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장 내 남편의 첫사랑(2)(4권) (12/31)

    레이디 비스트 4

    10장 내 남편의 첫사랑(2)

    며칠 후, 엘리사는 진저 대신 회의에 나서야 했다.

    미리 남편으로부터 회의에서 논의될 내용과 해야 할 얘기, 꼭 막아야 할 발의 등을 듣고 온 터라 예상보다 쉽게 회의를 넘길 수 있었다.

    그는 신년 회의에 대해 설명해 줬다. 얼굴을 비치고 각 계파의 유대를 다지기 위한 자리라며 회의 후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진저에게 줄을 대고 있는 몇몇 귀족이 술자리를 마련했다며 말을 붙였다.

    마시지 않더라도 자리는 지키고 있어야 했다.

    엘리사와 사내들이 주점으로 이동했다. 귀족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자들이 출입하는 곳이라 상점가 축제에서 들렸던 바켄 주점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주점의 마담이 호들갑을 떨며 그들을 방으로 모셨다.

    처음엔 술로 목을 축이며 이런저런 일 얘기를 나누었는데 방 안으로 몇 명의 여자가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내들의 곁에 여성들이 한 명씩 붙어 안주를 입에 넣어주는 등 야살을 떨었다.

    물론 엘리사의 곁에도 여자가 붙었다. 자신을 마리라고 소개한 여자는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어깨만 움찔거렸다.

    마리와 함께 들어온 여자들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엘리사와 마리를 훔쳐보았다.

    이것만으로도 남편의 소문이 어디까지 바닥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만이 남편의 다정함을 알고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그만큼 대단한 남자라면 응당 여성들이 달라붙어야 했는데 하도 소문이 나쁘다 보니 여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루펠라가 말했다.

    「그냥 개차반이면 눈 딱 감고 달려들겠죠.」

    그럼 남편은 그냥 개차반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엘리사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뭐, 여자가 붙을 때도 있죠. 누군가의 명으로, 혹은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 게 있어서. 하지만 진심으로 오빠를 원하는 여자는 없어요. 두려우니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그웬군은 텍스국과 프레스그 강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전쟁에 졸렬과 비열은 따지지 말아야 했다. 어차피 사람 목숨 뺏는 건 매한가지니까.

    텍스국은 정도가 심했다. 병사들을 해치는 게 아니라 식모부터 전쟁을 보조하기 위해 따라간 하녀들, 시동 등을 붙잡아왔다. 그리고 투항을 종용하며 성문 앞에 그들을 세워놓은 채 살을 저몄다.

    그 중엔 병사들의 친누이도 있었고, 어미도 있었으며 병사들의 제자를 자처하는 소년병도 있었다.

    인과를 따지자면 진저를 자극한 쪽은 텍스국이었다. 그들이 진저의 잔혹성을 드러내도록 만든 것이다.

    진저는 투항하지 않았다. 프레스그 강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물론이고 왕의 승인을 얻어 텍스국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왕좌에 앉은 진저는 출전에 동의한 귀족들이며 전투에 도움을 준 자들까지 모두 줄을 세웠다.

    진저는 벌벌 떨고 있는 자에게 처자식과 부모, 형제까지 칼로 저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혀를 깨무는 자들도 있었고 죽여 달라 애원하는 자들도 있었다.

    진저는 아름답게 웃으며 그들을 처벌했다. 참극이 끝난 건 닷새 후 아침. 텍스 국은 진저 울타리 안의 사람을 짐승처럼 저민 데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그의 나이, 고작 18세 때의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본 자들은 진저의 별명을 부정했다.

    저자의 별명이 미친개라고? 고작 미친개? 아니, 그는 악마였다.

    엘리사도 프레스그 전투 때의 진저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들었다.

    란델과 인접한 나라들뿐만 아니라 먼 그란디아에서도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몰랐다. 라골에게 물어도 프레스그 전투가 그웬군 악명의 시발점이라는 것만 말해주었다.

    ‘마님에게 보이는 모습이 주인님의 전부가 아닌 것만 알아주십시오.’

    그래서 당사자에게 그 일을 물었다. 그 얘기를 들은 진저는 여상하게 답했다.

    ‘선대의 사망 전이었거든.’

    엘리사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덧붙였다.

    ‘내가 살기 위해 본보기를 보였어야 했지.’

    그와 그 아래에 있는 자들을 해하려는 자가 얼마나 큰 화를 입는지.

    마리가 손을 벌벌 떨며 엘리사의 입가로 과일을 가져갔다.

    그웬 공작이 이 주점을 찾은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손을 들지는 않았지만 실수를 한 자는 마담에 의해 죽어 나갔다.

    웬만하면 거절하겠는데 안색이 시퍼런 것이 톡 치면 기절할 것 같았다.

    엘리사가 그녀의 손에 들린 과일을 쏙 빼내어 입에 넣었다.

    마리와 여자들, 귀족들까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러시오?”

    “아, 아니, 아닙니다!”

    “예예.”

    “과일 좀 더 내오거라.”

    엘리사가 몰래 입을 쭉 내밀었다. 그녀의 남편도 음식은 평범하게 먹는다.

    ‘정말 괴물은 아닌데.’

    가끔 괴물처럼 무서울 때는 있지만. 그건 결혼 초의 일이었고 지금은 귀여울 때도 있었다.

    술자리는 이르게 파했다. 평소와 다른 그웬 공작 때문에 긴장을 풀기 위해 술을 연신 들이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나하게 취해 ‘아, 각하가 이렇게 재미난 분인 줄 몰랐습니다’ 하고 떠들었다.

    그리 재밌는 일은 없었는데 왜들 저렇게 호들갑을 떠나 싶었다.

    대화의 9할은 여자와 아내, 자식의 이야기였다.

    자식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여자 이야기에는 끼어들 수 있었다.

    ‘역시 가슴이지요.’

    ‘이 사람이 뭘 모르는구만. 나이 들면 엉덩이가 최고야. 잡는 맛은 엉덩이를 못 이기지.’

    그 말에 후작의 엉덩이도 푸짐해서 잡는 맛이 있을 것 같다고 답해주었다.

    후작은 사색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잠자리에선 그저 오래 하는 게 최고지. 아, 우리 마누라쟁이가 그러지 않았겠어? 내가 오래 하는 거로는 따를 자가 없다고!’

    백작의 말을 들었을 때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란델에 오고 나서는 그런 성적인 농담을 듣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여자들은 오래만 하는 남자들이 일찍 시드는 남자보다 더 싫다고 말했다.

    여자는 아파 죽는데 저 혼자 좋아 죽는 게 꼴 보기 싫다고.

    그래서 엘리사는 남편이 꼴 보기 싫을 백작 부인을 위해 조언했다.

    ‘그거 욕이오.’

    또 사내들이 껄껄껄 뒤집어졌다.

    데탕스 후작이 아예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는 ‘2차’인가 하는 것을 부르짖었다.

    다른 사내들은 술이 다 깬다는 표정으로 쏙 내빼버렸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대하기 편했다지만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르니 더 무서웠다.

    데탕스 후작이 엘리사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따윽 하은즈안만 더 하십쉬다. 따윽 한 즈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따윽? 따오기? 새?

    남편은 근래 데탕스 후작에게 공을 들이고 있었다.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취미생활에 어울려 주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새가 보고 싶기도 했고.

    엘리사는 동물을 좋아했다. 왕궁에서는 키울 수 없었고, 그웬가에선 남편이 털 달린 건 질색을 하였다.

    그녀는 데탕스 후작과 함께 그의 저택으로 향했다.

    데탕스 후작 부인과 그 딸이 나와 진저를 환영했다.

    응접실에 술상이 마련되고 데탕스 후작은 혀가 꼬부라진 채로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렸다.

    따오기를 보여준대서 왔는데 따오기는커녕 따오기가 그려진 술병도 없었다.

    한 시간쯤 어울려 주다가 데탕스 후작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돌아갈 준비를 했다.

    새도 못 봤는데 남편에게 한 소리 듣게 생겼다.

    벌써 밤이 되었다. 후작 부인은 엘리사가 이렇게 일찍 돌아갈 줄 몰랐는지 외저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가주가 인사불성이니 그의 아내에게만큼은 인사를 해야 했다.

    엘리사가 소거실에 앉아 후작 부인을 기다렸다.

    후작 저의 고용인들이 급히 데탕스 영애를 불러왔다.

    영애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주인 없이 객을 혼자 둘 수는 없어 내려오긴 했는데 워낙 소문이 안 좋은 인사다 보니 껄끄러웠다.

    게다가 루펠라 그웬의 호적상 오라비이지 않은가.

    로웨나 데탕스와 루펠라 그웬은 유명한 앙숙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머리채를 잡고 구른 사건은 젊은 귀족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성격이 안 맞아도 그렇게 안 맞을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동족 혐오와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 아카데미엔 남다른 성격을 자랑하는 세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루펠라 그웬, 칸나 트라노이, 로웨나 데탕스.

    소년들은 신사의 매너 운운하며 잘난 체하게 마련인데 그 세 명이 있는 쪽으로는 침도 안 뱉었다.

    루펠라 그웬은 개차반이었고, 칸나 트라노이는 너무나 직설적이었으며 로웨나는 상상 속에서 살았다.

    데탕스가의 외동딸인 그녀는 부친과 모친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엔 단 한 번도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모친은 언제나 남들 위에 서 있는 만큼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칸나 트라노이는 공작가의 적녀였으니 자신과 동등해도 루펠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불쌍하니까 잘해줘야지.’

    입양아니까. 듣자 하니 선대 공작 부인도 그렇게 내켜서 입양한 건 아니라던데.

    하지만 루펠라가 누구던가. 미친개의 동생으로 미친년 꽃다발 소리를 듣고 사는 여자였다.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건 참아도 대놓고 가엽게 여기는 건 절대 참지 않았다.

    루펠라와 로웨나는 교실에서 머리채를 잡고 싸웠다.

    로웨나는 지금도 루펠라라면 눈을 까뒤집었지만, 그녀 인생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날 일로 환상이 와장창 깨져 버렸으니까.

    길길이 날뛰어줄 줄 알았던 부모는 공작가에서 온 고용인에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마피 부인이라 불리는 고용인이 협박을 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마디.

    ‘공작 부인께서 유감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세상을 호령하는 줄 알았던 부모는 고개를 수그렸다.

    소녀, 로웨나는 그 일로 알게 되었다.

    ‘좆같은 세상!’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루펠라 그웬은 그나마 상대가 가능한 수준이지만 진저 그웬은 눈 밖에 나면 세상 하직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로웨나가 본 그웬 공작은 소문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덩치로 위압감을 뿜어냈다.

    사실 로웨나는 그웬 부부가 참석했던 첫 파티장에 있었다.

    아콘 백작이 다른 귀족 사내들과 엘리사의 몸매를 운운하며 낄낄거리는 것도 목격하였다.

    뒤에서라지만 남의 부인을 희롱하는 건 보기 역겨운 광경이었다. 파티에서 본 그웬 공작 부인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천박해 보이는 여자가 아니었다.

    된통 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저가 나타났다.

    그는 강냉이가 몽땅 털리고 싶지 않으면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는 투로 아콘 백작을 협박했다.

    저렇게 난폭한 남자와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로웨나는 엘리사의 앞에 앉아서 찻잔만 매만졌다.

    엘리사가 움직일 때마다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다.

    로웨나는 작았다. 란델은 여성들의 평균 키가 낮은 편이었는데 란델의 평균과 비교해도 한참 작았다.

    키만 작은 게 아니라 얼굴도 작고 손도 작았다. 저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다 들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새하얀 피부와 백금발, 작고 통통하며 붉은 입술을 병아리를 연상시켰다.

    ‘귀여워.’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 로웨나는 앙증맞았다.

    긴장한 채로 차를 마시던 그녀가 사레가 들린 건지 켈룩켈룩 기침을 했다.

    “저런.”

    엘리사가 손수건을 건넸다.

    당황한 로웨나는 내밀어진 손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죽이기 전에 마지막 친절을 베푸는 건가. 로웨나는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얼이 빠진 것 같은 로웨나의 표정을 보고 엘리사가 테이블에 손수건을 올려놓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로웨나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천천히 손수건에 손을 올렸다.

    ‘세상에, 목소리도 귀엽잖아.’

    엘리사는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아이와 동물을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데탕스저에 온 건 따오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따오기는 어디 있나요?”

    ‘따오기?’

    로웨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따긴 뭘 따겠다는 건가.

    ‘설마 내 목을?’

    “따…… 오기요?”

    “네. 기대하고 있답니다.”

    엘리사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그때, 외저에 나갔던 후작 부인이 돌아왔다. 그녀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딸은 객이 몸을 일으켰는데도 불구하고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호호호, 얘도 참.”

    후작 부인이 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악, 비명을 지른 로웨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릴 때는 들키면 역모죄로 줄줄이 얽혀 죽을지도 모르면서 ‘우리 공주’하던 어머니가 이젠 손님 앞에서 옆구리를 막 꼬집었다.

    엘리사는 후작 부인과 로웨나의 배웅을 받으며 데탕스저를 나섰다. 따오기가 아쉽긴 하지만 남편의 잔소리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오늘 늦게 들어가면 얼마나 잔소리를 하려나. 요새 그는 어찌나 잔소리가 많은지.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것 같았다.

    ‘이럴 때 뭐라고 하던데.’

    일전에 엘리사에게 잔소리를 하는 오빠를 보고 루펠라가 한마디 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루펠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바가지를 긁는다.

    그래, 남편은 요새 바가지를 긁었다.

    한편, 데탕스저에는 소란이 일었다. 후작 부인이 인사불성으로 꼬꾸라진 남편의 등짝을 때렸다.

    “우에?”

    푸지게 취한 그는 아예 사람 말을 하지 못했다.

    “따오기! 따오기가 뭐야!”

    로웨나는 엘리사가 저택을 나서자마자 모친에게 매달렸다.

    ‘엄마, 나 죽나 봐.’

    무슨 소리냐고 묻자 엘리사가 남기고 간 손수건을 보여주었다.

    데탕스 후작 부인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웬 공작이 손수건을 건넸다니. 그것도 웃으면서. 이건 협박이 분명했다.

    남편이 술에 취해 뭔가 크게 실수를 한 게 분명했다.

    “정신 좀 차려 보라고, 이 화상아!”

    하나 있는 딸을 따오기인지 뭔지 하는 것으로 요절하게 할 순 없었다.

    다음 날, 그웬저에 데탕스 후작과 그 딸이 찾아왔다.

    후작은 파리한 안색으로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진저가 엘리사와 함께 그들을 맞았다. 어제 실수한 게 없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로 저택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그것도 딸까지 데리고서.

    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다시 물었지만, 그녀도 당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데탕스 후작은 연락도 없이 찾아온 무례를 용서해 달라며 상자를 내밀었다.

    진저 대신 엘리사가 상자를 열었다. 갖은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뇌물?’

    진저도 이해가 안 되는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데탕스 후작은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외에는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다. 겁 모르고 뇌물 같은 것을 쥐여줄 자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뇌물을 줄 만한 일 자체가 없었다.

    상자 안을 보던 진저가 보석과 어울리지 않는 변색된 종이를 발견했다.

    저건 데탕스 가에 은밀히 전해지는 대단한 스크롤이었다.

    왕궁의 장거리 이동 스크롤과 비교해도 절대 지지 않는.

    숨이 끊어진 사람만 아니라면 어떤 상처든, 병이 든 고치는 마법 아이템이었다.

    이런 대단한 것까지 가져온 이유가 뭐란 말인가.

    진저의 눈이 가늘어졌다.

    “각하, 부디 어제의 실수는 용서해 주십시오!”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였다.

    ‘실수?’

    진저가 아내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만취한 후작과 대화하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다.

    그는 사람 말을 하지 않았다.

    ‘우에’, ‘뜨억’, ‘쿠엑’ 등의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말이라기보다는 짐승 울음소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서 사과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엘리사가 까닭을 물었다.

    “실수라니?”

    사실은 후작도 실수가 뭔지 기억하지 못했다.

    새벽에 술이 깨서 물을 찾았는데 아내와 딸이 유령 같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내와 딸은 그웬 공작이 건넸다는 손수건을 보여주었다.

    그는 손수건을 건네며 무려 미소까지 지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후작과 모녀는 서로를 얼싸안고 새벽 내내 울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뭔가 실수를 하여 그웬 공작이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제가 취해…….”

    후작이 취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간 몇 번이나 취한 모습을 보았지만 네 발로 기긴 했어도 실수를 한 적은 없었다.

    아예 실수가 불가능했다. 그는 취하면 말 그대로 개가 되었다. 사람 말을 못하는 자가 어떻게 실수를 한단 말인가.

    진저의 발에 오줌발을 쏘는 것만 아니라면 실수할 일이 없었다.

    “취해서 무얼 어쨌는데.”

    엘리사가 토끼 눈이 되어 남편을 보았다.

    “……요.”

    “죽여 주십시오, 각하. 사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아침부터 이따위 상자를 가져온단 말인가.

    진저는 슬슬 짜증이 났다. 곧 생리가 터지려는지 아침부터 두통이 있었다. 예민하기도 했고.

    남편이 인상을 쓰자 엘리사가 나섰다.

    “그대가 실수라 여기지 않았다면 그건 실수가 아니겠지.”

    실수가 아니라 고의잖아? 후작에겐 그녀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실수가 맞습니다!”

    대화가 자꾸 어그러졌다. 결국 부친의 곁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로웨나가 나섰다.

    그녀는 엘리사의 손수건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손수건을 주면서 협박했잖아, 라는 의미였다.

    엘리사가 ‘아아’ 소리를 내더니 손수건을 가져왔다.

    진저가 그녀를 흘겼다. 전에도 몸이 바뀌었을 때 여자들을 죄 홀리고 다니더니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것으로 진저는 저들이 아침부터 저택을 찾은 이유를 깨달았다.

    평소와 전혀 다른 행동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그가 아내의 귀에 입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당신이 손수건 같은 걸 건네니까 겁을 먹은 거야.”

    엘리사도 목소리를 죽이고 대꾸했다.

    “그냥 손수건이었어요. 사레가 들린 것 같길래.”

    “사레가 들린 걸 당신이 왜 신경을 써.”

    “저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다고요.”

    “다른 여자한테 손수건 같은 거 막 주고 다니지 말라고.”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여자들에게 친절한 남편을 타박하는 것으로 알았을 터였다.

    후작과 로웨나가 시선을 교환했다. 대체 무슨 얘기들을 나누는 걸까.

    로웨나는 ‘제 발로 찾아온 거 그냥 여기서 죽여 버리자’는 말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니냐며 울상을 지었다.

    잠 한숨 못 자고 걱정만 하고 나왔더니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했다.

    후작의 표정도 새파랗게 질렸다.

    ‘대체 따오기가 뭐지?’

    어떤 정치적인 의미인가 싶었는데 마땅히 짚이는 게 없었다.

    후작 부녀의 심장이 쪼그라들거나 말거나 엘리사와 진저는 투닥거렸다.

    “손수건을 왜 주는데? 닦을 게 없으면 소매로라도 어떻게 하겠지.”

    “저렇게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가 당신 몸을 마주하고 있었다고요.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귀엽기는 무슨. 아내 쪽이 열 배는 더 귀여웠다.

    분위기가 진정된 건 하녀들이 차를 가지고 온 이후였다.

    엘리사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노라 설명했으나 후작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따오기. 대체 그놈의 따오기가 뭐란 말인가.

    어제 회의 내용부터 주점에서 있었던 일까지 모두 떠올려도 짚이는 게 없었다.

    후작과 함께 그웬저를 나선 로웨나는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후작이 연유를 묻자 로웨나는 입을 반쯤 열다가 다물어 버렸다.

    아버지는 따오기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하셨다. 그웬 공작의 반응은 새벽에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럼 왜 손수건을 준 걸까? 로웨나는 상식적인 기준에서 판단하려 노력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손수건을 주었다. 그것도 다정하게 웃으며.

    ‘날 좋아해서?’

    그러고 보니 오늘 자신을 보는 공작 부인의 표정이 이상했다.

    힐튼 후작 부인의 파티나 모의 전투 전야제에서는 아주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루펠라가 하도 그녀의 칭찬을 입에 달고 다녀서 꺼린 것뿐이지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질투? 질투인가?’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고 푸성귀는 떡잎부터 아는 법이며 어릴 때 굽은 길마가지였다.

    부모에게 공주 취급받으며 큰 아이는 세상의 엿 같음을 알았어도 병은 쉬이 낫지 않는다.

    로웨나는 제 외모와 성격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일반적인 기준의 미인은 아니지만, 사내들 마음을 얻는 데 지장 없을 만큼 매력적이라고 여겼다.

    일전에 만났던 영랑은 제 작은 손이 단풍잎 같다며 징그러울 정도로 찬양하지 않았던가.

    로웨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과거의 그웬 공작이 제게 연심을 품었다면 이와 같은 반응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렇게 성질 더러운 사내는 열 명을 가져다줘도 싫었다.

    하지만 어제오늘 본 그웬 공작은 아주 부드럽고 친절했다.

    그웬저를 나서는데 구두가 불편해서 발을 조금 절었다. 그웬 공작은 즉시 하녀에게 편한 신발을 가져오라 일렀다.

    부드럽고 친절한 데다 여자의 마음도 잘 알았다. 외모나 신분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꿈에 그려온 이상형이었다.

    후작 부녀가 저택을 떠나고 엘리사와 진저는 늦은 식사를 했다.

    진저는 여전히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었다. 본래 그의 몸이었다면 무서울 정도로 위압감을 풍겼겠지만 지금 그는 엘리사와 몸이 바뀐 상태였다.

    고용인들의 눈에는 마님이 토라진 것 같아 귀여웠다. 콕스가 주의를 주었으나 그들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와 달리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았다. 여성에게 친절한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 아닌 그가 다른 여자에게 호감이 있어서 친절하게 대한다면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고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부부는 몸이 바뀌었다. 여성에게 친절한 건 엘리사이지 진저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부부는 함께 진저의 방으로 이동했다.

    진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엘리사에게 앞으로 여성에겐 친절하게 대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골이 난 표정이었다.

    “잔소리.”

    “뭐?”

    “저는 애가 아니라고요.”

    물론 남편의 보호는 기분이 좋았다. 왕태후가 병마에 쓰러진 이래로 자신을 이처럼 보호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모든 잔소리가 그녀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애처럼 대하고 있었다. 마치 넘어지면 안 되니 걷지도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참을성 많은 엘리사로서도 잔소리가 연일 계속되니 뿔이 났다.

    남편은 남편의 생각만큼 인기가 많지 않았다.

    기사들이 입을 모아 ‘저렇게 쓸 얼굴이면 나나 주지!’ 하고 통탄했다.

    엘리사의 생각도 같았다. 그녀는 진저가 어떤 추남이었어도 좋아했을 것이고, 추남이라면 혹시 다른 여자가 그를 빼앗을까 봐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엘리사는 좋아하는 남자에게도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했다.

    성격이 너무 큰 단점이라서 얼굴만 못났더라면 여자들은 그웬저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지만.’

    기사들은 매일같이 장가가고 싶다고 징징거렸다.

    ‘애인과 함께 먹는 밥은 단가요?’ 하고 묻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가여운 사람들. 남편의 외모를 나눠서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좌우지간 남편은 여자에게 인기가 없었다.

    귀부인들은 남편의 여자 문제로 속을 썩였다. 전야제에서도 바람 난 누구누구, 스무 살 어린 하녀에게 꽂혔다는 누구의 남편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남편의 여자 문제로 속을 썩은 적이 없었다.

    줄리아 트리거 때도 그녀의 앞에서 당당하게 제 손을 잡아주지 않았는가.

    물론 줄리아에겐 엘리사가 먼저 손을 내민 것으로 보였겠지만.

    “혹시 제가 여성과 바람이 날 거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었다.

    그로서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남자에게 친절한 것도 아닌데 울화가 치밀다니.

    그는 몸이 바뀌기 전에도 아내가 저 모르는 다른 사람과 너무 친한 것이 마뜩잖았다.

    루펠라와 라골은 다른 문제였으나 고용인이나 기사들과 가깝게 지내는 걸 보며 짜증이 났다.

    진저가 답이 없자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할게요. 당신 흉내 잘 낼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제 흉내 좀 잘 내주세요.”

    사실 엘리사도 타박하고 싶은 건 많았다. 시상식 파티에서도 어찌나 딱딱하게 구는지 민망할 정도였다.

    어떤 이익을 바라서 도가 넘게 달라붙는 자들은 경계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

    진저는 말이 없었다. 너무 잔소리를 했나 싶어서 눈치를 보는데 그가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는데?”

    “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엘리사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고 그녀 자신만 아는 모습. 그는 아내의 말을 제법 잘 들어주는 남자였다.

    “일단 그 표정이요.”

    “표정?”

    “너무 딱딱해요. 화가 난 사람 같단 말이에요. 조금만 표정을 풀어주세요.”

    “……알았어.”

    “모레 파티가 있죠? 트라노이 공작 부인도 나온대요.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세요.”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진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리고 모레 고든이 올 거예요.”

    진저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든이라면 제게 이상한 사탕을 준 놈이었다.

    “그가 화장을 도와줄 거예요.”

    진저는 그놈과 대면하는 게 껄끄러웠다. 그러나 아내는 고든을 좋아했다. 물론 이성적인 감정이 아닌 건 안다.

    그래도 자신을 대하는 것과 차이가 있었다. 그 녀석에겐 어찌나 궁금한 게 많고 말이 많은지 보고 있으면 열통이 터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파티 당일이 되었다.

    고든은 약속한 시간보다 이르게 그웬저에 도착했다.

    저택에 온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엘리사의 드레스룸을 살피는 것이었다.

    진저를 따라 엘리사의 드레스룸에 들어온 고든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세상에!”

    어떻게 된 게 전부 유행하는 옷이었다.

    드레스를 꼼꼼하게 살펴본 그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유행은 선도해야 하는 것이지 따라야 하는 게 아니었다.

    “부인이 고르신 건가요?”

    진저가 고개를 저었다. 아내가 고른 건 아니었다.

    그의 명을 받은 집사 콕스가 드레스 숍에 구매 의사를 전했고, 숍에서는 알아서 드레스를 골라 보냈다.

    “지금은 시간이 빠듯하니 수선만 하죠.”

    그렇게 말한 고든이 드레스 중에 하나를 골랐다.

    요새 유행하는 벨라인의 드레스였다. 고든은 드레스 상의에 빠르게 비즈 장식을 달라 지시했다.

    그가 데려온 조수들이 비즈를 달기 시작했다. 놀라운 속도였다. 저 정도 속도면 허투루 달 수도 있는데 문외한인 진저가 보기에도 마무리까지 꼼꼼했다.

    밋밋했던 소매와 치맛자락에 비즈를 단 것만으로도 달라 보였다.

    고든이 왔다는 소식에 엘리사의 방을 찾은 루펠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달라지긴 했지만 조금 촌스럽지 않나. 비즈 장식은 십 년 전에나 유행하던 것이다.

    “비즈는 너무 촌스럽지 않아?”

    루펠라의 말에 고든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어머! 영애, 유행은 돌고 도는 거예요!”

    그는 부인이 직접 입으면 옷만 보는 것과 다른 느낌일 거라고 말했다.

    루펠라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별말을 하진 않았다.

    고든의 실력이야 이미 잘 알고 있던 바가 아니던가.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를 착용하면 또 다른 느낌일 수도 있었다.

    진저를 화장대 앞에 앉힌 그가 커다란 케이스를 열었다. 브러시부터 립스틱, 파우더까지 없는 게 없었다.

    이윽고 고든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펠라까지 쩍 입을 벌릴 정도로 굉장한 솜씨였다.

    “대단해!”

    엘리사의 얼굴은 분위기만 따지면 청초한 쪽이지 색스러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의 그녀는 평소와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야릇한 느낌인데 천박하지 않은 오묘한 무언가가 있었다.

    고든이 수선한 드레스까지 입으니 더욱 완벽했다.

    검은 드레스에 달린 작은 비즈는 마치 밤하늘의 별과 같았다.

    어떻게 되었나 싶어 구경 온 엘리사도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정말 저게 나란 말이야?’

    고든은 그웬 공작까지 기함을 하자 몹시 뿌듯한 표정으로 홍홍 웃었다.

    “바탕이 워낙에 훌륭하셔서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온 거예요.”

    그가 엘리사를 향해 찡끗 윙크했다.

    진저는 고든의 윙크에 마뜩잖아 할 겨를이 없었다. 거울 속에 보이는 아내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엘리사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진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남편의 몸을 하고 있고 따지자면 아름답게 바뀐 건 진저였다.

    그런데 그는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마님.”

    수발을 들던 온 하녀가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저가 하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아름답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자화자찬으로 보였다. 고든과 루펠라가 서로를 보다가 킥킥 웃음을 흘렸다.

    루펠라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울 속에 들어갈 것 같아요, 언니. 그렇게 예뻐요?”

    엘리사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니, 아니야!”

    루펠라가 팍 인상을 썼다. 아니긴 예쁘기만 한데. 하여간 오빠는 멋대가리가 없었다. 이럴 때는 칭찬 해주면 좀 좋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예쁘기만 한데. 그렇지, 고디?”

    “제 인생 최대의 역작이 나왔어요.”

    엘리사는 어쩔 줄을 몰랐다. 저 사람은 왜 제 입으로! 자화자찬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고든이 뿌듯한 표정으로 마음에 드시냐고 말했다. 이미 표정으로 알 수 있었지만 칭찬은 들으면 들을수록 짜릿한 것이었다.

    “그래. 입 맞추고 싶을 정도로.”

    엘리사의 귓불이 빨개졌다.

    ‘저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놀리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저런 농담을 하고 제 반응을 보며 픽픽 웃지 않았는가.

    고든과 루펠라가 시선을 교환하더니 엘리사의 방에 있던 조수, 하녀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모두 방을 나섰다. 방에는 부부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엘리사가 버럭 소리쳤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진저는 그 자리에서 입을 맞춘 것도 아니고 비유일 뿐인데 뭐가 문제냐고 되물었다.

    설령 입을 맞췄다 한들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물론 엘리사도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민망하고 부끄러웠을 뿐이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것을 싫어할 여자는 없었다.

    표현하지 않는 남자보다는 백번 나았다.

    “그래도…….”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하지 뭐라고 해야 하는데?”

    “…….”

    그녀가 뜨거워진 귓불을 매만졌다.

    남편에 대한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가끔 서운하고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그는 아내의 말을 잘 들어주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녀는 서운한 게 있으면 서운하다고 말했고, 속상한 게 있으면 속상하다고 말했다.

    몇 달 전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진저는 그녀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능글맞게 웃었다.

    변화한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더 달콤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욕심을 가져선 안 된다. 그는 충분히 노력해 주고 있었다.

    엘리사가 화제를 돌렸다.

    “오늘 언제 들어오실 거예요?”

    “글쎄, 가봐야 알겠는데.”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큰일이었다. 엘리사는 괜히 날씨 핑계를 대며 서둘러 돌아오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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