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34화 (934/956)

구조요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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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지, 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다가오는 이를 바라보던 예영은 곧 모자 쓴 이의 정체를 확인하고 반가워했다.

“난 또 누군가 했네.”

“안녕하세요.”

선글라스를 벗으며 예영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는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비어있는 자리가 마침 예영의 옆자리라 예영의 옆으로 다가간 유진은 단유 옆에 앉은 나윤을 확인하고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냐고 묻는 시선에 단유는 간략하게 나윤에 대해 소개했다.

“가디스R! 들어본 적 있어요. 안녕하세요, 정유진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TV에서 많이 봤어요. TV에서 볼 때도 되게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실물이 훨씬 좋으시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어릴 때 선배님 노래 되게 좋아했었어요.”

“고마워요.”

유진은 웃는 얼굴로 나윤과 인사를 나눈 뒤, 단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지만 눈빛에는 왜 이 자리에 예상 못 한 손님이 자리하고 있냐는 질책이 담겨있었다.

단유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보다 이 누나가 너한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함께 오자고 했어.”

단유의 대답에 나윤이 어리둥절해하며 단유와 유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이틀 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언제나처럼 노트북을 두드리며 최근에 만들었던 업무 보조용 프로그램의 디자인을 구상하던 단유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도와줘.”

작년 겨울 만난 이후로 연락이 없던 유진으로부터의 전화였다.

“무슨 일인데?”

“만나서 얘기하자. 전화로는 힘들어.”

“카페에서 볼까?”

“···그래.”

힘이 빠진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가던 유진은 다음 날 스케줄이 있어 보기 힘드니 이틀 후 보자고 제안했고 단유는 이에 응했다.

통화를 마친 후, 키보드 자판 위에 다시 손을 올리고 프로그램을 수정하려던 단유는 잠시 손을 멈추고 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곧 마우스를 잡은 단유는 매우 개인적이며 합법적이지 않은 수단을 사용할 때 이용하는 터미널 창을 열고 작업에 들어갔다.

현대사회는 인터넷이라는 매개체와 CCTV라는 도구를 이용해 방 안에서 제한적이나마 세계 곳곳을 누빌 수 있다. 거기에 몇 가지 프로그램과 몇 안 되는 명령어를 입력함으로써 그 제한마저 풀 수도 있다. 그 방법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방법은 아니지만 단유는 자신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끔 이용했었기에 익숙했고, 이제는 별 죄책감없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귀찮다는 이유 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20인치도 안 되는 화면을 통해 지켜보는 게 재미있지도 않았고.

하지만 이번에는 호기심을 떠나, 친구의 어려움을 돕겠다는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그녀의 최근 행적을 추적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그녀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대충 추적할 수 있었던 단유는 몸을 뒤로 젖히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정확히 그녀가 어떤 부분을 힘들어하는 것인지 유추는 할 수 있지만, 사람마다 걱정의 기준이 다르니 그녀가 어떤 지점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지는 직접 듣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파악한 사실을 토대로 추리해보면, 단유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이 구별된다.

더구나 과거 그녀에게 도움을 주겠다 했을 때, 그녀 스스로가 도움을 거절했던 전적이 있음을 상기해보면, 이번에도 단유의 도움이나 조언이 그렇게 쓸모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대신해 그녀의 고충과 고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줄 사람을 함께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

“나 보다는 더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같이 왔어.”

단유의 설명에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윤을 향하는 유진의 시선. 그리고 유진과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던 나윤.

하지만 갑작스러운 연출에도 나윤은 이내 당황을 감추고 유진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가 다른 사람 이야기는 잘 들어주거든요?”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해보라며 유진을 안심시키려는 나윤이었다. 그래도 유진은 머뭇거리며 입을 쉽게 열지 못하는데 단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리 옮길래?”

아무리 개인의 영역이 존중되는 공간이라 해도 듣는 귀가 있으니 곤란할 수도 있겠단 생각에 물었고,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래.”

예영은 단유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나윤의 손을 붙잡았다.

“자주 와.”

“그래요. 또 올게요, 언니.”

단유의 차에 오른 세 사람. 묘한 긴장과 침묵이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어디 갈 건데?”

나윤이 물었고, 단유는 뒷 자리에 앉은 유진을 룸미러로 확인하며 물었다.

“가고 싶은 데 있어?”

“조용한 곳이면 어디라도 괜찮아.”

조용하면서 사람이 없는 곳이면 좋다는 이야기리라. 단유가 아는 선에서 가장 조용하고 사람 없는 곳은 한 군데 뿐이었다.

“우리 집, 괜찮아?”

“너네 집?”

나윤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는 느낌이지만 단유는 개의치않았다. 유진도 조금 난감해하는 듯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여기가 너네 집?”

“응.”

“혼자 살아?”

“응.”

“너 정말 부자구나.”

나윤의 말에 단유는 민망해하며 볼을 긁적였다.

거실에 들어선 뒤에는 놀라움이 더 커진 여자 둘. 여기 저기 둘러보느라 고민 많던 표정도 사라진 유진, 그리고 입을 반쯤 벌린 채로 구경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 못하는 나윤. 단유는 소파로 자리를 권했다.

“우리 집에 먹을 건 없고 물 밖에 없는데, 물 줄까?”

단유의 물음에도 대답은 없이 자기들끼리 질문을 주고 받는 두 여자.

“유진 씨도 여기 처음이에요?”

“네. 언니도요?”

“처음이에요.”

그게 뭐 중요한가 싶다만, 어쨌든 단유는 혹시 듣지 못했나 싶어 다시 한번 물었다.

“물 마실래?”

나윤이 단유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냉장고 구경해도 돼?”

“볼 거 없는데?”

잠시 후.

“정말 볼 거 없구나. 뭐 먹고 살아?”

“보통은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니까, 집에서 잘 안 먹게 되더라고. 요리를 할 줄도 모르고.”

“라면도 안 먹어?”

“컵라면이라면 저기 찬장에 있는데, 줄까?”

“그냥 물어본 거야.”

나윤은 단유가 건네는 물컵을 양손에 받아들고 유진에게 하나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준 건 단유인데, 왜 유진에게 고맙다는 건지. 그나저나 조용히 이야기할 공간을 위해 왔을 뿐인데 어쩐지 본말이 전도된 기분이 느껴졌다.

방은 몇 개냐, 거실은 몇 평이나 되냐, 청소는 매일 하냐, 같은 사소한 질문들과 간이 집들이가 끝나기까지 대략 30여분이 소요되었고 이후에야 다시 거실 소파에 모이게 된 세 사람.

“이런데서 혼자 살면 무섭겠다, 너.”

나윤의 걱정 아닌 걱정에 단유가 되물었다.

“무서울 이유가 뭐가 있어?”

“이렇게 넓은 곳에 혼자인 게 무섭지 않아?”

단유는 어깨를 으쓱거려보였다.

“잘 모르겠는데.”

“내가 사는 집은 이 집 거실보다도 작겠지만, 그래도 가끔 밤에 혼자 침대에 누워 있으면 무섭다고.”

“내 주관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혼자라고 무서워할 이유는 없는 거 같애.”

“남자네, 남자야.”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우리가 무섭다는 감정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건 미지에 대한 공포 때문인 경우가 크잖아? 그런 측면에서 혼자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선 공포를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봐. 특별히 그 상황을 변화시킬 변수가 없으니까.”

“또또 혼자 진지하지?”

“그냥 내 생각을 말한 거야.”

“그럼 넌 이렇게 혼자 살아도 안 무섭다는 거네?”

“응.”

“만약에 네가 늙어서도 혼자라면 어떨까? 병들고 힘이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러면 무섭지 않을까?”

“그건 무서움이 아니라 외로움이 문제인 거 같은데?”

“외롭다는 게 무섭다는 거야.”

“글쎄···,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외로움은 크게 문제가 안 된다고 봐. 과거에야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질 수 있고, 거기에 대처하는 능력들이 떨어지니까 혼자가 무섭고 힘들겠지만, 요즘은 혼자라도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이 잘 만들어지지 않을 거 같은데. 예를 들면,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갈 일이 생겼다. 그런 경우라면 핸드폰으로 119만 쳐도 거의 해결되잖아? 배가 고프면 요리를 못해도 배달을 시키면 굶지 않을 테고, TV에서는 24시간 방송이 이어지고 인터넷으로 외부의 소식들을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계속 접할 수 있으니 고립감도 덜하고. 영상 통화가 보편화되었으니 거리에 상관없이 언제나 상대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거기에 사람의 온기가 없잖아, 온기가.”

“감성적으로 접근하겠다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런 감성적인 문제도 현실적으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봐.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람이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어떻게?”

“사람이 살면서 얻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인간 관계에서 온다는 연구결과가 있더라고. 직장에서, 사회에서 온갖 군상들과 마주하며 겪는 스트레스와 고민들을 집에까지 끌고오는 건 부적절하지 않을까? 집에서는 편히 쉬고 싶잖아, 다들? 그러니 집에서만큼은 사람과의 관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편이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는.”

“너답네, 정말.”

“그런 말도 있잖아? 정말 무서운 건 사람이라는 말.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사람 속은 모르는 거라고 하니까.”

“그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지.”

“사람의 속을 누가 알겠어?”

“너. 넌 겉과 속이 같잖아?”

“모르는 일이지. 아무리 누나라도 내 속을 다 알진 못하잖아?”

“난 알아.”

단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래, 안다고 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래. 보통의 경우,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사람과 관계된 문제고, 우리가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사람이란 거의 항상 예상을 빗겨가기 마련이란 말이지.”

단유는 나윤에게서 눈을 돌려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둘의 대화를 듣던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유진아?”

“···응.”

“그러니 말해봐. 네 고민.”

“······.”

갑자기 화제가 자신의 이야기로 바뀌니, 또 선뜻 입을 열기 곤란한지 유진은 머뭇거렸다.

사실 지금 단유와 나윤이 나눈 대화를 듣고 있으니 본래 단유에게 하려던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본래는 그저 작년에 단유가 제안했던 회사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며 넌지시 회사를 옮겨볼까 고민중이라고 말하려했다. 만일 대화 중에 이유를 묻는다면, 어차피 계약기간도 끝나가고 다른 회사를 찾아야 하는데 기왕이면 아는 사람이 있는 회사가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과, 단유가 작년에 약속했던 최고의 지원을 기대한다는 말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단유와 나윤이 뭘 알고 그런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주제가 정확히 유진이 고민하는 내용의 핵심을 찔렀다.

그리고 우연이겠지만, 마치 다 안다는 듯한 깊고 검은 눈동자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네 고민’을 말해보라는 단유의 눈빛을 받으며 유진은 차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 고민을 밝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뭐 들은 거 있어?”

장고 끝에 꺼낸 유진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들은 바는 없지만, 본 것은 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너 알지, 내가 무슨 고민하는 건지?”

“말해 봐. 들어줄게. 나 입 무거워. 이 누나도 쉽게 입을 여튼 스타일 아니고.”

유진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사실, 나···.”

한참을 머뭇거리다 유진은 겨우 입을 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먼저 타.”

“괜찮아요. 저 택시 불러서 갈게요.”

“택시는 무슨. 내 차 타고 가. 데려다 줄게.”

“괜찮은데.”

잠깐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결국 지아는 창모의 차에 올랐다.

창모의 손짓에 지아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대리기사에게 주소를 불렀고, 대리기사는 곧 능숙하게 차를 운전해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많이 취하신 거 아니죠?”

“취하긴. 그냥 조금 알딸딸한 정도야.”

“차라리 선배님 집엘 먼저 가는 게 좋았을 거 같아요.”

“넌 어떡하고?”

“선배님 들어가시는 거 보고 집에 가는 편이 더 안심됐을 거 같아서요.”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건.”

창모는 부러진 손목처럼 흐느적거리는 손을 흔들며 지아에게 걱정 말라 했다.

30여 분을 달리는 동안 창모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레스토랑에서 했던 말들을 다시 반복했다.

“항상 굶주려야 돼. 굶주림 속에 갈망해야 그 끝에 단물같은 아이디어가 찾아오는 법이거든.”

설교와 주정의 중간 즈음이 되는 말들이 쏟아지던 차에 차가 멈췄다.

“도착했네요.”

“어, 그래? 벌써? 빠르네.”

“차가 안 막혔나봐요. 저 내릴게요.”

“그래? 잠깐 나도 내리자. 바람 좀 쐬야겠어. 어지럽네.”

창모도 지아의 뒤를 뒤따라 내리더니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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