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비스트 3
8장 그웬의 꽃
길리안이 그웬저에 온 날 보았던 분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집무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만으로도 뼈가 시릴 정도였다.
원인은 당연히 루펠라였다. 파티에서 흘린 말이 와전되고 와전되어 그들이 목적했던 ‘그웬 공작 부인의 임신’까지 도달했다.
엘리사는 물론이고 루펠라조차 당황스러운 결과였다.
가신 회의까지 소집되었다. 소문의 진원지를 파악하고 소문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루펠라는 사실대로 말하자는 엘리사를 뜯어말렸다.
“오빠가 이 정도로 화가 나면 아무도 못 말려요!”
“마님, 진정하십시오.”
“이토록 곤란한 일이라면 사실을 말하고 사죄해야 해요. 내 짧은 생각 때문에 모두 고생하고 있잖아요.”
물론 엘리사가 모의 전투에 나가고 싶어 했던 건 맞다. 그녀의 자리를 찾고 싶었고 그의 곁에 있어야 할 명분이 필요했으므로. 하지만 이 계획에 발을 담그도록 이끈 건 루펠라와 라골이었다.
그런데 왜 엘리사 혼자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루펠라는 죄인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라골은 계속해서 엘리사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마님이 나서는 건 절대 해결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짧은 생각 때문에 남편이 곤란할 거로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곧 회의가 파할 겁니다. 일단 제가 상황을 보고 오겠습니다.”
루펠라 또한 일단 그러는 게 좋겠다고 동조했다. 이러다 또 잘못되는 게 아닌가 싶어 불안했다. 하지만 라골의 말처럼 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의 아내인 제가 나서는 건 더 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라골의 말이 맞아요. 기다려 봐요.”
힘이 쭉 빠진 엘리사가 무너지듯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 회의장으로 향하던 라골은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에 표정을 굳혔다. 길리안이 먼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며칠 내내 안 보이길래 애거슨가로 돌아간 줄 알았다.”
퍽 정겨운 말투였다. 그가 보일 즈음에서야 다시 고용인의 가면을 쓴 라골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뭘 그렇게 예의를 차려.”
“귀하신 도련님께 어찌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라골은 철저히 거리를 조절했다. 어릴 적에 정을 나눴던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냉랭함이었다.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냐마는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네 작품인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루펠라, 공작 부인이 굉장히 마음에 든 것 같던데. 그녀가 도움이 되지 않을 이야기를 늘어놓진 않았을 것 같거든.”
예나 지금이나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그러나 라골도 만만치 않은 사내였다. 표정 변화 없이 길리안을 응시했다. 철이 든 이래로 신분 같은 것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릇된 출생의 아이가 맞아 죽거나 굶어 죽지 않고, 제 힘으로 벌어먹었으니 더 이상 원도 한도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제 하찮은 신분이 구역질 나도록 싫은 건. 저 뻔뻔한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려 주고 싶었다.
“편히 말해.”
부아를 끓게 만드는 놈은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럼 편히 말씀드리지요.”
길리안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본래대로 되돌아왔다.
길리안과 진저, 그리고 라골은 어릴 적엔 사이좋은 지기였다. 라골은 진저의 시동이었고, 진저가 트리거가를 들락거리면서 트리거 공작의 장남인 길리안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라골과 비슷한 형편의 진저는 말할 것도 없고, 길리안은 어렸을 적부터 누구하고도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어른 눈 없는 곳에선 서로 말을 놓았으며 나무 막대를 하나씩 들고 내가 강하네, 네가 강하네 하며 겨루기를 하기도 했다.
머리가 굵은 뒤로는 만남이 줄어들었지만 사사로운 자리에서는 서로를 벗이라 불렀다.
“신경 끄고 가던 길이나 가라.”
‘그날’ 이후 친구였던 라골을 잃고, 여동생처럼 여겼던 루펠라를 잃었다. 그게 사무치게 아쉬워 일 년에 한 번은 그웬저를 찾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라골의 무례한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되레 거리감이 줄어들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너답지 않게 조급했군.”
원흉의 입에서 조급했다는 말이 나오자 라골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 뻔뻔한 작자와 한 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것조차 비위가 상했다. 라골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순진해 보이던데 너무 이용하진 마. 진저가 알면 크게 화를 낼 거다.”
십 년이 넘도록 지기로 지낸 진저를 농락한 사람에게서 들을 소린 아니었다. 말을 섞어봤자 득 될 것이 없었다.
라골은 그를 지나쳐 회의장으로 향했다. 새벽이 되도록 이어진 회의는 이미 파해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회의장을 나서는 가신들에게 허리를 굽힌 그는 진저가 나오길 기다렸다.
진저는 한참이 지나도록 회의장을 나서지 못했다. 이따금 꽝, 하는 마찰음이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라골이 들어온 건 회의가 파하고 한 시간가량이 지났을 때였다. 발소리만으로도 침입자를 알아차린 진저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흘렸다.
“접니다.”
진저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지만 함께했던 세월이 십 년을 넘어가다 보니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진저 또한 루펠라의 입단속을 하지 못해서 이런 사달이 벌어진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그 녀석이 할 말, 못할 말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득실은 따질 줄 알았다. 아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이야기를 농담 따먹듯 떠벌릴 녀석은 아니었다.
라골이 어째서 이런 짓을 벌였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주제넘은 짓이었다. 그는 바로 콕스를 호출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회의실에 들어온 콕스는 굳은 표정의 주인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골을 번갈아 보았다.
“징벌방을 열어라. 징벌방이 준비될 때까지 라골은 지하에 구금한다.”
징벌방이란 가주나 안주인이 본분을 잊은 고용인을 처벌하는 곳으로 그곳에 들어간 고용인은 모두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반병신이 되어 나오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선대 안주인이 가문의 열쇠를 쥐었을 때는 징벌방이 몇 번 열린 적이 있었지만, 진저가 작위를 계승한 뒤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인님께선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라골은 일반 고용인과는 달랐다. 라골이 고용인들 사이에서 겉도는 건 귀족가의 사생아란 입장 때문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선대 공작의 유일한 씨를 받들며 그와 끈끈한 유대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골이 징벌방행이라니. 콕스는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하인들을 불러 그를 제압했다.
지기 둘 다 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명한 자도, 끌려가는 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라골은 애초에 이만한 각오를 하였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그간 쌓아 온 유대가 아니었더라면 단번에 목이 떨어질 일이었다. 다만 마님이 걱정되었다. 그는 징벌방에 갇히면서 콕스에게 이 일은 마님이 모르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고용인의 징벌방행을 안주인이 몰라서야 되겠느냐는 타박은 없었다. 콕스도 라골의 의견에 동의했다. 마님은 야무지게 내저를 돌보셨지만 마음이 약한 분이셨다. 혹시 당신 때문이라 여겨 마음 아파하실까 봐 염려되었다.
“입단속을 시켜 놓지.”
“감사합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사람이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콕스도 눈치가 뛰어난 자였다. 젊은 나이에 총괄 집사가 된 자니 능력 면에선 남들과 비교해 떨어지는 부분이 없었다.
라골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그의 양 손목과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졌다. 혀를 깨물 수 없도록 재갈을 물린 콕스는 징벌자가 될 고용인들을 소집했다.
모두 오랫동안 그웬가를 모셔 온 자들이었다. 엘리사가 인상이 좋고 성실하다고 생각하던 마부 덱스부터 나이 어린 하녀들이 향수병에 잠 못 이룰 때면 옆자리를 내어주던 하녀 캐롤까지 낮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 * *
상황을 살피러 간 라골은 남편에게서 급한 명을 받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 대신 소식을 전하러 온 콕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회의에서도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말을 전했다.
루펠라는 엘리사의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엘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곧 동이 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방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잠시 주저하던 엘리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곧이어 문이 열렸다. 집무실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서류가 쌓여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어지럽혀진 서류에서 얼핏 모의 전투라는 단어가 보였다.
소파에 앉은 그는 목을 주무르며 아내를 올려다보았다. 피곤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엘리사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구부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
“만져도 돼요?”
분명히 대륙 공용어로 말하고 있는데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그녀의 말을 고민했다.
“어디를?”
대답보다 손길이 빨랐다. 그녀는 남편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아내의 손을 잡았다.
“다음부턴 부위를 먼저 말해.”
“다른 곳도 허락해 주실 건가요?”
“어디까지 만지고 싶은데?”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은 빼먹지 않았다. 엘리사는 됐다고 말하며 그의 붉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곤란할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고뇌하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숨죽였는데. 미안함과 답답함이 뒤섞여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한바탕 울어 수습될 일이라면 잠겨 죽을 정도로 울 수 있었다. 하지만 수습은 남편의 몫이 된 지 오래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염치가 없어 나오지 않았다.
“저예요.”
그녀는 남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모의 전투에 참가하고 싶어서 제가 루펠라에게 부탁했어요.”
“왜.”
“제 자리를 찾고 싶었어요.”
‘인정받고 싶었고, 당신 옆자리에 제가 있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진저의 눈이 일순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간절하게 원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부족한 자신감을 성실함으로 채우려는 여자란 것 또한 인지하고 있는 바였다. 안이하게 생각한 건 자신이었다. 그 얄팍한 판단으로 일을 이 지경으로 몰아간 것 또한 자신이었다.
아내는 고작 스물 남짓. 평생을 왕궁에서 살아온 여자였다. 모든 것을 그녀 스스로 배워야 했다. 란델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안주인으로서 소양을 배울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라골에게서 어느 정도의 수업을 받았지만 하루 몇 시간으로 그 많은 것을 완벽하게 숙지할 순 없었다.
라골은 말했다. 루펠라를 부추겨 사단을 만든 건 자신이라고. 아내가 알고 있는 건 계획뿐이었으리라. 어떤 게 위험하고, 그가 정말 주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을 터였다.
무엇보다 라골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데엔 자신을 위한 충정이 있었다. 잘못된 방식이었다고 해서 자신을 위한 일임을 부정할 생각 따윈 없었다.
원흉은 자신이었다.
“일어나.”
그가 쪼그려 앉은 아내를 일으켰다. 그녀를 맞은편에 앉힌 그는 이번 일로 있을 풍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대 공작 부인의 조카였던 루펠라가 입적되긴 했지만 본가의 씨는 나 하나뿐이야.”
결혼 전에 미리 전달받긴 했지만 그에게서 직접 선대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선대는 발정 난 개…… 아니, 방탕했는데도 자식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어.”
그는 선대 공작 부인은 석녀였으며 그웬가에는 해괴한 소문이 돈다는 것 또한 짚어주었다.
“당신이 모의 전투에 참가하지 않으면 임신을 했다고 추측할 테고, 이후에 임신이 아니었다고 말하더라도 유산되었다느니, 진저 그웬에겐 저주가 깃들었다느니 불온한 소문이 확산될 거야.”
그따위 헛소문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소문을 기회 삼아 기어오르는 자들이었다. 후계를 생산치 못한다면 하루 바삐 가문 내에서 후계를 선출해야 한다며 눈을 벌겋게 빛낼 것이다.
후계를 보지 못하는 자들은 대개 본가와 가장 가까운 혈통의 아이를 입적시킨다. 옹알이나 하는 아이가 두려운 건 아니었다.
아이를 핑계 삼아 친부모가 간섭을 시작하고, 후계의 나이가 차면 반대 세력은 아이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려 할 터였다. 그를 축출하려 들 것은 예견된 결과였다.
진저에겐 적이 많았다. 작위에 눈을 빛내는 친인척뿐만, 아니라 선대 공작 부인의 가문인 카르트가에서도 호시탐탐 뒤를 노리고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그따위 벌레들이야 밟아 죽이면 그만이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내와 몸이 바뀌는 일은 결코 신성의 발현이 아니었다. 저주가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성국까지 개입하게 된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 그는 불안 요소를 몇 개나 껴안고 있었다.
진저의 설명을 들은 엘리사가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변…… 명은 하고 싶지 않아요. 제 잘못이에요.”
아내는 연약했다. 모의 전투라지만 죽는 사람이 없을 뿐이지 선혈이 난무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 현장 속에서 벌벌 떨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진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당신이 모의 전투에 참가해야 해.”
“…….”
“하나만 약속해.”
“네.”
“당신의 생각보다 내 지시가 우선이야.”
“그럴게요.”
엘리사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 * *
수습은 의외로 간단했다. 4공 회의에 참가한 진저가 직접 아내의 첫 공식 일정이 모의 전투임을 밝혔다. 왕궁에서 내려온 모의 전투 관련 서류에는 엘리사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수도에 퍼진 이야기는 저택 내 훈련이 늦게 시작된 바람에 와전된 소문으로 둔갑했다.
이번 일로 호된 벌을 받게 된 루펠라는 툴툴거렸다.
“하여간 하는 건 책상머리에서 입 놀리는 것밖에 없는 영감탱이들이.”
진저가 가신들을 소집한 목적은 엘리사를 모의 전투에 불참시키면서 소문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기회를 잡은 영감들은 벌써 결혼한 지 6개월이 넘어갔다며 아우성이었다.
본저에서 아기 울음소리는 언제 들을 수 있냐는 말에 진저가 분노했음은 자명했다.
「영영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말로 들리는군.」
진저의 살벌한 목소리에 몇몇 가신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고 했다.
엘리사와 진저의 사이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남편이 몹시 고마웠다. 그로 인해 저 또한 남편의 울타리 안에 있음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남편이 고마운 만큼 스스로가 싫었다. 목적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은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남편이 신경 쓸까 봐 그의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홀로 있을 땐 한숨이 많아졌다.
며칠 뒤, 모의 전투 훈련이 시작되었다. 엘리사는 예정된 시간보다 이르게 연무장을 찾았다.
홀로 연무장을 찾은 건 오랜만이었다. 병사들은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맞아주었다.
그녀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마크빌이 서둘러 다가왔다. 하우벡 또한 함께였다. 오늘 훈련을 위해 설치한 두 개의 막사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쏙쏙 튀어나와 있었다. 일전에 남편의 몸으로 보았던 소대장들이었다.
“이번 주엔 참관만 하시면 됩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참가하는 훈련은 여드레 뒤에 있는 모의 전투 예행연습이었다.
“훈련은 두 개 소대로 나눠 전술을 시험할 겁니다. 마님께서 위험하실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보호구를 착용해 주십시오.”
엘리사의 시중을 위해 함께 온 하녀가 마크빌이 건네는 보호구를 받았다. 갑주와 비슷한데 그 위로 두툼한 천이 덧대져 있었다.
하우벡에게 착용법을 듣던 하녀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엘리사를 올려다보았다. 하녀와 마찬가지로 마크빌 경 또한 난감한 표정이었다.
훈련을 위해 평소에 입는 드레스보다 단출하게 입긴 했지만 오늘 복장 또한 치마였다. 그란디아에선 여성이 바지를 입는 건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여성 광대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손가락질을 받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저택 내에 감금을 당했다.
그란디아의 문화를 얼추 아는 마크빌은 마님의 옷차림을 지적하는 게 몹시 막막했다.
엘리사는 무슨 문제가 있느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복장이…… 훈련에 용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더 가벼운 옷이어야 하나요?”
그러고 보니 갑주에 두툼한 천까지 붙어 있어 외투 대용이 될 것 같았다. 엘리사는 그 자리에서 코트를 벗어 하녀에게 건넸다.
“저…… 외투보다는…….”
마크빌이 주저하며 시선을 내렸다.
‘치마?’
엘리사는 란델에 온 후로도 바지를 입은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여성의 정규 교육에 검술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지식은 있어야 할 것 같아 책을 살펴보았었다. 책에서도 발목 위로 올라오는 치마를 착용하고 있었다.
‘설마 겉치마까지 모두 벗어야 하는 걸까?’
그녀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럼 슬립 차림으로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는 소린데 그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까짓 부끄러움쯤이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참아야 했다.
“옷은 훈련 시작 전에…….”
엘리사가 말끝을 흐렸다. 마음을 다잡았어도 벗을게요, 라는 말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에 마크빌이 한숨을 내쉬었다. 루펠라 아가씨는 모의 전투 훈련에 참가하실 적이면 항상 눈을 세모꼴로 뜨고는 ‘대충 해, 대충’을 주문처럼 외쳤다. 마님이 옷을 갈아입을 수 없다고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사려 깊은 분이라 다행이었다.
이어 마크빌은 훈련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작년까지는 방어에 치중했으나 올해는 탈취를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시합이 작년과 같은 내용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국왕이 변덕을 부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훈련은 모든 내용을 아우를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했다.
“총 세 개 조로 나누어 1조는 공격을 2조와 3조는 꽃을 호위합니다.”
“적극적으로 공격을 한다면서 왜 방어 쪽에 인원을 더 투입하는 거죠?”
“아직 탈취전 방식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대일 토너먼트 방식으로 전승한 군이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떨 때는 4군이 모두 투입되어 가장 많은 ‘꽃’을 탈취한 군이 1위가 되었다.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통 두 가문씩 동맹을 맺어 상대 가문의 꽃을 확보한 후 다시 일대일 전투를 치렀다.
문제는 초반 동맹전인데 이때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큰 변수는 가문 간의 동맹이 얼마나 견고한가였다.
“음, 잘 이해가 안 돼요. 견고한 동맹이 중요한 건 알겠지만 두 조로 나누는 이유는 모르겠어요.”
“볼모쯤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동맹을 맺은 가문에서 뒤통수를 치면 그대로 게임 오버였다.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이었다.
“동맹을 맺은 가문끼리 꽃을 교환합니다.”
상대 가문의 꽃을 빼앗아도 제 가문의 꽃을 지키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었다.
“꽃을 교환하면 섣불리 배신할 수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아! 방어 조를 나누는 이유를 알겠어요!”
마크빌이 빙그레 웃었다.
“꽃을 교환하면서 방어조의, 그러니까 1조나 2조의 병사들도 함께 보내는 거죠?”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가문의 꽃 호위로 보이지만 진정한 까닭은 달리 있습니다. 동맹을 맺어 다른 가문의 꽃을 확보한 후엔 동맹을 맺었던 가문 간에 전투가 벌어집니다. 본래의 꽃을 찾아오기 위해서죠.”
꽃과 함께 교환한 병사들은 제 가문의 꽃을 무사히 탈출시켜야 했다.
진저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 이것이었다. 병사들은 이 탈출전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렸다.
모의 전투의 의의는 건국왕의 뜻을 계승하는 것도 있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의미가 퇴색되어 축제의 장이 되었다.
네 가문이 한 번에 전투를 치르는 것이 많은 전술을 구사할 수 있으며 볼거리가 다채롭다.
그럼에도 1 대 1 전투를 선호하는 이유는 몇 년에 걸쳐 한 번은 꼭 여성에게 트라우마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마크빌은 7년 전의 사례를 토대로 탈출전의 위험을 강조했다.
“트라노이가의 레이디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만 보면 과호흡을 일으키곤 합니다.”
“모의 전투에선 각지에 닥터가 대기한다고 들었어요. 그럼 위험한 상황은 없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마크빌의 표정이 굳었다.
“그웬가의 수도군을 비롯한 4공의 병사들은 모두 죽을 각오를 하고 모의 전투에 참가합니다. 마님, 병사들에게 모의 전투는 가문의 위상을 자랑하는 축제가 아닙니다. 국지전의 축소판이지요.”
“국지전의 축소판…….”
“죽는 병사는 없어도 팔이 잘려 나가는 병사는 있죠. 힘줄이 베여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자들도 생겨납니다.”
엘리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고된 훈련으로 상처가 생긴 이들은 있어도 모두 건강했다.
그전까진 건강하던 사람이 타인에겐 축제일 뿐인 모의 전투로 인해 평생을 괴롭게 사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7년 전 레이디 또한 그랬습니다. 어릴 적부터 호위를 전담하던 기사가 레이디의 앞에서 두 눈이 멀었습니다.”
입을 가린 엘리사가 조그맣게 헐떡거렸다. 그녀였더라도 충격을 이기지 못했을 터였다.
연무장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새하얗게 질린 마님을 본 자들이 모두 마크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죽을 각오로 지켜 주겠다고 외쳤다.
“마님의 안전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상하지 않도록 목숨 바쳐 지켜드릴 겁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남편이 그토록 반대를 외쳤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곁에서 마크빌의 이야기를 듣던 하녀도 질린 표정이었다. 이맘때가 되면 죽을 각오, 혹은 죽일 각오로 훈련에 매진하는 건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그녀는 새하얘진 마님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다.
“마님…….”
“……괜찮아.”
‘모의’자가 붙은 전투에도 불구가 될 각오로 달려드는 사내들이 앞에 있었다. 이깟 충격으로 비틀거려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봄을 앞두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겉치마쯤은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니, 살을 에고 뼈가 부서지는 추위에도 반드시 그러해야 했다. 정신을 차리자 주위에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각지에서 차출된 인재들이라지만 7할은 궁핍한 살림에 먹고 살기 어려워 자원한 자들이었다. 소대장쯤 되면 기사 서임을 받고 삶의 질이 나아진다지만 일반 병사들에겐 어림없었다.
그녀가 오기 전까진 푹푹 찌는 무더위에도 뼈가 삭는 엄동설한에도 식사의 품질은 변함이 없었다. 식사를 개선해 준 안주인은 그들에겐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이봐! 닥터를 불러와!”
“의자! 의자를 가져와라!”
“담요가 먼저다!”
곧 위험한 일을 앞둔 자들이 그녀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입을 가린 손을 천천히 내려놓은 그녀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하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사를 살폈다.
“마님…….”
“굉장하지 않니?”
“네?”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에게 나는 보호를 받고 있었구나.”
하녀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 업무를 끝내고 연무장에 도착한 진저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한쪽 눈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이 자식들.’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낸 진저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훈련이 시작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늘어지게 게으름을 부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제가 살필 때도 훈련을 이르게 시작한 적이 없는 놈들이었다.
열을 지어 선 이들이 구호를 외치며 날 없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크빌의 목소리도 평소와 다르게 우렁찼다. 뺀질거리던 소대장들도 진중한 표정으로 병사들 사이를 거닐며 자세를 고쳐 주었다.
그는 구령대 난간을 잡은 채 병사들을 지켜보고 있는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등 뒤를 지키고 있던 마크빌이 허리를 숙였다.
“벌써 훈련을 시작했나?”
그를 반긴 엘리사가 해맑은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네, 모의 전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훈련 시간을 늘리겠다던 걸요?”
그런 명을 내린 적은 없었다. 진저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마크빌을 돌아보았다.
“모두 자발적으로 훈련 시간을 늘렸습니다.”
자발적이라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자발적 훈련이라니 진저 평생에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엘리사가 손뼉을 짝짝 부딪치며 병사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사내들의 목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칭찬은 고래는 물론이고 게으름을 사명으로 여기는 자들마저 춤추게 했다.
* * *
기사들의 충성심은 도를 넘었다. 그들이 이렇게 훈련에 열의를 보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루, 이틀을 넘어 일주일이 다 되도록 그들의 마님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다.
이젠 그녀가 참가하지 않는 훈련에서도 솟구치는 마님 사랑을 자랑했다. 잠시 훈련을 살피러 온 진저는 기막히는 구호를 듣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여든하나, 마님을 지키자!”
“여든둘, 마님을 지키자!”
‘저 미친 새끼들이.’
훈련장 입구에 표정을 구기고 있는 진저를 발견한 하우벡이 달려왔다. 일주일 동안은 수시로 조를 변경해 훈련했지만, 내일부터는 고정된 조에서 그에 맞는 훈련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진저에게 각 조의 명단을 넘긴 하우벡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2조에 지원이 넘쳐서 머리를 쥐어짰지 뭡니까.”
2조는 탈취전에서 동맹군 진지에 넘어가 꽃을 호위할 조였다. 다른 조보다 위험하고, 위험한 만큼 훈련 강도가 세서 모두 피하고 싶어 했다.
서류를 넘기던 진저는 모의 전투에 참여할 109명의 병사 중 단 다섯 명을 제외하고 모두 2조에 지원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원하지 않은 다섯 중 둘은 방어조의 지휘를 맡게 될 마크빌과 1조의 조장이 될 하우벡이었다.
“나머지 셋은 모두 3조를 지원했습니다.”
그들은 마님이 위험할 일 없도록 적군을 쳐부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병사들이 이토록 훈련에 열의를 보이는 건 흐뭇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아가 치밀었다. 저놈의 ‘마님을 지키자!’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답지 않게 핑계를 만들었다. 제 앞에선 뺀질거리던 놈들이 아내 앞에서 살랑거리는 꼴이 괘씸해서라고.
연무장에 도착한 뒤로 벌써 반백 번 가까이 저놈의 ‘마님을 지키자’ 소리를 들었다.
“아침 훈련은 이제 정리할 시간 아닌가.”
“오늘이 모의 전투 예행연습이 있는 날 아닙니까.”
다시 말해 아내가 연무장을 찾는 날이란 소리였다.
“모두 마님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며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진저가 이를 갈았다.
그렇게 원한다면 나 죽겠소 소리가 나올 때까지 굴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창고에서 모래주머니를 가져와라.”
하우벡은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두 번 묻지 않고 모래주머니를 내오라 일렀다.
이윽고 훈련용 모래주머니가 연무장에 도착했다. 탑처럼 쌓인 모래주머니를 본 병사들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양 팔목과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하나씩 달라고 명한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뛰어, 이 새끼들아.”
그날 아침, 진저는 다짐했던 대로 병사들의 비명을 들은 후에야 연무장을 나섰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내저로 돌아온 그는 아내의 방을 찾았다. 하녀들이 뒤꿈치를 들고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아내의 드레스룸 쪽에서 콕스와 하녀 몇이 나오고 있었다. 모두 서류를 한 아름 끌어안은 채였다.
진저를 발견한 콕스가 허리를 숙였다.
“안사람은?”
“잠시 눈을 붙이고 계십니다. 어제도 밤을 새우신 모양입니다.”
혹여 그가 엘리사를 깨우기라도 할까 봐 애타는 어조였다.
왜 침실을 놔두고 드레스룸에서 잠을 청하는 건가.
아내의 몸에 고용인이 손을 댈 수 있을 리 없었다. 잠든 그녀를 옮겨주기 위해 드레스룸에 들어간 진저는 놀라운 변화에 미간을 좁혔다.
그를 따라 들어온 콕스는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마땅히 일을 보실 곳이 없으셨는지 테이블을 놓으셨습니다. 침실 티 테이블엔 이 많은 서류를 놓을 자리가 없지 않습니까.”
안주인의 방은 침실과 응접실, 드레스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주처럼 집무실이 따로 있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테라스나 침실의 티 테이블, 혹은 서재에서 업무를 보았다.
아내의 드레스룸은 옷과 구두, 보석들이 사라지고 완전히 집무실로 바뀌어 있었다.
“드레스룸에 있던 물건은.”
“침실 안 쪽방으로 옮기셨습니다.”
“그 안에 물건이 다 들어간단 말인가.”
“선대 공작 부인의 물건은 잘 정리하여 창고에 두셨습니다. 마님의 물건은…….”
콕스가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마님의 물건은 쪽방을 가득 채우지도 못했다. 그란디아에서 가져온 물건은 몇 없었고 드레스나 액세서리 등은 진저와 루펠라가 선물한 게 다였다.
테이블엔 그녀가 엎드린 자리를 제외하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류와 책이 빽빽했다. 테이블 아래도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내저의 서류나 모의 전투에 관련된 책이었다. 혹여 서류 더미나 책이 넘어질까 봐 불편하게 팔을 굽히고 있었다.
“가구를 새로 들이지 그랬나.”
책상도 모서리가 죄 헤졌고, 의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내가 조금 뒤척인 것뿐이었는데도 삐거덕삐거덕 듣기 싫은 마찰음을 냈다.
“말씀드렸습니다만, 남들 귀에 들어가지 않게 저택에 있는 것으로 구하라 명하셨습니다.”
진저는 그란디아의 문화가 란델보다 여성들에게 각박한 구조라는 것을 떠올렸다. 여성은 집무실을 가질 수 없었다.
몇몇 신여성은 저택의 방을 개조하는 모양이지만 좋은 소리를 듣진 못했다. 방을 개조한 여성은 물론이고 그녀의 남편조차 마찬가지였다. 아내 단속을 못 했다는 이유로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혹시라도 진저가 싫은 소리를 듣게 될까 봐 몰래 테이블을 들여놓은 모양이었다.
란델은 달랐다. 각종 신화에 여성 영웅이 등장하기도 할뿐더러 여성이 가문을 지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그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밤을 새운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쪽잠을 이렇게 곤히 잘 수 없었다. 그녀를 침대로 옮긴 그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의 침실을 나선 진저는 맞은편 방에 아내의 집무실을 만들라고 일렀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도록 해라.”
“예, 주인님.”
콕스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켰다. 사실 마님께서 드레스룸에 테이블을 준비하라 명하신 이후 몰래 가구를 봐 놨었다.
주인님의 선물에 감격하실 마님을 떠올리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 * *
분명 드레스룸에서 잠이 든 것 같은데 일어나 보니 침실이었다. 잠에서 깬 엘리사가 졸린 눈을 비비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세 시네…… 세 시?!’
소스라치게 놀라 이불을 걷었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확인했을 때가 오전 10시였다. 요새 이것저것 일이 많아 수면 시간이 줄긴 했지만 낮에 다섯 시간을 내리 잘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방을 나섰다.
오늘은 모의 전투 예행연습의 첫날이었다. 필사의 각오로 훈련을 하는 병사들에게 방해가 될 순 없었다.
30분 뒤면 훈련이 시작될 터였다. 그전에 마지막으로 훈련 내용을 정리해야 했다.
“마님! 마님! 어디 가십니까!”
뒤에서 콕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헐레벌떡 다가오는 그를 보며 오늘 내저 업무 중 놓친 게 있었나 고민했다.
“무슨 일이죠?”
“병영에 문제가 있어 예행연습이 미뤄졌습니다.”
“병영에 문제요?”
“예.”
콕스는 혹시 연무장에 가시는 중이었다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전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으나 콕스는 그저 흐뭇했다. 엘리사가 수면 중인지 묻던 진저의 표정이 떠올랐다.
병영에도 무슨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지만 예행연습을 미룬 데엔 엘리사의 영향이 전혀 없진 않을 것이다.
“마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침도 서류를 보느라 대충 요기만 했다. 식사 얘기를 듣고 보니 배가 고팠다. 하지만 곧 저녁때였고 자느라 오전을 날린 탓에 식사보다 다른 일이 우선이었다.
“간단한 것으로 준비해서 드레스룸으로 올…….”
식사를 지시하는 중에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식당에서 먹어.”
남편이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내의 안색을 살폈다. 모의 전투에 참여키로 한 뒤엔 늘 안색이 파리했다.
괜찮다는 아내의 말을 뚝 자른 진저가 아내의 아침 식사 메뉴를 물었다.
“스콘과 석류 잼, 크림이 들어간 홍차, 그리고 호두 몇 알을 드셨습니다.”
마치 선생님에게 고자질하는 아이 같았다. 숨도 쉬지 않고 엘리사의 아침 메뉴를 일러바친 콕스는 이어 그녀가 어제는 무엇을 먹었고, 얼마나 먹었는지를 달달 읊기 시작했다.
“아침엔 가재 수프를 반도 드시지 못했고, 점심엔 연어 샐러드에 포크를 세 번 가져가셨고, 달걀을 올린 가지 구이를 3분의 1가량 드셨으며 저녁엔 주방장의 음식도 물리시고 초콜릿을 한 잔 드셨습니다.”
진저가 눈살을 찌푸렸다. 초콜릿이 디저트지 식사이던가. 점심, 저녁도 평소 식사량의 반도 미치지 못했다.
엘리사는 남편의 눈빛에 기가 죽었다.
“식당에 가서 제대로 먹지.”
“곧 저녁이니까…….”
“식당에 가서, 제대로 먹어.”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주어 말한 그가 식당을 향해 앞장섰다.
엘리사는 남편의 뒤를 졸랑졸랑 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라골이 그의 명으로 저택을 비운 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콕스가 많이 도와주고 있긴 하지만 마피 부인의 곁에서 오랫동안 그녀의 일을 지켜봐 온 라골만큼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간의 내저 운영 자료를 살피고 확인을 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모의 전투까지 준비하느라 정신이 쏙 빠졌다.
아내와 함께 식당에 도착한 진저는 본격적인 잔소리를 시작했다. 쓰러지려고 작정했느냐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답지 않다는 생각은 잊고 있었다.
“식사는 가장 기본적인 거잖아.”
엘리사는 억울했다. 배가 부르면 잠이 오기 때문에 식사량을 조절했던 거지 밥 때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남편이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 대꾸 없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진저는 아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내내 지키고 있었다. 스푼을 움직이고 오물거리는 것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던 그는 그녀가 배부르다는 소리를 하자마자 다시 타박을 시작했다.
“그렇게 안 먹으니까 양이 줄지.”
엘리사의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듣다 보니 기분이 좋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에게서 듣는 걱정 어린 소리는 어떤 말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그런데 훈련은 왜 중지된 건가요?”
진저는 아무렇지 않게 군 내부 일이라고 답했다.
“그렇군요.”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큰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식사 시중을 들고 있던 콕스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내가 식사를 마치는 것을 확인한 진저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가 떠난 후 엘리사도 다시 일을 보기 위해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엘리사의 뒤를 따라온 콕스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려는 엘리사를 만류했다.
“그쪽이 아닙니다, 마님.”
“무슨 소리죠?”
콕스는 엘리사 방의 맞은편 문을 열었다.
도배를 새로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가구의 이야기까지 듣진 못했다. 어제와는 다른 방을 둘러본 엘리사가 콕스에게 물었다.
“누가 저택에 들어오나요?”
“아닙니다.”
“그럼 왜…….”
콕스는 내저의 일을 상의 없이 진행할 자가 아니었다.
“주인님께서 마님의 집무실을 만들라 명하셨습니다.”
“각하께서요?”
“드레스룸에서 잠드신 마님을 보셨습니다.”
그녀 또한 드레스룸으로 가져간 책상이나 의자가 낡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저택 내라 하더라도 마음만 먹었더라면 그보다 나은 가구를 구했을 터였다. 어차피 책상과 의자는 그저 일을 보기 위한 것이고, 바쁜 일이 끝나는 대로 드레스룸을 정리할 생각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엘리사에겐 집무실이 너무나 과한 선물로 느껴졌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괜히 남편이 신경 쓰게 만든 것 같았다.
엘리사가 당황하자 콕스는 그란디아와 란델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설명했다.
란델에서 여성의 집무실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란 콕스의 말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성 상인이나 여성의 몸으로 가문을 지휘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오직 안주인을 위한 집무실은 란델에도 많지 않았다.
콕스는 서둘러 선대 공작 부인 또한 안주인의 방이 아닌 다른 방을 증축하였노라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업무 처리를 위한 방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쏙 빼니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이 말은 안 드리길 잘했어.’
오늘 예행연습이 취소된 이유는 주인님께서 마님을 배려하셨기 때문이었다.
물론 콕스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한 일이었다. 진저 그웬을 아는 모두가 기함을 할 테지만 마님은 달랐다.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혔다며 괴로워할 것이 눈에 빤했다. 그래서 주인님께서도 별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두 분께서 결혼하시고, 아니, 결혼하기 전부터 콕스는 새로운 그웬 공작 부인이 귀부인들과 교류하는 것을 염려했다. 오랫동안 귀족가의 고용인으로 일하면서 여러 집단을 알게 되었다. 여성의 무리는 남성의 무리보다 시류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건 하찮든 고귀하든 마찬가지였다.
귀부인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얄팍한 말을 듣고 주인님을 닦달하거나 주무르려 드는 건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귀부인들 간의 교류를 염려한 것인데, 마님이라면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주인님을 너무 배려하는 게 문제일 정도였다.
남편의 사소한 배려에도 바짝 긴장하여 어쩔 줄 모르는 건 더 이상 흐뭇한 광경이 아니었다.
마님은 고용인의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보기에도 매력이 넘치는 분이었다. 매사 조심스럽고 상냥하며 진심을 다해 사람을 대할 줄 아셨다.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분이셨다.
콕스는 그녀가 사랑받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길 바랐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 확신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피 부인이 언제쯤 올라오실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마피 부인의 병은 그렇게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 닥터는 약물치료만으로 호전될 수 있다고 하였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병든 몸으로 내저를 지킬 수 없다며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진저는 부모 대신이었던 그녀가 그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홀로 생활하는 것을 반대했다. 루펠라 또한 자신도 함께 떠나겠노라 떼를 썼다.
그래서 1년 정도 요양을 떠나는 것으로 절충안을 내었다. 이제 곧 마피 부인이 올라올 때가 되었다. 그녀라면 새로운 그웬 공작 부인에게 라골보다 더 좋은 조력자가 될 것이다.
엘리사는 집무실을 좀 더 자세히 둘러보았다.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접자 이만큼 마음에 드는 방이 없었다.
콕스는 그녀가 무슨 색을 좋아하고 어떤 가구를 유심히 보았는지 기억해 두었다. 선대 안주인 취향에 맞췄던 안주인의 방과는 달리 집무실은 오롯이 엘리사의 취향만을 고려했다.
크림 톤의 밝은 벽지는 섬세한 무늬가 들어가 방을 안락하게 보이게 했다. 가구는 남편의 집무실에서 보던 것보다는 밝은 살구색이었는데 좋은 나무로 만들었는지 가벼운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묵직한 분위기를 주어 책상에 앉는 것만으로도 집중이 될 것 같았다.
집무 테이블을 기준으로 그 앞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티 테이블보다 살짝 높은 식당용 테이블도 있었다. 일을 볼 때마다 자주 밥을 걸렀더니 집무실 안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테이블을 가져다 둔 듯했다.
그녀를 가장 감격하게 한 것은 양쪽 벽을 차지하는 두 개의 책장이었다. 수백, 아니, 천 권을 훌쩍 넘게 꽂을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책장에는 이미 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방에 있던 책들은 모두 옮겨 놓았습니다.”
왕궁에서 가져온 것들은 물론이고 저택 내 서재에서 가져온 책들도 있었다. 그녀가 여기에 꽂아두어도 괜찮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콕스가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왕궁에서도 그녀의 방은 있었다. 공주의 방답게 테라스며 작은 정원 등이 딸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도 책장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만의 책장이 가지고 싶었다. 왕궁 서고는 너무 멀었고 대여 기간도 짧았기 때문에 불편했던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더 필요하신 책은 없으신지요?”
“업무용 책은 이거면 됐어요.”
“주인님께서 마님은 사교 활동을 하셔야 하니 읽으시는 모든 책이 가문에 도움을 주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사의 양 뺨이 기대로 달아올랐다. 지금껏 구하지 못하여 읽을 수 없었던 책들도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란디아에서 금서로 구분되던 것들도 지금은 읽을 수 있었다.
“저, 그럼 클리크의 저서인 ‘정치의 이해’ 그리고 ‘현실론’ 또…….”
책이 열 권을 넘어가자 콕스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목록을 작성해 주십시오.”
“아, 그게 빠르겠네요. 잠시만요.”
그녀가 무언가를 이토록 가지고 싶어 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 * *
콕스는 진저에게 마님께서 선물을 몹시 기뻐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찌나 행복해하시던지 보는 자신마저 뿌듯했다는 말도 함께였다.
진저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사실 벽지는 곰팡이가 슬어 교체한 것이고, 가구만 새로 사들였다. 물론 질 좋은 나무와 란델에서 가장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제품이다. 서민들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것이지만, 귀부인이 착용하는 보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웬 공작 부인쯤 되는 여성이 착용하는 보석이라면 수도 외곽의 저택 하나는 우스울 것들이 태반이었다. 책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깟 책쯤 수만 권을 사도 엘리사가 받은 결혼 예물에 비할 순 없었다.
결혼 예물에도 미소 한 번 짓지 않았다던 아내가 고작 그런 것에 기뻐했다니.
콕스에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게 다였지만 오후 내내 그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 * *
문제는 아내가 그의 선물을 너무나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일은 물론이고 식사를 할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집무실에서 나서지 않았다.
벌써 사흘째 아내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해서 교란을…… 주군?”
전략을 설명하던 하우벡이 그를 불렀다.
“그래.”
대답을 하는데도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하우벡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온 한스까지도 의아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쭐까 하던 하우벡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진저가 일하는 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하우벡은 수도군의 실무를 맡고 있을 뿐 영지의 행정이나 정치적 문제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그건 가신들과 그웬저 사무관들의 몫이었다.
수도군은 어느 때보다 사기가 올라있었다. 마님 사랑을 외치며 훈련에 매진하였고, 하루가 다르게 완벽해지는 모습을 자랑했다. 예행연습이 미뤄진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그러니 모르긴 몰라도 군을 제외한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홀로 생각을 정리하던 하우벡이 한스를 돌아보았다. 사실 한스는 하우벡을 제외하고, 주군에게 두들겨 맞은 횟수로는 최다 횟수를 자랑하는 자였다. 다시 말해 말을 하는 것에 필터가 없었다. 생각나는 대로 무조건 뱉고 보았다.
“똥 마려운 찰스 같은 표정이시니 드리는 말입니다.”
찰스? 진저는 그게 누구냐는 표정이었다. 한스는 거시기에 털도 나기 이전부터 수도군에 몸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저와 가장 오래된 전우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한스가 아는 자라면 진저 또한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찰스는 기억 속에 없는 이름이었다.
“찰스?”
그제야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한스가 하우벡을 쳐다보았다.
‘날 왜 봐?’
‘도와주라.’
‘내가 미쳤냐.’
찰스는 정 많은 마크빌이 주워 온 강아지였는데, 연무장에서 남는 밥을 먹으며 지냈다. 훈련을 하거나 진저의 병영 시찰이 있을 때면 다른 곳에 맡겨 놓았다. 진저는 강아지가 병영 내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우벡이 출구를 확인했다.
‘같이 얻어맞을 순 없지.’
죽어도 함께 죽는다와 같은 동지애는 진저의 주먹 앞에선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저번 고자 사건 때 얻어맞아 생긴 멍이 아직 다 빠지지도 않았다.
“안사람에겐 내용을 전달했나?”
다른 때 같았으면 귀신같이 말실수를 눈치챘을 진저가 화제를 전환했다. 한스가 하우벡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우벡은 오늘 개요를 전달할 예정이라 말했다.
“그건가.”
진저는 하우벡의 손에 들린 서류를 가리켰다. 하우벡이 눈치 빠르게 서류 뭉치를 건넸다.
아내에게 전달될 서류에는 진저가 본 것과는 다르게 그림이 빽빽했다. 기초 지식이 없는 아내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일전에 그러했듯 밤을 새워서 맥락을 파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터였다.
진저가 아내 몫의 서류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하우벡 대신 서류를 전달하면서 비싼 얼굴도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우벡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진저를 쳐다보았다. 사생아라는 오명 때문에 음지에서 살아왔지만 공작 가의 오롯한 후계였다. 잔심부름 따위는 꿈에서조차 해본 적 없을 사람이 대뜸 하우벡의 일을 대신하겠다는 게 놀라웠다.
“뭐 해?”
“예?”
“문까지 친절하게 열어줘야 하나?”
이제 됐으니 꺼지라는 소리를 돌려 말하기까지 했다. 진저의 집무실을 나선 하우벡은 복도 창에 매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 하냐?”
“오늘 해 어디서 떴지?”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서쪽에서 뜬 게 분명해. 아니면 주군이 저주를 받아서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갔던가.”
한스는 헛소리를 하는 하우벡을 두고 저 홀로 걸음을 옮겼다. 말실수를 하고도 얻어맞지 않았다.
‘이렇게 운이 좋은 날엔 경마장에 가야지.’
그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 * *
엘리사는 문에 기대서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진저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이전에도 온다 간다 말없이 그녀를 찾긴 했지만 자신의 집무실을 찾은 건 처음이었다. 선물에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을 때도 몇 번 고개를 끄덕인 게 다였다.
엘리사가 집무실 안에서 일을 돕고 있던 하녀에게 차를 내오라 일렀다. 하녀는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처럼 금세 차를 내왔다.
아내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차와는 다르게 진저가 받은 차에서는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그가 막 들어왔을 적에도 아내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 식은 차를 마시고 있었던가. 아내의 집무실은 2층 소주방과 가까워서 차나 과자를 쉬이 내올 수 있었다.
진저의 시선이 집무실 한구석에서 얌전히 손을 포개고 있는 하녀에게 닿았다.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엘리사가 하녀를 옹호했다.
그가 마뜩잖게 보고 있는 아이는 성실하고 상냥했다. 마님께서 식은 차를 드시는 게 싫다며 세 시간 동안 네 번이나 찻물을 새로 내왔다. 그런데도 잔에 온기가 남지 않은 이유는 방 안의 온도가 낮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만들어준 집무실은 예쁘고 안락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다만 안 쓰던 방이라 그런지 난방시설은 벽난로가 유일했는데, 이마저도 낡아 제 구실을 못 했다. 고용인들이 수리를 해놔도 금세 장작에 물기가 어려 불씨가 꺼졌다.
“벽난로가 말썽이라서 그래요. 저 아이가 얼마나 성실한데요.”
그러고 보니 아내의 옷차림이 평소보다 두꺼웠다.
진저는 점점 더 아내의 집무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한 일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많아 피곤할 텐데 방이 추우니 쉽게 감기에 들 것이다.
이 정도면 벽난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벽을 뜯어서라도 무엇이 문제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곧 날씨가 풀릴 거라며 벽난로 수리는 다음 겨울에 해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안 돼. 수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 쓰지 마.”
“저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들어올 때마다 기분이 좋은걸요.”
“기분이 좋다고 건강해지는 건 아니잖아. 수리될 때까지 나와 집무실을 함께 쓰지.”
“네?”
엘리사의 눈이 커졌다. 물론 그의 집무실은 그녀의 집무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데다 난방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나 아내와 남편이 집무실을 함께 쓴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침실도 함께 쓰고 싶은가?”
“싫어요…….”
뭐 그렇게 싫은 게 많은지. 그녀 방의 침대를 없애겠다고 협박할까 했지만 그럼 바닥에서 자겠다고 나올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처음엔 이렇게 점잖고 얌전한 여자가 또 있을까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생각과 달라졌다. 그녀는 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특히 고집을 부릴 때가 꼭 그랬다. 이상한 건 그게 싫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로 인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렇게 잔소리가 많았나.’
남에게 간섭하는 게 귀찮을뿐더러 그가 간섭하게 만들 만큼 시선이 가는 자들은 없었다.
“며칠만. 수리는 며칠이면 끝날 거 아냐.”
이렇게 어르고 달래는 일도 없었다.
부하들이 실수를 하면 이후론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물론 제가 나서는 경우는 몹시 드물었다. 실수를 할 만한 자를 옆에 두지 않을뿐더러 그렇다 해도 실수를 한 자의 상관이 수습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참 고민하던 그녀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떼쟁이가 따로 없군.”
“네?”
“갓난쟁이를 어르고 달래는 기분이야.”
엘리사는 불만스러운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는 아내의 표정을 보고 픽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녀 또한 그웬저에 온 뒤로 아니, 그와 몸이 바뀐 이후로 스스로 많이 변화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보호가 익숙해졌으므로 긴장을 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진저는 더 고집부리지 않기로 한 아내가 귀여운지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집무실 구석에서 진저를 바라보고 있던 하녀가 몽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녀는 엘리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엘리사의 눈에도 그의 미소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건 그녀가 남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그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남편을 어떻게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먼 그란디아까지 그의 별명이 자자하지 않았는가.
‘란델의 미친개.’
결혼 생활을 크게 염려할 정도로 소문이 좋지 않은 남자였다. 주변 사람에겐 독하다 싶을 만큼 불친절한 남자가 제게만은 다른 표정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놓고 그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이후에도 잠들지 못하는 밤은 있었다. 진저의 손이 엘리사에게 닿았을 때, 다른 날보다 더 상냥했을 때, 자존심 강한 남자가 자신을 위해 굽혀 주었을 때. 가슴속에서 이는 풍랑을 주체하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진저는 말이 없는 아내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그가 아내의 뺨에 손을 뻗었다.
엘리사가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이 사람이 나빠.’
제게만 다정한 남자에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여자라면 누구든 꿈꾸는 이상이 아닌가. 알맹이 없는 친절로 설레게 하여 결국 이런 떼쟁이로 변화시켜 버렸다.
“몸이 안 좋나?”
‘자꾸 헛된 기대를 하게 만들어.’
“것 봐. 찬 데서 지내니 몸이 안 좋지.”
‘안 될 일인 걸 알면서도 자꾸만…….’
“닥터를 불러와라.”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고용인들은 그녀를 여왕처럼 모셨다. 왕궁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나마도 왕태후가 정정할 때의 일이라 먼 옛날이었다.
영양을 일일이 따져 메뉴를 내왔고 때마다 몸에 좋은 약을 챙겼다. 그란디아에서는 스트레스받을 일이 많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계절이 바뀔 때면 항상 심하게 앓았다. 그런데 요새는 잔병치레조차 없었다.
“그럼 제가 마님 심기를 상하게 했나 봅니다.”
장난스러운 어투였다.
“그러지 마세요.”
하녀 앞이 아닌가. 아니, 둘만 있는 자리라도 공작가의 가주가 이런 말투를 쓰는 건 위상이 상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예예, 누구 말씀이신데’ 하며 그녀를 골렸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이럴 때는 차라리 화제를 전환하는 편이 나았다. 매일같이 놀림을 당하면서 얻게 된 지혜였다.
진저는 그녀에게 하우벡이 정리한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들춰 본 엘리사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림 때문에 이해가 쉬울뿐더러 군 관계자가 아닌 민간인에겐 익숙하지 않을 수 있는 용어는 따로 정리까지 해주었다.
“하우벡 경이 고생했겠군요. 아주 보기 편해요.”
“다행이군.”
“당신이 명하신 건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명한 게 아니라 대답하지 않은 것뿐인데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아내는 볼우물이 쏙 파이도록 웃었다.
“감사해요.”
또다시 그의 눈빛이 짓궂게 변했다.
엘리사는 제 앞에 내밀어진 남편의 손을 보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평소에 놀릴 때도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할 것 아냐.”
그림도, 단어집도 그가 명한 건 아니었지만 진저는 부하의 공을 날름 집어삼켰다. 고민하던 아내가 구석에 서 있던 하녀를 곁눈질했다.
아내는 고민을 마쳤는지 하녀를 내보냈다.
“나가 보거라.”
하녀는 방을 나서면서도 아쉬움에 문을 흘끔거렸다. 마님께서 주인님께 무슨 보상을 하시려는 걸까. 주인님에겐 부족한 게 없었다. 물질적 보상은 전혀 쓸모가 없을 터였다.
‘설마 애들처럼 키스는 아니겠지.’
하녀가 킥킥거리며 엘리사의 집무실에서 멀어졌다.
그녀가 과연 무엇을 줄지 흥미진진한 건 진저도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장난이었는데 진심으로 기대가 되었다. 조금만 놀려도 빨개질 만큼 수줍음이 많은 여자였다. 볼에 입맞춤 정도면 만족할 수 있었다.
‘입술이면 좀 놀라울 것 같긴 한데.’
엘리사가 주춤주춤 일어났다. 서로를 보며 앉아 있던 터라 일어나지 않으면 그에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아내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뺨이나 목에 닿을 거로 생각했는데 허공에서 멈춰 버렸다. 게다가 손을 편 것도 아니고 주먹을 쥐고 있었다.
진저는 이게 대체 뭐냐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치려고?’
그런데 위로했던 손등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손이 차례로 펴졌다.
“자요.”
“이게 뭔데.”
“상을 원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상이라고? 나한테 주는?”
“네.”
그녀가 쥐고 있던 건 사탕이었다. 연분홍색 바탕에 땡땡이 무늬가 들어간 포장지에 감싸진 사탕.
‘차라리 한 대 맞는 게 나았겠군.’
“고든이 보내준 거예요.”
고든이라면 ‘매혹’에서 보았던 이상한 사내놈이었다. 다른 남자가 준 선물을 제게 상이랍시고 준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그녀가 직접 먹으려 했다는 건 더 기막혔다.
디저트로 나온 것을 쟁여 두었다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받았다면 몰라도 그놈의 선물이라니 그냥 두기 싫었다. 차라리 그가 먹는 게 나았다. 사탕을 낚아채듯 가져온 진저가 그 자리에서 포장지를 벗겨 입에 집어넣었다.
단맛이라면 질색하는 남편이 제 앞에서 사탕을 먹는 게 놀라웠다. 핥아먹는 것도 아니고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사탕을 좋아했나……?’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그녀는 사탕이 담겨 있는 상자를 통째로 가져왔다.
매혹에서 만난 이래로 그녀는 고든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체로 선물을 받는 편이었다.
고든은 그녀가 고가의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걸 알고 직접 만든 화장품이나 드레스, 액세서리 카탈로그 등에서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것들을 체크해서 보냈다.
가끔은 디저트도 있었다. 이전에 받았던 몽블랑은 너무나 훌륭해서 따로 제과점 이름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는 이 사탕을 보내주면서 아주 특별한 것이니 꼭 남편과 나눠 먹으라는 말을 전했다.
환상적이었던 몽블랑보다 특별한 사탕이라는 말에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이토록 좋아한다면 그에게 모두 주어도 괜찮았다.
진저는 그녀가 여덟 개나 되는 사탕을 상자에 넣어 잘 보관하고 있었다는 걸 알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다른 놈이 준 것을 먹는 꼴은 볼 수 없었다. 그는 통째로 사탕을 빼앗았다.
“마음에 드세요?”
“아니.”
“그럼 제가 다시…….”
“마음에 들어.”
그는 엘리사가 사탕을 다시 가져갈까 봐 본심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녀는 ‘다행이에요’ 하며 웃었다.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진저는 그 자리에서 사탕 여덟 개를 모두 씹어 먹었다.
* * *
그날 밤, 진저가 이상했다. 저녁 식사를 한 뒤로 몇 번이나 덥다며 짜증을 내더니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그가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며 고개를 숙였다.
“각하?”
보다 못한 엘리사가 그의 팔을 잡았다.
“몸이 안 좋으신가요?”
“큭.”
갈증이 전신을 옥죄는 것만 같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잡았다. 기분이 불쾌하다. 눈앞이 뱅뱅 도는 것만 같았다.
“각하!”
그녀가 그의 팔을 잡았다. 닿은 부분에 전류가 이는 것 같았다. 흥분이 지나쳐 고통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열이…….”
열을 재기 위해 뻗은 손은 목적한 곳에 닿지 못했다. 진저가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다급히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거친 키스는 처음이었다. 입안이 다 아릿할 정도로 다급하고 공격적인 키스. 당황한 엘리사가 고개를 돌리려 들었다.
“각, 으응!”
진저가 그녀의 허벅지를 잡고 번쩍 안아 들었다.
허공에 몸이 붕 뜨더니 순식간에 벽에 등이 닿았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한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도망치는 아내의 혀를 뱀이 먹잇감을 공격하듯 단단히 조인다. 입천장부터 설태까지 샅샅이 훑었다.
그의 양손이 가슴을 주무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건 그의 입술이 턱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여, 여보…….”
그의 붉은 눈을 보는 순간 알았다.
‘먹히고 말 거야.’
등줄기가 오싹했다.
이제야 알겠다. 그동안 그의 패팅은 인내의 산물이었다는걸. 그의 주변에서 검은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맹수 앞 초식동물처럼 도망갈 곳을 찾았다.
그러나 도망칠 곳 따윈 없었다. 뒤는 벽이고, 앞은 그의 품이다.
그는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아내의 몸을 돌렸다. 벽을 짚은 그녀는 제 목 뒤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는 그를 느끼며 눈을 깍 감았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도무지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지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단추를 세 개째 풀던 그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흥분으로 잔뜩 쉰 목소리였다.
수녀복의 단추도 이만큼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맨살에 입술을 비비고, 잔뜩 핥아 젖게 만들고 싶었다.
핏줄이 잔뜩 울거진 손으로 네 번째 단추를 잡던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우악스럽게 옷을 뜯어냈다.
드레스가 허리로 흘러내렸다. 등의 브래지어의 버클까지 푸른 그는 살짝 튀어나온 날개 뼈에 입 맞췄다. 그녀의 몸이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진저는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가슴을 잡았다. 손 안에서 터질 것처럼 부드러운 가슴이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를 모르는 몸에 왜 이리도 자극적인 향이 나는 걸까. 분내도, 꽃 냄새도 아닌 기묘한 향이 음심을 부추긴다.
‘이대로 꽂을까.’
음부는 침입자를 밀어내려 자신의 것을 빡빡하게 조일 거다. 앙앙 우는 소리는 그 어떤 연주보다 감미로울 테지.
박고 박아 자신의 모양으로 길들이고 싶었다. 종내엔 그녀 스스로 제 위에 올라타 음란하게 움직이도록.
가슴을 쥔 진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파아…….”
그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진저는 허리에 걸쳐져 있던 드레스를 끌어내렸다. 이제 결합을 막는 천은 하의의 속옷 하나뿐이다.
진저가 천 위를 더듬어 구멍을 찾았다. 하체의 요망한 구멍은 말과는 달리 이미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속옷 위를 매만지는 것뿐인데도 애액이 묻어났다.
“큭, 이대로 넣고 싶어.”
“안 돼, 안 돼!”
엘리사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마음을 자각한 후로는 그와의 성관계를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그에게 먹혀버리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진저가 팬티에 손을 끌어내리려 하자 엘리사가 질겁하여 팬티를 잡았다. 하지만 여성의 힘으로 남성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팬티가 허벅지에 걸쳐지고 진저의 손이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진저가 그녀의 질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그녀 스스로는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은밀한 곳을 타인, 그것도 홀로 사랑할 뿐인 남성이 헤집고 있었다.
찔꺽.
오돌도돌한 내벽이 그의 손가락을 꽉 끌어안았다. 문지르자 새하얀 꿀을 토해낸다.
“아!”
참고 참았던 신음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엘리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피하고 싶지만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곧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무릎이 후들거렸다.
두 번째 손가락이 들어왔다. 그가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치 성기를 삽입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흐읏!”
벽을 잡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수풀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던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벅지를 타고 내려와 검은 드레스를 적셨다.
엘리사가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흔들려던 무렵, 그의 손이 쑥 빠져나갔다. 끝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려는데 철컥 버클 푸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엘리사의 골반을 잡아 허리를 제 쪽으로 쭉 끌어당겼다. 가랑이 사이로 뭉툭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엘리사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진저의 거친 숨소리가 느껴졌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육봉이 질 입구를 문질렀다. 흥분으로 부푼 클리토리스에 미칠 것 같은 자극이 느껴졌다.
“흐, 흐응!”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건 진저도 마찬가지였다. 성기가 다리 사이를 스칠 때마다 젖은 살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몇 번 비비지도 않았는데 쿠퍼액이 줄줄 흘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아내를 끌어안고 성기 끝을 질 입구에 댔다.
아내의 몸이 가냘프게 떨렸다. 그의 것이 질 입구에 비벼지자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절 사랑하세요?”
‘제길.’
진저가 이를 악물었다.
무시하고 싶었다. 무시하려 했다.
애정을 담뿍 담은 눈이 떠오르지만 않았다면. 그가 안았던 여자와 아내는 다르다. 아내는 애정 없는 성관계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흥분으로 미칠 지경이었지만 이대로 삽입하는 건 쓰레기라 생각했던 제 아비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진저가 이를 악물며 아내에게서 떨어졌다.
* * *
화장실에서 홀로 사정하고 온 진저가 인상을 구겼다. 더러운 기분이다.
“당신, 나한테 뭘 먹인 거야?”
이렇게까지 흥분해 앞뒤를 모르다니. 뭘 잘못 먹은 게 분명했다. 오늘 먹었던 것을 짚어봤지만 식사나 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걸리는 건 사탕뿐이었다.
몸이 예민하다 보니 신경까지 예민해졌다. 아내가 자신을 골리려고 사탕에 무언가 넣은 게 아닐까. 그것 외에는 이상한 게 없었으므로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네?”
아내는 순진한 반응이었다. 사탕에 무언가를 넣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럼 그놈. 고든이란 놈이 사탕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놈이 뭐라 하면서 사탕을 주었지?”
“특별한 사탕이니 당신과 나누어 먹으라고……. 금슬을 좋게 해줄 거랬어요.”
진저는 즉시 고든을 잡아오라 명을 내렸다.
그웬군 병사들에게 잡혀 온 고든은 빽빽 울었다. 파자마 차림으로 헤어캡까지 쓴 채로 잡혀 온 것도 서러운데 호의로 보낸 선물은 박스째 진저의 발에 밟혔다.
“감히 내게 약을 먹이다니 배짱도 좋군.”
그런 와중에도 황송할 정도로 눈요기가 되어주는 모습이었다. 아직 열이 남아 색이 더 진해진 구릿빛 피부, 땀에 젖은 머리칼, 거친 숨결까지.
‘이럴 때가 아니지!’
고든은 타국에서 유행하는 사탕을 선물했을 뿐이라며 울부짖었다.
“4공을 해하려 한 자는 본인은 물론이고 부모, 형제자매, 자식까지 삼 대의 목을 벤다는 건 알고 있겠지?”
부모는 일찍 여의었고 형제자매는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며 자식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죽을 사람이 없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도 죽고 싶지 않았다.
아직 미남 구경도 다 못했고, 재물도 원하는 만큼 벌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소원인 불타는 연애! 그의 취향에 꼭 맞는 화려한 미남과 키스도 해보지 못했다.
맹세하건대 약인 줄은 몰랐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구한 것으로 밤에 먹으면 부부 금실을 좋게 해준다는 속설만 알고 있었다.
남편도, 아내도, 연인도 없는 사람이 먹으면 3년은 홀로 지내게 된다는 말에 직접 먹어보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이런 황당한 결과를 불러오다니.
“정말입니다, 각하!”
그는 눈이 퉁퉁 붓게 울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부인! 부인께서 말 좀 해주세요!”
그녀는 고든을 옹호하지 않았다. 남편이 괴로워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엄한 목소리로 고든을 꾸짖었다.
“자네가 보낸 사탕으로 각하의 몸이 상하지 않았는가.”
주변에 있던 고용인들과 기사들은 몹시 감격한 표정이었다. 상냥하신 마님이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아시네!
진저는 묘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오해였으니 용서하라며 자신을 말리기는커녕 되레 그의 편을 들었다. 무슨 생각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흐뭇했다.
“각하의 약에 중독시켜 미약 사탕을 란델에 유통하려 하였는가.”
고든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물론 그웬 공작 부인에게 잘 보여 공작의 맘에 들고 싶다는 야심이 있긴 했다. 그의 마음에 들면 사업도 승승장구할 테고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순수한 호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엘리사는 자신과 남편을 위한 선물이었다는 말을 믿었다. 농담과 진담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매번 남편에게 골탕을 먹지만 악의와 호의는 구분할 수 있었다.
재물과 관련된 화제에는 눈을 빛내는 수전노이긴 하나 선한 자임은 확실하다. 문제는 고든이 검증되지 않은 것을 공작가에 보냈다는 것이다.
남편이 그녀의 안전 문제에 민감한 것처럼 그녀도 남편의 안전에 민감했다.
혹시 저 사탕에 정말 독극물이 묻어 있었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분명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녀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했다.
“각하, 이번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진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진지한 표정이었다. 측은한 마음에 허투루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저자를 지하에 가두고 죄를 토설할 때까지 물 한 방울 주지 말 거라.”
고용인들이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고, 부인! 용서하십시오!”
정말 해할 마음이 없었는데 무슨 죄를 토설한단 말인가. 심약하게 보였던 그웬 공작 부인은 남편보다 독했다. 고든이 눈물, 콧물을 옴팡 흘리며 용서를 청했다.
“정말, 정말 몰랐습니다! 부인, 흐어엉.”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하인들에게 끌려 나가는 모습을 눈 한 번 떼지 않고 지켜보던 그녀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내게 성분이 불분명한 음식이 전달된 까닭이 무엇이냐.”
선물 검수를 맡고 있는 하인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감히 그웬 공작 부인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이 선물로 들어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콕스는 하인들의 안일한 일 처리에 분노했다. 그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의 죄라며 무릎을 꿇었다. 총괄 집사가 무릎을 꿇자 모든 고용인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앞으로 외부에서 들여온 것들은 모두 철저히 검수하여라. 나나 각하께 들어오는 선물 또한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대로 발신인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진저는 그녀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품위나 교양을 제외하면 공주답지 않게 유약하다고 여겼는데 이런 문제에 있어선 제법 왕족다운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일과 관련된 자들을 징계하고 반년간 급료를 절반으로 삭감했다.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상냥하게만 봤던 마님의 뚝심에 놀라워했다.
이 일로 가장 마음이 상한 건 엘리사였다. 란델이나 그란디아에도 속설이 있는 음식들은 있었다. 가령 모월 모일에 해바라기 씨가 들어간 케이크를 먹으면 예쁜 딸을 낳을 수 있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고든이 보낸 사탕도 그런 의미겠거니 생각했다. 자신이 안일했다.
내저의 일을 마무리한 엘리사는 보던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남편의 집무실에 올라왔다. 진저는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펜을 놓고 아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방해가 되었나요?”
“아니.”
그녀의 손에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그건 뭐지?”
“아, 검수 책임자의 사직서예요.”
오늘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투성이였다.
“당신이 받겠다고 한 건가?”
“그건 아니지만 사직서를 물리진 않았어요.”
검수 책임자는 아이가 줄줄이 있는 가장이었다. 며칠 전 막내딸의 생일이라 엘리사가 구두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 자의 고용을 해지하게 된 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사직서를 받지 않을 순 없었다. 추천장도 써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고용 계약이 해지되면 집사는 안주인의 허가를 얻어 추천서를 작성해 주는데, 추천서가 없으면 아무리 귀족가에서 일했다고 하더라도 이전보다 좋은 직장을 찾을 순 없었다.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게 되면 고용인들은 분명 이쯤은 넘어가 준다고 생각하여 마음가짐이 해이해질 것이다. 게다가 다른 일도 아니고 가주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어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저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흔들렸을 터였다.
아내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난 괜찮으니 당신 원하는 대로 해.”
“네?”
“그렇게 힘들어할 거면 그냥 두어도 된다는 소리야.”
“이건 제가 감당할 몫이에요.”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웬 공작 부인으로 살기로 했어요. 살며 마음 아픈 일은 언제든 일어날 테죠. 그러니 익숙해져야 해요.”
정에 약해서, 마음이 아파서 이런 문제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끝도 없었다. 지금보다 더한 일이 생겨 가슴이 찢어져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아픈 일이 생겨도 의연히 내저를 다스려야 했다.
아내의 색다른 모습에 좋았던 기분이 그녀의 눈을 보자 가라앉았다.
여성을 차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에겐 남성, 여성을 떠나 크게 의미를 두는 자가 없었으므로 남성이 더 대단하니, 여성이 더 대단하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내의 몸으로 살면서도 불편했을 뿐이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가슴속에서 이는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밤낮으로 내저의 일에 몰두하는 그녀가 유난하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대단하다거나 고맙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비틀거리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저러다 언젠가 쓰러지고 말지. 이렇게까지 열성을 다할 필요는 없잖아. 앞으로 평생 그웬 공작 부인으로 살아갈 테니 천천히 배우면 될 텐데.
아예 마음가짐이 달랐다. 진저는 그녀의 남편이 되기 위해 마음을 다잡거나 남편으로서 제 몫을 다하기 위해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대단하군.”
“네?”
“당신 말이야.”
그가 타인에게 존경심이 생긴 건 평생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내심 대단하다 여겨도 입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내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네?”
“고맙다는 말이야.”
고맙다는 말을 하는 수는 칭찬보다 많기는 했다. 아무리 막돼먹은 인사라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입 발린 말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건 불가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입 발린 말에 진심이 섞이진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감사를 표한 사람은 그의 스승인 트리거 공작을 제외하면 그녀가 유일했다.
아내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골리는 것 아니니 고민하지 마.”
“그게 아니라…… 당연한 걸 고마워하시니까…….”
개죽음은 당하고 싶지 않아서 가문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혼이 나갈 정도로 노력을 다한 적은 있었지만, 머리가 굵은 이후로는 요령이 좋아져 어릴 적만큼 고생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아내는 다 자란 후에도 성실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라고 의문이 들 정도로 요령이 없었다.
“내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오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란 것만 알아둬.”
어쩐지 민망해서 생색을 냈는데 아내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제가…… 당신에게 특별한가요?”
“뭐?”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이번에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진저였다. 당최 의미를 모르겠다. 그의 아내인 것만으로도 그녀는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미 충분히 특별해.”
푸른 눈에 실망감이 어렸다.
그때, 진저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절 사랑하세요?」
마치 사랑해 달라 애원하는 것 같았던 목소리.
진저의 눈이 굳어졌다.
그를 보는 그녀의 눈이 처음과 다르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아내는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홀로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감당하는 게 싫어서 제가 스스로 기댈 곳을 내어주었다. 그래서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자신을 보는 아내가 ‘여자의 표정’을 하고 있었던가.
과거를 되짚어보던 그는 그녀가 이러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 때가 이유 없이 자신을 피했던 그때라는 걸 깨달았다.
“나가 볼게요.”
붉은 눈동자가 잔뜩 실망한 채로 방을 나가는 엘리사를 좇았다.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놈…….”
사생아로 태어나 사지를 전전했다. 당연하게도 육감이 남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암살자의 칼날을 피했고, 지금껏 살아남아 작위를 계승했다.
물론 감정에 둔한 건 인정했다. 이성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알 필요조차 없었다. ‘그 일’을 겪은 뒤로는 더 철저히 인생에서 여자를 배제했다.
그래서였을까.
진저가 픽 실소했다.
남보다 뛰어난 육감이 제 인생에 도움 되지 않을 아내의 감정을 인지하려 들지 않았다.
곤란했다. 아내에게 금은보화를 안겨 줄 순 있어도 그녀가 원하는 감정만은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덮고 넘어가기로 했다. 감정이란 놈은 사람을 쉬이 지치게 만들었다. 보답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다 확실히 깨닫는다면 그녀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