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불청객 (8/31)

    7장 불청객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은 트리거 공작의 장남인 길리안이었다.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이르게 도착한 그는 남의 저택 소거실에 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하녀들이 기둥 뒤에 다닥다닥 붙어 길리안을 훔쳐보고 있는 꼴은 어려서부터 본 광경이었다.

    진저는 그랬지만 엘리사는 달랐다. 그녀는 콕스에게 하녀들을 단속시키라 이르고 드레스 매무새를 만졌다. 남편은 한발 앞서가 손님과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트리거저로 꺼져’ 등의 야박한 말과는 달리 남편의 표정은 평소보다 풀어져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길리안 트리거가 막연한 사이라는 콕스의 말을 떠올렸다.

    길리안 트리거는 남편의 지기인 데다 엘리사가 공작 부인이 된 후 정식으로 맞이하는 첫 손님이었다. 과거에 만났던 어떤 상대보다 그녀를 긴장시켰다.

    걸어오는 엘리사를 발견한 길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먼저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엘리사 또한 고개를 숙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길리안 트리거입니다.”

    “엘리사 그웬입니다. 결혼식 때 뵙고 처음인가요?”

    남편과 막역한 사이라면 분명 식장을 찾을 거로 생각했다. 길리안은 난처한 듯 잠시 진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식장에 오지 않았어.”

    “네?”

    “중증의 방랑벽이 있거든. 내 결혼식이라고 여행을 중단할 놈이 아니야.”

    엘리사가 당황하여 입을 가렸다. 길리안은 무안해하는 엘리사를 위해 부러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미인이신 줄 알았더라면 달려서라도 갔을 텐데 아쉽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식장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게 당연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과의 의미로 다시 고개를 숙인 그녀는 남편에게 손님의 식사를 준비할지 물었다. 점심때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남편과 그녀는 이미 식사를 마친 후였다. 하지만 란델에선 손님이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함께 수저를 들어주는 것이 예의였다.

    길리안은 엘리사가 진저와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그녀를 훑어보았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아들의 여행지에 자주 편지를 부쳤는데, 저번 달에 도착한 편지엔 새로운 그웬 공작 부인을 만났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그녀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말수가 적지만 훌륭한 센스를 지녀서 이후 사교 활동이 기대된다고 하였다. 란델의 여성들과는 다른 타입의 미인이라는 말도 함께였다.

    길리안은 사람 보는 눈이 있는 편이었다. 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통찰력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식사는?”

    진저가 물었다.

    “오는 길에 간단히. 차면 돼.”

    “짐부터 풀고 와라.”

    “신혼집에 오래 머무를 수야 없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것부터 충분히 무례하니까 며칠 쉬고 가라. 모의 전투 때문에 온 거잖아.”

    모의 전투가 아니었더라면 엉덩이를 차서라도 돌려보냈을 것이다.

    길리안은 진저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엘리사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부인?”

    “그럼요. 손님방을 치워놓았어요.”

    길리안은 엘리사가 진저에게 딱 맞는 아내라고 생각했다. 저밖에 모르는 지기에겐 이런 순종적인 신부가 어울렸다. 말수가 적으니 진저와 부딪칠 일도 적을 터였다.

    처음 보는 지기의 처는 말간 눈을 하고 있었다. 때가 묻지 않은 데다 철저히 예의를 지켰다.

    다만 한 가지. 사교 활동은 우려가 되었다. 그란디아는 어떤지 몰라도 란델의 사교계는 강약약강의 세계였다. 아무리 공작 부인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약자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모친이 그녀의 어떤 면을 보고 사교 활동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제가 보는 그녀는 사자라기보다는 토끼에 가까웠다.

    “제가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엘리사가 눈꼬리를 접었다.

    “미리 도착 날짜를 언질해 주셨더라면 조금 더 편했을 거예요.”

    길리안은 그녀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순한 줄만 알았는데 의외의 면도 있었다. 할 말은 하는 야무진 여자인가.

    진저는 그런 그녀가 기특한지 픽, 실소를 흘렸다. 겉으로는 이렇게 얌전해 보일 수 없는 사람이지만 알면 알수록 이런 강적이 따로 없었다. 그녀로 인해 몇 번이나 기막혔던가.

    길리안의 눈동자에 잠시 당황스러운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다음부턴 꼭 언질을 드리겠다며 굽실거리는 체하였다.

    다과를 준비시키겠다며 엘리사가 떠나자 소거실엔 지기 둘만이 남게 되었다. 잘 지냈냐고 묻는 이는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거지. 길리안은 맨몸뚱이로도 능히 잘 살 사내였고, 진저 또한 성질머리가 괴팍해서 그렇지 능력 없는 사내는 아니었다.

    “이번 모의 전투엔 네가 선봉에 서는 거냐.”

    “아버님이 어디 그렇게 두실 분이던가. 난 언제나처럼 들러리지.”

    “수도의 화살이 씨가 마르게 사들인다던데.”

    “촉 없는 화살이라고는 못 들었나? 해전 훈련용이겠지.”

    ‘능구렁이 자식.’

    ‘전략을 술술 부는 멍청이가 어디 있냐.’

    두 사내의 시선에서 불이 튀었다. 진저와 길리안, 그리고 포르테가의 장남인 게일은 또래다 보니 많은 부분에서 비교를 당했다.

    게일 포르테는 진저라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대거리를 벌이려 들었다. 사실 진저는 그가 까불지만 않으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진저가 인정하는 상대는 길리안이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트리거 공작 밑에서 함께 수업을 받았는데, 그 덕에 자주 검을 겨루었고 커서는 가문의 일로 부딪칠 때가 있었다.

    서로를 견제하는 건 수많은 이점을 불러왔지만 단점도 있었다. 함께 있을 때면 평소의 나이답지 않게 유치해졌다. 특히 사담을 나누는 자리는 더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화살은 뭣 때문에 사들인 거냐’, ‘해전 훈련이라고 하지 않았냐’, ‘궁수전을 벌일 셈인 거냐’, ‘내가 아버지 속을 어떻게 아냐 너야말로 기병 훈련을 하는 이유가 뭐냐’ 등 신경전을 벌였다.

    그들의 대화가 멎은 건 다과 준비를 마친 엘리사가 다시 소거실로 들어왔을 때였다. 남편의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작은 약통을 들고 있었다.

    진저가 물었다.

    “다쳤나?”

    “제가 아니라 손님께서 다치셨어요.”

    제게 화제가 돌아오자 길리안이 손을 내둘렀다.

    “아닙니다.”

    “일어나실 때 불편해하시던걸요.”

    진저가 길리안의 다리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하의 밑단이 부풀어 있었다. 진저는 또 무슨 여우 짓을 하다 다쳤냐며 그를 타박했다. 길리안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찰나에 이걸 보았단 말인가. 그웬가의 새 안주인은 저보다 눈치가 빠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닥터가 자리를 비워서 약만 가져왔는데 괜찮을까요?”

    “약이면 됐습니다. 법석을 부릴 정도로 심한 상처는 아니니까요.”

    “집사에게 실내화를 가져오라 일렀어요. 구두보다는 편하실 거예요.”

    진저는 제 지기를 배려하는 아내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길리안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진저 그웬이 이런 눈빛을 하다니. 다른 놈들이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진저와 어울리는 무리엔 길리안 말고도 셋이 더 있었는데 마탑에서 수행 중인 리한, 중앙 기사단의 카발디, 그리고 왕궁의 행정관인 요셉이었다. 그들 모두 귀족 자제의 정신 교육장인 ‘에켈’에서 만난 사이였다.

    리한은 감정이 부족해 주변 사람의 복장을 터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카발디는 분노 조절 장애여서 부모조차 학을 뗐으며, 요셉은 아카데미에서 커닝 페이퍼를 만들어 팔다 걸렸다.

    진저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릴 때부터 성질머리 더러운 거로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길리안은 진저가 에켈에 갇히게 되자 재미있겠다며 따라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소년들은 장성한 뒤로도 서로를 가장 친하다고 여겼다. 진저가 가장 먼저 작위를 이어 자리를 잡은 뒤엔 만나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두세 달에 한 번은 꼭 얼굴을 보았다.

    그런 친구들에게 진저는 식을 일주일 앞두고서야 결혼 소식을 전했다.

    괄괄한 카발디는 분통을 터뜨렸고, 요셉은 이를 갈았다. 예나 지금이나 감정이 부족한 리한조차 ‘개새끼……’라고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소식을 가장 늦게 접한 건 길리안이었다. 여행 중이었던 길리안은 결혼식 이틀 후에야 불알친구가 기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체 어떤 여자일까 궁금했는데 제법, 아니, 몹시 괜찮은 여자였다.

    사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리사는 십여 분쯤 지나 편히 말씀 나누시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한 달도 못 살고 이혼할 줄 알았는데 별 소식이 없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다.”

    진저가 개소리를 한다며 핀잔을 주었다.

    “다 공작 부인 덕이었군.”

    “칭찬은 좀 제대로 하던가.”

    “입꼬리는 왜 올려? 네 칭찬한 거 아냐, 임마.”

    지기에게 듣는 아내의 칭찬은 듣기 좋았다. 이상하게 어깨가 올라가는 기분이라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길리안은 팔불출이 다 되었다며 놀렸지만 그는 쉽게 인정했다. 형제자매 자랑하는 놈들의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다.

    제 방에 올라가던 엘리사는 수업 준비를 위해 서재를 찾던 중인 라골과 마주쳤다. 양손에 가득 들린 자료를 본 그녀는 항상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루펠라 아가씨께서 오셨다던데 들으셨습니까.”

    “네. 인사만 하고 연무장으로 가더군요.”

    라골은 오늘도 루펠라에게 붙잡혔을 하우벡을 안타깝게 여겼다. 진저에게 모의 전투를 안 하겠다며 난리를 피우던 그녀를 달래기 위해 꺼낸 카드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괴롭히게 될 줄은 몰랐을 터였다.

    어제만 해도 하우벡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은 꼭 그레닉 경이 계신 곳을 듣겠다고 하셨어요. 늦어질 수도 있으니 기다리지 말라고 하던걸요.”

    루펠라가 확인을 위해 하우벡이 가르쳐 준 곳으로 사람을 보냈을 때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다른 곳으로 파견을 갔다는데 어딘지 아는 자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라골에게까지 혹시 들은 게 없냐며 매달렸다.

    “하우벡 경만 곤란하게 되었죠.”

    “모두 고생이 많네요.”

    “알아주셔서 기쁩니다.”

    엘리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기왕 마주친 김에 수업을 빨리 끝내버리기로 했다.

    손님이 오셨으니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았다. 저녁 전에 부지런히 수업을 받고 남은 시간 동안은 손님이 계실 동안 내올 메뉴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라골의 수업은 점점 더 다양해졌다. 문화뿐만이 아니라 엘리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 오늘 수업에선 엘리사가 알아야 할 각계 주요 인사들을 알려주었다. 트리거가의 가계도를 보던 엘리사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트리거 영애의 초상화는 없네요.”

    다른 공, 백작가의 가계도에는 인물마다 마법으로 실사화한 그림이 딸려 있었다. 트리거가의 가계도도 마찬가지였다. 트리거 영애만 제외한다면.

    라골의 말이 잠시 멎었다.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십니다.”

    트리거 영애의 신상 내역을 읽어보던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왕자비 내정자?”

    란델의 유일한 적장자인 헨젤 왕자의 약혼녀라면 왕비가 될 여성이란 말이었다. 어느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인데 어째서…….

    서류를 내려놓은 엘리사가 라골을 빤히 응시했다.

    라골이 이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두 번째예요.”

    “예?”

    “세 번째엔 묻겠어요.”

    라골은 영리한 자였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챈 그가 고개를 조아렸다. 삼 주 전 대화에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번까지는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가 주겠지만 다음은 없다는 뜻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한담 한 마디 없이 수업이 진행되었다.

    “포르테 백작 부인은 주변에 휩쓸리는 성격이므로 마님께서 어울리기 적합한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수도 사교계의 핵심 인물인 것만은 맞습니다. 부군 되시는 포르테 백작이 공작가의 장남인 데다 친정 쪽도 권세가지요.”

    “그렇군요.”

    라골은 자료를 유심히 살피는 그녀를 흘끔,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그녀가 화를 낼 만한 일이었다. 내저를 관리하고 그웬가를 위해 사교 활동을 해야 하는 그녀는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의 교사인 그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문제였다. 그녀가 별말을 하지 않는 게 자신을 믿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겸연쩍었다.

    한담 한 마디 오가지 않는 수업은 일찍 파했다. 라골은 수업 내내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조금 더 자료를 살피고 싶었지만, 괜히 더 신경 쓰이게 할까 봐 필사본을 보내달라는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다.

    서재를 나선 엘리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녀로서는 할 말을 한 거지만 라골 입장에선 곤란한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라골은 그녀에게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었다. 무리한 부탁에도 성실하게 임해 주었다.

    좋은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건 언제나 힘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제 머리와 어깨에 닿는 손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진저가 인상을 쓴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았으면서 재차 캐물었다. 저로 인해 라골이 더 곤란해지는 게 싫었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피곤해서.”

    진저가 머릿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달거리 때가 되었나.”

    화들짝 놀란 엘리사가 그의 입을 막고 주변을 살폈다. 아내의 달거리까지 살피는 남편은 없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엘리사가 손을 내리고 새초롬히 그를 흘겼다.

    “맞잖아. 당신은 항상 25일마다…….”

    “제발요, 여보!”

    울상이 된 엘리사가 소리쳤다. 몸이 바뀌었던 탓에 남편은 제 달거리 일정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 저번엔 하도 놀려서 평소보다 과하게 화를 냈더니 ‘이틀째인가?’ 하고 물었다. 정확해도 이렇게 정확할 수 없었다.

    “길리안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어떻게 그래요. 제겐 첫 손님인걸요.”

    “당신 몸이 우선이야.”

    “그렇게 안 힘든데…….”

    “힘들어.”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자신이 직접 겪지 않았으면 믿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생리의 고통을 겪어본 남자였다. 쉴 새 없이 흐르는 피는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하루 종일 허리가 아프고 이따금 두통이 생기기도 하며 몹시 예민해졌다.

    연약한 아내의 몸이 그 대단한 달거리를 이제까지 견뎌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어, 어쨌든 달거리 때문에 지친 건 아니에요. 그보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손님 입맛에 맞는 메뉴로 내오라고 할게요.”

    “멋대로 왔으니 흙을 퍼줘도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야지.”

    “그게 뭐예요.”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저는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온 것이 반가웠다. 그의 손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무슨 일 있으면 말해. 그리고 메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렸다. 집사 콕스의 수다가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문어로 해.”

    “그건 저도 좋아해요.”

    그야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말한 거니까. 진저가 웃음을 삼켰다.

    엘리사는 기뻐했다.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란델과 그란디아의 식문화가 달라 괴로울 때가 있었다.

    란델은 그란디아보다 간이 센 편이었다. 평생 저염식을 해서 그런지 란델에 온 후로는 자주 속이 아팠다. 집사가 눈치를 채고 주방장에게 주의를 주기 전까지는 배탈 약을 달고 살 정도였다.

    혹시 따로 조리하기 힘든 메뉴를 원할까 봐 걱정되었는데 다행이었다.

    진저와 짧은 대화를 마친 엘리사는 주방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루펠라와 마주친 그녀는 함께 식사를 하겠느냐 물었다. 처음엔 제2저로 돌아가서 먹겠다던 그녀가 손님이 길리안이라는 말에 말을 바꿨다.

    “오늘은 자고 갈게요.”

    “내일 일정이 있다지 않았어요?”

    “그렇긴 한데……. 됐어요, 준비할 건 본저로 가져오라고 하면 되니까. 참, 언니 시간 되면 함께 쇼핑하러 나갈래요? 곧 계절이 바뀌니까 신상품이 나왔을 거예요.”

    함께 속옷을 사러 가기로 했을 때는 몸이 바뀌어서 남편이 대신 가주었다. 그녀가 직접 루펠라와 외출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기대되네요.”

    엘리사와 루펠라는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수다를 즐겼다.

    하우벡은 어떻게 알았는지 연무장에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어 부단장인 마크빌 경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엘리사는 궁금했다. 대체 그레닉은 어떤 사내기에 루펠라가 이렇게까지 찾으려 애를 쓰는 걸까. 그레닉 경에 관해 물어도 괜찮냐는 엘리사의 말에 루펠라가 반색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루펠라와 그레닉은 신분의 벽이 너무나 높았다. 루펠라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있어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사와 같은 반응은 처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본 사이예요. 아버님과 어머님은 일반적인 부부와는 거리가 멀었어요. 그래서 오빠도 나도 방치되다시피 컸죠.”

    “그랬군요.”

    “난 오빠가 정말 싫었어요.”

    “왜요?”

    “유모가 나보다 오빠를 더 많이 신경 썼거든요. 난 어머니의 관심을 받을 수 없었던 것뿐이지만 오빠는 달랐거든요. 어머님은 오빠를…….”

    루펠라가 말을 흐렸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법이 없던 그녀에게도 ‘진저를 보는 선대 공작 부인의 눈빛은 혐오 일색이었다’는 말은 어려웠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챈 엘리사가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 또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레이라 부인의 딸인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는 엘리사가 그웬 공작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을 격렬하게 질투했다. 그래서 그의 소문을 늘어놓으며 겁을 주었다.

    물론 그들의 말에 진정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그저 결혼 생활이 쉽지는 않겠구나 하며 마음을 잡을 뿐이었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소문들이 이젠 그녀를 아프게 했다.

    엘리사는 타인의 악의가 얼마나 아픈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작은 진저를 안아주고 싶었다. 아이의 등을 어루만지며 너는 소중하다며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유모에겐 나보다 오빠가 조금 더 아픈 손가락이었겠죠. 아이들은 다 이기적이잖아요? 나는 유모밖에 없는데 유모는 오빠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죠. 그래서 정이 아주 고픈 상태였어요. 그때, 그 사람을 만난 거예요. 다정다감하고 상냥하고 멋지고. 어떻게 안 반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루펠라는 아주 예뻤다.

    “지금도 이기적이라는 거 알아요. 그 사람은 나 때문에 괴롭겠죠. 그런데요, 언니. 나는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돼요. 진정으로 원하는 건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부모의 사랑도 그랬고, 완전한 울타리도 없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정말 그녀가 아니라면, 그녀는 죽어도 안 된다면 놓아줘야겠지만 노력은 할 수 있었다. 자존심이 바닥을 쳐도, 그의 거절에 수없이 상처 입어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었다.

    “내가 이상한가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

    엘리사의 말에 루펠라가 힘없이 웃었다.

    “하지만 나는 루펠라가 예뻐요.”

    “…….”

    “그러니까 루펠라의 용기를 응원할래요.”

    그녀의 사랑은 한 번도 응원받지 못했다. 모두 손가락질했고 그녀를 헐뜯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지지받을 수 있다는 건 이렇게 큰 충만함을 주는구나. 루펠라는 계속 이 이야기를 하다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쇼핑 말인데요. 내일 오전은 어때요?”

    “시간 괜찮아요?”

    “네. 파티는 해가 진 후에 시작하거든요.”

    “하지만 손님이 계셔서…….”

    “길리안은 신경 쓰지 말아요. 근데 길리안에게 무슨 말 못 들었어요?”

    루펠라는 긴장된 표정으로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인사 외엔 딱히……. 각하와 말씀 나누는 것만 보고 자리를 비켜 드렸거든요.”

    루펠라가 엘리사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쓸데없는 말을 할 사람은 아니지. 말해봤자 흠밖에 더 되겠는가.

    엘리사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뜨자 루펠라는 별것 아니라면서 손을 내저었다.

    “여우예요. 겉으로는 사람 좋아 보이는데 굉장히 약았어요.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화를 하는 데엔 선수니까 무슨 말을 하든 한 귀로 흘려버려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걱정은 어쩔 수 없어서 새언니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다른 문제도 걸렸지만 엘리사가 상처 입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루펠라는 길리안처럼 겉과 속이 다른 타입은 질색이었다. 청소년기의 기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일까. 그녀는 늘 길리안이 께름칙했다. 반면에 새언니는 얼마나 좋은가. 사람이 진실 될뿐더러 상냥하기까지 했다.

    한참 수다를 나누던 그녀들은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하녀의 말에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진저와 길리안도 식당에 도착했다.

    진저는 친동기간 같은 그녀들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저들을 시누올케라고 생각하겠는가.

    길리안이 반가운 표정으로 루펠라에게 말을 붙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와 다르게 루펠라는 냉랭했다.

    “싫은 얼굴을 봤는데 좋을 리가 있어요?”

    “섭섭한데. 옛날엔 잘 지냈잖아, 우리.”

    “열 길 물속보다 한 길 사람 속이 시커먼 걸 몰랐을 때의 일이죠.”

    엘리사는 당황하여 눈치를 보았지만 진저는 익숙한 일인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 루펠라는 길리안에게 털을 곤두세웠다. 당사자보다 더 분노한 그녀는 길리안의 이름만 나와도 치를 떨었다. 길리안은 그렇게 냉대를 당하면서도 루펠라에게 말 붙이길 포기하지 않았다.

    “전엔 결혼하자면서 쫓아다니더니. 어때, 지금은? 결혼할까?”

    “상담받아 봐요. 분명히 미쳤을 테니까.”

    대화의 수위가 높아지자 진저가 나섰다.

    “그만하고 식사나 하지.”

    루펠라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싫어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길리안의 아무렇지 않은 반응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는 끊임없이 루펠라에게 말을 걸었다.

    결국 루펠라는 식기를 던지듯 내려놓고 식당을 나섰다. 그렇게 손님과의 첫 식사는 최악의 마무리를 지었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엘리사가 보아온 루펠라는 이렇게까지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돌하긴 했다. 진저나 그웬가의 사람들처럼 격의 없는 사이라면 몰라도 타인에겐 달랐다.

    오늘은 진저도 단단히 화가 나 루펠라를 다그쳤다. 남매 사이에 한차례 고성이 오갔다.

    “그런 일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저택을 찾는 게 웃기잖아!”

    “그런 일이 뭔데.”

    말문이 막힌 루펠라는 제 오빠를 노려보았다.

    “당사자도 입 다물고 있는 일이야. 네가 뭐라고 나서.”

    엘리사와 대화를 나눌 때도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속상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부정해도 그 사람의 일이 덮이진 않아.’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등을 돌렸다.

    진저의 방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엘리사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엔 피곤이 역력했다. 괜찮냐고 묻고 싶었는데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저는 말없이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기죽은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고 있어서 돌려보낼 수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손을 뻗어 아내를 끌어안았다. 다른 때라면 어쩔 줄 몰라 하며 꼼지락거렸을 텐데 남편의 기분을 풀어준다고 미동도 없었다.

    “괜찮으세요?”

    “별로.”

    “왜 그러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길리안이 뭘 좀 숨겼어. 절대 손닿을 수 없는 곳으로.”

    ‘누구에게서요?’

    궁금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남편은 충분히 피곤했다. 엘리사는 이만 들어가 보시라는 말과 함께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남편은 손을 풀어주기는커녕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이 여자는 이상했다. 다른 아군들과는 분류부터 다르기 때문일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진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귓가에 남편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러다 심장이 터질지도 몰라.’

    하지만 모질게 떼어낼 순 없었다. 남편의 모습에 상상 속에 존재하는 꼬마 진저가 겹쳐졌다. 그녀는 천천히 남편의 등에 손을 올렸다.

    * * *

    날이 밝았다. 엘리사는 아침부터 루펠라의 방문 앞을 서성였다. 콕스가 루펠라의 기상 시간은 멀었다며 그녀를 돌려보내도 십 분도 되지 않아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왔다.

    세 번째로 돌아왔을 때였다. 드디어 루펠라의 방문이 열리더니 눈이 퉁퉁 부은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머리는 산발이 되어서는 파자마도 반쯤 흘러내렸다.

    “거슬렸다면 미안해요. 나중에 올게요.”

    “이미 일어난걸요. 들어와요.”

    루펠라가 하품을 하며 문 안쪽으로 한 발자국 이동했다.

    루펠라의 방은 주인 내외의 방과 달리 작았다. 안쪽에 욕실과 작은 드레스룸이 있었지만 응접실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소거실을 자주 찾았구나.

    엘리사는 방을 둘러보며 침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사이 루펠라는 호출 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대와 귀마개를 든 하녀가 나타났다. 루펠라의 기상 시간은 여타 귀족들에 비해 한참 늦었는데, 이른 시간에 호출을 하는 건 ‘빛이 거슬려’ 혹은 ‘시끄러워 죽겠어!’ 등의 용무였다.

    “세숫물을 가져와. 세안제는 저번에 가져온 걸로.”

    “예, 아가씨.”

    루펠라는 침대 헤드에 기대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세숫물을 기다리며 꾸벅꾸벅 조는 동안 엘리사는 그녀의 방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창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침잠이 많은 루펠라에겐 적절한 방이 아니었다. 그녀는 본저를 떠나기 전에도 이 방을 썼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남쪽 복도는 손님방만 있는 곳이었다. 왜 하필 여기서 지내는 걸까.

    그녀는 오래지 않아 까닭을 알아차렸다. 창문 밖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이 보였다.

    ‘참, 그쪽은 연무장이 있는 곳이지’

    그레닉 경을 멀리서라도 보고 싶어 불편한 방을 택한 거구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하녀가 세숫물과 세안제 등이 든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침대에서 일어난 루펠라가 비척비척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뭘 보는 거예요?”

    “기사들이요. 아침 훈련이 끝났나 보네요.”

    “나 없을 땐 들어와서 구경해요.”

    “아, 아니에요!”

    “아니긴. 슬쩍 웃는 거 다 봤어요.”

    “안 웃었어요…….”

    엘리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루펠라는 세수를 하면서도 킥킥거렸다. 오빠가 왜 새언니를 놀리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반응이 귀여웠다.

    놀림을 받은 건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제보다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세수로 잠을 몰아낸 루펠라가 쭉 기지개를 켰다.

    새언니가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까닭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별말 없이 들어오라고 한 것이었다.

    나쁜 건 길리안인데 새언니가 제 눈치를 보는 게 마음이 쓰였다. 자신을 살피느라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다.

    “아침은요?”

    “속이 더부룩해서요.”

    “나도 아침은 안 먹는데. 잠이 원체 많다 보니 늘 걸렀거든요. 버릇이 됐어요.”

    엘리사는 굳이 기분이 나아졌느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루펠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여느 때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색함에 말이 끊기지도 않았고 평소보다 화제도 다양했다.

    루펠라는 제가 쓰는 세안제를 추천했다.

    “매혹이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건데 요새 유행하고 있어요. 향기가 좋아서 한번 속아 보자 하고 샀어요. 생각보다 꽤 괜찮더라고요.”

    엘리사는 유행을 잘 몰랐다. 란델에 온 지 얼마 안 됐기도 했지만 그란디아에서도 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충 잡히는 대로 입었고 꾸미는 법 같은 것도 결혼을 한 뒤에야 조금씩 알아갔다.

    하녀들 몇에게서 ‘매혹’의 이야기는 들었던 기억이 났다. 젊은 여성들에게서 유행하는 화장품 브랜드였다.

    향기를 맡아보니 과연 엘리사의 비누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녀가 쓰는 건 고급 비누이긴 했지만, 남편도 같은 것을 쓸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다.

    과일류 특유의 새큼한 향이 주를 이루지만 언뜻 우유 냄새처럼 묵직한 향기도 풍겼다.

    “향이 오래 남아서 향수 대신 쓰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참, 몇 가지 받아온 게 있는데.”

    잠시 기다려 보라던 루펠라가 드레스룸으로 쏙 들어가더니 종이봉투 몇 개를 꺼내왔다. 세안제를 사면서 함께 받아온 샘플이었다.

    샘플의 향기를 맡던 엘리사가 그중 하나에 흥미를 보였다.

    “향기가 너무 좋아요.”

    “이거요? 언니 취향 참 독특…… 하네요.”

    웬만해서는 이런 향 좋아하기 힘든데. 루펠라가 픽 웃으며 오늘 본품을 사러 가자고 했다. 엘리사는 몹시 기뻐했다. 매일 이 향기 속에 있으면 지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루펠라는 세 시간 뒤에 상점가 앞에서 보자고 말한 뒤 제 저택으로 떠났다. 미리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해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택에 도착한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과 마주해야 했다. 외숙인 카르트 후작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학이라 란델에 돌아온 줄 알았더니 교수를 협박했던 거냐며 한바탕 잔소리를 시작했다. 누가 보면 조카 사랑이 지극한 줄 알 테지만 속셈이 있었다. 루펠라도 그걸 모르지 않아서 잠자코 잔소리를 들어주었다.

    ‘정신 상태 운운하며 카르트령에 데려가려는 거겠지.’

    진저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구슬리려던 것이었다.

    잔소리가 두 시간을 넘어가자 슬슬 엘리사가 걱정되었다. 벌써 나왔으려나. 카르트 후작의 잔소리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 * *

    루펠라에게서 전달된 편지를 받은 콕스는 부리나케 진저를 찾았다.

    “주, 주인님!”

    “무슨 일이냐.”

    “읽어보셔야겠습니다.”

    발신인의 이름을 본 진저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루펠라의 편지를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편지를 읽는 진저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요약하면 ‘급한 일이 생겨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는데 엘리사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상점가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마부와 떨어져 홀로 상점가에 들어갔다고 한다. 걱정이 되니 사람을 보내 찾아봐라’였다.

    “요새 상점가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

    “무뢰배들이 귀족 아가씨를 납치해 돈을 뜯어낸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시 괴담일 뿐이었다. 상점가는 구금소와 가까이 있는 데다 왕궁 경비병이나 기사들이 흔히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귀족 영애를 납치할 수 있는 자는 돈을 주고서라도 고용하는 게 마땅했다. 그만한 실력자라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이성보다 아내 걱정이 먼저였다. 그는 가문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행사인 모의 전투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방을 나섰다. 콕스가 그를 뒤따랐다.

    “매혹이라는 곳에서 세안제를 산다고 하셨습니다.”

    “매혹?”

    “유명한 화장품 숍입니다. 기다려 주시면 약도를…… 주인님!”

    콕스의 목소리를 무시한 그는 서둘러 내저를 나섰다. 마구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종내엔 뜀박질이 되었다. 마차도 아니고 말에 올라탄 진저는 말을 몰아 저택을 벗어났다.

    마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를 30분 만에 도착한 진저는 지나가는 여성의 팔을 붙잡았다.

    “매혹이 어디지?”

    무례에 화를 내려던 여자는 진저의 얼굴을 보더니 홀린 듯 눈을 깜빡였다.

    “어디냐고!”

    허락도 없이 레이디를 붙든 무례는 탓할 수도 없게 만드는 살벌한 목소리였다. 겁에 질린 여자가 떠듬떠듬 위치를 설명했다.

    그는 숨도 고르지 못하고 매혹을 찾아 달렸다. 눈앞에 ‘매혹’이라 쓰인 커다란 간판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인파 속에서 불안한 듯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각하?”

    “하.”

    훈련을 제외하곤 여름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그를 땀범벅으로 만든 여자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여긴 어떻게…….”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네?”

    “기사들이 왜 있는지 몰라?!”

    진저의 고함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부부를 구경했다. 엘리사는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루펠라와 쇼핑을 나온 것뿐이었다. 사람이 많아서 도행에 방해가 될까 봐 일부러 수행인을 데려오지 않았다.

    “음, 가문을 지키기 위해……?”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미안하다’, ‘다음부턴 기사를 데리고 다니겠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니면 사람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작정한 걸까.

    남편의 굳은 얼굴을 보니 그가 원하는 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각하의 안전을 위해서인가요?”

    진저는 가까스로 화를 눌렀다.

    “내 몸은 내가 지켜.”

    “그럼 왜요?”

    “당신 지키자고.”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 같았다. 한참 대답할 말을 생각하던 엘리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 사한 일이네요.”

    맹한 얼굴을 보니 더 이상 화도 낼 수 없었다. 진저는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돌아가자.”

    “루펠라와 약속이 있어요.”

    “안 올 거야, 그 녀석.”

    남편의 옷깃을 잡은 엘리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한번 심장이 뚝 떨어졌다 돌아오니 만사가 귀찮았다. 그는 콕스에게 물어보라며 아내의 손목을 끌었다.

    “아, 잠시만요. 루펠라가 못 오는 건 아쉽지만 이왕 나왔으니 잠깐 들어갔다 나오면 안 될까요?”

    성질 같아서는 나중에 다시 들르라고 하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아내가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그깟 도시 괴담에 철렁해 말까지 몰고 달려온 꼴이 우스웠다.

    그때 진저의 시야에 ‘매혹’의 입간판이 들어왔다.

    “루펠라가 추천해 준 세안제를 사려고요. 향이 너무 좋아서.”

    “왜?”

    “그냥 향이…….”

    “그러니까 향이 좋은 세안제를 왜 쓰는 건데.”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나 싶어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진저가 그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남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입간판이 보였다.

    「남편을 유혹하는 향, SE 시리즈 출시. 힘없는 남편은 이제 안녕.」

    ‘매혹’의 SE 시리즈는 기혼의 여성을 타깃으로 한 상품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화장품 광고 문구와는 달리 ‘내 남자’라는 말보다 ‘내 남편’이라는 말을 채택했는데, 이 문구가 이상하게 엘리사의 상황과 맞물렸다.

    엘리사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저히 등을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는 얼핏 보이는 그녀의 귀가 터질 듯 붉게 부푼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 문구를 보고 상품을 구매하러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펠라의 꼬임에 넘어갔다든가, 아니면 아예 이런 상품이 있는 줄도 몰랐을 터였다.

    진저는 아내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남편을 돌아보았다.

    “들어가지.”

    “네?”

    “살 게 있다며?”

    “아, 네!”

    잔뜩 놀림을 받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남편은 광고 문구를 보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자신을 배려해 준 걸까?

    ‘설마…….’

    그녀는 바로 생각을 정정했다. 요새 그는 그녀를 놀리는 일이라면 눈이 벌겋다고 생각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파랗게, 또 빨갛게 만드는 통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진저가 먼저 숍으로 들어가고 엘리사도 그를 따랐다. 그들 부부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 중 대다수가 그웬 공작을 알고 있다는 것은 모른 채로.

    숍은 화장품에 있어서 까다로운 루펠라가 드물게 칭찬을 했을 정도로 화려함을 자랑했다.

    엘리사에겐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그녀는 걱정도 잊고 숍 안의 상품을 구경했다. 귀부인 취향에 맞춘 화려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바틀은 화장품에 관심이 없는 엘리사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매혹의 점원 나타샤는 남성과 함께 들어온 엘리사를 보고 눈을 빛냈다. 저렇게 당당히 출입할 정도면 분명 남매는 아니었다. 여성 쪽은 돈 냄새깨나 풍기는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오랜 접객 생활로 갈고닦은 그녀의 눈을 속이진 못했다.

    ‘촌스러워.’

    꾸미는 법을 모르는 여성이었다. 저런 사람들이 한번 물꼬를 트면 한도 끝도 없이 빠지는 것이다.

    ‘애인도 함께 왔겠다, 왕창 뜯어낼 수 있겠군.’

    엘리사의 곁에 다가간 나타샤는 상냥한 표정으로 그녀가 들고 있는 화장품에 대해 설명했다.

    “안목이 훌륭하십니다. 지금 들고 계신 크림은…….”

    그녀는 기존의 크림은 기름을 바르는 것처럼 갑갑하지만 이 크림은 그렇지 않다, 끈적거리지 않고 가볍게 발리며 장시간 피부를 촉촉하게 유지한다, 며칠만 써 보셔도 피부가 달라지는 게 느껴지실 거다 등의 이야기를 빠르게 늘어놓았다.

    엘리사는 멍하니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나는 크림이 아니라 세안제를 사러 왔는데…….”

    “그러셨군요. 잘 오셨습니다. 이번에 새로운 라인이 출시되었는데 굉장히 호평이에요. 한번 보시겠어요?”

    엘리사가 가져온 샘플을 꺼낼 겨를도 없이 점원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중년의 여성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곳을 요령 좋게 뚫고 지나가는 게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진저는 픽 웃으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도 상점가에서도 이만큼 큰 숍은 몇 없었다. 이런 데서 일하는 여자니 아내 혼을 쏙 빼놓을 만큼의 상술을 지닌 게 당연했다.

    그는 아내가 유심히 보고 있던 크림을 들었다. 비슷한 디자인의 상품이 여러 개 진열되어 있었다. 크림부터 시작해 립스틱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었다.

    아내의 몸으로 살며 그녀의 생활 전반을 알게 되었다. 기본적인 화장수 등은 하녀들이 준비해 주고 색조 화장이 필요할 때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직접 무언가를 산 적은 없었다. 흔한 장신구 하나 없는 것을 보고 기막혀 했었다.

    그는 곧 점원을 불러 비슷한 디자인의 화장품들을 포장하라 일렀다. 매혹은 귀부인들이 애용하는 브랜드인 만큼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다. 대단한 귀족 나리들도 가격표를 보면 인상부터 썼다.

    점원은 포장을 하면서도 가격조차 묻지 않은 채 한 라인을 전부 사들인 그를 흘끔거렸다. 점원이 포장을 하는 계산대 쪽으로 다가온 여성들이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어머? 그웬 공작 아니에요?”

    “맞아요. 웬만한 파티에는 얼굴도 비치지 않는 분이 웬일일까요?”

    “여성과 함께 온 것 같더라고요.”

    “애처가가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요.”

    귀부인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던 점원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리본을 묶다 말고 계산대를 벗어난 점원은 위층으로 향했다.

    어떻게 하면 귀족들의 돈을 갈퀴로 긁어낼 수 있을까 고심하던 매혹의 사장, 고든은 소란스러운 점원을 보고 인상을 썼다.

    “얘! 나 거품 물고 꼬꾸라지는 꼴 보고 싶니?!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일 천지인데 너까지……!”

    “돈방석이요! 돈방석이 왔어요!”

    매혹이 수도에 숍을 연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수도와 먼 곳에서 일해 왔던 터라 자작쯤 되는 나리를 왕처럼 여겼다. 그래서 수도에 온 후론 이런 소란이 자주 있었다.

    ‘배, 백작 부인이래요!’

    ‘후, 후작 영애가 왔어요.’

    ‘우리 숍 망하는 건가요? 왜 후작 부인이…….’

    이제 백작, 후작 부인쯤은 우스울 지경이었다. 저번 달엔 트라노이 공작가의 심부름꾼이 임신한 공작 부인의 배가 트지 않는 크림을 만들어 달라고 오지 않았는가.

    그는 거슬리게 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매장으로 내려가는 건 딱 두 가지의 경우 빼곤 없어. 첫째, 투자자가 왔을 때. 둘째, 4공이 직접 왔을 때. 알았으면 내려…….”

    “그러니까 왔다고요!”

    점원은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쿵쿵 내려쳤다.

    “투자자가?”

    “아니요, 그웬 공작이요!”

    “뭐?!”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걸 왜 지금 말했냐고 소리친 그는 쏜살같이 방문을 뛰쳐나갔다.

    엘리사는 열변을 토하는 점원 나타샤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세안제는 루펠라의 추천을 받은 그것 외엔 관심이 없었는데 나탸샤는 세안의 완성은 크림이라며 부르짖었다.

    그녀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책과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 배웠다. 원래 겉핥기로 아는 사람이 더 의심이 많은 법이었다.

    크림을 쓰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진 것처럼 빛이 난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 열심히 얘기하는데…….’

    장장 십 분에 달하도록 자신을 붙들고 상품을 소개하는 걸 보니 안쓰러워서라도 구매해 주고 싶었다.

    “그럼 세안제와 크림을…….”

    엘리사의 말에 점원이 반색했다.

    “향도 같은 것으로 할까요? 요새는 크림도 종류가 많아요. 목적에 맞도록 세분화해서 쓰는 게 가장…….”

    하나를 사겠다고 하면 또 하나를 더 추천했다. 얼굴에 바르는 크림뿐 아니라 입술에 바르는 크림, 발에 바르는 크림 등 총 여섯 가지나 되었다.

    아내의 표정이 점점 곤란해지자 진저가 나섰다.

    “당신이 필요한 것만 사.”

    “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모두 사도 좋고.”

    엘리사는 발이나 손에 크림을 바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집안일을 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손이 틀 일도 없었고, 손을 씻은 후엔 장미 기름을 바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엘리사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위층에서 우당탕 하는 소음이 들리더니 배불뚝이 중년 사내가 등장했다. 그는 거친 숨을 고르더니 진저를 향해 이글이글거리는 시선을 고정했다.

    적발에 적안. 점원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웬 공작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엘리사는 무슨 일인가 싶어 사내를 쳐다보았다. 진저 또한 아내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뭐야, 저 자식은.’

    외양은 사내놈이 분명한데 자신을 보는 눈빛은 여성과 같았다.

    그렇게 느끼는 데엔 패션도 한몫했다. 곱슬거리는 장발을 하나로 묶어 어깨로 늘어뜨린 것도 그렇고, 귀에 주렁주렁 달린 귀걸이도 사내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옷…… 허리 라인을 꽉 조인 레이스 셔츠는 여성의 드레스처럼 화려했다.

    게다가 저 화장은 뭐란 말인가. 쥐 잡아먹은 사람처럼 시뻘건 입술에 눈꺼풀엔 그림을 그린 듯 푸르고 붉은 것이 발라져 있었다.    고든은 황홀한 듯 뺨을 감쌌다.

    십여 년간 화장품 사업을 벌이며 미인이란 미인은 죄 만났지만 저만큼 대단한 미남은 처음이었다.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화려한 외모. 꾸준한 관리를 하는 모양인지 옷 위로 꿈틀거리는 근육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머 어머, 슬림한데도 야성미가 있네.’

    진저가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그녀의 몸을 돌렸다. 고든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얼른 사고 돌아가지.”

    “네? 아, 네.”

    엘리사도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고든의 행색 때문이 아니라 남편을 바라보는 눈이 당황스러웠다. 파티에서도 그랬지만 그녀의 앞에서 남편에 대한 호감을 저렇게 확연히 드러낸 사람은 없었다.

    “저…….”

    고든이 부부에게 말을 붙이며 다가왔다.

    “제 숍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고든의 시선은 오직 진저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엘리사는 고든의 인사에 답하지 않는 진저를 올려다보다가 그를 불렀다.

    “각하…….”

    성질 같아선 인사고 뭐고 무시하고 싶은데 아내의 이런 눈엔 약했다. 작게 혀를 찬 그가 다시 몸을 돌렸다.

    고든은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켰다. 그웬 공작이 잘생겼다는 소리는 귀에 인이 박히게 들었지만 잘생겼으면 얼마나 잘생겼나 싶어 콧방귀를 뀌었다.

    수도에 얼마나 인물이 없으면 그렇게 호들갑을 떠나 싶었는데 직접 보니 그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편하게 고디라 불러주세요.”

    엘리사는 고든의 가슴에 달린 나무 명찰을 보았다.

    “고디?”

    진저의 입에서 나오기 바랐던 애칭이 다른 여성에게 불렸다. 고든이 살짝 인상을 쓰고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웬 공작이 이 여성의 어깨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엘리사를 쳐다본 건 진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왜 이런 이상한 놈의 이름을 부르냐는 듯 오만상을 짓고 있었다.

    “아, 명찰엔 ‘고든’이라고 쓰여 있어서요.”

    고든에서 고디라니. 누가 봐도 애칭이었다. 남편이 누구의 애칭을 부르든 그녀가 관여할 바 아니었다. 책에선 사랑에 빠진 여성들은 격렬한 질투의 물보라에 휩쓸린다고 했다. 그녀는 아직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늘 이 순간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남편에게 저토록 짙은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이 애칭을 불러 달라 말하는 건 이상한 느낌이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차오르는 데다 등허리가 긴장으로 꼿꼿해졌다.

    이게 바로 질투인 걸까? 생애 최초의 질투가 남성으로 말미암아 느껴졌다는 게 묘했다.

    “이분은 공작…… 부인이십니까?”

    고든의 눈이 가늘어졌다. 외모만 본다면 미인인데 성격은 이렇다 딱 단정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제법 귀엽다는 것이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어도 오랫동안 사람 상대를 해온 고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표정에 당혹이 묻어나고 있었다. 자신이 일반적인 남성과 달라서가 아니었다.

    남편을 황홀한 듯 쳐다보는 게 못마땅한지 눈빛이 앙큼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새로운 그웬 공작 부인은 신분에 걸맞은 기품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 보였다.

    남편을 데리고 쇼핑까지 나올 정도로 사랑받는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고든은 동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의 첫사랑은 마을에서 가장 잘생긴 청년이었다. 열네댓 살이 되었을 즈음에 겪었던 열병은 그의 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청년은 동성도 홀린 제 외모에 자부심을 가졌다. 곁을 허락할 것도 아니면서 고든이 지칠 즈음엔 다정한 말 몇 마디를 건네주었다.

    소년의 순정이란 소녀와 다를 게 없었다. 고든은 가슴앓이에 몇 년을 괴로워하고서야 알았다.

    ‘나는 그에게 사랑받을 수 없구나.’

    그의 사랑은 친지들에겐 수치였고 당사자에겐 괴로움이었다. 마을 처녀 애들은 청년에게 붙어 있는 고든을 손가락질하고 싫어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 여성과 같은 눈을 하진 않았다.

    그건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내에게 호감을 표하든 이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젊을 때야 비슷한 성벽의 사내들을 울릴 정도로 예쁘장했지만, 지금은 그저 아저씨에 불과했다. 이런 아저씨가 뭐라고 저토록 귀여운 표정을 하는 걸까.

    저 아름다운 사내의 부인이라는 게 배알이 뒤틀릴 정도로 부러웠지만 이상하게 호감이 갔다.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외모나 손짓은 여성스러운데 웃음소리는 의외로 사내다웠다.

    엘리사는 껄껄 소리 높여 웃는 그를 피해 남편 가까이 몸을 움직였다. 그런 아내가 귀여운지 진저가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숍 앞에 혼자 있을 때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강아지 같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점점 더 애교스러워졌다.

    엘리사는 흐뭇한 표정의 진저가 이상한지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왜요……?”

    그는 허리를 굽혀 아내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떻게 혼자 나올 생각을 했지?”

    “네?”

    “무서워 죽겠다는 표정이잖아.”

    화들짝 놀란 엘리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람 많은 곳을 기피하는 건 사실이지만 무섭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란디아에 있을 때는 공주로서 많은 파티와 행사에 나가야 했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다른 사람 없이 홀로 나온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건 아마 남편의 보호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많은 것보다 무서운 건 그가 제 인생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미래였다.

    엘리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곳이 저택이 아니란 걸 깨닫고 순식간에 몸을 긴장시켰다.

    진저는 그녀의 변화가 의아했다. 하지만 이내 이 딱딱한 표정이 그녀의 가면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란디아에서 왔다는 건방진 여자를 만났을 때도, 결혼 직후에도, 그리고 한 달 전 그를 피했을 때도 그녀는 이러한 표정이었다.

    그가 무언가 말을 건네려 했을 때였다.

    “사이가 좋으시군요.”

    고든이었다. 그가 야살스레 웃으며 부부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어머 어머, 웬 주책이람! 너무 보기 좋으셔서요.”

    그는 호들갑을 떨며 찰싹찰싹 입술을 때렸다.

    “아티스트 디렉터의 약자를 붙여 고디라고 불립니다. 어느 쪽이든 편한 대로 불러 주셔요.”

    엘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아…….”

    애칭이라고 생각했던 게 미안했다.

    “귀인께서 숍을 방문하셨다는 소식에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요. 괜찮으시다면 위층에서 대접을 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어머나, 그 세안제가 마음에 드셨나요?”

    “향이 좋군.”

    “영광이에요. 비슷하게 조향해 드리지요.”

    진저는 대접이고 나발이고 이만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귀찮기도 할뿐더러 상대할 이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와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다. 겉으로는 내색지 않지만 그녀의 몸으로 살아본 그는 알 수 있었다. 향수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사려고 했던 건 다 산 것 같으니 끌고 갈까?’

    고민하던 그가 아내의 반짝거리는 눈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가 이만큼 관심을 보이는 건 몇 없었다.

    계집애 같은 녀석이라도 남성이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아내를 홀로 두고 가는 것도 걸리는 데다 그 자신 또한 그러고 싶지 않았다.

    “30분만이야.”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와 고든은 위층으로 이동했다.

    고든이 금세 조향을 마치고 돌아오겠다며 부부를 응접실에 둔 채 사라졌다.

    진저는 기대에 부푼 아내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결혼 예물을 받았을 때도 이런 표정은 짓지 않았을 터였다. 대체 저게 뭐길래 저다지도 기쁜 표정이란 말인가.

    “그렇게 좋나.”

    “이 향이요? 으음, 향도 좋지만 그보다는 조향에 관심이 있어요.”

    “조향?”

    왕궁에서 태어난 엘리사는 어릴 적 왕궁 밖을 몹시 궁금해하였다. 그건 모후인 리즈 왕비의 영향이었다. 권세가의 영애와는 달리 그녀는 산과 들에 대해 해박했다.

    “그란디아 왕궁에는 들꽃이 없었어요.”

    그렇겠지. 그란디아 왕궁뿐 아니라 웬만한 왕궁에서는 들꽃을 보기 힘들다. 진저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나 싶어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모후께서 들꽃이나 약초에 대해 많이 알려 주셨거든요. 그래서 항상 들꽃이 궁금했죠. 흔히 나는 들꽃은 화분을 들여와 보여 주셨는데 그렇지 않은 들꽃이나 약초도 있었어요.”

    그래서 모후는 엘리사를 위해 조향을 해주셨다.

    그 얘기를 듣던 진저는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조향? 귀족은 물론이고 평민 또한 조향에 해박한 자는 몇 없었다. 조향의 재료가 되는 마영석을 다룰 수 있는 건 마법사들뿐이기 때문이었다.

    리즈 왕비는 소피아 왕태후가 직접 간택하였다고 들었다. 그럼 당연히 귀족일 텐데 조향을 할 줄 안다니. 아내의 외가 또한 특이한 내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란디아엔 마법사가 없을 텐데. 성국과 긴밀한 관계지 않나?”

    “단일 신앙을 가지고 있긴 해요. 그래서 마법사들이 아닌 성국에서 파견한 신관들이 있죠.”

    성국과 마탑은 서로를 견제했다. 마법에 대한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성국은 마법을 신성력이라 부르고 신의 은총으로 여겼으나, 마탑은 마법에 신앙을 배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성국은 마탑을 이단이라, 마탑은 성국을 실재를 부정하는 우매한 집단이라 헐뜯었다.

    그란디아는 성국에 소속된 열아홉의 왕국 중 하나였다. 그래서 마법을 철저히 배제했다.

    그와 달리 과거의 란델은 국가에서 마탑을 관리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200여 년 전 일어난 1차 성마 전쟁에서 패전한 이후 성국의 가펠리아 교를 국교로 삼았다.

    그 후 2차 성마 전쟁에서 마탑이 승리하였으나 이미 퍼진 신앙을 막을 순 없었다. 그래서 란델은 대륙에서 유일하게 성국에 속해 있으나 마탑의 자주권을 인정하는 중립국이 되었다.

    “대단하군.”

    “조향사들이요?”

    “돌아가신 전하 말이야.”

    “어…… 머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신관은 조향을 마법사의 영역이라 여겨 기피하지. 아무리 왕비라도 신관에게 그러한 명을 내릴 순 없어. 신관들이 마영석을 정제해 조향을 할 정도면 굉장히 호의를 가졌다는 건데, 그만한 호의를 이끌어 내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인품이 훌륭하다는 말이잖아?”

    남편에게서 듣는 어머니의 칭찬은 무척 기분 좋은 것이었다. 발그레 달아오른 엘리사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훌륭하신 분이었어요.”

    아내는 무언가를 자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기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진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저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조향을 마친 고든이 들어왔다. 콩콩, 바닥을 구르며 나타난 그가 테이블에 작은 향수병을 내려놓았다.

    “부인께서 원하신 향수예요.”

    “고맙네. 값은 돌아갈 때 지불하지.”

    “서운한 소리 마셔요. 선물이랍니다.”

    그의 말에 놀란 엘리사가 향수를 내려놓았다.

    “그런 거라면 받을 수 없네.”

    “예? 아, 아아! 혹시 뇌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이 향수에는 제 열정과 호의밖에 담기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엘리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란디아에서 지내며 작은 선물 하나가 얼마나 큰 분란을 야기하는지 여러 번 목격했다. 그웬 공작 부인이라 불리는 이상 자신은 그웬가의 얼굴이었다. 한 번 넘어가기 시작하면 두 번, 세 번은 더 쉬웠다.

    사소한 것이라도 직접 값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제 것이 될 순 없었다.

    아내의 굳은 얼굴을 본 진저는 작게 웃었다. 이런 표정을 지으면 타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 내가 선물하는 것으로 하지.”

    “각하.”

    그녀가 남편을 채근하듯 불렀다.

    “조향에 대한 값을 내가 지불하면 되잖아. 당신은 내 선물을 받은 거고, 이쪽은…….”

    고든 쪽을 돌아본 그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호의에 대한 대가를 받은 거고.”

    엘리사가 고민하기도 전에 남편은 금화 몇 개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향수 한 병의 값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세상에, 다정하기까지 하잖아!’

    고든이 몽롱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부인은 정말 행복하시겠군요. 부군께 이런 사랑을 받으시니까요.”

    사랑. 입안에서 단어를 굴리던 그녀는 취기가 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이 들뜨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게 될 것 같아서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아, 그, 마, 마영석을 정제할 수 있나?”

    마영석을 다룰 줄 아는 이는 마법사뿐이었다. 고든이 두 손을 내저으며 껄껄 웃었다. 성별을 바꾸고 싶어서 마법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마법으로도 성별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미련 없이 꿈을 접었다.

    “마탑에서 정제한 것을 구매한 거랍니다. 시중에 나오는 향료와 마영석 정제수는 모두 가지고 있어요. 또 필요하신 게 있다면 찾아주세요.”

    그가 찡끗 한쪽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바람에 화장이 눈 밑에 묻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엘리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저는 기분이 더러웠다. 외간 남자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기분이 어떤지 모른 채 엘리사는 제 눈을 가리키며 웃었다.

    “어머머, 부끄러워라!”

    그제야 눈 밑에 화장이 묻었다는 것을 안 고든이 소리쳤다. 눈 밑을 벅벅 문지르자 두껍게 쌓아 올렸던 화장이 지워졌다.

    나이가 있어 화장을 두껍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워진 곳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이들보다 고운 피부였다.

    “피부가 고운데도 화장을 하나?”

    “나이에 비해 나쁘지 않은 거죠. 관리하지 않으면 녹물이 나올지도 몰라요. 부인께서도 굉장히 아름다운 피부를 가지고 계시네요.”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해서 그런지 대화가 즐거웠다.

    그들은 진저를 상석에 앉혀 놓은 채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었다. 루펠라나 라골과 얘기할 적엔 질문 몇 마디가 고작이었던 그녀가 고든과의 대화에서는 꽤 말을 많이 했다.

    “타사의 크림을 쓰고 계신다면 바르시고 한 시간 뒤쯤엔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 내세요.”

    “크림을?”

    “피부에 흡수되면서 노폐물이 남거든요.”

    “아아, 그렇군. 그럼 화장품을 바른 뒤 간지러운 건 뭐지?”

    “어멋! 갖다 버리세요!”

    자신과 대화할 때도 이렇게 말이 많았던가. 과거를 짚어보던 그는 미간을 구겼다.

    ‘나한테는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적 없잖아.’

    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시계만 노려보며 약속했던 30분이 어서 흐르길 빌었다. 분침이 마지막 1분을 남겼을 때였다.

    “일어나.”

    한참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엘리사가 고든과 남편을 번갈아 보았다. 벌써 30분이 흘렀나 보다. 첫 10분은 조향을 한다고 자리를 비웠지만 이렇게나 빨리 20분이 흘렀다.

    아쉬운 듯 향수병을 매만졌지만 이내 몸을 일으켰다.

    고든도 그들을 막을 순 없었다. 처음부터 딱 30분 만이라고 못 박지 않았던가.

    처음엔 그웬 공작 쪽에 다른 마음이 있었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공작 부인도 마음에 들었다. 매장에선 남편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질투를 하는 것 같더니 금세 잊고 자신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건 고든이 사내라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 상대만 십수 년이었다. 동성을 사랑하며 살려면 살벌하게 눈치를 갈고 닦아야 했다. 눈만 봐도 알았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는지 아닌지 같은 건.

    “너무 아쉬워요. 꼭 다시 찾아주셔요.”

    엘리사가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열자 진저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날이 지겠군.”

    “네? 네 시도 되지 않았는걸요.”

    “겨울엔 해가 일찍 져.”

    “아, 저, 인사를…….”

    아내는 빈말을 몰랐다. 다시 오겠다고 하면 정말 다시 올 것이다. 진저는 인사를 하려고 버티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쏜살같이 숍을 나섰다. 엘리사가 고든과 인사를 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진저는 숍을 벗어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를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다 봤을 거라고 쨍알거리는 소리는 가볍게 무시했다.

    남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보다 아내가 고든인지 고자인지 하는 놈을 다시 만나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잘됐군. 부끄러워서라도 못 갈 테니.’

    저택에 돌아오니 매혹에서 구매했던 상품이 도착해 있었다. 마차를 구하느라 시간을 소요한 덕에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었다. 상품과 함께 보낸 고든의 편지를 본 그녀는 저녁도 먹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다.

    방 밖에서 대체 뭐길래 밥도 먹지 않느냐고 외치는 진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다음 날, 걱정이 돼서 그웬저에 찾아온 루펠라는 숨도 쉬지 못하고 웃었다.

    “오빠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요?”

    “절 놀리는 거예요.”

    “오빠가요?”

    루펠라는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사내들과는 자주 농담을 했지만 새언니에게 하는 것처럼 자주는 아니었다.

    “기사들이랑 대화할 때는 얼마나 짓궂은데요.”

    “제게도 충분히 짓궂은걸요.”

    마음이 단단히 상한 모양이었다. 루펠라는 화를 내는 모습도 점잖은 그녀가 귀여워서 소리 없이 웃었다.

    “오빠가 질투를 하는 것 같은데요?”

    “질투요?”

    “웬만해선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거리낄 것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지킬 건 지킨다고요. 백주 대낮에 사람 많은 데서 안아 올 정도면 말 다했죠, 뭐.”

    루펠라의 말에 엘리사의 눈꺼풀이 조금 내려왔다. 정말 질투일까. 이런 추측은 괜한 기대만 불러왔다. 정말 그녀를 놀리는 게 아니라면 질투라기보다는 소유욕이라는 쪽이 더 신빙성 있었다.

    어제의 일을 떠올린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왕궁에서만 지냈다고 해서 사교계의 생리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말(馬)보다 말(言)이 빠르다. 부끄러운 소문일수록 더더욱.

    “사람들 눈이 신경 쓰여요?”

    “네…….”

    루펠라가 알기론 엘리사에겐 고약한 소문들이 많았다. 멀리 란델까지 들려왔으면 본국에선 얼마나 지독했겠는가. 그런 그녀가 소문에 신경을 쓴다는 건 의외였다.

    엘리사가 진정 신경 쓰는 건 제 소문이 아니었다. 저로 인해 그가 싫은 소리를 들을까 봐 그게 가장 걱정되었다. 제가 이해할 수 있든 없든 남편이 상점가까지 온 건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저로 인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까지 한다면…….

    “너무 걱정 말아요, 언니. 지금도 그렇게 나쁜 소문은 없다고요. 그웬 공작이 사람 되었다잖아요. 미친개에서 사람으로 진화했으니까 오빠는 언니한테 감사해야 해요.”

    엘리사는 루펠라가 고마웠다.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고든이 편지에 뭐라고 쓴 거예요?”

    “아, 그게…….”

    “뭔데 그래요. 그것 때문에 밥도 안 먹었다면서요? 오빠가 펄펄 뛰더라고요.”

    루펠라의 표정에 흐뭇함이 엿보였다. 새언니는 좋은 사람이고 그녀는 그런 새언니가 오래오래 오빠와 함께해 주길 빌었다.

    가능하면 평생 잡음 같은 거 없이 다정하게만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빠의 변화가 진심으로 기꺼웠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쑥스러웠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집사 콕스를 통해 새언니의 아침을 챙겨 먹이라는 말을 전해 왔다.

    이건 본저의 왕이 바뀔 조짐이었다. 오빠도 그랬지만 집사 콕스조차 간절한 표정이었다. 새언니의 방을 찾다가 마주친 라골도 은근히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엘리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냥, 사랑…… 받는 것 같다고요.”

    다른 건 부끄러워서 말할 수 없었다. 고든의 편지는 꽤 길었다. 엘리사가 아름다운 데엔 이유가 있다는 말을 시작으로 사랑받는 여자들은 모두 아름다우며 사랑이 여성의 아름다움의 원천이니 계속 지극한 사랑을 받으셨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게다가…….

    「두 분을 닮으셨으면 아기님의 외모는 얼마나 대단하겠어요. 곧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아기라니. 자신은 아직 초야조차 치르지 못했다.

    “뭐야. 난 또 아기 얘기하면서 주책 부리는 줄 알았어요.”

    “헉.”

    그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엘리사가 숨을 들이켜자 루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정말이에요? 그래서 언니가 이렇게 부끄러워했군요.”

    “그, 그게…….”

    “란델에선 인사 같은 거예요. 원래 그렇게 무례한 자는 아니니 혹시 언짢았다면 기분 풀어요.”

    “그게 아니라…….”

    루펠라가 엉큼하게 웃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도 기대돼요. 절대 오빠를 닮으면 안 돼요. 꼭 언니 닮은 아기여야 해요.”

    엘리사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부담이 되어서 그러나 싶었는데 이상하게 찜찜했다. 반응이 마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엘리사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루펠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니, 이건 설마 해서 하는 말인데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혹시…… 아직 안 한 건 아니죠?”

    딱딱하게 굳은 엘리사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는 남편의 몸으로 마르코스 유 한 병을 다 썼다 선언한 바 있었다. 거짓인 걸 들키면 남편이 곤란해지는 건 아닐까.

    “언니!”

    엘리사는 거짓말을 못 했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젬병이었다.

    “안 했어요?!”

    “그게…….”

    “마르코스 유 한 병을 다 썼다면서요. 다음 날 침실에서 못 나왔다고 들었단 말이에요.”

    침실에서 못 나온 적은 없었다. 소문이 와전된 듯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오빠 안 서는 거죠? 그렇게 헤프게 놀아 대더니 어디서 이상한 병이라도……!”

    분통을 터뜨리던 루펠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엘리사의 표정을 본 루펠라가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본 건 아닌데 소문이 그렇단 거예요. 오빠가 얼굴은 멀쩡하니까, 여자들이 많이 붙…… 은 게 아니라…….”

    얼마나 여자를 많이 만났으면 동생의 입에서 ‘헤프다’는 말까지 나온단 말인가. 엘리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 * *

    훈련을 끝내고 본저로 돌아온 진저는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온 하우벡 또한 그랬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고용인들이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건 당연하지만 거슬릴 정도로 눈치를 보진 않았다. 집무실에 올라간 그는 바로 콕스를 호출했다. 이상한 건 콕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지?”

    “마님께서 통 식사를 안 하십니다.”

    “루펠라가 있는데도?”

    “아가씨께서 오신 후로 심기가 더 불편해지셨습니다.”

    그 녀석이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그는 곧장 루펠라를 불러오라 명했다. 콕스가 부리나케 루펠라를 찾으러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퉁퉁 부은 루펠라가 진저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무슨 실수라도 한 거냐.”

    “실수는 오빠가 했지!”

    “내가?”

    오늘은 얼굴도 보여주지 않아서 실수할 일도 없었다. 진저는 무슨 헛소리냐고 루펠라를 타박했다. 아예 실수를 했다는 것을 전제로 다그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이 실수를 하긴 했지만, 정말 새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건 오빠였다. 루펠라가 빽 소리쳤다.

    “나 아니라니까 이 고자야!”

    하우벡과 콕스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숨도 쉬지 못하고 홉뜬 눈으로 루펠라를 쳐다보던 그들이 십여 초가 흐르고 나서야 눈만 겨우 움직여 시선을 이동시켰다.

    개차반도 고자라는 말엔 타격을 입었는지 일순 말을 잃었다.

    “너……!”

    “그렇게 놀아나다가 사단 낼 줄 알았어! 제 기능도 못 하는 거 왜 달고 있어! 귀찮은데 잘라내 버리지!”

    콕스는 하얗게 질려 진저의 하체를 보았다.

    ‘후, 후, 후, 후계 아기씨가!’

    두 분 사이가 정다우시니 곧 소식이 있겠구나 싶어서 야금야금 사 모았던 딸랑이와 공갈 젖꼭지가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놀란 건 하우벡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진저의 성생활을 가장 근지에서 지켜본 자였다. 주군 주니어의 위용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진저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울화병으로 죽든, 분노한 그에게 맞아 죽든 송장 하난 치울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우벡이 나서서 변명했다.

    “오해십니다! 주군은 몹시 건강하십니다!”

    누이는 고자라고 악을 지르고 부하는 아니라고 소리쳤다. 참다못한 진저가 테이블을 꽝! 내려쳤다.

    “무슨 헛소리야!”

    “그럼 왜 언니를 이때까지 초야도 못 치른 바보로 만드는데!”

    이게 소문이 난다면 오빠는 물론이고 새언니까지 반편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하우벡과 콕스는 또다시 굳었다. 초야를 아직? 마르코스 유 한 병을 몽땅 비웠다는 소문은? 두 사내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루펠라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친 후에야 어쩌면 기능을 상실한 게 근래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진저는 말없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내 녀석이면 개 패듯이 팼을 텐데 저것도 여자라고 때릴 순 없었다.

    진저가 말이 없자 루펠라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할 말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한참을 반복했다.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너…… 무 걱정하지 마. 요새는 의술이 많이 발전했으니까. 노력하다 보면 혹시 모르잖아. 기…… 운 내.”

    위로하는 게 더 같잖았다. 루펠라가 이만큼 저자세로 나오니 콕스와 하우벡 또한 상상 속에서 없는 병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놀아 재끼셨는데 애 소식 하나 없는 게 이상하긴 했지.’

    ‘그래서 여자들이 주군이라면 학을 떼는 건가.’

    애 소식 하나 없는 건 선대와 업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임법이라면 전문가보다 그가 나았다.

    여자들이 학을 떼는 이유는 아무리 잘생기고 돈 많고 밤일이 훌륭해도 성격이 아흐레 굶은 개보다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그보다 조금 떨어져도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하지 수틀리면 아내고 뭐고 용서가 없을 개차반은 아니었다.

    “주인님, 제가 비밀리에 마탑에 의뢰해 보겠습니다.”

    “저는 신관과 접촉하겠습니다, 주군.”

    “일단 의사가 먼저지.”

    진저를 제외한 세 사람은 아예 확신하는 듯했다.

    “예예,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낫지 않는데도 괜찮습니다. 주군의 하초에 문제가 있으셔도 주군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우벡은 전장에서나 보이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를 위로했다.

    결국 주먹을 들게 만드는 놈이었다. 하우벡에게 다가간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맞고 시작하지.”

    집무실 안쪽에서 매타작 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점심때가 훌쩍 지나서야 엘리사는 방을 나섰다.

    그녀는 근래 고용인들이 심하게 제 기분을 살핀다는 걸 느꼈다. 자만일지도 몰라 잠자코 있었으나 만약 그렇다면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는 것이었다.

    루펠라가 돌아가기 전에 배웅도 해주어야 했다. 루펠라에게 저조한 속내를 내비친 게 미안했다.

    1층으로 내려간 그녀는 이마에 붉게 멍이 든 콕스와 입이 댓 발 나온 루펠라를 발견했다. 루펠라는 그녀와 대화하던 도중 남편의 호출을 받았다. 그 호출을 전한 건 콕스였다.

    ‘혹시 그이가…….’

    콕스에게 손을 올린 건가. 고용인의 처벌은 안주인의 몫이었다. 그녀는 고용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건 육체적인 체벌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콕스.”

    “마님! 식사를 준비할까요?”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콕스가 민망한 듯 이마를 매만졌다.

    “각하예요?”

    콕스와 루펠라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우벡이 얻어맞는 걸 본 후라 혼이 쏙 빠지고 말았다. 그 상태에서 집무실에서 나오다가 공구를 든 하인과 부딪쳐 버렸다.

    엘리사의 표정이 몹시 싸늘했다. 콕스가 펄쩍 뛰며 그녀의 추측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제 과실입니다.”

    “그렇…… 죠?”

    하긴 남편이 조금 사나워 보이긴 하지만 막무가내로 사람을 팰 인사는 아니었다.

    표정이 풀어진 그녀를 본 루펠라는 엘리사에게 대체 오빠를 어떤 호인으로 보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녀의 오빠는 용서가 없는 사람이었다.

    능력을 인정하거나 웬만큼 그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면 사소한 실수도 가차 없었다.

    봐줄 만한 상대면 멀리 치웠고 봐주기 힘들다 싶으면 아예 저승행 티켓을 끊어주었다.

    “마님이 내려오시면 식당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또 식사를 거절하기 전에 루펠라까지 콕스를 거들었다.

    “저녁도 걸렀다면서요.”

    콕스에 루펠라마저 성화를 부리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가 콕스를 따라 식당으로 이동했다.

    엘리사가 늘 앉는 곳에 자리를 잡자 하녀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내왔다. 줄곧 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가 식기를 시작하자마자 식당의 문이 다시 열렸다. 남편이었다. 점심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식당을 찾은 걸 보니 그도 식사를 거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편 몫의 식사는 내오지 않고 콕스와 하녀들이 쭈뼛쭈뼛 식당을 나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데 남편이 말을 걸었다.

    “식사부터 해.”

    “당신은요?”

    “됐어.”

    그럼 왜 자신을 그렇게 마뜩잖은 눈으로 보고 있단 말인가. 궁금했지만 물음은 미뤄 두기로 했다. 음식 냄새를 맡자 식욕이 동했다.

    진저는 그녀가 샐러드에 집중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외출로 허기가 졌을 텐데 과자 부스러기 하나 입에 대지 않았다. 아침은 물론 점심도 걸렀으니 하루 내내 섭취한 게 없었다.

    샐러드 접시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진저는 식탁 모서리에 부착된 호출 줄을 가볍게 당겼다. 구운 도미에 소스를 얹은 요리가 나왔다. 그리고 하녀는 한차례 전처럼 퇴장했다.

    아내는 칼과 나이프로 뭔가 열심히 건드리고 있었다.

    “왜 그러지.”

    “가시가 있어서요.”

    보통 생선 요리는 모두 살만 발라내 저민 후 조리되었다. 란델은 도미를 비롯한 몇 가지 생선은 뼈를 발라내지 않았다. 무슨 전설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란델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에겐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그는 아내의 옆으로 이동했다.

    “이리 줘.”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더 열심히 가시를 골라냈다.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남편이 보고 있으니 긴장이 되어 자꾸 가시를 조각내고 있었다.

    “내일까지 하겠군.”

    그는 아내의 접시를 가져와 손수 가시를 발라 주었다. 조각조각 자른 탓에 꽤 손이 많이 갔다. 뼈를 다 발라낸 후에는 아예 먹기 좋게 한 입 크기로 자른 뒤 접시를 다시 돌려놓았다.

    “고마워요.”

    “자르는 게 아니라 빼는 거야.”

    “알아요…….”

    “알면 하고.”

    마지막은 꼭 저렇게 밉살맞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라 그녀는 툴툴거리지 않고 도미 살을 씹었다.

    반쯤 요리가 없어진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궁금한 모양이야.”

    물을 마시던 엘리사는 사레가 걸려 콜록거렸다.

    “네?”

    “특히 이 녀석이.”

    그가 눈짓으로 제 하체를 가리켰다. 엘리사가 홱, 고개를 내려 남은 도미 살을 노려보았다. 대낮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당황스럽기도 했고, 루펠라에게 들었던 남편의 헤픈 성생활이 떠오르기도 했다.

    화낼 자격 같은 건 없었다. 결혼 전의 일인 데다가 몸이 바뀌기 전에 남편과 자신은 서로의 생활에 터치하지 않기로 은연중에 합의되었다. 제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미 정해진 것을 바꿀 순 없었다.

    엘리사는 인지하지 못했다. 남편도 그녀의 생활에 넘치도록 간섭하고 있다는 것을.

    이 얘기를 들으면 또 어쩔 줄 몰라 할 줄 알았는데 아내는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화가 났어?’

    화낼 사람이 누군데. 부부의 밤일을 시누이에게 누설한 쪽은 아내였다. 식당에 침묵이 감돌았다.

    “말 좀 해.”

    “……아니에요.”

    “그놈의 아니에요, 소리 그만할 수 없어? 답답해서 돌아버리겠다고.”

    ‘답답한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정말 화가 나는 건 질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은 점점 깊어지는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엘리사.”

    “…….”

    “대답 좀 해.”

    “……말씀하세요.”

    다른 사람에게는 잘만 내는 화가 그녀의 이런 목소리 앞에선 쑥 기어들어갔다. 아내에게 꼼짝 못 하는 놈들이 이런 심정일까. 짜증은 나는데 울리게 될까 봐 조바심이 들었다.

    “왜 화가 난 건데?”

    남편의 말투가 부드러워지니 이상하게 더 화가 났다. 그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건 그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냥, 그냥 마음껏 질투하고 싶었다. 토라지면 토라지는 대로 솔직하게 나는 이러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토라진 이유조차 대지 못하는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안 그러겠다고 말해줘요.”

    “뭔지 알아야 말을 해주지.”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이제 안 그러겠다고 해주세요.”

    이제 다른 여자를 품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말을 잇는 엘리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마지막엔 거의 안 들리다시피 하였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던 진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겠지.’

    심하게 장난을 칠 때를 제외하곤 불합리하다고 생각될 법한 일에도 침착하던 여자였다.

    “안 그럴게.”

    답을 요구한 건 아내 쪽이었는데 원하는 대로 해주니 놀라는 쪽도 아내였다. 푸른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의 우는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품 안에 감춰 버렸다. 아내의 눈물로 가슴께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 왜 울어.”

    “고마워요…….”

    “식당을 옮겨야겠어. 매번 이곳에서 울리는군.”

    남편의 가슴에 코를 박고 훌쩍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이세요?”

    “뭐?”

    잠깐 고민하던 엘리사가 그의 하체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 녀석이라 일컫지만 남편의 생식기를 그와 같이 칭할 순 없었다. 인격화시킨다면 마땅히 존칭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주저하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이분 말이에요.”

    “…….”

    이번에 말이 없어진 건 진저였다. 고무공은 어디로 튈지 예상이라도 하게 해주지 아내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황당함에 얼굴을 굳혔던 진저는 이내 픽픽 웃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분 사정을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제가요?”

    진저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궁금하면 알려줄 수도 있고.”

    “돼, 됐어요!”

    진저의 가슴을 밀치려던 그녀는 손이 붙잡혀 버렸다.

    “그만 놀려요.”

    “진담이면?”

    이전에는 관계란 부부 사이에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마음을 자각한 후로 그건 무섭고 부담스러운 행위가 되었다. 그와 몸을 겹치고 나면 퇴로를 떠나 길이란 길은 송두리째 저 지하로 꺼져 버릴 것 같았다. 모쪼록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는 그대로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엔 겁을 먹긴 했지만 관계를 피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제 아내라는 이유로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그녀를 안고 싶진 않았다. 그건 능욕과 다를 바 없었다.

    “하나만 약속해. 그럼 나도 당신이 바라는 것 한 가지는 뭐든 들어줄게.”

    아내가 저어한다면 별수 없었다. 이상하게 그녀에겐 몇 번이든 져주고 싶었다.

    “그게 뭔데요?”

    “아무리 화가 나고, 날 피하고 싶어도 입을 다물진 마.”

    “…….”

    “싫어?”

    “……좋아요.”

    “그럼 당신은 내게 뭘 원하지?”

    손가락만 꼼지락대던 그녀가 힐끔, 그의 눈치를 보았다.

    “나중에 말할래요.”

    당연히 초야를 미뤄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엘리사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뭐든 바라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스스로 뱉은 말은 꼭 지키는 남자이니 계약서 같은 게 없더라도 꼭 지켜줄 터였다.

    사실 그녀가 정말로 바라는 건, 그가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이었다. 같은 마음으로 한곳을 보고 서로의 손길에 떨려 하는 것. 그리하여 더 이상 미래를 겁내지 않게 되는 것. 하지만 바란다고 해서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흐를 수 있다면 그를 향한 이 마음도 무 자르듯 잘라 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마지막 보루로 소원을 남겨 놓고 싶었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은데.”

    “그래도 꼭 지켜주세요.”

    엘리사는 아주 절박한 표정이었다.

    대체 그 소원이 무엇이기에 아내가 이처럼 간절하단 말인가. 진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이렇듯 환하게 웃어준다면 얼마쯤의 손해는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엘리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이 태어나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그래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계획했던 소란을.

    그날 저녁, 그웬저엔 남편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새어 나갔을 리 없는 소문이 귀에 들어온 것이다. 새로운 공작 부인이 모의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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