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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940화 (940/95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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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은 뒤 나윤은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훔쳤다. 물기가 묻어난 엄지손가락을 비비며 생각을 정리했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 누군가는 연예계 1년이 일반 사회 생활의 10년과 같다고 거만하게 말하기도 하지만, 꼭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어렸을 적부터 해서 십여 년간 실패와 성공을 겪으며 지금에까지 이른 지금. 적지 않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 누군가에게 조언 한 마디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정도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20대 초반의 자신은 어렸고 모자랐지만, 당시에는 세상 모든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며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고 착각했었다. 철없는 어른들보다 자신이 낫다고 착각했었고, 겉만 보며 착각하는 사람들과 달리 속을 꿰뚤어볼 줄 안다고 착각했었다.

때문에 지금의 나윤은 10년 전의 나윤과 다르다. 그리고 지금의 나윤과 10년 후의 나윤이 또 다를 거란 사실을 짐작한다. 그러니 지금의 지식과 상식, 경험을 토대로 누군가에게 훈계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짓임을 자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유진을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저 나이 대의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다만 그녀가 아는 세상과 진실은 20대의 유진이 아는 세상이고 진실일 뿐이니 10년 뒤의 유진이 지금의 모습을 떠올리면 창피하고 부끄러울 거란 사실을 짐작해 볼 따름이다. 때문에 단지 불쌍할 따름이다.

그래서 조언을 해줘야 하는가.

글쎄···.

조언이란 게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부분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나윤은 처음 만난 유진에게 애정과 관심이 없다. 시간이 더 지나더라도 생기진 않을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은 나윤이 그녀에게 해 줄 조언이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만약 지금 그녀에게 그녀의 가치관에 대해, 삶에 대해 한마디를 한다면 그건 조언이 아니라 훈계가 될 것인데, 훈계를 할 자격은 그녀에게 없었다.

단순히 말하면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만약 단유가 이렇게 자리를 깔아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아.”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와중에 느꼈던 동정심도 지금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단지 가여울 뿐이고 애처로울 뿐이다. 도와야 할 의무도,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단유만 아니라면.

‘쟤한테 무슨 말을 해 주란 말이지?’

나윤은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거실로 걸어가 유진에게 건넸다.

“괜찮아요.”

“마셔요.”

“괜찮은데요.”

“그래도 마셔요.”

“명령이에요?”

“···마시고 우선 진정해요.”

“제가 흥분한 것처럼 보이세요?”

“어떤데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잠깐의 침묵 후 유진은 나윤의 손에서 컵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도 마시지 않으니 나윤이 덧붙였다.

“이야기 많이 했으니까 우선 목을 축여요. 배우라면서요? 가수만큼이나 목소리와 발성에 신경 써야 하는 직업인데 목관리는 제대로 해야죠.”

나름 명분있는 이유라 유진은 못 이기는 척 입술을 적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큐멘터리 좋아해요?”

뜬금없는 질문.

“네?”

“저는 동물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서 가끔 유튜브에서 찾아보기도 하거든요. BBC에서 그런 쪽으로 재미있는 영상들을 많이 만들기도 하는데, 시간 날 때면 가끔 찾아봐요.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요.”

“그런데요?”

“동물도 스트레스를 받는데요.”

“스트레스요?”

“네. 그리고 장기간 극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자해를 하기도 한다네요.”

“그게 어때서요?”

“그런데 보통 자해를 하는 동물은 대부분 지능이 극히 높은 포유류과에서 나온대요. 바꿔 말하면 지능이 높지 않은 동물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도 자해를 하진 않는다는 뜻이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뿐이겠지만, 전 되게 슬프다고 생각했어요. 오죽하면 자신에게 해를 가할까. 바닥에 머리를 찧는다거나, 자신의 발을 물어뜯는 다거나 하는 동물들의 영상을 보면 절로 눈물이 날 정도예요. 사람은 그래도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라도 있지, 동물들은 그러지를 못하잖아요?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그 답답함이 자해로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슬프더라고요.”

“감성적이시네요.”

“그런 면도 없잖아 있어요. 어릴 때 노래 배울 때는 노래에 감정을 못 싣는다고 구박도 받고 그랬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럴까, 점점 감성적으로 돼가네요. 아무튼 그런 동물들의 영상을 보면 슬프고 답답해지니까 한 번은 카라에 가입해서 비정기적으로라도 활동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었죠.”

“카라요?”

“동물보호단체예요. Korea animal rights advocates.”

“아.”

“그런데 말이죠. 자해를 하는 대표적인 포유류가 뭔지 아세요?”

“···사람이요?”

“네. 맞아요. 사람은 스스로에게 위해를 가하는 몇 안 되는 생명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왜 그럴까?”

문득 유진은 이 뜬금없는 대화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의문이 드는 동시에 답도 떠올랐다.

가끔 단유와 대화할 때면 이랬었지.

“인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잖아요? 음악을 듣는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혹은 대화를 통해서. 뭐, 가끔은 대화를 하다가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다지만, 어쨌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을 못해서 답답함을 겪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거예요.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많은 병을 앓는다고들 하니까, 확실히 스트레스가 문제긴 해요. 그렇죠?”

“그래서 지금 저한테 스트레스가 많냐고 물어보고 싶으신 건가요?”

“조금 전 말한 것과 같이,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장시간 노출된 사람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제대로 해소시키지 못해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하게 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픈 거예요.”

“만약 제가 그런 사람이냐고 묻는 거라면, 전 그렇지 않다고 답해드릴 수 있겠네요. 보이시죠? 저 손목 깨끗해요.”

“자해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죠.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예를 들면요?”

“자신의 지출 한계를 넘어서까지 쇼핑에 몰두하는 경우라든가, 혹은 도박에 빠져서 현생을 포기할 정도가 된다거나 하는 일들, 종종 듣고 보는 일들이잖아요?”

“중독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래서 제가 섹스 중독에라도 걸린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으신 거예요? 둘러 말하실 필요 없어요. 전 그런 거 아니니까. 말했죠? 전 단지 제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일 뿐이라고.”

“꿈이라. 아마도 들어봤겠지만, 수험생들 중에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아이들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사례에 대해 아시나요? 수능이 끝난 후 자살을 시도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왜 그랬을까요? 사실 수능이란 것도 다시 준비해서 다음 해에 도전하면 되는 거잖아요? 고작 한 번의 시험에 좌절해서 자살을 시도한다는 게 이해되세요?”

“······.”

“그게 바로 꿈이란 이름 아래 스스로를 극단적인 스트레스 상황으로 몰고간 것, 이라고 전 생각해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을 만큼 자신을 몰아붙이게 만드는 명분이 바로 꿈이란 거죠.”

거실이 참 조용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고 해도 살다 보면 외부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나 옆집의 TV 소리, 또는 이웃 사람들이 내는 다양한 소음들이 들리기 마련인데 이 집은 방음이 잘 되는지 외부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고, 내부에도 시계 소리라든가 기타 소음을 내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나윤이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으면 절로 잠이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한 공간이었다. 아마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푹신한 소파의 도움을 받아 쉽게 잠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 정적이 뇌 속 깊숙한 곳을 자극했다.

과거의 추억, 현재의 기억, 미래에 대한 상상이 머리속에서 우후죽순 돋아나는 것 같다. 나윤은 과거의 추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제가 연습생일 때, 가수를 준비할 때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남들은 쉽게 쉽게 해내는 것을 난 왜 못할까, 생각하며 탄식하던 날이 많았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어요. 제 꿈은 명확했고, 그 꿈을 이루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거든요. 만약 가수가 되지 못한다면 난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단정했어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때문에 미친 듯이 연습했고 노력했어요. 비 오면 곰팡이 냄새가 나고 하루의 끝에는 찌든 땀 냄새에 익숙해져 버린 몰골로 숙소를 향하곤 했어요.”

유진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오디션 장소를 전전하고, 가끔 광고 현장에 나갈 때면 감독과 스태프들의 귀염을 독차지하며 스타로 지냈다. 그러나 진짜 ‘스타’는 아니었기에 더더욱 진짜 ‘스타’에 대한 갈망으로 차올랐던 시절이었다. ‘스타’ 외에 다른 것은 전혀 떠올릴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전, 가수는 아니네요. 보다시피.”

그러나 슬프지 않았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진 않으니까. 아직까지 유진은 모른다. 꿈을 이루지 못해도 슬프지 않다는 사실을.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윤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가수가 되었다면 더 기뻤겠지만, 그렇다고 지금 제 모습이 부끄럽다거나 슬프진 않아요. 반대로 10년 뒤의 유진 씨는, 어쩌면 저보다 나은 처지일지도 몰라요. 본인이 말한 것처럼 계속 ‘노력’을 하니까. 그런데 말이죠. 그렇더라도 부디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지금 깨끗한 그 손목처럼, 몸도 마음도 깨끗하길 바라니까요.”

꿈은 희망이어야지 스트레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로 스스로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보이는 부분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갉아먹는 게 스트레스니까.

****

경찰보다 먼저 달려온 것은 신고를 받은 아파트 경비원이었다. 60대를 훌쩍 넘은 듯 보이는 흰머리 경비원이 다가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기서들 뭐하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서로 멱살을 잡지 못하고 개싸움을 펼치던 두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경비원을 쳐다보았으나 그것도 잠시 뿐, 싸움을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는 다시 주먹을 서로에게 뻗고 휘둘렀다.

“어어, 이러면 안 되는데?”

“선, 선배님?”

이미 두 사람의 싸움은 단순한 말싸움의 정도를 넘어섰다. 어쩌다 우연히 얼굴을 정확히 가격해도 자신이 때린 곳을 정확히 보고 휘두르는 이가 없다 보니 그저 주먹이 조금 아프구나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어이쿠.”

밀쳐진 경비원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자, 발을 동동 구르던 지아가 달려가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래요, 이게? 아이구, 죽겠네.”

다행히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진 않으니 안심하고 지아는 다시 창모를 불렀다.

“선배님, 그만하세요!”

이미 멈출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러 두 사람은 손과 발을 되는대로 휘두르는 중이었다.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것인가가 관건이 된 싸움이었다.

주변 아파트동에 살던 주민들이 베란다 문을 열고 관전하던 개판 오분전 상황이 멎은 것은 약 2분여 후, 경찰이 도착한 뒤였다.

경찰차 뒷좌석에 앉는 순간까지 지아를 바라보지 못하는 창모를 먼저 보낸 후, 따로 택시를 잡아 경찰서로 향하는 지아였다.

‘어떡하지?’

경찰서도 처음이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도와줄 사람.’

경험과 상식이 부족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떠올리는 순간, 지아는 자연스럽게 단유를 떠올렸다. 이제껏 자신의 인생에서 ‘도움’이란 걸 직접적으로 제공해 준 이는 단유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으니, 지아에게 단유는 ‘키다리 아저씨’였다. 곤란할 때는 늘 키다리 아저씨를 부르게 되는 법일까?

“이사님, 제발 좀.”

신호가 울리는 데 전화를 쉬이 받지 않는 단유였다. 다른 사람을 찾아볼까 생각하며 연락 가능한 사람들을 떠올리던 와중, 핸드폰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이사님!”

―네, 지아씨. 무슨 일이시죠?

“그게요.”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서 지아는 자신이 제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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