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내가 되고 싶은 건
당황한 엘리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늘 그녀가 눈뜬 곳은 익숙한 방이었지만 그녀의 침실이 아니었다.
방 주인인 남편은 이미 자리를 비운 지 오래였다. 침대에서 일어난 엘리사는 하녀들이 오기 전에 직접 침대를 정리했다.
마르코스 유에 대해 안 후라 그런지 괜스레 고용인들 눈치를 보게 되었다. 사실 그런 것보다도 자신이 먼저 피한 주제에 울다 지쳐 남편 침대에서 일어난 게 더 부끄러웠다. 남편이 흐트러진 잠자리를 보고 웃게 될까 봐 그녀는 말끔히 침대를 정돈했다.
고작 시트의 주름을 펴는 게 다였지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그런지 시간이 걸렸다. 오른쪽 주름을 펴면 왼쪽에 주름이 잡힌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어린 시절 제 잠자리를 봐주던 하녀가 시트를 팡팡 두들기던 게 생각났다.
‘부채…… 같은 거였는데.’
청소 도구는 고용인들이 끌고 다니는 트레이에 있었다. 대충 비슷한 것을 침실 안에서 찾던 그녀는 장식장 위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녀에 키로는 잡을 수 없어서 발을 디딜 수 있는 의자를 가져오기로 했다. 침실에서 쓸 만한 건 남편의 의자뿐이었는데 굉장히 크고 무거워서 그녀의 몸으로 옮기기엔 무리였다.
그녀는 의자의 양 모서리를 끌어안고 낑낑대었다. 고작 몇 센티 끄는 것도 중노동처럼 느껴졌다.
“그건 왜?”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엘리사의 어깨가 흠칫 위로 솟았다. 남편이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서서 의자를 끌어안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니 그게……!”
“비켜 봐.”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의자를 한 팔로 들어 책상 밖으로 놓아주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엘리사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인을 부르지.”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대체 언제 왔담.’
그녀는 한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변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버릇이 있었다. 집중력이 있는 거로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뭔데.”
“저걸…….”
엘리사가 손을 뻗어 장식장 위의 부채 같은 것을 가리켰다. 그는 의자에 오르지도 않은 채 아내가 가리킨 것을 내려주었다.
가까이서 보니 청소 도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가주의 방에 청소 도구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이번 모의 전투장의 지도야. 그건 왜 필요했지?”
진저의 눈이 가늘어졌다. 모의 전투의 꽃으로 참가하길 바라는 걸까. 그녀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당황하여 온몸이 발갛게 변한 아내를 보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에겐 위험해.”
“……네?”
“모의 전투 말이야. 당신을 참가시킬 순 없어.”
“위험한 건 루펠라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녀는 남편의 말이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따박따박 대꾸했다. 돌이켜 보면 남편은 언제나 그녀를 유리병처럼 여겼다.
그란디아의 왕태후가 병마에 쓰러진 뒤엔 처음 받는 보호. 남편의 보호가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든든하고 기쁘기까지 했다. 그녀가 해야 할 일까지 못 하게 막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엘리사의 못마땅한 시선에 진저는 왈칵 얼굴을 구겼다. 안주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것 자체는 훌륭했다. 통 대화를 하지 않으려던 부인이 입을 열게 된 것 또한 기꺼운 일이었으나 고집을 부리는 건 다른 문제였다.
부부는 팽팽하게 대립했다.
“안 돼, 위험해.”
“괜찮아요.”
“당신에게 위험하단 말이야.”
“다른 여성들은 괜찮고요?”
“모의 전투에서 병사들이 드는 건 진검이야, 날이 시퍼렇게 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예요.”
“엘리사!”
진저는 결혼 전후를 통틀어 그녀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엘리사는 다람쥐나 햄스터와 같은 작은 동물처럼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진저는 목소리를 낮추고 아내를 설득하려 들었다.
“당신이 맡은 일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의욕을 보여주는 건 훌륭해. 하지만 모의 전투는 안 돼. 그란디아와 달리 란델은 척박한 땅이라 전투가 빈번해. 전쟁에 특화된 민족이라는 말은 란델을 헐뜯기 위한 타국의 비아냥거림이 아니야. 여성들의 정규 교육 과정에 검술이 들어 있을 정도라고.”
“…….”
“당신의 몸으로 지내 온 내가 가장 잘 알아. 모의 전투는 위험해.”
진저는 단호했다. 부부 사이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엘리사도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지 더 이상 대꾸를 하진 않았다.
그 또한 그녀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였더라면 저를 우습게 여긴다고 화르르 분노할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여성을 배려하는 인사가 아닌 것 또한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아내의 성실함은 차치하고서라도 모의 전투 이후 발생하는 후폭풍은 모두 그녀의 몫일 터였다.
‘입을 찢어버리면 되지.’
다만 그는 너무나 호전적이었다. 제 앞에서 혹은 아내의 앞에서 입을 잘못 놀리는 이들 따위, 산 자가 아니게 만들어주면 된다.
혹자는 안이하다, 폭력성이 짙다 비난하겠지만 뭐 어떤가. 그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는 자였고,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도 않았다.
진저는 의기소침한 아내에게 아침을 권했다. 엘리사도 그와 대거리를 벌이기보다는 식사가 낫다고 생각했다.
부부가 이동한 곳은 식당이 아닌 진저의 방 테라스였다. 진저의 방 테라스는 2층 정원과는 달리 밖에서도 테라스의 사람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였다.
몸이 바뀌었을 때는 혹시나 긴장이 풀려 그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될까 봐 저어되어 자주 나서지 않았다.
간혹 몹시 답답할 때 5분, 10분 바람을 쐰 게 다였다. 본래의 몸으로 온 남편의 테라스는 환상적인 경치를 자랑했다.
함박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지만 앙상한 나무 위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병사들의 교대 시간인지 갑주를 어깨에 대충 멘 기사들이 희희낙락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고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과 하녀들은 스치면서도 힐끗힐끗 쳐다볼 뿐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일인데도 엘리사는 흥미롭다는 듯 그들을 주시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저 아이요. 근무표에 따르면 오늘 아침엔 내저에 없어야 하거든요.”
‘고용인들의 근무표도 줄줄이 꿰고 있는 건가.’
진저는 픽 웃으며 ‘그런데?’ 하고 물었다.
“하녀들끼리 잡담을 나누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을 봐야 하는데 아침 근무가 없어서 심란하다고요. 저 병사인가 봐요. 눈을 못 떼네요.”
진저로서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본래 연애에 관심이 없는 편인데 남의 연애사까지 알아 무엇하겠는가. 그는 그런 것보다도 아내의 표정이 변하는 게 더 흥미로웠다.
“그런 게 재밌나?”
“그냥……. 저는 평범한 일상이 어떤 건지 모르잖아요. 이렇게라도 볼 수 있는 게 좋아요.”
고약한 계모가 아니었더라도 애초에 공주인 여자다.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먼 게 당연했다. 그들은 아내가 누리는 것들을 꿈꿀 텐데, 아내는 그들의 일상을 동경하는 게 우스우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아내는 딱 이십 대 초반이었다. 아이와 성인의 경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를 시기. 연애를 어떤 스포츠나 놀이보다 즐길 때가 딱 저 나이였다.
엘리사는 난간 밑 사람들을 구경하고 진저는 그런 엘리사를 구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도착했다. 집사 콕스는 다시 가까워진 부부가 내심 흐뭇했다. 그런 콕스와는 달리 진저는 인상을 썼다. 그는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콕스를 살벌하게 쳐다보았다.
진저가 입에도 대지 않는 세 가지가 있었다. 다른 음식 재료보다 상대적으로 보관 기한이 긴 붉은 콩은 전장에서 물리도록 먹어 저택에선 식탁에 오르는 것도 싫어했고, 시큼한 과일 또한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오트밀을 가장 싫어했다. 어릴 때 훈련에 따라갔다가 상한 오트밀을 먹은 경험이 있어서 아주 학을 떼었다. 생긴 것도 꼭 토사물 같지 않은가.
“마님이 좋아하시는 음식 위주로 준비했습니다. 주방장이 직접 선별하고 볶은 아몬드로 만든 오트밀입니다.”
집사부터 식사를 돕기 위해 온 하녀들까지 하나같이 아내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내는 왜 그러냐는 듯 눈만 깜빡였다.
그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몇 개월 된 구르는 돌이 몇 십 년 박혀 있던 돌을 뺀다더니. 이건 빠지기만 한 게 아니라 아예 저 멀리 던져진 격이었다.
더 분통이 터지는 건 그가, 천하의 진저 그웬이 식사 때문에 좋아진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온통 풀뿌리뿐이군.”
“네?”
“아니야. 먹지.”
그는 보기도 싫은 붉은 콩 샐러드를 입에 구겨 넣었다.
아내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고용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사가 훌륭하다며 새로 온 주방장 솜씨를 칭찬했다.
콕스도 주방장이 성실하고 수더분한 자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녀들 또한 귀가 커져 아내와 콕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가 있는 자리만 소리가 없어진 기분이었다. 식사는 저와 아내가 하기로 했는데 왜 제가 방해꾼이 된 기분인 걸까. 진저는 애꿎은 음식만 포크로 찔러댔다.
“마님, 손님방은 정리가 다 되었습니다.”
“다음 주쯤 도착하신다고 하셨죠?”
콕스와 엘리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저가 고개를 들었다.
“아,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침에 다시 편지가 왔더군.”
길리안은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다음 달에나 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엘리사는 콕스에게 먼지가 쌓이지 않게 방을 관리해 두라 명했다.
부부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진저는 식사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엘리사에겐 아주 만족스러운 아침이었다.
* * *
남편과 식사를 마친 엘리사는 루펠라와 티타임을 함께했다. 부부의 식사 중에 난입한 루펠라가 도무지 일이 흘러가는 방향을 모르겠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어젯밤에 진저에게 쫓겨난 후로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눈 밑이 거뭇했다.
괜찮냐고 묻는 루펠라에게 엘리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엘리사의 반응도 미심쩍은지 루펠라는 한참을 앵알거렸다.
왜 아내에게 소리를 치냐며, 내저가 무슨 훈련장이냐고 땍땍거리던 그녀는 귀를 파는 진저를 보고 결국 빼액- 소리를 치고 말았다.
‘소리는 병사들한테나 지르라고!’
진저도 지지 않고 맞붙었다.
‘그럼 난 네 병사인가?’
그러더니 콕스에게 닥터를 부르라고 명했다. 저 계집애 지랄병을 고치기 전엔 다시 의사 소리 못 들을 줄 알라며.
남매의 싸움에 불이 붙자 결국 엘리사가 나섰다. 루펠라에게 티타임을 청한 것이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남매도 엘리사의 청은 무시 못 하겠는지 결국, 진저는 진저대로 할 일을 하러 떠나고 루펠라는 엘리사와 함께 정원에 나왔다.
“저 인간은 다 나쁜데 폭력적인 게 제일 나빠요. 안 그래요, 언니?”
“좋은 말로 달래주셨어요. 이번엔…… 제가 잘못한 거예요.”
일방적으로 피했으니. 연유를 모르는 남편이 답답할 만도 했다.
“언니가 뭘 잘못해요! 딱 봐도 저 인간이 제 분 못 참은 건데요.”
엘리사는 잔뜩 흥분한 루펠라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시집살이는 어떤 여자든 고역이라고 했는데 루펠라는 무조건 제 편이었다. 나이는 루펠라 쪽이 어리지만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사람 기 빨리게 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니까요. 제 연애도 어찌나 방해를 하는지…….”
루펠라가 입을 쭉 내민 채 투덜거렸다.
“그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루펠라의 연인인데 이름도 모르네요.”
일그러져 있던 루펠라의 표정이 단번에 발갛게 물들었다. 괄괄한 편이라 오해를 사는 것 같은데 이렇게 보면 루펠라도 딱 제 나이 대의 소녀였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쩔 줄을 모르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엘리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레닉이에요.”
그레닉의 이름이 나오자 루펠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요?”
“그게…….”
루펠라가 머뭇거리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엘리사가 그녀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내게 말해주지 않을래요? 루펠라는 제게 좋은 조언을 많이 해주었잖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움이 되고 싶어요.”
“언니…….”
루펠라는 엘리사의 품에 안겨 훌쩍였다. 한 번도 또래를 안아준 적 없던 엘리사는 당황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루펠라의 등을 어루만졌다.
“죽여 버릴래요.”
“네?!”
엘리사가 예상했던 말은 외사랑의 비참함이라든가 그들 신분에 대한 고뇌 등이었다. 하지만 대뜸 나온 말은 난데없는 살인 예고였다.
“아, 음…….”
엘리사는 왕족의 폭력성이 서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열정적으로 강의했던 한 교수를 떠올렸다.
형제자매나 부친, 혹은 친인척에게서 그러한 경향이 엿보일 때 취하여야 할 행동에 대해 시험을 본 것 같은데……. 그때를 되짚어보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부와 권력이 가장 우선되는 가치는 아닙니다.”
“뭐라고요?”
“아니, 그러니까…….”
부와 권력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가치가 아님을 알려주라던 해답은 이 상황에선 쓸데없었다. 또 한참을 생각하던 엘리사는 결국 살인자가 될 시누이를 감싸주기로 했다.
“루펠라가 누굴 죽인다고 해도 전 루펠라의 편일 거예요.”
“네?”
“그런…… 일을 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음, 루펠라에게 살해당할 그분 또한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헤아려 줬으면 해요. 오해로 인해 루펠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긴다면 저 또한 아주 괴로울 거예요.”
엘리사는 한겨울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부디 마음을 돌려줘.’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엘리사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루펠라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렇게까지 순진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한동안 깔깔거리던 루펠라는 엘리사의 벙벙한 표정에 헛기침을 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보낸 편지만 궤짝으로 하나는 될 텐데 답장은 전혀 없거든요. 나만 보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새파래져서는.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전 루펠라처럼 사랑스러운 여성을 본 적이 없어요.”
아주 단호한 대답이었다. 제 잘난 걸 잘 아는 루펠라마저 머쓱해할 정도로.
엘리사는 그런 걸 물어 뭐 하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루펠라가 픽 웃으며 엘리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도요. 나도 언니가 사랑스러워요. 우리 집 미친개와 결혼해 준 게 아주 고맙고요.”
“우리 집 미친개요?”
엘리사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당사자들은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해도 엘리사에겐 그저 남매지간에 격의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형제자매가 없기 때문일까.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저도 결혼 전엔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함께 지내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세간의 평가만큼 나쁜 분은 아니에요. 어떤 면은 깜짝 놀랄 만큼 상냥하세요.”
“언니 어디 아파요?”
루펠라는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돌 맞는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무슨 콩깍지가 씌웠길래 진저 그웬을 상냥하다고 평가하는 걸까.
진저 그웬의 상냥함이란 적을 고통 없이 단번에 죽이는 것 정도였다. 여성에게 상냥한 진저 그웬이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밤엔 좀 상냥한가 봐요? 왜요? 힘이 없어요?”
이번엔 루펠라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엘리사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럼 짐승 같은가? 뭐, 밤엔 짐승 같은 게 상냥할 수도 있겠네요.”
“정말 아니에요. 그 분은 잠자리에선…….”
애무를 받긴 했으나 안으로 들어온 적은 없었다. 그 이후로도 애무만 몇 번 반복되었을 뿐이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루펠라는 절륜하다는 말을 수식어로 달고 사는 제 오빠가 새언니와 합방하지 않았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잠자리가 시원치 않았나? 에이, 설마. 오빠와 잔 사람은 모두 황홀했다고……. 잠깐! 설마 오빠가 너무 아랫도리를 휘두르고 다녀서 고자가 되었나?!’
루펠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택에 도는 소문은 뭐란 말인가. 마르코스 유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던 ‘진저 그웬 토끼설’은…….
‘그래서 토끼설이! 기능에 이상이 생겨서!’
입을 떡 벌리고 있던 루펠라가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혹시…… 오빠와 문제가 생긴 건가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사람이 얼마나 못돼먹었어. 몸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고. 제 생각이 맞는 건가요?”
진저의 몸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건 진저의 몸으로 몇 개월을 지내온 엘리사가 가장 잘 알았다. 엘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남편은 아주 건강했다.
“아픈 데도 없으시고, 다치지도 않으셨어요. 아주 건강하신걸요.”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안 서냐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의 것이 얼마나 건강한지 또한 버켄 주점에서 확인한 바 있었다. 흥분으로 인한 존재감 키우기가 아니더라도 아침마다 곤란한 증명을 하기도 했고.
그 말에 루펠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네?”
“언니도 걱정되지만, 내 걱정도 되거든요. 오빠의 성 기능에 문제가 있으면 내 아이를 입양하려 들 테니까.”
루펠라가 빙긋 웃었다.
“오빠가 내 아이를 넘보는 건 싫거든요. 저도 입양아라서 잘 알아요. 사람의 시선이 어디까지 차가워질 수 있는지.”
“루펠라…….”
“안쓰러워해 달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저 그랬다는 것뿐이에요. 양부모는 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지만 유모로부터 넘치도록 사랑받았거든요.”
루펠라는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신분이 벽이 될 수 없다는 건 마피 부인에게서 배웠다. 마피 부인은 상냥한 말씨를 가진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불사해 줄 사람이었다.
그 단적인 예가 루펠라가 14세였을 때의 화장수 사건이었다. 사춘기였던 루펠라는 반항을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말괄량이였던 그녀의 반항은 일반 영애들과는 정도가 달랐다.
건달이라 부름에 부족함이 없는 귀족 영랑들과 어울렸고 사고를 치며 몸에 상처가 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 루펠라에게 마피 부인은 말했다.
‘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목숨밖에 협박거리가 없어요. 아가씨께서 또 건달들과 어울려 몸에 상처를 남긴다면 혀 깨물고 죽을 거예요.’
훌륭한 교육법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루펠라는 또 말썽을 부렸고 전보다 더 큰 상처를 달고 왔다. 그리고 며칠 후, 공작저는 뒤집어졌다.
마피 부인이 공작 부인의 화장수를 마셔 버린 것이다. 루펠라는 오열했고 진저는 생애 최초로 내저에서 고함을 내질렀다.
그건 마피 부인 나름의 비난이었다. 루펠라가 대놓고 상처를 입고 돌아와도 선대 공작 부인은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 루펠라가 어긋난 건 방임주의를 표방한 방치라는 학대 때문이었다.
죽다 살아난 마피 부인에게 진저와 조카인 라골은 소리를 쳤다.
‘이게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도 진저는 전장을 오가고 있었다. 소년답지 않은 위압감에 하인들은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했는데 마피 부인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공작 부인이 곤란해하시던가요?’
‘유모가 없으면 집안이 제대로 안 돌아가는데, 아무렴.’
‘도련님은요?’
‘말이라고 해?!’
마피 부인은 웃었다. 그리고 기가 죽어 있는 루펠라를 향해 손짓했다. 그녀는 말했다. 자신은 이런 방법밖에 모른다고. 쇠한 몸으로 아가씨께 경각심을 줄 수 있다면 열 번이라도 죽어줄 수 있노라고.
왜 이렇게까지 했냐고 묻는 그웬 남매에게 마피 부인은 대답했다.
‘도련님과 아가씨를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요.’
그 후로 진저와 루펠라의 인생은 바뀌었다. 루펠라는 건달 친구들의 만남을 그날로 정리했고, 진저는 믿음이란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피 부인의 일화를 말하던 루펠라는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엘리사를 향해 웃었다.
“대단하죠?”
“네…….”
“다른 사람들도 그러더라고요. 참 독하다, 얼마나 그웬가에 붙어 있고 싶었으면 그런 짓까지 하느냐. 내가 생각해도 그래요. 이상한 교육법이야.”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마피 부인이요. 피붙이도 아닌 아이들을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맞아요. 난 내 아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알아요. 유모가 나를, 그리고 오빠를 정말로 사랑한다는걸.”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달랐을까. 온전히 기댈 사람이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었다.
루펠라는 대다수의 타인과 전혀 다른 반응의 엘리사가 신기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표정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입양아의 생이란 각박하다고 안쓰러워하게 마련이었다.
그녀는 엘리사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 몰랐다. 엘리사는 삶을 가엽다, 덜 가엽다로 판단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지만,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다는 건 부정하지 않았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엘리사 자신도, 그리고 그웬 남매도 모두 녹록지 않은 삶을 산 것이다.
엘리사는 루펠라가 존경스러웠다. 삶이 어떤 길이었든 즐길 수 있다는 것, 나아감에 있어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건 존경받아 마땅했다.
“언니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제가요?”
“네. 정말 이상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호감이 가네요.”
“저도 루펠라가 좋아요.”
두 여성의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루펠라는 드물게 부끄러운 표정이었다. 차 시중을 들며 그들 대화를 엿듣던 콕스의 표정도 부드러웠다.
루펠라 아가씨가 저택 내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이야기하는 건 얼마 없는 일이었다. 마피 부인 앞에서나 볼 수 있는 아가씨의 부드러운 표정에 콕스는 흐뭇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엘리사의 물음에 루펠라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마음을 표현하는 게 두렵지 않나요? 거절당할 수도 있잖아요.”
“제가 아마 란델에서 가장 많이 차인 여자일걸요? 하루에 열두 번을 차여도 다음 날 또 매달려요.”
엘리사는 루펠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전에 듣기로는 그 사람, 그러니까 그레닉 경은 그녀와 아주 오랫동안 알아온 사이로 과거에도 미래에도 얼굴을 맞대야 하는 사이였다.
마음을 전하는 게 무서운 이유는 상대가 거절할까 봐 두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절로 인해 사이를 돌이킬 수 없을까 봐, 그래서 상처받게 될까 봐 불안한 것이었다.
루펠라에겐 그런 공포가 없는 걸까. 엘리사의 시선에 루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어요. 거절당한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난 그 사람이 다른 여자를 만나면 질투에 미칠 것 같아요. 내 옆자리에 그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어요.”
“상대에겐 루펠라의 마음이 버거울 수도 있잖아요.”
루펠라의 말에 수긍하기 어려웠다. 그녀에게 마음은 짐이었다. 행복을 바라는 순간 겨우 지켜왔던 탑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버겁겠죠. 나도 내 위치는 알아요. 주군의 누이, 예속 가문의 영애. 그런 여자가 매일같이 들이댄다면 누구라도 도망칠걸요. 하지만 난 안 돼요. 그 사람이 아니면 싫어. 그러니까 그 정도 버거움은 감당해야 해요. 반하게 한 사람이 나쁜 거니까.”
엘리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나한테 왜 잘해 줬어? 나한테 왜 다정하게 말을 붙여주었어? 외롭고 지친 사춘기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으니 홀딱 빠질 수밖에.”
루펠라는 뻔뻔하게 말했다. 턱을 위로 추어올린 그녀는 몹시 오만해 보였다.
“나는 그레닉이 아니면 싫어요. 그 사람이 아니면 말라 죽을 거예요. 내가 죽긴 싫으니 어째요. 자존심이 똥 밭을 뒹굴어도 매달려야지.”
흥, 콧방귀를 뀐 루펠라는 어쩐지 기가 죽은 새언니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고는 휘휘, 손을 내저어 콕스와 하녀들을 내보냈다.
“언니, 무슨 일 있죠?”
“아니에요.”
“오빠와 관련된 일인가요?”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엘리사가 대답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말해봐요.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잖아요.”
“…….”
우물쭈물하는 엘리사가 답답했던 루펠라가 눈을 홉떴다. 오빠 이게 또 무슨 짓을 한 모양이었다. 어제 순순히 돌아간 게 후회되었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집사 콕스와 라골, 그리고 하녀 몇이 달려들었던 건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엘리사는 당혹스러운 듯 몇 번이나 아랫입술을 물었다. 루펠라에게 제 상황을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사랑에 빠졌어요, 같은 말은 부끄럽기도 할뿐더러 동정만 살 뿐이었다. 루펠라조차 그녀의 오빠가 얼마나 이성의 애정을 귀찮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루펠라는 남편의 서류상 친족이라는 것 외에도 엘리사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였다. 처음으로 살가운 대화를 나눈 또래이기도 했고, 친구가 아니어도 그녀의 삶의 방식이 아주 보기 좋았다.
엘리사와 루펠라는 서로를 좋아했지만, 서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달랐다. 엘리사는 루펠라의 당당함이 좋았다. 루펠라는 엘리사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여자라 좋아했다. 서로를 좋아하는 이유가 다르다 보니 표현 방식도 달랐다.
“언니, 결혼한 친구들이 그랬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시댁 흉, 남편 흉이라고요. 우리는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잖아요? 재밌는 건 나눠야죠.”
루펠라가 엘리사를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새언니는 순진하고 귀여운 사람이었지만 간혹 숨이 막힐 만큼 답답했다. 돌이켜보면 항상 ‘고민’이라는 화제에서 말문을 닫았다.
‘분명히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거야.’
그녀는 새언니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다른 여자였으면 그웬의 이름을 이용해 야욕을 채우거나 제 배를 불리려 했을 터였다.
뭐, 본저의 일은 오빠인 진저의 몫이니 자신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공작 부인의 창끝이 겨눠지는 쪽이 마피 부인과 제 사람들이라면 달랐다. 그녀 또한 바짝 털을 세우고 새 공작 부인과 대립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달랐다. 루펠라의 입장에서 해도 되는 일, 해선 안 되는 일을 철저하게 구분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기꺼운데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 아주 사랑스러워서 만남이 기대되기까지 했다.
루펠라는 진정으로 엘리사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빠의 문제라면 닦달을 하든, 바닥을 구르든 도울 수 있었다. 그게 감정적인 문제라면 다를 테지만 루펠라는 엘리사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란델의 미친개였다. 만 명에 한 명도 우스울 대단한 미남이 그만큼 인기가 없는 건 이유가 있는 법이다. 작위를 이은 후엔 여자들이 그렇게 달려들었는데 이제는 진저 그웬 얘기만 나와도 가래침을 탁 뱉었다.
언니도 생각이 있는데. 언니는 순진해서 그렇지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길 리가. 만에 하나, 정말 천만에 하나 부부 사이에 감정이 생긴다면 오빠 쪽이 먼저이리라. 루펠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빠의 말투가 거슬려요?”
엘리사가 무어라 말도 하기 전에 루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나죠. 복장이 터져요. 나도 안다고요, 그거.”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어쨌든 문제는 있다는 거네요.”
엘리사는 고민했다. 어떻게 돌려 말해야 진심을 들키지 않고 루펠라의 궁금증도 가라앉힐까. 한참을 고민하던 엘리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제가 바라는 것과 그분이 바라는 게 차이가 있어서 곤란해요.”
“그럼 언니가 바라는 대로 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그분은 그걸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혹시 오빠를 때려죽이고 싶어요?”
“아니에요!”
엘리사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어때요? 사람의 이해는 항상 같을 순 없어요. 누군가 하나는 굽혀야 하는데 그게 왜 언니여야 해요? 언니는 참는 게 좋아요?”
참고 싶지 않았다. 호감이 사랑으로 변해 가는 과정 때문에 괴롭고 혼란스러워도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랑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오게 될 곤란한 상황들이 무서운 거지.
많은 철학가는 서술했다. 사랑은 몹시 숭고한 감정이며 아가페, 에로스를 떠나 사람이라면 누구든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고.
“언니가 오빠와 이혼하지 않는 한은 평생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하잖아요. 오빠가 못돼 처먹은 건 나도 잘 안다고요. 오빠는 들어주는 척하지만 결론은 항상 제멋대로 내는 사람인걸요. 그럼 언니는 평생 지고 살아야 해요.”
“부부 간에 이기고 지는 게 있을까요?”
엘리사의 모후인 리즈 왕비는 언제나 몸을 굽혔고, 입을 닫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보아준 적 없는 남편과 어떠한 마찰도 만들지 않았다.
어머니를 떠올리던 엘리사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직접 들은 적이 없으니 추측만이 가능했다. 아마 자신과 자신보다 소중한 딸, 그리고 형제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부왕은 유약하지만 사랑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분이셨다. 모후에겐 ‘혹시’라는 단어가 가장 무서웠을 것이다. 상사병으로 오늘내일하던 양반이니 어느 순간 홱 돌아 자신과 자신의 딸을 내몰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들었을 테니.
그럼 자신은 그런 어머니가 보기 좋았나? 이건 아주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 부왕의 앞에서 어머니의 허리와 고개는 들릴 줄을 몰랐다. 어릴 적에도 궁금했다. 어머니는 왜 항상 약자인 걸까.
“이기고 지는 게 없어도 참지 않는 사람과 참는 사람은 있잖아요. 언니는 왜 참으려고만 해요?”
그제야 엘리사는 제 두려움의 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다시 그란디아로 돌아가게 될까 봐.’
제가 남편의 사랑을 원한다면 그는 어떻게 나올까? 피할 것이다. 당혹스러워할 테고 그녀는 남편에게 곤란한 짐 덩어리가 될 것이다. 그럼 남편은 제게 이혼을 강요할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짐이 되지 않는다면 괜찮아.’
그는 그녀에게 기대도 좋다고 하였다. 그녀 하나쯤은 기대도 되는 사내라 호언장담을 했단 말이다.
“언니? 언니!”
“……만약에, 만약에요. 꽃인 줄 알고 산 씨앗이 꽃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꽃이 아니면 뭔데요? 야채 같은 거요? 가지나 토마토, 뭐 그런 걸 말하는 거예요?”
“네.”
“아쉽긴 하지만 이미 심었다면 어쩔 수 없죠.”
루펠라는 모를 소리만 하는 엘리사가 걱정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땅만 보며 침묵하고 있던 엘리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렇죠? 어쩔 수 없는 거죠?”
그와 자신은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다. 혼약 서류에 서명을 했고 신관 앞에서 평생 부부로 살아가겠노라 맹세했다.
분에 넘치는 욕심을 갖는다면 몰라도, 아니, 갖더라도 그에게 강요만 하지 않는다면…….
‘루펠라의 말이 맞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옆자리는 이미 그녀의 것이었고, 그가 사랑하는 여성이 생기지 않는 한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없으면 강탈하는 세상이잖아요. 물욕에 눈이 멀어 살인까지 하는걸. 몇 푼으로 살인을 방조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으며, 돈 있는 자들에겐 처벌조차 하지 않는다고요. 그런 세상에 사는데 몇 개쯤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가지면 뭐 어때?”
엘리사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언니는 좀 이기적으로 굴 필요가 있어요. 오빠 같은 자기중심의 중봉을 데리고 살기엔 사람이 너무 양심적이야.”
엘리사는 일생 단 한 번도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 욕심이 불쑥 고개를 들라치면 레이라 부인을 비롯한 이들이 그녀의 욕심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러니까 그들에게서 벗어난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호감은 괜찮아.’
사랑으로 변한다 하더라도 그녀를 손가락질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사 직전의 사람 앞에 달콤한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내 것이라 이름까지 쓰여 있었다. 그는 그웬 공작이고, 자신은 그웬 공작 부인이니까.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못한다.
“저기, 루펠라.”
“네.”
루펠라는 제게 말을 거는 그녀가 반가운지 화색을 띠웠다.
“각하는 어떤 분이시죠?”
“오빠요? 세상 사람들이 다 알잖아요.”
루펠라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이기적이고, 못돼 먹고, 사람 귀한 줄 모르고,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다고 믿는 남자예요.”
그동안 당한 게 많은지 목소리에 울분이 담겨 있었다.
그래, 자신은 그런 사람의 아내였다. 조금쯤은 닮아도 괜찮아. 루펠라와의 대화에서 얻은 이치는 그녀를 변화시켰다. 배덕감 따위는 씻은 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설렘이 들어앉았다.
밝아진 엘리사를 본 루펠라가 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팔짱을 꼈다.
“혹시 모의 전투 때문이에요?”
그건 아니었다. 변명거리를 생각하던 엘리사가 타이밍을 놓치자 루펠라가 버럭 소리쳤다.
“모의 전투 때문이구나! 언니, 당연히 나가야 해요. 망구들이 얼마나 입방아를 찧겠어요!”
그녀가 말하는 망…… 구들이란 게 정확히 누굴 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았다. 평생을 견뎌온 게 시선이었다. 타인의 악의를 견디는 대회가 있다면 필시 우승은 그녀의 차지일 것이다. 엘리사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언니가 몰라서 그래요. 작가도 그런 작가가 없다니까요. 그웬 공작이 바람났다느니, 역시 곱게 자란 공주님 손에는 잡히지 않는 남자라느니 오두방정을 떨 거라고요. 또 제 손녀나 조카들을 갖다 붙이려고 눈이 벌게질 텐데. 그 꼴을 어떻게 봐요?”
다른 건 괜찮지만 마지막만은 용인할 수 없었다. 미간을 좁힌 엘리사가 주먹을 앙당그레 쥐었다.
“오빠는 내가 아니면 답이 없어요. 이 집안에 다른 여성은 없으니까요. 아니면 먼 친척뻘 되는 레이디를 섭외해야 하는데 빚 만드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하고 싶어요.”
“그래요!”
“제가 할래요!”
“네! 언니가 해요!”
“각하를 보러 가야겠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결정권자의 의사는 무시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의욕에 불타는 엘리사를 본 루펠라는 흐뭇하게 웃었다. 점점 더 새언니가 마음에 들었다.
* * *
티타임을 마친 엘리사는 계획대로 남편을 찾았다. 그는 가신들과 회의 중이었는데 차마 회의 중간에 들어갈 수 없어 문 앞에서 서성댔다. 복도를 지나던 라골이 몇 마디 말을 붙였지만, 그녀는 대충 대꾸만 하며 남편에게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라골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엘리사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첫 강의 때 빼고는 상대방 말을 흘려들었던 적이 없는 분이셨다. 어제 그와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하기야 진저 그웬이 제 침대에 타인을 재울 정도였으니 무슨 일이 있을 만도 했다.
“마님이 오셨다고 알릴까요?”
“아뇨.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녀는 작은 동물 같았다. 여성의 평균 키를 웃돌았지만 워낙 유순해서 그런지 공작 부인다운 위용은 없었다. 그건 좋은 뜻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현명하게 집안을 이끌고 있지만 추후엔 어찌 될지 모르는 법.
라골은 마피 부인의 치료가 진전되는 대로 그녀와 공작 부인의 만남을 추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참,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다음 달부터 2주가량 강의는 무리일 듯싶습니다.”
“왜죠?”
“모의 전투 시기가 예상보다 빨리 잡혔습니다. 가문에서 중히 여기는 이벤트 중 하나라 고용인들도 준비할 게 많습니다. 저도 연무장을 살펴야 하고요.”
“아아, 그렇군요.”
모의 전투는 엘리사의 예상보다 큰 행사인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평소와 달리 내저에 드는 사람이 많았다.
저도 무언가를 도와야 하는 게 아닐까. 일단 모의 전투의 ‘꽃’ 역할부터 상의를 해야 하는데.
고민하던 엘리사는 저를 멀뚱히 보고 있던 라골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은 크게 바쁘지 않습니다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저보다 집사님이 편하실 텐데요.”
라골은 고용인이었지만 신분도 그렇고, 예전부터 그웬 남매와 피붙이처럼 지내왔기에 그저 그런 하인과는 입장이 달랐다. 라골을 알게 된 후 집사 콕스에게 들었던 첫 조언도 ‘라골만큼은 다른 고용인과 다르다’는 말이었다.
라골이 안다면 괜한 오지랖이라 화를 내겠지만 콕스는 라골보다도 마님을 위하여 주제넘은 조언을 한 것이었다.
라골의 고용인답지 않은 기품은 귀족들의 심기를 빈번히 건드렸다. 선대 공작 부인의 조카들도 간혹 저택을 찾을 때마다 라골을 찍어 누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럴 때마다 루펠라가 파르르 눈을 까뒤집었다. 라골은 루펠라에겐 또 다른 오빠였다. 한번 마피 부인에게 호되게 혼이 난 뒤로는 조심하는 것 같지만, 마님께서 라골을 잡으려 든다면 집안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 터였다. 지금이야 뭐, 둘도 없는 시누올케 사이가 되었다지만.
“라골은 내 스승이죠?”
“……분에 넘치는 직함입니다.”
마님의 이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어린아이가 말썽을 부리지 전에 보이는 눈빛처럼 반짝였다. 라골이 오싹함에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가르쳐 줘요. 내겐 각하를 설득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해요.”
“모의 전투를 이르십니까?”
한차례 모의 전투로 인한 불화가 있었다는 건 이미 어젯밤에 들었으므로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네.”
내저는 안주인의 소관이었다. 그 말은 진저가 없는 자리에선 엘리사가 곧 법이라는 소리였다. 라골이 그녀의 청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와 마찰을 빚을 각오를 한다면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루펠라가, 또 모든 고용인이 그러하듯 엘리사는 라골에게도 대단히 만족스러운 주인이었다.
“제가 아는 한에서라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곧장 서재로 향한 그들은 오전 내내 상의를 거듭했다.
“이건 어때요?”
“주인님이시라면 이렇게 대답하실 겁니다.”
“그럼 저건요?”
“약합니다.”
라골은 훌륭한 교사였다. 건국사부터 자잘한 관습까지 모르는 게 없는 그는 남편과의 대거리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사료에 따르면 결혼 후 첫 모의 전투에서 공작 부인이 참여하지 않은 건 단 세 차례에 불과합니다. 임신 중이었던 분이 두 분, 결혼 후 불화로 이혼을 하신 분이 한 분이십니다.”
“전 임신 중도 아니고 이혼을 할 정도로 당신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니 참가해야 한다고 할까요?”
라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이 막히면 어쨌든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리실 겁니다. 말할 틈 없이 몰아붙이셔야 합니다.”
“감정에 호소해 볼까요?”
“주인님의 별명을 잊으셨습니까?”
란델의 미친개. 개도 침을 뱉을 인간 말종. 엘리사가 잘못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라골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리더니 루펠라가 등장했다. 밖에서 듣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녀 또한 몇 시간 전의 엘리사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뭘 고민해. 내가 튀면 되지.”
엘리사가 얼른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싸움이 날 거예요.”
“내가 오빠랑 한두 번 싸우는 것도 아닌데요, 뭘.”
“그렇지만…….”
“제 생각에도 이 방법뿐입니다.”
라골의 말에 엘리사가 눈을 크게 떴고, 루펠라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화통하게 웃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야 좀 말이 통한다는 듯 라골의 어깨를 두드렸다.
라골과 엘리사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진저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루펠라가 사라지지 않는 한은 어떤 억지를 써서라도 불허를 외칠 것이다.
“별다른 수가 없어야지 마님의 말씀을 들어주실 테죠.”
“그럼 난 펠길 사원에서 좀 쉬다 올래.”
“펠길 사원은 그웬령과 가깝기 때문에 금세 잡히실 겁니다. 가실 거면 카르트령이 어떠십니까?”
카르트령은 선대 공작 부인의 친정이었다. 진저의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망치려는 이들이 있는 곳이라 진저 또한 쉬이 수색대를 내려보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럼 쉴라 계집애나 놀리고 와야지.”
정보에 밝진 않지만 그웬가의 소문을 아예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결혼을 하기로 한 뒤엔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문이 있었다. 현 그웬 공작이 사생아라 선대 공작 부인의 가문에선 그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고.
모의 전투 때문에 루펠라를 카르트 령으로 내려보낼 순 없었다.
“그건 제가 허락할 수 없어요.”
루펠라는 그웬가에 입양되긴 하였지만 자신은 본래 카르트가의 사람이라 그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며 엘리사를 설득했다.
“모의 전투의 ‘꽃’이 되고 싶은 건 사실이에요. 할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귀부인들이 그에게 다른 여자를 소개시킬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전 그웬 공작 부인이에요. 남편에게 해가 될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게 옳아요. 루펠라와 라골에겐 진심으로 고마워요.”
엘리사는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두 손을 얽어 꼼지락댔다.
“전 누군가와 이렇게 편하게 얘기한 적이 없어서 여러분과 대화하는 게 즐거워요. 그러니까 제 말이 불쾌하다면…….”
혹여나 그들의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이다. 그녀의 말에 시선을 교환하던 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언니! 카르트령엔 해마다 한 번은 꼭 내려갔어요. 내려가지 않으면 외숙이 들들 볶거든요. 우리 설명이 부족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물론 카르트 후작이 그녀를 찾는 게 오로지 조카를 보고 싶기 때문은 아니었다. 루펠라는 생각이 깊은 편이 아닌지라 살살 구슬리면 그웬가의 정보를 빼낼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루펠라가 카르트령에서 속 편하게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같은 피가 흐르는 카르트가의 사람들보다 호적상이긴 하지만 평생 함께 지낸 진저를 더 가깝게 여겼다.
“언니가 걱정할 만도 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루펠라와 엘리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골이 졌다는 듯 양손을 위로 올렸다.
“방법이 있긴 합니다.”
되도록 쓰고 싶지 않았지만 도리가 없었다.
“포르테 공작 부인과 만나신 적이 있으시지요?”
4공 부인이 모두 모이는 모임에는 제가 아닌 진저가 갔었다. 그녀는 부인들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라골과 루펠라가 있는 자리에서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었다. 엘리사의 난처한 표정을 라골과 루펠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포르테 공작 부인을 보았던 모임에서 그녀의 며느리인 백작 부인 또한 보았을 것이다. 그럼 그 유명한 포르테 고부지간 기 싸움까지 목격했을 거다. 그들은 순한 엘리사가 당혹스럽게 여길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작년부터 모의 전투에 포르테 공작 대신 장남인 게일 포르테가 나서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님과 사사건건 맞붙는 자지요.”
루펠라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린 시절부터 모사꾼의 싹이 보이더니 이젠 아예 안주인 책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다른 시누이라면 역정을 부릴 일이었는데도 루펠라는 그저 흐뭇했다. 그녀는 진저 그웬 엿 먹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여자였다.
“마님이 불참하신다는 걸 은근히 흘리십시오.”
“네? 하지만 저는 포르테 공작 부인과 그다지 친분이 없는걸요.”
“그럼 내가 할게요. 마침 다음 달에 포르테 백작 부인이 참석하는 파티에 초대받았거든요.”
엘리사는 그들의 대화에 따라갈 수 없었다. 모의 전투에 불참한다는 소문을 내라니. 제 바람과는 정반대지 않은가.
“포르테 공작 부인이 며느리를 들들 볶는 이유가 손주 때문이에요. 갖은 보약을 다 먹여도 애가 안 선다면서 아주 난리래요. 그런데 여기서 언니가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봐요.”
“……임신인 줄 알겠군요.”
“네. 그럼 포르테 공작 부인은 며느리에게 더 난리를 치겠죠. 은근히 아들이 오빠에게 못 미친다는 말을 신경 쓰고 있거든요. 새로 들어온 그웬 공작 부인은 애도 척척 잘 들어서는데 넌 뭐 했냐, 대체 잘하는 건 뭐냐 잔소리를 하면 며느리는 약이 바짝 오를 테고요.”
루펠라는 킥킥대며 말을 이었다. 포르테 백작 부인은 시모에게 당한 걸 남편에게 그대로 풀 것이다. 게일 포르테는 그대로 열이 받아서 진저에게 시비를 걸 게 뻔하다. 이건 언제나 되풀이되는 일이니 보지 않아도 결과가 훤했다.
“게일 포르테도 사람 성질 긁는 데엔 일가견이 있거든요. 임신한 거냐, 축하한다, 좋은 시절 다 갔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결국 공처가가 되었냐.”
진저는 임신이 아니라고 반박할 터였다. 사생아가 그웬가를 잇게 된 건 그를 제외한 계승권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진저의 입장에선 행운이었지만 남들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진저와 루펠라가 살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웬가의 저주’였다.
공작 부인은 석녀에 장자는 사생아, 딸은 입양아, 그렇게 아랫도리를 신나게 내돌렸던 선대 공작도 진저 외엔 더 이상 자식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신이 그들 가문을 저주해 아기를 내려주지 않는다며 입을 놀렸다.
안 그래도 본저의 작위를 노리고 있는 친인척은 널려 있었다. 물론 지금의 그웬가는 많이 자리가 잡히긴 했다. 하지만 아직까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굶주린 승냥이들에게 먹잇감을 내려줄 수는 없단 말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엘리사는 ‘아, 자존심을 자극하면 내가 모의 전투에 참가할 수도 있다는 말이구나’라며 수긍했다.
루펠라와 라골이 모르는 것도 있었다. 진저와 엘리사는 이미 저주인지 마법인지 모를 현상 때문에 몸이 바뀌었다. 그의 입장에선 가문의 저주 어쩌고 하는 소문은 이전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카르트령에 내려가는 것보다는 이쪽이 낫습니다. 임신이야 오해라고 둘러대면 되지만 카르트령에 내려가 실수를 하게 되면 본저에 큰 피해를 입힐 테니까요.”
루펠라는 자신을 어떻게 보는 거냐며 라골을 타박했다.
“만약의 경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언니 모의 전투에는 꼭 참가해야 해요.”
“예, 마님.”
그들의 눈에 비추는 열의는 엘리사를 당황시켰다. 뭔가 이상했다. 엘리사가 들을 입방아를 염려해 준다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나요?”
루펠라가 난처한 듯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기는 라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골랐다.
“주인님과 마님께서 살갑게 지내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뭔가 있어.’
이를 모를 정도로 평탄한 삶을 살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오직 그녀를 위해서라기엔 루펠라의 반응이 과했다. 라골 또한 이런 일에 무리수를 둘 사람이 아니었다.
빤히 그들을 쳐다보던 엘리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저 둘은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좋은 사람들이었다. 저토록 좋은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겠지. 엘리사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 후로 삼 주가 흘렀다. 부부 사이는 점점 더 좋아졌다. 엘리사는 고민을 정리한 뒤로 그를 피하지 않았다. 진저 또한 모의 전투에 참가하겠다는 고집을 굽혀준 아내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의 격의 없는 농담은 가끔 엘리사를 토라지게 했지만,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단순한 여자가 되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마음을 풀고 주변 사람들이 사르르 녹도록 눈꼬리를 접었다.
“초콜릿이 그렇게 좋나?”
오늘도 부부는 휴식 시간을 함께 보내는 중이었다. 진저는 턱을 괸 채 초콜릿 케이크를 먹고 있는 엘리사에게 말했다.
“란델의 디저트는 정말 훌륭해요.”
“그래, 얼마나 훌륭하면 열흘을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겠어.”
“……엿새째예요.”
“엿새 동안 점심, 저녁으로 챙겨 먹었잖아.”
“어젠 자몽 샤베트를 먹었어요.”
입술을 삐죽 내민 엘리사가 종알거렸다. 근래 엘리사는 이전보다 말을 받아치는 횟수가 늘었다. 신기한 건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그녀가 귀여워 보였다.
“철도 아닌데 자몽은 어떻게 구한 거야?”
“지나가는 말로 자몽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마침 있었나 봐요.”
빈 찻잔에 차를 따르던 콕스는 허벅지를 쥐어짜며 웃음을 참았다.
‘마님께서 자몽이 먹고 싶으시단다!’ 그 한마디에 고용인들 모두가 얼마나 분주하게 뛰어다녔는지 모른다. 주인이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하나같이 난리였다.
사람 좋은 콕스마저도 상보다 벌이 사람을 성실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벌이 없으면 마음이 해이해지고 마음이 해이해지면 실수로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마님의 방식은 초반엔 통할지 몰라도 결국 불상사를 낳게 되리라. 그는 후일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게 웬걸. 선대 공작 부인 때도 그랬지만 마피 부인이 내저를 지휘하고 있을 때도 고용인들이 이만 한 충성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누가 나서서 다그치는 것도 아닌데 고용인들은 성실해졌고, 그로 인해 일의 능률이 올랐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게을러서 유심히 지켜보던 자들 역시 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말에 그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마님이 제 생일을 아시더라고요.’
‘화상으로 고생했는데 마님 쓰시던 좋은 약을 주셨어요.’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하는데 이런 신분을 물려줘서 제대로 교육도 못 시켰거든요. 그런데 마님이 괜찮은 아카데미를 알아봐 주셨어요.’
제 이름을 아는 주인은 있어도 제 생일과 다친 곳, 그리고 아들을 아는 주인은 없었다.
공작저 고용인들은 어느 곳보다 고액의 급료를 받았다. 공작저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도 다음 취직처를 찾는 게 빠른데, 미래가 보장되는 만큼 공작가는 까다로운 일터였다.
좋은 주인에 좋은 조건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님이 내저를 지휘하는 방식을 보고 콕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벌보다 믿음과 기대로 인해 성장한다는걸.
콕스는 엘리사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콕스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무조건 외웠다. 저 사람은 어제 발목을 다쳤어. 저 사람은 바느질 솜씨가 좋아. 그러다 보니 의외의 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엘리사는 입술에 초콜릿이 묻은지도 모르고 케이크에 집중한 상태였다. 진저는 픽 웃으며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훑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얼른 허리를 뒤로 뺐다.
“뭐 하시는 거예요!”
화르륵,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목소리까지 높이며 그를 다그쳤다. 닦아줄 생각이었는데 아내가 이렇게 나오니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진저는 날름 혀를 내밀어 초콜릿이 묻은 손가락을 핥았다.
“얼마나 맛있으면 정신이 없는지 궁금해서.”
“당신 몫으로 하나 더 내오라고 하면 되잖아요…….”
“뭘 그렇게 화내.”
‘심장이 터질 뻔했으니까요!’
엘리사는 속으로 꽁알거렸다.
“……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교양 없다고 생각하면 어떡해요.”
진심을 말할 순 없어서 가까스로 생각해 낸 말이었다.
진저는 아내의 새초롬한 태도가 재밌었다. 첫 수련에 나섰을 때 어느 남쪽 섬에서 보았던 화초 같았다. 톡 건들면 쏙 잎을 접어 숨기고, 인기척이 없을 때를 노려서 다시 이파리를 펼치는 식물은 수련 내내 진저의 가장 재미난 장난감이 되어주었다.
“부부 사이에 나눠 먹을 수도 있지. 난 원래 교양 같은 건 없는 놈이야.”
“자꾸 놀리실 건가요?”
“귀여운데 어떡해.”
아내는 어릴 적 보았던 그 식물을 똑 닮았다. 가만히 두면 저택을 살필 때 외엔 화초처럼 입 한 번 열지 않았고, 건드리면 쏙 숨어버렸다.
그래도 그 식물과 다른 점도 있었다. 사과인가 싶을 정도로 새빨개지는 것. 아내가 붉어지는 게 재밌어서 자꾸 심술궂은 말만 나왔다.
“수국이 그렇던가. 비가 오면 색이 변하잖아.”
“아, 그 꽃이 수국인가요?”
화를 오래 못 내는 점이 가장 귀여웠다. 그는 화제를 돌린 것만으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중하는 아내가 우스워 배를 잡고 웃었다.
“당신은 비도 오지 않는데 빨개지고, 하얘지느라 바쁘군.”
“……놀리시는 거죠?”
“칭찬은 아니겠지.”
“정말!”
결국 터져 버렸다. 엘리사가 그 좋아하는 디저트도 남겨 두고 몸을 일으켰다. 씩씩대며 제 방으로 향하는 아내의 뒷모습에 진저는 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하녀들이며 콕스까지도 미소를 띠웠다. 가면 갈수록 보기 좋아지는 부부는 고용인들의 새로운 자랑이 되었다. 다른 가문에서 일하는 친구에게도 어찌나 자랑을 늘어놓는지 지겹다며 혀를 내두르는 경우도 있었다.
콕스에게도 주인 내외의 다정함은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딱히 입단속을 조심하지 않았더니 수도엔 어느새 그웬 공작 부인이 미친개에게 목줄을 단단히 채웠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뒷정리를 하던 콕스가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진저에게 말을 붙였다.
“하인들부터 기사님들까지 마님 친위대가 되었습니다.”
진저도 훈련에 참관하면서 아내 칭찬을 많이 들었다. 특히 기사들의 식사 품질을 높여준 게 엘리사의 공임을 알게 된 후로는 저보다도 아내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것 같았다.
아내 칭찬을 듣는 것은 색다른 기분이었다. 하녀들이 제가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아내 칭찬을 재잘재잘 떠들면 기분이 좋은데, 시커먼 사내놈들이 ‘우오오, 마님!’ 하는 꼴을 보면 엿 같았다.
“두 분 사이가 다복해지셔서 기쁩니다.”
진저는 집사의 수다를 막지 않았다. 그건 그 또한 기꺼웠다. 이전에는 입을 꿰매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 없었는데 이제 제법 앙큼한 말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아내로 인해 자주 웃게 되었다는 걸 인정했다.
일 때문에 심사가 꼬여도 아내를 놀리다 보면 기분이 풀렸다. 그래서 진저는 화를 내는 횟수가 적잖이 줄어들었다.
“마님께서도 주인님을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물론 주인님께서도. 뒷말을 삼킨 콕스는 푸스스,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집사는 이전에도 오지랖을 지병처럼 앓았다. 능글맞은 웃음은 거슬렸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집사의 의견에 동의하기도 했다.
아내는 제게 마음의 문을 연 상태였다. 저 또한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아내와 저는 좋은 동반자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사가 생각하는 것 같은 이성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고용인들의 추측을 정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화목하다고 여기는 쪽이 아내에겐 도움이 될 터였다.
남편을 두고 방에 올라온 엘리사는 또 한바탕 씩씩거려야 했다. 이제 슬슬 날이 풀려 드레스룸 정리를 시켜 놓았는데 저는 본 적도 없는 속옷이 서랍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엘리사를 기함시켰던 망사에 꼬리 달린 팬티뿐만이 아니었다. 속옷인지 아기 턱받침인지 모를 끈으로 된 팬티, 속이 훤히 비추는 속옷 세트며 이상한 동물무늬의 속옷은 태그도 떼지 않은 채 처박혀 있었다.
‘이 사람이 진짜!’
포장도 뜯지 않은 속옷은 그렇다고 치자. 턱받침 같은 끈 팬티는 세탁을 했는지 그웬가에서 쓰는 세제 향기가 났다. 그렇다면 남편이 입어봤다는 건데 다른 속옷이 많은데도 왜 굳이 이 망측한 것들을. 하녀들이 보았다고 생각하니 엘리사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뭐 하는 거야?”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씩씩대고 있는 엘리사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움의 원흉인 남편이었다.
그녀는 바구니에 정리된 망측한 속옷을 가리켰다.
“이게 뭐예요!”
“뭐긴 속옷이잖아.”
“제 속옷이 아니라고요!”
“그럼 루펠라의 것과 섞였나 보지.”
새빨개져서 화를 내던 엘리사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괜히 화를 내서 미안한 듯 고개를 수그렸다.
“오…… 해해서 미안해요.”
파하, 하는 소리와 함께 진저가 배를 접었다. 오늘만 몇 번째를 웃는지 모르겠다며 꺽꺽거리는 그를 보던 엘리사가 속옷 바구니를 돌아보았다.
“루펠라의 속옷이 아니군요!”
당연하지. 루펠라가 제2저로 나선 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 녀석 몫의 방이 있긴 하지만 묵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다 진저가 직접 사들인 속옷이었다.
“당신 취향 이상해요!”
“말했잖아. 어울린다고.”
“전 싫어요! 평범한 게 좋다고요.”
진저가 느물느물 웃으며 빨래 바구니 속 그녀의 속옷을 집었다.
“당신이 입으면 다른가. 내가 보기엔 별것 없는데.”
순백색의 팬티와 브래지어를 각각 들어 올린 진저가 ‘어디 한번 봐주지’ 하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엘리사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남편의 심술 맞은 농담은 언제나 곤란했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이런 종류의 농담이었다.
그는 사슴을 몰아넣을 때처럼 슬금슬금 아내에게 다가갔다. 엘리사는 ‘오지 말아요’, ‘소, 속옷을 왜 궁금해하는 거예요!’ 하고 반항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에게 잡혀 버렸다.
“남편이 아내 속옷을 궁금해할 수도 있지.”
어깨를 잡힌 그녀가 그를 떨쳐 내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그녀가 속옷을 보여준다면 냉큼 구경하는 자세를 취하겠지만, 강제로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짓궂게 구는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내는 정말이지 귀여웠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모시고 사는 놈들이 이해가 갔다.
뽈뽈 걷는 것도, 털을 곤두세운 채 경계하는 것도, 그러면서 시선을 주지 않으면 주위를 졸랑졸랑 쫓아다니는 것까지 모두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는 푸, 하고 실소를 흘리며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엘리사는 심장에 이상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의 몸에 닿을 때면 주변 소음이 작아지고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콩닥거렸다.
이상한 건 그렇게 당황스러운 데도 그의 손길이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되레 그 순간이 지나가면 마음이 들뜨고 행복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콕스의 목소리에 엘리사와 진저가 시선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