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내 남편의 첫사랑(1)
“어머나, 공주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오늘 파티에서는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기도 했다.
비앙카였다. 힐튼 후작 부인의 파티에서 진저에게 창피를 당했었다. 그 이후로 몸을 사리는 것 같더니 다시 파티장을 출입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레이라 부인의 딸인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와 함께 엘리사를 모욕하던 여자. 그란디아가 아닌 란델에서도 괜한 소리를 할까 봐 걱정이었다.
엘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앙카는 벌써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휙휙, 고개를 흔들었다.
“부군께선 함께 오시지 않았나요?”
일전에 만났던 파티에서는 그렇게 다정하시더니. 혼잣말을 하는 척 엘리사를 모욕할 셈이었다.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사실이 아니지요? 란델의 공작 부인들은 결혼 후 첫 모의 전투에 반드시 참가한다던데요.”
소문이 느리다. 그 소문은 이미 남편이 직접 수습을 한 지 오래였다.
엘리사는 고민했다. 방자한 태도를 꾸짖을까, 아니면 첫 공식 일정을 원만하게 끝나기 위해서 침묵할까.
비앙카는 아직도 엘리사를 그란디아 왕궁의 천덕꾸러기로 보는 모양이었다. 인정한다. 그때의 엘리사는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기댈 구석 하나 없는 불쌍한 여자였다.
왕족을 모욕한 죄를 물으려 거든 얼마든지 물 수 있었다. 문제는 모욕한 무리 가운데 클라우디아와 필리아가 있다는 것이었다. 처벌을 하려면 클리우디아, 필리아 자매도 함께해야 하는데 레이라 부인이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차라리 무시하는 게 속 편했다.
비앙카는 어리석은 여자였다. 다른 아이들은 눈치가 있어서 클라우디아, 필리아가 없는 자리에선 행동을 조심하는데 그녀는 엘리사만 보면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다.
“언짢으신 건 아니죠?”
깔깔깔, 비앙카가 천박하게 웃었다.
그러게 잡서만 읽지 마시고 남자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알아보시지, 두 분 영애도 걱정이 많으세요 등 그녀는 거리낌 없이 엘리사를 자극했다.
휴게실에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아가씨께서 어찌나 걱정을 하시던지. 저까지 마음 아플 지경이었답니다.”
그녀가 말하는 작은 아가씨는 레이라 부인의 둘째인 필리아였다. 신분은 백작 영애에 불과하나 그란디아 국왕을 주무르는 여자의 딸이었다. 국왕은 그들 자매에게 친자식보다 더한 관심과 사랑을 보였다.
큰 아가씨, 작은 아가씨라는 별명은 레이라 부인에 대한 아첨임과 동시에 그녀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보여 주는 예였다.
“자비는 여기까지네.”
엘리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공주님이 염려되어 하는 말이에요.”
휴게실에 들어온 여자는 비앙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모의 전투를 앞두고 괜한 소문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대로 넘어가면 가문의 위신이 상할 터였다. 결국 엘리사는 비앙카를 꾸짖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공작 부인.”
휴게실에 들어온 여성이 엘리사를 불렀다. 그녀는 앉아 있는 엘리사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처음 뵙습니다. 트리거가의 줄리아입니다.”
올해 모의 전투에서 트리거가의 꽃이 될 여자였다.
‘길리안의 여동생이자 왕세자의 약혼녀.’
엘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엘리사 그웬이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줄리아의 눈이 비틀거리는 비앙카에게 향했다.
“제가 도울 일이 있는 것 같군요. 경비병을 불러오겠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놀란 건 엘리사뿐만이 아니었다. 비앙카마저 토끼 눈이 되어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무뢰배의 출입을 허하였으니 죄를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앙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트리거 영애는 그웬 공작 부인보다 유명한 여자였다. 먼 그란디아에서 란델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이름이 줄리아 트리거였다.
트리거 공작의 보물이자 왕비가 될 여자였다.
엘리사에겐 함부로 대할 수 있어도 줄리아 트리거에겐 아니었다.
“오해셔요.”
비앙카가 불쌍한 척하며 두 손을 맞잡았다.
“오해?”
“공주님과 전 어릴 적부터 격의 없이 대화를 하던 사이라…….”
“무뢰배인 줄 알았더니 천치였군.”
“예?”
“영애는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눈 게 아니라 공작 부인을 모욕한 거지.”
줄리아가 엘리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은 짓이었다면 용서하십시오, 부인.”
“아닐세.”
비앙카는 얼굴이 붉어져 어쩔 줄 몰라 했다.
줄리아는 비앙카에게 눈도 맞추지 않은 채로 말했다.
“내가 경비병을 불러와야겠는가. 스스로 가겠는가.”
“여, 영애…….”
비앙카는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용서해 주십시오, 공작 부인. 술이 과해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비는 비앙카의 모습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 이 순간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레이라 부인이 살아 있는 한 현실이 되지 않을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
엘리사는 한숨을 삼켰다. 호된 벌을 받고 그간 그녀를 모욕한 죗값을 물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심만으로 왕궁 주최 파티를 엉망으로 만들 순 없었다.
그녀 개인의 악감정보다 가문의 위신이 중요했다.
엘리사는 사과를 받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킨 그녀가 휴게실을 나섰다. 그 앞에서 몇 보 떨어져 대기 중이던 라골이 고개를 수그렸다. 복도까지 비앙카의 목소리가 새어 나간 모양이었다.
엘리사의 호위를 위해 따라온 기사들이 이를 갈았다. 계집만 아니었으면 곤죽을 내주었을 것이다. 마님은 모욕에도 의연하셨다.
왕족 출신 공작 부인. 타이틀만 제한다면 그저 이십 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상대의 모욕에 파르르 대꾸하는 건 하수였다. 가문을 위해 분노를 갈무리하신 게 분명했다.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드문 인내였다.
그녀는 이전 표정 그대로 중앙 홀에 돌아갔다. 홀은 나오기 전보다 왁자지껄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군데에 몰려 있었다.
“부인.”
진저였다. 회의를 마친 그가 길리안과 함께 회장에 들어섰다. 모욕을 당하고 나서도 끄떡없던 그녀의 표정이 사르르 녹았다.
“언제 오셨어요?”
“지금 막. 별일 없었소?”
진저는 무심했던 표정이 밝아지는 순간을 보았다. 마치 공작 부인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 안에 있던 순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 드러난 것 같았다.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하실 일은 없었다고 답했다.
진저가 라골과 눈을 맞추었다. 라골이 회장과 화장실이 이어지는 통로 쪽으로 눈을 돌렸다.
‘무슨 일이 있었군.’
엘리사는 란델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를 돕기 위해 라골을 붙였다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뜻은 다른 데 있었다.
아내는 지나치게 악의에 무감했다. 하나둘 넘어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게 사람이다. 그웬가의 안주인은 가문의 얼굴이다. 그건 위신이 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사실 그보다도 아내에게 함부로 구는 이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 파티에서 본 기분 나쁜 여자는 아직까지도 가끔 떠올랐다.
이전엔 ‘그웬 공작 부인’을 우롱하는 게 거슬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상처 주는 자들을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그때 주둥이를 찢었어야 하는데.’
아내의 감정이 변화하는 동안 그의 감정도 달라졌다. 과거와는 사뭇 다른 감정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그의 변화를 눈치챈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다정한 목소리, 그보다 더 다정한 눈빛. 진저 그웬이 저렇게 변할 수 있는 사람이던가? 회장에 있는 모두가 놀라워했다.
남편이 곁에 있으니 이전보다 편해졌다. 그는 그녀 인생에서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다.
마음이 편해져서 타인을 여유롭게 대할 수 있었고 엘리사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었다.
그웬가의 위광에 기대 덕을 보고 싶어 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라 트라노이가의 공작 부인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웬 공작이 있든 없든 그녀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남편인 트라노이 공작이 홀에 도착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남편과 눈인사만 나누고 다시 엘리사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내 남편이 대단하네, 네 남편이 대단하네 따지는 이들과는 달랐다.
사심 없이 대화를 나누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두 공작 부인은 서로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또래인 데다 둘 다 이른 나이에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공감할 일이 많았다. 동지가 생긴 기분이었다.
진저는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비켜 줄까 싶어 고개를 돌리다가 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트리거 영애네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의 말에 엘리사 또한 고개를 돌렸다. 도움을 받고도 서둘러 자리를 피하느라 감사를 표하지 못했다. 엘리사가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트리거 영애를 불렀다.
“영애.”
멀리서 진저와 시선을 교환하던 트리거 영애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남편이 이상했다. 트리거 영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상한 건 영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를 보는 시선이 아주 오묘했다. 엘리사가 남편의 소매를 잡았다.
“각하……?”
그제야 진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엘리사가 입술을 내밀었다.
‘트리거 영애가 미인이긴 하지.’
미인이 많은 란델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은 본 적이 없었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라든가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등 전반적으로 화려한 인상이었으나 천박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품이 넘쳤다. 발걸음 하나, 손짓 하나 우아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고 공작가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왕세자의 약혼녀가 되었어도 위세를 자랑하지 않았다. 친분이 없는 사람이라도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줄 줄 아는 의기까지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온 줄리아가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얼마나 마음에 들면 저렇게 혼이 쏙 빠질까.
진저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줄리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공사가 번다하여 제대로 축하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결혼을 축…… 하드립니다.”
다른 말이었다면 몇 마디 대꾸라도 했을 테지만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엘리사와 줄리아가 함께 있는 자리가 불편했다. 자리를 피하려 아내를 보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아내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그녀와 살며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적장의 검이 목전에 들어왔을 때도 이렇게 섬뜩하진 않았다.
엘리사는 제 눈치를 보는 진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디 불편하신지요?”
“아니, 아니오…….”
놀라운 광경이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입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천하의 진저 그웬이 아내에게 기가 죽었다. 기만 죽은 게 아니라 아예 볼일이 급한 강아지처럼 동동거렸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얘기 나누시오.”
엘리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리를 벗어나면서도 엘리사와 줄리아를 힐끗거렸다. 그리고 라골에게 눈짓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주시를 명한 것이었다.
테라스에 나온 진저는 버릇처럼 재킷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날 이후 담배 근처에도 가지 않았건만 오늘만은 담배가 간절했다.
대체 왜. 자신과 마주칠 만한 자리는 기를 쓰고 피한 여자였다. 자신 뿐 아니라 아내가 나올 자리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도무지 속을 모를 여자였다. 그는 두 손으로 난간을 짚었다.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이었다. 동요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 *
모의 전투의 전야제는 왕비가 주도하는 파티였다. 왕비의 축사가 끝나자마자 진저는 아내와 함께 저택에 돌아왔다.
엘리사는 줄리아 트리거를 보는 그의 눈빛이 찜찜하긴 했으나 잊기로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껄끄럽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했다. 아니, 만족해야 마땅했다.
줄리아 트리거와 비앙카의 일을 제외하면 파티는 즐거웠다. 특히 트라노이 공작 부인을 알게 된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엘리사에게 파티가 끝나면 꼭 연락하라고 말했다.
라골 또한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온화하고 바른 사람이라 엘리사와 어울리기 적당한 분이라 하였다.
진저는 저택에 돌아와서도 아내의 눈치를 보았다.
“몸은 어때?”
“칵테일 한 잔인걸요.”
숙취로 고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파티에서도 술잔을 멀리했다. 권하는 이들에겐 내일 모의 전투를 위해 몸을 관리하고 있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왕비가 권하는 칵테일은 거절할 수 없었다.
왕비와 그녀는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4공의 아내, 그리고 왕비는 계절마다 한 번은 꼭 티타임을 가졌다. 다음 달에 있을 티 파티에 나오라는 말에 엘리사는 그러겠노라 답하였다.
“아, 그런데 말이에요.”
진저는 아내가 제게 말을 거는 게 반가웠다. 저택에 돌아오는 중에도 말 한 마디 없어서 단단히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왕비 전하와 트리거 영애는 사이가 나쁜가요?”
아내가 어째서 줄리아에 관한 일을 궁금해하는 걸까? 엘리사는 사교계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왜?”
“며느리가 될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굉장히 날카롭게 대하더라고요.”
“뭐, 왕세자비 교육을 하는 중이니까 엄하게 대하나 보지.”
줄리아는 파티 내내 왕비의 뒤를 쫓았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왕세자의 약혼녀가 될 줄리아를 교육하는 것임을 알았다.
엘리사가 이상하게 여기는 건 그게 아니었다. 줄리아가 남성들과 인사를 나눌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왕비는 귀부인들과 대화를 하며 아들의 약혼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것도 줄리아를 곁에 둔 채로.
“기 싸움이겠지. 공작가의 영애에 비하면 한미하기 그지없는 가문 출신이니.”
진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가요…….”
“왜 그 여자에게 관심을 두는 거야?”
“그녀를 유심히 보셨잖아요. 그래서 의미 있는 분이 아닐까 생각했죠.”
옷을 벗던 진저의 손이 멈칫하였다.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주무시라는 말을 끝으로 그의 방을 나섰다.
* * *
파티가 끝난 후 왕궁을 찾은 줄리아는 삼십 분째 왕세자의 침실에 서 있었다. 치마를 쥔 줄리아의 손마디가 새하얘졌다.
왕세자는 앉으라는 말도, 돌아가라는 말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펜대를 놀려 양피지에 서명을 할 뿐.
결국 줄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밤이 늦었습니다. 건강이 염려되오니 부디…….”
“누구의 건강?”
줄리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꾹 베어 물었다. 그의 잇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웬 공작은 참 부러운 사내야. 란델 제일가는 레이디를 염려하게 하니 말이야.”
“지나친 농이십니다. 어찌 다른 사내를 생각하겠습니까. 그간 과중한 업무로 제게 시간을 내어주지도 못 하셨으니-”
왕세자의 손에서 펜대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그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줄리아의 턱을 잡았다. 그녀는 강제로 고개가 들리고도 그의 눈을 피했다.
“뻔뻔하기는.”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줄리아의 목울대가 꿀렁 움직였다.
파티장에서 보았던 이들이 떠올랐다. 진저와 함께인 게 편한 것 같았던 여자.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그.
그라면 자신에게 이런 모욕 같은 건 주지 않을 거다.
왕세자는 그녀를 모욕하고 멸시했다. 겉으로는 다정한 약혼자 행세를 하지만 단둘이 되면 가시를 잔뜩 세운 혀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이렇게 늦은 밤에 날 찾은 이유가 뭐요. 또 무슨 가당치 않은 청을 하려고.”
본래라면 왕족, 그것도 왕세자의 약혼녀인 줄리아는 모의 전투 탈취전에 참가할 수 없다. 줄리아가 왕세자에게 부탁하고, 부친에게 우겨 겨우 탈취전의 꽃이 된 것이다.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왕세자가 눈꼬리를 접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자에게 애원을 해. 돌아가고 싶으니 받아달라고.”
“…….”
“다리라도 벌리면 혹시 아나, 배신한 여자라도 받아줄지.”
왕세자가 손톱으로 그녀의 입술을 툭툭 쳤다. 이런 말을 듣고도 미동조차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그대는 징그러운 여자야.”
“…….”
“참으로 대단한 야심이지. 감히 심중에 다른 사내를 품은 채 왕세자의 약혼녀가 되다니.”
“……전하께서도 그리 좋은 분은 아니십니다. 약혼녀를 두고도 다른 여자를 품으셨지요.”
줄리아의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곧 죽어도 지지 않는 여자다.
“내게 안기면서도 다른 놈 생각을 하는 약혼녀가 역겨워서 말이야. 게워내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거든.”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줄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약혼한 이래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다 모욕과 멸시를 받는다. 생이 끝나길 바랄 정도로 매일이 끔찍했다.
“그날 일은……!”
“몇 번이나 들어줬잖아. 실수라는 말은.”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와 처음 몸을 나누던 밤. 성기가 안을 파고들 때 그녀는 바라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진저…….」
굳어지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난 그때마다 그대를 보내주겠노라 말했고.”
“…….”
“그대는 번번이 거절했고.”
차라리 가버리지. 다른 사내를 겹쳐 보며 번번이 능멸치 말고.
조각난 자존심을 이어 붙이느라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자존심을 수선하며 찔리고 베였다. 그녀를 보듬어줄 여력 따윈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러했다. 대화를 바란 건 자신이면서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으면 입을 다물어버린다. 실로 이기적인 여자였다.
왕세자의 손이 줄리아의 등 뒤로 향했다. 그가 등 뒤에 달린 단추를 하나 풀어버리자 줄리아가 눈을 꽉 감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웬 공작이었다면 그대를 안아 침실로 데려갔을까?”
“…….”
“달콤한 말을 잔뜩 속삭였겠지.”
그는 기어이 줄리아의 드레스를 벗겨버렸다. 브래지어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마지막 남은 속옷을 잡자 줄리아가 제지하려는 듯 그의 손을 잡았다.
“폐하께서 탈취전 참가를 윤허하여 주신 데에 보답을 받고자 하십니다.”
왕세자가 픽 실소를 흘렸다. 그럼 그렇지. 제게 올 때면 언제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허벅지를 들어 테이블에 걸터앉게 한 그가 속옷을 벗겨냈다.
“그런데?”
“영지에서 오는 마영석의 3할을 원하세요.”
“계속 말해.”
그는 줄리아의 유두를 입에 물고, 한 손으로 반대편 가슴을 매만졌다. 줄리아가 인상을 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탈취전 참가에 대한 보상으로는 과한…… 읏.”
왕세자는 탐욕스럽게 가슴을 맛보았다. 그가 길들인 몸이었다. 몇 번이고 처박아 제 손만 닿아도 애액을 줄줄 흐르도록 만들었다. 진저 그웬이 아닌 자신이.
가슴을 주무르던 손이 슬금슬금 내려간다. 수풀을 더듬으며 애태웠다. 줄리아의 입에서 달뜬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왕세자의 검지와 중지가 음부를 파고들었다.
“흐읏!”
그는 음부 안을 긁어내릴 것처럼 난폭하게 움직였다. 질 안의 조물조물한 주름들이 반항하듯 움찔거린다. 왕세자의 입에 조소가 걸렸다.
찔꺽. 질 안을 헤집자 애액과 손이 마찰하는 야릇한 소리가 났다. 줄리아는 허리를 뒤틀었다.
“아버님께서 곤란…… 하앙, 전하!”
줄리아는 왕세자의 약혼녀가 된 후, 왕궁을 장악하기 위해 왕의 신임을 얻고자 했다. 겉으로는 자신을 마뜩잖아 하는 왕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왕세자는 그녀의 속을 알고 있었다.
‘폐하의 사후,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오르기 위해 준비를 하는 거지.’
모후의 재산을 야금야금 왕궁에 귀속시키는 일도 그랬다. 폐하 사후에 태후가 될 그녀와 부딪칠 때를 대비하는 게 빤히 보였다.
「그대 행보가 과하지 않소.」
「왕비님의 사저를 왕궁에 귀속시킨 일을 이르시나요? 전하께서 왕비님을 감싸실수록 여론은 더 안 좋아질 뿐에요. 폐하께서 첩을 들여 아이라도 보면 어쩌시려고요. 전하는 외가가 든든하지 않은 만큼 여론을 신경 쓰셔야 해요. 그런데 왕비님께서 사치로 전하의 평판을 갉아먹으니…….」
‘전하를 생각해서 하는 일이에요’
말은 언제나 번드르르했다.
하지만 왕세자도 왕도 천치는 아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에서 왕비를 견제하고 왕의 신임을 얻으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왕의 신임을 받아 왕궁을 치마폭 아래 두고, 나아가 왕국 전체를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그걸 위해 사랑하는 남자까지 버리고 온 여자였다. 야심이 대단했다.
“그랬으면 그리 사무치는 표정은 짓지 말았어야지.”
“전……! 하으응!”
질구에 손가락이 세 개째 들어갔다. 애액이 뚝뚝 떨어져 카펫을 적셨다.
줄리아의 귓가에 파슥, 파슥 하는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안을 조금 더 비벼준다면 절정에 이를 것 같았다. 어서 편하게 해줘. 줄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스스로 허리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음욕이 차오르자 왕세자는 손가락을 빼버렸다. 한순간에 안이 비어버리자 줄리아가 애타게 신음했다.
“싫어…… 멈추지 말아요.”
왕세자가 책상 맞은편에 있는 의자로 향했다. 성큼성큼, 걸음엔 미련이 없었다.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아 흥분으로 발그레 달아오른 줄리아를 쳐다보았다.
“마저 얘기하지. 그래서?”
“하아, 3할은 너무 과해요. 폐하를 설득해 주세요.”
“곤란해질 걸 몰랐나. 그런데도 부득불 참가하겠다던 건 그대야.”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어머님이 몸이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나도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난 바보가 아니라고.”
왕세자는 일부러 그웬 공작 부인을 언급했다. 파티에서 그들이 몹시 다복해 보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줄리아가 신경질적인 이유도 그것일 터였다.
“왜 이렇게 변하신 거죠? 약혼 초에 전하께서 얼마나 달콤하셨나요.”
“약혼녀가 내 정액을 안에 품고 야밤에 달려가 첫사랑에게 안기기 전까진 계속 달콤할 생각이었지.”
줄리아가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진저였다면 아무리 자신이 잘못했다고 해도 이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왕세자와 사이가 나빠질수록 진저가 그리웠다.
“이번에도 그웬 공작에게 내달라지 그래? 기하스엘 토벌 건으로 받은 섬에 마영석이 잔뜩 매몰 되어 있었다던데.”
아마 왕도 그걸 노렸을 터다. 줄리아는 트리거가에 해가 될 일은 하지 않는다. 재물이 필요하거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진저를 찾았다. 눈치 빠른 영감탱이가 그웬 공작과 줄리아의 사이를 모를 리 없었다.
줄리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우는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닌 것 같은 표정. 왕세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핏줄이 불거지도록 꾹 말아 쥔 그녀의 손을 보고 확신했다.
‘오늘 그 일을 부탁하려고 그웬 공작을 만나려고 한 건가.’
왕세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는 대단한 여자야.”
“…….”
처음엔 그리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자신에게 온 그녀가 기꺼웠다. 버렸으니 잊을 테지. 나를 선택한 거겠지.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겪어보니 알겠다. 저 여자의 욕망을.
그웬 공작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저렇게 연약한 척 기대고, 그가 지칠 때쯤 미끼를 던진다. 부득불 우겨 꽃 탈취전에 참가한 것도 그에게 미끼를 던지기 위해서였다.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그건 또 그웬 공작에게 요구하면 될 거라 생각했을 테고.
그런데 공작 부인과 다정하니 손해 볼 생각에 화가 나고, 그를 빼앗긴 것 같아 두려운 것이다.
픽 웃은 왕세자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그녀에게 턱짓했다.
“꽂아.”
줄리아의 얼굴이 수치로 달아올랐다.
‘나를 창녀 대하듯!’
하지만 왕세자에게 얻어야 할 것이 많았다. 왕을 설득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또…….
그녀가 왕세자에게 다가갔다. 의자 등받이를 짚고 그의 허벅지에 올라탔다.
왕세자는 웃으며 그녀가 제 성기를 향해 허리를 내리는 걸 지켜보았다. 귀두 끝에 질 입구가 닿았다. 방금 애무를 한 탓에 애액이 흐르고 있었다. 애액이 그의 성기에 뚝뚝 떨어져 대를 타고 흘렀다.
왕세자가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단숨에 음부를 꿰뚫린 그녀가 탄성을 내질렀다.
“하앙!”
큿, 그가 신음을 억눌렀다. 질 안의 조물조물한 주름이 성기를 빡빡하게 조였다. 그녀가 숨을 고를 때마다 주름이 실룩거린다. 왕세자가 흉흉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왕세자가 더는 참지 못하고 퍽퍽 치대자 아응, 항 하는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 가며 성기를 꽂아 넣었다. 그가 허리를 뺄 때마다 질 안의 주름들이 아쉬워하며 수축한다.
“아으응!”
줄리아 또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의 손을 끌어올려 제 가슴을 잡게 만들었다. 왕세자는 손바닥 가득 그녀의 가슴을 잡고 엄지손가락을 살살 돌려가며 바짝 선 젖꼭지를 자극했다.
“이번 탈취전에 약물을 쓸 수 있게, 흐읏.”
“약물?”
왕세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음부와 제 성기 사이를 파고들었다. 목적한 곳은 클리토리스다. 흥분으로 부푼 그것을 건드리자 질 안이 바짝 긴장했다.
줄리아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박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할 것 같은데 클리토리스까지 만져지니 죽을 것만 같았다.
“말해. 약물로 무얼 하려고.”
“아앙! 탈, 탈취전 전략에 꼭 필, 하으응!”
왕세자의 손이 더 빨리 움직였다. 손가락에 비벼질 때마다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던 클리토리스의 형태가 뭉개진다.
위아래로 치대던 그녀가 이젠 위아래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는 성기를 꽂은 채 그녀의 허리를 덥석 안아 들었다. 한순간에 자세가 바뀌었다. 줄리아가 의자에 앉아 하늘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가 성기를 내리꽂았다.
“학!”
너무 세게 들어와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입을 벌리고 전율했다. 그는 용서가 없었다. 어깨에 그녀의 양다리를 올린 채 박아댔다. 짝짝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한 움직임이었다.
왕세자의 것이 사정없이 질 안에 비벼지며 내벽을 자극했다.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왕세자가 거친 숨을 뱉음과 동시에 뜨겁고 끈적한 것이 그녀의 속을 점령했다.
“후우.”
파정한 그가 천천히 성기를 뺐다. 정액이 성기 안부터 밖까지 주룩 이어졌다. 그녀의 입술 바로 앞에서 맴돌던 그의 입술은 목적한 곳을 찾지 않고 떨어졌다.
달콤한 키스 같은 건 없는 관계였다. 왕세자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약물은 그대 뜻대로 하시오.”
그리고 그대로 옷을 입고 방을 나갔다. 휑한 방 안에 남은 그녀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진저가 보고 싶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엘리사는 새벽같이 일어나 오늘 있을 모의 전투를 준비했다. 그웬군의 동선, 그리고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체크한 그녀는 스크롤을 챙겼다.
각자 준비를 마친 부부는 예정보다 이르게 출발했다. 전투가 벌어질 몽구스산에 도착한 병사들은 그웬군의 진영을 둘러보았다.
진저와 병사들이 분주한 것에 비해 엘리사는 할 일이 없었다. 트라노이 영애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막사 안에 얌전히 앉아 뜨개질을 했다.
트라노이 영애는 공작 부인으로부터 엘리사를 신경 써 달라 청을 받은 모양이었다.
“뜨개질을 하고 계셨나 보네요.”
“네. 괜히 움직이면 병사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서요. 트라노이 영애는 준비를 다 마친 건가요?”
“칸나라고 불러주세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만큼이나 칸나도 좋은 사람이었다. 칸나와 루펠라는 동년배로 자주 함께 어울렸다.
루펠라가 타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에도 편지로 왕래했다.
그녀가 란델에 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는데 새언니가 생겼다는 소식에 우려를 표하니 그렇게 좋은 사람이 없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떤 분이실까 궁금했어요. 루펠라가 워낙 자랑을 많이 했거든요.”
엘리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루펠라가 보통 성질 머리던가. 그웬가에는 개차반이 둘이나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그웬 공작 부인까지 남다른 성격을 가졌으면 풍비박산 나는 건 한순간일 터였다.
새로운 공작 부인의 성격이 좋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루펠라는 마음이 편해지자 얼마쯤 성격도 유해졌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도 대화가 편해졌다며 기뻐했다.
칸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소중하다고 말은 하지 않았어도 루펠라는 칸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친구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엘리사가 고마웠다.
게다가 칸나 또한 상냥한 엘리사가 마음에 들었다.
엘리사와 칸나가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포르테 백작 부인이 막사로 들어왔다.
“함께 계시다기에 찾아왔어요.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니죠?”
막사 안은 여성들의 재잘거림으로 화기애애하였다.
대화 주제는 포르테 백작 부인의 시어머니 욕이었다. 장장 삼십 분간 욕을 쏟아내던 그녀가 샐샐 웃으며 ‘여러분은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하고 물었다. 예의상 하는 말이 분명했다.
“사흘 전엔 음식이 비리다면서 저를 타박하시는 거예요. 제가 주방장도 아닌데 왜 혼이 나야 하나요? 어머니는 만사가 다 제 탓인 줄 아세요. 비가 오는 것도, 아버님이 늦게 들어오신 것도 전부 제 잘못이래요.”
엘리사야 마주친 적이 없지만 칸나는 포르테 공작 부인을 잘 알았다. 어릴 적에 포르테 공작 부인에게 레이디로서의 몸가짐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포르테 공작 부인이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예민하기도 하고, 사람을 가리기도 했는데 여타 귀부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백작 부인은 시어머니가 희대의 악녀라도 되는 것처럼 욕했지만, 공작 부인이 신경질적인 시어머니가 된 데엔 백작 부인의 잘못이 컸다.
어찌나 말을 잘 부풀리고 다니는지 포르테 공작 부인이 기침만 해도 온 사교계에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교는 또 얼마나 하는지 몰라요.”
“부인도 하시잖아요.”
듣다 지친 칸나가 백작 부인의 말을 끊었다.
“네?”
“아까부터 트리거 공작 부인과 비교하시면서 흉을 보셨어요.”
“어머 어머! 어머님도 트리거 공작 부인께 배울 게 있다고 말한 거죠.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세요.”
과연 루펠라의 친구였다. 할 말을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게 그거죠.”
“아 다르고 어 다른 거예요.”
그렇게 포장한들 본질이 바뀔까. 칸나가 코웃음을 쳤다.
“본인 아들 귀한 줄만 안다니까요. 어제는 제가 미처 각하의 식사를 못 챙겼는데 집안이 뒤집어졌어요. 바깥일 하는 사람이 배까지 곯아야겠느냐면서…….”
포르테 백작 부인이 투덜거리면 칸나가 받아치고 엘리사가 둘을 중재했다.
“아, 오는 길에 트리거 영애를 봤어요.”
포르테 백작 부인의 말에 칸나가 인상을 썼다. 지겨운 시어머니 욕에서 벗어나고 싶긴 했지만 이쪽으로 튀길 바라지 않았다.
칸나는 트리거 남매가 껄끄러웠다. 선대로부터 길리안은 독사 같은 자이니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어릴 땐 그렇게 잘 웃고 수더분한 사람이 왜 독사 취급을 받는 걸까 싶었는데 겪으며 알았다.
그가 가진 독은 맹독이었다. 치료제가 없는 맹독. 물리면 단숨에 숨이 끊어지고 말 것이다.
길리안과 마찰을 빚었던 여성이 사교계뿐 아니라 귀족 사회에서 매장당했다. 제법 영향력 있던 가문이었는데 3년 만에 저택을 정리하고 영지로 떠났다.
칸나와 그 여성은 교류하던 사이였다. 무슨 일로 마찰을 빚은 건지는 몰라도 그렇게 매장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줄리아도 껄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제 발밑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드러내어 나 잘났소 광고하진 않았으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칸나가 공작가의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줄리아는 말조차 섞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무시당하는 게 좋을 사람은 없었다. 신분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더욱.
“전 트리거 영애가 불편하더라고요. 인사만 하고 왔어요.”
엘리사는 그녀들의 반응이 의아했다. 줄리아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어제 파티에서도 남성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 남성들뿐만 아니라 몇몇 여성 또한 그녀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안달을 했다.
하지만 드러내어 묻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물을 정도로 엘리사는 사교계의 생리를 모르지 않았다. 진심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는 세계였다. 그저 사실만을 가지고 판단했다.
엘리사가 줄리아에 대해 궁금해한다면 저보다 신분이 높아질 여성을 견제하는 것으로 볼 터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왕의 축사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칸나와 포르테 백작 부인이 각 가문의 진영으로 이동했다.
부부와 병사들은 모두 막사 밖으로 나와 커다란 거울 앞에 정렬했다.
어째서 축사를 들으러 가지 않느냐는 엘리사의 물음에 마크빌이 답했다.
“미러를 통해 폐하의 축사가 송신될 겁니다.”
그들이 미러로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왕과 다른 귀족들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요?”
“곳곳에 마도구가 있습니다. 폐하와 귀족들이 있는 대연회장에 송신됩니다.”
마크빌의 말대로 거울 안에 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진저와 엘리사, 그리고 병사들이 동시에 무릎을 굽혔다.
축사를 읊은 왕은 이번 모의 전투의 방식을 공지했다.
* * *
중앙 막사에 들어온 진저가 의자를 걷어찼다. 사각전. 이번 모의 전투는 4군이 동시에 전투를 치르는 것으로 각 군의 ‘꽃’들의 위험도가 가장 높은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라 들어온 엘리사에게 거듭 주의를 주었다.
“절대 나서지 마. 무슨 일이 생겨도 당신은 얌전히 있어야 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각오한 일인걸요. 준비도 철저히 했고요.”
진저는 불안했지만 이미 방식이 공지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웬군은 트리거군과 동맹을 맺었다. 이때껏 그러했듯 꽃들의 교환도 이루어졌다.
트리거 공작은 여성에게 해를 입힐 사람이 아니었다. 지휘관이 철저한 기사도를 강조했으므로 병사들 또한 매너 좋기로 유명했다.
이윽고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트리거군의 진지에 도착한 엘리사는 트리거 공작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곁에 있던 길리안이 눈짓을 보냈다.
호위조의 군사들과 함께 오긴 했지만 모두 막사 밖에 있었다. 근지에 익숙한 사람이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군의 총책임자는 공작이었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길리안이 맡았다. 트리거 공작은 전투가 이루어지는 내내 막사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따금 병사들이 들어와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
“이거 대접할 게 없어서 민망하군.”
트리거 공작의 말에 엘리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웬군 진지엔 차 같은 건 없었다. 전투 중에 차나 마시며 노닥거리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저택에서 준비해 오신 건가요?”
“차 말인가?”
“네.”
“안사람이 부득불 챙겨줘서 말이야. 늙은이는 젊은 사람들 일에 끼지 말고 얌전히 막사에 있으라고. 귀한 사람이 올 줄 알았으면 다른 것도 준비할 걸 그랬지. 란델의 디저트를 좋아한다지?”
진저는 4공 회의가 끝나고 가끔 간식을 사서 돌아갔다. 트리거 공작이 네가 무슨 일이냐고 놀리자 남편 노릇 좀 해보려 한다고 답했다.
트리거 공작은 나이가 있어서 음식을 조절했다. 아내 몰래 술을 마시는 일은 있어도 달거나 짠 음식은 조심했다. 그래서 다과를 준비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엘리사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나이 들어서도 다정한 부부는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한참 트리거 공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병사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병사들 사이에 칸나가 있었다.
엘리사를 본 그녀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한 시간 만에 잡혔어요. 그러니까 포르테가와 동맹을 맺지 말랬는데.”
칸나의 말에 트리거 공작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이 위로를 했으나 칸나는 ‘그래도 최하위잖아요’라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30분가량이 더 흘렀다. 그웬가의 병사들이 하나둘 들어오더니 그녀를 에워쌌다.
그웬가의 기사가 작게 속삭였다.
“곧 포르테 백작 부인을 확보할 듯싶습니다.”
그때였다. 트리거가의 병사들이 막사를 에워쌌다.
* * *
포르테 백작 부인에게 팔찌를 채우자 그녀의 손등에 붉은 문양이 생겼다. 가문이 패전했음을 뜻했다.
진저는 전서구를 띄우라 일렀다. 포르테가의 꽃을 탈취하였으니 이제 트리거가와 전투를 치를 차례였다.
그런데 그웬가에서 전서구를 띄우기 이전에 마크빌이 소리쳤다.
“붉은 새입니다!”
호위조는 두 마리의 전서구를 데려갔다.
흰 새는 무사히 트리거군의 진지를 탈출했을 때, 그리고 붉은 새는 아내가 잡혔을 때 띄우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흰 새가 하우벡의 팔에 착지했다. 새의 발목에 쪽지가 묶여 있었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하우벡이 거칠게 욕설을 뱉었다.
“호위조가 모두 제압됐습니다. 마님은 트리거군의 병사들과 함께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동맹전에서 2군이 패전함과 동시에 새로운 규칙이 생긴다. 이제부터 타 가문의 꽃에게 팔찌를 채울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신전뿐이었다. 몽구스 산의 신전은 트리거군 진지에서 멀지 않았다.
“트리거가의 꽃을 제2지점으로 옮겨라. 남은 병사는 모두 신전으로 향한다.”
* * *
엘리사는 불안한 눈으로 뒤를 쳐다보았다. 모의 전투가 시작된 지 아직 세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모두 열심히 훈련했는데…….’
그렇게 빨리 제압될 줄은 몰랐다.
실력으로 제압된 게 아니라서 더 분했다.
모의 전투라는 것을 잊고 어른이 주시는 차라고 생각하여 그가 주는 차를 넙죽넙죽 마시는 게 아니었다.
칸나를 확보한 뒤 막사로 돌아온 길리안은 말했다.
너희들의 꽃이 마신 차는 배앓이를 유도하는 성분이 들어있다. 치료제를 얻고 싶다면 지금 당장 투항하라.
병사들이 비겁하다며 소리쳤으나 길리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에 이상이 없다면 규칙을 위반한 게 아니지. 너희는 투항을 할 거고 우리는 약을 줄 거다.’
투항하지 않는다면 트리거가는 규칙 위반으로 실격될 터였다. 하지만 병사들은 검을 내려놓았다.
안주인이 복통에 괴로워하는 것보다 패배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것이다.
모의 전투임을 감안한다면 엘리사가 마신 건 독과 진배없었다.
‘나 때문이야.’
자책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병사들을 제압하고 나서도 길리안은 치료제를 주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거짓말 한마디로 유혈 사태 없이 전투를 끝낸 것이라고 답해 주었다.
병사들은 괘념치 말라며 그녀를 위로하였으나 눈빛에 서린 분노를 지우진 못했다.
신전이 보이기 시작하자 미안함이 더욱 커졌다.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 마크빌은 모의 전투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주었다. 모의 전투를 축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경꾼뿐이라며 병사들에겐 목숨이 아닌 인생을 건 전투라고.
‘절대 나서지 마’
‘저희가 목숨 걸고 지켜드릴 겁니다. 마님께선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남편의 말과 병사들의 말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병사들이 훈련에 매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검을 잡는 자들은 초반엔 손이 모두 헤졌다. 헤지고 낫기를 반복하면서 돌덩이처럼 딱딱한 손이 되었다. 평생 수련을 해온 자들의 손에 피고름이 생겼다. 그건 그들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를 뜻했다.
그들은 강도 높은 훈련 때문에 밥도 넘기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 훈련이 끝날 때면 모두 걷지도 못하고 흙바닥에 엎어졌다.
입술을 꾹 깨문 엘리사가 스크롤을 꺼냈다.
공격용 스크롤이라고 생각했는지 트리거군의 병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길리안이 앞으로 나섰다.
“공작 부인!”
“물러나세요.”
“공격용 마도구는 사용자에게도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진정하시고 일단……!”
“경고는 한 번뿐이에요.”
“병사들이 죽기라도 하면 그대로 실격이에요.”
계속해서 그녀를 설득했으나 그녀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스크롤은 공격용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도 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야겠군.’
마도구 사용은 1회로 한정되어 있었다. 어떤 마도구인지 몰라도 한 번만 피하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길리안은 방어 태세를 명했다.
엘리사가 스크롤을 찢었다. 그러자 눈을 뜨지 못할 만큼 강한 빛이 사방에 뿜어져 나왔다. 눈을 떴을 때 그웬 공작 부인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 황망한 표정으로 그녀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설마 호신용으로 소지한 스크롤이 그것일 줄은 몰랐다.
“뭐 해, 찾아!”
길리안이 이를 갈았다. 한없이 순해 보이는 여자가 이토록 자신을 당황시킬 줄이야. 계획이 어그러진 것보다 화가 나는 건 이곳이 위험한 산짐승이 포진해 있는 몽구스산이란 것이었다.
‘짐승이라도 마주치면 어떡하려고!’
그웬군 진지와 이곳은 꽤 먼 거리였다. 현재 제작 가능한 스크롤은 이 거리를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없었다.
엘리사는 신전 앞에서 라골의 말을 떠올렸다.
‘가펠리아 신을 기리는 빈 신전이 있습니다. 신전 뒤쪽에 샛길이 나 있는데 조금 걷다 보면…….’
남편과 라골이 유년시절 자주 놀러 다닌 곳이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던 게 이런 행운을 주었다.
그녀가 이동한 곳은 라골이 알려주었던 토굴이었다.
훈련을 하면서 사용했을 때 알았다. 연무장에서 내저로 향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녀의 스크롤은 다른 이동 스크롤과 다르게 많은 기능이 추가된 대신 본연의 기능은 떨어졌다.
다시 말해 일반 이동 스크롤보다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짧다는 것이다.
괜히 욕심을 부려 그웬군 진지로 향하려다 다시 잡히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토굴에 도착한 엘리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라골이 말해준 약초를 찾는 것이었다.
남편은 몽구스산엔 위험한 산짐승이 많으니 절대 홀로 움직이지 말라고 말했다.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는지 귀에 인이 박힐 지경이었다.
‘연초 향이 나는 풀이랬지.’
토굴 근처를 둘러보았다. 라골이 말해준 것과는 다르게 제법 길이 크게 나 있었다. 다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약초의 종류도 많았다. 스무 가지는 더 되어 보였다.
게다가 야생 약초라기엔 너무나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약초끼리 섞이지 않도록 줄을 이용해 구역이 나누어져 있기도 했다.
잎사귀가 삐쭉삐쭉한 약초를 만져 보던 엘리사는 확신했다. 누군가 관리를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제는 비가 오지 않았다. 아무리 산이라도 이 시간에 이슬이 맺혀있을 리 없었다. 누군가 물을 주고 간 것이다.
엘리사는 마음이 급해졌다. 약초를 관리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되도록 마주치지 말아야 했다. 최악의 경우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땅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서둘러 라골이 말해준 약초를 찾았다.
‘모양을 알아둘걸.’
그래도 특징은 알고 있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을 순 있을 거로 생각했다. 연초를 태우는 냄새, 그리고 옷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냄새가 밴다고 했다. 엘리사가 한참 약초밭을 헤집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토굴 근처에서 자라는 약초랬는데?’
근처에 있는 약초의 냄새는 다 맡아보았는데 연초 향이 나는 약초는 없었다.
“누구야!”
뒤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 * *
진저가 길리안의 멱살을 잡았다.
길리안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신전에 온 그에게 황망한 소식을 전했다. 스크롤을 쓴 데다가 사라졌다니. 스크롤을 쓰면 병사들이 소지한 탐색기에 위치가 잡혀야 했다.
하지만 진저의 것은 물론이고 다른 병사들의 탐색기에도 위치가 잡히지 않았다.
“넌 뭘 했어, 이 새끼야!”
당혹스럽기는 길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그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당연히 그웬군 진지로 갔을 줄 알았다.
입을 꾹 다문 길리안이 그의 손을 쳐냈다. 언제나 허허실실 웃던 그가 이렇게 차가운 표정을 짓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진저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역시 아내를 참가시켜선 안 됐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의 입을 모두 찢어서라도 수습하는 게 옳았다.
그웬 공작 부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트리거 공작이 달려왔을 땐 진저와 길리안은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다.
아들은 얼굴에 멍이 들었고 제자는 뺨에 생채기가 생겼다. 그 어처구니없는 꼴을 지켜보던 트리거 공작이 노성을 내질렀다.
“뭐하는 짓들이야!”
각 군의 병사들이 나서 그들을 떼어놓았다.
트리거 공작은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다 자란 줄 알았더니 알맹이는 목검을 들고 겨루던 그 옛날과 다르지 않았다. 진저와 길리안은 고집스레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지금 이럴 때냐!”
“…….”
“…….”
“진저 네놈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상한 것을 호신 도구라고 쥐여준 게야?! 길리안! 너는 무얼 했느냐. 어떻게 공작 부인이 사라질 때까지 눈만 뜨고 있어!”
그는 당장 전투를 중지하고 그웬 공작 부인의 수색을 명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밤이 깊어지면 수색도 할 수 없었다.
그웬군, 트리거군 할 것 없이 모두 공작 부인을 외치며 산을 수색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내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스크롤로 이동이 가능한 거리는 모두 수색하였으나 공작 부인의 머리카락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탐색기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다른 건 전혀 문제가 없었다. 훈련을 하는 동안 세 번이나 스크롤을 사용했지만 모두 탐색기에 위치가 잡혔다.
제작 기간이 워낙 짧다 보니 불량품이 섞여 있던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그 불량품을 모의 전투에서 쓰게 된 것이다.
마크빌이 마탑과 연락을 취했던 병사에게 물었다.
“마탑에선 아직 연락 없어?”
“학술회인가 뭔가를 한다고 펠벤국으로 떠났답니다.”
“남아 있는 마법사가 한 명도 없진 않을 거 아냐!”
“없대요. 한 명도 안 남기고 떠났다고요!”
마크빌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대체 어디로 사라지셨단 말인가.
타군에서는 도시 괴담을 운운하기 시작했다. 마법 아이템이 정상적으로 발동하지 않으면 사용자의 에너지를 모두 빼앗아 육신을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소문이었다.
실제 사례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론상으론 가능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웬군 병사들은 육친이 죽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했다. 트리거 공작이 나서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목을 벨 것이라 선언했다. 그러나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산을 이 잡듯 뒤졌는데도 오리무중이었다. 모의 전투 같은 건 모두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스크롤을 제작한 놈들 모두 도륙하리라 고함을 내지르던 진저도 입을 다물었다. 이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모의 전투를 누구보다 성실히 준비했다. 그러니 집합 지점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진저는 그웬군 진지부터 시작해 온 지점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신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까지 가 봤으나 아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웬군과 트리거군뿐 아니라 트라노이, 포르테군까지 그웬 공작 부인 찾기에 나섰으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진저는 홀로 신전 안에 있었다. 모의 전투 종료 시까지 30분도 남지 않았다. 해가 지고 달이 뜬 지 오래였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건 마탑의 연락이었다. 놈들이 돌아와야 무엇이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네 탓 아니야.”
여성의 목소리였다. 진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가 지금 가장 간절한 건 아내의 목소리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얘기 좀 해.”
“돌아가라.”
“지니!”
줄리아가 그의 애칭을 불렀다.
“걱정될 거야. 나는 알아, 책임감 강하고 다정한 사람이잖아, 너.”
그녀가 진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병이 든 사람처럼 시렸다. 그녀가 제 앞에 다가와 양팔을 붙들 때까지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엘리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정말 스크롤이 정상적으로 발동하지 않은 건지, 그래서 온몸이 가루가 된 건지, 아니면 어째서 찾을 수 없는 건지. 걱정과 절망, 당황이 한데 뒤엉켜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모두 함께 수색하고 있잖아. 마법사들이 돌아오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거야.”
줄리아의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한 것인가. 아내는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그를 위했다. 주의를 주었어도 듣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줄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와 얘기하고 싶었어. 그래서 어제도…….”
“그만 가라.”
“내 말 좀 들어줘. 진, 제발…….”
모질게 그를 떠난 건 그녀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녀가 고뇌하고 아파할 때면 언제나 품을 내주었다. 진저는 그녀에게 안식처였다.
괴롭고 괴로워서 이대로 죽어버릴까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를 떠난 후로 일상은 지옥이 되었다.
“네가 보고 싶…….”
그때였다.
“주군!”
마크빌이 신전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진저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신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엘리사는 기사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던 옷이 흙 범벅이 되었고, 하나로 묶었던 머리카락이 부스스 풀어 헤쳐져 있었다.
엘리사는 그런 모습이 민망한지 손으로 연신 머리를 빗어내고 있었다. 칸나나 포르테 백작 부인이 괜찮냐고 물었다. 그녀는 걱정해 주어 고맙다는 말고 함께 환히 미소를 지었다.
그웬가의 기사, 병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상한 곳은 없는지 체크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다친 곳은요? 몸이 상하진 않으셨고요?”
“정말 괜찮아요. 걱정을 끼쳤군요. 미안해요.”
“마님…….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됐습니다.”
천둥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엘리사!”
그는 머리가 하얗게 빌 정도로 분노했다.
쿵쿵, 발을 굴러 엘리사에게 다가간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위험한 산짐승이 있으니까 병사들 곁에서 떨어지지 말랬잖아!”
“아…….”
“구하러 간다고 했어! 당신이 어디에 있든 내가……!”
“……걱정하셨어요?”
너무 당연한 말을 하니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말이라고 하는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했다. 도시 괴담 같은 소문에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참!”
그녀는 얘기하다 말고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진저뿐 아니라 그웬군 기사와 병사, 길리안과 트리거 공작, 트라노이 공작, 포트테 백작까지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신전 내부로 들어간 그녀는 홀로 있는 줄리아를 발견했다. 그러더니 다시 진저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춤에 달린 구속용 마도구를 채갔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줄리아 또한 엘리사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전군이 산을 이 잡듯 뒤지게 만든 여자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다시 줄리아 앞으로 간 엘리사는 그녀가 뿌리칠 틈도 없이 손목에 마도구를 채웠다.
“아!”
병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줄리아의 손등에 붉은 문양이 새겨졌다. 순식간에 패배당한 트리거군이 황망함에 말을 잃었다.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종료 전에 트리거가의 꽃을 탈취했어요.”
엘리사는 아주 해맑은 표정이었다. 진저도, 길리안도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트리거 공작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갑자기 사라져서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았으면서도 이 대회의 본질을 잊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모의 전투, 다시 말해 전쟁의 답습이며 가상의 전쟁이었다.
생과 사, 부흥과 몰락의 갈림길에선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다. 전쟁의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과 위기, 사고를 겪으며 승리를 쟁취해야 만했다.
“하.”
진저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보다 늦게 정신을 차린 길리안도 작게 실소했다.
“우리가 이겼군요!”
엘리사가 해말갛게 소리쳤다.
전투가 끝나고 대연회장으로 이동한 이들이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뒤에서 마탑주인 쿠벨 후작과 마탑의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대체 무슨 일인가 하여 까닭을 묻는 진저에게 왕은 답했다.
“모의 전투엔 4공의 병사들과 꽃 외에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불가하지 않은가?”
왕의 말을 들은 그웬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불충한 표정이 모두 드러날 뻔하였다.
진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기하스엘 전투 포상 건으로 앙심을 품은 게 분명했다. 그가 동동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소했겠지.
그웬군이 모의 전투에서 우승한 건 십수 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마음 졸였던 걸 생각하면 의미가 없었다.
마도구를 통해 대회를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이의가 제기되었다. 전투를 온전히 다 치르지 못하고 도중에 그웬가의 꽃을 수색하지 않았나. 게다가 트리거가의 꽃을 탈취한 건 그웬군이 아니었다.
그웬 공작 부인이 이런 일만 벌이지 않았더라면 누가 봐도 트리거가의 승리였다. 그웬군은 단시간 만에 수세에 몰렸다. 대회 내용만 따지만 점수가 더 높은 쪽은 트리거가였다.
구경꾼의 이의에 그웬, 트리거, 트라노이의 지휘관들이 저건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포르테 백작은 내심 구경꾼의 이의가 먹히길 바랐으나 동조하진 않았다. 앞에 ‘모의’를 붙이긴 했지만 전투였다. 전투에 내용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로 가도 승리만 하면 장땡이었다.
더욱이 실격이 될 만한 일도 없었다. 지휘관이며 병사들이며 수색을 하느라 모의 전투의 규칙을 어길 새가 없었다. 그건 그웬 공작 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구경꾼들은 마도구를 통해 그녀가 어떻게 빠져나와 어떤 일을 하였는지 모두 지켜보았다.
토굴 쪽에서 있었던 일은 보지 못했으나 마법사들은 다른 아이템이 발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토굴로 이동하여 그녀가 보이지 않았을 때는 구경꾼들도 발을 동동 굴렀다. 왕까지 전투를 중지시켜야 하나 고민했다. 마탑주의 후계인 리한이 음울한 목소리로 ‘생…… 체 신호…… 가 잡힙…… 니…… 다’라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몽구스산에 중앙군을 투입했을 터였다.
왕은 물었다. 마경에 잡히지 않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엘리사는 잠깐 고민했다.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망신이었다. 그래서 스크롤 핑계를 대었다.
“기절…… 했었습니다.”
마법사들은 그녀의 말에 납득했다.
스크롤이 오 발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 발동을 일으킨 마법 아이템은 사용자에게 꽤 많은 마력을 빼앗는데 그웬 공작 부인은 보통 사람보다 마력이 부족하다고 들었다. 마력이 충분하지 못하면 아이템은 사람의 생체 에너지를 마력으로 변환한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일 터였다. 단숨에 체력이 떨어지니 기절할 수밖에.
왕이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훌륭한 부인을 얻었군. 그웬의 복이로다.”
“황공하옵니다.”
진저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왕이 손을 올리자 중앙 기사단장이 모의 전투의 결과를 선언했다.
“러셀 13년, 모의 전투의 우승은 그웬군이오!”
세 번의 북소리가 울리고 4공작가의 지휘관들이 몸을 일으켰다. 우렁찬 박수 소리가 대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 * *
저택에 돌아온 줄리아는 불 꺼진 방 안에 서 있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진저 그웬이 줄리아 트리거의 손을, 저밖에 모르던 소년이 그의 인생 통틀어 가장 귀히 여기던 소녀를 뿌리쳤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 마음이 사랑이라 절대 인정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만인이 손가락질하는 악당은 그녀를 사랑했다. 투명하도록 희고, 숭고하도록 아름답게.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그녀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다. 그는 그녀의 안식처였고 첫 남자였으며 간절하게 바랐던 처음이자 마지막 진심이었다.
그런 남자가 자신을 뿌리치고 다른 여자에게 달려갔다. 그녀를 보던 표정으로, 눈빛으로, 목소리로 다른 여자에게…….
쨍!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찻잔이 거울에 부딪쳐 깨졌다. 줄리아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시부가 될 왕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의자에 걸려 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그를, 그를 봐야겠어. 왜 나를 흔들어 놓느냐고, 어째서 그 여자를 자신을 볼 때와 같은 눈으로 보느냐고 물어야 해.’
줄리아가 급히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길리안의 손에 의해 제지되었다.
“문을 나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길리안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낮아졌다.
“다시 돌아올 거야.”
복도에 불빛이 어른거렸다. 이 문을 나서면 저 빛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등 뒤는 어둠. 새카맣고 질척한 그것이 곧 그녀를 잠식할 것 같았다.
“금세 돌아올 거야. 이때껏 그랬듯이 다시……!”
“내가!”
고함을 내질렀던 길리안이 주위를 살피고 다시 말소리를 죽였다.
“기억해. 내가 그 녀석에게 무슨 짓까지 했는지.”
“……부탁한 적 없어.”
“줄리아.”
“한 시간, 아니, 십 분이라도 좋아. 보고만 올게.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
“네가 가면 난 또 그 짓을 되풀이해야겠지. 더 이상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을 거다. 너는 그 안에서 공포에 떨어야겠지. 왕세자는? 왕비는? 왕궁에 피바람을 몰고 온 너를 용서할까?”
눈물이 차올랐다. 울 수 없어 눈물을 참느라 새하얀 목에 붉고 푸른 핏줄이 돋았다. 길리안은 그런 동생을 보고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감당할 수 있겠어? 너에 대한 진실이 드러날지도 모르는데.”
쿵!
귓가를 울리는 이 소리는 무엇일까. 가슴이 떨어지는 소리? 아니, 이건 불행의 전조였다.
“우린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해.”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쥔 그녀의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결혼까지 했어. 너보다 심성이 곱고, 따뜻한 여자다. 더 이상 그들 곁을 맴돌지 마.”
그 말을 끝으로 길리안은 줄리아의 방문을 닫았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를 매몰차게 버렸다. 더 이상 불안에 떨고 싶지 않아서 그를 버리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갔다.
그를 원망하고 스스로를 원망했다.
너는 왜 진저 그웬인가. 어째서 그릇되게 태어난 것인가.
나는 왜 줄리아 트리거인가. 어째서 그릇되게 태어난 것인가.
아니, 사실 가장 많이 원망한 건 그녀의 모친이었다. 어째서 그녀를 낳았는가. 그토록 큰 상처를 짊어지고 왜 부친에게 돌아왔는가. 모친은 그리하여 그 사랑스러운 남자와 자신을 만나게 하였다.
“아아, 어머니…….”
차라리 낳지 말지. 그대로 죽어버리지 그러셨어요. 그녀는 끊임없이 원망을 토해냈다.
필립 트리거와 루에나 트리거는 축복받은 연인이었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성사된 약혼, 필립과 루에나는 첫눈에 서로에게 빠졌다. 신분부터 외모, 취향, 성격까지 맞지 않는 게 없었다.
연인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약혼한 지 2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금실 좋은 부부가 없다며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날들이 이어졌다. 루에나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필립에게 아들을 안겨주었다.
그와 똑 닮은 아들은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었으며 필립은 아내와 아들을 지키기 위해 가문을 더욱 부흥시켰다. 빛만이 가득한 일상이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부부는 행복했다.
하지만 신은 공평했다. 그렇게 큰 행복을 선사한 만큼 커다란 불행마저 내렸다.
그날은 필립이 영지를 시찰하기 위해 저택을 떠났다. 루에나는 수도 외곽까지 그를 배웅했다. 떨어지기 싫어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부부는 해가 지고 나서야 각자의 목적지로 떠났다.
저택으로 돌아가는데 마차가 멈추었다. 바퀴가 빠져 수리를 위해 마부와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홀릴 것처럼.
마부와 기사들이 수리를 하는 동안 그녀는 몰래 빠져나갔다. 남편은 언제나 기사를 떼어놓지 말라 하였지만 멀리 떨어질 생각은 아니었다.
잠깐 주변을 산책할 생각이었다. 하녀가 함께였으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금세 기사를 불러오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근처 호숫가를 거닐었다. 찌르르 풀벌레 소리와 밝은 달, 아름다운 경치, 달콤한 공기. 모든 것이 남편과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 슬픔을 위로했다.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눈이 가려지고 입이 막혔다. 하녀도 마찬가지였다. 두 여자는 괴한들의 손에 의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차 수리를 마친 기사들이 호숫가에 왔을 때는 트리거가의 문양이 그려진 손수건 하나만 남아 있었다.
해가 뜰 때까지 수색이 이어졌다. 아내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필립은 새파랗게 질려 마차를 돌렸다.
이틀이 지나서야 루에나가 발견되었다. 생이 모두 찢어발겨진 채로.
정신을 잃은 아내를 보며 필립은 오열했다. 나를 배웅하느라. 내가 늦게 돌려보내서!
온몸에 난 상처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엉겨 붙은 유린의 잔재.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분노가 그를 좀먹었다.
일어난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울부짖었다.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의사들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평생 입을 다물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울부짖는 그녀를 볼 때마다, 엄마를 찾는 아들을 볼 때마다 필립은 숨도 쉬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들 부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필립의 모친은 사건을 수습했다.
기사들의 입을 막고 그녀를 진료한 의사들을 은밀히 살해했다. 하녀가 죽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함께 유린당한 여성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건 없었다.
가문의 위신이 중요했다. 필립의 모친은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하자가 생긴 며느리를 처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며느리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손으로 밥을 먹고, 똥오줌을 가리지 못했다. 고귀했던 만큼 더 처절하게 망가졌다.
아들뿐만 아니라 손자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터였다. 벌써 손자를 학대할 기미를 보였다. 그녀의 눈엔 그랬다.
며느리는 손자가 생명줄인 것처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며느리의 그러한 행동이 시위처럼 느껴졌다. 네 손자를 내가 낳은 이상 멋대로 쫓아내지 못한다는.
밉다, 밉다 하였더니 설상가상 배까지 부르기 시작했다. 필립은 제 아이라고 주장했지만 어느 누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루에나는 유린당한 날로부터 딱 열 달을 채우고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아이는 트리거저의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 필립이 애썼지만 그의 모든 시도는 모친에 의해 가로막혔다.
‘내 손주에게 천박한 출생의 아이를 동생으로 남겨선 안 되지.’
그녀는 손해 없이 루에나와 필립을 헤어지게 하기 위해 무려 2년을 준비했다. 그동안 루에나는 트리거저 지하에 갇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나아졌으나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두 달이 더 지난 뒤에야 치료를 마치고 내저로 돌아왔다. 고용인들은 작은 마님이 큰 병을 앓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필립과 그의 모친은 소리 없는 전쟁을 벌였다. 당사자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점점 지쳐갔다.
결국 그의 모친은 강수를 두기로 했다. 세상에 여자가 어디 루에나뿐이던가. 지금은 뭐에 홀렸는지 사리 구분을 못 하는 아들도 다른 여자를 만나다 보면 달라지리라 생각했다.
트리거저에 미혼의 여성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모두 대단한 집안의 영애들이었다.
그녀들이 올 때면 루에나는 안주인의 방이 아닌 손님방에 갇혔다. 필립의 모친은 몹시 매정했다. 손님들에게 안주인의 방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아들은 뒤늦게 아내를 처리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길길이 날뛰었다. 아들의 의사 같은 건 배제한 지 오래였다.
‘제가 지키지 못한 겁니다! 어머니 아들이요!’
‘제 몸 간수 못 한 걸 누구 탓으로 돌려! 보아라, 저 계집이 낳은 아이가 너를 조금이라도 닮았느냐.’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제 자식으로 키우기로 했습니다.’
‘흥, 어미도 꺼리는 더러운 아이를 키우겠다고?’
루에나는 둘째가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아이를 안아주지 않았다. 젖을 주는 것도 질색하여 아이의 젖어멈을 들였다.
그렇게 1년이 더 지났다. 그의 모친은 며느리를 내쫓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번번이 필립에게 제지당하면서도 지지 않았다. 그동안 줄리아는 방치되었다. 우는 소리마저 듣기 싫다고 그녀와 가장 먼 방에 아이를 가두었다.
그동안 필립은 아이들을 살뜰히 챙겼다. 제 친자식인 길리안뿐만 아니라 아내가 유린당해 태어난 아이에게도 줄리아라 이름 붙이고 애정을 쏟았다.
아내를 챙기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둘째와 친해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들이 동동거리는 꼴은 모친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무슨 짓을 해도 아들은 며느리를 놓지 못했다.
결국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제 발로 저택을 떠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아들 곁에서 언제까지 기생할 테냐.’
‘…….’
‘네 발로 나가거라. 끔찍한 씨는 네가 데리고 가야 할 것이다. 길리안은 안 돼. 대신 약속하마.’
최고로 키워주겠다.
왕보다 더한 권능을 손에 쥐여줄 테고, 길리안은 누구나 우러러보는 사내로 성장할 거라고 말했다.
루에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언어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할 수 있다고 한들 시모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을 터였다.
자신은 아들의 인생에 있어 결점이었다. 트리거가에서 입을 봉하고 있긴 했으나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술에 취해, 혹은 재물을 취하기 위해 입을 연다면 아들의 인생에 가시밭길이 생길 것이다.
루에나는 남편을 사랑했다. 아들도 꼭 그만큼 사랑했다. 그녀 자신 같은 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녀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필립은 모친에 의해 갇혀 있었다. 친정에 돌아간 그녀는 일주일을 앓았다. 어미를 찾는 줄리아의 울음소리가 들릴 적마다 더 깊게 잠을 청했다.
병상에서 일어난 그녀는 깨달았다. 아, 난 그가 아니면 살 수 없구나. 그 없이 더 이상 생을 지속할 수 없었다.
루에나는 그전과 달라졌다. 밥을 먹기 시작했고,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줄리아를 돌보기도 하였다. 그녀의 일을 알고 있었던 부모는 몹시 기뻐했다.
끔찍한 사고는 그녀의 부모에게도 큰 트라우마를 남겼으나 살아가야 했다.
그녀가 달라진 후 일주일. 루에나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부터 줄리아를 보고 있었다.
‘아가, 미안해.’
이렇게 못난 어미라서. 너에게 이런 삶밖에 줄 수 없어서.
부모님과 줄리아, 그리고 길리안에게 편지를 남긴 루에나는 저택을 나섰다.
‘어디 가.’
‘…….’
‘돌아오는 중이었지?’
‘…….’
‘당신과 줄리아가 보고 싶었어.’
피투성이가 된 필립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상냥한가.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고,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럽단 말인가.
그는 애원했다. 그녀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죽으려거든 함께 죽자고. 그를 위해 곁에 남아달라고.
결국 그녀는 그에게 돌아갔다. 죽을 수 없었다.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사람을 자신과 같은 불행 속에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트리거 공작은 가문 내에서 어머니를 따르는 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모친을 영지로 보내 발을 묶었다.
온전히 가문을 장악한 그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 살았다. 루에나도 자신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는 남편을 위해 애썼다.
시모의 빈자리를 채웠으며 길리안의 교육에 힘썼다. 줄리아에게도 애정을 나눠주었다.
마음 가짐을 달리하니 곪아 문드러졌던 속도 점차 나아졌다. 그녀는 다시 말을 되찾았다.
그 후로는 평화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따금 그 끔찍했던 날의 꿈을 꾸지만 곁에 남편이 있었다. 루에나는 그 하나면 되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길리안과 줄리아는 부모의 관심 속에서 자랐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큰 애정과 사랑을 받았지만, 이따금 발작하듯 자지러지는 부모로 인해 알맹이는 어른보다 더 여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저 그웬이 트리거저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이의 출생을 가엽게 여긴 트리거 공작은 아이의 스승이 되길 자처했다.
처음엔 마뜩잖아 보였던 아이도 어느 순간부터 트리거 공작을 따르기 시작했다.
공작은 아이가 길리안과 좋은 친구가 되길 바랐다. 그래서 수련을 할 때면 항상 길리안과 함께하게 했는데 그의 예상대로 아이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너무 친해져서 사고도 함께 치고 다녔다.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진저와 길리안이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줄리아도 진저에게 관심을 보였다. 진저는 어릴 때부터 퉁명스러운 아이였다. 입도 험했다. 함께 놀고 싶어도 우물쭈물하는 줄리아를 골리고 괴롭혔다.
고용인들은 소중한 아가씨를 괴롭히는 아이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았지만, 트리거 공작은 그저 흐뭇했다.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을까. 말은 거칠어도 속정이 깊은 아이였다.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트리거 공작 부인은 남편의 의견에 반대했다. 진저가 귀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고를 칠 때면 엄히 꾸짖었어도 다정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사생아였다. 줄리아의 출생이 드러날 때를 생각하면 위험한 일이었다. 사생아와 사생아의 만남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할 가시밭길일 것이다. 그들의 아이는 더 가여운 삶을 살 테고.
공작 부인은 그녀가 겪은 고통을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공작 부인의 바람과는 달리 진저와 줄리아는 가까워졌다. 소녀가 된 줄리아는 정숙하고 교양 있는 완벽한 레이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레이디는 쉬이 호감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없었지만 눈빛은 달랐다.
언제 어디서나 진저의 등을 쫓았다. 진저와 대화를 나눌 때면 여자의 얼굴이 되었다. 어릴 때 함께 놀던 친구가 아닌 남자로 느끼는 게 분명했다.
아직 열너댓 살의 아이들이니까.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까. 공작 부인은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성년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진저까지도 줄리아를 여자로 보기 시작했다. 사랑을 모르는 청년은 줄리아에게 느끼는 감정을 우정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아이였던 그가 청년이 되고 사내가 되었다. 그동안 그는 전쟁에 나갔고 공을 세웠으며 한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그가 공작 위를 이어받은 지 2년이 되던 해, 줄리아와 진저는 처음으로 입술을 맞추었다.
줄리아는 약혼을 부탁하기 위해 트리거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길리안도 함께였다.
그는 동생과 절친한 지기의 사랑을 응원했다.
트리거 공작의 집무실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저는 안 돼요. 그 아이만은 안 된다고요!’
모친이 그렇게까지 흥분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사생아라서 결혼을 반대하는 걸까. 어머니는 남매만큼 진저를 챙겼다. 그 모습이 가식이었다고 생각하니 울컥 화가 차올랐다.
줄리아는 물론이고 동생과 진저를 아끼는 길리안도 이를 악물었다. 집무실에 들어가려던 그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줄리아는 내 딸일 뿐이오.’
‘당신에겐 그렇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어미가 겁탈당해 태어난 천박한 아이일 뿐이라고요.’
그날 남매는 어머니의 비밀과 줄리아의 태생을 알게 되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이 남편의 집무실을 나왔을 때, 남매는 집무실 문 뒤에 숨어 있었다. 어머니가 방으로 돌아가고,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멎고 나서야 남매는 겨우 발을 떼었다.
그날 이후 줄리아는 열흘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진저가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다.
길리안은 동생의 방문 앞을 지켰다. 밤이고 낮이고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는 소리가 들릴까 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겨를도 없이 그녀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동생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길리안은 생애 첫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가지고 있는 첫 기억의 풍경은 지하였다.
머리가 산발이 된 어머니는 나신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젖을 물려주었다. 마치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듯.
이따금 궁금했었다. 말을 시작한 아이에게 어째서 젖을 먹였을까. 그때의 어머니는 왜 그렇게 처참해 보였을까.
지금에서야 알았다. 차마 줄리아를 안을 수 없어 길리안에게 대신 젖을 먹인 것이다.
모친이 겁탈당한 자식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길리안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슴에 소용돌이를 만든 이 감정은 무엇인지.
겁탈당한 여성을 본 적이 있었다. 가해자뿐만 아니라 피해자도 손가락질을 받았다. 몸가짐이 바르지 못해서, 엉덩이가 가벼워서, 그럴 만한 짓을 해서. 어떤 이유를 대서든 여성을 욕했다.
‘나는 그 여자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었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일이 아니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모두의 일이었다. 여성은 연약하고 남성은 마음만 먹으면 여성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는 어째서 자신은 이런 일을 겪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단 말인가.
그의 세상은 비틀리고 비틀려 종내엔 자신의 모습까지 어그러져 버렸다.
열흘 후, 방에서 나온 줄리아는 공작에게 약혼을 하고 싶다고 청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남자와.
트리거 공작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딸을 말렸다.
무슨 일이냐, 진저와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수많은 질문을 하며 줄리아를 말리려 들었으나 그녀의 결심엔 변함이 없었다.
줄리아는 진저를 사랑했다. 그것은 그녀의 입장이 어떻게 달라지든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를 볼 때만 달라지는 눈빛, 그녀만이 아는 그의 다정함. 화려한 외모와 더불어 권세를 지녔다는 것을 포함하여 진저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보다 사랑하지는 않았다.
사생아와의 결합은 안 돼.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그녀에게 진저는 물었다. 연인이 되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 않았다. 그래도 세상 모든 여자 중에 오직 줄리아만이 그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
눈에 안 보이면 궁금하고 그리웠다. 이기적인 성격까지도 괜찮았다. 그녀라면 제 성격을 죽여서라도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납득하지 못하는 진저를 매정하게 끊어낸 그녀는 왕성으로 향했다.
트리거 공작은 제자를 안타까이 여겼으나 딸의 청을 거절하진 못했다. 길리안의 부추김도 트리거 공작의 결단에 한몫을 하였다.
남매는 줄리아의 태생을 무덤까지 가져가자고 합의하였다.
줄리아는 그 일을 알고 있는 자들을 모두 쳐 냈다. 무슨 죄를 뒤집어씌우든 혹은 재물로 회유를 하든 기사들이고, 모친을 치료하기 위해 조모가 살려둔 마지막 한 명의 의사고 단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왕세자는 진저와 비교할 수 없는 남자였다.
언뜻 아량이 넓어 보이지만 길리안보다도 더 음험한 기질이 있었다.
트리거와의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녀를 약혼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그의 뜻대로 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능력은 있는 사내였다. 남성으로서 매력은 없었지만. 왕세자에게 줄리아는 필요한 사람이었다. 물론 줄리아에게도 왕세자가 필요했다.
기브 앤 테이크. 철저히 서로의 이익을 위한 관계. 그게 버거워진 것은 왕비의 눈 밖에 난 이후였다.
왕비는 공작가에 비하면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선대 트라노이 공작과 포르테 공작의 덕을 보아 왕비 자리에 앉았다. 과거에야 상당한 미인이었으나 나이가 들면서 달라졌다.
왕은 젊고 아름답고 생기가 넘치는 여자들을 품었다.
꽃 같은 외모가 지고 남은 건 빈껍데기뿐인 자리였다. 어째서 왕의 사랑을 받을 때 권력을 움켜쥐지 못했을까. 힘의 소용을 알고 동동거릴 때 그녀의 아들 곁에 줄리아가 나타났다.
‘줄리아 트리거가 왕세자비가 되면 그나마 있는 힘까지 모두 빼앗기게 되겠지.’
왕은 트리거 공작의 딸인 줄리아를 몹시 귀애했다. 한 달에 두어 번은 따로 불러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가까이에서 본 4공의 움직임을 듣고 싶어 했다.
그건 왕비의 콤플렉스를 자극했다. 그녀에겐 친정이 큰 콤플렉스였다. 왕비는 줄리아에게 모든 힘을 빼앗기게 될까 봐 매몰차고 악독한 여자가 되었다.
왕세자는 왕비의 눈 밖에 난 줄리아를 감싸주지 않았다. 힘에 겨워 기대고자 하면 철저하게 대가를 바랐다.
줄리아는 왕세자의 약혼녀가 되고도 이따금 진저를 찾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날엔 그가 숨통을 트여주었다.
그는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기다리는 것도 모른 채로.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사랑임을 자각하면 사람은 욕심을 가지게 된다.
그녀는 진저가 자신을 탐내지 않고 이렇게 평생 뒤를 지켜주길 바랐다.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런 안일함이 진저와 길리안 사이에 골을 만들었다.
그날도 줄리아는 진저를 찾았다. 안아줘, 괜찮다고 해줘,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해줘. 간절하게 말했다.
‘그럴 거면 나한테 와라.’
‘난 이미 전하의 여자야. 이러지 마. 너까지 이러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해?’
‘평생 안아주마. 아무 일도 없도록 만들어줄게.’
줄리아는 흔들렸다. 왕세자와의 약혼식을 앞두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게 길리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진저를 선택했더라면 그 길이 어떤 가시밭길이라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닌 왕세자를 선택한 뒤엔 달랐다. 이미 큰 치부가 있었다. 이대로 가문은 왕과 왕이 될 남자에게서 버려질 터였다.
진저는 적이 많았다. 가문 내에서도 호시탐탐 그의 뒤를 노렸다. 그와 적대하는 자들은 줄리아를 노릴 터였다.
그러다 그녀의 그릇된 출생이 드러난다면? 줄리아는? 어머니는 어떻게 되지?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그걸 봐야 할 자신은?
왕실은 그들을 감싸주지 않을 거다. 오롯이 트리거가가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다행히 줄리아는 진저를 택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씩 여지를 남겼다. 힘들어, 괴로워, 내겐 너뿐이야. 진저의 눈길이 다른 곳을 향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줄리아와 왕세자의 약혼식이 있었던 날, 진저는 평생 처음으로 누군가를 잡기로 했다.
줄리아를 잡기 위해 저택을 벗어난 그는 줄리아의 약혼식장을 눈앞에 두고 지기의 검에 쓰러졌다.
그의 복부를 찌른 길리안은 울고 있었다.
진저를 찾으러 나온 루펠라가 비명을 지르며 기사들을 불렀다. 가장 먼저 뛰어온 건 라골이었다.
진저는 라골에게 조용히 상황을 정리하라 일렀다. 지기의 검 끝에 자신의 피가 묻어 있었다는 사실은 당사자들과 루펠라, 라골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줄리아와 사이가 좋던 루펠라는 그 이후로 그녀의 이름만 나와도 히스테릭하게 반응했다.
물론 진저를 찌른 길리안에겐 더욱. 트리거 남매를 혐오하는 건 라골도 마찬가지였다.
루펠라와 라골은 그 일을 악연의 시작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진저는 석 달 뒤, 자신을 찾은 길리안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탓하기는커녕 그 일을 묻었다.
* * *
길리안은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의 손으로 가장 소중한 지기를 찔렀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모든 것이 가루가 되었을 테니까.
스스로를 원망하고 줄리아를 원망하다 종내엔 죄 없는 모친마저 원망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모두 그들 스스로가 만든 업이었다.
저택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모국을 떠나 각지를 여행하는 것도 죄의 시작인 나라의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길리안은 그웬저로 돌아갔다. 저택이 소란스러웠다. 모의 전투의 우승은 십수 년 만에 있는 일이라 기사와 고용인 모두 기뻐하고 있었다.
그웬 부부는 연무장에서 우승파티를 함께하는 중이었다.
진저도 드물게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내일 있을 시상식에서도 푸지게 술을 마셔야 할 텐데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곁에서 엘리사가 동동거리고 있었다. 오늘 일로 호되게 야단을 맞은 모양이었다.
진저를 찔렀을 때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광경이었다. 그가 저렇게 편하게 웃을 수 있으리라곤, 또 다른 여성을 품을 수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하인들과 함께 술을 옮기던 콕스가 길리안을 발견했다. 그는 함께하시라 권했지만 길리안은 능청스러운 말로 거절했다.
“승리가 코앞이었는데 2위를 했다고. 내가 술 마실 기분이겠어?”
콕스는 ‘아이고, 안되셨습니다’하고 답했다. 그 또한 능청스럽게 대꾸하고는 다시 술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저가 그의 눈치를 보는 아내를 흘끔 돌아보았다. 이번 일로 크게 한 소리 하였더니 제대로 파티를 즐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크빌이 엘리사를 위로했다.
“이번 승리는 모두 마님의 공입니다.”
엘리사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수그렸다. 기사들이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들이 모두 기뻐하니 그녀도 기뻤다. 남편의 기분만 풀리면 더 좋을 텐데. 엘리사가 또 한 번 진저를 돌아보았다.
그의 기분은 이미 다 풀려있었다.
‘다 제 탓이에요. 죄송해요.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하셔도 들을게요. 저를 욕하세요!’
마크빌의 말처럼 이번 승리의 공은 아내에게 있었다. 그런 사람이 타박을 얌전히 듣는 것으로도 모자라 욕까지 해달라고 하니 화가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시무룩해진 아내를 보면 픽픽 웃음이 나왔다.
기사들이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이런 좋은 날 마님께서도 한잔하셔야 한다며 아우성이었다.
진저가 아내의 앞으로 내밀어진 잔을 대신 받았다.
“마시지 마.”
“이런 날도 못 마시게 하는 남편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한스의 말에 진저가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뭐라고 하는데.”
한스가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미 만취 상태였다.
“밴댕이 소갈딱지.”
어찌나 취했는지 제가 누구 앞에 있는지도 잊은 모양이었다. 진저가 테이블 아래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한스는 끅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자빠졌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저 새끼 저거 오지게 마시더니 처자는구먼.”
누군가의 말에 기사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사는 이렇게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늘 정숙함을 강요받던 삶이었다. 살면서 기사들과 술을 마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제 앞에 놓인 와인잔을 보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남편의 몸으로 술을 마신 후 술맛을 알았다. 숙취는 괴롭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란델은 음식뿐만 아니라 주류도 훌륭해서 그란디아의 술과는 달랐다. 여성의 입에 딱 맞는 달콤한 술이 많았다.
그란디아에선 술을 마시는 게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녀가 스스로 술을 찾았다.
진저는 엘리사에게 술이 건네지는 족족 그가 받아마셨다. 아내의 손이 술잔에 닿는 것도 보지 못했다.
“……은데.”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그가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지은 죄가 있는 자는 드러내어 투덜댈 수도 없었다. 그의 시선에 엘리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렇게 기쁜 날은 함께 취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는 남편의 감시하에 안주로 나온 치즈만 몇 조각 먹을 수 있었다.
부부는 기사들이 보다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파티가 끝나기 전에 내저로 돌아왔다. 진저가 아내를 제 방으로 이끌었다.
또 한바탕 야단을 치려는 걸까. 엘리사는 그에게 끌려가면서도 눈썹을 떨구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혼날 일은 했지만 그대도 우승 축하 파티를 하는 중인데. 오늘은 이만 넘어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녀는 남편의 방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몇 가지 술과 그녀가 좋아하는 달콤한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아……?”
“당신이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어.”
남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진저는 그렇게 꽉 막힌 남자는 아니었다. 물론 아내의 일엔 이상하게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그래도 대부분 아내의 뜻을 따라주었다.
“좋은 날은 즐겨야지.”
그가 의자를 빼주었다. 직접 잔에 술을 따라주기까지 했다.
진저가 아내를 위해 선택한 술은 일전에 트리거 공작이 가져왔던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달콤한 데다 도수가 낮아서 아내에게 딱이었다.
“화…… 나신 줄 알았어요.”
“났어.”
“……죄송해요.”
“그 죄송하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은 못하나?”
“네?”
“화를 풀어줘야 할 것 아냐.”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가 ‘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진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른 여자라면 키스라도 해주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아내는 아니었다. 사탕 사건으로 호되게 당하지 않았는가.
“사탕 같은 거 말고.”
엘리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보.”
너무 다그쳤나. 진저의 눈엔 아내가 뿔이 난 것 같았다. 아내의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번 우승은 그녀의 공이었다. 그런데 걱정시켰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무얼?”
“원하는 건 확실하게 딱, 짚어서 말씀해 주시면 알아듣기 편할 거예요.”
진저가 픽 실소를 흘렸다.
“원하는 걸 말씀해 주시면 구해놓겠어요. 지금은 당신이 좋아하실 만한 걸 가지고 있지 않아요.”
왜 그 좋아할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남자였다. 남자가 아내에게 바라는 건 당연히 물건이 아니었다.
아내의 순진함은 그의 복장을 터뜨렸지만 그만큼 귀여웠다. 진저가 웃으며 그녀를 다시 앉혔다.
그제야 남편이 농담을 했다는 것을 알고 엘리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리고 농담을 하시기 전엔 농담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농담이 어디 있는가. ‘농담인데-’ 하고 말을 시작하면 오히려 농담 같지 않을 것이다.
“토굴은 어떻게 알았어?”
진저가 화제를 전환했다.
“토굴이요? 아, 라골에게 들었어요. 이럴 적에 당신과 함께 자주 갔었다고.”
진저는 아내를 다그쳤던 게 민망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내에게서 연초 향이 났다. 사내놈들과 같이 있다 자연스레 묻은 건 줄 알았는데 산짐승을 쫓기 위해 부러 향을 묻힌 모양이었다.
사실 진저는 일부러 약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약초를 믿고 괜한 일을 할까 걱정했던 탓이었다.
그는 저택에 돌아와 아내를 야단쳤다. 거짓말 조금 보태 바가지 긁는 여자처럼 굴었다.
산짐승들은 당신은 씹지도 않고 꿀떡 넘길 거라고 화를 냈던 게 민망했다.
엘리사가 말을 멈추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항상 사고를 쳤을 때 이런 표정을 지었다.
진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뭔데.”
“그게…….”
“말해.”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화날 만한 일을 한 거군.’
진저가 인상을 찌푸리자 엘리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보라 말했지만 도리도리 고개만 저었다.
“안 내…… 려고 노력할 테니까 말해.”
“정말요?”
“그래.”
“그게 사실은 기절한 게 아니라 붙잡혀 있었어요.”
“뭐?!”
그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엘리사가 울상을 지었다. 화 안 내기로 해놓고선. 진저가 씨근덕거리며 술잔을 짚었다.
“누가 당신을 잡은 건데.”
“말 안 할래요…….”
“미치는 꼴 보고 싶어?”
“화내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노력해 보겠다고 했지 화를 안 낸다곤 안 했다. 하지만 아내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럴 땐 닦달하는 것보다 달래는 게 먹혔다. 진저가 화를 가까스로 누르며 차분하게 물었다.
“누군데.”
남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지자 엘리사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 약초밭을 관리하는 사람 같았어요.”
“그래서 병사들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잖아! 자각 좀 하란 말이야. 예쁘다고, 당신!”
피가 거꾸로 솟구쳐서 거르지 않고 말을 뱉었다. 엘리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지만 진저는 쑥스럽다거나 민망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은가. 아내는 아름다웠다.
“그놈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았어?”
“놈…… 이라곤 안 했는데. 년이었는걸요.”
엘리사가 합 입을 다물었다. 욕 같은 건 모진 일을 당하면서도 입에 담지 않았다.
남편의 말에 대꾸하려다 보니 실수를 해버렸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며 뺨을 감쌌다.
“년? 여자였다고?”
“……네.”
진저가 훅 한숨을 내쉬었다. 사납던 기세가 누그러졌다.
“여자가 왜 당신을 잡아놨던 건데?”
“약초 도둑인 줄 알았대요. 나중에 아니란 걸 알고 풀어줬어요. 산짐승 쫓는 약초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기도 했고요.”
다행히 찢어 죽일 개새끼가 아니라 아내의 은인이었다. 그가 찬술을 들이켰다. 또 한 번 심장이 뚝 떨어질 뻔하였다.
“아세요? 그 약초를 ‘나래’라고 한 대요. 약초 지식이 굉장해서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었어요.”
부부는 그날 밤 술을 마시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이 들어간 아내는 말이 많아졌다.
진저는 그녀의 말을 지겨워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부부의 술자리가 끝났다.
진저는 술에 취해 잠든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무서웠을 것이다. 여성이라곤 하지만 난데없이 포박당한 게 아닌가.
이전처럼 건강하게 돌아와 준 게 고마웠다. 아내를 안아 든 진저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아내를 제 침대에 눕히고 함께 잠이 들었다.
또 한 번의 사고가 찾아올 줄도 모르고.
* * *
일어나니 남편의 침대였다. 엘리사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기척에 작게 미소 지었다. 어제는 즐거웠다.
분위기에 취해 제법 많이 마셨는데도 숙취가 전혀 없었다. 마음이 편해서 그런가. 그녀는 에헤헤, 웃으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어? 숙취가 전혀 없는 건 아닌가?’
평소보다 시야가 넓어졌다. 하지만 두통이 있거나 속이 메슥거리지 않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남편이 이때까지 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모의 전투 때문에 많이 힘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계속 자게 둘 순 없었다. 저녁에 시상식이 있었다.
그녀가 볼록 올라온 이불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윽.”
이불 속에서 신음이 들렸다. 어디가 아파서 늦게 일어난 건가. 화들짝 놀란 엘리사는 서둘러 이불을 들추었다.
“어?”
남편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어어, 어어어?!”
엘리사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거울을 찾았다. 거울 속에 비치는 건 남편의 얼굴이었다.
한동안 잠잠하길래 저주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더니. 그녀는 황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붙들고 있는 남편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대신해 남편이 숙취를 겪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엘리사가 호출줄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콕스가 들어왔다.
“숙취 제거제를 가져오너라.”
“예.”
“그리고 면장갑도.”
몸이 바뀔 때면 늘 그녀를 고생시키는 그것. 부푼 아랫도리를 해결해야 했다.
진저가 이마를 잡았다. 이놈의 저주는 대체 언제가 되어야 사라진단 말인가.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째였다. 그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주무르며 입에 약을 털어 넣었다.
“웩!”
토악질이 올라왔다. 아내의 몸은 쓰고 떫은 건 받아들이지 못했다.
엘리사가 약을 한 봉 더 찢어서 건넸다. 꿀물도 함께 주었다.
아내는 저보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익숙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약을 먹고 꿀물까지 들이켠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승전 파티는 얼굴만 비친다고 쳐도 이제 곧 신년 회의가 있을 터였다. 이번엔 또 얼마 만에 몸이 바뀌려나. 이젠 제 몸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진 않았다.
대체 몸이 바뀌는 조건이 무엇일까. 몸이 바뀔 때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짚어보았지만 도무지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진저가 그녀에게 어제 별다른 일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스크롤을 사용한 것 외엔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답했다.
굳이 다른 걸 대보라면 남편과 술을 마신 것? 하지만 처음 몸이 바뀌었을 적엔 그녀도, 남편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어제는 정말이지 즐거웠다. 대화가 즐거워서 그를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도 그녀처럼 즐거운지 알고 싶었다.
“일단 승전 파티에 갈 준비를 할까요? 폐하만 뵙고 나오더라도 안 갈 수는 없어요.”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그 지겨운 여성의 준비를 해야 한다니. 눈앞이 깜깜했다.
무심코 거울을 쳐다본 그가 고개를 내려 가슴을 보았다.
“살이 빠졌나?”
“아, 며칠 바빠서 식사를 못 챙겼더니…….”
그는 몸을, 그러니까 제 영혼이 들어간 아내의 몸을 이곳저곳 주물렀다.
확실히 살이 빠졌다. 이전에 몸이 바뀌었을 때보다 팔도 가늘어졌고. 진저가 양손으로 가슴을 붙잡았다. 가슴도 작아졌다.
“뭐 하는 거예요!”
“당신 손이잖아.”
“영혼은 다르잖아요!”
그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어차피 씻을 때 보고 만질 텐데, 뭘.”
그 말을 끝으로 진저가 몸을 일으켰다.
“지금 씻으려고요? 잠깐만요! 내가 씻겨줄게요.”
“그게 더 야할 텐데.”
그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내 손이 당신 맨몸에 닿는 거라고.”
그건 싫었다. 엘리사는 이도 저도 못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 * *
시상식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엘리사는 진저에게 줄을 서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출발 전에 진저로부터 들은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떠올리며 필요한 자들, 필요 없는 자들을 구분해 대화시간을 조절했다. 그건 몹시 피곤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만 피곤한 건 아니었다. 루펠라는 엘리사가 된 진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영애들에게 인사를 시켰는데, 대화의 7할은 ‘우리 새언니가 모의 전투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 몰라요’ 하는 자랑이었다.
멀찍이 있던 엘리사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반면에 진저는 제 칭찬도 아니면서 뻔뻔한 표정이었다.
루펠라가 ‘그렇죠, 언니?’ 하면 겸양을 떠는 일은 일절 없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 못한 엘리사가 나섰다.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라고 좀 해요.”
“맞잖아.”
이번 우승은 모두 그녀의 공이었다. 역대 성원제 꽃 중에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어제는 국왕으로부터 몇 번이나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다.
“겸손은 레이디의 미덕이에요.”
“내 아내의 미덕은 인정할 건 인정하는 거야.”
“정말!”
루펠라는 흐뭇한 표정으로 부부를 바라보았다. 찰싹 달라붙어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그녀는 구석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있는 줄리아를 흘겼다. 오빠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으려 하지만 은근히 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저 여우.’
그렇게 매몰차게 오빠를 버린 주제에 무슨 일만 있으면 꼬리를 아홉 개나 달고 와서 살랑거렸다.
힘들다, 안아 달라, 내 진심은 너밖에 모른다. 겉만 번지르르한 말들로 사람을 뒤흔들어 놓고 쏙 내빼는 꼴이 역겨웠다.
결혼 전엔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한테는 그렇게 개차반 같은 오빠가 저 여자 앞에선 병신이 되었다.
새언니가 오빠와 결혼해 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새언니는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들었다.
착하고, 친절하고, 예쁘고, 순수하다. 루펠라가 이렇게까지 타인을 칭찬하는 일은 없었다.
‘누구랑은 비교도 할 수 없지, 암.’
루펠라가 엘리사를 좋아한 것만큼 과거에 줄리아를 따랐다는 건 기억에서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줄리아의 곁으로 길리안이 다가갔다. 남매끼리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건데 루펠라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둘 다 뱀 같은 게 딱 둘이 남매요, 광고하는 꼴이라며.
진저와 엘리사는 파티 내도록 함께했다.
혹시 여우 같은 줄리아가 엘리사 보는 앞에서 또 살랑거리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나 그런 기미는 없었다.
이제 슬슬 걱정을 접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영애, 혹시 들었어요? 트리거 영애 말이에요.”
겨우 신경을 꺼도 되나 싶었는데 또 저 여우의 이야기였다.
줄리아의 이야기를 꺼낸 여자는 평소에도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먹이 물어다 주듯 소문을 잘 알아왔다. 소문을 많이 접하는 만큼 신빙성이 떨어졌다.
루펠라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주스가 반쯤 남은 잔을 내려놓았다.
“트리거 영애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
“전하 말이죠?”
루펠라 대신 줄리아 화제에 관심을 보이는 영애는 왕비에게 유달리 귀여움을 받았다.
그런 여자가 알고 있는 내용이니 뜬소문은 아닐 것이다. 그제야 루펠라가 소문의 내용을 물었다.
“전하에게 애인이 생겼는데 글쎄 왕비님께서 붙이셨대요.”
“네? 약혼자가 있는 아들에게요?”
“트리거 영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더니 결국……. 더 큰일은 전하께서도 왕비님이 붙인 여자를 굉장히 아끼신다더라고요.”
또 다른 영애가 맞장구를 쳤다.
“한간에는 그런 소문도 있잖아요. 전하께서 아이가 있다고. 아이의 모친이 미천한…….”
“이런 얘기는 그만하죠. 입에 담을 소문이 아니군요. 괜한 말 퍼뜨렸다간 경을 칠 거예요.”
줄리아 욕이라면 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는 루펠라가 말을 딱 끊었다.
사생아가 화제에 오르는 건 기분이 나빴다. 영애들이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루펠라는 더 이상 파티장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상했다.
테라스로 나간 그녀가 찬바람을 맞았다. 마음 같아서는 저따위 화제를 즐거워하는 여자들을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다.
왕이 참석하는 파티만 아니라면 콧구멍 두 개를 하나로 이어줬을 것이다.
테라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루펠라를 따라온 건 진저의 몸을 하고 있는 엘리사였다.
그녀는 제 오빠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언니는?”
엘리사는 시종일관 자신을 챙기는 루펠라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잠깐 화장실에 가야겠대서.”
그런 일이라면 타박할 수 없었다. 루펠라가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엘리사는 후후 웃음을 흘렸다.
“뭐 잘못 먹었어? 징그럽게 왜 이래?”
이제 남매의 대화에 겁을 먹지 않았다. 루펠라나 진저나 서로에게 말은 거칠게 해도 정이 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엘리사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새언니가 고마워해.”
모의 전투에서 함께 가문의 꽃을 맡았던 칸나는 말했다. 루펠라가 자신의 칭찬을 입에 달고 산다고. 그때까지는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 했지만, 오늘 직접 보니 정말 고마웠다.
루펠라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엘리사의 변화, 그 시발점은 루펠라였다.
루펠라가 자신만만하게 사랑받지 못해도 노력은 하겠노라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이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했을 터였다.
‘이 마음이 연심이라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학대하고 또 학대했겠지.’
루펠라는 별말을 다 한다고 일축했으나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언니한테 잘해. 오빠 같은 거랑 결혼하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평범한 여자였으면 사흘도 못 살고 뛰쳐나갔을 거라고.”
엘리사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진저는 겉으로 보기엔 대하기 불편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란델의 미친개라는 소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냐?”
“물론이지.”
얼마나 고마운지 잠에서 깰 때마다 볼을 꼬집는다. 지금 내 곁에 그가 있는 게 맞지? 묻고 또 물었다.
“오빠는 그게 문제야. 그 자의식 과잉은 어떻게 안 돼? 오빠 전혀 좋은 남자 아니거든! 얼씨구, 왜 웃고 그래. 허파에 바람 들었어?”
루펠라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새언니와 결혼한 후에 뭔지 모르게 오빠가 부드러워졌다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확실히 깨달았다.
오빠는 정말 많이 변했다.
사실 아예 영혼이 바뀌었으니 안 변하는 게 이상했다.
당사자들은 곤욕스러워하였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진저가 처음처럼 광견병 걸린 미치광이나 마귀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루펠라는 돌아가지 않고 자신만 쳐다보는 오빠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정말 왜 이래?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뭐 잘못을 했다고 해서 이렇게 징그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진 않겠지만.
“나한테 도움받을 일이라도 있어?”
“응?”
루펠라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납득했다.
어쩐지 오늘 내내 느글거리게 굴었다.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난 게 틀림없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엘리사를 보던 루펠라가 테라스 문을 돌아보았다.
창문 너머로 여우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 저 여우 때문이야?”
“여우?”
“노파심에 말하는데 전처럼 말랑하게 굴 생각 절대 하지 마. 힘들다, 뭐다 찾아와도 쌩 까라고!”
루펠라는 이것저것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새언니에게 집중해라. 오빠 너는 안 그래도 미친개인데 바람기까지 있다는 소문이 돌면 답도 없다. 거시기 관리 못 하는 남자들의 말로가 어떤지는 잘 알지 않느냐. 말이 나오니까 한마디 하자면 바람피우는 것들은 모두 불알을 떼어내야 한다.
엘리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하기 전엔 외도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부녀가 되고 나니 알겠다.
‘바람은 나빠.’
진저가 다른 여자를 품는 건 상상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남편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 시각, 진저는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있었다. 여자들은 볼일 한 번 보는 데에도 뭐 이렇게 귀찮은 게 많은지 모르겠다.
드레스를 걷고 바지와 속옷을 차례로 내리고 변기에 앉아야지 볼일을 볼 수 있었다.
그나마 귀족 저나 왕궁 변기가 좌변기라 다행이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오던 진저의 표정이 굳었다.
줄리아였다. 그녀가 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의 전투에서는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다친 곳은 없나요?”
진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은 아내와 몸이 바뀐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군께서 크게 기뻐하셨겠군요.”
“예.”
“건강 조심하세요.”
“예.”
“오라버니가 그웬저에 계신다지요? 귀찮게 하지는 않나요?”
진저가 노골적으로 대화를 피하려 들었는데도 줄리아는 계속 말을 붙이려 들었다.
그가 아는 줄리아 트리거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남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들의 동경을 즐기지 않았고 제 할 일에 집중했다.
“……그분은 잘해주시나요?”
진저가 그녀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어릴 때부터 자주 어울리던 사이였어요. 아버님께서 각하의 검술 스승이셨거든요.”
“잘해주십니다.”
대답을 끝으로 진저가 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로 줄리아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홀에 돌아온 그는 급히 아내를 찾았다. 아내는 자신을 대신해 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 공작 부인!”
왕이 아는 체를 했다. 진저가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실로 뛰어난 재치를 보였소. 덕분에 아주 즐거웠지.”
“황공하옵니다.”
왕을 비롯한 모의 전투 관람자들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진저 그웬이 온몸을 땀으로 적신 채 온 산을 뒤지는 광경은 놀라웠다.
왕은 일전에 기하스엘 토벌 건으로 섬을 하사했다. 별 볼 일 없는 섬에 마영석이 매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분했던가.
아직 완전히 채굴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어마어마한 금액의 마영석이 나왔다.
왕은 진저를 불러 은근히 마영석을 왕궁에 기증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죽어서 재물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에 진저는 평소와 다름없이 싹수 노란 표정으로 답했다.
‘마영석으로 묘지를 제작하는 것도 좋겠죠.’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왕에게도 한 마디 지지 않는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져주었겠는가.
귀족들은 대연회장에서 혼백이 빠진 것 같은 진저를 보며 배를 잡았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진저 그웬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엘리사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왕과 부부가 대화를 마친 후 곧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진저를 대신해 트로피와 상을 받은 엘리사가 기쁜 얼굴로 단상 위에서 내려왔다.
진저는 시상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아내를 데리고 저택에 갈 준비를 했다.
감이 좋지 않았다. 계속 이곳에 있었다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몸을 핑계 대고 파티를 나서려는데 뭔가 찝찝했다. 엘리사의 손목을 붙든 진저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그러세요?”
진저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당신 달거리 언제 했어?”
“달거…… 아, 그러고 보니 곧 할 때네요.”
하지만 일주일이나 남았다. 엘리사는 주기가 일정한 편이라서 예측한 날이 꼭 맞거나, 하루 정도 차이가 났다.
남편은 이를 갈다가 하녀를 불러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그동안 엘리사는 파티 홀 외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달거리를 하기 전에 몸이 바뀌었다. 남편은 몸이 바뀔 때마다 달거리를 겪었다.
‘혹시 달거리가…… 아니지, 그랬으면 저번 달에도 바뀌었겠지.’
도무지 변화의 이유를 모르겠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야 마음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냈지만 지금은 곤란했다.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응큼한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파티에 올 준비를 하려 몸을 씻는데도 자꾸만 시선이 슬금슬금 내려갔다.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 다시 눈을 천장에 고정했기에 망정이지 정신 못 차렸다면 남편에게 큰 실례를 하게 될 뻔하였다.
엘리사가 손들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남성에 비해 길쭉길쭉하고 얇은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곳곳에 검에 베인 상처, 활촉에 찔린 상처, 불에 덴 상처가 남아 있었다.
복부엔 더했다. 조각 같은 근육 위에 자잘한 상처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이건 그가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표지판이었다.
어린 소년이 홀로 전쟁에 나가 많이 무서웠겠구나, 훌륭히 싸웠어, 그는 어릴 때부터 많은 노력을 해왔구나.
사람은 간사했다. 그 이전에는 안 보였던 것들이 마음이 바뀌자 보이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점이 있는 입술을 매만졌다. 이런 데에 점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남편의 얼굴은 남편 본인보다 그녀가 더 많이 볼 텐데도 말이다.
하긴, 오늘처럼 거울에 코를 박다시피 해서 얼굴을 살핀 게 아니니까.
육안으로 보기엔 너무 조그만 점이었다. 남편의 입술이 붉어서 잘 안 보이기도 했고.
“진.”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엔 그녀 하나뿐이었지만 엘리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진…….”
설마 남편의 이름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냥 이름도 아니고 애칭과 비슷했다. 이 근처에도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내가 있는 모양이었다.
등에 무언가 닿았다. 눈이 커질 대로 커진 엘리사가 휙 몸을 돌렸다.
정말 남편의 애칭을 부르는 것이었나.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얼굴. 엘리사가 줄리아 트리거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직 화가 난 거니.”
‘말을…… 놓았어?’
그녀는 남편의 지기인 길리안의 동생이자 남편 스승의 딸이었다. 서로 막역한 사이일 수도 있었다.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쓰며 표정을 조심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세요.”
줄리아는 대체 왜 이러냐는 표정이었다.
고용인도, 루펠라도 아닌 여성에게 말을 놓는 건 어려웠다.
더더욱 남편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다른 여성이지 않은가.
왕세자의 약혼녀가 무슨 일로 이렇게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찾았을까.
어쩐지 전야제 때 남편의 표정이 이상했다. 엘리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줄리아는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빼어난 미모, 불의를 참기 못하는 의기, 교양이나 품위도 나무랄 데 없었다.
남편이 오기 전에 그녀가 어서 말을 끝냈으면 좋겠다. 엘리사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줄리아도 곤욕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럽고 민망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 했다. 누굴 포기하면서까지 얻은 자리인데 이대로 쫓겨날 순 없었다.
왕비는 줄리아를 몹시 싫어했다. 왕세자가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왕궁에서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왕은 얼핏 아들의 약혼녀를 아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4공의 정보 하나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었다.
지금이야 알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풀어주며 왕의 껍데기뿐인 애정을 받고 있지만 이제는 다를 것이다.
왕비가 왕세자에게 붙인 여자는 펠긴 자작의 딸이었다. 왕세자의 여자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신분이지만 펠긴 자작은 왕이 호시탐탐 노리는 것을 줄 수 있는 남자였다.
펠긴 자작의 동생이 성국에서 신성력을 인정받아 곧 제법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말이 있었다.
건국왕 신화만 보면 4공은 왕을 위한 자들로 알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저 왕과 왕국을 수호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왕권과 귀족권을 어느 한쪽이 넘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왕이 무슨 일을 하려 해도 그들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불가한 일이었다.
이번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4공, 그리고 여타 귀족들과 뜻이 맞지 않는 일을 꾸미고 있었다.
4공의 찬성 없이는 불가한 일이라 성국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왕비는 그것을 노려 펠긴 자작의 딸을 왕세자에게 붙였다.
이전에도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왕비는 꾸준히 줄리아를 견제했다. 하지만 왕이 은근히 도움을 주었다.
왕세자를 불러 왕족의 품위는 유지해야지 않겠느냐고 다그쳐 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왕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4공이 폐하께서 하고자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펠긴 자작의 딸은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그 일을 도운 줄리아를 더욱 귀애할 터였다.
트리거 공작은 딸에게 약했다. 눈물로 읍소하면 뜻을 따라줄 게 분명했다. 문제는 트리거 공작을 제외한 다른 공작들이었다.
그웬만 찬성을 해주면 된다. 그럼 트라노이와 포르테는 설득할 수 있었다.
줄리아 또한 그녀가 진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지 알고 있었다.
연인을 버리고 간 여자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옛 연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간절했다. 왕세자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왕비 신분이라면 ‘그 일’이 드러난다 한들 사람들은 입을 놀리지 못할 터였다.
왕비는 유일하게 모욕죄를 목숨으로 물을 수 있는 여성이었다.
그 부탁을 하려고 진저를 찾은 건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제 뒤만 쫓던 그의 눈길이 다른 여자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아주 끔찍한 기분이었다.
전야제에서 어떻게 서 있었는지 모를 만큼 충격을 받았다.
그가, 진저 그웬이, 그녀만 알던 소년이 다정한 눈길로 다른 여성을 보았다.
음식 하나, 음료 하나 일일이 챙기고 혹시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본래 제자리였던 곳에서 그 여자는 환히 웃고 있었다.
궁금했다. 대체 어떤 여자인지.
처음 그녀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 준 건 그가 그녀에게 그런 눈빛을 보내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아주 한심했다. 그의 옆자리에 전혀 맞지 않는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아내로 들였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네 아내, 야무진 여자는 아니더라.”
엘리사는 도무지 상황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왕세자의 약혼녀는 지금 질투를 하고 있었다.
레이라 부인의 딸인 클라우디아와 필리아가 자신을 쳐다볼 때 꼭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왕세자의 약혼녀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질투한단 말인가.
“전야제에서 봤어. 곤란한 일을 겪고 있었지.”
“…….”
“안주인은 가문의 얼굴이잖아. 그녀의 행실은 그웬가의 위상 문제니까…….”
‘그를 좋아하는구나.’
엘리사 또한 그를 사랑하므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이 남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다음에 만나면 확실히 말할게.”
엘리사는 기분이 나빴다. 사람 마음은 칼로 베어낸다고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 또한 감정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했었다. 아직도 불안에 떨었다.
이해하려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오만했다.
줄리아 트리거는 왕비가 아니었다. 아니, 왕비라 하더라도 일가의 안주인을 함부로 논할 수 없었다.
엘리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잖아. 그건 가문에 누를 끼치는 일이야.”
“왜 그걸 영애가 신경 쓰나요?”
“……뭐?”
엘리사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줄리아는 새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친구…… 끼리 걱정도 못 해주니?”
“영애의 행실도 그다지 단정하지는 않군요. 공작가의 가주에게 사사로이 말을 놓는 걸 보면.”
줄리아가 서둘러 등을 돌렸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비참했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래? 내가 너한테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었어?
소리를 치고 싶었다. 그와 자신이 어떤 사이였는지 기억해 내도록 과거의 일을 일일이 짚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더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란 걸 알았다.
서늘한 표정으로 줄리아의 등을 보고 있던 엘리사가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제게서 멀어지자 줄리아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그가 당최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마음이 다 떠난 걸까. 울고 있는 자신을 그냥 버려두고 갈 만큼 아내가 소중하단 말인가.
“진!”
마차 대기소로 향하던 엘리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줄리아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언제 돌아온 모양인지 진저가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줄리아 또한 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를 발견했다.
진저는 엘리사를 빤히 응시하다가 줄리아에게 눈을 돌렸다.
줄리아의 안색이 더 새하얗게 변했다.
‘어디까지 본 거지?’
그녀가 왕세자를 두고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일이 커질 것이다.
펠긴 영애를 왕세자와 떨어뜨려 놓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위치만 흔들어 놓는 꼴이었다.
상황을 수습할 말을 떠올리던 줄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가 그의 아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얗게 질린 건 줄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엘리사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친구의 동생을, 더 깊은 관계일지도 모르는 여성을 그의 몸으로 거절했다.
엘리사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제 얼굴을 한 아내를 빤히 보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아…….”
“잡아.”
그는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내 몸으로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자신의 몸으로 줄리아의 앞에서 손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엘리사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부부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줄리아는 제가 주저앉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다른 여자의 손을 잡았어.’
얼굴이 젖어 들었다.
왕비가 다른 여자를 아들에게 붙였을 때도, 왕이 제 이득을 위해 선심 쓰듯 함께 차를 마셔줄 때도, 왕세자가 자신을 모욕했을 때마저도 이처럼 비참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부부는 고요에 묻혀 있었다. 진저도, 엘리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랑과 불안의 크기는 비례해서 마음이 크면 클수록 쉬이 불안을 불러온다.
그러나 엘리사는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줄리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과거에 그와 어떤 관계였든 그는 엘리사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창밖을 보던 진저가 아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 마피 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자는 꽃이다. 꽃은 빛과 물 없이는 살 수 없는데 여자에겐 빛과 물이 남편의 사랑과 관심이다.
그러니 선대 공작 부인을 너무 원망하지 말라 말해주었다.
유년 시절엔 이해할 수 없었다. 부친과 공작 부인은 필요에 의한 결혼을 하지 않았는가.
애초부터 사랑이 없는 관계일진데 사랑받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잃을 순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고, 그 지겨운 사랑 놀음으로 평생을 족쇄를 찬 채 살게 되었다.
마피 부인이 말하는, 또 줄리아나 엘리사가 말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하나, 사랑에 빠진 여자가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인지는 알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를 남자로 보고 있었다. 그의 과거가 궁금할 테고, 줄리아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할 것이다.
“왜 묻질 않아?”
남편의 말에 엘리사가 미소를 지었다.
“묻지 않아도 되니까요.”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자존심인가. 선대 공작 부인처럼 자존심에 까닭조차 묻지 않는 걸까.
“왜?”
“당신이 제 손을 잡아주셨으니까요.”
그는 만인이 숭고하다 말하는 감정이 우스웠다.
사랑을 핑계 삼으면 아무리 엿 같은 짓도 그럴 만했다고 자위하는 꼴이 역겨웠다.
사랑의 부산물은 너무나 추잡해서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지치게 만들었다.
질투, 자존감의 하락,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현실에까지 해를 끼친다.
그런데 아내의 사랑은 무엇일까. 그녀는 이따금 아주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사랑하면 가지고 싶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사랑하는 여자는 이기적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모두 그러했다. 선대 공작 부인도, 루펠라도, 줄리아까지도.
그는 줄리아가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만은 부정하지 않았다. 지켜주고 싶었고, 괴로울 때 기대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길리안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느끼는 감정과 동일했다.
줄리아는 사랑받고 있다 자신한 모양이지만 그는 타협을 한 것이다.
이 정도면 평생 아끼면서 살아갈 수 있겠지. 일말의 애정도 없는 결혼보다야 그게 낫겠지.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책임질 게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아내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상념에 빠져있던 진저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저 여자는 달랐다. 아내만은 그가 지금껏 보았던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게 편할 텐데.”
“네?”
엘리사는 남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말 그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받는 것도 편하지만은 않아요.”
“왜?”
“보답하고 싶어질 테니까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인데도 그가 물은 것과 가까운 답을 내었다.
그는 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뺨이 뜨거웠다.
‘손길 하나에도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마차가 저택으로 들어갔다. 마부가 나서기도 전에 먼저 내린 진저는 아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