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56화 (956/956)

연습실에 들어선 단유는 후끈한 공기와 마주하며 연습생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데뷔를 바라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하고, 몸 어딘가에 심각한 근육통이 생겨 통증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도 꾹 참고 연습에 집중하는 건 지난 5년간 그들이 오롯이 바라던 날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테다.

"작년 이맘때였죠? L.E.Vi(Levitate Exalted Victory)의 데뷔 때가 생각나네요. 다들 기억나나요?"

''네."

"그때 그 친구들도 지금 여러분들 같은 모습이었죠. 긴장과 부담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고. 그리고 그때는 저희도 경험이 없어 제대로 케어를 못해줬었기에 많이 후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다들 수능 보셨죠? 수능을 목전에 둔 많은 학생들이 여러분들과 비슷할 거 같네요. 학창 시절 제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 소화불량에 걸려서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친구들, 잠을 억지로 쫓아내려고 무리한 수를 쓰는 친구들. 그런데 그런 친구들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하죠. 수능만 끝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하지만 당장 수능만 해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결코 좋은 결과를 보기 힘들다는 거, 아실 겁니다. 더군다나 수능이 끝나도 그게 끝이 아니죠? 망가진 컨디션과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원서를 어디에 넣을 것인지 전략을 짜야 하고, 면접 준비와 입학 시험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하죠.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가장 먼저 신경을 써야 하는 건 대형 안무도 아니고, 가사 암기도 아닙니다. 인터뷰 준비부터 해서 여러 가지 것들은 이미 능숙하잖아요? 이제와 그걸 반복 하는 건 오히려 정상 컨디션을 해칠 뿐이라는 거죠. 그러니 조바심내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그간 흘린 땀과 노력은 그대로 무대 위에서 증명될 테니까요."

단유의 격려에도 연습생들은 규암처럼 굳어진 얼굴을 풀지 못했다. 스스로를 믿는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더구나 이미지 훈련一디스플레이에 나오는 이미지에 맞춰 동작을 반복 연습하는 훈련一에 익숙해진 뒤로 거울에 빨간 마크가 뜰 때마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상황이다. 때문에 지금도 빨간색 마크가 계속 뜨지 않을 때까지 연습을 반복하는 중이었고.

단유는 그 부분에 대해 말했다. 꼭 맞출 필요는 없다고.

"리듬과 박자 감각이 기계 수준에 올랐다고 좋아할 필요는 없잖아요? 처음 말했던 것처럼 저건 단지 보조 도구로서 활요하는 것이지 거기에 여러분들을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빨간 마크가 계속 뜨는 이유는 그만큼 여러분들의 체력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방증이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연습을 안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라는 게 연습생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쇼케이스 무대 위에서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안무를 까먹어서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거나, 가사를 잊어서 입도 뻥긋 못하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소탐대실이란 말이 있죠? 지금 여러분들이 초조해하며 쉬지 않고 연습하는 건 작은 걸 탐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 큰것을 놓칠수 있음을 보지 못하는 거예요. 자, 다들 아시겠지만 여러분이 데뷔 쇼케이스를 가진 뒤에 는 더더욱 쉴 시간이 부족해요. 일주일에 6번 있는 음악방송이 4주 동안 잡혀 있습니다. 새벽부터 스케줄 준비로 바쁜 것은 물론이고 그 사이 틈틈이 잡혀 있는 인터뷰, 그리고 인터넷 방송 스케줄까지 다 하면 여러분은 거의 한 달간 지금보다 더 빡빡한 하루를 보내야만 한다는 계산이 나와요. 그 와중에 어디가 탈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죠. 물론 여러분들은 그러겠 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건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월씬 체력도 좋고 건강한 L.E.Vi 멤버들도 이 주 정도를 겨우 버티다가 결국 탈이 났었던 거 기억하시죠?"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L.E.Vi의 메인 댄서 포지션이었던 친구가 리허설 도중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져 결국 음악 방송 펑크가 났던 사고. 다른 이들도 크게 소문이 나진 않았지만 스케줄 중간에 병원에 가서 링겔을 맞거나 혹은 대기실에서 진통제를 맞으면서 버텼다는 일화는 꽤 오랫동안 입에 을랐었다.

"이런 이야기, 매니저를 통해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진심으로 회사가 원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제가 직접 여러분께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온 겁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본론인데, 이 시간부로 연습실 사용은 하루 2시간으 로 제한합니다."

"네? 그럼 연습은 어떻게 해요?"

"데뷔 쇼케이스 전날 딱 2시간만 합을 맞춰보는 걸로 합니다. 그렇게 해도 충분하다는 계산이 나와서입니다."

"그럼 그때까지 뭐하는데요?"

"물론 그낭 쉬라고 해드리고 싶지만, 그건 좀 어렵고요. 대신 여러분들 단체로 병원을 방문할 겁니다. 긴급 건강 진단이라고 해야 할까요?"

"주사 맞아요?"

"필요하면 주사도 맞겠죠."

질색하는 막내 시화의 표정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사지도 받으셔야 합니다."

"와아!"

"그렇게 좋아할 건 없어요. 여러분들 몸에 고장난 곳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한 도수치료니까요."

''아."

"다음으로는… 아로마테라피 등등이 잡혀 있는데, 자세한 일정은 진 팀장님이 알려주실 거에요."

"테라피요?"

데뷔조 연습생들을 마냥 쉬게 두면 여러 생각이 나서 오히려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라는 생각에 단유는 차라리 시간을 빽빽이 채우되 리프레쉬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다. 의견일 뿐이지만 대표의 의견은 곧 명렁에 준하니, 데뷔조를 맡은 신인개발팀 진 팀장은 그에 따르는 스케줄을 빠르게 만들어냈다.

"섣불리 성공을 입에 담는 건 안 될 일이겠지만, 그래도 지금 현 상황에서 저희는 꽤낙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부평가 에서도 좋았지만, 여러분들이 지난 2년 간 해 온 인터넷 방송을 통해 돼 많은 팬이 모였잖아요? 사실 말이 데뷔지, 여러분들은 이미 데뷔를 한 거나 다름없죠.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신감을 가지셔도 됩니다. 여러분들을 응원하는 팬들을 위해서라도요. 또 저 역시도 여러분들의 대표이기 전에 팬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저는 여러분들이 성공하리라 믿어요."

기운 내라고 한 말이었지만, 너무 과했던 것일까? '팬'을 자처하는 단유의 말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바라만 보는 아이들.

"그보다 먼저 해야할 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땀이 식었을까, 몇몇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보였다.

"식사부터 하러 가죠."

일단 배부터 채워주면서 이틀 간의 빡빡한 힐링 스케줄을 진행하기로 했다.

검은 숲 속을 뛰놀며 나무껍질이나 줍던 아이가 어느새 한 조직의 대표가 되어버렸다. 무지렁이 축에도 끼지 못하던 그 아이는 세상의 비밀과 진실을 간직한 마법사가 되었고, 흙냄새 풍기던 낡은 오두막에서 100평 남짓한 큰 집으로 삶의 터전이 옮겨졌다.

'아버지...'

넓은 등을 보이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꿈에서마저 호릿하게 보일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사뭇쳐 눈물로 밤을 지새던 꼬마가 이제는 새로운 가족들을 만들어 외로움을 떨쳐내고 있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여전히 혼자다.

'깜박 잠이 들었었나?'

고요한 방. 퇴근하고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시 쉴 생각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여자 연습생들의 성공적인 데뷔를 기념하는 자리라고 직원들이 흥에 겨워 건네는 술잔을 모두 받아줬던 탓이리라. 아늑하지만 외로운 공간. 어느새 밤이 깊어 사위가 어둡다. 전등을 켜는 대신 마법으로 방안을 밝히니 태양같이 밝은 빛이 가득 채워진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려다 눈부심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바로 마법을 해제했다. 다시 어두워진 방 안. 고요함 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 꿈의 마지막, 아버지가 뭐라고 했던 거 같은데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탓일까.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다. 그 세월, 남들은 그저 고아가 출세해서 번듯한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고 평할지도 모를 세월이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괴롭고 힘든 시간이 뒤죽박죽인 인생이었다.

뒤죽박죽이라는 말이 와닿는다. 가족을 잃었고 새로운 가족을 얻었다. 잃었다는 말이 정확하진 않다. 오랜 모험 끝에 다다른 진실은 그의 어린 시절이 모두 허상이었다는 사실이었으니.

진실에 대한 추구는 마법사로서의 의무였으며 삶의 의미였다. 그가 그토록 진리와 진실을 맹목적으로 추구한 것은 과거의 상실이라는 진실에 대한 반대급부였다. 동등한 등가교환의 선택은 아닐지 모르나, 과거보다 현재를 선택한 것에 대해 단유는 후회하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현재가 미래를 만들기 때문이다.

미래의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을 거듭해보아도 알기 힘들다. 스스로도 지금, 어떻게 한 회사의 대표가 될 수 있었는지 모르니 말이다. 운이 좋았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전과 달리 이제는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을것 같다. 진심을 담아 동의는 못 하지만,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고 용인해줄 순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미래의 자신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융통성있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단유 역시 인간이다. 그러므로 단유는 이기적이다. 하지만 단유는 다른 누구보다 이기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비밀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고들 말한다. 하지만 단유가 가진 비밀은 누구도 알 수 없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될 비밀이다.

'고통스럽고 끔찍한 비밀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할 나는 늘 외롭다.'

단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릴 때처럼 아무리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던 때와는 다르다. 근래 부쩍 늘어난 일거리 때문에 피곤했던 탓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자조섞인 망상이나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선택은 반드시 후회를 남긴다. 지금, 단유가 후회하는 것은 그가 포기해버린 진실의 한 조각 때문이다. 스스로 당위성을 떠올려 설득하는 짓까지도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과거를 떨쳐낼 수 있으리라.

번잡한 상상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는 단순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생각이란 놈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아예 생각을 말자. 다른 생각을 하자.

그에게 다른 번잡한 생각을 잊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번잡한 마음만큼이나 서두르는 손가락이 핸드폰의 자판을 눌렀다. 그리고 곧 이어 전화가 왔다.

"안 자?"

一 너는?

"잠깐 졸았다가 방금 했어."

一술 많이 마시더라.

단유는 나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점차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명수의 친근함과는 또 다른 안정감이다.

과거의 가족이 '상실'이라는 의미였다면, 지금의 가족은 '채움', '보상'이라는 의미로 정의된다.

그리고 그녀. 과거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다르다. 그녀가 변했다는 말이 아니라, 단유 안에서 그녀에 대한 감정이 달라졌다. 어설프게 사랑을 고백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그녀에겐 감히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거보다 더 진하고 농밀한 감정을 느낀다. 흔히 말하는 "연인'으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무언가다.

그리고 갈망한다. 그녀를. '가족'으로서.

"보고싶어."

一정말취했구나.

''그런지도."

一얼른 자.

"가도 돼?"

一온다고? 여길? 네가?

"안 돼?"

一안돼.

"알았어."

一쉽게 대답하네.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한숨소리.

一오지마. 내가 갈게.

"온다고?"

一너 술마셨잖아? 내가 갈게.

"올 거야."

一가지 마?

"아냐. 와."

一기다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액정 화면도 빛을 잃으며 다시 어둠 속에 잠기는 단유.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가슴 안에서 느껴졌다. 욕심일까? 감히 바래도 되는 걸까?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해도 부정당하지 않는 유일한 한 가지. 허상일리 없는 한 가지가 그녀의 목소리에 들어있었다.

그것이라면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게 해줄까? 그것이라면 그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해줄까?

그것이라면 이기적인 자신이라도 감싸주지 않을까?

새로운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내딛기로 마음먹은 단유는, 동시에 불안했다. 선택이 또 어떤 결과를 낳을지, 어떤 후회를 낳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그녀와 헤어질 때는 미련을 남기지 않았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이 얕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때는 단지 책임을 지지 않으려했던 때문이다. 자신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어린 시절이었기에 타인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책임감을 배웠고, 부담감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자세에 대해 교정을 받았다. 마치 오늘의 선택을 위한 것이었다는 듯 준비되어왔다.

벨이 울렸다.

문득 시계탑의 첫 종소리가 생각났다.

= 완(完) =

< Last forever.(10) > 끝 ④ 황금하르방

작가의 말

사직스캉님 후원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_꾸벅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