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절대 들키지 않아야 해
많은 일이 있던 모임 날로부터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몸이 되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웬저는 언제나 고요했다. 한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날 이후 엘리사는 노골적으로 진저를 피했다. 식사는 물론이거니와 몸이 바뀐 뒤로 언제나 함께하던 오전 시간마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싶다는 핑계를 댔다.
첫날은 그 전날 있었던 일이 많이 부끄러웠나 보다, 하여 넘어갔지만 그게 이틀, 사흘, 나흘이 넘어가니 진저도 슬슬 기분이 상했다.
그는 오늘도 자신을 피해 달아난 아내를 찾아 서재로 향했다. 오늘은 용건이 있었다.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일이 있어도 의견을 교환하지 못했다.
서재에 들어 가장 처음 보이는 건 바닥에 쌓여 있는 책이었다. 깔개도 없이 바닥에 앉은 그녀 곁에도 몇 권이나 되는 책들이 쌓여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놀란 엘리사의 어깨가 들썩였다.
“아…….”
진저가 인상을 쓰며 바닥에 있던 책 몇 권을 집어 들었다. ‘사랑은 콩깍지로부터 시작된다’, ‘외사랑의 정의’, ‘이별의 정석’, ‘마음 정리’. 모두 별 거지 같은 제목의 책이었다.
‘이따위 책이나 읽으려고 날 피한 건가.’
그는 심사가 꼬여 있었다. 책을 대충 테이블 위에 던진 그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이름은 무려 ‘사랑 따윈 믿지 않아’였다.
“바람났나?”
“네?!”
“그럼 왜 그렇게 사랑 타령하는 책들만 읽는 건데?”
“그냥 재미 삼아…….”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진저는 왜 부부의 대화가 매번 이런 방향으로 흐르는지 모르겠다는 듯 손으로 머리를 흩뜨렸다.
고용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라고 말한 건 제 쪽인데 늘 그녀를 야단치듯 구는 쪽도 저였다.
“라골이 문화 수업을 하자더군.”
그러고 보니 수업을 청한 이후 몸이 바뀌는 바람에 라골에게 일정을 미뤄 달라 말해놨었다.
“참.”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지, 하고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먼저 청했는데 안 하겠다는 것도 웃기잖아. 수업이 필요하기도 하고.”
“하지만 몸이 바뀌었잖아요. 당신 몸으로 받을 수는 없어요. 아, 혹시 라골에게 이유를 설명하실 건가요?”
“그럴 리가.”
이 일은 진저가 사생아라는 것보다 더 큰 약점이 될 것이다. 라골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아는 사람이 늘게 할 수는 없었다. 이 일과 관련된 사람이 많을수록 단속이 어려워질 터였다.
“그럼 어쩌죠……?”
진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심술이 샘솟았다. 이 문제만 의논하고 나면 또 정신없이 도망 다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함께 받지. 하루에 한 시간씩이랬나?”
엘리사가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싱숭생숭한 마음이 정리되면 모를까 지금 이 상태에서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건 곤란했다.
진저의 심술에 곤욕스러운 건 엘리사뿐만이 아니었다.
아랫것들은 살기 위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등 수많은 이유로 눈치를 갈고 닦았다. 말 한 마디, 시선 한줄기에도 군림하는 자를 알아보는 것, 그것이 귀족의 고용인으로 살 수 있는 최우선 덕목이었다.
진저 그웬은 그웬령의 왕이자, 그웬저의 황제. 그웬가에서 녹봉을 받는 이들에겐 란델의 왕보다도 까마득하게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근래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내였다.
그웬가의 새로운 공작 부인은 결혼 초의 겸양이 포말인 양 사라지고 또 다른 진저 그웬이 되었다. 왕처럼 군림한 것은 아니었으나 변화한 그녀에게선 왕만 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영혼이 바뀌었기 때문이었지만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 주변인들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웬령의 왕과 왕만 한 위압감을 뿜는 여왕의 지시라면 아무리 라골이라 해도 거절은 불가피했다. 그는 등 뒤엔 진저의 모습을 한 엘리사를, 맞은편엔 엘리사의 모습을 한 진저를 둔 채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라골의 등 뒤에서 진저와 마주 본 엘리사는 내도록 갑갑한 표정이었다. 싫다는 그녀에게 ‘그래? 그럼 수업 내용은 알려주지 않아도 되겠지’ 하며 느물느물 협박하는 통에 도리가 없었다.
다시 몸이 바뀌면 수업은 제가 받아야 할 테고, 이 나라의 문화를 알아야 본격적인 사교 활동이 가능했다. 엘리사는 얄미운 남편을 흘기며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라골은 수업 시작 전부터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는 안주인, 그러니까 진저를 보고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은 다른 날과는 다르게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었다. 제 등 뒤를 보면서 묘한 눈을 하는 게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기본적인 것들은 정리해 온 자료를 통해 숙지하시면 됩니다. 자료는 그란디아뿐 아니라 그란디아에 인접해 있는 국가의 관습과 유사한 것들이고, 낯설 수 있는 문화는 설명을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진저는 대답을 하면서도 아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진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라골은 평소와 다른 그웬 공작의 표정을 보고 잠시 미간을 좁혔다.
힐튼 후작 부인의 모임에서 시작된 기이한 소문은 단 하루 만에 수도를 뒤덮었다.
란델의 미친개, 진저 그웬이 공처가가 되었다더라. 아내라면 기도 못 펴고 깨갱이더라. 오죽 아내에게 잡혀 살면 모임 장소까지 친히 와주었겠는가.
그 아내는 말 한 마디로 남편을 휘어잡는 여장부더라. 소문을 들은 저택의 고용인들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직접 보니 아예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아니었다.
란델의 미친개, 개는 미쳐서 침을 흘리지만 그웬가의 개자식은 미친 척도 하지 않고 거품을 문다, 시야에 드는 순간 사망 확정 등이 진저에 대한 평가였다.
그런 그가 아내의 눈빛에 기도 못 펴다니. 오랜 세월 진저를 보아온 라골마저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릴 광경이었다.
엘리사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라골의 미심쩍은 시선도 당혹스러운데 저를 도와야 할 남편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다.
그저 며칠 피한 것뿐이었다. 20년이 넘도록 보아온 제 얼굴에 가슴이 콩닥거리는 게 황당해서. 이 마음이 제가 의심하는 그것일까 두려워서.
엘리사는 인내하는 것에 능숙했다. 그러나 제 감정에 둔감한 편은 아니었다. 제가 남편을 볼 때 가슴이 뛰는 것,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 남편 앞에서는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것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렸다. 이건 호감이었다. 책에선 호감을 이렇게 서술했다.
사랑의 시작이라고.
그녀에게 첫 호감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호감이 흐르고 흘러 종착지에 닿는다면 남편과 제 사이엔 큰 균열이 생길 터였다. 다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깊은 골.
엘리사는 스스로에게마저 지나칠 만큼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쁜 편이 아니다. 하지만 이성의 호감을 단번에 끌어낼 만큼 매력적이진 않았다.
물론 외모가 사랑의 전부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남편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육욕의 부산물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빠져 버린다면?
그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스무 해를 갓 넘긴 생이지만 그녀를 지치게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숱한 고난은 재해와는 다른 것으로 타의에 의한 경우가 빈번했다.
십 대 소녀가 타인의 악의를 견딜 수 있었던 까닭은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마다 생각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낮추었고 악의는 자연의 섭리로 여겼다. 사람이 질투를 할 수도 있지. 사람이니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는 거지.
혹자는 그녀를 한심하게 여기고, 혹자는 그녀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나 세간의 관심 따위는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어릴 적에는 뜨겁게 분노했을 때도 있었다. 지금과 사뭇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았던 것도 같다.
그래도 성장 후엔 달랐다. 제 고통 따위는 그들 술자리의 안주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노를 온전히 완전히 삭여 재로 만드는 것이 어디 쉽다던가. 아주 가끔은 그 어릴 적처럼 분노했고 고통스러웠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단어는 오직 한 가지였다.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굳이 죄를 따지자면 딸자식보다 연인이 소중한 부친 밑에 딸린 것, 그 부친이 하필 왕이었던 것, 부친의 연인이 떠듬떠듬 듣던 계모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 불운으로 켜켜이 쌓인 탑은 무너져 내리는 법을 몰랐다.
와르르 무너져 더 이상 추스를 수 없는 지경이라면 차라리 포기라도 할 수 있을 법한데 탑은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랑이어선 안 돼.’
호감에서 끝내자. 저를 존중해 주는 남편을 만난 것만으로 만족하자. 마음까지 바라는 건 염치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웠기에 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고, 남편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제가 아무리 진득한 감정을 보내더라도 남편의 마음속에 제 자리는 없었다.
며칠을 책을 파던 그녀는 가까스로 한줄기 희망을 찾아내었다.
‘마음의 거리는 몸의 거리에 비례한다.’
그래, 거리를 두다 보면 그러다 보면 감정이 흐려질 것이다. 그녀는 책에서 찾은 한줄기 빛에 기대 가까스로 마음의 끈을 잡고 있었다.
엘리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면에서 남편은 제게 너무했다. 부왕의 애첩인 레이라 부인이 제 입에 들어간 것까지 모조리 털어 그녀의 딸들에게 취하게 할 때도 이만큼 박정하다 여기진 않았다. 계모 중의 계모인 그 여자도 숨구멍 정도는 트여주었다.
‘굳이 나를 앉혀 놓고 수업을 받을 건 없잖아.’
보아하니 오늘 수업은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진 않았다. 라골이 정리해 준 자료만 보아도 될 듯싶었다. 엘리사가 출입문을 바라보며 타이밍을 노렸다. 이렇게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순 없었다.
라골은 수업을 시작하고 10여 분이 지나도록 한눈을 파는 상대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 집중해 주십시오.”
“그래.”
“자료에서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있으십니까?”
“그래.”
“어느 부분이……?”
진저는 라골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라골은 부부 간에 문제가 생긴 것을 눈치챘다.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혹은 일감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다른 고용인들도 눈치에 뛰어났지만, 그는 눈치가 금치라는 말을 들을 만큼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자였다.
‘오늘 수업은 텄군.’
라골은 대충 일정만 맞춰 수업을 때우고 따로 시간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기본적인 부분만 설명하겠습니다. 란델에선 인사를 할 시에…….”
엘리사는 라골의 등 뒤에서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남편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도둑 강의를 듣는 것 같은 느낌에 어깨가 꼿꼿이 섰다.
루펠라에게 들었던 그의 평은 조금도 보탬이 없었다. 그는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내였다. 설명은 간략했지만 이해하기 어렵거나 모호한 부분이 없었다. 그란디아의 문화에 빗대 설명해 주어 훨씬 쉽게 와 닿았다.
진저는 제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업에 열중하는 아내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 또한 아내가 특별히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었다. 제 할 일을 등한시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분에 넘치는 것들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저를 피했다는 이유만으로 몰아붙이기엔 그 또한 께름칙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진저 그웬이 누구던가. 뻔뻔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남자였다. 저를 피하는 아내가 괘씸하기도 했고, 사실 그보다도 아내가 저로 인해 곤란해지는 게 즐거웠다.
감정에 무딘 아내가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그답지 않은 일을 하게 됨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아내를 보고 작게 실소를 흘렸다. 난해하다 싶은 문화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드문드문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특히 디저트나 음식 문화에는 눈을 빛냈다. 가만 보면 제 얼굴도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 외려 자꾸만 눈길이 갔다.
진저는 본래 제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제가 잘생겨서 그러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특이한 문화는 자료 11페이지를 참고하십시오. 관용어나 농담 등으로 흔히 쓰이는데, 모르는 내색을 하면 우습게 보이게 십상입니다.”
특히 마님은 가끔 맹해 보일 때가 있으니까요. 라골이 뒷말을 삼키고 제 몫으로 준비한 자료의 원본을 들추었다.
사실 괜한 걱정이긴 했다. 그웬가의 새 안주인은 공주로 태어나 왕가의 교육을 받은 여자였다. 저택에서야 마음이 풀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결혼 후 3개월 동안은 그웬가의 안주인으로서 충분한 역량을 보였다.
아무리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지만 그는 그웬가의 고용인이었다. 라골은 제 위치를 다시 상기했다. 그러고 보면 마님은 묘하게 정이 가는 분이었다. 저 같은 사내가 걱정을 할 만큼.
“특히 마르코스 유(油) 같은 경우엔 술자리 농담으로 자주 쓰입니다. 부부의 잠자리에 꼭 쓰이는…….”
라골의 말을 경청하던 엘리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르코스 유라면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마르코스 유를 들었던 때를 떠올리던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진저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드디어 그것의 쓰임을 알게 되는 건가. 얼굴이 홍옥처럼 붉어질 아내가 기대되었다. 그는 부러 ‘마르코스 유?’ 하고 라골에게 그것을 되물었다.
“마님도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 초야에 말입니다.”
“모르겠으니까 자세히 설명해.”
진저의 말에 라골은 난감한 듯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라골은 그웬가에서 오래 지낸 만큼 저택 내 사정에 훤했다.
주인 부부의 초야에서 마르코스 유가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는 소식은 진즉에 들었다. 며칠 전엔 주인님께서 마르코스 유를 언급하는 기사들에게 밤이 아주 대단했노라 직접 말씀하셨다고도 했다.
“등화유와 비슷한 노란 액체입니다. 여성의 몸을 따뜻하게 하고, 임신을 돕는다 하여 부부의 잠자리에는 꼭 쓰이는 기름이죠. 그, 감…… 도를 높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는 라골의 말에 등화유와 비슷한 노란 기름을 떠올렸다. 초야가 될 뻔했던 밤, 하녀가 들고 온 그것이었다. 또 하나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주군, 좋은 시간 보내셨다면서요?」
「향유병을 아주 그냥 막!」
「향유가 하나도 안 남았다던데 모른 척하시기 있습니까? 마님과 초야에서 말입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아, 그래. 하나도 남지 않았지.」
그럼 그게! 벌떡 몸을 일으킨 엘리사는 진저의 예상대로 새빨갛게 변했다.
“다, 당신!”
진저는 그런 아내를 보며 픽 웃었다. 라골이 무슨 일이냐는 듯 부부를 번갈아 보았다. 진저는 아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라골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하지.”
“예? 아, 예.”
“나가봐.”
라골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엘리사를 미심쩍게 바라보며 제 몫의 자료와 펜을 챙기고 문을 나섰다. 라골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엘리사가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알고 있었죠!”
“무얼?”
“마르코스 유 말이에요!”
“알고 있었는데 그게 왜? 내가 뭐라 했던가?”
“왜 말리지 않았어요!”
“뭘?”
엘리사가 책상 끝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진저는 좌절하는 아내를 즐겁게 감상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내 몸으로 돌아가면 해보자고. 하룻밤에 다 쓸 수 있는지 말이야. 참고로 마르코스 유는 삽입 직전에 ‘조금’ 바르는 거야.”
어쩔 줄 모르는 아내를 보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엘리사는 방을 나서는 진저를 뒤쫓았다.
“어째서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은 거예요?”
엘리사는 ‘이제 어떻게 해요’, ‘우리가 정말 한 병을 다 비운 줄 알거라고요’ 하며 화를 냈지만 남편은 대꾸가 없었다.
진저는 미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이 얼굴을 붉힌 채 화를 내는 아내를 응시했다.
“계속할 건가?”
“네?”
진저는 주위를 슥, 훑어보더니 다시 아내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제야 이곳이 고용인들이 오고 가는 복도라는 걸 깨달은 엘리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오리처럼 입술을 내밀고 홱 어깨를 돌렸다. 진저가 그런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르코스 유를 다 썼다는 건 자랑이야.”
“아니에요!”
기어이 소리를 치게 만든 진저는 그녀가 우습다는 듯 허리를 접은 채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아내를 놀리던 진저는 그녀가 참다못해 대거리를 포기하고 나서야 접었던 허리를 폈다.
엘리사는 다음 날까지 뿌루퉁한 상태였다. 파티며 훈련 등을 논의해야 하는데 앵 돌아져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진저였다. 기실 이 관계에서 절대적인 약자는 그였다. 그녀는 마법사의 핏줄도 아니고, 기하스엘의 피를 뒤집어쓰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그란디아 왕궁의 천덕꾸러기라지만 적출 왕족이었다. 이 일이 드러나 이혼을 하고 그란디아에 돌아간다 하여도 이전에 누렸던 것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진저는 달랐다. 사생아의 작위 승계를 반대하는 세력은 가문 내부에도, 또 외부에도 득실거렸다. 그런 놈들은 벌레 같아서 아무리 밟아도 수를 불려 맞서온다. 그는 그런 놈들을 ‘병신 짓만 하는 벌레 새끼들’이라고 불렀다. 진짜 벌레면 살충제를 치거나 밟아 죽이겠는데 꼴에 사람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어쨌든 진저는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콕스에게 부러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메뉴를 선정하라 이르고, 달콤한 디저트를 잔뜩 준비해 두었다.
진저는 그간 아내와 가장 가까웠던 고용인인 콕스에게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지?」
그렇게 묻는 진저를 보며 집사 콕스는 미간을 좁혔다. 집사 자리에 맞는 사람인지 시험을 하시는 건가.
콕스는 드디어 마님께서 안주인의 일을 시작하시려나 보다, 하고 감격했다.
「마님께선 제철 채소와 어패류를 좋아하시고, 육류는 질기지 않은…….」
콕스는 그녀가 저택에 들어온 뒤 먹었던 음식을 모두 나열할 기세였다. 귀찮긴 했지만 기억력이 좋은 집사 덕에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쉬이 준비할 수 있었다.
“유자 샐러드 좋아하지?”
마침 샐러드를 집으려던 엘리사가 포크를 멈췄다.
“기억…… 하고 계셨어요?”
“뭐…….”
아내는 어쩐지 감격한 듯한 표정이었다. 뿌루퉁했던 표정이 풀어진 건 달가웠지만 이상하게 양심이 찔렸다. 스무 해가 넘도록 양심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그에겐 아주 생소한 느낌이었다.
엘리사는 붉어진 뺨을 들킬까 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마음이란 건 참 이상했다. 호감임을 자각하고 나니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섰다 풀어지길 반복했다.
멋쩍어진 진저는 서둘러 화제를 찾았다.
“근데 당신, 전엔 왜 피한 거야?”
“네?”
“상점가 축제에서의 일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엘리사는 말을 돌려 하는 법을 몰랐다. 답하기 곤란한 상황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게 엘리사에게 가장 쉬운 처세였다. 그녀와 만난 대부분의 사람은 그녀를 어려워하거나 싫어하는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좋은 말을 해도 그들 나름대로 해석을 하거나 말을 덧붙였다.
엘리사가 호감을 느낀 상대가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건 평생 몇 없는 경우로 그럴 때마다 구석을 찾았다.
혹시 말을 잘못해서 그 호감을 잃을까 봐. 그렇다면 차라리 상대방 상상에 맞추어 생각할 여지를 주기 위해서.
하지만 남편은 두 가지 경우 모두 아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그러나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을 좋아하게 될까 봐 겁이 나서요.’
진심을 말한다면 남편은 자신을 피할 것이다. 엘리사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혼자가 편해요.”
가까스로 찾은 대답은 남편을 공감시키지 못했다.
“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했나?”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아니면 왜? 몸이 바뀐 후로 오전 내내 함께했지만 서로 불편한 건 없었잖아.”
진저는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아내는 이따금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는데 지금이 그런 경우였다. 아내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꼼지락 꼼지락 손을 매만졌다.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도 말이 없긴 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답답하진 않았다. 아내와의 대화가 피곤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내의 대답을 기다리던 진저는 5분이 넘어가자 한계를 느꼈다.
“먹고 나와. 우리 사이엔 대화가 필요한 것 같군.”
그 말에조차 엘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당을 나서던 진저는 엘리사를 잠깐 돌아보았지만 별다른 타박을 하진 않았다.
식당에 홀로 남은 엘리사는 냅킨을 꾹 말아 쥐었다. 수발을 들러 온 집사 콕스가 불편한 게 있냐고 물었지만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진정 불편한 건 콕스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사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허튼 감정이었으니까.
* * *
홀로 테라스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엘리사는 그녀 어깨에 닿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남편이었다. 엘리사는 그가 걸쳐 준 얇은 담요를 추슬렀다.
그는 테라스 문에 등을 기댄 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왜요?”
“당신은 이렇게 복수를 하나 해서.”
“제가 무얼요……?”
“내 몸, 감기라도 걸리게 할 셈인 것 같은데. 어제 놀린 데에 대한 복수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한겨울에 계속 밖에 나와 있는 이유가 뭔데?”
엘리사의 푸른 눈 안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 몸은 본래 제 혼을 담고 있던 그릇이었는데, 지금은 이상할 만큼 다른 느낌이었다.
“보고…… 계셨나요?”
진저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긍정의 의미였다. 처음 테라스에 있는 그녀를 본 건 땅거미가 지던 오후. 그녀는 해와 함께 사라질 듯 희미해 보였다. 엘리사를 지켜보고 있던 진저에게 다가온 집사 콕스는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역시 부부는 닮나 봅니다. 3층 테라스에서 바람을 맞는 건 마님의 취미시죠.」
「……그렇군.」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결혼 전 엘리사 그란디아의 조사 보고서에서조차. 그 모습이 어릴 적 자신과 겹쳐졌다. 돌이켜보면 그의 유년은 외롭거나 괴롭다는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마피 부인이나 아버지의 지기인 피셔 자작, 그리고 스승 트리거 공작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삶이 다른 이들보다 불행하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내는 왕국의 귀애였다. 모후와 왕태후의 지극한 애정 아래서 성장하였다. 왕의 방관 같은 건 두 여자의 애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사랑받던 아이가 한순간에 모든 애정을 잃고 천덕꾸러기로 남았다.
그웬저에 있는 두 천덕꾸러기는 서로 얼마큼 닮았으며, 또 얼마큼 다를까. 그는 그녀가 궁금했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야.”
뜬금없는 그의 말에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을 보면 답답해.”
“네?”
“어떨 땐 기분이 나쁠 정도로.”
한차례 전엔 의미를 알 수 없어 대답할 수 없었고, 지금은 그의 말이 이해되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를 답답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많았다.
이제껏 그런 말들이 신경 쓰이지 않았던 까닭은 그들이 그녀에게 별 의미 없었기 때문이었다. 귓가에 쿵 하는 기이한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오전엔 사람 같던 사람이 지금은 화초 같군.”
“…….”
“표정도 없고, 말도 없고, 재미도 없어.”
잠시 꾹 눈을 감았던 엘리사가 남편을 보았다.
“이혼을 원하시나요?”
“하.”
기어이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는 터지려던 화를 겨우 누르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대체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고작 마찰 한 번으로 이혼까지 생각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몹시 극단적인데 생각의 방향마저 저와 어긋나 있었다.
“협박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몸이 바뀌었는데 이혼을 하자는 게 말이 돼?”
“안 될 것도 없죠.”
“당신 정말 왜 이래. 사람 답답해서 돌아버리게 하려는 거야?”
답답한 건 그녀고, 말도 안 되는 건 그녀가 품은 감정이었다. 자꾸 의심이 짙어졌다. 이 호감이 금세 사랑으로 변해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엘리사는 지금껏 버텨온 게 용할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다른 불행까지 짊어지라고? 신은 그녀를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로 몰아넣고 있었다.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곁에서 자그마한 행복을 얻었다. 제 얘기를 들어주는 남편 같은 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산물이었단 말이다.
“그럼 뭐가 문젠데? 말을 해야 해결을 보지.”
그 해결이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당신을 좋아해도 돼요? 이 호감을 키운다면 당신에게 푹 빠져 버릴 텐데. 당신은 이런 나를 감당할 수 있어요?’
지금도 그의 표정 하나, 말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혹여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호감을 자각한 지 고작 며칠만의 일이었다.
“문제 같은 거 없어요…….”
“당신……!”
그의 눈이 차가워졌다.
“됐어. 그럼 그렇게 지내.”
엘리사는 테라스를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감히 잡을 수도 없었고, 잡고 싶지도 않았다. 잡아봐야 그가 원하는 답을 주진 못할 테니까.
그녀는 홀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도망치고 싶어…….’
그에게서도, 그녀를 괴롭게 하는 현실에서도.
그녀의 소원이라면 무시로 일관했던 신이 드물게 은혜를 베풀었다. 아침에 일어난 부부의 몸이 본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 * *
제 몸으로 돌아온 진저는 미뤄두었던 일에 집중했다. 엿 같은 대외 활동이며 가신 회의, 그웬군의 훈련까지.
그는 몸이 둘이어도 벅찰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내저에 있는 시간은 취침을 위한 고작 몇 시간이 다였다.
그동안 엘리사도 그녀의 일을 했다. 상급 고용인들과 함께 내저의 일을 살폈고, 란델의 문화 교육을 받았다.
부부의 사이는 몸이 바뀌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안부 인사마저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엘리사는 언제나처럼 그에게 몇 마디 인사를 했지만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남편은 아주 무관심해졌고,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허무했다.
그녀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책은 역시 가장 좋은 스승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지는 것 같았다.
밤을 한숨으로 지새우고 온 신경이 그의 기척에 쏠려 있었으며 차가운 시선에 상처받았지만, 이전처럼 두렵진 않았다.
본래대로 돌아온 지 열흘 하고도 이틀째의 아침. 엘리사는 집사 콕스가 가져온 손님의 프로필을 보았다.
“트리거가의 장남이요?”
“예. 주인님의 절친한 지기십니다. 방랑벽이 있어서 란델에서 머무는 날보다 타국을 도는 일이 많으시지요.”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읽었다.
“란델에 돌아오실 땐 꼭 저택을 찾으신다고요?”
“결혼 전엔 석 달까지도 저택에서 지내셨습니다.”
“손님방을 정리해야겠군요. 아직 트리거 경이 초청을 청하진 않았으니 준비만 해두도록 해요.”
“예. 그런데 마님…….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주저하는 콕스를 보며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콕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수면 유도제를 자주 복용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요 며칠은 계속 약을 찾으셨다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란디아에서부터 불면증이 있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엘리사의 대답에도 완전히 근심을 지울 수 없는지 콕스는 내도록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혹시 주인님과…….”
그는 평소와 다르게 집요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엘리사가 물었다.
콕스는 귀족가의 집사답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녀들이 농담 삼아 ‘아주머니’라고 칭할 정도로 정이 많고 수더분했다. 가끔 오지랖을 부리기도 했는데 그래도 젊은 나이에 집사장의 휘장을 단 자인 만큼 경계를 넘진 않았다.
“루펠라인가요?”
“예?!”
그가 지나치게 놀라는 것으로 보아 이 오지랖 뒤엔 다른 사람이 있는 게 확실했다.
콕스는 아찔해졌다. 고용인은 안주인의 명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루펠라가 아무리 그웬가의 일원이라 해도 안주인의 허가 없이 이런 종류의 부탁을 들어줄 순 없었다. 이번 일은 견책받아 마땅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콕스를 본 엘리사는 작게 실소를 흘렸다.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괜찮다고 전해 줘요.”
엘리사는 여상히 답했으나 본심을 완전히 숨기진 못했다.
“아가씨의 지시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고용인 모두 마님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란델에 온 뒤로 마음이라는 근심이 생겼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었다. 이곳엔 좋은 사람이 많았다. 그녀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일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조금 더 관대해졌고, 조금 덜 고되었다.
엘리사는 사람 좋은 집사 덕에 온몸을 칭칭 동여맨 수십 개의 밧줄 중 하나를 끊어낸 기분이었다.
엘리사와 반대로 아침부터 기분이 바닥을 친 사람도 있었다.
진저는 악우의 편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내팽개쳤다.
트리거 공작의 장남인 길리안은 사람 속 긁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진저와 유일하게 맞붙을 수 있는 자였다. 첫 문장부터 성질을 돋우더니 마지막엔 벌컥 성질을 내게 했다.
편지는 ‘공처가가 되었다는 벗에게’로 시작하더니 란델의 수도에서 들리는 소문을 모두 나열해 놓았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면, ‘너 이 새끼 아내라면 아주 벌벌 떤다며? 아내를 모시는 남자들을 그렇게 우습게 여기더니 꼴좋다. 파티장에도 모시러 간다던데 아주 탈피를 했구만? 그렇지, 넌 좀 사람이 되어야 해’ 정도였다.
내용도 열이 받는데 추신은 더 화를 돋웠다.
「곧 진저 그웬을 사람 만들어준 은인을 뵈러 가마. 설마 숨겨 놓거나 하진 않겠지?」
이번엔 기필코 저 자식의 주둥이를 지져 버리리라.
안 그래도 아내를 볼 때마다 화가 났다. 제멋대로 살아온 그는 도무지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려운 건 왜 그렇게 많고, 겁나는 건 왜 그렇게 많단 말인가. 무슨 일만 있으면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통에 복장이 터졌다.
이 정도로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상대는 찍어 누르거나 아예 포를 떠버렸다. 그는 벗에게도 용서가 없는 자였다. 사내자식이라면 두들겨 패기라도 하겠지만 그녀는 여성이었고, 그의 아내였다. 아주 작고 가녀려서 건드리기도 어려운 여자. 눈물이라도 터뜨릴까 봐 신랄한 말 한 마디도 못 하게 만들었다.
천하의 진저 그웬이, 란델의 미친개라 불리는 그가 대체 왜 여자 하나 때문에 전전긍긍해야 하느냔 말이다.
* * *
그웬저의 구조는 여타 귀족저보다 크지만 의외로 구조는 단조로운 편이었다.
내저를 먼저 설명하자면, 지하엔 파티나 오찬, 만찬 등으로 쓰이는 대식당이 있었다. 1층 중앙엔 대거실, 그리고 정원과 이어진 소거실 하나, 식당과 조리실, 접견실 등이 있었는데 주로 공적으로 사용되었다.
2층은 서재를 기준으로 네 방향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쪽은 공작의 방, 서쪽은 안주인의 방, 그리고 북쪽과 남쪽은 손님방이 자리했다.
수도의 3층짜리 저택은 공작위 이상의 가문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가문의 위세와 같았다. 그런 까닭에 공작의 집무실이나 대회의장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웬저 또한 그러한 구조를 채택했다.
진저는 아래층에서 나는 부산스러운 소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흘끔, 시계를 쳐다본 그는 이 소음이 벌써 한 시간가량이나 이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마침 집사 콕스가 커피를 들고 공작의 집무실 찾았다.
“무슨 소리지?”
“마님께서 손님방 정돈을 명하셨습니다. 트리거 경께서 저택에서 묵으실 때는 항상 각하의 집무실 아랫방을 이용하신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콕스의 말을 듣던 진저가 커피 잔 손잡이를 집었다.
주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챈 콕스는 이내 말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기실, 마님과 주인의 사이가 냉랭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두 분 사이에 대화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님은 아직 내저의 관리를 완전히 일임받지 않았다. 보통 2년 내지 3년간 시모의 교육을 받고 내저의 열쇠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마님께선 교육을 해준 선대가 없었고, 그간 안주인의 일을 대신하던 마피 부인이 와병으로 자리를 비웠다.
결혼 후로는 줄곧 내저의 일을 주인님과 상의하셨는데 보통 서류나 전달책을 통해 일을 진행했다.
‘요 몇 개월은 사이가 원만하신 것 같았는데…….’
오전이면 늘 침실에서 함께하셨다. 처음에 주인님께서 마님을 피하실 때는 다들 하는 사랑싸움이겠거니 하였다. 그러나 두 분의 사이는 점점 나빠져 종내엔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해하셨다.
주인님은 마님의 이야기만 나와도 인상을 쓰셨고, 마님께선 주인님의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어버리셨다.
허리를 굽혀 인사한 콕스가 쟁반을 들고 나가려던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우벡입니다.”
“들어와라.”
진저의 윤허에 모습을 드러낸 하우벡이 콕스를 향해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하우벡 러트. 그는 무인의 밭이라는 코르만디 족에서도 이름난 신동이었던 자로 그웬군에서 가장 검을 예리하게 다루는 자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예리한 검이 아닌 지략이었다. 어릴 때부터 잘난 육체만 믿고 오만 사고는 다 친 탓에 군문 안에서 교육된 이들과는 다른 관점을 지녔다.
진저는 코르만디 족과 벌였던 키사크 전투에서 하우벡을 만났다. 하우벡은 탈영병이었다. 탈영병이라면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도륙했던 그가 제 군에 그를 넣은 까닭은 함께 병영을 탈출한 자들 대신 제 목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코르만디 족장은 하우벡이 가장 사랑하는 벗의 처를 겁간했다. 그의 벗은 분노하여 족장을 향해 쇠도끼를 들었으나 다른 부족민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리고 양 발목이 잘렸다. 하우벡은 발목이 잘린 벗과 정신을 놓은 벗의 처를 업고 탈영을 감행했다.
적군에게 붙잡힌 하우벡의 표정에는 일말의 공포도 엿볼 수 없었다.
「나 하나로 끝내주시오.」
진저는 그런 그에게 검을 던졌다.
「네가 이기면 보내주지. 단, 내가 이긴다면 너희 셋 모두 내 것이다.」
병영을 탈출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성인 둘을 업고 이틀 밤낮을 달린 자였다. 체력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승자는 진저였다.
검 등으로 흠씬 두들겨 맞고 엎어진 하우벡은 ‘저 비열한 새끼’라며 씨근덕댔다. 한 대 맞을 거 입 잘못 놀려 열 대 맞은 하우벡은 그날로 진저의 것이 되었다.
진저 그웬은 비열하긴 해도 영 글러 먹은 자는 아니었다. 노예로 팔아먹을 줄 알았는데 그의 군에 넣어줬다. 물론 사람이 쓸데없이 쪼잔해서 앞으로 저 새끼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면 다 뒤질 줄 알아, 하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처맞아가며 정신교육을 받았다.
어쨌든 저뿐 아니라 양 발목을 잃은 벗과 그의 처를 군의 식구로 받아주었다.
“1차 모의 전투에 관한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꽃에는 어느 분 이름을 올릴까요?”
란델의 네 공작가가 자웅을 겨루는 모의 전투는 총 2차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차는 토너먼트로 형식의 ‘꽃 탈취전’이었다.
‘꽃’은 가문에서 가장 귀한 여성, 그러니까 가주의 아내나 딸, 약혼녀 등이었다. 탈취전은 의외로 간단한 게임이었다. 제 가문의 ‘꽃’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상대 가문의 ‘꽃’을 빼앗는 것이다.
“평소처럼 루펠라 아가씨의 이름을 올릴까요?”
“그래.”
하우벡은 몇 가지 설명과 함께 전달된 공문을 올렸다.
“그럼 지금 바로 아가씨께 서명을 받을까요?”
“지금? 루펠라가 저택에 와 있나.”
“소거실에서 뵈었습니다.”
그 시끄러운 녀석은 아내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본저를 찾았다.
“그럼 그렇…….”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불청객이 등장했다.
“안 해!”
루펠라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집무실에 들이닥친 그녀는 씩씩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웬일로 하우벡이 내저에 왔나 싶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집무실을 찾았더니 새파래진 얼굴의 콕스가 루펠라를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탈취전의 꽃을 맡는 여성이 꼭 안주인이어야 하는 법은 없었다. 트리거가만 해도 공작의 장녀가 꽃을 맡았다. 포르테가의 꽃은 공작의 며느리이자 후계의 아내인 포르테 백작 부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새언니가 그웬가에 들어오고 첫 탈취전이었다.
“안주인이 있는데 내가 왜 거길 나가? 언니한테 창피를 줄 셈이야?”
공작 부인들이 결혼 후 첫 탈취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관습처럼 굳어진 것이었다.
진저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망구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겠어!”
“우스운 건 네 말투지.”
망구가 뭔가, 망구가. 하우벡은 아예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어쨌든 난 안 해. 내가 서명 안 하면 오빠는 꽃 없이 탈취전에 나가게 될걸? 이번 모의 전투에선 부전 패로 최하위겠네.”
“손목을 잘라서 지장을 찍어줄까?”
“그러시든가. 세상에, 그웬 공작이 아주 미쳐서 누이 손목을 잘랐다네. 오빠 작위를 노리는 놈들이 이때다 싶어 훌라춤을 출 테지.”
“네 저택으로 돌아가라.”
진저가 손을 내저었다. 루펠라는 눈이 돌아가면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나 안 해. 호적에 누이 한 명 더 들이든가. 원로들이 아- 주 좋아하겠어.”
루펠라가 이죽거렸다. 진저의 동공이 반쯤 덮였다. 폭발 직전이라는 신호였다. 남매 사이에 끼어든 하우벡이 루펠라 앞에 양 손바닥을 보였다.
“기사 서임은 아가씨가 받아야겠습니다. 그런 거 있거든요. 불의를 참지 말아야 하며 어쩌구.”
“흥, 난 불의만 참는 사람이야.”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건 그웬가의 특성인가.
그래도 하우벡은 지지 않고 입을 놀렸다. 그는 루펠라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웬가의 기사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이름. 이름의 주인은 학을 떼지만 남매 간의 전쟁을 말리기 위해서라면 한 사람쯤은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은가. 그 녀석이 알면 학을 떼겠지만.
“그 녀석, 허리를 다쳤다는데 아십니까?”
“허리?!”
역시 예상대로였다. 루펠라가 빽 소리를 치더니 하우벡의 어깨를 붙들었다.
“무슨 일인데? 왜 하필 허리야! 남자의 허리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서? 불구가 된 건 아니지? 뭔데!”
루펠라는 말할 틈도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그건 아니고 노인의 짐을 들어주다가 삐끗한 모양입니다.”
“밥 먹고 하는 일이라곤 몸 단련밖에 없으면서 허리는 왜 다쳐!”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래도 살아는 있나 보네.”
제 편지에는 답장 한 번 없더니. 점 하나라도 찍어달라고 애원을 했는데도 묵묵부답이었다. 죽을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다. 부단장인 마크빌 경을 살살 꼬셔 거처를 알아내려고 했다. 이렇게라도 소식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허리 다쳤다는 소식에 기뻐해야 하는 거냐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던 루펠라가 그 녀석의 근황을 더 들어야겠다며 하우벡을 잡아끌었다. 문을 나서려던 그녀가 흘끗 뒤를 쳐다보았다. 진저는 다시 서류를 보려 펜을 집어 든 상태였다.
“분명히 안 할 거라고 했어.”
“이렇게 네 저택 비울 거면 도로 내놔.”
“가져가.”
루펠라가 따로 지내는 제2저는 본래 선대 공작 부인의 소유였다. 제도대로라면 호적상 장자인 진저에게 상속되어야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매가 한 저택에 기거할 수 없어 그녀에게 소유권을 이전한 상태였다.
어차피 ‘그 녀석’이 본저로 돌아오면 그녀 또한 아예 본저에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루펠라는 재산 따위에 미련이 없었다.
“제발 좀 꺼져라.”
“누군 보고 싶은 줄 알아? 이번 일 알아서 처리해. 귀찮게 다시 찾아오게 하지 말고.”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루펠라가 방을 나서자 진저는 이마를 짚었다.
진저 또한 엘리사가 탈취전에 참가하지 않으면 소문 좋아하는 하이에나들에게 물어 뜯기리란 걸 알았다. 그녀가 아닌 루펠라를 명단에 올린 건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화는 났다. 탈취전 훈련을 시작하면 볼 일이 늘어날 테고, 대답 없는 그녀로 인해 답답해질 것이다. 그가 답답한 만큼 그녀도 불편해할 터였다.
그런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녀는 너무 약했다. 그녀의 몸으로 몇 달을 지낸 그였다. 얼마나 연약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탈취전은 그저 상대 가문의 ‘꽃’을 빼앗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꽃’을 물체가 아닌 사람으로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꽃’을 확보해도 탈출을 막지 못한다면 그대로 게임 아웃.
루펠라는 그 녀석만 곁에 세워두면 진지 밖으로 나갈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일곱 번의 탈취전을 벌이고, 네 차례 루펠라를 상대 군에 빼앗겼다. 그웬군이 최하위였던 재작년엔 아예 ‘내 발로 갈 테니까 저 사람도 같이 끌고 와’ 하고 상대 군에 뻔뻔하게 요구했다.
그의 아내는 몹시 가녀렸지만 책임감만큼은 어떤 사내보다 뛰어났다. 상대 군에 빼앗긴 ‘꽃’이 제 발로 돌아오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녀라면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작가의 귀애를 위한 규칙이 존재하긴 했다. ‘꽃’에 상해를 입히게 되면 그 즉시 게임이 종료되고, 상해를 입은 쪽의 가문이 승리한다. ‘꽃’에 상해를 입혀 패배한 가문엔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고 기사, 가주할 것 없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탈출하며 다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진저는 욕이란 욕은 다 주워 먹고 사는 인사였다. 비정한 남편이라 욕을 들어도 별 상관이 없었다. 아내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걸리긴 하지만 그녀의 뚝심이라면 의연히 견뎌낼 터였다.
‘몸을 다치는 것보단 낫잖아.’
그는 아내를 전장의 꽃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 *
엘리사는 바쁘게 지냈다. 몸이 바쁘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서 좋았다.
그녀의 일과는 고정된 편이었다. 오전엔 내저의 일을 보았다. 콕스의 도움으로 마피 부인의 수첩을 얻게 된 그녀는 그간 마피 부인이 해왔던 일들을 서투르게나마 흉내 냈다.
마피 부인은 정말이지 훌륭한 여성이었다. 선대 공작 부인이 세상을 뜨기 전부터 내저를 총괄해 왔다는 마피 부인은 주인의 식사부터 양말까지 챙기지 않는 것이 없었다. 수첩을 읽으면서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커졌다.
오전은 마피 부인의 일정에 따라 움직였고, 오후엔 그녀만의 일이 있었다.
우선 라골의 문화 수업 시간을 늘렸다. 주에 한 시간이었던 수업이 하루에 한 시간으로, 다음엔 아예 세 시간으로 늘어났다. 수업의 범위도 넓어졌다. 라골이 마피 부인의 조카이다 보니 내저에 관한 일들을 조금 더 상세하게 배울 수 있었다.
오후 몇 시간은 수업으로 보내고 수업이 끝나면 오전에 지시해 놓았던 일을 확인한 뒤,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정했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고용인들은 새로운 안주인을 좋아했다. 마피 부인은 지나치게 꼼꼼하고 어떤 부분에선 꼬장꼬장하여 실수를 하면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안주인은 실수를 하면 혼을 내는 게 아니라 사유서를 작성케 하였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툰 탓에 다른 꾀를 낸 것이었으나 사유서는 아주 긍정적이 효과를 불러왔다. 제 실수를 되짚게 하여 추후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였다.
그렇다고 엘리사가 완전히 만만한 주인은 아니었다. 처음엔 경각심을 갖더라도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마음이 해이해질 터였다. 그래서 각 분야의 책임자를 정해 놓고 사유서에 책임자의 서명과 짧은 소견을 작성하게 했다.
어떻게 보면 질책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것과 같았다. 하지만 주인에게 직접 꾸중을 듣는 것보다 나았다. 각 분야의 장(長)들은 책임감이 생겼고, 고용인들 사이엔 확실한 기강이 만들어졌다.
구조가 너무 수직적으로 변하면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 부분에서도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다.
콕스에겐 장(長)들에 대한 감시 감독을 맡겼다. 콕스의 집무실 앞엔 투서함이 생겼다.
콕스는 말했다.
“투서함을 놓아도 글씨체로 작성인을 알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꺼리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좋은 대비책이 아니라 사료됩니다.”
엘리사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감시 감독 체제가 대비책 중 하나인 건 맞아요. 하지만 전부는 아니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감시 감독을 하는 사람이 콕스인 게 진정한 대비책이죠.”
콕스는 아무리 큰 권한이라도 달리 쓰는 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피 부인이 남편에게 집사장으로 추천한 것이다.
마님의 믿음에 보답하겠다고 말하는 그는 크게 감격한 표정이었다.
엘리사는 라골과의 수업을 끝내고 소거실로 내려왔다. 소거실엔 본 적 없는 사내가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자리 잡은 여자를 본 엘리사가 눈가를 휘었다.
“언니!”
루펠라가 벌떡 일어나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부르지 그랬어요. 온 줄도 몰랐네요.”
“괜찮아요. 말 상대가 있었거든요.”
루펠라가 뒤를 가리켰다. 그녀를 상대하느라 지쳐 있던 하우벡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상의에 그웬군의 문양인 두 마리의 뱀이 수놓아져 있었다. 은색 휘장까지 달린 것으로 보아 소대장급의 기사인 모양이었다.
“하우벡 러트입니다.”
“언니는 처음 보죠? 군의 실무자예요.”
“러트 경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하우벡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하지만 기사 서임을 받은 분을 어떻게…….”
엘리사가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자 하우벡이 호탕하게 웃었다.
“제가 무지렁이 출신이거든요. 기사 서임은 어림도 없죠.”
진저가 후견인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코르만디의 탈영병이었던 그는 란델에 발도 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운 좋게 그웬군에 들어왔지만 다른 소대장들과는 달리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경 자 같은 건 붙일 수 없었다.
“말을 못 타나요?”
“예? 설마요. 이래 봬도 전장에서는 방귀 좀 뀌는, 아니, 잔뼈가 굵습니다.”
“기사란 본래 말을 타는 병사를 일컫는 말인걸요. 란델에선 작위가 있든 없든 기사를 ‘경’이라고 칭한다면서요.”
하우벡의 출신을 모르는 엘리사는 그의 가슴에 달린 휘장을 가리켰다.
“수도군의 소대장이 되는 건 기사 서임을 받는 것보다 어렵다지요?”
오늘 라골에게 배운 내용이 그것이었다. 그웬가의 수도군은 영지에서도 특출 난 인재를 차출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힘든 교육을 한다. 낙오되는 자는 사정 봐주지 않고 영지로 돌려보냈다. 그런 까닭에 개인의 능력만 본다면 수도에선 따를 재간이 없는 군대였다.
루펠라가 둘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두 사람 의견을 절충해서 하우벡 경으로 하면 되겠네.”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우벡은 조금 얼떨떨한 듯 보였지만 이내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콤콤한 냄새가 나는 남자는 사랑받지 못해요’ 사건을 듣고 대단한 여우라고 생각했던 게 우스웠다. 새 공작 부인은 순진한 체하며 할 말을 다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국의 공주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순진했다. 이상한 건 그 순진함이 그저 기막히기만 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아, 그렇지!”
루펠라가 느닷없이 짝, 손뼉을 쳤다.
“혹시 언니가 안 한다고 한 거예요?”
“네?”
“모의 전투 1차전 얘기 못 들었어요?”
웃고 있던 하우벡이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루펠라는 화통하고 뒤끝이 없어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편한 상대였다. 앞뒤 생각 없시 지르는 이것만 뺀다면 말이다.
“모의 전투요……?”
“매년 한 번 내지 두 번 이루어져요. 날짜가 고정된 게 아니라서 폐하와 4공이 국가 대사 중 하나 정하는데…….”
설명을 하던 루펠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설명에 재주가 없었다. 말을 못한다기보다는 장황한 설명을 귀찮아했다. 타국엔 없는 란델만의 문화다 보니 자세한 설명 없이는 엘리사를 이해시킬 수 없었다.
때마침 수업을 정리하고 내려오던 라골이 보였다. 라골을 부른 루펠라가 설명을 떠넘겼다.
“모의 전투는 오늘 수업 내용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건국사…… 말인가요?”
란델의 건국왕, 크라우디 1세는 7명의 맹우와 함께 대업을 이루었다. 공신록에 이름을 올린 일곱 명 중 두 명은 역적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다섯은 현대에 이르러 네 공작가의 시조, 최초의 마탑 연맹주로 이름을 남겼다.
크라우디 1세는 제 세를 과시하고, 호전적인 네 명의 맹우를 서로 견제하게 하여 다른 뜻을 품지 못하도록 서로 겨루게 했는데 이가 모의 전투의 시작이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모의 전투 또한 개국 초의 방식처럼 4공이 겨루며 마탑이 심판을 보았다.
라골은 수업 내용에 덧붙여 모의 전투 방식에 대하여 설명했다.
“탈취전이요?”
“이 또한 건국 초부터 이어진 게임입니다. 꽃 탈취전은 신화에 나오는…….”
루펠라가 지겹다는 듯 양손을 내저었다.
“그만! 어디까지 설명하려고. 그건 두 분이서 따로 얘기하시고 본론으로 돌아가지?”
라골의 설명과 루펠라의 말을 곱씹던 엘리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이번 모의 전투에서 꽃을 맡아야 하는 거군요.”
엘리사의 표정이 변하자 두 사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다물었다.
남편이 그녀를 제쳐 두고 생각했다는 게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대화를 피한 건 자신이었다.
“마님,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모의 전투긴 해도 검을 든 사내들이 천지입니다. 아내를 걱정하신 겁니다.”
하우벡이 애써 진저를 감쌌다. 그제야 엘리사는 셋 모두 제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하우벡 경이 옳아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당황한 엘리사가 분위기를 전환하려 허둥거렸다. 라골과 하우벡은 별다른 말은 없었으나 내심 그녀가 안쓰러웠다.
루펠라는 분통을 터뜨렸다. 이럴 땐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라며 제가 더 흥분하여 진저를 욕했다.
“하여간에 섬세함은 코딱지만큼도 없다니까요!”
엘리사는 저를 대신해 화를 내는 루펠라가 고마웠다.
“다들 식사는 하셨나요? 괜찮다면 가벼운 요깃거리를 내오라 이를게요.”
하우벡이 배가 등에 붙었다며 엄살을 피웠다. 할 일이 있다는 라골까지 부득불 붙든 하우벡과 루펠라는 엘리사가 요깃거리를 지시하러 간 틈을 타 머리를 맞댔다.
“서운한 것 같지?”
루펠라의 말에 하우벡이 말해 뭐 하냐며 동조했다.
“이번 탈취전의 꽃은 꼭 새언니가 맡아야 해. 언니도 언니지만 망구들이 가만 안 있을 거라고. 얼마나 주둥이를 놀려대겠어. 쇼윈도 부부네 뭐네 하면서 말야.”
“주군이 결정을 번복한 적이 없잖습니까?”
라골 또한 하우벡과 의견이 일치했다. 진저는 주변에서 아무리 감 놔라 배 놔라 아우성이어도 한번 결정한 건 절대 물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루펠라는 소극적인 두 남자가 답답하다며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오빠가 이번 탈취전의 꽃으로 정한 사람은 나고, 공문은 하우벡의 손에 있고, 라골은 오빠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조카야. 그럼 뭘 해야겠어?”
하우벡이 입을 떡 벌렸다. 저도 여러 인생 말아먹은 사람이지만 루펠라는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공문서 위조를, 그것도 주군이 직접 서명한 공문을 멋대로 수정하라는 소리였다. 뒷감당은 모두 라골의 이모인 마피 부인에게 떠넘기고.
“모두 목이 날아갈 겁니다.”
라골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루펠라는 지나치게 저돌적이었다. 지금껏 진저가 제게 반항하는 루펠라를 두고 본 건 그녀가 정도를 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저 자신과 관련 없는 사고를 쳤고, 사고는 모두 수습 가능한 선이었기에 아량을 베풀 수 있었다.
그녀는 제 오빠의 무서움을 몰랐다. 무슨 대형견쯤이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대형견은 무슨. 그는 맹수였다. 수틀리면 기백이고 기천이고 목을 죄 따버릴 수 있는.
“남자가 이 정도 용기도 없어? 좆에 사과해.”
“깔끔하게 사과하겠습니다. 죽는 것보다 생식기에 사과하는 게 낫죠.”
“내 손으로 죽여줄까?!”
루펠라가 버럭 소리쳤다.
그때, 엘리사가 소거실로 들어왔다. 소거실에 남아 있던 세 명이 합, 하고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은 하녀가 내온 샌드위치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루펠라와 하우벡은 이야기를 재미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라골은 여러 방면으로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 이따금 화제와 관련된 역사나 야사를 말해주었다.
엘리사는 나이든 이래로 처음 있는 편한 한담이 즐거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훈련장을 찾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온 진저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미간에 잘게 주름을 세웠다. 그와는 인사 한 마디도 어려워하던 아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밌지?”
진저의 목소리에 말소리가 멎었다. 가장 먼저 일어난 라골이 허리를 굽혔다. 엘리사와 하우벡 또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건 루펠라뿐이었다.
머쓱해진 하우벡이 뒷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그냥 세상 돌아가는 얘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돌아가는 얘기 뭐?”
사실 그들 대화의 반 정도는 진저를 욕하는 소리였다. 루펠라가 어릴 때부터 글러 먹은 사람이었다고 흉을 보면 하우벡은 지금도 그렇다고 투덜거렸다. 라골 또한 내심 동의하는 눈치였다. 엘리사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 왜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검은 개는 기르지 말라는.”
란델에서 검은 개는 사나운 개의 대명사였다. 성격이 더러운 강아지는 자라서 성격이 더러운 늙은 개가 된다는 뜻이었다. 제 입으로 말하고도 하우벡의 얼굴에선 핏기가 가셨다.
매번 주둥이로 화를 불러오는데 도통 고쳐지지 않았다.
얻어맞을 거라는 하우벡의 예상과는 달리 진저는 조용했다. 이걸 어찌하나 고민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저의 속을 알아챈 루펠라가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루펠라의 호적 메이트는 제가 성격이 더럽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관대한 축에 든다고 생각했다. 보라, 지금도 거슬리는 놈들을 살려두고 있지 않은가.
“훈련은 파했나?”
“이틀 전부터 훈련 시간을 늘렸습니다. 저녁 식사 후 9시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참관하시겠습니까?”
“먼저 가 있도록.”
하우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라골 또한 책 정리가 남았다며 2층 서재로 떠나고 자리에 남은 건 엘리사와 진저, 그리고 루펠라뿐이었다.
소거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진저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아내를 빤히 응시했다. 조금 전만 해도 말갛게 웃음을 터뜨리던 사람이 남편 앞에선 사자 앞에 놓인 다람쥐처럼 굴었다.
정말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 걸까. 아니라면 왜 갑자기 이다지도 자신을 불편하게 여긴단 말인가. 그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훅, 한숨을 흘렸다.
진저의 한숨 소리가 엘리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마음을 자각한 뒤로는 언제나 그가 어려웠다. 남편 또한 그녀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더 불편해졌다.
진저의 시선이 몇 가지 빵과 티 세트가 놓여 있는 소파 테이블로 향했다. 그래도 뭘 먹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저를 피하느라 식사도 하지 않는 줄 알았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제가 왜 저를 유령 보듯 피하는 아내의 식사까지 신경 써야 한단 말인가. 걱정하게 만든 아내는 식사를 했냐는 말 한 마디 없었다.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저녁은?”
“아, 저는 간단히 먹었…….”
“내가 안 먹었다는 말이야. 식당으로 가지.”
진저가 엘리사의 손목을 잡은 채 성큼성큼 걸었다.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르는 엘리사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뒤에서 루펠라가 빽 고함을 내질렀다.
“먹을 거면 혼자 먹지 왜 이미 먹은 사람을……!”
진저 또한 크게 소리쳤다.
“저 녀석 한 마디만 더하면 묶어서라도 쫓아내!”
남매의 살벌한 대거리에 놀란 엘리사가 연신 딸꾹질을 했다.
진저가 식사를 하는 동안 엘리사는 멀뚱히 앉아 물 잔만 매만졌다. 란델의 음식을 좋아하긴 했지만 두 끼를 먹을 정도로 많이 먹진 않았다. 루펠라과 하우벡, 라골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빵을 집어 먹어서 이미 배가 더부룩한 상태였다.
진저도 아내를 체하게 하고 싶진 않아 굳이 음식을 권하진 않았다. 그는 기계적으로 고기를 썰었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내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식당엔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맴돌았다. 엘리사는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실수를 할 것 같아서 말을 하는 게 내키지 않기도 했다.
저녁으로 나온 스테이크는 상당히 질이 좋았다. 살이 연한데다 육즙이 알맞게 흘렀다. 그러나 진저는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사실 그렇게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다. 그의 저녁을 챙기러 온 라골에게 미리 거르겠노라 말해놓기도 했다.
엘리사가 놀란 이유도 그것이었다. 분명히 라골에게 식사를 안 하신다고 전달받았는데 뜬금없이 저녁을 찾고, 그녀를 앞에 앉혀 놓기까지 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결국 참지 못한 건 진저였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보았다.
“네?”
“내가 어려워진 이유가 뭐냐고.”
“……그런 거 아니에요.”
이렇게까지 물러났는데도 아내는 여전히 움츠리고 있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그가 쾅, 하고 테이블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는데 엘리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변화는 표정뿐만이 아니었다. 어깨를 바짝 긴장시킨 채로 꾹 눈을 감았다.
그는 기가 막혀 말을 잃었다.
“하, 하하, 하.”
식당 안에 그의 헛웃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제야 실눈을 뜬 엘리사가 굳어진 그를 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진저가 엘리사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누구야?”
“무, 무슨…….”
“당신한테 손댄 사람이 누구냐고.”
그가 엘리사를 아내로 택한 이유는 그녀가 그란디아의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내는 공주였다. 그렇다면 단 한 번도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반응은 공주의 반응과는 전혀 달랐다.
귀족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막 나가는 루펠라조차 이러한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건 루펠라가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일방적인 폭력에 노출된 적이 없었으니까. 저 사람이 날 때리겠지, 따위의 생각은 못 했다.
엘리사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란디아 국왕의 애첩인가? 아니면 애첩의 딸들? 그도 아니면 그들의 지시를 받은 새끼야?”
아내의 부친이라면 응당 장인이라 불러야 했으나 그런 방관자를 제 장인이라 칭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의 반응이 증명했다. 그가 든 예시 중에 답이 있었다.
“그란디아를 뒤집어버리기 전에 대답해.”
“……지속적인 폭력은 아니었어요.”
“맞긴 했다는 거군.”
“뺨 한 대였어요.”
“한 대든 두 대든 당신이 맞았다는 거잖아!”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왕의 애첩, 레이라 부인의 장녀 클라우디아가 제 남자를 뺏어갔다며 엘리사에게 손을 올렸다.
당시엔 조모가 쓰러진 뒤였고 왕궁에 제 편은 아무도 없었다. 부왕마저 모른 체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일말의 관심조차 없던 건지 생채기까지 난 엘리사의 뺨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부왕이 그렇게까지 제게 관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좋았을걸. 소녀는 허튼 자신감에 차 있었다. 클라우디아에게 뺨을 맞은 당일, 부왕에게 알리겠다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엘리사는 레이라 부인 소유의 창고에 갇혔다.
어린 소녀에게 어두컴컴한 창고는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빛 한 점 들지 않은 곳에 반나절쯤 갇혔다 나온 엘리사는 공포로 말을 잘 들었고, 그 ‘체벌’이 효과가 좋다는 것을 안 레이라 부인은 그 후로도 심기가 불편해지면 그녀를 와인 창고에 가두었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사람은 화가 나면 때린다. 창고에 가둔다. 도와줄 사람 따윈 없다. 왕궁의 궁인들은 그녀가 레이라 부인의 창고에 갇힐 때가 있다는 걸 알았다. 쉬쉬하긴 했지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국왕을 치마폭에 감싼 여성에게 맞설 수 있는 간 큰 자는 없었다.
처음엔 자신을 지켜줄 조모가 병상에서 일어나기만을 소원했다. 하지만 기적 같은 건 없었다. 구원자를 바랬던 소녀는 성인이 될 때까지 홀로 견뎌야 했다.
그것이 엘리사가 이만큼 소극적으로 변한 이유였다.
진저는 여전히 화가 난 상태였다. 대답 없는 아내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내가 당신 뺨이나 때릴 놈으로 보이나!”
“……레이라 부인도 처음엔 그랬어요.”
“뭐?”
“그녀도 돌아가신 모후 대신 어머니가 되어줄 것처럼 상냥했다고요. 입속의 혀처럼 굴었어요. 그래서 잘 보이려 노력하고 싶었고, 그녀의 딸이 되고 싶었어요.”
엘리사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었다.
처음 레이라 부인이 왕궁에 들어왔을 적엔 행복했다. 모후를 잃고 괴로워하는 엘리사에게 레이라 부인은 새로운 기둥이 되어줄 것 같았다.
리즈 왕비는 국왕의 연정으로 인한 상처를 딸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 리즈 왕비가 레이라 부인을 비난했더라도 어린 엘리사는 새로운 어머니에게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엘리사는 노력했다. 하지만 레이라 부인의 상냥함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아직도 기억한다. 다정했던 눈동자가 본색을 드러내던 날. 혐오로 일그러지던 눈은 엘리사 인생 최초의 공포였다.
애정을 갈구했기에, 레이라 부인에게 마음을 내주었기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어렸기에 뭣 모르고 버텨낼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 겪을 상처는 엘리사를 절벽으로 몰아넣을 터였다. 그러니까 진저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쉰 진저가 무릎을 굽히고 엘리사와 눈을 맞추었다.
“썩은 울타리에 기댔으니까 다칠 수밖에.”
“…….”
“내가 당신 하나 기댄다고 무너질 울타리로 보여?”
“……거짓말. 거짓말은 언제나 달콤했어요. 그러니까 당신 말도 거짓말일 거야.”
엘리사의 얼굴을 자신의 품 안에 가둔 진저가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뒷머리를 어루만졌다.
“나는 당신이 신경 쓰여 죽겠어.”
기대도 될까. 정말로 나를 받아줄 수 있을까. 지금도 가슴이 이렇게 뛰는데, 이 마음이 커지고 커져 사랑이 된다면 그때도 당신은 이렇게 나를 안아줄까.
그의 품에 안긴 엘리사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 * *
진저는 엘리사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처음 보는 모습에 고용인들이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공작 부부가 지나가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걱정스레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저는 아내를 제 방으로 데려왔다. 아내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섭고 두려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무엇이 이토록 두렵단 말인가. 죽이겠다는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기대 달라는 말이었을 뿐이었는데.
진저가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푸른 눈에 물기가 잔뜩 어려 반짝인다.
촉.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졌다.
엘리사는 울던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위로의 말 같은 건 몰라.”
그녀가 그의 눈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위로하지 않…… 으응.”
두 손 가득 그녀의 얼굴을 쥔 그는 그녀의 입을 탐했다.
그녀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밀어내지는 않는다. 도리어 입술에 노크를 하니 스르륵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혀가 아내의 입안을 탐험했다. 아주 다정히. 일전의 키스와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과거의 키스가 짜릿하도록 공격적이었다면 오늘의 키스는 녹아들 것처럼 부드러웠다.
엘리사가 진저의 셔츠를 꼭 그러잡았다. 숨 쉬는 법을 몰라 공기가 부족하다. 진저가 잠시 입을 떼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타액으로 된 가는 줄이 생겼다 사라졌다.
엘리사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색소가 옅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다.
진저는 다시 한번 그녀의 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입맞춤에 저주가 풀렸다는 어느 이야기 속 여자처럼 눈꺼풀이 열리고 투명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진저는 말없이 셔츠를 그러쥔 그녀의 손등 위로 제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등이 움찔 떨리는 건 그에겐 신호와 같았다.
“잠깐…… 여보…….”
엘리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위에 올라탄 진저를 쳐다보았다.
“주, 주무셔야죠. 저도 자러…….”
“못 잘 텐데.”
“네?”
“못 자잖아. 수면 유도제 없이는.”
엘리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이이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집사에게 전해 들었나. 날 챙기고 있었구나.’
고마운 마음이 드는 한편 불안했다. 마음이 깊어지는 건 그녀에겐 기쁜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상처를 입을 테니까. 그녀에게 남편의 거절은 예정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앞으로 닥칠 일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엘리사가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괘, 괜찮아요.”
진저는 엘리사의 쇄골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내가 재워줄게.”
어떻게?
엘리사의 눈이 의문이 떠올랐다. 진저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야릇하게 핥았다.
“잔뜩 움직이고 나면 푹 잠들지 않겠어?”
‘아니야!’
이런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푹 잠들기는커녕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밤을 꼴딱 세울 것이다. 엘리사가 도리질 치자 그가 픽 웃으며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
“아!”
“이것보다 조금 더 아프다고 생각하면 돼.”
조금 전만 해도 혀가 녹아내릴 것처럼 다정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위험한 짐승같이 변했다.
엘리사는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항은 진저에겐 바르작거림에 불과했다.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 드레스 치마를 걷었다.
“각하, 놔주세-!”
“그 호칭은 섹시하지 않군.”
단번에 속치마까지 가슴 위로 올라왔다.
그가 엘리사의 속옷을 본 건 오늘로 두 번째였다. 처음은 하녀가 초야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었다. 하녀는 마님의 점잖은 취향에 따라 되도록 정숙한 속옷을 준비해 두었다. 그래서 야릇함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저택에서도 숨 막히게 많은 걸 걸친다고 생각했는데…….”
진저가 중얼거렸다.
“네?”
“가터벨트까지 꼼꼼히 입어줘서 고마운걸.”
엘리사는 제 다리와 가터벨트를 빤히 쳐다보는 그가 민망했다.
그녀가 허리를 비틀어 중심부를 가리려 들자 그가 허벅지를 살짝 깨물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반항하던 것도 잊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남편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는 밤의 교사가 될 준비가 된 남자였다. 아니, 그보다 그가 먼저 밤의 교사가 되길 자청하고 있었다.
그는 짐승이 먹이를 탐색하듯 아내의 팬티 위로 입술을 움직였다. 아내가 흠칫 놀라 다리를 오므리려 들었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잡았다. 자신의 손가락에 의해 눌린 부위까지도 자극적으로 보였다.
그의 중심은 이미 잔뜩 부풀어 올랐다. 자신을 위한 좁고 은밀한 구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성을 내는 것이다.
흥분한 것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속옷도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그녀의 음부를 정신없이 탐하던 그가 속옷을 노려보았다. 이 불필요한 천을 걷어내면 그가 바라마지 않는 낙원이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벗길까.’
거치적거리지만 보기 좋았다.
진저는 팬티 아래로 손을 넣어 가슬가슬한 수풀을 건드렸다. 손끝에 애액이 끈적하게 묻어나왔다.
“제발…… 그만해요…….”
감정을 자각하고 나니 초야 때보다도 훨씬 부끄러웠다. 천 위로 느껴지는 입술조차 버거웠다.
“아직이야.”
아직 그가 원하는 만큼 젖지 않았다. 그의 것은 자신하던 대로 거대했다. 그는 아내가 고통스러워하길 원하지 않았다. 쾌락만을 뇌리에 새겨 그녀 스스로 그를 원하길 바랐다.
진저는 검지와 중지로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비볐다.
“흐응, 응!”
신음을 억누르는 것도 한계였다. 제 목소리라곤 믿기지 않는 신음이 거침없이 새어 나왔다.
“제발, 하으, 앙!”
절박한 애원에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혀가 속옷을 비집고 들어와 클리토리스를 희롱했다.
“흐, 흐아앙!”
기어이 눈물이 터졌다. 시트를 꽉 그러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진저가 미간을 좁혔다. 이건 흥분 때문에 터진 눈물이 아니었다. 정말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제길.’
페니스가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끝만 조금 넣어도 정액을 줄줄 흘릴 것처럼 흥분한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제 마음보다 아내의 안정이 우선이었다. 첫 삽입이다. 범하듯 안고 싶진 않았다.
그는 아내를 덥석 안아 다리 위에 앉혔다. 그리고 살살 달래듯 눈물을 핥았다.
“괜찮아.”
“흐윽.”
우느라 몸이 떨려서 자꾸 페니스가 자극당하고 있었다.
‘이대로 꽂아 넣고 싶군.’
그렇게 한다면 두 번 다신 저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턱을 아내의 정수리 위에 올려두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 거길 핥는 건, 흐윽, 싫어요.”
“그래.”
울음을 그쳐야 뭘 해도 할 것이다. 그는 ‘내가 죄인이요’만 외치지 않았지 완전히 납작 엎드렸다.
“놀랐다구요…….”
“그래.”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십 분. 그는 아내를 끌어안고 다독여주었다.
아내는 이제 진정이 되었는지 떨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진저의 손이 슬금슬금 그녀의 엉덩이로 내려갔다.
“무섭게 하지 않을 테니까…… 엘리사?”
색색.
진저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미동이 없다.
“제기랄.”
잔뜩 울어서 그런지 아내는 세상모르고 잠들었다. 귀엽게 자고 있어서 깨우지도 못 하겠다. 진저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 *
진저는 잠든 아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골이 향초와 몇 개의 성냥을 가지고 들어왔다. 집사에게 부탁한 숙면을 돕는 향이었다.
심지에 불이 붙자 우유의 단향이 풍겼다. 진저와 라골은 엘리사가 잠에서 깰까 봐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방을 나섰다.
두 사내는 진저의 방에 딸린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진저가 외투를 뒤적여 담배를 찾았다. 담배를 깊게 들이켠 진저가 한숨처럼 연기를 뱉었다.
“안 피셨잖습니까.”
진저가 픽 웃으며 답했다.
“란델의 악마라잖아.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해봐야지.”
“심란하십니까.”
진저가 흘긋, 라골을 쳐다보았다. 달그림자에 얼굴이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진저가 담배 케이스에서 한 개비를 꺼내 라골에게 건넸다. 그것은 신호였다. 다시 어릴 적의 벗으로 돌아와도 된다는 신호.
라골이 성냥으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마피 부인은?”
“여전하시지. 편지만 보면 아픈 사람이 맞나 싶다.”
진저가 픽 웃었다.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지만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에겐 라골과 마피 부인이 그러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라.”
“말씀하실 분인가. 너희 남매가 잘 지내는 게 가장 큰 선물이지. 편지로도 온통 너희 남매 걱정뿐이시더라.”
“너도 말이야, 임마. 계속 잡일꾼 노릇이나 할 순 없잖아.”
진저와 라골은 입장이 비슷했다. 두 사람 다 귀족의 사생아였다. 다른 게 있다면 진저는 공작가의 후계로 컸고, 라골은 누군가의 고용인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아니, 사실 차이점은 달리 있었다. 라골은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했다. 자작가로 돌아갈 기회도 있었다. 불행한 사고로 후계를 잃은 자작이 라골에게 후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라골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진저는 까닭을 물었지만 별다른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귀찮아서, 따위의 농담이 그가 들은 대답의 전부였다.
라골이 물었다.
“널 보는 것 같냐?”
“무슨 헛소리야.”
“난 널 보는 것 같거든. 꼬마일 적에 너 말이야.”
“내가 저렇게 순진하진 않았지.”
평생을 같이 지낸 벗은 주어가 없어도 대화가 통했다. 그들이 말하는 이는 진저의 침실에서 잠든 엘리사였다.
“제삼자의 눈으로 봐야 보이는 게 있는 경우도 있다.”
“쓸데없는 소리.”
라골은 훌륭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도, 심지어 본인까지도 모르는 감정을 정확히 캐치해 냈다. 진저는 말도 안 된다며 일축하지만 어릴 때의 그는 그녀처럼 무언가를 갈구했던 적이 있었다.
“그럼 그 여자와 동일시하는 거냐.”
담뱃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진저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테라스 난간에 양팔을 걸쳤다.
“그럴지도.”
“이번엔 부디 자리를 찾길 바란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라골이 먼지가 묻은 옷을 툭툭 털었다. 두 사내가 벗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딱 담배 한 개비를 문 시간뿐이었다.
금세 고용인의 표정으로 돌아간 그가 가볍게 묵례를 한 뒤 테라스를 나섰다. 찬바람을 맞으며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있던 진저는 자조 섞인 실소를 흘렸다.
그조차도 제 속을 알 수 없었다. 정말 그 여자와 동일시하는 건지, 아니면 완전히 생소한 감정인 건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떠한 추측에도 이혼은 없었다. 그는 제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이 엘리사임을 확신했다.
사랑할 수 있는 아내 같은 건 바란 적도 없었다. 그녀는 동반자였다. 그녀에게 죽고 못 사는 사내가 생긴다면 몰라도 괜한 걱정으로 이별을 꿈꾸게 하고 싶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