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37화 (937/956)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

-------------- 937/952 --------------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실래요? 저 앞에 편의점 있는데 가서 음료수라도 사올게요.”

“아냐, 괜찮아. 좀 쉬니까 괜찮아진 거 같다.”

“정말요?”

“찬 바람 쐬니까 정신이 깨는 거 같아.”

“다행이네요.”

“이거 비밀이다? 팀 식구들한테 말하면 안 된다. 쪽팔리니까.”

“안 할게요.”

“믿는다?”

“네.”

창모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는 지아. 센 척 하며 와인을 시킬 땐 언제고, 고작 몇 잔에 헤롱대다가 멀미난다고 헛구역질을 하더니 그런 모습이 창피하다고 비밀로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치기를 부리는 어린 아이같다. 그만큼 아직 순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과대포장인 걸까.

“갈게.”

“네.”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보자.”

“선배님이야말로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 그래. 맞다. 여기 너네 집 앞이지?”

머쓱해하는 표정으로 지아에게 손을 흔들고 차에 오르는 창모. 차가 떠날 때까지 지켜봐 줄 요량으로 서 있는데, 무슨 일인지 차가 출발을 하지 않는다. 차가운 가을 밤바람에 지아가 팔뚝을 쓸며 기다리는데, 운전석 쪽 문이 벌컥 열리며 대리기사가 차에서 내렸다.

가는 눈의 대리기사가 지아를 째려보더니 작지 않은 목소리로 ‘씨발!’이라고 중얼거리며 돌아선다. 그리고 곧 이어 창모가 차에 한 발을 걸친 채 내리며 대리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이봐요! 이봐요!”

대리기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떠나려 하고, 창모는 붉어진 얼굴로 지아를 한 번 흘깃 본 뒤 대리기사를 쫓아갔다. 영문을 모르는 지아도 창모의 뒤를 쫓았다.

“그냥 이렇게 가면 어떡합니까?”

“놔요, 이거!”

어깨를 붙잡는 창모의 팔을 거칠게 떨쳐내는 대리 기사는 창모를 아니꼽다는 식으로 바라보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대리기사라고 우습게 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언제 우습게 봤다고 그래요?”

“아니면, 바쁜 사람 앉혀 놓고 뭐하는 짓인데?”

“···그 잠깐을 못 기다려서 이 사단을 내요?”

“잠깐? 잠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신 기다리는 30분이면 내가 한 차를 더 돌았어. 당신이 그만큼 보상해 줄거야, 뭐야?”

“그런데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왜 아까부터 반말이에요?”

“그럼 당신도 반말 하던가?”

“당신 회사 어디야? 고객한테 이렇게 해도 돼?”

“고객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씨발, 내 더러워서 때려친다.”

“당신 욕 했어?”

“귓구멍이 막혔나? 술 쳐먹었으면 집에 작작 들어갈 일이지, 아, 작업 거느라고 정신이 없었나?”

이죽거리며 상스런 말들을 입에 담는 대리 기사의 행동에 창모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가 커졌다.

“뭐? 이 사람이!”

그때 지아가 창모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두 남자가 충돌했을지도 모른다.

“선배님, 선배님! 참으세요.”

씩씩거리는 창모가 지아의 손에 붙들려 한 발 물러서자, 이죽거림이 더 심해진 대리기사. 얼굴을 쭉 빼며 놀리듯 물었다.

“참지 마. 안 참으면 어쩔 건데? 응?”

“와, 나···. 뭐 이런 깡패 같은 새끼가 다 있지?”

창모의 대꾸에 대리 기사의 얼굴이 ‘깡패처럼’ 일그러졌다.

“깡패? 깡패라고? 씨발, 어디 깡패한테 뒤지게 맞아볼래?”

지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창모를 더욱 뒤로 끌었다.

“선배님! 참아요, 제발.”

정확히 뭐 때문에 대리기사가 욱해서 저런 돌발적인 행동을 취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의 입장이 되보지 못해서, 과연 그 30분의 기다림이 정말로 대리 기사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고작 30분―정확히 따지면 30분도 안 될 시간이겠지만―을 기다리는 걸 못해 이 난리를 피우나 싶어 지아도 대리 기사에게 한 소리 하고픈 마음이었다. 그러나 자기까지 나서면 정말로 큰 소란이 될 거 같고,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까 두려운 마음에 우선 창모를 말리기로 마음먹은 지아였다.

하지만 그런 지아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오히려 지아 앞이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정말로 술이 취한 때문인지, 창모는 순식간에 지아의 손에 붙들려 있던 팔을 빼며 대리 기사의 멱살을 잡아챘다.

앞섶이 창모에 의해 들리자마자 대리 기사는 눈을 번들거리더니 더욱 머리를 처밀며 ‘때려봐, 때려보라고’ 시비를 걸었다.

“선배님, 왜 그러세요. 그만해요, 선배님.”

필사적으로 말리는 지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창모의 손이 머리 위로 들렸다.

“씨발, 그러다 치겠다?”

이죽거림에 눈이 돌아간 창모가 손을 휘둘렀다.

****

단유는 주머니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

“아니.”

단유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눌러 소리를 끄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냥 봐서는 여전히 무표정인 듯 해도 나윤은 그 속에서 심상치않은 변화를 읽었다.

“무슨 일인데?”

단유는 대답대신 핸드폰을 끄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나 잠깐 나갔다 와도 될까?”

“응? 갑자기?”

“그럴 일이 생겼어.”

표독스런 눈초리로 단유를 노려보고 있던 유진도 단유의 돌발 발언에 당황하는 눈치였고 나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 둘만 여기 있으라고?”

“배고프면 아무거나 시켜도 돼.”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지금···.”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미안. 그리고, 유진아.”

“······.”

“우리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더 할 말이 남았어?”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은 없지. 단지 들어줄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야.”

“들어줄 말? 흥.”

“나한테 하기 어려운 말이면 누나한테 해도 돼. 나보단 더 널 잘 이해해줄 테고, 누나라면 네 입장을 최대한 공정하게 나한테 전해줄 테니까, 그러면 네 행도의 의도라든가 내가 공감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이해시켜 줄테니까.”

단유의 대답에 나윤이 당황하는 찰나, 단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물 밖에 없는데, 나간 김에 뭐라도 사올까?”

유진이 벌떡 일어섰다.

“나 갈거야.”

“앉아.”

단유의 단호한 대꾸에 유진은 또 한번 도끼눈을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대로 나간다면 더 이상 나에게서 도움을 바라지 않아야 할 거야.”

“도와줄 마음은 있고?”

“우선 날 설득할 수 있게 노력해봐.”

나윤에게 손을 살짝 들어보인 후 단유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둘 만 남겨진 거실에서,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집을 나온 단유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뒤 미간을 좁혔다. 주변의 시선이 없음을 확인 후, 곧바로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

책상 위 작은 램프와 모니터 불빛만이 전부인 작은 서재. 중년의 사내는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준비해놓은 수표를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일어선 사내가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걸치며 서재를 나서자, 거실에서 TV를 보던 아내가 말을 걸었다.

“어디 가요?”

“잠깐 밖에.”

“이 시간에요?”

“일 때문이야.”

최근 사내의 직장에 소란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던 아내였다. 그리고 그 소란의 여파로 남편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인지는 모른다. 중년 사내는 중년의 아내에게 바깥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아내 역시 남편에게 그런 것을 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살가운 남편도 아니고, 다정한 남편은 더더욱 아니었으나, 남편의 재력은 두 딸을 모두 유학 보낼 수 있을 정도였고, 노년까지 풍족한 생활을 이을 수 있을 정도라는 것에 만족하는 아내였다. 남편에게 그 정도 능력과 책임감만 있으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약주 하실 거예요?”

“신경쓰지 말고 먼저 자.”

무뚝뚝한 남편의 대꾸에 아내는 입을 다물었다. 궁금하지 않았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다녀 와요’ 한마디 건네는 정도의 성의로 아내의 책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보다 막장으로 치닫는 심야 드라마의 다음 스토리가 더 궁금해질 뿐이었다. 남편과 두 딸 신경 안 쓰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만족하는 아내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시동을 걸고 바로 차를 몰아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갈 때,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던 사람이 있음을 모르는 사내. 핸들에 붙은 버튼을 눌러 통화를 시도하느라 주위를 살필 틈이 없었다.

“거기서 보세.”

미리 약속된 장소를 지정하고 바로 통화를 종료한다. 그리고 다시 운전에 집중.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도로엔 차로 가득하다. 초조한 손가락이 핸들을 두드리고 시선은 계속 시계로 향한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한강 고수부지. 차에서 내린 사내는 차가운 강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밤 운동을 나선 사람들과 산책 나온 커플들을 지나쳐 어둡고 한적한 곳으로 향한 사내는 곧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상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고, 사내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더니 이제 10시를 갓 넘어가고 있었다.

‘후우.’

두근거림이 쉬이 멎질 않는다.

한 때 같은 라인이었던 사람들이 줄줄이 쫓겨나고 좌천되는 와중에 자신은 겨우 자리를 유지했다. 평소에 일을 잘한 탓, 이라고 믿고 싶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빨리 사태를 파악하고 손을 썼던 탓이었다. 평소 같잖게만 보던 이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다시피 하며 같은 파 라인 사람들의 약점들을 제공하는 현명함이 그를 구원했다. 그러나 사태가 너무 빨리 진전된 탓일까, 반대파 내부의 파벌 싸움까지는 예상을 못했다. 비록 자신과 상관없는 지네들 끼리의 싸움이지만 온갖 폭로와 추문, 그리고 비리가 쏟아지는 와중이라 자칫 창범에게까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발동했다.

그런데 그 때 창범은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을 떠올렸다. 분명 자신에게 위기인 상황이지만, 이 상황을 잘 타개하면 전보다 훨씬 나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겠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소위 여론전이 펼쳐지는 상황. 누가 더 많은 패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마타도어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창범은 그동안 패를 꽤 많이 모아놓은 편이었다. 모두 다 터뜨린다면 오히려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모름지기 이런 진흙탕 여론전에서 살아남으려면 아예 큰 판을 짜서 주요 선수들을 몰아넣고 자신은 한 발짝 빠져있는 수를 쓰는 게 좋다. 누가 이기더라도 결국 넝마가 되어 돌아올 이들 앞에 멀쩡한 자신이 나선다면 자신에게 더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을 거란 계산을 마친 창범.

옅은 입김이 공중에 흩어지던 때,

“이사님.”

뒤에서 들리는 저음의 불량한 목소리. 돌아보니 험상궂은 외모의 사내가 히죽 웃으며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차가 많이 막혀서요.”

전혀 죄송하지 않다는 듯 건들거리며 등장하는 사내를 보며 창범은 미간을 좁혔다.

“됐네, 나도 지금 왔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여기.”

품에 넣어뒀던 봉투를 꺼내들자, 사내가 히죽 웃으며 USB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건넸다.

“감사합니다.”

“내 이름은 안 나오게 작업해야 하는 거 알지?”

“그럼요. 장사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USB에 담긴 영상의 주인공, 유진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어린 나이인 그녀의 가장 큰 재능은 바로 남자 보는 눈에 있다. 어떤 남자가 힘을 가졌는지, 어떤 남자가 자신에게 힘을 보탤 것인지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배우로서의 재능보다 이쪽으로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어쨌든 그녀의 재능이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꽤 적당한 남자를 작업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창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불쾌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갈아타기로 마음 먹고 이별을 통보한 상대가 바로 자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별, 이라고 말을 하니 우습다. 애초에 이별 운운할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불쾌할 뿐이다. 여자에게서 쓸모없는 남자 취급받는 게 기분좋을 리 없으니까.

그러니 그녀의 선택을 이해는 하지만 불쾌했고, 마침 내부 정치 판도가 그녀를 이용하기에 적당하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창범은 죄책감없이 그녀의 영상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스캔들은 장작이다. 불쏘시개로 안석준을 집어넣었으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판단이 들어, 또 다른 사내들이 엮인 영상을 이용하기로 했다. 남자는 많았다. 감독, 배우, 작가 등등.

어린 년이 발랑 까졌다, 는 소리 들어도 그녀는 억울해 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자초한 셈이니까.

“자네도 대단하군. 이 정도 소스면 충분히 기사로 써도 될 텐데 말이야.”

“기사 몇 줄로 밥 빌어먹는 신세지만, 그래도 이 정도 수익은 아니니까요.”

“입단속 잘해.”

“물론입니다.”

사내와 친한 척 악수를 할 일도 없으니, 창범은 입꼬리를 잔뜩 올린 사내를 지그시 바라본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돌아선 창범 앞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한 젊은 남자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것.

“뭐, 뭐야?”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는 창범. 그 앞에 선 단유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창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그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