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45화 (945/95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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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들끼리 간소하게 회의를 할 수 있도록 꾸며진 공간에는 긴 직사각형의 테이블과 접이식 의자들, 그리고 화이트보드가 전부였다. 보드에는 최근 회의 때 기록한 후 미처 다 지워지지 않은 낙서 같은 글귀들이 남아 있었고, 회의 때 사용했던 자료철이 테이블 위에 쌓여 있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급작스러운 단유의 방문에 놀람이 채 가시지 않은 희수의 물음이었다. 엄연히 업무 시간이지만 다른 이도 아닌 회사의 이사가 방문한 것이니 대놓고 불평을 할 순 없었다.

“연락이라도 미리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넌지시 불만을 둘러 표현할 뿐이다.

“많이 바쁘셨어요?”

무미 건조한 단유의 되물음.

“저희야 항상 바쁘죠. 프로젝트도 한참이라 늘상 회의의 연속이거든요. 지금도 잠시 후에 있을 회의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어서, 이렇게 이사님 방문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리 연락을 했으면 사무실 청소라도 간단히 했을 것처럼 말하는 희수의 답변이었다.

“바쁘시다 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네, 무슨 일이신데요?”

아직까지는 여유로운 모양새. 직급은 팀장이지만, 사실 회사 내부 사정상 ‘팀장’이란 직함일 뿐 실질적으로 회사 전체에서 대표 다음으로 권력이 센 이였다. 회사를 배에 비유하면, 당연히 선장은 대표지만 선장이란 지위가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위치라면, 실질적으로 항해 계획을 세우고 배를 운전하는 이는 2등 항해사다. 박희수 팀장이 바로 그 2등 항해사 정도의 직급이니 직급상 상사인 단유라 하더라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사를 우습게 볼 순 없으나, 그래도 은연중에 드러나는 여유로움은 그런 권력에 기반한다.

단유는 느긋한 희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팀장님께서 어제 일 기획하셨습니까?”

단번에 표정에 금이 갔다. 미세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슬그머니 내려오고 여유롭던 눈동자는 폭풍을 만난 배처럼 요동쳤다. 키를 잡은 항해사는, 그러나 그간 쌓은 경험이 있어 금방 동요를 멈추고 태연함을 가장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시치미 떼실 생각이시라면 하나하나 증거들을 들어 확인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번잡스런 과정은 생략하고 간단히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바쁘시다니까.”

“시치미를 떼다뇨? 제가 무슨 범죄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솔직히 불쾌합니다.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죠.”

“어제 일은 아십니까?”

“모릅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으신가 보네요? 어제 일, 이라고 언급했을 때 그게 뭐냐고 묻기보다 모르겠다고 시치미를 먼저 떼시니.”

“···괜한 꼬투리 잡으려들지 마시고, 말씀해 보시죠. 어제, 말씀하시는 그 일이 뭡니까, 대체.”

“창모 씨가 어젯밤 폭행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창모라면, 작곡팀의?”

“네.”

“아니, 어쩌다가?”

“가벼운 음주 후 대리 기사를 불렀답니다. 어떤 이유로 사소한 언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창모 씨가 주먹을 쓰셨답니다.”

“어이없는 일이군요. 그런데 그 일에 제가 무슨 기획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최초 창모 씨는 후배인 지아 씨와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답니다. 이유는 작업 중인 곡이 잘 써지지 않아서 스트레스도 풀겸해서 갔다고 합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와 곁들일 와인을 주문했고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와인을 가볍게 마셨지만, 그래도 음주니까 대리 기사를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지아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지아 씨의 집으로 향했고, 거기서 지아 씨를 배웅하기 위해 창모 씨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 사이 대리 기사는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대리 기사의 말로는 그 시간이 꽤 길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약속되지 않은 행선지로 향한 것은 그렇다쳐도 거기서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허비함으로 인해 자신이 손해를 봐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때문에 다시 차에 오른 창모 씨와 언쟁이 있었고, 급기야 대리 기사는 대리 운행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지금 처음 들은 이야깁니다.”

이후 경찰서에 갔고, 변호사까지 불렀다는 이야기로 단유의 설명이 끝날 즈음 희수의 얼굴은 다시 처음의 낯빛으로 돌아갔다.

“다 들었지만 도저히 제가 어느 부분을 기획했다고 의심받는지 알 수가 없네요. 창모 씨에게 생긴 일은 안타깝지만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창모 씨가 당분간 정상적으로 일을 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죠.”

“비약이 심하시네요. 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귀를 다친 것도 아닌데 일을 왜 못합니까? 설령 지금 당장은 복귀가 힘들다해도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후에 돌아올 수 있는 일인데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러시는지. 어쩌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좋은 곡이 떠오를 수도 있는 일인데 말이죠.”

“논리적으로는 팀장님 말씀대롭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테죠. 하지만 그 전에 말입니다. 만약 그 언쟁이, 그리고 싸움이 일부러 벌인 일이라면 문제가 되겠죠.”

“일부러요? 하하, 이사님.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혹시 최근에 뭐 무서운 영화라도 보셨습니까? 그런 말도 안되는···. 도대체 어느 누가 일부러 맞아가면서 싸움을 벌인답니까?”

“그러게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런 일이 눈앞에 펼쳐지니까 저도 어이가 없더라고요.”

“이사님. 계속 하시는 말씀이 정말로 누가 그 싸움을 기획했고, 그 기획자가 저라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이건 꽤 모욕적입니다. 젊은신 분이지만, 그래도 이사님이시니까 계속 존중해드리고는 있지만,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계속 참기 힘들거든요?”

“저도 비슷한 심정입니다. 여태까지는 팀장님이 어떤 일을 기획하시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팀장님이 하시는 일이 이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팀장님이 개인적 야망? 혹은 욕심을 채우는 일을 하시더라도 충분히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젯밤의 일은 그냥 넘어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해서 이렇게 찾아뵌 겁니다.”

“이사님! 거 자꾸 제가 뭔갈 했다고 하시는데, 계속 이러시면 저도 참지 못합니다? 근거도 없이 망상으로 저를 핍박하시는 이유가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까?”

“말씀드렸듯 근거는 있습니다.”

“뭡니까, 그 근거라는 게?”

단유는 지체없이 설명했다.

단유가 어제 일을 계획적이라고 생각하는 첫 번째.

“블랙박스입니다.”

“블랙박스요?”

“정확히는 블랙박스의 메모리카드 때문입니다.”

변호사 말로는 블랙박스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빼놓았다고 하지만, 단유가 따로 알아본 바로 해당 블랙박스의 제조사 측에서 내놓은 펌웨어 업그레이드가 지난 3년간 없었다. 혹시 3년 전에 나온 펌웨어를 미루다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생각이 나서 하려고 했다고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으니 창모의 개인 컴퓨터를 살폈고, 그렇지만 어떤 업그레이드용 프로그램도 찾을 수 없었던 단유다.

그러니 사라진 메모리카드에 대해 설명하던 변호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가 모른다고 아예 딱 잡아뗐더라면, 물론 그래도 단유는 그의 표정과 말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겠지만, 변호사는 모르쇠로 나오기보다 엉뚱한 변명으로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제 딴에는 그럴듯한 이유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나, 설마 단유가 물을 거라 생각못해 당황한 채로 임기응변을 펼친 변호사의 실수다.

그래서 두 번째 이유는 변호사다. 마치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고 나선 변호사는 단유가 지나가듯 언급한 대로 마치 준비된 사람마냥 등장했다. 캐쥬얼한 복장을 하고 나타난 것은 나름 괜찮은 전략이었지만 그의 차에 내장된 네비게이션에 지난 운행 기록이 남아있었던 것은 실수일 테다.

“지아 씨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은 계획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데려다주기 위해 단유가 변호사의 차를 빌리는 것까지도 계획에 없던 일이었을 테다. 그렇다고 단유에게 차를 빌려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 차가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변호사는 흔쾌히 단유에게 차키를 넘겼다.

단유는 지아의 집까지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네비게이션을 조작했다. 그러던 중 혹시나 해서 봤던 최근 검색 기록에서 가장 최근으로 등록된 목적지가 하필이면 지구대가 아닌 지구대 근처의 한 빌딩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요컨대 변호사는 미리 이 지구대로 올 준비를 하고 도착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연락을 받은 후 적당히 출발하여 도착했다는 의심이 든다.

그리고 그 의심에 근거하여 추리하면 창모가 지아의 집 근처에서 싸움을 벌인 것도 계획 중 일부고, 거기서 싸움이 벌어지면 자연히 가장 가까운 지구대가 출동하고 그 지구대로 이동하게 될 것임을 약속해 놓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연락은 단유가 했다. 그렇다면 변호사는 단유가 연락할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연락을 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했다면 말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창모와 함께 있을 지아, 그녀가 연락을 취하면 그때 전화를 받고 출동한다는 계획이 될 테다. 만약 그녀가 변호사에게 연락하지 않더라도 회사의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걸면 자연히 변호사에게 연락이 갈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변호사가 지구대를 찾게 될 테니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는 단지 희수를 의심하게 된 근거일 뿐이다. 그에 앞서 단유가 블랙박스나 변호사를 의심하게 된 이유에는 또 다른 근거가 존재한다.

바로 싸움을 벌인 당사자인 창모.

평소에는 유했던 성격이 술김에 갑자기 폭력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없진 않겠지만, 지아가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라면 창모를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의 표정에는 싸움을 벌인 것에 대해 후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분노를 느끼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도 아니었고, 단지 계획에 없던 단유가 나타나는 바람에 당황하는 기색이 잠시 스쳤지만, 이후로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후회나 반성보다는 초조함이었다. 진술 조사를 받는 사람에게서 긴장감없는 초조함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의심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메모리나 블랙박스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창모 씨가 그런 이유야 술이 취해서인 것 같고, 표정이요? 이사님이 무슨 도사도 아니고 표정만 본다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시는 건 아니지 않나요? 정말 어디 추리 소설 같은 걸 보고 따라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네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덕분에 어젯밤 단유는 나름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앞서의 의심과 추리는 단지 단유가 직접 행동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도록 부추겼을 뿐이다. 정황과 추리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단유가 팔을 걷고 나선 뒤에야 드러났다.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업그레이드를 위해 제거한 게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일부러 빼놓았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일부러 빼놓았는지에 대해서는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겠지만 정황상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사실 결정적인 증거는 창모 씨의 핸드폰이었습니다.”

“핸드폰이요?”

“팀장님과 전화한 기록이 있더군요. 자주요.”

“프로젝트 때문에 자주 연락했습니다만, 설마 그것 때문에 절 의심하는 겁니까?”

“그리고 팀장님과 통화를 저장한 녹음본이 있더라고요.”

순간 마른 진흙이 갈라져 떨어지는 듯이 희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들려드릴까요?”

단유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흔들었더니 희수의 턱이 잘게 흔들렸다.

“모함입니다.”

“모함이요?”

“전 그 사람과 업무 외의 일로 통화한 적이 없습니다.”

“들려드릴게요.”

단유가 핸드폰의 잠금 화면을 해제하자, 희수가 급히 손을 뻗어 단유의 손을 잡았다. 단유는 희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팀장님께서는 일부러 프로젝트의 진행을 방해하며 시간을 질질 끌고 있더군요.”

“······.”

“창모 씨에게 먼저 제안 하셨죠? 일을 벌이도록 사주하시고, 대리 기사까지도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모양인데 맞습니까?”

“······.”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도 생각해봤는데, 짐작가는 바는 있지만 아무래도 본인에게 직접 듣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렇게 찾아 온 것입니다. 됐나요?”

어금니가 부러질 정도로 이를 꽉 문 희수와 대조적으로 태연하기만 한 단유는 손을 천천히 기울여 희수의 손에서 핸드폰을 되돌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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