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비스트 2
4장 3장은 페이크였다(2)
저택에 돌아온 진저와 엘리사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다시 마차를 돌려야 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치안 관리단 산하 귀족 구금소. 공작 부부가 나란히 귀족 구금소를 찾는 이유는 길거리에서 싸움질을 하다가 붙잡힌 루펠라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구금소에 도착한 부부는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그웬 공작을 알아본 치안관들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갈색 머리의 치안관이 구금소 내로 부부를 안내했다.
엘리사는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놀라 눈을 크게 뜬 채 내부를 둘러보았다. 한쪽에선 나이 지긋한 사내들이 엉겨 붙어 서로를 새끼네 자식이네 칭하며 삿대질을 하고, 또 다른 쪽에선 흥분한 여성들이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뒹굴고 있었다.
놀라운 건 이곳이 귀족 구금소라는 것이었다. 귀족, 그것도 수도에 터를 둔 이들이 교양 없이 쌍욕을 하고 굴러다니는 광경은 정말이지 당황스러웠다.
당황한 엘리사와는 달리 진저는 능숙하게 정황을 파악했다. 루펠라가 구금된 게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싸움이라니.”
진저의 말에 갈색 머리의 치안관 하나가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러시 백작 부인의 드레스 숍에서 후작 영애와 싸움을 벌이셨습니다.”
“이유가 뭔가.”
“그게…….”
치안관의 눈길이 의자에 내동댕이쳐진 드레스에 닿았다.
“두 분이 구매하려던 드레스가 한 벌밖에 남지 않아서…….”
진저가 이를 갈았다. 가지가지 한다. 여동생이 아닌 남동생이었다면 3박 4일을 홀딱 벗겨 연무장을 돌게 했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흠씬 두들겨 팼겠지. 진저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루펠라가 갇힌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치안관은 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웬 공작과 함께 온 것으로 보아 이분이 그 유명한 그웬 공작 부인인 듯싶었는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구금소에 몇 번이나 와 본 사람처럼 말이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아, 아닙니다. 따라오십시오.”
게다가 여성답지 않은 위압감까지 있었다.
진저와 엘리사는 치안관을 따라 루펠라가 구류된 옥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족 구금소라 그런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옥과는 달랐다. 철창이 있긴 했지만 의자가 있었고, 테이블이 있었으며 천장에는 조명까지 달려 있었다.
철창 안으로 보이는 루펠라는 뻔뻔하리만치 잘 있었다. 몇 시간 전과는 달리 깔끔하게 정돈되었던 머리가 헝클어져 있다거나 목 부위에 가느다란 생채기가 생겼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진저의 생각일 뿐이고 엘리사는 달랐다.
엘리사가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괜찮아?”
루펠라는 내가 안 괜찮기를 바라냐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누이의 적반하장에 진저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은 같은 여자인데 한 대 쥐어박아?
진저가 갈등하는 사이 엘리사가 입을 떼었다.
“무슨 일인데 구류까지 된 거야?”
“일단 좀 꺼내줘 봐.”
루펠라가 음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계집애 입을 짝 찢어버리고 오게.”
엘리사가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이 진저를 쳐다보았다. 그는 물어 뭐 하냐는 듯 삐딱하게 고개를 젖혔다. 엘리사는 샐쭉 그를 흘겼다.
아무리 호적상 누이라지만 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몇 번 대화를 나눠본 게 다인 그녀도 걱정이 되는데.
하지만 진저는 진심으로 루펠라를 걱정하지 않았다. 한두 번이었어야 말이지. 선대 공작 부인은 루펠라를 호적에 올리긴 했어도 어머니가 되어주진 않았다.
좋은 일에도 감흥이 없는 사람이 나쁜 일이라고 관심을 두었겠는가. 루펠라의 사고 뒷수습은 자연스레 마피 부인에게 떠넘겨졌다. 작게는 아카데미의 부모 소환부터 크게는 이렇듯 구금소 보호자 소환까지 모든 것을.
문제는 마피 부인이 요양을 떠난 후로는 이 귀찮은 일이 진저의 몫이 되어버렸단 것이다. 무려 1년이나.
루펠라도 할 말은 있었다. 란델의 네 공작가 중 만년 최하위라지만 그녀는 공작가의 영애였다. 치안관에 의해 구류가 되든, 교장실에 불려가 반성문을 쓰게 되든 열 받는 건 자신이다.
진저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서류에 사인 몇 번이 다였다. 왜 사고를 쳤느냐고 연유를 묻는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제 또래의 여자애들은 영악했다. 물론 제 또래가 아니래도 영악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어른이라면 타인의 약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무지는 없었다.
싸움의 시작은 언제나 사소했다. 문제는 루펠라가 말싸움에는 도가 텄다는 것이었다.
말발에서 진 계집애들은 파르르 떨며 ‘그럼 뭐 해? 진짜 공작가 영애도 아니잖아!’라거나 ‘부모도 모르는 것들과는 이래서 상종을 하면 안 돼’ 등의 말을 쏟아냈다.
그럼 루펠라는 참지 못하고 그들의 머리채를 잡았다. 남매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많은 부분이 닮았다. 남들과는 다른 체력이나 힘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우로 흔들고 좌로 흔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앞으로 뒤로 돌리면 그녀들은 언제나 바닥에 처박혀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상대방 부모 측의 보복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딸의 머리채가 잡혔는데도 어찌하지 못하는 건 제 딸이 공작 영애의 출생을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루펠라가 씩씩거리며 진저의 몸을 하고 있는 엘리사를 노려보았다.
“됐으니까 어서 꺼내줘! 왜 나만 잡혀 오냔 말이야!”
진저와 엘리사의 시선이 치안관을 향했다. 치안관은 난감하다는 듯 답했다.
“함께 싸운 영애는 진찰 중입니다.”
얼마나 야무지게 때렸으면 진찰까지 받게 하는가. 진저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가져오라 일렀다.
루펠라 때문에 곤란을 겪었던 치안관은 화색을 띠고 보호자 서명이 필요한 서류를 대령했다. 루펠라에게 대단히 질린 모양이었다.
진저를 대신해 엘리사가 서류에 서명을 하고 나서야 루펠라가 갇힌 철창의 문이 열렸다.
철창을 나온 루펠라는 포효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고 계집애 두피까지 죄 뜯어놨어야 하는 건데! 콧구멍에 주먹을 처박을걸! 등의 말을 꽥꽥 소리쳤다.
엘리사는 오만상을 짓고 있는 진저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귀족 영애가 상점가 한복판에서 싸움을 할 정도면 큰일일 텐데요.”
어쩐지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는 묻고 싶지도 않고, 물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뻔하지.”
“네?”
“상대방이 루펠라의 약점을 들먹였을 거야.”
진저도 숱하게 겪은 일이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요절을 냈어야지 애매하게 패니까 자꾸 기어오르는 게 아닌가. 남매 간의 진한 정은 없지만 루펠라가 누구 하나를 골로 보낸다면 처리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신경을 쓰면 더 말이 많아지는데.”
엘리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종알거렸다.
진저는 누이가 구금된 것보다도 그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아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아내는 이상하리만치 타인의 적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그만한 적의는 흔히 겪었기 때문일 터였다. 진저 또한 마찬가지니까.
진저는 아내와 결혼하기 전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하여 짧은 조사 보고서를 받았다.
그란디아의 아데울리 국왕은 애첩, 레이라 부인의 치마폭에 싸여 친딸을 방관했다. 아데울리 국왕과 엘리사는 부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로를 등한시하였다. 그 결과 허튼 소문까지 퍼지고 말았다.
엘리사 그란디아는 리즈 왕비의 외도로 태어난 자식이다, 라는 소문이었다. 가장 고귀하게 태어나 가장 천박한 소문 속에서 자란 여자였다.
“면전에서 모욕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지.”
엘리사가 남편을 잠깐 돌아보았다. 눈빛이 어쩐지 부드러웠다. 칭찬을 받은 기분이라 엘리사는 쑥스러웠다.
그렇다. 엘리사는 진정 모욕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란디아에 난 소문은 그저 헛소문일 뿐이었다. 제가 당당했으니 거리낄 것이 없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제껏 공주로서 모든 걸 누렸던 것도 아니다. 공주로 태어나 좋았던 건 나라에서 가장 큰 서재를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과 배곯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정도였다.
물론 그란디아에서의 시간이 그녀 인생에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타인에게 정을 잘 주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상대방이 베푸는 사소한 친절에도 당황하는 것도 그렇고. 어릴 적에는 쾌활하고 씩씩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재미가 없을 정도로 조용한 것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방어기제였다. 그녀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택한 방법은 적의를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구금소를 나온 부부는 또다시 황당한 일을 겪었다. 마부는 있는데 마차와 말이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진저가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마차는 어디에 있지?”
“그, 그게 그웬가의 마차라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는데 말입니다. 새로 온 치안 관리장이 어찌나 깐깐한지…….”
“요점만 말해.”
“불법 주정마(馬)라고 견인됐습니다.”
마부가 땀을 뻘뻘 흘렸다. 루펠라 아가씨 때문에 구금소를 찾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주인의 성정을 아는지라 더 곤란했다. 이상한 건 주인님께 된통 깨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님이 더 화가 나 보인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마부에게 물었다.
“과태료를 내면 되나?”
“3일 동안 압수된다고…….”
진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새로 온 치안 관리장이라면 포르테가의 장남인 게일 포르테였다. 말로도 힘으로도 지니 치졸하게 마차를 압수해? 루펠라만 멍청하다고 여길 게 아니었다. 기어오르는 놈을 봐준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몸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포르테가의 대를 끊기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뭘 타고 가야 하나.”
엘리사가 중얼거렸다. 진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뭐요?’ 하고 되묻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걸어갈까요?”
“…….”
이쯤 되면 아내가 자신을 놀리려는 건가 의심이 들만도 한데 표정이 너무 해맑았다. 그는 루펠라에게 마차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먼저 돌려 보냈어요. 언니 마차는요?”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마차는 돌려보내고 아내와 한 마차로 저택에 돌아간 것이었다. 당연히 구금소도 한 대로 이동했다.
“같이 왔지, 요.”
“어쩔 수 없네요. 마차가 수배될 때까지 기다려야지. 난 근처에서 쇼핑이나 하고 있을래요.”
루펠라는 마차 수배가 되면 호출하라며 목적지를 말하고 팔랑팔랑 떠났다. 마부는 주인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꽁무니가 빠지라 달렸다. 하지만 10분이 흐르고, 20분이 더 흘렀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진저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언제 오는 거야.”
구금소는 상점가 인근에 있었다. 마차 대여소가 근방일 텐데 왜 이다지도 수배가 지연된단 말인가.
“아, 오늘 상점가 축제 마지막 날이라던데.”
엘리사는 일전에 루펠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왕궁 주최 축제처럼 성대하지는 않지만, 세일을 하기도 하고 볼거리가 많아서 귀족들도 제법 많이 찾는다고 했다.
구금소 쪽은 길이 여러 갈래라 지체 없이 들어올 수 있었지만, 대여소에서 구금소를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중심가와 인접해 있는 길이라 뚫고 들어오기 까다로울 터였다. 그것도 마차 대여가 가능할 때의 일이지 축제라면 사람이 몰릴 테고, 사람이 몰리면 마차 대여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진저는 몇 시간은 꼼짝없이 서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상점가에서 가장 큰 펍은 무희를 초청해서 공연을 한대요.”
엘리사가 기대된다는 듯 양손을 맞잡았다.
“가자.”
“네?”
“여기 더 있어 봐야 마차가 일찍 수배되는 것도 아닌데 보러 가자고.”
진저와 루펠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닮은 게 참 많았다.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것도 그렇고 엘리사가 어어, 하는 사이에 밀어붙이는 추진력도 그랬다.
진저는 구금소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마부가 오면 전할 쪽지를 맡기고 엘리사를 이끌었다.
***
진저는 어쩔 줄 모르는 아내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눈이 호두알처럼 커져서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그럴 만도 했다. 왕궁에서 자란 공주니 서민들의 축제는 처음일 터였다.
아이들이 들고 있는 솜사탕을 신기하게 쳐다보기에 진저가 하나 사주니 맛을 보고 또 탄성을 흘렸다. 구름처럼 포근하다고 말하는 아내는 아이보다 더 아이 같았다. 그래도 자신의 몸으로 솜사탕을 들고 다니게 할 순 없어서 골목에서 다 먹고 가길 권했다.
“저택으로 가지고 가면 안 되나요?”
“넣을 데가 없잖아.”
처음 먹어보는 솜사탕은 식감도 새롭고 아주 맛있었는데 너무 달아서 그런지 금세 질렸다. 하지만 이대로 버리긴 아쉬웠다.
진저는 시무룩해진 아내에게 솜사탕 기계를 사주겠다고 했다. 엘리사는 이 신기한 게 기계만 있으면 뚝딱 만들어지느냐고 물었다. 진저가 그런 걸 알 리 없었다.
“솜사탕 장인을 들이면 되지.”
“장인이라면 급료가 굉장하지 않을까요?”
진저가 그게 뭐 별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결혼 예물로 대단한 보석을 받았으면서도 의례적인 감사의 말뿐이었던 아내가 솜사탕 같은 것에 진심으로 기뻐한다는 게 우스웠다.
부부는 무희의 공연이 있는 펍으로 향했다. 버켄 주점이라는 간판이 걸린 펍은 축제로 들뜬 사람들이 가득했다. 엘리사는 간판을 보고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남편을 보았다.
‘엉덩이가 기특한 하이디.’
그녀는 남편의 기사들로부터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엔 이상하게 울컥했는데 생각해 보면 화가 날 일이 아니었다. 남편과 자신은 필요에 의해 결혼을 택한 것일 뿐이니 서로를 구속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건 따로 있었다. 화가 날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는데도 하이디나 엉덩이라는 말이 떠오르면 기분이 묘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하이디가 있을까요?”
하이디라면 군사들이 떼로 주먹을 휘두르게 한 여자가 아닌가. 자신이 엉덩이를 기특해했다던.
진저가 걸음을 멈추고 아내를 돌아보았다. 질투를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쩐지 찔리는 듯한 기분이라 그는 헛기침을 했다.
“난 엉덩이는 손으로 잡힐 정도가 딱 좋아.”
엘리사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남편은 뭐든 평균 남성 사이즈보다 컸다. 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양손을 펼쳐서 보여주자 진저가 말을 정정했다.
“한 손에 말이야.”
“한 손에 한쪽이요?”
“……들어가지.”
“네.”
하지만 그들은 펍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엘리사와 진저의 차림을 보고 어디 대단한 귀족 나리와 마나님이라고 추측한 종업원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관람권이 있는데, 그 관람권을 소지한 사람만이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진저는 잠시 밖을 둘러보더니 축제를 위해 세운 조형물을 가리켰다. 그러더니 대뜸 어음을 꺼내 가격을 적으라며 종업원에게 쥐여주었다.
진저와 엘리사는 펍 내부로 들어갔다. 밖에선 한바탕 소란이 이는 것 같았지만 진저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무심했다.
공연은 이미 한창이었다. 부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무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엘리사는 금세 무대에 시선을 빼앗겼다. 비록 옷차림은 옷감이 부족한가 싶을 정도로 망측했지만 아름다운 동작과 화려한 동선이 놀라웠다.
진저는 그런 아내를 구경했다. 아내는 말수가 부족한 것처럼 표정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희의 손동작 하나에도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무희 열댓 명이 한 번에 재주넘었을 때는 입까지 벌리며 놀라워했다.
“버켄 주점의 간판 아가씨, 하이디를 소개합니다!”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이자 무대 천막이 걷히더니 무희들과 같은 디자인에 색상만 다른 옷을 입은 여자가 등장했다.
하이디는 허리를 야살스럽게 흔들며 객석으로 내려왔다. 객석 가까이에 있던 사내들의 뺨을 쓰다듬고 손 키스를 보내던 그녀가 부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이디는 진저의 몸을 하고 있는 엘리사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당황한 엘리사가 몸을 뒤로 뺐으나 개의치 않고 바짝 몸을 붙였다.
진저가 말릴 새도 없었다. 흥분한 좌중이 하이디와 엘리사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거리를 좁혔다. 진저가 안간힘을 썼으나 아내의 육체는 힘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사내들보다 한 뼘은 작은 터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엘리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이디는 다른 사내들처럼 리듬을 타거나 제 허리를 잡지 않는 엘리사에게 바짝 약이 올랐다.
“아, 잠……!”
점점 대담해지는 움직임에 하이디를 밀쳐 내려 손을 뻗었으나 막지 못했다. 하이디는 오히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엘리사의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가슴을 딱 붙인 채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여성의 말캉한 것이 가슴부터 배, 허리를 쓸어내리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굳어버린 엘리사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닿았는데도 엘리사의 반응이 없자 흥미를 잃었는지 하이디는 다시 무대로 올라가 버렸다.
진저는 사람들이 흩어진 틈에 얼른 아내에게 다가갔다.
“당신!”
“어떡해요…….”
엘리사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다.
“왜? 저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데!”
엘리사의 시선이 하체로 내려갔다. 아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던 진저는 이내 고개를 올렸다.
“생리 현상이야.”
왜 자신이 아내를 위로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진저로서는 인생에 다시없을 친절함을 발휘했다. 하지만 아내는 끔찍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훌쩍였다.
“일단 한 발 빼는 게 좋겠군.”
그렇게 엘리사는 남편에게 이끌려 첫 자기 위로의 현장이 될 주점 화장실로 향했다.
***
1층엔 여자 화장실이 있었고, 2층엔 남자 화장실이 있었는데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라서 그나마 줄이 적은 2층으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사람들은 사내를 끌고 들어온 여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악!”
소변 통 앞에서 볼일을 보던 사내들은 엉덩이를 가려야 할지, 남근을 가려야 할지 모르고 허둥대다가 서로의 발목에 소변을 쏴버렸다.
“으악!”
“뭐 하는 거야!”
진저는 세면기 근처에 있던 빗자루를 들고 거울을 내려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울이 깨졌다.
“다 나가.”
아무리 여성의 몸에 혼이 들어왔다지만 그는 저택에 있던 시간보다 전쟁터에서 구른 시간이 많은 사내였다.
사람들의 눈에 그는 기이하리만큼 위압감을 내뿜는 여자였다. 화장실에 있던 사내들은 진저를 믿는 구석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여자의 몸으로 저만한 위압감을 내뿜는 거겠지. 옷차림도 평민의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눈치를 보던 사내들이 바지를 올리지도 못하고 화장실을 뛰쳐나갔다.
들고 있던 빗자루로 문을 막은 진저가 아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직도 하체가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이제 어쩌죠?”
“문질러서 빼.”
“어떻게요?”
“거기 말이야. 거기를 문질러.”
엘리사가 하체의 포인트 위에 손을 올리고 배를 쓰다듬듯 원을 그렸다.
“아니, 옷을 벗고 그걸 잡아서 위아래로 흔들라는 말이야. 일전에 한 번 내가 해줬잖아.”
처음 몸이 바뀌었을 때 그가 손으로 정액을 빼줬던 일이 있었다.
그 일을 떠올린 엘리사가 질색을 했다.
“네?! 싫어요!”
“그럼 어쩔 건데!”
“무섭다고요!”
볼일 볼 때, 샤워할 때도 차마 보지 못하고 천장에 눈을 고정했다. 그런데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만지라니. 죽어도 못 할 일이었다. 엘리사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저가 츳, 하고 혀를 차며 엘리사의 허리춤을 잡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이 못 하면 내가 해야지. 이 상태로 나갈 순 없잖아.”
“당신 손이 내 손이잖아요! 안 할 거예요. 그때도 진짜 창피했다고요!”
“내 혼이 움직이는 손이니 내 손이지!”
“다시 몸이 바뀌면 내 손이잖아요!”
이리 내, 안 돼, 이렇게 있을 거야? 그래도 싫어! 부부가 실랑이를 벌였다.
“소변을 볼게요. 아, 아침에도 소변을 보면 가라앉으니까…….”
“그거와 이건 달라.”
뭐가 다른데, 그냥 달라, 그런 게 어딨어, 있다니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그럼 해보든가.
진저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시도해 봤자 우뚝 솟은 상태에서는 나오지도 않는다. 박박 우기는 아내만큼 진저도 당황스러웠다. 그가 왜 제 몸이 자기 위로를 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가.
그는 잠자리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때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위로한 적이 없었다.
술자리에선 란델에서 가장 자위의 횟수가 적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단 말이다.
아내에게 정액을 빼줄 때 당황스러웠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재촉에도 엘리사는 고개만 내저었다. 그녀는 도저히 그의 것을 잡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영혼이 들어간 제 몸이라면 더더욱. 부부의 교합과 남편이 보는 앞에서의 자기 위로는 다른 것이었다.
‘브래지어를 차는 법을 알려줄 때도 부끄러웠단 말이야.’
이따금 브래지어 사건을 꿈에서 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스스로 자위를 하라고? 절대 무리다.
그녀는 그래도 시도해 보겠다며 소변 통으로 걸어갔다.
“윽.”
소변 통 안은 물론이고 소변 통이 있는 부근은 몹시 지저분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아내가 또다시 동동거리자 그는 한숨을 내쉬고 화장실 구석에서 청소용 대야를 찾아왔다. 그리고 으득,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은 진저 그웬의 수발을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야.”
“……고마워요.”
하지만 엘리사는 대야 앞에서도 하의를 내리지 못했다.
“뭐 해?”
“뒤요…….”
“뭐?”
“뒤돌아주세요.”
아내는 정말 특별한 여자였다. 진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발을 받은 데다 이렇게까지 인내를 발휘하게 만든.
남편은 부탁대로 등을 돌렸지만 엘리사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칸막이 하나 없는 곳에서 바지를 내리다니. 그란디아였다면 아무리 공주라도 풍기문란죄로 나흘은 옥사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밖을 활보하는 게 낫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후자보다는 차라리 눈 딱 감고 바지를 내리는 쪽이 나았다. 본래 몸이었다면 죽어도 못 할 일이었다.
엘리사가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지를 내렸다. 도저히 맨손으로 그것을 조준할 자신이 없어서 허리를 최대한 쑥 내밀었다.
그런데 도통 요의가 생기지 않았다. 남편의 말이 맞았다. 허리를 탈탈 흔들기까지 했는데도 덜렁거리기만 할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진저는 등을 돌린 상태로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안 되잖아.”
목공도 1년이면 칼 잡는 사람, 10년이면 목수, 20년이면 장인이라는데 진저는 자그마치 30년 가까이 남자로 살았다. 남자의 일이라면 진저가 엘리사보다 해박한 게 당연했다.
아침에 그녀를 곤란하게 했던 ‘기상나팔’과 지금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든 ‘남성성의 증명’은 풀이 방식이 달랐다.
엘리사는 말없이 바지를 올렸다. 대체 이 아이는 왜 이다지도 건강하단 말인가. 아침마다 저를 곤욕스럽게 만드는 거로도 부족해 사소한 자극에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남성으로 사는 건 정말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주섬주섬 바지 올라가는 소리에 진저가 다시 아내를 돌아보았다. 아내는 기가 팍 죽어 있었다. 기는 팍 죽었는데 그건 죽지를 않는다. 뭐, 당연했다. 저는 건강하고 크고, 또 대단하니까. 그것은 진저의 자랑 중 하나였다.
진저는 수치심에 울먹거리는 아내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내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화들짝 놀란 엘리사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가 빨랐다. 그는 일전에 첫 사정을 시켰을 때처럼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그녀의 성기를 잡았다.
그의 손이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중간에 선단을 엄지손가락으로 비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저가 까치발을 들고 아내의 귓불을 물었다. 귓불을 살짝 깨물고 핥던 그가 귓바퀴를 따라 혀를 움직였다.
엘리사가 바지춤을 꽉 움켜잡았다.
츠읍, 츕.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다.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몸이 떨릴 만큼 흥분은 됐으나 첫 사정 때와는 달리 빠르게 사정하지 않았다.
그야 그럴 것이다. 진저의 몸은 본래 자위엔 익숙하지 않았다.
진저는 저택보다 전장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전장으로 폐허가 된 땅엔 머리가 아닌 몸을 쓰고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 말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매춘부가 된 여자가 넘친다는 소리다.
전쟁터에서만이 아니라 모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분 상승을 위해 미친개, 사신도 마다하지 않는 영악한 여자들이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다리를 벌리는 여자들 천지. 그의 육체는 굳은살로 가슬가슬한 손보다 좁고 축축하며 침입자가 들어가는 즉시 오물오물 감싸는 질 안이 익숙했다.
그녀의 첫 사정이 빨랐던 건 행운이었다.
화장실 밖에서 낯선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긴장으로 쉬이 토정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낯선 곳. 화장실 밖에선 안으로 들어오려는 남자들이 문을 쿵쿵 두드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토끼도 사정이 쉽지 않겠지.’
진저가 츳 혀를 차며 아내를 밀어 화장실 문에 등을 붙이도록 만들었다.
그는 무릎을 꿇으려다 말고 화장실 주변을 살폈다. 아내의 무릎에 오물을 닿게 할 순 없었다. 그는 구석에 박혀 있던 또 다른 대야를 찾아와 엎어두고, 그 위에 무릎을 얹었다.
그는 소매로 성기를 대충 닦았다.
“뭐, 뭐 하려는 거예요.”
당황한 엘리사가 허둥지둥 몸을 비틀었다.
“부탁이니까 가만히 있어.”
진저는 한 손은 아내의 허벅지에 대 무게중심을 잡고, 다른 손으로 성기를 잡았다.
그리고 삼켰다.
뭐를?
성기를.
“잠깐, 여보! 진저!”
너무나 놀라 그의 이름까지 소리쳤다. 그러나 남편은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딸까지 쳐주었지만 사정하지 않는다. 밖에선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며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뱉고 있었다.
그라고 제 성기를 물고 싶겠는가. 진저는 최대한 아내의 성기에 치아가 닿지 않도록 노력하며 투덜거렸다.
“아안이 이으아이아.”
가만히 있으라니까.
엘리사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점막이 주는 짜릿한 감각에 취해 허리를 비틀고 이때껏 한 번도 내 본 바 없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으, 으아흣, 아앙!”
진저는 혀로 대를 핥아 내리고 그 아래 고환까지 입에 머금고 쭙쭙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리가 온통 떨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가 한 손으로 고환을 주무르며 성기를 삼켰다. 자라처럼 대가리를 드러난 선단, 그 주변을 혀를 이용해 콕콕 쪼았다.
“아아앙, 앙!”
엘리사의 머릿속에서 샐 수 없는 폭죽이 단번에 터지고 있었다. 아니, 머리가 폭죽이라도 된 것처럼 터질 것 같았다.
미쳐 버릴 것 같아.
제발! 아아, 제발!
무슨 말을 하는지, 제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어떤지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그저 남편의 어깨를 잡고 애원할 뿐이었다. 무엇을 바라는지 또한 알 수 없었다.
흥분에 겨운 엘리사는 자신도 모르게 남편의 뒷머리를 잡고 허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큭. 거대한 성기가 목젖을 치고 목구멍 안으로 파고들려 했다. 토기가 밀려왔다. 욱, 욱. 진저는 자신의 머리를 잡고 앞으로, 또 뒤로 허리를 흔드는 아내의 엉덩이를 붙잡고 도리질 쳤다.
“흐, 으응!”
남편 입안의 여린 살이 오므라들며 성기를 감쌌다. 쿠퍼액이 침과 섞이며 쯔걱, 츕 하는 야릇한 소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며 그의 입안에 파정했다.
***
엘리사는 고개를 들지도 못 하고 쭐레쭐레 남편의 뒤를 쫓았다. 진저는 걷는 와중에도 은근히 뒤를 살폈는데 그녀는 고개를 수그리고 있느라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이 많은 광장을 지나 구금소로 향하는 길목에 도달했다. 부부 사이엔 침묵만 감돌았다.
부부는 예상치 못한 사고로 당황했고, 생전 처음 겪는 일에 정신이 쏙 빠진 상태였다.
엘리사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생을 시킨 건 미안한데 또 고맙기도 했다.
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지만 공작가의 후계인 그가 자신을 위해 냄새나는 곳에서 함께 머물러 주었다. 더러운 소변 통을 꺼리는 그녀를 위해 직접 대야를 옮겨주기도 했다.
고개를 숙이고 걷던 엘리사가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아내의 팔을 잡아주었다.
사고를 친 후에 이런 배려를 받으면 도무지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진저는 우물쭈물하는 엘리사의 팔목을 가볍게 잡은 채 앞을 향해 걸었다. 소란한 틈을 타 해가 자취를 감췄다. 본격적인 퍼레이드가 시작되면 사람들이 더 불어날 테니 서둘러 구금소 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은 아내, 남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고된 하루였다.
용기를 쥐어짠 엘리사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저, 여…….”
하지만 그녀의 용기는 남편에게 닿지 못했다.
“이거 놓지 못해?!”
어딘가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외진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어쩐지 익숙했다. 서로를 마주 보던 엘리사와 진저는 고함이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튀어나간 건 진저였다. 엘리사보다 그에게 더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제 누이, 루펠라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엘리사가 진저의 뒤를 쫓았다.
“놓으라…… 오빠!”
남보다 못한 남매라지만 그래도 일평생 보고 살았던 정이 있는지 루펠라는 한발 먼저 간 진저의 영혼보다는 몸, 그러니까 제 오빠로 보이는 엘리사를 더 반겼다.
그녀는 구금소에서 봤던 모습과는 달랐다. 잘 차려입었던 드레스는 온데간데없고 평민들이 입을 법한 낡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 주변엔 수염이 거뭇거뭇한 사내 둘이 있었는데, 코며 뺨이 몹시 붉은 것으로 보아 거나하게 취한 모양이었다.
“저 자식들 뭐야.”
루펠라에게 수작을 걸고 있던 사내들이 느닷없는 목소리에 부부를 주목했다. 사내들이 무어라 외쳤다.
하지만 어찌나 취했는지 반절만 알아듣고 반절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충 웬 방해냐, 넌 뭐냐 등의 말인 듯싶었다.
엘리사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하여 당황하는 사이 진저는 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아내의 몸으로 장정 둘을 상대할 수 있는가? 아니.
아내가 저를 대신해 저들을 상대할 수 있는가? 절대.
루펠라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도주할 수 있는가?
루펠라는 사내들에게 양손을 잡힌 상태였다. 저 녀석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을 테고 누군가 도와줘야 하는데 아내의 몸으로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언제일지 모르는 도움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루펠라가 그렇게 고함을 내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주변을 지나는 이가 없다는 소리였다. 다시 말해 방법은 하나라는 말이었다.
“그 손 놔.”
진저가 낮은 목소리로 사내들을 위협했다.
엘리사가 진저의 허리춤을 잡았다. 그녀가 보아왔던 험한 꼴은 약과였다. 그도 그럴 게 엘리사는 한 나라의 왕녀였다. 독살이면 몰라도 육체적 고통을 걱정할 일은 없었다. 이름뿐이었지만 그녀만을 위한 기사단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궁정 경비병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일평생을 자란 여자로 사내가, 그것도 이렇게 으슥한 밤에 여성을 힘으로 제압하는 일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걸 보면 그녀 자신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특권층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진저의 위협은 통하지 않았다. 사내들은 작은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는 것을 본 것처럼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뭐 하는가! 어서 치안관을 불러오지 않고!”
진저는 멀리 있는 고용인에게 명을 전하듯 소리쳤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개똥 허세. 전쟁에서도 수세에 몰리면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처럼 허수를 놓는다. 전장이 아닌 이따위 뒷골목에서 개똥 허세를 부릴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진저 그웬이 고작 사내 둘 때문에 허세를 부리게 될 줄은 또 어찌 알았겠는가.
“요거 요거, 앙큼한 맛이 있네?”
뚱뚱한 사내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그는 거시기를 북북 긁으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그때, 엘리사가 냅다 튀어 나가 남편을 등 뒤로 숨겼다.
남편이 도움을 준 만큼 그녀도 보답하는 게 옳았다. 남편보다는 제가 나서는 게 맞는 상황이었다. 그의 수가 통했다면 모를까 통하지 않은 지금은 여성의 몸보다 남성의 몸 쪽이 덜 위험했다.
저주를 받은 건 엘리사의 탓이 아니었지만, 남편이 나설 수 없는 건 그녀의 몸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멈추시오.”
“뭐야, 넌!”
“이 사람 아내, 아니, 남편이오!”
겁을 잔뜩 집어먹어 벌벌 떠는 주제에 목소리는 우렁찼다. 진저는 기가 막혀 아내를 올려다보았다. 드러난 목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책도 없이 어쩌려고. 남편이 함께 있다고 봐줄 사람들이었으면 처음 보았을 때부터 루펠라를 놔주었을 것이다.
“사내자식이 계집애처럼 곱상해서 힘이나 제대로 쓰겠어?”
진저는 저런 말을 한 후레자식을 그냥 보낸 적이 없었다. 그가 비키라는 듯 엘리사의 팔을 잡았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꾹, 눈을 감았다.
“여성을 힘으로 제압하는 사내보다 낫지!”
“뭐야?!”
“내가 진저 그웬이오!”
엘리사가 버럭 소리쳤을 때였다. 으악 하는 비명과 함께 루펠라의 손을 잡고 있던 장신의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제야 눈을 뜬 엘리사가 입을 합 다문 채로 고꾸라진 사내와 루펠라를 번갈아 보았다. 루펠라는 멀쩡한 얼굴로 잘만 있었는데 장신의 사내는 하초를 붙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흥.”
진저는 다시 계산을 시작했다. 일단 한 놈은 불알을 걷어차였으니 빠르게 회복하진 못할 터였다.
3대 1의 상황. 세 명이서 달려드는 동안 한 놈이 회복하면 곤란하다. 진저가 루펠라를 향해 손짓했다. 팔랑팔랑 다가오던 루펠라가 뚱뚱한 사내에 의해 가로막혔다.
“이년이!”
엘리사가 또다시 냅다 뛰어가 뚱뚱한 사내를 막았다. 그녀 덕분에 루펠라는 잡히지 않고 진저의 뒤로 숨을 수 있었다.
“오빠 너 미쳤니?! 장난 그만 쳐!”
사이좋은 남매는 아니지만 진저의 실력까지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는 도태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실력을 택했다. 오로지 살기 위해 정진하는 자를 그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진저와 엘리사의 몸이 바뀌었다고는 상상조차 못 하는 루펠라가 얼른 돌아가자며 엘리사를 채근했다.
아무리 그간 진저가 수련에 힘썼어도 혼은 엘리사였다.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사내를 이길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결국 진저는 주변에 너부러진 돌을 손에 움켜쥔 채 사내에게 다가갔다. 머리라도 내려쳐 기절시켜야 했다. 죽을지도 모르지만 알 바 아니었다. 인간쓰레기를 버릴 폐기물 처리장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 진저는 인간쓰레기는 죽다 살아나도 재활용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이게!”
쓰레기는 쓰레기답게 약자를 가장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 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를 덥석 잡은 사내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얏!”
딱콩!
진저는 단말마와 함께 쓰러지는 사내의 뒤로 주먹을 꽉 움켜쥔 아내를 보았다. 주먹을 틀어 제대로 내려친 것도 아니고, 정말 꿀밤을 먹이듯 엄지를 정면으로 하고 있었다.
“…….”
“주, 죽었나요?”
그럴 리가. 아무리 진저가 수련에 힘썼다지만 힘마저 장사처럼 좋을 순 없었다. 그건 신의 영역이었다.
사내는 열이 받은 모양인지 숨을 학학, 거칠게 내쉬며 엘리사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틈이 생기자마자 쏜살같이 끼어든 진저가 사내를 메다꽂았다.
“아…….”
아내는 맹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물었다.
“그 몸으로 어떻게…….”
“요령만 알면 돼. 저택으로 돌아가면 당신에게도 알려주지.”
힘이 없어서 제대로 곤죽을 내주진 못했으나 시간을 벌 순 있었다. 부부와 루펠라는 그대로 꽁무니를 뺐다.
사내들이 쫓아오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타격을 받았는지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구금소에 도착한 그들은 경비병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귀족 추행죄를 물길 요청했다.
그웬저의 마부는 한참 전부터 대기 중이었다. 함께 마차를 탄 이들은 저택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웬저에 도착한 부부가 마차에서 내렸다. 루펠라는 그대로 마차를 돌려 제 소유의 저택으로 귀가키로 했다. 그녀는 내저로 들어가는 부부를 향해 소리쳤다. 몹시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난 새언니가 마음에 들어. 메다꽂을 때 아주 섹시하던걸?”
진저에겐 생전 처음으로 동생에게서 듣는 칭찬이었고, 엘리사에겐 부끄럽기 그지없는 핀잔이었다.
부부는 동시에 생각했다. 루펠라가 바보라 천만다행이라고.
내저에 들어온 진저는 거추장스러운 코트를 내던지듯 벗었다. 여성의 코트는 뭐 이렇게 복슬복슬한지 움직이기 몹시 불편했다.
한겨울인 데다 워낙 아내의 몸이 허약한 탓에 참고 있었을 뿐이다. 본래의 그였다면 애진즉 벗어 던졌을 터였다.
하녀가 쓰레기처럼 내던져진 코트를 주웠다. 아랫것들은 주인 심기에 하루에도 열두 번씩 목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눈치는 자연히 늘게 되는데, 하녀는 오늘 마님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 없이 발을 놀렸다. 평소에 점잖은 사람이 화가 나면 개차반이 되는 것이다.
안주인의 침실에 들어온 진저는 걸리적거리는 액세서리를 죄 떼어내고 얼굴 가죽을 벗기듯 화장을 지워냈다. 대충 물에 적신 천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진저가 아내에 대해 나쁘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언제나 평가는 객관적이었다. 그건 그가 살아남기 위해 택한 몇 가지 삶의 제약 중 하나였다. 육신을 모두 갈아 넣다시피 수련에 매진했던 것처럼.
진저는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꾸미는 법을 몰라 그렇지 아내의 바탕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아니, 원석의 크기와 자질만 놓고 본다면 훌륭하다는 말이 더 적합했다.
그녀와 몸이 바뀌기 전엔 아내는 얼굴 근육이 부족한가 싶었다. 결혼 후 3개월 동안은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몸이 바뀌고 나서는 영혼이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웃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다시 몸이 되돌아온 후엔 조금 달랐다. 그가 편해졌는지 드물게 미소를 보였다.
진저는 입꼬리를 바짝 끌어 올리다가 훅,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봐도 한심한 짓거리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내였다. 진저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 일은 미안해요.”
다른 때 같았으면 ‘당신은 뭐 그리 감사하고 미안한 게 많나’ 하며 핀잔을 주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진저가 기가 팍 죽은 엘리사를 보며 머리를 삐딱하게 젖혔다.
“내가 당신을 고용했던가?”
“네?”
“우리가 상하 관계냐고 묻고 있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게 끝이야.”
이제야 진저는 아내가 왜 이다지도 사소한 친절에 감사해하고 미안해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자존감이 낮아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기대치가 바닥을 맴도는 것이었다. 그건 진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였다.
축복과 함께하는 삶은 아니었어도 사람을 만날 기회는 많았다. 그웬군의 소대장들은 그가 직접 뽑고 함께 수련한 이들이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실력이 좋은 자들을 차출했다.
그 때문에 열이면 열 모두 성격과 방향성이 제각각이었다. 귀족, 그것도 사생아라 그를 얕잡아 보는 자도 있었고, 어렵게 생각하는 자도 있었으며 가엽게 여기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군대란 사회에서 가장 으뜸가는 가치는 능력이었다.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유는 너무나 당연했다. 인생 최초의 별명이 리스트럼(란델의 수도)의 꼬마 귀신이었던 그다.
여린 손이 수백, 수천 번 칼날에 베였다. 그러고도 다음 날이면 멀쩡한 표정으로 검을 잡았다. 그웬저를 떠나는 게 평생의 소원이었으므로.
입에서 단내가 아니라 썩은 내를 풍길 정도로 전술서를 파고 또 팠다. 어서 그웬 공작 부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생아이긴 해도 공작의 외아들이란 것에 만족했다면 음울하고 끔찍한 삶을 살았을 터였다. 그는 스스로를 가엽게 여기는 건 딱 질색이었다. 자기 연민의 가장 좋은 표본이 공작 부인이라는 직함으로 근지에 있었던 까닭이었다.
방치라는 학대를 받고 살아온 진저는 스스로에게까지 학대를 받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오로지 뻔뻔해지기 위해 이 모든 노력을 다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모였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고독하다 느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남성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궁의 꽃에게는 불가한 삶. 엘리사가 마주치는 자들의 9할은 부리는 자들이었다.
대화를 나눌 상대는 모든 사랑을 애첩에게 주어 남은 것이 없는 아버지, 자신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할퀴는 왕의 애첩과 그 딸들뿐이었다. 그나마 제 편이었던 조모는 병마에 짓눌려 시름시름 앓았다.
엘리사에겐 노력할 기회조차 없었다. 왕족의 특혜를 누리고 산 대가로 양 손목과 발목에 시선이라는 족쇄가 채워졌다.
감옥 같은 왕궁을 빠져나가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왕궁의 모든 사람은 왕의 머리 꼭대기 위해서 놀고 있는 애첩과 그녀의 딸을 우선시했다.
그들에게 단단히 찍힌 왕의 딸에겐 관심을 주어서도, 받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시종들뿐만이 아니었다. 엘리사를 가르치는 왕궁 교사들마저 사사로운 이야기는 엄격히 제한했다.
그렇다고 엘리사의 삶이 진저보다 불행했다는 건 아니었다. 결코 낫지 않았을 뿐.
진저에게 다행이었던 건 마피 부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승인 트리거 공작이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부친의 지기인 피셔 자작 또한 그를 아껴주었다.
하지만 엘리사에겐 아무도 없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고 2년 뒤 왕태후마저 쓰러져 버렸으니 장장 10년이 넘는 세월을 홀로 인내해 왔다.
진저가 엘리사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렇지 않을까 유추할 뿐이었으나 비슷한 삶을 살았던 만큼 그의 추측은 정답에 가까웠다.
엘리사는 진저의 말을 곱씹었다. 남편에게 순종하면 다시 그란디아로 돌아가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진저 그웬의 아내’로 고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럼 남편이 바라는 건 뭐지.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또다시 불빛 한 점 비추지 않은 길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럼요?”
“뭐?”
그녀의 말에 되묻는 진저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당혹스러웠다. 그럼 이 여자는 이제껏 제게 고용이 되었다고 생각한 건가.
“그럼 전 무엇을 해야 하나요?”
“굳이 뭘 해야 하나?”
“그럼 제가 이곳에서마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엘리사의 말에 날이 서 있었다. 진저는 뒷목을 주무르며 말을 골랐다. 귀족 간의 결합에 실리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 또한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도 이익을 위해 신부를 골랐고, 아내 또한 어떠한 가치에 의해 결혼을 선택했을 터였다.
오롯이 사랑만으로 부부가 되길 택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집안의 격이 맞는 남녀가 우연히 사랑에 빠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그런 경우는 전자보다도 수가 적었다. 그저 맞춰 살아가는 것이다.
“일단 이것부터 정정하지. 우린 고용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야.”
“그게 뭐가 다른 거죠?”
“벗어.”
엘리사의 눈이 커졌다.
본래 제 눈이었던 것이 이다지도 투명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릎도 꿇고.”
그녀는 하의의 천을 그러쥐어 비틀었다.
“이게 당신이 말하는 관계. 내가 말하는 관계는.”
진저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거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거울에 비친 부부는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남성보다 한 뼘하고도 반이 더 작은 여성이 가까스로 남성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이거지. 같은 곳을 보고 서로 존중하며 사는 것.”
“……네.”
그녀가 말하는 고용 관계가 실제로 그의 예처럼 한쪽이 천대받는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런 용어로 규제된 관계라면 서로의 심리 상태는 그의 예와 별만 다를 게 없다는 거지.
“당신 이름이 뭐야?”
“네?”
“엘리사 그웬. 내가 주었고, 당신이 선택해 준 이름. 내 아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기도 하고. 내가 당신을 믿기 시작한 것처럼 당신도 나를 조금쯤은 신뢰해도 괜찮잖아.”
엘리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이상했다. 가슴이 벅차고, 떨려서 도무지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남편은 항상 능글거리고 밉살맞지만, 가끔 저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여보, 나를 너무 곤란하게 하지 마.”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여보.”
진저가 빙긋 웃었다.
“오늘은 함께 잘 건가? 난 당신 몸으로도 좋은 꿈을 꾸게 해줄 수 있는데.”
엘리사가 샐쭉 그를 흘기며 그의 손을 떼어냈다.
“돌아갈 거예요.”
“품에 안아 재워준대도.”
“놀리지 말아요!”
토라진 그녀가 도망치듯 안주인의 침실을 나섰다. 복도에 달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새하얗게 부서지는 달빛을 보며 그녀는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똑똑, 이상한 것이 뺨을 적시며 떨어졌다. 열네 살 이후로 울어본 적이 없던 엘리사는 남편의 한 마디에 울고 웃는 평범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건 아주 기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을 잃어버린 기분인 듯도 하고, 꿈을 꾸듯 몽롱한 기분인 듯도 했다.
‘정말 위험해.’
남편은 다정했다. 왜 그런 몹쓸 별명들이 붙었는지 모를 정도로 다정다감한 남자였다. 남편의 친절과 배려가 얼마나 특별한 건지 알기에 가슴이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