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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두 명의 천덕꾸러기(1권) (1/31)

    레이디 비스트 1

    1장 두 명의 천덕꾸러기

    그의 이름은 진저다. 어릴 적 별명은 물어 무엇하겠는가. 당연히 생강. 공작가의 유일한 아들이 어째서 이런 해괴한 이름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건 그의 출생이 그릇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그웬 공작은 평소에도 막돼먹은 인사였다.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후리며 다녔고, 그날도 황궁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괜찮은 여자 한 명을 낚아챘다.

    ‘얼굴도 이 정도면 반반하고 교양도 얼추 갖춘 것 같고. 음, 좋았어. 너야.’

    공작은 맨정신에, 여자는 술에 취해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쿨하게 헤어졌다…… 면 좋았을 테지만 하룻밤 불장난은 여자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만들었다.

    그래, 오점. 여자는 먼 나라의 공주였다. 그리고 공주는 처녀의 몸으로 애를 뱄다.

    공주의 부모는 진노하였으나 그렇다고 자식을 버릴 순 없었다. 그래서 손자를 버리기로 했다.

    공주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임신 기간을 보내고 남몰래 출산하여 아이를 그웬 공작에게 떠맡겼다.

    기억도 나지 않는 날의 실수로 아들을 얻게 된 그웬 공작은 당황스러웠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당황 후엔 분노, 분노 후엔 원망. 원망의 대상은 자신이었다.

    공작 부인은 대단한 집안의 고명딸이었으나 석녀였다. 제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이런 끔찍한 방법으로 자식을 얻은 걸까.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패배감으로 그녀의 마음은 병들어 갔다.

    부부가 고용인의 피를 말리는 긴 전쟁에 돌입했다. 공작은 공작 부인을 외면했고, 공작 부인은 공작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그 전쟁 사이에서 아이는 방치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일 이후 그웬 공작이 피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아이는 사생아였으나 공작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비록 가문 안에서 학대에 가까운 폭언을 듣고, 가문 밖에선 뭇 사람의 비웃음을 들었지만 어쨌든 공작가의 일원으로 자랐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그렇게 자란 아이는 후에 어떠한 어른이 될까?

    진저는 몹시 비뚤어진 아이였다. 이따위 인생을 선사해 준 세상에 분노를 품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그래서 여자와 거리를 두었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부친의 여성 편력을 줄줄 꿰고 있는 아이가 진저였다. 여자에게 마음을 주진 않았지만, 아무리 여자가 꼴 보기 싫어도 가끔은 필요하다.

    그는 공작만큼 바람둥이가 되었다. 질은 더 낮았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주제에 제 마음은 일절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공작보다 더 비상한 능력을 갖췄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오로지 살기 위해 이 악물고 능력을 길렀으니까.

    진저가 태어난 지 20년이 되던 해. 볼 때마다 피 터지게 싸워댄 공작 부부는 한날한시에 사이좋게 세상을 떠났다.

    모두 불운한 사고라고 알고 있는 그날의 진상은 오로지 진저만이 알고 있는 가문의 치부였다. 술에 취한 공작 부인이 공작을 붙잡고 절벽에 뛰어든 것이다.

    ‘제법이잖아. 그 여자로서는 최고의 복수군.’

    비운의 어린 시절을 보상하려는 듯 하늘은 진저에게 관대했다.

    부친의 화려한 외모를 물려받은 진저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선명한 적발과 적안은 저 멀리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얼굴뿐 아니라 수많은 전투와 훈련으로 다져진 몸은 여성들의 환호를 불러왔다. 공작가 영랑이 아니었더라도 떵떵거리고 살았을 외모였다.

    문제는 성격이 워낙 냉소적이고 호전적이란 것이다. 더욱이 그는 웃으면서 타인을 까내려도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얄미운 인사였다.

    그렇게 6년.

    벌이는 사업마다 성공했고, 진저의 군대는 패배를 몰랐기에 수많은 콩고물이 떨어졌다.

    란델 왕국의 네 공작가 중 만년 최하위에 머물렀던 그웬가는 진저로 인해 승자의 금관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 * *

    불행한 아이는 여기 또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사였다. 그란디아 왕국의 유일한 적자. 왕은 자애롭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나 우유부단한 왕국 제일의 사랑꾼이었다.

    바람둥이라는 뜻은 아니고 한 여자에게 빠진 뒤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뒤고 양옆이고 그 여자 외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자식인 엘리사에게는 간간이 애정을 내비쳤으나 그마저도 그 여자가 없는 곳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왕비는 몸이 약했다. 아이를 낳은 뒤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엘리사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왕비를 아는 이들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말했다.

    왕은 그녀와 결혼 전부터 다른 여성에게 빠져 있었다. 하찮은 신분, 그것도 남편과 사별한 과부.

    왕의 모친과 신하들은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뒤집어졌다.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꼴을 볼 바에야 이대로 바다에 뛰어들겠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결국 왕은 모친이 정해 준 여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왕비에게서 예쁜 딸까지 보았다.

    그렇다고 왕이 연인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백작 부인이라 불렸던 그 여자는 평민의 신분으로 백작의 옆자리를 꿰찬 대단한 요부였다.

    ‘왕도 사내인데 별거 있어? 미래를 누가 장담해. 내가 왕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것이다. 백작 부인은 왕비는 아니었지만 왕비 비슷한 것이 되었으니까.

    왕이 상사병을 앓더니 오늘내일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자식이라곤 엘리사 한 명밖에 없는 마당에 이대로 꼴딱 숨이 넘어가면 호시탐탐 왕좌를 노리고 있는 왕의 숙부가 왕국을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그는 폭군의 싹이었다.

    왕은 비록 사랑에 미쳐 날뛰는 망아지였지만 마음은 약했다. 그건 흉년에 나라 창고를 개방하는 일쯤은 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결국 모친과 신하들이 왕의 상사병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그래도 왕비는 안 되지. 애첩 자리 정도는 눈감아주겠다.”

    왕후의 허락이 떨어지자 백작 부인은 제 자식들을 줄줄이 왕궁으로 데리고 들어와 왕비궁 다음으로 큰 궁을 꿰찼다.

    마침내 그녀는 왕비는 아니지만 왕비만큼의 권한을 행사하는 여자가 되었다.

    엘리사는 여덟 살에 모친을 여의고 계모를 만났다. 계모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찌나 똑같은지, 전 부인의 자식에게 있는 것은 죄다 빼앗아 제 자식에게 주었다.

    왕은 몰랐는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날마다 말라가는 공주를 외면했다. 그래도 어린 엘리사는 씩씩했다.

    돌아가신 모친은 이 부당한 대우를 견디게 해줄 만큼 커다란 애정을 주고 가셨다. 조모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었다. 가끔 백작 부인, 아니, 레이라 부인의 침실에 나타나 상을 뒤집어엎었다.

    “네가 내 손녀를 홀대해?!”

    하지만 할머님의 보호는 얼마 가지 못했다. 노쇠를 이기지 못한 할머님은 깨어 있는 날보다 눈을 감고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이때다 싶었는지 레이라 부인과 그녀의 딸들은 대놓고 엘리사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엘리사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말 없고 순종적이며 야무진 여성으로 성장했다.

    가끔, 정말 가끔 견디기 힘든 날엔 레이라 모녀와 맞서기도 했지만 왕이 평생 한결같이 편애했던 여자를 상대하기란 벅찬 법이다.

    엘리사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다. 레이라 부인이 왕궁의 밥버러지를 내버릴 수 있는 쓰레기장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엘리사의 남편감 말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곪은 집안이 좋겠어.’

    레이라 부인의 이기심은 왕에겐 제 자식에 대한 관심으로 보였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로군! 하하, 내 여자는 상냥하기도 하지.”

    왕도 레이라 부인을 도왔다. 그러나 둘은 핀트가 좀 달랐다. 왕이 찾은 엘리사의 남편감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사내였다.

    “그, 그웬 공작이요? 그는 너무…….”

    뛰어나잖아! 내 딸들보다 좋은 집안은 안 돼!

    “여자에게 박하다는 소문도 있고, 바람둥이라고도 하고. 엘리사에겐 안 어울려요.”

    레이라 부인이 반대하자 왕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음, 어쩌지? 이미 서약서를 교환했는데.”

    진저에겐 번듯한 집안의 신부가 필요했다. 처가가 먼 나라, 작은 왕국인 것도 메리트였다. 그럼 간섭이 줄어드니까. 아예 안 하면 더 좋고.

    엘리사는 얼굴도 모르는 사내와 결혼하는 것이 끔찍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있으면 독살당할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타국으로 떠나는 게 나을지도.

    그녀에겐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살아남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남들이 보기엔 지겨운 나날이었다. 소리 없는 전쟁. 하지만 그녀는 그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여자였다.

    ‘왕비궁 정원이 참 예쁘지. 주방장의 디저트는 맛있어. 아이들 웃음소리는 너무나 사랑스럽네.’

    그렇게 혼담이 오가고 얼마 후 엘리사는 그웬가로 시집가게 되었다.

    * * *

    진저와 엘리사의 첫 만남은 정말이지 평범했다. 결혼식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나쁜 걸지도. 엘리사는 사실 기대를 하긴 했다. 혹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까. 서로 한 쌍이었던 것처럼 잘 맞아 평생 함께 걸어갈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한순간에 바스러졌다. 왕국에 있었을 때보단 나았으나 그는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래도 눈을 마주치면 인사는 해줬다.

    엘리사는 그걸로 만족했다. 저택 안으로 여자를 데려오는 무례도 없었다. 가끔 얄미운 말을 할 때는 입술을 꽉 꼬집고 싶었지만 견딜 만했다.

    공작가의 차는 맛있었고, 정원은 왕비궁의 정원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고용인들은 모두 순박하여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래, 이거면 됐지 뭐. 살해 위협에서 벗어난 게 어디야.’

    사랑만 바라지 않는다면 평화로운 날이 이어질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하지만 정말 세상일은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것이다. 진저는 마물을 잡기 위해 토벌군과 함께 떠났다. 그리고 3개월 뒤, 마물의 피를 옴팡 뒤집어쓰고 돌아왔다.

    그 이후, 공작가엔 이상한 기운이 흘렀다.

    엘리사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진저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랑이 사이에서 뭐가 흐르는데?”

    그러자 진저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더니 아,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달거리를 할 때가 됐나 봐요.”

    “달거리?”

    “월경 말이에요. 생리.”

    마물은 마지막 생명을 불태워 진저에게 저주를 내렸다.

    몸이 바뀌는 저주를.

    진저는 엘리사가 되었고, 엘리사는 진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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