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보답할 수 없는 마음 (10/31)

    9장 보답할 수 없는 마음

    진저의 뒷모습을 보는 엘리사의 표정이 복잡했다.

    사탕 사건이 지나고 사흘 후, 남편이 달라졌다. 그녀에게 냉랭해지거나 대화를 피하려 드는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오늘은 미뤄졌던 모의 전투 예행연습이 있는 날이었다. 남편은 병사들이 훈련대장에게 지도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답답한 건 이런 점이었다.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장난을 걸어오던 그가 며칠째 장난은커녕 말도 잘 걸지 않았다. 저녁 식사 때도 그녀가 묻는 말 외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그제야 식사가 입에 맞냐는 의례적인 질문을 해주었다. 그의 집무실에서 함께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콕 집어 말하기엔 너무나 사소한 일들이었다.

    “저…….”

    엘리사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는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와 눈을 맞출 수 있는 건 좋았는데 말을 붙이고 나니 마땅한 화제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항상 그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고 그녀는 대답을 해주는 편이었다. 질문 몇 가지를 하긴 했어도 그가 말을 거는 횟수가 월등히 많았다.

    엘리사의 모든 일상은 남편의 배려 속에 있었다. 어째서 남편의 배려를 몰랐을까. 짓궂은 장난에 파르르 화를 내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아, 보호구, 보호구 말이에요.”

    “보호구가 왜?”

    “착용이 불편하던데, 혹시 여성용 보호구는 없나요?”

    화제라고 생각해 낸 게 고작 이런 거라니. 혀를 깨물고 싶었다.

    진저는 마크빌을 불러 더 작은 보호구가 있는지 물었다. 마크빌은 마님용 보호구는 제작 중이며 수일 내에 도착할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채 보호구를 착용하러 가는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강아지와 같은 귀가 달려 있다면 축 처져 있을 것 같았다.

    난감했다. 아내의 감정을 눈치채고 나니 평소에 그녀에게 하던 행동 하나하나가 옳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짓궂게 놀리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토라지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입술에 묻은 부스러기를 떼어주거나 하는 행동은 지나쳤다.

    아내가 기대를 하게 만들어 놓고 다시 희망을 뺏는 짓을 하고 있었다. 이건 그렇게나 멸시하던 부친의 난봉질보다 질이 낮았다.

    부친이 상대하는 여성들은 닳고 닳은 편으로 사랑을 찰나의 유희로 여겼다. 관계를 끝내고도 매달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매달린다 하더라도 부친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가 던져 주던 재물 욕심에 전전긍긍하는 것뿐이었다.

    아내는 순진한 데다 정이 고픈 여자였다. 버림받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사생아라는 타이틀도 이렇게까지 그를 고뇌하게 만들진 못했다. 처음부터 그러했기에 마지막도 그러하리라 막연히 예상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일생에 가장 어려운 난제였다.

    ‘미친 새끼.’

    진저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흩뜨렸다.

    그때, 아내와 함께 나섰던 어린 하녀가 연무장에 돌아왔다. 하녀는 진저의 곁에 있던 마크빌 경에게 달려와 무언가를 상의하였는데 워낙에 가까이 있던 바람에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보호구가 이상합니다.”

    루펠라는 모의 전투 훈련 중에 보호구는커녕 화려한 외출용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가 사모해 마지않는 그레닉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에 화장이나 헤어도 언제나 완벽하게 갖추었다.

    모의 전투는 귀족들만 관람이 가능했으므로 ‘꽃’들의 옷차림이 어떤지 아는 하녀는 드물었다. 라골이나 집사에게 물으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저택에 없었다.

    라골은 처벌방에서의 일로 한 달은 운신이 불가능했기에 병동에서 입원 중이었고, 콕스는 내저의 일을 보느라 외출을 하였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도 아이 기저귀 같은 하체용 보호구는 치마 위에 입을 수 없었다. 겉치마에는 파니에(스커트 버팀대)가 있기 때문에 아예 착용이 불가했고, 겉치마를 벗어도 속치마가 죄 밀려서 허벅지가 드러났다.

    ‘마님, 이렇게 입는 게 맞나요?’

    엘리사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차라리 바지를 입었으면 입었지 맨다리를 다 드러내고 훈련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하녀가 다시 마크빌 경에게 착용법을 물으러 왔다.

    “보호구가?”

    “그게…… 다리가 다…….”

    “다리가 왜?”

    다리? 다리가 왜? 마크빌보다 진저의 물음이 빨랐다. 혹시 보호구를 착용하다가 다리가 쓸리기라도 한 걸까.

    주인님이라면 몰라도 다른 남성이 있는 자리에서 마님의 허벅지가 다 드러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입기 위해 낑낑거렸던 보호구를 이번엔 벗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힘으로 내리려다 보니 보호구에 맨살이 쓸려서 벌겋게 변했다. 하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진저는 하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병영 내에 마련된 그녀 몫의 탈의실로 향했다. 안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다리를 다친 모양이었다. 그가 천막을 걷고 들어가 칸막이를 밀었다.

    “꺄악!”

    보호구를 맨다리에 걸치고 있던 엘리사가 비명을 질렀다.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진저도 이 해괴한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일순 굳어버렸다.

    “……뭐 하는 거지?”

    “나, 나가세요!”

    “그걸 왜…….”

    기가 막히는 것도 정도껏이지 한계를 넘으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걸 왜 치마를 입고 착용한단 말인가.

    엘리사는 울상이 되었다.

    진저가 보호대 안을 가리켰다.

    “그 안에 단추를 풀어.”

    단추? 단추가 어딨는데?

    패닉이 되니 눈앞이 까매져서 보호구 안쪽에 손을 넣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숨을 푹 내쉰 진저가 하녀에게 여성용 바지를 가져오라 일렀다. 하녀가 천막을 뛰쳐나가자 그가 아내의 보호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 손이 닿잖아요!”

    “더한 것도 했잖아. 가만히 있어.”

    “그치만…….”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진저는 그녀가 신기했다. 더한 것도 잔뜩 했으면서 손등이 다리에 닿는 것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법을 알려 주시면 제가 할 수 있어요!”

    “삼 박 사 일은 걸리겠군.”

    “여, 여보…….”

    아내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마치 잠자리에서 흥분에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라 기분이 야릇했다. 하필 보호구가 속바지처럼 생겨서 속옷을 벗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리사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부부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두꺼운 천으로 밖과 구분해 놓은 것뿐인데 천막 밖의 소리가 가로막혀 뭉개졌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가림막 안은 괴상할 정도로 온도가 올라갔다.

    ‘미치겠군.’

    기분이 이상해서 그런지 손도 느려졌다. 단추가 있는 곳을 찾으려 손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어깨를 짚은 아내의 손이 움찔거렸다.

    “빠, 빨리요.”

    아내의 말도 의미가 모호했다.

    마음 같아선 톱질을 해서 보호구를 잘라 내고 싶었다. 이깟 게 뭐라고 사람을 이토록 당혹스럽게 하느냔 말이다.

    진저가 이를 악물고 보호구 안을 헤집었다. 이놈의 단추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아내 앞에서 망신을 당할 것 같았다.

    다행히 손가락에 단추가 걸렸다. 검지로 단추를 밀어내는 중에 정수리 위로 달뜬 목소리가 떨어졌다.

    “빨리 벗겨 주세요.”

    단추가 풀리는 동시에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를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내려갈 거야.”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그가 가림막 밖으로 나섰다. 평소와 걸음걸이가 달랐으나 부끄러움에 정신이 없던 엘리사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천막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숫자를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89, 88, 87…….’

    가림막 안쪽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울고 싶은 건 진저였다. 가뜩이나 민감한 상태인데 여기서 눈물로 헐떡이는 소리까지 들리면 상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몸을 앞으로 숙인 채 고개를 떨군 그는 으득, 이를 갈았다.

    엘리사가 머뭇거리며 가림막을 나섰다. 이번 일로 놀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남편은 말없이 땅만 보고 있었다.

    “여보……?”

    이제 아예 두 손으로 정수리를 가렸다.

    ‘나 때문에 불쾌한 걸까?’

    기가 죽은 엘리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요새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제게 실망까지 했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루펠라는 말했다. 자신은 그레닉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 볼 거라고.

    ‘나는? 나는 그가 아니어도 될까?’

    이제는 단언할 수 있었다. 그에게 품은 마음은 호감이 아니었다. 연심이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

    그러니까 자신도 노력해야 했다. 그녀보다 어린 루펠라는 굉장한 용기로 연심에 맞서고 있었다. 엘리사는 없는 용기를 쥐어짜 냈다.

    “제가 실수를 했다면 너그러이 용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가림막 안에서 겨우 수습했던 눈물이 다시 터질 것 같았다.

    “아니야.”

    “네?”

    진저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남편이 숨기려 했던 것을 알아차렸다.

    “아…….”

    민망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저와 엘리사는 한참 시선을 교환했다.

    “저…… 그건…… 생리 현상이니까…….”

    그때, 바지를 가지고 돌아온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들어가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엘리사가 외쳤다.

    “아, 앞에 놓아두어라.”

    “예?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변명거리를 찾느라 대답이 지체되자 하녀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하녀의 ‘마님’ 소리를 들은 연무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마님을 매일같이 부르짖던 기사들까지 나서 까닭을 물었다. 엘리사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저와 기사들과 하녀의 그림자가 보이는 출구를 번갈아 보았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일 없다는 사람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갈라져 있었다. 밖에선 마크빌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눈치라고는 밥 말아 먹은 이들이 우렁찬 소리로 걱정을 시작했다.

    “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마님!”

    “마님!”

    결국 진저가 막사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꺼져!”

    진저 그웬은 시궁창보다 더러운 성격을 자랑했으나 실력만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괴한 몇 명을 맨손만으로도 상대가 가능한 실력자였다. 그런 그가 소리를 치니 그제야 기사들이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녀 또한 ‘그럼 여기 놓아두겠습니다’ 하며 사라졌다.

    막사 안은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그를 위로할까 고민하던 엘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뭐?”

    “저번에 당신도 해주셨으니…….”

    버켄 주점에서의 일을 말하는 건가. 진저의 눈이 커졌다. 다리에 손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하는 여자가 그 일을 해주겠다니.

    엘리사가 그의 다리 사이에 손을 뻗었다. 진저가 흠칫하여 뒤로 물러났다.

    ‘입? 입으로 하려는 건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엘리사는 무릎을 꿇지 않고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꼬물꼬물 손을 움직였다.

    버클을 푸르고 드로우즈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페니스를 잡았다.

    “손…… 정도라면 괜찮아요.”

    그러더니 진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손을 위아래로 흔드는 게 이토록 부끄러운 일이었단 말인가.

    진저는 미칠 것 같았다. 말랑거리는 손이 성기를 꼭 잡는 것도,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도 미칠 것 같은데, 신음을 참는 것도 그랬다.

    다른 여자에게 삽입할 때도 이토록 자극적이진 않았다. 희롱당하는 기분이다. 자신을 희롱하는 사람이 순진하기 그지없는 아내라니. 붉어진 귓불을 보자 오만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 눕혀서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진저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큭.”

    “아, 아픈가요?”

    엘리사가 당황하여 휙 고개를 들었다.

    “큿, 멈추지 마.”

    그는 제 평생에 이런 애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 *

    무슨 정신에 모의 전투 예행연습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정신이 쏙 빠진 채로 기사들의 인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훈련이 끝나고도 하우벡과 마크빌에게 탈출 경로에 대해 들었지만 한 귀로 들어가 한 귀로 흘러나왔다.

    방어구를 입은 채 내저에 돌아온 그녀는 침실 안을 배회했다. 남편이 저로 인해 그것을……. 순식간에 얼굴로 피가 몰렸다.

    망측한 일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매력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혼자 부끄러워하던 그녀가 다시 인상을 썼다.

    ‘남성은 감촉에 약하다고 하던데…….’

    아무런 매력이 없어도 맨살이 닿으면 흥분하는 게 아닐까.

    엘리사에겐 조언자가 필요했다.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라골이 떠올랐다.

    라골은 남편의 명으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떠났다. 콕스가 말해준 예정대로라면 다음 주 안엔 돌아올 터였다.

    라골이 징벌방에 들어갔단 것을 모르는 엘리사는 그에게 조언을 얻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제2저 연금령을 받은 루펠라도 라골이 돌아올 즈음이면 볼 수 있었다.

    “마님, 식사를 준비할까요?”

    외출에서 돌아온 콕스가 물었다.

    “각하께선요?”

    “저녁은 되었다고 하십니다.”

    훈련 중에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시무룩해진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입맛이 없어요.”

    “차와 케이크를 올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콕스를 물린 엘리사가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도무지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책에선 사랑의 통증이 달콤하다고 했는데 그녀에겐 단맛은커녕 쓰고 시었다.

    그날 이후로도 진저는 태도가 달랐다. 여전히 대답은 해주었지만 거리감은 계속 늘어났다. 뺨을 잡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등의 스킨십은 일절 없었고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집무실 난방시설 공사가 완료되었다. 집무실까지 따로 쓰게 되니 하루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엘리사가 참가하는 훈련은 주에 두 번이 다였다. 그 시간만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오늘도 남편은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쳐 주지 않았다. 처음엔 그 일이 부끄러워서 그러겠거니 생각했는데 갈수록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했다.

    ‘내가 싫어진 걸까?’

    애초에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싫어졌다는 말은 이 상황에 맞지 않았다.

    2층 정원에 앉아 있던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관계가 좋아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딱 이전만큼만, 딱 그만큼만 제게 마음을 허락해 주길 바랐다.

    “공작 부인?”

    길리안이었다.

    “표정에 수심이 가득하십니다.”

    엘리사가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라골과 루펠라가 그와 친분을 쌓는 것을 극렬히 반대한 데다 젊은 남성과 단둘만 있는 자리는 부담스러웠다.

    “아니에요.”

    “각하를 기다리십니까?”

    진저와 단둘일 때는 격의 없던 그가 공작 부인의 앞이라고 예의를 지켰다.

    “아니에요. 경은 무슨 일이신가요?”

    “나무 구경을 좋아합니다.”

    시기상으론 봄이 맞지만 나무에는 아직 이파리도 돋지 않았다.

    길리안은 객으로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오갈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답답한 모양이었다.

    “아, 그럼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엘리사가 몸을 일으키자 잠시 그녀를 보던 길리안이 정원 문을 열었다. 숙녀에 대한 매너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의 의자까지 빼주었다.

    그러더니 하녀를 불러왔다.

    “결혼한 여성과 미혼 남성이 대화를 나눌 땐 문을 열어 놓습니다. 그리고 입회자가 필요하죠.”

    손님인 길리안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던 엘리사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상하지요?”

    “예?”

    “문을 열어 놓든 닫든 한 공간에 있는 건 매한가지인데 문을 닫아 놓으면 상간을 한 파렴치한이고 열어 놓으면 지성을 나눈다고들 하니 말입니다.”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며 식견을 넓힌 길리안은 그란디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문화가 어떠한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의 위치는 어디인지. 그란디아에서 온 여자에겐 곤란한 질문일 터였다.

    예상대로 엘리사는 쉬이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가 더 우습게 생각하는 건 입회자였다. 여성이 하나든, 둘이든 남성은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불한당이 될 수 있었다.

    길리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녀는 불안한 눈으로 입구를 힐끔거렸다. 고용인들의 식사 시간이라 정원을 지나가는 하인이 아무도 없었다. 점잖은 귀족 나리가 설마 친구의 아내에게 해코지를 하겠냐마는 이런 말을 들으니 불안감이 앞섰다.

    그의 질문을 고민하던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제게 듣고 싶은 답이 있나요?”

    길리안이 사람 좋게 웃으며 짓궂은 농담이었노라 답했다.

    “그렇다면 경은 제게 무례했군요.”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역시 쉽게 볼 여자는 아니었다. 얼핏 유순해 보이지만 다른 여자보다 더한 강단이 있었다.

    길리안은 대화를 능숙하게 이끌었다. 대화라곤 인사 몇 마디가 고작이었던 그녀의 관심사를 빠르게 찾아내었고, 폭넓은 지식으로 자리를 껄끄러워하는 엘리사의 흥미를 끌어냈다.

    라골과 루펠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어째서 그를 좋아하는지 알 정도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엘리사가 클라크의 저서를 구하지 못해 아쉬워한다는 것을 알고 트리거저에 있는 책을 빌려주기로 했다. 대화 내도록 미적지근했던 그녀의 눈이 빛났다.

    “클라크가 집필한 책을 모두 가지고 있나요?”

    “예. 포용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클라크 특유의 건조한 문체를 좋아해요. 필요한 문장 외에는 묘사조차 넣지 않았죠.”

    “로망스 소설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까?”

    공작 부인은 루펠라보다 고작 서너 살 연상이었다. 아직 사랑에 환상을 가지고 있을 나이였다.

    길리안의 물음에 엘리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로망스를 저속하다 여기는 건 아니었지만 모든 여성을 같은 범주 안에 두는 건 유쾌하지 않았다.

    “엘긴도스의 회한을 좋아해요.”

    말투가 조금 쌀쌀맞아졌다. 길리안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성의 사회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그란디아의 공주답지 않았다. 아니, 그란디아의 공주이기 때문일까. 여성의 몸으로 오랜 시간 그란디아를 주무르던 소피아 왕태후의 핏줄이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회한은 저도 읽었죠.”

    “특히 여주인공의 독백이 기억에 남아요.”

    사랑은 항아리 속의 물과 같아서 바람 한줄기에도 파동이 일며 그것을 담는 그릇이 깨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구절이었다.

    “매력적인 캐릭터죠.”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뒤파르 부인이에요.”

    길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대화를 주도하던 그가 말을 하지 않자 정원에 침묵이 흘렀다.

    뒤파르 부인은 여주인공의 양모로 남자를 병적으로 혐오하여 남주인공과 만나지 못하도록 양딸을 탑에 가뒀다. 그 일로 남주인공과 여주인공 사이엔 큰 오해가 생겼다. 서로 결혼을 약속했으나 제삼자가 만든 오해로 인해 이별하게 되었고, 그들은 중년이 되어서야 다시 만나게 된다.

    “악역을 꼽으라 하면 열에 일곱은 뒤파르 부인을 말할 겁니다.”

    “물론 남주인공에겐 누구보다 악독한 여자죠. 남성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으니까요. 하지만 병든 여주인공이 마지막 하루를 남겨 두고 찾는 건 뒤파르 부인의 리본이에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뒤파르 부인은 좋아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회한의 화자는 남주인공인 콜린이므로 그녀의 악독한 면만을 보여주었다.

    “여주인공이 뒤파르 부인의 리본을 찾으면서 그녀를 회상하잖아요. 거기서 왜 그녀가 남성을 혐오했는지, 어째서 양딸을 탑에 가두었는지가 나오죠.”

    뒤파르 부인은 고향 토호와 결혼한 지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몹쓸 일을 당했다. 그녀의 성(性)뿐만 아니라 일생을 모두 유린한 자는 그녀의 오랜 지기로 뒤파르 부인이 결혼하기 전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결혼을 부모의 강요라고 생각하고 함께 떠나자 청하는데 뒤파르 부인은 그때 이미 남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뒤파르 부인은 그와 함께 놀았던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한 카틀레아 꽃밭에서 그의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믿었던 친구에 의해 겁간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충격으로 아이까지 잃은 그녀를 보듬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남편마저 품행이 단정치 못해 귀한 장손을 잃게 하였다며 그녀를 쫓아냈다. 부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토호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딸을 멀리 쫓아냈다.

    죽지 못해 살던 그녀에게 찾아온 위안은 양딸이자 여주인공인 모타였다. 그녀는 버려진 모타를 거두고 온 정성을 다해 딸을 키웠다.

    “모성 때문에 양딸에게 헌신했다고 보십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뒤파르 부인은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간범인 친구를 만나러 갔죠. 그녀가 자초한 결과입니다. 남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겁니다. 남편이 아내가 겁간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내쳤을까요?”

    길리안의 목소리가 섬뜩할 만큼 낮아진 채 말을 이었다.

    “아니요.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 빛도 보지 못한 자식을 잃게 된 분노, 그녀로 인해 곤두박질친 가문의 명예, 일가를 통솔하는 자로서의 죄책감. 모든 것이 그를 평생 괴롭게 했을 겁니다.”

    “전 그녀의 남편이 또 다른 가해자라고 생각해요.”

    “그런 아내를 감싸 안아야 한단 말입니까, 병신처럼?”

    엘리사는 그가 이토록 흥분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그녀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의 가정엔 없는 게 있어요. 아시겠나요?”

    “예?”

    “그녀의 의사가 없어요. 그녀가 겁간당하길 택했나요? 그녀의 입장에선 그 일은 재해예요. 신도 아닌 사람이 사람을 강제한 건 재해와 비할 수 없이 나쁜 일이에요.”

    엘리사의 또렷한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나쁜 건 그녀를 겁간한 남자죠. 남편이 가지 말라던 곳을 굳이 갔으니 그만한 일은 당해도 된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경은 그녀 인생의 또 다른 가해자예요.”

    길리안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아이는요? 그 일이 드러나면 평생을 지옥에서 살게 될 아이는요?”

    “모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두 명의 자식 모두를 이르는 겁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책은 현실을 기반으로 쓰이고,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안타까워하는 게 맞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는 마치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라도 된 것처럼 분노하고 있었다.

    “삶이 녹록하진 않겠죠.”

    처음엔 여성을 보는 시각에 화가 나서 대거리하듯 대꾸한 건데 그의 가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마따나 가여웠다.

    “저로선 경의 마음에 찰 만한 대답을 드리지 못할 것 같군요.”

    길리안이 자조 섞인 실소를 흘렸다. 누구라도 엘리사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아니, 겉으로는 가엾다고 여겨도 책이 아닌 현실에서는 손가락질하며 뒤파르 부인을 헐뜯지 못해 안달할 터였다.

    상처 입은 자에게 세상이 얼마나 잔혹한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구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에 차는 대답은 진실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안아주고 싶어요.”

    “예?”

    “저는 저 하나만으로도 벅찬 사람이라 위로가 되진 못하겠지만요.”

    허례였다. 겉만 번드르르한 대답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미소가 번졌다. 순한 듯싶다가도 고집이 있고, 맹한 듯싶다가도 강단이 있는. 종잡을 수 없는 여자의 말이 어쩐지 가장 솔직하게 느껴졌다.

    “모타가 기뻐할 겁니다.”

    그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한 엘리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책 속 이야기에 빠지다 보니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 버렸다. 그가 입회인으로 섭외한 하녀는 지치기 시작하는지 맞잡은 손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늦었네요. 이만 들어가…….”

    “분위기 좋군.”

    삐딱한 목소리에 엘리사와 길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여보.”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진저에게 다가갔다.

    진저는 정원에서 대화를 나누는 둘을 20분 동안 보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던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길리안이 누군가와 특히, 여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하는 건 처음 본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상하게 울컥 화가 치밀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나?”

    “아, 책 이야기였어요.”

    아내가 책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길리안은 책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집중할 놈이 아니었다.

    길리안은 남편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엘리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길리안과 대화를 나눌 땐 무심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던 그녀가 남편이 왔다고 양 볼이 발그레 달아오를 정도로 좋아한다.

    자신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던 여성이 다른 사내를 보고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은 이상한 기분을 들게 하였다.

    “무슨 책?”

    “아, 회…….”

    “말해도 모를 겁니다. 소설을 아예 안 읽거든요.”

    맞는 말이지만 진저는 기분이 나빴다. 진저와 길리안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길리안과 오래 알고 지낸 진저는 그의 가면을 구분할 수 있었다. 언제나 허허실실 웃는 얼굴이지만 누구보다 냉소적인 놈이었다. 그런 놈이 아내에게 완전한 호의를 보내고 있었다.

    “날이 찬데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안에 천을 덧대서 보이는 것보다 두꺼워요.”

    길리안이 끼어들었다.

    “로소의 작품이죠? 그란디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이너라더군요.”

    진저가 인상을 구기고 그녀의 드레스를 둘러보았다.

    “다 버리라지 않았나.”

    남편은 포대 자루 같은 드레스를 모두 버리라고 하였지만, 로소의 드레스는 편한 데다 따뜻해서 저택용으로 입으려 가지고 있었다. 결혼 전 예물을 교환할 때 목록에 작성했던 것이라 그가 선물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드레스룸을 그가 선물한 옷으로 채운 뒤에도 자주 입고 다녔던 옷이다.

    “아내 옷장에까지 간섭하나.”

    분위기가 이상했다. 진저와 길리안은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진저가 무언가를 물으면 길리안이 툭, 말허리를 끊었고 길리안이 무언가를 권하면 진저가 되받아쳤다.

    그란디아의 공주로 인생의 대부분을 왕궁에서만 보낸 그녀도 사내들의 영역 다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폐가 있다. 영역으로 따지면 이 정원은 물론이고 이 어마어마한 저택은 모두 남편의 소유였다.

    아데울리 국왕은 자신이 통치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선왕이 승하 후 모친인 소피아 왕태후의 섭행이 이루어졌고, 나이가 차고 나서는 왕태후 파의 귀족들에게 밀려 결정권을 잃었다.

    소피아 왕태후가 병마에 쓰러진 후에는 그의 애첩, 레이라 부인을 필두로 한 보수파가 득세했다. 다시 말해 젊을 때나 나이 들어서나 훌륭한 허수아비였다는 뜻이다.

    왕이 실권(失權)한 나라가 별다른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왕이 통치에 대한 미련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통치를 잘하는 자들이 나서면 되지. 처음부터 가져 본 적이 없는 건 흰머리가 성성해져도 그다지 욕심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매사 넉살스러운 그도 파르르 분노할 때가 있었다. 그건 성국에서 내려온 신관장과 의견 마찰이 생길 때였다.

    그란디아는 성국의 영향력하에 있었기 때문에 신관장은 어떤 문제에 있어선 왕보다 월등한 발언권을 자랑했다.

    아데울리 국왕과 신관장은 마치 고양이와 생쥐 같았다.

    그건 어떻게 보면 영역 싸움과도 같았다.

    실권한 왕이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데울리가 권력자들의 입맛에 꼭 맞는 왕이기도 했지만, 그의 대리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왕위 계승이 가능한 유일한 왕족은 흉년에 쌀 한 톨 내놓지 않을 폭군의 싹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이 생떼를 부리면 못 이기는 척 그의 뜻에 따라 주었다.

    하지만 신관장은 달랐다. 왕의 생떼가 전혀 듣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관장과 아데울리 국왕의 인연이었다. 신관장은 아데울리 국왕이 왕세자였던 시절 함께 어울리던 자였다.

    어쩌면 동년배 지기이기 때문에 서로 그렇게 앙숙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부왕께서도 신관장과 자주 부딪치셨지.’

    꼭 진저와 길리안의 분위기처럼.

    어릴 적에는 신관장의 말이라면 무조건 뒤집어지는 체하는 왕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이 지긋한 중년 사내들이 서로만 보면 파르르 하는 게 이상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다.

    아데울리 왕은 언제나 신관장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신관장은 신의 품에 귀의하기 전 레이라 부인과 지극한 관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기의 관계에 악연이 움튼 것은 모두 여자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진저는 길리안이 못마땅했다.

    모의 전투 방식이 사각전(네 공작가가 동시에 투입되는 전투)이었을 때를 대비해 이 시간에 의견을 나누기로 하였다.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걷어차러 왔는데 남의 아내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아내와.

    길리안도 진저가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저와 달리 화를 내는 이유를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진저가 따지고 든다면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뜻깊은 대화를 나누느라 평소와 다른 표정을 지은 것뿐이었다. 설마 그가 머리가 주먹만 했을 시절부터 벗이었던 진저의 아내를 탐내겠는가.

    하지만 그게 궤변이란 건 길리안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두 남자의 눈치를 보던 엘리사가 말했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엘리사가 정원 밖으로 향하고 나서야 두 남자를 둘러싸고 있던 날카로운 분위기가 풀어졌다.

    길리안 쪽이 먼저 손을 들었다.

    “인정. 내가 실수했다.”

    “뭐?”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진저는 알아듣게 얘기하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개수작으로 보일 수 있었다고.”

    길리안도 스스로가 대체 뭘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진저는 삐딱하게 서서 길리안을 내려다보았다. 길리안이 양손을 올리며 연신 ‘항복, 항복’ 하고 중얼거렸다.

    항복을 선언하는 주제에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킬킬 소리까지 내며 배를 잡기까지 했다.

    “미친개가 사람 되었다더니. 나는 사람들 눈이 삔 줄 알았지.”

    그는 진저의 살벌한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떠벌떠벌 말을 이었다.

    공작 부인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냐며, 살아생전에 진저 그웬의 달라지는 모습을 볼 줄은 몰랐다고 진저를 골렸다.

    진저가 길리안이 앉은 의자 다리를 걷어찼다.

    길리안은 의자에서 떨어지고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 *

    한참을 뒤척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콕스에게 수면제를 부탁했는데 그는 펄쩍 뛰며 주인님이 수면제만큼은 주지 말라셨다며 성화였다.

    콕스가 수면제 대신 따뜻한 우유에 꿀과 브랜디를 넣어 왔다. 첫술로 호되게 앓아서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남편의 몸으로 지내면서 술 마시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술에 취해 남편의 몸으로 자신의 몸에 키스한 망신이 떠올랐지만 엘리사는 잠이 절실했다.

    우유 한 잔을 죄 비웠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더 마셔 볼까.’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양주잔 바닥을 겨우 덮을 만큼 소량의 술을 시작으로 얼굴이 달아오를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주량은 한 잔째에서 이미 넘겼다. 세 번째 술잔을 비웠을 때는 가슴이 쿵쿵 요동치고 가슴이 갑갑했다.

    몸을 일으킨 엘리사가 숄을 걸쳤다. 내저를 나서자 매서운 찬바람이 여린 피부를 날카롭게 쓸고 지나갔다.

    멀리서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시간조차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경비병들이 순찰을 하는 건 새벽 2시와 4시 사이였다.

    벌써 이렇게 이슥한 시간이 되었던가.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잘못했더라, 분명 무언가 언짢게 한 게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연무장 탈의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까.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자책을 하게 되었다.

    내가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였더라면.

    이룰 수 없는 가정들을 하고 과거의 자신을 힐난했다.

    심란해서 정신이 없다 보니 앞에 돌부리가 있는 것도 몰랐다. 무심코 발을 옮기던 엘리사가 휘청거렸다. 겨우 중심을 잡아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돌부리에 걸린 것뿐이었다. 넘어져 무릎이 깨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코가 시큰했다.

    “뭐 해?”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다. 너무 많이, 오래, 간절히 생각해서 환청이 들리는 거로 생각했다.

    “다쳤나?”

    “……아니요.”

    남편이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넘어질 뻔했던 것까지도 모두 보았나. 깊은 밤인 게 다행이었다. 낮이었더라면 분명 붉어진 얼굴이 보였을 것이다.

    “왜 나와 있어.”

    “그냥 답답해서요.”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엇을 답답해하는 건지 그녀의 입으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저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고 엘리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게 몇 분 동안 어둠에 가려진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부부는 동시에 한숨을 삼켰다. 진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엘리사는 그의 기분을 살피느라 진이 빠졌다.

    엘리사가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새벽이라 없는 용기가 불쑥 샘솟은 걸까, 아니면 취기가 올랐기 때문일까. 차라리 묻고 싶었다. 어째서 나를 피하느냐고.

    남편은 그녀에게 기대도 좋다고 말했다. 어떤 것에도 욕심을 내지 않겠노라 다짐해 왔던 그녀를 먼저 흔든 건 그였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무슨 소리야.”

    “왜 저를 피하세요?”

    “피한 적 없어.”

    혼란스러운 감정을 묻기 위해 도망치던 그녀를 붙든 것도 그였다.

    생각하다 보니 억울했다. 뒤흔들고 붙들었으면서, 그래서 호감을 연심으로 변화시켰으면서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자신을 피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당신이 나빠요!”

    버럭 소리친 엘리사가 눈물을 터뜨렸다.

    진저는 아내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단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발음도 이상했다.

    ‘술을 마신 건가?’

    아내가 술에 취약하다는 건 몸이 바뀌었을 때 확실하게 느꼈다. 고작 보드카 한 잔으로도 여파가 대단했다. 다음 날 저녁때까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두통과 속 쓰림은 물론이고 신체 기능이 한 단계 떨어진 것 같았다. 펜을 몇 번씩 떨어뜨렸고, 고작 세 줄짜리 문장을 여러 번 읽어야 했다.

    시종일관 ‘나빠’만 외치는 아내의 어깨를 잡았다. 이러다 뭔 일이라도 낼 것 같았다. 방으로 들여보내려는데 무언가 가슴을 콩, 치고 지나갔다.

    “주사가 주먹질이야?”

    아내로 인해 대체 몇 번이나 기가 막히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주먹질이라고 아내는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아프기는커녕 가렵지도 않았다.

    “정말 대단하군.”

    수발을 들게 하는 것도 모자라 술주정까지 받게 했다.

    처음 술주정으로 입을 맞추었을 때도 기막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몸이 바뀌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트리거 공작은 술을 전혀 못 하는 사람에게도 막무가내로 술을 권하는 사람이었다.

    짜증이 난다거나 귀찮아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픽픽,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걸 주먹질이라고 한다는 게 우스웠다. 차라리 애교를 부린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나쁜데.”

    “반말이나 하고.”

    “뭐?”

    “왜 말 놔요? 나도 놓을 거야!”

    말은 진작에 놓았다. 처음부터 공대를 한 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존중한다는 의미로 하대하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제 말투에 불만이 있는 줄은 몰랐다.

    진저가 아내의 양 손목을 붙잡았다. 제법 앙당그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목을 잡힌 엘리사는 뵈는 게 없었다. 흥분을 하여 취기가 더 오른 모양이었다.

    “나한테는 피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그래, 내가 나빴어.”

    일단 아내를 달래 침실로 데려가야 했다. 이대로 덥석 안아 드는 게 편할 테지만, 술에 취해 정신 줄을 놓은 아내가 무슨 짓을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진저는 아내의 말을 받아주며 슬슬 그녀를 이끌었다.

    아내는 순순히 끌려오다가도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불만을 토로했다.

    “생리는 내가 더 많이 했는데! 나도 달거리 천이 어떤 게 맞는지 안단 말이야! 당신은 고작 두 번 해봤잖아!”

    ‘그게 그렇게 억울했나?’

    진저는 마음 놓고 실실거렸다. 이 정도면 다음 날 기억을 못 할 게 분명했다.

    아내의 불만은 끝이 없었다. 어떻게 이 불만을 다 쌓아 놓은 건지 궁금했다.

    “자꾸 놀리기만 하고! 나도 야한 말 할 줄 안다고요!”

    그러더니 합, 숨을 들이켰다.

    “생- 식- 기!”

    “으하하!”

    진저는 배를 잡았다. 야한 말이라고 한 게 고작 생식기였다. 살면서 이렇게 웃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술을 마신 아내는 아주 귀여웠다. 이걸 기억 못 할 거로 생각하니 약간 아쉽기까지 했다.

    그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마음을 정리하도록 거리를 둔 것뿐인데 이렇게 귀엽게 굴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아내를 끌어안고 등을 부드럽게 얼렀다.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나쁜 놈이야.”

    “놈?”

    “놈…….”

    “나쁜 놈이네, 정말.”

    아내는 얌전히 안겨 있으면서도 ‘토끼 속옷 진짜 싫어’ 등의 말을 중얼거렸다. 한참 아내를 안고 달래던 그는 껌뻑껌뻑 눈을 감기 시작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엘리사는 남편의 품에서 곤히 잠들었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난 엘리사는 숙취로 괴로워했다.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 애썼지만 힘을 주면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잠이 오지 않아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술을 마시다가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식당으로 내려가니 남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단둘이 식사를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자신을 피하고 나서부터는 손님인 길리안과 식사를 하거나 연무장에서 간단히 해결하고 돌아왔다.

    엘리사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편과 잠시라도 함께하게 된 건 좋지만 그가 거북해할 것 같았다.

    식사 메뉴는 모두 매콤한 음식이었다. 엘리사가 술을 마셨다는 걸 알고 일부러 준비한 것이었다.

    그란디아에서는 해장을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이 오늘은 매운 음식을 먹고 싶어 했겠거니 생각했다.

    한참 말없이 식사를 하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남편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것처럼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속은?”

    “네?!”

    그가 먼저 말을 걸 줄은 몰랐다. 토끼 눈이 된 엘리사가 입에 넣은 음식을 씹지도 않고 꿀떡 삼켜 버렸다.

    “속은 좀 어떠시오, 부인?”

    아예 거리를 더 벌리는 건가 싶었는데 말투는 예전처럼 장난스러웠다.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주인님과 마님 사이를 걱정하던 콕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시중을 들던 고용인들에게 눈짓했다. 콕스와 고용인들이 식당을 벗어났다.

    식당엔 그웬 부부, 단둘만이 남았다.

    “당신 지식엔 못 당하겠소.”

    광대가 대사를 읊듯 우스꽝스러운 말투였다. 다른 때라면 놀림받는다는 생각에 울상을 지었을 텐데 오늘은 의미가 달랐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 그가 반가웠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성의 몸에 대해 어찌 그리 자세히 아시오?”

    그야 여자니까. 엘리사가 미간을 좁혔다. 남편이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간 저택에 별일 없었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제 말은 놓지 않으려 하오. 당신을 존중하는 의미로.”

    존중은 무슨. 몸이 바뀌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말투였다. 표정은 또 얼마나 능글맞은지 어제까지 자신을 피하던 남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놀리시는 거죠?”

    “설마.”

    “그만하세요.”

    “당신이 그만하라고 한 거야.”

    엘리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래의 말투로 돌아왔다.

    부부는 그간의 일상을 나누었다. 일정이 많은 데다 모의 훈련까지 겹쳐 신경이 날카로웠다는 그의 변명을 엘리사는 납득해 주었다.

    그녀는 이제 내저의 새로운 체계가 자리를 잡아 이전만큼 바쁘지 않다고 말했다. 모의 전투가 끝나는 대로 사교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며 그러려면 라골에게 많은 걸 배워야 한다며 걱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번 주에 돌아오는 건가요?”

    “며칠 더 걸릴 거야.”

    징벌방 행으로 몸이 많이 상했다. 루펠라의 금족령도 곧 풀릴 테니 아내가 홀로 시간을 죽이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근래 가장 신경 쓰였던 게 그것이었다.

    아내는 일을 마치고, 예정했던 공부를 끝내면 남는 시간을 모두 뜨개질로 보냈다. 홀로 정원에 앉아 멍하니 바늘만 움직이는 걸 보면 진저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내저의 일을 보기 이전에도 하루 종일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보았다. 그때는 아내의 성향이 원체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생기가 넘쳤다. 사실 한담을 나눌 때도 뜨개질이나 십자수를 할 적과 같이 얌전하긴 했다. 말을 하는 것보다는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래도 혼자 있을 때와는 달리 미소를 자주 보였다.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무슨 문제 있으면 말해.”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요.”

    “무슨 얘기?”

    “어제 새벽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대요. 누군가 망…… 측한 단어를 크게 외쳤다더라고요.”

    진저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 * *

    엘리사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어제만 해도 곤두박질쳤던 기분이 오늘은 하늘을 날 듯 들떴다.

    그가 예전과 같아졌다.

    그녀에게 농담을 건네고 웃어주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는 독종 사생아는 사실 아주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다는 걸. 이건 그녀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그의 눈길을 한 번이라도 더 받고 싶어서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 일에도 파르르 떠는 척을 했던 적도 있었다.

    아, 물론 토끼 꼬리가 달린 새하얀 망사 속옷은 정말 부끄러웠다. 제 앞에서 일부러 속옷만 입고 방 안을 돌아다니는 게 얄미워 씩씩대며 그를 흘겼다.

    그러니까 그녀가 말하는 건 농담이었다. 대화하는 법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를 위해 일부러 더 짓궂게 군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야한 농담의 2할쯤은 재미도 있었다.

    엘리사는 그가 좋았다. 친구로서, 동반자로서, 남편으로서, 또 남자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진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의욕에 불탔다. 모의 전투에서 승관을 쟁취해 그에게 주고 싶었다. 내저를 완벽하게 다스려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고, 사교 활동도 잘해서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원래도 성실한 사람이 의욕까지 생기니 말릴 재간이 없었다. 밤을 새우고,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일과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렀다.

    라골이 돌아왔다. 루펠라의 금족령도 풀렸다. 그들은 가장 먼저 엘리사를 찾았다. 섣부른 판단으로 곤란하게 했다는 사과를 몇 번이나 전했다.

    루펠라에겐 금족령이 내려지기 이전에 이미 사과를 받았다. 라골도 그 일이 벌어진 날 바로 허리를 굽혔다.

    “난 괜찮아요.”

    루펠라는 감격한 얼굴로 새언니를 끌어안았다.

    “언니 왜 이렇게 말랐어요?”

    일과 훈련을 함께하느라 바빠서 끼니를 챙기지 않았더니 조금 살이 빠진 모양이었다. 루펠라는 펄쩍 뛰며 하인을 호출했다. 제과점 이름을 몇 개씩이나 대며 유명한 디저트를 사 오라 일렀다.

    디저트 이야기를 하니 일전에 ‘매혹’의 사주, 고든에게 받았던 몽블랑이 떠올랐다.

    “저번에 굉장히 맛있는 몽블랑을 먹었어요. 가을이 다 지났는데도 밤이 굉장히 실하고 달콤하더라고요.”

    “몽블랑을 잘하는 데가 어디더라……. 누구에게 받은 건데요?”

    “고든이요.”

    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루펠라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금족령 때문에 제2저 밖을 나서지 못했지만 수도의 소문에 훤했다.

    어떤 이가 귀족가에 큰 실수를 해서 엉덩이가 죄 터져 돌아왔다는 말이 수도를 넘어 저 먼 코단령까지 퍼졌다.

    실수를 한 그가 귀족가에 본가를 둔 자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콕스에게 서신까지 보내 사실을 확인했다.

    루펠라가 깔깔거리며 고용인들을 둘러보았다.

    “본가가 마님 친위대 소굴이 되었다면서요?”

    라골마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일터에 복귀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그간 미뤄 놓았던 병영 잔디 손질이었다. 병사들이 우렁차게 구호를 외치며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나, 마님을 지키자!’

    ‘둘, 마님을 지키자!’

    엘리사가 식사를 개선해 주었다는 말에 펄쩍펄쩍 뛰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굉장한 충성심은 없었다.

    내저의 고용인들이야 워낙 마님 사랑이 투철한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전에도 엘리사만 보면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 기세긴 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보니 그저 그런 강아지가 아니라 철저하게 교육된 군견 같았다.

    “고든의 취미가 베이킹이라고 들은 것 같아요. 아마 어디서 산 게 아니라 직접 만든 게 아닐까요?”

    “어머나.”

    아직 수도로 터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진가가 드러나지 않아 그렇지, 루펠라는 고든이 나라에서 손꼽는 거부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새언니는 그웬 공작 부인이고, 오빠는 안 그런 것 같아도 제 사람은 지켜 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재산이 많다는 것으론 그웬가의 문 하나도 상하게 하지 못한다.

    그래도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루펠라의 눈에 엘리사는 정에 약한 사람이었다. 혹시 고든이 입을 잘못 놀려 엘리사가 상처를 입을까 걱정되었다.

    “어제 보내 준 빵도 훌륭하던데 그것도 고든의 작품일까요?”

    ‘뭐?’

    루펠라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껌뻑거렸다. 라골은 이미 마님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가 일부러 그웬저에 불러 고든을 벌한 까닭은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님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음식을 반입시킨 자라서였지만, 고든이 정말 무지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목적이 바뀌었을 것이다.

    4공에게 약물을 먹인 건 그 자체만으로도 사형까지 가능한 중죄였다. 그냥 중죄인가. 삼족지죄이다. 그대로 사법 처리를 했어도 될 일을 지하에 가둬 며칠을 굶긴 건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며칠이 지나도 진저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며 고든은 정말 까닭을 몰랐다는 것을.

    “굉장하십니다.”

    “뛰어난 스승을 두었기 때문이죠.”

    그제야 루펠라는 ‘아!’ 하며 무릎을 쳤다. 그래서 아직도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고든은 언니에게 은혜를 입은 거네요. 평생 감사해야겠군요.”

    “고든 때문만은 아니신 듯합니다.”

    엘리사는 대답하지 않고 차를 홀짝였다.

    고든을 벌하는 것으로 내저의 신체계를 완전히 굳혔다. 엘리사가 채택한 방법은 겉으론 합리적인 것 같지만 실은 구멍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 사람은 언제나 어려운 것보다 쉬운 것을 택하며, 시작과 끝이 달랐다.

    지금에야 ‘마님, 마님’ 하며 잘 따르고 있지만 익숙해지다 보면 그들 마음을 해이해지게 할 터였다.

    반입 물품을 관리하던 하인 중의 하나가 사직서를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엘리사는 사직서를 낸 책임자와 고든을 본보기로 고용인들을 채찍질한 것이었다.

    “검수 책임자를 해고했다고요? 그런데도 이렇게 언니를 따르나요?”

    “고든에게 보내셨을 겁니다.”

    라골은 정말이지 훌륭한 스승이었다. 그 상황을 직접 보지 않고도 엘리사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맞혔다.

    “사업 쪽에 더 재능이 있던 자였어요.”

    “그에게도 고든에게도 빚을 하나씩 만들어 두셨군요.”

    미래의 일은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가문을 위한 히든카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게 어떻게 쓰이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엘리사는 부디 그 패마저 꺼내야 할 일이 생기지 않기를 빌었다.

    루펠라가 입을 쩍 벌렸다. 톡 건드리면 부서질 듯 연약하고,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언니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하긴 상점가 축제에서 술 취한 개들을 메다꽂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때는 진저와 엘리사의 영혼이 바뀐 상태였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루펠라는 새언니 찬양이 더 늘었다.

    이미 그녀도 훌륭한 공작 부인 신봉자였다.

    세 사람은 그 이후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골은 공작가의 기밀을 수행하고 온 것으로 되어 있어 근황을 말하지 않았지만, 루펠라와 엘리사는 그간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며 까르르 웃었다.

    금족령이 내려진 뒤에도 루펠라는 일상을 즐겼다. 고용이들이 신상 드레스, 액세서리 등의 카탈로그와 수도의 소문을 부지런히 가지고 왔다.

    수도는 모의 전투를 서두로 축제 준비에 한창이었다. 모의 전투는 귀족들의 가장 큰 볼거리이고 수도 귀족뿐 아니라 지방에 터를 둔 귀족들도 올라오는 큰 행사였다.

    상점가에선 벌써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사교계야 말할 것도 없었다.

    “어려운 건 없어요? 내가 도울 게 있다면 말해요.”

    “아니에요. 모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어서 힘들지 않아요.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할게요.”

    이번 모의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수도 외곽에 위치한 몽구스 산 일대였다. 그곳은 라골과 진저가 어릴 적에 자주 놀러 다니던 곳이었다. 숲길부터 개구멍까지 모르는 곳이 없었다.

    그건 루펠라도 알고 있는 바였다. 몽구스 산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저택에 올 때는 트리거가에서 훈련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마피 부인은 꼬마들의 앙큼한 거짓말을 귀신같이 알아냈다.

    “신기하지. 유모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무얼요?”

    “오빠랑 라골이요. 어릴 때 몽구스 산에서 자주 놀았거든요. 위험한 산짐승이 있어서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어요.”

    남편이 사고뭉치였던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흙먼지가 잔뜩 묻어 꼬질꼬질했을 그의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때부터 오빠는 트리거가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거든요. 라골은 오빠의 시동이라서 항상 동행했고요. 훈련을 받으면 산에서 논 것과 진배없이 먼지가 묻는데 유모는 산에서 놀았는지, 훈련을 받았는지 귀신같이 알아챘어요.”

    “약초 때문입니다.”

    “약초?”

    “주인님과 제가 항상 지나던 작은 토굴이 있었습니다. 그곳엔 사시사철 약초가 돋아 있었죠. 향이 몹시 특이한 데다 옷이 닿기만 해도 향이 묻어나서 모르려야 모를 수 없으셨을 겁니다.”

    엘리사와 루펠라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라골은 진저와 각별한 사이임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님에게 말하면 저 좀 잘 봐달라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모의 전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라골이 한숨을 삼켰다. 마님의 말이 핑계임을 모르지 않았다. 흥미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두 여자에게 진 라골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산에 갈 때는 항상 ‘이 다음에 내가 가문을 이어받게 되면 잘 봐주겠다’ 하는 말로 마부를 구슬렸다. 그때는 선대 부부가 모두 정정하실 때라 사생아의 말이 우스웠을 텐데도 사람 좋은 마부는 못 이기는 척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산에서는 토끼나 날다람쥐를 잡으며 놀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토끼, 날다람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짐승이 우글거리는 그곳에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 약초가 산짐승을 쫓은 것 같습니다. 짐승의 후각은 사람보다 훨씬 예민하니까요.”

    토굴을 찾아낸 건 산짐승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산에 놀러 갔을 적에 야생 멧돼지가 쫓아오는 바람에 멧돼지가 오갈 수 없는 곳만 쏙쏙 골라 다녔다.

    엘리사는 라골에게서 듣는 어린 시절의 그가 신기했다. 지금은 맨손으로도 멧돼지를 때려잡을 것 같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아이였던 때가 있었구나. 엘리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빠가 도망을 쳤다는 게 상상이 안 돼. 어릴 때부터 개똥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잖아.”

    루펠라가 헹, 코웃음을 쳤다. 멧돼지에 기겁해 놓고선 저택에 와서는 자신을 그렇게 괴롭힌 건가. 엄한 데서 맞고 와서 화풀이하는 격이었다.

    라골의 생각은 달랐다. 진저는 루펠라에게 관심이 없었다. 귀찮고 짜증 난다며 성질을 부렸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진저가 루펠라에게 큰 소리를 내면 마피 부인은 펄쩍 뛰었다.

    루펠라를 더 아끼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자아이라 연약하기도 했고, 뭣보다 아이들의 출신에 차이가 있었다.

    선대 공작 부인 입장에선 그래도 루펠라는 피가 이어진 아이였고, 진저는 남편의 사생아였으니 둘의 싸움은 집안에 큰 분란을 야기했다.

    그래서 마피 부인은 안 보이는 곳에선 진저를 싸고돌았다. 루펠라가 서운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토굴은 어디에 있나요? 그 약초 향이 궁금해요.”

    “가펠리아 신을 기리는 빈 신전이 있습니다. 신전 뒤쪽에 샛길이 나 있는데 조금 걷다 보면…….”

    굉장히 복잡한 길이었다. 라골이 아직도 길을 모두 외우고 있는 게 신기했다.

    “향은 마님께서도 아실 겁니다.”

    “제가요? 전 산짐승을 쫓는 약초 같은 건 본 적도 없는걸요.”

    “짐승에겐 미묘하게 달리 느껴질 테지만 사람에겐 굉장히 유사하게 느껴지는 향이 있지요.”

    “그게 뭔가요?”

    “연초입니다.”

    연초? 그러니까 담뱃잎을 말하는 건가? 루펠라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질색이라는 듯 혀를 빼물었다.

    “연초라니 신기하네요.”

    “연초를 만드는 풀은 아니지만 태웠을 때의 향이 연초와 굉장히 유사합니다.”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마피 부인이 귀신같이 눈치챌 만도 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화제를 바꿔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엘리사는 라골이 없는 동안 궁금하게 여겼던 것들을 모두 물어보았다.

    라골은 모의 전투에 관해서도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루펠라는 하우벡이 실무를 맡기 전까진 라골이 군 내정을 도왔다고 말해주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기실 루펠라와 라골이 없는 동안 외로웠다. 루펠라는 밝고 상냥한 사람이라 항상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으며 라골은 무뚝뚝하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은근히 친절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제가 시간을 너무 뺏은 건 아닌가 걱정되네요.”

    루펠라가 킥킥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오빠가 언니 수업에만 집중하라고 아예 근무처를 옮겨 주었대요.”

    엘리사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루펠라가 그녀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게 부끄러워서 얼른 말을 돌려 버렸다.

    “그럼 이제 집사가 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마님 전담 시중을 맡게 되었습니다. 교사 겸 수행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엘리사가 크게 기뻐했다. 라골이라면 무슨 일이든 믿을 수 있었다. 일을 허투루 처리하지 않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우려를 표했다. 그가 자작가의 사생아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그의 능력을 신임하는 진저조차 마땅한 직책을 내리지 못했다. 남들 시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라골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라골은 이번 일도 거절하려 하였다. 하지만 공작 부인에게 자신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진저의 곁에는 훌륭한 부관과 병사 등 인재가 넘쳐 났지만 공작 부인 주변엔 이렇다 할 사람이 없었다.

    괜찮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만 그녀를 돕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 외부 일정에서 돌아온 진저에게 엘리사는 감사를 표했다. 제 인선에 만족한다면 다행이었다.

    아내는 입만 열면 라골의 칭찬이었다. 진저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라골이 그러는데’로 시작하는 말이 나왔다.

    어쩐지 심술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놈이 뭘 어떻게 가르쳐 주길래 아내가 이렇게 신임한단 말인가.

    “그 녀석이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도 있지.”

    “라골이 모르는 거라니, 상상이 안 돼요.”

    진저가 왈칵 얼굴을 구겼다.

    “나한테서 배우는 것들 말이야.”

    엘리사는 진저에게 뭘 배웠나 곰곰이 짚어보았다. 그에게서도 많은 걸 배우긴 했지만 모두 라골이 미리 알려준 지식을 기반으로 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바쁜 남편이 저를 위해 이것저것 얘기해 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뻤다.

    진저가 까딱, 왼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아내는 제 말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남자를 느끼는 법만큼은 확실히 알려주었지. 내 몸으로 말이야.”

    진저가 야릇하게 그녀 입술을 매만졌다.

    “그, 그건!”

    “지식은 공유함으로써 확대된다잖아. 많이 공유해 보자고.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

    그는 셔츠 소매 단추를 풀며 심술 맞게 웃었다. 엘리사가 방방 뛰며 마지막까지 가진 않았으니 그건 잠자리 횟수로 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군.”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줄 알았더니 의외로 순순히 답했다. 엘리사가 미심쩍은 듯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횟수를 채우면 되겠군.”

    “네?!”

    “옷 벗는 중에도 안 나가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

    크게 당황한 엘리사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남편과는 사이가 좋아졌고, 내저는 평화로우며 모의 전투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부터 루펠라와 라골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들떠버렸다.

    입을 합, 다문 그녀가 포르르 도망쳐 버렸다.

    ‘항상 남은 일부터 처리하고 씻으러 갔으면서!’

    매일 그녀를 놀릴 거리만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 * *

    모의 전투 개최식이 코앞에 다가오자 엘리사는 내저의 모든 일을 콕스에게 일임하고 훈련에 매진했다.

    병사들이 예행연습을 하는 동안엔 그들의 이동 루트 등을 머릿속에 기억해 놓았으며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간단한 호신 기술도 배웠다.

    “여성의 몸으로 훈련받은 병사를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의 전투에서는 각 가문의 ‘꽃’들에게 무기를 하나씩 지참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보통은 마탑에서 제작한 실드를 택했다. 마법 도구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마탑에서 제작한 것이라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자랑했다.

    마크빌은 그웬가에서 소유하고 있는 몇 개의 호신 무기를 꺼냈다. 모두 마탑에서 오랜 기간 공을 들여 만든 최상품이었다.

    창보다 칼을 잘 쓰는 자, 칼보다 활을 잘 쓰는 자가 있는 것처럼 마법이 깃든 무기 또한 사용자와 상성이 맞는 것을 쓰는 게 가장 좋았다.

    마크빌은 엘리사가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불덩이가 나가는 화살 없는 활은 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화르륵 불이 뿜어져 나왔다. 실드는 더 가관이었다. 엘리사는 실드를 발동시키자마자 새하얗게 질려서는 주저앉았다.

    “무, 무거워요.”

    작년 모의 전투에서 루펠라가 지참하였던 실드였다. 루펠라는 발동을 시키고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녔다. 아니, 루펠라뿐만 아니라 이와 동일한 실드를 가지고 있는 포르테 백작 부인도 이동에 무리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몸이 약할 수 있단 말인가. 엘리사 주변을 빙 둘러 감싸고 있던 소대장들이 말을 잃었다.

    낑낑대며 발동을 멈춘 엘리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실드 발동 장치를 내려놓았다.

    기사들이 애써 마님을 위로했다.

    “가, 감각이 좋으십니다.”

    “왜 마법사 중에서도 타인의 마력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타입이 있지 않습니까.”

    “저게 고…… 장이 났나 보네!”

    “예, 마님! 고장이 난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다음 무기도, 그다음 무기도 쓸모를 다하지 못했다.

    무기 네 개가 패스될 때까지는 그녀를 위로하던 기사들이 말을 잃었다. 보통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평범한 사람들의 마력이 10이라고 치면 마법사나 신관이 되는 자들은 100을 가볍게 웃돌았다.

    세간에 풀리는 마법 아이템들은 모두 평균 마력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먼 옛날, 마탑의 시작이었다는 모 부족에선 만드는 아이템마다 일반 마법사의 수십 배는 높은 마력을 요했다고 한다.

    일반 마탑의 아이템도 버거워하는 그녀가 이제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부족의 아이템을 발동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다.

    뭐, 이 이야기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일 뿐, 기사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한 마님께서 마법 아이템을 발동시킬 일은 없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사람이 하나 정도는 빠지는 게 있어야지. 아름다우시고, 상냥하시고, 현명하신데 마력까지 넘치면 인간미가 없다.

    기사들이 아무리 마님 사랑이 넘친들 그웬가의 호신 무기가 죄 쓸모없다는 건 큰 문제였다. 이 문제로 인해 군 내부 회의가 열렸는데 진저 또한 일을 미뤄 놓고 회의에 참석했다.

    당장 제작하기엔 시일이 빠듯하니 일반 무기를 소지시키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낸 기사는 쌍욕을 얻어먹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발의한 자를 쳐다보던 이들이 그의 상관에게 입을 모아 말했다.

    “굴려.”

    모두 전장에서 살다시피 한 자들이었다. 훈련받지 않은 민간인이 날이 시퍼렇게 선 무기를 쓰는 건 무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무기를 빼앗기게 될뿐더러 상대를 자극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마님이 검이나 활을 다루시다가 생채기라도 나면 어떡하냐고 왕왕 짖었다. 결국 회의 중간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그웬저로 불려왔다.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자들이 귀족만 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탑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법사가 될 만큼 마력이 높은 아이는 천 명 중에 하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도 마력을 운용하는 식을 계산해 내야 했으므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야 했다.

    성국에서는 재능 있는 이들을 모아 무상으로 가르치며 얼마쯤의 보수까지 주었다. 마법사를 목표로 하는 자들은 모두 독학을 해야 했다.

    물론 마법사가 되면 일반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보수를 받았다. 성력 신관들은 성국에 무상으로 봉사해야 했지만 마법사들은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오늘 그웬저에 불려 온 마법사들은 마탑에서도 방귀 좀 뀌는 이들이었다. 공작저, 그것도 거부로 알음알음 소문이 난 그웬가라는 말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개구리처럼 팔짝팔짝 뛰다가 발목이 아작 날 뻔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상상하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융숭한 대접은커녕 삶아 먹을까, 볶아 먹을까 고민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은 전장에서 잔뼈 굵은 이들이었다.

    그에 비해 마법사들은 육체파보다 두뇌파가 많았다. 마력을 섬세하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기반 지식이 필요했으므로 1년 365일 중 360일은 책상에 앉아 지냈다.

    1차 성마 전쟁에서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자의 수가 월등히 많은 마탑이 성국의 군사들에게 개박살이 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물론 전쟁에 부름을 받을 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들도 있었다. 그 예가 진저의 지기인 리한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미천한 신분이더라도 백작위에 필적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그보다 높은 자들이라도 웬만하면 부딪치려 하지 않았다. 검기를 두르지 못하는 기사들은 그들 옷깃도 스치지 못한 채 거품을 물고 죽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드문 경우였다. 란델에서도 그만한 능력이 있는 자는 리한과 그의 조부인 쿠벨 후작뿐이었다.

    과거에는 전투가 가능한 마법사들의 수가 지금보다 많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발명가와 같은 선상에 있었다.

    이번에 공작저에 불려 온 자들은 펜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쟁에 잔뼈가 굵은 그웬가의 병사들은 굉장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가장 상석에 앉은 진저 그웬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거, 아이템 좀 제대로 만드시오.”

    “우리 마님이 이렇게, 어? 이렇게 비틀거리셨다고.”

    “활 만든 자가 누구요? 아, 우리 마님 다치시면 어쩌려고 불덩이가 그렇게 크게 튀어나오도록 만들었어?!”

    그웬가 수도군의 기사들은 그들 주군만큼이나 악명을 떨치는 자들이었다. 게을러터졌으면서 성격은 어찌나 불같은지 수틀리면 국물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자들만 골라 모아놨냐며 혀 차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발동시키면 화살비도 뚫지 못하게 튼튼해야겠지.”

    “왜 그런 거 있잖아. 아무리 써도 피곤하지 않은 그런 거.”

    “실드 안에 있으면 푸근하면서 오만 걱정이 사라지도록 만들어 보시오.”

    마법사들은 뒷골목 양아치도 이들보다는 아량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마법사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마님이 좋아하는 향기도 좀 나게 해봐, 까지 들은 그들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마법사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그웬 공작을 쳐다보았다.

    “사흘.”

    그놈이 그놈이었다.

    마법사들은 아흔일곱 가지나 되는 요구 사항을 모두 받아 적고 훌쩍거리면서 돌아갔다. 그웬 공작이 정한 시일까지 새로운 공작 부인의 호신용 무기를 만들지 못하면 뼈와 살이 분리될 터였다.

    리한을 제외하면 마탑에서 가장 유능한 마법사들이 이틀 밤을 꼴딱 새웠다. 이동 스크롤이었다. 마법 아이템 중에서도 가장 고가로 거래되는 물건이었다.

    그들은 총 다섯 장의 스크롤을 보냈는데 스크롤을 찢고 원하는 장소를 생각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이동이 가능했다.

    스크롤을 받은 엘리사의 눈이 반짝거렸다. 연습용으로 세 장을 쓰고 시합에서 한 장을 쓰기로 했다. 모의 전투 규정상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마법 아이템은 1회만 사용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한 장은 원하는 대로 쓰라는 말에 엘리사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어디든 갈 수 있을까요?”

    “저택 내에서라면.”

    만든 사람의 실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란델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인 쿠벨 후작이 나서도 그 이상은 무리였다. 엘리사에게 전달된 스크롤도 굉장한 실력자들이 몇 명이나 달라붙어 겨우 완성한 것이었다.

    실망하는 그녀에게 진저는 외저까지는 가능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엘리사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웬저는 4공의 저택 중에서도 가장 넓은 부지를 자랑했다.

    “건국왕 치세기에 제작된 장거리 이동 스크롤이 있다더군. 왕궁 내에서 보관 중이라지.”

    엘리사는 스크롤을 보관하는 상자에서 주의 사항이 적힌 양피지를 꺼냈다.

    “정말 신기해요. 가 보지 않은 장소도 가능하군요!”

    “어떻게 이동하는지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스크롤엔 그간 들어본 적 없는 기능을 추가했다. 엘리사가 스크롤을 찢는 순간 탐색기에 위치가 잡혔다.

    두 달 걸릴 일을 이틀 만에 해냈는데도 마법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들은 마탑주인 쿠벨 후작에게 매달려 애걸복걸하였다.

    마탑주이자 지기의 조부인 쿠벨 후작이 나서 그들을 옹호하니 진저로서도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진저도 완전히 아흔일곱 가자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줄 거로 생각지는 않았다. 발동을 시킬 때마다 꽃잎이 흩날리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며 좋은 향기가 풍겨야 한다니.

    엘리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꼴을 하고 무기를 든다면 목을 부러뜨렸을 것이다.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왜 그 꼴로 전투를 해야 하는가.

    기사들이 요구했던 아흔일곱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진 못했어도 굉장한 물건인 것만은 확실했다.

    진저는 아내를 높게 평가했다. 이동 중에 병사들에게 휩쓸려 무릎이 몇 번이나 깨졌는데도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다. 되레 방해가 되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병사들을 더 황송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의 마님 사랑에 휩쓸리지 않았던 마크빌까지 달라질 정도였다. 엘리사를 주군의 아내라 공경하는 게 아니라 그녀 자체에 존경심을 가졌다.

    몸 쓰는 일에 이골이 난 이들 눈에도 엘리사는 대단했다. 그들보다 한 뼘은 족히 작은 여자가 그들보다 더 열심히 움직였다.

    귀부인의 몸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귀한 입에 병사들과 같은 음식이 들어갔으며 아무리 힘에 부치는 일이 있어도 싫은 소리 한 번이 없었다.

    그녀는 노력했다. 베짱이 버금가는 게으름뱅이 가슴속에서 열의를 이끌어낼 만큼, 딱 그만큼 노력했다.

    병사들만큼 그녀의 노력을 높이 사는 사람이 있었다.

    진저였다. 그와 그의 가문을 위해 땀을 흘리는 아내는 어떤 미인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모의 전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모의 전투를 앞두고 전야제가 열렸다.

    4공이 그들 가문의 ‘꽃’이 될 여성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회의가 늦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엘리사 홀로 왕궁 파티장에 가야 했다.

    그녀는 불안했다. 남편은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다. 라골과 기사들이 그녀를 수행하였지만 남편만 한 의지는 되지 않았다.

    엘리사가 파티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웬가의 기사들이 호위하는 여성을 몰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몇몇 여성이 엘리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힐튼 후작 부인이 주최한 모임에 나왔던 여성들이었다.

    몸이 바뀌었을 때, 남편이 저를 대신해 참석해 준 모임이었다. 엘리사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엘리사를 보는 여성들의 표정이 묘했다.

    모임에서 만났을 적에 그웬 공작 부인은 진저 그웬과 똑 닮은 여자였다. 예법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어딘지 고압적인 느낌이었다. 다른 귀부인과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고 대답을 해도 네, 아니오 정도의 몇 마디가 고작이었다.

    당시엔 요로아 후작 부인이라는 특출 난 자가 있었으므로 태도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웬 공작이 새신부를 ‘꽃’에서 배제시켰다는 소문이 돌고 나서야 말이 생겼다.

    모임에서도 먼저 입을 연 적이 없다는 둥,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한데 전혀 여성스럽지 않다는 둥, 어찌나 잘난 체를 하는지 모른다는 둥의 이야기였다.

    남 헐뜯는 자는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고 그런 자들이 절대다수인 곳이 이 사회였다. 이방인에겐 더 각박했다. 게다가 먼 타국에서 흘러들어온 소문이 곱지 않다면 더더욱.

    엘리사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서는 귀부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히 모임에서 보았을 때와 느낌이 많이 달랐다. 고압적이지 않고, 대화가 귀찮다는 내색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쉽지 않은 여자였다.

    엘리사는 제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모두 공평하게 대했다. 사교계에서 힘깨나 쓰는 부인이든 평민 신분으로 백작 부인 자리를 꿰찬 여성에게도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람들을 더 수월하게 대했다. 라골은 내심 흐뭇했다. 과연 왕족 출신다운 여유와 기품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부푼 배를 끌어안은 여자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내셨나요?”

    엘리사가 인사를 나눈 귀부인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기억에 전혀 없는 여성이었다. 그렇다면 힐튼 후작 부인의 모임에서 본 여성이라는 건데…….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임신을 했다고 했지.’

    엘리사 또래의 여성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다. 그러고 보니 라골이 주었던 사교계 관련 서류에서 트라노이 공작 부인의 사진을 보았다.

    임신을 해서 인상이 조금 푸근해지긴 했지만 그녀가 분명했다.

    “네, 부인께서도 좋아 보이시네요.”

    “조금 힘든 것 빼고는 맘 편히 지내고 있어요. 모의 전투에 안 나가도 되고 말이죠.”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들었던 것처럼 상냥한 사람이었다. 워낙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도 호감이 갔다. 엘리사와 그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도 엘리사가 마음에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모임에서 보았을 때와 느낌은 많이 달랐지만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았다.

    선대 트라노이 공작은 그웬의 선대와 다른 의미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대다수의 귀족 남성은 자신보다 가문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선대 트라노이 공작에게 가문은 편리하게 살 수 있는 도구였다.

    형이 비명횡사하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돈 쓰는 것밖에 없었던 그가 가문을 이었다.

    어릴 때는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형이 미웠는데 가문을 잇고 나서야 알았다. 그의 어깨에 어떤 것이 올라가 있는지를.

    제대로 된 후계 교육도 없이 노는 게 제일 좋은 펭귄이 가문을 이었다. 당연히 뭘 몰랐고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일주일을 꼬박 공부만 했다. 그의 20대는 산지옥이었다.

    죽은 형만 한 아들이 있는 나이가 되자 책임 같은 건 부질없어졌다. 그는 형이 죽기 전이 좋았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내가 왜 매일 피곤에 절어 가며 일을 해야 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마음 같아선 가문이고 나발이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여우 같은 마누라에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두곤 그럴 수도 없었다. 여우 같은 마누라는 결혼 전부터 못을 박았다.

    ‘네가 무슨 매력이 있니. 집안 보고 결혼하는 거지.’

    예나 지금이나 못돼 먹은 계집애였다. 가문은 소중하지 않았지만 아내와 자식은 달랐다.

    그래서 그는 하나 있는 아들을 볼 때마다 말했다.

    ‘어서 크거라.’

    어서 커서 이 지겨운 족쇄를 가져가다오. 아들에 대한 믿음을 표출한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공작은 정말 아들이 결혼을 하자마자 아들과 며느리에게 가문을 맡기고 영지로 홀랑 내빼 버렸다.

    트라노이 부부는 뭐든 빠른 사람들이었다. 남편은 물론 트라노이 공작 부인까지도. 그녀는 이른 나이로 안주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임신도 빨랐다.

    트라노이 공작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작 부인 또한 란델에서 손꼽히는 권력가의 딸이었다. 공작 부인이 되지 않았어도 친정의 권세만으로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을 여자였다.

    친정도 대단하고, 시댁은 더 대단한 여자라면 오만할 만도 한데 공작 부인은 굉장히 따뜻한 여자였다. 사랑받은 사람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엘리사를 다른 귀부인들에게 인사시켜 주었다. 라골은 트라노이 부인과 어울리는 귀부인은 대체로 유순하고 선량한 사람임을 귀띔해 주었다.

    “오늘은 아가씨를 모시고 나왔어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임신한 바람에 올해 트라노이가의 ‘꽃’은 공작의 사촌 동생인 칸나 트라노이의 몫이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의 시선을 따라가자 인상을 쓰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칸나는 그녀에게 달라붙는 미혼의 영애들이 몹시 귀찮아 보였다. 저렇게 솔직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웬 영애와 우리 아가씨는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에요.”

    “그렇군요.”

    “저도 같은 아카데미를 나왔답니다. 부인은요? 왕족 아카데미를 나왔나요?”

    “저는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두 공작 부인은 의기투합하여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런 그들 곁에 사람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힐튼 후작 부인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와 엘리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공작 부인 모두 눈부시게 아름다우시군요.”

    “어머나, 부인도 참.”

    “과찬이세요.”

    4공은 가문의 ‘꽃’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래도 훈련을 하며 고용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새어 나가는 경우도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공작 부인의 연령이나 가문의 사정 등으로 올해의 꽃을 추측했다.

    이미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는 포르테 공작 부인은 물론이고, 트리거 공작 부인은 건강을 이유로 파티에도 잘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모의 전투의 ‘꽃’이 될 리 없었다.

    포르테가에서는 후계의 아내인 포르테 백작 부인이, 트리거가는 이전처럼 공작의 딸이 꽃을 맡았다.

    아니나 다를까 포르테 공작 부인과 트리거 공작 부인은 파티에 불참의 뜻을 밝혔다.

    이 파티에서 가장 지체 높은 여성은 엘리사와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자들은 수없이 많았다.

    엘리사는 수많은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정신이 쏙 빠졌다.

    엘리사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중앙홀을 빠져나갔다. 엘리사는 화장실 내 휴게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신은 새 구두는 불편했다. 뒤꿈치가 따가웠다. 긴장이 풀리니 허리도 욱신거렸다.

    남편이 도착할 때까지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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