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요청(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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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를 향한 유진의 눈빛에 원망이 깃들었다. 마치 네가 뭔데 그런 소릴 해, 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윤으로서는 끼어들 이유를 찾을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같은 게 뭔데?”
“말했잖아? 똑부러지는 성격, 밝은 에너지, 솔직한 태도. 내가 아는 유진이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어. 하지만 지금의 너. 번드르르한 말로 너 자신을 포장하기 바쁘지.”
“포장이라고? 내가 뭘 포장했는데?”
“계속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마, 유진아.”
“똑바로 설명해야 알 거 아냐? 너, 지금 되게 모욕적이야.”
단유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만약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널 만났더라도 지금의 너에게선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게 분명해. 게다가 난 너희 회사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알아.”
“안다고? 뭘?”
“돌려 말하지 않을게. 유진이 너, 스캔들 있었어. 그렇지?”
‘스캔들’이란 단어에 놀란 유진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단유가 자신의 개인 컴퓨터를 이용해 본 것은 유진의 회사 내부 자료였다. 재무재표부터 시작해 회사 내부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이사회 회의록과 대외비로 지정된 문서까지도 컴퓨터에 저장된 중요 파일 대부분을 살폈다.
덕분에 유진의 회사가 현재 지분 문제로 지저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돈 문제가 얽히면 그리 깨끗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드문 경우가 많다. 더구나 액수가 커지고 얽힌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더더욱 해결이 어렵다.
유진네 회사에도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발단은 공교롭게도 단유로부터 시작된다. 단유로 인해 정신을 잃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기획사 사장 정광식. 대표의 부재로 혼란스러워진 틈에 무호동죽이작호(無虎洞中狸作虎)랬던가, 반 사장파의 이사와 그의 라인들이 치고 들어올 틈이 생겼다.
광식이 병실 신세를 진 순간부터 틈이 만들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본래 광식이 독선적인 카리스마로 운영하던 회사였고, 덕분에 사장파 라인은 거의 반 사장파 라인을 누르던 형국이었었다. 때문에 구심점이 사라졌다해도 사장파 라인의 힘은 여전했고, 더구나 광식이 그렇게 오래 의식을 잃은 상태로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치 못했기에 반 사장파도 쉽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사장은 쉽게 의식을 찾지 못했고, 그가 돌아오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사장파 라인에 동요가 발생했다. 반 사장파 라인의 이사들과 간부들 역시 기회라고 생각, 반격을 시작했다.
“방만한 운영으로 인해 회사의 이익이 줄어들고 있는데 현 사장은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라는 게 반 사장파 라인에서 주장하는 바였다. 물론 본격적인 파벌 싸움에 앞서 내세운 명분에 불과하지만, 명분은 효과적이었고 특히 문제로 제시된 사항에 대해 시정안이나 대책을 내놓을 결정권자가 전무한 상황에 놓인 사장파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회사의 혼란이 장기화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이사진에서 긴급 이사회를 열었고, 임시 대표 선출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다. 거친 말싸움과 삿대질 속에 반 사장파 라인에서 임시 대표가 선출되었다.
사실 이 쿠데타는 오래전부터 기획되었다. 단지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을 뿐. 기회가 오자 반 사장파 라인의 이사 및 간부진은 사장 라인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틈이 없도록 몰아붙였다.
각종 비리가 언급되고 덮어뒀던 각종 문제들이 수면 위로 노출되었다. 비리에 연루된 인사들은 해명할 기회도 갖지 못한채 회사를 엉망으로 만든 주범으로 낙인찍혀 좌천되거나 혹은 쫓겨났다.
불과 한달 새에 말이다.
반 사장파가 조금 무리하게 서두르긴 했다. 왜냐하면 사장파 라인 인사들이 기다리는 광식이 생각보다 일찍 의식을 찾아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자신들이 모든 것을 차지해야 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무리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한달 여가 되었을 즈음, 광식이 의식을 찾았고, 그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 반사장파 인사들은 긴급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고소합시다.”
비리와 횡령의 증거를 찾아 회사를 발칵 뒤집다시피 했고, 결국 광식이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그는 휠체어를 타고 검찰청을 방문해야 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었다면, 반 사장파 인사들에게는 그저 성공적인 쿠데타,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일이다. 하지만 몇 달 사이에 일을 무리하게 진행시키느라 내부의 혼란이 꽤 적지 않았다.
예부터 지금까지, 성공적인 쿠데타 뒤에는 논공행상으로 인한 논란이 뒤따랐다. 더구나 당시 회사의 대표는 임시일 뿐이며, 정식 대표는 아니었다. 요컨대 누구나 정식 대표로 선임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
반 사장파 파벌 내부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싸움이 지금까지도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이 일에 유진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우습게도 이 지저분한 싸움판에 유진이 거론되고 말았다.
“정유진 양과 무슨 사이입니까?”
이사회 중 나온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경영자문을 맡은 사외이사 중 한 사람이었다.
“무슨 사이라뇨?”
“지금 발뺌하시는 겁니까?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가!”
사외 이사와 소속 연예인과의 부적절한 관계. 사외 이사가 미혼이라면 큰 문제가 안 되겠지만, 그에게는 부인과 두 딸이 있었다.
“회사의 이사 직함을 달고 스폰을 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반 사장파 내 파벌 싸움에서 다른 한쪽을 누르기 위한 고발과 폭로의 시발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사는 해임되었고, 유진은 단유를 만나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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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들지 못하는 유진. 그러나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내부 이사회 이야기가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지금이야 당장은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외부에 소문이 돌겠지.”
단유의 건조한 목소리에 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내렸다.
“······.”
말을 잇지 못하는 유진을 보며, 나윤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보다 왜 단유가 이렇게 냉정하게 그녀를 대하는지 잘 모르겠다, 는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냥 모른척 해줄 수 있는 문제 아닐까? 친구라며?
비록 그녀가 지금 단유가 밝힌 그 스캔들을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여자로서도 말하기 힘든 문제고 친구 앞에서 털어놓기도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연예인 스폰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종종 듣게 되는 이야기 중 하나였다. 쉬쉬하며 암중에 벌어지는 위험한 계약들. 그것은 소위 ‘뜨지 못한’ 연예인들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 유혹에 굴복한 것은 분명 유진의 잘못이겠지만, 유혹에 굴복했다고 해서 마냥 그녀를 비난할 순 없는게, 나윤 역시 연예인이고 연예계의 생리를 잘 알기 때문이다.
뜨지 못하는 연예인의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동경하며 도전하는 어린 아이들은 잘 모르지만, 업계에 발을 담그고 오래 생활하다보면 알게 된다. 스포트라이트 바깥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지. 때로는 인간 이하 취급을 받는다는 기분도 든다.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스태프들에게 무시당하고, 쥐꼬리만한 수익도 회사와 나누다보면 아예 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 그마저도 수익이 나는 일거리가 들어올 때 할 수 있는 불평. 일거리마저 없으면 그저 굶으며 찬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 할 정도다.
연예인만 그런가? 우리 사회가 그렇다. 픽업되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들,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아르바이트, 번번이 낙방만 하는 취준생들. 그들에게 만약 위험한 유혹이 손을 뻗치면 과연 몇 명이나 그 유혹을 견딜 수 있을까.
“그만해, 단유야.”
나윤은 단유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서 벌벌 떨고 있는 유진의 손을 가만히 덮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유진 씨. 괜찮아요.”
“뭐가 괜찮다는 건데?”
눈치없게 단유가 묻기에 나윤은 그를 흘겨 보았다.
“그만 좀 해. 유진 씨도 힘들어 하잖아. 본인 입으로 그런 이야기, 쉽게 하기 힘들다는 거 몰라? 아무리 친구 앞이라고 해도 그런 이야기는 못 해. 더구나 넌 남자잖아?”
“남자, 여자 문제가 아니잖아, 이건.”
“연예인이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몰라서 그래.”
“몰라. 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잖아.”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도 변절했어. 사람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는 거야.”
무표정한 얼굴로 되묻는 단유.
“어떤 유혹?”
“그 사람, 사외 이사라며? 너도 그렇지만, 회사에서 이사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가진 힘이 좀 대단해? 그런 사람이 다가와서 스폰을 제의하면, 그걸 거절하기가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문제였다면 나도 이해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 이건 정반대야.”
“···응?”
단유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데, 유진이 손을 털며 자신의 손을 덮고 있던 나윤의 손을 떨쳐냈다. 놀란 나윤이 돌아보자 유진이 젖은 눈으로 단유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스폰해 달라고 하지 않았어! 그 사람과 난 사랑이었다고!”
나윤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거나말거나 유진의 독기 서린 눈빛은 단유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게 뭐가 잘못된 건데? 난 돈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 단지 좋은 배역 맡을 수 있게 기회를 좀 더 달라고 했을 뿐이야. 정당한 요구였다고!”
“정당하다는 단어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 뿐만이 아니잖아?”
단유의 폭탄 발언에 유진이 움찔 거렸다. 나윤은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단유는 마치 외우고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처럼 막힘없이 털어놓았다.
“처음은 3년 전. 당시 사내 이사였던 김창범과 관계를 맺고, 다음은 지금 언급된 사외 이사 안석준 씨.”
김창범은 사장파 라인의 콘텐츠 총괄 이사직을 맡았던 이였다. 그의 도움으로 몇몇 드라마에도 조연으로 출연할 수 있었지만, 사장파 라인이 흔들리게 되었을 때, 유진은 먼저 안석준으로 갈아탔다.
안석준에게는 아직 본격적으로 스폰을 제안하지 못했다. 작업을 걸던 와중이었으니까. 장년의 사내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유혹을 견디지 못했던 것은 최근 쿠데타에서 거둔 성과 때문이었다. 성공이 이어지는 와중에 일찍 터뜨린 축배에 취한 탓이라고 해야 할까. 그 틈을 잘 노린 유진은 안석준을 침대로 끌어들였다.
“그러니 네 말은 반은 맞고 반은 거짓이야. 스폰해 달라고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였고, 사랑이라는 그 말도 사실은 거짓인 게 분명해. 넌 단지 네 성공을 위한 도구로서 그 사람들을 이용한 거지.”
지금 부들부들 떠는 유진의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아마도 수치심이리라.
“네가 모르고 있는 게 있어. 어쩌면 짐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안석준 씨와 관계를 했다는 증거가 어떻게 다른 파벌 사람들에게 들어갔을까?”
“······.”
“사실은 그 증거, 김창범 씨가 넘긴거야.”
“······!”
“김창범은 네가 어떤 여자인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추측컨대 그 사람은 너와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 꽤 많은 영상을 모아뒀던 거 같애. 너와 헤어진 뒤에도. 네가 그 사람을 이용했듯이, 그 사람도 널 이용하려 했던 모양이지.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그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네 영상을 이용했어. 안석준의 반대 파벌에게 영상과 증거를 제공하고 대신 자신을 살려달란 거래를 한 모양이야.”
“···그게 말이 돼? 어떻게 그런 일이···.”
나윤이 중얼거리며 한탄했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바로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윤 누나에게 도와달라고 한 건, 바로 지금 이 이야기를 내입으로 하기 싫었던 때문이야. 누나가 말했듯, 아무리 친구지만 남자인 나에게 하긴 힘들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두 사람에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 누나는 조금 전처럼,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유진이 이야기도 잘 들어줄 테고, 현명하게 조언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조금 전, 넌 우리한테 조금의 진실도 내보일 마음이 없었어. 날 친구가 아니라 단지 이용할 수 있는 상대로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게 날 슬프게 했어.”
마지막 말의 울림이 바닥에 무겁게 내려앉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