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3장은 페이크였다(1) (4/31)

    4장 3장은 페이크였다(1)

    왜 당혹스러운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는가.

    아내보다 일찍 기상한 진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내는 잘 자고 있었다. 진저의 몸으로, 아주 잘.

    제가 누웠던 자리에서 양손을 앙당그레 말아 쥔 채로 쌕쌕, 숨을 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진저는 생각했다.

    저주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건가. 그럼 이전엔 어떻게 내 몸으로 돌아간 거지. 돌아갔을 적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저주가 발동했단 말인가.

    날짜인가. 아내의 몸이 되었던 건 13일.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온 건 5일. 오늘은 9일. 날짜는 저주와 상관이 없었다.

    그보다 잔뜩 웅크린 채로 ‘우응’ 하고 잠투정을 하는 자신의 몸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진저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잠시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시 엘리사의 몸으로 돌아간 진저를 보고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헙, 하고 숨을 들이켜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뭐죠?”

    “그러게. 나도 궁금하군.”

    “또 몸이 바뀐 거예요?”

    “눈앞에 당신 몸이 있는 게 맞다면.”

    손을 내려다보던 엘리사가 서둘러 이불을 들췄다. 남편의 몸이 맞았다.

    * * *

    그래도 한번 겪어봤다고 처음과 같은 소란은 없었다. 부부는 옷을 갈아입고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놀라서 그런 건지, 피곤해서 그런 건지 아침마다 엘리사를 곤란하게 했던 생리 현상은 없었다. 혹시 모르니 하인에게 장갑을 가져오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그녀에게 그는 말했다.

    “어차피 친해져야 할 텐데. 계속 신경안정제를 먹을 순 없잖아.”

    그녀가 그를 새초롬하게 쏘아보았다. 어제의 복수인 듯 그는 밉살맞은 투였다. 엘리사가 작게 꿍얼거리며 무릎에 두 손을 포갰다.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그녀의 다소곳한 몸짓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여성의 몸으로 한다면 몰라도 멀대 같은 자신의 몸으로 다소곳한 몸짓을 하는 건 대단히 속이 쓰렸다.

    진저는 접힌 미간을 꾹꾹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그놈의 기하스엘. 그놈의 토벌! 이럴 줄 알았으면 포상이고 나발이고 참전하지 않는 건데. 토벌로 얻은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컸다.

    “계속 이렇게 몸이 바뀌는 걸까요?”

    “아무래도.”

    “큰일이네요. 이번엔 일정이 많은데.”

    그도 1차로 몸이 바뀌었을 적에 미뤄 놓은 일들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가장 급한 건 신년 모의 전투였다.

    이전엔 겨우 체면만 산 정도라 신년 모의 전투에선 1위를 노리고 있었다. 진저의 군은 4공 중 가장 전장에 익숙하지만, 모의 전투에서는 애석하게도 모든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지가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마음가짐이 느슨해지는 탓이었다.

    1년에 한 번 내지 두 번 치러지는 모의 전투를 위해 4공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모의 전투는 가문의 위상이 달린 문제였다. 이렇게 되면 아내가 훈련에 참가해야 하는데.

    진저는 아내,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몸의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책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도 없는 듯한 가녀린 팔목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활을 쏘아본 적이 있나.”

    “네.”

    “있다고?”

    그럼 궁수들의 훈련엔 참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저는 그녀에게 언제 활을 잡아보았는지, 실력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캐묻다가 돌아오는 대답에 좌절했다.

    “모후께서 활을 선물해 주셔서 시위를 당겨 보았어요.”

    그녀의 모후라면 절명한 리즈 왕비일 테고, 리즈 왕비 생전에 활시위를 당겨보았다는 건 적어도 14년은 더 된 일이란 건데. 어린 아내에게 제대로 된 활을 선물했을 리도 없고. 활촉이 무딘 장난감 활이 분명하다. 엘리사는 그마저도 손가락에 상처가 나 왕태후에게 활을 빼앗겼노라 말했다.

    “그래도 맞추긴 했어요.”

    “동물도 아니었을 텐데.”

    “동물이었어요. 원래 과녁을 맞히려고 했는데 날아가는 새를 맞추었지 뭐예요.”

    “…….”

    진저는 말없이 이마를 덮었다. 날아가는 새를 맞추는 명궁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실수로 날아가는 새를 맞춘 사람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신 일정이 어떻게 되지?”

    “다음 주에 힐튼 후작 부인과 4공 부인들의 모임에 가요. 매일 라골에게 문화 수업을 받기로 했고. 또…….”

    일정을 종알종알 늘어놓던 엘리사가 큰일이라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이보다 더 큰일이 뭐길래. 진저가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그녀가 답했다.

    “오늘 아가씨와 속옷 상점에 가기로 했어요.”

    그녀가 아가씨라고 부를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진저의 누이, 루펠라.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속옷. 구경할 필요가 뭐 있다고 상점까지 들린단 말인가. 짜증 섞인 물음에 엘리사가 ‘패션의 시작은 속옷이라던 걸요’ 하고 말했다. 그녀의 주장에 코웃음 친 진저가 대꾸했다.

    “포장지가 훌륭하면 뭐해. 알맹이를 줄 생각이 없잖아, 당신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엘리사가 그를 흘겼다. 다정함에 고맙다가도 저렇게 미운 말을 하며 입술을 꽉 꼬집고 싶어졌다.

    그녀가 파르르 떨며 자신을 쏘아보자 그는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진저는 어차피 자신만 볼 텐데 자신의 취향은 맨몸이니 약속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며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자 엘리사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당신만 일이 있는 게 아니에요. 제게도 소임이 있어요.”

    “부인, 나는…….”

    “알아요. 당신이 보기에 하찮은 일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겐 아니에요. 그웬가의 안주인이 되었으니 소임을 다하고 싶어요. 가정을 두루 평안하게 하는 것. 사교 활동으로 보탬이 되는 것. 내실을 살피는 것. 모두 제가 할 일이에요.”

    시무룩해진 그녀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진저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의 일을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다. 가문의 안주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결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저가 한숨을 내쉬며 그런 뜻이 아니었어, 하고 그녀를 달랬다.

    “저도 당신의 일을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오늘 아가씨와 약속을 취소하지 말아줘요.”

    꼭 속옷 상점에 가야 한단 말인가. 거기선 대체 무엇을 하기에. 저 레이스가 예쁘네, 저 색은 너무 화려하네 떠드는 건 카탈로그를 보면서도 할 수 있었다.

    그는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녀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자신이야 말 몇 마디 섞어주기만 하면 되나, 아내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들에 도전해야 했다. 수습의 강도가 달랐다.

    “훈련에 참관만 해.”

    “뛰는 것 정도는 같이할 수 있어요.”

    그들이 얼마나 뛸 줄 알고. 그녀의 생각보다 훈련은 고된 활동이다. 평생 몸을 단련해 온 진저도 훈련이 끝난 후엔 고통스러웠다.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하는 게 훈련이었다.

    그러나 진저는 몰랐다. 엘리사의 인생은 온통 인내해야 하는 것들 투성이였다. 여성이니만큼 남성의 체력을 따라가진 못하지만 정신력은 누구보다 강한 여자였다.

    엘리사는 평소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와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성에 비해 여성이 월등히 연약하다는 사실은 안다. 그래도 노력은 해볼 생각이었다.

    아내의 의지가 눈동자를 통해 전해졌다. 병사들이 평소 저 정도 결기를 띠고 있다면 모의 전투쯤은 우스울 터였다.

    “한번 해보자고.”

    “네.”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 * *

    오전의 결심이 흔들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어.’

    엘리사는 백지장 같은 얼굴로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뛰고 구르는 건 의지의 문제지만 이건 달랐다.

    병사들은 냉수마찰을 한다며 속옷 한 장 남기지 않고 탈의했다. 그들은 서로의 몸에 냉수를 끼얹으며 낄낄거렸는데, 이 추운 날에 찬물을 맞는 게 뭐가 즐거운지 모르겠어서 그녀는 그저 멍했다. 마크빌 경이 남편의 몫이라고 물동이와 수건을 가져왔다.

    물동이와 수건을 들고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엘리사는 기겁하여 등을 돌렸다.

    어제 관계를 맺을 뻔했더니 평소보다 더 무서워 보인다.

    징그러워! 징그러워! 그녀는 울고 싶었다. 왜 이들은 매일같이 옷을 벗어 던진단 말인가!

    “주군.”

    홀딱 벗은 채 다가오는 마크빌 경과 소대장을 본 그녀는 패닉에 휩싸였다.

    “꺄악!”

    비명을 지른 그녀가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소대장들은 조금 나았는데 그들 뒤쪽으로 덜렁거리는 것을 훤히 드러낸 이들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병사들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한 엘리사가 천천히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른세수를 하는 것 같은 주군을 보며 병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 계집애들처럼 그만 꺅꺅거리고 대충 끝내!”

    그제야 사내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서둘러 수건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 매일 이 광경을 봐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자신 없었다. 할 수 있다며 의지를 불태우던 오전의 자신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이 꼴을 다 견딜 수 있어야 남편 행세가 가능한 거다. 등을 돌린 엘리사는 훌쩍훌쩍 코를 비볐다.

    또다시 남편에 대한 분노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왜 저주를 받아서는! 이전에도 한 것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엘리사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훔쳐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서워!’

    * * *

    아내가 자신을 대신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던 진저는 소란스럽게 들이닥친 루펠라에게 이끌려 저택을 나섰다. 마차 안에서도 루펠라는 신나게 수다를 떨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꾸만 하였다. 엘리사가 워낙 조용한 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차는 쉼 없이 달려 상점에 도착했다. 루펠라는 신이 난 듯 그를 재촉했다. 쇼윈도에는 얼굴 없는 마네킹이 속옷 바람으로 서 있었다.

    망사 소재에 털까지 듬성듬성 달린 속옷을 보던 진저가 혀를 내둘렀다. 진저의 취향은 아니었다. 차라리 자신이 나온 게 나은 걸지도 모르겠다. 순진한 아내에겐 너무나 당황스러운 속옷일 테니.

    루펠라가 그의 손목을 잡고 상점 안에 들어섰다. 드레스 샵에도 들러본 적 없는 그는 눈앞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광경에 말을 잃었다.

    디자이너이자 속옷 상점 ‘밤의 올리브 나무’의 주인 올리비아는 밝은 표정으로 그들을 반겼다.

    “잘 오셨어요. 영애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만한 상품이 준비되었답니다.”

    “오늘은 내가 아닌 이분의 속옷을 골라주게.”

    “처음 뵙는 분이신데, 이분은…….”

    “그웬 공작가의 안주인이시지. 나의 새언니일세.”

    올리비아가 입을 가리며 진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그녀는 곧 차를 내올 테니 잠시 기다리시라며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진저는 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것 같은 이리의 눈빛이랄까. 어떻게 뜯어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해 소리 없이 혀를 찼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보아온 아내는 금전 감각이 없었다. 왕궁에서 자란 탓이었다. 무엇이 필요하다 얘기하기도 전에 궁인들이 알아서 대령했을 테고, 보석이나 드레스 같은 건 멀리하였으니 그런 사치품이 얼마나 하는지 모를 만도 했다.

    란델에선 혼인 전에 부부가 될 이성이 원하는 것을 선물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대체로 땅이라든가 고가의 보석, 혹은 어떠한 권리들을 요구했다.

    진저는 그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내를 들이는 이유가 처가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으므로 왕국의 부당한 참견을 제한하는 권리 문서를 요구했다. 왕은 두말없이 서약했다.

    엘리사에게도 사람을 보내 물었다. 무엇이 갖고 싶으냐고. 란델로 돌아온 사무관은 멍청한 얼굴로 ‘책이 갖고 싶답니다’ 하고 말했다.

    「제대로 물은 건가. 그딴 걸 예물로 받고 싶을 리 없잖아.」

    「란델의 관습을 설명해 드리고 예비 신부가 어떤 것들을 요구할 수 있는지도 알려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무관은 진저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혹여 그가 믿지 않을까 싶어 서투르게 엘리사를 흉내 내기까지 냈다.

    「보석 같은 건 먹을 수도 없고 짐만 되는걸요. 책은 마음의 양식이에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가 천치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처음 본 그녀는 의외로 멀쩡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아내가 될 사람이 머저리, 혹은 사내를 꾀는 것에 익숙한 요부라고 생각했던 그는 드물게 당황하기까지 했다.

    진저는 차를 내온 올리비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깟 한두 푼 문제가 아니라 감히 그웬가의 안주인을 뜯어먹으려는 눈빛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새빨간 입술을 길게 늘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이곳은 밤의 요정들의 살롱이죠. 저는 부인께 가장 멋진 갑옷을 선물할 마법사고요.”

    “올리비아의 작품은 하나같이 훌륭해요. 오빠도 뒤집어질걸요.”

    두 여자가 음흉하게 웃었다.

    ‘염병을 떠는군.’

    진저는 관심 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깟 속옷 없어도 그녀에게 만족스러운 밤을 선사할 수 있었다. 루펠라는 미쳤는지 자신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진저는 다 안다는 듯 제 어깨를 토닥이는 여동생을 노려보았다. 이 염병 떨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봐서 졸업이나 하지. 그녀와 함께 입학한 동기들은 모두 졸업을 했다.

    “학업으로 바쁘실 텐데 이런 곳을 찾으셨네요.”

    ‘내가 너한테 쏟은 돈이 얼마인데 이딴 곳에서 놀고 자빠졌냐’는 말을 돌려 말했지만 루펠라는 그저 까르륵 웃을 뿐이었다.

    올리비아가 손가락을 튕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들이 마네킹을 들고 들어왔다. 지루한 듯 목만 주무르고 있던 그는 족히 스무 개도 넘는 마네킹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저건 뭐지.”

    “밤의 요정들이 입을 갑옷이죠. 전장에 나가는 사내들만 갑옷을 찾는 게 아니에요. 여성들도 갑옷이 필요할 때가 있죠. 가령.”

    몸을 일으킨 올리비아가 표범 무늬 속옷을 입은 마네킹을 매만졌다.

    “거사를 치를 때라거나.”

    올리비아가 야릇한 손길로 마네킹의 가슴 라인을 훑었다.

    “기력 없는 남편도 나무꾼 못지않은 힘을 발휘할 겁니다.”

    순간 표범 패턴의 속옷을 입은 엘리사가 떠올랐다. 진저가 흥미로운 눈으로 속옷을 훑기 시작하자 루펠라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초야를 치렀다고 하더니 속옷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하긴, 제 의붓오빠는 펜을 놀린 시간보다 검을 놀린 시간이 많았다. 체력 면에선 어떤 귀족 남성들도 그를 따라가지 못할 터였다.

    “오빠의 취향은 저쪽인 것 같죠?”

    ‘어디가.’

    진저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루펠라가 짚은 마네킹은 머리에 고양이 헤어밴드를 착용하고 있었다. 꼬리에 달린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진저가 인상을 찌푸렸을 때였다. 종업원이 포르테 백작 부인이 샵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포르테 백작이라면 사사건건 진저에게 시비를 거는 녀석이었다. 그녀를 대신에 찾았던 파티에서 시낭송을 했던 그 여자가 샵을 찾았다고? 진저가 픽 실소를 흘렸다.

    겉보기에도 비리비리한 녀석이 밤에도 힘을 못 쓰는군. 아니라면 부러 이런 기괴한 속옷을 구매하러 올 리가 없지.

    반대로 부부의 사이가 몹시 친밀할 수도 있으나 포르테 백작 부인은 파티에서도 남편 욕만 주야장천 하던 여자였다. 시부모가 어떠네, 남편은 인내심이 없네, 인내심이 없다는 말이 이런 뜻도 포함하고 있었나 싶어 비죽,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포르테 공작을 걸고넘어지지 않아도 약 올릴 만한 일이 생겨서 그는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잠시 자리를 비울게요. 카렌, 귀한 분들께 그것을 보여드리려무나.”

    올리비아가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카렌이라는 이름의 종업원이 카탈로그를 한 무더기 내왔다.

    “이건 어때요? 언니 체형이라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루펠라가 가리킨 그림 속엔 남성과 얽힌 여성이 살구색 속옷을 입고 야릇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속옷과 별다른 게 없었다.

    루펠라가 추천한 속옷은 죄 아내가 기겁할 만한 것들이었는데 평범한 속옷을 추천하는 게 이상했다. 그의 눈이 의아한 듯 일그러지자 루펠레가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커플 속옷이에요.”

    “커플 속옷?”

    “언니에게 특별히 양보해 드릴게요.”

    종업원이 샘플을 가져왔다. 카탈로그에서 본 것과 동일한 그것은 루펠라의 말대로 남성 속옷과 세트였다. 속옷을 만진 진저는 머리가 아팠다. 이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 녀석이 질겁하며 도망친 까닭이 있었다.

    “말 그대로 커플 속옷이에요. 제가 사봐서 아는데…….”

    가장 은밀한 부위의 천이 찢어져 있었다. 아니, 부러 칼집을 내놓은 게 분명했다.

    “벗지 않…… 웁.”

    루펠라의 입을 막은 진저가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물었다.

    “설마 그 녀…… 아니, 그분에게 선물하신 게 이겁니까.”

    “들었어요? 맞아요. 이 속옷을 선물했는데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도망치지 뭐예요. 남자가 간이 콩알만 해서는.”

    저 속옷을 입은 채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눈이 화전 등만 해져서는 움찔움찔 뒷걸음만 쳤다. 하도 답답해서 벌떡 일어나 그의 성기를 잡았다.

    「윽!」

    그러자 낯빛이 시퍼렇게 변해 도망쳤다.

    루펠라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시 생각해도 기막힐 노릇이다. 밥상을 다 차려놨는데 맛도 안 보다니. 도망칠 건 뭐란 말인가.

    ‘그래도 크긴 했어. 탱탱하기도 했고.’

    기사들이 흉악하다고 낄낄거리던 ‘그’의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보여주면 닳기라도 하는 거야? 그놈의 용기는 왜 내 앞에서만 안 나는 건데.’

    루펠라가 콧잔등을 실룩였다. 진저는 그녀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속옷을 선물 받으면 누구라도 도망친다.

    그는 ‘그 녀석’이 파견을 청하던 날을 떠올렸다. 표정 없는 녀석이 평소답지 않게 파랗게 질려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러더니 암살도 좋고, 전쟁도 좋다며 떼를 쓰듯 파견 지원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크빌에게 묻자 그 또한 녀석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그게…… 아가씨께서 선물을 보내셨는데……. 저, 전 말 못 하겠습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도망쳤다. 그래서 파견 지원에서 서명을 하는 대신 연유를 캐물었다. 녀석은 답했다.

    「밤이 두렵습니다…….」

    그 말은 밤에 루펠라가 선물한 속옷을 입었는지 확인하겠다며 쳐들어올까 봐 두렵다는 뜻이었다. 남자 쪽 속옷에 달린 저 구슬 두 개는 뭐란 말인가. 진저는 골치가 아파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루펠라가 불퉁 입술을 내밀었다. 사내에게 그런 속옷을 보낸 게 교양 있는 행동이라 할 수 없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녀석은 자신을 여자는커녕 예닐곱 어린애로만 볼 터였다. 나는 다 컸는데, 내가 그에게 속삭인 모든 밀어는 진심이었는데.

    “아무튼 오빠는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물론 싫어하진 않는다. 진저가 츳, 혀를 차며 카탈로그를 뒤적였다.

    포르테 백작 부인과 상담을 마친 올리비아는 마음이 급했다. 결국 구매한 건 이전과 비슷한 촌스러운 반짝이 속옷 하나면서 무려 한 시간이나 자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응접실에 두었던 그녀는 뛰다시피 그웬의 두 여자를 찾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미 구매를 끝냈는지 미련 없이 응접실을 나서는 중이었다.

    “버, 벌써 돌아가시려고요? 아직 회심의 작품이 남았습니다.”

    “공작 부인께선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셨더군. 속옷은 잘 보았네. 지불도 끝냈고.”

    루펠라는 속옷을 들고 있는 하녀를 가리켰다. 구매 명세서를 확인한 올리비아가 펄쩍 뛰었다. 그웬 공작 부인이 구매한 속옷은 아무것도 없는 민무늬의 하얀 속옷이었다.

    밤을 불태울 수 있는 좋은 작품이 얼마나 많은데! 올리비아가 그들을 뜯어말렸지만 루펠라는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참, 화장수를 잊었네. 언니, 천천히 나와요.”

    루펠라가 서둘러 숍을 나섰다. 루펠라도 아니고 저 얌전한 공작 부인에겐 설득도 소용없을 터였다.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데 루펠라가 나서자마자 진저가 입을 떼었다.

    “아까 그것.”

    “예?”

    “꼬리가 달린 것으로 가져오게.”

    꼬리가 달린 거라면……. 올리비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응접실에 들인 마네킹 중에 분명 그 디자인이 있었다. 올리비아가 종업원에게 ‘토끼의 색기’를 가져오라 일렀다.

    토끼 새끼가 뭐? 진저가 그 해괴한 이름은 뭐냐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올리비아는 신이 나서 속옷의 제작 의도를 떠벌떠벌 늘어놓았다.

    진짜 토끼털로 만든 볼을 달아 놓은 그 속옷은 움직일 때마다 꼬리가 흔들린다며 혹시 원하는 커스텀이 있으면 주문 제작도 가능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틈이 있는 연인을 유심히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살구색 커플 속옷의 작품명이에요. 그것과 같이 하의에…….”

    “그건 됐어.”

    벗기는 재미를 잃을 수야 없지.

    진저의 칼 같은 답에 올리비아는 입맛을 다셨다. 포장에 걸리는 시간은 오래지 않았다. 종업원에게 쇼핑백을 건네받은 그가 올리비아에게 금화 다섯 개를 내밀었다. 아쉬움이 환희로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최고가! 작품 중 최고가를 받았다. 얼굴이 벌게진 그녀가 몇 번이나 허리를 굽혔다.

    * * *

    훈련을 하느라 넋이 나간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본래 자신이 쓰던 침실을 찾았다. 침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자신이 가야 할 곳이 남편 방이라는 걸 떠올렸다.

    문을 나서려던 그녀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밤의 올리브 나무’라는 로고가 박힌 쇼핑백으로 보아 남편이 그녀의 청대로 속옷 상점에 가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배시시 미소 지은 엘리사가 쇼핑백을 열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그녀가 그대로 굳어 손을 떨었다.

    목욕을 마친 진저는 속옷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대충 가운만 걸치고 욕실을 나섰는데 예상치 못했던 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이, 이게 뭐예요?”

    “뭐긴. 속옷이지.”

    “그러니까 이걸 왜!”

    엘리사가 파르르 떨며 토끼 꼬리가 달린 속옷을 흔들었다. 진저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다가가 속옷을 빼앗았다. 당황한 엘리사가 그의 손에 들린 속옷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토끼 꼬리가 달린 속옷을 들고 다시 욕실로 쑥, 들어갔다.

    “잠깐만! 왜 들어가요!”

    문틈으로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안 입는 것보다 속옷을 입는 편이 낫잖아.”

    “다른 속옷도 있어요! 내가 줄게요! 그, 그걸 입으려는 건 아니죠?! 입지 말아요!”

    망사는 싫다구요!

    * * *

    진저는 아침부터 퉁퉁 부어 있는 아내에게 샐러드를 덜어주었다. 힐끗 그를 쳐다본 엘리사는 그의 배려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입으로 음식을 가져갔다.

    식사뿐 아니라 차를 마실 때도, 뜨개질을 할 때도 아내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아내를 훔쳐보며 펜대를 돌리던 진저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아내는 평소처럼 침대 구석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오후에 훈련 참관을 할 예정이라 지금이 아니라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계속 토라져 있을 건가.”

    “토라진 게 아니라 화가 난 거예요.”

    “왜?”

    그야 당신이 토끼 꼬리가 달린 속옷을 입었으니까. 화가 난 이유는 명확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긴 민망했다. 어젯밤에도 앵돌아진 엘리사에게 ‘나는 당신 남편이고 남편이 토끼 속옷 좀 입는 게 뭐 어때서?’ 하고 물었다.

    억지로 입힌 것도 아니고 몸이 바뀐 후에 내 취향의 속옷 좀 입겠다는데 뭐, 왜, 뭐, 라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녀 또한 그가 질색하는 삼각팬티를 입으니까.

    ‘하지만 고정이 안 되니까 거슬려서 입는 거란 말이야.’

    엘리사가 바구니 속에 뜨개질 거리를 와르르 욱여넣고는 협탁에 놓인 책을 들었다. 어제의 그 일만 생각하면 자꾸 얼굴이 붉어진다.

    남편은 속옷을 입고 나서도 한참 동안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그 망측한 속옷을 입은 자신의 몸을 보았을 거라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진저는 책으로 얼굴을 가린 아내 앞에 앉아 책등을 쑥 밀었다. 종이에 얼굴이 파묻힌 엘리사는 미간을 좁히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고양이 같은 아내의 역정에 픽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이제 안 입을게.”

    “……정말요?”

    “다시 몸이 바뀌면 당신이 입어줘.”

    “싫어요!”

    엘리사는 책을 허벅지에 던지듯 내려놓고 씩씩거렸다.

    “어제도 당신이 싫어해서 벗었잖아.”

    “나 때문이 아니라 꼬리가 불편해서겠죠.”

    “어쨌든.”

    “당신 취향 이상해요. 꼬리가 달리지 않나 구멍이 숭숭 뚫린 망사질 않나.”

    “어울리던걸.”

    결국 엘리사는 그를 밀치고 침실을 나섰다. 이전에 그녀에게 밀려났을 때는 화가 치밀었는데 오늘은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허리를 접고 폭소하던 그는 몸이 바뀐 후로 웃을 일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수가 적어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아내는 의외로 재밌는 사람이었다.

    엘리사는 침실 밖으로 흘러나오는 남편의 웃음소리를 듣고 쿠션을 쥐어뜯었다. 몸이 바뀐 후론 온통 곤란한 일투성이였지만 그중 가장 곤란하고 당황스러운 일은 어젯밤의 그 토끼 속옷 사건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얼마나 뒤척여야 했던가.

    너무해!

    “그런데 그건 어디에 뒀지?”

    어느새 침실에서 나온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 속옷이요?”

    푸하.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 속옷이 대체 얼마나 당황스러웠으면 말을 꺼내는 것마다 속옷을 연상시키냔 말이다.

    아내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파르르 떠는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만 놀리고 싶어져 큰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감정까지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당신 인장 말이야. 결혼식 후에 받았을 텐데.”

    “아,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어요.”

    “필요하면 써도 되는데, 왜.”

    “그다지 쓸 일이 없었거든요. 필요한 건 말하기 전에 고용인들이 챙겨주었어요.”

    가문의 내실을 다지는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아내는 ‘란델의 문화에 익숙해진 뒤에 꺼내려고 했어요’ 하고 덧붙였다.

    옳은 생각이다. 무분별하게 인장을 남발하는 안주인보다 사용에 조심스러운 안주인 쪽이 가문에 이로웠다. 엘리사는 잠시 기다리시라며 남편의 방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장이 든 나무 상자를 가져온 그녀는 필요한 일이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에 사용하실 건지는 알고 싶어요.”

    “욕실 시설이 낡았더군. 수리를 할 생각이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온순한가 싶다가도 제 할 일엔 똑 부러졌다. 안주인의 인장은 그녀의 권능이었다. 이번처럼 욕실 수리 등의 사소한 일에도 쓰이지만, 이혼 서류에도 안주인의 인장이 필요했다.

    인장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엔 분실했다느니 하는 핑계 따위는 먹히지 않았다. 관리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물건인지라 부부는 몸이 바뀐 후에 바로 인장의 사용처를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참, 저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지?”

    “병사들의 식사가 형편없더라고요. 고된 훈련을 하루에 열두 시간씩 받는데 마른 빵과 냄새나는 고기가 전부였어요.”

    수도에 올라와 있는 병사의 수는 많아야 천을 넘지 못했다. 왕성에서 반란을 저어하여 수도에 데려올 수 있는 병사의 수를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적은 수라도 천 명의 세 끼 식사였다. 전장에선 그보다 못한 음식을 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영지에서 훈련하는 군사들은 육류는커녕 콩을 저며 만든 가고기를 먹었다.

    당장 운용할 수 있는 금액은 크지 않았다. 역시 금전 감각이 부족한가. 진저는 천 명을 하루 세끼씩 일 년을 먹일 때 어느 정도의 돈이 드는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찬조를 받는 게 어떨까요?”

    “찬조라니.”

    “최근 그웬령의 주변은 척박하여 강도 떼가 들끓는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대륙의 상권 중심지인 케사르에 가려면 그웬령을 지나야 하죠. 상인들은 당초부터 손해를 볼 걸 감수하고 상단을 보낸다더라고요.”

    아내가 말하는 찬조가 무엇인지 깨달은 진저는 입술을 길게 늘였다.

    “강도에게 짐을 빼앗기는 것보다 대가를 지불하고 호위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하겠지. 그 대가가 재물이 아닌 식자재라면 더더욱.”

    “네, 맞아요.”

    아내는 여간해서는 한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여자였다.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여자인가 싶다가도 순진해서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금전 감각이 부족한가 싶었는데 이런 부분에선 또 제대로 된 답을 내놓는다.

    그녀의 말이 맞다. 노략질로 빌어먹는 종자라도 겁을 모르진 않았다. 진저의 군은 4공의 군대 중 가장 전장에 익숙했다. 그의 군대에 맞서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머저리라면 상대도 쉬울 터였다.

    “처음엔 큰 이익을 취하진 못할 거예요.”

    “하지만 성공하면 내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테지.”

    “네. 그럼 주방장과 상의해 주세요.”

    “내가?”

    “당신 몸으로 할 순 없잖아요.”

    엘리사는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졸지에 일이 하나 더 늘어버린 진저는 한숨을 내쉬었으나 표정은 부드러웠다. 부부가 세세한 부분을 논의하던 그때, 한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트리거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당황한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 * *

    남편을 대신해 중요한 자리에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타인에게 드러나서는 안 될 비밀.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트리거 공에게는 더더욱 들켜선 안 된다. 남편은 대충 그와 자신의 인연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검술 스승, 지기의 부친, 스승님 세 단어를 거듭 되뇌었다. 이미 저택에 들어온 후라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예상치 못할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부부는 이 일을 계기로 매일 밤 짧게라도 중요한 내용에 대해 공유하기로 했다.

    트리거 공. 진저가 가문의 키를 쥐기 전까지는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호탕하고 유쾌한 성정으로 아랫사람, 윗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 그를 좋아했다.

    남편은 검술을 배우러 자주 트리거가를 찾으면서 공작 부인과 그의 아들딸과 인연을 쌓았고, 트리거 공의 장자는 현재 중앙 사령부의 있……. 장자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문고리를 잡은 엘리사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이마를 짚었다. 과일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트리거 백작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어이쿠,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예. 막…… 들어가려던 참입니다.”

    트리거 공이 술병을 흔들었다.

    “차는 재미없어. 좋은 술이 들어와서 가져왔지. 어서 앉아라.”

    엘리사는 술에 약했다.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머리만 아파서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파티에서도 도수가 약한 술 위주로 몇 모금 마시는 게 다였다.

    엘리사는 엉겁결에 트리거 공이 쥐여주는 술잔을 받았다. 훈련을 핑계로 받아두기만 하려 했는데 자꾸만 잔을 부딪치는 바람에 결국 한 잔을 몽땅 비우고 말았다.

    ‘남편의 몸은 술이 잘 받네.’

    꽤 도수가 높은 술이었는데 한 잔을 모두 들이부어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았고 어쩐지 몸이 부유하는 듯 기분이 묘해졌다.

    트리거 공작은 연거푸 술을 들이켜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결혼 전에 잠깐 만난 여자가 이혼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그것 때문에 트리거 공작 부인이 몹시 예민해졌다고 했다.

    꽃을 선물하면 ‘그 여자가 좋아하는 꽃인가요?’ 하며 속을 뒤집고 며칠씩 방에 틀어박혀 식사도 걸렀다.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공작이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라며 그녀를 달랬지만 듣지도 않고 앵돌아졌다.

    듣다 보니 이상했다. 라골에게 들었던 트리거 공작은 평소에도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남자였다. 여자의 질투는 대체로 불안에서 시작된다. 그만한 사랑을 받는 여자가 불안해질 일이 무에 있다고. 엘리사가 고개를 조금 젖혔다.

    “그게 전부인가요?”

    “음?”

    “공작 부인께서 이혼 소식을 듣고 바로 토라지신 거예요?”

    정신은 멀쩡했는데 자꾸 말이 느려졌다. 그러고 보니 트리거 공작의 푸념을 들어주며 벌써 술이 네 잔째 오갔다. 속도도 빨랐다.

    “그전에 토라졌지. 그 여자의 이혼 소식을 듣고는 밥도 먹지 않고 방에 틀어박혔어. 건강을 해치면 어쩌려고.”

    그것 보라지. 분명히 다른 이유에서 토라졌는데 이혼 소식을 듣고 더 불안해지신 거다. 남성의 입장에서 듣는 사랑싸움은 처음이라 엘리사는 흥미로웠다.

    사실 이런 가벼운 대화는 란델에 온 이후로 하게 된 거지 그란디아에서는 사소한 대화를 나눌 일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왕궁 하녀들과 농담 몇 마디를 하는 게 다였다.

    “무슨 일로 싸우신 건데요?”

    “회의를 마치고 꽃을 사 갔잖아. 그때 말이야. 진저, 너와 케이크를 사러 갔던 그때.”

    엘리사는 지난번 진저가 사다 준 케이크를 떠올렸다. 몽블랑이 맛있었지. 남은 케이크도 티타임마다 찾아 먹었다.

    “당신이 매화를 좋아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사 왔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토라진 거야.”

    그의 말을 들은 엘리사는 헤실헤실 웃었다. 한참 분통을 터뜨리던 트리거 공작은 이 녀석이 이렇게 술이 약했나 싶어 잠시 눈을 가늘게 떴으나, 그웬군이 훈련에 들어갔다던 말을 떠올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고되면 취기도 빨리 오른다. 엘리사가 손뼉을 짝 마주쳤다.

    “부인께서 그것 때문에 서운하셨나 보네요.”

    “그게 왜?”

    “매화요. 정말 부인이 좋아하는 꽃이 맞나요?”

    “무슨 소리. 내가 똑똑히 기억한다고. 날씨가 풀려서 매화를 볼 수 없다고 아쉬워하던…… 헉.”

    트리거 공작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기억이 흐릿했다.

    이마를 탁, 두드린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다. 아내가 아니었어.”

    그러고는 돌아가야겠다며 엘리사의 배웅도 거절했다. 트리거 공작이 떠난 후 응접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엘리사가 공작이 선물로 가져온 박스를 열었다.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술이 몇 병이나 들어 있었다. 끙차, 소리를 내며 박스를 소파 위로 끌어 올린 그녀는 그중 술병이 가장 예쁜 것을 꺼내 들었다. 투명한 병 안에 연분홍빛의 술이 찰랑거렸다.

    계속 흐릿해지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눈을 일그러뜨린 그녀가 코르크에 오프너를 꽂아 넣었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병을 막고 있던 코르크가 제거되었다.

    ‘기분 좋아.’

    엘리사가 히죽히죽 웃으며 잔에 술을 꼴꼴 따랐다.

    “달다. 맛있어.”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입에 머금을 때마다 단물이 톡톡 입안을 자극했다. 그 느낌이 재밌어서 계속해서 술잔을 기울였다.

    * * *

    “벌써 돌아가셨다고?”

    “예.”

    그녀가 트리거 공을 대접하기 위해 나간 지 벌써 세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진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내를 찾아 방을 나섰다. 응접실 문을 연 그는 예상과는 다른 광경에 말을 잃었다.

    소심한 아내가 실수를 해서 기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기가 죽기는커녕 주정뱅이가 되어 술병을 끌어안고 있었다. 진저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 하는 거야.”

    “이거, 각하, 선무울.”

    스승님께서 아내에게 술을 먹였나. 아내의 몸은 늘어진 주정뱅이를 바로 앉힐 만한 힘이 없었다. 되레 그녀에게 끌려 품에 안기게 된 진저가 으득, 이를 갈았다.

    그녀는 진저가 곰 인형이라도 되는 듯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질에 공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제 머리카락을 만지며 ‘아까 아까 먹은 술이랑 똑같아. 분홍색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하인을 불러올 수도 없었다. 진저의 몸으로 주정을 부리면 답이 없다. 그는 아내를 옮기길 포기하고 술이 깨기를 기다리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만 마시라니까.”

    진저가 술병을 빼앗자 울상이 된 그녀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대체 얼마나 먹인 거야. 스승이 술을 좋아하는 거야 익숙하지만 먹이는 상대가 자신이 아닌 아내라면 말이 달랐다.

    그는 아내의 손에 물 잔을 쥐여주었다. 꼴깍꼴깍 물을 마시던 엘리사가 그 맛이 아니라며 앙당그레 쥔 두 손을 눈가에 올리고 훌쩍거렸다.

    “주세요.”

    “뭘.”

    “그으거. 달고 재밌는 거.”

    진저가 그녀의 입에 안주로 나온 체리를 집어넣었다. 뭐라도 씹으면서 정신을 차리라는 뜻이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입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안주에 손도 대지 않고 이 독한 술을 다 마신 건가. 그는 테이블에 가득한 빈 병을 보며 팔짱을 끼었다. 한참 체리에 집중하던 엘리사는 동이 난 그릇을 보고 또다시 울상을 지었다.

    “이거, 이거 더, 더 먹을래.”

    체리를 더 가져오려면 하인이 들어와야 하고, 하인은 주정뱅이가 된 그녀를 보고 기겁을 할 것이다. 진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두고 체리를 가지러 갈 수도 없었다. 자신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 들키지 않았는지 모를 만큼 잔뜩 취해 있었다.

    이대로 나가면 큰일이다. 저택의 고용인들과 병사들은 그를 오래 보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번에 입이 가벼운 고용인들을 정리하며 경력이 오래된 자들만 남겼다. 고용인들은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치사해.”

    “이제 없으니까 좀.”

    “거어짓말. 여기도 있잖아.”

    순식간이었다. 한순간에 진저의 입술을 덮은 그녀가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핥았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제 몸과 키스를 하는 건데도 이상하게 허리께가 찌르르하고 정신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입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내 체향이 본래 이리 단 건가. 아니면 술의 탓인가. 그도 아니면 담고 있는 영혼이 달아 체향마저 달콤해진 걸까. 그의 혀가 움직임을 멈추자 엘리사가 투정 섞인 비음을 흘렸다.

    “으응.”

    “잠- 웁.”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 뒷머리를 잡은 엘리사가 야릇한 살덩이를 찾아 입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체리보다 달고 술보다 재밌는 살덩이가 자꾸만 달아나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그녀가 그의 아랫입술을 물고 우물거렸다. 묘한 자극을 받자 허리에, 또 가슴에 야릇한 감각이 번졌다.

    진저는 당황스러움에 그녀의, 그러니까 제 몸의 가슴을 밀쳤다. 그녀와 키스를 하는 건 몰라도 그녀의 영혼이 들어간 제 몸과 키스를 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서 더 혼란스러웠다. 엘리사는 바르작거리는 진저의 양 손목을 잡고 입술을 떼었다.

    “싫어?”

    묘하게 발음이 정확했다. 결국 진저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가 엘리사를 끌어안고 천천히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포개진 입술 안에서 질척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반항을 멈추고 키스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엘리사는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이상해. 기분이 이상해.

    얼마나 흘렀을까. 입가가 번들거릴 정도로 키스에 몰두하던 남녀가 천천히 떨어졌다.

    “이상해…….”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진저가 픽 웃었다. 먼저 시작했으면서도 순진한 반응이었다.

    “아침도 아닌데…….”

    엘리사의 눈이 제 하체에 닿았다. 그녀는 꼿꼿하게 일어난 그것을 지그시 응시했다. 진저가 재빨리 그녀의 눈을 가렸다. 아무리 호방한 진저라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 * *

    잠에서 깬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얼마나 마신 거지? 술 상자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찾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 있었다. 목도 마르고 관절도 욱신거리고. 마실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술이 깨자 두통이 찾아오는 건 똑같았다.

    ‘추워.’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일으켰다. 응접실이었다. 해가 다 저물어 빛이라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이 전부였다. 소파에 누워서 잔 건가. 테이블 위를 더듬어 물을 찾은 그녀는 훅, 뜨거운 숨을 뱉었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나.”

    “아……!”

    엘리사가 베고 있던 건 그의 무릎이었다. 순간 그가 자신을 찾아와 물을 건네던 장면이 떠올랐다.

    “죄송…… 해요.”

    “뭐가?”

    “제가 취해서 당신에게 실수를…….”

    주위가 캄캄해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자신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미는 것 정도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당황한 엘리사가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실수를 했는데.”

    “어……. 그게…….”

    “기억나지 않으면 내가 가르쳐 주지.”

    그의 입술이 엘리사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거어짓말. 여기도 있잖아.」

    「싫어?」

    「이상해. 아침도 아닌데…….」

   그제서야 떠올랐다. 제 인생 최고의 실수가 될 그 장면이. 엘리사가 얼굴을 감싸 쥔 채 절규했다.

    * * *

    다음 날, 엘리사는 하녀가 가져온 스프를 마시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어제는 너무 당황하여 남편을 밀치고 침실로 돌아와 버렸다.

    사내의 몸을 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에게 잡혀 계속 놀림을 받았을 터였다. 몸이 바뀌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어째서 이런 일로 해야 하는가. 정말이지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남편 대신 남편의 가신과 기사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눈에 익은 기사 몇몇이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방에서 휴식을…….”

    그들이 신경 쓰여서 말이 몇 번이나 끊겼다. 엘리사는 방으로 돌아가면서도 뒤쪽을 힐끔거렸다. 자신이 정신을 놓은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나쁜 일은 아닌 듯싶었다. 흉사라고 하기엔 고용인들의 표정이 밝았기 때문이었다. 방으로 돌아가던 그녀가 침실로 오는 중인 남편과 마주쳤다.

    그녀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시선을 돌렸다. 남편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는데 그녀를 발견하고는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숙취는 괜찮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무리 지어 복도를 걷던 군인 몇몇이 엘리사를 보고 허리를 굽혔다.

    “주군을 뵙습니다.”

    엘리사가 당황하여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턱을 까딱 들었다. 대충 인사만 해주라는 뜻으로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저는 날름 방으로 들어갔다.

    “주군, 좋은 시간 보내셨다면서요?”

    그녀에게 말을 건넨 이는 한스로 연무장에서 몇 번이나 본 인사였다. 상관에게도 거리낌이 없는 그는 그웬 군 사건 사고의 중심이었다.

    엘리사는 그의 말뜻을 몰라 좋은 시간이라는 말을 입에서 굴리다가 미간을 좁혔다.

    “향유병을 아주 그냥 막!”

    한스의 말에 함께 있던 군인 둘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향유?

    “향유가 하나도 안 남았다던데 모른 척하시기 있습니까? 마님과 초야에서 말입니다.”

    초야, 초야, 초…… 아! 그제야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남편이 엘리사의 방을 찾았을 때 자신이 깨뜨린 그것을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안 남긴 했다. 자신이 병을 깨뜨려 버렸으니까.

    “아아, 그래. 하나도 남지 않았지.”

    우오오! 사내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역시 주군!’, ‘힘은 아주!’, ‘대단하십니다’ 하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그 향유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쓰임이 달랐다. 향유의 다른 이름은 마르코스 유(油)였다. 그것은 마르코스 어린잎으로 만드는데 성욕을 증진시키고 몸을 따뜻하게 하여 임신을 도왔다. 때문에 란델에선 교합에 쓰이는 기름이었다.

    그들의 말은 ‘초야에 대체 몇 번이나 한 거야? 이 짐승’ 정도의 뜻이었다. 그러나 란델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엘리사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대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주군. 정말 한 방울도 안 남기신 겁니까? 전부?”

    “전부.”

    “그걸? 하룻밤 만에?”

    “향유 냄새가 진동을 했어. 내가, 아니, 안사람이 미안해할 정도였지.”

    사내들이 또다시 탄성을 내질렀다. 힘을 너무 쓰셔서 마님이 미안해하셨구나! 음흉하게 낄낄거리던 그들의 뒤로 또 다른 익숙한 사내가 걸어왔다. 진저를 대신해 군의 행정을 맡고 있는 부단장, 마크빌 경이었다. 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사내들의 뒤통수를 한 번씩 때렸다.

    “여기서 농땡이 치지 말고 연병장으로 돌아가라.”

    ‘딱’도 아니고 ‘빡’ 소리가 날 정도로 얻어맞았는데도 사내들은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마크빌 경에게 그 얘기를 들으셨냐느니, 대단하시다고 생각은 했지만 인간이 아니라느니 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엘리사는 저들이 저렇게 흥분한 것으로 보아 남편이 무슨 장한 일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마크빌 경은 호들갑을 떠는 사내들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다들 총각이라 그런지 부부 일에 관심이 많았다. 군인이 으레 그러하듯 이들도 이성 간의 일이라면 눈이 벌겋다.

    그는 픽 웃으며 엘리사를 돌아보았는데 다른 때 같았으면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을 주군이 오늘따라 얌전히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마치 칭찬을 받아주겠다는 듯이.

    “아, 그, 예. 잘…… 하셨습니다.”

    그녀는 이들의 칭찬에 남편이라면 어떻게 대꾸를 할지 고민했다. 남편은 겸손한 타입이 아니었다. 제 자랑을 하는 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공을 돌릴 성격도 아니다. 그녀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너희들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한 병을 모두 비울 수 있을 것이다.”

    마크빌 경의 어깨를 두드린 엘리사가 방으로 들어가자 사내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게 정력인 거지?”

    누군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들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방 안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진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그 향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노력을 운운한단 말인가.

    방으로 들어온 엘리사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침실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 침실에 들어간 진저는 언제나처럼 침대에 자리 잡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향유의 소용을 아나?”

    “꽃 기름이니까 미용을 할 때 쓰지 않을까요?”

    역시. 기가 막힘과 동시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걸 귀엽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답답하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진저는 쓰임새를 정정해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제 일도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이것까지 알려주었다간 아내 성격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터였다. 그래도 그냥 묻기에는 아쉬워서 밉살스러운 말을 던졌다.

    “다음에 도전해 보자고.”

    “뭘요?”

    “하룻밤에 향유를 다 비울 수 있는지 말이야.”

    모를 말이었다. 엘리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진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확실히 자신에겐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구는 여우 같은 와이프보다는 엘리사 쪽이 맞았다. 여동생같이 느껴져서 없던 정도 생기게 되니까. 호적상 누이가 워낙 괄괄하다 보니 누이가 아닌 아우처럼 느껴졌는데 엘리사를 보면 진정 지켜줘야 할 누이가 생긴 것 같았다.

    각자 자리에 앉은 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할 일을 했다. 진저는 업무에 바빴고 엘리사는 연병장에 가기 전까지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취미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독서나 수놓기, 혹은 뜨개질. 술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술에도 취미가 없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궁금했다.

    일을 하던 진저는 이따금 고개를 들어 그녀를 훔쳐보았다. 표정도 없고, 말도 없다. 그래도 밉살맞은 말을 건네면 파르르 하는 것이 놀리는 재미는 있었다.

    엘리사는 진저의 시선을 느꼈지만 고집스레 뜨개질에 집중했다. 어제 일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미쳤어, 정말.’

    그의 입술이 제 입술을 스치는 감각이 자꾸만 떠올라서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엘리사는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자세를 틀었다. 그의 몸은 다른 여성의 입술을 수도 없이 거쳤겠지만 자신은, 자신의 영혼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몸과 키스라니. 이걸 안타까워해야 하는 건가.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먼저 그의 입술을 빼앗은 건 자신이고, 그 또한 제 몸과의 키스가 당황스러웠을 테니까.

    그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와중에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다가오고 있음을. 엘리사는 뻣뻣하게 굳어 마른침을 삼켰다. 제 앞으로 다가온 남편이 허리를 굽힌 채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숙취는 없나?”

    “괘, 괜찮아요.”

    두통은 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엘리사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피했다. 진저가 그녀의 턱을 잡아 고개를 돌렸다.

    “어디 봐.”

    “정말 괜찮아요…….”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또다시 그가 입을 맞출 것 같아서 심장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찾지 않고 엘리사의 이마를 짚고 열을 쟀다.

    “감기는 없나? 찬 데서 졸았잖아.”

    내 목소리가 이렇게 야릇했던가. 스무 해 넘도록 들었던 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자 익숙함보다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이상했다. 정말 묘한 일이었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게 아닌 다른 곳에, 그러니까 상체가 아닌 그 아래로…… 헉, 숨을 들이쉰 엘리사가 그를 밀어내려 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말캉한 무언가가 손바닥에 닿았다.

    놀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진저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얼른 허리를 펴고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로서는 처음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옷 위로도 감촉이 선명했다.

    진저가 눈치를 봐야 하나 아니면 당신이 만진 거니 나는 죄가 없다고 잡아떼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엘리사는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당신이…….”

    “브래지어 찼어요?”

    “뭐?”

    “브래지어요. 제대로 착용한 건가요?”

    브래지어를 제대로 찼다면 이렇게 감촉이 생생할 리 없었다. 설마 이 사람, 평소에도 브래지어를 차지 않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 그녀가 즐겨 입는 옷은 품이 널찍한 드레스라 티가 나지 않았을 거고, 진저는 스무 해가 넘도록 사내로 지냈으니 속옷 착용법을 모를 수도 있었다.

    “어디 봐요.”

    “뭘?”

    “벗어보라고요. 자꾸 속옷을 안 차면 가슴이 처진단 말이에요.”

    본래 자신의 목소리에 부끄러워한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았다. 아내는 성큼성큼 다가와 등을 어루만졌다.

    체인이 없는 걸 보니 확실히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녀가 훅, 한숨을 내쉬며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방을 나섰다. 진저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눈알만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아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손에는 베이지색 속옷이 들려 있었는데, 그녀는 이리 와보시라며 그를 향해 손짓했다. 졸지에 아내에게서 브래지어 착용하는 법을 배우게 된 그가 미간을 좁혔다. 생리대 착용법을 배울 때도 당황스러웠는데, 이제 속옷 입는 법까지 배워야 한다니.

    “어깨끈에 팔을 집어넣고 이렇게요.”

    남편은 말로 설명해 주니 감이 오지 않는지 인상만 쓰고 있었다. 엘리사는 직접 보여주겠다면서 어깨끈에 팔을 집어넣고 등 끈을 당겨서 후크를 찼다. 진저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제 몸으로, 그것도 옷 위에 브래지어를 차는 건 못 볼 꼴이었다. 그가 알겠다면서 얼른 속옷을 벗으라고 소리쳤다.

    “처음엔 등 뒤로 후크 차는 게 어려울 수도 있어요.”

    차는 건 해본 적 없지만 벗기는 데엔 귀신이었다. 진저가 쏜살같이 손을 뻗어 후크를 풀고 속옷을 벗겼다. 그런데 엘리사는 쉽게 속옷을 차는 법을 알려준다며 이번엔 어깨끈을 걸치지도 않고 브래지어를 앞으로 돌려 후크를 채웠다.

    “지금은 당신의 몸이라 사이즈가 안 맞아서 돌리기 어려운데 당신이 할 땐 쉬울 거예요. 이렇게 앞으로 돌린 다음에 팔을 넣으면 돼요.”

    “알았으니까 제발 그것 좀 벗어.”

    진저는 제 와이프가 그저 순하고 맹하기만 한 여자가 아니란 것을 상기했다. 천하의 진저 그웬이 브래지어를 차다니. 누가 본다면 그 누구의 눈알을 뽑아야 할 만한 광경이었다.

    “알겠으니까 제발 좀 벗어.”

    “당신도 해보세요. 이제 당신이 입어야 하잖아요.”

    “난 뭐든 잘해. 봐, 푸는 것도 잘하잖아.”

    진저가 또다시 후크를 풀어 침대 쪽으로 속옷을 던져 버렸다. 엘리사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속옷을 주워왔다.

    얼마나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으면 속옷 벗기는 데엔 선수란 말인가.

    알려준다는데 저 태도는 뭐고. 그녀는 남편을 위해 아무리 피곤해도 머리를 말리고 잔다. 남편의 머리는 곱슬인데다 숱도 많아서 아침에 일어나면 산발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도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고 훈련을 할 거예요.”

    엘리사의 말에 진저가 왈칵 얼굴을 구겼다.    그녀가 말하는 보호대는 생식기 보호대였다. 말을 타거나 격한 훈련을 할 때 차는 것으로 잘못하다간 그의 알 두 개가 계란 깨지듯 깨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알이 깨지기 전에 거시기가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르고.

    “그걸 안 하면 나만 곤란한 게 아닐 텐데.”

    “그럼요?”

    “당신도 곤란할걸. 그 녀석 없이 초야를 치르려면 기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난 ‘내 크기’로 준비할 생각이거든. 첫 경험이 아주 각별하지 않겠어?”

    엘리사가 말없이 그를 흘겨보았다. 농담이란 건 알지만, 초야 미수 때의 일이 떠올라 약이 오른다.

    “전 괜찮아요.”

    “뭐?”

    이런 반응은 예상 못 했다. 그가 눈을 홉뜨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정말 보호대를 빼기라도 할 태세였다.

    그녀가 휙 뒤로 돌자 진저가 황급히 두 손을 들었다.

    “항복!”

    “…….”

    “항복이라고. 브래지어 착용법을 알려주시죠, 부인.”

    그제야 엘리사가 빙긋 웃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브래지어를 들었다. 그리고 뒤집어진 부분을 정리했다.

    그동안 진저는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아서 금세 맨가슴이 드러났다.

    엘리사가 한 손에 브래지어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남편의 가슴, 그러니까 남편의 영혼이 들어간 본래 제 가슴 손을 올렸다.

    “아.”

    타인의 손이 닿는다는 건 기묘한 감각이었다. 남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놀란 엘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 무슨 소리를 내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내 탓이 아니라고. 당신 몸이 예민한 탓이야.”

    그도 민망한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정말…….”

    엘리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방 안의 분위기가 묘했다.

    애무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브래지어의 착용법을 알려주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엘리사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상한 건 남편도 조금 굳어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남편이 굳어 있으니 더 기분이 이상하다는 게 맞는 말이다.

    진저로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남성일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 전신이 예민해지고 온갖 관절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엘리사가 조심스레 그의 가슴을 쥐었다.

    “이, 일단 주변 살을 모아서…….”

    그녀는 겨드랑이 밑의 살을 가슴으로 끌어왔다. 그냥 끌어오는 것만으로는 흘러내려 버려서 꽉 움켜쥐어야 했다.

    “읏.”

    진저의 목소리가 한층 더 야릇해졌다. 진저는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환장하겠네.’

    이건 다 아내의 탓이다. 왜 이렇게 몸이 예민해서는. 가슴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아래가 젖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그만할까요?”

    엘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해.”

    꼭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진저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아내가 순진하지만 않다면 이것저것 요구하고 싶었다.

    유륜을 핥아서 날 조급하게 해줘. 유두를 물고 살짝 깨물어줘.

    하고픈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살을…… 모아서…… 이렇게……. 속옷을 잡아주세요.”

    엘리사에게서 속옷을 건네받는 그의 손이 열기로 떨리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의 손을 애써 외면하며 가슴에 집중했다. 온갖 사념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내 가슴이 이렇게 생겼었나. 큰……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살은 사기처럼 희고 매끄러운데 유두의 빛깔이 붉어서 탐스러워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남편의 몸이 되어서 그런가. 여성의 몸, 아니, 제 몸이 너무나 색스럽게 느껴졌다.

    엘리사가 양손으로 가슴의 살을 모아 붙잡았다.

    “이제 브래지어를 입으시면…….”

    탁.

    브래지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작 천이 떨어졌을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엘리사가 눈을 크게 뜨고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물어.”

    위험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간과하던 한 가지. 남편의 영혼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참을성이 없었다.

    “뭐, 뭘…….”

    말을 온전히 맺을 새도 없이 그가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입술이 유두를 스쳤다.

    “하아…….”

    그의 입에서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 그의 방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이 방을 정리하러 들어올 시간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부부가 황급히 떨어졌다.    엘리사가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꼬, 꼭 입으세요. 가슴이 처지는 것도 문제지만 이제 펑퍼짐한 옷이 없어서 속옷을 안 입은 걸 금방 들킬 거예요.”

    진저는 아쉬운 표정으로 혀를 달싹였다. 아내와 재미를 좀 보려고 했더니. 문을 잠그고 다시 하자고 하면 펄쩍 뛸 게 뻔하다.

    순진해서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순진해서 뭘 하려야 할 수가 없다. 순진한 건 좋은 게 아니었다.

    “불편한데.”

    그가 심드렁하게 답하자 엘리사가 그를 샐쭉 흘겼다.

    “저도 불편하지만 당신 몸에 속옷을 꼭 입힌다고요. 여성에겐 브래지어와 팬티가 모두 속옷이라고요. 하나라도 입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당신 속옷은 내 속옷보다 더 불편한 것 같은데. 너무 작아.”

    “당신 속옷도 충분히 작아요.”

    진저가 능글맞게 웃었다.

    “작을 만한 사이즈가 아닌데. 남편 사이즈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냐?”

    “당신도 제 사이즈를 과소평……. 그 말이 아니잖아요! 속옷이요. 속옷 사이즈를 말하는 거예요!”

    그는 가슴을 내려다보면서 ‘그런가?’ 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아내의 가슴은 큰 편이 아니었다. 본래 진저의 손으로 잡는다면 흘러넘치지 않을 사이즈였지만 모양이라거나 포인트의 색이 예뻐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감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남편의 눈이 다시 욕망을 띠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후, 훈련 시간이에요. 얼른 가봐야겠어요.”

    홀로 남은 진저는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훈련 참관을 시작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머리 익은 사내놈들이 향유를 들먹거리며 낄낄거릴 텐데 순진한 아내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몸을 일으킨 그는 아내가 곱게 접어 올려놓은 브래지어를 들었다. 그리고 거울을 쳐다보았다. 아내의 말처럼 옷이 펑퍼짐하지 않아 그런지 속옷을 입지 않은 태가 나는 듯도 했다.

    그는 드레스 지퍼를 내리며 구시렁거렸다.

    ‘제기랄. 왜 저주를 받아서는.’

    등 지퍼를 내리고 나신이 된 그가 브래지어 어깨끈에 팔을 꿰었다. 그는 한때 잠자리를 같이했던 여성들이 속옷을 착용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무안하도록 쉽게 속옷을 착용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옷까지 다시 입은 그가 문을 나섰다.

    * * *

    진저의 예상이 딱 들어맞았다. 엘리사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거나 존경스럽다는 듯 허리를 굽혔다. 소대장들은 역시 주군이시라며 그녀의 하초를 바라보았다.

    까닭을 모르는 엘리사만이 정말 남편이 큰일을 한 모양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하스엘 토벌처럼 대단한 일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 없는데 대체 무엇일까. 엘리사는 소문에 밝은 하녀에게 연유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는 하녀들이 연무장 안으로 음식을 나르는 것을 발견했다. 식모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마크빌 경을 기사님이라 칭하며 일지에 서명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는데, 보통 기사란 말을 타는 군병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누구는 기사라 불리고 누구는 병사로 불렸다.

    “뭘 그리 고민하지?”

    갑자기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훈련을 준비하던 이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남편은 몸이 바뀌면 연무장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엘리사가 그들을 살피고 있을 땐 더더욱. 진저를 향해 허리를 굽히려던 그녀가 아차, 하며 몸을 굳혔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 마크빌 경은 기사님이라고 불리잖아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아서…….”

    “소대장 휘장을 단 자들은 기사 서약을 받았어. 서약을 받은 자만 기사로 분류되지.”

    “아…….”

    그의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엘리사는 군사학 관련 서적을 읽어보자고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돌려 군사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엘리사만 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한껏 가슴을 부풀리고 열심히 수련하는 척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돌변한 그들의 행동에 엘리사는 연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진저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이것들이.’

    여자 앞에서는 검에 맞아도 무게를 잡느라 죽지도 못할 놈들이다. 확실히 아내는 꾸며 놓으니 미인이었다. 여성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한 데다 공주라 그런지 손짓 하나도 우아했다.

    그웬가는 여타 귀족가와는 다르게 신분이 아닌 재능을 가장 우선하였기 때문에 귀족보다 평민인 자들이 많았다. 평민들은 귀족을 직접 볼 기회가 적었다.

    귀족이 아닌 여성들은 생활에 치여 스스로를 단장하지 못했다. 귀족 여성들과는 애초에 가꿔진 정도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진저의 군사들은 귀족 여성이라면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했다.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네?”

    엘리사가 되물었으나 그는 그저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저놈들이 감히 제 아내를 탐낼 리 없었다. 개가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들 듯 자동 반사일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진저는 부부에게 다가오는 마크빌 경에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전군, 정렬해라.”

    여성답지 않은 위압감에 마크빌 경이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라고 각하께서 말씀하셨네.”

    급히 말을 덧붙인 진저가 엘리사를 바라보자 마크빌 경 또한 그녀를 보았다. 마크빌 경은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구령대 밑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정렬한 사내들은 하염없이 뜀박질해야 했다.

    달리는 것만 두 시간째, 무슨 일인지 마님은 흉흉한 눈빛으로 연무장을 떠나지 않았다. 구령대 위에 나란히 앉은 부부는 사내들이 죽도록 달리는 꼴을 구경하고 있었다.

    주군보다도 마님 쪽의 시선이 더 열렬했다. 처음엔 군사들의 각 잡힌 모습에 감동이라도 하신 걸까, 싶었는데 뜀박질이 삼십 분째 이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감동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 많이 보아온 눈빛이다. 주군이 군사들을 굴리기로 날을 잡았을 때와 같은 눈빛. 오히려 주군 쪽 반응이 부드러웠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다들 안색이 나빠요.”

    “이 정도는 예삿일이야.”

    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가랑이가 푹 꺼질 때까지는 달려야지’라는 말을 들은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뛴다고 해서 사내들의 가랑이가 푹 꺼지지는 않는다.

    “네?”

    아내가 그의 말뜻을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진저는 관용어일 뿐이라고 답했다.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군사들은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을 많이 알고 있었다.

    왕궁에도 그들만의 은어가 있다. 왕이 왕비나 애첩의 침실을 찾을 때는 시녀들끼리 ‘천마가 하강했다’는 말을 쓰곤 했다. 가랑이가 푹 꺼질 때까지 달리라는 말은 대충 강도 높은 훈련에 지지 마라, 정도인 것 같았다.

    ‘아!’

    마크빌 경이나 한스 경이 군사들에게 윽박지를 때 쓰던 말이 떠올랐다. 엘리사는 자신도 은어를 자주 써서 보다 완벽히 남편을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은어를 쓸 기회를 엿보기 위해 구보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렇게 한 시간이 더 흘렀다. 진저는 그제야 구보를 중지시켰다. 헉헉거리며 정렬한 군사들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구령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엘리사가 나설 차례였다.

    구령대 난간을 짚은 엘리사가 군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녀는 연무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대가리 박아!”

    사내들이 서둘러 바닥에 머리를 박고 등 뒤로 손을 마주 잡았다. 엘리사는 잘했냐는 듯이 진저를 쳐다보았다. 진저는 그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군사들이 죽을 것 같다며 걱정하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물론 대가리는 박게 할 생각이었지만 순한 아내가 이런 말을 쓸 줄은 몰랐다. 진저의 반응이 예상과 다르자 엘리사는 당황했다.

    하지만 언제나 구보가 끝나면 대가리를, 아니, 머리를 박게 했다. 훈련의 시작이 구보인 것처럼 으레 따라오는 과정이라 생각했는데. 엘리사가 맨 앞에서 머리를 박고 있는 마크빌 경과 한스 경을 번갈아 보았다.

    ‘아, 그렇지.’

    “이, 이놈들아!”

    ‘대가리 박아’ 뒤에는 항상 ‘이 새끼들아’가 따라왔다. ‘이 새끼들아’까지는 도저히 무리라 조금 순화시켜 소리쳤는데 진저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가 소리를 낮추고 연유를 물었다.

    “이게…… 아닌가요?”

    “허…….”

    그는 기가 막혀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다고 판단하면 저런 면을 보여주고, 저렇다고 생각하면 또 이런 면을 보여주었다. 마냥 순하고 점잖은 줄 알았는데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엘리사는 남편의 표정을 보고 자신이 또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진저가 픽, 실소를 흘렸다. 그럼 그렇지. 어디서 본 걸 그럴듯하게 따라 한 모양이었다.

    “저 자식, 가슴 안 붙였잖아.”

    “네?”

    그가 한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왕 박으라고 했으니 자세까지 제대로 잡으라고 해.”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여성이되 남성의 육체를 하고 있는 엘리사와 남성이되 여성의 육체를 하고 있는 진저를 제외한 사내들은 모두 곡소리가 나도록 굴렀다.

    우렁차게 대가리를 박으라던 주군은 다른 명령이 없었고 사내들은 숨도 못 가누던 상태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도록 대가리를 박아야 했다.

    평소에 단련되지 않았더라면 토사물로 몸을 흥건히 적실 만한 일이었다. 구령대 위에서 그들을 보고 있던 엘리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저를 쳐다보았다. 저러다가 정말 대가리, 아니, 머리가 뻥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해선 안 돼. 모두 당신 남편이 직접 뽑은 인재들이니까.”

    그는 삼십 분 전에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말을 했다. 엘리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사람 육신엔 한계가 있었다.

    진저도 육신에 한계가 있음은 부정하지 않았다. 심장이 뚫리면 아무리 재능이 넘치는 자라도 골로 가고 마니까.

    그러나 그는 숱한 세월 동안 그웬 군의 책임자로 있었다. 전장에 뛰어든 이들이 해할 상대는 짐승도, 귀신도 아닌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들 또한 인간과 귀신의 경계에 있어야 마땅했다.

    수도로 올라올 수 있는 사병은 모두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었다. 총 3차로 이루어지는 시험은 고단하고 혹독하며 모질었다.

    1차는 30여 일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모두 통과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시험장은 맹수와 마물이 들끓는 그야말로 사지였다.

    추위를 버티고 2인 1조로 총 네 마리의 마물 혹은 짐승을 잡을 것. 모든 조건을 충족한 이들만이 2차 시험장의 문을 열 수 있었다.

    2차는 추위보다도 모진 시련이었다. 한 달간 동고동락한 조원에게서 이겨야 했으니까. 3차는 2차를 통과한 자들을 토너먼트식으로 경쟁시켰다. 매년 1인에서 2인만이 수도를 향하는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러니까 이쯤은 견딜 수 있는 자들이란 말이다. 필히 그래야 했기도 하고. 하지만 진저는 아내가 저들의 대가리를 박게 한 원흉이라며 스스로를 탓하기 전에 져주기로 했다.

    진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만 일어나도 좋다!”

    엘리사가 소리쳤다. 이전보다 목소리가 작았으나 이 순간만 고대하고 있던 군사들은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가장 빨리 몸을 일으킨 건 마크빌 경이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그는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진저는 그들에게 휴식을 줄 생각 따윈 없었다. 팽이는 돌리라고 있는 거고 부하는 굴리라고 있는 거다, 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주특기에 맞춰 각자의 무기를 들고 다시 모여야 했다. 그것도 3분 안에. 구보에 대가리까지 박았던 이들은 땀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혼비백산하여 제 무기를 찾아 달렸다.

    * * *

    훈련 마무리를 부대장 마크빌 경에게 일임한 부부가 연무장을 나섰다.

    어느덧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엘리사는 남편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정신이 없어서 본래 그녀가 쓰던 안주인의 방으로 갈 뻔하였는데 진저가 ‘각하의 방은 저쪽’이라 일러주었다.

    방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샤워를 하고 속옷과 가운을 찾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그녀는 장갑도 끼지 않고 팬티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함께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남편이 시키는 대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명령한 게 다인데 몹시 피곤했다.

    남편은 정말 사정을 봐주지 않고 사내들을 굴렸다. 관용어가 아니라 정말 굴렸다. 그녀는 남편의 말에 따라 ‘굴려’ 하고 명한 것뿐인데 마크빌 경은 그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우로 굴러, 좌로 굴러, 너 이 새끼 제대로 안 해?!”

    점잖다고 생각했던 마크빌 경이 그렇게 욕을 잘하는지는 몰랐다. 한스 경은 더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욕이 있고, 단어만으로도 사람 오금을 저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한참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는 노크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말에 알았다고 대답한 뒤 불편하지 않은 하의를 입었다.

    식당으로 내려간 그녀가 남편을 보고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귀신처럼 군사들을 잡는 걸 보아서 그런지 약간 껄끄러웠다. 그도 샤워를 한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이 약간 젖어 있었다.

    고용인들이 모두 식당을 나섰다. 부부는 몸이 바뀐 뒤로 둘만 있을 때면 언제나 고용인을 물렸다. 식탁의 양 끝에 앉은 부부가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진저는 아내의 몸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먹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게 어릴 때부터 전장에서 굴렀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본래 육체의 미각이 둔한 건지, 아니면 아내가 민감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내의 몸은 제 몸보다는 맛을 잘 느꼈다.

    아내의 몸으로 지내면서 깨달았다. 그웬가의 주방장은 솜씨가 형편없었다. 마담 캐롤라인 파티에 갔을 때 먹었던 음식은 간도 적절하고 군내 같은 건 일체 느낄 수 없었다. 네일 아트인지 염병 아트인지 하는 별 거지 같은 짓을 당하면서도 맛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웬가의 음식은 언제나 간이 모자라거나 넘쳤고 냄새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오늘 음식은 형편없음을 넘어 끔찍하기까지 했다. 고기는 질기고 군내가 나며 소스는 떫고 쓴 데다 짰다.

    하지만 아내는 몸이 바뀌기 전에도 그렇고 다시 몸이 바뀌고 나서도 군말 한 마디 없었다. 안주인으로서 주의라도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진저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제 몸이라곤 하지만 정말 묵묵히 잘 먹었다. 기계적으로 살을 썰어 입으로 가져가고 꼭꼭 잘도 씹었다. 그란디아의 식(食) 수준이 란델보다 떨어지는 걸까. 그래서 음식이 형편없어도 참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던 진저는 생각을 정정했다. 일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란델의 디저트는 정말 굉장해요.」

    음식 수준이 낮다면 디저트만을 콕 집어 말했을 리 없었다.

    “입에 맞나?”

    진저의 말에 엘리사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요.”

    역시 맛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주방 고용인들을 새로 들이지.”

    “현재 고용된 이들과 계약을 해지하시겠다는 건가요?”

    “맡은 일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이들을 데리고 있을 순 없지. 난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야.”

    대꾸를 하려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진저는 답답했다. 스쳤던 표정으로 봐선 반대를 하려던 것 같았는데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렸다.

    “당신이 그랬잖아. 안주인의 소임을 다하고 싶다고. 고용인을 관리하는 건 당신 몫이니 의견을 말해도 돼.”

    잠시 고개를 숙였던 엘리사가 진저를 쳐다보았다.

    “전…… 반대예요.”

    “어째서? 당신 몸은 저들이 만든 음식이 안 받는데.”

    진저가 포크를 들어 남은 음식을 쿡쿡 찔렀다.

    “모두 실력이 나쁜 건 아니에요. 당신 없을 때 내오는 음식들은 모두 훌륭하거든요.”

    “그럼 이건 뭐지?”

    엘리사는 이 부분을 진저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작위를 이어받고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온전히 저택 내의 일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제야 그녀는 남편이 먼 타국의 공주를 아내로 들인 이유를 수긍하게 되었다. 그가 수준이 비슷한 란델의 귀족과 결혼했다면 저택 내의 일은 그의 흠이 될 터였다.

    “당신이 먹는 음식은 모두 현 주방 총괄자가 만들어요. 작고하신 어머님께서 데려온 자라서 서툰 솜씨로도 주방을 총괄할 수 있었나 봐요.”

    선대 공작 부인이? 진저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작년까지는 당신의 유모였던 마피 부인이 주방을 총괄했는데, 그녀가 요양을 떠나면서 총괄 책임자가 바뀌었대요.”

    꽝!

    진저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는 저택 내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선대 공작과 공작 부인이 사망하고 이제 그를 견제할 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자연히 고용인들은 진저를 따라야 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고용인들이 별다른 사고를 치지 않은 이유는 주인이 오롯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루펠라의 유모였던 마피 부인이 뒤에서 저택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진저가 엘리사와 결혼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요양을 떠나던 마피 부인의 간곡한 청도 한몫을 했다.

    그녀는 진저에게 결혼을 하라 간청했다. 중년의 부인이 으레 그러하듯 오지랖을 부린 게 아니었다. 이런 일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마피 부인은 진저와 선대 공작 부인의 성정을 가장 잘 아는 여성이었다. 진저를 애정으로 길렀으므로 가장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직 고용인 사이에 배어 있는 공작 부인의 존재감과 홀로 맞선 것일 터였다. 진저가 그것을 알고 부친과 양모를 떠올리길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저, 마피 부인을 탓하지 마세요.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주제넘으면 어때.”

    “네?”

    진저가 턱을 괸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도 돼. 아니, 제발 좀 그래 봐.”

    엘리사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에게 믿음을 줬어. 난 당신의 믿음에 보답 정도는 할 수 있는 남자란 말이야.”

    엘리사는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부터 그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남편은 능글맞고 이상한 데서 심술을 부리고 성격도 나빴다. 그렇지만 영 몹쓸 남자는 아니었다.

    “고마워요.”

    대체 저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은 언제쯤이면 듣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그는 진심으로 아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진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런 일엔 고맙다는 말이 필요 없다는걸.

    “당신은 가끔, 정말 가끔 감동 비슷한 걸 줘요.”

    다른 것도 알려주고 싶었다. 이런 얘기를 할 땐 ‘가끔, 정말 가끔’과 ‘비슷한 걸’이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피 부인이 그를 해고하지 않은 건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제가 그녀와 연락을 취해도 될까요?”

    “일단 몸이 돌아오면.”

    “네.”

    “라골이 마피 부인의 조카야. 연락하려거든 그를 통해서 해.”

    “알겠어요.”

    식사를 마친 부부가 몸을 일으켰다.

    식사를 끝낸 진저가 향한 곳은 테라스였다. 그는 몸이 바뀐 뒤로 꼭 필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방에서 오랜 시간 머물지 않았다.

    아내의 방은 대대로 안주인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선대 공작 부인 또한 그 방에서 청춘을 모두 보냈다. 엘리사가 들어온 뒤로는 벽지와 가구의 배치를 바꾸었지만, 그는 언제나 안주인의 방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선대 공작 부인과 처음 대화를 나누었던 곳이 안주인의 방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열두세 살 정도 더 먹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싸움을 거는 또래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파티가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고 목격한 이들이 여럿인 데다 두들겨 맞은 아이의 부모가 노발대발 화를 냈다. 선대 공작 부인은 그를 불러 쥐어 팬 아이에게 사과를 하라고 일렀다.

    그는 말했다. 어째서 걸어오는 싸움을 참아야 하느냐고. 왜 모욕을 받고도 견뎌야 하느냐고.

    선대 공작 부인은 답했다. 내가 너를 견디고 있으니까, 라고.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었다. 싫으면 싫은 거고, 좋으면 좋은 거지 그렇게 살아봐야 무엇이 남겠는가.

    남편은 언제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발정 난 개처럼 학학거리고, 공작 부인은 그런 남편에게 분노했다. 진저는 그런 부모가 엿 같았다. 그 때문에 공작 부인의 그런 인내는 모두를 힘들게 만들었다.

    진저는 선대 공작 부인이 세상에 없는 지금도 그때가 떠올랐다. 혐오에 찬 눈빛, 파리한 얼굴, 가늘게 떨리는 어깨.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듯한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도망치지도, 맞서지도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질문에 유모인 마피 부인은 말했다.

    「팔자인 거죠. 그렇게 살다 죽는 거예요.」

    마피 부인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살다 죽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떠올리면 연민보다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으면 뺨을 올려붙였어야지. 사생아를 덜컥 데려왔으면 남편의 생식기를 부러뜨렸어야지. 그 뒤로도 제 버릇 개 못 줬으면 죽여 버렸어야지.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한평생을 자기 연민만 하다가 떠났다.

    진저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비볐다. 괜히 옛일이 떠올라 싱숭생숭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문 안쪽에 서 있는 건 제 몸을 한 아내였다. 그가 들어와도 좋다고 답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혹시 잊으셨을까 봐 확인차 왔어요.”

    “뭐지?”

    “힐튼 후작 부인이 모임에 초대하셨잖아요.”

    생각해 보니 파티가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것도 같다.

    “굳이 가야 할 이유가 있어?”

    “4공의 부인이 모두 참석하는 모임이래요.”

    “당신이 안 가면 모두는 아니지.”

    “루펠라도 가는 게 좋겠다고 그랬어요. 정보의 보고라던 걸요. 당신 일에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해요.”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진저는 ‘정보의 보고’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언제나 소식이 늦었다. 수도에서는 잡스러운 소문 한 자락도 유용하게 쓰였다.

    가령 폼피츠 부인과 마르티스 백작이 한 침대에서 일어났다는 것처럼. 폼피츠 부인은 요식업계의 큰손이었다. 마르티스 백작은 수도에서도 손꼽히는 자산가였고. 둘이 정분이 난다면 자연히 폼피츠 부인의 사업이 크게 확장될 터. 진저는 정보 부족으로 투자할 기회를 잃었다.

    ‘재미 좀 볼 수 있었는데.’

    그때 폼피츠 부인의 사업에 투자했던 사람들은 모두 큰 이문을 얻었다. 소문은 언제나 여성이 남성보다 빠른 법이고 처녀보다 유부녀가 더 많은 정보를 쥐었다.

    “모임이 언제지?”

    “내일이요.”

    “…….”

    진저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는 아내를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 * *

    다음 날 오후, 루펠라가 공작 저택에 찾아왔다. 소거실에서 차를 마시던 엘리사가 그녀를 환영했다. 루펠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는 거냐고 물었다.

    루펠라와 진저는 서로에게 다정하지 않은 남매였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성격이 워낙에 호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좋으려야 좋을 수 없었다. 그들은 배려와 존중보다는 쌍욕과 선빵에 익숙했고 덕분에 유년기를 피 터지게 싸우며 보냈다.

    휴전의 시기는 진저가 전쟁터를 오가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어린 진저는 깨달았다.

    남성에 가까워진 자신은 여성인 데다 아이인 루펠라를 때려선 안 된다는 것을. 기사도나 매너, 혹은 상식 때문이 아니었다. 한 대만 툭 쳐도 골로 간다. 루펠라는 귀찮긴 하지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녀석은 아니었다.

    진저가 맞서지 않자 루펠라도 조금은 얌전해졌다. 그들은 호적상 남매로 자라며 어떤 동지애 같은 게 생겼다. 누군가 남매에게 동지애를 운운한다면 거기서 ‘애(愛)’는 빼라고 하겠지만.

    “새언니는?”

    “아, 모임에 초대를 받아서…….”

    “그게 오늘이었어?”

    루펠라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미리 주의 사항을 알려줄걸. 당황 좀 하겠네.”

    “주의 사항?”

    “그 모임에 요로아 후작 부인이 있잖아. 그 여자, 모성애 운운하면서 어디서나 수유를 하거든. 나 모유 수유하는데도 가슴이 이렇게 예뻐요, 하고 자랑하는 거지. 음담패설도 굉장해.”

    그녀는 순진한 새언니가 당황 좀 하겠다며 키득거렸다. 루펠라의 예상이 맞았다. 엘리사는 당황했다. 남들 보는 데에서도 가슴을 다 보인다니. 그것보다도 자기 대신 그 광경을 보게 될 남편이 걱정이었다.

    “오.”

    진저가 감탄사를 흘리자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성들이 미간을 좁히며 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요로아 후작 부인은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옷을 내리고 수유를 했다. 그녀가 굳이 아이를 데려와 가슴을 드러내는 이유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처녀 적에도 가슴을 훤히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다니며 제 자랑을 늘어놓던 여자였다. 진정 아이를 사랑해 수유를 하는 거라면 이해는 물론이고 존경스럽기까지 하겠지만, 너무 속이 빤히 보이니 반발만 샀다.

    진저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자 하나가 목소리를 낮추고 요로아 후작 부인을 헐뜯었다.

    “저렇게 자랑하고 싶을까요. 같은 여자인데 말이에요.”

    “이제 남자에게 자랑할 수 없으니까요. 공작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렇군요.”

    진저는 요로아 후작 부인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여자들은 진저가 요로아 후작 부인에게서 눈을 못 떼는 이유가 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먼 타국의 공주이다 보니 가문 내에서 입지가 약할 것이다. 게다가 그웬 공작이 사생아이기도 했고. 어서 아이를 낳아 남편과 제 위치를 공고히 하고 싶을 만도 했다.

    힐튼 후작 부인이 진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진저가 시선을 빼앗긴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힐튼 후작 부인도 다른 여성들과 생각이 같았다.

    “아이가 참 귀엽죠?”

    “네, 뭐.”

    “곧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부군께서 부인을 몹시 아끼시잖아요.”

    그제야 진저는 힐튼 후작 부인을 쳐다보았다. 자신과 아내의 아이라니. 자신에게 자식이 생긴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뭣보다 자기를 닮은 자식이라면 자신 쪽에서 거절하고 싶었다. 진저는 엘리사를 닮은 아이를 떠올렸다. 뭐, 괜찮을지도. 그러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이 상태면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았다.

    성적으로 담백한 편이긴 했지만 그도 남자였다. 하루에 여섯 번쯤은 야한 상상을 하는. 홀로 잠드는 날이 길어지니 괴롭긴 했다.

    그렇다고 아내와 초야를 치르기도 전에 다른 여자를 품고 싶진 않았다. 만약 아내가 몸이 바뀐 것을 그의 약점으로 여겨 이것저것을 요구한다면 모를까. 아내는 어째서 약점을 잡아야 하냐고 묻는 사람이었고, 그런 아내의 태도는 작게나마 부부 간에 믿음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몸이 바뀌는 대로 아내에게 향유의 사용법을 알려주기로 했다. 아주 상세하고, 은밀하게. 그는 남편이 아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뜨거운 밤이라고 믿었다.

    “다른 분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진저는 힐튼 후작 부인의 안내에 따라 모임에 참가한 여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부 힘깨나 쓰는 집안의 안주인이었다.

    그도 그럴게 4공의 부인이 모두 모인 건 이 모임이 유일했다. 특히 트리거 공작 부인은 사교 모임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왕궁 주최 무도회가 아니라면 얼굴 보기 어려운 양반이었다.

    4공의 부인들을 제외한 이들에게 인사를 마친 진저는 본래 있던 테이블이 아닌 다른 테이블에 착석하게 되었다. 4공과 힐튼 후작 부인이 있는 테이블이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인사를 건넸다. 트리거 공작 부인은 중년의 여성이었고, 포르테 공작 부인은 이미 며느리까지 볼 정도로 나이가 지긋했다. 트라노이 공작 부인은 연배가 비슷한 엘리사, 그러니까 진저가 반가운지 말씨와 눈빛이 다정했다.

    “힐튼 후작 부인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교양 있는 분이시라고요.”

    엘리사였다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겠지만 진저는 달랐다.

    “예.”

    부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부인을 애타게 기다렸어요. 아줌마들 사이에서 혼자 심심했을 테니까요.”

    “아니에요. 항상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한걸요.”

    트리거 공작 부인의 말에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손을 내저었다.

    진저는 트리거 공작을 스승으로 모시고 검술과 전술을 교육받은 바 있었다. 그녀는 다른 귀부인들과는 다르게 수더분한 여자였다. 어딘가 억척스럽고 괄괄하기까지 해서 진저에겐 마피 부인 다음으로 친숙한 여성이었다. 진저가 사고를 칠 때면 ‘이놈!’ 하고 호통을 지른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성들 사이에 있는 트리거 공작 부인이 어딘가 어색했다. 정말 귀부인 같지 않은가. 뭐, 완전히 귀부인 가면을 쓴 건 아니었다. 귀부인은 스스로를 아줌마라 칭하지는 않을 테니까.

    포르테 공작 부인이 며느리를 소개하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포르테 백작 부인이 시모의 부름에 다가왔다.

    마담 캐롤라인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던 여성이었다. 네일 뭐시기를 받으면서 들었던 그녀의 시낭송은 최악이었다. 입만 떼면 시부모 흉, 남편 흉이라 우습기도 했다.

    그녀는 소개를 마치고 다시 제가 있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포르테 공작 부인은 며느리의 소개가 마뜩잖았는지 그녀가 돌아가자마자 이것저것 흠을 잡았다.

    “하나를 시키면 꼭 하나만 한다니까요. 둘, 셋을 하는 경우를 못 봤어, 내가.”

    포르테 공작 부인과 며느리의 테이블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며느리는 시모의 말을 들었는지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름만 달랑 말하는 것 봤죠? 이러니까 답답해하는 거예요. 트리거 공작 부인은 며느리를 들일 때 꼼꼼하게 따져 봐요.”

    “아직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곧 좋은 짝이 나타나겠죠.”

    관심이 없기는. 트리거 공작 부인의 말을 듣던 진저가 픽 웃었다. 여자에 가장 눈이 벌건 게 그 녀석이었다. 오죽했으면 다른 친구 녀석이 ‘내가 치마를 입고 오마. 그러니까 중간에 사라지지 좀 마’라고 말할 정도겠는가.

    길리안은 술자리를 가지면 꼭 여자 하나는 꼬여서 돌아가는 놈이었다. 종마로 써도 될 만큼 힘이 넘치는 놈이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지체 높은 귀부인들의 대화는 지루했다. 진저는 간간이 제게 오는 질문을 제외하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부인들에게 제법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용하며 진중하다. 타국의 사교계는 어떤지 간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4공의 부인뿐 아니라 모임에 참가한 이들이 은근히 그를 훔쳐보았다.

    웬만한 여성이라면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진저 그웬은 달랐다. 그리고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남편은 사생아이며 아내는 버려진 자식이다. 이만큼 잘 어울리는 부부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귀부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진저는 아내가 마음에 들었다. 아내는 제 자랑에 눈이 벌겋지도 않고, 남을 헐뜯지도 않으며 별것 아닌 일을 흠잡아 스스로를 가엽게 여기지도 않았다.

    진저는 스스로도 제가 운이 좋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의 결혼도 운이 작용한 결과이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루펠라는 말했다. 그란디아에서 온 여자가 그웬가의 밤 소문이 은밀히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분 나쁜 소리를 지껄인다고.

    그란디아에서 온 여자는 비앙카로 추정되었다. 그녀는 힐튼 후작 부인의 파티에서 망신을 당했는데도 굴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언니를 마중 나가는 게 어때?”

    다른 때 같았으면 개소리 말라고 일축했을 오빠가 오늘따라 유순했다. 루펠라는 엘리사가 어어, 하는 사이에 그녀를 내몰아 마차에 태웠다.

    엘리사는 마차 안에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루펠라만 아니었으면 다시 저택으로 되돌아가겠는데 그녀는 저도 모임 장소가 있는 쪽에 약속이 있다며 부득불 같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엘리사는 당황스러웠다. 남편이라면 어찌할까. 그가 아내의 첫 모임이라고 해서 마중을 나와 줄 인사이던가. 그녀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

    남편의 몸으로 하게 되는 활동이 마중이라니. 그녀는 남편의 반응이 염려되었다. 그냥 이대로 마차 바퀴가 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사의 바람과는 다르게 마차는 열심히 달렸다. 가끔 땅이 푹 패이거나 야트막하게 솟아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잘 달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끄럽게 달렸다. 금세 모임 장소에 도착한 엘리사가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루펠라는 도통 봐주는 법이 없었다. 마차에 태웠을 때처럼 엘리사를 정신없이 몰아내더니 어서 들어가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계단 밑에 팔짱을 끼고 서서 올라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계단을 다 오르니 회장의 출입문이 보였다. 그녀는 잠시 두 손을 맞잡았다. 회장에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자신을 본 이들이 괜한 소문을 내면 곤란하다. 소문이란 건 당사자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풀려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란디아에 있을 적에도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났다. 그녀 자신의 소문이라면 몰라도 엘리사는 지금 남편을 대신해 살고 있었다. 남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 그녀는 결국 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란델은 그란디아보다 사치에 관대한 편이었다. 왕족 소유의 파티장이 아닌 일개 개인의 파티장이 놀라울 정도로 화려했다.

    게다가 힐튼 후작 부인은 이 모임이 소수로 이뤄지는 그저 작은 화합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소수로 이뤄지는 그저 작은 화합회에 이런 파티장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엘리사는 이 놀라운 회장을 둘러보며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파티장에 정신을 빼앗긴 엘리사는 코너를 돌다가 무엇과 부딪치고 말았다. 제게 부딪친 여자는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여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눈을 어디에……! 각하.”

    엘리사는 그녀가 신기했다. 어쩌면 이렇게 표정 전환이 빠르단 말인가. 엘리사, 그러니까 진저의 몸을 알아본 여자가 치마의 양 끝을 잡아 펼치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마크빌 백작가의 마리라고 합니다. 일전에 왕세자 전하의 환송회에서 뵈었지요.”

    엘리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반갑소.”

    “예.”

    “…….”

    “각하?”

    마리 마크빌은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싶었다. 란델의 예법상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허가가 없이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런데 그웬 공작은 인사를 받고 나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몇 분간 침묵이 이어졌다. 엘리사는 마리 마크빌이 자신을 왜 빤히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고, 마리 마크빌은 그녀, 그러니까 진저 그웬이 자신을 엿 먹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진저와 마리는 상당한 악연이었다. 마크빌 백작가의 장자를 날름 제 기사로 취해서 부모님 두 분이 뒷목을 잡게 한 게 바로 진저 그웬이었으니 말이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마크빌, 마크빌’ 하고 되뇌던 엘리사가 아,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마크빌 경!”

    마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 새끼가 지금 날 놀리나. 남의 오빠를 뺏어가더니 나를 몰라보기까지 해?’

    마리는 어린 시절, 제 오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진저의 정강이를 걷어찬 전적이 있었다. 그때 사색이 되던 오빠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자신도 어렸고 저놈도 어렸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가문 간의 싸움으로 번질 뻔한 일이었다. 마리는 그가 그 일을 마음에 담고 있어서 자신에게 물러가란 말이 없나 싶었다.

    “알아요, 마크빌 경.”

    “모르면 이상하지요.”

    “아니, 그게……. 굉장히 훌륭한 기사란 뜻이에요.”

    “출가외인이 어떻게 사는지엔 관심이 없어서요.”

    그렇게 또 침묵이 찾아왔다.

    엘리사는 마리가 왜 이처럼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마크빌 경과 싸웠나? 아니면 남편과 루펠라처럼 사이가 좋지 못한 걸까?

    마크빌 경이 백작가의 자제라는 건 놀랍지만 그뿐이었다. 그란디아에서는 귀족가의 자제가 부러 단련하기 위해 무가에 예속되는 경우가 있었다.

    “계속 서 있을까요?”

    마리가 물었다. 그녀의 말에는 적의가 담뿍 배어 있었다. 엘리사는 그란디아에서의 경험으로 타인의 감정을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타인이 자신에게 적의를 갖는다고 해서 굳이 예민하게 반응할 까닭이 없었고, 반응한다 한들 곤욕스러운 일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엘리사의 삶일 뿐, 진저의 삶에 발을 들인 이상은 그의 방식을 따라야 했다.

    남편은 어떻게 반응할까. 첫인상이라든가 소문으로만 따지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여자에게 가차 없을 사람이다. 하지만 엘리사에겐 의외로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마크빌 경은 그의 기사이고 그녀보다 오랜 세월간 알았다. 그의 동생이라면 어느 정도 물러나 주지 않을까.

    고민하던 엘리사가 입을 떼었다.

    “내가 영애에게 실수를 하였나?”

    “실수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영애가 내게 실수를 하는 게로군.”

    “제가요? 제깟 게 어찌 그웬 공작 각하께 무례를 범한단 말입니까. 무서운 말씀 마셔요.”

    엘리사가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대꾸했다.

    “그럼 이다음에는 웃으며 인사할 수 있겠지? 만나서 반가웠네, 마크빌 영애.”

    엘리사가 마리를 지나쳤다. 마리는 저 싹퉁바가지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리는 비단 오빠 일뿐만 아니라 그냥 저 남자 자체가 싫었다. 예의 없고 사람을 깔아뭉개는 데다 저 잘난 맛에 사는 남자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의 그는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부드럽고, 신사다웠다.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등을 돌렸다.

    엘리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제대로 반응한 게 맞겠지. 남편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엘리사는 마리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 가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내가 남편을 위해 애쓰는 동안, 남편인 진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이 지겨운 자리가 어서 파하기를 빌었다. 기도가 마흔하고도 여덟 번째가 되었을 때였다.

    샴페인 한잔에 알딸딸해진 요로아 후작 부인이 그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녀는 진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허락도 없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뒤쪽에서 ‘수유를 하는 여자가 술이라니요. 몰상식하게’라는 둥의 험담이 들려왔다. 임신한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의자를 조금 끌어 그녀의 곁에서 멀어졌다.

    “우리 초면이지요?”

    요로아 후작 부인은 정말이지 무례한 여자였다. 자신이 아닌 아내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당황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쾌했다. 엘리사는 그의 여자였다. 제 여자에게 무례한 건 그에게 무례한 것과 일맥상통했다.

    요로아 후작 부인은 대뜸 제 소개를 하더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주절주절 쏟아냈다. 처녀 적에 인기가 너무 많아서 곤란했다느니 하는 말들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이 어찌나 짐승 같은지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며 투정 섞인 자랑을 했다.

    진저가 요로아 후작에게서 들었던 말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요로아 후작은 속이 다 비추는 슬립을 입고 제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를 보면 겁부터 난다고 했다. 매일같이 하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최종 방어선만 지키고 산다고 들었다.

    그들 부부의 최종 방어선은 달에 세 번이라는데 수도의 귀족 중에는 그 날짜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6일, 16일, 26일만 되면 요로아 후작은 뺨이 홀쭉해지고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처럼 떨었다.

    요로아 후작은 진저에게 조언했다. 웬만하면 결혼은 최대한 천천히 하라고. 그러면서 자기는 언젠가 복상사로 죽을 거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우리 남편은 얼마나 힘이 좋은지 몰라요. 공작 각하는 어떤가요?”

    요로아 후작 부인이 물었다. 한순간에 회장의 시선이 진저에게 쏠렸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대단하죠.”

    점잖은 귀부인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는지 몇몇 이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하지만 이내 웃음이 번졌다. 말수가 적긴 하지만 센스는 있는 여자라면서 칭찬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 그이만은 못할걸요.”

    진저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란델만의 특이한 관습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적군의 피를 묻히고 돌아온 자들은 신전 대욕탕에서 몸을 정화해야 했다. 그곳에서 본 요로아 후작의 하초가 떠오른 것이다.

    그는 신전 대욕탕에서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트리거 공작이 말했다.

    「내가 귀한 분을 몰라봤구먼.」

    요로아 후작은 타월로 허리를 감싸며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공은 사후에 그 부분만 박제해서 박물관에 기증하시게. 그래야 다른 사내들이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지. 안 그렇나, 그웬 공작?」

    그때 진저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제 남편의 손가락만 한 거시기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요로아 후작 부인은 잔뜩 허풍을 떨었다. 참다못한 진저가 입을 열었다.

    “한때, 제 남편의 별명이 흰수염고…….”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힐튼 후작 부인의 시종이 뛰어들어와 외쳤다.

    “마님, 그웬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각하께서?”

    힐튼 후작 부인이 하인을 향해 되묻자 회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일순간 진저에게 쏠렸다.

    그는 속으로 하인의 말을 부정했다. 아내가 사전에 언질도 없이 회장을 찾았을 리 없다. 하지만 하인은 그의 믿음과 다른 답을 내놓았다.

    “예. 휴게실에 계십니다.”

    진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내가 자신을 찾으러 올 정도면 대단히 큰일이 난 것일 터였다. 힐튼 후작 부인이 하인에게 휴게실을 안내해 주라 명했다. 진저는 하인의 뒤를 따르며 몹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 * *

    엘리사는 차마 모임이 한창인 회장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만 서성였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루펠라 몰래 저택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진저 그웬은 대단한 유명 인사였다. 조심한다고 신경 썼지만 그의 불타는 것 같은 적발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와 약 1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 둘이 쑥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한 사내는 그대로 뒤를 돌아 뛰어갔고, 다른 사내는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엘리사 앞까지 다가온 사내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얼떨결에 하인을 따라가게 된 엘리사는 티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 있는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방은 청결하게 관리되어 고가의 가구가 아니더라도 불쾌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방에서 나는 아로마 향기는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소파에 깊게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하인이 방을 나서고 몇 분가량 지나지 않아 드륵드륵, 트레이가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트레이를 밀며 방에 들어온 건 하녀였다. 엘리사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녀는 테이블에 찻잔을 비롯한 포트, 찻잎이 조금 담긴 거름망 등을 내려놓았다.

    하녀가 포트를 열었다. 오기 전에 한번 데운 모양인지 뿌옇게 김이 오르고 있었다. 그 안에 뜨거운 물을 붓고 거름망을 담그자 향긋하고 쌉싸름한 냄새가 올라왔다. 크림과 각설탕이 든 조그만 케이스를 내려놓은 하녀가 허리를 깊게 숙이고 방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크림만 조금 넣은 차를 마신 엘리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차가 들어가니 한결 더 편안해졌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루펠라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점심을 걸렀다. 그녀는 차와 함께 나온 파운드 케이크를 맛보았다. 고소한데 지나치게 달지 않아 남편 입맛에 딱 맞았다.

    케이크를 먹던 엘리사는 제 얼굴에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얼른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엘리사는 찻잔으로 티코스트를 가볍게 치고 내려놓았다. 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하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은 채 포트를 들었다. 겁에 질린 모양인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엘리사는 아직 진저 그웬이란 사람의 소문이 어디까지 바닥을 쳤는지 알지 못했다. 일전에 연무장에서 하녀 하나를 울린 적이 있었지만, 기사와 병사들의 기에 질려 반응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진저는 별명이 많았다. 전장의 귀신부터 시작해서 악마, 미친 공작, 개도 침을 뱉을 놈 등 악의가 담뿍 담긴 별명이었다. 그가 과거에 얼마나 막 나가던 놈이었는지를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결국 우왕좌왕하던 하녀가 찻물을 제 손에 쏟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꺅 비명을 지른 그녀가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그웬가의 하녀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엘리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하녀는 여전히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으나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손을 보여다오.”

    “가, 각하…….”

    하녀의 손이 다른 의미로 떨렸다. 하녀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진저 그웬은 성격이 더러운 까닭에 매력을 몽땅 갉아먹어서 그렇지 입만 다물면 세상에 둘도 없는 미남이었다.

    하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홀린 듯 손을 내밀었다. 엘리사는 붉어진 그녀의 손등을 보며 작게 ‘저런’ 하고 중얼거렸다.

    하녀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핏기가 돌아왔다기보다 붉어진 것이 맞았다. 엘리사가 하녀의 손을 잡은 채 쟁반에 있던 찬물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뭐 하는 거야…… 요.”

    남편이었다. 뛰어왔는지 하녀만큼 붉어진 얼굴의 그가 순식간에 다가와 아내의 손에서 하녀의 손을 빼냈다. 그리고 버럭 소리쳤다.

    “나가!”

    “……예?”

    “나가라고!”

    하녀가 서둘러 휴게실을 뛰쳐나갔다.

    “당신, 여색에 관심이 있었나?”

    “네?”

    “저 여자 손은 왜 그렇게 꼭 붙들고 있어.”

    “아…… 차를 따르다 화상을 입어서요.”

    진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내의 몸은 체력이 형편없었다. 조금만 달려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한참 헉헉거리던 진저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엘리사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몸으로 여자 손을 잡으면 어떡해.”

    “시중을 들다가 다친 거니까요.”

    진저에게 마피 부인이 특별하듯 그녀에게도 특별한 사람이 있었다. 그란디아 왕궁의 시녀였다. 꼭 저 하녀만 한 나이에 만났는데 어찌나 사람이 맑고 쾌활한지 무뚝뚝한 엘리사마저 가끔 웃음을 터뜨리게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하녀에게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제 또래의 하녀를 보면 어쩐지 그녀가 생각나 잘해 주고 싶기도 했다. 엘리사는 남편이 어째서 저렇게 투덜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화를 내시는지 알려주시겠어요?”

    “내가 당신이 있는 곳에서 다른 여자 손을 잡고 히히덕거리면 어떻겠어?”

    “글쎄요.”

    진저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내는 정말 모른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성을 만나실 거잖아요.”

    “뭐?”

    그는 말문이 막혀 답하지 못했다.

    진저에게 아내는 동반자이자 여동생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를 송두리째 빼앗고 싶다거나 품에 가둬 놓고 다른 곳은 보지도 못하게 하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진저는 몰랐다. 사랑이란 굉장히 모호하고 아름다우며 따뜻한 감정이란 사실을. 그저 들려오는 이야기에 빗대 정욕과 같은 선상에 있는 감정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사랑의 극단적인 예가 일생을 갉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라면 눈이 벌건 부친과 출신도, 누군지도 모르는 생모는 하룻밤 사랑에 진저를 가졌다.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그저 색욕에 불과한 것이라면?

    사랑이어야 했다. 그래야 부친의 시체를 난도질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아, 하지만 당신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실수예요. 죄송해요.”

    “……없어.”

    “네?”

    “당분간 만날 생각 없다고.”

    엘리사는 그 말을 끝으로 홱, 몸을 돌리는 진저를 멍하니 응시했다.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남편은 이미 휴게실을 나섰다. 그녀가 서너 걸음쯤 떨어져 남편을 쫓았다.

    “그런데 모임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궁금해?”

    “몸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 알아두려고요.”

    걸음을 멈춘 진저가 아내를 향해 몸을 돌렸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저 무표정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싶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내 별명을 알려줬지.”

    “별명이요?”

    “그래.”

    “아, 저도 들었어요. 란델의 마물, 귀신, 개도 침을 탁 뱉을…… 뭐 그런 거요?”

    그가 인상을 구겼다. 이제껏 자신 앞에서 그 별명들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인생에 이렇게까지 어려운 여자가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타인이 아닌 제 아내로. 진저가 훅, 한숨을 내쉬고 능글맞게 웃었다.

    “흰수염고래.”

    “흰……?”

    “흰수염고래. 당신도 외워둬. 주문 같은 거니까.”

    무슨 주문인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진저는 성큼성큼 걸었다. 누구에게 말하든,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녀를 사과보다 더 새빨갛게 만들 수 있는 주문이었다.

    흰수염고래의 생식기 크기는 3m. 세계에서 생식기가 제일 큰 포유류였다.

    인사도 없이 저택에 돌아가려던 진저는 엘리사의 청으로 다시 회장에 돌아왔다. 모임의 귀부인들은 모두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볍게 목례를 한 진저는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회장을 빠져나왔다. 오늘로 아내에게 꽉 잡혔다는 소문이 날 줄도 모르고.

    진저와 엘리사는 함께 회장을 벗어났다. 계단을 내려온 부부는 마차가 오는 동안 나란히 서 있었다.

    엘리사는 말도 없이 회장에 찾아왔는데도 타박하지 않는 남편이 고마웠다. 그녀는 우물쭈물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남편은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싫어했다. 그녀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감사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듯 굴었다.

    그는 모를 터였다. 몸이 바뀐 지금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날이란 것을. 암살 위협도 없고, 저만 보면 이를 가는 레이라 부인과 두 딸도 없다. 레이라 부인과 두 딸은 엘리사에게 조그만 흠이라도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언제나 긴장해야 했고, 언제나 쉴 틈이 없었다.

    작게 헛기침을 하던 엘리사가 그를 바라보았다.

    “저…….”

    “각하.”

    뜻하지 않은 방해꾼이 있었다. 마크빌 경의 여동생인 마리로 그녀는 조금 전과 사뭇 다른 표정으로 엘리사를 대했다. 그녀는 엘리사의 몸을 하고 있는 진저에게 허리를 굽혔다.

    진저가 인상을 쓰며 마리와 아내를 번갈아 보았다. 저 짐승 같은 여자가 왜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한단 말인가. 그는 아직도 오빠인 마크빌 경을 데려가지 말라고 제 종아리를 깨물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진저와 마리 마크빌은 전혀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내가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속이 좁았습니다. 각하께서 내밀어주신 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속이 좁은 건 아나 보군.”

    진저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마리는 듣지 못했는지 그에게 ‘예?’ 하고 되물었다. 엘리사가 손을 내젓고 그를 등 뒤로 감춰 버렸다.

    “아닐세.”

    “예……. 아,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공작 부인의 아름다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군요.”

    “고맙네.”

    “그리고 과거의 연과 헛소문을 믿고 무례를 범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아둔한 자들이 붙인 별명과는 전혀 다른 분이란 걸 이번에…….”

    별명? 엘리사가 진저를 잠깐 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정말이지 신기한 남자였다. 이런 때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별명을 알려주지 않았는가. 엘리사가 해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흰수염고래 말이지?”

    “예?”

    마리는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표정이 무너졌다. 설마하니 그걸 뜻하는 건 아니겠지. 마리가 미심쩍다는 듯 엘리사를 보았다. 티 없이 맑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런 음담패설을 입에 담는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제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나 보다, 하고 마리는 다시 인사를 했다.

    진저는 엘리사의 등 뒤에서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리 마크빌의 표정은 왜 그렇고 남편은 왜 이렇게 웃는단 말인가.

    하하, 하. 한참을 웃던 진저는 엘리사의 뺨에 손을 가져갔다. 그도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정말 귀여워.”

    그녀의 눈이 잘게 떨렸다. 남편은 가끔 뜻 모를 행동을 했다. 그럴 때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는데 엘리사는 남편이 왜 그러는지, 자신은 또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냥 이상하게 코가 찡해졌다. 얼굴이 붉어지고. 때마침 도착한 마차가 아니었다면 붉어진 얼굴을 들켰으리라. 남편을 따라 마차에 오른 엘리사는 저택에 돌아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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