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35화 (935/956)

구조요청(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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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세요?”

지아가 다가가니 허리를 굽힌 채로 숨을 몰아쉬던 창모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멀미가 나서 그래.”

하얀색 배기가스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동차에 손을 짚은 채로 숨을 쉬는 창모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지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옆에 서서 창모가 괜찮아지기를 기다렸다.

“정말 괜찮으니까 들어가.”

“그래도···.”

후후, 숨을 크게 몰아쉬던 창모가 허리를 폈다.

“내가 술이 약한 편이 아닌데, 왜 이럴까.”

“잠을 못 주무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거의 이틀 동안 못 주무셨잖아요.”

“예전 같지가 않네. 예전에는 3일 철야를 해도 거뜬했는데.”

하긴 창모도 이제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선 데다 특별히 운동을 한다든지 하는 활동은 거의 없는 편이었으니 체력이랄 게 있을까 싶다.

“그럼 저기···.”

창백한 표정이 된 창모를 보던 지아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

“난 꿈이 있었어.”

유진의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단유 너도 알겠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흔들리지 않는 꿈을 가지고 있었어. 내 성격이 그래. 알지? 적당히 어중간한 건 싫어하는 거. 꿈도 마찬가지야. 한 번 목표로 잡은 이상은 어떻게든 이뤄내야만 해. 그래서 서울대도 들어갈 수 있었던 거고. 고3 때, 나 진짜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어. 공부하느라 힘든 것도 있었지만, 회사를 통해서 들어오는 광고, 연기 전부 거절하느라 힘들었어. 물론 처음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어. 고3이 되면 난 무조건 대학 입학을 하기 위해 학업에 전념할 거라고. 그건 혹시 배우로 성공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차선책 같은 게 아니었어. 반드시 배우로 성공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스펙 같은 거였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현장을 전전하며 보니 이 바닥에도 스펙이 중요하단 걸 깨달았고, 똑똑한 여배우는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어. 연기는 기본이지만, 이 사회에서 똑똑한 여배우는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잠시 숨을 고르는 유진에게 물컵을 건넸다. 유진은 입술을 가볍게 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난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꿈이었고, 그 꿈을 위해 달려왔어.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도 난 여전히 배우가 꿈이야.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배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진짜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야. 칸에서 레드카펫도 밟고 상도 받고 싶어. 나이가 들어도 멋있는 배우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런데 그런 배우는 그냥 되는 게 아니잖아?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만 해. 노력없이 이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시 한번 목을 축이고 경청하는 단유와 나윤을 잠시 살핀 뒤, 다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좋은 배우는 단지 연기만 잘한다고 좋은 배우 소리 듣는 건 아니더라고. 우리나라에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당장 대학로에만 가도 무명이지만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배우들이 널렸어. 대학교 연영과에서 연기 잘한다고 소문난 애들이 한 해에도 수십 명씩 배출되는 곳이야. 그런데 그렇게 연기 잘하는 애들이 모두 좋은 배우로 성장하진 못해. 왜일까?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일단 그 사람들이 좋은 배우라는 걸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난.”

사람들이 보지 않는 연극에서 혼자 쌩쇼를 해봐야 소용없다. 관객 없는 무대 위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연기를 펼쳐봐야 무슨 소용인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 배우도 좋은 배우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배우는 자신을 널리 알려야 한다. 소위 PR이다.

“난 여태껏 여유롭게 자기만의 시간을 가진 적이 거의 없어. 스케줄이 없어도 늘 바빴어. 전화에 저장된 번호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고. 틈만 나면 간단한 안부라도 메시지를 보내서 관계를 이어나가려고 노력했어. 좋은 배우가 되려면 좋은 작품을 만나야 하잖아? 좋은 작품은 좋은 감독이 연출해야 하고, 좋은 작가가 글을 써야 하고, 좋은 스태프들이 뒤에서 지원해줘야 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니까. 이런 거야, 좋은 작품은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런 열정에 내가 기여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고 다음에도 나와 함께 작업하기를 희망하게 될거야. 그래서 난 늘 웃고 다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어. 몸은 조금 힘들지 몰라도 그런 노력이 나를 좋은 배우로 만들어줄 거라고 믿었어.”

그리고 그런 의도의 연장선에서, 배우는 좋은 소속사를 두는 편이 좋다. 1인 기획사도 좋고 작고 가족같은 분위기의 소속사도 좋지만 그래도 배우로서 성공하고 싶다면 후방지원을 든든하게 해줄 소속사를 만나는 것이 유리하다. 특히 유진처럼 아직 특급 대우를 받지 못하는 배우라면 말이다. 자신의 이름이 곧 브랜드가 되는 연예인이 된 후라면, 소속사의 힘이 다소 약해도 상관없겠지만 유진은 아직 그 정도가 되지 못했다.

때문에 유진은 작년, 단유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금 유진이 소속된 회사는 배우 쪽으로 유명한 회사이고, 그쪽으로 관계된 인맥이 상당하기 때문에 아직 파워가 부족한 유진은 회사의 힘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했다.

다양한 기회를 많이 창출해주는 회사에서 다양한 커리어를 쌓고, 그 커리어가 인정될수록 좋은 배우로서 기억되게 된다. 달리 좋은 배우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유진 씨.”

나윤이 손뼉을 마주치며 감탄했다.

“네?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면, 약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니까 오늘날의 유진씨가 있는 거구나란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 나는 그동안 뭘했지, 하는 반성도 하게 되네요.”

“쑥스럽네요. 그렇게 칭찬들으려고 한 이야기는 아닌데.”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유진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단유의 시선에 미소를 지웠다.

“대단하지 않아?”

나윤이 대신 단유에게 물었고, 단유는 대답 대신 나윤을 향해 턱을 까닥이며 말했다.

“계속 이야기해봐.”

유진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조금 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회사 안에서 난 꽤 신뢰받는 편이라고 생각해. 항상 누구에게든 친절하려고 하고 어떤 가벼운 말과 약속도 지키려고 노력했으니까. 펑크 한 번 내지 않았고, 작은 역할에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으니까.”

신뢰는 올리기는 힘들지만 내려가는 것은 한 순간. 그러니 언제나 주의하고 신중해야 한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에 밸 정도가 되어야 한다. 짜증내지 않고, 지나가는 말로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조금 피곤할 수 있지만, 유진은 힘들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목표, 꿈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나에게 좋은 기회가 왔어. 국내에서 역대 최고액의 투자를 받아 만들어질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연은 아니지만 서브로 꽤 주목받을 수 있는 역할을 받게 된 거야. 내 노력의 결과였다고 생각해도 상당히 기쁜 일이었어. 회사 내에 다른 사람도 많았지만, 그동안 쌓은 신뢰 덕분인지 대본은 나에게로 왔거든. 사실 우리 회사에 선배님들이 많잖아. 개중에는 연기파로 소문난 배우도 있고,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선배도 있어. 그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참여하고 싶어했던 선배도 있었고. 하지만 대본은 나에게 왔어. 난 그게 신뢰의 결과라고 생각해. 나라면 그 역할을 무리없이 소화할 뿐 아니라 작품에 참여하는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 그리고 완성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엘 찾아올 관객들에게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역대 최고액’이라는 힌트 만으로도 단유와 나윤은 그 작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유진의 이야기는 과거형이지만, 현재 개봉을 앞둔 그 영화에 관한 기사는 지금도 계속 쏟아지는 중이었다.

“촬영은 잘 끝났어. 내 역할은 무리없이 소화했고, 기자 시사회에서도 좋은 평을 들었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터라 딱히 영화에 대해서는 특별한 정보가 없는 단유였지만, 유진의 회사와 영화 제작사 쪽에서 엄청난 홍보비를 쏟아부으며 기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유진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 했다. 흥행이 예상되는 영화에까지 출연하게 된 유진. 기자 시사회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는 평까지 들으며 홍보에 열을 올리는 지금, 그녀가 말한대로 사람들이 알만한 배우가 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없다 뿐일까? 앞으로 남은 건 성공 뿐이라 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유진의 얼굴은 어둡다.

“그런데 왜 회사를 옮기고 싶다는 거야?”

단유는 돌려 묻지 않았다. 단유의 질문에 나윤이 깜짝 놀라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옮긴다고요? 회사를? 혹시 우리 회사로?”

유진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예.”

“왜요?”

잘나가고 있고, 앞으로 더 잘 나갈게 뻔한 시점에서 회사를 옮긴다? 지금까지 그녀가 말한 것과 반대되는 경우이지 않은가?

“얼마 전까지 저희 회사 내부가 조금 혼란스러웠어요. 회사 경영에 관한 문제라 저랑은 별로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회사 내부가 그 문제로 조금··· 그랬어요. 그래도 회사가 작은 회사도 아니고 좋은 사람들도 많으니까 혼란은 곧 수습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회사 경영진이 바뀌었어요. ···저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회사 경영에 참여할 것도 아니고, 제가 원하는 건 그저 회사의 서포트였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저에 대한 서포트를 줄이겠다고 했어요.”

“왜요?”

“저도···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렇잖아요? 제가 회사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듯, 회사도 저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잖아요? 쌍방계약에 의해 성립된 관계니까. 그런데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어떤 신뢰를 위한 노력도 하지 않으려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 신뢰를 계속 이어나가겠다는 진심이 보이지 않으니 결국 이제껏 좋았던 관계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된 거예요. 전 그저 배우로서 활동하고 싶을 뿐인데 그 활동마저 지장이 생길 것 같으니 더는 회사와 함께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회사를 옮기려고요.”

나윤은 유진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단유는 혹시 이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만약 알고 있었다면 도대체 나한테 어떤 조언이 나오길 바라며 함께 오자고 했는지 궁금해졌다.

“유진아.”

나윤의 시선을 받던 단유가 유진을 불렀다.

“응?”

“네가 한 표현대로 말하자면,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진실된 대화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무슨 뜻이야, 그게?”

“예전에 네가 나한테 처음 말을 걸었던 이후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넌 네멋대로 나와 널 친구 관계로 엮었었어. 하지만 난 너의 솔직함과 명랑한 성격, 그리고 목표를 향해 한길만 달리는 우직함을 인정했고, 존중하기에 너와 친구가 되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난 너를 친구라 여기게 되었고, 이후로 지금까지 우린 친구였어. 하지만 지금, 네가 솔직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네 말처럼 너에 대한 내 신뢰는 꺾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더 이상 난 널 도울 의지가 없어.”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넌 지금까지 스스로에 대한 변명과 핑계만 대고 있었을 뿐이잖아.”

“무슨 핑계? 난 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회사에서 왜 너에 대한 지원을 끊었는데?”

“모른다고 했잖아?”

“그게 네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 중 두 번째 거짓말이었어.”

“······.”

싸늘한 침묵이 거실에 내려앉고 유진은 상기된 얼굴로 단유를 노려보았다.

“너는 어떤 이유로 진실을 감추고 단지 선량한 피해자인척 하며 지금 처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중이야. 만약 그게 네 이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매우 개인적인 일이라면 너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겠지만, 만약 그 문제가 우리 회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라면 미리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알고 대처하는 것과 모른 상태에서 당하는 것은 다르잖아.”

“너 마치 내가 무슨 큰 사고라도 친 것처럼 말한다? 내가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고 망명신청하는 사람처럼 보여?”

“응.”

단유는 단호하게 시인했다.

“너, 지금 되게 너같이 안보여.”

“······.”

유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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