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지나간 마차는 돌아오지 않는다 (13/31)

    11장 지나간 마차는 돌아오지 않는다

    진저가 엘리사의 손을 잡은 이후로 줄리아는 며칠을 꼬박 앓았다.

    잠 속으로 도피하였으나 꿈에서마저 그가 다른 여자의 손을 잡는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였던가.

    그는 애초에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자신과 마음을 나눌 때조차 사랑임을 부정했다.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여자에게 다정히 대하는 건 그저 가장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치미는 토기를 참을 수 없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속을 게워냈다.

    줄리아가 앓는 동안 길리안은 트리거저에서 머물렀다.

    동생은 절벽 끝에 매달려 있었다. 눈을 떼면 진저를 찾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노라 애원할 것 같았다.

    길리안은 줄리아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를 붙들었다.

    ‘그 녀석은 할 만큼 했어. 검을 맞고도 우리를 용서했다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이미 옆자리엔 네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으니까.’

    그 말이 동생을 더욱 괴롭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길리안은 모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남매에겐 죄가 없었다. 아니, 가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전까진 죄가 없었다.

    진저를 매정하게 몰아붙였던 그때부터 남매는 죄인이 되었다.

    그마저도 감당하지 않으면 괴물이 될 터였다. 이건 남매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죄업이었다.

    병상에서 일어난 그녀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건 며칠 내내 앓았던 속병보다 더한 일이었다.

    왕세자는 모의 전투 시상식에서의 일이 적힌 보고서를 내밀었다.

    ‘이래서야 쓰나. 신중해야지 않겠소?’

    그는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안색의 약혼녀를 안쓰럽게 여기지 않았다.

    ‘아직은 내 사람이라는 걸 명심해야 할 거요.’

    아직은. 그 말인즉 소용을 다하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물었다.

    ‘제가 전하께 무얼 잘못했나요.’

    그의 여자로 살며 수백, 수천 번을 생각했던 말이었다.

    대체 무얼 그리 잘못하였기에 이같이 참담한 모멸감을 안겨주는가.

    시퍼런 안광을 보이는 그녀에게 그는 말했다.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점.’

    약혼식 내내 그의 얼굴에서 다른 사내를 찾으려고 한 점, 그에게 안기면서도 다른 사내를 그린 점, 그리하여 일국의 왕세자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감을 선사한 점.

    그리 절절하게 원하는 사내가 있다면 오지 말았어야지. 희망을 주지 말았어야지.

    그녀의 가장 큰 과오는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 것이었다.

    그는 이 모진 약혼녀에게 절대 이 사실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졸렬하다 비난받더라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절대 진심을 말하지 않으리라.

    기어코 첫사랑의 눈에서 눈물을 뽑아낸 그는 속으로 조소했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왕궁을 나선 줄리아는 예감했다. 이제 더 이상 기댈 것이 없었다.

    무사히 왕비가 되더라도 왕의 애정을 받지 못한다면, 아니, 동등한 입장일 수 없다면 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 나는 너를 버렸을까.’

    이리 망가질 줄 알았더라면 절대 진저를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길리안의 말을 떠올렸다.

    정말? 정말 그럴까? 아직은 기회가 남지 않았을까?

    그녀가 바라 마지않는 자리에서 다른 여자가 웃고 있었다. 진저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행복을 빌어주었을 터였다.

    결혼한다는 말에도 이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되레 평생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할 그의 여자를 안타깝게 여겼다.

    줄리아는 그 여자가 궁금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기에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되었던 눈빛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그때, 그녀의 시야에 파티 초대장이 들어왔다.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조차 전하지 않았다.

    ‘그웬 공작 부인이 참석한다고 했지.’

    다시 한번 보고 오자. 보기만 하자. 보는 것은 죄가 아니니까.

    그래서 줄리아는 파티에 참석했다.

    소소한 테이블 파티였으나 참석자들은 대단한 가문의 안주인들이었다.

    미혼의 신분으로 참석한 영애들은 모두 권력자들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줄리아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이들을 대충 상대하며 문을 주시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웬 공작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진저와 줄리아의 시선이 부딪쳤다. 줄리아는 사람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꼭 참석해야 하는 파티 외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욱이 이 테이블 파티에 그웬 공작 부인이, 아내가 참석한다는 건 수도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녀를 목적으로 초대를 청한 여성들도 있을 정도였다.

    진저는 줄리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어요?”

    몹시 반갑다는 투였다.

    트라노이 부인은 아내가 특별히 친절하게 대해 달라 부탁한 여자였다.

    진저도 그녀의 남편인 트라노이 공작과 제법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4공 중엔 가장 나이가 비슷한 데다, 가장 수더분한 자였다.

    트라노이 부부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사람을 편하게 대해주는 점은 판에 찍어낸 듯 똑같았다.

    진저는 애써 미소 지었다. 하겠다고 했으니 해야지. 안 하던 짓을 하다 보니 아무리 아내의 몸이라도 입가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진저는 파티 내내 트라노이 부인과 함께 있었다.

    화제는 여러 가지였는데 가장 주의 깊게 들었던 건 ‘임신 후 트라노이 공작의 태도 변화’였다.

    “요새는 함께 잠도 자지 않는다니까요.”

    그야 임신을 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진저가 눈썹을 실룩였다.

    “태중의 아이가 있으니 잠자리는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 그 잠자리 말고요. 그냥 잠이요.”

    트라노이 부인은 조금 쑥스럽다는 듯 종알거렸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꼭 남편의 팔을 베고 잤는데 임신한 후로는 한 달에 한 번도 어렵다고 했다.

    “남자들은 임신한 부인이 징그러워 보인다면서요?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진저는 트라노이 공작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허벅지를 비틀어 가며 참는 것도 이제 슬슬 한계라고 했다.

    사실 안정된 시기에 들어서면 부부의 잠자리는 태아 발달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건 남성들이 알기 어려운 지식이었다.

    임신을 하면 예민해지니 괜히 건드렸다간 등짝이나 얻어맞을 줄 알고 슬슬 피했다.

    “그…… 남자는 말입니다.”

    진저는 아내와 절친하게 지내는 여성에게 도움을 주기로 했다.

    “견디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견디기 힘들다고요?”

    그는 어떻게 해야 교양 있게 이 문제에 대한 조언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 남편이 밤마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며 말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몸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트라노이 부인은 진저가 말이 없어지자 울상을 지었다.

    견디기 힘들다니. 임신한 부인이 견디기 힘들어서 팔베개조차 해주지 않는단 말인가.

    “그러니까 의식같은 것 말입니다.”

    “의식이라니요?”

    “부부의 의식을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간절하게…….”

    말을 멈춘 진저가 벌컥 차를 들이켰다.

    이렇게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면 차라리 때려치우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라노이 부인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오해예요! 남성만 부부의 의식을 바라는 건 아니잖아요. 여성도 가끔은 간절할 때가 있죠. 저도 사실…….”

    진저는 말을 잃었다. 다시 몸이 바뀌면 트라노이 공작에게 꼭 ‘여성도 원할 때가 있으니 병신처럼 굴지 말고 올라타라’고 말해주기로 하였다.

    파티가 시작했을 땐 눈치를 보던 여성들이 진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웬 공작 부인이라는 감투도 감투지만 그녀들은 공작 부인의 지식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렇게 남자 속을 잘 아는지.

    진저가 앉아 있는 테이블이 바글바글했다. 무슨 상담소가 된 것 같았다.

    “우리 남편 말이에요. 바람피우고 있는 게 아닐까요? 자꾸 향수 냄새를 풍기고……. 이번엔 참다 못해서 물어봤는데 펄쩍 뛰더라고요.”

    “바람피우고 있냐고 물으면 당연히 펄쩍 뛰지.”

    그리고 귀부인의 예상이 맞았다. 진저가 듣기론 귀부인의 남편은 주점의 종업원에게 홀딱 반해 아내의 목걸이까지 갖다 바쳤다고 했다.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진저는 시계를 보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쯤이면 충분히 자리를 지킨 것 같았다.

    아내와 대화를 나눌 때는 이렇게 지겹지 않았는데 지금은 돌아가고 싶어 좀이 쑤셨다.

    테이블 파티가 시작한 후 딱 3시간이 지났다. 진저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귀부인과 영애들은 몹시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진저는 주최자와 트라노이 공작 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인이 마차를 부르러 가기도 전에 실내를 나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품 때문에 질식할 뻔했다. 대체 화장을 다 하고 왔으면서 왜 분칠을 더 하는 걸까. 아내는 기관지가 안 좋아서 먼지나 가루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간질거리는 코를 문질렀다.

    “부인.”

    그를 부르는 게 확실했지만 진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줄리아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공작 부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줄리아는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아주 위태로워 보였다.

    진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줄리아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보고만 오려 했는데 가슴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치밀었다.

    ‘저 여자는 어째서 저렇게 행복해 보일까.’

    줄리아에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저 여자에게 제 자리를 갈취당한 기분이었다.

    “부군께선 잘 계시나요?”

    “…….”

    진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줄리아조차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겁한 짓이란 건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다.

    “아, 다른 뜻은 아니고 어릴 때부터 각별하던 사이라…….”

    진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삼가는 게 좋겠소. 아내가 있는 남자와 각별하다는 건 다른 의미로 해석될 테니.”

    줄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순하게만 보았던 공작 부인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다.

    그녀는 일부러 각별하다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와 자신이 어떤 사이인지 눈치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진저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떼었다.

    “기다려요.”

    줄리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줄리아가 참을 수 없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숨도 쉬어지지 않는 건 그웬 공작 부인이 진저와 너무나 닮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게 사실 동정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의 눈빛은 고통이었고, 슬픔이었으며 미련이어야 했다.

    생애 오직 하나 완벽한 사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그가 결혼을 한 것도 참을 수 있었다.

    “다정하시죠?”

    “영애.”

    “다른 사람과 다른 표정을 부인에게만 보여준다고 생각하시죠?”

    틀렸다. 엘리사에게 보내는 것과 똑같은 눈빛을 진저도 받았다.

    ‘아니야, 그는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어’

    진저는 자신에게 버려진 후에도 그녀를 위해 애써주었다. 왕의 관심을 받기 위해 무리한 청을 하였을 때도 못 이기는 척 들어주었다.

    그건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차지한 여자, 그 여자의 오만한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고 싶었다.

    줄리아의 눈이 시퍼런 안광을 띄었다.

    “하지만 그 사람, 절대 사랑한다는 말은 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런 남자니까.”

    지그시 눈을 감았던 진저가 다시 눈을 떠 그녀를 보았다.

    언제부터였는가. 그녀가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진 것이.

    과거에는 이만큼 빛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고 스스로밖에 모르는 건 변함이 없었어도 불의를 참지 않았으며 당당했다.

    줄리아는 트리거 공작의 자랑이었다. 스승은 언제나 딸의 칭찬을 입에 달고 살았다. 겉으로는 팔불출이라고 말했어도 내심 스승의 말에 동의했다.

    줄리아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사랑받는 게 너무나 당연해서 누군가의 악의에도 의연히 고개를 추어올렸다.

    “왜 이렇게 됐지?”

    진저의 말에 줄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있어?”

    줄리아가 입안에 여린 살을 짓씹었다.

    “동정하지 말아요. 나도 부인만큼 행복했던 적이 있으니까.”

    치미는 설움을 되삼켰다. 이 여자는 왜 이리 당당한 것인가. 왜 자신은 자신보다 한참 부족한 여자 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하는 걸까.

    눈물만은 보일 수 없었다. 찢기고 밟혀 너덜너덜한 자존심이라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진저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특별해.”

    “뭐…… 라고요?”

    “이 사람은 특별해.”

    입 밖으로 말이 나오고 나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엘리사는 제게 특별한 여자였다.

    어떤 의미로 그녀를 특별하게 여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 모든 여자와 다른 의미인 것만은 확실했다.

    줄리아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악을 내지르는 모습이 상처 입은 짐승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진저 또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찾아오지 마.”

    “……당신이 뭔데!”

    “아내지. 앞으로 지켜야 할 사람이고.”

    줄리아가 그의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으나 팔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적어도 기억 속에선 퇴색되지 않도록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살자.”

    이 여자가 특별했던 적도 있었다. 자신과 달리 고난 같은 건 모르는 여자. 자신처럼 상처받지 않도록, 이 감정이 우정일지언정 평생 웃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진저는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저 멀리에서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부에게 향했다.

    마부는 연신 진저와 줄리아를 돌아보았다.

    * * *

    샤워를 마친 엘리사가 가운을 입고 나왔다.    요새는 제법 날이 풀려서 방이 건조하도록 장작을 태우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머리를 말리고 한 손으로는 일정표를 잡았다.

    남편의 손은 크고 뭉툭하고 투박해서 뜨개질이나 자수를 놓기 어려웠는데 다른 이점은 있었다. 한 손으로도 머리를 말릴 수 있었다.

    요새만 같으면 몸이 바뀌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될 만큼 기분이 좋았다.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말리던 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리사가 목을 길게 빼고 들어와도 좋다고 말하자 콕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부탁하지도 않은 차를 가져왔다. 남편이 평소에 단 거라면 질색을 하므로 다과 같은 건 없었다.

    콕스가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보는데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할 말이 있는 듯하였다. 내저의 일을 돕는 집사가 대화를 해야 할 사람은 엘리사였다.

    그가 남편을 찾아와 이렇듯 난감한 표정을 지을 일은 없었다.

    “저…… 주인님.”

    불러놓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콕스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오늘 마님을 수행했던 마부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마부가 무슨 말을?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내색을 하진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파티에서 피곤한 일이 많았다며 엄살을 부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었다.

    콕스는 이런 이야기를 올리게 되었을 때의 주인님께서 취하실 행동을 몇 가지 예상했다.

    주제넘었다고 처벌한다, 혹은 주제를 모른다고 처벌한다, 또는 섣부르게 나섰다고 처벌한다.

    아무리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끝은 ‘처벌받는다’였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마님은 저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셨다.

    안주인인 것을 떠나 성실하시고 부리는 자들에게마저 상냥하셨다. 그런 분을 위해서라면 처벌쯤은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파티에서 트리거 영애와 마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까지도 여상하던 엘리사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줄리아 트리거가 왜…….

    “영애가 마님에게 손을 올렸답니다.”

    엘리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집사는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힘을 주어 눈을 감았다.

    “왜? 무슨 일로!”

    제 몸을 때리려 하였다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와 남편은 몸이 바뀐 상태였다. 다시 말해 남편이 맞았다는 말이었다.

    “아, 마님을 치지는 못했습니다. 마님께서 손목을 잡으셨다고…….”

    아주 뿌듯한 표정이었다. 콕스는 그웬 저에서 오래 일했으므로 줄리아와 진저의 관계가 미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줄리아로 인해 혹여라도 부부의 관계가 나빠질까 우려했다. 마님은 너무 유순해서 줄리아같이 영악한 여자에게 골탕을 먹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마부에게 듣기론 마님의 승리였다.

    엘리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이는, 아니, 아내는 어디에 있나?”

    “예? 아, 마님 말씀이십니까? 방에서 취침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보라 말했다. 콕스는 입을 붙였다 떼었다 반복하며 우물쭈물하였다.

    “더 할 말이 있나?”

    “아, 아닙니다.”

    처벌은 없는 걸까. 그는 진저의 방을 나서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방문이 닫히자 엘리사는 책상 위에 손을 올리고 그 손등에 이마를 붙였다.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 게 맞는지.

    그가 자신에게 그 일을 내색하지 않았다는 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그 뒤로 엘리사는 펜을 잡을 수 없었다. 잠이 오지도 않았다.

    창문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녀들이 분주하게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곧 자정, 번을 서는 고용인과 병사가 아니면 내저에 출입이 불가한 시각이었다.

    궁금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지만 물어봤다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애써 잠재워 놓았던 불안에 불씨가 떨어졌다.

    사람 마음이 장작이라면 기쁨과 행복은 단비가 되어 장작을 적시고, 불안은 바람이 되어 물기를 말려 버린다.

    불씨는 어떤 사소한 말이나 행동으로도 떨어지는데 이때, ‘장작이 젖은 상태인가, 마른 상태인가’가 가장 중요했다.

    장작이 기쁨과 행복으로 젖었다면 불길이 오르지 않을 테고, 바짝 말라 있었다면 온 마음과 육체를 모두 태워 버린다.

    엘리사의 장작은 말라 있었다. 곧 불이 온몸을 집어삼키게 되리라, 그녀는 예감하였다.

    다음 날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남편을 대했다.

    그와 그녀는 약속하였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입을 다물지 말라고. 하지만 이번에 무슨 일이 생긴 건 그녀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결재는 미뤄놓았어요.”

    “그래, 식사 후에 내가 살펴보지.”

    아내가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표정은 평소와 같았지만 고기 위에서 나이프가 몇 차례째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리 줘.”

    “네?”

    부부는 요새 거리가 짧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였다. 그가 아내의 접시를 가져와 고기며 그 위에 얹어진 야채까지 작게 썰었다.

    엘리사는 그 모습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이렇게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투박하던 말도 제법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그를 자신이 변화시킨 게 아니라 생각했다. 본래부터 다정하던 사람이 다정해도 되는 사람을 만난 것뿐이라 여겼다.

    그럼 줄리아 트리거에게는? 그녀에게는 어떠하였나.

    진저가 접시를 아내 쪽으로 되돌려놓자 엘리사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제대로 웃어야 해.’

    긴장을 한 채 식사를 하였더니 식사 후엔 진이 다 빠졌다.

    진저가 그녀와 함께 방으로 올라왔다.

    “자료는…….”

    진저가 입을 다물었다. 아내는 뜨개바늘을 쥔 채 잠들어 있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하기야 안 하던 일을 하다 보면 피곤할 터였다.

    일전에 몸이 바뀌었을 때는 외부에서 사람을 만날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외부활동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무릎 위에 있던 담요를 목 바로 아래까지 올려주었다.

    “으응.”

    잠투정을 하는 아내를 보며 진저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애 같은데 애 취급을 하지 말라니.

    루펠라나 라골, 기사들부터 고용인까지 모두가 그녀를 현명하고 점잖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라골은 조금씩 아내의 진면모를 눈치채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은 마님이 나이와 달리 어른스럽다며 혀를 내둘렀다.

    ‘어디가.’

    어른스러운 게 아니라 참는 게 익숙할 뿐이었다.

    처음엔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갈수록 못마땅해졌다.

    아내는 자신보다 남이 우선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그는 줄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동정하지 말아요. 나도 부인만큼 행복했던 적이 있으니까.’

    줄리아는 아내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 놓았다. 그 또한 줄리아와 아내가 특별했던 것만은 인정했다.

    하지만 느껴지는 게 달랐다.

    줄리아가 제게 최초로 동정심을 갖도록 한 사람이라면 엘리사는 최초로 안타까움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그녀만 보면 왜 이처럼 안타까운지 알 수 없었다.

    엘리사가 눈을 떴을 때, 남편은 없었다.

    침실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이 응접실을 청소할 시간이었다.

    하녀들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 허리를 굽혔다. 마님께서 주인님의 잠을 깨우지 말라 단단히 주의를 주셨다.

    “각, 아니, 안사람은?”

    “연무장에 가셨습니다.”

    ‘벌써 초하루구나.’

    남편은 초하루가 되면 늘 훈련을 참관했다. 몸이 바뀌었으니 남편 대신 자신이 할 일이었다. 더 신경을 쓰지 못해 미안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응접실 소파 테이블 위에 있는 편지를 발견했다. 트리거가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몸이 바뀔 때도 편지나 영지 관련 보고서는 남편이 확인했다. 혹시 줄리아 트리거인가 싶어 등이 긴장으로 곧추섰다.

    그러나 발신인은 그녀가 아닌 트리거 공작이었다.

    트리거 공작은 용건이 있을 때면 아들을 통해 전달했다. 그러고 보니 길리안은 짐만 놔둔 채 며칠째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셨나? 하지만 트리거 경이 없을 때도 용건은 사람을 통해 전달하셨는데.’

    더욱이 4공 회의가 금방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라면 편지까지 보낼 리 없었다.

    자꾸만 이상한 불안감이 생겼다. 일적으로 편지를 보낼 수도 있지 않은가. 급한 일일 수도 있었다.

    어제 줄리아 트리거의 일을 들었더니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오후에 남편이 돌아왔다. 그 또한 트리거 공작의 편지라는 것에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엘리사는 남편이 편지를 읽는 동안 그의 곁에 있었다.

    두 장의 편지를 모두 읽은 그는 그대로 벽난로에 편지를 넣더니 불을 붙였다.

    “저…… 여보, 무슨 일인가요?”

    “별일 아니야.”

    표정이 좋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별일이 아니라니 더 별일 같았다.

    엘리사는 양손을 꼭 잡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머리로는 더 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뭐라고 쓰여 있어요? 혹시 줄리아 트리거를 언급하신 건가요? 왜요? 내겐 무슨 일이 있을 때 입을 다물지 말라고 했으면서 당신은 어째서 말해주지 않아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4공 회의에서 논의될 내용을 정리해 주세요.”

    “……갈 필요 없어.”

    엘리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신년 회의와 4공 회의만은 꼭 참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편지다. 편지가 그의 마음을 바꾼 것이다.

    “왜요?”

    그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날카로운 말투였다.

    편지가 불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있던 진저가 고개를 돌렸다.

    “꼭 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럴 필요 없어졌어.”

    “무슨 얘기가 나오든 참석만은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진정 묻고 싶은 건 꾹꾹 눌러 참은 채 다른 말을 하려니 저도 모르게 날을 세웠다.

    “엘리사.”

    그녀가 그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애썼다.

    그날 일은 묻어두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파묻었다.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그가 그녀의 옆에 있어줄 거라는 뜻이니까.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야.”

    “그렇겠죠. 전 당신에게 신경 써선 안 되는 사람이에요.”

    “비약하지 마.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그럼 말씀해 주실 건가요?”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데.”

    “트리거 영애!”

    육체는 감정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줄리아를 보는 그가, 그의 손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른다. 자신의 손을 잡을 때와는 달랐다.

    그와 그녀의 마음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을 강요하는 순간 끝이 날 관계라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사람의 절반은 욕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어느 책의 글귀는 사실이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그에게 닿고 싶어지더니 이젠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트리거 영애 때문인가요?”

    그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짓말을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릴 사람도 아니었고, 만일 그런 경우가 생긴다고 해도 엘리사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터였다.

    단 한 번도 그가 제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가능한 믿음이었다.

    “저는 당신이 트리거 영애를…….”

    한 음절, 한 음절 힘겹게 말했다.

    “영애를…… 영애를…….”

    진저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입을 막을 수 없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는 두려웠다. 아내의 입에서 사랑이 언급되는 것이.

    그는 보답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감정을 고백하고 나면 그는 아내가 홀로 괴로워하더라도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어깨가 그녀의 눈물로 젖어들었다. 제 몸에서도 눈물이 나올 수 있던가. 걸음마를 뗀 이후부터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아 모르겠다.

    엘리사가 진저를 밀쳐냈다.

    “이러지 말아요. 저는…… 당신이 안아주실 때면 기대를 하게 돼요. 혹시 나를 사-”

    “엘리사!”

    남편이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눈을 크게 뜬 엘리사가 남편을 응시했다.

    그는 어째서 말을 끊은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왜 이다지도 다급하게 말을 막았는가.

    ‘알고 있었어.’

    “하.”

    깨닫는 순간 실소가 나왔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 체를 했다. 알면서도 이전과 다름없이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부끄러워하고, 손길 하나에 설레는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아주 우스웠겠군요.”

    “그렇지 않아.”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꼴이 얼마나 웃겼을까요. 많이 비웃었나요?”

    “엘리사 나는……!”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렸다. 밉고 미워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파서 참을 수 없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이토록 미운데도 그를 보면 가슴이 뛴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셔츠의 옷깃을 꽉 말아 쥐었다.

    “당신은…….”

    눈물을 삼킨 그녀가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만난 최악의 남자야.”

    진저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엘리사는 그를 뿌리치고 방을 나섰다. 그렇게 내저를 나와서야 깨달았다.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손목이 잡혔다.

    “어디 가십니까?”

    라골이었다.

    “마님.”

    그녀의 눈이 커졌다.

    라골이 부부를 수상하게 여긴 건 꽤 오래전이었다.

    부부는 어떤 시기엔 평소와 너무나 다른 행동을 했다. 마치 서로 바뀐 것처럼. 그리고 그 시기엔 고용인이며 병사들까지 멀리한 채 칩거하였다.

    라골은 태어날 때부터 진저 그웬을 알았다. 뭣 모르고 뛰어놀던 시기를 지나 유년의 아픔을 함께했고, 자라서는 속내를 공유했다.

    많은 사람은 진저의 단편적인 부분만 보았지만 라골은 그의 속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런 친구이자 주인의 변화엔 놀랍다기보다는 수상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렇다고 확신을 한 건 아니었다. 오늘 그의 침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아마 계속해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진저의 목소리가 맞는데 내용은 이상했다. 진저의 목소리에 답하는 마님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그녀라곤 믿기지 않는 말들이었다.

    ‘이러지 말아요. 저는…… 당신이 안아주실 때면 기대를 하게 돼요. 혹시 나를 사…….’

    ‘엘리사!’

    마님이 마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기함을 했다. 대체 무슨 일인 것인가.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일단 자리를 피하려는데 말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아주 우스웠겠군요.’

    ‘그렇지 않아.’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꼴이 얼마나 웃겼을까요. 많이 비웃었나요?’

    ‘엘리사 나는……!’

    ‘당신은 내가 본 최악의 남자예요.’

    그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진저, 아니, 진저의 몸에 들어간 마님이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갔다.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마님을 따랐다. 상태가 몹시 불안정했다.

    공작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는데도 그걸 느낄 겨를조차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공작 저를 나서게 하면 큰일이 벌어질 터였다.

    물론 마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화가 났다고 해서 그에게 해를 입힐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보아라. 남편을 최악의 남자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몸이 바뀐 것이 드러나자 저토록 놀라셨다.

    “오, 오해…….”

    하지만 지금 공작 저를 나서는 건 위험했다. 무엇보다 갈 곳조차 없으실 터였다.

    “일단 돌아가세요. 나가도 주인님께서 나가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엘리사가 코를 훌쩍이며 눈을 깜빡였다.

    그의 저택인데 어째서 그가 나가야 하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라골을 쳐다보았다. 라골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잘못한 놈이 나가는 겁니다.”

    “아…….”

    “놈은 비밀입니다. 없는 데선 임금님 욕도 하지 않습니까.”

    엘리사가 입술을 꾹 베어 물었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으니 또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들어가서 우는 게 좋겠습니다. 지나가던 사람 심장 마비시키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 * *

    엘리사와 라골이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엘리사가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단단히 문을 닫아두었다.

    본래 여성과 남성은 문을 열어두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사실 문만 열어두어야 하는 게 아니라 입회자까지 있어야 하지만 그간엔 수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입회자를 두지 않았다.

    다른 귀족가의 치부 등을 논할 때는 문마저 닫아두는 경우도 있었다.

    엘리사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울었다. 진저의 몸이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혼절했을 터였다.

    장장 한 시간 동안 울다 그치길 반복했던 엘리사는 이제 좀 진정이 되는지 숨을 골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남편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라골과 진저가 절친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라골에게도 이 일을 밝히지 않았다.

    엘리사가 주저하자 라골이 그녀를 설득했다.

    “이미 두 분의 몸이 바뀌신 걸 알고 있습니다. 계속 주인님 역할을 하셔야 하는데 지금은 주인님을 만나고 싶은 기분이 아니시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엘리사는 결국 입을 열었다.

    기하스엘 토벌이 있고 난 뒤 몸이 바뀌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몸이 바뀌었음을 알리지 못했다.

    지금까지 몸이 바뀐 횟수는 총 세 번. 시간이 지나면 돌아왔는데 돌아오거나 바뀌는 이유가 확실하지 않다.

    기하스엘의 피를 뒤집어쓰고 돌아온 진저가 저주를 받은 듯싶다.

    몸이 바뀌었을 때는 외부 활동을 자제했지만 피할 수 없는 자리엔 몸이 바뀐 채로 참석했다.

    아직까지 이 일을 눈치챈 사람은 라골이 유일하며, 진저는 다른 사람에게 들켜선 안 된다고 거듭 당부했다.

    엘리사가 말한 내용을 들은 라골이 이마를 짚었다.

    진저의 말이 맞았다. 이 일은 알려지는 즉시 여태껏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쌓아온 탑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4공 회의에는 참여하실 겁니까?”

    엘리사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 말도 안 되는 일도 답답하지만 진저 녀석은 더 답답했다.

    줄리아는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도무지 그 여자의 속을 알 수 없었다. 왕세자와의 약혼식을 방해받지 않기 위하여 제 혈육에게 그를 찌르게 만들었다.

    뭐,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녀의 부탁이 아니었다 한들 제 혈육의 검을 맞은 사내를 몇 번이나 찾아온 건 정상이 아니었다.

    바람 잘 날 없던 그웬저에 평화가 찾아오나 했더니 모르는 곳에서 태풍이 불고 있었다.

    몸이 바뀌는 저주. 이때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기하스엘은 개체 수가 증가하여 민가에 피해를 입히기 전엔 성수라 불리었다.

    마물로 분류되기 이전엔 성국 내부뿐 아니라 성국의 교리를 믿는 자들까지도 의견이 분분했다.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성수가 아니다. 당장 토벌해야 한다.

    기하스엘은 성서에 기록된 신수다. 추악한 인간들을 단죄하려 신께서 현세에 사자를 내린 거다.

    다행히 전자를 주장하는 사람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진저가 직접 죽인 기하스엘은 다른 개체와는 판이하였다. 일반 기하스엘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할뿐더러 부리를 벌리면 불덩이가 튀어나왔다.

    정말 신의 사자라도 되는 듯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진저는 그런 기하스엘을 죽였다. 그런데 기하스엘을 죽인 뒤 몸이 바뀌었다. 당연히 저주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

    극단주의자들은 성수로 인해 저주받은 자를 죽여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자고 주장할 것이다.

    사생아라는 타이틀에 전장의 마귀라는 세간의 평가, 그리고 저주까지 겹쳐진다면 그를 감싸려는 자는 없을 것이다.

    줄리아 트리거는 왜 하필 이런 상황에 나타나서 다른 분란을 만드느냔 말이다.

    마님의 성품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그웬저의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진저는 그런 그녀에게 최악의 남자라는 소리까지 듣고 말았다.

    제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를 물심양면 돕지는 못할 터였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엘리사는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한바탕 울어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혼란 속에 있었다. 가슴속에서 이해와 분노가 충돌하여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드는 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라골의 말에 엘리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괜찮아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골은 한숨을 삼켰다. 문밖에서 들었던 것으로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될까 봐 그리 기를 쓰고 마님을 모의 전투에 내보내려 한 것이다.

    부부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얘기가 돌면 줄리아가 마음 놓고 진저를 찾을 테니.

    노력의 결과로 장기간 입원행 티켓을 끊어야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건 루펠라도 마찬가지였다. 금족령을 받고도 ‘새언니에게 미안하지만, 고 계집애 엿 먹일 수 있다면 외출 금지가 문제야?’ 하고 깔깔거렸다.

    진저와 견원지간인 것처럼 구는 루펠라도 진저가 길리안에게 검을 맞았을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시종일관 ‘전쟁! 이건 전쟁이야!’를 외치며 길길이 날뛰었다.

    진저의 능력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신의 가호가 깃든 사람처럼 운까지 이어졌다.

    적군이 불화살을 쏘아대면 소낙비가 내렸고, 강물이 불어 진군하지 못하면 적의 진영에 역병이 돌았다.

    신의 가호는 전쟁에서만 발휘되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인재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진저 개인의 능력으로 트리거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었다.

    그냥 치고받는 것도 아니고 그웬, 트리거의 군이 모두 움직여 서로 칼을 겨누게 되면 나라가 두 쪽 나는 건 순간이었다.

    확률만 놓고 봐도 그웬가가 밀렸다. 아직 진저는 가문을 모두 장악한 상태가 아니었고 부친에게서 사람을 물려받지 못했다.

    란델에는 ‘아비 된 자가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세 가지는 명예와 재물과 인맥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선대 그웬 공작은 명예와 재물은 물려줬어도 마지막은 아니었다.

    진저가 경험과 지식을 쌓아가는 중이라면 트리거 공작은 이미 상당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한 상태였다.

    뭐, 이건 진저가 트리거가에 선전포고를 할 때의 일이었다.

    라골은 위의 이유들로 진저가 길리안 트리거를 책망하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여자에 미쳐서 배에 구멍이 뚫려 피를 철철 흘리고도 용서한 거로 생각하긴 싫었다.

    그건 등신 천치였다.

    라골은 그의 기사도 아니고, 그를 모시는 가신도 아니었다. 이런 말쯤은 속으로 곱씹을 수 있었다.

    마님에게 말씀드렸던 것처럼 없는 데선 임금님 욕도 한다.

    좌우지간 심각한 일이었다. 몸이 바뀌었는데 마님은 진저를 보지 않으려 하셨다.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마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주인님은 적이 많습니다.”

    몸이 바뀌지 않았다면 암살자가 나타나는 순간 개 패듯이 패고 개 산책시키듯이 줄을 걸어 질질 끌고 다니겠지만, 지금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 * *

    진저는 아내가 돌아올까 하여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급히 문을 연 그는 아내가 아닌 라골을 보고 인상을 썼다.

    돌아가라 말하려는데 라골이 빨랐다.

    “마님은 서재에 계신다.”

    진저는 이전과 다른 의미로 표정을 굳혔다.

    ‘라골이 알게 된 건가. 어떻게?’

    저주에 대해 알게 된 이가 라골이라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저가 침실에 비치된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파심에 말하는데 마님께서 말씀하신 게 아니다.”

    “알아.”

    아내에 대한 의심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라골이 물었다.

    “어떻게?”

    “싸웠다고 해서 입을 쉽게 열 사람이 아니지.”

    “틀렸다.”

    그는 라골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싸운 게 아니지. 멀어진 거다.”

    로망스에나 나올 법한 유치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아내와 멀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멀어질 터였다.

    진저는 이 일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고용인이 아닌 친구로 나온다면 더더욱.

    “한심한 놈.”

    “신경 긁지 말고 꺼져.”

    “최악이라는 소린 많이 들었잖아. 네가 최악이 아닌 적 있었어?”

    ‘아내와의 대화를 들었군.’

    아내가 이 녀석에게 자신과의 일을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았을 리 없었다.

    다른 때라면 맞붙어서 설전을 벌였을 진저가 조용했다.

    입 한 개를 가지고도 여럿의 뒷목 잡게 하였던 그가 입이 열 개가 되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 입장에선 농락당했다고 느껴질 수 있었다.

    그의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있는 사실 그대로만 본다면, 아내의 감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한 데다 진심을 말할 수도 없게 한 것이다.

    라골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오해라면 풀어. 네가 언제부터 신사였다고 오해까지 감싸 안겠다는 거야.”

    “그릇되게 해석하는 걸 오해라고 하는 거다.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지.”

    아내에게 저열한 짓을 했다.

    그토록 비난했던 부친의 오입질보다도 더 질 낮은 짓이었다. 아내는 자신을 비난할 이유가 충분했다.

    무엇보다 관계를 회복한다 하더라도 그는 아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수 없었다.

    진저가 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 이래서 진심이 불편한 거다. 이랬기 때문에 피하려 든 것이고.

    나는 어째서 그녀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것인가. 거리를 두려는 시도는 왜 그만두게 된 것인가.

    아내가 귀여워서? 자신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게 안쓰러워서?

    틀렸다.

    자신이 그녀에게서 떨어지기 싫었던 것이다.

    눈치는 보는 게, 저 때문에 그녀가 작아지는 게, 속앓이를 하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게 싫었다.

    그래서 이런 순간이 올 줄 알면서도 그녀에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자학은 다른 데 가서 해라. 마님, 쉬시게.”

    진저가 문을 향해 눈짓했다. 몸이 바뀌었으니 아내는 이 방에서 지내야 했다.

    자신 때문에 돌아오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말을 섞기 싫다는 거군.’

    진저가 다른 말없이 방을 나섰다. 아내의 침실에 들어간 그는 그녀의 향기가 잔뜩 배어 있는 베개를 흘끗 쳐다보았다.

    복잡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 *

    트리거저.

    진저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소식에 길리안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기에 편지까지 보내셨냐는 말에 공작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부친이 진저에게 편지를 보낸 걸까. 또 트리거 가의 후계인 제게 편지를 보낸 이유를 말하지 않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오늘 왕궁에 간다는 줄리아가 다른 날과 다른 표정을 지었다.

    마음을 잡았나 하여 그냥 두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 설마!”

    “그만 나가 보거라.”

    “왜 편지를 부치셨어요? 그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하신 거예요!”

    길리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공작은 추궁하듯 묻는 아들을 타박하지 않았다. 길리안이 부친의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고는 이를 갈았다.

    “줄리아입니까?”

    그 녀석이 결국 왕세자를 포기하고 진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트리거 공작은 딸에게 맹목적이었다. 줄리아의 문제라면 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다.

    아니, 이성적으로 생각했어도 결국 딸의 손을 들어주었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제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길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진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면 이처럼 태평하실 수 없을 테지요.’

    길리안이 가보겠다는 말도 없이 공작의 집무실을 나섰다. 줄리아를 봐야 했다.

    홀로 남은 공작은 진저에게 보내고 남은 양피지 뭉치를 쳐다보았다.

    마음이 좋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웬 공작 부인에게 못 할 짓을 하였다.

    모의 전투에서 보았던 그웬 공작 부인은 맑은 사람이었다.

    노인네의 말을 귀찮아하지 않을뿐더러 온갖 일을 겪으며 얻은 지혜에 감탄했다.

    그녀는 진저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겁이 많아 보였는데 산짐승이 우글거리는 몽구스 산을 발발 뛰어다녔다.

    대연회장에서 마도구를 통해 그녀를 본 이들은 모두 그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공주로 태어나 귀부인이 된 여자가 넘어져도, 나뭇가지에 찔리고 긁혀도 아무렇지 않게 남편을 향해 걸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웬 공작 부인이 진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아버지, 저요. 죽을 것 같아요.’

    줄리아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다리에 매달려 애원했다.

    자신이 없어서 후회할 선택을 하고 말았다. 가문에 큰 누를 끼쳤다.

    눈물을 흘리는 딸을 보는 트리거 공작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딸은 이제 바라는 게 없다고 하였다. 어떤 시련이 와도 그의 손을 잡고 있으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줄리아, 진저는 이미……!’

    공작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진저와 함께할 적에 줄리아는 이처럼 망가진 상태가 아니었다.

    자신감 넘치고, 의기 있고, 영리하고, 아름다웠다.

    무엇이 너를 이처럼 망쳐 놓았을까. 트리거 공작은 딸을 끌어안았다.

    줄리아가 가려는 길은 세상 사람 모두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왕세자의 약혼녀가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웬 공작을 탐하여 본부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꿰찼다.

    지금보다 더 힘들 테고, 지금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트리거 공작은 진저에게 편지를 보냈다.

    줄리아를 제 딸로 받아들이며 맹세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

    그는 맹세를 지켜야 했다. 그웬 공작 부인의 원망은 모두 제 몫이었다.

    그래서 진저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 못난 사내를 스승이라 부르지 마라. 여기 남은 건 상처 입은 자식을 끌어안아야 하는 아비뿐이니라.]

    오래전 세상을 떠나신 모친이 떠올랐다.

    자식과 가문을 위해 아내를 희생시키려는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하였던가.

    그는 그때의 어머니와 같은 나이가 되어서야 어머니를 이해했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는 게 부모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을 제 자식을 위해서 희생시키려 하고 있었다.

    돈과 지위, 명예로 보상할 수 없는 큰 죄였다.

    * * *

    엘리사는 남편의 뜻에 따라 4공 회의에 나가지 않았다.

    그웬 공작의 외부 일정이 모두 중단되자 수도에선 그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진저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일은 흔히 겪고 들어왔다.

    그가 온 신경을 집중한 건 아내였다.

    외부 일정을 중단한 것 외에 그녀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함께 식사를 했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주었고, 해야 할 일을 똑 부러지게 마쳤다.

    달라지지 않았기에 더 답답했다.

    그녀는 결혼 초의 눈빛과 목소리로 그를 대했다. 아니, 결혼 초보다 더 거리감이 느껴졌다.

    라골은 하루 종일 아내의 눈치를 보는 진저를 향해 혀를 찼다.

    ‘미친 자식.’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엘리사의 스트레스는 한계치를 넘은 지 오래였다.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렇게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그녀는 쓸모를 잃어버린다.

    애초에 진저가 엘리사와 결혼한 이유는 말 잘 듣고 얌전한 내저 지키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타국의 천덕꾸러기 공주는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신부였다.

    먼 나라이다 보니 간섭도 없었고 그녀가 남편에게 외면당해서 파르르 할 이들이 없었다.

    쓸모를 잃은 아내를 처분하려 들지는 않을까. 죽이지는 않아도 이혼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혼을 당해 그란디아로 돌아가면?

    또 이전과 같은 산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독살의 위험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 테고 그녀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 수 없을 거야.’

    이미 남편의 다정함과 그로 인해 얻은 사람들의 따뜻함을 맛보았다.

    스트레스가 심하다 보니 음식을 먹기만 하면 속을 게워냈다. 하루에 한 시간을 자면 그나마 많이 잤구나 싶을 지경까지 불면증이 심해졌다.

    라골이 우유를 탄 홍차를 들고 집무실을 찾았다.

    콕스의 애원이 있었다.

    ‘주인님이 식사를 못 하신다!’

    진저는 집사의 간섭을 두고 볼 마음 좋은 주인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이것저것 마님에 대한 일을 알려 은근히 참견을 한 상태였다.

    그는 거의 애걸복걸하다시피 라골에게 차를 들려주었다.

    너라면 죽이지는 않으실 거다, 라는 말에 그간 진저가 얼마나 매정한 주인으로 보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라골이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았다.

    “오늘도 식사를 하지 못하셨다면서요?”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와 몸이 바뀐 진저가 그 자리에 함께했다.

    물론 조금 깨작대다 말았지만 어쨌든 입에 음식을 넣고 씹어서 삼키는 데까지 성공했다.

    진저는 다른 병사들만큼 먹었다. 전장에선 음식이 떨어지는 일이 허다했다. 보급선이 끊기기도 하고, 포위를 당하기도 하고, 어떨 땐 식량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럴 경우엔 풀뿌리를 뜯어먹었다. 풀이라도 찾으면 다행이지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때도 있었다.

    전장에 나서는 자들은 있을 때 먹어두기 위해 혈안이 된다.

    한스 경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모의 전투 승전 파티에서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다가 결국 토사물을 먹는 지경이었다.

    진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전쟁을 모르는 남성보다는 확실히 먹는 양이 많았다.

    “주인님께는 새 모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양입니다.”

    “신경 쓰게 했군요.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엘리사가 차를 마시며 서류를 보았다. 먹는 걸 확인한 라골이 방을 나서려는데 입을 막은 엘리사가 화장실을 향해 뛰어갔다.

    화장실 안에서 구토 소리가 들렸다.

    “마님! 마님!”

    이젠 토해도 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입을 닦은 엘리사가 세면대를 붙잡았다.

    점점 몸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이젠 움직일 때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예전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화장실을 나서자 라골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괜…… 찮아요.”

    괜찮다면 저렇게 안색이 나쁠 리 없었다.

    라골이 연유를 묻자 가벼운 두통이나 복통일 뿐이라고 답했다.

    진저는 건강 체질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체가 썩은 전장에 발을 들이다 보니 면역력이 좋은 건 물론이고 상한 음식을 먹어도 이상이 없었다.

    그에 반해 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는 멀쩡했다.

    엘리사는 진저와 비교할 수 없는 허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극단적으로 식욕을 잃거나, 불면증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두통이나 복통은 자연히 따라왔다.

    “이전에 몸이 바뀌었을 때도 아프셨습니까?”

    “아니에요.”

    라골이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아프셨습니까?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항상 몸이 좋지 않으셨던 겁니까? 전엔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으셨던 겁니까?

    그전에는 이렇게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었다는 말에 라골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닥터의 진찰을 받으십시오.”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안 그래도 수도에 그의 건강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닥터의 진찰을 받으면 더 큰 소란이 생길 터였다.

    가주의 건강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후계를 세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이때를 노려 의견을 밀어붙이려는 자들이 나올 터였다.

    외부에서는 정적들이 송곳니를 드러낼 것이다.

    개인의 영달뿐 아니라 가문에게도 상당한 위기였다.

    라골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있다간 점점 건강이 악화될까 염려되었다.

    결국 라골은 진저를 찾았다. 이 이상 그녀가 그의 일을 하는 건 무리였다.

    마님에게는 쉴 시간이 필요했다. 안주인의 일은 콕스와 제가 하면 될 테고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일은 진저가 도로 가져와야 했다.

    라골에게서 아내가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그녀를 찾았다.

    그의 눈에도 그녀의 안색은 심각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나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건가.”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엘리사!”

    “소리치지 말아요.”

    그가 아내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았다.

    “당장 진찰을 받아. 그렇게 있다간 몸이……!”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건강하게 돌려줄게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난…….”

    “걱정된다고 하지 말아요.”

    진저의 귀엔 걱정할 자격도 없다는 말로 들렸다.

    엘리사는 아주 지쳐 있었다. 더 이상 기대도, 실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지치는 건 그럼에도 그와 있으면 설렌다는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있던 진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할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는데.”

    “당신은 제 일을 하고, 저는 당신 일을 하면 돼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당……!”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 주인님.”

    집사인 콕스였다. 난감한 표정의 그가 엘리사와 진저를 번갈아 보았다.

    분위기가 심각한 듯하여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중요한 일이었다.

    “트리거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그의 말에 엘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남편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알았으니 나가보아라.”

    “예? 아, 예…….”

    마님의 날카로운 반응에 콕스는 두말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놔주세요. 손님이 오셨다잖아요.”

    “당신은 있어. 내가 가볼 테니.”

    “그웬 공작을 찾아온 손님이에요. 그러니 제가…….”

    “제발 좀!”

    진저가 버럭 소리쳤다. 여성의 몸으로도 굉장한 위압감이었다. 엘리사가 말을 잃자 그는 아내의 어깨를 잡아 주저앉혔다.

    “나오지 마.”

    피곤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진저가 방을 나서고 홀로 남은 엘리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의 피로한 표정이 위안이 된다면 이상한 걸까. 그도 그녀만큼 힘든 걸까.

    엘리사는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한숨과 함께 삼켰다.

    * * *

    트리거 공작이 있는 응접실에 들어간 진저가 허리를 굽혔다.

    당연히 진저가 나올 줄 알았던 트리거 공작은 쉬이 인사를 하지 못했다.

    엘리사가 된 진저가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답이 돌아왔다.

    “아, 나는 뭐. 공작 부인은 잘 지냈나?”

    진저의 스승으로 지낸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트리거 공작은 제자의 아내를 편히 대했다.

    “예. 각하께선 외출하셨습니다.”

    트리거 공작은 민망한 듯 뒷목을 주물렀다.

    한동안 외부 일정이 없다기에 오늘도 저택에 있겠거니 싶었다.

    공작 부인의 말이 마치 일정도 잡지 않고 찾아온 자신을 타박하는 것 같았다.

    “내 실례했군. 마음이 급해 연락도 없이 찾아오고 말았어.”

    “무슨 일이십니까? 말씀해 주시면 각하께 전달하겠습니다.”

    진저는 딱딱한 어조로 그를 대했다.

    “아니, 아닐세. 그 녀석과 개인적으로 나눌 말이 있었는데 다음에 찾아오지.”

    공작의 말을 끝으로 차가 나왔다. 차로 목을 축인 트리거 공작은 공작 부인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전에 보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공작 부인의 모습에 진저가 겹쳐졌다.

    응접실은 고요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트리거 공작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공작 부인.”

    “예.”

    “혹시 필요한 건 없나?”

    진저가 대답치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혼자가 되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든가.”

    진저는 트리거 공작이 저택을 찾은 이유를 깨달았다.

    아내를 보내지 않길 잘했다. 스승은, 아니, 스승임을 포기한 공작은 딸에 대한 애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했다.

    “혼자가 될 일이 없으니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트리거 공작은 그웬 공작 부인에게 큰 부채감이 있었다.

    그는 줄리아가 그간 왕궁에서 어떤 모욕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침묵했던 것이다.

    지금의 형태, 진저에게 아내가 있고 줄리아에게 약혼자 있는 이 형태는 딸이 택한 결과였다.

    알면서도 딸을 위해 나섰다.

    딸이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마다 가슴이 저몄으므로. 아내를 지키지 못해 제 핏줄로 태어나지 못한 가여운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자. 그는 결심했다.

    “바라는 게 있거든 나를 찾게. 내 물심양면으로 공작 부인을 돕지.”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게.”

    그웬 공작 부인이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다. 트리거 공작이 인자하게 웃었다.

    “더 이상 저택을 찾지 말아주십시오.”

    진저의 말에 트리거 공작은 손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공작 부인.”

    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라 제일의 권력자이던 남자였다. 진저도 쉬이 맞설 수 없는 위압감이 흘렀다. 진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 눈빛을 본 트리거 공작은 확신했다.

    ‘내가 진저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군.’

    트리거 공작이 자신의, 아니, 아내의 얼굴을 뜯어보듯 응시했다.

    겉으로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 없는 것 같지만, 그는 독사라 불리는 길리안의 부친이었다. 잔혹할 때는 자신보다 잔혹했다.

    그가 아내를 적으로 분류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약속을 어기셨다지요.”

    트리거 공작의 눈이 커졌다.

    “남편에게 들었습니다. 수년 전에 단단히 ‘약속’하신 게 있으시다고요.”

    “……그웬 공작이 말해주었나.”

    트리거 공작의 얼굴에서 가면이 모두 벗겨졌다. 진저가 그것까지 말할 정도로 공작 부인을 아낀다는 걸까. 아니면…….

    ‘줄리아를 옆에 두지 않으려는 건가.’

    뭐가 되었든 그들의 약속을 알고 있다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진저가 제 아내를 지키려 든다면 란델엔 피바람이 불 것이다.

    트리거 공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하나 묻지.”

    “예.”

    “나는 내 딸과 진저가 이어지면 그웬가를 물심양면 지원할 거야. 빚을 갚고, 은혜에 보답키 위해 내가 가진 건 뭐든 내어줄 생각이지. 공작 부인은 어떤가? 이런 것들을 진저에게 해줄 수 있나? 아니, 그보다 그 녀석의 곁에서 행복할 자신이 있어?”

    진저에겐 트리거 공작의 물음이 달리 들렸다.

    너, 네 부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느냐?

    진저는 이를 악물었다.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진저 그웬은 뼛속까지 이기적인 남자였다.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지언정 놓지 않겠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 *

    깊은 밤이 되어서야 트리거 저에 도착한 공작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길리안을 보았다.

    피곤하다는 말에도 아들은 드릴 말씀이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공작이 아들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길리안은 끈질겼다. 기어코 집무실까지 쫓아 들어간 그가 언성을 높였다.

    “아버지께서 줄리아를 막아주십시오.”

    줄리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길리안은 그녀를 다그쳤다. 네가 얼마나 큰 분란을 만들게 될지 가늠이나 되냐고 물었다.

    왕비의 핍박, 왕세자의 모욕은 트리거 공작의 비호 아래 스스로를 가장 고귀하다 여겼던 여성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이만큼 힘들었으면 되었다. 그녀는 그리 여겼다.

    길리안은 여상한 표정의 동생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 할 거 아냐!」

    진저는 남매의 죄에 침묵했다. 란델의 미친개, 전장의 마귀라고 불리던 그가 자신을 찌른 친구를, 친구가 자신을 찌르게 만든 원흉을 용서했다.

    그 말에 줄리아는 답했다.

    「사람 새끼가 아니라서 그런가 보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았다.

    트리거 공작은 자신을 붙들고 늘어지는 아들에게 손을 휘저었다.

    “나가봐라.”

    “아버지!”

    “나중에 얘기하자.”

    “그웬저엔 왜 가신 겁니까? 그 녀석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트리거 공작은 길리안의 영웅이었다. 영지에서도, 수도에서도 그를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정도 없이 영지를 다스렸고 용맹하게 나라를 지켰다.

    귀족답지 않은 투박한 손이 좋았다. 아버지의 손은 그가 얼마나 많은 검을 물리치고 란델과 가족을 지켰는지를 증명했다.

    세상 모든 아이가 그를 부러워했다. 진저 그웬마저도 아버지의 말에는 말대답을 하지 않았다.

    필립 트리거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수많은 특혜가 있었다.

    물론 아비만 못한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그런 것쯤은 우습다 여길 만큼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벗을 찌르면서까지 줄리아의 출생을 비밀에 부친 건 아버지의 이름에 추악한 험담들이 뒤따를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선 그의 우상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딸을 위해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

    진저의 복부에 칼을 꽂아넣던 순간이 떠올랐다.

    검붉은 피로 그의 셔츠가 옴팡 젖었다.

    길리안은 부친의 태도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트리거가는 이미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제가, 줄리아가 그 녀석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신다면 이렇게……!”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순간 숨이 멎었다.

    길리안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을? 무엇을 알고 계신단 말인가.

    줄리아와 그는 그들이 알게 된 사실을 무덤까지 가져가자고 굳게 다짐했다.

    줄리아의 약혼식장에서 그를 찌른 건 남매와 진저, 그리고 라골과 루펠라만이 아는 일이었다.

    진저는 라골과 루펠라의 입을 단단히 봉해놓았다.

    라골은 어릴 적부터 영리하던 아이였다. 그웬 공작이 트리거 후계의 검에 찔렸다는 게 세상에 드러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럼 루펠라인가? 루펠라가 제 오빠의 명을 어기고 부친에게 그 일을 발설한 건가?

    집무실에 있는 진열장에서 술을 꺼낸 공작이 마개를 비틀어 열었다. 독한 술 냄새가 흘러나왔다.

    길리안은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작이 술을 따르고 잔을 입에 털었을 때가 돼서야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무슨…… 무엇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너희들이 내게 감춘 모든 것.”

    줄리아는 진저를 사랑했다. 딸의 연심이 너무나 선명해서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런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변했다.

    며칠을 앓더니 병상에서 일어난 즉시 그를 찾아와 왕세자의 여자가 되겠노라 말했다.

    어떤 아비가 딸의 변화 앞에서 무감하겠는가.

    그는 딸이 이상해진 기점을 떠올렸다. 분명 그날 아내와 딸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딸이 아내와의 대화를 들은 것이다.

    길리안의 황망한 표정에 트리거 공작은 두 잔째 술을 따랐다.

    트리거 공작은 처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딸이 진저를 원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딸과 사위가 될 진저를 보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딸은 다른 선택을 하였다.

    “어째서 말리지 않으신 겁니까.”

    “무얼 어떻게 말린단 말이냐. 줄리아가 출생을 부끄럽다 여기는데 네 어미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 무슨 소리를 해.”

    “아버지…….”

    “약혼식장에서 그런 일을 벌여놓고 수습도 뒷전이었던 놈이 내게 어찌 알았느냐 묻는군.”

    진저가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밀히 마차를 수배한 사람은 그였다.

    루펠라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고, 라골은 응급처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줄리아의 약혼식 후 그는 진저를 찾았다. 복부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에게 공작은 약속했다.

    ‘침묵해다오.’

    진저는 말이 없었다.

    ‘용서해다오.’

    그런 그에게 트리거 공작은 제안했다.

    딸의 버팀목이 되어준다면, 다시 말해 그녀로 인해 길리안이 그를 찔렀다는 걸 잊어준다면 두 가지 약조를 해주겠노라.

    첫 번째는 비밀리에 상속된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웬가에 대한 외압을 철저히 차단하며 그 자신 또한 그웬가에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저와의 두 번째 약속을 어겼다.

    줄리아가 진저를 원했다. 그렇다면 공작 부인을 떨어뜨려 놔야 하는데 그건 그웬가에 대한 간섭이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을 어겼다. 그리고 그걸 그웬 공작 부인이 알고 있었다.

    공작 부인은 말했다.

    ‘참으로 파렴치하십니다, 각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위나 명예로 매수하실 수는 없을 텐데요. 저는 그란디아 왕가의 적통 혈손이니. 그럼 돈으로 매수하실 겁니까? 어쩌죠. 그런 데엔 관심이 없는데.’

    진저와 같은 눈빛으로, 진저가 할 만한 말을 했다.

    마치 제자에게 비난받는 것 같았다.

    트리거 공작은 그웬 공작 부인을 회유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보다 직설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웬 공작이 내 사위가 되길 바라. 보상하겠다. 그대가 원하는 무엇이든 이뤄줄 것이다. 모국에 복수코자 하는가. 그렇다면 내 군대를 보내 왕궁을 짓밟아주지.’

    ‘그웬 공작이 그 일을 덮은 게 각하와의 약조 때문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란 말인가.’

    공작 부인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십시오. 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작 부인.’

    ‘남편이 말하였습니다. 과거를 모두 지우겠다고.’

    트리거 공작은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진정 스승으로 여기지 않겠다. 진저는 그리 말한 것이다.

    ‘그를 만나게 해주게! 그 일을 덮은 이유를 물어야겠어! 약조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왜……!’

    트리거 공작의 말에 응접실을 나서던 공작 부인이 등을 돌렸다.

    ‘이제 말을 높이십시오. 저는 더 이상 제자의 아내가 아닙니다.’

    ‘공작 부인!’

    ‘우리 부부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트리거 영애의 출생을 평생 입에 담지 않도록.’

    그웬 공작 부인이 응접실을 나서고도 트리거 공작은 한참을 소파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걸 어떻게, 진저가 그걸 어떻게!

    그는 진저에게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자식들이 말했을 리 없었다.

    길리안은 진저를 찔러가면서까지 비밀을 지키고자 하였다.

    딸은 그 비밀을 지키려 사랑하는 남자를 버렸다.

    진저가 그 일을 덮은 건 딸의 출생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은 그들의 결정이 딸의 출생에 관련된 일임을 제게조차 내색하지 않았다.

    그웬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트리거 공작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가문의 영달을 위해 침묵한 게 아니라면 이유는 자신 때문이었다.

    스승을 위해서. 피를 그렇게 흘리고도, 계속해서 줄리아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면서…….

    “아신다면 더더욱 안 됩니다. 줄리아는 지금 사리 판단이 안 된다고요! 진저를 흔들어 놓지 못하게 가둬서라도……!”

    “두어라.”

    “아버지!”

    “진저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다시 제자리를 찾을 테니.”

    그럴 턱이 있나.

    길리안은 확신했다. 진저는 흔들릴 것이다.

    공작 부인과 유대를 쌓아가고 있지만, 그들이 결혼한 건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줄리아는 그에게 특별한 여자였다. 진저 그웬이 여자를 붙잡기 위해 약혼식장까지 찾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 * *

    엘리사는 결국 수면제를 먹었다. 남편의 몸은 약이 잘 듣지 않아서 그녀의 몸으로 평소 먹는 양의 세 배를 먹어야 했다.

    엘리사가 약에 취해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그녀가 잠든 침실의 문이 열렸다.

    진저였다.

    아내가 결국 수면제를 먹었다는 말에 침실까지 찾았다.

    어릴 적을 제외하면 열병 한 번도 겪지 않았다. 자상이 아니라면 이토록 앓은 적이 없었다.

    분명 제 몸인데 영혼이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이처럼 안쓰러워 보였다.

    아내의, 아니, 제 몸의 이마를 짚어본 진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

    그녀가 눈꺼풀을 조금 들어 올리더니 그를 불렀다.

    잠을 깨웠나 싶어 긴장하는데 다시 눈이 감겼다.

    “여보…….”

    하지만 입은 계속 움직였다.

    약에 취해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와 멀어진 이후로 이런 다정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보…….”

    그녀는 약에 취해서도 그의 이름만을 불렀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여보…….”

    “그래.”

    “……보.”

    “그래.”

    “여보…….”

    “여기 있어.”

    진저가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손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움켜쥔 채 눈꺼풀을 떨었다.

    “가지 말…… 아요…….”

    한 손은 아내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은 아내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또 그는 그녀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아내는 제 몸을 하고도 작고 약해 보였다.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무릎을 굽힌 그가 가만히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못돼 먹은 남자가 뭐가 좋아서 가지 말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최악의 남자라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십여 분 동안 그녀를 보고 있던 그는 내려간 이불을 다시 올려주고 침실을 나섰다.

    엘리사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직 남편의 온기가 손에 남아 있었다.

    그는 다정했다. 그래서 더 놓을 수 없었다.

    그를 비겁하다 여겼지만 진정 비겁한 건 자신이었다.

    완전히 미워하지도, 완전히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그의 곁에서 언제 버려질까 눈치만 보며 뱅뱅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줄리아 트리거가 이해되었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잊어. 어떻게 완전히 놓을 수가 있겠어.

    그녀는 남편이 잡았던 손을 가슴에 가져갔다.

    이렇게 가슴이 뛰었다.

    수면제를 먹었어도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날이 밝았다. 해가 뜨자마자 그웬 저를 찾은 루펠라는 제 오빠에게 뛰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줄리아 트리거가 왜 왕세자와 파혼을 한 건데!”

    루펠라에게 멱살이 잡힌 엘리사도, 제 동생이 무슨 짓을 벌일까 염려하여 뛰어들어온 진저도 모두 말을 잃었다.

    루펠라가 엘리사의 멱살을 짤짤 흔들다 말고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놓았다.

    엘리사가 된 진저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여자 잘못 건드려서 좆 된 오빠는 멱살이 잡힐 만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새언니는 지켜줘야 한다.

    사실 잘못 건드린 건 아니었다. 오빠는 손이 빠르다는 소문도 있으면서 고 계집애와는 단둘이 한방에 있던 적도 없다.

    루펠라는 그간의 일을 몰라 엘리사가 줄리아와 오빠의 일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굳이 줄리아 트리거의 존재를 알릴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루펠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새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잤어요?”

    그녀의 새언니는, 아니, 새언니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는 말이 없었다.

    루펠라 뒤에서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를 볼 뿐.

    줄리아가 왕세자와 완벽히 갈라선 건 아니었다. 관계를 정리 중이라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엘리사가 집무실을 나섰다. 루펠라는 저게 도망친다며 방방 뛰었다.

    라골은 진저와 엘리사로부터 각각 들은 말들로 인해 줄리아가 부부에게 균열을 만든 원흉임을 알았다.

    그가 엘리사를 위로했다.

    왕세자와 줄리아는 어차피 맞지 않는 사이였다는 둥, 진저를 노리고 그리된 건 아니라는 둥, 아마 파혼의 결정적인 이유는 왕비의 텃세 때문일 거라는 둥 말을 늘어놓던 그가 엘리사의 안색을 살폈다.

    진저는 본래부터 피부가 어두운 편이었는데 훈련을 하거나 전장을 지휘하면서 더 그을려 하얗다는 말은 예의상으로도 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 뒤집어지는 구릿빛 피부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몸이 계속 안 좋으신 겁니까?”

    “아, 아니, 으…….”

    엘리사는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녀는 양팔로 배를 끌어안고 고통을 호소했다.

    라골은 진저의 침실로 엘리사를 부축해 왔다.

    엘리사는 라골이 가져다준 약을 먹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두통에 복통은 물론이고 이제 근육통까지 생기는 것 같았다.

    엘리사를 살피던 라골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그렇다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우선 진저는 건강했다. 영혼이 바뀌면서 스트레스가 심해져 이만한 병이 생겼다고 하기엔 정도가 심했다. 게다가 약이 듣지 않았다.

    그웬저의 닥터는 실력이 좋은 자였다. 란델뿐만 아니라 타국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명의였다.

    그런 자가 조제한 약이 조금도 듣지 않았다.

    ‘영혼이 바뀌면서 몸에 이상이 생겼나? 그럼 진저 녀석은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라골이 엘리사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원인은 스트레스가 맞았다.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분명 스트레스가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진저는 라골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마법서와 신학서를 뒤졌다.

    아내가 괜찮은가 확인하려던 것도 라골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는 고용인이 아닌 친구로 돌아와 ‘네 녀석은 와봤자 등신짓만 하겠지. 썩 꺼져라’ 하고 핀잔을 주었다.

    진저는 이도 저도 못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절실히 느꼈다.

    한심하다, 한심하다 했지만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답 없는 새끼일 줄은 몰랐다.

    그 아비에 그 아들.

    진저가 질색하는 말이었다. 누구든 그 앞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하면 즉시 혀를 자르고 눈알을 뽑았다.

    신분이 높아 당장 처리하기 어려울 땐 뒤에서 움직였다.

    지금 와서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은 딱 아비만큼 역겨웠다.

    하루 종일 책을 뒤졌으나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몸이 바뀌는 저주라는 것 자체가 들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가 씨근덕거리며 책장을 엎었다.

    후에 난장판이 된 서재를 본 하인들은 마님이 이 난리를 쳐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인님께서 또 염병을 부리셨군’ 하며 무너진 책장과 바닥을 뒹구는 책을 정리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재 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 건 진저였으니까.

    설상가상 저택에 왕비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귀부인들을 미혼의 숙녀들에게 소개하고 서로 이끌고, 따를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초대자 목록을 확인한 진저가 인상을 썼다. 초청한 귀부인이 트라노이 공작 부인과 쉴라 백작 부인, 그리고 아내뿐이었다.

    이렇게나 소수이면 불참이 어려웠다. 왕비와 척을 지는 게 무에 두렵겠냐마는 수습은 진저의 몫이 아니었다.

    왕비의 진노를 받아내야 하는 건 아내였다.

    가뜩이나 스트레스로 아픈 아내에게 다른 것까지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진저는 참석하겠다는 편지를 써 왕궁에 보냈다.

    그리고 이틀 뒤, 진저는 왕비의 티파티에 참가했다.

    그리고 왕비가 갑작스레 아내를 초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왕비는 트리거 공작의 비호 아래 있는 줄리아를 쫓아내고 싶었지만 목적을 이루니 덜컥 겁이 났다.

    한미한 친정은 트리거가의 진노를 받는다면 늦가을 낙엽처럼 맥없이 바스러질 터였다.

    구명줄을 마련해야겠는데 그웬 공작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웬 공작 부인이 떠올랐다.

    모의 전투를 볼 수 있는 대연회장에 그녀도 있었다.

    천하의 진저 그웬이 사색이 되어 숨도 고르지 못하고 아내를 찾아다녔다.

    그웬 공작이면 능히 트리거 공작과 대적 가능하리라.

    그래서 왕비는 아내와 친목을 다지고 싶어 한 것이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을 초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쉴라 백작 부인은 연로한 남편 대신 집안을 책임지는 여걸이었다.

    왕비의 시커먼 속이야 별문제 아니었지만 초대객 중에 줄리아가 있다는 건 문제였다.

    파티 시작 때에 딱 맞춰 도착한 줄리아는 왕비 곁에 앉아 있는 진저와 눈이 마주쳤다.

    왕비는 파티 내도록 트라노이 공작 부인과 진저에게 상냥했다.

    그러면서도 줄리아를 견제했다. 시종일관 진저를 챙기며 줄리아를 흘끔거리거나, 그웬 공작 부인과 줄리아를 은근히 비교해가며 창피를 주었다.

    초청객 모두에게 불편한 파티였다.

    오죽하면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제 몸 핑계를 대고 일찍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배가 불편하다고 할게요. 부인이 절 도와준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그나마 진저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트라노이 공작이 원체 궁 내 권력 구도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진저에게 속닥거리던 그때 왕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웬 공작 부인이 부군과 참 다복하지. 모름지기 결혼이란 그래야 하오. 그전에 마음을 나누지 않았어도 남편과 원만히 지내고 시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며 가정에 불화가 없어야 하지.”

    줄리아를 조롱하기 위한 말이 분명했다.

    “다들 새겨 두시오.”

    눈치 없는 미혼의 레이디들은 고개를 숙였지만 귀부인들은 달랐다.

    왕비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왕비가 다정히 웃으며 진저에게 말을 붙였다.

    “그웬 공작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 들었소.”

    “아닙니다. 내부를 살피시느라 외부 일정을 줄였을 뿐이지요.”

    줄리아가 진저를 묘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러더니 파티 내내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줄리아와 진저는 서로를 마주 본 채 앉아 있었다.

    “각하께선 피로하실 때면 눈이 쉬이 충혈되십니다. 부인, 동대륙의 삼이 눈 건강에 좋다고 들었습니다. 보낼 터이니 끼니때마다 챙겨주세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진저와 줄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줄리아의 말은 몹시 무례했다. 그녀가 그웬 공작 부인보다 그를 더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왕비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녀뿐만 아니라 트라노이 공작 부인, 그리고 쉴라 백작 부인 또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쉴라 백작 부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인 쉴라 백작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 그녀의 속을 까맣게 태웠던 전적이 있었다.

    백작 부인이 마뜩잖은 듯 헛기침을 했다.

    줄리아는 왕비나 다른 귀부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간 왕비의 무례에 침묵하였던 이유는 그녀가 약혼자의 모친이었기 때문이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험담을 들을까 봐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트리거 공작가의 영애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가 무례하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해를 가할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하고자 하면 변명이 가능했다.

    부친의 제자여서 어릴 적부터 교류가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그웬 공작과 막역한 사이라 걱정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등의 핑계가 있었다.

    모두가 침묵하였던 그때, 미혼의 레이디들 사이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냈다.

    “무례인 것 맞죠?”

    로웨나 데탕스였다. 진저가 된 엘리사로부터 손수건을 받은 그녀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웬 공작은 나를 좋아하고 있어!’

    바뀌기 전의 진저는 전혀 타입이 아니었지만 진저가 된 엘리사는 딱 그녀가 그리던 이상형이었다.

    다정하고, 사려 깊고, 친절하고, 말도 예쁘게 했다.

    남성들은 여성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곧잘 무시하였는데 변한 그웬 공작에게선 그런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웬 공작 부인은 원래부터 호감이 갈 만큼 인상이 좋기도 하고 그의 아내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소유권을 주장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여자라면 말이 달랐다.

    ‘제가 공작 영애면 다야?’

    루펠라로 인해 공작 영애들에겐 유감이 많았다.

    “왜들 말이 없어요? 무례한 언사잖아요. 제가 사교 활동을 오래 하진 않았어도 그쯤은 안다고요. 무례를 범하신 거 맞죠? 네?”

    일부러 무례를 몇 번이나 입에 담았다.

    줄리아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설마하니 저렇게까지 맹랑한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로웨나와 줄리아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회장의 모든 시선이 줄리아에게 집중되었다. 결국 그녀는 그웬 공작 부인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부인. 어릴 적부터 막역한 사이인지라 걱정이 되어 그만.”

    “흥.”

    로웨나가 코웃음을 쳤다.

    “데탕스 영애, 전하께서 계시는 자리입니다. 불경한 행동은 삼가세요.”

    줄리아의 날이 선 말에 로웨나는 입을 가렸다.

    “어머나, 큰 실수를 했네요.”

    표정에서 ‘그럼 너는 약혼자의 모친 앞에서 무슨 짓이냐’ 하는 것이 느껴졌다.

    괜히 루펠라와 원수 사이인 게 아니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안절부절못하며 영애들의 설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왕비는 별말이 없었다. 은근히 로웨나의 말에 속이 시원해 보였다.

    파티는 이르게 파했다. 다른 사람들이 왕궁을 떠나는 동안 진저는 왕비에게 붙들려 있었다.

    왕비는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연회장에서 모의 전투를 관전하며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느니, 확실히 왕족이라 그런지 기품이 남다르다느니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자주 들러주게. 우리는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게야.”

    왕비가 진저의 손을 문지르며 웃었다.

    진저는 이래서 국왕이 그녀에게 애정을 내주지 않은 거로 생각했다.

    객관적으로만 보면 왕비는 란델의 전통적인 미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타국의 미인상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아직도 중·노년층은 란델의 전통적인 미인을 선호했다.

    왕비가 그랬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쌍꺼풀이 진하며 코가 오뚝하고 입술이 얇았다.

    중년이 된 지금도 미모는 전부 바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왕이 그녀를 멀리하는 건 그녀가 멍청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트리거 영애라는 굉장한 패를 견제한 것부터가 무지를 증명했다.

    현왕의 나이 아직 마흔이었다.

    역대 왕들의 평균 서거 나이는 예순에서 일흔.

    다시 말하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돌봐줄 여력이 충분하다는 소리였다.

    왕세자가 유일한 적출 남아라 자신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후계를 공고히 하여 불상사를 방지해야 했다.

    불상사를 방지하기에 트리거 공작의 딸보다 좋은 패는 없었다.

    무사히 결혼만 한다면 현왕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권력을 손아귀에 넣게 될 터였다.

    그런데 한낱 내궁의 권력 싸움이나 하고 앉았으니 왕세자 입장에선 얼마나 복장이 터지는 일인가.

    왕비는 진저를 한 시간가량이나 붙들고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았다.

    제대로 속을 숨기지도 못했다.

    “내겐 공작 부인이 필요하네. 나 또한 공작 부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사교계에서…….”

    계속해서 서로의 쓰임을 논했다.

    왕비는 왕궁에서 쫓겨나지만 않는다면 아내가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얼굴을 볼 사람이었다.

    자신만 생각한다면 이런 짜증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서겠지만, 아내 생각을 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씨발…….’

    그는 속으로 백하고도 서른두 번째 쌍욕을 했을 때가 되어서야 왕비에게서 풀려 날 수 있었다.

    그녀는 직접 배웅을 해주며 주에 한 번씩은 들러 달라 청하였다.

    내성을 나선 진저가 마차에 오르지 못하고 허리를 구부렸다.

    내성을 나서면서부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더니 갈수록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내의 몸은 짧은 일정이라도 외부에 나가는 일이 있으면 곧잘 지치곤 하였다.

    그런데 이 고통은 피로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통증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머릿속의 퓨즈가 껐다 켜졌다 반복하는 것처럼 눈앞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마치 혼의 고통이 전이되기라도 하듯이.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진저의 예상대로였다. 저택의 고용인들이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서둘러 아내가 있는 침실을 찾았다.

    콕스가 닥터와 함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닥터는 안색이 누렇게 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콕스가 드물게 노한 표정으로 다그치는 중이었다.

    “의사가 까닭을 모르면 누가 안다는 말씀이십니까!”

    닥터, 테슬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육중한 몸을 바짝 웅크렸다.

    “무슨 일이냐.”

    “마님.”

    콕스와 테슬러가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안사, 아니, 각하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냐.”

    안 그래도 오금이 저린데 공작 부인까지 등장했다. 테슬러는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저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아내가 아무리 거절했어도 진찰을 받게 해야 했다.

    곧 나아질 거라는 말을 믿어선 안 됐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그, 그게…….”

    진저의 서슬 퍼런 눈빛에 테슬러가 말을 더듬었다.

    닥터 테슬러가 누구인가. 살린 환자의 수는 셀 수 없고 먼 나라에서도 가르침을 청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가 모르는 병은 없었다. 정말 이상했다. 맥은 분명 정상인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고용인인 라골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복통과 두통을 자주 호소하시고 음식을 넘기지 못하셨다고 한다.

    증상을 유추해 병을 알아보려 해도 너무 복합적이었다.

    무엇보다 환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제대로 된 진찰이 불가했다.

    그로서도 고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테슬러는 그웬 공작에게 목숨 빚이 있었다. 제 목숨뿐인가. 처자식부터 조모, 조부, 증조모, 증조부, 이름도 모르는 친인척들의 목숨까지 죄 빚을 지었다.

    재주가 죄였다. 귀족, 왕족 할 것 없이 아플 때면 가장 뛰어난 의사를 찾았다.

    테슬러는 신의 손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의사였고 병자들의 수준이 굉장한 만큼 검은 손길도 많았다.

    ‘약에 독을 섞어주게.’

    ‘내가 언제 죽이라고 하였나. 치료를 조금 늦추면 반병신이 되지 않나.’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은혜는 개뿔이. 돈에 눈먼 동생이 그 몰래 귀족의 약에 독을 섞었는데 일이 잘못 흘러 타국의 귀빈을 상하게 하고 말았다.

    의사이길 망각한 자는 삼족은 물론 가문의 씨를 모두 멸하는 것이 란델의 법이었다.

    그는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일했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다 보니 단 것, 짠 것을 입에 달고 살아서 젊을 때의 훈남은 다 사라지고 톡 치면 데굴데굴 구를 것 같은 아저씨가 되었다.

    이 정도로 열심히 살았으면 다른 건 못 줘도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게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늘을 원망하고 있을 때 진저가 나타났다.

    ‘네놈 재주가 이 나라 제일이라지.’

    진저 그웬은 전장의 마귀, 란델의 미친개라 불리는 사내였지만, 죽을 날을 받아놓은 테슬러까지 두렵게 할 순 없었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어차피 죽을 거 할 말은 다하고 죽자고 생각했다.

    ‘흥, 지상 제일이오.’

    콜.

    진저는 테슬러를 살려주고 공작가 의사들의 수장 노릇을 맡겼다.

    진찰할 때마다 다리가 달달 떨리고 이러다 내가 죽겠소, 곡소리가 나왔어도 은인이었다. 어찌 이대로 죽이고 싶겠는가.

    하지만 도무지, 도통, 전혀 모르겠다.

    “어찌 된 일인지 묻지 않았는가!”

    부부가 어쩜 저리 똑같을까. 사람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이 판에 찍은 것 같았다.

    테슬러는 벌벌 떨다가 납작 엎드렸다.

    “용서하십시오, 마님! 도저히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진저는 테슬러의 능력을 인정했다. 전쟁에서 얻은 자상이 곪아 사람 구실을 못 하던 하우벡을 말끔히 고쳐 놓은 게 테슬러였다.

    이 정도의 명의가 까닭을 모른다면 필시 저주 때문이었다.

    “열흘, 아니, 일주일, 아니, 나흘만 주십시오! 그 안에 반드시 병을 알아내겠습니다.”

    꺼이꺼이 오열하는 테슬러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에 들어갔다.

    하인들과 라골이 아내의, 아니, 자신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았다.

    경련 중에 혀를 깨물까 봐 조치해 놓은 듯싶었다.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진저가 라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저주 때문일 수도 있고……. 마님이 쓰신 스크롤 말이다.”

    모의 전투 때 썼던 스크롤을 말하는 건가.

    “코발트로 만들었던데 혹시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코발트라면 마력을 최대치로 이끌어내는 것으로 마영석의 한 종류였다.

    아내는 평범한 사람이 쓸 수 있는 마도구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발동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마력은 필수라 코발트를 써서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듯싶었다.

    “일반 사람보다 마력이 낮은 게 아닐지도 몰라.”

    “무슨 헛소리야? 루펠라는 아무렇지 않게 쓰던 호신용 마법 아이템을 제대로 발동시키지도 못 했다.”

    “마도구가 제대로 발동하지 않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어. 하나는 모두가 알듯이 마력이 부족해서. 또 하나는…….”

    두 번째 가능성은 사실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서적을 찾고, 생각을 거듭해도 짚이는 건 이것뿐이었다.

    “마력이 너무 강해서 조절이 안 되는 거지.”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어.”

    “네 시동이었을 적에 트리거 공작 각하께 트리거저 서재에 출입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었잖아. 기억나?”

    기억난다. 트리거 공작은 주인이 훈련을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땡볕에 서있는 라골을 안쓰러워하였다. 그래서 훈련 때엔 서재에서 책을 읽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서재 안쪽에 봉해진 방이 있었다.”

    언젠가 트리거 공작이 그 방을 잠그지 않았던 적이 있는데 어린 마음에 그 안이 궁금하여 들어갔었다.

    각종 마법서 및 신학서, 신화와 고대 민족에 대한 조사집까지 실로 놀라운 책들이 가득했다.

    그때 읽었다. 고대 어느 민족에선 일반 마법사와 비교되지 않는 강력한 마력을 지닌 자들이 태어난다고.

    “내 안사람이 그 민족 출신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알아. 그 민족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그란디아의 왕족이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엄청난 마력을 지닌 자들은 일반 마법사들이 만든 아이템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거다.”

    하지만 아귀가 맞았다.

    그 민족은 성수와 공명하여 엄청난 힘을 발휘했는데 그 힘을 두려워한 자들이 연합하여 민족을 모두 도륙했다고 한다.

    진저가 성수라 불리었던 기하스엘의 피를 뒤집어쓰고 돌아온 후 부부의 몸이 바뀌었다.

    라골은 이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았다.

    애초에 그 민족이 진정 존재했는지에 대해 확인되지 않았다.

    진저는 고민을 거듭했다. 라골이 제시한 가설이 완전히 신빙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마님에게서 마력을 빼앗아 확인을 해야 하는데 위험…….”

    “아니.”

    진저의 시선이 창문에 비친 아내의 본래 몸으로 향했다.

    지금 그녀의 몸을 차지한 건 그였다. 다시 말해 가설대로라면 진저의 몸이 된 ‘엘리사’가 아닌 엘리사의 몸이 된 ‘진저’에게 마력을 빼앗아야 했다.

    “마크빌이 마도구를 관리하고 있을 거다. 그중에 마력을 빨아들이는 도구가 있어. 가져와라.”

    위험하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님의 상태가 위중했다. 크게 한숨을 내쉰 라골이 방을 나섰다.

    마크빌에게 마도구를 받은 라골은 바로 진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급히 편지를 써 마탑으로 보냈다.

    만약을 대비해 마탑에 있는 진저의 지기, 리한을 불러와야 했다.

    마도구로 인해 진저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므로.

    마도구를 받은 진저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마도구 사용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을 뒤졌다.

    마법사를 제압하기에 용이하여 가문의 보물처럼 여겨졌으나 사용자에게 큰 해를 미쳐 백여 년 전부터 효용을 잃었다.

    진저에겐 더 위험했다. 본인의 몸에 담긴 마력을 빼앗기 위하여 스스로가 발동을 하는 것이니만큼 위험도는 두 배가 아닌 그 열 배에 육박했다.

    함께 마도구의 사용법과 효과에 대해 확인한 라골이 그를 뜯어말렸다.

    이 방법을 말해준 자신의 입을 꿰매고 싶었다.

    “위험하다니까!”

    “정신 사납게 할 거면 꺼져.”

    그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환장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겠냐.”

    이보다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 독화살을 여러 대 맞은 채 진영으로 복귀했던 적도 있고, 불과 여덟 살 나이에 암살자 손에 의해 살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진저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 그리고 라골은 리한이 서둘러 그를 찾아와주길 바랐다.

    리한의 조부는 마탑주였다. 조부보다 높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리한이 있으면 이 미친 짓 말고 다른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한이 그웬저를 찾은 건 이미 진저가 마도구를 발동한 후였다.

    발동 장소는 지하였다. 지하가 한 순간 환해지더니 그윽그윽, 땅이 울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저택이 흔들렸다.

    라골이 눈을 떴을 때는 진저, 아니, 엘리사의 몸이 마법진 안에 쓰러져 있었다.

    * * *

    진저에 이어 엘리사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저택이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한차례 전보다 더한 소란이었다. 하녀들이 눈시울을 붉힌 채 엘리사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리한이 도착했다. 부부가 나란히 혼절했다는 말을 들은 그는 말했다.

    “너…… 멍청이야? 의사를…… 불러.”

    사람 속 터지게 하는 말투는 여전했다.

    라골은 고민하였다. 이 일을 진저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발설해도 되는가.

    처음엔 마도구를 발동했다가 바로 목숨을 잃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진저는, 아니, 마님의 몸은 숨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에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스크롤이 오 발동된 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부부…… 가…… 쌍으로…… 누워 있어……? 무슨…… 쇼…… 라도…… 하는…… 거야……?”

    말투는 어눌한 주제에 할 말은 다했다.

    라골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를 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설명을 한다고 쳐도 그걸 과연 믿을까 싶었다.

    “어쨌든 마님은 마도구가 잘못 발동되어 마력을 빼앗기셨고, 주인님은…… 옆에 있다가 말려 드셨습니다.”

    “……미친.”

    리한은 일단 공작 부인을 살폈다. 엘리사의 마력을 확인하고 맥을 잡았으며 기가 잘못 돌지 않았는지 확인한 그는 눈썹을 까딱였다.

    “……마력을…… 빼앗겼다고……?”

    “예. 그런데 말씀 좀 빨리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골이 이를 갈며 말했다. 리한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라골의 말대로 마도구 때문에 쓰러진 건 맞다. 마력의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력을 빼앗긴 건 아니었다. 일반 사람보다 훨씬 웃도는 마력이 느껴졌다.

    “……공작…… 부인…… 이혼하면…… 마탑으로…….”

    “안 하십니다!”

    라골이 버럭 소리쳤다.

    “대우는…… 잘…… 해주겠다고…….”

    “안 하신다니까요! 평생 함께 사실 겁니다.”

    제 부인도 아니면서 성질이었다.

    리한은 엘리사를 살핀 후에 진저의 몸을 하고 있는 엘리사를 찾았다.

    리한이 눈이 시리다는 듯 인상을 썼다.

    양 뺨에 홍조가 오른 채 두 손을 얌전히 포갠 지기의 모습은 보기 역겨웠다.

    “……이…… 새끼…… 돌았어……?”

    “…….”

    라골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섬뜩한 광경이었다.

    리한이 패고 싶다는 듯이 손을 추어올렸다.

    “아, 안 됩니다!”

    진저라면 몰라도 지금 저 몸엔 마님의 혼이 있었다.

    라골이 필사적으로 그를 뜯어말리려 했을 때였다.

    누워 있던 진저의 몸이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일어나…… 있었으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어깨를 주물렀다.

    “이 새끼 누가 불렀어.”

    ‘마님?’

    아니, 진저다. 저 싹수 노란 말투는 절대 마님이 아니었다.

    진저가 목까지 얌전히 잠가놓았던 파자마의 단추를 풀었다.

    리한이 신경질적이 어투로 말했다.

    “……사람…… 오라 가라…… 하고…… 있어……. 죽을…… 라고.”

    사람이라기엔 너무 시퍼러딩딩한 안색이었다. 진저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내의 상태를 물었다.

    “……의사한테…… 물어봐…….”

    “네놈이 봤잖아.”

    아내와 몸이 바뀐 건 몇 분 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몸으로 누워 있으면서 리한의 기척을 느꼈다.

    어디가 크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온몸이 축 늘어져 눈이 떠지지 않았다.

    “……마력의…… 흐름을…… 되돌려…… 서…… 이제…… 곧…… 눈을…… 뜰…… 거다.”

    점점 가면 갈수록 말이 느려졌다.

    진저는 더 듣고 있다가는 속이 터질 것 같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라골이 죽는소리를 해서 불러온 마탑의 후계를 버려둔 채 방을 나섰다.

    목적지는 당연히 아내의 방이었다.

    엘리사가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진저가 제 몸에서 눈을 뜰 때의 자세 그대로.

    베개를 베고 색색 숨을 내쉬었다. 숨결이 이전처럼 거칠지 않았다.

    진저는 아내의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확인하고 다른 이상이 없는지를 살폈다.

    몸이 바뀐 건 행운임과 동시에 불행이었다. 마도구를 발동한 상태에서 몸이 바뀌면 자연히 아내에게 온 충격이 가게 되었다.

    아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달게 자고 있는 아내의 손을 한 번 꾹 쥐었다가 놓아줬다.

    그는 아내가 앓는 동안 심장이 멎을 뻔했다는 게 어떤 건지 절감하게 되었다.

    라골의 가설이 맞았다. 코발트로 인해 아내의 마력이 폭주했기 때문에 몸이 아팠던 것이다.

    이상한 건 그렇다면 혼이 아닌 육체가 아파야 했는데 정작 아내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는 멀쩡했다.

    왕궁에서 나설 때만 잠깐 고통을 호소했을 뿐이었다.

    그때 닥터 테슬러가 진찰 도구를 가지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왔다.

    맥박 정상. 호흡 정상. 체온 정상.

    아내를 살핀 테슬러가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닥터 테슬러는 반나절 만에 건강을 회복한 진저를 속으로 욕했다.

    어째 아무 이상이 없었다.

    ‘술이라도 푸지게 마셔서 그 지경이 되었나 보군.’

    이 반나절 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테슬러는 아내를 보고 있는 진저를 몰래 흘겼다.

    “다른 이상은 전혀 없는 건가.”

    “예. 피로가 누적되신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으십니다. 피로에는 영양제를 처방할 테니 끼니때마다 챙겨 드시도록 하십시오.”

    거듭해서 아내의 건강을 확인한 그가 허리를 폈다.

    그런데 단단한 것으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윽.”

    진저가 미간을 좁혔다.

    “각하, 어디 안 좋으십니까?”

    “됐다.”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진저는 닥터와 콕스에게 아내를 맡겨 놓고 리한을 배웅하러 나왔다.

    표정 없기로 유명한 리한도 진저가 직접 배웅을 나오자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미쳤…… 어?”

    다른 때라면 배웅은커녕 ‘가라’ 한 마디가 끝이겠지만 물을 게 있었다.

    “고통이 타인에게 옮겨가는 경우도 있나?”

    “……무슨…… 헛소리야?”

    마지막으로 혹시 혼이 바뀌는 마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리한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그가 물은 것에 대해 두 번 생각지 않을 놈이었다.

    무엇보다 세속의 가치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탑주의 손주인 만큼 재물은 남부럽지 않게 있을 테고.

    안다 해도 이것으로 무얼 얻어내야겠다고 여기지는 않을 터였다.

    “……뭐?”

    “몸이 바뀌는 마법, 들어본 적 있냐고.”

    “미친…… 새끼.”

    ‘시발…….’

    ‘죽을라고’부터 ‘돌았어?’에 ‘미친 새끼’라고 쌍욕까지 먹은 진저는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단거리 이동 스크롤을 꺼내던 리한이 멈칫하였다.

    “스트레스는…… 그만…… 받도…… 록 하는 게…… 좋아.”

    리한은 남의 스트레스에 관심을 가질 만한 놈이 아니었다.

    “마법…… 은…… 육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정신…… 적인…… 힘이…… 더 크게…… 작용하지. 공작 부인의…… 몸은…… 마력에…… 영향을 받은 데다가…… 스트레스로…… 흐름이…… 완전히…… 뒤틀렸었어.”

    그 말을 끝으로 리한은 공작저를 떠났다.

    진저는 밤이 깊도록 아내를 살폈다. 갈수록 안색이 나아지고 있었다.

    아내의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의 성정을 안다. 누군가에게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선하고 맑은 그의 아내는 그동안 받은 상처가 너무 커 남의 고통마저 안타까워했다.

    그런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최악이라 말했다.

    절벽에 몰리고 몰려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었다.

    마력은 섬세하게 컨트롤해야 하는 것이었다. 스트레스는 쥐약과 같았다.

    리한의 말을 듣고 스트레스가 마력의 흐름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았다.

    고뇌로 머리가 하얗게 셌던 어느 마법사는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심장이 터져 죽고 말았다.

    마력의 흐름이 뭔지, 정확히 어떻게 심장이 터졌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를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스승은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왔고 그간의 침묵은 의미를 잃었다.

    일전에 라골이 물었다. 엘리사에게서 줄리아를 겹쳐 보고 있느냐고.

    인정한다. 비슷한 감정이었다.

    줄리아는 스승의 딸이었고 지기의 동생이었으며 평생 처음으로 지켜주고 싶던 여자였다.

    하지만 엘리사가 이처럼 앓는 것을 본 뒤로 줄리아와 그녀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가 지켜야 하는 건 아내였다.

    몇 시간을 아내만 보고 있던 진저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더니 푸른 눈동자가 조금 드러났다.

    반짝이는 눈을 보며 진저는 작게 웃었다.

    “간 줄 알았는데…….”

    잠긴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안 가.”

    “거짓말…….”

    “정말이야.”

    “그 여자에게 갈 거잖아요.”

    엘리사가 입술을 깨물자 진저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잡았다.

    “당신 곁에 있을 거야.”

    그녀의 곁에 있기로 했다. 그녀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녀는 소중하다는 것이다.

    “당신은 내게 새로운 것을 많이 가르쳐 주는군.”

    엘리사는 말없이 그의 손에 뺨을 기댔다.

    * * *

    다음 날, 진저는 트리거저를 찾았다.

    그가 왔다는 소식에 줄리아는 기쁨에 겨워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돌아올 줄 알았어.’

    왕세자와 파혼을 한다는 소문을 퍼뜨린 건 그가 자신을 찾아와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줄리아는 매무새를 매만졌다.

    어제 머리를 손질해 둘 것을 그랬다. 어쩐지 평소보다 푸석푸석해 보였다.

    다음에 그를 만날 땐 머리뿐만 아니라 피부도 관리받아 놓기로 하였다.

    매혹이라는 브랜드를 만든 고든이 굉장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체크를 마친 줄리아가 그가 기다리고 있는 정원을 찾았다.

    그는 정원에 서서 막 돋아나는 중인 풀잎을 보고 있었다.

    줄리아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등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투정을 부리듯 속삭였다.

    “옛날에도 자주 이랬는데. 기억나? 진, 네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으면 내가…….”

    진저가 제 허리에서 그녀의 손을 떼 내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줄리아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아직 화났어? 알아. 화났을 거야. 내가 나빴어.”

    그가 이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에겐 차갑고 무심한 사람이었지만 그녀에겐 아니었다.

    “네가 모르는 일이 있어. 너도 그 일을 안다면 내가 어째서 너를 놓았는지 이해할 거야.”

    진저는 애처롭게 소리치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꾸만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줄리아는 그가 자신을 찾을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기 위해서.

    “진저. 내가 너한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떠올려 봐.”

    줄리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품을 찾았다.

    “나도 힘들었어. 너만큼, 아니, 너보다 더 괴롭고 아프고……. 오죽했으면 염치없이 너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겠어.”

    그녀는 처절하게 매달렸다.

    “난 괜찮아. 네가 공작 부인을 버릴 수 없다면 함께……!”

    모든 자존심을 다 버렸다. 줄리아는 그의 사랑을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와 만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여자와 자신이 같을 리 없었다.

    “이제 오지 마.”

    “진저!”

    “더 이상 내 아내를 찾지 말고, 내게도 연락하지 마. 마주쳐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지나쳐.”

    “그 여자가 뭔데!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의 옷깃을 붙잡은 줄리아의 손이 떨렸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이 상황이 혼란스러워서 멀어지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공유한 감정 전부를 부정하는 건 용납이 안 됐다.

    그가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이듯이 그 또한 그녀를 특별하게 여겨주었다.

    줄리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운 얼굴이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진저는 줄리아의 젖은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해할 수도 있어. 네가 내게 너무 크게 실망해서…… 그래서……!”

    “처음으로 사람다운 선택을 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암살자가 나타나고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이 목전에 들어왔다.

    아이는 검 앞에 무력했다.

    루펠라와 라골은 트리거 남매를 감싸는 이유가 이해득실 때문이라 여겼다.

    길리안은 지기의 정이라 여겼으며 줄리아는 사랑 때문이라 여겼다.

    모두 아니었다.

    “암살자에게서 나를 구해 주시고 자랄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준 그분을 위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다운 선택을 했어.”

    그에게 트리거 공작은 어두운 토굴에 비추는 한줄기 빛이요, 열리지 않는 철문의 열쇠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외면하는 사생아를 가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자로 들였다.

    가식 없이 오직 진심만으로 아이를 대해 주었고 지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어주었다.

    그래서 평생에 단 한 번쯤은 반편이가 되어주자고 생각했다.

    나서 자라 죽을 때까지 마귀처럼 살아야 할 테니 단 한 번만은 사람답게 은혜를 갚아보자고.

    “그게 너다.”

    줄리아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을 골랐다.

    그녀는 영리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할 여자가 아니었다. 다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몰라서…… 몰라서 그래. 여태까지 사랑이 뭔지 모르고 컸으니 당연히 네 마음을 자각하지 못할 수 있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리는 그녀가 더 이상 안쓰럽지 않았다.

    약혼식 이후 줄리아는 남은 게 하나도 없어서 곧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자신은 어떤 눈으로 보았던가.

    그 이전에는? 그녀와 결혼을 결심할 때는 어떤 마음이었던가.

    줄리아가 어떤 감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또 자신의 감정을 무엇으로 추측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주위의 모두가 줄리아를 향한 마음은 사랑이라 말했다.

    그만큼 희생한 것, 천하의 진저 그웬이 모지리가 된 것.

    모두가 그녀를 향한 마음의 반증이라 외쳤다.

    진저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엔.

    그녀라면 좋은 동반자가 되어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기처럼, 때로는 동생처럼.

    라골의 말이 맞다. 그는 엘리사를 줄리아에 빗대 보았다.

    줄리아와 결혼하려 했을 때의 마음가짐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서 그녀가 지기가 되고, 동생이 되길 바랐다.

    엘리사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줄리아를 향한 감정을 자각하지 못한 건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진정 그렇지 않았기에.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 말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말해줄게. 너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래서 네가 실망했다면 말해줄 수 있어!”

    “알고 있어.”

    줄리아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에 힘을 주었다.

    무엇을? 어떤 것을? 그녀가 힘들었다는 걸 이해한다는 뜻일까. 줄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뭘 안다는 거야?”

    진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럼 그렇지. 가장 중요한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가문의 치부를 발설할 만한 자는 없었다.

    줄리아가 숨을 골랐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네가 나를 떠난 이유.”

    줄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럴 리 없다. 그녀를 포기시키려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혹시나 정말 그가 알고 있을까 봐, 그래서 자신과 멀어지려는 걸까 봐 겁이 나서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너와 결혼을 결심했던 날, 공작 부인이 날 찾아왔다.”

    트리거 공작과 대화를 마친 공작 부인은 남편마저도 진저와 줄리아를 이어주려 한다는 것에 절망했다.

    그녀는 폭행의 당사자였다. 그 끔찍한 날이 드러날까 봐 평생을 불안 속에서 살아왔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건 세간의 입방아도, 끔찍한 날의 기억도 아니었다.

    혹시 남편이 마음을 바꿔 그녀와 갈라서려 들까 봐. 그녀를 더럽다고 여기게 될까 봐.

    그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던 트리거 공작 부인은 딸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딸이 진심으로 진저를 사랑한다는 건 어미인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찾아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딸을 지켜줄 건지.

    진저는 그렇다고 답했다.

    「줄리아가 각하의 딸이 아니어도?」

    이전 물음엔 지체 없이 답하던 진저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공작 부인을 보았다.

    「내 딸의 출생이 그릇되어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 딸이…… 강간마와 피가 섞였어도 결혼을 할 생각이냐고 묻는 거네.」

    실금 같은 상처도 없이 키운 귀한 딸을 고작 사생아 따위와 결혼시킬 수 없다는 오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몹시 간절했다.

    「난 그웬 공작과 내 딸이 결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어미로부터 이미 큰 짐을 물려받은 아이야. 이 일이 드러나 공작의 출생과 함께 언급되는 걸 바라지 않아.」

    그는 묻고 싶었다. 그럼 어째서 그리 간절하게 보느냐고. 진정 하고 싶은 말이 결혼시킬 수 없다는 게 맞느냐고.

    아니었다.

    공작 부인이 그를 찾은 이유는 안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딸을 지켜주겠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진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트리거 저를 드나들었다. 남편과 자식들이 그에게 마음을 준 만큼 그녀 또한 진저를 아꼈다.

    장성하여 작위까지 물려받은 그는 트리거 공작 부인의 눈엔 아직도 아이였다.

    아들과 함께 사고를 치고 혼이 나던 꼬마.

    다정한 눈길에 어쩔 줄 몰라 하고 털을 바짝 곤두세우던 작은 아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그가 딸과 결혼하여 진정 자식이 되는 게 어떻게 불안하기만 하였겠는가.

    기쁘고 고마웠다.

    그래서 더 반대를 외친 것이다. 딸만큼 그도 걱정되었으니까. 자신의 치부로 인해 진저까지 고통받는 게 걱정되어서.

    “네 출생을 들었고, 우리 결혼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씀드렸다.”

    그래서 줄리아를 잡았다. 그깟 일 때문에 스스로 어긋난 길로 향하는 게 싫었다.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다. 세간의 손가락질쯤이야 그들 손을 죄 잘라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사랑은 아니었어도 평생을 함께할 만한 정이 있었다.

    “하…….”

    줄리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남자를 버린 것이다. 이런 남자를 버리고 산지옥을 선택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친이었다. 부친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쯤은 예상했다는 듯이. 딸을 보는 눈이 담담했다.

    모두가 모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진정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얼마나 무지한 것인가.

    왜 홀로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던가.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약혼하고 너를 찾아갔을 때, 어째서 나를 안아줬니. 가여워서?”

    “아니.”

    “그럼.”

    “안아달라고 했으니까.”

    그녀는 울었다. 울면서 웃었다.

    진실이 너무 무거워서 직접 이유를 말해주지 않은 채 그를 버렸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만이 희생자라 생각했다.

    그도, 부친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 치부해 버렸다.

    그런데 진정 홀로 감당하던 건 부친이었고, 진정 희생되었던 건 사랑하는 남자였다.

    줄리아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돌아가.”

    울음덩어리를 삼키고 눈물을 멈추었다.

    “원하시는 대로 하지요. 다신 각하와 공작 부인을 찾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포기할 수밖에.

    과오의 대가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다만 전부 묻을 수 있을 때까지 마음 정도는 머물게 해주세요.”

    진저는 그녀와 그녀 뒤에 있는 트리거 공작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말했다.

    “불허한다.”

    조금의 틈도 없는 완전한 이별이었다.

    * * *

    그웬저에 돌아온 진저는 바로 아내의 방을 찾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 식사 중이었던 엘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남편을 쳐다봤다.

    시중을 들던 하녀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주인님과 마님이 한동안 불편해 보이셔서 모두 걱정하였다.

    오죽하면 기사들까지 내저 고용인들을 볼 때마다 두 분 사이를 물었겠는가.

    한스 경은 아예 집사 콕스에게 ‘두 분 가둬두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하다가 곁에 있던 마크빌 경에게 얻어맞았다.

    남편이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스푼 끝을 매만지던 엘리사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새벽에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몽롱하여 꿈인 줄 알았는데 일어나보니 그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다.

    ‘내 옆에…….’

    마음을 전달할 수조차 없게 하던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그녀의 곁에 있어주겠다고 하였다.

    “약은?”

    “……먹었어요.”

    진저가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그녀의 무릎에 있던 쟁반을 가져왔다.

    직접 묽은 오트밀을 떠서 아내의 입가에 가져갔다. 아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제,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냥 먹어주면 안 되나.”

    “…….”

    “팔 떨어지겠군.”

    주저하던 엘리사가 입을 벌렸다. 진저는 계속해서 직접 오트밀을 먹였다.

    모이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스푼이 입가에 올 때마다 입을 벌리는 그녀가 귀여웠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진저는 쟁반을 협탁으로 치웠다.

    그녀의 침실엔 침묵이 감돌았다.

    엘리사는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진저는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할게.”

    뜻밖의 말에 놀란 엘리사가 또다시 눈을 크게 떴다.

    이대로 사과를 받으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엘리사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무얼요?”

    “당신 마음을 알면서 모른 체했어.”

    “……저는요.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에요.”

    진저가 아내의 눈을 보았다. 이불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던 엘리사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용기가 필요했다. 이미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그녀가 진심을 전달하는 건 처음이었다.

    “고백조차 할 수 없었던 게 슬펐어요.”

    “…….”

    “당신이 좋아요.”

    둔기에 얻어맞은 것 같은 격통이 그를 덮쳤다. 가슴과 등, 팔다리며 손까지 찌르르 울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곧은 말에 자신처럼 비겁한 자가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한참 침묵하던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엘리사, 나는…….”

    그녀가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보답 같은 건 바라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을 갖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건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자신감이 없어서도, 남편을 믿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된 건 필연이었다. 도망칠수록 더 단단한 족쇄가 채워졌고 그녀를 저 깊은 늪지로 잡아끌었다.

    그를 사랑하게 된 건 스스로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리라.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지금 말해도 될까요?”

    엘리사가 눈을 휘며 환하게 웃었다.

    “좋아하게 해주세요.”

    줄리아와 같은 바람이었다. 그러나 줄리아처럼 끊어낼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그는 어째서 이처럼 그녀가 신경 쓰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일을 알기 전엔 어떤 지기보다 줄리아를 아꼈고, 그 일을 알게 된 후에는 동정했다.

    줄리아가 그처럼 천지 분간 못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영리한 여자가 제 속을 모를 리 없었다.

    아내는 누구보다 특별했다. 그게 그녀가 바라는 것과 같은 마음이 아닐지라도 전우보다, 지기보다 특별했다.

    줄리아는 자신이 그의 첫 번째에서 밀려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거다.

    그녀의 반짝이는 푸른 눈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한차례 전보다 더 환히 웃었다.

    “저는 당신이 간절해요. 이제 당신 없을 삶이 상상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폐를 끼칠게요.”

    “무슨 뜻이지?”

    “당신도 저와 같은 마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이에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사랑해 주지 않느냐고 투정부리더라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항상 그의 눈치만 보던 아내가 처음으로 용기를 낸 순간이었다.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한숨 놓였다.

    불쾌해하면 어쩌지, 그래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쩌지. 노력하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불안했다.

    고마웠다. 타인에겐 악귀 같은 남자가 그녀에겐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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