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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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모든 진실은 우리 앞에 있어요.”
다만 그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뿐, 이라는 단유의 말은 단순한 선험적, 혹은 철학적, 또는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나윤은 단유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보는 법’을 배웠고, 정말 진실이 우리 앞에 있음을 경험했다. 아직은 보는 법 자체도 미숙한 면이 있고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서 가끔은 헷갈리기도 하고 가끔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지만, 단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입증되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진실’에 대한 정의다. 문자 그대로 진실을 정의할 경우, 진실은 단지 사실에 불과하다. 다만 그 ‘사실’이란 것은 어떤 이유로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실이어야 한다.
‘오염’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이유가 중요하다.
“모든 진실은 그 자체로 순수해야만 해요.”
단유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흔히 보고 듣는 진실들, 책에서, TV에서, 혹은 경험을 통해서 얻는 진실들이 과연 진실 그 자체일까? 아주 간단하게 예를 들면,
“태양은 동에서 서로 향한다.”
어떤 면에서 이는 진실이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반시계방향으로 돌고 이를 지구에서 관측하게 되면 마치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니까.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태양은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니, 앞서와 같이 진술하거나 혹은 ‘관측지점’을 조건으로 명제를 더욱 구체화시켜야 비로소 온전한 진실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형태의 인식 하에서, 사실 이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초적인 과학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때로 관습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앞서와 같은 진술 형태로 사실을 서술하면 ‘오염’이 발생할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마치 진실인 양 언급되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진실이 아니다. 대체로 많은 경우, 승자에 관련된 사료들이 모여 기록된 역사서가 많다는 것 뿐이지 역사가 마치 승자의 관점에서만 쓰여진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말을 많이 쓰고, 또 그것이 진실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그럴듯한 핑계가 되기 때문이다.
진실은 자연에서 오염되지 않는다. 진실을 관찰하는 사람에 의해 오염된다. 혹은 진실을 특별한 의도로 전달하려는 사람에 의해 오염된다. 오염된 진실에 물들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되고, 다른 게 아닌, ‘틀린’ 판단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의 틀린 생각과 말, 선택은 곧 폭력이 된다. 그 사례는 무수히 많은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독재자들이 있다. 독재자들이 높은 강연대 위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말들. 그 속에는 오염된 진실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 나아가 국가를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거기까지 닿지 않더라도, 오염된 진실이 사람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언론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논문들에서 볼 수 있으며, 비과학적 오류들이 만들어내는 참상들에서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단유는 오염된 진실을 경계해야 한다고 나윤에게 가르쳐 주었다. 오염된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항상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단유는 말한다.
“의심하세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검증하고 확인하는 습관을 길들여야 한다. 타인의 말뿐 아니라 자신의 말에서도 거짓이 없는지,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기만하려거나 특정한 의도를 담아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고 단유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단유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오염을 경계해야 하는 주체는 바로 자신이다. 그런데 스스로가 오염되어버리게 되면 과연 진실을 올바르게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
‘믿음’은 다른 무엇도 아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스스로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무턱대고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태만에 빠지지 않고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속의 향락과 쾌락을 멀리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수도사들의 삶처럼,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속해야 하는 법이다.
단유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다. 스스로에 대한 단속. 자신이 뱉는 말은 무조건 지킨다는 책임감도 있지만, 사소한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스스로를 교만하지 않게 하며 의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하나의 기준이 되어 진실을 판가름할 수 있게 된다.
“단유의 스스로를 믿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니 자연히 곁에 있는 사람들도 그를 믿을 수밖에 없게 되는 거지요. 단유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노력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더라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유진 씨가 단유를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고 봐요, 저는.”
“좋은 말씀이시네요. 100% 이해했다고는 못하겠지만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어떤 사람이든 기준이 있어요. 그게 자신이든 타인이든. 보통은 자신이 되지만 때로는 타인이 기준이 되는 경우도 있죠. 소위 롤모델이라고 하는 거, 있죠? 어릴 때 많이들 묻잖아요?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그렇게 기준이 있어요. 아까 유진 씨가 그랬죠? 일관성없이 기준이 바뀌는 사람은 싫다고. 그런데 지금 유진 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알 거 같아요. 유진 씨 본인이 바로 그 기준이 없다는 것.”
“정말 오늘 제게 모멸감을 주기 위해 작정을 하신 거 같네요. 초면에 말이죠.”
“유진 씨를 일부로 곤혹스럽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최대한 진실되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요. 괜히 배려한답시고 이리저리 말을 덧붙이기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를 이야기해야 오해가 덜 쌓일 것 같으니까.”
“좋아요. 그럼 제가 기준이 없다는 건 무슨 근거에서 하신 말씀이신가요? 선배님?”
“유진 씨는 꿈이 있다고 하셨죠.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루겠노라 하셨죠. 하지만 유진 씨의 말 속에 유진 씨의 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가치관은 보이지 않아요. 그저 꿈만 이룬다고 유진 씨의 인생이 끝은 아니지 않나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 건데요, 유진씨는?”
나윤의 물음에 유진은 발끈하며 대답했다.
“뭔가 장황하게 설명하려 드시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우습지도 않네요. 기준이 없다느니, 가치관이 보이지 않는다느니. 꿈만 이룬다고 끝이 아니라고요? 아니요. 그 꿈이 제 인생이에요. 꿈을 이루고 난 뒤의 나머지는 어쩔 거냐고요? 그건 보너스에요.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 제게 주어지는 곁다리죠. 돈? 명예? 제가 그런 걸 욕심내는 것 같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주어지는 거예요. 제가 이룬 꿈의 댓가로서 말이죠. 아는 척 말아요. 오히려 제가 보기엔 선배님은 그저 변절자일 뿐이니까요.”
“변절자요?”
“자신의 꿈을 배신한 사람. 변절자죠. 적당히 현실의 핑계를 대면서 스스로의 노력을 포기한 사람.”
나윤은 할 말을 잃었고,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단유가 등장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긴장된 거실 분위기를 살피던 단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온도 설정.”
그러자 거실 어디엔가에서 들리는 목소리.
“설정 온도는 26도이며 현재 거실 온도는 24도입니다.”
“28도로 맞춰줘.”
“설정 온도 28도로 맞춥니다.”
뜬금없는 단유의 명령과 거기에 호응하는 목소리에 나윤과 유진은 조금 전까지 나누던 대화를 잊을 정도로 신기해하다가 단유에게 물었다.
“뭐니, 방금?”
“아까는 급하게 나가느라고 몰랐는데 거실이 꽤 쌀쌀했었네. 안 추웠어?”
나윤은 추운 줄도 몰랐다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뭐였는데? 혹시 그렇게 말로 하면 저절로 난방 온도가 맞춰지고 그러는 거야?”
“응.”
“···너 정말 좋은 데 사는구나.”
실은 단유가 직접 시스템을 만들어 설치한 것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대신 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이야기는 많이 나눴어?”
유진은 나윤을 흘겨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많이 했나 보네. 도움이 됐어?”
“도움?”
비웃음이 섞인 그 한 마디에 유진의 소감이 모두 담겨 있었다. 유진은 옆에 내려뒀던 백을 챙겨들며 일어섰다.
“충분히 이야기했고, 충분히 많은 도움이 됐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
단유와 나윤을 번갈아 보던 유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연락 안 할게.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으니까.”
“그래.”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반응에 유진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너 정말···.”
“만약 누나가 네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네게 도움이 될 말을 해줄 수 없었다는 뜻일 거야. 난 누나보다 말재주가 없으니까.”
“······.”
“온도 맞춰달라고 요구하면 군말 없이 맞춰주는, 그런 기계 같은 반응을 원했던 건 아닐 거야. 만약 그런 걸 원했다면 네가 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 테고.”
“내가 몰라도 한참 몰랐네. 너무 몰랐어. 미안할 정도로 몰랐네. 너란 사람. 그리고 선배님도.”
“마찬가지잖아?”
“뭐가? 뭐가 마찬가진데?”
“싸움닭처럼 굴지 마. 처음부터 손수건 손에 쥐고 불쌍한 척 한 건 너였어.”
“야, 김단유!”
“만약 처음부터 네가 너의 모습을 숨김없이 밝혔다면 나도 조금은 널 돕고 싶어졌을 거야. 하지만 넌 숨기고 감추려 들면서 도움을 바랐고, 난 그런 도움에 응해줄 마음이 없었을 뿐이니까, 이렇게 헤어지는 게 맞아.”
“···정말 두 사람, 대단하구나, 대단해.”
“바래다줄까?”
“그만하지? 더는 두 사람에게 설교 듣고 싶지 않으니까.”
화가 난 얼굴로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던 유진은 갑자기 자리에서 우뚝 섰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더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단유와 나윤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 무슨 관계야?”
단유와 나윤이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자,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무슨 상관이람.”
잠시 후, 문이 세게 닫히고 거실에는 잠시 정적이 돌았다.
“잠깐 나갔다 올게.”
“바래다 주게?”
“택시 타는 건 봐줘야지.”
“같이 나가. 나도 가야 하니까.”
옆에 뒀던 겉옷과 백을 챙기며 일어서는 나윤과 단유는 함께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까는 무슨 일이었는데?”
“음, 간단히 설명하기 어렵네. 여러 가지가 얽혀서.”
“그래? 난 갑자기 연락이 오니까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그리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던 거야?”
단유는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나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어.”
“네가 걱정해야 할 문제니까?”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 걱정이라기 보다는 그냥 조금 신경이 쓰이는 정도? 사실 오늘보다 내일이 좀 더 신경 쓰이지만.”
단유는 이내 멀찍이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유진을 발견했다.
“유진아.”
소리에 돌아보던 유진이 단유를 확인하고는 자리에 우뚝 섰다.
“오지 말라니까!”
단유는 나윤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후 유진에게 다가갔다.
“한 가지 말해줄 게 있어서.”
“···또 뭔데? 할 말이 남았어?”
“너희 회사에 너에 관련된 영상들은 이제 없을 거야.”
“뭐?”
“거기까지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이었던 거 같아. 더 도와주지 못해 유감이네.”
“···아까 나갔던 게 그것 때문이야?”
“겸사겸사. 아무튼 거기까지는 이제까지 내 친구로서 함께 해줬던 너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해줘.”
유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구나, 김단유.”
“그래?”
“그래서 더 단유답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가?”
“···그럼 이제 우리 끝인거니?”
“끝이라고 표현하면 이상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건 분명하겠지.”
유진의 눈동자가 복잡한 의미를 담은 채로 단유를 향했지만, 단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덤덤한 시선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래. 알았어. 어쨌든 고맙다.”
“택시 타는 데까지 같이 가줄게. 늦었는데.”
“됐어. 넌 선배님한테나 가봐.”
“알았어.”
단유는 거절하지 않았고, 유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돌아서는 유진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 나윤이 다가와 물었다.
“다 끝난 거야?”
“응.”
나름 깔끔하게 관계를 마무리한 셈, 이라고 단유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