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55화 (955/956)

어느덧 회사가 문을 연지 5년이 지났다. 최초 대훈과 이야기할 때는 제대로 웅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시간만 3년이라고 들었는데, 3년이 겨우 넘는 시점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지면서 회사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한껏 기대를 받으며 악수를 나누고 들어왔던 회사의 주요 간부진들의 반이 불미스러운 일로 회사를 떠났고, 주요 디렉터로 키울 요량이었던 제작팀의 수장 창모가 비록 집행유예지만 선고를 받으며 업계를 떠났다. 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회사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신뢰를 주었던 대표가 회사를 떠났다. 언제든 돌아만 와달라고 했지만, 언제 돌아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 떠맡듯 맡게 된 대표직 명패를 바라보던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사다난'이란 표현이 적절했던 5년. 그중 대표로서 일한 시간은 2년. 대훈이 언급했던 웅비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충분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단유가 대표직에 적응하기에는 층분한 기간이었다.

"스튜디오에 잠시 내려갔다 을게요."

"알겠습니다."

비서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단유는 복도를 걸어갔다. 얼마 전 공채에 합격한 직원들이 선배들과 함께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을 결눈질로 확인하다 마침 눈이 마주친 직원 한명이 급히 허리를 숙이는 바탐에 마주 고개를 숙였다. 덩달아 곁에 있던 직원들도 황급히 단유를 향해 예를 표한다. 단유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잠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옆을 바라보니 벽면 모서리 부근에 커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얼룩이 눈에 띄었다. 청소 업체에서 미처 확인을 못했을까? 아니면 자신이 괜히 민감하게 느끼는 탓일까? 하지만 저 정도 얼룩이면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제거.'

이제는 간단한 의지를 돋우는 것만으로도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된 것처럼 간단하게 마법이 발동한다. 시야 범위 내에서는 정밀한 표적 추적도 가능한 제거는 오롯이 얼룩만을 '지워'버렸다. 게다가 이제는 제거 시 발생하는 빛마저도 완벽히 통제가능하다. 빛과 소리, 열로 환원되려는 에너지를 통제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단유는 성공하게 되었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지구상의 어떤 것이든, 인간을 포함한 생물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물질들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꾸준한 공부와 뒷마당 창고에서 새벽까지 반복하며 행했던 노력들이 빛을 발한 결과다. 물론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단유는 한 걸음 더 진보된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이 세상의 구성원리에 대한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역시나 그 어떤 학계, 학술지에도 발표하기 힘든 진실이라 혼자만의 만족일 뿐이지만.

"대표님, 오셨습니까?"

꾸벅 인사하는 팀장의 모습에 손을 들어 단유에게 인사하려던 상미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삼키는 모습이다.

"그냥 한 번 와봤어요. 저 친구가 제대로 일하는지 보려고."

"상미씨요? 상미 씨야 늘 잘하고 있습니다."

6개월 단기 계약을 맺고 들어온 상미도 어느새 2년째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D&D 엔터테인먼트의 소속 크리에이터로서 회사의 관리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2년 전과 변한 점이었다.

처음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소속 연예인들의 스트리밍 프로젝트는 대 성공까지는 아니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컨텐츠 크리에이터로서, 그리고 지난 10년간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인터넷 시청자들의 관심사와 그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주제를 적절히 골라내는 능력이 탁월했던 상미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 성공으로 인해 회사와 스트리밍을 했던 아티스트의 인지도가 부쩍 오르는 효과는 물론이고 기대치 않았던 수익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첫 시작을 알렸던 연습생들의 영상에서 소개되었던 첨단 문물의 협찬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를 벤치마킹한 영상이 줄을 이을 정도였으나, 오리지널 프로그램을 활용한 단유네의 그것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 열기 속에 처음 디스플레이를 제공했던 회사에서는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된 미러식 디스플레이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다. 더불어 현존 최고 화질의 디스플레이 모니터도 무상으로 주기까지 하는 등으로 협조적인 모습을 보여 회사로서는 소소한 이득을 봤다. 비단 디스플레이 회사뿐 아니라 혹시 자기네 회사의 물품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며 협찬 을 먼저 의뢰하는 회사도 줄을 이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거든요."

물이 올랐다고 해야 할까, 이렇다할 홍보 없이 입소문만으로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던 영상이었기에 각종 첨단 기기 제조 회사들의 관심이 쏠렸던 모양이다.

"굳이 협찬을 받아야 하나요?"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단유의 물음에 팀장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제작 경비를 줄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줄이지 말라니까요."

"제 말은, 본래 제작비가 100일 때, 90으로 깎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110의 제작비로 만들 수 있는 영상을 본래 가진 100의 영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예술하는 거 아니잖아요."

상미가 말을 보탰다.

"예술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업무가 바로 방송이야. 네가 편하게 보는 방송이나 영상들, 그냥 나오는 거 아냐. 그거 다 돈 들인 만큼 나오는 법이거든. 하다못해 CG라도 하나 넣는 거 다 돈이고, 돈이 많이 들수록 더 보기 편하고 재미있는 영상을 만들 수 있어."

"영상의 퀄리티도 좋지만 결국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내용, 이라고 네가 말했던 거 같은데?"

"그때는 내가 돈 없을 때 했던 말이고."

"지금은 달라?"

"내용도 중요하지만 영상의 때깔을 어떻게 내느냐가 경쟁력인 시대야."

그렇다고 아무 제품이나 무조건 협찬받을 순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전적으로 협찬은 협찬일 뿐, 광고는 아니기에 단유는 철저히 서로의 이익이 맞는 선에서 제품을 골라 받기로 했다. 그마저도 단유의 엄격한 기준에 통과하지 못하면 협찬도 하지 못한다.

"엄격하지 않아. 그낭 쓸만하면 되니까."

"네가 쓸만하다는 기준이 엄격하니까 하는 말이지."

나윤의 핀잔은 웃음으로 넘기는 여유를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새로운 인력을 모집하고 협찬사도 붙으면서 프로젝트는 궤도에 올랐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누구도 쉽게 예상 못할 장거리 레이스라고 각오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이 왔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의미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수익을 다시 투자하여 정식으로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마침 회사 바로 옆 건물이 비어있어 거기에 스튜디오를 만들고 컨텐츠 사업팀의 사무실까지 모두 이전시켰다.

****

"왜 왔는데?”

"말했잖아? 너 잘하나 보려고 왔다니까."

"언니 보러 온 건 아니고?"

"누나? 오늘 누나촬영날인가?"

"와, 모른 척 시치미 떼기 있기없기?"

단유는 핸드폰을 들어 상미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문자 온 거 봐라."

"명수? 걔가 나 감시하래?"

"감시는 무슨. 최근에 독감이 유행이라는 뉴스를 보고 네 걱정이 되더란다. 그래서 너 건강한지 봐달라고 문자 한 거야."

"웃긴다, 걔는. 그런 걱정 할 거면 나한테 바로 전화하지, 왜 너한테 한 대? 우리가 무슨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으니까 연애감정이라도 생기나 보지."

"어이구? 단유 네가 그런 것도 알아?"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고. 몇 번 스튜디온데?"

"그럼 그렇지. 2번 스튜디오지, 아마?"

"너 건강한 거 같으니까 그대로 보고할게. 나중에 보자."

말이 길게 이어져봐야 놀리기 밖에 더 하겠냐는 생각에 단유는 얼른 자리를 피했다. '2번 스튜디오'라는 문패를 찾아 간 단유는 문에 달리 작은 쪽창 너머로 촬영이 진행 중이 내부를 살폈다. 거기에는 환한 조명 아래 나윤이 예의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방송을 하는 중이었다. 방송에 집중하느라고 단유가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보였다.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복도를 지나던 스태프들의 인사를 받으니, 괜히 눈치가 보였다. 창피해서가 아니라 나윤에게 눈치 가 갈 것이 걱정이 돼 그냥 돌아섰다.

다시 복도 끝 사무실로 돌아오니 편집영상을 체크하고 있던 상미가 단유를 발견하곤 왜 벌써 나오냐고 물었다.

"나도 바쁜 사람이야."

"그 바쁜 사람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뭘까나?"

"아까도 말했지만…."

"알았어, 알았어. 너도 참…. 아, 그러고 보니까 여자팀 데뷔 날짜 얼마 안 남았지?"

"이틀 뒤야."

"벌써? 되게 빠르네.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대?"

시간이 빠르다고 느끼는 이는 상미 뿐만이 아니었다. 곧 데뷔무대를 앞두고 전력을 다해 준비에 임하던 연습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올해로 25살이 된 김지서, 데뷔조의 맡언니 역할을 맡으며 부쩍 부담감이 심해진 탓에 최근 회사로부터 다이어트 금지라는 지시를 들을 정도로 살이 빠진 이 멤버는 근심 어린 눈으로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1 년 전, 남자 데뷔조가 눈물의 데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뒤라 더욱 데뷔를 갈망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데뷔조의 맡언니 역할을 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본래 가수 데뷔조의 맡언니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자처하던 한 살 연상의 지윤이었는데, 올해 초 데뷔를 포기하고 회사를 나갔다.

"미안."

"왜요? 이제 곧 데뷔잖아요. 언니 데뷔 바라는 팬들도 많은데."

연습생 채널을 통해 일상이 공개된 뒤, 멤버 각자의 팬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항상 댓글을 통해, 그리고 생방송의 채팅창을 통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고, 연습생들에겐 모티베이션을 강화하는 요소였다.

"자신 없어. 어차피 지금 내 나이가 아이돌 하기에 적당한 나이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 저는 뭐가돼요?"

자조적인 미소를 얼굴에 그려내며 고개를 흔들던 지윤은 결국 그렇게 돌아섰다.

데뷔조를 나간 이는 지윤 뿐이 아니었다.

"언니, 미안해요."

하나같이 왜 다들 자신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것인가. 리더기 때문에? 눈물 고인 눈을 감추려 애쓰는 채린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채린 역시 결국 회사를 나갔다.

연습생 초기 광고 모델로 나설 기회를 얻었던 채린은 나름 괜찮은 연기와 마스크로 광고계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채린 역시 모델 쪽이 자신에게 더 적성이 맞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소심한 면이 있던 채린이어서 평소에도 시율에게 들러붙어 있다시피 하더니, 데뷔조를 결성할 무렵에 스스로 회사를 나가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 결정을 그녀 혼자 했을리는 없겠지만, 당사자가 말하지 않으니 알 도리는 없다.

결국 지윤, 지서, 슬기, 시율, 채린, 시화. 이렇게 6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여성 연습생에서 데뷔를 하게 된 이는 최종적으로 지서, 슬기, 시율, 시화 총 4명이 되었고, 그 4명은 이틀 뒤 있을 데뷔 무대를 위해 잠을 아끼며 연습에 매진 중이었다.

옆에서 거울을 보며 연습하는 아이들을 보며 지윤은 속이 울컥하는 기분이 느껴졌다. 감정적으로 울컥하는 기분도 기분이지만, 실제로 위액이 역류하는 거북함이 느껴졌다.

창백해진 얼굴로 급히 화장실로 달려간 지서는 변기를 붙잡고 한참을 게워냈다. 아침에 꾸역꾸역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해 내고 나니 후련하기보다 우울해졌다. 무엇을 바라며 지금을 버티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을 나오는 지서는 뜻밖의 사람과 마주쳤다.

''어, 대표님.''

단유는 눈을 껌백이며 지서를 보다가 손을 살짝 들어 인사를 받았다.

"속이 안 좋아요?"

지서는 뒤처리를 제대로 안 했던가, 당황해하며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조금요.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요."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란 말처럼 들리네요?"

''네."

"병원에 가라고 해도 안 가겠네요?"

지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뷔가 이틀 뒤인데 병원에라도 가게 되면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치는 꼴, 이라는판단 때문이었다.

단유는 얕게 침음을 홀리며 지서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가요."

"네? 아니 괜찮은데…."

"병원 말고 연습실이요."

"네? 아, 네."

지서는 급히 허리를 숙여 보인뒤 서들러 연습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 뒤를 단유가 따라오는 게 아닌가?

돌아보는 지서에게 단유가 답했다.

"저도 연습실 가는 길이었거든요."

지서는 붉어진 얼굴로 연습실 문을 열었다.

< Last forever. (9) > 끝

ⓒ 황금하르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