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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942화 (942/95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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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 억지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나윤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 아니라,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술회하는 내용이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다. 어떤 면에서는 유진이 밝힌 소신과 신념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도 있다. 꿈을 향한 열정과 확고한 의지, 신념은 존중받아 마땅하고, 나윤은 충분히 그녀를 향해 손뼉 쳐 줄 마음이 있었다. 비록 나윤 스스로는 유진의 가치관에 따를 자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 다름을 인정한다면 얼마든지 그녀의 인생을 존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평생에 걸쳐 노력한 결과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면 그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도전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그건 부질없는 말장난이라고 전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자기 위안 하는 건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어요. 혹은 애초부터 그것이 자신의 꿈이 아니었거나. 꿈이란 건 목숨을 걸고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꿈인 것이고, 도전한 이상 어떻게든 그 결과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결과를 위한 과정이 깨끗하지 않으면 그 결과 역시 깨끗하지 않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같은 말 계속 똑같이 하시는데, 까놓고 말해서 도대체 그 깨끗함이라는 거, 누가 결정하는 거죠? 선배님이요? 아니면 어른들이요? 아니면 누가 깨끗한지 아닌지를 결정하죠?”

“이 사회가 결정하죠.”

“하, 선배님. 그런 말 들어보셨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Winner takes it all. 사회는 승자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에요.”

도저히 간극을 좁히기 어렵다. 그녀는 확고하고 자신이 넘쳤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녀가 지금까지도 연예계에 자리하고 있는 이유고, 그녀의 행보가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지금 왜 단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죠? 단유의 도움 없이도 유진 씨는 성공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전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혼자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데요?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 아닌가요?”

아, 그렇구나. 그녀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고, 언제든지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그런 것으로 그녀의 자존심이 상처 입진 않을 거라는 것처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유진이라는 사람. 워낙에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어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

나윤은 짧은 감탄성을 뱉었다. 이제야 단유가 왜 나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여기는 제게 맡기시고 두 분은 들어가시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금방 끝날 일은 아니니까요. 물론 밤을 샐 일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두 분이서 여기서 괜히 시간을 죽이며 기다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아의 진술이 끝난 후 변호사는 두 사람에게 귀가를 권했다.

“상대측과 합의도 할 겸 이야기를 나누고 하다 보면 시간이 더 걸릴 겁니다. 어쨌든 두 분은 먼저 들어가시고 내일 오전 중으로 이사님께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단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몸은 피곤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조금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집에 모시고 온 손님들도 있으니 들어가긴 해야 했다. 그러나 비단 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아 씨도 들어가세요. 괜찮으니까요.”

“하지만···.”

“어차피 여기서 지아 씨가 더 할 일은 없습니다. 기다리신다고 해서 더 나아질 상황도 아니고. 그리고···창모 씨도 지아 씨가 여기 계시는 걸 그리 달갑게 여기진 않을 겁니다.”

경찰과 다시 마주한 창모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지아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어디에 있어요?”

“아마 아파트 안에 있을 거예요. 오기 전에 경비 아저씨께 부탁을 했거든요.”

“여기서 머나요?”

“아뇨, 그리 멀지는 않아요.”

“밤도 늦었으니 일단 데려다 드릴게요. 잠시만요.”

단유는 변호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차 키를 받아왔다. 변호사의 차를 타고 지아를 데려다주는 길에, 지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이사님 차는요?”

“안 가지고 왔어요.”

“그럼 택시 타고 오신 거예요?”

단유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이 자신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착각한 지아는 미안해 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전화해서.”

“죄송할 필요 없다니까요.”

“그래도 저 때문에 늦은 시간 오셔서 고생하셨는데.”

말이 길어질수록 부담스러운 사과만 계속 받을 것 같아 단유는 화제를 돌렸다.

“이제 많이 적응하신 것 같네요, 회사에.”

“네? 아, 네.”

“어때요? 일하는 건?”

“아직 많이 부족하죠. 계속 배우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렇군요.”

단유의 대답 이후, 지아는 뭔가를 궁리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서 많이 가르쳐주시고 계셨어요.”

“창모 씨가요?”

“네.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게, 꼼꼼하게 가르쳐 주셔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섬세하신 분이시거든요. 다정하시고요.”

“그렇군요.”

단유의 심심한 대답에 지아는 다시 말을 이었다.

“평소에는 정말 과격함이라곤 일도 없는 분이셨는데, 갑자기 이런 일이 나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싸움을 벌이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나봐요?”

“아뇨, 제 말은, 그러니까 오죽 화가 나셨으면 그러셨을까 싶은 거죠. ···솔직히 제가 옆에서 봤을 때는 선배님이 잘못하신 건 하나도 없거든요. 그 대리기사 하시던 분이 먼저 시비를 걸었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 하는 말도 이상하고요. 조금 기다리게 한 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이었을까 싶기도 하고.”

“······.”

“그러니까 어···, 아까 이사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쌍방 폭행이 될 것이라고. 선배님도 잘못이 있다고. 그런데 전 그 말에 동의하기 힘들어요.”

“억울해요?”

“조금요. 아니, 많이요. 물론 선배님이 주먹을 쓴 건 맞지만, 그 전에 그 사람이 되게 화가 나게 만들었단 말이에요. 만약 제가 선배님 입장이었으면, 저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거예요.”

단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파트에 도착한 단유와 지아. 차에서 내린 지아가 단유에게 인사를 건넸다.

“먼저 들어갈게요.”

“잠시만요.”

“네?”

“그 전에 경비분께 차키를 받았으면 하는데.”

“차키요? 아, 선배님 차요?”

“네.”

“잠시만요.”

지아는 경비실로 가서 차키를 받아 단유에게 건넸다.

“그런데 지금 이거 몰고 가시기 힘들지 않으세요?”

“그냥 확인만 조금 하려고요.”

“확인이요?”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식 키의 버튼을 누르니 멀찍이서 번쩍하며 헤드라이트가 켜졌다. 차로 향하는 단유의 뒤를 지아가 총총 따라왔다.

“혹시··· 블랙박스 확인해 보시려고요?”

“네.”

그러나 이미 차 안의 블랙박스에는 메모리카드가 사라져 있었다.

“어? 없어요?”

“네.”

“어떻게···.”

단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까 출동했을 때 경찰이 가져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애초에 메모리카드가 꽂혀있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제삼자가 가져갔을 수도 있고.”

“제삼자요? 누구요?”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이야깁니다.”

단유는 차 내부를 대충 훑어본 뒤 나왔다. 그리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지아에게 이만 들어가 보라고 권했다. 지아는 정말 이대로 들어가도 되는지 자신할 수 없어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지아 씨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만 들어가서 쉬세요.”

“이대로 들어가도 편히 쉬긴 힘들 거 같아서요.”

단유는 어깨를 으쓱이며 변호사의 차로 돌아갔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아, 저기요.”

“네?”

“저기 혹시 내일 변호사님께 이야기 들으시면 저한테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변호사님이 먼저 지아 씨께 이야기를 드릴 겁니다.”

“아, 네.”

단유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지아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마주 인사하는 지아를 뒤로하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단유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다시 지구대로 돌아갔다.

“어? 왜 도로 오셨습니까? 집에 가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변호사님 찬데 돌려드려야죠.”

“전 택시 타고 돌아가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여기.”

“아, 네.”

변호사는 공손하게 단유가 건네는 키를 받았다. 단유는 변호사의 뒤를 보며 물었다.

“끝났습니까?”

“아, 네. 거의.”

“그렇군요.”

단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지켜보다 다시 변호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뭘요.”

멋쩍어하는 변호사를 가만히 지켜보던 단유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예. 먼저 들어가십시오. 내일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창모 씨는 변호사님께서 집에 데려다 주실거죠?”

“네? 아···네.”

“알겠습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인사에 괜히 초조해지는 인상의 변호사.

“그런데 변호사님.”

“네?”

“혹시 집에 계시다 오신 겁니까?”

“네? 아, 네.”

“집이 가까우십니까?”

“가깝진 않은데, 지금 이 시간엔 차가 그리 밀리지 않는 편이라···. 그런데 왜 그건 왜?”

“그냥 확인차 여쭸습니다.”

“확인 차요?”

“네.”

“뭘···?”

“내일 이야기하죠. 지금은 제가 미뤄둔 일이 많아서요.”

이 시간에 미뤄둔 일이란 게 도대체 뭔지 궁금하지만 변호사는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신도 되도록 빨리 이 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

“왜 그러세요?”

나윤의 탄성에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 유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서요.”

“뭘요?”

“유진 씨에게 제가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

“이미 충분히 하신 거 같은데요?”

처음과는 사뭇 달라진 유진. 꼬박꼬박 ‘선배’라 호칭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선을 그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윤은 이해했다. 애초에 제대로 그녀를 이해하지 못해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그녀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모양이니까.

“죄송해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난 유진 씨가 되게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유진 씨를 단유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무슨 뜻이죠? 그게?”

“그 전에 하나 물을게요. 유진 씨가 보기에 단유는 어떤 사람이에요?”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단유는 그냥 좋은 사람이죠.”

“어떤 의미로 좋은 사람인데요?”

“대답하기 싫어지는 기분이지만 굳이 답하자면, 단유는 이지적이고 냉정해요. 누구처럼 일관성없이 바뀌는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보지 않죠. 그래서 맺고 끊음이 확실해요. 전 그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착한 사람인 척 하지 않고, 가식적이지도 않는 사람. 솔직한 사람. 그렇기 때문에 난 단유의 진심을 의심해 본적이 없어요. 그는 누군가를 속이려들지 않으니까요.”

중학교 시절, 단유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진이었다. 그 시절, 연예계에 발을 들이며 만났던 수많은 어른들과 그 사람들이 쓰고 있던 가면들을 목도하며 환멸을 느끼던 때였다. 그런 어른들의 세계에 어울리기 위해 자신도 가면을 써야 했고, 그런 자신이 부끄럽던 시절.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 유일하게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던 때였으리라.

그래서 그처럼 당당하고 싶었고 솔직하고 싶었다. 비록 단유가 가는 길, 목표가 유진과는 달랐지만, 유진은 단유가 세상을 향해 대처하는 자세를 본받고 싶었다. 물론 그것을 온전히 따라할 수는 없었다. 단유가 살아가는 세계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계는 다르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계,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할 세계에서 솔직하게, 당당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녀는 서울대를 지망하기에 이르렀고, 남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옷을 벗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유와 유진 씨는 근본적으로 다르죠.”

“그게 뭔데요? 혹시 단유는 깨끗하게 살았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예요?”

“단유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죠.”

“······.”

“거짓말을 할 줄 몰라서 하지 않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거짓말을 하기 싫어하는 거죠. 병적이라고 느낄 만큼.”

“그래요. 전 거짓말도 해요. 하지만 누군가를 악의적으로 속이기 위해, 혹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요.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요.”

“그렇군요. 하지만 단유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를 저는 이렇게 봐요.”

나윤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다음에 이어질 단어를 유진의 가슴에 정확히 박아 넣는다는 심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발음했다.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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