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st forever. (8) >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난 단유는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몇 십년이 지나더라도 익숙해지지 않을 서울의 겨울, 이라는 명수의 투덜거림을 떠올리며 가볍게 발을 굴렸다. 가슴 속 깊이 들어오는 냉기를 길게 내뿜으며 달리기 시작한 단유. 언제나와 같이 호흡으로 몸의 힘을 축적하고 축적된 힘을 몸 구석구석으로 보내 균형을 잡는다. 한 발 한 발을 내딛을 때도 주의를 하며 달린다. 몇 십년을 반복해온 동작이라고 방과하지 않는다. 호흡, 동작이 언제나 일치하도록 주의하고 집중한다. 그렇게 달리다보면 지치기보다는 활력으로 가득 찬 자신을 느낀다. 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가 힘으로 가득한 느낌. 그 느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데 오늘의 하루는 조금 다르다.
"감히 내 아내를 탐내다니!"
집에 돌아오니 명수가 단유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성난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 자지, 왜 벌써 일어났어?'라는 말이 쪽 들어간다. 눈곱이나 제대로 떼고 말을 하지.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 명수를 보니 시차적응 따위는 없는 듯 보였다.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사람들 오해한다."
단유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생수병 하나를 집어 따는 단유를 향해 명수가 외쳤다.
"오해가 아니잖아! 네가 내 마누라 꼬셨잖아!"
결코 즉흥적인 대사가 아니다. 분명 몇십 분 이상 고민하면서 만들어낸 대사일 테다. 어떻게 하면 단유가 당황하며 얼굴이 붉어질까, 를 수차례 고민하고 상상한 끝에 만들어낸 대사일 테다. 과연 이렇게 수를 냈을 때, 상대는 어떻게 받아칠까, 그 반응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속내가 는 속에 어려있다.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거실 소파에서 TV 대신 명수의 원맨쇼를 흥미롭게 감상하는 상미를 바라보았다.
"얘 왜 이래?"
"왜긴. 네가 나한테 한 이야기를 듣고 저러는 거지."
"그걸 왜 지금 이러는 건데? 하려면 어제 저녁에 만났을 때 하던가."
설마하니 무료한 일상을 즐겁게 해줄 목적으로 참고 있다가 새벽부터 이런 장난을 친다고? 아무리 장난기가 넘쳐흐르는 명수라도 이런 타이밍은 이상한데?
"어제저녁까진 몰랐다고!"
명수의 대답에 단유가 상미를 바라보자,
상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젯밤에 알았어, 명수는."
"영국에서 이야기하고 온 거 아니었어?"
눈을 가늘게 뜨고 명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상미.
"얘 한국행 비행기 타기 전까지 게임하느라 바빠서 대화할 시간이 없었지."
"비행기에서는?"
"둘 다 그냥 피곤해서 자느라고 못했고."
결국 그 중대한 이야기를 한국에 입국하고 나서, 단유의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하지 않았다는 상미의 대답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상미마저 명수를 닮아가는 것인지.
"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사정이 밝혀졌음에도 명수는 연극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이 무척 화가 났다는 것을 어필하려 애쓰는 모습에 어디까지 장단을 맞춰줘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아침부터 정신 사나워."
"안돼, 난 허락 못 해. 너 하지마, 그거."
단유가 명수의 떼를 받아주기 싫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상미에게로 방향을 돌리니, 상미는 자기마저 명수의 장난을 받아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할 건데?"
"왜? 왜?"
상미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덩실거렸다.
"저렇게 멋있는 남자가 꼬시는 데 안 넘어가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야?"
"어, 어, 이것 봐라? 야, 김단유! 너 내 마누라한테 무슨 짓 했어? 응?"
단유는 생수병을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까지 왜 그러냐?"
상미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쓰러졌다. 그런다고 웃음소리가 새지 않을 리 없다.
컹컹, 이 집에서 유일하게 시차 적응하느라 힘들어하던 패티가 시끄러운 부부의 장난에 짜증 난다는 듯 짖어댔다.
아침부터 장난기가 동했던 명수는 너무 짧은 시간에 기운을 쏟아낸 바람에 빠르게 허기를 느꼈다.
"밥 없냐?"
"라면 있어."
"라면 먹자."
세 사람은 주방에 둘러앉아 컵라면에 물 붓고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그 사이, 상미가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말하자면, 네 제안 관심은 있어. 다만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네."
단유는 싱크대 위 찬장에서 새 컵을 꺼내 명수와 상미에게 건네며 대꾸했다.
"다들 왜 이렇게 자신 없다는 이야기를 쉽게 하는지."
"누구? 나 말고 또 있어? 제안한 사람?"
"아니. 이 일 말고 다른 일로. 그건 신경 쓸 거 없고, 어쨌든 난 말이야, 네가 지난 십년간 해은 일과 그 성과에 대해 깊은 신뢰가 있어. 막연히 잘하겠지, 라는 신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네가 잘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고. 그동안 봐왔던 모습과 네 성격을 감안해서 나름 신중하게 제안한 거야. 이건 친구라서 하는 립서비스 같은 게 아니고, 객관적으로 너라는 사람을 평가하고 내린 결과야."
"음, 단유의 평가라면 믿을 만하지. 그럼."
명수의 추임새는 못 들은 척, 상미는 미간을 좁힌 채로 말을 이었다.
"난 대학도 안 나왔고....."
"대학 나온 사람보다 네가 낫다고 생각한다. 방송이란 학문 자체가 그리 오랜 역사를 지닌 학문도 아닌데다, 인터넷 방송이란 영역은 그 시기가 훨씬 짧잖아? 학문적 접근과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대학이라고 해서 더 나을 것도 없는 분야니까, 이런 경우는 차라리 현직에서 뛴 네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럼 그럼. 우리 마누라는 대학 안 나왔어도 나보다 낫지. 그런데 상미 대학 나왔잖아? 방통대?"
"졸업 안했어."
"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나보단 낫네, 뭐."
"너랑 비교를 하니?"
"내가 뭐?"
"둘 다 그만. 말장난이나 하다가 시간 보낼 여유 없다, 나. 라면 부니까 얼른 먹어."
"오, 우리 단유, 직장인 다 됐는데?"
"씁."
"근데 난 라면 다 먹었는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미 젓가락질을 시작했던 명수는 이미 국물만 남은 컵라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웃음을 흘렸다.
"내 거 먹어."
단유의 양보를 명수는 거절하지 않았다.
****
어릴 때는 '물불 안 가리고', '겁 없이' 달려드는 게 미덕으로 인정받는다.
"잃을 게 없으니까."
반면 나이가 든 뒤에는 그런 시도를 감히 하기가 어렵다. 한다 해도, 평가는 반반이다.
적성에 맞지 않아 10년 근속하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퇴직금으로 치킨집을 연다. 그리고 망한다.
"하던 일이나 계속하지, 왜 겁도 없이 장사를 시작해? 장사 아무나 하는 줄 알아?"
적성에 맞지 않아 10년 근속하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퇴직금으로 치킨 장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성공한다.
"그래, 네가 누구 밑에서 일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 몸은 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잖아? 돈도 이렇게 잘 버는데, 진작에 했어야 했어.어쨌든 잘 했다, 잘했어."
실패하면 '겁도 없이' 무리하냐는 말이 나오고, 성공하면 '운이 좋아' 성공한다는 말이 나온다.
어느 쪽이든 비슷한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도전은 위험하다는 생각. 혹자는 보수적이라고 표현하고, 혹자는 안전한 게 제일이라는 말을 하지만, 결국 다 같은 말이다. 어른이 되면 이상보다 현실을 우선순위로 둘 수밖에 없다는 것.
"거피취자(去彼取此)라는 말처럼 말이야."
노자의 인용에 상미는 격렬하게 몸을 떨며 거부감을 표시했다.
"아, 난 그런 거 모르겠고, 그냥 자신 없다고."
"그래서 하기 싫어?"
이쯤이면 층분히 엔진에 열이 들어왔겠지, 싶어 단유는 기어를 넣고 천천히 악셀레이터를 발았다. 차고를 빠져나가는 순간 전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하얀 햇살에 상미는 손우산을 만들며 대답했다.
"그건 아닌데, 잘 모르겠다. 하고는 싶은데, 괜히 했다가 너한테 피해만 끼치는 건 아닌가 해서."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한테 피해끼치긴 어려울 거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왜? 내가 잘할 테니까?"
"네가 못한다고 해도, 그건 대부분 사전에 예상한 감당해야 할 리스크 범위 내니까.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실패나 잘못은 모두 감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으니까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거고, 그래서 너한테도 제안을 하는 거야. 설령 네가 이번 프로젝트를 말아먹는다고 해도 난 피해를 안 입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위로하는 방식이 참 단유스럽네.''
"고마워."
핸들을 틀어 큰 대로변으로 차를 몰았다. 아침 출근 시간답게 차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게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일 테다. 빈틈없이 앞뒤로 막힌 출근길에서 지각을 면하려 초조한 마음을 누른 채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뗐다 반복하는 직장인들. 서행과 제동을 반복하는 그들의 이상은 노브레이크 무한 질주이리라.
''야 진짜할거야?"
뒷자리에 앉아 있던 명수가 물었다.
"안 했으면 좋겠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느라 즉답을 못하는가 싶더니,
"반반."
이라고 짧게 속내를 밝히는 명수였다.
"반반? 왜?"
"만약에 네가 진짜로 단유랑 같이 일한다고 하면, 좋기도 좋겠지. 네가 기업에서 인정받을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니까. 물론 친구긴 하지만, 단유가 무조건 친구라고 좋게 봐주는 애는 아니잖아? 내 마누라가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건데 좋지."
"나 나름 인방계에서 인정받는 스트리먼데?"
"그건 그쪽 업계에서나 인정받는 거지만, 정식으로 기업체에서 인정받는 거랑은 또 다르잖아? 혹시 알아? 이번 일이 소문 나면 대기업 쪽에서도 너한테 제안이 들어올지?"
"그럼 내가 일을 했으면 한다는 말이야?"
"아니, 그건 그런데, 너 없으면 나 혼자 영국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잖아?"
"너 나 없는 편이 좋다며? 잔소리하는 사람 없어지니까 좋은 거 아냐?"
"에이, 그건 그낭 하는 말이지, 진심이겠냐? 너 없으면 나 혼자 어떻게 살아?"
"밥 해줄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고?"
"어허, 단유 오해하겠다. 내가 언제 너한테 그랬어?"
"그런데 그것도 걱정은 걱정이다. 나 없으면 너 맨날 햄버거, 피자나 처묵처묵 할거잖아?"
"야, 내가 언제 햄버거, 피자 막 먹은 적 있냐? 몸 관리가 생명인데. 나 안 그래."
"그래서, 결론이 뭔데? 내가 했으면 좋겠어, 안 했으면 좋겠어?"
그 순간 룸미러를 통해 단유와 명수의 눈이 마주쳤다. 간절하게 답을 애걸하는 명수의 눈빛을 확인한 단유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마침 신호가 떨어져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 참이기도 했고.
****
결국 고민 끝에 상미는 프로젝트 제의를 받아들였다. 정식 직원으로 들어오는 대신, 프로젝트 기간 계약직으로 합류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상미 본인의 방송도 계속 해야 된다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미의 기준에서 보면 회사 프로젝트 건은 일종의 부업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인터넷 스트리밍 방송이 주업이니까.
그리고 회사에 놀러 온 명수랑 같이 회사 구경을 하면서 신기해하다가 프로젝트 주인공인 나윤을 만나고는 깜짝 놀라 당황하기까지 했다.
"두 사람, 다시 만나는 거?"
잘 그러지 않는 명수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에 단유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아침 일에 대한 복수로 이 정도면 충분하겠거니 했는데, 문득 느껴지는 나윤의 짜릿한 눈빛에 흥이 식어버렸다.
나윤에게 미리 말한다는 걸 깜박한 걸 보니, 자신 역시 명수에게 옮은 모양이었다.
'이래서 바보병은 불치라고 하나보다.'
"인연은 인연이네요, 두사람."
"그러게요. 그런데 명수 씨도 되게 잘 나가던데요?"
"저요? 에이, 아니에요."
"스포츠 뉴스에 자주 나오는 거 봤어요."
나윤의 몇 마디 칭찬에 헤벌쭉 웃으며 우쭐대는 명수의 저런 모습은 닮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단유는 세 사람에게 식사를 제의했다.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자."
"와, 연예인이랑 밥 먹는거야?"
"연예인은 무슨. 명수 씨가 저보다 더 유명하신데."
"전 연예인 아니잖아요."
"상미 씨도 거의 준 연예인 급이시던데. 여기 회사 직원 중에도 팬이 있으시던걸요?"
나윤의 말마따나 직원들 중에 상미의 방송을 챙겨보던 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단유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상미에게 접근해 팬임을 자처하며 싸인을 받아간 직원도 있었다고 한다. 나윤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제일 안 유명한 사람은 단유 뿐이네?"
명수가 놀리듯 말했다.
"안 유명하지만 제일 돈 많은 사람이니까,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
"콜 !"
명수는 기분 좋게 외치며 단유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그리고 힘으로 단유를 끌고 앞장 서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 진짜 안 사귀는거맞아?"
"안 사귀는데."
"왜? 왜 안 사귀는데?"
"그걸 왜 니가 신경 써?"
"그냥 사귀어. 좋아하잖아."
"......"
"너, 저 누나 좋아한다고, 티내고 다니더만."
"티 낸다고? 내가?"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냐?"
딱히 할 말이 없어, 그저 볼을 긁적일 뿐인 단유였다.
< Last forever. (8) > 끝 ⓒ 황금하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