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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944화 (944/95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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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 찾아왔고, 단유는 평상시와 똑같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로비를 지났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네, 가은 씨도 수고 많으시네요.”

언제나처럼 먼저 인사를 건네는 로비 데스크 직원들에게 화답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출근을 위해 기다리던 다른 직원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한동안 계속 추울 거라고 하더라고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이사님.”

“선향 씨도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이름이 불리면 괜히 볼을 붉게 물들이며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하는 여직원이 비단 한 사람 뿐이랴. 단유가 직원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는지 내기가 걸릴 정도로 가벼운 인사들이 오갈 때면 단유는 꼭 이름을 언급해주었고, 그런 모습은 직원들에게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이유로 단유와 마주치는 직원들은 어디서 그와 마주치더라도 인사를 건네며 짧게라도 대화를 하고 싶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단유는 휴게실에 잠시 들러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오렌지 주스병 하나를 집어 재무팀 사무실로 향했다. 먼저 출근해서 자리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건네는 인사를 받으며 이사실로 들어간 단유는 겉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잠궜던 서랍을 열며 업무 준비에 들어갔다.

시원하고 달달한 오렌지 주스 한 모금을 마시며 컴퓨터의 부팅을 기다리니 곧 모니터에 바탕화면이 펼쳐졌다. 익숙한 동작으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폴더를 열어 어제 저녁 늦게 올라온 결재건이 있는지 확인하고 당일 스케줄에 맞춰 검토해야할 서류들이 있는지를 살폈다. 오늘 중으로 급히 처리해야 할 건들이 없다면 이전에 검토했던 것들 중 새로이 업데이트 되어야 할 내용들이 있는지 교차 검토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일을 처리하다보면 어느새 오전 중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거의 마무리된다. 일이 많으면 점심시간 직전까지 해야 할 정도로 밀리지만, 보통의 경우는 한 두 시간 정도 집중하면 금방 처리될 일들이어서 이후에는 여유롭게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을 정도다.

업무 시간, 이라고 정해져 있긴 하지만 억지로 업무 시간을 지켜야 할 필요는 없다, 고 단유는 직원들에게 말해놓은 상황이었다. 굳이 억지로 앉아서 업무 시간을 지키기 보다는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하되 업무 처리에 빈틈이 없도록 집중해 주는 편이 업무 효율에도 좋다고 판단한 단유의 지시였다.

업무 스케줄과 내부 인트라넷에 올라온 처리 문서들을 살펴보니, 한동안 정신없이 바빴던 재무팀이 겨우 숨돌릴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2/4분기 관련 보고서도 잘 마무리된 듯 하니 이제 다음 분기 보고서 작성 시한까지는 여유롭게 지낼 수 있을 듯 보였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단유는 코트를 걸치지 않은 채로 이사실을 나왔다.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던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는 포탈 사이트의 뉴스페이지를 가던, 쇼핑 사이트의 상품목록들을 살피던 상관없다고 했지만 막상 상사가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있기가 민망한가보다, 싶어 단유도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지금 제가 급히 해야 할 일은 없는 거죠?”

“네.”

“그럼 잠시 변호사님께 다녀올게요.”

“알겠습니다.”

차라리 자리를 비워주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설마 나중에 가서 ‘우리 이사님은 사무실에 붙어 있질 않아. 맨날 싸돌아다니시는데···.’ 라며 뒷담화에 오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니 어젯밤 캐쥬얼한 복장으로 마주했던 변호사가 넥타이를 목에 꽉 끼게 맨 채로 단유를 맞이했다.

“제가 먼저 갔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한가한 사람이 먼저 움직여야죠.”

“이리 앉으시죠.”

단유는 앞을 닫고 있던 단추를 풀며 변호사가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양해를 구하고 컴퓨터로 하던 작업을 마무리한 뒤에야 단유 앞에 앉은 변호사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물었다.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어제 이사님을 그렇게 배웅하고 난 뒤 조금 찜찜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냥 제 차를 타시도록 좀 더 권할 걸 하고 말입니다.”

“아뇨.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평소에도 차를 잘 끌고 다니질 않아서요.”

“운전하는 걸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신가 봅니다. 보통 이사님 나이 때 남자들은 자가 운전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게다가 단유의 차가 좀 좋은 차던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더욱이 단유 또래의 남자들이라면 거의 타기 힘든 금액대의 차가 아닌가.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단유의 심리를 이해못할 바도 아니다. 그 나이대의 남자들은 쉽게 빠져들기도 하지만 쉽게 질려하기도 하는 법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차가 아무리 비싸다한들 단유의 재력을 고려하면 그렇게 부담스러운 가격대의 차도 아닐뿐더러 몇 번 타다보면 좋은 차, 비싼 차 라는 게 무의미하게 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차에 관심이 없는 경우일 수도 있고.

“어제 일은 어떻게 됐나요?”

단유는 사사로운 화제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영리한 변호사는 이내 그 뜻을 캐치해냈다.

“잘 처리됐습니다. 상대 측과도 잘 이야기가 됐고요, 세부적인 협의는 필요할 테지만 아마 창모 씨와 법정까지 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렇죠? 대리 기사하는 친구라길래 혹시 액수 때문에 협의를 거절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쉽게 수긍하더라고요. 자신도 이 일로 오래 끌고 싶지 않다는 뜻을 보이기에 잘 협조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창모 씨가 크게 타격을 받을 일은 없겠네요.”

“그럴 겁니다.”

걱정하지 말란 듯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이는 변호사.

“오늘 출근하셨나요?”

“아, 오늘은 못 나오셨을 겁니다. 병원에 가셨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업무 복귀가 바로 되긴 힘들겠네요?”

“뭐, 일단 경찰 조사가 완전히 끝나야 확인될 내용이지만, 어쨌든 창모 씨가 먼저 주먹을 쓴 것은 본인도 인정한 바여서 그 부분에 있어 과실은 인정해야 합니다만, 그래도 쌍방 폭행 사건이었잖습니까? 평소 운동을 하던 이도 아니었으니 충격을 많이 받았죠.”

조사가 끝난 후 변호사는 창모를 데리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고, 거기서 요양 차 입원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 변호사는 말했다. 전치 4주 정도가 나왔으니 이삼일은 입원 치료를 받고 이후로는 통원 치료를 받기로 했단다.

“결국은 그런 거네요.”

“네?”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조금은 생뚱맞은 단유의 대꾸에 변호사는 의아해했다. 변호사는 살짝 굳어지는 본인의 얼굴을 감지하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 어제 보셨으니까. 몰골이 좀 엉망이긴 했죠?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런데 말입니다, 강 변호사님.”

“네?”

단유는 무표정한 얼굴로 변호사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변호사님은 이 일을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언제···부터라니요? 당연히, 어제 전화를 받고 알았죠.”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마치 연락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달려오시길래요.”

“하하, 오해십니다. 제가 무슨 신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사고가 날 줄 미리 알았겠습니까?”

이상한 질문을 한다는 듯, 또는 웃음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보려는 듯 변호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이를 바라보던 단유는 어젯밤 보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턱을 문질렀다.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한 가지 더 여쭐 게 있는데요.”

“뭡니까?”

“창모 씨의 차에 블랙박스 있잖아요? 그거 메모리카드가 없던데 혹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아십니까?”

변호사의 얼굴이 또 한 번 굳어졌고, 이번에는 아까처럼 자연스럽게 감추질 못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은 모양새지만, 대답은 지체없이 나왔다.

“아, 그거요? 며칠 전에 블랙박스를 업데이트 하려고 했다나, 뭐 그런 이유로 메모리카드를 빼놨었는데 미처 돌려놓지 못했답니다, 창모 씨가요.”

“처음부터 없었다는 말씀이시네요.”

“네. 만약 있었다면 창모 씨한테 좀 더 유리할 수 있었을 텐데, 저도 그 점이 많이 아쉬었습니다. 만약 그게 있었다면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대리 기사와 합의를 볼 수 있었을테니 말입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대충 이야기를 다 나눴고 그래서 이만 떠나려나보다 판단한 변호사도 단유를 따라 일어서는데, 단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강 변호사님?”

“네?”

“지금 나눈 이야기 중에 혹시라도 잘못 전달된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 제게 알려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대신 시간은 되도록 빠른 게 좋겠습니다. 너무 늦어버리면 변호사님에 대한 신뢰가 내려갈 테니까요.”

미소가 사라진 변호사가 이마에 깊은 주름살을 만든 채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무슨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 지금 되게 불쾌해졌소, 라는 표정을 짓는 변호사. 처음의 느슨했던 여유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어진 모습이다.

“창모 씨에게 물어봐도 아마 변호사님과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겠죠? 그러니 창모 씨께 갈 필요는 없어 보이고···. 일단 잘 들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도록 하죠.”

단유는 간단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사무실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간단히 조작하여 몇 가지를 확인 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굳이 바쁘게 처리할 일은 아니지만, 되도록 점심 시간이 오기 전에 처리하고 싶었다. 점심 시간 이후에는 오후 업무가 있었고, 무리하게 업무 시간을 줄여가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여유 시간이 있으니까 여유를 부릴 뿐, 회사 일과 자신의 업무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단유는 계단을 통해 3층으로 내려갔다. A&R팀이 있는 사무실은 3층 안쪽 복도를 따라 깊이 들어가야 나오는데, 가는 도중에 단유는 걸음을 멈췄다. 중간에 복도가 갈라지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작곡팀의 스튜디오가 나온다. 가는 중에 양쪽으로 방들이 있는데 그 방들은 작곡가들의 개인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단유는 닫혀 있는 한 사무실 문 앞에 섰다. 가볍게 노크를 하니 안에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휘둥그레 뜬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며 허겁지겁 일어서는 지아와 마주쳤다.

“이사님.”

보아하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밑에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아, 조금···. 어, 저기, 근데 선배님은···?”

“아마 병원에 갔을 겁니다.”

“병원이요? 많이 다쳤대요?”

단유는 변호사에게 들은대로 알려주었다. 전치 4주란 말에 놀란 지아는 2, 3일 정도의 휴양 후 통원치료를 받게 될 것인데 크게 다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설명을 덧붙이자, 그제야 지아는 내심 안심되었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창모 씨가 하던 작업들, 혹시 볼 수 있나요?”

“작업물이요? 그건 선배님 PC에 다 들어있을 텐데 지금은 비밀번호가 걸려있어서 확인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대충 그러리라 예상했던 바였기에 딱히 곤란함을 느끼진 않았다.

“이 컴퓨터 맞죠?”

“네. 그런데 비번이 걸려있어서···.”

“잠깐 봐도 될까요?”

“어, 그게···.”

“간단히 확인만 하면 됩니다.”

딱히 허락이 필요하진 않았다는 듯 단유는 컴퓨터 앞으로 갔고, 지아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단유가 컴퓨터를 켜고 마치 자신의 것인양 자연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려 컴퓨터의 잠금을 해제하는 것을 보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비밀번호?”

“어쩌다보니 알게 됐네요.”

단유는 마우스 몇 번 움직여 작업 폴더 안의 내용을 확인했고, 이를 지아에게도 확인받았다.

“이게 창모 씨가 작업하던 거 맞나요?”

“네.”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폴더를 닫고 컴퓨터를 종료시켰다.

확인은 끝났다. 그러나 마지막 확인을 해 줄 사람은 창모도, 지아도, 변호사도 아니었다.

오늘만 세 번째 노크. 각기 다른 사무실이었고, 이번에도 새로운 사무실의 문. 문을 열자 사무실 안에서 업무를 보던 직원들이 단유를 보더니 엉거주춤 일어서서 인사를 건넸다.

“팀장님 계십니까?”

“팀장님이요? 저기 안쪽에···.”

여직원 한 명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 파티션으로 막혀 있는 공간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바로 A&R팀의 박희수 팀장.

“어, 이사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단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용건을 밝혔다.

“팀장님을 뵈려고요.”

“저를요?”

“잠깐 시간 되세요?”

“어, 네. 잠시만요.”

희수는 마침 통화중이었는지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다시 들어 ‘나중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다시 단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단유는 팀장의 응대에 따라 파티션 뒤쪽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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