 숙일 일은 아니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피해자였다.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당할 거라 생각지 않은 것이 죄라면 죄일 것이나 절대 그녀 스스로 바란 일이 아니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이 그녀에게 이처럼 호의를 가진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그녀의 아들은 말했다.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 불효를 이해해 달라고.
‘저는 어머니 인생에 또 다른 가해자였군요.’
그웬 공작 부인과 견해를 나누고 나서야 어머니는 몹쓸 재해의 피해자인 것을 깨달았노라 말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자식에게 나는 겁탈당했노라 말하는 건 혀를 깨물고 싶은 수치심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치를 견디고 나니 숨통이 트였다. 긴긴밤 외로움에 사무쳐 가슴을 쥐어뜯지 않아도 되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이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상처 하나 없이 고운 귀부인의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엘리사는 이상한 부끄러움에 아랫입술을 물었다. 어머니의 손은 상처투성이였다. 왕비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투박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의 손은 어머니의 것과는 전혀 달랐으나 온기만큼은 기억 속 어머니의 손과 똑 닮았다.
포르테 공작 부인과 함께 들어오던 트라노이 부인이 그 광경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모나지 않은 레이디에겐 친절한 분이었지만 이렇게 정감 있게 구는 사람은 아니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활짝 웃으며 말을 붙이려 했을 때였다.
포르테 공작 부인이 오자마자 냉수를 찾았다. 그녀는 중년을 넘어 노년에 들어서는 나이에도 기품을 잃지 않는 여성이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함께 앉으며 연유를 물었다.
“풍기문란죄 말입니다. 왜 이렇게 통과가 안 되는 거죠?!”
그녀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풍기문란죄라면 귀족의 품위를 훼손시킬 수 있는 주점이나 매음굴을 수도에서 몰아내는 법이다. 작년에만 아홉 번 넘게 상정되었으나 귀족 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이 말했다.
“그 양반이 그 양반이니까요. 다들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있으니 가결할 리가 있나요.”
풍기 문란죄는 모든 귀부인이 환영하는 안건이었다. 남편을 밖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부인이 어디 있으랴.
매일같이 여성들을 끼고 술을 퍼마시는 작자들을 꼴 보기 싫어하는 아내는 차고 넘쳤다.
“록산느 그것이 또 우리 집 양반과 나들이를 갔답니다. 배도 사달라고 했대요!”
트라노이 부인이 ‘어머!’ 하고 소리치며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꽃이 피면 배 타고 꽃놀이를 가자기에 이상해서 부관을 캐봤죠. 아니나 다를까!”
“저번엔 폴리 백작 부인과 한바탕 소란을 벌이던데.”
“그러고도 안 잡혀가니 문제지요! 다들 록산느, 록산느! 그 계집 주점에서 술 받아먹은 놈들이 얼마나 많기에!”
트리거 공작 부인도 눈살을 찌푸렸다. 문란한 주점이라면 근처에도 가지 않는 남편이 록산느의 주점에 갔다가 걸린 게 두 번째였다.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리사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록산느라면 어제 그녀의 머리를 아프게 한 주범들 중 하나이지 않은가.
4공 부인 모두가 표정이 안 좋았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도 록산느로 인해 남편과 다툰 적이 있었다.
“저도 몇 달 전에 다툰 적이 있어요.”
“부인은 왜요? 부군과 다복하기로는 리스트럼(란델의 수도)에 따를 사람이 없잖아요.”
“다 오해예요. 얼마나 속을 뒤집는지 몰라요. 임신 초에 살구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집사에게 부탁하라던 분이 다음 날 살구를 가져오신 게 아니겠어요? 웬 거냐고 물으니까 록산느가 주었대요. 그 자리에서 버렸죠.”
“하여간 사내들이란!”
“그러니까요! 제가 그걸 먹고 싶겠어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과 포르테 공작 부인의 대화에 트리거 공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임신 중인 부인에게 다른 여자가, 그것도 록산느가 준 살구를 가져왔다고요?”
“회합을 록산느의 주점에서 했대요. 사회생활하는 남자는 어쩔 수 없다고 달래는데……. 말이 돼요? 다른 번듯한 회합장 두고 왜 하필 주점에서 회합을 하는데요?”
“모이기만 하면 2차, 3차 신이 나죠.”
엘리사는 그녀들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었다.
음식이나 술 문화가 발달해서 그런가. 란델은 그란디아보다 주점이 발달해 있었다.
‘이쪽 문화가 발달하면 이런 문제점이 생기는구나.’
진저가 록산느에게서 받아온 음식을 제게 준다고 하면 자신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엘리사의 표정이 시무룩해지자 포르테 공작 부인이 건수를 잡은 것처럼 달려들었다.
“그웬은 무슨 일 없었나요?”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트리거 공작 부인이 설명했다. 공작 부인끼리 모이는 자리가 많으니 호칭만 부르면 누군지 몰라 가문의 성만 간략히 부르기로 하였다.
“아, 그런 건 아닌데…….”
“뭐, 그웬 공작은 이런 곳에 자주 출입하지 않으니……. 그래도 록산느는 알지요? 부인과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그 계집의 주점을 찾았다던데.”
“네…….”
엘리사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그 일이라면 4공 부인 모두가 알고 있는 바였다. 그웬 공작의 총각 파티를 한다고 록산느의 주점에 4공이 모두 함께 갔다지 않는가.
“불결해!”
포르테 공작 부인이 소리치자,
“그러니까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동조하고,
“캐물으면 항상 그렇게 끌려갔대요. 다른 데선 그렇게 단호한 양반이.”
트리거 공작 부인이 투덜거리자,
“맞아요…….”
엘리사가 동의했다.
부인들은 각자의 남편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록산느 그게 얼마나 여우인지 몰라요. 트리거는 모르나요?”
“뭘요?”
“술값을 한사코 거절하더니 배웅한다면서 따라 나와선 꽃 한 송이 사달라고 그렇게 졸랐대요.”
“네?! 우리 남편이요?! 그래서 사줬다던가요?!”
포르테 공작 부인이 그녀를 제외한 4공 부인들과 눈을 맞췄다.
“다요, 다!”
부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그웬 공작은 거절했다네요. 그래서 트라노이 공작이 두 송이를 사줬다고…….”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트리거 공작 부인도 함께 몸을 일으켰다.
“저도.”
포르테 공작 부인이 도착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포르테 공작 부인은 전혀 개의치 않고 손을 흔들었다.
어쩌다 보니 엘리사도 그녀들에게 휩쓸려 마차에 올랐다.
다른 공작 부인들이 ‘꽃’, ‘사줬다’, ‘내 남편’에 눈앞이 벌겋게 변한 것과 달리 그녀는 침착했다. 저택에 돌아와서도 언짢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꽃을 사주지 않았대.’
방으로 돌아가던 엘리사가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게 마음에 든 건 아닌가 봐.’
진저는 제 팔 안의 사람에겐 다정했다. 자신에게만 해도 말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사주지 않는가. 요새는 그녀를 위해 자주 디저트를 사다 주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따라 기분 좋은 마님을 보는 이들의 시선 또한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어제부터 아내의 눈치를 보던 진저도 그녀의 기분이 나아졌음을 깨달았다. 은근슬쩍 다가오는 게 사고 치고 기죽어 있던 강아지, 아니, 개 같았다.
아내의 반경 3m 안에 들어갔다.
아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아내의 반경 1m 안에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무릎이 아내의 치마를 스쳤다.
이 또한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기는커녕 잘 다녀왔노라 귀가 인사까지 했다. 진저의 입매가 흐물흐물 풀렸다.
진저는 아내의 방 응접실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엘리사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고 그는 즐겁게 아내와의 대화를 기다렸다.
곧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응접실로 나섰다.
“망구들이 괴롭히진 않았어?”
“망구라니요. 다들 교양 있는 귀부인이셨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포르테 공작 부인은 깐깐한 노인네라고. 며느리를 쥐 잡듯이 잡는다던데.”
“친절하게 대해 주셨어요.”
그는 남의 일엔 돈을 쥐어준다고 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남의 고부지간 이야기가 나온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엘리사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남편을 위해 귀부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그래서 자리가 일찍 파했어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마차를 타면서도 이를 악물고 있었다. 간혹 ‘죽었어’, ‘꽃? 꼬옻?’ 하고 중얼거렸다.
트리거 공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처럼 씨근덕대진 않았으나 얼굴이 새빨갰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진저가 픽 실소를 흘렸다.
마담 록산느가 얼마나 야살을 잘 떨던지 여자라면 아내밖에 모르던 트리거 공작까지 쩔쩔맬 정도였다.
‘아이, 꽃 한 송이인 걸요. 정 아니 사주시겠다면 한 번 안아주셔요.’
트리거 공작의 허리에 매달리며 찡긋 눈을 감는 모습에서 사내들이 열변을 토하는 ‘30대 여성의 농익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나는 안 사줬어.”
아주 단호한 말투였다. 엘리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요. 트라노이 공이 당신 몫까지 두 송이를 사주었다면서요.”
진저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성, 이성을 떠나 제게 치근덕대는 사람을 싫어했다.
무엇보다 그는 검을 쓰는 자들에게 일정 간격을 유지하지 않는 이들을 무지하다고 여겼다.
훈련된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반응 속도가 빨라서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접촉을 한 자는 목이 꺾일 수도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다른 공작들에 이어 진저에게까지 치근덕거리는 록산느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읽은 트라노이 공작이 나선 것이다.
트라노이 공작은 대뜸 ‘내가 두 송이 사주지!’ 하고 소리쳤다.
그 일로 트라노이 공작이 몹시 곤란해졌으나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애초에 유부남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에게 꽃을 사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당시 진저는 유부남이란 이유로 록산느에게 꽃을 사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그만은 록산느에게 꽃을 사주지 않았다. 그는 태세 전환이 빠른 남자였다.
“그래서?”
“네?”
“잘한 거냐고 묻는 거야.”
“아, 네. 잘…… 하셨어요.”
“논공행상이라는 말이 왜 있어?”
엘리사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왕도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잖아.”
“……그런데요?”
“칭찬받을 일을 했으면 상을 줘야지.”
진저는 몹시 뻔뻔한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 전에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남자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무얼 원하시는데요?”
진저는 고민을 시작했다.
병사들이 노가리를 깔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마누라쟁이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헛소리가 이제 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병사들은 말했다. 선선한 날에 마누라쟁이의 두툼한 허벅지를 베고 누우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고.
그의 아내는 허벅지가 두툼하지 않으니 벨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아침에 들었던 아무개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지지고 볶아도 귀가 간지럽다고 하니까 귀이개를 가지고 오더라고. 이래서 자식새끼 없인 살아도 부인 없인 못 산다는 거야.’
아내의 다리를 유심히 보았다. 엘리사가 불안한 얼굴로 제 허벅지와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왜…… 요?”
“요새 귀가 간지러워.”
“……싸우셨나요?”
“아니.”
“아니면 병사들에게 힘든 훈련을 시키셨다든가.”
“아니.”
“사소한 언쟁이라도…….”
“무슨 소리하는 거야, 당신?”
욕을 먹으면 귀가 간지럽다지 않은가. 눈빛으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차린 그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이 사람은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아니야.”
어쩐지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엘리사가 그럼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도 전에 몸을 일으킨 그가 아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그녀의 허벅지를 답삭 베고 누워 버렸다.
귀를 파달라고 하면 아예 청력을 잃게 만들 것 같았다. 아내는 다 좋은데 너무 성실한 게 문제였다. 건드려선 안 될 부분까지 깨끗하게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아내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무릎에 두었던 손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허둥거리다가 가슴 앞에서 멈추고 주먹을 꽉 쥐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
진저가 자세를 고쳤다. 천장을 향해 정자세를 취한 그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자 머리에 무언가가 조심스레 닿는 것이 느껴졌다.
진저의 붉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엘리사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촉감이 좋았다.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워서 만질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접촉은 언제나 불쾌했는데 아내가 머리를 만지는 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되레 졸음이 쏟아질 정도로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웬 부부가 한갓진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 시각, 진저를 제외한 공작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었다.
트라노이 공작은 울음보를 터뜨린 아내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임신 후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극과 극을 오갔다.
여신처럼 자비롭다가도 사소한 것 하나에 틀어져 퉁명스레 변했다.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침에만 해도 그웬 공작 부인과 만난다며 기뻐하던 아내가 모임이 파할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들어와선 제 앞에서 눈물을 터뜨렸다.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그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죄인이 되었다.
트라노이 공작은 잽싸게 두 손바닥을 붙였다.
“내가 잘못했소.”
한참 앙앙 울던 그녀가 울음을 뚝 그치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뭘요?”
“그러니까…… 약속을 못 지켜서? 어제 아기 옷을 함께 보자고 했는데 새벽이 다 돼서야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소. 그런데 그건 정말 회의가 늦게 끝나서……!”
“아니에요!”
“그럼 옷이 작은 것 같다고 해서? 그것도 이유가 있었소. 나는 당신이 저택에선 편하게 지내길 바라서…….”
“아니라고요!”
‘그럼 대체 뭔데!’
제가 점쟁이라도 된단 말인가. 알려주지 않는데 어떻게 이유를 알라고……. 트라노이 공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겐 꽃 한 송이 사주지 않으셨으면서!”
“꽃?”
트라노이 공작이 되묻자 공작 부인이 크게 발을 굴렀다.
“록산느에겐 무슨 꽃을 사주신 거죠? 그것도 두 송이나!”
‘헉.’
공작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마부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놓았는데.
남편을 노려보던 공작 부인이 씩씩거리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잠깐만 부인! 그건 그웬 공작이 무슨 일을 낼까 봐! 내 말 좀 들……!”
쾅!
공작 부인이 소리 내어 문을 닫더니 걸쇠까지 걸어버렸다.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머리를 감쌌다.
“임신한 아내에겐 꽃다발 하나 없던 양반이 주점 마담에겐 꽃을 두 송이나 사줬으니.”
그곳을 지나던 공작의 누이, 칸나가 츳츳 혀를 찼다.
트라노이 부인의 방에선 밤늦도록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났다. 가뜩이나 임신 때문에 감정 조절이 어려운데 남편이 서운하게 하니 우울함을 떨칠 수 없었다.
트라노이 공작과 함께 있던 칸나가 세 번째로 집사를 불렀다.
“아직 울고 계시더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식사도 물리고 저녁 내내 눈물 바람이었다.
“이러다 아기씨에게까지 무리가 갈까 우려됩니다.”
칸나가 우는 소리를 하는 집사를 엄히 다그쳤다.
“마님 걱정보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씨 걱정이 먼저이냐.”
“소, 송구합니다.”
집사가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칸나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어 집사를 내보내고 제 오빠를 노려보았다.
“어쩔 거예요?”
“…….”
“손이 발이 되게 빌던가, 못 하겠으면 이 사단을 만든 록산느의 머리채라도 끌고 오던가!”
“신사가 되어 여성의 머리를 어찌……. 게다가 꽃 한 송이 때문에 사람의 머리채를 잡을 순 없지 않느냐…….”
“꽃 한 송이 때문에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건 되고요? 애초에 딱 거절하셨으면 이런 일도 없지요. 남에게 세상에 둘도 없이 좋은 사내면 뭐 해요. 아내에겐 환불하고 싶은 못난 사내인데. 저러다 새언니 다 죽겠어요.”
칸나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트라노이 공작이 깊게 한숨을 내쉰 후 몸을 일으켰다.
칸나는 문을 나서는 제 오빠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트라노이 공작이 아내의 방문을 두드렸다. 콩콩 노크 소리에 흑흑 하는 울음소리가 멎었다.
“나요.”
“록산느에게나 가셔요. 귀찮은 부인 뭐 예쁘다고 오셨어요.”
날카로운 어투에 공작이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당신이 귀찮다니. 난 한 번도 그리 생각한 적이 없소.”
“…….”
“서운하다는 것 알고 있소. 내가 당신에게 너무 무심했지.”
“…….”
“록산느에게 마음이 있어서 꽃을 사준 게 아니오. 그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소.”
“그것 때문에 서운한 게 아니에요!”
방 안에서 빽 고함이 터져 나왔다. 문고리를 잡았던 그의 손이 흠칫 오므라들었다.
“당신은 항상 남에게만 좋은 사람이죠!”
칸나가 했던 말과 같았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훌쩍거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여자에게도 다정하고……. 그게 절 얼마나 불안하게 하는지 아세요?”
공작이 침음을 흘렸다. 서운한 게 이렇게 많았었나. 항상 웃는 낯이라 이렇게 많은 서운함이 쌓여있는지 몰랐다.
공작과 트라노이 부인은 비슷한 집안에 비슷한 또래로 부부가 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고백을 한 적도, 서로 속내를 털어놓은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공작에게 아내는 당연한 사람이 아닌 소중한 사람이었다. 결혼식을 하던 날엔 속으로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과 연을 닿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나는 모르는 게 많은 남자요.”
“란델의 지략가가 모르는 것도 있더이까! 왜 하필 부부 문제에서만 백치인-”
“나는 백치가 맞소.”
“…….”
“그러니 부인이 내게 알려주면 안 되겠소?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고, 어느 것에 서운함을 느끼고, 어느 것에 기뻐하는지.”
“…….”
“부인에게는 답답한 말이겠지만, 사실 조금은 기뻐.”
“…….”
“목소리를 높이는 당신을 보게 되어서.”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방 안의 눈물 소리가 멎었다.
트라노이 공작이 문고리를 잡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식사는 해요. 당신이 걱정돼.”
공작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등을 돌리려 할 무렵,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부-”
반갑게 그녀를 부르려 했던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아내의 눈엔 아직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는 말없이 아내를 안아주었다.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요.”
그녀가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매번 저만 속앓이를 하고…….”
“그건 오해요. 나도 당신 때문에 속이 타.”
“제가 화를 내서요?”
트라노이 공작이 한쪽 눈을 찌푸리고 픽 웃었다.
“화가 난 당신이 귀여워서 안고 싶거든. 욕해도 좋소.”
공작 부인은 피,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방문 앞에서 한 발 물러났다. 들어와도 좋다는 말이었다.
이렇다. 여자는 거창한 어떤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다시는 다른 여자와 말을 섞지 않겠다, 눈도 마주치지 않겠다’ 하는 신뢰 없는 거짓말이 아니라 다정한 말 한 마디를 바랐다.
트라노이 공작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잔뜩 울어서 그런지 베갯잇이 젖어 있었다.
그녀를 눕힌 그가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깟 꽃, 당신을 위해서라면 천 송이, 만 송이라도 직접 베어오리다.”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게 이 목소리 때문이었다. 낮고 달콤한 저음.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다.
그는 눈물로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직 서운한 게 남아 있는지 제 눈을 피한다. 그 얼굴이 귀여워서 픽 실소가 흘렸다.
“배가 고프진 않소?”
그의 손이 동그랗게 오른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다정한 시선은 오랜만이라 가슴이 설렌다. 주린 배가 잊힐 정도로.
부부의 시선이 묘하게 얽혔다. 원을 그리며 움직이던 그의 손이 느려졌다. 배를 가린 레이스를 걷어내자 홑겹 슬립이 드러났다.
“일전의 관계도 괜찮았으니 오늘도…….”
그녀가 턱을 목 안으로 수그렸다.
“……네.”
그가 아내의 위로 올라탔다. 복부에 제 아이를 품어 동그랗게 부푼 배가 맞닿았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공작 부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아이를 품은 몸이 보기 싫다는 걸까. 생각해 보니 임신한 뒤로 관계를 가질 때면 항상 미적지근하게 굴었다.
“왜요? 아이를 가진 몸은 싫으십니까?”
그녀의 말투가 다시 뾰족해졌다.
“그게 아니라…….”
그가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꼭 관람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
“그, 그런 말씀을…….”
그가 그녀의 배꼽에 입을 맞췄다.
“네가 너무 일찍 찾아와 아비를 부끄럽게 하는구나. 오늘 밤은 아비의 시간이니 눈을 꼭 감고 있거라.”
공작 부인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언제나 점잖던 제 남편이 맞는지 모르겠다.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슬슬 가슴골로 내려왔다. 공작 부인의 가슴은 평균보다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임신을 한 후로는 손 하나에 가득 잡혔다.
낮에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신사적인 남자가 밤엔 송곳니를 드러낸 야수 같다는 걸 록산느는 모를 거다. 공작 부인은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불편하오?”
“조금…….”
허리를 조금만 내려도 배가 짓눌릴 것 같았다. 젖꼭지를 지분거리던 손이 천천히 허리로 내려왔다. 그는 아내의 등허리를 감싸고 번쩍 몸을 뒤집었다. 놀란 그녀가 시트를 잡았다.
그녀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그의 입술이 가랑이 사이를 더듬었다. 그의 혀가 질을 가리고 있는 음부의 얇은 점막을 따라 움직였다.
“하으…….”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온다. 남편은 혀를 단단하게 세워 안쪽까지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약한 점막이 공격당하자 몸은 단단하고 뜨거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주름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것을 혀끝으로 문지르며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녀의 음부가 축축이 젖었을 무렵, 그는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었다. 거대하게 부푼 성기를 아내의 음부에 붙였다. 그의 성기가 그녀의 음부를 스칠 때마다 셔츠가 나풀거렸다.
“이제 괜찮겠소?”
아주 낮고 위험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대답 대신 교성을 흘렸다. 오랜만에 관계는 욕망을 부채질했다. 제가 아이를 품고 있으며 남편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모두 보고 있다는 건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어서요. 여보, 어서!”
그는 아내의 음란한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녀의 새로운 모습은 단 한 번도 그를 불편케 한 적이 없다. 언제나 가슴이 떨리도록 사랑스러웠다. 특히 잠자리에선 더욱.
그가 엎드린 그녀의 등에 가슴을 붙였다. 등줄기에 흠칫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내의 가슴은 중력에 의해 땅으로 늘어졌다. 덕분에 정상위 때보다 더 부드러웠다. 그가 한 손으로 아내의 가슴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강하게 껴안았다.
삽입을 기다리는 음부가 옴짝옴짝 움직였다.
그게 아니야.
안에 당신의 것을 넣어줘요.
낯부끄러운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그의 성기가 단숨에 음부를 파고들었다.
쿡. 쿡. 성기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을 찾기 위해 내부를 헤집었다. 그의 것이 내벽을 쑤실 때마다 교성을 참을 수 없었다.
“아흐흑, 아!”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자신의 영역을 탐색하는 호랑이처럼, 혹은 씨를 뿌릴 곳을 찾는 농부처럼.
슬렁슬렁 빠졌다 들어오는 성기 때문에 그녀는 미칠 지경이었다. 더 세게, 더 강하게 자신을 몰아붙여주길 바랐다.
“흐윽, 싫어요, 싫어! 더!”
기어이 보채는 말이 튀어나왔다. 목덜미에 키스를 퍼붓고 있던 그의 입에서 푸스스 날숨이 새어 나온다. 자신은 낯부끄러운데 픽픽 웃고만 있는 남편이 얄미워 그 대신에 시트를 비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매만졌다. 가랑이 사이를 흉흉하게 침범하고 있는 남자라곤 믿을 수 없는 다정함이었다. 그가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
“아앙!”
그녀가 바라는 대로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트리거 공작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내는 저택에 돌아와서도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더니 저녁 식사마저 거부했다.
걱정되는 마음에 아내를 찾은 트리거 공작은 베개로 맞아야 했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당장 나가라는 소리를 들은 그는 울상이 되어 소거실로 향했다.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남매는 황당한 표정의 부친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공작이 길리안과 줄리아를 붙잡고 연유를 캐물었다.
너희들 어머니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냐. 공작의 물음에도 남매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더니 잘 생각해 보시라는 말과 함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처럼 어물쩍 넘어가주지 않았다. 트리거 공작은 며칠이나 서재에서 쪽잠을 청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