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남편에게 가슴이 달리는 건 흔한 일은 아닐 거야
엘리사의 하루는 하녀의 노크 소리로 시작되었다. 오늘도 그의 기상 시간에 맞춰 몸을 일으킨 그녀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이제는 아침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하체에 놀라지 않는다. 해결책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 한구석에 비치된 장갑을 낀 그녀는 바지를 쑥 내리고 천장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몸이 바뀐 지 서른 날하고도 이틀째. 처음과 같은 어리숙함은 없었다.
처음엔 얼마나 놀랐던가. 당황스러움에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주먹으로 내리쳐도 보고 신께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엘리사가 픽 웃으며 끔찍했던 첫날을 떠올렸다.
* * *
‘제발 이 아이가 기운을 잃도록 해주세요.’
엘리사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다. 몸이 바뀐 것만으로도 곤란한데 남편의 하체는 왜 커져서 줄어들지 않는단 말인가.
주먹으로 내리치기까지 했는데 줄어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엘리사는 결국 진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문만 열면 남편이 있었다. 남편은 침실 밖 응접실에서 책을 산더미째 올려두고 ‘몸이 바뀌는 일’에 대해 찾고 있었다.
엘리사가 문을 조금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 각하.”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기던 진저가 고개를 들었다.
“이 아이가 줄어들질 않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이 아이, 그러니까 각하의 성기가…….”
진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고작 살덩어리일 뿐인 성기의 호칭이 ‘이 아이’라니.
마냥 점잖은 줄만 알았던 아내에게 별난 면이 있었다.
“용변을 보시오.”
“네? 용변만 보면 되나요?”
진저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사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기가 막혔다. 뭘 이런 것에 저토록 기뻐한단 말인가. 아내가 신이 나서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본 그는 픽 실소를 흘렸다.
엘리사가 해결책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문제는 연이어 발생했다.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는 꼿꼿하게 일어난 그것과 몇 분이나 눈싸움을 했다. 생김새가 무시무시했다.
붉고 검은데다 힘줄까지 일어난 거대한 크기의 살덩이.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운데 촉감은 더 기묘했다. 근육처럼 단단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처럼 부드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곤란한 건 손끝이 닿자마자 승천하듯 꿈틀거린다는 것.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그녀는 스스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
진저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는 자신의 무기에 닿았다.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곤 엘리사와 함께 화장실에 들어갔다.
“가, 각하!”
엘리사는 화장실에 들어온 후에야 도움을 청할 대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이 엘리사의, 아니, 그의 살덩이를 손으로 잡으려 들었다.
“가만히 있으시오. 튈 수도 있으니.”
그의 손이 성기에 닿았다. 살덩이가 부풀어 올랐다. 그녀가 스스로 그것을 잡았을 때완 확연히 다른 감각이었다.
“하지 마세요.”
울먹이는 목소리에서 당황과 부끄러움, 그리고 미미한 끔찍함이 느껴졌다.
진저가 한숨을 흘렸다. 이대로 두면 곧 가라앉겠지만, 앞으로도 아침을 허비하게 할 순 없었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머리에 새겨두어야 오늘과 같은 곤란을 겪지 않으리라.
그는 기어코 아내의 허리와 성기를 잡고 변기를 향해 조준했다.
타인의 손이 닿자 예민한 살덩이는 더욱 꼿꼿하게 일어났다.
엘리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남편이 잡은 것만으로도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
진저는 터질 듯 붉어진 아내의 얼굴을 보고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식기는 좁고 축축한 구멍에 들어가도 쉬이 파정한 적 없는 근엄한 녀석이었다.
고작 잡힌 것만으로 신음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부인, 이제 용변을-”
“읏.”
그가 아내를 부르자마자 아내의 입에서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저의 눈과 엘리사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엘리사는 그대로 굳어져 입만 벙긋거렸다.
남편과의 정사는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을 했으니 후계를 낳아야 한다. 후계를 낳으려면 정사는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예상한 적은 없었다.
남편의 손에 의해 남편의 몸으로 흥분하게 될 줄이야.
진저는 굳어 있는 아내를 빤히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흘렸다.
아침 발기는 소변을 보는 것으로 가라앉힐 수 있겠지만, 성적 발기는 다르다.
그 말인즉, 사정해야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아내는 순진하다. 순진한 아내가 스스로 성기를 흔들어 사정할 수 있을 리 없다.
진저가 다시 한번 아내의, 아니, 제 육체의 성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 싫어요.”
아내가 움찔거리며 그를 피했다.
“그럼?”
“……네?”
“이제 소변을 보는 것으론 가라앉힐 수 없을 텐데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겠소?”
“그건…….”
엘리사는 울상이 되어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보다 더 노골적으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진저가 살덩이를 부드럽게 쥐었다. 엘리사의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보지 않으려는 듯 눈을 깍 감고 고개를 돌렸다.
진저는 살덩이를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았다.
“잘 봐둬.”
언제까지 영혼이 바뀌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몸으로 개망신을 당하는 일은 피하지 않겠는가.
“…….”
엘리사가 입술을 깨물고 하초를 내려다보았다.
남편의 손이 야릇하게 움직였다. 엘리사는 반사적으로 본래 그의 손이었던, 제 몸에 매달린 손을 보았다.
귀족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손. 수 없이 베이고 곪아 투박한 손이 본래 저 남자의 것이었다.
분명 움직이고 있는 건 평생 보아왔던 하얗고 부드러우면 매끈한 손이었다. 그와 자신은 영혼이 바뀌었으니 그가 움직이는 손은 제 것임이 당연하다.
자신의 손이 이토록 야릇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가.
손길이 너무 야릇해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달달 떨린다.
음경을 쥔 손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악 물린 잇새로 달콤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묘한 감각이었다.
위아래로 흔드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데 그는 이번엔 다른 곳을 공략했다. 그가 검지를 선단에 올려두고 부드럽게 원을 그렸다.
“으으응!”
강렬한 쾌감.
엘리사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진저는 자꾸만 뒤로 빠지려는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휘감았다. 그리고 이번엔 조금 더 힘을 주어 성기를 흔들었다.
“으…… 흣!”
허리 부근에 머물던 열기가 한순간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녀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순간 눈앞이 점멸하더니 무언가 꿀렁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저는 아내가 완전히 토정할 때까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엘리사가 가뿐 숨을 토했다. 한동안 정신이 없어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뿌옇던 시야가 본래대로 되돌아오자 정신까지 함께 돌아왔다.
남편의 손은 자신이 토해낸 정액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가늘어졌던 엘리사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진저가 비치되어 있던 타월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당신도 닦…….”
“으, 으으.”
“부인?”
어깨를 가냘프게 떨던 그녀가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스르륵 주저앉은 그녀는 세상이 끝난 듯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진저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 * *
첫날의 끔찍했던 사건을 떠올리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첫 성적 접촉이 자위일 줄이야. 그것도 몸이 바뀐 채 남, 아니, 남편이 해주는 자위라니.
엘리사가 한숨을 흘리며 바지를 올렸다. 남편의 손에 토정도 했는데 이쯤이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문제를 가볍게 해결한 그녀는 세수를 하고 잠옷을 갈아입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던 그녀가 아차, 하며 다시 단추를 풀었다. 단정한 모습이 보기 좋지만 오늘은 조금 차림새를 느슨히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오늘뿐만은 아니었다.
몸이 바뀐 지 한 달하고도 이틀째. 마물의 피를 옴팡 뒤집어쓰고 돌아온 남편은 저주로 인한 건지, 아니면 태생적으로 기묘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건지 엘리사의 몸을 앗아갔다.
3개월 동안 나눈 이야기라곤 ‘다녀오셨습니까’, ‘식사는 하셨나요’, ‘좋은 아침입니다’ 뿐인 남편과 몸이 바뀌다니. 레이라 부인이 왕궁에 들어온 후부터 언제나 상기하는 바지만 엘리사는 정말이지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엘리사는 방을 나서기 직전 거울을 보며 표정을 체크했다. 조금 더 싹퉁머리 없어 보여야 했다. 남편은 늘 이런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방을 나선 엘리사는 언제나처럼 세 열로 나누어 서 있는 남편의 예속들을 보았다. 그들은 ‘설마 오늘도?’ 하는 표정으로 엘리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도였다. 그녀는 남편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니 침실에서 지내겠다.”
그러고는 인사도 없이 방으로 쑥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니 그녀가 방을 비운 사이에 원주인이 돌아와 있었다.
진저 그웬. 그웬 공작가의 가주이자 그녀의 싹퉁머리 없는 남편이며 이 황당한 일의 원흉이었다.
진저가 침실을 향해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몸이 바뀌기 이전부터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던 하녀 몇이 기쁜 표정으로 침실 문을 열었다.
벌써 한 달이었다. 주인 부부가 오전을 몽땅 침실에서 보내신 게. 결혼 후 마님을 3개월이나 독수공방하게 하시더니 주인님께서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리셨나 보다. 이거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날이 머지않았겠어.
하녀들의 섣부른 꿈은 아마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말랑거리는 작은 손과 사랑스러운 웃음소리를 기대하고 있을 하녀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이 침실에서 하는 거라곤 실뜨기나 뜨개질 혹은 지겨운 서류 보기가 전부였다.
진저는 언제나처럼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서류를 검토했다. 엘리사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녀의 자리는 늘 침대 한구석이었다.
진저의 커다란 몸을 한구석에 구겨 놓고 투박한 손으로 열심히 코바늘을 움직이는 모습은 언제나 그의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제기랄.’
마물을 토벌하러 간 것도, 마물을 찔러 죽인 것도, 마물의 피를 뒤집어써서 몸을 바꾼 것도 그였다.
마법사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저 말랑한 부인이 요사스런 술수를 부렸을 리는 없다. 진저는 싹수는 많이 없었지만 자신이 지은 죄를 남에게 떠넘기는 옹졸함은 없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뒤적거렸다. 벌써 한 달이나 흘렀는데도 몸을 되돌리기는커녕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근래 그들의 하루 일정은 이러했다. 엘리사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꾀병을 부리고 진저와 함께 침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서로의 할 일을 한다.
엘리사는 대체로 뜨개질이나 수를 놓는 등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일을 선호했다. 진저는 서류를 봤다. 몸이 바뀌었다고 일까지 그녀에게 미루지는 않았다.
오전은 그렇게 보내고 식사를 한다. 식사 후에는 저명한 마법사나 신관을 초대해 마법서와 신학서를 하나씩 끼고 이야기를 듣는다.
진저는 마법엔 관심이 있어도 신학에는 개뿔 관심도 없었다. 신이 정말 있다면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터였다.
어릴 적에도 그 개고생을 시키더니 나이 들어서도 개고생을 시키는 신이라면 없는 게 나았다. 문제는 그 저명한 마법 학자와 신관들도 육체가 바뀌는 일에 관해선 모른다는 것이었다.
농담을 가장하여 ‘혹시 육체가 바뀌는 일에 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들은 ‘요새는 그런 농담이 유행입니까?’ 하고 허허 웃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복장이 터졌다.
오늘 그는 평소보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다. 엘리사가 짜증스럽게 호출 줄을 당기는 남편을 보며 날짜를 가늠해 보았다.
아아, 그렇지. 첫 달거리가 한 달 전이었으니 이제 달거리를 할 때가 되었다. 단 것이라곤 질색하는 진저가 며칠 전부터 디저트며 시럽이 잔뜩 들어간 차를 입에 달고 살았다.
진저는 집사에게 물을 가져오라 명하고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댔다.
며칠 내내 짜증 나고 예민하여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이 갑갑하고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오며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더웠다. 창을 열어놓고 자면 춥고, 그렇지 않으면 답답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몹시 불쾌했다.
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 주전자와 물 잔이 든 쟁반을 내왔다.
“너무 차갑잖아.”
진저가 버럭 성질을 냈다. 한겨울에 고뿔이라도 들란 말인가. 안 그래도 바람 한줄기 견디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몸이다.
집사는 두말없이 더운물을 내왔다. 그러자 이번엔 너무 뜨겁다며 짜증이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엘리사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저래 봐야 달라지는 건 없는데. 엘리사도 그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저 또한 달거리 즈음이 되면 며칠은 신경질적이 되곤 하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혼자 있는 곳에서 그랬을 뿐 진저처럼 남에게 드러내어 ‘나 오늘 예민하오’ 하고 광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피차 매달 겪는 일이고, 드러내 짜증을 내어봐야 생리하냐는 말밖에 듣지 못한다. 뭐, 남편으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니 당황스럽기도 할 것이다.
진저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처음 생리를 할 때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여 하늘이 노랬다. 우유 짜는 소도 아니고 하루 종일 아래로 피를 줄줄 흘렸다. 소는 짜야 우유를 내기라도 하지 이건 시도 때도 없었다.
처음엔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하여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데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피를 흘리는 게 아니라 몸이 아기집을 정리하는 거니 죽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 표정이나 말투가 아무렇지도 않아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월경은 정말 고역이었다. 하루 종일 짜증이 나고 단것을 입에 달고 살며 겨울을 대비하는 다람쥐처럼 볼이 불룩해질 때까지 입에 온갖 음식을 집어넣었다.
불편하긴 또 얼마나 불편한가. 천장을 보고 누워 있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트를 붉게 물들였다.
엘리사는 상냥하게 생리대 착용법을 알려주었다.
“천을 이렇게 둘러야 해요. 아니요. 그렇게 느슨하게 묶으면 피가 다 새어 나올 거예요. 그렇죠. 네. 잘하고 계세요.”
천하의 진저 그웬이 아내에게 생리대 착용법이나 교육받는다니. 몇 번이나 혀를 깨물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한번 겪어봤다고 이번엔 수월했다.
그런데 저번 달에도 이틀째엔 이렇게 양이 많았던가. 온몸의 기가 쭉 빠질 정도로 생리대를 흥건히 적셨다.
그웬가의 집사 콕스는 하얗게 질린 진저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주인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새 마님께서 타국의 공주라기에 걱정한 것도 잠시, 3개월 동안의 공작저는 몹시 평화로웠다. 주인님께서 결혼을 하시니 매일같이 제 딸이며 손녀의 초상화를 들고 찾아오는 귀족들도 줄어들었다.
물론 한 달 동안은 결혼식이다 새 방 단장이다 하여 바빴지만, 마님의 성격이 워낙 유순하신 편이라 소란 한 번 없었다. 그런데 그간 참아왔던 게 터진 걸까.
사실 새 신부 입장에서 진저 그웬은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는 남편감이었다. 초야에도 그녀의 침실을 찾지 않았다는 소식은 이미 온 저택에 소문이 퍼졌다.
그렇다고 다정하게 말을 붙여주는 것도 아니요, 그녀에게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바라지도 않았다.
‘이쯤 되면 터지실 때도 됐지.’
콕스는 처음 가져온 찬물에 데운 물을 붓고는 고개를 숙였다. 진저는 저도 괜한 짜증이라는 걸 아는지 세 번 타박하는 일은 없었다.
콕스가 나가자 침실엔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라던가 숨소리만 아니었더라면 누가 있는지도 모를 만큼 고요했다.
어느새 스웨터를 다 짠 엘리사가 그것을 바구니 속에 정리했다. 손을 움직일 뿐이지 자세가 변하진 않았다.
“내 근육이 다 녹슬겠군. 운동이라도 하는 게 어떻소, 부인.”
“예.”
엘리사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일에 집중했다.
그녀는 3개월 동안 한결같았다. 세상사를 초월한 성인이라도 된 것처럼. 스칠 때마다 몇 마디 나누긴 했지만 ‘네’, ‘아니오’ 같은 대답이 고작이었다.
서류를 내려놓은 진저가 고개를 삐딱하게 틀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뚝심이 대단할 정도였다.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생각조차 포기한 건지.
그란디아 왕의 대단한 순애보는 국경을 넘어 타국에까지 소문이 파다했다. 왕이 첩 한두 명 거느리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느냐마는 아데울리 국왕은 정도가 심했다.
그는 엘리사 그란디아의 모후가 세상을 등진 이후로 왕비를 들이지 않고 첩인 레이라 부인만을 살뜰히 챙겼다. 레이라 부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두 딸에게도 지극한 애정을 보였다.
그 결과 레이라 부인의 딸들은 왕가의 핏줄이 아니었음에도 공주만 한 권한을 행사했다. 레이라 부인과 그녀의 두 딸을 제재하던 왕태후마저 병마에 쓰러졌다 하니, 공주의 과거가 얼마나 고되었을지 가늠이 갔다.
처음엔 말도 없고 욕심도 없어서 만족스러웠던 부인은 일이 이 지경이 되자 진저의 불만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홀로 바뀐 몸 때문에 안달복달 못 하는 것 같아 울컥 화가 치미는 것이다.
“나만 안달이 난 모양이오.”
“그럴 리가요. 저도 몹시 당황스럽답니다.”
엘리사는 평화로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도 익숙해져서 그렇지 그녀도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 세수를 하려고 보니 물 위로 비추는 게 제 얼굴이 아닌 남편의 얼굴이었다.
잠이 덜 깼나 싶었던 것도 잠시, 거울 속에선 남편이 심술 맞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웬만한 것에 내성이 있는 엘리사조차 비명을 질렀던 그날 아침. 방 밖에선 또 다른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엘리사의 몸이 파자마 차림으로 튀어나왔다. 세상에 무슨 이런 조화가. 엘리사와 엘리사의 몸이 된 진저가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누구냐!」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누구시죠!」
「설마……. 부인?」
「각…… 하?」
「제기랄!」
「맙소사…….」
* * *
남편과 몸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며칠간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저주를 받은 게 아닐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더라. 아니지, 저주라면 자신보다는 남편 쪽이 받는 게 맞는데……. 원한 살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닐 것 같지 않은가.
곤란하긴 또 얼마나 곤란했는지 모른다. 아침마다 존재감을 발휘하는 그곳도 그렇고. 온종일 수분을 섭취하지 않아도 요의는 생겼다. 엘리사는 화장실에 드나들 때마다 몇 번이나 비명을 질렀다.
한번은 소변용 장갑을 소변 통에 빠뜨렸다. 그것도 그 전날 밤에 받은 새 장갑을. 두 번 장갑을 요청하면 혹여 의심이라도 살까 싶었던 그녀는 무작정 요의를 참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바지를 적시기 직전, 남편-그러니까 엘리사의 몸에 들어간 진저-의 명을 받은 집사가 장갑을 가져왔다.
그날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엘리사가 입술을 내밀고 코를 실룩였다. 남편의 몸이지만 스물둘이나 먹고 바지를 적실 뻔했다는 건 공포마저 드는 일이다. 정말 수치스러웠다.
“내 얼굴로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
남편의 핀잔에 엘리사는 입술을 삐죽였다.
“제 얼굴로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내 표정이 어떤데?”
엘리사는 뚱하게 입술을 내밀고 생각했다.
‘마귀할멈 같아.’
그녀, 아니,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진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사내 같은 구석이 있다면 괴리가 덜하겠지만, 그녀는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였다.
내숭을 떠는 건지 낯가림이 심한 건지 아니면 성격이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는 한 송이 백합 같은 여자였다. 조용하고 얌전하며, 좋다 싫다 의견을 피력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자라며 겪은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달 동안 오전 시간을 몽땅 함께하며 알게 되었다.
저 여자, 은근히 맹하다.
맹한 데다 묘하게 깜찍한 구석까지 있었다. 핀잔을 주면 열에 일곱 번 정도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를 한다. 하지만 처음에 보았던 성격과 크게 다른 부분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성격만 그런 게 아니라 외양도 마찬가지로 여성스러웠다. 작은 키는 아니지만 워낙 실루엣이 여리여리한 덕에 가녀린 인상이었다.
붉은 기 도는 부드러운 캐러멜색의 머리카락은 색이 연해 태양 밑에서 보면 연분홍색이었으며, 얇고 긴 속눈썹이라던가 탁한 색이 섞이지 않은 보석 같은 청안도 마찬가지로 사내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외모만 따지면 그의 취향과는 동떨어진 여자였다. 하지만 허리에서 엉덩이로 떨어지는 곡선이 놀라울 정도였다. 펑퍼짐한 드레스에 숨기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사내들이 환장하고 들러붙을 터였다.
그래서 물었던 적이 있었다.
「부인은 제대로 된 액세서리나 화장품도 없더군. 스스로를 꾸미는 게 싫은 거요?」
「그럴 리가요. 그저 귀찮을 뿐입니다.」
꾸미는 게? 아니면 아름다워진 후에 올 풍파가? 진저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어느 쪽이 정답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와 진저는 닮은 부분이 많았다. 태어나 자란 곳이 일반적인 가정이 아니었던 것도, 그리고 지킬 게 스스로뿐이라는 것도.
그 또한 부친과 계모의 생전엔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귀찮은 일이 생기리란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저의 말을 한 귀로 흘린 채 뜨개질에 열중하던 엘리사는 문득 떠오른 일정에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내일은 그녀가 처음으로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날이었다.
“내일 마담 캐롤라인이 주최하는 파티가 있어요.”
“내일?”
마담 캐롤라인은 벨라 백작의 누이로 남편과 사별하여 친정에 돌아온 여인이다. 벨라 백작은 누이가 남편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화장품 사업을 벌였는데,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최근엔 신무기 개발에 투자를 하고 있어 진저 또한 주목하는 인사였다.
‘참석을 피할 수는 없겠군.’
진저에게도 일정이 있었다. 그는 못 미덥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엘리사를 응시했다.
“명일, 기사단 동계 훈련이 시작되오. 참관할 수 있겠소?”
엘리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왕궁에서 지낼 때도 군사 훈련에 참관한 적은 없었다.
그녀의 반응에 진저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정수리를 덮었다. 마물 토벌에 앞장서는 게 아니었다. 토벌의 공로를 인정받아 큰 이익을 얻긴 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이득이고 나발이고 가래침이나 탁 뱉고 말았을 터였다.
* * *
동계 훈련은 차치하고서라도 란델의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연례 회의에는 꼭 참석해야 했다.
발언은 하지 않더라도 참석만은 해야 귀족들의 반발을 사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계속 저택에 숨어 지낼 수는 없었다.
부부는 결국 외부 활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로의 일에 차차 익숙해지기 위해서 엘리사는 동계 훈련을 참관하고 진저는 마담 캐롤라인의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마담 캐롤라인은 미용에 관심이 있어서 아마 이번 파티에서도 화장품 관련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그걸 다 조사했소?”
“집사가 언질을 주었어요.”
콕스를 아내에게 붙인 건 옳은 선택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공작가 집사들의 우두머리가 된 사내로 눈치가 빠르고 일 처리가 능숙했다. 진저는 전달받은 마담 캐롤라인 관련 서류를 뒤적이며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엘리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품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혹시나 하여 물은 결과, 그가 아는 거라곤 하얀 가루는 파우더고 인주같이 붉은 건 입술에 바르는 제품이라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마저도 이름을 몰라 어물거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했다. 그 정도만 알면 되지 뭐. 목에 차는 건 목걸이, 팔에 매는 건 팔찌, 귀에 거는 건 귀걸이니 입술에 바르는 건 입술 뭐시기겠지.
“그게 아니라 립…….”
엘리사가 그의 얕은 지식을 정정해 주려 할 때였다.
“전 대, 훈련 준비를 마쳤습니다.”
부대장, 마크빌 경의 목소리에 엘리사가 어깨를 움츠렸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진저는 기죽은 그녀를 보며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평소엔 사람 속 뒤집어질 정도로 평상심을 잃지 않던 아내는 막상 일이 닥치니 당황스럽긴 한 모양이었다. 픽, 웃은 그가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뜀박질이라도 시키시오.”
엘리사가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만 돌려 ‘뜀박질이요?’ 하고 물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뭐가 뭔지도 모를 테니까.”
“예…….”
그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여간에 대답은 잘한다. 서류를 내려놓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창 너머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걷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 * *
결혼한 지 3개월, 몸이 바뀌고 1개월. 도합 4개월을 그웬가에서 지냈지만 연무장 방문은 처음이었다.
왕궁에서 자란 엘리사의 눈에도 널따란 연무장엔 기백은 족히 될 사내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다. 그녀가 구령대에 오르자 사내들이 일시에 두 손을 등 뒤로 젖혀 부동자세를 취했다.
“주군을 뵙습니다!”
안 그래도 단련된 사내들이 내뿜는 위압감에 질려 있었는데 난데없이 우렁찬 목소리가 터졌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주춤, 뒷걸음질 쳤다.
마크빌 경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오늘 주군은 정말이지 이상했다. 하얗게 질린 낯빛만 보면 검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자 같았다.
검 없이도 사람을 때려잡는 분이신데. 몸이 좋지 않아 한 달이나 두문불출하셨다더니 아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신 걸까?
“각하?”
“네?”
네? 구령대 가까이에 있던 소대장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얼른 남편의 싹수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습할 말이 없어서 남편의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것뿐인데 소대장들이 알아서 ‘귀지 좀 파야겠군’ 하며 제 귀를 후볐다.
싹수없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가 진저 그웬이다. 그런 분이 제 휘하 부대장에게 존대를 할 리가 있나.
소대장들이 알아서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 준 덕에 엘리사는 격려사를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엘리사는 진저가 써준 격려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읊었다.
그란디아 궁인들이 딱하게 여겼던 유년기가 도움 되기도 한다는 게 신기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왕궁 도서관에 틀어박혀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며 지냈고, 그 덕에 암기는 자신 있었다.
격려사까지는 문제없었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그녀의 격려사가 끝나자 사내들이 하나둘 웃옷을 벗기 시작하더니 종내엔 연무장에 가득한 병사들이 모두 하의까지 탈의했다.
달랑 속옷 한 장만 걸친 그들을 본 순진한 공주님은 비명을 내질렀다.
“악!”
이번엔 분명히 들었다. 마크빌 경을 비롯한 소대장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이번엔 모른 척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용변을 볼 때도 이처럼 당황스럽진 않았다. 새삼 남편에 대한 분노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왜 저주를 받아서는!
부부는 몸이 바뀐 원인을 죽은 마물에서 찾았다. 성국에 의해 마물로 분류된 ‘기하스엘’은 3년 전까지만 해도 성수로 여겨졌다.
성국이 기하스엘을 대책 없이 풀어놓은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잠시 눈을 뗀 사이에 개체가 늘어났고, 개체가 늘어남에 따라 먹잇감이 줄어들었다.
기하스엘은 부족한 먹잇감을 보충하기 위해 인가로 내려와 사람을 공격했다. 죽어 나간 사람의 수만 수천에 달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가 그웬가가 터를 둔 란델이었다.
란델의 강력한 항의로 성국은 기하스엘을 포획하려 하였으나 거대한 데다 위험한 공격성을 지닌 만큼 포획 작업이 쉽지 않았다. 결국 성국은 기하스엘을 마물로 분류해 각 나라에 토벌을 허가했다.
한 달 전 수도 근경에 나타난 기하스엘은 다른 개체와는 달랐다. 다른 개체에 비해 열 배 더 크고, 백 배 더 위험했다.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 아무리 화살을 쏘아도 상처 하나 내지 못하는 가죽만으로도 위험했는데 부리를 쩍 벌리면 커다란 불덩이까지 튀어나왔다.
란델 왕은 마물을 잡기 위해 중앙군을 투입했지만 대대는 전멸했다. 왕은 결국 란델을 수호하는 4공작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발로 떠난 진저의 군은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공작가들이 무안하게도 빠르고 정확하게 마물을 토벌했다.
덕분에 백성들에겐 인망을, 왕에겐 큰 상을 받았다. 인망과 상만 받았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엿까지 함께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몸이 바뀐 이유는 기하스엘밖에 없었다.
대장들, 그리고 병사들마저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꼴깍, 마른침을 삼킨 엘리사가 소리쳤다.
“악…… 소리가 날 때까지 뛰어라.”
남편은 말했다. 정 안 되겠거든 뜀박질을 시키면 된다고. 그러자 사내들이 열을 지어 으! 하! 으! 하!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병사들에 이어 대장들마저 옷을 벗어 던졌다. 가장 가까이 있던 마크빌 경까지 옷을 벗자 그녀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대체 한겨울에 옷은 왜 벗는 거야. 다행히 마크빌 경은 하의까지 벗진 않았다. 그마저 벗어던졌다면 기절하고 싶어졌을 거다.
“오랜만에 함께 훈련하시겠습니까?”
마크빌 경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춥기도 했고, 뛰기도 싫었고 무엇보다 속옷만 입고 있는 사내들 곁에 다가가기가 꺼려졌다.
란델과 달리 엘리사의 모국, 그란디아는 성문화가 보수적인 나라였다. 속옷 바람의 사내들이 가득한 연무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발랑 까졌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이어 마크빌 경은 훈련 지시를 청했다. 훈련 지시까지 하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외롭고 고되게 자라긴 했지만 엘리사는 일국의 공주였다. 군대에서 무슨 훈련을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오래도록 고민했고 뛰고 있는 사내들은 죽을 맛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쉬지도 못하고 달렸는데 멈추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다 죽어가는 동안 엘리사는 책에서 본 수많은 훈련법을 떠올렸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기는 했지만 모두 흥미 위주였다. 군사 관련 서적은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소설 속에 어느 용사가 살기로 적군을 기절시키던 장면을 떠올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동료를 기절시키면 안 되지. 진저가 들었다면 기함을 할 만한 생각이었다.
마법사도 아니고 일반 병사가 살기로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다면 훈련을 시키는 게 아니라 그가 훈련을 받아야 할 거다.
‘그럼 대체 무얼…… 그런데 저건 뭐지?’
엘리사가 연무장 구석에 놓여 있는 박스 무더기를 가리켰다.
“저건 뭔가?”
“그게…….”
마크빌 경이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사과…… 입니다. 루펠라 아가씨께서 일전의 실수를 ‘사과’하신다고…….”
루펠라? 루펠라라면 남편의 의붓여동생이었다. 작고하신 시모의 조카로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양친을 잃어 그웬가에 입양되었다고 들었다.
대단한 말괄량이라던데 유학 중인지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녀가 사과를 보냈구나. 사과……. 사과?
엘리사가 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훈련은 저것으로 하지.”
“예?”
“저 사과를 가져오게.”
훈련에 사과를 쓴다니. 마크빌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으나 두말없이 사과를 구령대 앞에 대령했다.
엘리사의 박수 소리에 달리기를 멈춘 사내들도 호기심을 갖고 사과 박스를 주목했다. 그녀가 박스 속에서 사과를 꺼냈다. 그리고 명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를 베라.”
이것도 기를 이용해 적군을 기절시킨 용사가 나온 소설에서 본 건데, 용사는 날아오는 사과를 정확히 반절로 갈랐다.
그녀가 훈련 방식에 대하여 설명했다. 2인 1조로 조를 짜서 한쪽은 던지고 한쪽은 가른다. 들어본 적 없는 훈련 방식에 어리둥절한 사내들을 보고 엘리사는 시범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병사들을 보고 있던 소대장을 향해 사과를 던졌다.
뻑!
사과는 소대장의 뒤통수를 정확히 가격했다. 억, 소리와 함께 엎어진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당황한 그녀가 입을 가렸다.
‘소설에서 보니까 이런 건 막 한 손으로 잡고, 베고 그러던데…….’
하늘에 맹세코 고의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단한 사과에 맞은 소대장이 걱정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사내들은 이 특이한 훈련에 기함을 토했다.
이것은 동체 시력과 검의 정밀도를 높이는 정수를 훈련하기 위함인가!
마크빌 경은 소대장을 부축하기 위해 걸음을 떼던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과연 주군이라며 ‘훌륭한 훈련법입니다!’라고 감동했다. 엘리사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원래 그런 거 안 해? 그보다 저 사람 죽은 거 같은데…….’
아무도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 심지어 소대장 중 몇몇은 그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마크빌 경이 남은 사과 상자를 번쩍 들어 구령대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발에 걸리는 소대장을 보고 츳, 하고 혀를 찼다.
“한스, 그만 농땡이 부리고 일어나라.”
그러자 벌레처럼 꿈틀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던 사내가 구시렁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엘리사는 놀라움에 눈을 깜빡였다. 마크빌 경의 말처럼 그는 농땡이를 치려 수작을 부린 건지 아주 멀쩡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군인은 사기도 잘 쳐야 하는구나.’
* * *
엘리사가 해괴한 깨달음을 얻고 있는 그때, 진저는 속으로 쌍욕을 읊는 중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지루한 모임은 처음이었다.
계모를 피해 전장으로 달아났던 그때도 이런 거지 같은 일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차라리 연병장에서 죽도록 뺑이 치는 게 낫지 이건 정말 못해 먹겠다.
그는 네일 아트인지 염병 아트인지를 시연한다는 마담 캐롤라인을 말리지 않은 자신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긴 네일 아트 뭐시기가 두 시간 동안이나 손을 쿠션 위에 올려놓고 남편 밤일이 어쩌고, 자식 교육이 어쩌고 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 여자들은 손톱에 물감이나 찍찍 바르는 게 뭐가 좋다고 저렇게 하하 호호 하는 거야? 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 미친 짓을 돈 주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진저가 쉰 하고도 세 번째 쌍욕을 삼키는 사이, 시낭송을 마친 귀부인이 후련한 얼굴로 내려왔다. 파티에 참석한 여성들은 손으로 손뼉을 치지 못하니 입으로 소리를 냈다. 짝짝. 멋져요. 짝짝.
‘미친.’
시낭송을 한 귀부인은 홍조 띤 얼굴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수그렸다. 그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여성이었다. 진저의 일이라면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게일, 그 자식의 아내였다.
게일 포르테. 그러니까 포르테 공작가의 장남인 그는 저보다 이른 나이에 가문을 짊어진 진저에게 이상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안건을 발의할 때마다 별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반대부터 하고, 그를 헐뜯기 위해 눈이 벌겠다.
그렇다고 참아줄 진저던가. 그 또한 게일과 마주칠 때마다, ‘부친은 안녕하신가. 아아, 이거 미안하군. 안녕하실 리가 없지. 지병으로 고생 중이실 터인데’라며 약을 올렸다.
포르테 공작은 불같은 성미로 화병을 달고 사는 인사였다. 그러니까 진저는 그에게 ‘네 부친 염병은 좀 나았냐?’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게일은 파르르 몸을 떨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게일은 아직 부친의 작위를 잇지 못한 백작. 상대는 한 가문의 가주이자 4공 중 하나인 진저 그웬이었다.
말로도 힘으로도 이기지 못하니 게일은 언제나 호시탐탐 진저의 뒤통수를 노렸다.
진저는 작게 혀를 찼다. 포르테 백작 부인은 파티장에 들어선 이후로 한시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고 재잘거렸다.
제 남편이 어떠네, 드레스 하나로 쪼잔하게 굴어서 기분이 상했네, 말끝마다 남편 흉이었다. 남편 흉이 취미인 여자보다야 제 아내 쪽이 백번 나았다.
진저의 입가에 잠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자식은 저보다 나은 게 뭐 하나도 없었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피곤하겠군. 기분이 나아진 진저는 제 손가락 사이로 풍풍, 뿜어지는 아티스트의 콧바람도 견딜 만하다고 생각했다.
“완성입니다.”
진저는 결국 세 시간이 지나서야 완성된 네일을 보고 말을 잃었다. 엄지손톱에 그려진 꽃밭은 뭐고, 중지엔 그려진 웬 이상한 조각상은 뭐란 말인가. 아티스트는 자랑스럽게 ‘부군님을 그려 보았습니다’ 하고 답했다.
제가 이따위로 생겼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고, 굳이 중지에 그려 넣은 이유도 모르겠다. 남편은 하나같이 개 같으니 엿이나 먹으라는 건가.
진저는 화장실을 핑계로 일어섰다. 홀을 나서는 그를 본 마담 캐롤리안이 ‘찍히지 않게 조심하세요~’ 하며 주의를 주었다.
화장실을 찾기 위해 코너를 돈 진저는 자신의 어깨에 부딪혀 ‘아!’ 하고 소리치는 여자 때문에 인상을 구겼다. 먼저 부딪친 주제에 사과도 없었다.
게다가 제 얼굴, 아니, 아내의 얼굴을 가리키며 삿대질까지 하는 게 아닌가. 오늘 정말 제대로 날 잡았군.
“어머, 공주님.”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진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낭패다. 아내와 친분이 있는 여자인가. 여자는 노란 드레스 치마를 양옆으로 펼치며 무릎을 굽혔다.
“이런 데서 다 뵙네요.”
“그래.”
아내를 공주님이라고 칭하는 걸 보니 신분을 아는 모양이고, 나이를 봐도 한참 어려 보였다. 키만 멀대같이 클 뿐이지 얼굴엔 심술보 같은 젖살이 붙어 있었고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그는 일국의 공주를 오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이가 나쁜 건가? 하지만 아내는 누구와 척을 질 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만큼 말이 없으면 기어오르는 하녀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적당히 거리를 조절했고 상대를 배려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아랫사람에게도 상냥한 여자가 누군가에게 적의를 갖게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클라우디아 공주님께 안부 전할게요. 물론 엘리사 공주님의 놀라운 변화도 함께요.”
“그란디아 왕국의 공주는 내가 유일할 텐데.”
하. 여자는 헛웃음을 뱉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 앞에서는 언제나 벙어리처럼 가만히, 정말 가만히만 있던 여자였다.
그웬 공작이라는 비빌 언덕이 생겼다고 건방지게 구는 모양인데, 그 잘난 남편이 초야에마저 그녀를 찾지 않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와 함께 얼마나 웃었던가.
과거에 비앙카는 마음에 품었던 영식을 그녀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다. 사실 빼앗겼다는 것도 웃기다.
엘리사의 외모에 혹한 그가 비앙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뿐이지. 비앙카를 매력에 홀딱 빠뜨리고 사흘 밤낮을 울게 만든 그는 그란디아 왕국, 온 영애들의 우상이었다. 다정한 말씨,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품과 완벽한 매너. 그의 미소에 뒤집어지는 영애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를 사모한 건 비앙카뿐만이 아니었다. 레이라 부인의 차녀, 필리아 또한 그를 마음에 품었다. 그녀는 비앙카와는 다르게 마음을 전달하기까지 했다.
물론 무참히 차였지만. 소문으로는 아주 단정적으로 말했다고 했다. ‘내가 영애를 좋아할 일은 없어요’ 하고.
그 때문에 엘리사는 온 영애들의 적이 되었고 클라우디아와 필리아의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 몇 번은 화를 내기도 했지만, 레이라 부인이 제 딸을 위해 그란디아 왕 앞에서 훌쩍거린 뒤로는 화마저도 내지 못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진저는 느닷없이 약이 바짝 오른 비앙카를 보고 고개를 삐딱하게 젖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감히 제 아내에게 눈을 부라리는 꼴은 거슬렸다.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도 아니고 그는 사랑을 믿는 로맨틱한 남성도 아니었지만 엘리사는 제게 속한 사람이었다.
“저도 곧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초야는 어떠셨나요?”
진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을 본 비앙카가 만면에 미소를 띠웠다.
“남의 부부 초야는 알아서 뭐 하려고.”
그의 껄렁한 대꾸에 당황한 비앙카가 콧잔등을 실룩였다. 초야에까지 버림을 받아 막 살기로 했나 보지? 그녀는 팔짱을 끼며 하하, 웃음을 흘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너무 경계 마세요. 같은 그란디아 출신이 아닙니까. 서로 돕고 살아야죠. 뭐, 공주님의 마음이 편치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각하께서 초야에도 공주님을 찾지 않으셨다면서요? 아직 연인들도 정리하지 못하셨다고 들었는데, 힘내시기 바라요.”
그제야 진저는 아차 싶었다. 필요에 의한 결혼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 아내였다. 제 신부가 타인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했는데. 워낙 사교계를 꺼렸던 탓에 그들의 입방정을 쉽게 보았다.
그래도 결혼 후엔 이성과 따로 만난 적은 없었다. 물론 그간 바빠서 밤놀이가 줄어든 거지 아내를 배려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신경은 쓰였다.
진저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후, 뜨거운 숨을 뱉었다.
“이봐.”
“네?”
“두 팔이 잘려 나가고 싶지 않거든 다신 이 몸 앞에서 그따위 표정 짓지 마라.”
“뭐, 뭐라고요?!”
비앙카가 진저의 무례한 말에 파르르 떠는 사이 그는 그녀를 지나쳐 화장실로 향했다.
여자와 부딪친 탓에 아티스트가 열과 성을 다해 그려 넣은 중지의 그림이 찍혀 있었다. 그는 제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찍힌 부분이 묘하게 일그러져 마치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찬물에 손을 담그며 거울을 응시했다.
공주의 신분으로 저런 철부지에게마저 괄시를 당하고 산 그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 * *
“딱 절반으로 갈랐다.”
“누가 동태 눈깔 아니랄까 봐. 이게 절반으로 보이냐?”
루펠라가 보낸 사과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사내들은 신박한 훈련법에 신이 나 내가 더 정교하다느니, 맞추지도 못한 새끼도 있다느니 하며 낄낄거렸다.
하계 훈련이든, 동계 훈련이든 훈련 첫날은 언제나 지겹고 무식한 방법으로 몸을 단련한다. 올해 하계 훈련에선 검만 지겹게 휘둘렀고, 검을 지겹게 휘두르고 나면 활을 지겹게 쐈다.
주군은 올해 동계 훈련은 다른 때보다 더 빡셀 거라며 이를 갈았다. 추수감사절 모의 전쟁에서 최하위를 겨우 모면했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 넘게 쉬지도 못하고 뛸 때는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에 조부, 조모까지 부르짖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다른 때보다 즐거운 훈련이었다.
던지는 이가 단련된 군인이다 보니 속도나 힘이 평범한 이들과는 달랐고, 사과를 정확히 가르기 위해선 정확한 곳에 재빨리 검을 휘둘러야 했다.
“저 새끼는 아예 맞추지도 못했어!”
“껍질 벗기냐? 미친 자식!”
저 사람들은 욕 없이는 말을 못 하는 걸까? 엘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저들보단 남편이 나았다. 그가 쌍욕을 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간혹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면 ‘제길’이라든지 ‘젠장’ 하고 중얼거리는 건 보았지만, 저들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몰랐다. 귀족 자제로 태어나 공작이 된 그가 사실은 군인들보다 욕에 능한 남자라는 것을.
그녀가 남편의 평가를 올려주던 그때, 진저는 네일 아트가 찍혔다고 다시 받기를 권하는 귀부인들을 향해 불경 외듯 쌍욕을 읊는 중이었다. 물론 속으로.
사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동이 나고 말았다.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사과가 모두 동이 나자 엘리사는 다음 훈련법에 대하여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처음에 그러했듯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고무줄놀이를 하라고는 할 수 없잖아.’
그녀가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은 여자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 영감을 얻어 필살기를 개발했지만, 이건 엘리사가 생각하기에도 힘든 일이었다.
마지막 사과 하나가 갈라지자 엘리사는 결국 훈련법을 재탕하기로 했다. 이번엔 레몬을 갈라라. 사과에 이어 레몬까지. 무슨 잼 만드는 것도 아닌데 군인들은 역시 주군이라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레몬은 겉이 매끈매끈해 사과보다 자르기 어려운 과일이었다. 사실 얻어걸린 거였고, 주방장이 선물로 들어온 레몬이 너무 많다며 버려야 하나 고민하던 것이 떠올랐던 것뿐이었는데 박수갈채가 터지니 조금 민망했다.
병사들은 열심히 레몬을 날랐다. 그웬가에 진상되는 레몬이니만큼 최상등품이었지만 주방장은 그저 썩히지 않아 다행이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레몬으로 훈련을 시작한 이들이 악악,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레몬은 사과보다 과즙이 풍부한 과일이다. 레몬을 가르자마자 신 과즙이 눈에 튀는 것이었다.
이건 사막의 모래 폭풍을 견뎌내기 위해 눈을 단련하라는 뜻인가!
병사들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주제에 엘리사의 훈련법을 상기하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역시 주군! 다른 공작들과 달리 어려서부터 병영에서 구르시더니 이런 특별한 훈련법을 생각해내셨구나! 엘리사는 뭣도 모르고 좋아하는 병사들을 보며 흐뭇해하였다.
땀 냄새도 과일 향기에 묻혀 사라지고, 사내들의 열기 때문에 추운 줄도 모르겠다. 뭐, 남편의 육체가 워낙 건강한 것도 이유겠지만. 엘리사는 연무장에 가득한 레몬 향기를 맡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레몬은 엄청난 속도로 소진되었다. 소대장들은 한 알도 아깝다며 ‘제대로 못 벴으면 다시 베, 이 새끼야’ 하고 윽박을 질러댔다. 오늘 평생 들었던 욕보다 더 많은 욕을 들었지만, 사람은 역시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자꾸 듣다 보니 어쩐지 구수하게 느껴졌다.
“저……. 주인님. 차와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군인들을 위해 준비된 음료와 간식이 간이 테이블에 마련되었다. 하녀가 작은 쟁반에 쿠키와 초콜릿, 그리고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엘리사도 익숙한 하녀였다. 엘리사를 담당하는 하녀로 덩치가 하도 작아서 많아도 열댓 되었겠다, 했는데 자신과 동갑이었다.
엘리사는 범 앞에 놓인 토끼처럼 긴장한 그녀를 보고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 앞에서는 재잘재잘 수다도 잘 떨던 아이가 남편 앞에선 오금이 저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헙!”
긴장을 풀라고 웃어준 건데 하녀는 사색이 되었다. 엘리사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자 하녀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노라 싹싹 빌었다.
“아니, 저기…….”
“용서해 주세요!”
하녀는 울음보까지 터뜨려가며 손을 빌었다. 엘리사는 손을 내저었다. 대체 평소에 어떻게 처신했으면 미소 한 번에 하녀가 눈물을 줄줄 흘린단 말인가.
잠시 올라갔던 그에 대한 평가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두통이 다 생길 지경이라서 관자놀이를 꾹꾹 주물렀다.
사실 그는 엘리사가 보기에도 대단한 미남이었다. 워낙 이성에 관심이 없어 미남과 추남에 대해 누가 더 낫네 따질 마음은 없지만, 그의 몸으로 저택을 거닐 때마다 하녀들의 시선이 등 뒤로 달라붙었다.
힘없이 한숨을 뱉는 이들도 있었다. ‘저렇게 잘생겼는데 왜 성격은 저 모양일까?’ 하고 그녀들이 몰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내 말이.’
성격만 좋았더라면 그의 눈길 한 번 받으려고 절절매는 여자들이 란델에서 그란디아까지 이어질 터였다.
엘리사는 그와 결혼한 후, 그가 의외로 여성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란디아에서의 경험으로 인기 있는 남자에게 애정을 받거나,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여자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냉랭한지 잘 알고 있었다.
사교 파티 초대는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그와 함께 나서야 하는 자리는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엘리사를 헐뜯기는커녕 측은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남편의 성격 때문이라는 것에 엘리사는 내기를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진저도 자기 사람에겐 제법 다정했다. 손을 올리지도 않았고 호통을 치지도 않았다. 결혼하기 전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지금까지 남편 역을 성실히 수행했다.
“왜 어린 애를 울리고 그러십니까, 주군.”
“기사도요. 기사도.”
소대장들이 거의 기어나가는 하녀를 보며 츳츳, 혀를 찼다. 엘리사는 제 잘못이 아닌데도 묘하게 미안해져서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싹싹하고 예의 바른 하녀를 울린 건 남편의 평소 만행이지만, 그래도 죄책감은 들었다. 다른 하녀 품에 안겨서까지 훌쩍거리는 그녀를 보며 엘리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처음엔 남편이 무서웠다. 사실은 지금도 간혹 거울을 볼 때 놀라곤 한다.
하녀가 울면서 나간 직후, 병사들은 잠깐 휴식을 했다. 사과를 벨 때는 손목 스냅이 중요하다, 레몬이 눈에 들어가니까 눈알을 빼서 닦고 싶을 정도로 시리다는 둥의 수다가 오갔다.
엘리사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는 뜻밖의 사실을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일반 병사들은 그가 어려워 다가오지 못하지만, 직급이 꽤 되는 소대장들은 그를 제법 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걸어오는 말이 죄다 여자와 관련된 이야기라 그렇지.
“하이디가 편지를 줬다고요. 주군, 저 내년에 장가갑니다.”
“하이디? 바켄 주점의 하이디?!”
“하이디라고?!”
누군가 하이디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꺼내자 정신없이 입속으로 간식을 욱여넣던 이 중 몇몇이 꽥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멱살을 잡고 연무장 흙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네가 그녀에게 수작을 부리는 그놈이구나!”
“이거 왜 이래! 하이디는 고릿적부터 내 여자였다고!”
소대장들끼리 이 새끼 오늘 죽었어. 저 자식 오늘 돌아가신 부모님 뵙게 될 줄 알아라, 하며 뒤엉켜 뒹구는데도 아무도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되레 누가 이기는지에 대하여 내기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와 배를 맞췄다고 주장하는 남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등에 점이 있다느니, 배꼽 모양이 어떻게 생겼다느니 소리치던 소대장들이 서로 멱살을 잡았다.
놀란 건 엘리사 하나였다. 여기는 군대고, 자신은 남편의 몸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들의 가장 상관이란 말이다. 그런데 상관 앞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면서까지 쌈박질을 하다니.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잠시 연무장을 나갔던 마크빌 경이 돌아왔다. 그는 소대장들이 바닥을 뒹구는 모습을 흘끗 쳐다보고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
“창고에 있는 레몬을 모두 가져와도 일 인당 한 번씩이 고작입니다.”
부대장인 그는 소대장들의 싸움을 말릴 생각이 없는지 다음 훈련에 대해 논의를 청했다.
엘리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을 구르는 이들을 가리키자, 마크빌 경은 ‘이번엔 누구를 두고 싸우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바켄 주점의 하이디…… 라던데.”
“아아, 그녀요? 애교도 있고 가슴도 크죠. 싸울 만합니다.”
“아?”
“저번에 한번 보셨잖습니까. 엉덩이가 기특하다고 하셨던 점원입니다.”
엉덩이가 기특해? 엘리사는 기가 막혀 실소를 흘렸다. 조금 거칠고 신경질적이라고만 생각했지 여자 엉덩이를 기특하게 여기는 사내일 줄은 몰랐다. 엉덩이가 기특하지 않은 나와 결혼해서 어쩌나. 그녀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다음 훈련은 어찌할까요?”
“앵두로 하든가, 체리로 하든가.”
엘리사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 * *
해가 저물고 나서야 저택에 돌아온 진저는 도착하자마자 연무장을 찾았다. 보통 첫날 훈련은 밤늦게까지 이어지게 마련인데 연무장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사람이 없는 거로도 모자라 달큼한 향기가 진동했다. 땀 냄새로 토기까지 올라와야 하는 곳에 달달한 향기가 웬 말이란 말인가.
그는 빨래 바구니를 껴안고 종종걸음으로 막사를 나서는 중인 하녀를 불러 세웠다.
“돌아오셨어요, 마님?”
“훈련이 벌써 파했나? 병사들은?”
“아마 뒷산에 계실 거예요. 버켄…… 뭐라더라 하는 걸 두고 대련을 하신다던데. 소대장님들은 모두 뒷산으로 향하셨어요. 병사분들도 구경하시겠다면서 따라가셨고요.”
진저가 이를 갈았다. 이 자식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그는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고 내저로 향했다.
귀찮은 일에 신경 쓰이는 일, 마지막엔 분통이 터지는 일까지 겪은 그는 호흡을 가다듬을 정신도 없었다.
입고 있던 코트를 거칠게 벗어 던지고, 목을 죄던 단추를 풀며 제 침실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욕실에서 작은 물소리만 흘러나왔다.
그가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대체 오늘 뭘 한 거냐고 쏘아붙이려던 그는 굳어버렸다.
아내가 거품으로 제 가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황급히 가슴을 가리긴 했으나 진정하고 보니 가슴을 가릴 필요도 없었다. 이 몸은 원래 그의 몸이니까.
그녀가 민망한 듯 거품을 치우고 자신을 찾은 연유를 물었다. 침착을 가장했지만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볼은 감춰지지 않았다.
“……일단 그 샤워 캡은 좀 벗지.”
“하지만 머리카락이 젖는걸요.”
“젖어도 되니까 벗어.”
제 머리에 쓰인 분홍색 땡땡이 샤워 캡을 본 진저는 황망함에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사람의 기막힘이 한계치를 넘으면 화고 뭐고 말부터 잃는구나. 그는 지친다는 듯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미쳐 버리겠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진정이 된 그는 일단 씻고 나오라며 욕실을 나섰다.
욕실 문이 닫히자 엘리사는 꿍얼대며 샤워 캡을 벗었다. 머리가 곱슬이라 감은 채로 자고 나면 새집이 된단 말이야. 아무리 바싹 말려도 그렇다고. 그의 체면이 상할까 봐 일부러 불편해도 샤워 캡을 쓰고 있었는데.
목욕을 싫어하진 않지만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감을 순 없었다. 날씨도 날씨이거니와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거품만 닦아낸 그녀는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하고 준비해 놓았던 가운과 속옷에 손을 올렸다.
없던 게 생기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안정감도 없고. 다음엔 착 달라붙는 속옷을 구매할까.
가운에 매듭까지 묶고 욕실을 나선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남편을 보았다. 인상이 흐리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얼굴도 들어 있는 영혼이 바뀌니 제법 날카로워졌다. 그의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은 그녀가 다시 한번 자신을 찾은 연유를 물었다.
오전은 함께 보내지만 저녁은 휴식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녀나 그나 서로의 휴식 시간을 방해한 적은 없었다.
진저가 가까스로 화를 참는다는 듯 후우, 쓴 숨을 뱉었다.
“훈련이 너무 이르게 끝났더군. 참관하지 않았소?”
“오후에 휴식이 있기 전까지는 제대로 훈련을 했어요.”
“내 병사들이 감히 내 앞에서 농땡이를 부릴 리도 없고. 왜 이렇게 일찍 파한 거요.”
“버켄 주점의 하이디를 걸고 대련을 한다던데요.”
버켄 주점의 하이디가 무엇이길래 뒷산까지 가서 대련을 한단 말인가.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이 엉덩이가 기특하다고 했던 점원이요.”
“뭐라고?”
“엉덩이가 기특한 하이디 말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던데요.”
말문이 막힌 진저는 그저 멍하니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녀석들과 토벌을 가기 전 주점에 들려 술잔을 기울였다.
점원이 애교가 넘치는 데다가 가슴이며 엉덩이며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의 크기라 유심히 봤던 것도 같고.
그러다 그녀 쪽에서 먼저 유혹을 해왔다.
「각하를 피를 부르는 남자라고 부른다면서요? 전쟁의 신이라는 별명도 있고…….」
「리스트럼(란델의 수도)의 미친개라고도 하지.」
「제게도 사내들이 붙인 별명이 있어요.」
그녀가 진저의 귓가에 야릇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버켄 주점의 명기.」
「…….」
「맞는지 확인해 주시겠어요?」
노골적인 유혹이었다. 그리고 진저는 여성의 유혹을 마다하는 머리 굳은 남자는 아니었다.
버켄의 명기. 확실히 그녀에게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뒤통수가 싸했다.
엘리사는 란델의 미친개를 눈치 보게 만든 최초의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리 준비해 놓았던 차를 마셨다. 좀 전에는 어이가 없어서 살짝 화가 났는데 생각해 보니 자신이 화낼 것도 없었다. 필요에 의한 결혼이고, 그들 부부 사이엔 애정이 없었다.
진저는 그저 간섭하지 않는 처가와 아내가 필요했고 자신은 왕궁에서 나와 평안한 삶을 영위하길 바랐다.
‘정략결혼이 다 그렇지. 그래도 신혼이라고 애인을 만들지도 않았고. 가슴이나 엉덩이가 기특하다며 내게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도 아닌데 뭐.’
마담 캐롤리안의 파티에서 아내를 깔아뭉개는 여자를 만난 뒤, 그는 생각했다. 사랑을 줄 순 없어도 배려만큼은 해주자고.
진저는 이 상황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며 어깃장을 놓아야 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오늘 파티에서 부인의 친구를 만났는데 말이오.”
“친구요? 전 친구가 없는데요.”
진저는 제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그렇지. 저를 깔아뭉개는 상대를 친구라고 부르진 않는다. 여성들은 안면만 트면 모두 지기네 벗이네 하기에 너무 쉽게 생각했다.
남편의 영혼이 들어 있는 몸은 22년을 함께한 자신의 몸이었다. 당황할 때 어디가 어떻게 물드는지, 기쁠 때는 어떻게 되는지 제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 몸의 귓불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저는 당황할 때 귓불이 발개진다.
“괜찮아요.”
“……아아, 그래.”
“그란디아의 공주들은 왕궁에서 나갈 일이 없어요. 웬만한 교육은 모두 왕궁 내에서 받고, 파티가 아니라면 내성을 나서지 않죠. 전 파티에 참가할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모후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챙겨주실 분이 안 계셨어요. 조모께선 몸이 몹시 안 좋으셨고요.”
그란디아 왕께서 레이라 부인에게 엘리사의 사교 활동을 일임한 후엔 더더욱. 가끔 나서게 되면 클라우디아, 필리아 자매들이 장난을 쳐놔서 곤란한 일투성이였다. 그러다 보니 파티를 꺼리게 되고, 또래의 여성을 만날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요?”
“음?”
“그녀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나요?”
무슨 일을 했다기보다는 거슬렸다. 진저가 아아, 하며 말끝을 흐리자 엘리사는 대충 그녀가 누군지 예상할 수 있었다.
미트리샤나 칸나, 아니면 비앙카 정도겠지. 비앙카가 란델에 친척을 두고 있다고 들었다. 그녀일 것이다.
그란디아의 영애들이 저를 멸시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는 공주였다. 공주인 자신을 대놓고 깔아뭉개는 사람은 그 셋 정도가 다였다.
비앙카는 레이라의 장녀, 클라우디아와 사이가 좋아서 자주 왕궁에 들어왔다. 올 때마다 어찌나 사람을 들볶던지 한번은 제대로 화가 나서 클라우디아에게 물었다.
「네가 시켰니?」
그때가 아마 열 살쯤이었던 것 같다. 어린아이가 처세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있는가. 궁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클라우디아는 억울하다며 눈물을 터뜨렸고, 레이라 부인이 부왕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
당신의 딸이 내 딸을 구박하니 나는 더 이상 궁에 있을 수 없다고. 그 일로 엘리사는 왕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리고 포기했다.
전하께선 내 아버지가 아니라 레이라 부인의 연인이시구나. 그 이후로 엘리사는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애정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동화 속의 여자아이는 구박을 받으면 배도 곯는데 그래도 자신은 배를 곯진 않았다.
궁인들도 친절했다. 자주 오시진 않지만 외조부나 이모들도 기념일엔 꼭 선물을 보내주셨다. 비록 매년 똑같은 곰 인형이었지만.
“죄송해요. 제 탓이에요. 비앙카는 저를 싫어하거든요.”
“그게 왜 부인의 탓이오?”
“그녀가 저를 싫어하니 당신에게…….”
“무례를 범한 건 그 여자지 당신이 아니잖아. 그런데 왜 사과를 하는 거요?”
“그야 당신이 불쾌하셨을 테니까요.”
“부인.”
진저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당신 잘못이 아닌 건 사과하지 마. 그리고 앞으로 또 그런 여자가 있으면 주둥이를 잡아채.”
“네?”
“당신은 그란디아의 공주이기 이전에 내 아내야. 내 아내를 모욕하는 건 나를 모욕하는 거고. 그깟 주둥이 잡아 찢는다고 해도 내가 당신을 지켜줄 테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말을 끝낸 진저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나서려던 그는 맹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는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당신 엉덩이도 꽤 훌륭해.”
엘리사가 항의할 새도 없이 ‘좋은 꿈 꾸시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아 허공을 보고 있던 그녀가 주먹을 꾹, 쥐었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피곤해서 저녁도 걸렀는데 속이 왜 이럴까.
그녀가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목욕할 적만 해도 노곤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몸이 붕 뜬 것 같았다.
‘위험해…….’
침대에 누운 엘리사가 천장을 보며 계속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 * *
다음 날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침실에 든 부부는 서로 할 일에 집중했다. 그는 기사단 훈련 메뉴를 짜며 이를 갈았다. 어제는 당황해서 물러났지만 오늘은 어림도 없었다. 곡소리 날 때까지 돌려주지, 망할 자식들.
새벽 조례를 다녀온 아내에게 물은 결과 어제 싸움의 승자는 한스였다. 다들 눈이며 광대, 혹은 쇄골이나 손목에 멍을 달고 있었다는 말에 진저는 급히 냉수를 찾았다.
소대장 이상 직급을 가진 이들은 진저가 거시기에 털도 나지 않았던 시절부터 어울려 다니는 놈들이었다. 가벼운 주먹다짐은 어디에서나 있었다.
하지만 전투 시엔 굉장한 단결력과 집중력을 보여서 어느 정도 선만 넘지 않으면 묵인해 주었다.
게다가 어제 동계 훈련에 참여한 병사들은 모두 영지에서, 혹은 타국에서 저와 대장들이 직접 뽑은 인재들로 그저 그런 병사들과는 달랐다. 사소한 전투부터 한 나라의 존폐가 달린 전쟁까지 함께 달려온 이들이다.
하지만 훈련을 게을리한다면 말이 다르다. 군의 총수가 한 달이나 두문불출하였으니 기강이 해이해질 수밖에. 그렇다고 아내에게 매일 훈련에 참관하라고 할 순 없었다.
진저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엘리사와 진저의 시선이 방문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리고 아담한 숙녀 하나가 엘리사를 향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어디 숨겼어! 어디에 숨겼냐고!”
자세히 보니 숙녀라기보단 소녀에 가까웠다. 양 갈래로 딴 머리를 돌돌 말아 정수리에 고정한 그녀는 목까지 붉어진 채로 진저, 그러니까 엘리사의 멱살을 잡았다.
“무슨…… 앗!”
“루펠라!”
엘리사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진저는 버럭 소리쳤다. 그제야 엘리사의 옷깃에서 손을 놓은 그녀가 진저의 영혼이 들어간 엘리사의 육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구? 아, 새언니?”
새언니? 엘리사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제 몸과 마주한 루펠라를 쳐다보았다. 저 소녀가 남편의 의붓여동생이었다. 루펠라 그웬. 별명은 그웬가의 광견. 엘리사가 켁켁, 기침을 하며 옷깃을 쥐었다. 혹여 또 멱살이 잡히지 않을까 경계한 것이다.
“우리 오빠 같은 이상한 남자와 결혼해 줘서 고마워요. 인사는 나중에 해요. 볼일이 있어서.”
루펠라가 다시 몸을 돌려 엘리사를 노려보았다.
“그 사람, 어디에 숨겼어?”
“누굴 말하는 건지……?”
“어디서 개수작 질이야?! 유학 다녀오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 지긋지긋한 유학 생활을 견뎠는데 나 없는 새에 홀랑 숨겨놔?! 오빠 네가 이러고도 사람이야?!”
엘리사는 당황한 눈으로 진저를 바라보았다. 진저가 한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일투성이인데 저 계집애까지 돌아오다니.
일단 이 상태에서 아내를 저 미친개와 마주치게 할 순 없었다. 지적 능력은 저 아래 여섯 살배기와 흡사한 주제에 이상하게 감이 좋은 녀석이다. 게다가 해괴한 마법에 심취해 있기까지 했다.
진저가 호출 줄을 당기자 이미 상황을 예측하던 집사 무리가 들어왔다.
“아가씨께서 많이 흥분하신 모양이니 별실로 모셔라.”
진저의 말에 집사들이 그녀의 양팔과 양다리를 붙잡았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몹시 신속한 대처였다. 그녀가 집사들에게 붙들려 나가자 침실은 다시 적막을 찾았다. 한바탕 폭풍에 놀란 엘리사가 계속해서 숨을 홉홉, 들이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요?”
“……라마즈 호흡이요.”
“라마즈 호흡?”
“그런 게 있어요.”
평범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이런 당혹스러운 경우는 처음이었다. 엘리사는 격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시 숨을 홉홉 들이켰다.
진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 아내를 뒤로한 채 별실로 향했다.
‘그놈을 내려보낸 걸 어떻게 안 거지? 저택에 사람을 심어 놓았나?’
아니, 그보다 유학원의 총괄 책임자와 연락을 취한 게 열흘이 안 됐다. 그때까지 기숙사에서 얌전히 지낸다던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란델에 들이닥칠 수 있단 말인가.
‘약삭빠른 녀석. 이미 총괄 책임자를 매수해 놓았군.’
진저가 신경질적으로 별실 문을 열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루펠라는 의붓오빠가 아닌 낯선 새언니가 들어온 걸 보고 츳 혀를 차며 다시 주저앉았다.
“나 좀 달래보라던가요?”
진저는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루펠라는 그와 얘기할 마음이 없는지 계속해서 ‘오빠가 숨긴 거야, 도망친 거야? 아니, 내가 뭐 어때서?!’ 하고 중얼거렸다. 어떻지. 많이 어떻지.
진저는 대꾸하지 않으려 애썼다.
“얘기 들었어요. 유학 중이라고요.”
“네. 3년만 참으면 결혼시켜 준댔거든요.”
“내가 언제.”
“네?!”
“아니, 오빠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데요.”
억울하다. 그는 그놈과 결혼시켜 준다는 말을 실수로도 한 적이 없었다. 의붓누이이긴 하나, 그래도 호적상 유일한 직계 가족이었다.
뭐, 물론 그가 호적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는 아니지만 어디 가서 제 가문이 모욕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루펠라가 결혼을 시켜 달라고 조르는 그는 평민이었다.
“그 사람도 너…… 아니,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어 하나요?”
감정이 휘몰아치니 말까지 헛나왔다. 그의 말에 루펠라가 눈을 희번득 까뒤집으며 ‘그럼요! 당연하죠!’ 하고 답했다.
진저는 고민했다. 저 계집애가 ‘그럼요, 당연하죠’의 뜻을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이 알기로는 그는 루펠라에게 일말의 관심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나랑 껴론해’, ‘우리눈 여닌이야!’ 하며 쫓아다녀서 귀엽게 여겼을 뿐이지, 루펠라가 다 크고 나서는 학을 떼며 도망 다녔다. 그곳으로 내려가기를 먼저 청한 이도 그였다.
대체 뭔 자신감인지.
루펠라는 진저의 미심쩍은 시선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말을 들어보진 못했지만 눈을 보면 알아요.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한단 말이에요.”
“착각일 수도 있어요.”
“착각이 아니에요! 재작년에 내가 크게 다칠 뻔했는데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해 줬다고요. 그리고 말했어요. 내가 무사하면 됐다고.”
결국 진저는 대화를 포기했다. 설득한다고 해서 들어먹을 계집애였다면 일찌감치 설득하였을 것이다. 설득은커녕, 제발 얌전히 있어 달라고 애원을 해야 했다.
그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 계집애를 멀리 치워 놔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놈과 결혼시켜 주겠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데 언니.”
“언니?”
“언니죠. 우리 오빠와 결혼했으니까.”
진저는 픽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붙임성 하나만큼은 훌륭했다. 몸이 원상태로 돌아온다면 아내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슴 진짜예요?”
그러더니 진저의, 아니, 엘리사의 가슴을 덥석 잡았다.
“진짜네……. 뽕인 줄 알았거든요.”
정정한다. 몸이 원상태로 돌아가 봐야 저 정신머리를 싹 재정비하지 않는 한 누구와도 잘 어울릴 수 없을 것이다.
진저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볼을 사정없이 늘렸다.
“아, 아하오. 아흐아우오(아, 아파요. 아프다고요)!”
* * *
그날 오후. 복도를 거닐던 엘리사는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을 보고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그녀였다. 남편의 의붓여동생. 처음엔 당황해서 인사도 못 했지만 그의 육체를 맡고 있는 만큼 상냥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의 남매는 모두 사이가 좋았다.
엘리사와 마주친 루펠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치켜떴다.
“뭐야?”
“밥은 먹었니?”
엘리사는 오빠나 동생이 없어서 실제 남매 관계를 몰랐다. 진저 남매는 다정한 말보다는 다정한 쌍욕이 익숙한 관계였다.
“왜 이래, 징그럽게.”
엘리사가 어벙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침없이 발을 움직이던 루펠라가 잠깐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새언니 몸매 죽이던데?”
그 죽이다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뜻은 아닌 것 같았다. 엘리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엿새 후. 그란디아 왕국.
왕의 유일한 적자인 엘리사가 타국으로 시집을 간 뒤, 레이라 모녀는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엘리사의 남편이 대륙에서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란델국, 그것도 4공 중 하나인 그웬 공작이란 건 배가 아프지만, 초야에도 남편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는 소식에 모녀는 깔깔 하고 천박하게 웃었다.
“눈, 코, 입 멀쩡하면 뭐해요. 재미가 없는데. 침대 위에서도 목석처럼 누워만 있을걸요?”
레이라 부인의 차녀 필리아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자 클라우디아가 동조했다.
왕의 관심은 친딸인 엘리사보다 자신들이 더 많이 받았는데, 그놈의 정통성이 뭐라고 사신 접대나 국가적인 파티가 있을 땐 회합장이 있는 본궁 출입을 삼가야 하였다.
전하의 곁엔 늘 그녀가 있었다. 그들 자매가 가장 원하는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졌으면서도 언제나 무관심한 표정으로.
클라우디아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쿠키를 집었다.
“참, 비앙카에게 편지가 왔다면서?”
여동생의 질문에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년기엔 같은 여자를 싫어한다는 동지애로 제법 잘 지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란델에 갔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계집애의 소식도 있어?”
“아직 열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가져와 보거라.”
모친마저 흥미를 보였다. 몸을 일으킨 클라우디아가 아무렇게나 버려두었던 비앙카의 편지를 가져왔다.
레터 나이프로 봉투를 뜯은 그녀가 종이를 들고 중얼중얼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남편을 믿고 얼마나 오만방자한지 몰라요.”
레이라 모녀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