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933화 (933/956)

구조요청(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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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자리를 잡은 테이블에 커피 세 잔이 놓였다. 전에 왔을 때와 다른 얼굴의 아르바이트생은 단유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곤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카페 매니저인 예영이 그의 지인들과 나누는 담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일 테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원두도 이곳에서 사용하는 것 못지않게 좋은 걸 사용한다. 커피 본연의 맛과 별개로 공간이 주는 분위기가 주는 맛이란 게 존재한다, 며 커피숍을 제집 드나들 듯 아침저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솔직히 잘 공감이 되질 않는다. 극단적으로 쓰거나 혹은 신맛이 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산미나 초콜릿향 같은 건 잘 모르는 단유다. 하지만 맛을 제외한다면 ‘특정 공간이 형성하는 분위기’라는 주장에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이를테면 만남의 장소로서 활용되는 점. 약속을 정하고 만나기에도 편하고, 만난 후에도 조용히 담소를 나누기에 좋다. 탁 트인 공간임에도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가까운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대화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다. 물론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거나 요란한 행동을 자제하는 편이 좋다.

그런 이유에서 단유는 예영과 나윤을 조금 자제시키는 편이 좋지 않을까, 란 생각을 잠시 했다.

두 여자의 해후가 어찌나 떠들썩하고 요란한지, 단유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다.

“이런, 고생 많이 했겠다.”

“저보다 언니가 더 고생한 거 같은데요? 여기서 얼마나 일하신 거예요?”

“거의 7, 8년 다 돼 가는 거 같은데?”

“정말요? 그럼 회사 나오고 거의 바로 여기 온 거네요?”

“바로는 아니지만, 거의 그래.”

서로의 힘들었던 과거사를 공유하며 안타까움과 위로를 적절히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나가던 두 사람은 곧 함께 했던 시절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때 그랬잖아? 기억나?”

“아, 맞다! 그랬죠? 그랬었네, 우리.”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데 말이야.”

“그러니까요.”

이제는 두 사람 다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할 수 있겠다. 어린 시절 원했던 그 길은 아닐지 몰라도, 예영은 연예계 바깥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나윤은 비록 가수의 길은 아니지만 연예계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혀끝을 감싸는 시트러스한 커피맛, 따위는 모르겠다.

오래 전, 그러니까 대학 때 동기들과 자주 이 커피숍을 드나들 때의 일이다. 당시 친구들이 커피 맛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커피가 그렇게 다양한 맛이 난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맛에 대한 감각이 평균보다 떨어지는 편이었던 단유는 호기심에 자신에게 맞는 커피맛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커피맛이 있다면, 혹시 평균 이하의 미각을 가진 자신에게도 잘 맞는 커피맛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였다.

예영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원두를 준비해 다양한 맛의 커피를 시음해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원두값은 단유가 지불했다.

보통은 커피를 제품화하려는 회사에서 소비자의 취향을 알아보고자 할 법한 테스팅을 오직 단유 본인의 입맛에 맞는 커피를 찾기 위해 시도해보았다. 상관분석과 회귀분석을 통해 다양한 제품군을 선별, 그 맛을 몇 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하고 이후 로스팅하여 시음회를 연다. 테스터는 오직 단유 한 사람.

클러스터링을 통해 재분류하고 거기서 단유의 주관적 선택을 통해 몇 가지 제품들을 걸러내어 최종적으로 남는 단 하나의 맛이 단유가 찾은 자신에게 딱 맞는 커피이리라.

그러나 실험 직후, 곧바로 벽에 부딪혔다.

단유의 미각은 상상을 초월하여, 맛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탓이었다.

“다 똑같은 맛인데?”

예영도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단유의 자기 커피 찾기는 실패로 끝났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윤과, 커피전문점에서 매니저로 수년간 일하는 예영 사이의 대화에서 단유가 함께 나누기 좋은 화제는 그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고 끼어들 틈을 찾던 단유에게 예영이 물었다.

“너희 두 사람 헤어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계속 만나는 거야?”

예영의 질문에 화들짝 놀란 나윤과 표정을 감추지 못한 단유.

“뭐야, 그 표정들은?”

“언니 알았어요?”

“뭘? 너희 사귀는 거?”

“저희 안 사귀는데요.”

“사귀었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당시 단유와 나윤이 사귀었던 건 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데뷔를 앞두었던 나윤이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들키면 안되니까 그 당시 나윤을 발탁해 올리려던 이사 및 매니저가 단유에게 헤어질 것을 종용하기까지 했었다.

아무튼 그런 상황이고 보니 들키지 않으려 나름 노력했던 나윤과 단유였는데, 예영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꽤 놀라웠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에? 정말요?”

“니가 오죽 티를 냈어야지.”

“제가요?”

나윤이 손가락을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고, 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내에서는 거의 소문이 났었다는 이야기에, 나윤이 얼굴을 붉혔다.

“그건 그때고, 지금은 ···아니에요.”

“아직이야?”

나윤의 얼굴을 붉게 타올랐고, 단유는 쓴 커피를 한 모금 더 들이키며 강제로 입술을 닫았다.

두 사람의 얼치기 같은 모습에 예영은 씨익 웃었다.

“난 또 두 사람 연애하는 거 자랑하려고 깜짝 방문한 줄 알았지.”

그런 의도였냐며 단유를 돌아보는 나윤에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오늘 만날 사람이 있어서 온 거예요.”

“만날 사람?”

나윤과 예영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략 20여 분이 흐른 지금 두 사람 다 새로운 등장 인물이 있을 거란 예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오랜 만에 만난 두 사람을 위한 자리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인데, 단유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시계를 확인한다.

“곧 올 시간인데.”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카페 문이 열리고 딸랑 종 소리가 울리며 세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어?”

예영이 놀란 표정을 짓던 그 시점에, 나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단유는 가볍게 손을 들어 손짓했다.

“이쪽이야.”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던, 모자를 푹 눌러쓴 가는 다리의 여인이 단유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

“요즘 SNS에서 핫한 레스토랑이라는데 괜찮지?”

“저야 감사하죠.”

창모의 말대로라면 ‘요즘’이라는 건 거의 최근의 경우를 일컫는 것일 텐데, 레스토랑 입구에 들어섰을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레스토랑 직원이 창모를 알아보는 경우라면 창모에게 이곳이 첫 방문이 아니란 뜻일 테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게다가 확인까지 해주니 지아로선 호기심이 생긴다.

“SNS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최근이지만, 난 전부터 단골이었거든.”

“아아.”

“비유를 하자면, 뭐랄까, ‘홍대병’, 알아?”

“‘홍대병’이요?”

“남들이 잘 모르는 비주류 가수들 있지? 홍대에서 활동하는 인디밴드들이나 가수들, 그런 가수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고 홍대병 걸렸다고 하잖아?”

“그래요?”

“너 좀 더 공부 해야겠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살면 대중음악 작곡가로서 살아남기 힘들어.”

“죄송합니다.”

“농담이야, 농담. 뭘 또 진지하게 받아들여? 아무튼 그런 거야. 남들은 잘 모르는 가수를 나만 안다는 느낌. 대중과 구별되는 나를 자각하면서 일종의 심리적 우월감을 느끼는 건데, 사실 일종의 멸칭 같은 거야.”

“안 좋은 거네요.”

“뭐, 그렇긴 한데, 그냥 그런 거야. 나만 아는 가수, 나만 알고 싶은 가수. 그런데 찾아보면 그런 거 많잖아? 나만 아는 영화, 나만 아는 노래, 나만 아는 명작소설, 나만 아는 시. 그것처럼 여기도 나만 아는 가게였으면 했었지. 조용히 방문해서 조용히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공간. 그러면서 맛은 기가 막혀서 자주 찾게 되는 곳.”

지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궁리해봐도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사례가 떠오르지 않았다.

“너 같은 경우는 더 간단하지 않나? 남들이 잘 모르는 클래식 음악 같은 거.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같은 ‘대중’들이 모두 아는 작곡가 말고 너만 아는 작곡가, 없어?”

“브루흐의 스코티쉬 판타지 같은 곡이요?”

“어, 뭐 그건 좀 유명하지 않나? 그래도 브루흐라는 작곡가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긴 하지. 아무튼 그런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나만 안다고 해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이긴 한데, 그보다는 차라리 나만 아는 등산코스 정도가 더 적합한 예시가 아닐까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등산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와, 더 이상 몸을 괴롭히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산을 찾지 않게 되었다. 가장 마지막 등산이 단유와 마주쳐 사고(?)가 났던 때였다.

‘그러고 보니 등산할 때가 생각을 제일 많이,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거 같은데.’

고개를 들어 주문을 하는 창모를 바라보니, 썩 운동을 좋아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한 번 권유는 해보는 게 어떨까 싶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땀을 흘리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것들도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도 들고, 그 시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으니까.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 생각하며 말을 건네볼까 궁리하던 차에, 창모가 와인을 주문했다.

“운전하셔야 하지 않아요?”

“대리 부르면 되지. 일단 저녁 겸해서 먹고 보자고.”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저녁 때 와인 한 잔 곁들이는 건 몸에도 좋다더라, 며 창모는 손을 쓱쓱 비볐다.

식사는 창모가 말한 대로 입에 잘 맞았다. 잘 맞을 뿐 아니라 솔직히 감격스러울 정도로 맛있었다. 이렇게 좋은 레스토랑이라면 창모 말처럼 나만 알고 싶다는 소유욕이 들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랬더니 걔가 못하겠다고 주저앉는 거야. 부스 안에서 주저앉으면 어쩌겠다는 거냐고, 내가 따지니까, 한 키만 내려달라고 사정을 하더라. 아니 지가 한 키를 더 높여 부를 수 있게 연습을 해도 될까말깐데 녹음하려고 부스까지 들어간 상황에서 한 키 내려 녹음하자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냐고.”

“당황하셨겠네요.”

“당황은 무슨. 화가 여기까지 치밀어 올랐지. 아니, 그럴거면 처음에 곡 받았을 때 이야기를 하던가. 녹음이 무슨 노래방 반주야? 그냥 뚝딱 한 키 내리면 끝이게? 키를 내리는 순간 곡의 분위기가 바뀌잖아? 못 부르겠으면 아예 곡을 받질 말든가.”

“그래서요?”

“그래서는. 어쨌든 갑은 그쪽인데. 난 아직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은 을이었고. 돈 받고 곡 주는 입장인데 내가 맞춰줘야지. 다행인건 그 곡이 내가 정말 아끼는 곡은 아니었단 거지. 그래서 결국 한 키 내려서 녹음했잖아. 근데 그 곡이 대박이 난 거야. 그게 ‘Stand by’야.”

“아, 그거요? 저 알아요.”

“요즘 노래 모르는 니가 알 정도니까 얼마나 대박인지 감이 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곡은 곡이 좋아서라기보다 순전히 가수의 힘이었던 거 같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곡도 아니고 요청하는 대로 만들어준 곡이었거든? 그래서 녹음 당시까지만 해도 사실 시간에 쫓겨서 만든 거나 다름없었는데, 당연히 좋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그게 히트를 한 건 가수의 힘이었다고 난 생각해. 이게 중요해. 결국 어떤 곡이 성공을 하려면 단순히 곡만 잘 쓴다고 끝이 아니란 거지. 곡을 부르는 가수의 힘도 한몫하는 거야. 가수가 어떤 곡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곡의 생명이 달라질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이후로 곡을 쓸 때는 항상 누군가가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상상하며 쓰게 된 거야.”

“아, 네.”

“그래서 좋은 곡이 나오기 힘든 거야. 곡을 살리는 가수란 사실 쉽게 만나기 힘들거든.”

“좋은 가수를 만나는 것도 작곡가에겐 행운이겠네요?”

“운명 같은 거지.”

“운명이요?”

“베토벤의 운명. 뛰어난 작곡가. 그리고 그에게 찾아온 시련. 그리고 그 곡이 발표될 당시의 분위기. 이런 게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명곡이 만들어진 거야.”

“그렇네요.”

“소박한 꿈이라면 꿈인데, 정말 삼박자가 골고루 갖춰진 곡을 만드는 게 소원이다.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가수가 완벽한 가사로 완벽하게 내 곡을 완창하는 거.”

“완벽하게요···.”

“그렇다고 우리 아이돌 가수분들의 컨셉에 그리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고. 그건 단지 컨셉일 뿐이잖아? 쯧, 우습지도 않게···.”

“저기, 그건 비밀인데.”

혹시 누가 들었을까 싶어 지아는 주위를 살폈지만, 다른 테이블에선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창모와 지아 쪽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다.

“누가 듣는다고 그래.”

“목소리가 크세요.”

“그래?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가. 넌 괜찮아?”

“전 아직은 괜찮아요.”

“그래? 맛있었지?”

“네, 정말 맛있네요.”

“그래, 맛있었으면 됐다. 나가자.”

계산서를 들고 일어서던 창모가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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