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39화 (939/95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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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목을 부여잡고 켁켁거리며 발버둥을 치는 남자들을 내려다보던 창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니, 단유가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고, 한 걸음 다가오면 두 걸음 물러선다.

“으으.”

오지 마, 라고 말하려던 것인데 혀가 마취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질 않아 신음소리만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다행히 창범의 의사가 제대로 먹혀들어 갔는지 단유는 다가오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일관성 있는 단유의 요구에 창범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단유에게 건넸다.

“여, 여기요. 살려, 주세요.”

단유는 손에 들린 USB 메모리칩을 슬쩍 본 뒤,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키는 창범. 그리고,

“이사님!”

창범의 팔을 붙들며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놀란 창범이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조금 전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던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사내만큼이나 놀란 얼굴이 된 창범에게 사내가 말했다.

“왜 그걸 주는 겁니까?”

“어떻게, 어떻게 지금···.”

너무 놀란 창범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이사님 미쳤어요? 지금 그걸 그렇게 쉽게 주면 어떡해요?”

미친 사람 쳐다보듯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을 향해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들었다.

“다, 당신 어떻게? 방금 주, 죽었잖아?”

“누가 죽었다고 그래요?”

사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창범을 바라보았다.

“방금 여기···.”

창범이 고갤 돌리고 쓰러진 사내들을 가리키려는데, 조금 전까지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리둥절한 눈으로 창범을 바라보는 사내들이 서 있을 뿐이었다.

“으어허!”

기함을 뱉으며 눈을 뒤집는 창범.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서고, 그 모습을 본 사내가 단유의 뒤를 지키고 있던 남자들에게 외쳤다.

“야, 그 새끼 잡아!”

두 남자가 단유의 길을 막고 붙잡았다.

“어딜 그냥 가려고?”

사내는 뒤로 돌아선 단유의 등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창범이 자신들 같은 전문가가 아닌 이상, 뒤를 밟혀서 은밀해야 할 현장이 노출되는 사고가 벌어질 수 있음은 이해한다 쳐도, 이런 자리에서 자신을 비롯해 건장한 남자 둘이 둘러싸고 있음에도 태연한 얼굴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야 옳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가 아무리 돈이 많든, 혹은 자기들처럼 음지에서 활약하는 이들을 우습게 볼 수 있을 정도의 권력을 지녔든 의미가 없다. 막말로 세 사람이 합심해서 묻어버리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걸 모른다면 저렇게 태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다.

단유는 한숨을 내쉬며 고민했다. 조금 전 창범에게 보여줬던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도 되는지에 대해 잠시 고민해보았는데, 역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렸을 적에야 그저 자기방어를 위해 조금 과도하게 힘을 쓰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그럴 명분도 없을뿐더러 정신적 트라우마의 긴 후유증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 사람 씩에게 모두 환상을 걸기엔 다른 사람들이 마냥 기다려줄 것만 같진 않다.

사내의 명령에 단유를 막고 선 남자가 단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소위 기선제압이라는 것이다.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이지만, 자신이 힘껏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열에 아홉은 기가 죽어 눈을 내리깔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유는 그 시선을 받으며 짧게 혀를 찬다. 그리고 가슴을 밀치는 남자의 손을 붙잡아 비틀었다.

“어어?”

통증을 느끼기 전에 손을 빼려는 남자. 그러나 단유의 단련된 악력은 쉬이 볼 수준이 아니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방심하고 있는 상대에게는 마법도 사치였다. 그저 손을 비틀고 갑작스런 통증에 당황하는 사이 파고들어 허리로 상대를 업고 손을 잡아당기면 무게중심이 흐트러진 남자는 꼼짝없이 공중을 날아 바닥에 메쳐지게 된다.

그간 틈틈이 운동 삼아 격투기를 배워둔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피해낸 뒤 숨을 고르고 상대의 한 팔을 감싸 겨드랑이에 끼운 뒤 몸을 틀어 관절이 반대로 꺾이도록 하면 제대로 격투기를 배우지 않은 이상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게 된다.

거기에 한쪽 무릎을 꺾으며 몸의 중심을 낮추면 단유에게 붙들린 남자 역시 강제로 몸을 숙여야 하는데 이때 몸은 단유보다 더 낮은 위치로 향해야 고통이 덜하다. 지금과 같은 경우라면 바닥에 밀착해야만 가능한 상황.

“아악!”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새된 비명을 묵묵히 견디며 남자의 팔을 좀 더 강하게 꺾어 올리면, 어디서 본 거는 있는지 바닥을 탭하며 풀어달라는 본능적인 발버둥을 친다.

이쯤에서 그를 풀어주고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키면 그때까지 관망만 하던 사내가 사커킥을 할 요량으로 뒷발을 힘껏 밀며 뻗는데, 그가 명수 정도로 단련된 축구 선수가 아닌 이상 그 정도에 맞아줄 단유는 아니었다.

비스듬히 피하며 몸을 일으킨 단유는 어깨를 슬쩍 돌리며 몸을 풀었다.

“이 새끼가···.”

단세포 원시생물 수준의 언어 구사력이라 할 만큼 뻔하고 단순한 욕을 입에 담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사내. 오른손을 뒤로 힘껏 당겨 내뻗는데, 하체를 제대로 이용하지 않고 고관절이 고정된 상태에서 단순히 견갑골의 회전만을 이용하니 제대로 힘도 실리지 않을뿐더러 광배근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해 속도도 느리다. 한 마디로 날아오는 주먹을 맞아주기가 무척 힘들다는 뜻. 게다가 주먹이 날아오는 방향도 뻔해서, 앞으로 내뻗는 펀치가 아니라 비스듬히 휘두르는 궤도의 펀치 정도는 상체를 살짝 뒤로 물리는 정도로 피할 수 있었다.

“어라, 이 새끼 봐라?”

허공을 가로지른 주먹의 힘에 몸이 크게 돌아가지만 금방 균형을 찾고 뒤이어 왼손을 휘두르는 사내. 하지만 오른손의 주먹보다 더 느리고 힘도 덜 실려서 그냥 맞아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지만 굳이 맞아줄 이유는 없으니 이번에도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주먹을 흘리는 단유. 새벽 운동 삼아 다니기 시작한 트레이닝 센터에서 종종 파트너로 함께 운동하는 남학생과 합을 맞춰 연습하는 게 더 긴장감이 넘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위빙과 더킹, 스웨이백을 적절히 섞어 상대의 공격을 회피해야 한다던 관장님의 지도를 철저히 따른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 정도라면 굳이 그런 훈련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긴장감이 없는 방어였다.

아직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두 남자가 있었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아서 단유는 여유롭게 주먹을 피하며 사내를 관찰했다. 분노로 가득 찬 눈동자, 하지만 그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 악 다문 이와 불거진 하악근, 조바심내는 표정과 당황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이 주먹에 실려 공기를 가르, 지만 단유에게는 닿지 않았다.

칼날 같은 강바람이 더 매서울 정도.

주먹 몇 번 내질러도 닿지 않고, 짐승같은 표정으로 노려봐도 평온하다 여길 만큼 표정 변화가 없는 단유를 보고 있자니 사내도 안 되겠는지 두 팔을 활짝 펴고 단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단유의 허리를 붙잡은 사내가 악을 쓰며 힘으로 단유를 밀어붙이려는데, 단유는 무릎을 살짝 굽혀 중심을 내리고 한 발을 뒤로 물러 안정성을 더한 뒤 사내의 견갑을 누르며 옆으로 밀었다. 힘의 진행 방향을 살짝 바꿔주는 것만으로 사내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후속공격을 염려하며 바닥을 몇 번 더 구르고 벌떡 일어나보지만, 딱히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단유. 사내는 덜컥 겁이 났다.

‘프로?’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상대는 전문적인 동종 업계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동생들도 나름 한 주먹 한다는 녀석들인데 그 녀석들을 가뿐히 제압할 때부터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 선입견 때문에 생긴 착각으로 상대를 과소평가해서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고 사내는 생각했다.

‘도망쳐야 한다.’

문제는 아직도 바닥에서 신음을 흘리는 동생들. 저들을 챙겨야 할 텐데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발을 이끌었다.

단유는 달아나는 사내를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 신음을 흘리던 그들도 눈치를 보며 몸을 일으키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이들을 굳이 쫓아가 해코지 할 마음은 없었다.

창범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한데서 잤다고 입이 돌아갈까 싶지만, 죽지만 않으면 무슨 상관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제껏 그랬듯, 그가 깨어나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자신이 겪었던, 정확히는 그가 보았던 일에 대해 말한다 해도 누구 하나 믿어줄 사람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공포를 그에게 심어두는 편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좋으리란 판단을 내리며 단유는 자리를 떠났다.

****

서먹한 침묵이 감도는 거실. 나윤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저기요.”

“······.”

고개를 든 유진에게 나윤이 물었다.

“물 좀 마실래요?”

“···괜찮아요.”

“그래요? 저는··· 좀 목이 마르네요.”

유진은 그러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윤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자는 걸까, 단유는.

“저기요.”

그때 유진이 입을 열었다. 나윤은 움찔 놀라며 거실에 있는 유진을 바라보았다.

“네?”

“더러워요, 제가?”

“네?”

질문의 뜻을 이해 못 해 되물은 나윤은 뒤늦게 유진의 질문을 이해하고 서둘러 변명했다.

“아니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초연한 듯 건조한 유진의 대답이 이어진다.

“내가 한 행동이, 내가 택한 방법이 떳떳한 방법이 아닐지도 모르죠. 하지만 상관없어요. 이 세상에, 마냥 떳떳하기만 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나윤은 물컵을 만지작거리며 유진의 생각에 대한 반론을 떠올렸다.

“갓 태어난 아이를 제외하면, 누구도 자신에게 떳떳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말로야 떳떳하네 떠들 수 있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단 한 점의 오점도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봐요. 이 세상이 그런 세상이니까. 만약 진짜 떳떳하게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거나, 실패와 좌절만을 무수히 겪을 뿐인 사람일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피라미드 같은 구조니까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사회니까요. 강한 사람은 스스로의 강함을 위해 떳떳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을 테니까요.”

“그건 섣부른 판단 아닐까요?”

“아니요.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해요. 피라미드라는 구조는 반드시 경쟁이라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고, 경쟁은 곧 상대를 짓밟거나 발 아래 둬야 한다는 뜻이잖아요? 중고등학교 때처럼 단순히 공부만 잘한다고, 머리가 좋기만 해서 1등이 되는 구조가 아니거든요, 이 사회가.”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는 간다.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의 시선에서 이 세계는 하수구 오물보다 더 구역질나고 더러운 일들이 비일비재 벌어지는 곳이리라. 모든 게 더러운 마당에 자신의 더러움은 티도 안 나겠지. 하지만 나윤은 동의할 수 없었다.

“단유가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 자리에 오른 것처럼 보이세요?”

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단유도 마냥 떳떳하진 못할 거예요.”

“그 이야기를 단유가 들었으면 섭섭해 하겠네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죠.”

“딱히 단유를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그랬듯, 떳떳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다고 비난할 순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에요.”

“그건 단지 스스로가 비난받고 싶지 않다는 합리화 아닌가요? 세상이 잘못된 거지, 내가 잘못 된 게 아니라는 합리화?”

“선배님의 경우를 봐요.”

“저요?”

“만약 선배님이 조금만 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면, 지금처럼 무명의 리포터로 남진 않았을 거예요.”

나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말, 그냥 있어보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정말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적당한 노력과 가식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에요. 피나는 노력과 처절한 몸부림, 거기에 어떻게든 성공하고 말겠다는 독기어린 의지가 섞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에요, 이 곳은.”

합리화에 이어 훈수인가. 나윤은 조금이나마 남았던 동정을 물 한잔에 씻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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