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본래의 몸으로 돌아오다
잠에서 깬 엘리사는 눈을 감은 채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기온이 더 떨어진 걸까. 평소보다 춥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허리께에 자르르한 통증이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몸살이라도 난 것 같았다.
엘리사가 후우 하고 숨을 뱉으며 이불을 걷었다.
‘내가 어제 이 이불을 덮고 잤던가?’
제 몸일 적에 덮었던 탁한 분홍빛 이불을 매만지던 엘리사가 눈을 깜빡였다. 안이 묘하게 어두웠다. 비몽사몽 한 상태에서도 평소와 다른 점은 인지할 수 있었다.
“마님, 세숫물을 들이겠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러하라 응답한 엘리사가 사뿐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컨디션은 좋지 않지만 몸은 가벼웠다. 마치 달거리 때의 통증과 같은 느낌에 그녀는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하녀는 세안 도구가 올라간 트레이를 끌고 들어와 침실 구석에 놓여 있던 테이블을 들어 이동시켰다.
‘저 아이는 남편의 몸일 때에는 보지 못했던 하녀인데……. 잠깐.’
하녀가 자신을 주인님이나 각하가 아닌 마님이라 불렀다. 엘리사가 황급히 침실 내부를 훑었다.
남편의 방이 아니었다. 자신이 결혼한 이래로 계속 써오던 방. 세숫물 속에 비친 건 분명 22년간 보아온 자신의 얼굴이었다.
엘리사는 세수를 하는 것도 잊고 파자마 차림으로 방을 튀어 나갔다. 뒤에서 하녀가 ‘마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하인과 하녀들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시선을 느낄 새도 없이 뛰어온 엘리사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 너머 저 앞쪽에서 한 달 새 익숙해지다 못해 지겹다고 느꼈던 남편의 몸이 보였다.
남편 또한 자신을 찾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서로를 마주 본 부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온 건가?”
“그런 것…… 같은데…….”
하. 진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한 달 내내 마법 문헌부터 성서까지 온갖 문서를 뒤져도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그런데 기한이 한정된 저주였다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잠깐. 저주는 옮겨가는 경우도 있었다.
진저가 미간을 찌푸리고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입을 조금 벌린 맹한 표정이며, 나긋나긋한 말씨는 평소의 아내와 같았다. 하지만 표정을 흉내 내는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이틀 전 당신에게 뭐라고 했소?”
“……제 엉덩이도 꽤 훌륭하다고 하셨죠.”
아내가 맞다. 진저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은 이만 되었으니 돌아가서 눈곱이나 떼라는 말도 함께였다.
화들짝 놀란 엘리사가 얼른 눈을 가렸다. 미처 가리지 못한 목이 붉어진 것으로 보아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가 등을 돌리며 픽, 웃었다. 한 달 남짓 아내의 몸으로 살며 저보다 더한 꼴도 보았다. 그런데 눈곱이 뭐라고 부끄러워한단 말인가.
엘리사는 얼굴을 가린 채 허겁지겁 방으로 돌아왔다. 세수를 하는데도 얼굴의 붉은 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참. 그녀가 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 * *
식당 안은 조용했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그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렸다. 몸이 바뀌었을 적엔 주변에 그 사실이 드러나선 안 되기에 서로의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지금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진저는 묵묵히 샐러드를 입으로 옮기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남편의 시선을 느낀 아내는 고개를 돌렸다. 식기를 내려놓은 진저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요?”
“오늘은 일정이 없어요. 나흘 후엔 당신과 동석해야 하는 파티가 있구요. 몸이 바뀌었을 때는 참석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게 아니라…….”
이 여자가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걸까, 아니면 아는데도 모르쇠로 나오는 걸까? 진저는 혼란스러웠다.
마물의 저주를 받아 몸이 바뀌었다. 이 한 문장은 그간 진저가 애써 이룩한 모든 것을 모래성으로 만들 수 있었다.
친인척들은 선대 공작 부인의 소생이 아닌 그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성국의 지원을 받게 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저주를 무기로 자신을 협박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바람을 모두 들어줄 생각은 아니었지만, 거래를 할 마음 정도는 있었다.
왕궁 안에서 순수하게 자라 저주의 소용을 모르는 건가? 진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렇게 순진한 여자가 아니었다. 유년기의 풍파를 겪으며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게다가 부왕은 냉정하게 평가하면 무능한 사내였다. 부왕이 후대 역사서에 어떻게 서술될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떤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부왕은 제대로 된 답변을 내지 못했다.
선왕의 장자로, 그리고 적출이라는 이점만 없었더라면 그가 왕위를 오를 가능성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독서를 했다. 정치적인 문제나 그 외 부가적인 부분에 대해 가르쳐 줄 교사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과거의 사례를 토대로 제 살길을 궁리한 것이다.
부왕이 여자에게 빠진 데다가 무능하기까지 했으니 어린 엘리사가 불안에 전전긍긍할 만도 했다.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엘리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협박을 할 마음은 없었다. 일단은 공주였고, 그의 입맛에 꽤 맞는 부인이라 자부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웬가에서 쫓겨나 다시 그란디아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어떤 부당한 대우도 감내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이제껏 자신이 각오했던 부당한 대우를 한 적이 없었다. 부당한 대우를 하기는커녕 제법 다정하기까지 했다.
“저주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뜻이오?”
“전 이 일을 발설할 생각도 없고, 한다 한들 믿는 이들도 없을 거예요. 몸이 바뀌는 저주라는 건 이때껏 들어본 적도 없는걸요.”
그야 그렇지만.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진저의 표정이 일순 부드러워졌다. 자신을 협박하여 애인을 만들지 않게 할 수도 있고, 뒤로 재물을 빼돌릴 수도 있었다.
진저는 평소 개차반으로 유명하긴 했지만, 그것도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거나 이익을 바라는 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무척 희소하다는 것에서 발생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개의치 않았다.
“함께 가지.”
엘리사는 호의라도 베푸는 것처럼 말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부 동반 파티이니 당연히 함께 가야지요.”
란델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몰랐다. 말이 부부 동반 파티지 남편 없이, 혹은 아내 없이 참석하는 이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부부가 함께 파티에 가는 일은 사이가 정말 정다울 때나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생각을 정정하지 않고 그저 픽 웃으며 그렇군, 하고 답했다.
* * *
몸이 돌아온 후 진저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병사들은 훈련 첫날의 긴장이 다 풀려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저가 외쳤다.
“박아.”
이전과 다른 흉흉한 모습에 얼떨떨한 것도 잠시, 평소의 그를 떠올린 병사들이 엎드려뻗쳐 머리를 박았다. 소대장들이 뒷짐을 진 채 머리를 박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진저의 시선이 얼굴에 울긋불긋 멍이 올라온 소대장들에게 향했다. 아내의 말대로 멍을 달고 있지 않은 자들이 없었다. 부대장 마크빌마저 턱 아래에 멍이 들었다.
“니들도, 이 새끼들아.”
주군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소대장들은 뜸도 들이지 않고 서둘러 머리를 박았다.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이들은 벌써부터 공포에 떨었다. 오늘은 연무장을 걸어 나갈 수 없겠구나.
* * *
시간이 흘러 파티 당일이 되었다. 단장을 돕기 위해 엘리사의 방을 찾은 하녀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무언가를 한 아름 끌어안고 있었다. 엘리사가 그게 무엇이냐 묻기도 전에 작다란 하녀가 드레스가 걸린 옷걸이를 들고 들어왔다.
“주인님께서 보내셨어요!”
한 달 내내 오전을 함께하시더니 사이가 많이 좋아지셨구나! 하녀들이 제 일처럼 기뻐했다. 드레스를 살펴본 엘리사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하녀들이 펄쩍 뛰며 이름난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며 꼭 입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가슴이 너무 파였고, 조금…… 작을 것 같아.”
“그래서 좋은 거예요. 그리고 주인님께서…….”
“응?”
“포대 자루 같은 드레스는 다 버리라고 하셨어요.”
엘리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드레스룸을 돌아보았다. 한 사이즈 웃돌긴 하지만 포대 자루같이 크진 않은데. 하녀들은 좋은 말로 그녀를 달랬다. 란델에선 남성이 여성에게 옷을 선물하는 건 큰 의미가 있다며 꺅꺅 소리를 질렀다.
“큰 의미라고?”
“네. 직접 벗기고 싶다는 뜻이에요.”
엘리사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하녀들은 마님의 순진한 반응에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말수가 적어 무뚝뚝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으시다.
한 하녀가 이러다 늦겠다며 엘리사가 거절할 틈도 없이 그녀가 골라 놓은 드레스를 방 밖으로 들고 나갔다.
마님의 명이 중요하긴 하지만, 가장 우선시 되는 건 주인님의 의사다. 마님은 꾸미는 법을 모르셔서 그렇지 꾸며 놓으면 란델의 유명한 미인들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거라 확신했다.
엘리사 스스로 꾸미기를 저어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하녀들은 아름답게 손질한 후 깜짝 놀랄 마님의 표정을 기대했다.
늘 둥글게 고정했던 머리카락이 풀어지고, 향기로운 장미 기름을 바른 빗이 다가왔다. 엘리사는 그란디아에서도 머리를 푼 적이 거의 없었다. 걸리적거리지 않게 하나로 묶거나 시간이 남는 날은 땋아버렸다. 그런 그녀이기에 거울을 통해 분주히 움직이는 하녀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보내준 드레스는 가슴이 너무 파였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일단 사이즈가 작았다. 안 맞으면 어쩌지? 치장보다 드레스 사이즈에 더 신경이 쓰였다. 마른 여성들도 옷 사이즈엔 예민하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뚱뚱하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다.
단장을 하면서도 탄성을 터뜨리던 하녀들은 준비를 마치고 드레스를 입고 나온 엘리사를 보며 손뼉을 쳤다.
“완벽해요!”
누군가 소리치자 하녀들이 모두 동조했다.
“아름다우세요!”
엘리사가 끙, 침음을 흘렸다. 못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작았다. 라인을 죄 드러낸 드레스가 부담스러워 다른 드레스를 찾았더니 하녀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안 돼요!”
그러더니 정말 바꿔 입을까 봐 아예 드레스룸 문까지 닫아버렸다.
“주인님께서 선물하신 드레스잖아요. 마님께서 다른 드레스를 입으시면 저희 모두 혼쭐이 날 거예요.”
남편의 성정을 아니 타박하지도 못 하겠다. 엘리사는 결국 진저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고 방을 나서야 했다.
준비를 마치고 소거실에 나와 있던 진저는 쭈뼛쭈뼛 걸어 나오는 엘리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디자이너의 카탈로그를 볼 때부터 어울릴 줄 알았다. 그런데…….
“가슴이 너무 많이 파이지 않았나.”
몸에 착 달라붙은 드레스는 그녀의 라인을 불필요할 정도로 부각시켰다. 진저가 미간을 찌푸렸다. 카탈로그만 봤을 때는 이렇게 파이고 달라붙을지 몰랐다.
“작은 것 같은데.”
남편의 말에 엘리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살이 쪘다고 타박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러자 소거실에 나와 있던 루펠라가 무슨 소리냐며 그를 타박했다.
“다들 이 정도는 입거든?”
루펠라는 몰라보게 아름다워졌다며 엘리사를 추켜세웠다. 진저의 여성 취향을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엘리사를 처음 보았을 때 조금 의아했다.
진저가 애인을 고르는 기준은 얼굴과 몸매였다. 지적 수준이라든가 성격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보니 이해가 간다. 역시 아무리 필요에 의한 결혼이어도 미모를 완전히 배제했을 리는 없다.
“그런데 목이 좀 허전하네. 잠시만 기다려요, 언니.”
루펠라가 읽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고 제 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읽고 있던 잡지로 시선을 내린 엘리사는 잡지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기겁하여 고개를 돌렸다.
진저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의 시선이 향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거벗은 남녀가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그림이었다. 루펠라의 취미는 도색 잡지 모으기였다. 그래도 오늘은 수위가 약한 편이었다.
진저는 아내를 다시 평가했다. 맹한 데다가 순진하기까지 하군. 초야를 치렀다면 어떤 반응이었을지 궁금했다.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도색 잡지를 집은 그가 부러 소리를 내며 뒤적였다.
“부인도 구독을 신청하는 게 어떻겠소?”
“네?!”
엘리사가 비명을 지르듯 되묻자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향해 잡지를 돌렸다.
“시사 정보가 수록되어 있거든.”
“아…….”
“왜 그리 얼굴이 붉어졌소?”
엘리사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밤일을 위해 미리 살펴보라는 뜻인 줄 알았다. 울상이 된 그녀를 본 진저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제 방에서 목걸이를 가지고 나온 루펠라는 무슨 일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냉랭하기 그지없는 오빠는 드물게 웃음을 보였고, 새언니는 얼굴이 온통 발개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 * *
규모 있는 파티는 적잖이 경험한 바 있으나 란델의 파티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었다. 란델에서의 첫 파티는 저를 대신하여 진저가 나서주었으니 그웬가의 안주인으로서 첫 일정이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란델 귀족들과 마주치는 일은 결혼식 외엔 없어서 그녀는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녀는 제 성격이 귀부인이나 영애들에게 스며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맥을 많이 만들진 못하더라도 트집 잡히지 않는 걸 성공으로 삼자. 엘리사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귀족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남편의 팔짱을 끼고 연회 홀에 들어서자 모두 눈이 호두알만 해져서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렇지 않은 채 가장하긴 했지만 사람들의 그런 반응이 엘리사는 당혹스러웠다.
이번 연회는 왕궁에서 주최하지 않았고, 국가 기념일도 아니라 4공 중 참석한 이는 진저가 유일했다. 그들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던 아콘 백작은 하마터면 샴페인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진저가 막 작위를 물려받았을 적에 본처 소생이 아니라며 건방을 떨었다가 강제로 발치당할 뻔한 경험이 있었다.
진저는 다른 귀족 사내들과 입장이 달랐다. 저택에서 머무는 시간보다 전쟁터에서 구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의 부친은 진저를 싸질러 놓고도 관심이 없었고, 공작 부인은 남편을 싫어하는 만큼 진저를 혐오했다. 부친과 양모의 외면뿐이었더라면 살 만했겠지만, 그의 등장으로 그웬가는 뒤집어졌다.
안주인이 석녀라는 사실에 작위를 기대하던 인척들은 하나같이 진저의 절명을 빌었다. 인척들뿐 아니라 공작 부인의 친정인 카르트가도 마찬가지였다. 여동생을 절절하게 사랑한 카르트 후작은 가만두어도 죽을 가능성이 농후한 전쟁터에도 암살자를 보냈다. 때문에 진저는 살기 위해 전쟁터로 떠나야 했다.
그러다 보니 성격이 모나고 괄괄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주인의 온실 속에서 금이야 옥이야 자란 귀족 남성들이 사지라는 요람에서 성장한 진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콘 백작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냅다 꽁무니를 뺐다.
“받으시오.”
진저는 긴장한 엘리사에게 잔을 건넸다. 그는 몸이 바뀌었을 때의 경험으로 그녀의 몸이 알코올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괴로운 심정을 달래고자 술을 찾았는데 다음 날 아침 깨달았다. 그녀의 육체는 술로 시름을 달랠 수 없다는 것을. 달래기는커녕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몸이 축축 늘어져 죽을 맛이었다.
파티홀 안의 귀족들이 교양도 잊고 입을 쩍 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저 그웬이. 루펠라 그웬과 나란히 란델의 미치광이라 불리는 저 사내가! 아내와 파티를 동석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에게 술잔을 챙겨주다니!
“혹시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요?”
몇몇 영애가 태양의 위치를 물었다.
“이거 정말 오랜만이군.”
엘리사와 진저의 곁으로 배가 호빵처럼 부푼 사내가 다가왔다.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있어 그렇지 복색을 평민과 같이하고 그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그냥 뒷집 아저씨, 혹은 정육점의 누군가로 불릴 것 같은 사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지. 반갑소, 로렉스 피셔요.”
로렉스 피셔. 그러니까 피셔 자작은 선대의 오랜 지기로 진저가 갓난아이였던 시절부터 교류한 사내였다. 그는 성정이 어질고 후해 부친과 양모 모두에게 외면받는 진저를 살뜰히 챙겼다. 생일이며 핀저스-요정이 어린아이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날-마다 빼먹지 않고 선물을 보내주기도 했다.
대체로 용사가 나오는 동화책이라든가 장난감 목검 등이었다. 일곱 살 어린 나이부터 진검을 휘두른 진저에겐 하등 쓸모없는 물건이었지만 버리진 않았다. 로렉스 피셔는 진저가 호감을 느낀 몇 안 되는 어른이었다.
엘리사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엘리사 그웬입니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눈 엘리사는 요령껏 대화에서 빠져 그들 옆을 지나쳤다. 진저가 건넨 술을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지나던 하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몸이 바뀐 탓에 달거리를 한 차례 걸러 그런지 오늘은 유난히 힘들었다. 벽 쪽으로 다가간 그녀는 찌르르 올라오는 통증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사가 진저와 떨어지자 그녀를 관심 있게 보던 이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진저의 시선이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아내에게 향했다. 피셔 자작이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참하군. 아내를 잘 얻었어.”
“예, 뭐…….”
“네 아비가 봤다면 기뻐했을 거다.”
‘글쎄요.’
진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그웬 공작이 관심이 있던 건 오직 자신과 자신을 즐겁게 할 여성뿐이었다. 그 안에 양모가 없었던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진저의 표정엔 부친에 대한 일말의 그리움도 없었다.
‘몹쓸 놈. 어떻게 살았으면 아들이 제 아비를 남보다도 못하게 여기는가.’
피셔 자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진저는 부모의 외면이나 외로웠던 유년기에 대해선 정말 별생각이 없었다.
유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수심을 활활 불태우진 않았다는 것이다. 전장은 시체에서 나는 역한 썩은 내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사람도 짐승도 아닌 이들을 만나게 해주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재밌는 일도 있었다. 아니, 사실은 복수를 할 만한 관심도, 애정도 없다는 말이 맞을 터였다.
피셔 자작을 시작으로 돈 냄새에 회가 동한 날파리들이 하나둘씩 들러붙기 시작했다.
진저는 그들이 원하는 대화 주제가 기하스엘 토벌로 받은 포상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가 란델 왕에게서 받은 상은 남부 지역에 있는 외딴섬이었다. 땅이 기름지지 않아 영지민을 이주시킬 수도 없었고, 4면이 죄 바다라 개발이 녹록지 않기도 했다. 왕은 진저와 진저의 군대에게 개고생을 시켰으면서 쓸모없는 상으로 생색을 냈다.
「섬의 경관이 몹시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니까 휴가 때만 쓰라는 말이었다.
딱히 쓸모를 찾지 못해 신경을 거두고 있던 그때, 어마어마한 수의 마영석을 발견했다.
마영석은 마력 주입이 가장 용이한 광물로 시중에 거래되는 마법 아이템은 모두 마영석으로 만들어졌다. 왕은 자신이 하사한 땅에 노다지가 매장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굴렀다. 왕실 사유지였던 300년간은 대체 왜 그 노다지를 몰랐던 거냐며 절규했다.
고작 2주 만이었다. 말이 되는가. 300년간 골칫덩어리였던 그 땅이 주인이 바뀐 지 2주 만에 마영석을 울컥울컥 토해냈단 말이다. 세간엔 진저에게 재물신이 붙었다는 소리마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명한 마법사들을 포섭하고 있는 웨렐가가 가장 유력하겠지요?”
진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웨렐가고 나발이고 내 손에 들어왔으니 모두 내 것이다. 차라리 마법사들을 직접 거두는 한이 있더라도 투자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귀족이란 것들이 계약 전과 계약 후에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진저의 시선이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아내에게 향했다. 그녀가 자꾸만 볼에 손등을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월경 중이었다. 그 달거리란 게 얼마나 요망한지 자꾸만 얼굴이 홧홧해지고 허리가 찌르르해서 서 있는 게 고역이었다.
진저는 실례한다는 말도 없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리고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귀족 영애들을 헤치고 아내에게 다가갔다. 토끼 눈이 된 그녀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부인, 잠시.”
“아, 네…….”
엘리사는 진저에게 이끌려 홀을 나섰다. 사람이 없는 휴게실을 찾은 그가 하인에게 물과 약을 부탁했다.
“주최자에게 인사만 하고 저택으로 돌아갈 거요.”
“하지만 첫 파티인걸요.”
“당신 몸이 우선이오.”
엘리사는 이걸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달거리의 고통을 아는 남편이라니. 뭔가 조금…….
‘이상하잖아.’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이 물과 통증 억제제를 가져왔다. 엘리사의 손이 약에 닿기도 전에 진저는 자신이 부탁한 통증 억제제가 맞는지 거듭 확인했다.
생리 첫날, 배가 뒤틀릴 것 같아 약을 먹었는데 몸이 하루 종일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아내의 몸은 술에만 약한 게 아니라 약에도 약했다. 하인은 순한 약이 맞다며 몇 번이나 답을 한 뒤에야 휴게실을 나설 수 있었다.
“생리대는?”
“네?”
“속옷을 적시는 게 싫다고 두꺼운 면을 쓰지는 않았소?”
“아, 예…….”
“샐 걱정은 덜어도 자주 갈 수 없으니 찝찝하더군. 몸에 맞는 천으로 자주 갈아주도록 하시오.”
엘리사는 창피해서 쥐구멍을 찾고 싶어졌다. 한 해에 열두 번씩, 도합 84회가 넘는 달거리를 겪은 자신에게 고작 한 번 겪어본 남편이 생리대 면이니, 약이니 하는 말들을 하는 게 이상했다.
그러나 진저는 엘리사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경험에 빗댄 조언을 이어갔다.
“다른 생리대가 없는지 물어보……!”
“안 돼요!”
엘리사가 기겁을 하고 그의 입을 막았다.
그는 몸 상태를 살펴준 건데 기겁을 하는 아내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하루 스물네 시간, 정확히 35일을 서로의 몸으로 지내야 했다. 눈곱 낀 얼굴, 머리가 헝클어진 모습이라든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까지 이미 모든 것을 본 그다. 아내가 직접 생리대 착용법까지 알려주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몸이 바뀌자마자 부끄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진저는 못마땅한 듯 아내의 손을 떼어냈다. 엘리사는 남편의 배려를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나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누구나 달…… 거리 때는 힘들기 때문에 괜히 수선을 부리고 싶진 않아요.”
엘리사의 말에 진저가 동의했다. 바람에도 날아갈 것 같은 가냘픈 몸과 책보다 무거운 것은 들지 못하는 체력 등 불만스러운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 가장 힘든 게 달거리였다.
진저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중얼거렸다.
“다신 육체가 바뀌고 싶지 않아. 여자는 귀찮은 게 너무 많거든. 당신은 나보다 수월했겠지만.”
엘리사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곤란한 일도 많았고. 엘리사가 저도 힘들었다며 반박하자 진저는 여성의 몸이 더 힘들다고 받아쳤다.
“여자가 더 힘들어.”
“사내도 마찬가지예요.”
“여자는 매달 열흘 가까이 아래로 피를 줄줄 흘려야 한다고.”
“아침마다 일어나는 당신의 그것 때문에 저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였어요.”
부부는 서로를 마뜩잖게 바라보았다. 아내의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은 그가 눈을 부릅떴다. 여성은 연약하고 체력도 약하며 귀찮은 일이 많다. 용변을 볼 때도 앉아서 보지 않는가.
진저의 말에 엘리사가 그를 새초롬하게 흘겼다. 남성은 손가락이 굵고 뭉툭해서 섬세한 작업이 쉽지 않고, 매일 면도도 해야 했다.
“뜨개질을 안 하면 되고, 면도도 매일같이 할 필요는 없어.”
“남성은 성적으로 흥분하면 겉으로 티가 나잖아요.”
부부는 동시에 말을 잃었다. 진저가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걸 어떻게 알지?”
“……몸이 안 좋아요.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엘리사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생전에 이런 꾀병을 부리게 될 줄은 몰랐다. 엘리사는 먼저 마차에 가 있겠다며 코트를 주워 들었다. 그녀가 말릴 새도 없이 휴게실을 나서자 진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큭큭대던 그는 자신을 찾으러 온 하인을 보고 얼른 얼굴을 굳혔다. 하인은 주최자의 축사가 끝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진저는 몸을 일으켰다. 도망친 아내 대신 주최자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파티 홀로 향하기 위해 복도를 걷던 그는 익숙한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놈이었다. 감히 자신 앞에서 건방을 떨던 놈. 아콘 백작은 제 뒤에 맹수가 있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그웬 공작 부인의 미모가 그렇게 훌륭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누군가가 말하자 아콘 백작이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엔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 여자는 건드리는 맛이…….”
“실로 흥미로운 화제군.”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사내들의 어깨가 움찔, 치솟았다.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진저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아콘 백작에게 다가갔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살기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안면이 있는 분이시군.”
“가, 각하.”
“내 그때도 말한 것 같은데 말이야.”
그가 아콘 백작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이빨 몽땅 털리고 싶지 않으면 간수 잘해야 할 거라고.”
살벌한 말과는 달리 달콤한 목소리였다. 아콘 백작이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이 미친놈이라면 사람들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짜로 그럴 것 같았다. 백작은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콘 백작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후, 그는 백작의 곁에 모여 있던 영식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들은 진저가 협박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고개를 수그리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마지막엔 거의 뛰다시피 하여 복도를 나섰다.
진저는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흥, 코웃음을 흘렸다. 자고로 남자는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베야 하고, 선빵을 맞으면 로우킥으로 보답해야 한다. 계집애들처럼 뒤에서 쑥덕거리기나 하다니.
* * *
저택에 돌아가겠다던 엘리사가 향한 곳은 홀이었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할 도리는 해야 했다. 주최자들에게 인사도 없이 파티장을 떠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녀가 남편 없이 홀로 돌아오자 좌중이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거봐요, 역시 부인 쪽에서 떼를 쓴 거라니까요.”
“그웬 공작이 부인의 떼를 들어줄 위인이던가요.”
“하기야 그웬 공작을 이 자리에 끌고 온 것만 해도 대단하군요.”
남편이 없으니 귀부인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라도 되는 양 쉬이 입을 놀렸다.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주최자인 힐튼 후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되레 좌중의 입방아를 들은 후작 부인 쪽에서 민망해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정말로 감흥이 없었다. 그란디아에 있을 적엔 이보다 더한 모욕도 듣고 살았는데 무얼. 란델의 귀족들은 큰 소리로 깔깔 웃음을 터뜨리지도 않고 엘리사가 그 옆을 지나치면 입을 꼭 다물기도 했다. 저 정도면 귀여운 괴롭힘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사의 한결같은 표정에 후작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 내공을 가지긴 쉽지 않다.
하지만 공작 부인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태도였다. 힐튼 후작 부인은 엘리사를 제외한 4공의 아내들과 막역한 사이로 사교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여성이었다. 귀부인답지 않은 쾌활하고 대범한 성정으로 많은 이가 그녀와 친해지기를 바랐다.
“훌륭한 파티입니다.”
“공작 부인께서 자리를 빛내주신 덕분이죠. 부인 덕에 겨우 면이 섰어요.”
“과찬이세요.”
필요한 말만 골라 하는 과묵한 성격도 마음에 든다. 힐튼 후작 부인은 공주라는 신분만으로 4공 중 하나인 그웬 공작의 아내가 된 여자를 경계했다.
먼 나라, 영토도 그렇고 무엇 하나 대단한 구석이 없는 그란디아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주였다. 공작 부인이라는 명패와 공주라는 신분으로 사교계를 엉망으로 휘저을까 저어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 외로 점잖고 과묵하며 성격도 좋았다. 마지막 평가는 두고 봐야겠으나 좌중의 무례한 입방아에 내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렇지 않을까 예상했다.
‘공주다운 구석이 하나 없다던데. 왕의 애첩에게 질시해 지독한 짓을 많이 했다고.’
힐튼 후작 부인은 이 젊은 귀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귀부인들의 속살거림에 넘어가 그녀를 둘러싼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의 눈길이 할리아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숙녀에게 향했다.
할리아 부인과 그녀의 조카딸인 비앙카에게서 들은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힐튼 후작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할리아 부인의 조카딸, 비앙카를 쏘아보았다.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지독한 쪽은 비앙카였다. 소문을 확인하려 비앙카를 초대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건 그녀답지 않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다음 주에 일정이 있으신지요?”
엘리사는 뜬금없는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간 귀찮은 자리에 끌려갈 수도 있다. 엘리사가 잠시 뜸을 들이자 후작 부인이 밝게 웃으며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라 덧붙였다.
“아닙니다. 일정이 있나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없으시다면 티타임을 함께하시는 게 어떠세요? 트라노이 공작 부인이 이번에 첫 아기님을 얻으셨답니다. 친분 있는 귀부인들끼리 조촐한 축하 자리를 마련했어요.”
그란디아에서는 임신한 여성에게 율무나 참치 등의 날음식, 커피 가루가 배달되는 일이 빈번했다. 발신인의 이름이 없긴 했으나 대부분 알고 있었다. 자기 앞에서 웃고 있는 여자가 범인이라는걸. 뭐, 이것도 계모와 그 딸들에게 들은 이야기이니 그들 관계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래도 임산부에게 율무나 날음식이라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웃는 낯으로 칼을 품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봐서 그런지 트라노이 공작 부인을 향한 귀부인들의 배려에 호감을 느꼈다.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앙카가 방긋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며칠 전에 뵈었죠?”
역시 그녀였나. 엘리사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비앙카 애쉴리는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를 제외하면 그란디아에서 가장 자신을 싫어하는 여성일 것이다. 그녀로 인한 귀찮은 일이 많았다.
언제였더라. 열일곱의 어느 봄날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왕의 딸로 태어나 귀족들의 멸시를 견디는 이유가 무어냐고. 그래서 엘리사는 답했다. 살고 싶어서.
그녀의 어머니, 리즈가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왕이 무지했고, 조모가 욕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왕태후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어린 왕을 왕좌에 올렸다. 왕의 나이 11세 때의 일이었다. 열한 살의 어린아이가 무슨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왕태후의 섭정이 이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권력의 단맛을 본 왕태후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쥔 패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택한 며느리가 엘리사의 모친 리즈였다.
왕태후의 먼 친척으로 형편없는 권세를 가진 리즈는 입맛에 딱 맞는 며느리였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사랑스러운 데다 순종적이었으므로 왕비로서 그만한 재목이 없었다.
그러나 리즈 왕비는 절명했고 여우 같은 애첩이 들어왔다. 설상가상 왕태후의 녹슨 몸은 병마에 무너지기까지 했다.
기실, 조모의 욕심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과거에 벌였던 일들이 사슬이 되어 엘리사의 발목을 묶었다.
왕태후는 능력 있는 여성이었으나 인망이 두터운 여성은 아니었다. 그녀가 병을 앓으며 곁에 있던 이들은 거의 떨어져 나갔고 그 반대 세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라 제일의 권력자에서 병마에 허덕이는 노인이 된 그녀와 그녀의 사랑을 받는 공주는 귀찮은 천덕꾸러기일 뿐이었다.
왕태후의 사랑을 받는 공주, 왕의 관심에서 멀어진 공주, 도와줄 외척마저 변변치 않은 공주. 암살당하기에 딱 좋은 수식어가 아닌가. 그래서 엘리사는 몸을 낮췄다. 왕궁에서 도망치기 위해 일면식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였다.
“제가 두 분의 대화를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비앙카가 웃는 낯으로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불편하긴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된 곳에서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작 부인이 마뜩잖은 듯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비앙카는 물러서지 않고 엘리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앙카는 지난번 이 반편이 공주에게서 들은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곱씹었다. 내 팔을 모두 잘라가겠다고? 어디 해보라지. 그녀의 도전적인 시선에 엘리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어머나, 공주님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요.”
후작 부인은 이 맹랑한 아가씨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녀가 엘리사의 얼굴을 운운하는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이 회장에 존재치 않았다. 초야에도 남편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는 소문은 이미 수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제가 말벗이 되어드릴 수 있어요. 우린 같은 그란디아 출신이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과거의 모든 일을 의연히 버텨낸 것은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해 눈물짓는 날도 있었고, 제 인생에 대한 회의로 고뇌하는 날도 있었다. 자신을 헐뜯고 무시하는 자들이 싫었다. 레이라 모녀가 싫었고 비앙카가 싫었다.
“한참 찾았잖소.”
세 여성의 시선이 장신의 미남에게 고정되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진저가 엘리사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이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거요.”
“각하.”
“오랜만입니다, 부인.”
비앙카의 말을 끊은 그가 힐튼 후작 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후작 부인과 짧은 인사를 나눈 진저가 비앙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앙카는 몽롱한 표정으로 진저를 바라보았다. 그란디아에도 미남은 많았지만 진저처럼 위험할 만큼 아름다운 사내는 본 적이 없었다. 한순간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웬 공작이 대단한 미남이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다.
“본 적 없는 얼굴이군.”
“비, 비앙카 애쉴리입니다. 그란디아의…….”
비앙카의 말을 끊은 진저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당신과 가까운 사람이오?”
남편의 물음에 비앙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아내를 헐뜯어 면구스러운 게 아니라 다른 흑심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닙니다.”
“그럼 기억해 둘 필요 없겠군. 후작 부인과 인사도 나누었으니 돌아갑시다.”
진저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아주 난감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당신, 내일은 더 아플 예정이거든.”
“예?”
그가 낮게 웃으며 엘리사의 볼에 입 맞췄다. 좌중의 입이 벌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엘리사마저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남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내가 서 있기 힘들거든요.”
“아아, 예! 몸이 안 좋으신 줄도 모르고 제가 주책을 부렸네요.”
얼굴이 약간 붉어진 후작 부인이 어서 가보라며 그웬 부부를 떠밀었다. 엘리사는 어버버거리며 남편에게 끌려갔다.
아무리 순진하더라도 내일은 더 아플 예정이라느니, 서 있기 힘들다느니 하는 말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진저에게 이끌려 마차에 오른 엘리사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워서 다시는 파티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진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떠는 부인을 보며 삐딱하게 고개를 젖혔다.
“허리 펴지그래. 아플 텐데.”
“사람 많은 곳에서 그,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내가 틀린 소리를 한 것도 아닌데 왜.”
“그, 그래도!”
“월경 때문에 허리 아프잖아. 계속 서 있었으니 내일은 더 힘들 테고. 내 말이 틀린 건가?”
진저는 저러다 아내의 얼굴이 터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전보다 더 붉어진 아내는 입을 벌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실 월경 때문에 부러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그는 당당했다. 남편이 아내 몸 챙기는 게 뭐 어때서. 사람들이 밤일을 연상한다 해도 할 말은 많았다. 부부 사이에 밤일을 격하게 할 수도 있지 뭘.
그래도 우습긴 했다. 온몸이 붉어져 파르르 떠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진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따로 가르칠 필요 없겠어.”
“뭐, 뭐를요.”
진저가 몸을 낮춰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제 하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은데. 달거리 걱정도 다른 쪽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
“아니에요!”
“그쪽 학식으론 당할 수가 없군.”
엘리사가 대꾸도 못 하고 울상을 지었다. 진저는 대화를 포기하고 시선을 돌리는 아내를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 * *
저택에 돌아온 엘리사는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남편과 대화만 나누면 기가 쭉쭉 빠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의 배려를 정말 오해한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 놀림을 당한 것도 같아서 혼란스러웠다. 힘없이 축 처져 있던 엘리사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젖히고 드레스를 벗던 그녀는 노크도 없이 열리는 문에 놀라 가슴을 가렸다.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이는 루펠라였다.
루펠라는 ‘언니, 씻으려고요?’ 하며 눈을 깜빡였다.
“아, 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간다고 말하려고 왔어요.”
“이 시간에 가신다고요?”
“오빠한테 쫓겨났거든요.”
루펠라가 심통 난 표정으로 들어왔다. 엘리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남매 사이가 좋지 못한 것 같더니 쫓아내기까지 했단 말인가. 저택을 관리하는 건 안주인의 몫이지만 남편의 의사에 반할 순 없었다. 엘리사가 인상을 찌푸리자 루펠라가 손을 내저었다.
“수도에 따로 저택이 있어요. 그놈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붙어 있었는데 안 오려나 봐요. 그래서 가려고요.”
“아아.”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매가 같은 집에서 사는 건 이상하잖아요.”
루펠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남편과 루펠라도 자신만큼 많은 일을 겪었을 터였다. 엘리사는 지퍼를 다시 올리고 호출 줄을 향해 손을 올렸다.
“아니에요. 금방 갈 거예요.”
“차 한잔이라도 하고 가시죠.”
“차 안 좋아해요. 술이라면 모를까.”
루펠라는 명랑한 데다 붙임성이 훌륭했다. 남편에게 왜 그렇게 냉랭하게 구는지 모르겠지만, 그녀 말로는 남매는 대부분 그런 관계라고 했다.
엘리사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종알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노크 소리도 못 들었어요?”
“아, 그게…….”
“내가 맞춰 볼게요! 어떤 남자? 아니면 그 남자의 몸?”
엘리사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루펠라는 다 안다며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오빠가 얼마나 괴롭히기에 파티 도중에 나왔냐며 놀리기까지 했다.
엘리사는 깨달았다. 남편과 루펠라는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굉장히 닮은 남매였다.
루펠라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무려 세 시간이나 수다를 떨 수 있는 기인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는 새언니를 보며 그녀는 킥킥, 웃었다.
듣던 대로 말수는 적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 재미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엘리사는 그녀의 수다를 지겨운 기색 없이 들어주었다. 파티를 다녀오느라 녹초가 되었을 텐데도 한숨 한 번 내쉬지 않았다.
루펠라는 이 조용한 새언니가 마음에 들었다. 수다스럽지 않지만 또 완전히 샌님은 아니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루펠라는 엘리사의 짧은 대꾸를 통해 그녀가 란델에 대해 아는 바가 적다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문화 교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짚어주었다. 지금이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란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없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무지한 이에게 얼마나 가혹해지는지를. 더욱이 엘리사는 이방인이었다. 공주라는 신분만으로도 겉돌게 십상인데 어리바리해서는 육포처럼 물어뜯길 터였다.
루펠라가 문화 교사로 추천한 인물은 라골로, 진저와 루펠라의 보모인 마피 부인의 조카였다.
“자작가의 사생아요?”
“그래서 귀족의 생리에 대해 잘 알죠. 곁에 두면 도움이 될 거예요.”
루펠라는 말 나온 김에 인사라도 하라며 집사를 호출했다. 엘리사의 응접실을 찾은 라골이 고개를 숙였다.
엘리사는 루펠라가 추천한 교사가 남성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루펠라가 라골을 대하는 태도에 두 번 놀랐다.
루펠라는 부리는 자에게 허물없이 굴었다. 그란디아에서는 고용된 이에게 예를 표하는 일이 잦지만 그렇다고 루펠라와 라골처럼 허물없지는 않았다. 라골 또한 그녀의 수더분한 태도에 익숙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인연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땅한 직책이 없어 모두 라골이라고 불러요. 서류부터 잔디밭까지 이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답니다.”
“반가워요, 라골.”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사내였다. 아아, 그렇지. 결혼식에서 잡무를 보느라 자신의 주위를 맴돌던 이였다. 그때도 눈치며 일 처리가 빨라 눈여겨보았다.
엘리사가 고개를 까닥이자 루펠라는 늦은 시간에 그를 호출한 이유를 알려주었다. 라골은 마님의 교육을 맡는다는 게 부담이 되는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라골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더 나은 교사가 있을 겁니다.”
“어떤 교사? 저택의 일을 시시콜콜 사교계에 전하는 교사? 아니면 공작 부인의 교사라는 이유로 아랫사람을 휘두르는 교사? 이봐, 라골. 내게도 너를 추천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
“제겐 너무 막중한 임무입니다.”
“봐요, 언니. 이 사람이 이렇게 고지식해요.”
루펠라가 그를 새침하게 노려보았다. 엘리사는 그의 고지식한 면이 자신과 잘 맞을 거로 생각했다. 엘리사마저 다시 생각해 보길 청하자 라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에요. 어떻게 안 되겠어요? 난 라골의 도움이 필요해요.”
“…….”
루펠라라면 몰라도 공작 부인의 청을 거절하는 건 그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했다.
루펠라는 결국 이렇게 될 걸 뭘 빼고 그러냐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라골의 모친이 산통을 견디지 못해 절명하고, 마피 부인은 자매가 남긴 유일한 핏줄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귀족가의 사생아와 그 보호자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머물 수 있는 기간은 6개월이 고작. 그런 마피 부인이 마지막으로 택한 곳이 그웬가였다.
다행히 그웬가에선 할 일이 있었다. 어린 아들을 잃은 지 얼마 안 된 그녀는 젖먹이 진저를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그녀의 신세를 연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라골을 통해 사생아의 인생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공작 부인은 마피 부인을 내보내기는커녕 그녀의 일을 집사에게 일임했다.
진저가 젖을 뗄 때까지만 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진저가 어미 손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즈음, 루펠라가 그웬가에 오게 되었다. 마피 부인은 제 조카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조카보다 더한 애정을 그들 남매에게 주었다.
아이에겐 일절 관심이 없는 공작이나 석녀인 탓에 아이만 보면 히스테리 부리기 바쁜 공작 부인을 부모로 두고도 그들 남매가 이만큼 씩씩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모두 마피 부인에게 있었다.
그런 이유로 진저와 루펠라에게 라골은 형제처럼 가까운 이였다.
“그럼, 교사가 되었으니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란디아 왕궁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란델에선 사내를 밤늦게 들여선 안 됩니다.”
“부른 건 나인걸. 새언니는 네가 사내인 줄도 몰랐다고.”
“그러니까 아가씨께 주의를 드리는 겁니다. 아가씨의 섣부른 행동으로 마님께선 어떤 곤란한 소문에 휩쓸리실 수도 있습니다.”
루펠라는 입술을 조금 내밀긴 했지만 그의 말에 이의가 없었다. 루펠라에게 라골은 형제와 같은 이인 데다 란델에서 자신의 연애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사가 주의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그를 내보냈다.
루펠라가 그를 본 감상에 대해 물었다. 엘리사 또한 그가 좋은 교사가 되리라 생각했다. 과묵하긴 하나 행동을 짚어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스승은 엄격해야 한다. 신분보다 학식과 성품이 우선되어야 하는 게 스승이라는 직책이었다.
“그럼 가볼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줘요.”
“밤이 늦었는데 오늘은 저택에서 머물고 내일 떠나시는 게 어떨까요?”
“코앞인데요, 뭘. 실력 좋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을 테니 걱정 말아요. 무엇보다 이제 저 얄미운 얼굴은 그만 보고 싶다고요.”
남편의 험담에도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게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우스워서 루펠라는 허리를 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 * *
“라골이라고?”
콕스에게 아내가 문화 교사를 청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진저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란델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라골, 라골이라. 그의 이름을 입속에서 굴리던 진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하고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아내에게 도움이 되겠지.’
콕스는 마님의 교사가 남성이라는 사실이 걸렸다. 워낙 유순한 분이셔서 소문에 능동적인 대처가 어려울 것이다.
진저나 루펠라는 소문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아 소문의 위험성에 대해 간과하고 있었다. 콕스 또한 라골을 잘 알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지만, 처지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라골은 귀족가 사생아라는 입장 때문에 과할 정도로 조심성이 많았다.
‘쉽사리 허튼 소문을 수용할 자는 아니지만…….’
“주인님, 최근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 아십니까?”
“소문이라니.”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주인님과 마님, 두 분에 관한 소문입니다.”
진저가 쥐고 있던 펜을 놓고 콕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충직한 집사가 수다쟁이가 될 정도의 소문이라니.
그의 시선에 콕스가 어깨를 좁혔다. 주인님은 세간의 소문처럼 막돼먹은 인사는 아니어도 수많은 혈전을 치룬 만큼 위험한 살기가 흐르는 분이셨다. 이런저런 일을 많이 보고, 직접 겪기까지 한 콕스에게도 어려운 사내였다.
“주인님께서 초야에 마님을 찾지 않으셨다는 소문이 수도에 파다합니다.”
“그건 네 능력이 부족하니 목을 베어달라는 뜻인가.”
“…….”
콕스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저택의 일이 일파만파 퍼진 것은 총괄 집사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웬 남매가 워낙 소문에 관심을 두지 않기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기도 했고. 콕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얼른 수그렸다.
진저 또한 알고 있는 바였다. 그란디아에서 왔다는 그 맹랑한 계집에게 들어 이제 단속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콕스는 허튼 입방아 때문에 잃기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가 깍지를 끼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입이 가벼운 자들은 내보내고 남은 자들과 새로 고용 계약을 맺어라. 조항은 일일이 짚어주지 않아도 되겠지.”
“예.”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뭐야.”
“본래 마님께서 오신 직후에 이루어져야 했을 일이지만 그간 주인님께서 마물 토벌로 번다하셨고, 건강도 좋…….”
“본론만.”
“수인사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족가에선 안주인이 들어오면 예속들과 따로 인사 자리를 만든다. 보통 남편의 모친이나 가장 웃어른이 챙기는 일인데 그웬가에는 특별히 그녀를 살펴줄 어른이 없었다.
진저는 자신이 그간 아내에게 무심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기사부터 말단 하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인사회에 참여하라는 명을 내렸다.
콕스는 기쁜 표정으로 그러겠노라, 답했다.
“어째 네가 더 기뻐하는군.”
콕스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붉어진 얼굴을 수습했다.
“주인님과 마님께서 다복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는 맹수 같은 주인님께서 어깨를 떨구는 일이 다시없기를 바랐다. 진저 그웬이란 사내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드는 게 가장 어울리는 남자였다.
* * *
난데없이 인사를 받아야 한다며 끌려온 엘리사는 홀로 의자에 앉아 충성을 맹세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웬가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던가. 인사만 받는데도 몇 시간씩이나 이어지니 지쳐 갔다.
그렇게 인사만 받기를 세 시간. 이름은 뭐고 제 업무는 뭐며 맡은 일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말을 한 오백 번쯤 들었나 싶었을 때 마지막 한 명이 인사를 끝냈다.
끝났다고 좋아하기도 전에 그녀는 또다시 자리를 이동해야 했다. 인사받을 사람이 더 있는 거야? 울상이 된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그웬가의 정예군입니다. 마님을 지키고 그웬가를 수호할 대장부들이죠.”
라골의 말에 엘리사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진저의 몸으로 본 사내들이라 그런지 이전보다 긴장이 덜했다.
구령대 아래에 마련된 단상에 오른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한차례 전에도 라골과 콕스를 하얗게 질리게 한 그 행동은 병사들의 안색마저 시퍼렇게 질리게 하였다.
그란디아에서 자란 그녀는 란델이 상하 관계가 몹시 경직되었다는 것을 몰랐다. 라골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짚어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콕스는 어쩐지 눈망울이 촉촉했다. 귀족의 고용인으로 살며 단 한 번도 윗사람에게 인사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웬의 안주인이자 그란디아의 공주였다. 감히 우러를 수도 없는 신분의 여성이 한낱 아랫사람에게 허리를 굽힌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대장들부터 군사들까지 어버버 하는 사이에 인사를 받았다. 엘리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등을 곧게 폈다.
부대장 마크빌 경이 서둘러 한쪽 무릎을 굽히자 당황했던 병사들 또한 그를 따라 무릎을 굽혔다. 이윽고 한 사람씩 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제일 첫 순서는 부대장 마크빌 경이었다. 그는 정중한 태도로 제 소개와 함께 목숨 바쳐 그녀의 안위를 지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엘리사가 그의 턱밑에 멍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직 멍이 다 빠지지 않았군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멍, 울혈 등엔 미역이 좋죠. 부지런히 챙겨 먹도록 해요.”
“예! 감사합니다!”
마크빌 경은 주군인 진저 앞에서도 이만큼 긴장하진 않았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라 그녀는 그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그래서 바켄 주점의 하이디를 건 대련의 승자는 누구였나요?”
“헙.”
사건의 원흉인 한스 경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그걸 어떻게 아시지. 주군께서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아시는데도 말을 안 하셨나. 공작 부인의 질문에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마크빌 경은 그저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승자는 없습니다! 모두 차였습니다!”
“어머나. 내가 실수를 한 건가요?”
“아닙니다! 차이는 건 늘 있는 일입니다!”
엘리사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병사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소대장님들은 공보다 더 많이 차이십니다!”
그녀와 함께 연무장을 찾은 하녀들이 킥킥거리며 대장 배지를 단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지만 마크빌 경은 엘리사가 곤란해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일주일 전에는 꽃집 아가씨에게도 차이고, 그전에는 용병 중개소의 메리 양에게도 차였습니다. 저번 달에는……!”
수도 여자들의 이름이 다 나올 기세였다. 엘리사는 소대장들을 안쓰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렇게나 많은 여성에게 차였다니. 전장에만 있어 여성의 마음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안쓰러운 영혼들에게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옷을 좀 세탁하는 게 어떨까요?”
“예?”
“모두 옷이 붉게 물들었잖아요. 여성들은 깔끔한 남성에게 호감을 느끼죠.”
그녀가 생각했던 훈련법. 날아오르는 사과, 레몬 베기에 이어 마지막을 장식한 건 체리였다. 날아오는 체리를 베다가 옷이 물들었다는 걸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엘리사는 몹시 순수한 눈망울로 옷을 지적했다.
“음, 그리고 목욕도 자주 하시고요.”
“…….”
“퀴퀴한 냄새가 나는 사내는 사랑받지 못해요.”
그녀가 순진한 눈으로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훈련을 하느라 꼬질꼬질했다. 하녀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모두 허벅지를 비틀고 있었다.
콕스의 사정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거의 울먹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불쌍한 공들을 위해 비누를 잔뜩 사들여야겠다고.
저택에 돌아온 진저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평소와 같이 연무장이었다. 그는 막 병사들과 수인사회를 마친 아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병사들은 군기는커녕 그냥 기까지 다 빠져 있었다. 진저가 무슨 일이냐는 듯 마크빌 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또한 무언가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혼이 반쯤 나가 있었다. 더 이상한 건 병사들과는 다르게 아내 곁의 고용인들은 모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저를 발견한 라골이 허리를 굽히자 엘리사 또한 몸을 일으켰다. 진저가 대번에 인상을 구긴 채 라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마님께서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조언이라니.”
마크빌 경을 비롯한 소대장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 *
연무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듣던 진저는 픽, 실소를 흘렸다. 녀석들이 모두 차였을 줄은 알았다. 어차피 걷어차일 것을 내 거네, 네 거네 싸워대는 꼴이 기막히기도 했고.
그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이유는 아내가 그들에게 농이 아닌 진심을 담은 조언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수인사회를 마치고 연무장을 떠날 즈음엔 병사 모두 혼이 빠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조언엔 단 1할의 악의도 담기지 않았다. 모두 멋진 사내인데 공처럼 차이는 게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그녀는 괜한 참견을 했다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저는 턱을 괸 채 시무룩한 표정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조용해서 그렇지 뜯어보면 우스운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뭐라고 조언해 주었소?”
엘리사가 눈썹을 착 늘어뜨렸다. 괜한 참견을 했다고 역정을 부리시는 걸까.
진저는 말썽을 부리고 기가 죽은 어린아이 같은 그녀를 보며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치를 보던 엘리사가 떠듬떠듬 변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정말…… 도움이 되고 싶어서…….”
“도움이 되었을 거요. 이제 목욕과 세탁에 대해 경각심을 갖겠지.”
“……놀리시는 거죠?”
“다행이네. 놀리는 줄은 알아서.”
엘리사가 뾰로통한 얼굴로 일어서려 하자 진저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콕스에게 가져온 것을 내오라 일렀다. 콕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답게 장식된 케이크를 내왔는데 엘리사는 화를 내려던 것도 잊고 멍하니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트리거 공이 당신에게 전하라더군.”
트리거 공작은 란델의 4공 중 가장 호방한 성품을 지녔다. 남의 자식, 제 자식 가리지 않기로는 피셔 자작보다 더한 이였다. 그는 진저의 검술 스승으로, 진저는 그에게서 검술뿐 아니라 전략부터 처세까지 많은 것을 전수받았다.
진저에게 트리거 공은 스승이 아니라 양부 같은 사람이었다. 귀찮은 일을 하느니 귀찮게 만든 이의 목을 베었을 진저가 가끔이지만 휘둘려 주기까지 할 정도로.
공작은 애처가였다. 아니, 사실은 공처가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는 별명답게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남자였다. 저택 밖을 나설 때면 늘 양손 가득 아내를 위한 선물을 샀다.
오늘도 4공 회의가 끝나자마자 진저를 끌고 꽃집이니 제과점이니 하는 곳을 들렀는데, 그는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의 진저에게 선물이라며 케이크를 잔뜩 사주었다.
「제가 앱니까?」
「여자는 모두 요정이지. 달고 아름다운 것을 싫어하는 요정을 보았느냐.」
「가끔 제가 아는 스승님이 맞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나도 그래.」
트리거 공작은 눈 밑이 거뭇해져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요정 어쩌구 하는 헛소리는 공작 부인에게 들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엘리사는 발그레 홍조가 올라온 뺨을 가렸다. 먹어도 되냐며 묻는 그녀가 기막혀서 진저는 한동안 뒷목을 주물렀다. 그럼 이 많은 케이크를 저 혼자 먹으려고 사 왔겠는가. 진저가 전부 다 먹어도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단맛을 즐겼다. 달거리를 할 때는 이가 녹을 정도로 단 초콜릿이며 빵, 잼 등이 생각났고, 그녀의 몸으로 살았던 한 달여간 진저는 평생 먹어본 것보다 더 많은 단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아무리 계모의 구박 아래 살았다 하더라도 그녀는 공주였다. 이만 한 음식도 못 먹지는 않았을 터였다. 왕궁에서 더한 것도 먹었을 텐데 뭘 이런 걸 가지고.
물론 그의 생각처럼 엘리사가 음식도 못 먹을 정도로 구박을 받은 건 아니었다. 다만 식탐이 많지도 않았고 부러 찾을 정도로 단 음식을 좋아하진 않았다.
그란디아가 란델에 비해 디저트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것 또한 이유 중 하나였다. 란델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이 결혼식 케이크였다.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케이크는 웅장하기까지 했다.
엘리사가 스푼을 쥐며 뭐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했다. 미간에 주름까지 만든 채 고심하던 그녀가 택한 케이크는 황금빛 밤이 올라간 몽블랑이었다. 몽블랑 위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엘리사가 힐끗 진저를 쳐다보았다.
“드릴게요.”
“설마 밤을 말하는 거요?”
“네.”
“그 밤은 안 끌리니 다 드시오.”
진저가 삐딱하게 고개를 젖히며 중얼거렸다.
“다른 밤이면 몰라도.”
진저의 말을 들은 엘리사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러니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펄쩍 뛰었다간 내가 무슨 밤을 말한 줄 알았기에 그러는 거냐며 놀릴 터였다.
설탕 코팅이 된 밤을 입에 넣은 엘리사가 작게 탄성을 흘렸다. 란델의 디저트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토라진 것도 잊고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며 진저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쩐지 스승님이 매번 케이크며 꽃다발 등을 바리바리 싸 들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 *
목욕을 끝내고 젖은 머리를 말리던 엘리사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녀 몇몇이 시트와 향초, 작은 병을 들고 그녀의 방을 찾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잠자리를 정돈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택에 온 후 사나흘간은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를 챙기기 위해 하녀가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뿐이었지 한 달이 넘어서는 밤늦게 엘리사의 방을 찾는 경우는 없었다.
그녀는 자꾸만 서로 눈을 마주치고 키득거리는 하녀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들은 탁자 위에 약과 이상한 병을 놓고는 물을 새도 없이 엘리사의 방을 나섰다.
엘리사는 머리를 말리다 말고 침대에 올라가 병을 매만졌다. 밀봉된 병은 물이나 주스와는 다르게 미끄덩거리는 액체가 들어 있었다. 내용물이 궁금해진 그녀가 힘을 주어 코르크 마개를 젖혔다. 그런데 일반 술병, 혹은 물병과는 다르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서 쉬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 병과 씨름을 하고 있던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진저였다. 남편은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서서 계속하라며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당황한 엘리사가 옷깃을 여미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병을 집었다.
“돌려서 여는 거요.”
그의 말이 맞았다. 남편이 마개를 연 병을 건네주었다.
“아, 등화유네요.”
“그게 뭐지.”
“향료예요. 화장수에 들어가서 익숙한…….”
진저의 붉은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어쩐지 등줄기가 오싹하고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병 주둥이를 꼭 그러잡은 그녀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남편을 피하기 위해 자꾸만 뒤로 밀려나던 엘리사가 결국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는 두 손으로 침대를 짚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맞춰봐.”
“모, 모르겠어요.”
“그럼 알려줘야겠군.”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다.
쇄골 근처를 유영하던 입술은 곧 아래를 향했다.
맨 위 단추는 그에 의해 어느새 풀려 있었다. 단추가 하나둘 풀릴 때마다 그의 움직임이 더욱 농염해졌다.
그의 입술이 가슴 산을 오르기 직전, 상의의 단추는 모두 풀려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그녀의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
“쉬, 괜찮아.”
손짓은 처녀를 희롱하는 악마처럼 농밀한데 반해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하다.
괴리는 첫 정사를 맞이하는 새 신부를 달뜨게 만들었다. 엘리사가 바들바들 떨며 향유병을 꼭 쥐었다. 진저는 등반을 방해하는 그녀의 손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엘리사는 그가 슬립의 어깨끈을 입술로 물 때까지도 몸을 굳힌 채였다.
상상 속에서의 부부의 밤과 현실에서 맞이하는 부부의 밤은 다르다. 행위에 불과하리라 생각했던 첫 관계는 희열보다 공포가 먼저였다.
“각하-”
엘리사가 입을 열자마자 슬립이 흘러내려 나신이 드러났다.
“자, 잠깐.”
그 순간 그의 손이 드로우즈 속으로 들어왔다.
그가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가슴골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닿자마자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골 사이에 있던 그의 입술이 어느새 붉은 과실을 찾았다. 그는 탐욕스러웠다. 탐색만으론 만족할 수 없는지 입을 벌려 과실을 머금었다.
“아……!”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 발가락이 오그라들고 절로 달뜬 숨이 터져 나온다.
진저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내를 올려다보았다. 색스럽지 않은 신음이다. 그저 생경한 감각에 놀라 질러낸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반가운 소리다. 순진한 눈이 진저의 음심을 부추겼다.
단번에 다리를 벌려. 다리 사이를 손으로, 혀로 헤집어 한 점 흰 곳을 찾아볼 수 없게 붉게 만들어버려.
침입자를 처음 맞이하는 입구는 네 것을 뜨겁게 조일 거다. 일절 자비를 갖지 말고 허리를 흔들어. 사정하고 사정해 음욕에 사로잡히게 만들어라.
진저의 눈이 음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아내의 허벅지 사이를 잡은 채 머금고 있던 과실을 맛보았다.
엘리사는 향유병을 손에 쥔 채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제 목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꼭 끌어안은 아내가 사랑스러웠다.
‘후’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엘리사는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떠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욕망에 찬 붉은 눈이 보였다.
‘야해.’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는 제 뺨을 잡은 그녀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렸다.
누가 먼저랄 새도 없이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다. 아내의 혀는 미숙하게 움직였다. 그의 혀가 입안을 탐험할 때에도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반면 진저의 혀는 주인을 닮아 짓궂었다. 초심임이 분명한 아내의 혀를 거칠게 희롱했다.
주인을 닮은 건 혀만이 아니었다. 손 또한 예의를 몰랐다. 아내의 드로우즈를 안은 헤집던 손은 은밀한 곳을 지키는 마지막 천 쪼가리 안마저 허락 없이 들어갔다.
엘리사가 입맞춤에 정신을 빼앗긴 동안 진저의 손은 가늘고 부드러운 수풀을 매만졌다. 수풀은 애액에 젖어 습했다.
가슴을 조금 빨고 키스만 했을 뿐인데도 아내의 몸은 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요망하리만큼 솔직한 육체였다.
진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아직이야. 처음이라면 필경 아플 테니 조금 더 적시는 게 좋겠군.’
입맞춤에 방심한 지금이다.
그는 뭉툭한 손끝으로 음핵을 문질렀다.
엘리사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앗!”
당황한 엘리사가 병을 내던지고 그를 밀어냈다.
쨍!
날카로운 파열음이 야릇한 분위기를 갈랐다.
꼭 감았던 눈을 뜨자 당황한 얼굴의 그가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병의 잔해를 쳐다보고 있었다.
몸이 바뀌기 전엔 그저 점잖고 조용하다 생각했고, 바뀐 뒤엔 점잖은 건지 맹한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젠 알겠다. 저 여자 정말 맹하다. 아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가 막혀서 화가 날 정도였다.
음핵을 만졌다고 병을 내던지고 밀어내다니.
“뭐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형편없었나.”
“그, 그게 아니라…….”
사내 경험이 없다는 건 알지만, 사내 경험이 없는 여자들이 죄 아내처럼 굴진 않는다.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참으며 테이블 위에 있던 티슈 박스를 가져왔다.
무릎을 구부린 그가 손 위에 티슈를 놓은 채 유리 조각을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하자 진저가 소리쳤다.
“일어나지 마!”
어리바리한 공주님이 괜히 돕겠다고 나서봤자 발만 베일 것이다. 엘리사는 울상이 된 채로 진저가 깨진 병을 수습하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저, 하인을 부르면…….”
“4개월이나 걸린 초야에서 병을 깼다는 소문까지 들으려고?”
엘리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소문을 들었구나…….’
저택 안에서만 지낸다고 사교계의 소문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라 관심을 거두었을 뿐이지 수도에 자신과 남편의 소문이 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루펠라와 라골 또한 주의를 주기도 했고.
그들은 신방이 더 늦어져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부부 간의 정다운 관계는 차치하고서라도 사교 활동을 시작한 후엔 싫은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초야가 늦어져서는 안 되다는 말엔 엘리사 또한 동의했다. 소문이나 사람들의 비웃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부부가 되었으니 당연히 따라와야 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엘리사는 병을 정리한 후 돌아온 남편의 소매를 잡았다. 그 손길이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진저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화를 되삼켜야 했다. 미안한 건 아는 모양이다.
“옷이 젖었는데…….”
“그래. 당신 때문에.”
엘리사가 홉, 숨을 들이켰다.
“이제 준비되었어요. 하세요.”
대체 뭘. 분위기는 다 깨 놓고 다시 하라니. 그것도 저토록 결의에 찬 표정으로. 진저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한참 헛웃음을 흘리던 그가 눕기나 하라며 그녀를 이불 안으로 집어넣었다.
부부는 함께 누워 말없이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십 분. 또 이십 분. 엘리사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안 하실 건가요?”
벌떡 몸을 일으킨 진저가 그녀의 입까지 이불을 올려주었다.
엘리사는 그 후로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결혼 준비를 하며, 혹은 고용인들에게 들어온 남편은 소문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늘 그가 방에 찾아온 건 자신을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남편을 너무 매몰차게 밀어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놀라서 그런 건데…….’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엘리사가 몸을 뒤척이며 거듭 한숨을 내쉬자 진저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잠이 안 오나.”
“네? 아, 네…….”
진저는 아내의 힘없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일이 묻었던 셔츠를 벗어 세탁 통에 집어넣고는 호출 줄을 잡아당겼다. 그는 아내를 위해 꿀이 들어간 따뜻한 우유를 내오라 일렀다. 남편의 세심한 배려에 미안해진 엘리사도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남편은 세간의 말처럼 ‘힘 있는 개새끼’가 아니었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배려받고 있었고 그는 살뜰하지는 않았지만 엘리사에게 신경을 거두진 않았다.
하녀에게서 쟁반을 건네받은 그가 우유 잔만 든 채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진저가 엘리사에게 우유가 든 컵을 건넸다.
컵을 타고 온기가 전해졌다. 온기가 꼭 남편의 배려 같아서 엘리사는 작게 속삭였다.
“미안…… 해요.”
“뭐가.”
“당신을 창피 주려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러워서…….”
“당신은,”
엘리사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진저가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내 다시 그녀를 바라본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전보다 더 당황한 엘리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내가 옹졸했어. 당신에겐 무서울 수 있는 일이란 걸 간과했지.”
엘리사는 목구멍을 간질이는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를 칠 때는 무서웠고, 화가 난 것 같았을 때는 두려웠다. 혹시 이곳에서 쫓겨나 다시 그란디아로 가게 되면 어떡하지?
그러나 남편은 그런 자신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은 없었다. 자꾸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진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래도 밀어내지는 마.”
“…….”
“대답 좀 해주시지.”
“……네.”
진저는 울먹이듯 대답하는 아내를 보며 픽, 웃었다. 그는 자신에게 애정을 바라는 여자를 극도로 경계했다. 몸을 겹친다거나 가끔 식사를 함께하는 이들은 모두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그러니까 경험이 많은 여자들이었다.
순진한 아내에게 초야가 어떤 의미일지 예상했어야 했다. 자신을 밀어내는 손길에 울컥하여 겁 많은 아내를 움츠리게 하였다.
그녀가 쓰는 침실은 선대 공작 부인의 침실로 인테리어나 벽지, 가구 배치 등은 과거와 달랐지만 의모를 연상시켰다. 그는 유년기를 지긋지긋하게 만든 의모의 눈빛을 떠올렸다. 이해는 한다. 자신이 의모였어도 남편을 죽이고 싶고, 밖에서 데려온 남편의 자식을 할퀴고 싶었을 터였다.
폭력은 없었다. 권세가의 고명딸로 자란 그녀는 자존심상 자신을 폭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걸 의붓자식을 폭행하는 것으로 증명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
그러나 진저에게도 의모가 차라리 자신을 때려주길 바라던 때가 있었다. 마귀를 보듯 혐오스러운 눈빛은 어린 진저를 몰아붙였고 오직 생존을 위해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컵을 매만지던 엘리사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다음에 저를 찾으실 땐…… 말씀해 주세요. 신경안정제를 먹고 기다릴게요.”
부부의 밤에 왜 신경안정제가 필요한 건데. 진저는 기가 막혀 허, 입을 벌렸다.
이 여자, 정말 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